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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북한기독교회사

에반젤(복음) 2021. 8. 21. 07:15

북한기독교회사

1945년 남북분단 이후 북한 기독교는 북한사회의 독특한 조건 속에서 소멸과 재건의 과정을 거쳐왔으며, 이 과정에서 북한 기독교를 대변한 것은 조선기독교도연맹이었다. 조선기독교도연맹은 1946년 11월28일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이라는 명칭으로 결성되어 1996년 11월 평양에서 창립 5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이 글에서는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설립 과정과 그 후의 활동을 통해서 북한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려고 한다.

 조선기독교도연맹의 결성 과정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한국 지배가 끝나면서 북한사회의 정치적 기류는 사회주의적 색채가 농후해 갔다. 해방 후 1년 이내에 지주제도가 사라지고 토지는 재분배되었으며 중요 산업들이 국유화되었다. 1946년 2월에는 소련의 후원 하에서 이 같은 사회개혁을 주도해 나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처럼 북한사회에서 급속히 사회주의 체제가 형성되어 가자 교회는 당혹 감을 감추지 못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1920년대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적대적 행동을 취했던 것이 불쾌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서북지역 개신교 신자들이 상인층과 자본가층, 중농 이상의 농민층에 속해 있어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장차 전개될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보다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승만이나 김구가 장차 통일된 조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같은 입장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은 9월부터 사회주의적 정치 기류에 반발하면서 '기독교 민주당'과 '기독교 자유당' 같은 정당의 창당 작업을 시도하였고, 11월3일에는 기독교인들이 다수 참여한 '조선민주당'이 결성되었다. 북한교회의 정치활동은 마침내 공산세력과의 갈등과 충돌로 이어졌다.

 

1946년에 들어서서 이북교회의 공산정권과의 직접적이고도 규모가 큰 충돌은 3월1일 3.1운동 기념예배에서 발생했지만, 더 큰 충돌은 11월3일 북조선 인민위원 선거 문제로 해서 일어났다. 1946년 2월8일 북한에서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김일성이 위원장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장로교 목사 강양욱이 서기장을 맡았다. 북한 최초의 중앙 권력기구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그해 9월5일 도, 시, 군 인민위원회 선거에 대한 법령을 공포하고 두 달 후인 11월3일을 인민위원 선거일로 결정하였다. 교회와의 충돌은 선거일로 정해진 11월3일이 일요일이라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선거를 위한 준비작업이 시작되자 북한사회 한쪽에서는 선거 실시는 시기상조이며 자유경쟁이라야 정말 민주주의 선거다, 승려와 목사들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종교에 반대된다는 등과 같은 말들이 유포되어 갔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북한 기독교인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그리고 이미 공산체제의 구축에 반발하고 있던 장로교의 '이북5도연합노회'는 10월20일 회합을 갖고 선거반대 분위기에 편승하여 북한당국에 5개항의 결의문을 전달하였다. 북한당국의 협조를 요청한 이 결의문의 첫번째 조항은 "성수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여하한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고 두번째 조항은 "정치와 종교는 이를 엄격히 구분한다"고 하였다. 이 결의문은 교회행정의 원칙과 신앙생활의 규범을 밝힌 것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주일 선거의 부당성 내지 선거 불참 의지를 드러내 주는 결의문이었다. 이 무렵 북한교회에서는 사경회나 부흥회 같은 종교집회가 성행하고 있었는데, 이 집회들에서도 북한정권을 비판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5개조의 결의문도 이런 배경 하에서 나온 것이었다. 북한 당국자들에게 이 결의문은 단순히 선거 불참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불참할 것을 종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북 5도 연합노회의 결의에 크게 당황한 것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 강양욱 목사였다. 결의문 발표를 주도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설득은 용이하지 않았다. 강양욱은 이 사실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에게 보고했다. 김일성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유력한 목사 10여명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청사에 불러 "민주선거가 좋은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인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에 교인들을 참가하지 못하게 할 근거가 없지 않는가, 교회에서도 안식일에 장로나 집사를 선거하는 일이 있지 않는가"하고 물었다. 북한의 한 문서는 이 만남으로 말미암아 " '5개조'라는 것은 휴지장이 되어 버리고 첫 민주선거는 모든 교인들도 열성적으로 참가"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김일성이 선거 이틀 전인 11월1일 평양시 민주선거 경축대회에서 선거에 부정적인 일부 목사들과 장로들을 "교인들의 적이며 전체 조선 인민의 적"이라고 비난한 것을 보면, 김일성의 설득도 별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

 

김일성이 11월1일의 연설에서 선거에 반대하는 이들을 '간첩', '적의 앞잡이', '전체 조선 인민의 적' 등으로까지 표현하고 특히 일부 개신교 목사들을 그런 부류에 포함시킨 것을 보면, 선거 반대 움직임은 어느 집단보다도 교회 쪽에서 더 강렬했던 것같다. 이 사건은 북한 당국으로 하여금 친정부적인 교회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고 그것은 선거 직후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오늘날의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전신인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이 조직된 것은 1946년 11월28일이었다. 이 조직은 1945년 12월26일 결성된 '북조선불교총연맹', 1946년 2월1일 설립된 '천도교북조선종무원'에 이어 북한사회에서 세번째 결성된 종교단체로 강양욱 목사가 위원장을 맡았다.

 

오늘날 북한 개신교를 대변하는 조선기독교도연맹의 결성과 활동은 강양욱 목사에 의해서 주도되었지만, 기독교도연맹의 결성에는 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던 김일성이 개입했다는 것을 북한의 문헌은 다음과 같이 전해 준다.

 

어느 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강양욱]을 부르시어 조만식이가 사람들을 반동의 길로 이끌어 가려고 책동하는데 매우 엄중한 행위라고 하시었다. 그러시고는 일제 식민통치에서 갓 해방된 우리들에게 있어서 지금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전체 인민을 하나로 크게 묶어 세워 우리나라를 하루 빨리 자주독립국가로 건설하는 것인데 적지 않은 종교인들이 조만식을 비롯한 악질 상층 종교인들의 꾐에 넘어가 반동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하시면서 이 문제를 바로 잡을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습니다 라고 믿음을 표시해 주시었다.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 선생은 즉시 진보적인 교인들을 동원하여 광범한 기독교 신자들 속에서 위대한 수령님의 새 민주조선 건설노선의 정당성을 인식시키는 한편 그들이 반동의 길에 말려들어 가지 않도록 적극적인 사업을 벌였다.

 

선거가 끝난 다음 며칠후 김일성은 강양욱에게 "기독교인들 속에서 애국주의 교양을 잘하여 그들이 미국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 건국사업에 적극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무슨 교양단체를 하나 내오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종교보다 정치가 우위를 점하는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이 조직되었고 강양욱이 전개한 "적극적인 사업"은 저 연맹의 강령 첫번째에 나타났다. "기독교의 박애적 원칙에 기하여 인민의 애국열을 환기하며 조선의 완전 독립을 위하여 건국사업에 일치 협력할 것." 그후 "건국사업"은 기독교도연맹의 첫번째 목표가 되었으며 그 강령의 신학적 기반은, 1947년 여름 강양욱이 북한 전역을 돌면서 취재 활동을 벌이고 있던 한 외국 기자에게 종교와 정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 데서 어렴풋이 드러난다. "일제 치하에서 종교와 정치는 전혀 별개이어야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도 그러해야 한다고 하지요. 그러나 나는 민주국가의 모든 시민과 조직은 좋은 법안의 통과를 추진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도연맹의 태동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1946년 11월의 국민투표 이전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연맹이 공식적으로 결성된 시기는 투표 직후인 11월28일이었다. [조선중앙연감]에 의하면 1948년 현재 자의 또는 타의로 가입한 맹원 수는 85,118명이었다. 이 연맹의 조직과 함께 북한의 교회들은 친김일성적인 교회와 김일성 정부에 반대하는 교회로 정치적 성격이 양분되어 갔다.

 

이 무렵 남한에서는 1919년 3.1운동 시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참여하고 그후 미국 유학을 거쳐 감리교신학대학 교수를 지낸 김창준 목사가 좌파 기독교인들을 결집해 1947년 2월 서울에서 '기독교민주동맹'을 결성함으로써 북한의 기독교도연맹과 함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운동에 뛰어들었다. 북한의 한 문헌은 이 무렵 김창준이 사회주의 운동에 편입되는 과정을 김일성, 허헌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1947년 2월 어느 날, 그는〔김창준〕우리 아버지〔허헌〕를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아버지는 그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 자기에게 친서를 보내 주신데 대해 이야기하면서 남조선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애국적인 민주 인사들에게 주신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그대로 전하여 주었다고 한다.

 

새 조선의 진로를 밝혀 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에 접한 김창준 목사는 형언 못할 감격과 흥분에 휩싸였다.

 

그는 기독교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남조선에서 애국적이며 민주주의적인 모든 종교인들을 하나로 묶어 세우는데 전심전력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그후 김창준은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했다. 회의가 끝난 후 남쪽 대표들은 서울로 돌아왔으나 김창준은 허헌, 홍명희 등과 함께 계속 북한에 머물렀다. 따라서 그의 지도력 하에 있던 기독교민주동맹은 일년 남짓 활동하다가 이승만 정부의 등장과 함께 소멸되고 말았다.

 

북한의 개신교 지도자들 다수가 해방 직후부터 북한의 정치권력과 대항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은 1946년 초반까지는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북한의 정치권력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면서 정세의 흐름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6년 중반 이후로는 이같은 태도에서 벗어나 반공 반혁명적인 태도를 분명히 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북조선기독교도연맹 위원장 강양욱은 평양 교구장 홍용호 주교를 찾아가 가톨릭 교회가 연맹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으나, 교회 지도자들은 북조선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신론자에게 일시적 또는 외면적으로라도 협력하는 것은 가톨릭교리에 어긋나는 것이요, 신앙을 배반하는 것"이라면서 신자들에게도 가입을 금지시켰다.

 

가톨릭교회를 가입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독교도연맹은 1948년부터는 신도들에게도 가입을 허용하여 면 군 도의 연맹을 결성한 후 1949년에는 연맹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무렵 연맹이 개신교회들을 직접 주관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감리교의 경우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예컨대, 1949년 6월1일 남포중앙교회에서 기독교조선감리회 서부연회 남포지방회가 열리는데 이 연회의 회의록은 당시 북한의 감리교회가 북한당국과의 마찰 때문에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구속상태에 있기는 하나 기독교도연맹의 통제하에 있다는 증거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1950년 3월까지는 기독교도연맹은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의 성화신학교를 통합하여 '기독교신학교'로 개칭하고 신학교육을 시작함으로써 신학교육 기관의 장악에 성공한다. 이 신학교는 1950년 7월5일 졸업식을 가진 후 문을 닫았다.

 


 

한국전쟁 시기의 조선기독교도연맹

 


 

1950년 여름부터 3년 동안 한반도에서 동족간에 싸움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남과 북의 교회들도 이 싸움에 깊이 간여하였다. 전쟁 중 남북한 교회들이 다투어 한 일은 전쟁에 대한 물질적, 정신적 협력 활동이었다.

 

북한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은 인민군의 서울 점령 직후 서울 탈환 환영예배를 드리는가 하면, 1950년 8월5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는 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들과 각 지구 기독교도연맹 대표들 그리고 북한 전역의 목사, 장로, 전도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궐기대회를 열고 북한의 기독교인들에게 전쟁의 승리를 위해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8월13일에는 북한 전지역에서 전승 기도회가 열리었다. 이 집회들에서 6.25전란은 "정의의 전쟁이며 성스러운 전쟁"으로 규정되었고 "악마"인 남한정부와 미군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내리기를 기원했다.

 

기독교도연맹의 전쟁 지원은 이 같은 정신적 지원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연맹은 전쟁 승리를 위하여 무기 대금을 마련하기 위한 헌납운동도 전개했다. 기독교도연맹총회 초대 총회장을 지낸 황해도 신천 서부교회의 김익두 목사가 비행기, 탱크, 함선 기금 10만원을 헌납한 후 군기 구입 헌납운동은 각지 교회들로 확산되어 갔다. 앞서 언급한 8월5일의 기독교 교역자 궐기대회에서는 "불의와 죄악을 제거하기에 어떤 것도 아끼지 말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받들고 정의로운 우리의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영웅적 우리 인민 군대에게 비행기, 탱크, 함선을 더 많이 헌납하기 위한 기금 거둘 운동을 교도들 사이에서 더욱 맹렬히 전개하자!"고 호소한 바도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1950년 10월 남한군과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북진하기 전 북한교회에서 일어난 전쟁 지원 활동들이었다.

 

1950년 9월28일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수복과 함께 전세는 남한 쪽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 수복의 여세를 몰아 북진하기 시작했을 때 북한교회에서는 새로운 사태가 벌어졌다. 10월 중순부터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에 진주한 10월19일 사이에 각처에서 목회하고 있거나 수감되어 있던 기독교 성직자들이 후퇴하는 인민군들에 의해 살해되기 시작하였다. 피살된 성직자들 중에는 김익두 목사처럼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에 호의를 보이거나 협력한 사람들도 끼어 있었다.

 

1950년 10월 이후 북한 기독교인들의 죽음을 동반한 수난은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유엔군 점령지에서의 남한교회의 성급한 선교활동 그리고 북한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국군과 유엔군의 공격 같은 복합적인 이유들에 의해서 일어났다. 1950년 10월 이후 유엔군과 국군은 북진을 계속, 10월19일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당시 평양에 거주하고 있던 박대선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국군과 유엔군의 평양 진주는 "8.15의 기쁨과 희망을 다시 한번 맛보게 해"준 사건이었다. 10월25일 평양에서는 남한의 고위관리들과 군 지휘관들 그리고 다수의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탈환을 축하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이 날 월남한 장로교의 교역자들 가운데 이인식, 윤하영, 한경직, 김양선, 고한규, 이대영 목사 그리고 장로교 선교사 다섯 사람이 북한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선교활동과 선무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들 말고도 장로교의 황은균, 조향록 목사 등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북한지역에 선무대원으로 또는 선교책임자로 파견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남한교회의 사절단이 평양에 도착한 그 다음 주일에 시내 교회는 일제히 문을 열고 예배하기 시작하였으며, 오후 2시에는 약 3천명의 신도가 서문외교회에 모여 사절단 환영예배를 성대히 거행하였다. 수천 명의 주민들이 부흥회와 기도회에 몰려들었다. 당시 평양 지역의 정보장교로 일했던 선우휘는 그의 소설 [노다지]에서 기도회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신앙의 자유를 되찾은 평양 기독교 신자들이 제2의 해방과, 그 해방군으로서의 국군과 유엔군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하고 오늘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대부흥 기도회를 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회나 부흥회가 한 달 정도 계속되고 있을 때 중국군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에 놀란 방북 목회자들은 다시 서둘러 월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험을 무릅쓴 그들의 선교 열의는 우리가 본받을 일이지만, 그들의 선교전략은 낙제점이었다. 유동적인 전황을 무시한 조급한 선교활동과 남한 지지를 유도하는 활동들은 중국군의 참전과 함께 전세가 역전되면서 실패로 끝났다. 대다수 교인들도 유엔군 환영과 지지 행위로 그들을 따라 월남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남아 있던 교인들은 북한의 적대세력으로 인식되어 북한사회에서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

 

한 증언의 의하면, 전쟁이 끝났을 때 이북에 남은 목사의 수는 전부 20명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6. 25전쟁 후 북한에는 교회도 없고 십자가도 보이지 않았다. 6.25전쟁을 남한과의 전쟁이라기보다는 남한을 지배하고 있는 미제국주의자들과의 전쟁으로 파악하면서, 기독교가 미국의 침략에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되고 있는 사회에서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허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6. 25전쟁은 북한당국이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반대, 탄압할 수 있는 분위기와 근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다수의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교회가 박해 속에서도 살아 남았지만, 유독 북한에서만 교회가 사라진 것도 그 주요한 배경 중의 하나는 6. 25전쟁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남북한의 기독교인들이 전쟁 중에 활발하게 전개했던 반공 활동과 함께 그들이 북한에서 적으로 간주하고 있던 미국과 가장 가까운 집단이라는 인식, 전후 북한사회에서의 극단적인 반미 분위기 등이 겹쳐 1950년대의 북한교회는 생존의 기로에 섰음이 분명하다. 어쨌든 전쟁과 그후의 북한교회사는 우리들에게 선교활동에서 교회와 국가 관계를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값진 교훈을 남겨 주었다. 전후의 이런 기류 속에서 일제 때부터 형성된 반공적 성격의 기독교가 재건될 리 없었으며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에 협력했던 기독교 세력들까지도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북한사회에서의 반기독교적 사회풍조는 이 시기 북한에서 크게 강조된 사상의식의 개조작업의 일환인 반종교 선전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1959년에는 반종교 선전을 위한 소책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1959년 노동당출판사에서 펴낸 [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는가?]도 그것들 중의 하나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당시 북한사회에 흐르고 있던 기류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지난 3년간의 조선전쟁과 오늘 남조선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미제가 감행한 무고한 인민에 대한 학살, 약탈, 방화 등 비인간적인 야수적인 만행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약탈에 이용되는 종교의 추악하고 반동적인 본질을 말하여 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 책은 종교를 "낙후한 사상잔재"로 보고 그것의 비과학성과 반동성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우리가 사회주의 건설을 더욱 촉진시켜 나가기 위하여서는 우리들 속에 남아 있는 비과학적인 종교, 미신에 대한 잔재들을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주장은 곧바로 인류의 사회생활에 막대한 해독을 끼쳤다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유의 반종교선전 책자들이 출간된 1959년경에는 북한의 사회 정치적 분위기로 볼 때 공식적인 교회 활동이 거의 사라졌던 것 같다. 그해에는 9월29일에는 월북 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낸 김창준 목사도 뇌일혈로 세상을 떠난다. 사망 시 그의 나이 69세였으며, '애국열사'로 추대되어 애국열사능에 묻혔다.

 

그러나 김창준이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김일성이 김창준에게 "높은 정치적 신임을 베푸시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가 결성될 때에는 초대 서기국장으로 사업하도록 하여주시었으며 파리와 모스크바, 프라하와 빈에서 있은 평화옹호 세계대회들에 조선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게 하여주시었다"고 하는 사실뿐이다. 이런 활동들과 관련하여 우리는 김창준 목사가 1952년 12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평화대회에 참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그 모임에서 김 목사는 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그로 인한 참상을 고발한 바 있다. 전후에는 평양의 기독교신학교도 문을 열지 않았으며 교회 건물은 물론이고 종교조직도 재건되지 못했다. 아마 이때부터 북의 평신도들은 몰래 또는 외부에 드러내지 않고 종교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고기준 목사는 이 같은 예배 형태에서 1980년대부터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지도자들이 '가정교회'라고 불러온 기독교 공동체의 기원을 찾은 바 있다. 1950년대 후반이 되면 북한사회에서 교회에 가고 또 공공연히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사라진 것 같지만, 북한 당국은 교인들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극히 부분적이나마 일부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이 꾸준히 노력할 대신에 '신'이나 '하느님'의 힘을 믿음으로써 우리의 사회주의 건설과 자신의 생활에서까지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신도들을 통해 1960년대에도 북한교회의 명맥이 가늘게 이어지고 있었지만, 공적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이미 1960년대 초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 같다.

 

휴전 이후 1960년대까지의 기독교도연맹의 활동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전쟁과 반종교 선전의 영향일 것이다. 다만 강양욱 목사가 기독교도연맹의 대표로서 1963년 10월 바르샤바에서 열린 '세계평화이사회'와 같은 해 11월에 열린 '평화옹호민족위원회' 등에 참가해 사회주의권 종교인들의 평화운동과 연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북한 정치 속에서의 기독교도연맹의 위치가 설정된다. 1961년 5월 김일성의 발기로 북한의 정당 사회단체 및 각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종교인들의 정당 사회단체들도 여기에 참여했다. 기독교도연맹이 이 위원회에 참여했다면, 전쟁후 처음으로 이 때부터 기독교도연맹은 다시 북한사회에서 공적인 단체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한사회에서의 반기독교적 사회풍조는 이 시기 북한에서 크게 강조된 사상의식의 개조작업의 일환인 반종교 선전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1959년에는 반종교 선전을 위한 소책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1959년 노동당출판사에서 펴낸 [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는가?]도 그것들 중의 하나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당시 북한사회에 흐르고 있던 기류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지난 3년간의 조선전쟁과 오늘 남조선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미제가 감행한 무고한 인민에 대한 학살, 약탈, 방화 등 비인간적인 야수적인 만행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약탈에 이용되는 종교의 추악하고 반동적인 본질을 말하여 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 책은 종교를 "낙후한 사상잔재"로 보고 그것의 비과학성과 반동성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우리가 사회주의 건설을 더욱 촉진시켜 나가기 위하여서는 우리들 속에 남아 있는 비과학적인 종교, 미신에 대한 잔재들을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주장은 곧바로 인류의 사회생활에 막대한 해독을 끼쳤다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유의 반종교선전 책자들이 출간된 1959년경에는 북한의 사회 정치적 분위기로 볼 때 공식적인 교회 활동이 거의 사라졌던 것 같다. 그해에는 9월29일에는 월북 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낸 김창준 목사도 뇌일혈로 세상을 떠난다. 사망 시 그의 나이 69세였으며, '애국열사'로 추대되어 애국열사능에 묻혔다.

 

그러나 김창준이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김일성이 김창준에게 "높은 정치적 신임을 베푸시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가 결성될 때에는 초대 서기국장으로 사업하도록 하여주시었으며 파리와 모스크바, 프라하와 빈에서 있은 평화옹호 세계대회들에 조선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게 하여주시었다"고 하는 사실뿐이다. 이런 활동들과 관련하여 우리는 김창준 목사가 1952년 12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평화대회에 참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그 모임에서 김 목사는 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그로 인한 참상을 고발한 바 있다. 전후에는 평양의 기독교신학교도 문을 열지 않았으며 교회 건물은 물론이고 종교조직도 재건되지 못했다. 아마 이때부터 북의 평신도들은 몰래 또는 외부에 드러내지 않고 종교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고기준 목사는 이 같은 예배 형태에서 1980년대부터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지도자들이 '가정교회'라고 불러온 기독교 공동체의 기원을 찾은 바 있다. 1950년대 후반이 되면 북한사회에서 교회에 가고 또 공공연히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사라진 것 같지만, 북한 당국은 교인들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극히 부분적이나마 일부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이 꾸준히 노력할 대신에 '신'이나 '하느님'의 힘을 믿음으로써 우리의 사회주의 건설과 자신의 생활에서까지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신도들을 통해 1960년대에도 북한교회의 명맥이 가늘게 이어지고 있었지만, 공적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이미 1960년대 초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 같다.

 

휴전 이후 1960년대까지의 기독교도연맹의 활동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전쟁과 반종교 선전의 영향일 것이다. 다만 강양욱 목사가 기독교도연맹의 대표로서 1963년 10월 바르샤바에서 열린 '세계평화이사회'와 같은 해 11월에 열린 '평화옹호민족위원회' 등에 참가해 사회주의권 종교인들의 평화운동과 연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북한 정치 속에서의 기독교도연맹의 위치가 설정된다. 1961년 5월 김일성의 발기로 북한의 정당 사회단체 및 각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종교인들의 정당 사회단체들도 여기에 참여했다. 기독교도연맹이 이 위원회에 참여했다면, 전쟁후 처음으로 이 때부터 기독교도연맹은 다시 북한사회에서 공적인 단체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이후의 조선기독교도연맹

 


 

1972년 남북간에 '7.4 공동성명'이 발표된 후 북한사회에서는 반종교 선전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민족통일을 위한 통일전선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기류 변화에 발맞추어 1970년대 이후 기독교도연맹은 한편으로는 정치적 관심을 남한사회와 교회에까지 확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문을 닫은 기독교신학교를 계승하는 3년제의 '평양신학교'를 1972년에 개설함으로써 교회조직의 유지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1972년 9월 강양욱 목사는 남북한 기독교인들이 접촉할 것을 제의했는데, 그는 그해 12월 사회주의 헌법 공포와 함께 신설된 주석 제도에 따라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강양욱의 부주석 지위의 획득은 1970년대 초반부터 기독교도연맹이 북한사회에서 공신력을 얻으면서 급속하게 발전하는 데 하나의 디딤돌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1974년 8월에는 '조선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회'가 남한의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남한정부의 조치를 비난하는 성명을 냄으로써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은 '조선기독교도연맹'란 이름으로 다시 활동을 재개해 나갔다. 이 시기 불교, 천도교 등의 종교단체들도 활동을 재개했다. 이 연맹의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 표명과 남한사회의 인권문제에 대한 이같은 성명은 1980년대를 거쳐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시기 기독교도연맹의 활동과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국제적 연대 활동이 강화되고 있는 점이다. 김성율 등 기독교도연맹 대표들은 1975년 1월 인도 고타얌에서 열린 '아시아기독교평화회의'(ACPC)와 1976년 11월 체코의 부르노에서 열린 '세계기독교평화회의'(WCPC)에 참석하여 이 회의들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결의문을 채택하도록 했으며, 1974년 8월에는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에 가입 신청서를 제출한 바 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의 기독교도연맹의 역사는 침묵의 역사이다. 이 시기는 남아 있는 북한의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였을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신의 지난날의 정치적 성격을 되돌아보면서 친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진 또는 이데올로기적 색깔을 배제한 비정치적 교회로 탈바꿈하는 과도적 변화의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변화란 교회조직과 시설, 성직자의 부재상황에 적응하면서 북한사회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와 신앙생활 방식을 모색, 실천하는 과정을 말하며, 그것이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비정치적 신앙생활 방식은 다수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비공개적인 가정교회 스타일로 나타났을 것이며, 친 사회주의적 신앙 유형은 기독교도연맹이라는 공적인 제도하에서 소수의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서 조심스럽게 가시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가 되면서 기독교도연맹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진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기독교도연맹은 교포 종교인들을 북한에 직접 초청하거나 제3국에서 개최되는 남북 종교인을 포함한 국제적인 종교행사에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예컨대, 1981년부터 오스트리아 비인에서 시작된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와의 대화'에는 고기준 기독교도연맹 서기장과 함께 연맹 소속 목사들, 전금철 조통평 부위원장이 참석하여 주로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에 관해 논의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기독교도연맹은 북한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해 나갔으며 이를 토대로 각종 국제종교 단체들과도 접촉해 나갔다. 1981년에는 기독교도연맹의 WCC 재가입 신청이 기각되었으나 1984년 WCC 국제문제위원회는 일본 도잔소에서 열린 '동북 아시아에서의 정의와 평화' 협의회에 조선기독교도연맹 대표들을 공식 초청하였으며 그 다음 해 11월에는 WCC 대표단 2명이 기독교도연맹과 조통평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기독교도연맹과 WCC의 활발한 접촉은 마침내는 1986년 WCC의 주선으로 한국전쟁후 처음으로 조선기독교도연맹과 남한 개신교 대표들의 스위스에서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국제적 연대활동의 강화와 함께 이 무렵 조선기독교도연맹은 성서 및 찬송가를 간행하고(1983-4), 교회 건물을 건립함으로써(1988) 북한 기독교의 내실을 더욱 튼튼히 해 나갔다. 이런 종교시설에서는 주일 예배 및 부활절, 성탄절 예배가 집전되었다. 이같은 경전 간행과 종교 건물의 건축은 1980년대에 북한에서 일기 시작한 종교에 대한 관용 조짐과 종교의 기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결과들이었을 것이다. 북한의 주체사상 전문가들인 박승덕이나 황장엽은 1980년대 중반부터 종교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과거의 종교정책에 대해 간접적인 형태로나마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이미 1955년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다는 헛소리로 근로 인민들에게 믿게 하려는 술책"으로 기독교를 이해했던 황장엽은 1989년에는 "북한은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종교에 대해서도 종래의 맑스주의와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면서 종교와 주체사상은 모두 사랑이나 믿음을 중시하고 있으나, 양자가 다른 것은 그 실현의 방법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1980년대 초반부터는 기독교도연맹의 기본 조직단위로서 가정교회가 다른 나라의 방문객들에게 공개되기 시작함으로써 가정교회의 구성과 예배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방문자들을 통하여 가정교회는 1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예배에서는 1930년대 중반 이후 한국장로교회가 사용한 [신편찬송가]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들이 드러났다.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조직도 외부세계에 알려졌다. 1985년 중국교회를 방문한 고기준 목사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연맹은 중앙위원회 밑에 조직, 선전, 해외관계, 총무의 네 개 부서를 두었으며 50개 도시에 지역위원회를 설치하고 있었다. 지역위원회가 설치됨에 따라 각 지역의 가정교회들은 이 위원회를 통하여 기독교도연맹의 지도를 받게 되었으며, 기독교도연맹은 매월 가정교회에서 행해질 설교 방향을 제시하고 지역위원회 사무실에서 가정교회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례전을 거행하고 있다고 한다.

 

기독교도연맹의 조직과는 달리 신학적 입장은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1988년 북한을 방문한 캐나다교회협의회 대표들이 기독교도연맹의 신학적 입장을 묻자 고기준 목사는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믿습니다. . . .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지는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와 지혜와 능력을 총동원하여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을 완수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라고 답변한 바 있다.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기독교도연맹의 이 같은 입장은 이미 이 글의 서두에서 본 것처럼 1947년 강양욱이 외국 기자에게 한 말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83년 강양욱 목사가 사망한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실질적으로 이끈 사람은 고기준 목사였다. 1994년 3월30일 조선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회 서기장 고기준 목사는 그의 긴 생애를 끝마쳤는데, "나의 신앙생활을 돌이켜 보며"라는 제목의 수기를 남겼다. 1994년 4월16일 평양방송을 통해 낭독된 그 수기에서 고기준 목사는 이런 말을 했다. "해방후 미제국주의자들과 한 짝이 된 반동들이 일부 종교인들을 꾀어 노동당의 정책을 비난하고 반대하도록 사주하면서 알력관계를 조성했으므로 종교인들을 경원시하고 차별하는 것이 무리한 일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 후에 안 일이지만, 그것도 가짜 공산주의자들이 한 짓이었지 주체형의 공산주의자들이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1922년 평안남도 증산군에서 태어난 고기준은 인민경제대학에서 수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가 조만식 장로가 중심이 되어 결성된 조선민주당에 가담한 것은 1947년이었다. 그후 1970년대 후반까지 그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활동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1980년 그는 조선민주당의 후신인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의 조직부장이 되며 그 다음 해에는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활약한다.

 

그는 1981년 11월초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열린 제1회 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의 대화 모임에 김득룡, 김운봉 목사 등과 함께 조선기독교도연맹 서기장의 자격으로 참석함으로써 남한교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서 '사회주의와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8.15 전에는 물론 8.15 후에도 오늘까지 이북에서 교직자 생활을 하고" 있다고 밝혔으나, 그가 목사의 직함을 갖기 시작한 것은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서기장이 된 무렵부터인 것 같다. 그는 연설에서 자기의 신앙생활과 관련하여 이런 말도 했다. "저는 대대로 하느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고 환갑이 지나도록 신앙생활을 하여 온 기독자입니다. 오래 전 일이기는 하지만 저도 한때 사회주의에 대하여 의혹을 품어 왔고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수화상극이라고 생각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선노동당의 모든 시책과 북한의 사회제도 속에서 종교인들이 갈구하는 이상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 오랫동안 굳어진 신앙생활의 관습을 굳이 버릴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또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이해도 달리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비엔나 회의에서 북한교회사와 관련된 몇 가지 사실들을 전해 주었다. 전쟁 전에는 평양에 40여 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전쟁 중 다 파괴되었고, 유엔군의 황해도 신천군 점령 시 군내 인구의 4분의 1인 3만5천명이 학살당했다는 것, 전후에 초대교회와 같이 교인들의 집을 예배처소로 정하여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 1981년 당시 이북에는 5천여 명의 교인들이 있고 전국적으로 5백여 개의 예배처소가 있다는 것 등이었다.

 

비엔나 회의 이후 그는 남북교회의 만남이나 세계교회들 대표들과 만날 때 북한교회의 대표로 활약했으며, 사망 전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범민련 북측본부 중앙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의 공헌을 기리면서 북한 중앙인민위원회는 1995년 8월17일 고기준 목사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했다.

 

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1989년부터 김성율의 뒤를 이어 강양욱의 아들인 강영섭이 맡고 있다. 1995년 현재 기독교도연맹 소속 목사는 약 30여명이며 북한 기독교인 약 1만명 중 6천여 명이 이 연맹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독교도연맹의 조직은 총회, 중앙위원회, 지방위원회, 각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위원회에는 25명의 위원과 9명의 상임위원이 있다고 한다. 기독교도연맹의 실질적인 사무는 선전부, 국제부, 조직부, 경리부 등 네 개의 부서로 이루어진 사무국이 담당하고 서기장이 사무를 총괄한다. 1994년 3월 고기준 목사가 소천한 이후 이천민 목사가 서기장직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