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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수와 바울의 영성

에반젤(복음) 2021. 7. 30. 12:36

예수와 바울의 영성

 

 

이 글은 2003년 11월 17일에 개최된 제 2차 교회선교연구소 정기학술심포지움이 주제인 한국교회와 영성회복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들어가는 말>
“1980년대를 지나 1990년대에 접어들자 여러 곳에서 영성을 말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미래학자들은 다가올 21세기가 영성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었고, 신학교들은 영성에 대한 강좌를 서둘러 개설하기 시작했으며, 사회 정치적인 색채가 가장 강했던 신학교들에서도 영성에 대한 서적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교회들에서는 ‘영성 집회’라는 이름으로 종전의 부흥회를 재탕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이 민재 2003. 6월호 월간 기독교 사상)

위의 말을 인용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은 21세기를 ‘영성의 시대’로 간주한다. 물론 영성(spirituality)이란 개념이 오직 기독교에만 국한 된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서양의 합리주의와 전통적 종교의 쇠퇴로 말미암아 일어난 사상적 반동으로서 영성에 대한 갈증과 배고픔은 여러 면에서 도출되어 왔다(Sheldrake 1999:5). 이러한 영성에 대한 갈망과 도전은 우리 시대의 목회현장에서도 동일한 목소리로 나타났다. 최근 들어서 한국교회성장의 둔화와 침체 원인이 영성의 부족으로 지적되면서 21세기를 맞이하는 한국교회의 교회성장을 위한 목회적 대안을 영성의 고양(高揚)이라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 특히 이성희 목사(2003)는 미래교회 목회의 근본과제를 ‘영성회복’이라고 주장(“미래는 영성목회의 시대이다”)하며 미래 목회에 가장 긴급히 요청되는 과제인 ‘영성’(靈性)은 교회가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중심된 사역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교회의 영성의 현주소는 무늬와 구호만 영성(기존의 것들을 다른 옷으로 갈아입힌 재탕?)이지 오히려 더 혼란스러운 양상이다. 물론 교회성장의 목회적 대안으로서 이러한 영성에 대한 관심의 고조 현상들은 21세기 첨단 기술문명과 물질문명으로 인하여 세속화되고 물질화 되어 가는 인간성의 문제를 회복하려는 관점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결국 최근에 일어나는 이러한 영적 과열현상은 Regent College의 영성신학과 교수인 유진 피털슨(Eugene H. Peterson)의 지적(1993:27)처럼 도리어 현재의 상황이 ‘건강하기보다는 병리적이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

사실 한국교회는 세계교회가 주목하는 것처럼 영성에 관해서는 할말이 많다. 새벽기도의 열풍(요즈음은 ‘특새’라 부름)이라든가 열광적 은사운동과 기도운동 그리고 치유집회는 교회성장이 왕성하였던 70-80년대의 전유물이었다. 이제는 이러한 영성의 모습들이 열린 예배와 찬양집회의 모습으로 대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즉, ‘능력의 종’으로 불려졌던 은사운동가로부터 ‘내적 치유자’라는 이름의 찬양인도자로 전환되면서 예배가 일종의 무대로 전환되고 있다. 이제 교회는 너도나도 강단에 요란한 악기를 등장시키거나 워십댄서를 통하여 예배 혹은 사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유능한 찬양사역자들을 모셔오기에 혈안이다. 우리의 예배가 설교중심(사경회)에서 은사중심(은사집회)으로 그리고 이제는 찬양중심(찬양집회)으로 탈바꿈되어가고 있다. 과연 지금의 한국교회의 영성은 건강한가? 세속의 한 복판에 서서 복음을 전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교회가 되어야 할 오늘의 한국교회는 건강한 영성(올바른 영성)을 소유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교회가 참된 영성으로 돌아가려면 어디로 가야하는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하여 필자는 예수와 바울의 영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까닭에 이번 영성 세미나의 시작은 바로 이 부분부터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거품 같은 표층적 근대화(압축 근대화)1)의 당연한 귀결인 IMF를 만나면서 부르짖었던 우리의 구호는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고 국민의 정부는 이것을 ‘제 2의 건국’이라는 말로 국정을 이끌어 갔지만 결국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단지 구호나 정치적 수사(修辭)로만 전락하였고 개혁과 번영은 약간의 진전을 이룬 것처럼 보이나 아직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이러한 한국의 상황 속에 오늘의 한국교회 역시도 지금의 영적 혼란, 즉, 거품 같은 영성을 어떻게 참된 영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교회의 과제이기도 하다. 이점에 있어서 영성회복은 분명 우리의 목회(사역)의 중심에 있어야 할 과제(이성희)임이 분명하다.

결국 오늘의 한국교회는 중세의 영적 어두움과 타락 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이 부르짖었던 ‘성경으로 돌아가자’,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외침을 상기하면서 영성회복의 방향을 ‘성경적 영성’의 회복인 예수와 바울의 영성의 회복으로 삼아야 한다. 이점에 있어 필자는 예수와 바울의 영성에 대한 고찰은 오늘의 한국교회의 영성회복에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라고 여겨진다.

우리가 신약에서 보는 대로 사도 바울의 영성과 예수의 영성은 분리된 두 가지가 아니라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의 영성의 근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다음 단락[‘바울의 영성’]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바울의 신앙과 사역(설교)과 삶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에 뿌리를 박고 그분의 영성을 닮아 가는데 그 목표가 있다. 이것은 바울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것인데 한 마디로 예수 미드미. 예수 따르미, 예수 달므미의 모습이 우리의 영성의 목표이다.

이점은 어찌 사도 바울에만 국한된 것이겠는가? 종교개혁자들이 돌아가고자 하였던 초대 교회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기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일 즉 그를 본받는 것이 초대 교회의 영성의 목표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약성서의 정경성의 기원(principium canonitatis)이며 정경 그 자체이다”(de Toit 1988[한역]:41), “그리스도가 곧 기독교다”(Neill 1961:91)라는 주장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교회)의 영성의 기원(origin)이며 정경/잣대(Canon)이며 모델이며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오래 전에 글로버(Glover)는 그의 책 ‘역사의 예수’(The Jesus of History)라는 책에서 “예수는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사로잡고 있는 기독교 운동의 심장이고 영혼으로 남아있다.… 인간 역사에 예수 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진 인물이란 없다.”(1920:3, 5)고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복음주의 신학자이며 목회자인 존 스토트(John Stott) 역시도 그의 책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Life in Christ)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신앙과 삶이 참된 것이 되어야 한다면 반드시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1991:7)고 주장하면서 다양한 전치사들(Through Christ/On Christ/In Christ/Under Christ/With Christ/Unto Christ/For Christ/Like Christ)을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관련하여 설명함으로써 신자의 신앙과 삶의 기원이며 모델이며 목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잘 제시하였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영성의 활성화의 승패란 오늘의 우리의 영성을 어떻게 과거의 예수님의 영성과 잘 결합(융합)시킬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Doohan 1992:30).

결국 예수의 영성이란 우리(교회)의 영성의 기원이며 잣대(목표)이고 모델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성회복은 무엇보다도 예수의 영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1. 예수의 영성2)

사실 예수의 영성은 사도 바울의 영성의 기원이고 모델이었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영성의 원천이며 모델이기도 하다. 우리가 예수의 영성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약의 기록들- 그중에 특히 복음서 - 을 통하여 그 특징과 윤곽을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는 초대 교회가 외적이고 내적인 여러 가지 어려움들(고난과 영적 낙담과 도덕적 부패)에 직면하게 됨으로써 정체성의 위기와 혼란을 겪게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반추(회상)함으로써 그들이 직면한 신앙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답변으로 주어졌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즉, 그의 오심(성육하심)과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교회의 신앙과 삶의 근원이고 모델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영성)에 대한 회상을 통하여 그들이 직면한 정체성(identity)의 위기와 삶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즉, 그들이 기억(회상)하고 있는 또는 기억하고자 하는 예수의 생애는 현재 그들의 영적 활동 또는 삶(제자도)의 근간을 이룰 뿐만 아니라 활력을 주는 회상으로서 예수의 생애에 대한 그들의 회상은 곧 초대교회가 따라야 할 영성의 원천이며 모범으로 제시되어졌다.

예수님의 삶(영성)에 대한 이러한 초대 교회의 회상은 개개의 신자와 신앙공동체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처한 사회적 정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존슨 1998:158-159). 그러므로 예수의 영성은 각각의 복음서마다 그 강조점과 형상(形象)이 다름(‘틀림’이 아님)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점에 있어서 복음서는 예수의 영성 탐구의 보고(寶庫)이고 참고서이다(Barton 1992:6). 물론 필자는 여기서 우리가 ‘예수의 영성’이라고 할 때 조직신학이나 신약신학에서 추구하는 예수의 기독론적 이해와 불가분의 연관을 가지나 그러한 기독론적 이해보다는 훨씬 더 협의적인 의미(제자도와 관련된 의미?)에 국한되어짐을 먼저 전제로 한다. 복음서에서의 예수의 기독론의 의미는 구원론과의 관련성을 가짐과 동시에 제자도와도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아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보다 적절한 신학적 토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위에 언급된 점들에 비추어서 각권(특히 공관복음)의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의 영성의 모습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참된 의(義)의 교사’로서 ‘신자’ 예수 그리스도(마태)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영성(혹은 경건)의 껍데기(외식)와 황폐함(타락)을 심도 있게 지적하면서(마 15:1-20; 23장) 그의 청중들에게 참된 영성(경건)의 원천과 모델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다(마 5:20 참조).3) 그것은 ‘참된 의(義)의 교사’(The Great Teacher of Righteousness)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마 4:19; 7:24-27; 11:29; 23:8; 28:20). ‘의(義)의 교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에 대한 마태의 강조는 그 동안 많은 학자들에 의해 적절히 제시되어 왔다(Hays 1996:94). 마태는 예수가 그의 가르치심(마 5:17-48)과 행하심(마 23장. 특히 1-2절을 보라)에 있어서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들/교사들(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는 아주 다른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예수의 가르치심과 행하심은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기 위한 과시적이고 위선적인 모습(마 5:17-6:18과 마 15:1-20)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드러내는(산상보훈을 포함한 5개의 강화들[5-7장; 10장; 13장; 18장; 24-25장]들과 함께 특히 마 5:21-6:18) 권세 있는 가르치심(마 7:28-30; 13:54)으로서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뜻(계명)에 대한 완전한 순종(5:17)을 통하여 잘 입증하였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교사들(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영성(경건)은 실천이 없는 타락한 위선적/과시적 영성(경건)이었다. 마 5:17-6:18과 마 15:1-20과 23장에 나타난 대로 이들 종교지도자들의 영성은 은밀히 보시고 행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하나님의 뜻(계명)을 행하기보다는, 장로들(사람)의 유전을 따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과시적이고 위선적인 영성으로서 주님으로부터 엄중한 책망을 받았다. 특히 유대교 경건의 세 가지 실천인 구제, 기도, 금식에 있어서 그들의 영성(특히 마 6:1-18 참조)은 사람의 유전을 따라 되어진 과시용, 전시용, 자기 확인용의 위선적 영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지도자들의 영성과는 달리 예수님의 영성은 오직 은밀히 보시고 은밀히 행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전하고 실천하는 ‘내면적 성찰의 영성’으로 마태는 제시한다.4) 이점은 마태복음(특히 산상보훈)에서 반복하여 언급된 “모르게, 은밀하게, 은밀한 중에”(6장)라는 표현과 “마음”(5:8, 28; 6:21, 22; 15:8)에 대한 강조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이 ‘내면적 성찰의 영성’은 율법의 참된 정신인 공의와 자비의 실행(9:13; 12:7; 23:23)을 중시하는 ‘실천적 영성’과 결코 분리되지 아니한다.

비록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반복된 언급)을 찾고 그것을 자신의 삶의 최고의 우선순위로 삼고 행하는 삶을 살았다(광야시험에서와 겟세마네에서. 7:21; 10:32-33; 11:25-27; 12:50; 등). 이런 까닭에 그는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주여, 주여, 부르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도록 촉구하였다(마 7:21-27). 물론 은밀히 보시고 은밀히 행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행하시는 예수님의 내면적-실천적 영성은 결코 율법(도덕법)을 무시하거나 버리는 영성이 아니었다(마 5:17-20; 15장; 22:34-40). 자신은 결코 율법을 폐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는/완전케 하는 사람으로 제시하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마 5:17).

결과적으로 마태가 제시한 ‘참된 의(義)의 교사’로서 예수의 영성 즉,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전하는 참된 교사로서의 모습과 그것을 행하는 실천적 교사(의의 교사)로서의 모습은 제자들(교회)이 본받아야 할 영성의 교범과 같다(마 5:20과 28:20). 이점에 대해서는 마 5:17-20; 5:48; 7:21-28; 11:28-30; 12:50; 마 13:51-52; 마 28:20의 구절들은 보라.

결국 예수의 영성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높이고 그 뜻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있는 하나님과 함께 하심(동행하심)의 ‘임마누엘의 영성’(마 1:23)을 의미한다. 이 ‘임마누엘의 영성’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약속하신(마 28:16-20) 영성이다(Saunders 2002:160-161). 예수의 이러한 ‘임마누엘의 영성’의 원동력은 그가 은밀히 보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아버지) 앞에서 행하는 삶이 전제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신자’)로서 예수가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높이고 그 뜻을 따르는 그의 아들 되심의 모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수의 이러한 모습은 그의 광야시험(마 4:1-11)과 겟세마네의 기도(마 26:36-46)에서 잘 드러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사탄이 제안하는 길(요일 2:16 참조)인 불순종의 길로 나아오라는 사탄의 유혹에 예수는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광야시험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지상에서 살아가야 할 영성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삶의 모습을 잘 보여준 것이며 또한 겟세마네에서의 모습 역시도 예수가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26:39, 42, 44) 수용하는 모습을 통해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영성의 전모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예수의 영성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살아가야 할 제자들(교회)의 영성의 근간이 된다.

2) 기도와 성령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누가)
특히 누가(‘기도의 전도자’[Polymale]로 불림)는 예수가 ‘기도의 사람’(Barton 1992:87, 89)이라는 사실을 어떤 복음서 기자들보다도 보다 강하게 제시한다.5) 다른 복음서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잘 언급하지 않아도 누가는 중요한 사건들이 있을 적마다 예수의 기도하는 모습을 빠트리지 않고 언급하고 있다(눅 3:21[세례 받을 때]; 6:12[열두 제자를 산에서 부르실 때]; 9:18[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신앙고백 때에]; 9:28-29[변화산에서]; 11:1[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에]; 18장의 기도의 교훈들; 22:41[겟세마네의 기도]; 23:34, 46[십자가상에서의 기도]). 즉 구속사의 중요한 사건들과 관련하여 누가는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부각(언급)함으로써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의 골조를 이루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누가는 예수님의 이러한 기도의 모습과 가르침을 통하여 교회가 따라야 할 기도의 영성의 아름다운 모습을 축조하고 있다(Polymale 1990:533). 즉, 누가에 따르면 예수와 교회는 “낙망치 않고 항상 기도에 힘쓰는”(눅 18:1) 존재로 제시한다.

이같이 기도의 주제는 누가신학과 영성의 중심부에 놓여 있다. 이점은 누가복음의 연속인 사도행전을 통해 잘 알 수 있는데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가 예수의 기도하는 모습과 가르침에 얼마나 충실하게 잘 따르고 있는가를 보여 준다. 특히 예수의 기도의 삶은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받는 성령 충만한 영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눅 11:13). 이점은 예수의 기도의 영성은 성령 안에서의 영성과 불과분의 관계를 가짐을 의미한다. 누가복음에서의 예수의 영성의 또 다른 면은 ‘성령 안에서의 영성’ 즉,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권능과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에서 행하는 영성이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누가의 기술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사역과 성령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의 출생을 둘러싼 성령의 역사와 함께 그의 공생의 시작에서부터 특히 예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면서 그에게 비둘기같이 임한 성령의 강림(눅 3:21-22)은 일종의 성령의 기름부음으로써 그의 공사역은 성령의 인도와 권능과 충만으로 이루어짐을 잘 보여준다(이 모습에 대한 행 10:38의 누가의 진술을 보라.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눅 3:16; 3:22; 4:1, 14, 18-19; 10:21). 결국 성령의 인도와 권능과 충만으로 이루어진 예수의 사역은 앞으로 있을 교회의 영성의 본보기가 됨을 누가는 주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눅 24:49; 행 1:8, 그리고 사도행전에서의 제자들의 모습을 보라).

행 1:1-5(특히 4-5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로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시작될 사도들의 행적은 누가복음에서 그 중심인물이신 예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면서 주어진 성령의 기름 부으심(성령강림)으로 시작된 공사역의 모습(눅 3:21-22과 행 10:38)과 적절한 병행을 이룬다(Talbert). 세례 받으신 후에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강림하셔서 그의 공사역을 이룰 수 있게 준비시킨 것처럼, 이제 성령께서 또한 그의 제자들(사도들) 위에 강림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사역을 잘 할 수 있게끔 준비시킬 것이다. 이처럼 누가-행전에서 성령은 예수의 사역과 사도들의 사역의 원동력으로 제시되어진다. 결론적으로 누가-행전에서 성령은 예수와 사도들의 영성의 원동력으로 제시되고 있다.

누가에서 예수의 이러한 영성은 선교적 영성(잃은 자를 찾아 구원함)과 평등과 사랑의 실천적 영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본다. 특히 눅 4:18-19의 언급처럼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 하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오셨다. 누가가 보여주는 예수의 영성은 결코 평등(이방인; 사마리아인; 여인; 세리와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과 사랑의 실천 즉 부(富)의 사용(부의 사용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과 많은 교훈)까지 나아가고 있음을 본다. 이점에 대해서는 김경진 교수의 논문인 ‘누가신학의 제자도와 청지기’(1996: 솔로몬)를 보라.

3) ‘광야의 사람’, ‘수난 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마가)
누가가 보여주는 예수님의 기도의 영성이 마가에서도 어느 정도 잘 나타난다. 그러나 마가는 누가와는 달리 중요한 사건들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오히려 광야 혹은 한적한 곳(e;rhmoj)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점은 ‘광야의 그리스도’(Mauser 1963)로서의 예수의 영성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광야’는 마가복음의 도상학(iconography)의 중요한 장소로서 마가의 예수(Marcan Jesus)의 영성을 규정하는 주된 배경이다.6) 마가복음의 주된 모티브로서 ‘광야’(e;rhmoj)7)는 막 1:2-3, 12-13; 1:35, 45; 6:31-32, 35; 8:4에 반복하여 언급되고 있는데 마가는 ‘광야’를 예수의 사역의 중심장소로 제시한다. 막 1:2-3에 언급된 광야에서의 ‘주의 길’은 앞으로 예수가 걸어가야 할 메시아의 길(Marcus 1992:29이하)로서 예수는 ‘광야의 사람’으로 그 길을 걸어가야 할 운명이다.

마가복음에서 ‘광야’는 출애굽의 광야에 대한 회상(출 18:21; 민 27:17)과 더불어 새로운 출애굽의 광야에 대한 소망(호 2:14; 겔 20:35-38; 34:5; 사 40:3; 48:20-21)의 구약적 배경과 잘 어우러져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계시가 광야에서 시작된 것처럼 예수님의 구원사역도 광야에서 시작되고 있다(1:12-13).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공사역은 철저히 광야(에서)의 사역임을 본다. 결국 예수님의 광야의 영성 혹은 광야에서의 주의 길을 가는 영성은 출애굽(exodus) 즉 ‘길 떠남’(evk + o[doj)의 영성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점은 예수님의 광야시험과 그의 한적한 곳에서의 사역과 삶을 통해 잘 제시되고 있다.

막 1:12의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의 언급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광야시험의 기사는 앞으로 있을 예수의 공생애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전쟁)을 통과하는 것으로서 이 시험의 승리는 한적한 곳에서의 기도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마가는 제시한다. 특히 예수님의 광야에서 시험받으심은 예수님의 지상생애가 광야의 삶을 사는 것임을 예시하는데 이것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삶을 통해서 보여준 대로 메시아 역시도 광야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사람임을 암시해 준다. ‘광야의 생활’로 비유된 예수님의 지상생애는 하나님의 뜻(수난의 길)을 순종하는 삶을 말한다. 이 광야의 길에는 사탄의 시험(유혹/싸움)이 있다. 이 광야의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가 걸어가야 할 메시아의 길에 ‘사람의 일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막 8:33) 순종의 시험이다. 특히 구약에서 ‘광야’는 저주의 장소, 악한 영들이 방황하는 곳, 그리고 불순종으로 인한 죽음이 있는 곳으로 묘사된다. 성령이 이곳으로 예수를 능동적으로 강하게 이끌어 감으로써 예수님은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순종을 통하여 광야의 길을 통과해야 할 ‘광야의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길을 통과하기 위해 예수는 ‘한적한 곳’(광야[e;rhmoj])에서 기도의 씨름을 하신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 나가(cf. 7:24; 10:1) 한적한 곳(e;rhmoj)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심”(1:35);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e;rhmoj)에 계심”(1:45);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e;rhmoj)으로 가심”(6:31-32);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14:32-42). 산에서 홀로 기도하시는 모습(6:46-47)도 이 부류에 속한다(Crockett 1988).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걸었던 불순종한 길을 걷지 않고 순종의 길을 걷기 위해 고독한 기도의 씨름을 한다. 한 마디로 ‘길 떠남’(exodus)의 예수의 영성의 원동력은 바로 한적한 곳(광야)에서의 기도하는 삶이다. 결국 기도를 통하여 예수는 이적적인 능력과 함께 대속적 수난의 그리스도로서의 삶(광야에서의 주의 길)을 이루심을 본다. 특히 수난의 길을 걸어가신 승리의 원동력이 바로 이 기도의 삶인 것을 마가는 강조한다. “기도 외에는”(9:29).

특히 막 1:35-39의 모습은 마가의 예수(‘광야의 사람’ 예수)의 영성 이해에 주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날은 ‘안식일이 지난 첫 날 아침 이른 새벽’이다. (오늘로 말하면 주일 새벽이다.) 이 ‘이른 아침 새벽 미명에’(prwi> e;nnuca li,an) 예수님은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다. 여기 ‘일어나 나가’(avnasta.j evxh/lqen)의 표현은 그의 사역의 새로운 전환을 의미한다(cf. 7:24[일어나 떠나]; 10:1[일어나 나가]; cf. 2:14). ‘안식일이 지난 첫날(부활)의 새벽 여명’을 바라보면서(cf. 16:2[li,an prwi> th/| mia/| tw/n sabba,twn], 9[prwi> prw,th| sabba,tou]) 아직도 어둠이 깔려있는 시간에 무리의 세속적 요구(사람의 일)를 뿌리치고 복음전파의 사명의 길(혹은 수난의 길)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의 씨름’을 하는 모습은 우리의 영성에 커다란 도전이 된다. 비록 오해와 수난의 어두운 길을 걸어가도 ‘부활의 새벽의 여명’(16:2)을 바라보는 이 시간에 ‘한적한 곳’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의 씨름은 이 모든 어두움(시험)을 이기는 능력의 원천(지성소)이 된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겟세마네 기도(막 14:32-42)에서 가장 극명하게 입증되었다. 시험에 빠지지 않게 간절히 기도하신 예수님은 기도가 끝난 후에 당당하게 수난을 직면한다(41-42절). 결국 예수님의 이러한 영성(안식’과 ‘기도’의 재충전의 시간)은 그를 따르는 제자의 삶(특히 목회사역)에서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8:33)하고 주의 길을 따르게 해주는 위대한 전환점(kairos)의 시간으로 제시된다.

마가복음에서 기도는 능력과 수난의 삶 사이에 존재하는 메시아의 길과 제자의 길의 원동력이 된다. 확실히 한적한 곳에서의 기도는 마가복음의 영성(예수의 영성)의 원동력이다. 기도를 마친 후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를 따라서 곁길로 나아감이 없이 자신이 걸어가야 할 사명의 길(“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로 담대히 결단하며 나아간다(38절; cf. 14:42). 구약에서 ‘광야’는 불순종한 세대에게는 유혹과 불평과 방탕과 파멸과 죽음의 장소이지만 그러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과 영광을 경험하는 신뢰의 장소다(cf. 출 16:10-12).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광야의 길(성령에 이끌리어 기도하며 가는 길)은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 된다. 이 길에 하나님의 현존이 있고 능력과 영광이 있다. 예수는 지금 광야의 새 백성의 대표자로서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 우리 역시도 이 예수를 따라 새 백성으로서의 그 길(제자의 길)을 가야 한다.

특히 이 광야에서의 기도하는 예수의 영성은 수난의 메시아의 길을 걸어가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Crockett 1988:124 참조). 이점은 그의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를 통해 잘 드러난다. 그의 기도는 사단의 시험을 이긴 기도(광야시험의 예)로서 이것은 모든 시험(‘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보여준 사단, 환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에서 승리하는 원동력(막 14:38)으로 제시된다. 특별히 수난의 시험을 이기는 비결이 바로 이 기도에서 나오는 것임을 마가는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를 통하여 잘 보여주는데 예수께서는 기도를 마친 후에 언급된 41-42절의 표현을 보면 그가 수난을 담대하게 직면하는 것을 본다. 결국 예수는 기도 후 그가 걸어가야(영어 must의 의미인 헬라어 dei에 유의) 할 수난의 운명의 길(막 8:31; 9:31; 10:32-34)로 자발적/능동적으로 나아가 그 모든 수난(능욕/침 뱉음/죽음)을 다 당하신다. 한 마디로 예수가 걸어가야 할 ‘주의 길’은 수난의 길이다.

마가복음의 예수의 영성은 섬김과 수난(자기희생)의 영성(막 9:30-37; 10:32-45, 특히 10:45)이다. ‘수난의 종’(suffering servant)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은 마가복음의 예수의 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마가복음의 장르를 ‘확장된 서론을 가진 수난기사’(passion narrative with an extended introduction)로 주장한다. 그의 공생애의 시작부터 수난의 그림자(1:14; 3:6)가 드리워져 있고 자신의 수난의 예언(막 8:31; 9:31; 10:32-34)처럼 예수는 수난의 목적지인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간다. 특히 부활기사가 없는 것은 이점을 잘 반영한다. 이 수난의 영성은 다른 사람을 위한 섬김과 자기희생의 사랑의 영성으로 제시되고 있다. 특히 마가복음에서 인자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자기 자신을 많은 사람(의 죄)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막 10:45)은 예수의 영성이 철저히 섬김과 자기희생과 사랑의 영성임을 알게 된다. 병자들을 보시고 그들을 민망히 여기시고 그들을 고쳐주신 모습(1:41)이나 먹을 것이 없어 목자 잃은 양과 같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먹이신 모습(6:35이하)은 주님의 긍휼의 영성을 잘 보여준다. 마가에 의하면 이 섬김과 수난의 예수의 영성은 또한 그의 제자들이 따라야할 제자도의 영성(8:34-38; 9:33-50; 10:42-45)으로 제시된다.

2. 바울의 영성

이미 앞에서 영성이란 정의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하여, 신자들의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과의 의식적인 관계에 의하여 보여진 모든 인간 활동”이라는 Sheldrake의 견해를 통하여 이해한 것처럼 바울의 영성 또한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2)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하여 3) 몸된 교회(공동체)내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바울의 영성은 예수의 영성과 결코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바울의 영성의 기원은 물론 그가 디아스포라 유대인 혹은 더 나아가 가말리엘 문하의 바리새인으로서의 삶(유대적 영성)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겠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메섹 사건’(Damascus event) 혹은 ‘그리스도의 사건`(Christ event)으로부터 시작한다. 사실 바울의 영성은 바로 이 다메섹 사건을 시발점으로 하여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following F. F. Bruce). 이런 점에서 필자는 다메섹 사건에서 주님을 만난 사건이 바울 영성의 시발점이고 핵이며 축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바울의 신앙 간증(사도행전의 법정기사들)이나 고백(바울서신의 자서전적인 고백)은 언제나 여기서 출발하고 있음을 본다. 이점에 있어서 바울의 영성은 그 시작부터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성(Christ-centric spirituality)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1)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 십자가의 영성(Cruciformed spirituality)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의 바울 영성의 모습은 그의 전체 서신들에서 나타나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특히 고린도 전서를 통하여 강조된 바울의 영성이기도 하다.

그의 서신들에 언급된 대로 바울의 믿음(갈 2:20)도, 그의 삶의 목표와 가치기준(빌 3:7-12; 롬 14:7-8)도, 그가 전하는 복음의 중심 내용(고전 1:17-2:2; 골 1:26-29)과 사역자(사도)로서의 모습(‘그리스도의 일군’[고전 4:1]; ‘수난 받는 종’으로서의 사도 바울의 모습[고전 4:9-13; 고전 9장; 11:1]) 뿐 아니라 성도들의 신앙과 삶의 목표(롬 8:28-29), 그리고 인간관계의 위대한 모범(롬 15:5-7; 빌 2:5-11)도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놓여 있다. 한 마디로 바울의 영성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예수 미드미’, ‘예수 따르미’, ‘예수 달므미’로서의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이다. 이러한 바울의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은 다음과 같은 그의 고백 속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 바울의 믿음(삶)의 중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 바울의 삶의 목표와 가치기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7-12).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 바울의 사역의 목표: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6-29).

- 성화의 목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8-29).

- 바울의 삶의 모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의 바울의 영성은 무엇보다도 복음전파와 삶(사역)의 모습에 있어서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영성’(cruciformed spirituality)으로 나타났다. 특히 헬라의 종교적 영향아래에서 황홀한 영적 체험과 말과 지식과 구변과 지혜를 자랑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 그의 선포의 중심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 즉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고전 1:7-2:2)가 그의 선포의 중심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도로서의 자신의 모습은 그 당시 순회 전도자들(거짓 교사 혹은 거짓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보여주고 주장하는 모습인 교회 위에 군림(왕 노릇)하거나 권리(삯)만을 주장하는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인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모습(고전 4:8-13)이 사도의 표(mark)라고 주장한다. 특히 바울은 자신이 자유자이며 사도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만 복음과 구령을 위해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절제(참음)하거나 포기(희생)하는 종(섬김)의 삶을 택하였다(고전 9장). 우리는 여기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종의 몸으로 오셔서 자기를 비우신 주님의 모습과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절제하고 포기(희생)하는 바울의 모습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이시지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된 모습과 바울이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와 같이 되고,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고, 약한 자에게 약한 자와 같이 된 모습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한다.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으로 사는 삶은 바울이 만났고 배웠던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죄인이며 포행자인 자신을 위하여 종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의 모습이 바울의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고 사도 바울은 이 모습을 자신의 복음사역의 본(本)으로 삼고 행동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복음(구령)을 위하여 자기를 비워는 일 즉, 자기의 자유와 권리를 절제하거나 때론 포기하면서 까지 복음을 위하여, 영혼구원을 위하여 종의 모습을 취하며 애쓰는 바울의 모습(고전 9:1-23)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비워 종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며 사셨던 모습(빌 2:6-8)을 연상하게 된다. 이러한 바울의 희생적인 종의 삶의 모습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는 삶의 결과(고전 11:1)이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의 ‘약함의 사도’에 대한 바울의 변증(고후 10-13장) 역시도 바로 이 주님의 모습을 따르는 모습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도는 그의 복음전파의 근본 내용일 뿐만 아니라 그의 삶(사역)의 위대한 모범이다.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을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영성’(cruciformed spirituality)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바울의 영성은 그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순간(중생의 순간)에서부터 그의 믿음과 신학과 삶과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은 바울 영성의 기원이고 목표이고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바울 영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2) ‘성령 안에서 삶’으로서의 바울의 영성(“Spirit-uality”)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에서 본 것처럼 바울의 영성 또한 결코 성령을 떠나서 논의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더불어 성령은 바울의 영성의 중심에 있다. 바울의 영성에 대한 글에서 Fee는 “바울의 영적 삶과 사역 그리고 교회에서의 삶에 있어서 성령의 중심된 역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바울[의 사역과 영성]을 이해할 수 없다”(2000:47)는 말로 이점을 잘 지적하였다. 이런 까닭에 Fee는 바울의 영성을 ‘성령 안에서의 삶`(life in the Spirit)으로 서술하면서 바울의 영성(spirituality)을 “Spirit-uality”(Fee ibid)로 표현한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Fee(2000:37)는 우리가 바울서신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성령이 모든 신자의 삶과 경험의 중심요소라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Fee는 역사적 개신교의 중심주제인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가 바울 신학의 중심주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삼위]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이 그 중심을 이루는데 여기에 성령의 사역(갈 4:4-6; 딛 3:5-7)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신칭의’를 중심주제로 여기는 갈라디아 서신에서도 성령은 개종(갈 3:2-5)에서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크리스천의 삶(갈 5:13-6:10. 이 단락에서 특히 5:16, 18, 22-23, 25, 6:8을 보라)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영적인 사람 혹은 성령의 사람으로서 불려지는 신자의 삶이란 성령 충만한 삶, 성령을 좇아 사는 삶,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사는 삶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에게 있어서 영성이란 곧 ‘성령 안에서의 삶’을 의미한다고 해도 가언이 아니다.

성령의 역할은 개종(중생)과 신자의 지속적 삶에서 뿐 아니라 복음전파에 있어서도 언제나 바울 사상의 중심에 놓여있음을 본다. 고전 2:3에서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믿음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통해 주어지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이 아니고서는 결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사정)을 알 수도 없고 전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전 2장). 특별히 자연인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役事)로 되어지는 것임을 바울은 주장한다(6-16절).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은 중생의 동인(動因)일 뿐만 아니라 능력 있는 복음전파와 신자의 거룩한 삶(롬 8장)의 위대한 원동력이다.

바울의 영성에 있어서 성령의 중심된 역할은 결코 그의 기도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즉, 성령 안에서의 바울의 영성은 기도 안에서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미 앞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영성에서 살펴보았던 것과 같이 기도와 관련된 성령의 중심된 역할은 바울의 영성에도 동일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 경우 기도는 바울 영성의 중심부로부터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3) 기도의 영성8)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난다. 누가복음에 묘사된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처럼 기도는 바울 사역의 핵심(살전 1:2-3; 살후 1;3; 고전 1:4-7; 엡 1;16이하; 빌 1:3-11; 골 1:3, 9-12)을 이루는 모습이다. 복음전파의 예비(필수)사역으로서 그는 자신의 교회(후원자들)에게 복음전파의 기회 혹은 문을 위해 기도를 요청하는 것(엡 6:19; 골 4:3; 살전 5:25; 살후 3:1-2)을 자주 본다. 특히 지속적인 기도는 사도 바울의 사역과 삶의 본질적인 모습(살전 5:17; 엡 6:18; 빌 4:6-7; 골 4:2; )이지 그의 교회를 위한 간구의 일환만은 아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영적인 능력과 충만한 삶은 기도로부터 나오며 기도는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지속시키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성도간의 관계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특히 사역자(사도) 바울과 그의 공동체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기도이다. 특히 바울의 기도는 대부분 서신서 서두의 감사의 단락 가운데 언급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그들의 믿음과 복음을 받아들임 그리고 형제사랑 즉 복음에 참예한 것(구제 혹은 연보)에 대한 감사가 그 중심을 이룬다. 특히 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에 대한 끊임없는 기억과 감사의 기도(살전 1:3)는 바울의 영성이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성도를 향한 바울의 기도의 목표는 그들의 거룩함과 온전함에 있음을 본다(살전 5:23). 결론적으로 기도가 빠진 바울의 영성이란 결코 생각할 수 없다.

4) 공동체 중심의 순결과 연합과 나눔과 절제와 섬김과 세움과 질서를 강조한 바울의 영성
앞에서 바울의 영성이란 ‘성령 안에서의 삶’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 ‘성령 안에서의 삶’으로서의 바울의 영성은 단지 개인의 경건과 영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Fee(1994:856)가 지적한 대로 “교회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하나님의 백성과 개인사이의 이분법은 바울의 경험과 신학에 관한한 잘못된 것이다.” ‘성령 안에서의 삶’으로서의 바울의 영성은 결코 공동체성을 이탈하거나 무시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공동체(하나님의 교회) 내에서 유지되고 공동체를 세워주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고린도 서신에 나타난 바울의 영성이다. 우리는 고린도 전서를 통해 바울의 공동체성이 강조된 영성[과 윤리적 영성]을 만난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특별하신 역사로 인해 많은 영적 은사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헬라적 사조(철학/문화/종교)의 영향으로 신속히 세속화의 길을 걸어갔다. 특히 바울이 떠난 후에 고린도 교회는 달변과 세속적 지식을 강조하는 헬라철학과 이적과 황홀한 체험과 은사를 강조하는 헬라의 신비종교와 거짓 순회전도자들의 영향 아래 구변과 지식과 지혜와 은사들을 자랑하면서(1:5; 12, 14장) 시기와 분쟁과 파당이 일어났다. 즉 고린도 교회는 영지주의적인 형태의 모습이나 영적 열광주의와 은사주의의 초-영성에도 불구하고 시기와 분쟁과 파당(1:10-11; 3:3; 11:18; 12:25)이 있었고 더 나아가 자랑과 교만과 멸시와 방탕과 방종과 무질서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영적 방종과 방탕과 무질서의 모습은 공동체적인 교회의 본질과 공익과 세움을 위한 성령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였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바울은 서신을 통해 교회가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3:16-17)이며, 누룩 없는 떡 덩어리5:6-8)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12:12-27)임을 제시할 뿐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은 공익(12:7)과 세움(14장)을 위하여 주어진 것임을 설파한다.

고린도 교회는 외관적으로는 수퍼․우퍼의 초 영성(ultra-spirituality)을 자랑하였지만 교회 내에는 인간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파당이 형성되었고(1:11-17) 또한 근친상간의 음행(5장)과 행음(6:12-20)이 묵인되었고, 사소한 세상사로 인하여 형제간 법정송사(6:1-11)가 있었으며 지나친 금욕주의로 인하여 부부간 별거와 이혼과 독신의 문제(7장)가 발생하였고, 우상 제물로 인하여 교회 내에 갈등(8, 10장)이 있었으며, 여자들과 남자들은 영적인 일(기도와 예언을 함)에 가담한다고 하여 남여관계의 창조질서(남여구별)를 무시한 채에 머리를 [여자는] 빡빡 밀거나 [남자는] 머리를 길게 기르는 일로 부도덕한 방종의 행동을 교회에 파급하였고(11:1-16), 또한 주의 성찬에서 부자는 가난한 자들과 함께 성찬을 들기보다는 먼저 주의 만찬 전에 자기들의 만찬을 차려 놓고 즐기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로 주의 몸을 분변하지 못하는 일을 범하였고(11:17-34) 영적 은사(특히 방언)를 받았다고 하여 그것을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은사)을 멸시함으로써 예배 시에도 질서 없이 무분별하게 드러냄으로써 예배(공동체)를 어지럽게 하는 일을 범하였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모습은 영적 졸부의 모습으로 결코 성숙한 영성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어린애와 같은 미숙한 영성이며 육적 영성이며 세속적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로서 교회가 어떤 모습과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잘 제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성령 안에서의 삶’으로서의 영성은 언제나 공동체 안에서 공익과 세움을 위하여 시행되어야 하며 질서와 화평을 위하여 시행되어야 한다. 결국 ‘성령 안에서의 삶’으로서의 바울이 제시하는 영성은 시기와 분쟁과 파당과 자랑과 교만과 자기 유익만을 위하여 나타나는/나타내는 영성이 아니라 교회의 순결(정결)과 연합을 위하여, 다시 말하면 교회의 공익과 세움을 위하여 나아가는 보다 성숙한 영성(‘장성한 자’의 영성=사랑의 영성)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영성과 바울의 영성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바울이 말하는 ‘성령 안에서의 영성’은 나뉨(dividing)의 영성이 아니라 나눔(sharing)의 영성이며 나타남/나타냄(manifestation)의 영성이 아니라 세움(up-building)의 영성이며 무질서의 영성이 아니라 질서와 화평의 영성이며 쟁취함과 주장함의 영성이 아니라 절제와 섬김과 자기희생의 영성임을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와 같은 공동체성이 상실된 영성은 어린아이와 같은 미성숙한 영성이다.

5) 윤리적 영성
끝으로 고린도 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영성은 언제나 윤리적 면(거룩성)을 상실하지 않고 있음을 본다. 고린도 교회는 영적인 황홀한 체험들(방언과 찬송시)을 하고 영적 일(성찬과 기도와 예언하는 일과 예배)에 종사하여도 삶은 여전히 세속적이고 육적이고 비도덕적인 모습이었다. 즉 그들은 영적 지식이 있다고 하면서 음행(근친상간과 행음)에 쉽게 가담하였고, 사소한 세상적인 이익에는 법적 송사를 즐겨하였으며 절제 없는 영적 자유와 권리를 구가하였고,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돌봄과 나눔이 없는 성만찬을 즐겼으며, 화평과 질서와 도덕성을 상실한 채에 영적 활동에만 치우쳤다. 한 마디로 이러한 영성은 윤리 없는 거품 같은 영성이다. 이러한 모습은 영성의 오용이고 영성의 남용이다. 겉으로는 영적인 일에 열심히 가담하면서도 삶의 스타일은 세속적이고 육적인 방종과 방탕과 무질서의 삶이었다. 영성과 윤리가 엇박자를 이루는 삶(세속적 영성의 삶)이 바로 고린도 교회의 영성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영성은 언제나 거룩함(순결)을 잃지 아니하였고 자기 절제와 봉사와 희생이 있었고 소위 약한 자나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와 돌봄이 있었으며 질서와 화평이 강조되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이루신 영성이며 성령이 열매 맺기를 원하는 영성(갈 5:13-6:10)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영성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본받았고 거룩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의 열매(갈 5:22-23)를 맺는 일에 충실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계명)이 성취되어짐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영성으로서 이 경우 바울의 윤리적 영성은 결코 계명(도덕법)을 무시하지 않는다(고전 9:6-10; 롬 13:1-10). 특히 성령 안에서 사는 삶과 윤리의 관계(소위 직설법[indicative]의 문제)가 바울 영성의 중심을 이루면서도 바울의 영성은 윤리적 삶에 있어서 순종의 강조(바울 윤리의 명령법[imperative]의 문제)를 도외시 않는다.9)


결국 바울의 영성을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중심적인 영성’이며, ‘성령 안에서의 삶의 영성’이며 ‘기도하는 영성’이며 ‘공동체적 영성’이며, ‘윤리적 영성’임을 본다.

<나가는 말>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예수의 영성과 바울의 영성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영성의 현주소를 파악하고 우리가 어떠한 영성을 지녀야 할지를 배웠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의 영성(어린아이와 같은 영성)과 바울의 영성(장성한 자의 영성)을 비교하면서 우리의 영성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예수의 영성은 우리의 영성의 원천이고 잣대며 모델로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예수가 보이신 영성은 우리의 영성의 가장 기본적이고 완벽한 품새를 형성하기에 충분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임마누엘의 삶)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완벽한 영성의 모델이다. 그리고 기도와 성령의 인도와 충만을 받는 예수의 영성은 우리의 영성의 원동력이다. 특히 그의 광야의 자기부정의 영성과 내면적 성찰의 영성과 실천적 영성은 우리의 영성이 무엇을 지향해야 할 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교범이다. 이어 예수님의 영성의 모범을 따른 바울의 영성은 우리의 영성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이루어 질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견본과 같다. 특히 공동체성과 윤리적인 면에 대한 바울 영성의 모습은 영성회복의 방향을 적절히 설정해 준다. 무엇보다도 고린도 교회의 세속적, 육적, 어린아이와 같이 들뜬 거품 같은 영성을 돌아보면서 여기에 대한 바울의 영성은 오늘의 한국 교회가 처한 영성의 위기에 훌륭한 처방이 된다. 소위 기도하고 방언하고 신유하고 예언하는 일에는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실제의 삶은 파당과 분쟁과 다툼, 음란과 방종과 방탕, 자기주장과 자랑, 교만과 멸시의 모습이 우리의 영성이라면? 특정 지도자에 매달려 있는 교조적 교회정치, 지역할거주의. 개 교회주의. 성장지상주의. 획일화되고 극단화되고 계급화된 공동체의 모습이 우리의 영성의 현주소라면? 소위 신령하다는 영적 일에는 커다란 관심을 기울여도 윤리적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는 교회의 모습. 갈등과 대결구도의 보수와 진보간의 힘겨루기. 성적 문란과 사치와 방종. 약자와 가난한 자들의 박탈감과 상실감. 이 모든 영성의 위기는 결국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자들의 외침과 회상에서 보는 대로 예수와 바울의 영성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는 달리 소망이 없다. 오직 예수와 바울의 영성으로 다시 돌아가자.

<미주>
1) 표층적 근대화의 병폐에 대해서 김영민의 책 ‘지식인과 심층근대화’(1999)의 제 2장을 보라.
2) 여기서 ‘예수의 영성’이라고 했을 때 예수의 성육하심 즉 인성의 관점에서 이해된 면을 말한다. 그 이유는 예수의 신성(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굳이 예수의 영성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점은 특히 영성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하여, 신자들의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과의 의식적인 관계에 의하여 보여진 모든 인간 활동”(Sheldrake 1998:35 in Roxburgh 1999:131)이라고 정의한 Shelrake의 견해나 "근본적으로 영성을 충만한 의미에서 인간됨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한 Macquarrie(1992:40)의 견해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견해는 더욱 타당성이 있다. 김영봉 역시도 예수의 영성은 인성의 부분에서 탐구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1997:22-23).
3) 이점에 대해 Doohan은 마태복음을 얌니아 바리새주의(Jamnian Pharisaism)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고 있는 마태의 청중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올바른 영성을 회복하려는 것으로 이해한다(1992:31).
4) 마가 역시도 예수님의 내면적 영성을 강조하는 데에는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마가에 따르면 참된 정결(거룩)은 내면적인 문제 즉 마음의 문제로 이해한다(막 7:21-23).
5) 누가-행전에 나타난 기도의 연구에 대해서는 Wilhelm Ott의 책인 Gebet und Heil: Der Bedeutung der Gebetsparanese in der lukanischen Theologie(1965)로 시작하여 Oscar Gerald Harris의 미국 벤드빌트대학교 박사학위논문인 Prayer in Luke-Acts. A Study in the Theology of Luke(1966); L. O Harris의 Prayer in the Gospel of Luke(1967); P. T. O`Brien의 Prayer in Luke-Acts(1973); Stephen S. Smalley의 Spirit, Kingdom and Prayer in Luke-Acts; Allison Trite의 Some Aspects of prayer in Luke-Acts(1977)과 The prayer Motif in Luke-Acts(1978); Stephen F. Plymale의 Luke`s Theology of Prayer(1990)과 그의 책, The Prayer Texts of Luke-Acts(1991); 끝으로 가장 최근에 튜빙겐에서 발행된 David Michael Crump의 책인 Jesus the Intercessor: Prayer and Christology in Luke-Acts(1992)가 있다. 이 주제에 대한 연구의 역사적 고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크룸프(Crump)의 책 2-11쪽을 보라. 그리고 신약에 나타난 기도에 대한 연구로서는 Oscar Cullmann의 Prayer in the New Testament(1995[1994])와 H L Doohan의 Prayer in the New Testament: Make Your Requests Known to God(1992)를 보라.
6) Crockett(1988:125)는 마가복음에서 광야를 자기부정 혹은 자기희생의 제자도의 참된 모델을 확증해 주는 장소로 제시한다.
7) 마가복음에서의 광야의 모티브에 대해서는 Mauser 1963:103-143과 Marcus 1992:23-26을 보라.
8) 바울의 기도에 대한 연구로서는 D A Carson의 책인 A Call to Spiritual Reformation: Priorities from Paul and His Prayers(1992: Baker)와 O Culmann의 책(1994) 69-88쪽 그리고 H L Doohan의 책(1992) 51-59쪽을 보라.
9) 바울 윤리의 직설법과 명령법의 긴장관계에 대해서는 Dennison 1979:55-78; Parson 1995(1988):217-247; Furnish 1978:207-241; Ridderbos 1975:253-258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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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