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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율법, 유대인] / E.P. 센더스

에반젤(복음) 2021. 7. 30. 12:29

[바울, 율법, 유대인]

/ E.P. 센더스

 

 

성경의 중심을 무엇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늘 인간 본인이 중심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이 보는 시각도 항상 잘못 정렬되어 있다. 성경을 통해서 신학의 체제를 정립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오류는 생기기 마련이다. 모든 오류는 한 결 같이 잘못된 중심 잡기에서 비롯된다.

 

죄인으로 출생된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 중심적 사고방식은, 자신의 꿈과 포부와 정복심을 실현시키는 방향으로 정조준 된다. 이 인간이 무슨 활동을 하고 있더라도 중심적 사고방식이 강요하는 소원을 무시하지 못한다. '율법'이라는 주제를 거론해도 마찬가지이다. 율법이 무엇이며 율법이 왜 있으며 이 율법을 가지고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를 탐구하면서도 결국 기대하고 있는 점은, 자아를 전지전능한 쪽으로 변모시키는 일이다. 보다 많이 아는 자아가 됨으로 자아의 존재적 의미가 더욱 더 강해진다고 인식하고 싶은 것이다. 즉 자아는 뭐든지 많이 알아 나아감으로서 모든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 주체자로서 제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이 죄에 오염된 사고방식의 일부임을 놓치기 쉽다.

 

이 책의 저자는, 율법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그 중심 사상을, 율법의 활용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얼마나 잘 이루었는가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177P) 라는 말을 궁극적으로 남기기 위해서 율법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는 성경을 매우 냉정하게 보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무척 애를 쓴다. 객관적으로 견해와 주해를 통해 정확한 율법관이 나름대로 형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이미 죄로 오염된 상태의 이해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선행하지 않은 채 논리를 시작했다. 객관적이라든지, 정확한 주해, 공평한 해석 같은 것이 죄에 의해서 얼마나 눌려있으며 변질되어 있음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성경에서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죄'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을 분석, 조사하게 되면서부터 비로소 죄의 영향권과 자신이 죄인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그 죄에 대해 대비해 나가려는 방책을 꾸밀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여기는 사람같은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즉 성경에서 '죄'라고 기재된 문자를 해독하려고 덤버드는 그 인간 자체가 이미 죄에 물들어 있다는 점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죄'라는 대목이든지 무슨 대목이든지 그것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 속에는 어느 정도 순수성이 남아 있어 조심스럽고 또한 겸손하게 해석해 나가면 나은 해석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라는 것을 대단히 오해한 처사이다. 성경은, 인간이 성경을 대하기 이전부터 크게 잘못된 생각과 오해를 품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인간에 의해서 읽히도록 되어 있는 책이다. 즉 성경이 말하는 중심 사상과, 인간이 성경을 전체로 조명한 결과로 비로소 그 안에 중심 사상을 끄집어 낸 그런 중심 사상과는 엄청난 차이나 대치된 입장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은 알게 된 것은, 유대인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이 살해당한 사건을 기준으로 한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이해는, 예수님이 죽음을 그토록 원했던 그 유대인의 사고 방식 속에 같이 동참되어 있어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저자가 본 책으로 쭉 나열한 그러한 율법관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단지 차이가 나는 것은, 그들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이용 가치를 생각한 반면에 저자는, 예수를 이용한 것뿐이다. 인간의 죄악에서 창작해 낸 예수가 진짜 예수님을 살해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의 사상이 어떠한 것인지 상관없이 너무나도 확실하고 분명한 것은 그들이 아담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즉 죄의 권세 안에 놓여 있는 여느 인간과 같은 인식과 통할 수 있는 사상을 지녔다. 왜냐하면 같은 인간이니깐! 즉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죽인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마치 그 유대인의 범주 밖으로 벗어나서 성경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이 얼마나 큰 판단 착오인가! 그런데 저자는 이 판단 착오에서 나온 죄관을 가지고 성경의 죄와 율법과 의를 해석하려고 시도했다. 마치 유대인에게 예수님의 살해범을 재판하라고 맡긴 꼴이 된다. 제대로 세상을 판단 할 수 있는 자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에 의해 사람 취급 못 받던 예수님을 믿던 이방인이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1-12)

 

본 자손이 무시하게 된 것은 이방인들의 예수 이해가 그들 보기에 너무나도 무시할 만 했기에 무시한 것이다. 단순히 그들이(이방인들이) 저질이고 못 배우고 신학에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고 함부로 율법을 모독했기 때문에 무시한 것이 아니라, 왜 자기네들을 거치지 않고 바로 구원받는 일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네들을 제쳐놓고 제외시키고 구원 역사를 따로 이루어 나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 말씀을 아무리 이상스럽게 해석해 놓았다 하더라도 그럴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 있어 예수님의 모든 일은 이들 유대인을 공박하는 것이고, 그들의 해석을 전부 다 뒤엎어 버리는 해석을 남기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적들이고 그리고 십자가 사건이다. 즉 십자가 사건이란, 인간들이 문제 해석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지식을 일시에 부정해 버리는 절정의 지점에서 나타난 계시이다.

 

그런데 본 책의 저자는 이 중차대한 십자가 사건을 그냥 일시적으로 지나치면 그만인 에피소드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즉 후에 나타날 보다 확대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전단계로서의 역할을 담당한 사건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해석 토대에 관한 사건인 줄 모르고 있다. 성경에서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기 이전에 먼저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이미 해석의 목표와 기준과 확립시켜 놓게 만든 그 원천적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저자는 너무나도 깜깜하다. 이 깜깜한 무지로 인해 저자는 전반적으로 큰 오류를 남겼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율법관이 예수님을 살해한 그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으로 수납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즉 그의 율법관으로 인해 또다시 예수님을 살해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전제없이 무전제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자, 혹은 신앙의 눈을 가지고 성경을 보자!"라고 외쳤던 자들이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무전제나 신앙의 눈을 죄악의 극치라고 보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번도 자신이 주님을 해석해 낼 수 없을 정도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신앙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하나님 아들을 죽이는 동기로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때 당시 유대인들로 모르고 있고 오늘날 소위 자칭 신자라는 자들로 모르고 있다. 즉 십자가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자꾸만 십자가 사건을 지나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본래는 천성이 그들의 관심사를 십자가 사건 안에만 머물도록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 동기가 무엇인가? 도대체 이들이 십자가 사건의 영역을 급히 떠나서 또 무엇을 얻고자 한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신성화이며 전지전능성의 참여를 노리고 있다. 겉으로는 죄인 입네, 혹은 부족 합네 하지만 실질로는 자아 극복을 통한 초인 됨을 추구한다. 물론 마음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악마의 하수인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악마가 이런 자의 마음에 주관하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마저 극복하고 직접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고자 하는 의도로서 드러난다.

 

인간은 왜 법이라는 것을 버리지 못할까? 왜 그토록 법을 원할까? 왜 복음+법으로서 하나님과 상대하려고 할까? 그것은 그들의 영역은 예수 그리스도까지만 도달되는 것에 멈추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타고 넘어서 하나님까지 관계를 이어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간들 자신의 영역이 그리스도까지 로만 한정 지어진 것을 이들은 받아 드리려 하지 않는다. 법의 최종 수여자인 하나님의 구획까지 넘보고 있다. 그리스도만이 하실 일에다 그들이 자신들의 참여시키려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동등한 위치에서 직접 하나님 아버지와 상관하려 든다. 이들이 믿는 믿음의 내용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신 일만 들어 있지 않다. 그 안에다 자신의 몫도 포함시키려 한다. 즉 예수 믿고 난 이후에 자신들의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작업까지를 포함시켜서 믿음의 내용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자기중심적인 예수님 살해자들의 생각이었다.

 

저자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단지, 그 당시 예수님과 같이 살았던 그 유대인들의 소행으로만 국한하려 한다. 결코 아담 안에 있는 범인류적으로 공통적 속성으로 보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되니 그 당시 유대인들은 나쁜 자들이고 그 이후에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자청하는 자들에게 그런 의지가 없는 것처럼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십자가 사건은 지나간 약간의 오해 사건에서 멈춰지고 마는 것이다. 성도의 인격 내부에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사건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의 내용과 명백하게 다르다.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라는 말씀과 일치되지 않는다. 구원의 능력 속에 일부, 성도의 선행과 율법 지킴이 함유된 것인 양 여기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얼마나 잘 지켰나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는 말을 결론 삼아 쉽게 내뱉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복음으로 알고 믿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지상에 육체로 계시다면 또다시 달려들어 옷을 벗기고 살해할 자들이다. 그들의 율법에 대한 해석과 본성상 느낌에 대한 예수님이 동의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짓을 할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자기 백성에게 의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그것도 율법 외에 한 의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에게나 차별이 결코 있을 수 없는 의이다. 여자나 남자나 어린애나 어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상관없이 같은 의를 주신다. 왜냐하면 모두 다 같은 생명 안에 한 몸으로 같이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자의 행함이란, 독자적인 행함일 수 없다. 모두 다 한 몸을 이루기 위한 은사적 차원에서의 행함이다. 따라서 한 몸을 이룬다는 점에 의해 그 어떤 정량적, 질적 차이를 이유로 차별 대우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율법이라는 것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심 사상에다, 인간의 행함을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오직 그리스도께서의 행하심만 남아 있어야 한다. 십자가 사건만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다른 사건은 결국 십자가 사건 하나로 종속될 뿐이다. 구약에서 희생 양의 죽음이 언약의 중심을 달려 온 핵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신약에서 십자가 사건의 의의도 마모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의 주장을 반박하기 이전에 먼저 구약의 입장부터 설명되어야 한다.

 

1. 구약에서의 희생양의 입지

 

구약 이스라엘의 등장은, 필히 이방 나라와의 차이 남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다른 나라는 단순히 혈육과 혈통과 가문과 민족의 미세한 갈라짐에서 정립되어지는 반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세워지는 국가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했을 때, 흔히 쉽게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과 인간을 '위함'이라는 목표를 두고 있다고 봐서는 아니 된다. 언약은 그 언약 그 자체를 목표로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애초부터 큰 오류를 갖게 된 것이다. 즉 저자는 생각하기를, 신약이나 구약이나 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정보가 아닌가 하는 의식에 기초를 두고 신학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듯이 하나님을 위한다든지, 하나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체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선에서 그쳐져야 될 문제이다. 저자는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지금 자기 아들의 영화로움에 온통 관심이 가 있다.

 

그런데 소위 신자라는 자들이 하나님 관심사가 어디인지는 헤아리지 못하고 직접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고상스럽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광을 돌리는데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데 어디까지 나아가는가 하면은 하나님께 직접 만나 하나님께 영광이 전달하리라 마음먹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약속이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갈 3:16-17)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구태여 예를 하나 든다면, 사장님이 자기 강아지에게 무한정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아부 잘하는 부하 직원이 사장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장님이 무얼 좋아하는가, 조사해 보았다. 그랬더니 사장님이 자기 집 강아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같이 그 강아지를 좋아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 강아지를 좋아하는 것은 그 부하 직원은 최종 목표가 아니다. 최종 목표는 사장님을 기분 좋게 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하 직원에 대해서 사장님을 격노하신다. 왜냐하면 사장님의 최종 기쁨과 관심은, 자기 아들에게 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하 직원이라는 작자는 사장님이 최종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 강아지를 단순히 중간 과정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사장님의 마음과 그 부하 직원의 마음이 안 맞고 있다. 방향이 정반대이다. 사장님은 마음에 내려져 있는데 그 부하 직원의 마음은 한창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부하 직원은 혼자 착각하고 있기를, "내가 사장님이 좋아하는 강아지를 나도 좋아한다고 했으니 아마 사장님은 나로 인해 마음이 흡족하고 영광을 받을 거야"라고 안심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게 가 있는 것이다. 그 약속을 중간 과정이나 단계로 여겨서는 아니 된다. 이미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기 전이나 따먹고 난 이후나 여전히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 피조물의 한계는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선에서 멈추어진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2)

 

"그는(예수 그리스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5-16)

 

구약에서의 어린 양의 위상은, 인간들로 하여금 중지와 금지의 요구하는 하나님의 입장 표명의 뜻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즉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한 그 실정이, 또한 시내산에서 오직 모세만 불러 올려놓고서도 그 모세와 정면으로 얼굴이 대하지 못하게 하신 그 실정이 여전히 살아 있는 채로 이스라엘과 동행하시겠다는 표현이다. 그리스도까지만 인간이 허용이 되고 그 이상은 그리스도와 하나님만의 관계로 정립될 뿐이다. 그리스도는 분명 성도의 대리인이지 대표자가 아니다. 즉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 단독으로 나설 수 있지만 예수님이 계신다는 편리성 때문에 그 분을 대표로 앞장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는 존재라는 점을 영원히 고정시켜 버리기 위해 천국에 어린 양의 보좌가 영원히 존재한다. 그 보좌에서 가서야 성도는 비로소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고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시범 조교도 아니면 인간의 모범 택시 운전사로서 우리들 앞에 먼저 계신 것이 아니다.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 21:22-23/ 22:1-4)

 

그런데 이방 나라에는 인간이 신을 향한 열정과 사랑을 금지하고 중지할 수 있는 그 '약속'이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인격에 준해서 성의껏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점은 이미 가인의 제사에서 확연히 폭로된 바 있다.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 된 것은 순전히 그 제사가 표출하고 '약속성'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보고 잘 이용하고 잘 활용하라고 던져 준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의 성취와 실현에 전혀 인간들의 힘이 가미될 수 없는 영역임을 분명히 하는 약속이다. 이러한 점은 약속이 성취되어 가는 그 자국과 흔적을 통해서 분명하게 밝혀진다. 즉 국가 이스라엘의 실패와 멸망은 곧 하나님의 약속 실현에 인간이 결코 계약 상대자로 개입될 수 없음을 말해 주는 계기들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약속 안에 담겨 있는 자체적 힘으로 달성되는데 그 힘은 결국 언젠가 하나의 인물로서 세상에 나타난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모든 능력과 자질에 대한 한계성을 드러낸 사건이요 이 한계성은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님의 주도하에 성도 안에서 연이어 폭발되고 있다. 이 십자가의 폭발이 구약에서는 어린 양 제사의 반복으로 이스라엘 국가 내부에 제사 제도로서 심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라는 율법이 지닌 의의를 깨닫지 못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배척했고 급기야 고유의 성전과 제사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살해까지 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2. E. P 샌더스의 주장

 

(1) [서론] 부분에서

 

샌더스의 마음은 그의 다음과 같은 발언 속에 잘 담겨 있다.

 

"베이커와 후버 두 사람 다 '그리스도의 참여'한다는 것이 바울 사상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이 나의 관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 바울에게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사상의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바울 사상의 중심'(나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바울의 '중심적인 확신들')과 '옛 생활에서 새로운 생활로 옮긴 것을 나타내기 위해 바울이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술어'를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후자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싶은데 그것은 율법에 대해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자의 문제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했던 것 중에 많은 것이 내가 말하는 '들어가고(getting)' '머문다'(staying in) 는 구조 안에 있다. 이 구조는, 앞에서 말한 두 개의 주제 이외에도, '들어가지' 아니한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며 '들어갔지만' 바울이 생각하기에 성령 안에서 합당한 삶의 방식대로 행동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것도 포함하고 있다."(22P)

 

무슨 말인고 하니,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바울 사상에 있어 하나의 예비 단계에 불과하며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고, 최종적인 사도 바울의 관심사는 '옛 생활에서 옮겨진 새 생활'에 있다는 것이다. 이로서 저자의 중심 사상은 결코 그리스도 그 자체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그의 관심사는,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계속 머물고 있을 때(staying in)' 어떤 특징을 나타내게 되느냐에 있다. 이러한 판정을 위해서 율법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즉 그는 율법이란 다음 두 가지의 분류 작업을 위하여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고 있다. 이 두 가지 분류를 인하여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등장된다. 첫째 분류는, 당신이 그리스도도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벗어나 있습니까? 에 해당되고 두 번째 분류는,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더라도 성령 안에서의 합당한 삶의 방식대로 삽니까 아니면 합당치 못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를 가능케 하기 위하여 율법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주장이다. 즉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복음을 거론했다는 점이다. 즉 복음이란, 복음 그 자체로서 일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이러한 요구를 빈틈없이 달성하기 위한 예비 작업으로 주어졌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그 자체가 사도 바울의 중심 사상이 될 수 없고, 어떻게 신자가 새 생활을 하는가 이쪽에 사도 바울의 중심 핵심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복음이 중심이 아니라 율법이 중심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31P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바울이 율법이라는 용어를 최소한 두 개의 서로 다른 문맥에서 사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줄 것이라 기대한다. 하나는 사람이 어떻게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들어가는가'를 논의하는 문맥에서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가 율법을 지키면서) 행동하는가를 논의하는 문맥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미 중요한 결론들 중에 하나를 얻었다.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제기된 질문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는 '긍정적인' 진술과 함께 '부정적인' 진술들이 있으며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즉 저자의 주장은, 사도 바울이 이미 복음이 들어 온 시점에 있어서도 어떤 인간이 과연 구원받았느냐 아니 받았느냐를 판정하는 기준으로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이 그 자체로서 미완성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복음이 스스로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데 있어 율법의 틀과 체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서는 복음의 가치를 설명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2) [본론] 부분에서

 

저자는, 율법이 온 것이 믿음을 유발시키기 위해 일부러 정죄하려고 율법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로마서 7:7-13에서 하나님은 믿음을 기초로 구원할 수 있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정죄하려 율법을 주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율법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려고 율법을 주신다." (116 P) 즉 율법은 자기 고집이 있다면 말이다. 인간이 율법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율법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죄 때문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자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논리에 도착한다. "하나님은 자아 아들을 보내셨고, 그의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육신에 있는 죄'를 정죄했다. 그 목적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8:3 f)"(118P). 하지만 저자는 이 '로마서 8:3 f'를 크게 오해하고 있다. 즉 저자의 생각은 이러하다. "율법에게는 본래의 나름대로 뜻이 있는데 인간들의 마음속에 죄가 있어 그 속마음 때문에 율법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어서 마음속에 있는 죄를 제거하고 새사람 만들어서 이제부터 새 사람 된 성도는 성령에게 마음으로 순종하게 되어 율법이 그토록 원했던 그 율법의 본래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라"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 성경에 있어 로마서 8:3-4의 뜻이 이런 것이 아니다.

 

실제 로마서 8:3과 저자의 주장하는 로마서 8:3 사이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면에서 차이가 난다.

 

첫째, '자기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신 취지가 저자에게는 전혀 살아나지 않고 있다.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신의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뜻이다. 인간 속에 있는 죄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 전체(육신)에 대해서 기대를 걸지 말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앞으로 새 사람이 되든 옛 사람 그대로 있던 관계없이 어땠던 인간의 행위로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희망은 아예 갖지 말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뜻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지금 이 본문의 밑바닥에 십자가 사건을 깔아 놓고 있다. 저자는 이 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저 문자만 해석하면 의미가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즉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사 육신의 죄를 정해 버린' 행위는 이제부터의 율법적 기능을 십자가가 대행해서 치러진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십자가 이전까지의 죄와 의의 구분은 율법의 몫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낸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죄와 의의 구분을 십자가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율법의 요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저자를 모르고 있다. 율법의 요구는 오직 '의'이다. 그리고 그 '의'는 로마서 3:21에서 '율법 외' 쪽을 통해서 은혜로 주어지게 된다. 율법 외에 선물로 주어진 의이기에 사람이 행함으로 달성되는 의와(실제로 이룰 수도 없지만)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그리스도가 주신 의로 만족하지 않고 뭔가 더 추가해서 보태어 될 의가 아직 남아 있어 새 사람된 성도의 몫인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의를 실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단지 개인이 지니게 될 할 일의 색다름 정도로 파악한다. "바울은 두 의에 관해서 안다. 두 의의 차이는 공로와 은혜의 구별이 아니라 두 직분의 구별이다.― 다른 의를 잘못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구속사의 이와 같은 구체적 사실이지 은혜가 공로보다 우월하다는 추상적 이론이 아니다"(204-205 PP)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은혜를 실질적으로 인간의 공로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구속사적으로 일어난 인간의 오해의 결과로 해석되어진 일이라고 가볍게 다루려고 하기 때문이다. 은혜 일변도에 대한 저자의 못마땅한 태도는, 그 당시 유대교인들이 은혜를 거부한 증거를 성경이 명확하지 제시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이 선행을 하려는 동족의 열심을 비난했다는 발견은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바울은 유대인의 결점에 대한 중요한 논의에서, 유대인이 율법을 잘 행하지 못하고(로마서 2:17)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가 생기므로 율법을 행하는 것이 의에 이루지 못했다고 (로마서 10:3 f) 비난하지, 그들의 결점이 경건한 활동에 대한 열심에 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라고 저자는 주장한다.(229 p) 이는 그 당시 유대교인들 나름대로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여 은혜 안에 머물러 있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확실히 비 그리스도인 유대인들은 자신이 언약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았다"(231p)

 

저자가, 유대교인들은 변호하고 나서는 이유는, 행여나 '은혜― 공로' 라는 틀로서 그리스도의 의가 설명이 되면 나중에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이후에 은혜 핑계되고 실질적으로 아무런 선행과 경건 생활을 포기하여 율법의 요구를 성도가 이루지 않으려고 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실제적인 경건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은혜라면 처음부터 은혜를 못 받은 것이라고 저자가 외치지 않는 것이 되고 대신 다음과 같이 외치는 셈이 된다. "여러분, 은혜+'율법 행함'을 통해서 의를 이룹시다!" 라든지 또는 "여러분, 믿음+공로를 통해서 의를 이룹시다!" 라는 주장을 펼치는 것과 같다.

 

저자가 이 결론을 슬며시 내세우기 위해서 기초 단계에 해당되는 주장으로서, 유대교인들이 자기 의를 세우려고 열심을 낸 적은 없었고 그들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던 사람들이었는데 단지 그들이 무지한 것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데 있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지 않고 있는 점뿐이라는 것이다. "자기 의가 유대교 문헌에도 나오지 않듯이 바울의 서신에도 나오지 않는다"(230p) 이런 말을 저자가 구태여 삽입하면서까지 내세우는 주장은, 유대교를 비난 할 때는 그들이 자기 공로로 자기 의를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비난하지 말고 기독교의 메시지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비난해야 한다는데 요지가 있다.

 

저자의 이러한 논조는, 은혜와 대치되는 공로 사상을 인류 보편적인 정신 상태로 확산시키는 것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서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펼쳐 보는데 "사도 바울이 반대한 것은 모세의 율법이 '행함'을 요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세 율법의 수용이 하나님의 백성, 즉 아브라함의 후손에 속하는데 결정적인 점이라면 그리스도는 헛되게 죽으신 것일 것이라는 점이다(갈 2:21)"(234p) 이 주장에 의할 것 같으면, 모세 율법대로 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 자손에 이 세상에 보낸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아브라함 노선이 모세 율법과 무관한 독자적인 노선이 아니라 오히려 모세 율법을 제대로 받들어 봉사하기 위해서 마련되었다는 논리이다. 이런 주장에 의할 것 같으면,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지 않는 것으로 만들려면 모세 율법을 수용하지 말라 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뜻이라고 해야만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사도 바울은 이러한 저자의 주장과 정반대 주장을 표명하고 있다.

 

첫째, 갈라디아서 3:15-19에 의하면,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라디아서 3:15-19) 즉, 약속은 율법과 전혀 무관한 곳이며 심지어 약속이 먼저 있었고 430년 후에 주어진 것이며 그렇게 주어진 율법도 목적도 실은 그 어떠한 인간의 죄도 하나님의 약속 실현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인간의 죄 속에 투입되어 죄를 죄 된 것으로 드러난 역할을 할뿐이다.

 

둘째로, 예수님의 죽으심은 바로 모세 율법을 수용하신 그 결과로 돌아가신 것이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0,13) 즉,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신약 시대에 와서 율법적 기능을 할 수 있는 유일무일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십자가 사건 안에 그 모든 율법의 엄중함이 집결되어 있다. 의의 최종적 표현으로서 제대로 저주하고 또한 제대로 긍휼을 줄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저자는 이러한 율법적 기능을 놓쳐 버리고서는 그 대신 기존의 율법을 아직도 계속 채용하고 활용하는 방책 세우기에 열중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를 통해서 확실한 율법관을 갖고 있는 반면에 저자는, 가장 합리적이라는 이름으로 소위 역사적 배경에 충실한 성경신학적 계시 해석법을 동원하여 사도 바울이 전에 유대교인 적이 있다는 경력을 참고로 한 유대교의 율법적 실현 욕구를 그대로 사도 바울의 율법관으로 대체해 버린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전에 유대교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던 그 믿음과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에 있어 '믿는다는' 행위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중차대하고 결정적인 실수를 저자는 범하고 있다. 저자가 왜 이런 실수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은 '믿는다'는 것을 주님의 말씀 성취의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인간의 행동 양식의 일종으로 가볍게 처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가볍게 처리하는 그 정신 상태 속에는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옛 아담의 본성이 가득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믿으니, 무엇은 믿든 믿는다는 행위 자체는 같이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 믿음이라는 것을 오직 인간의 육체의 모든 행위를 부정해 버리는 약속 성취에서 나온 성취력의 결과이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2-3)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증거는, 성령께서 인간 육체의 행위를 대신하는 행위에 나선다는데 있고 동시에 모든 인간의 행위를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로서 단숨에, 그리고 날마다 부정해 버리는데 있다. 만약 인간이 그래도 자기 육체를 신뢰하고자 한다면(여기서 육체의 신뢰는 단순히 할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할례를 별로 중요하지 않는 사항으로 취급했는데 "바울의 주장에 따르면 [할례는] 본래 중요하지 않는 관행이었다. 갈 6:15/고전 7:19 234p 이는 당시 유대교의 신학과도 모순된다). 율법 아래 있는 자이고 따라서 항상 저주 아래에 있는 자이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0)

 

결국 저자의 딜레마는, 사도 바울이 내세우는 여러 가지 윤리적 덕목들에 대해서 이미 의롭게 되었다는 소위 법정적 선언과 모순 없이 결합시켜 보려는 욕심에서 나왔다. 즉 복음을 윤리적으로 보이는 의로운 행위로 간주하여서(출발부터가 잘못되었다) 이 복음을 일방적으로 둘로 쪼개어 놓은 것이다. 즉 믿음으로 구원과 윤리적 경건 생활이라는 두 가지 구성 요소로서 이루어졌다는 선입감을 집어넣은 것이다. 그래 놓고서 다시 저자 본인의 심도 있는 율법 연구로 인해 이 두 가지 요소를 잘 조화롭게 봉합시켜 놓았다고 자신만만해 한다. 애초부터 갈라질 수도 없고 갈라지더라도 믿음+행함으로 갈라지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복음을 이해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살해한 그 유대인들의 아담적 속성을 저자가 성실하게 재현한 것에 지나지 않다. 한 마디로 말해서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시작한 신학 연구가이다.

 

그런데 저자 본인이 봉합을 하려고 보니 사도 바울이 마치 너무 산만하게 서로 상충되는 주장들을 해 놓은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무어라고 변명하기 시작하는가 하면은, 사도 바울 자신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일관성을 가진 적이 없고 단지 자기가 맞닥뜨리는 상황 속에서 자기 확신대로 처신하다 보니깐 그런 산만한 주장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만성에 대해서 저자는, 대상을 나름대로 셋으로 분류해 놓고 대충 정리 정돈하는 것으로 사도를 대신해서 사도의 입장을 옹호하려고 나선다. 즉 사도를 계시를 철저하게 짓이겨 놓고서도 또다시 자기가 뒤치닥거리를 통해 사도의 권위를 회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소위 학문을 한다는 자기네들 세상에서는 균형 있고 학문적 솔직성이 돋보인다고 칭찬 받을 일로 통하는 것이다. 즉 저자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계셔서 복음적 활동을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을 사도 바울의 계시의 배후 원천으로 취급하지 않으려 한다. 따라서 율법의 위상을 모두 인간 행위에 근거해서 연관지어 해석하려는 신학적 태도를 분명히 부각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자기 주장의 신비스러운(?) 딜레마를 사도 바울의 대상을 셋으로 나누어서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 그의 분류가 얼마나 명확하고 정확한가가 문제가 아니다. 성경에서도 분류시키지 않는 것을 억지로라도 분류를 해야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점이 애초롭다.

 

그의 분류에 따르면 하나는 유대교적 그리스도인이요 다른 하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이요 다른 하나는 그냥 유대교에 대한 견해이다. 즉 사도 바울은 대상을 셋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율법관을 전파했다는 것이다. 유대교적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네들처럼 율법을(의식법) 행하지 않더라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라고 촉구하고 또한 이방인 그리스도에게는 유대교적 그리스도인의 말을 듣지 말고 믿었던 그대로 지내도 좋다고 자유를 허용한 한 편, 현재 유대교는 일관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언젠가는 그들도 반드시 구원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구원받기 위하여 회개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자신이 반대한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의 주장은 유대교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선교사를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방인이 교회의 회원되는 한 조건으로서 혹은 기본적 요구로서 율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견해를 반대하는 것이다.

 

바울의 주장은 믿음 자체를 옹호하거나 행위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훨씬 구체적이다. 이것은 참으로 '아브라함 자손'이 되기 위하여 모세의 율법을 지킬 것을 이방인에게 요구하는 입장을 반대 한다"(40-41PP) "만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것을 생각해야 하고 따라서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것이라고 제안한다면 그리고 그 제안이 내가 찬반 투표권을 행사하는 교회에 제출되어 있다면 나는 반대표를 던질 것이다"(289 P)

 

저자는, 율법에 대해 그 어떤 일관성 있는 주장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로서, 사도 바울 사상 자체가 체계적이지 않고 일관성이 결여되었다고 핑계를 댄다. "율법에 관한 바울의 사상이 체계적이지 않다는 특징은 또한 그가 옳은 행동을 논의할 때 두드러지게 전면에 나온다."(209 P) 저자는, 심지어 이러한 일관성 없음이 단순히 그 시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또 다른 새로운 계시를 제안할 것이라는 가설을 주저 없이 내세운다. "구원은 믿음에 의한다; 이스라엘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변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이 첫 세대 이상으로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확신을 붙잡고 계속 확언하면서 그것을 결합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계속 시도할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짧은 시기 동안 적어도 그것을 했다."(290 p) 즉 저자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뭔가 계시에 체계가 잡히지 않기에 모든 문제에 있어 단지, '자기 확신'만 남발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 확신'으로서 계시로 대신했다는 말이다. "바울은 설명하는 것보다 확언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는 상충되는 확신에 관한 문제를 갖고 있다"(290 p) "우리가 결과를 알므로, 바울의 서신에서 기독교의 자기 이해 가운데 많은 것의 핵심을 볼 수 있다. 기독교는 이스라엘 역사를 취하고 또 그 역사를 넘어 선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기독교는 유대교 성경을 의지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진리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주저하지 않고 원치 않는 본분을 버리고 새로운 말로 그것을 보충하려 했을 것이다. 어떤 말은 '주께로부터' 왔고 어떤 것은 인간의 권위에 의존한다. 유대교의 사상과 전통의 많은 측면들이 유지되었을 것이지만 새로운 유형의 사고방식이 드러났을 것이다. 새로운 언약적 율법주의가 계속 발전되었을 것이다."(297p)

 

이 말의 의도는, 계시란 사도 바울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추어서 어떤 것은 예수님을 믿는 확신 가운데 일부 채용하고, 어떤 것은 기존 유대교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섭리를 부정할 수 없기에 일부 채용해서 그 때 당시의 계시로 사도 바울이 활용했지만 그 당시 초대 교회 또한 전적으로 이러한 사도 바울에게만 계시 활동만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주장은, 그 때 그 당시 사도 바울의 개인이 당했던 그리스도의 경험의 표현에 지나지 않기에 그가 모든 계시를 다 알고 또한 함유하고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의중을 넌지시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호하게 사도 바울은 말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3:8,12)

 

이와 같은 정신 상태로 인해 저자는 로마서 8:5-7이 말씀에 대해서 세 번째로 성경과 다른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마치 행위의 주도권이 성도 된 각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물론 영을 좇든, 육신을 좇든 좇아가는 당사자는 인간임에 분명하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명령 자체가 무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말씀의 요지가 행위자가 누구냐를 따지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문제는 철학의 주제가 될 뿐이다) 관심사는 누가 그 행위자를 주관하고 있느냐에 있다. 성령께서 성도를 제대로 인도하게 되면 그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일어난 사건이 지속적으로 반복 하겠끔 된다. 왜냐하면 성령은 아들의 영이기 때문이다.(로마서 8:14-16) "더도 덜도 말고 아들 같이만 되어라!" 이것이 성령님의 요구인데 여기서 아들 같다라는 말은, 율법의 요구인 '의'에 지속적으로 매달려 있도록 성령께서 작용하신다는 뜻이다. 의가 없으면 신자는 예수님처럼 부활이 안 되기 때문이다.(로마서 8:9-11)

 

저자는, 신자에게 있어 성령을 받고 난 이 후에도 여전히 율법 안에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 가운데 살 때 율법 바깥에 서면서도 어떻게 여전히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하려고 분명히 시도하고 있다."(152P)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율법 없는' 자이지만 동시에 율법 없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기를 바란다"(153P).

 

저자의 윤리에 대한 집착은 사도 바울이 말한 각가지 성도다움을 요구하는 명령들에 대해서 구약부터 계속 내려오는 율법의 본뜻과 일치시키려는 요구 때문에 생겼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나 다른 여러 덕목들은, 오직 '십자가 사랑'이라는 이 한 말씀으로 다 설명이 된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10)

 

그런데 성경에서 말한 사랑이란 단순히 윤리적 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극단적으로 저주하는 행위를 말한다. 즉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상대에게 다가가는 그것이 사랑이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의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 25:7-13)

 

그런데 위의 말씀은 옛 언약 시절 때 이야기이다. 새 시대에는 하나님은 새 언약으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격한다. 즉 모든 사람을 죽이신다. 자기 아들 안에서 날마다 죽기를 요구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투이며 공격이며 공의이며 또한 사랑이다. 마치 엘르아살 제사장과 같은 행위를 계속 하시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믿음이란, 단순히 어떤 사실을 수납하는 인간 행위가 아니다. 이미 주가 되신 분의 직접적 행위이다. 말씀 성취의 자리에 앉아 계시기에 비로소 가능한 행위이지 인간이 자기 심성이나 결단력에서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새언약의 선물로서의 믿음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자기 믿음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살해시켜 주시는 주님의 행위이다. 그 주님의 행위의 결과로 도출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이다. 정과 육신을 늘 죽이는 겉 현상이다.

 

저자는, 십자가 사건이 인류 보편적인 사건인 것을 아마 인정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유대교인들의 율법에 대한 견해가 단지 예수님을 살해에 적극 가담한 그들만의 소질이나 본성이 아니라 아담 안에 속한 모든 인류 공통의 속성임을 저자는 결코 동의하지 않고자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은혜성을 별반 중요시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죄의 보편성도 함께 거론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죄의 보편성이 거론되면 유대인들의 선행이나 경건조차도 하나님이 일부러 시도하신 '강퍅' 과 '순종치 않음'에 해당되는 것이 뻔한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9:18/11:32)

 

저자는, 성령의 열매를 인간의 행위로 흉내내려고 한다. 왜 그런 행위를 하고 싶어 하는가? 그리스도에 충실하기보다는 자기에 충실하고픈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훼손시키는 결과로 나왔다면 이건 무슨 큰 낭패인가!

 

"심판은 앞에서 요약한 율법과 긍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얼마나 잘 이루었는가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177p) 저자의 주장이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리지만 하지만 이 얼마나 사탄적 발상인가! 성경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8-29)

 

결 론

 

왜 소위 자칭 신학자라는 자들이 신자의 모습을 못 보여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신자가 원래부터 아니기 때문이다. 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자기의 죄악 됨이 점차 드러나게 된다. 저자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둡다. 자기 것만 밝히려 한다. 자기 변명과 변호의 여지를 찾으면서 하나님의 완벽한 요구 사항과 늘 적당한 선에서 조정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처신을 궁극적으로 더 나은 자기 발전의 계기로 잡으려 한다. 구약 시절의 가나안 종교를 다시 한 번 보는 것 같고 선지자 시절의 자기 정체성만 붙들고 사는 관료 선지자들의 처신을 다시 보는 것 같고, 예수님 당신에 자기 완벽에 몰두하고자 하는 바리새인이나 세례 요한 제자들의 근성을 다시 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인간에게는 끝까지 따라 붙는 적이 하나 있다. 그것은 윤리성과 도덕심이 요구하는 책임 의식이다. "그래서는 되겠는가"를 되풀이하며 달라 엉기는 충동들이다. 이미 완벽 앞에서 죽임을 당한 자에 입장에서 자신의 미완전성에 다시 모험을 거는 불장난은 하지 않아야 한다. 다시 과거의 자신 속으로 들어가 머물어서는 안 된다. 십자가 앞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귀와 마주 서서 대결하려는 객기를 가동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주체가 아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만인 그런 피조물에만 머물자. 새로운 피조물도 여전히 피조물에 지나지 않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