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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울의 구원론(1)

에반젤(복음) 2021. 7. 30. 13:18
바울의 구원론의 기본사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간은 처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예 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결론하기 위해서 인간이 죄의 종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구원론을 시작합니다.

< 죄의 종 >

바울은 '죄(하말티아, )'라는 용어를 64회 사용하는데 로마서에서만 48회 사용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죄의 종'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롬 6:17,20).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롬 3:23).

< 육신 >

바울은 '육신'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신약 성경에 147회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 바울이 91회를 썼습니다. 이 단어는 인간의 육체라는 의미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지만, 군터보른캄에 의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에 대립되고 모순되는 인간의 존재와 태도'라는 의미로 바울에 의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육신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본문은 로마서 8장 1-17절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육신을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여깁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고 육신을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고 있습니다.

< 율법 >

바울이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가 율법입니다. 바울은 이 율법이라는 단어를 119회 사용하는데 신약성경 전체 191회의 62퍼센트 정도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말할 때는 대개 모세의 율법을 말하며, 바울은 그 율법을 하나님의 좋은 선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라는 헬라어 단어 '칼로스( )'는 '아름다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데이비스(W. D. Davi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폐기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즉 바울은 율법의 목적이 그것을 지킴으로 사람을 의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즉 죄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20).

레온 모리스는 여기서 '범죄'가 원어를 보면 단수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더 많은 범죄(범죄들)를 일으켰다는 말이 아니라 범죄에 대해서 더 밝히 드러냈다는 해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이 있음으로 범죄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니라, 범죄 여부가 더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목적은 우리의 죄를 명확하게 보여줌으로, 우리들에게 구원의 필요를 보여줌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갈 3:24)

그러므로 바울이 생각하는 율법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리기를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이 이용되면 율법은 오히려 구원의 방해꾼이 됩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죄를 깨달음으로 구원의 필요를 느끼고, 구원의 필요를 율법으로는 만족시킬 수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는 선까지 나아가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 죽음 >

바울이 생각하는 죽음의 개념은 단순히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죄의 결과인 죽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죽음은 모든 인간을 쓸어버리는 잔인한 정복자이나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내세를 위한 디딤돌입니다.

< 하나님의 진노 >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엡 2:3).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철저히 거부권을 행사하신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속성 자체가 '진노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의 인간을 진실로 사랑하기에 죄를 거부하는 모습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출처: 야곱의 우물가 원문보기 글쓴이: 야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