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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해석학적 기초 (고린도전서를 중심으로)

에반젤(복음) 2021. 7. 30. 12:30

바울의 해석학적 기초

(고린도전서를 중심으로)

 

 

바울은 유대 사회의 시골 지역을 배경으로 하던 그리스도교를 헬레니즘 사회의 도시 지역에 전하였다. 그의 선교 지역에서는, 문화가 다르고 사회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 간의 갈등이 잦았는데, 고린도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것, 신도가 음행에 빠지는 것,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생활을 하는 것, 공적 모임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 등등의 문제들로 혼란과 갈등을 겪었다. 그들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스스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여 공동체가 붕괴될 위기에 직면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 공동체 안에 그런 상황을 해석하고 대처할 해석학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바울에게 편지로 이런 상황을 상세히 적어 보내어 자문을 하였다. 바울은 이에 답하는 편지들―그 가운데 하나가 고린도전서이다―에서 그 문제들을 하나하나 다루면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 문제들은 다양하지만 그의 해결책들에는 일관되게 관통하고 흐르는 어떤 것이 있다. 이는 그가 임기응변적으로 문제들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큰 원칙을 갖고서 문제들에 접근했음을 의미한다. 즉 그 상황을 해석하고 대책을 제시할 수 있는 그 자신의 해석학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이런 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의 단편적인 언급들에서, 그리고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방식들에서 그의 해석학의 윤곽을 그려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고린도전서를 중심으로 이러한 해석학의 윤곽을 찾아보려고 한다.

 

1. 영의 제한

 

고린도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바울은 그 가운데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가장 큰 문제로 삼았다. 특히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공적 모임에서 무질서하게 방언으로 말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4장 전체를 할애할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것은 이 문제가 그 자체로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다른 모든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의사소통의 문제, 즉 해석학의 문제였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 계시, 신비 체험 등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취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그런 체험을 많이 하고 있음을 밝힌다(고전 14:1, 18; 고후 12:2, 7; 살전 5:19-20). 그렇지만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통행 식으로 자기가 받은 은사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문제를 삼는다. 실제로 고린도교회에서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공적 모임에서 방언으로 말을 하거나,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 예언하는 것은 듣지도 않고,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예언을 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바울은 이런 상황을, 그저 흔히 있을 수 있는 열성 신자의 문제 정도로 가볍게 여기지 않고, 공동체 전체를 파괴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것으로 여겨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한다.

 

먼저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적절한 제한 아래 있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는 자기 자신도 그런 제한 아래 있음을 밝힌다. 그 자신이 엄청난 계시를 받았지만, 주님은 그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그의 몸에 가시를 주셨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가시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것은 그가 계시 체험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제한하는 어떤 것이다.

 

방언으로 말하는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누가 방언으로 말할 때에는, 둘 또는 많아야 셋이서 말하되 차례로 말하고, 한 사람은 통역을 하라고 한다. 통역할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한다(14:27-28). 바울은 여기서 적어도 세 가지를 제한하고 있다. 첫째는 방언으로 말하는 인원수, 또는 시간의 제한이요, 둘째는 네 명이 이상이 동시에 말하여 통역할 수도 알아들을 수도 없게 하는 무질서에 대한 제한이요, 셋째는 통역할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지하라는 제한이다.

 

여기서 ‘통역하는 사람(diermhvneuthv")’이라는 단어는 신약 전체에서 이곳(고전 14:28) 한 곳에서밖에 나오지 않는다. ‘통역하다(diermhneuvein)’라는 단어도, 통역의 은사와 관련 없는 경우들(눅 24:27; 행 9:36)을 제외하면, 모두 고린도교회의 성령의 은사 문제를 다루는 데서만 네 번 나올 뿐이다(12:30; 14:5,13,27). 이에 비하면, 방언(glw'ssa)이라는 말은 고린도전서에서만도 20번이나 나오며(12:10; 13:1; 14장의 여러 곳) 그밖에도 여러 곳(막 16:17; 행 2:4; 10:46; 19:6)에서 나온다. 이는 초대교회에서 방언의 은사는 비교적 널리 알려진 반면, 통역의 은사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현상이었을 가능성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없으면 방언으로 말하지 말라는 바울의 권면은 실제로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완곡하게 금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교회에서 예언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바울은, 한 번의 모임에서 둘이나 셋이서 말하라고 함으로써 역시 예언하는 인원 또는 시간에 제한을 둔다.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내리면 먼저 말하던 사람은 잠잠하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예언하라는 것 역시 무질서하게 예언하는 것에 대한 제한이다. 한 사람이 예언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분별하라고 하는 것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통역하라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14:29-31).

 

여기서 ‘분별하다(diakrivnein)’라는 단어는, 그 예언의 의미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출처와 관련된 것이다. 아무 예언이나 다 받아들이지 말고, 그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인지 그와 상관없는 다른 영에 의한 것인지, 또는 자아도취적 황홀경 속에서 지껄이는 의미 없는 말인지 가려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동사의 주어 ‘다른 사람들(oiJ a]lloi)’은, 예언하는 사람들 가운데 지금 예언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교회의 회중을 뜻할 수 있는데,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1) 바울은 여기에서 예언하는 사람들도 교회 회중들에 의해 분별되고 제한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 영을 분별하는 기준에 대하여 이미 앞에서 제시하였는데, 곧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으로 감동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12:3).

 

여기에서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라는 문구가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말을 인용한 것이라면 그들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다. 어떻게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는 사람이 예수를 저주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는가? 이 문제 대해서 여러 가지 제안들이 있어 왔는데, 피츠너(V.C. Pfitzner)는 이런 제안들에 대해 하나하나 논박하면서2)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라는 문구는 실제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예수는 주님이시다’ 라는 고백에 대응하여 바울 자신이 고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3) 이런 견해에 대해 바레트(C.K. Barrett)는, 바울이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순전히 가설적이고 인위적인 가능성을 제시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알로(Allo)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방신전 무당(Sibyl)이 그녀를 사로잡으려고 하는 영감을 뿌리칠 때 거품을 내뿜은 것 같이, 혹은 에쉴루스의 아가멤논(Aeschylus's Agamemnon)에서 아폴로(Apollo)를 저주한 카산드라(Cassandra)가 한 것과 같이, 황홀경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엄습해 오는 무아지경이나 황홀경을 뿌리치기 위해 소리를 지르는 것에 대해 바울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레트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금 더 상황을 미루어 본다면, 고린도교회의 일부 열광주의적 신도들은 교회의 공적 모임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이런 이교적인 황홀경에 빠져서 예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의미 없는 말들을 지껄이거나 때로 예수를 모독하기까지 한 것으로 보인다. 혹 누가 그것을 제재하려고 하기라도 하면, 그들은 ‘예언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내게 내려서 말씀하는 것이므로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바울이 “예언하는 이들의 영은 예언하는 이들에게서 통제를 받는다”(14:32)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는 이 말로써 그런 이교적 영에 의한 황홀경의 상태와 성령의 감동 아래 있는 상태를 구별하는 기준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교적인 영은 그 영에 사로잡힌 자의 자아를 대체해 버리는 방식을 취하지만4), 성령은 성령으로 감동받은 이의 자아를 파괴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예언하는 사람은, 아무리 그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교회의 평화와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되는 일을 위하여 자신의 영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집중적으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예언하는 것을 대조하는데, 교회에서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예언하는 것을 권장하는 입장을 취한다(4, 5, 19, 23-25절). 이것은 두 은사에 어떤 차등을 매기려는 것이 아니라, 해석학적 문제와 연관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방언으로 말하므로 감사한다”고 할 정도로 그 은사에 친숙하며,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였다(14:18, 39). 그러나 그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교회의 공적 모임에서는 제한되어야 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령한 은사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을 때에는 교회에서는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해석학의 기본 원칙이다.

 

이런 원칙은 세 가지 유비(analogy)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먼저 악기의 유비다. 피리나 거문고 같은 악기도, 음색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지 않으면, 피리를 부는 것인지, 수금을 타는 것인지 알 수 없으며, 또 나팔이 분명하지 않은 소리를 내면, 아무도 전투 준비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은 외국인의 유비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말소리가 있지만, 뜻이 없는 소리는 하나도 없으며, 내가 그 말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나는 그 말하는 이에게 외국인이 되고, 그도 나에게 외국인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외국인(bavrbaro")'이라는 말은 본래 헬라인이 아닌 야만인을 뜻한다(롬 1:14).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서 이 용어를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관계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한다. 사람들이야 똑같은 헬라인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 관계는 헬라인과 야만인의 관계, 즉 서로 낯설고, 상종하지 않고, 말이 통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영과 이성의 유비다. 바울은 자기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의 영은 기도하지만, 그의 이성(nou'")은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한다고 하면서, 자신은 영으로 기도하고 또 이성으로도 기도하며, 영으로 찬미하고 또 이성으로도 찬미하겠다고 한다. 이 구절들에 대한 주석들에서 학자들은, 여기에서 영이 하나님의 영인지 기도하는 사람 자신의 영인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하였다. 방언은 기도하는 사람이 자기도취에 빠져서 하는 말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는 것이므로 자기 자신의 영으로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바울은, 분명히 여기에서 ‘나의 영’이라는 문구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다음에 나오는 ‘나의 이성’과 짝을 이루므로, 방언으로 말하게 하는 영은 기도하는 사람 자신의 영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주석가들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대개 인간학적 구성 요소로서 이성과 영을 대조하거나, 인간학적 구성 요소로서 이성과 인간에게 주어진 신적 요소로서 영을 대조하는 식으로 설명한다. 특히 그 영을 인간학적 영으로 볼 것인지 신적인 영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집중한다.5) 그러나 이와 같이 이성을 인간학적 구성요소로 보거나, 영과 이성 사이에 경계선을 분명하게 긋지 않고 보는 사고방식은 당시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잘 알려진 것이다. 당시의 헬레니즘 세계에서 영과 이성은 동일시되기도 하였다.6) 그리스 철학에서, 이성(nou'")은 인간의 순수한 이성일 뿐만 아니라 신적인 원리이기도 하다.7)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나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와 비슷한 것이며, 인간학적 의미로는 사람의 이해력, 이성, 정신, 마음, 생각 등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나 물질과는 대조되는 순수한 인간의 본질을 가리키는 이원론적 개념이다. 바울은 이성의 이러한 인간학적 의미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자신도 이런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곤 하였다.8)

 

그러나 이 세 번째 유비에서 바울은 이런 용법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식으로 영과 이성을 대조하고 있다. 그는 영과 이성을 인간학적 구성요소들로서 대조하지도 않으며 둘 사이의 경계를 혼동하지도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여기서 영(pneu'ma)과 이성(nou'")을 대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tw'/ pneuvmati)’와 ‘이성으로(tw'/ noi?v)’를 대조하고 있다. 두 가지 인간학적 요소를 대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찬미하는, 두 가지 방식을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학이 문제가 아니라 해석학이 문제이다. 그가 ‘이성으로’ 기도하고 ‘이성으로’ 찬미하겠다는 말은, 자신의 어떤 정신적 기능을 사용해서 그리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고 그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 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미하겠다는 말은, 다른 영에 사로잡혀서 자아를 망각하거나 자아도취적 황홀경 속에서 그리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 말하는 방식으로 그리 하겠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어떤 공통적인 것―이를테면 언어나 글과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른바 ‘해석학적 기초’이다(슐라이어마허). 바울은 바로 그런 해석학적 기초가 ‘이성으로’ 사는 삶에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함께 느끼며 사는 삶이요 친교하며 사는 삶이다.

 

3.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고린도교회에서는 이러한 내부 문제 못지않게 공동체 밖의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가장 심각하게 문제가 된 것은 음행의 문제이다(5:1-12). 그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자유분방하고 성이 문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는데, 이런 풍조는 고린도교회 안에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고린도교회 사람들 가운데는, 창녀를 찾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아버지의 아내(계모)를 데리고 사는 사람까지 있어서, 바울은 그러한 음행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볼 수 없는 것이라고 개탄하고 있다.

 

이 문제를 다루는 한 편지―고린도전서보다 먼저 씌어진 이 편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에서 바울은 음행하는 자들과는 상종하지 말라고 썼다. 이 말은 이 세상 사람들과 아주 상종하지 말라는 말로 받아들여져서 문제가 되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한, 이 세상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자신의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과 아주 상종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형제라고 일컫는 사람’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과는 함께 먹지도 말라는 뜻이라고 해명한다. 여기에서 그는, 이 세상 사람들을 ‘밖에 있는 사람들(tou;" e[xw)’이라고 부르고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안에 있는 사람들(tou;" e[sw)’이라고 부른다. 전자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태도를 취하는 반면 후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바울이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너그러운 태도를 취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들과 상종하지 않으려면 신자들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10b절). 이는 현실주의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다. 그 두 번째 이유는 밖에 있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은 자기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12절). 이것은, 밖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밖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분명히 하며(13절),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한다(6:2).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말적 심판이다. 그는, 지금 여기에서 이 세상을 심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은 물론 신도들에게도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는 해석학적 판단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여기에서,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는 해석학적 원칙을,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용하고 있다. 신도들이 이 세상 사람들의 음행에 대해 심판을 하려고 한다면, 그 심판의 근거는 십계명의 일곱 번째 계명이나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것, 곧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일 수 있는데, 그러한 것들에 근거해서 그들을 심판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에 있는 사람들의 기준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은 남이야 알아듣든 말든 일방적으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심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도 해당되지 않는 일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생활을 하는 문제(7:12-16)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이 문제는 신자가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해도 되느냐 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문제가 되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자가 별 생각 없이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했거나, 또는 결혼 당시는 둘 다 믿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도중에 어느 한 편이 믿게 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한동안 별 문제없이 잘 지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믿는 사람 쪽에서 결혼생활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된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성도가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은 자신을 더럽히는 것이며,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식도 더럽혀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믿지 않는 쪽에서는 그런 문제와 상관없이 결혼 생활을 계속 하기를 원하는데도, 완고하게 이혼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당혹스럽고 억울한 일일 수 있다. 그들은 결혼 당시 믿는 것을 조건으로 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믿지 않는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자가 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고 가정을 파괴할 수도 있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바울은 그가 이전에 사용한 것과 동일한 해석학적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즉 믿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자신은 거룩하고 상대방은 더럽다고 규정하여 이혼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믿지 않는 상대방에게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더욱이, 12-13절에 나오는, “그 여자가 남편과 같이 살기를 원하면” 그리고 “그가 아내와 같이 살기를 원하면”이라는 조건문은 믿지 않는 사람 쪽에서는 여전히 믿는 사람 쪽을 좋아하고 친밀하게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이전까지는 결혼 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믿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그런 문제를 제기해서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 쪽에 더더욱 부당한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런 경우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두 번씩이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믿는 사람 쪽에 관점의 전환을 요구한다. 믿지 않는 상대방에게 일방적인 기준을 강요하지 말고, 상대방의 ‘같이 살기를 원하는’ 마음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관계를,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더럽힐 수 있는 오염의 관계에서 보지 말고, 같이 살기를 원하는, 사랑의 관계에서 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랑의 관계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믿는 사람이 더럽혀지기는커녕,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과 그 자녀까지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바울은 그들이 이미 거룩해졌다고 선언한다(14절). 나아가서 그렇게 함으로써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구원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한다(16절).

 

그러나 바울은, 혹 믿지 않는 사람 쪽에서 헤어지기를 원하면 헤어져도 좋다고 한다. 이는, 주님의 명령임을 내세워 이혼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던 평소의 태도(10절)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과는 쉽게 헤어져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은 이런 오해가 없도록, “하나님은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게 하려고 부르셨다”는 설명을 덧붙인다(15절). 바울이 이혼을 금지한 것은, 주님의 명령에 근거하는 것이고, 믿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이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을 강요할 때 평화는 깨어질 수밖에 없다. 바울이 이혼을 허락하는 것은 이례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는 그의 해석학적 원칙에서 보면 일관성이 있는 것이다.

 

4. “양심을 위하여(dia; th;n suneivdhsin)”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고전 8:1-13; 10:25-28)는 신자들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8장에서는, 공동체 안의 이른바 ‘약한 사람’과 ‘지식이 있는 사람들’ 사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약한 사람(oJ ajsqenw'n)’들은, 일생 동안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으면서, 항상 그 제물을 실제로 우상에게 바친 것으로 생각해 온 이방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도 여전히 우상의 배후에 영적 존재들이 실재한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그 음식이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했다.9)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는 신이 없다고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식이 있고 자유를 누리는 점에서 ‘강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그의 지식으로 보나 자유로운 의식으로 보나 강한 사람들과 한 편이라는 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강한 사람들을 편들지 않고 오히려 강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이 되지 않게 하라고 말한다. 이것 역시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라는 그의 해석학적 원칙에 맞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의 논점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해 또 하나의 단어를 사용하는데, 곧 ‘양심(suneivdhsi")’이라는 단어이다. 문제가 되고 있는 ‘약한 사람’도 ‘양심이 약한 사람(hJ suneivdhsi" ajsqenhv")’을 의미한다.

 

suneivdhsi"는 바울의 전문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10) 이 단어의 일반적 의미는 ‘자기 자신의 행위를 평가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능력’이다.11) 바울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 문제를 다루면서 이 단어를 이러한 일반적인 도덕적 의미와는 다른 용법으로 사용하였다. 이 용법과 관련하여 학자들은 이 단어의 언어적 의미에 주목하였는데, 그 언어적인 기원은 “(자기 자신)과 함께 아는 것” 곧 “깨닫는 것”이다. 이 단어의 동사형 suvnoida(고전 4:4)도 “내가 깨닫는다”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현대의 일반적 의미에서 양심이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그것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강한 사람들은 우상들과 우상에게 바친 고기가 어떠한 것인지 진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지식에서 나오는 자유 안에서 행동하였다. 양심이 약한 사람들은 우상과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한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일뿐이다.12)

 

이 단어는 10:25-28에서 다시 집중적으로 나온다. 여기서 바울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세 가지 경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째로,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한다. 둘째로, 불신자들 가운데서 누가 그들을 초대하여, 그들이 거기에 가게 되면, 그들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나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한다. 셋째로,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이것은 제사에 올린 음식입니다” 하고 말하면, 그렇게 알려 준 사람과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경우는 상황을 알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당시 시장에 나오는 고기들은 대개 우상에게 바치는 의식을 거쳤기 때문에 신자가 이것을 먹는 것이 우상숭배와 관련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 있었다. 바울은 이방 신전에서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엄격히 금했지만(10:21), 시장에 나오는 그런 음식을 먹는 것까지 그 문제와 연관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 것이다. 또 믿지 않는 사람이 자기 집으로 초대를 했을 경우 거기에 나오는 고기의 출처에 대해서 일일이 물음으로써 흥을 깨고 친교에 흠이 가게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세 번째 경우인데, 이것 역시 불신자가 초대한 사적인 식사에서의 문제이다. 식사 도중에 초대한 사람이 공연히 이런 말을 해서 신자의 입장을 난처하게 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함께 간 어떤 신자가 자신의 약한 양심 때문에 그 음식에 대해서 주인에게 묻거나 부엌에 가서 묻다가, 그런 사실을 알게 되어서, 자기보다 양심이 강한 신자에게 가급적 가장 예의바른 말로 알려 준 경우라고 생각할 수 있다.13)

 

이 세 가지 경우들에서, 바울은 논점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를 다루려는 것이 아니다. 그 문제로 말하면, 먹으라고 했다가 먹지 말라고 했다가, 전혀 일관성 없다. 그러나 일관성을 있다면, 어떤 경우에서나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도덕적인 문제로 친교를 깨뜨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도 그 고기를 내놓은 상대방은 ‘알지도 못하는’ 일방적 기준에 의하여, 신자와 불신자의 벽이 없이 이루어진 친교를 깨뜨리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 문제를, 우상에게 바친 고기 자체가 먹는 이에게 어떤 해를 끼치느냐 하는, “종교적․주술적 관점”에서 판단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일로 어떠한 친교 관계를 이룩하느냐 하는, “공동체적 관점”에서 판단하였다.14)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이 세 가지 경우들에서 공히 ‘양심을 위하여(dia; th;n suneivdhsin)’라는 문구가 사용된 점이다. ‘양심을 위하여’라는 번역은 그 의미가 모호한데, 바울의 용법 자체가 모호하다. 흔히 이 문구는 ‘양심의 거리낌에서’, 또는 ‘양심의 가책에서’라는 의미로 해석되곤 한다.15) 첫 번째와 두 번째 경우에서 바울이 말하는 대상은 강한 사람들이며,16) 그들은 “땅과 거기에 가득 찬 것들이 다 주의 것이다” 하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다(10:26). 그러면 어찌하여 그들이 시장에서 산 고기나 사적 초대에서 먹는 고기에 대해서 양심에 거리낌을 느끼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윌리스(Wendell Lee Willis)는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라는 문구는 “너의 양심이 시달리지 않도록 아무 질문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일반적 도덕적 의미의 양심과 관계된 말이 아니라고 본다. 그는, “바울에게서 양심은, 윤리적 또는 종교적 안내를 해 주는 독립적 근원이 아니라, 욕망과 필요 안에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10:25에서,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인간의 요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행동에 대한 사람의 의식을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17) 바울이 이 문구에서 개인의 도덕적 양심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의 그의 행동에 대한 의식을 다루고 있다고 본 윌리스의 통찰은 옳다. 바울의 양심 개념에 있어서 초점은 “자기 이웃의 상황 그 이웃에 대한 자기 의식”이라는 홀슬리(R.A. Horsley)의 통찰도 옳다.18)

 

그러므로, 이 문제는 고기를 먹는 문제나, 양심의 거리낌을 해결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과 만남과 친교, 또는 공동체 안의 신도들 간의 친교에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의식, 그런 깨달음에 관한 문제이다. ‘양심을 위하여’라는 문구는, 첫 번째 경우에서는, 시장에서 고기를 파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깨달음에서’로, 두 번째 경우에서는, 식사에 초대해 준 이방 사람을 배려하는 ‘깨달음에서’로 해석할 수 있다. 세 번째 경우는, 그것이 ‘약한 사람’의 양심과 관련된 것이 분명하므로(10:29), 그 약한 형제의 ‘처지와 깨달음을 생각해서’로 해석할 수 있다.19) 여기에서도 바울이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하라고 하거나 ‘이성으로’ 기도하고 찬미하겠다고 할 때 사용한 것과 똑같은 해석학이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으로(pa'sin pavnta)

 

고린도교회 문제들에 대한 바울의 해결책에서 나타나는 그의 해석학적 원칙은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기준으로 그들을 정죄하거나 심판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원칙을 공동체 안의 삶이나 밖의 삶에 똑같이 적용하여, 신자들이 ‘이성으로’ 행동하고 ‘양심을 위하여’ 실천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것은 정신적 기능이나 도덕적 기능을 활용하라는 말이 아니라, ‘함께 느끼는 마음’과 서로를 배려하는 ‘깨달음’에서 평화와 친교를 이루라는 말이다.

 

바울은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사이에서 적당히 중도의 길을 모색하고 있지 않다.20) 그는,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라고 요구하며, 강한 사람들에게 약한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하는 그의 근거는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그 약한 신도를 위해서도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8:11-12). 이런 점에서 바울의 가장 근원적인 해석학적 기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원칙은 로마서에도 그대로 지켜진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하고,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15:1-3). 이 그리스도를 따라서 그는, 자신은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으며 ……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약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며,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pa'sin pavnta)”이 되었다고 한다(고전 9:19-22). 우상에 바친 고기 문제의 결론 부분에서도, 자신은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pavnta pa'sin)” 기쁘게 하기를 원한다고 한다(10:33).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는 것이며,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에서 가능하다. 이것이야말로 바울의 해석학의 대원칙이라 하겠다.

 

(『신학사상』 2001년 겨울, 11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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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데(F. Godet)는, 그 주어가 지금 예언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헬라어로 oiJ a]lloi 대신에 oiJ loipoiv를 썼을 것이라고 한다. F.L. Godet, Commentary on First Corinthians, Grand Rapids: Kregel Publications, 1985. D. A. Carson, Showing the Spirit,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1992, 120 참조.

 

바레트(C.K. Barrett)도 데살로니가전서 5:21(“모든 것을 분간하고……”) 같은 구절에 비추어 예언자들만이 예언의 말씀을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또 요한일서 4:1(“어느 영이든지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가를 시험해 보십시오”) 같은 구절을 근거로 영을 분별하는 것은 특정 예언자에게 국한되지 않았다고 본다. C.K. Barrett,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ew York: Harper & Row, 1973, 328.

 

2) 첫째는, 유대인들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신 21:23; 갈 3:13 참조)는 판결 아래 있는 자로 예수를 저주하였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1세기 후기에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저주한 증거는 있으나 그리스도에 대해 저주했다는 증거는 없다. 둘째로, 예수의 인간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일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지지해 주는 증거는 오직 3세기경의 것이고 그 맥락도 다르다. 셋째로 2세기초에 박해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저주할 것을 요구받았다는 것이다. 이것도 바울 시대보다는 후대의 상황이어서 설득력이 없다. 넷째로 이교제의에서 열광상태에 들어간 경우이다. 이것 역시 추측일 뿐이며, 바울의 관심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임재를 검증하는 데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다. V.C. Pfitzner, 이기문 옮김, 고린도전서, 컨콜디아사, 1990, 236f.

 

3) Ibid.

 

4) 그리스의 신화와 종교에서 나타나는 영의 특징은, 그것이 존재를 사로잡고 가득 채운다는 것이다. 만티스교(Manticism) 같은 데서는, 영은 ‘황홀경 가운데서 하는 말’의 원인이자 원천이다. ‘황홀경 가운데서 하는 말’ 속에서 여사제는 직접적으로 ‘신의 음성’이 된다.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타자”로서, 영은 예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집의 내부를 천둥 같은 소리나 아주 신성한 향기로 채운다. 그것은 인간이든 짐승이든 그것의 주위에 접근하는 것은 무엇이든 채운다. 특별히 아폴로 신전 무당(Pythia)의 내적 존재(yuchv)를 채운다. 그것은 그를 사로잡아 일상적 삶의 질서에서 끌어내어서 비일상적인 황홀경과 광란의 상태로 들어가게 한다. Kleinknecht, “pneu'ma”, TDNT VI, 346f.

 

5). 예를 들면, 바레트는, 고전 14:14에 대한 주석에서, “이성”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인간 본성의 가장 높고도 가장 본질적으로 선한 부분으로 평가한, 인간 존재의 합리적인 요소라고 보며, “내 영”은 내게 맡겨진 성령의 은사이거나 아니면 나에게 영감 받은 말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성령의 대행자라고 본다. C.K. Barrett,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319f.

 

리츠만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황홀경 가운데서 기도하는 것이며, 신자 안에 거하는 성령이 기도하는 동안 그의 인간적인 “정신력”은 기능을 일시적으로 멈춘다고 본다. 이러한 설명 역시 인간학적 이성과 신적인 영 사이의 대조를 말하는 것이다. Hans Lietzmann, An die Korinther I/II, Tubingen: J. C. B. Mohr, 1969, 71.

 

피이는 “나의 영”은 인간의 영일 수도 있고 동시에 성령일 수도 있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한 편으로는 “나의 영”에서 “나의”가 소유격이며 또 이 표현이 바로 이어서 나오는 “나의 이성”과 대조되는 점을 볼 때에, “나의 영”은 그 자신의 영을 가리킨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고전 12:7-11과 14:2의 증거를 볼 때에, 바울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활동으로 이해하였음이 틀림없다. 바울은, “나의 영은 기도한다”는 표현을 가지고, 성령이 말을 하게 하심에 따라서 그 자신의 영이 기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G.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Michigan: W. E. P. C., 1987, 669f.

 

6) 70인역에서는 히브리어 루아흐(ꖏוּר)를 누스(nou'")로 번역하기도 하였다(사 40:13). 헬레니즘 시대에 필로(Philo)와 같은 유대인들은, 유대교가 이성적이라는 것과 그것이 헬레니즘 사고와 공통적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영을 이성과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M. E. Isaacs, The Concept of Spirit, London: Heythrop College, 1976, 74f.

 

7). 이성을 이와 같은 개념으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이다. 이러한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게로 이어지며, 다시 플로티노스(Plotinos)에게로 이어진다. Hirschberger Johannes, 강성위 옮김, ꡔ서양철학사 상권ꡕ, 대구: 이문출판사, 1983, 88f.·278·366 참조.

 

8). 롬 1:28; 7:23·25; 11:34; 12:2; 14:5; 고전 1:10; 2:16; 빌 4:7 등.

 

9) C.K. Barrett,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194.

 

10) suneivdhsi"는 신약성서에 30번 나오는데, 절반인 15번 집중적으로 진정 바울서신에 나오고, 그 가운데 6번이 고린도전서 8장과 10장에 나온다. 이 단어의 선례가 구약성서에 없기 때문에 학자들은 바울이 스토아철학에서 이 용어를 가져온 것으로 생각하였다. 최근에는 이런 가설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C.A. Pierce는 당시의 스토아철학 작가들의 문헌에서 이 단어가 거의 나오지 않음을 밝혔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울 당시의 대중 철학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었으리라고 본다. Wendell Lee Willis, Idol Meat in Corinth, Chico: Scholars Press, 1985, 89f. 참조. 바울은 당시의 대중 철학에서 이 용어를 채택하여 자신의 상황에 맞는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1) Wendell Lee Willis, Idol Meat in Corinth, 91.

 

12) Ibid., 92.

 

13) C.K. Barrett,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242.

 

14). 김창락, “성만찬의 원래적 형태와 의미”, 『성서읽기 역사읽기』, 112.

 

15) 바레트는 “based on conscientious scruples(양심의 가책에 근거해서)”로(C.K. Barrett,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240f.), 콘첼만은 “Gewissen fordere(양심이 요구하는)”으로(Hans Conzelmann, Der erste Brief an die Korinther, Go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69, 208), 린데만은 “Nichtzustandigkeit(양심에 귀속되지 않음)”으로(Andreas Lindemann, Der Erste Korintherbrief, J. C. B. Mohr(Paul Siebeck) Tubingen, 2000, 229) 해석한다.

 

16) Wendell Lee Willis, Idol Meat in Corinth, 233.

 

17) Ibid., 233f.

 

18) R.A. Horsley, “Consciousness and Freedom Among the Corinthians, 1 Corinthians 8-10,” C.B.Q. 40(1978), 587.

 

19) Wendell Lee Willis, Idol Meat in Corinth, 245 참조.

 

20) 타이센(Gerd Theißen)은 바울이 이러한 입장을 취한 것은, 하류 계층 사람들과 상류계층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으로부터 사회적 지위와 지배를 재평가하였는데, 그것은 사회 영역에 아무런 “혁명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바울의 권고는 상류계층 사람들은 하류 계층 사람들에게 맞추어서 자신들의 행위를 조정하라는 것이며, 이것은 사랑―트뢸취가 말한 바 사랑의 가부장주의―에 기초한 것이다. 이것은 두 계층 사이의 긴장을 완화하는 것일 뿐이며, 서로 다른 관습을 지속하는 것은 허락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류계층 사람들이 누리던 지위의 실제적 특권,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제사에 바친 고기를 먹는 것은 허락이 되어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Gerd Theißen, Soziologie des Urchristentums, Tubingen: J. C. B. Mohr, 1979, 287-289. 그러나 이것을 바울이 상류계층 사람들의 선한 양심이나 사랑에 의지하여 타협을 한 것으로 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출처: 김재성 (http://mindl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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