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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울의 종말론

에반젤(복음) 2021. 7. 30. 13:20

바울의 종말론

 

 

서론

‘종말론’은 우리사회에 내재 되어 있는, 많은 불만적 요소의 표출 창구로 작용을 하는 예가 많다. 특히 얼마전 ‘다미 선교회’의 10월 28일 주장은 과히 충격적이라 할수 있다. 이장림씨의 ‘다미선교회 파동’은 기독교계에 있어 왔던, 종말에 대한 일반적 신앙을 신화적 소산으로 만들어 버렸고, 일부 사이비 기독교의 패해적 종말 윤리만을 극단적으로 극대화 시킴으로써, 한국 기독교계의 대 국민적 공신력을 잃게 하였다.
이제 우리는 과연 종말이 우리에게 필요한가 ? 하는 문제 까지, 스스럼 없이 제기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신학자 들중 길단의 그릅에서는, ‘종말론’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와, 개념만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결과론적 양태 해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종극적인 종말 보다는, 현재의 모습에서 우리에게 있는 믿음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이렇게 종말사건의 부정이나. 종말 사건 보다는, 그 사건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의미적 관심등으로, 종말 사건으로 부터 멀어지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케리그마의 기본이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라면, 그 결과적 강조점은 당연히 주의 재림이 되며, 따라서 종말은, 바로 기독교의 중요한 고백이 됨에, 틀림이 없는 중요한 신앙고백 중에 하나이다. 이러한 중요한 종말에 대하여, 바울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 했으며, 또한 어떻게 접근 했었는가 ? 하는, 바울의 신학에서의 ‘종말론’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즉 종말에 대한 바울의 전반적인 입장을 고찰함으로써, 현재의 우리에게 닦쳐진 전반적인 위기들에 대하여, 좀더 객관적이고, 그리고, 좀더 신학적인 자세를 가질수 있지 않을까 ?
바울의 종말에 대한 견해를 더듬기 위하여, 국내의 번역된 바울의 신학적 견해에 대한 연구 서적과, 성경의 바울서신들을 통하여서, 바울이 종말에 대하여 취하였던, 입장들을, 바울 서신의 내용을 통하여서 접근하려 하였다. 종말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각 관점들을 요약하고, 거기에 바울의 입장을 성경에서 찾아서 바울의 종말적 접근을 이해하려고 노력 하였다.

철학과 종교에서 종말 개념

종말의 보편성

마지막에 될 일들에 관한 이론은, 기독교에만 독특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볼수 없다. 개인이든지, 민족이든지, 인간의 삶에 대한 물음이 있는 곳에서는, 항상 마지막에 대한 의문들을 찾아 볼수 있다.
“ 각 인간의 목적,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 ? 인류전체가 향해 가고 있는 목표는 무었인가 ? 인간은 죽으면 소멸 되는가 ? 아니면 복이나 재난의 또 다른 존재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가 ? 인간 세대는 끊임 없이 연속하여 가고 오다가 결국에는 망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인가? Louis Berkhof,Introduction to systematic Teology 와 Systemic Teology 합본번역
조직신학, 권수경 이상원 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2. p.925.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인간이 자기 삶의 한계 넘어에 대한 본능적인 의문의 표출로써, 생각할수 있는 ‘이성’이 인간에게 있는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끝없는 질문들에 대한, 인간의 자기 대답의 방법으로는 종교 ,철학 ,과학 등으로 인간 이성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여기에 대답하고 있다. 결국 ‘종말론’에 대한 관심이 없는 고등학문은 없으며, 모든 방법론으로 여기에 대답하고 있으나, 특별히 인간이성의 논리적 최고 학문인, 철학과, 인간 정신의 최고 활동의 결과인, 종교에서의 종말에 대한 언급을 살펴 보겠다.

철학에서 종말론 문제

개인과 이 세계에 대한 최종적인 결과에 대하여, 철학자들은 매우 합리적인 자기 사고의 틀속에서 접근하고 있다. ‘플라톤’은 ‘영혼의 불멸성’ 곧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계속 존재한 Ibid.,p.925.
다고 가르?다. Ibid.,p.925.
하지만 이러한 ‘플라톤’의 가르침은 철학발전 초기의 종교적 사회지식과, 자기 철학의 ‘이원론적 구조’가 만들어낸 발전되지 못한 개념이라 하겠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철학체계’에서는 ‘종말론 자체’가 설수 없다. Ibid.,p.925.
하지만 ‘라이프니츠’ 같은 일단의 철학자들은 온갖 논증을 동원하여, ‘종말론’적 주장을 옹호 하였다.

‘칸트’의 경우 종말이라는 것은, 그의 철학적 사고 속에서 받아들여 질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천이성의 요청으로 ‘영혼 불멸설’을 남겨 두기도 한다. Ibid.,p.926.

19 세기에 들어 오면서 ‘관념론 철학’은 이 이론을 배제하여 버린다. 사실 ‘해링’이 말하는 바, ‘모든 종류의 범신론은 일정한 사색의 유형에 제한 되어 잇어서 어떠한 궁극적인 것으로도 나가지 않는다.’는 ‘관념철학’과 ‘범신론적 접근’의 ‘철학적 논리 한계’로는 ‘종말’이라는 명제 자체를 받아 들일 수 없는, ‘개념구조’를 제외한 모든 철학적인 구조하에서는, 종말후의 이 세계의 존재 형태,인간이성의 ‘죽음’ 이후 ‘존재 가능성’에 심각한 긍정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종교에서 종말론의 문제

종말에 대한 체계적이고 좀더 실재적인 지식은 종교에서 발견 되어 질수 있다. 종교에서 원시적인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 조차도, 죽음 넘어의 삶에 대한 전제에서 출발하며, 고등한 종교로 나아 갈수록, 그 구조는 복잡해져 간다.
인간 개인의 종말에 대하여 ,‘불교’는 ‘열반’, ‘이슬람교’는 ‘감각적 낙원’을 가지고 있으며, ‘인디언’들에게는 ‘행복한 사냥터’,가 있다. Ibid.,p.926.
세계의 종말에 대하여서는, ‘불교’에서는 ‘세계 영겁’을 말하는데, 이 ‘세계 순환’과 ‘세계 영겁’ 속에서 각각 새로운 세상이 나타나고, 또 다시 사라져 간다고 한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특히 죽은 조상이, 이 세계에 독특한 힘으로 개입하는데, 그 후손들을 잘 보살펴 주기를 기원하는, 이 세계와 저 세계와의 비 단절적인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결국 일반적인 종교에서의 ‘종말론’은, 종말의 모습이나, 종말의 실제적 형태를, 설명하기 보다는, 현제적 삶의 투사를 통한 미래적 물안감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즉 무한한 ‘윤회의 개념’이나, ‘감각적인 저 세상’, ‘행복한 삶의 터’와,‘이 세상과 연결된 저 세상’의 개념들은 구체적 종말일정과 종말의 필연적 원인에 근거를 두기 보다는, 현재 삶에 대한 보상과 위로의 사고 구조위에 한정될 뿐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종말 개념

구약의 종말 개념

구약에 있어서, 종말적 접근은, 모든 부분에서 연결되어 설명 되어질수 있다. 이는 ‘다니엘서’와 같은 ‘예언서 부분’에만 한정 하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부터, 장차 오실 구속자에 대한 ‘대망사상’이 발견 되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뱀과 인간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와, 그로 빚어진 이 세계의 파괴적 현실은 극복할수 없이 심각하여, 이것을 극복할수 있는 유일의 대안으로 메시야를 소망하게 되는대,
창세기 3장 15절 에서는 여인의 후손으로,
창세기 22장 18절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창세기 49장 10절에서는 유다 지파에서 나타날 것으로,
그리고 삼하 7장 12절과 13 절 에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구약 전체를 통하여 소망되어지고, Ibid.,p.15.
특히 이 ‘대망의 구속자’는 임마누엘 이사야 9장 6절
, 여호와의 고난 받는 종 이사야 53장 참조
, 사람의 아들 다니엘 7장 13절,14절
등으로 구체화 되어 소망된다.
회복의 모습에서는, ‘하나님의 왕국개념’ 으로 나타난다. 즉 ‘대망의 구속자’가 옮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는 확실해 지며,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확립되는, ‘하나님의 왕국’이 되어진다는 것이다. 신명기 33장,시편 84장3절, 이사야 43장 15절 등을 참조
그리고 회복의 구체적 사건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연관된다. 즉 왕국의 분열과 포로생활로 점철되는 이스라엘이 돌아오고, 통일되고, 주권적으로 새롭게 될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그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급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섬들에게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라고 강조하게 된다. 이사야 23장 3절

이러한 ‘회복의 개념’은 ‘주의 날’이라는 것으로 확연하게, 종말성격이 나타나게 된다. ‘오바댜’는 ‘애돔’에 불운한 ‘주의 날’이 도래하리라고 에언한다. 오바댜 15절,16절.
그리고 ‘이사야’는 13장에서 ‘바벨론’이 멸망하는 ‘주의 날’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장애가 되는 적대 세력들의 ‘멸망의 날’이, 결국 이스라엘이 되복되는 ‘주의 날’이 된다는 것이다. Anthony A Hoekma 「The Bible and the Future」
류호준 역, 「개혁주의 종말론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2. p 21,
그리고 이러한 구체화는 다시 ‘대망’으로 연결되어져서, 순환된다. 즉 ‘새 하늘과 새땅’에 대한 희망이 그것이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 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된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다.’ 이사야 66장 22절

이사야가 주장하는 것 처럼, 마지막에 대한 사상은 결국 ‘새하늘과 새 땅’이 라는 창조 초기의 모습으로 회복되고, 완성되는 순환적인 양태를 보인다. 결국 구약의 ‘종말 개념’은 ‘회복의 개념’이며 이것은 창세기의 에덴 동산으로 회기 되는, ‘민족적 귀소본능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 같다. 특히 ‘새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서 ‘이사야’의 좀더 구체적인 표현을 보면, 목가적인 이스라엘의 현실적 삶안에서 허영되는 한개한의, 관넘적 절대행복을 표현하고 있다. 이사야 65장 17절에서 25절 참조
따라서 구약의 종말 개념은 민족적 현실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신약의 종말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존재의 출현으로, ‘종말론’ 자체가 의미를 달리하게 된다. 즉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일어 낫다는 것이다. .

‘이사야’는 ‘보라 처녀가 잉채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장 14절
’ 고 외?다. 하지만 마태는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의미를 강조하며 마태복음 1장 20절에서 23절
, 함께 계시는 나타난 하나님에 대하여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구약 저자들에게는 하나로 인식 되엇던 종말의 내용이,

두 단계로 구체화 된다.
이러한 결론의 구체적 갈등은, 예언 되엇던 ‘대망의 구속자의 임재’와 그에 따르는 ‘완성된 왕국’의 도래 사이에 불일치를 경험 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완성된 왕국의 개념’에 상당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완성되는 왕국의 도래가, 다시오는 대망의 구속자의 ‘재림’과 연관됨을 강조 함으로, 결국 새로운 ‘종말 개념’에 신약을 사는 사람들이 접근하게 된것이다. 이 새로운 ‘종말 개념’은, 분명 비 유대적이나 구약적 관점의 연장 선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며, 도래 하였지만 완성되지 못한, ‘개념’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개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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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인 종말 개념

일반적 개념의 종말론

역사를 불명확하고, 끝이 없는 과정의 연속이 아니라, 시작에서 끝으로 가는 직선적이며, 1회적이고 그리고 그 역사에 목적을 상정할때, 종말은 일반적으로 인류 역사의 최종적인 완성에 로의 도달이라고 볼수 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이러한 종말은 ‘거대한 위기’로 임하는데, 바로 이러한 종말에 관계된 이 ‘위기’에 사실들과 사건들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역사 ‘종말론’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보통 일반적인 ‘종말론’의 주제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체적 부활,최후의 심판, 왕국의 완성,그리고 경건한 자와 악한자의 최종적인 상태, 등으로 나누어 설명되어진다.
일반적인 역사 ‘종말론’의 첫전째 사건은 바로 ‘은밀한 휴거’이다. ‘은밀한 휴거’(secret rapture)가 일어나는 것은 ,성도들을 위한 강림의 발생이다. 살전 4장 15절 16절
이 사건은 어떠한 선행된 사건 없이 발생하게 되며, 이 사건을 필두로, 7년 동안의 공백이 이어진 다. 이 기간 동안 ‘대환란’이 일어나고 마대복음 24장 21절
‘적 그리스도’혹은‘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며 살후 2장 8절에서 10절
,그 이후에는 또 다른 대대적인 ‘주의 강림의 날’ 살전 3장 13절
의 발생으로 대대적인 ‘심판 마태복음 25장 31절에서 46절 참조
’ ‘천년왕국’의 시대, ‘백보자 심판’ 등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년 왕국’에 대한 견해들 과 ‘대환란’의 성격들
그리고 ‘휴거’의 모양에 대하여 많은 주장과 예측이 나오고 있다. 어찌 되었던, 일반적인 역사 ‘종말론’의 확실한 점은, 역사의 마지막과, 그리고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치밀하게 계획되어지고, 실행되어 진다는 것이다.

종말의 시간적 접근

신학적으로 종말을 현재적, 미래적, 피안적,으로 보통 구분 하고 있다. 이는 종말이 ‘우리 안애 있느냐?’ ‘우리 앞에 있느냐 ?’ 아닌면 ‘우리 너머에 있느냐 ?’ 하는 종말의 ‘시간적 위치 개념’에 의하여 나누어 볼수 있다. 이것을 보통 신학적으로는 ‘현재적 종말론’, ‘미래적 종말론’, ‘초월적 종말론’ 이라고 불리워 지고 있다.
‘요한 복음’ 에서는 ‘현재적 종말론’ (요 3:15,18:36 5:24 참조)으로 실존적 개인적 ‘종말론’이 우세한 것으로 주장 되어지고 있는 반면, 마가복음이나, 마태 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멀고도(마가 13장 마태 25장 참조), 가까운 것으로 주장 되어지고 있다고 말한다.(마가 1:5, 마태 4:17 ,5:10)
‘긴장 관계’로 종말을 다루는 것은‘ 바울의 서신에서 볼수 있을 것이다. ’죽은자의 부활‘이 이미 세계에 일어난 것으로, 로마서(롬 6:3)에서나, 골로세서(2:12))에서 다루지만, 나중에 완성되는 것으로, 고린도 전서(고전 15:12)에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인 다양성은 종말이라는 의미가, 종말의 시간적인 이해 보다는,’ 종말 개념‘자체의 이해와 병립되어져야 할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종말 개념

 

바울의 일반적인 종말개념
바울이 그의 서신속에서 복음을 강조하는 배졍속에는,그리스도의 강림과 사역, 특히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본바와 같이, 역사속에서 구속의 신적 사역이, 그 완성에 도달 하였으며,하나님에 의해 약속 되어지고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 되어졌던, ‘위대한 미래의 구속의 섭리’가 현재에 시작 되었다는 중요한 개념이 전제되고 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 ,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그는 바로 지금이 ‘근본적인 종말’의 진행되는 ‘사건속의 한 시점’으로 파악했고 ,따라서 모든 일반적인 역사 종말개념 자체가, 벼랑위에 서 있는 비장한 ‘군사의 자세’ 그 자체 였다.
데살로니가 전서 5:2~8에서, 바울은 완성에 대한 것과, 그 날에 이미 속해 있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강조하며, 또 한편으로는 ‘주님의 큰 날’인 이 날이, 이미 현재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을 뿐 아니라, 비추이고 있다고 명백하게 못 밖는다.
이러한 임박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많은 부분에서 찾아 볼수 있다.

로마서 13장 11절 이하에서, 바울은
“우리가 처음 믿을때 보다 구원이 가까와 졌다”
고 강조한 다. 또한 빌립보서 4장 5절에서는, “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현재적 의미로, 그 확신을 언급한다. 고린도 전서 19장 29절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되어진 고로....” 라는 표현으로, 모든 부분의 세상이 마직막임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의 임박한 역사 종말시기에 대한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소망의 틀위에서 이해 되어질수 있다.(빌립보서 4장 6절 참조) 이러한 바울의 임박한 종말의 마지막 정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승리의 재림’이다.
그는 모든 피조물들이 구원을 바라고 부르짓는 소리를 강조한다. 그 소리는 허무한데 굴복해 버린 피조물들의 간절한 바램이며, 또한 이미 고통 가운데 괴로워 하며, 갱생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애타는 부르짓음으로 해석한다.(롬 8장 19절,20절 22절 참조) 그러나 그는 이세상의 지배 세력이 아직 까지는 존재하고 있는, 어둠의 권세의 종말이 다가오는 것을 강조한다.(에베소서 6장 12절 참조) 왜냐하면, 낙원에서 인간이 추방될때 주신 약속되로, 하나님께 곧 교회의 발아래, 사탄을 굴복 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롬 16장 20절 참조)
결과적으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전 우주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된 ‘승리의 종말’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러한 종말은 이미 시작된 사건으로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개인적 종말론의 견해

바울은 전 우주적이고, 매우 영광스롭고, 아름다운 ‘승리의 종말’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우주적인 종말 시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은, 개인의 참여 문제에 대한 초대교회의 의문은 증폭되어 갔고, 바울은 여기에 대하여 ‘개인적 종말론’을 목회적 요청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재림의 ‘역사종말점’ 이전에 죽은 죽음에 대하여, ‘죽음’이란 용어 대신 ‘잠자는 것’(falling asleep 고전 11:30, 15:5, 18:20 살전 4:13)이란 표현과 그 상태에 대하여서도 ‘잔다’는 표현을 쓴다.(sleeping 엡8:14, 살전 5:10) 하지만 이러한 바울의 개념이 결국 재림이전 죽은자들의 의식 상태가, 모두 정지되어 있는 상태로 부활시에 깨어나는, 잠으로 해석되어질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던져 질수 있다.

이러한 중간 상태에 대한 논란도 참으로 분분하며, 현재에도 논쟁거리이다. 고린도 후서 5장 1절에서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 서 지으신 집, 즉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는 줄을 아노니...” 라고 강조한다. 이것도 바울이 ‘죽음’이후의 우리의 ‘신체성’에 대하여 언금하는 중요한 구절중의 하나로 주의 깊게 볼수 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손으로 지은 집’, 즉 ‘장막집’을 ‘육체’에 비유하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을 ‘죽음’ 이후에 ‘우리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유적인 바울의 설명에서 우선 새로운 ‘신체성’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란 사실을 강조함을 알수 있다. 또한 이 ‘신체성’이 결과적으로 현재의 우리와의 연정선상에서 존재하며,우리에게 부여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확실히 바울은 이 새로운 ‘신체성’의 존재시점에 대하여서는 ‘중간 상태’나 ‘부활 후’ 라는 시간 개념의 접근 보다는, 우리의 모습에서 탈출--즉 ‘ 믿는자’가 ‘생존의 일시적 모습’에서 부터 ‘소멸되어 지는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활을 고대하여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 하는 것 사이의 대조를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고 봐야 할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더욱 확연히 나타나게 된다. 즉 죽은자의 종말 사건에 참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결과적으로 영광스럽게 합류할 것을 대조적인 용어로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개인적인 ‘종말론’적 입장 즉 역사적 종말시점에 죽은 자들의 참여 문제로 시작한다. 개인이 역사적 종말사건에 참여함의 당위성에서 출발하여, 참여함의 ‘개념적 모습’의 ‘비유적 설명’을 강조 함으로써, 역사적 종말의 필연에 파생되어, 당연히 일어나야 할 사건으로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바울의 종말 증거의 방법론적 구조

바울의 종말사건의 증거 방법은 몇가지 개념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잇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러한 모든 증거들은 기독론에 집중되어 있고, 특별히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성’에 근거를 가질려고 하고 있다.
종말사건에 대한 논리적 연결고리를 통하여, 종말론의 진의 여부가 어떻게 부활에 연결되는가 ?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 할수 있다.

ㄱ. 종말사건이 거짓말이면,
ㄴ.종말의 주인인 그리스도의 케리그마도 거짓이 된다.
ㄷ. 그리스도의 케리그마가 거짓이면, 그리스도의 ‘부활 케리그마’도 거짓이 된다.
ㄹ.그리스도의 부활의 케리그마가 거짓이면,죽은자의 부활은 거짓증거가 된다.

즉 바울의 ‘종말론’적 증거의 논리 구조는, 예수의 ‘부활 케리그마’에 기초하며 이 부활케리그마로 하여서 개인적 ‘종말론’과 역사적 ‘종말론’의 증러로도약하게 된다. 이러한 순환적인 연결고리속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예수의 부활을 사실로 강조함으로써 모든 종말 사건의 사실을 강조하게 된다.
고린도 전서 15장 12절에서 19절은 고린도 교회안의 부활 부정자를 특수한 논범으로 논박하는 부분이다.
루터는 이부분의 토론을 부정에 의한 부정의 논증(probare negatum per negatum) 또는 서행의 원칙의 요청(petere princpium)이라고 보았다고 한다. 철학적 용어로는 ‘선행 원칙의 요청’(peitiio principii)인 이 논법은 어떤 논증에서 논중후에 기본되는 사실이 아직 전재되어 잇는 논리적 오류를 가리키는 것이다.
“마일 주은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3절)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도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않니 하셨으리니...”(고린도전서 15장 15절)
여기에서 노증되지 않고 용납되는 몇가지 를 전재로 하고 개인적 종말 사건을 증거하려고 하고 있다.
논증되지 않은 전재는
ㄱ.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다시 살리 셨다.
ㄴ. 우리는 그 같이 선포했다.
ㄷ.사람은 다 죄인이다.
ㄹ.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희망이 있다.

즉 바울은 개인적인 ‘종말론’의 핵심인 개인의 종말사건에 있어서 북음 넘어의 부활을 강조하는 것으로 예수의 부활을 전제로 하는 논리적 오류를 전재로 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 케리그마’는 논증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다른 모든 종말 사건을 에수의 ‘부활 케리그마’에서 근거 시키고, 예수의 ‘부활 케리그마’는 역사적 시실 보도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15장 4절에서 8절까지, 예수의 부활 사전을 강조함에 있어서, 그 방법론을 철학적인 논리사고에서 출발 시키기 보다는, 부활의 케리그마를 목격했다는 증인들을 내세우며, 그 증인들이 체험 사실을 통하여 ‘부활 케리그마’의 ‘진실성’을 입증 하려고 하고 있다. 이는 ‘부활 케리그마’의 핵심이 되는, 부활이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사고의 틀을 초월하고 있는데 , 종말사건의 모든 논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케리그마’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증인을 통한 역사적 사실 언급을 통하여 해결을 하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이성을 초월한 사건의 논리적 논증이 불가능 하지만 이러한 초월적 사건을 접한 사람들의 증거가 있음으로 초월적 사건의 역사성이 결국 ‘부활 케리그마’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으로 연결되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구조로 확정 시켜서, 모든 ‘종말론’의 논리적 순환 구조의 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종교적 측면의 종말사건 증거

바울은 종교적으로 ‘종말론’적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묵시적 요소를 사용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할수 있다.
‘종말론’에 대하여 ‘구원사의 종국’(schlubgeschichte)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로마서의 ‘그리스도와 아담 동형론( Ahrist--Adam Typology)에서 그 전형을 볼수 있다.


하지만 묵시의 다른 요소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다.’(고전 15당 20)은 캐리그마적 선포이다. 즉 캐리그마적 선포를 묵시적인 요소로 들어 가기 전, 중간 상태인 전이단계---그리스도와 아담 동형론---을 통하여 최종적인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날 사실’(고린도 전서 4장 16절)과 같은 종말 묵시로 연결 시키게 된다. 이 논리적 사고 톨속에서 바울의 묵시적 선포가 참 인것을 증거하는, 전형적인 바울의 방법이라 하겠다. 결국 바울은 이러한 ‘전이 단계’가 다 끝나면 ‘공통된 어휘’ 죽은 자들이 다시삶...(고린도 전서 15:20, 데살로니카 전서 4장 16)
주의 재림............(고린도 전서 15:23, 데살로니카 전서 4:15)
잠자는 자들..........(고린도 전서 15:20, 데살로니카 전서 4:13,14)
로써 그의 ‘종말론적 사건’을 선포하게 된다.
이러한 바울의 의도는 첫째 종말 신앙에 대한 바른 입장을 갖도록 하고,둘째 고리스도와 하나님의 주권을 효과적으로 선호하고, 세째는 부활신앙의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 진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묵시적 요소를 통하여 종말에 대한 선포를 기존에 있던 성경의 지식적 연장 선상에서 바울의 ‘종말론’적 입장을 증명하고 이를 다시 효과적으로 선포하기 위하여 쓰여 졌다고 할수 있겠다.

바울의 종말론의 시간적 관점이해

바울은 종말에 있어서 마지막 ‘종말의 역사적 시점’에 대해서, 확실한 시점을 제시하기 보다는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때가찻음’(갈 4:4.엡 1:10),‘자기때가 이루어짐’(딤전 2:6,딛 1:3, 롬 5:6) 그리고 ‘저의 때에’(살루 2:6) 등에서와 같이, ‘때’에 대한 바울의 개념은 상당히 ‘시간적 시기’에 대하여 강조되는 것으로 비쳐 지기도 한다.
특히 데살로니가 후서 2장에 나오는 ‘불법의 사람’에 대한 ‘묵시적 경고’는 ‘계시록’과 그 맥을 같이 하여 ‘임박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미 종말 사건속으로 우리들이 들어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종말 사건의 ‘묵시적 개념확장’은 데살로니가 후서 2장에 ‘불법의 비밀’이 활동중임을 강조하는 것에서 자라 나타나고 잇다. 「바울신학」, op.cit.,p.598.

즉 이미 그리스도의 마지막 ‘영광의 재림’에 대하여, 악의 세력들의 마지막 공세에 관한 묵시적인 강조를 통하여, ‘임박한 종말 사건’의 ‘마지막 시점’에 대한 관심으로 부터, 일단 시작된 종말사건 전체로 ‘관찰 시점’을 확장 시킨 다음, 이것을 다시 ‘개념적인 의미’로 확장 시켜서, 그 의미성을 강조 하게 한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이 의미 하는 ‘영적의미’와 ‘부활의 양태적 해석’에 대한 ‘이원론적 개념’은, 결국 성도들이 어떻게 ‘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야 하는가 ? 하는 윤리적이 신앙적인 자세로 관심을 이전 시킴으로, 결국 바울의 때에 대한 묵시적 선포가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메세지어 연결 되어지게 된다. .

결론적으로 재림의 시기와 종말 시점의 때에 대한 시간적인 바울의 견해는, 그 목적이 성도들로 하여금 삶에 대한 ‘종말론’적 신앙을 갖도를 하기위한 ‘전이단계’로써 ‘전체적 위치’를 점유하고있는 것이다.

바울의 종말론적 윤리

바울이 ‘그리스도 재림의 임박성’을 거론 할때에, 그가 ‘재림’이 예상되어지는 ‘시기’에 대한 통찰이나, 특별한 지식으로 부텨 얻어지는 확신에서 시작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첫째 강림으로 인해 시작된 구속의 종말적 중요성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4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니,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라고 말하면서, 그 임박한 시기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고, 도리어 ‘이 같이 이미 나타난 빛’ 가운데 서서, 이미 밝아온 ‘빛의 아들’로써, 부주의 하게, 주님의 날을 미루고만 있기 보다는, 오히려 그 날을 맞이하기 위해, 나아가고, 깨어 근신하며, 그 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살전 5장 6절 이하 참조)
이러한 의미는 로마서 13장 11절에서 14절까지 보면, 더욱 명확하게, 마지막이기 때문에, 더욱 더 성도로써, 낮과 같은 행동을 하기를 강조하는 것으로써, 종말적 윤리상황의 설정과 강조가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바울의 ‘종말론’적 인식에 근거한 윤리들은 구체적인 실천 세목으로, 고전 7장 29절의 결혼 생활의 포기를 강조하는데 까지 발전한다. 하지만 이러한 ‘윤리적인 실천’에서 까지도, 바울은 ‘자의적 종교’와 ‘결혼을 모독’하는 것에 대한 경고를 잊이 않음으로, 중간기에 대비하는 바울의 ‘종말론’적 윤리의 중용적 단면을 잘 나타내어 준다. I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볼때 바울의 ‘종말론’적 상황의 윤리는,주님이 오심이 가까왔다는 의식을 가지는 ‘종말론’적 동기에서 출발함에도, 현세상의 삶에 대하여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 세계의 ‘종말시점’이 지연됨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적 인식에 대한 옳바른 이해로, 전혀 현실을 방조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삶에 책임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으로 작용한다.
‘재림의 임박성’의 강조가, 곧 윤리적 자세의 ‘책임성’에,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지게되는, 사도 바울의 윤리적 입장을 볼때, ‘종말의 임박성’은 권면의 진실성과, 성실하고 급박하게 받아들여지는 구조적 틀로써, 바울 윤리론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Ibid.,p.

결 론

바울이 ‘그리스도 재림의 임박성’을 거론 할 때에, 그가 ‘재림’이 예상되어지는 ‘시기’에 대한 통찰이나, 특별한 지식으로 부텨 얻어지는 확신에서 시작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첫째 강림으로 인해 시작된 구속의 종말적 중요성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것이다.
이러한 종말이 있을 것을 증거하는 데 있어서,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조하는데, 이성을 초월한 사건의 논리적 논증이 불가능 하지만, 초월적 사건을 접한 사람들의 증거가 있음으로, 초월적 사건의 역사성이 결국 ‘부활 케리그마’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으로 연결되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구조로 확정 시켜서, 모든 ‘종말론’의 논리적 순환 구조의 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전 우주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된 ‘승리의 종말’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러한 종말은 이미 시작된 사건으로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인 틀에서, 바울의 ‘개인적인 종말론’이 ‘역사적 종말’의 필연에 파생되어, 당연히 일어나야 할 사건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종말의 증거에 대한 바울의 의도는 첫째 종말 신앙에 대한 바른 입장을 갖도록 하고,둘째 고리스도와 하나님의 주권을 효과적으로 선호하고, 세째는 부활신앙의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 진다.
바울은 종말에 있어서 마지막 ‘종말의 역사적 시점’에 대해서, 확실한 시점을 제시하기 보다는 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미 종말 사건속으로 우리들이 들어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재림의 시기와 종말 시점의 때에 대한 시간적인 바울의 견해는, 그 목적이 성도들로 하여금 삶에 대한 ‘종말론’적 신앙을 갖도를 하기위한 ‘전이단계’로써 ‘전체적 위치’를 점유하고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이 의미 하는 ‘영적의미’와 ‘부활의 양태적 해석’에 대한 ‘이원론적 개념’은, 결국 성도들이 어떻게 ‘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야 하는가 ? 하는 윤리적이 신앙적인 자세로 관심을 이전 시킴으로, 결국 바울의 때에 대한 묵시적 선포가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메세지어 연결 되어지게 된다.
바울의 ‘종말론’적 상황의 윤리는,주님이 오심이 가까왔다는 의식을 가지는 ‘종말론’적 동기에서 출발함에도, 현세상의 삶에 대하여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 세계의 ‘종말시점’이 지연됨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적 인식에 대한 옳바른 이해로, 전혀 현실을 방조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삶에 책임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으로 작용한다.
‘재림의 임박성’의 강조가, 곧 윤리적 자세의 ‘책임성’에,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지게되는, 사도 바울의 윤리적 입장을 볼때, ‘종말의 임박성’은 권면의 진실성과, 성실하고 급박하게 받아들여지는 구조적 틀로써, 바울 윤리론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