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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생애와 사상

에반젤(복음) 2021. 7. 30. 13:06

바울의 생애와 사상

 

Ⅰ 서 론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일컬어도 부적합하지 않을 만큼 뛰어난 문필가요, 신학자요, 선교사였던 사람이 바울이다. 신약성경 중 최소7권에서 최대14권을 기록했다는 사실은 신약을 이해하는데 사도바울을 알지 않고서는 신약성경을 읽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도바울의 초년의 삶과 그의 로마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던 출처, 유대교의 정통한 바리새인으로서의 신앙, 계시 후에 그의 삶을 기술하려고 한다.

 

Ⅱ 바리새인 바울의 삶과 예수

 

1. 로마시민권자로서의 바울

3차전도 여행당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 의해 로마 군대 천부장에게 체포되었을 때에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행23:27)라고 말하자, 천부장은 놀라며 자신은 많은 돈을 들여 로마시민권을 샀는데 “네가 로마사람이냐” 묻는다. 바울의 대답은 “나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이다”(행23:28)라고 대답했다. 바울의 출생지인 길리기아 다소의 시민권만을 획득하는데 있어서도 500드라크마 이상의 돈이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바울이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부모가 폼페이나 안토니 같은 장군들에게 두드러진 봉사를 하여 명예로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1) 그 봉사는 바울의 선교사로서 사역을 감당하는 중 삶의 수단에서도 나타났듯이 천막 치는 일(오늘날의 천막 치는 일과는 다르다. 당시의 천막 치는 일은 건축, 그 자체였다) 을 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Van UnniK 는 바울의 모국어는 희랍어가 아니고 아람어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서신에 나타나 있는 구약성경인용이 대부분 희랍어성경인 70인역(LXX)에서 왔다고 볼 때 바울의 모국어가 희랍어가 아니고 아람어였다 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만, 바울은 다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희랍어에 의한 초등교육을 받았고, 후일에 예루살렘에 유학와서도 희랍말을 사용하는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계속 성장하고 활동하였을 것으로 본다.

 

2. 정통파 바리새인 사울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기를 사도행전22장 3절에서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고 말한다. 당시 가말리엘문하를 탄생시킨 가말리엘은 자유적 바리새주의를 세우는데 일조를 한 사람이다. 율법에 대한 그의 포용력 있는 해석은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한다. 가말리엘의 죽음이후 유대인들의 존경의 정도는, “토라에 대한 경의도 끝났다. 그리고 순결과 절제도 그와 함께 묻혔다”라고 고백하게 할 정도였다. 이러한 유명한 문하에서 배움을 받은 것이 사울이다. 또한 빌립보서 3장5절에서는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지파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다”고 말한다. 이는 바울과 그의 부모가 비록 희랍문화에서 살고는 있었지만 결코 희랍문화에 융화되지 않고 유대인으로, 바리새인으로 자라나게 했다는 증거이다. 또 바울이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고 하는 것은 바울의 가정이 개종자의 후예가 아니라 유대의 초대 임금 사울의 가문이며, 유다지파를 끝까지 지원한 명문가문인 것을 강조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2)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울이 자신을 바리새인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리새인이 된다는 것은 지도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어려서부터의 교육과정과 청소년 시절의 모든 교육과정은 이미 말한바 엄격하고 수준 높은 교육열에 의해서 배우고 익혔음이 밝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한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갈1:14) 고 고백한다. 바로 이 사실이 사울로 하여, 정통파 바리새인 사울로 하여, 자신의 사상과 믿음, 신봉하는 유대교에 정면으로 대적해 오는 예수당을 처참히 짓밟게 했던 이유가 되는 것이다.

 

3. 기독신앙 박해자 사울

가말리엘문하에서 구약을 정통하여 쪼개고 연구하며, 율법의 엄한교육을 받은 사울에게 있어서 예수당은 당연히‘이단’ 일 수 밖에 없었다. 스데반의 죽음 앞에서, 마치 스데반의 피가 그의 옷 가에 묻는 일이 있어도 그의 생각은 단호했다. 이는 “사울이 그의(스데반)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8:1) 라는 말씀 속에 잘 나타나있다. 또 갈라디아서1:13절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잔해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왜? 사울의 살기가 충만하여 예수당을 몰살하려했는가? 이는 그의 고백에서 잘 나타나있다. 바로 조상들의 유전, 유대종교의 핵심인 율법에 대한 지나친 “열심”(갈1:14)이것이었다. 구약을 분해하고 말씀에서 나타난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켜왔던 사울이었기에 그는 율법에 매인자였다. 민수기 25장에서 제사장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에 이방여인과 부정한 행위를 하는 이스라엘 남자를 창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이러한 열심이 사울에게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 때문에 유대종교의 근간인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깨뜨리는 크리스천들을 필요하다면 죽여서라도 제거하여 자신의 종교를 고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열심이 새로운 신앙공동체인 기독교를 박멸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훗날 그의 고백에서 비롯된 것과 같이 “죄인 중에 괴수”인 사울에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다.

 

4. 계시

사울의 계시는 이미 아는 데로 다메섹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여전히 살기등등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위해 먼 여정에 있었던 바울에게 예수께서 빛 가운데 나타나셔서 사명을 허락하셨다(행9:1-9) 사울의 믿음은 그가 거짓된 메시아로,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나사렛예수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직접 그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모습그대로 말이다. 저주받은 자로 여겼던 그분이 친히 자신에게 보이시므로 자신이 믿고 신뢰해 왔던 모든 신앙이 잘못됐음을 알게 된 것이다. 율법에 얽매여 행위대로만 살아왔던 바리새파 신학이 무너지고 깨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사울에게 있어서 예수는 삶의 전체요, 자신을 새롭게 이끌어가는 새로운 가치였다. 예수께서 30년경에 십자가형을 당하셨는데, 바울에게 나타나신 때를 주후 32년 또는 34년으로 본다. 이는 고린도전서15장4절에 나타났듯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는 말씀이다. 바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보이신 때와 얼마간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5. 바울의 사상과 사역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에게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를 받았고(갈1:120 복음의 사역자로 임명되었다. 어떠하든지 그는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고전9:16). 그는 은혜를 경험했고,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편치 못했다. 바울의 열심은 이런 거대한 사역에 종으로서 헌신하는데 적합한 요소였다. 특별히 그의 서신에서 나타난 특징 중 하나는 그가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린도나 갈라디아 같은 서신에서는 반박적인 태도를 보인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권위에 대한 도전에 대해 격렬한 영적인 명령과 권고들을 발동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권위의식은 바울이 사람이 아닌 신께(예수)직접 사명을 받았다는 체험과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육체적가시를 안고 살았다. 혹자는 간질병이라고 하고, 혹자는 안질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바울의 눈에 대한 일부 기독교인들의 동정은(갈4:15) 그가 안질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3) 가시를 안고 선교사로서의 사역을 감당하는 가운데 육체의 고난에 대해서 그는 고백한바 있다. “몇 번 감옥에 갇히고 수없이 채찍에 맞으며 돌에 맞고 몇 번 파선하고 자연과 인간으로부터의 많은 위험과 굶주림과 헐벗음”은 보통 그가 경험하는 것들이었던 것 같다. 세 번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굳게 하고, 복음이 이방세계에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했을 때 바울은 체포된다. 주후 57년경 겨울을 고린도에서 보낸 후에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으로 전하도록 위임받은 이방 교회의 대표들을 데리고 유대를 향해 배를 타고 떠난 것이 바울의 마지막의 시작이었다. 선상에서의 난동으로 무리와 함께 체포 된 바울은 첫 번 투옥을 끝내고 풀려나지만 다시 투옥된다. 그리고 디모데후서에 떠날 날이 다 되었다고 하며 그가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었다는 말을 함으로써 심각한 분위기를 반영한다. (딤후4:6) 결국 두 번째 감옥생활 중에 유죄로 판결을 받아 주후65/66년경 네로 치하당시에 칼에 순교 당한다. 그의 삶, 특별히 예수를 만난 뒤의 삶은 혹독한 고난의 삶이었다.(고후11:23-30)

 

Ⅲ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울의 신앙은 크리스찬들에 모델이라 생각한다. 철저하게 마음과 몸으로 익혔던 율법을 예수를 만난 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기를 원했던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자신에게 임한 육체의 가시(사단의 사자)를 순종과 겸손으로 대하여 오히려 은혜로 승화시키는 자였다. 그에게 두려움이란 없었던 것이다. 사도바울의 신앙의 결정적 표현이라 생각한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 함이니라”(빌1: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