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 박사/선교의 창

[스크랩] 선교현장에서 바라보는 선교적 교회론

에반젤(복음) 2021. 8. 18. 19:38

장완익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1993년 10월 31일 선교사 파송을 받았으며, 만 20년 이상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선교사역을 하였다. 신학대학원 졸업과 목사 안수 후 만 29세에 선교사 파송을 받았으니,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30대와 40대를 모두 선교 현장에서 보낸 것이다. 필자는 지난 20년 동안 교회를 통한 선교, 구체적으로 교회가 없는 지역에는 교회 개척을 통해 그리고 교회가 있는 지역에서는 세워진 교회와 협력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 사역의 기본 전략으로 삼았다. 즉 선교 사역과 지역 복음화의 핵심은 교회였다.
특별히 전통적이고 제도 중심적인 크리스텐덤 교회론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 수행에 심각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주제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2. 교회 자립과 지도력 이양의 오류
지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마16:18, 18:17)를 거쳐 오순절 다락방의 예루살렘교회(행1-2장)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안디옥교회의 선교사 파송을 기점으로 전 세계에 복음이 증거되었다. 사도행전을 비롯한 각 서신서에 나오는 모든 교회는 자립하는 교회였으며, 그 어느 부분에서도 교회 자립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아울러 교회의 지도력 역시 사도와 교인들이 갖고 있었으며, 이방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도 교회를 설립하는 일정 기간 그 지역 교회의 지도력을 개발하고 훈련한 후에는 그 지역 교회에 간섭하지 않았다. 즉 성경에 나오는 모든 교회는 자립과 지도력 개발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크리스텐덤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상의 많은 교회는, 특별히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거나 외부 지원에 의존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자립을 부르짖으며 강조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립은 요원한 실정이다.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교회는 자립하지 못한 채 선교사 교회(missionary church)로 남는 경우가 상당수이다.

설립 초기부터 지역 교회 스스로 갖고 있던 지도력이 누구에게 있었는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선교사들은 교회의 설립자가 선교사이므로 교회의 지도력이 선교사에게 있다고 생각하기에 열심히 전도하고 교인을 훈련하다가 어느 정도의 단계가 되면, 특별히 경제적으로 자립할 여건이 구비되면 선교사가 갖고 있던 지도력을 지역 교회에 이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자주 사용되는 원리가 해롤드 풀러(W.Harold Fuller)박사의 ‘4P이론’인데, 선교단체와 현지 교회를 개척자(Pionner)-부모(Parent)-협력자(Partner)-참여자(Participant)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과 원리가 과연 성경적인지 또는 이러한 개념과 원리의 적용이 선교 현장에 바르게 적용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선교사가 지역 교회를 개척했을지라도 그 교회의 지도력은 선교사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 교회 스스로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선교사는 조력자로서 교회가 잘 자라도록 돕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회의 지도력은 선교사가 지역 교회에 이양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교회가 처음부터 갖고 있던 지도력을 개발하고 그 지도력이 강화되도록 선교사는 돕는 것이 바를 것이다. 왕자를 가르치는 스승이라 할지라도 왕자보다 더 큰 지도력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3. 전통적 교회론의 한계
전통적 교회론은 4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서유럽을 지배했던 종교적 문화였던 크리스텐덤(기독교왕국)을 말한다. 이의 특징은 국가와 교회의 제도적 동반자 관계를 당연시하고, 필수적인 성직 계급과 화려한 교회 건물이 교회 개념과 교회 경험의 중심이다. 이러한 특징은 곧 전통적인 교회론의 한계로 나타났는데, 이 역시 아래의 몇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3.1. 교회 안의 성직계급주의
서구의 크리스텐덤이 낳은 전통적 교회론의 핵심적 사상이며 개혁교회에도 스며든 성직계급주의(sacerdotalism)나 성례중심주의(sacrementalism)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개혁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영적 중보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가 A.D.313년에 공인되면서 성직계급주의가 자연스럽게 교회의 전통이 되었다. 게다가 A.D.325년 니케아종교회의 이후에는 성만찬 예식을 감독들에게만 집례하게 함으로 계급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3.2. 건물 중심의 교회
교회(敎會)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봉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그리고 이런 신도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장소나 건물은 예배당 또는 교회당(敎會堂)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교회와 교회당을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 교회당을 성전(聖殿)이라 부른다.

성전은 성경 역사상 예루살렘에 세번 건축되었으며, 마지막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가 언급한 것처럼 이미 무너져 돌이 돌 위에 하나도 남지 않았다(마24:1-2). 지금 우리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건물 또는 장소는 성전이 아니라 교회당이다. 진정한 성전은 우리들의 몸(고전3:16)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이 모여 예배하며 교제하는 모든 장소 또는 건물은 교회당인 것이다.
크리스텐덤 이전의 초대 교회는 건물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예배와 교제를 하였으나 지금의 교회는 건물이나 장소가 그 교회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가 빚을 내어서라도 웅장하고 화려한 교회당을 건축하며, 이를 위한 헌금을 ‘성전건축헌금’이라 부르는데, 이는 크리스텐덤의 대표적인 잔재이다.

3.3. 제도와 재산 배경의 교회
교회의 머리되시며 교회의 창설자이신 예수그리스도는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기를 원하셨다. 그렇기에 초대 교회는 전혀 기도에 힘썼으며, 예배와 구제를 교회의 지표로 삼았다. 구제 활동이 지나치게 강화됨으로 부작용이 발생하자 사도들은 교회 운영의 역할 분담을 위해 일곱 명의 일군을 선출하여 교회 살림을 맡기고, 사도들은 여전히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였다(행6:4).

그러나 4세기 크리스텐덤 시대에 접어들자 교회는 국가로부터 각종 제도와 조직적인 혜택을 받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엄청난 재산(財産)과 부(富)를 축적하게 되었다. 이러한 제도와 조직을 기반으로한 권력 그리고 재산과 부는 초대교회에 의해 운영되기보다는 그러한 구너력과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와 조직을 배경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교회에 자본주의가 급속히 들어오고, 경제력은 믿음을 가진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증거로 그렇지 못한 성도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모순을 안게 되었다.

3.4. 대학에서 신학교로의 전환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가 세상과 거리를 두며 믿는 자들만의 공동체가 된 것도 전통적인 교회, 크리스텐덤의 한계이다.
신학교(seminary)라는 용어는 1563년, 트리엔트공의회(The Council of Trent)에서 교구 사제양성을 위해 설립한 학교를 지칭하면서 공식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그 전까지 교구에서 지도자 양성을 위해 사용하던 수도원 모델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경된 것이다. 개신교는 시대를 전후하여 대학(university)을 세웠다. 초기에 세워진 대학이 모두 기독교 대학인 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인 기독인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였다. 믿는 자들만의 공동체인 교회가 아닌 믿지 않는 자들에게 믿음을 나누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향력을 세상에 나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신교의 노력은 19세기 접어들면서 무너지기 시작하였는데, 유수한 기독교대학들은 점점 세속의 물결을 타기 시작하였으며, 대신 구교의 직업적 기술(vocational skill)에 역점을 둔 사제와 성직자(clergy)양성 제도인 신학교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현대 선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선교 지도자 중 한 명인 랄프 윈터(Ralph D.Winter) 박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직전, 서구 교회가 범한 12가지 잘못을 지적하였는데, 그 첫번째가 바로 ‘대학이 아니라 신학교부터 시작한 잘못(The mistake of starting Bible schools, Not University)’이었다.

4. 선교적 교회론의 적용을 위한 제안
이러한 크리스텐덤, 전통적 교회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려는 개념이 바로 선교적 교회론이다. 이러한 개념은 전 세계의 교회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오랜 교회 역사를 갖고 있거나 교회 구조가 변하기 어려울 만큼 굳어진 지역에서는 적용이 쉽지 않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짧은 교회 역사를 갖고 있거나 교회 구조를 세워가는 선교 현장에서는 상대적으로 그 적용이 수월한 면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다음의 몇 가지를 이에 대한 적용으로 제안한다.

가. 선교 현장의 사역자, 교회 목회자 또는 신학교의 교수 등을 막론하고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바른 인식과 관심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필자도 그런 경험이 있지만 선교적 교회론에 대해 한두번 들었다고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이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가진 이들이 먼저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성경에 근거한 선교적 교회론의 개념을 더 많은 곳에 흘려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연구와 토론이 가능한 지역에서는 적절한 형태의 포럼, 세미나 또는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과 필요성을 전달할 필요가 있으며, 각종 언론매체와 방송, 출판 등 매스미디어의 활동도 필요하다.

나. 선교지를 배경으로 하는 또는 선교 지향적인 연구단체와 지도자양성 단체/연맹 등과 긴밀히 협력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해외 선교단체 및 외국 선교사들과도 학문적, 학술적인 배경에서 연대할 부분은 연대하고, 논의할 부분은 논의를 해가면서 국제적인 공조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내의 신학자와 중견 목회자들과도 신학적인 문제는 없는지, 혹시 있다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열린 자세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다. 선교적 교회론을 선교신학적으로 그리고 사역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인 선교사, 신학자와 목회자를 중심으로 선교연구소/훈련원 또는 선교대학원을 설립한다. 이러한 구심점은 선교적 교회론을 배경으로 한 학문 활동의 근거가 되는데, 일정 기준의 연구 과정을 이수하고 결과물을 발표할 경우에는 소정의 학위(degree)또는 수료증(certificate)을 수여한다. 이는 선교적 교회론이 단순한 이론 또는 단회적인 주장을 넘어서  선교신학의 주요 범주에 포함되도록 기여할 것이며, 더 많은 선교 현장에서, 더 많은 선교사들이 이 개념을 갖고 사역하도록 격려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라. 선교적 교회론에 입각한 신학과 교회 그리고 선교 간의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전통적 교회론 개념으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실천하기 어렵다. 전통적인 교회론은 신학과 교회가 분리되어 있으며, 선교 역시 이 둘의 사이에 존재할 뿐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적 교회론으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가능하다. 선교적 교회론은 신학과 교회가 선교라는 매개체를 중심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학과 교회의 중심에는 선교가 자리하고 있으며, 선교가 신학과 교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력을 미친다.

5. 나가는 말
선교적 교회론은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1909-1998)이 38년 동안 인도에서 선교사로 사역 후 은퇴하여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온 뒤에 주창한 것으로, 그의 선교적 통찰력은 많은 글과 강연을 통해서 선교지가 되어버린 서구 사회의 현실에 도전을 주게 되었으며 나아가 세계 교회의 나아갈 바를 제시해주었다.
작금의 한국 개신교회는 그 영향력이 날로 감소되고 있으며, 특별히 많은 대형 교회들은 교회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함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다. 많은 교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참 모습과 표지를 찾기 위해 갈망하고 있으나 그 길은 쉽지 않다.
교회론에 대한 반성과 변화 없이는 사역의 효과도, 선교적인 기대도 갖기 힘든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때,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바른 지표를 찾고자하는 이들에게 선교적 교회론은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