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초대 교회사

[스크랩] 세계 교회사 연구

에반젤(복음) 2021. 7. 14. 02:32

세계 교회사 연구

 

● 교회사를 시대적으로 구분 하라1) 고대사(AD. 1 - 590)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 시까지

(1) 사도시대(AD. 1 - 100). 사도들의 활동이 끝날 때 까지( 교회 건설기)

(2) 사도후 시대(AD. 100 - 313). 콘스탄틴대제의 기독교 공인 까지(교회 핍박기)

(3) 니케아회의시대(AD.313 - 590).초대교황 그레고리우스1세 즉위까지(신학 조정기)

2) 중세사(590 - 1517).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부터 종교개혁 시작까지

(1) 과도시대(590 - 800).사를마뉴대제 즉위까지(선교 발달기)

(2) 로마교회 성장 시대(600 - 1073). 그레고리 7세 즉위까지(동서교회 분리기)

(3) 로마교회 전성시대(1073 - 1303). 보니페이스 8세 사망까지(기독교실생활기)

(4) 로마교회 쇠퇴시대(1303 - 1517). 종교 개혁까지(개혁 전초기)

3) 근세사(1517 - 현재). 종교 개혁시작부터

(1) 종교개혁시대(1517 - 1648). 베스트팔리아 강화 조약까지(선교 발생기)

(2) 근세 시대(1648 - 1800). 프랑스 혁명까지(선교 확장기)

(3) 최근세 시대(1800 -현재). (세계기독교화기)

 

● 기독교를 위해 로마제국은 어떻게 준비 되었는가를 쓰라

1) 판도가 확대 되었다.

(1) 지중해를 중심한 전 지역이 로마 영토가 되고

(2) 로마가 문화의 중심지로서 문화의 동화와, 통일, 융화를 촉진 시켰다.

2) 도로 시설로 교통이 편리해졌다.

(1) 로마를 중심하여 각지로 도로가 발달되어 교통이 편리해지고

(2) 군사용 도로가 개설됨으로서 전도 여행, 문서전달, 개인 교류에 유익하게 활용되게

되었다.

3) 언어가 통일 되었다.

헬라어와 라틴어가 통용됨으로서 전도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4) 군제(軍制)가 통일됐다.

군율이 엄하여 백성들의 안녕과, 질서를 잘 유지해줌으로서 전도에 유익하였다.

5) 유대인을 분산 시켰다.

기독 유대인들이 상업, 박해등으로 이주 각지에 분산되어 가는 곳 마다 회당을

세움으로서, 이것이 전도에 활용되었다.

6) 도덕이 타락되어 기독교를 선망하게 됐다.

(1) 노예매매가 성행을 하고

(2) 잔인 포악한 풍속이 자행되고(맹수와의 격투 등)

(3) 부모가 자녀에 대한 살해 권을 가지며

(4) 성적인 타락이 만연되어(신전에서 매춘 등) 기독교의 구별된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7) 종교 상태가 혼란했다.

잡신, 황제 숭배 등이 성행함으로서, 영적 감화와 생명력이 있는 기독교를 동경하게 되었다.

8) 철학 사상이 혼미했다.

(1) 스토아철학(Stoicism, 이성주의, 규칙적 철학)과

(2) 에피쿠로스파 철학(Ephicurrianism, 쾌락주의, 유물적 철학)과

(3) 플라톤, 신 플라톤주의(Neo-platonism, 범신론, 무신론) 철학 등으로 방황함으로서 기독교의 신앙이 받아드려지게 되었다.

 

이런 요건들이 기독교 복음전도와 발전에 요인이 되어줬다.

 

●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의 박해에 대하여 쓰라

1) 네로(Nero)의 박해(54 - 68)

(1) 원인 : 자기의 광기로 64년 6월18일 에 방화하여, 로마14구중 3구가 전소하고,

7구가 반소 하는 로마 대화재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2) 죄명 : 이 방화의 책임을 기독 신자에게 지웠다.

(3) 처형방법 : ◎ 맹견과 사자 밥으로 던지고

◎ 십자가에 못 박고

◎ 화형으로 처형시켰다.

(4) 순교자 :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했다.

(5) 네로의 최후 : * 국민의 신망을 잃게 되고

* 원로원 결의로 퇴위되어, 69년에 자살을 했다.

2)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81 - 96)

(1) 원인 : 기독교인이 황제 예배 불복하므로

(2) 죄명 : 기독교도 때문에 모든 신이 노했다는 죄명을 씌워

(3) 처형방법 : * 재산을 몰수하고

* 맹수와 결투를 시키고

* 저명인사를 추방하고, 신자 고관을 살해하는 처형을 하였다.

(4) 순교자 : 황제의 사촌동생 등 많은 신자가 순교 했고

(5) 카타콤 : 박해를 피해 지하 미로에서 예배드리는 카타곰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카타콤은 기독교를 보호 유지 발전시킨 거점이 되었다.

 

● 예루살렘 멸망과 그 영향에 대하여 쓰라

1) 멸망의 원인

(1) 헬라인이 유대인의 시민권 없음을 주장하자 로마정부가 이를 인정한 일에 대하여

분개한 가이사랴 유대인들이 반란사건을 일으켰고,

(2) 예루살렘에서도 주전당이 득세하여 로마군병을 습격하고,

(3) 로마관리들의 악정이 극심함이 근인이 되었다.

2) 멸망의 과정

(1) 가이사랴에서 유대인 2만 명이 살육당하고,

(2) 수리아 총독 갈루스가 3만 명의 군사로 예루살렘을 공격 했으나 실패했고

(3) 로마정부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에게 6만 명의 군대를 주어 예루살렘을 공격하려 했으나 네로의 자살로 귀환 했다가

(4) 디도가 70년 4월에 출정, 성을 포위하니 외부와 교류되지 않아 식량결핍으로 고난 을 당하게 되었다.


3) 결과 : 결국 70년 9월8일에 함락되고 말았다.

(1) 성 파괴 (2) 성전 방화 (3) 사망자 110만 명 (4) 포로 9만 7천명

4) 예루살렘 멸망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

1) 유대교 총본산을 함락함으로서 기독교가 유대교를 능가하게 되었다.

2) 기독교인이 각지로 흩어져 전도의 판도가 확장되었다. 주 무대가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연안의 전 지역으로 확장되게 되었다.

3) 정경 (Canon) 형성이 촉진 되었다.

4) 본격적인 기독교 조직화가 촉진되었다.

 

● 기독교 박해의 원인과 결과를 쓰라

1) 원인

(1) 우연한 원인

? 기독교인들은 부도덕한 자들이라는 오해 : 피신한 동국 속에서 남녀가 음행 한다 오해 하였던 것이다.

? 기독교인들은 불의한 자들이라는 오해 : 성찬식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식 잡아먹는 다고 오해 하였다.

? 기독교인 때문에 신이 노하여 천재지변이 일어났다는 미신이 박해 이유로 제공

되었다.

2) 진정한 원인

? 사상의 부조화 때문이었다.

ㄱ. 로마인은 국가 지상주의이고 기독인은 신본주의였으며

ㄴ. 로마제국은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기독교인은 끝이 있다고 생각했고

ㄷ. 로마인은 가장(家長)명령에 절대 복종하고, 기독교인은 가장이 불신자이면

복종치 않았다.

? 사회생활의 부조화 때문이었다.

ㄱ. 로마인은 오락, 사치를 죄로 여기지 않았으나 기독교인은 죄로 여겼고

ㄴ. 기독교인들의 이교도들과 융화되지 못함을 보고 사회와 정부를 분해 개조하려 는 행위로 보았던 것이다.

? 로마의 종교 정책 부조화 때문이었다.

ㄱ. 국가 통일 위해서 황제 예배를 강요하나, 기독교이는 거부 하였고

ㄴ. 기독교인들의 비밀 집회는 단 국가를 세우려는 정치적 음모라 하여 비밀결사로 취체를 하게 되었으며

ㄷ. 기독교인은 군대 복무를 안 하므로 박해가 생기게 된 것이다.

 

2) 박해의 결과

(1) 더욱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했고

(2) 직업 방해, 재산 몰수, 공직 박탈 등으로 사회에서 추방해 버리며

(3) 신약 성경(Canon) 형성을 촉진하였고

(4) 오히려 기독교 진리를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됐으며

(5) 사도와, 교부들의 순교로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임을 증명하였으며

(6) 교회와 국가의 구별을 명확히 하게 했다.

● 10대 박해에 대하여 쓰라

 




로마 황제

박해 이유

박해 방법

발생 사건

1

네로(54 - 68)

로마시에 방화 했다고

생일연(宴) 촛불대신 화형

베드로, 바울 순교

2

도미티아누스

(81 - 96)

국내에 따로 국가 세운다고, 황제숭배거절

재산몰수, 살해

카타콤 생활 생김

3

트라야누스

(97 - 117)

비밀결사, 사회생활 부조화

황제상 숭배 강요

익나티우스 맹수형

4

하드리아누스(117 - 138)

기독교인 증오로

기독교인을 죄인취급, 국경일에 헌제케 함

성묘에 여신상 세움 호교론 자나옴

5

마르쿠스 아우 렐리우스(161- 180)

질병 흉년으로 복음경시

고문, 리용교회 베일교회 심한 핍박

유스티누스 폴리카푸스 순교

6

셉티미우스 세베루스(205 - 211)

포악 무도하다고

입교 금지 칙령

이레니우스. 오리겐순교

7

막시미누스

지진 사고로

유 형

파피아누스바빌라스 알렉산더 금광 노예

8

데시우스

기독교 때문에 빈쇄해진다고

재산몰수, 악형

오리겐 중형

키프리안 도피

9

바렐리안

병, 흉년 신이 노한 까닭이라고

재산몰수, 의회권박탈, 에배금지

키프리안 순교

10

디오클레티아누스

부제(副帝)갈렐리우스의 참소로

교회파괴, 성경 교회 교인을 분살(焚殺) 시민권정지

니고메디아회당 파괴, 가다리우스 옥사


● 교부들을 입력하고 구분하라

교부의 정의 - 사도들의 직계제자로서 교리에 정통성을 가진 자이고 교리의 발전에

역사적 중요 위치를 차지한 자를 교부라 한다.

교부의 구분 - (1) 속사도 교부, (2) 변증 교부, (3) 헬라 교부, (4) 라틴 교부

1) 속사도 교부

(1) 이름과 저서가 같이 전해오는 교부

? 로마의 클레멘트 (30 - 100)

ㄱ. 1세기말의 로마의 유명한 장로로서 도미티안 박해시 순교했는데, 카톨릭 교회 에 의해 제 4대 교황으로 추대 받았다.

? 이그나티우스(익나티우스 - 117)

ㄱ. 안디옥 감독으로 로마에서 트라얀 박해 시 기쁨으로 맹수에게 던져져 순교 했다.

ㄴ. 사상 - 교회의 통일, 감독의 권위, 순교자의 영광을 갈파했다.

ㄷ. 저서 - 로마로 호송도중 7통의 서신을 집필하였다.


? 폴리카르푸스 (폴리캅69 - 160)

ㄱ. 서머나교회의 감독으로서, 사도요한의 제자이고, 이그나티우스의 친구이며 이레 니우스의 스승이다.

ㄴ. 155년 안토니누스 파이우스 박해 시 순교했다.(156년 2월 23일)

? 파피아스 (60 - 130)

ㄱ. 브리기아 히에라폴리스 감독으로 150년에 순교했다.

ㄴ. 사도요한의 제자인 듯하다

 

2) 저서만 전해지고 저자가 전해지지 않은 교부

 


제목 및 저작연대

주요내용

특 징

사상

목양자(헤르마스 1C말 - 2C 초)

롬16장14절의 허마 인 듯하다.

미래문학으로 천로역정과 비슷하다.

의무와 도덕을 강조

바나바서(바나바 1C말 - 2C 초)

히브리서와 비슷한 점이 많다.



성전에배에 무식한 유대교를 반대하는 입장

디오그네투스에게 주는 편지 - 발신자 수신자 모름

황제를 양해시키려는 변증서이다.

기독교 예배와 생활의 진의를 설명, 신자는 비국민인 근거가 없다, 박해는 신자들이 기뻐한다.

문장이 힘이 있고 풍부하다.

12사도의 교훈

신자의 생활과 습관을 교훈 한 것이다.

세례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실제적 교훈을 기록

187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내의 살램수도원에서 발견됨 1883에 출판


대표적 변증교부

(1) 저스티누스 - 125년 시리아에서 출생 166교수형으로 순교를 당함

155년 안토니오스피우스 황제에게 기독교야 말로 유일한 이성적 참 신 조라고 강조함

(2) 아리스티테스 - 아테네 사람 2세기 초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글을 올려 기독교를 변증함(시내산에서 발견)

(3) 콰드리투스 - 아테네 감독 , 2세기 초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변증서를 제출 하였다.

126년경 예수에게 병 고침 받은 자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고 주장 했 다.

(4) 타티아누스 - 110 - 170 저스티누스의 제자로 앗시리아, 시리아, 로마에서 사역했다.

(5) 아테나고라스 - 2세기 플라톤주의 자로서 아테네에서 사역하였다.

(6) 멜리토 - ~ 190 소아시아 사데교회 감독이었고 헬라 신화비판과 5~6종의 저서가 있 다.

(7) 라틴어 사용의 변증가들 - 미누키우스 펠릭스, 아르노비우스, 락탄티우스

 

● 교부들의 신학에 대해 설명하라

1) 기독론 9인성을 믿으나 신성을 더 강조함

(1) 로마의 클레멘트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엄한 홀이라고 표현함

홀(笏) = 왕이 지니는 홀(笏) 이다. 이 홀은 왕의 권력이 신으로 부터 부여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2) 이그티나우스 :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이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났다.

(3) 헤르마스 : 예수님의 선제 설을 주장 하였다.

2) 3.1 신 교리

희미하지만 삼위일체 교리를 믿은 듯하다. 성령에 대한 구별이 희미했다.

3) 속죄론

(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보이시고자 피 흘리시고,

(2) 회개하여 죄 사함 받는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3) 믿는 자들을 전능의 신께서 의롭게 하신다는 그 신앙으로 의를 얻는다 했다.

(4) 이그나티우스 ; a. 신자는 건축재(돌)이라 하고

b. 십자가는 끌어올리는 기계이며

c. 성령은 밧줄이라고 비유함

(5) 클레멘스(트) : 사도들은 임명을 받고 예수부활로 확신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에 견 고히 되고, 성령의 보증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복음을 말하였다.

4) 천년설 : 재림이 멀지않은 장래에 있다고 믿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천 년간 이 땅에서 왕 노릇 하신다고 설명하였다. (재림 천년 왕국 기대)

5) 윤리주의 : 이방과 구약 사상 의 영향을 받아 윤리주의가 아직 농 후 하였다.

 

● 그리스교부와 라틴교부들에 대하여 설명하라

 




헬라신학

라틴신학

중심지

알렉산드리아

칼타고, 로마

강조점

로고스의 성육신

전통의 확립

특성

신화된 인간의 종교적 이상

법학적, 정치적

철학견해

적극적 수용, 지식우위

비판적, 신앙우위

신관

종속주의

삼위일체

인물들

이레니우스, 클레멘트, 오리겐

이다나시우스, 시릴

티툴리안, 키프리안, 암부로시우스, 레오


● 유대교적 이단과 교회분파에 대하여 쓰라

1) 유대교적 이단

(1) 에비온 파(Ebionites, 가난한 자) - 1세기 말 팔레스틴에서 기원하여 소아시아로 번 져 나갔다.

? 바울교리를 배척하고 히브리어로된 마태복음만 사용하였다.

? 율법을 고수하였다.

ㄱ. 할레를 행하며 안식일을 지키고

ㄴ. 금식하며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다.

? 기독관

ㄱ. 메시아임을 인정하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고

ㄴ. 에수의 인성만 주장 했으며

ㄷ. 수세 이전엔 인간이었을 뿐이고

ㄹ. 수세시에 에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엇다고 주장했다.

? 천년왕국이 임박함을 믿고 기대하였다.

(2) 엘카사이파 - ㄱ. 예수는 아담이 다시 사람이 되어 나왔고 앞으로도 다시 육신을 입 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바울서신을 배격하고, 점성술과 마술을

인정했다.

ㄴ. 할레를 행하고, 안식을 지키고, 금식하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혼합

이었다.

 

2) 교회의 분파

(1) 몬타누스 파 - 156년 소아시아의 프리기아(브루기아)의 몬타누스에 의해 시작됨 영 지주의와 세속화에 반대하여 일으킨 것 맥시밀라 부리스길라 여인이 추종, 새 예언을 주장하며 계시와 방언과 예언을 행하였다.

성경은 전부 정경이라고 주장, 구교와 일치 함, 원시기독교를 부흥 시키고자 함이 목적이었다.

(2) 노바티아누스 파 - 데키우스황제 시대(249 - 251)에 박해로 변절자가 많았는데 이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려할 때 어떻게 처리하느냐로 의견 이 갈라졌다. 7세기에 자취를 감춤

(3) 도나투스 파 - 박해 시 성경을 버린자는 용서할 수없다 라는 강경론 때문에 분파 됨. 330년에는 270명의 감독이 이파에 속함

(4) 마니교 - 로마제국 동방에서 3세기에 일어난 종교 그노시스파와 비슷한 점이 있음

근원이 동방이며 서방으로 흘러와서 기독교와 접촉하고 조로아스터의 배 화교의 요소에다 기독교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다.

교조 마니(216 - 276)는 페르시아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19 ~24세 때 계시를 받은 것으로 주장. 어거스틴도 청년시절에 심취한 일이 있다고 함

 

● 콘스탄틴 대제의 업적을 쓰라

a. 교회보호 : ① 기독교 보호자라 잠임하고 궁중에서 기독교 연설

② 유세비우스를 궁중에 들이고 우대

③ 이단을 멸하고 교회 통일을 도모함

b. 법률개정 ; ① 십자가형을 폐지

② 검투를 폐지

③ 축첩을 엄벌, 이혼에 제한을 둠

④ 죄인 이마에 화인(火印) 하는 것을 금 함

⑤ 교회의 법률을 국가가 공인 했다.

⑥ 기독교를 위한 특별 법령제정 함

주일 휴업, 교직자 세금과 병역 의무 면제 등

c. 천도 : 332년 콘스탄티노폴리스(비잔티움)로 천도

d. 세 왕자에게 제국을 분할해 줌

 

● 니케아 회의 소집동기와 결과에 대해 쓰라.

동기 : 1. 부활절 일자 문제(동방은 유월절을 지키고, 서방은 주일을 중시함)

2. 아리우스(Arius) 설 때문에 교회가 분리 될 까 염려하여

아리우스 = 리비아인으로 당대 최고 학자며 성경 해석에 통달한 루키아누스 의 제자로 알렉산드리아 장로로 큰 세력을 이끌고 있어 추종자가 많은 그가 알렉산드리로스 감독이 삼일신의 현현을 가르칠 때 장 로인 아리우스가 이를 반박함으로 발단됨.

아리우스파에서 신조 초안을 제출하였으나 기각되었고, 가이사라 유세 비우스가 화합의 목적으로 신조를 제출 함 논의의 초점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동질(同質)로 아타나시우스는 추상적 변론을 피하고 구원 사상에 근거하여 주장했다.

결과 : 유세비우스가 제출한 초안(아리우스 설 부인) 에 수정을 하고 토론을 종결,

출석회원 일동이 서명케 함.

가이사랴 유세비우스는 하루 생각하고 서명 했고, 니코메디아 유세비우스는 (이 문서에 동의치 않는 자는 처벌한다.)는 마지막 문구를 삭제하고 서명했다.

결론 : 부활절은 주일에 지키기로 결정했고, 교회 정치에 관한 규정 제 20조를 제공 했 다.

*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기독론 사상 비교

 




아리우스

아타나시우스

부자의 성질

유사질(類似質)

동질(同質)

신성

반신성(半神性)

완전 신(神)

인성

특별히 주장

완전 인(人)

창조

무로부터 창조 됨

낳아짐

영혼

영혼무(無), 로고스가 영혼



 

● 기독교 논쟁에 대하여 설명하라.

⑴ 제2차 회의 ; 장소 / 시기 ; 콘스탄티노폴리스 , 381년

소집자 : 테오도시우스 황제

의장 :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의제 : 아폴리나리스(Apolinaris)설.

내용 :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인성 제한인데 그리 스도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사람의 영에 대치됐고 그리스 도는 사람의 영이 없으니 인성이 제한 된 것이라는 주장

이다.

결의 : 아폴리나리스 학설을 기각,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 이며 완전한 인간이다. 사도신경을 확정했다. 성경의 위 격과, 성부로부터 발출되심을 결정하고, 삼위일체 교리 를 확정 했다.

제3차 회의 ; 장소 /시기 ; 에베소 , 431년

소집자 : 테오도시우스 2세

의제 : 네스토리우스(Nestorius)의 양성론 주장으로 .

내용 :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고 로고스가 임한 것 이라 하며 신 인양성의 점진적 결합을 주장 한 것, 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로스(376 - 444)가 신 인성 분리 불가하다고 항의 하여

결의 : 키릴로스파는 동방회원이 아직 도착 하지 않은 틈을 타 서 네스토리우스의 출교를 결의해 버렸다. 네스토리우스 파가 도착하여 키릴로스를 이단이라고 결의 하였으나 435년 네스토리우스를 아라비아로 유배 시켰다.

에베소 도적 회의 ; 장소 / 시기 ; 에베소 , 449년

소집자 : 테오도시우스 2세

의장 :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의제 : 유티케스(Eutches)의 일성론(一性論 Monophysotosm)주 장, 그리스도는 이성(신성과 인성)으로 되어 있으나 합 일시 인성이 신성에 침입하여 우리의신체와 같지 아니하 다는 주장이다.

경과 : 이 회의는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자파 세력의 확장을 위 하여 유티케스를 지원하였고 테우도시우스황제로 소집 케한것이다.알렉산드리아감독디오스코루스 (Dioscorus)가 의장이 되어 병졸과 무뢰한을 동원하여 반대파를 위협하여 안디옥파 수령을 내어 쫓고 유티케스 를 복직시켰다. 그래서 도적회의라 부르고 정식종교회의 에 계산치 아니한다.

제4차 회의 ; 장소 / 시기 ; 칼케돈(Chalchidon), 451년

소집자 : 마르키아누스(Marcianus) 황제

600명 감독이 참석 했다.

결과 : 칼케돈 신조를 작성. 일성론 정죄, 예수는 완전 신, 인이 었다. 를 결정하고 신인 양성은 혼동, 변화, 분리, 분열 함 없이 연합되어 있다. 를 결정 함

제5차 회의 ; 장소 / 시기 ; 콘스탄티노폴리스, 553년

소집자 :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 -565)

의제 : 일성론자와 화해 하려고 삼장령(The Three Chapters : 안디옥파의 세 신학자의 의견을 반박 한 것)을 발표했기 때문에 소집했다.

결과 : 칼케돈 신조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교리를 삼았다.

제6차 회의 ; 장소 / 시기 ; 콘스탄티노폴리스, 680년

소집자 : 콘스탄티누스 4세

의제 : 일의론(Monothelitism), 양성을 가졌으나 신의만 가졌다.

분쟁

결과 : 이의론(二意論)채택, 신적의지와 인적의지 모두 가졌다 결정.

제7차 회의 ; 장소 / 시기 ; 니케아, 787년

소집자 : 콘스탄티누스 6세

의제 : 성화숭배문제

결과 : 성화숭배하기로 결정했다.

제8차 회의 ; 장소 / 시기 ; 콘스탄티노폴리스, 869,년 879년

소집자 : 바실리우스

의제 :

a. 869 - 이그나시티우스 대 포티우스의 성령 출처 문제로

b. 879 - 니케아신조 확인. 성령은 성부 성자로부터 발출 (發出) 된다.

요약(참고)

* 칼케돈 (Chalchidon) 회의의 결의 사항

(1) 예수그리스도는 신성에도 완전, 인성에도 완전하다.(각 성질은 보존)

(2) 그리스도는 참 신이며 참 인간으로 이성있는 영혼과 육체를 소유하였다.

(3) 신성은 성부와 같고, 인성은 우리와 같으나 죄가 없다.(양성은 섞이거나 변하거나 떠 나지 아니함.)

(4)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성으로 동정녀에게서 출생한다.

* 이 회의는 (니케아)(에베소)양 회의에서 정한 신조를 확인하고 설명을 가하여 교리를 명 백히 하였다.


● 수도원 제도의 원인과 영향에 대하여 쓰라.

일찍이 동지중해에서 출발한 수도원 운동은 초기 중세 유럽 문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전 문화의 보존 및 전달, 이교도들의 개종이 그들의 주요 임무였다. 그것은 불가분의 관계로 여졌던 바, 이교도들의 침입으로부터 고전 문화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전도 사업이었던 것이다. 동지중해와 이집트의 사막에 서 출발한 엄격한 수도원 운동은 갈리아로 전파되었다. 이집트 출신의 수도사들은 자 신들의 주변이 몽땅 이교도로 넘쳐났으므로 그들의 개종에 나섰던 것이다. 갈리아에 전파되었던 수도원은 다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이 두 섬에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전도 활동과 수도원 운동 이 전개되었다. 사실상 7세기와 8세기에 들어가면서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서의 선교 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거꾸로 그들이 보존한 여러 고전 문화들이 대륙으로 역수 출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라틴어로,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고전 문법 책을 구해 그것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반면, 대륙의 라틴어들은 지방 속어들과 융합되 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오늘날의 유럽 대륙 국가들의 언어가 형 성된 시기이다).

1) 원인

(1) 기독교가 국교가 되자 기독교의 세속화 현상이 일어나고 여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금욕생활, 경건생활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2) 교회가 조직화, 규율화 됨에 따라 개인적 신앙 활동을 수도원이라는 별개의 사회 에서 구하게 된 것이다.

(3) 복잡한 생활에서 떠나 물질 없이도 만족할 수 있는 새로운 생활의 욕망이 작용한 것이다.

2) 영향

(1) 수도원이 학문의 중심지가 됨.

(2) 공동생활을 하게 됨

(3) 노동을 장려하여 자력 생활을 함.

(4) 이교도들에게 전도 하는 일을 함

 

● 동방 교부와 서방교부를 구별하여 쓰라.

동서교회의 분열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4세기 로마 제국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자유를 얻은 이래 11세기까지 교회는 로마, 콘스타니노플,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의 5개 교회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 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성립, 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과의 연계 등 으로 약화된 4개 교회가 분열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하나의 보편교회 공동체에서 로마교회가 이탈한 것으로 이해하는 동방의 시각과 로마 교황으로부터 4개 교회들이 이탈한 것으로 이해하는 서방의 시각이 오늘날까지도 대립하고 있다. 이후 로마 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회로, 나머지 4개 교회는 정교회로 각자 분립되었다. 7세기 및 8세기에 들어서자, 유럽은 중요한 사건을 겪게 된다. 이 사건은 크게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수도원 운동, 두 번째는 프랑크 왕국의 성립, 세 번째는 이슬람의 팽 창, 네 번째는 동서 교회의 대분열,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서로마 제국의 수립이다. 7세기와 8세기에 벌어진 이 일련의 사건들은 중세의 남은 기간 동안 서방 세계의 종교 적·정치적 구조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무함마드의 추종자들, 즉 무슬림들은 북아프리카(성 아우구 스티누스는 바로 이곳 북아프리카 출신이다)와 동지중해를 기독교의 영역에서 빼앗아갔 다. 그리고 북유럽에서는 새로운 수도원 운동이 벌어져 로마 교황의 권위를 세워나갔으 며, 로마 교황청은 유서 깊고 세련되며 반동방적(半東方的)인 동로마 제국과 북방의 새 로운 세력(게르만족, 프랑크 왕국)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로마의 교황과 프랑크 왕 국의 왕 및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확실하게 결단을 내려야만 했고, 그들의 결단은 이후 중세 유럽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이 사건들은 일종의 병목 현상을 일으키면서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726년의 동로마 제국 황제에 의한 우상파괴령이다.

 

교부(敎父)는 2세기 이후 기독교 신학의 주춧돌을 놓은 교회 지도자들을 일컫는다. 교부 라는 호칭은 후대 교회에서 붙인 경칭이며, 이들의 신학을 기독교에선 교부학, 교부 신학이라 부른다. 종교철학에서는 교부철학으로 나누어 연구하고 있다. 교부는 2세기에 서 8세기에 걸쳐 기독교의 이론을 세우고 또한 이단과의 열띤 논쟁을 벌여 사도로부터 계승된, 거룩한 보편교회((Catholic Church)를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신학을 연 구하였다고 하여서 아무나 교부로 받들어지지 않는다. 교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음 과 몇몇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 전래의 교회에(antiquitas ecclesiae) 관하여 저술을 써서 인용되는 자.

* 정통교리를(doctrina orthodoxa) 세운 자.

* 성스런 삶을(sanctitas vitae) 꾸린 자.

*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은(approbatio ecclesiae) 자.

교부는 그들이 활동한 시대에 따라 크게 세 무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활동한 혹은 출생한 지역에 따라 무슨 무슨 교부라고 부르기도 한다.

1.사도들의 제자 혹은 그들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교부 (1세기 말 - 2세기초).

2.니케아 공의회 이전의 교부 (2 - 3세기).

3.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교부 (4 - 8세기).

* 동방 기독교는 소아시아, 발칸 반도, 동유럽, 중동 등지의 기독교를 말한다. 동방 기 독교라는 용어는 서방 기독교 측에서 서유럽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기독교를 총칭하 는데 주로 사용된다.

동방 정교회, 오리엔탈 정교회, 동방 가톨릭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 동방교부 들

1. 알렉산드리아와 팔레스티나의 교부들

(1) 유세비우스( 가이사라, 260 ~ 339, 교회사의 아버지, 260년 팔레스티나 출생,)

315년 가이사라 감독이 되고, 339 사망 시 까지 궁정 출입을 했다.

저서 : (교회사), (콘스탄티누스 생애), (복음의 준비), (복음의 증명)

후계자 : 유세비우스의 뒤를 이어 교회사를 집필한 사람

① 소크라테스(Socrates) - 5세기 초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사학자

② 소조멘(Sozomen) - 소크라테스와 비슷하나. 역사의 내용은 다르다.

③ 데오도레트(Theodoret) - 구브로의 감독 458년 죽음. 많은 저술을 남 겼다.

수사학(修辭學, rhetoric) : 언어를 매개로 사상이나 감정을 주고받는 사람, 즉 말 하는 사람, 듣는 사람, 글쓰는 사람, 읽는 사람 사이 에 의사소통의 정도를 높일 수 있도록 말 또는 글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 또는 그 방법을 가르치는 학문.

(2) 아타나시우스 (296 ~ 373) ; 315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됨, 삼위일체 정통교리 고수에 매진하였으나 궁정방침이 변동되므로 3차 례 유배를 당함.

* 33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 트리야 유배

* 34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 로마 유배

* 35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 사막 유배

저서 : (로고스의 성육신), (아리우스를 반격함)

( 콘스탄티누스에의 변증론) 등

(3) 키릴로스(Cyril, 376 ~ 444) : 알렉산드리아 감독 (413 ~ 444)이었으며, 이론은 바르나 성격이 포악하고, 당파심이 강했다. 신 플 라톤파 여 철학자 히파티아(Hypatia)의 피살에도 책임이 있었다. 마리아 숭배를 옹호하였다.

 

2.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방 교부들

(1) 데오도레(Theodore, 350 ~ 428) : 안디옥신학의 아버지, 길리기아 모프수에스티 아 감독였고,성경주석으로 유명했다.(그 단편 이 오늘날 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역사적 언 어학적 주석으로 유명하다.

(2) 가바도기아의 세 신학자

a. 바실리우스(Basilius the Great, 330 ~ 379)

조모의 신앙영향, 안디옥, 콘스탄티노폴리스, 아덴(아테네)에서 수학, 355년 변 호사가 되고 자매의 권고로 수도원생활을 시작했다. 365년 가이사라 교회 부목 사가 되고, 5년 후에는 감독이 되었다. 교회통솔, 지도능력이 특출하고 수도원 규칙을 제정했다. 저서로는 (그리스도의 신성론), (성령론), 설교집, 서신 등....

b. 닛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azians 332 ~ 395)

바실의 동생이며, 형과 같이 공부했고 카파도기니아에서 사역, 372년 권유에 못 이겨 닛사의 감독이 되었다. 38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신학 논쟁에 참가 했으 며 풍유작가 였으며 설교가이다.

c.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Gregorius Nazians 329 ~ 389)

나지안주스 감독의 아들로 출생 아테네에서 바실과 함께 공부 했다. 대설교가 였으며 시인이었다. 신학논집과 서한집이 있다.

(3) 크리소스토모스(Chrysostom, 374 ~ 407, 별명 - 황금 입)

346년 안디옥에서 출생, 아버지는 장군으로 일찍 죽고 어머니 안두사 (Anthusa)는 아우그수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와 같이 칭찬 받는 신앙인이었 다. 법률가, 수사학자, 변호사였으며, 안디옥감독에게 신학을 배운 후 세례를 받고 수도생활을 했다. 안디옥 감독이 되고(39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가 되었다. 해석적 설교와 성경주해에 노력 했고, 사치와 황태후를 공격하다 가 404년 길리기아로 추방되었다.

 

* 서방의 교부들

1) 힐라리 우스 (Hilarius, 295 ~ 368)

프랑스 프와티에에서 출생했고, 철학과 문학에 뛰어났다. 350년 고향 교회 감독 이 되었고, 정통 보수에 헌신 했다. 저서로는 삼위일체론, 신앙론, 시편주해가 있다.

2) 암브로 시우스 (Ambrosius 340 ~ 397)

340년 고올의 수도 토리에서 출생, 로마에서 교육받고 밀라노 주지사가 되고 5 년후 감독이 죽어 후임이 되었다. 교회통솔과 권위 유지에 명성이 높다. 저서로 는 설교집, 성경주해, 찬미가 가 있다.

 

3) 제롬 - 히에로니무스(Hieronumus Jerome 345 ~ 420)

346년 스토리돈의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했고수사학을 공부했다. 20세에 수세했 고, 372년 동방 여행을 하였으며 베들레햄에서 새 수도원을 건축했다 구약의 라 틴어 번역(Vuigate)에 성공했다, (12년간)


● 어거스틴에 대하여 설명하라.

어거스틴(Augustinus) : 354년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출생 아버지 페트리키우스 는 이교도 였는데 (후에 신자가 됨) 어머니 모니카 는 독실한 신자였다. 수사학자로 유명했다. 어거스틴은 청년시절 약 8년간 영지주의쪽영향을 받은 마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387년 3월 암브로 시우스 (Ambrosius)의 설교에 감화 받고 입신(롬 13: 14) 395년 알제리 고향 도시 힙포(Hippo)교회 감독이 되었다. 430년 게르만족의 침공때 76세로 죽었다.

어거스틴의 사상은 루터와 칼빈, 그리고 존 낙스 신앙의 영향을 주었다. 어거스틴은 신을 인격적 체험 대상으로 믿었으며, 그리스도의 양성을 주장 했고, 삼위일체를 주장 하고, 원죄를 인정, 그리스도 구원사역을 확신 했다. 예정론, 무형 교회, 내세관을 확신 했으며, 정통신자됨이 구원의 필수조건이라 했다. 성례와 의식의 중요함을 주장 했다. (성례전론의 원조)

저서로는 : 독백 (387년) --- 신, 영혼, 영생에 대해 논의

참회론(400년) --- 자서전

삼위론(400년 ~ 419년) --- 삼위동등 주장

 

● 펠라기우스에 대하여 설명하라.

영국인 수도사로서 5세기 초에 로마의 도덕적 부패 시정에 노력했다. 성질이 온순하고, 품행이 엄정 했으며, 지식이 명석했다. 카르타고의 장로가 되려다가 파울리누스의 반대 로 못되었다. 예베소의 장로가 되어 그의 학설이 퍼지게 되었다. 431년 에베소에서 이단 으로 규정 되었다.

*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와 펠라기우스의 교리적 차이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펠라기우스

1) 하나님의 예정, 불가항력적 은총

1) 의지 노력으로 개인 구원

2) 아담은 죄로 인해 죽음

2) 아담은 처음부터 죽을 사람으로 출생 범죄 여부없이 죽음

3) 아담의 죄 후손에게 영향

3) 아담에게만, 전 인류는 무관함

4) 유아에게도 원죄 있음

4) 새로난 유아는 범죄 전 아담과 동일

5) 아담 범죄로 죽음, 그리스도 부활로 삶

5) 율법도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

6) 믿음 통해 구원, 세례 시 사죄

6)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도 무죄자가 있었 음


 

 

 

 

펠라기우스 논쟁점 비교

 


주 의

대표적인 주장자

학 설

펠라기우스 주의

펠라기우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게 태어 났으며 구원에 필요한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어거스틴 주의

어거스틴

인간은 죄로 죽으며,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받으며, 이 은혜는 오직 선택 자에만 주어진다.

반 펠라기우스 주의

존 카시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의지가 함께 구원의 주도권을 가진다.

반 어거스틴 주의

케사리 우스

하나님의 은혜가 모두에게 주어지며,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에 필요한 것을 선택하여 행 할 수 있게 한다.


● 그레고리 1세에 대하여 설명하라.

540년 로마 부호 원로원 의원의 집에서 출생, 어머니와 고모 2명이 성자 칭호를 받는 가정에서 성장, 부친 사망 후 재산을 수도원에 기증하고 수도사가 되어 시실리에 수도원 을 6개 세우고 금욕, 고행생활에 정진 함 교황 베네딕트1세 때 행정위원회 부제로 임명 되었고, 교황 펠라기우스2세 대는 교황의 특사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되기도 했고, 교황 비서가 되었다가 교회와 원로원이 모두 그가 교황이 되기를 갈망했으나 거절하고 변복을 하고 도망 하다가 잡혀서 590년 9월에 교황이 되었다.

인격과 생활이 겸손하고 선행과 고행과 공덕을 세워 많은 감화를 주었고, 행정 능력과 현실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과 지혜가 뛰어난 인물

교회의 중요직위에 수도사를 채용하였고, 교직매매를 금 하였으며, 교직자가 된 후 결혼 을 금 하였다. 교황권을 강화시킴, 영국에 전도하기 위해 아우쿠스티누스를 파견함. 연옥 설, 성모 성자 예배, 여공 교리 사죄론을 확립, 예배, 미사, 교회음악, 기도문이 개량 제 정됨. 성경 주해와 설교 집을 많이 펴냄


● 모하메드에 대하여 설명하라.

570년 아라비아 맥카에서 카아바 신당의 관리 압두알라의 유복자로 출생 하였는데 6세 때 어머니 마져 죽어 고아로 가난하게 자라 신경질적이고 우울, 낙심 잘하고 미신적 이 었으며, 신령 강조 숭고한 것을 좋아 하였다. 12세때 삼촌과 사업차 수리아에 가서 유대 교, 기독교 세계와 접촉했으며 25세 때 부자 과부 카디아와 결혼 했다.

610년 40세에 수도 후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일신교를 창도 함으로 맥카에서 추방되어 메디나로 도망 하였다.(6년 - 해기라)

매디나에서 각 종 분쟁을 잘 해결 해준 결과 매디나의 재판관, 치리관이 되었으며, 매디 나의 시민권을 이슬람 신앙을 갖는 자에게만 줌으로 써 세력을 크게 확장 시킬 수 있었 다. 근방의 부족들을 규합하여 630년 맥카를 점령하고 우상을 제거, 신흥 종교의 중심 지로 삼았다.

632년 63세로사망 함

● 서 유럽 전도에 대하여 설명하라.

1) 서 고드족 전도

울피라스(Ulfilas 313 ~ 383) ; 아리안 주의자 였는데, 서고드(스페인지역)족 전체를 기독교화 시켰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뺀 성경을 고드어로 번역 하였다. 200년 후 이교회는 카톨릭화 되었다.

2) 프랑스 전도

(1) 전도자들

a. 이레네우스 (115) : 소아시아 가울 의 감독이었는데, 처음으로 전도하여 리용 시를 복음화 하였다.

b. 마르틴(Martin, Bishop of Tours, 361 ~ 400)

군인이므로 군대식으로 강제 입교 시키고, 전국 각지의 우상 전당을 제거 하며 전도 했다. 프랑스의 수호 성자로 추앙되었다.

(2) 공헌한 왕들

a. 클로레스(Clores, 496) : 예수 믿고 기독교를 장려 했으며

b.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 715 ~ 740) : 독일과 화란에 선교사를 파송하였 다.

c. 마르텔 왕자는 수도사가 되었고,

d. 국왕은 보니파키우스 주선으로 대회를 소집 하였다.

ㄱ. 742년 프랑크 교회 대회의 의 결정

(1) 규칙과 계율 엄수 (2) 교직자 부도덕 엄금

(3) 신부의 결혼 금지 (4) 금욕 생활을 장려키로 함

ㄴ. 감독회의(747) : 교회의 사법권을 인정 함

3) 독일 전도

(1) 월리브로오드(Willibroad, 657 ~ 739) : 영국인으로 아일랜드 교회의 감화와 교 육을 받고 화란과 덴마아크에 선교하고 황무지에 선교활동을 전개 했다.

(2) 보니파키우스(Bonifacius) : 영국의 귀족 출신으로 고등 교육을 받고, 월리브로 오드의 제자로 그를 도와 선교 활동을 했다. 교황 명령으로 프로이센(716) 선교를 거쳐 독일 전도의 사명을 받았고 입신 했던 사람들이 우뢰 신에게 되 돌아감을 보고 수천 군중들 앞에서 우레 신이 있다 는 상수리나무를 도끼로 찍어 무사하자 많은 사람들 이 신앙을 갖게 되었다. 한다. 20년 동안 10만명에 게 세례를 베푸는 업적을 쌓았다. 75세에 순교 함

4) 영국 전도

(1) 선교사들

a. 50년경 로마 군인중 신자가 있어 교회가 건설되기 시작하고

b. 400년경 펠라기우스가 전도 했다.

c. 패트릭(Patrick, 또는 Patricius 396 ~ 493) 첫 선교사가 되었다.

스코틀랜드 신자 가정에서 출생 어릴 때 북아일랜드 에 포로가 됨 추장 집에 서 6년간 목동생활을 함. 피신하여 수도 후 귀가 함. 431 아일랜드인이 도와 달라고 간청을 하는 환상을 보고 안수 받은 뒤 아일랜드로 가서 30년 전도 했다.

d. 아우구스티누스와 수행원 40명

596년 교황 그레고리우스1세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영국에 선교사로 파송 하자 켄트왕 에델버트(Ethelbert) 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영접하고 켄트벨리에 저택 을 지어 주고 자기도 입신 했고 1만 명이 세례를 받았다. 601년 아우구스티 누스는 영국 대감독이 되어 게속 선교 활동을 하였다.

(2) 선교에 공헌한 자들

a. 파이난(Finan of Conlard 470 ~ 548) : 수도원을 크게 발전 시킴

b. 컬림버(Columba 521 ~ 597) : 왕족 출신 수도원을 여러개 세움

c. 콜롬바누스(542 ~ 615) : 독일 선교, 스위스, 이탈리아에 수도원 세움

d. 켄트공주 : 아우구스티누스와 수행원 40명 중 파울리누스가 전도 남편 에드윈 노오덤브리아 왕은 기독교 채택을 가결했다.

e. 기타 : 비이더, 캐드먼,

* 유럽 전도자들의 종족 전도 요약

1. 울필라스 - 340년경 고트족 전도

2. 보니페이스 - 720년경 고트족 전도

3. 니니안 - 400년경 픽트족 전도

4. 패트릭 - 435년경 아이리쉬 전도

5. 클로버스 - 496년경 프랑크족 전도

6. 콜롬바 - 563년경 스코트 전도

7. 켄트베리 어거스틴 - 600년경 앵글 색슨 전도

8. 월리브로드 - 690년 경 프리시아 전도


● 신성 로마제국에 대하여 쓰라.(800 ~ 1806)

샤를 레방 대제부터 프란츠 2세까지 쓰인 명칭으로 기독교적 로마제국을 의미한다. 그 러나 공식적으로는 962년 2월2일 교황 요한 12세 가 독일 왕 웃토1세 에게 그의 공 적을 찬양하고 그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 는 칭호와 관을 줌 대관하고 신성로마 제국이라 명명함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 후 동 로마 국왕이 이탈리아 국왕을 겸하는 자격을 얻었고 국세도 떨치게 되었다.

 

● 이시도르 문서(역대 교황 교령집)에 대하여 쓰라.

스페인사람 이시도르(Isidore 636 사망) 의 저작으로 알려 졌으나 1433년 니콜라스 테 쿠사(Nicolas de Cusa) 가 이시도르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밝힘으로 (가짜 이시도 르 전집)이라고 부른다.

내용 : 교회규칙과 로마 감독 서한등이 담겨 져 있고 1세기 클레멘트부터 8세기 그레 고리2세 까지의 교황과 교회의 회의 결정 사항이 기록 되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부서(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실버스타와 그 후계자에게 라테란 궁전이 로마 의 토지와 이탈리아 토지 대부분을 기증한다는 내용의 날조 문서였다)

1446년 로랜즈 발라 에 의하여 거짓임이 밝혀졌다. ● 교직은 신의 특정한 계급으로 서 지상 재판을 받지 않는다. ● 교황은 논쟁의 최고 재판자로 신 외에는 그 위에 설 자가 없다. ● 교황 니콜라스 1세는 재주 있고 담력 있는 사람으로 이시도르 문서를 이용하여 자기의 이상을 관철 하였다.


● 동서 교회의 분리에 대하여 쓰라.

1) 원인

(1) 일차적인 원인

a. 정치적 원인 : 동서 로마 제국이 분리 된 때문에

b. 문화적 원인 : 동 - 희랍어, 서 - 라틴어를 사용 하므로 의사가 불통이 됨

c. 인종적 원인 : 국민성의 차이 때문에

(2) 근본적인 원인

a. 동서 관계없이 로마 교회가 샤를마뉴 대제에게 왕관을 수여 하므로

b. 사상적인 이유

동 : 교리중심(사색, 철학, 황제 중심)

서 : 제도중심(법적, 교황 중심)

c. 교리적 이유(성령론 문제)

동 : 성부에게서 성령이 유출

서 :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유출

d. 성상 숭배 문제

동 : 반대

서 : 찬성

(3) 직접적인 원인 ---- 교권 쟁탈 문제

a. 콘트탄티노폴리스 대주교 이그나티우스 파면문제

동로마 황제는 이그나티우스를 반역죄로 감금함. 그 이유는 황제의 외숙 바르 다스가 자부와 간통 했으므로 857년 강림주일의 성찬 참석을 거부하였기 때문

로마지방 대회는 이그나티우스를 대주교로 시인하고 동방은 교황을 부인(否 認)하기로 결의 하였다.

b. 불가리아 문제

불가리아 왕 보고리스 는 로마 교황과 접근 연락 취하다가 후에 왕은 교황에 게 불만을 품고 동방에 속하기를 원하였다. 당시 대주교 이그나티우스는 대 감독을 불가리아에 파송하여 로마 교사들을 추방 하였다. 포티우스 복직 후 불가리아는 동방에 속하게 되었다.

 

 


 

● 그레고리우스 7세의 생애와 업적을 쓰라

1015년 소아나(Soana)의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성 마리아 수도원에서 수학, 그레고 리우스 6세가 축출 당 할 때 독일로 동반하였다. 그가 죽자 남부 프랑스 클뤼니 (Clugny) 수도원으로 가서 각지를 순회하며 교황 권 확립에 힘썼다. 레오 9세가 교황이 되자 그는 부집사직에 임명되어 교황 권을 실제적으로 행사한다. 1073년 58세에 교황 이 되고(그레고리우스 7세) 1085년 70세로 죽었다.

업적으로는 : 교직매매를 금하고 교직자 독신 생활을 강조햇고, 교직 임면권과 재산

감독권을 교황 산하에 두었으며 교황은 국왕을 지배할 권한이 있다며

교황 권을 강화 했다.

 

● 십자군 전쟁에 대하여 설명 하라

1. 개요

서기11세기부터 14세기에 걸친 회교도에 빼앗긴 성지 엘루살렘을 탈환하기위하여 유 럽 그리스도 교회가 주도한 수차례의 원정 전쟁 (1095년 시작되었던 십자군 전쟁 은 1456년까지 약361년 동안 계속) 십자군(라틴어: croisade)은 역사적으로 11세기 부터 13세기까지 감행된 중세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 하는 것을 목적으로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한 행해진 대규모의 군사 원정을 가 리킨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은 처음의 순수한 열정과는 달리 점차 정치적 경제적 이권에 따라 움직이면서 순수함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 절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 켜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을 몰아내고 라틴 제국을 세운 제4차 십자 군이었다.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측에서 보면 십자군 원정은 성전이었지만, 비잔티움 제국이나 이슬람 국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침략전쟁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2. 배경

1071년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에게 침략을 당하자 동로마의 황제 로마노스 디오게네스 가 Manzikert 전쟁에서 패배하고, 투옥 당함. 1081년 알렉시우스 콤네우스기 황제가 되어서 1086년 안티오크 베데스다등의 도시가 이슬람에 빼앗기자 서방에 원군을 요청 하여 교황이 민중과 그리스도교회를 선동하여 전쟁 발발.

 

3. 경과

이 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와 문명의 충돌로써 서양의 중세사에 가장 큰 의 미를 가진 전쟁이며 이 전쟁의 배경에는 교황과유럽영주들의 잇속과 이해타산이 엉켜 원래목적인 성지탈환은 뒷전이고 전리품 노획과 약탈이 우선된 전쟁 이였다. 십자군 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자마자 이슬람교도도들을 무참하게 학살했고, 포로의 학대 행위 로 인해 이슬람을 뭉치게 했고 결과 는 결국 성지회복은 실패했고, 십자군은 타락하 여 중세 상인들의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으로 전락,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교황의 독 단적인 의도가 강해 이루어진 전쟁이며이를통해 교황의 권위 신분사회의 후퇴 중세사 회 영주의 몰락을 초래하게 되었다.

4. 원인

3세기 이후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애를 보냈던 지역을 방문, 즉 성지 순 례 여행을 해왔다. 순례 여행이 안전하고 용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 양 쪽의 상황이 모두 안정되어 있어야 했지만 팔레스타인 지방의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던 하킴은 11세기 초에 선임자들의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포기하고 기독교 신자 및 유대 인을 박해하기 시작함으로써 성지 순례 여행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1050년 무렵 셀주 크 투르크인들이 페르시아에 국가를 건설하고 이집트의 시아파 통치자들에 대항하여 수니파 이슬람의 옹호자가 되면서 순례 여행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따라서 유럽은 성 지를 이슬람 세력의 영향으로부터 해방시키기를 원하였고 당시 영주의 장남 이외의 아 들들은 상속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미지의 땅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또한 도시 상인 들의 시장 개척에 대한 요구 등 종교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십자군 원정에 대 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십자군의 시초는 1081년 당시 비잔티움 제국 황제인 알렉시 오스 1세의 지원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권의 공격에 시달 렸고, 제국의 가장 중요한 영토인 아나톨리아 지역을 거의 잃을 지경이었다. 이에 알 렉시오스 1세는 무슬림들이 성지순례를 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을 탄압한다는 과장된 주 장을 하면서 로마 교황청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고, 당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 지를 탈환하라는 연설을 통하여 사람들을 선동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의 선동에 설득 되었다. 곧 전 서유럽에서 군대가 동원되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약 200여 년에 걸쳐서 일어났다.

 

5.전개과정

제1차 원정

1096년~1099년. 셀주크 튀르크의 압박으로 괴로워하던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 스 1세 콤네노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1095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로마 가톨릭교도 들에게 이슬람교에 대한 군사 행동을 호소하여 전쟁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면죄된다고 선언하였다. 이 호소에 응한 서유럽의 기사들은 무슬림의 지배하에 있는 도시를 공격 해 학살, 약탈 등을 저지르면서 예루살렘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당시 이슬람교 세계 의 통치자들은 일치단결하지 못하고 제각각 분열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군의 공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1099년,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한 다. 성 안으로 난입한 십자군은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 질렀다. 그 결과,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걸쳐 이르는 중동 지역에 예루살렘 왕 국들 몇 개의 십자군 국가들이 세워졌다.

 

제2차 원정

1147년~1148년. 당분간 중동에서는 십자군 국가 등 기독교도와 군소의 도시 등 이슬 람교도가 공존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슬람교 측이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여 만회하였다. 이에 따라 유럽에서는 위기감이 조성되어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로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당시의 명성 높은 설교가 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교황의 부탁을 받고 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참가를 권유하여,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신성로마제 국의 콘라드 2세를 중심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모였지만 전체적으로 통제가 되지 못하 고, 큰 전과를 이룩하지 못한 채 소아시아 등지에서 이슬람군에게 패배했다. 어떻게든 간신히 팔레스타인까지 도착했지만 다마스커스 공격에 실패하여, 철수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제3차 원정

1189년~1192년. 1187년에 이슬람교 세계의 영웅인 살라흐 앗 딘(살라딘)에 의해, 대 략 90년만에 예루살렘이 이슬람교 측에 의해 점령, 탈환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 재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호소하여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 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참가하였다. 프리드리히 1세는 1190년에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강을 건너다 낙마해 익사했다. 그리고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는 1191년에 악콘을 탈환하였다. 그 후 필리프 2세는 귀국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살라흐 앗 딘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성지 예루살렘 탈환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악콘을 확 보한 것으로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는 보장되었다).

 

제4차 원정

1202년~1204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요청에 따라 실시되었는데, 예루살렘은 아니 고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도항비가 부족한 상황이 었기 때문에, 십자군의 수송을 하청받은 베네치아의 요구를 받아들여 수송료의 부족분 을 지불하기 위해 헝가리 왕국을 공략, 같은 기독교 국가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로마 교 황청으로부터 파문 당한다. 그 다음에는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 라틴 제국이 건국하였다. 멸망한 동로마제국의 황족들을 제국령 각지에 망명 정권을 수 립했다(동로마제국은 57년 후인 1261년에 부활한다). 알비 십자군 어린이 십자군 어린 이 십자군은 10대 어린이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십자군에 가담한 광신적인 종교현상을 말한다. 스테판이라는 10대 소년이 우두머리였으며, 출애굽 설화에 나오는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이 벌어질 것이라는 자신만만한 주장과는 달리, 유럽 상인들의 농 간으로 노예로 팔리거나 해상사고로 수장되고 말았다. 이들 중 노예로 팔린 소년들은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의 관용으로 해방되었다.

 

제5차 원정

1218년~1221년. 악콘 왕국(예루살렘 왕국의 후신)의 장 드 브리엔느 등이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하는 데 실패하였다. 한편, 머나먼 동방에서 수수께끼의 기독교 왕국의 프레스터 존이 대군을 인솔하여 십자군을 도우러 온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있었 다. 그러나 그 정체가, 훗날 유럽 전 국토를 뒤흔드는 몽골 제국의 군대라는 사실을 그 들은 알아채지 못하였다.

 

제6차 원정

1228년~1229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로 임명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종종 원정을 재촉하였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이를 이행 하려 하지 않자 그를 파문하였다. 1228년이 되어서야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된 채로 십 자군을 일으켰다. 당시 이집트 아유비드 왕조의 술탄 알 카밀은 내란으로 골치를 썩고 있던 상황인지라 프리드리히 2세의 교묘한 외교정책에 휘말려,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이양 받았다. 그레고리오 9 세는 교회로부터 파문된 채로 있던 프리드리히 2세가 예루살렘의 통치자가 된 것을 구 실 삼아,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십자군을 일으켰지만 황제군 에게 격퇴되어 1230년에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을 풀어주었다. 1239년에 맘루크 왕조가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 면서 휴전은 유명무실해졌다. 1239년부터 1240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제후 등이 원 정에 나섰지만, 역시 싸우지 않은 채 귀환하였다.

 

제7차 원정

1248년~1249년. 알 카밀이 죽은 후, 1244년에 예루살렘이 이슬람교 측의 공격을 받아 함락, 2000명 남짓한 기독교도들이 학살되었다. 1248년에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원정을 하게 되지만, 아유비드 왕조의 살라딘 2세에 패배하고 포로가 되어,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제8차 원정

1270년.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재차 출병, 아프리카의 니스를 목표로 삼았지만, 도중에 서거하고 만다.

 

7.결과 및 실패의 원인

십자군 운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가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이슬람권의 결집이다. 초창기 십자군의 연전연승은 당시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분열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걸출한 지도자였던 살라흐 엣 딘(통칭 '살라딘'으로 불림)가 등장하여 이슬람권은 세력을 결집하여 십자군에 반격을 하여 그들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당시 살라딘은 예루살렘 점령 시 피 정 복 민들에게 관용을 보였고, 이는 이슬람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게 했다. 심지어는 적인 소년 십자군이 유럽 상인들의 농간으로 노예로 팔리자 이들을 해방시켰다.

 

두 번째는 십자군의 잦은 와해와 그로 인해 야기된 내부 분쟁이다. 십자군은 상호 간, 또는 내부에서 국가 간 대립 및 영토와 경제적 이익 등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교 국가인 헝가리의 자라시를 베네치아 상인들의 농간으로 점령한 적 도 있다.

 

또한 무지와 광신, 편협성을 버리지 못한 십자군의 잦은 횡포는 당시 성지의 백성들과 같은 기독교권이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신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거창하게 시작되었던 처음과는 달리 그 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끝에는 초라하게 종 말을 고하고 말았다. 또한 동로마제국에서 십자군들이 벌인 동방 정교회 교인들에 대한 학살과 약탈 그리고 정교회 성당인 성 소피아 성당에서의 무례함은 비잔티움 제국의 국 교인 동방정교회와 십자군 기사들의 종교인 로마 가톨릭 간의 대립이 더 심하게 고착되 어, 1054년에 있었던 교회역사 최초의 분열사건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의 분열이 고 착화되게 했다.

 


8. 십자군 전쟁이 끼친 영향

비록 십자군은 이슬람의 수중에서 성지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후의 유 럽과 중동의 역사 및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경제적·정치적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보았다. 초기에는 아말피, 베네치아, 바리만이 동방과의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 다. 그러나 이후에 피사, 제노바 같은 다른 도시들도 지중해 무역 활동에 함께 동참하 게 되면서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들은 십자군에게 무기 및 식료품 등을 대여해주는 조건 으로 안티오키아, 베이루트, 트리폴리, 예루살렘, 키프로스, 알레포,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다른 여러 도시들에 위치한 주요 무역 거점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는 무역 확장을 위한 전위로서 동방과의 무역을 독 점하기에 이르렀으며 유럽의 시장들에 철, 모피 등 동방의 진귀한 물품들을 공급하였 다. 이들이 획득한 부는 당시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하여 상업과 공업 이 크게 발달하였고 훗날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 하게 된다.

 

9. 교황권이 쇠퇴된 이유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게 되면서 십자군 전쟁을 주도해온 교황권이 크게 손상을 입게 되 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던 교황권이 약해졌다는 것은 곧 기독교적·중세적 통합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서유럽은 더욱 가속적으로 분권화되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유럽의 동질성을 부여해왔던 종교적 통합의 중심마저 약화되자 각 나라들은 왕권이 강화되어 각개약진의 길로 나선 것이다. 바야흐로 중세는 해체의 조 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요점 정리

1) 원인 : 회교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1071년) 성지순례를 확대 했고, 흉년으로 경제적 불황이 계속 되자 반작용으로 신앙 열이 발화되어 성지 순례 행사가 잦아 졌고,

비잔틴 황제의 구원 요청이 있어 시작이 되었다.

2) 경과 : 제 1회 (1096 ~ 1099년)

선동자 : 교황 우르바누스(Urbanus 우르바노)2세 가 클레르몽(Clermont)종교 회의에서 성지 회복 결의를 하고 십자군을 조직키로 함. 십자군에 동 참하면 일체의 죄를 사면 해 준다고 하였다.

인솔자 : 고드프리(Godefrey), 레이몽, 로베르, 위고

목 표 : 투르크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하려는 것임

종군자 : 30만 명(독, 프, 영)

결 과 : 니케아, 안디옥, 에뎃사,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1099년 7월 15일 예루살 렘 왕국을 건설하고 고드프리가 왕이 되었다.

 

제 2회 (1147 ~ 1149년)

원 인 : 에뎃사가 회교 수중에 들어가고 예루살렘을 위협함.

교황 에우게니우스(Eugeniu) 3세가 베르나르투스를 유세케 하여 독일, 프랑스 왕이 호응을 함

대표적 인솔자 : 콘드라 3세, 루이 7세

목 표 : 투르크로부터 에뎃사를 재탈환 하는 것

결 과 : 서방의 십자군과 동방의 수비대 사이의 불화는 많은 십자군을 잃는 결 과를 초래 했으며 탈환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나, 포위된 모하메드 자파분쟁으로 40년간 평안 하게 지내게 되었다.

 

제 3회 (1189 ~ 1192년)

원 인 : 1187년 10월3일 예루살렘이 함락되므로 알렉산더 3세의 선동으로

대표적 인솔자 : 프리드리히 바바로사, 존엄왕 필립, 리차드1세

종군자 : 영, 불, 독군이 합세하여

목 표 : 살라딘과 사라센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재탈환 하는 것

경 과 : 프리드리히는 익사하여 독군은 중도 귀국하고, 필립의 프랑스군도 귀국 하였으며, 리차드의 영국군만 단독 진격하여 아크르와 욥바를 탈환하고 이집트왕 살라딘과 교전한 뒤 협약을 맺은 후 귀국했다.

휴 전 : 성지 순례자를 괴롭히지 않기로 협정함

* 이 3차 까지는 종교적 정열로 육로를 통하여 수행되었으나 4차부터 는 세속적 욕구로 해로를 통하여 수행 되었다.

 

제 4회 (1202 ~ 1204년)

선동자 : 인노켄트 3세의 주장으로

대표적 인솔자 : 상파뉴의 티보, 블루아의 루이 볼더윈, 시몽 드 몽포르, 헨리 단 돌로

목 표 : 이집트를 침공 하므로 서 사라센의 세력을 약화 시키려고.

결 과 : 베니스상인들의 농간으로 기독교 도시인 자라 항을 약탈하였고, 이로 인해 십자가군들은 파문당했으며, 그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 하 여 교회의 유물을 서방교회로 빼앗아 오고, 라틴제국을 세우고 발드윈 을 제왕으로 삼았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를 로마 교회계통으로 세우고 로마교회에 예속시킴으로서 동서교회간의 증오심이 격심해 졌 다.

 

소년 십자군(1212 ~ )

원 인 : 죄 없는 청결한 소년들에게 맡기면 성지 탈환이 될까 하여 프랑스 목 동 스테파노와 독일 소년 니콜라이 등 소년 3만 명이 진격하였다.

결 과 : 대부분이 도중 파선하여 익사하고, 기아로 많이 죽고, 종을로 팔리고 살해당했다.

 

제 5회 (1219 ~ 1221년)

선동자 : 호노리우스 2세

대표적 인솔자 : 폴랜드의 윌리암, 브리엔느와 존

목 표 : 이집트를 침공 하여 사라센의 세력을 약화 시키려고.

결 과 : 이집트의 다미에타를 빼앗았으나 이내 다시 빼앗겼다.

제 6회 (1228 ~ 1229년)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불신자였으나 교황의 협조를 얻기 위하여 대군을 인솔 예루살렘성지를 회복하려고 진격하였다. 일시 성지를 회복하고 술탄과 10년 간 휴전키로 협정을 하고 예루살렘 지배권을 얻었으나 이로 인해 프리드리히는 파 문당했다.


제 7회 (1248 ~ 1254년)

원 인 :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종교적 열심으로 이집트 침공으로 성지를 회복하 려고 이집트를 침공하였다. 그 결과 1만명 군사가 거의 피살되고 왕만 귀국 하였다.

 

제 8회 ( 1270 ~ 1291년)

원 인 : 루이 9세가 다시 일으켰으나 질병으로 사망, 영국 왕 에드워드 1세가 진격하여 나사렛을 점령하고 10년간 평화 조약을 맺음. 1291년 드디 어 예루살렘은 완전히 회교도 소유가 되어 버렸다.

 

십자군 실패의 원인

1. 십자군의 핵심인 교황에게 군사 통솔권이 없었다는 점.

2. 출전한 귀족, 기사들 간의 전쟁목적이 다르고 이해가 상반된 점

3. 최고 목적인 종교 열이 식어지고 , 재물을 약탈하기 위한 불순동기가 작용된 점

4. 십자군은 오합지졸들이었고, 회교군대는 지리에 능했다.


십자군의 유익

1. 회교도의 서방 침입을 저지 시킴

2. 유럽 제국의 단결 촉구, 기독교 국가의 의식을 환기 시킴

3. 귀족이 쇠퇴, 봉건제도 붕괴하고 상공업이 흥왕 함

4. 해운업의 발달로 이탈리아, 지중해 연안 도시가 번영됨

5. 모하메드 국가의 새 지식을 흡수하고 동방과의 접촉 기회가 많아짐

6. 로마 교회의 수입 재산 증가로 교황권이 강화 됨

 


● 스콜라 철학에 대하여 설명 하라

- 참고 -

중세기 특히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완성되었기 때문에 '중세철학'이라고 불릴 만큼 중세기를 풍미한 철학이다. '스콜라'(Schola)란 라틴어로 학교를 뜻하는데, 이 학교란 4세기 이후의 수도원과 성당에 마련된 부속학교를 말한다. 이 학교에서 가르치던 학문을 '스콜라학'(Scholasticism)이라고 불렀으며, 특히 이 학문은 신학과 철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철학은 기독교를 보다 합리적으로 설명하며, 신앙의 근거와 동기를 입증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였기에 '기독교철학'이라고도 불렀다. 이 철학을 통하여 철학과 신학은 조화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15세기부터 스콜라 철학은 점차 쇠퇴하여 유럽 철학계에서 우월했던 기반을 상실해 갔다. 그 원인으로는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① 스콜라 철학 안에 점차 유명론(nom inalism)이 유포되어 형이상학의 중요성이 간과되었다. ② 100년 전쟁(1337-1453)으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유럽이 혼란하였고 사람들의 정신구조 자체가 지적 생활로부터 멀어졌다. ③ 개념이 본유의 관념(本有觀念)이라고 하여 주관주의의 l길을 연 데카르트(R.Descartes)의 영향력은 개념의 객관성을 강조하는 스콜라 철학의 기반을 흔들었다.

 

1) 시대구분

제 1 기 : 9 - 12C 발생기

제 2 기 : 13C 전성기

제 3 기 : 14 - 15C 쇠퇴기

2) 성 격

Scholar(스콜라) 라는 말은 샤를대제의 궁정학교 명칭에서 유래 되었다.

신앙과 지성, 종교와 철학의 유기적인 조화를 강조하고, 기독교와 희랍(그리스) 철학의 혼합, 교회 교리를 철학적으로 논증했으며 그들의 책임은 신학을 그 시대사조에 맞추 어 재 조정하는 일을 했다.

3) 가 치

놀랄만한 지능적 광대구조, 신학방법의 대 진보를 가져왔고, 기독교 진리를 합리적 또는 철학적으로 논증했으며 진리 해설 상 오류 방지에 큰 도움을 준 것이다.

4) 약 점

역사적 평론을 경시하고 터무니없는 철학위에 수립 했던 점. 성경해석에 전설적인 해 설을 시도했던 점. 형식 논리를 과도하게 구사하고 궤변을 일삼았던 점. 성경이나 교 회 역사에 근거가 없는 이론을 도입했던 점. 이단을 뒤집어 놓은 것이 정통이라는 독 단이 생긴 점이다.

5) 대표적인 학자들

(1) 스코투스 에리게나(Scotus Eriugena 810 ~ 877년) : 아일랜드 출신으로 845년 궁정학교에서 일하면서 높은 대우를 받았다. 저서로는 가짜 디오니시우스, 자연 의 구분이 있으며 사상은 범 신론적이며, 신과 만유를 동일시 했다. 신 플라톤 사상을 중세에 전달해주었다.

(2) 안셀무스(Anselmus, 1033 ~ 1109년) (객관적 사변의 사상가, (思辨 = “경험 에 의하지 않고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인식하고 설명하는, 또는 그런 것”) : 북 이탈리아 아오스타(Aosta) 출신, 프랑스 베크 수도원에서 수도, 1078년에 수도원 장이 되었다. 1093년 캔터베리 대감독에 선임되고, 국왕 윌리암2세와 충돌하여 국외로 추방 되었다가 헨리 1세 때 소환되어 1109년 영국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 독백(Monologion), 대화(Proslogion), 속죄론(Cur deus Homo)

사상은 : “내가 믿으니 이해 할 수 있다”고 함. 평신도 서임을 반대하고, 대석의 교리를 전함.

(3) 아벨라드(Abelard, 1079 ~ 1142년) (주관적 사변의 사상가) : 1079년 프랑스 출 신, 22세 때 파리에 학교 세우고 철학을 강의 함. 1115년 노트르담에 있을 때 명 성이 높음, 실수로 친구 베르의 질녀 엘로이즈와 비밀 결혼 생활을 하다가 그녀 의 숙부에게 거세를 당했다. 수도원장이 되었을 때 문하생이 수천명이 되었고, 1140년 이단으로 선고 받고 2년 후 죽게 됨.

저서로는 : 긍정과 부정, 기독교 신학, 불행의 이야기 등

사상은 : “이해가 되기 전 까지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1. 신학연구의 자유를 주장

2. 신의 계시를 신앙과 희망과 사랑과 성례에서만 한정 하고, 선지자와 사도도 잘못될 수도 있다며 원죄를 부인 하고 자유 의지에 의 한다고 함.

3. 속죄설, 도덕 감화설을 주창. (십자가는 죄인이 회개할 생각이 나게 한다 는 것이다.)


대학설립 : 수도원이 발전되고 많은 학생이 모여 온 것이 기원이 되었다.

설립된 대학 : 볼로냐(Bologna) - 이탈리아 1158년 (법학)

파리(Paris) - 프랑스 1186년 (신학)

옥스퍼드(Oxford) - 영국 1200년 (신학)

살레르노(salerno) - 이탈리아 1200년 (의학)

 

조직과 내용 : 예과 - 음악, 논리학, 수학 등

본과 - 신과, 법과, 의과

라틴어를 사용, 강의와 변론을 함

특징 : 국가나 교회가 간섭 않고 교수나 학생의 자치 단체로 발전 함

대표적인 학자 : 알렉산더(영국인) - 프란체스코파 단원의 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입장에서 신학을 연구 하는 교수 파리 에서 교수 함. 저서 - 신의 요의

(1185 ~ 1245년)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 독일의 신비주의자 도미닉 단원 아리스토텔 레스 철학과 신비주의의 조화를 위해 노력 하였으며 신학은 하나의 과학이라고 주장 함. 쾰른에서 18년간 교수 하다가 87세로 죽었다. 믿음과 이성의 관계에 대하여 신학 은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학문이라고 하였 다. (1193 ~ 1280년)

보나밴투라 - 알랙산더의 제자 로 마그누스 문하에서 배웠다. 프란 체스코 교단 단원, 신비주의자 고행 주의자, 참된 지 식은 오로지 하나님의 신비로우심에 대한 명상으로부 터 얻어 진다고 보았다. (1221 ~ 1274년)

토마스 아퀴나스 - 이탈리아 나폴리 아퀴노 백작의 아들이며 도미 닉 단원, 파리 대학 출신으로 마그나누스에게 사사 받음, 1272년 교황 울반2세의 초빙으로 나폴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가 1274년에 죽었 다. 저서 : 신학총론 - 이 책은 중, 고대 기독 교 사상을 집합하여 체계화 한 것이며, 카톨릭 신앙의 표준이 되는 조직신학서 이다. 근대사상 부흥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227 ~ 1274년)

던스 스코투스 - 프란체스코 단원, 옥스퍼드, 파리, 쾰른 대학 교수 를 역임 했으며 독일 쾰른 수도원장이 되었고, 아퀴나스 반대자로 유명하다. (1255 ~ 1308년)

윌리엄 옥캄 - 유명론자, 영국 스코투스의 제자로 옥스퍼드출신, 파 리 대학 교수였으며 교회와 속권의 분리를 주장함. 교황 무오설을 반대 했으며, 교회의 일반적인 권위 를 부정 하였다. (1280 ~ 1348년)

 

※ "敎皇無謬說"이란? 이는 敎皇이 하는 일은 잘못이나 실수가 없고 만사萬事가 정확하며 교황이 교황으로서 공식적으로 신앙이나 도덕 교리에 관하여 선포한 내용은 절대로 틀 림이 없다는 뜻이다. *힐데부란트Hildebrand[그레고리 7세 Vll:1073-85]는 '로마 카톨 릭 교회는 완전하다 성경에 비취어 교회는 한 번도 오류를 범한 일이 없었고 장래에도 잘못될 수 없다'고 선포하였다. 교황은 전 세계 교회의 우두머리며 각처에 있는 주교. 사제들을 지도할 최상권을 가졌다고 주장하였다.이 교황무류설은 지난 800년 동안 지 속되어 왔다. 이는 20세기가 끝날 때가지 존속될 것이다. 다행이 현 교황청과 교황은 과거 카톨릭이 범한 죄악을 94회나 인정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유감을 표시하고 있다.

 

● 탁발교단에 대하여 쓰라

탁발교단이란? 청빈한 생활을 서약하고 구걸로 생계를 이어가는 수도단이다.

발달원인 : 교황과 감독등이 부와 권세를 얻고 사원에서 안일하게 지내고 예배의식만 중 히 여기고 설교를 가볍게 여겼고 백성들을 멀리 하며, 수도사들은 청백한 일 만 힘쓰고 전도와 구령사업을 등한시 하므로...

대표적인 인물 : 프란체스코(Francesco, 1182 ~ 1226년)

이탈리아 앗시시(Assisi)출생. 3인조 전도대(소형 제단)를 조직하여 각 처에 파송 함. 교단을 운영했다. (교황 인노켄트 3세의 인가 받음. 교단 원은 1221에 3천명이 됨. 귀족, 학자, 부호들이 많이 입단 함.

영향 : 민중의 벗이 됨. 많은 대학교수들이 참가 하므로 대학 세력이 확장됨. 13세기 의 학자들은 거의 이 교단에서 배출되었다.

 

● 스콜라 철학의 대표적 학자들을 쓰라 (상기 참조)

대표적인 학자 : 알렉산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보나밴투라, 토마스 아퀴나스, 던스 스 코투스, 윌리엄 옥캄

 

● 신비주의 단체들에 대하여 쓰라

(1) 베기니(Beguini) : 11세기부터 있은 여자 독신단체로 공동생활, 자급자족하며 봉사 를 목적으로 했다.

(2) 베가르드(Beghards) : 1220년에 조직된 남자, 평민 직업 자들의 단체로 공동생활 기도와 자선사업에 힘썼다. 탄압으로 화형 자가 생겼다.

1311년 교황 클레멘스 5세가 해산 명령을 내림.

(3) 신우단(GottesFreunde, 신비자의 연맹) : 공동생활을 하지 않으나 각각 기도와 봉사 로 협조 하였다. 병자를 위문하며 ,1348년 흑사병 유행 시에 시체 처리에 참여 힘을 써 왔다.

(4) 공동운명의 형제(Brethren of the Common Lot) : 게르하르트 그로오트(Gerhard Groot)가 조직 했으며 교육, 서적 보급에 힘쓰고, 학교를 설립했다.

대표자 : 토마스 아 캠피스(Thomas A Kempis, 원명 : Thomas Hamerken von Kempen)) : 1381 ~ 1471년 켐펜(Kempen)출생으로 성 아그네스(St, Agnes)수도원 수도사 였으 며 저서로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와 장미의 동산 등이 있다.

요한 벳셀(Johann Wessel 1420 ~ 1489년) : 공동운명 형제단에서 설립 한 학교에서 수학했고, 토 마스 아 캠퍼스의 저서를 읽고 크게 감동 받았으며 파리, 로마, 쾰른, 등지의 대학 교수로 명망이 있었 다. 믿음으로 구원 받음을 주장 했다.

채찍질 고행자(Flagellant) : 33일을 고행 하였으며 1476년 한스 뵘의 회 개설교로 5만명이 회개 했다고 한다.

 

● 문예부흥(Renaissance)의 원인과 그 영향에 대하여 쓰라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서 일어난 르네상스는 종교개혁과 아울러 세계역사의 큰 변혁 운동이었다. 동방과 접촉으로 그리이스와 라틴의 고전 문학이 부흥되고 인문주의 (Humanism) 가 싹틈으로써 그 결과 권위에 반항하고, 도리를 비평하며, 개인주의 세력 이 성행하였고, 자연미를 동경하고 현세 향락을 추구하는 등의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진 운동으로 9세기 초 샤를 마뉴 대제가 문예를 장려하고, 기독교사원 부속학교가 발달하 며, 십자가 전쟁으로 각지역의 문화가 수입이 되고 1453년 동로마 멸망으로 학자들이 모여와서 고전문학에 대한 연구 연구열이 생기고 인쇄술의 발달 등이 그 주원인이다.

특징 ; 활자, 인쇄기, 나침반이 발명되고 지리적 발견으로 각지에 대한 견문이 넓어 져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그 이유는 교통이 편리 해지고, 경제력이 커지 며, 정치적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중심인물 : 1. 단테(Dante Algheri, 1265 ~ 1321) - 신곡, 신생

2. 복카치오(Boccacio, 1313 ~ 1375) - 단테 전기, 데카메론

3.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 ~ 1519) - 화가, 과학자

대표적인 작품 : 성만찬, 모나리자

4. 라파엘(Raphael, 1483 ~ 1520) - 화가, 교황청 초청으로 벽화제작

대표적인 작품 : 성모상

5. 미켈란젤로(mICHAEL Angelo, 1475 ~ 1564) - 조각가, 화가

대표적인 작품 : 성모, 시스티나성당의 천지창조, 다윗 상

기타인물 : 벳셀, 루돌프 아그리콜라, 브란트, - 교육개혁을 일으 킴(독일에서는 150년 간 17개 대학이 설립이 됨)

에라스무스 - 네델란드에서 신약을 처음으로 그리스어로 발행했다.

토마스 무어 - 유토피아 저술

※ 현대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함. 선경 원어 출판 및 성경주해의 발전을 가지고 옴. 제 도와 권위에 반항하며 개인주의의 부흥을 가지고 옴. 인문주의 의 역풍으로 절대적 교회권위가 타격을 입었다.


●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에 대하여 설명하라

1)구분

(1) 교리적 개혁자 : 위클리프, 후스

(2) 실제적 개혁자 : 사보나롤라, 왈도

(3) 신비적 개혁자 : 에크하르트, 켐피스, 벳셀

왈도(WALDO) : 프랑스 리용 출신의 부자 상인으로 성경 및 기독교 문서 번역 사업에 투자 했으며 1177년 마태복음 19장에 감화되어 재산을 팔아 구제하 고 전도운동을 시작 했다. 1197 보헤미에서 사망 했다.

왈도는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표준이라고 주장 하고, 산상보 훈 지키기에 힘썼으며, 연옥설과 죽은 자 위한 기도 및 예전을 취하 지 않았다. 1215년 인노센트 3세의 박해를 받았으나, 이탈리아 통 일 후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단체가 되었다.

존 위클리프(John Wyclif 1324 ~ 1384) : 옥스퍼드대학 졸업 후 교수가 되었으며, 궁정목사가 되었다. 국왕 사절로 프랑스 에 가서 교황사절과 협상을 했으며 1382년 성경을 영어로 번역을 했다. 교 황이 영국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한 것 과, 고위 승려들의 타락을 공격하자 교 황이 체포령을 내렸으나 왕실의 보호로 무사했다. 런던 대회에서 이단으로 규정 되어 대학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목회생활을 하다가 사망 함.

41년 후 콘스탄쯔 회의(1414 ~ 1418) 에서 그의 주장을 정죄하고 뼈를 불살랐 다.

성경만이 신앙의 유일한 표준이라 주장, 속죄권을 부인 하고, 화체설을 배격하 고, 교황정치의 불필요를 역설함. 승려 의 독신주의를 비난함.

장 후스(Jan Hus, 1367 ~ 1415) : 보헤미아 수도 프라그 대학 교수로서 총장까지 지냄, 위클리프의 개혁정신에 감화받아 교황 정 치의 부패를 공격하고 속죄권 판매를 반대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껴 도피중 교회론을 저술함

콘스탄쯔회의에 소환되어 황제로부터 신변안전 보호 약속을 받고 출두하여 토굴에 감금당해 심 문 받다가 이단자로 규정받고 1415년 7월6일 화형 됨. 그가 죽은 후 보헤미아인들이 분개하 여 장 찌시카(Jan Zizka(체코), Jean Ziska(프랑 스))를 중심으로 개혁당이 결성 되었다.

 

● 바벨론 포로(Babylonian Captivity)의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쓰라

교황청이 프랑스의 아비뇽에 거주함으로 교황이 프랑스의 정치 도구로 전략하게 된 시 기를 말한다.

원인 : 교황 보니파키우스(Boniface)8세 와 프랑스 왕 필립과의 교회와 교직자들에게 과세하는 문제로 투쟁하여 프랑스가 강하여 교황이 일시 구금되었다. 1309년 프랑스인 클레멘스 5세가 교황이 되어 아비뇽에 천도하고 정교황이 프랑스왕에 게 내린 책벌을 취소하였다.(70년간)

경과 : 교황 클레멘스5세가 프랑스 왕의 괴뢰 노릇을 하게 된다. 아비뇽에 주재한 교 황은 요한22세,(1316즉위), 베네딕투스12세(1334즉위), 클레멘스6세(1352즉 위), 그레고리우스 11세(1370즉위), 그레고리우스11세가 죽자 백성들이 이탈리 아인으로 교황을 세우시를 요구하자 추기경들은 이탈리아인으로 교황을 세우고, 우르바누스6세라 칭하고 로마로 환도 한다.

두 교황 시대 : 우르바누스 6세가 카디날(카디날은 천주교의 추기경을 , 즉 카톨릭의 고 위 성직자를 의미 한다) 의 사치와 부패를 공격하니, 프랑스인들은 아비 뇽에 교황을 세우고 클레멘스7세라 불렀다. 그리하여 약 40년간 분열 되었었다. (1378 ~ 1417년)

◎ 로마교황(이탈리아, 독일, 영국) : 우르바누스 6세(1378 ~ 1389), 보 니페이스9세(1389 ~ 1404), 이노센트 7세(1404 ~ 1406), 그레고리 12세(1406 ~ 1415)

◎ 프랑스교황(프랑스, 스코틀랜드, 스페인) : 그레고리11세 (1370 ~ 1378), 클레멘스7세(1378 ~ 1394), 베네딕트13세(1394 ~ 1417)

결과 ; 교황과 국왕이 대립 하고, 로마교황과 프랑스교황이 대립하였으며, 대립된 교황 들은 재정의 결핍을 막기 위하여 교직 매매를 자행 했다.

파리대학장의 제자 게르손(Jean de Gerson 1363 ~ 1429)은 교회의 타락을 우려하여 교회회의를 열고, 두 교황을 퇴위 시키고 알렉산도르 5세를 새 교황 으로 선출 하였다. 그러나 3명의 교황이 싸우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나 게르손 은 1414년에 세 교황을 모두 퇴위 시키고 마르틴 5세를 세움으로 교회의 싸움 은 종식 되었다.

 

 

● 동로마 제국의 멸망과 동방 교회에 대하여 쓰라

1453년 터키 왕 모하메드2세가 콘스탄티누스2세를 공격하여 동 로마제국은 선전 하였 으나 50여일 만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당하고 황제가 전사 하고 말았다. 이로서 동 로마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 약 1,000년 동안 존속했던 동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이라는 이름은 유스티니아누스 왕조가 지중해 탈환을 위해 벌였던 게르만족 세력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610년 이후부터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팔라이올로구스 왕조 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한 1453년까지를 일컫는 중세 그리스의 동로마 문화권을 의미한 다. 그러나 동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신의 은총과 영원한 로마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그리스도교 국가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를 계속해서 '로마인'이라 불렀다. 비잔티움은 원래 고대 그리스가 세운 식민지였다. 이 지역은 유럽과 소아시아의 경계선에 있었고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324~337 재위)가 330년에 이곳을 '새로운 로 마'로 정하고 이를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한 후 수도를 옮겨온 뒤부터 동로마라는 새로 운 영역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을 때(395) 제국을 양분하여 동로마를 큰아들 아르카디우스, 서로마를 작은 아들 호노리우스로 하여금 각각 통치하게 함으로써 동서 로마의 분리는 결정적인 사실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제도 일반에서는 로마적이지만 주민·언어·문화면에서는 그리스적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은 일찍이 로마 제국이 완수한 적이 없었던 전략상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 다. 이것이 그리스를 중심으로 소아시아와 이탈리아 해안의 여러 섬들을 포함하여 강력 한 중앙집권 국가 조직을 갖추고 그리스도교와 동방적 색채를 포함한 군주국가로서 완전 히 성립된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헤라클리우스 황제 (610~641 재위) 때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행정과 학문에서 새로운 중심이 되었고 제국의 문화는 고전적 전통 및 중세 가톨릭 유럽과 소아시아의 이교문화의 교차 지점으 로서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비잔틴과 게르만족의 관계는 반드시 적대적인 것은 아니 었다. 야만족에 대해서는 세례만 인정하면 개방했고, 비잔틴 역시 문화의 기원이 다른 문화들인 슬라브·아랍·셈·투르크 등의 문화와 끊임없이 접촉했다. 그러므로 비잔틴 사회 는 초기부터 사회적·문화적으로 유동성과 수용력이 대단히 큰 제국이었음이 분명하다. 비잔틴의 사회 구조는 서유럽과는 극히 다른 유형에 속하며, 이는 역사가들의 흥미를 끌 어왔다. 또 12세기까지 지중해 교역의 중심세력으로서 아랍인과 경쟁을 벌인 역사 역시 중세 서유럽 상업을 부활시킨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12세기까지 비잔 틴 제국은 중세의 국제정치무대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이었고 지중해 경제와 신앙·학문·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이후부터는 지나치게 광범위한 정복지의 영역이 오히려 새로운 문 제를 불러일으켰다. 여러 종족간의 갈등, 종교적인 분열, 변방의 잦은 침입, 끊임없는 정 복전쟁 등은 제국의 재정과 인력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다. 결국 행정적 구조가 더이상 정복지에서의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어 제국은 마침내 붕괴 위기를 맞게 되었다.


- 참고 -

콘스탄티누스 2세 Constantinus II, Flavius Claudius. (재위 337-340)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2남. 태어난 바로 그 해에 부제로 임명되어 부황의 사망과 더불어 정제로 등극하여 브리타니아, 갈리아, 스페인이 그의 영유지로 주어졌다. 340년 말, 동 생 콘스탄스 황제의 소유령을 빼앗고자 북부 이탈리아에 침공하였으나 패배하여 죽었 다.

 

콘스탄티우스 2세 Contantius II, Flavius Julius. (재위 337-361)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3남. 그도 역시 부황의 죽음과 동시에 예정대로 신수도 콘스탄티 노플을 포함한 동방령 부제로부터 정제로 등극해했으나 20여년 간에 걸친 치세는, 차라 리 정정 불안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351년에 동생인 콘스탄스 정제를 패사(敗死) 케 한 참제 마그넨티우스를 격파하고 일단 통일제국의 정제 지위를 확보했으나, 동방에 서는 페르시아 황제 샤푸르의 침공과,서방에서는 게르만인의 갈리아 침범으로 끊임없이 복배(腹背)로부터의 위협에 시달리는 실태였다. 성격이 지극히 음습(陰濕)하고, 게다가 시기심이 깊어서 책모하기를 즐겼기 때문에, 허다한 오점을 생애에 남겼다.

 

그 첫 번째 오점은, 정제로 즉위한 직후 사촌형제 이하 혈족들을 대량 학살시킨 혐의, 둘째로 이런 비극에서 겨우 모면되었던 사촌동생 갈루스를 그후 갑자기 부제로 기용하 여 동방의 대리통치를 맡겼다가, 비록 갈루스 자신의 부덕한 난행이 있었다고는 하지 만, 곧 그를 체포하여 모살했고(354년), 셋째로 갈루스의 이복동생인 율리아누스를 부 제로 기용하여 갈리아에 대한 게르만 민족들의 침구를 제압시켰지만, 이 청년 부제가 빛나는 전공을 세운 후, 360년에 파리에서 군대에 의하여 정제로 추대되자 그를 폐위 시키려 한 것 등등이다. 율리아누스가 건곤일척의 대결을 위해 곧장 신수도 콘스탄티노 플을 향하여 원정길에 올랐을 때 동방에서 페르시아 군과 싸우던 콘스탄티우스가 급거 회군하여 율리아누스를 토벌하기 위해 진군했으나, 도중에 소아시아에서 병사하였다. 부황의 교육을 받은 그리스도 교도였지만, 신교문제에서도 쓸데없이 특정 종파에 특권 을 부여함으로써 혼란을 확대시켰다. 그의 궁정에 동양 풍의 허식을 즐겨 도입함으로써 사치풍조를 조성하였고, 특히 최대의 오점은 환관정치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 농락당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음우한 군주였다고 볼 수 있다.

 

콘스탄스 Constans, Flavius Julius. (재위 337-350)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4남. 마찬가지로 부황의 사망과 함께 정제로 등극하여 이탈리아, 일리리쿰, 아프리카 등이 그의 통치령으로 주어졌지만, 340년에 큰형인 콘스탄티누스 2 세 황제의 침공을 격퇴하면서 패사시켰다. 이후 전 서방영토를 통치하는 정제가 되었으 나 350년에 게르만족 출신 장군인 마그넨티우스의 반란군을 토벌하려고 출전했으나 패 배하여 살해되었다.

 

율리아누스 Julianus, Flavius Claudius. (재위 361-363)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 337년, 사촌형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한 혈족숙청에서는 이 복형 갈루스와 함께 갓난아기였던 탓으로 겨우 생명을 건졌으나 그 후로 장기간에 걸쳐 사실상의 연금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동안 그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과 이교에 몹시 친숙해졌고, 동양의 신비종교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355년, 갑자기 부제로 중용되어 갈리아에서 게르만족 토벌에 종사하여 5년 동안에 눈부신 전과를 올렸고 치 안을 회복했으나, 이를 시기한 정제 콘스탄티우스 2세와의 사이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 다. 즉, 콘스탄티우스 2세는 동방의 페르시아에 대비하기 위하여 갈리아 주둔군의 과반 수를 진용 하고자 했으나, 군대가 이에 불응, 거부하면서 360년 파리에서 율리아누스를 정제로 추대하였다. 신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향하여 진군하는 도중, 콘스탄티우스가 급 사함으로써 국민의 환호하에 신수도에 무혈 입성하여 다시 즉위하였다.

 

수도에 입성한 후, 그의 치세는 20개월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교로의 귀의(때문에 그리 스도교로부터는 소위 배교자로 비난되고 있다)와 군사. 행정면에서의 치적에 대해서는 이 율리아누스 황제만큼 진폭이 큰 황제도 드물다. 이교신앙에 대해서는 이미 공개성명 으로 밝히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유.평등의 신교 관용령을 발포하여 전 국민에게 관용 의 의태를 보여주었고, 또 한편에서는 유대교 신자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리스도 교도들로부터 부와 지식, 그리고 권력 등의 우위성을 모두 빼앗으려고 의도했 지만, 그에 앞서 숙적인 페르시아 토벌을 서둘러 363년 봄이 되자, 스스로 6만5 천의 대군을 이끌고 동방정토의 길에 올랐다. 갈리아 지방에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의조 식(粗衣粗食)에 만족하면서 언제나 진두에 나서 용감히 싸워 파죽지세로 유프라테스강 을 건너 적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지척에 바라보는 지점까지 육박했으나, 적의 모략공 작에 넘어가 오히려 불리해지자 총퇴각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적의 추격을 막으면서 철퇴하는 도중, 적병에 투창에 치명상을 입은 후 진중에서 낙명하였다. 363년 6월 26 일의 일인데, 이것은 그의 자신과다증이 자초한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철학 자. 문인. 황제이기도 하여 8편의 연설집, 2편의 풍자문, 80통의 서한문과 그리스도교 비난의 단편을 오늘날에까지 남겼다.

 

요비아누스 Jovianus, Flavius (Claudius). (재위 363-364)

율리아누스 황제의 페르시아 정벌 군에 친위대 부사령관으로 종군하고 있었는데, 율리 아누스 황제의 갑작스러운 전사가 있은지 몇 시간 뒤에 전군의 추대를 받아 진중에서 제위에 올랐다. 첫 번째로 한 일은 전군을 이끌고 무난히 귀국하는 문제였지만, 장병 들의 피로와 식량부족, 적군의 급한 추격 등으로 말미암아 철수작전이 지극히 곤란하 였다. 적의 추격전에도 로마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페르시 아 황제 샤푸르로부터의 화의 제의가 있자, 광대한 동방영토의 할양이라는 굴욕적인 조건을 수락하고, 겨우 로마 군을 위급한 처지에서 구해냈다. 그리스도 교도임을 선언 했지만 우유부단한 황제로 평가되었는데, 콘스탄티노플로 귀환도중에 급사하였다.

 

발렌티아누스 1세 Valentinianus I. (재위 364-375) 西.

요비아누스 황제의 급서 후, 10일 간의 공백기간을 거쳐 근위대 보병대 사령관에 선입 되어 등극하였다. 독군(督軍)이던 아버지 그라티우스의 명성과 공적에 더하여, 본인도 현명성과 정한성(精悍性)의 인상을 주는 용모를 가졌고, 또 43세라는 남자의 한창 때 라는 조건도 작용하여 황제로 선입되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황제가문이 아니라는 것은 전제(前帝)와 마찬가지였다. 즉위한지 30일 후에 평 범한 동생인 발렌스를 공치정제(共治正帝)로 지명하고, 제국을 양분해서 동방통치를 동생에게 맡긴다고 선언하였다(364년 6월-7월 경). 발렌티아누스 1세의 치정(治政)은 그리스도교 각 파 간에 있었던 유혈사태에 수반된 격심한 대립항쟁 속에서 신교의 완 전자유를 공인하고, 시종 온건.공정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다만 성직자들의 만족할 줄 모르는 화식욕(貨殖欲)을 억제하기 위하여 기진에 관한 금령을 내렸고, 이교에 대해서 도 관용했지만, 마법 죄에 관한 심문은 엄격했다. 황제 자신이 간소.절제 생활에 힘씀 으로써 콘스탄티우스 2세시대 이래의 악폐를 점차 개선했고, 궁중에서의 방탕열락행위 도 대략 일소했는가 하면, 청소년에 대한 교육에도 열의를 보였다.

 

다만 극심한 뼛성쟁이로서, 그것이 때로는 재판할 때 엉터리 판결까지 내리게 하였다. 한편 용맹하기로 이름이 높았던 율리아누스 황제의 사후, 변경지역의 이민족들이 브리 타니아 속주, 상 다뉴브 지역, 아프리카 등지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황 제 자신도 라인강변에서 게르만족을 격파하는 등 출정을 거듭하였는데, 다행하게도 독 군인 테오도시우스(후일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버지)의 동분서주에 의한 맹활약으로 이민족들을 억누를 수 있었다. 후일 게르만족과의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들의 사절을 접하던 중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급사하였다.

 

발렌스 Valans, Flavius. (재위 364-378) 東.

발렌티아누스 1세의 친 동생. 과거의 공적도, 또 재능도 전혀 없지만 형의 지명으로 동방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지나칠 정도로 소심하고 박지약행(薄志弱行)한 위인으로 서, 즉위한 다음 해에는 율리아누스 황제와 이종사촌간이라고 알려진 장군 프로코피 우스가 죽지 않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켜, 한 때는 이민족의 응원으로, 수도 콘스탄티 노플을 점령하는 등 지위도 위태로웠지만 겨우 이것을 진압할 수 있었다.(365-366년 간). 종교적으로는 형과는 달리 아리우스 파에 속하여 가톨릭 파를 박해했지만, 기타 다른 면에서는 형인 발렌티아누스 1세를 잘 섬기어 그의 충고와 응원으로 그럭저럭 황제자리를 지켜나갔다. 페르시아 및 이민족의 공세에는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한 바, 아르메니아와 이베리아의 두 속국을 페르시아 황제에게 빼앗겼고, 서고트족 군의 교 묘한 화전 양면작전에 휘말려 들어 황제 자신이 출정했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로마군 의 2/3이상을 잃은 일대회전의 와중에 아드리아노플 부근에서 전사했는데, 심지어 유 체조차도 찾지 못할 만큼 비참한 패배를 당하였다.

 

그라티아누스 Gratianus, Flavius Augustus. (재위 375-383) 西.

발렌티아누스 1세의 장남으로 부황 치세 중인 367년에 이미 정제(正帝) 칭호를 받았 는데, 이때 그의 선입은 전 갈리아 군단의 동의를 얻었다. 부황이 급사했을 때 불과 17세였지만, 이미 온갖 미덕을 갖추었음을 과시함으로써 군대와 국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군의 일부에서는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이복동생인 겨우 4살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옹립하고, 그를 제위에서 추방하려는 강한 움직임이

 

이때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간 내란으로 치달을 상황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라티아누 스가 현명하고 온당하게 나갔으므로 내란만은 피할 수 있었다. 즉, 동생이 제위에 오 르는 것을 쾌히 승낙하고 그를 그의 모후와 함께 평화로운 밀라노 궁전에 살게 함으 로써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통치케 하고, 자신은 좀더 곤란한 알프스 산맥 이북의 각 속주 통치에 임하기로 하면서, 책모의 주모자들에 대한 처벌이나 해임은 사태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보류시키는 방침을 취한 것이다.

 

그리하여 얼마 동안은 전 로마제국의 통치가 동방의 발렌스 황제와 서방의 그라티아 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 황제, 이 3명의 연서(連署)로 행해지게 되었다. 그의 치 세의 태반은 갈리아에서, 라인강 대안에서 침구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이민족들과 의 대치에 쫓겨 다니는 군사작전으로 메꾸어졌는데, 이 때문에 동방황제인 숙부 발렌 스가 패사했을 때도, 구원 차 달려가기에는 너무도 원격한 지역에 머물러 있었다. 숙 부인 발렌스 황제가 사망한지 5개월간이나 공위로 남아 있던 동방황제자리에, 일찍이 황제인 자기보다 인기가 더 높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했던 선제(先帝)대의 최대의 국 가공훈자인 테오도시우스 장군,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를 지명함으로써 동 가문에 보상하고 또 속죄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동서 로마를 통치할 체제를 갖 추었다(379년 1월).

 

그라티우스 황제는 만20세를 맞이할 때까지는 최고의 명성으로 찬양된 왕고(往古)의 여러 황제에 못지않을 정도로 인망이 높았었다. 타인에게 호감을 주는 그의 인품, 우 아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행동거지가 모두 국민의 마음을 크게 매료했던 것이다. 열 심히 신을 믿는 가톨릭교도라 하여 교회 측의 신망도 두터웠고, 문학에 대한 깊은 조 예는 문인들 속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20세 이후의 그는 아부만을 일삼는 주변 의 아첨꾼들이 잘못 유도한 탓으로, 정무는 내팽개치고 수렵에만 몰두하는 등 차차 사람들의 빈축을 사게 되었고, 군대로부터도 지지도를 잃어갔다. 때마침 브리타니아 속주의 군사령관이던 막시무스가 그라티아누스 황제에게 불만을 품은 브리타니아 주 둔군 장병들에 의해 추대되어 황제를 참칭한 다음, 곧 갈리아 지방에 상륙 침입하였 다(383년). 그라티아누스는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급히 파리로 향했으나 휘하 장병 이 도망치자 황제도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리용에서 자객의 손에 걸려서 죽 었다. 그때 그의 나이 24였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 Valentinianus II. (재위 375-392) 西.

불과 4세의 나이로 이복형제 간인 그라티아누스 황제와 공치제 형태로 이탈리아.아프 리카 통치를 담당했었다. 그리고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횡사했을 때,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12세에 불과했다.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의 감은(感恩)의 애정과 또 야심이 없 는 그의 커다란 포용력에 지탱되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서로마 황제의 지위를 보존 할 수 있었다. 그간 참제인 막시무스와의 전쟁이 있었는데, 이때는 수도에서 쫓겨나 외지로 망명한 신세가 되었는데,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도움으로 막시무스가 처형된 뒤에는 다시 서방황제로 복위될 수 있었다.

 

이때 아르보가스트(아르보가스테스)라는 프랑크족 출신 용장이 있었는데, 그는 그라 티우스 황제 치세부터 황제를 도와 기병대 총사령관의 지위에 올랐고, 막시무스의 반 란으로 황제가 횡사한 뒤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 휘하로 넘어가 막시무스를 쓰러뜨리 는 전쟁에 크게 공헌했고, 전후에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 휘하의 갈리아군 총사령관 겸 정무총감에 임명되어 전권을 휘둘렀다. 그가 남 몰래 서방제국을 지배하려는 야망 을 품고 점차 독수를 뻗쳐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측근에서 충직한 신하들을 모두 멀 리하게 하는 등 야망달성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시킨 후, 드디어 발렌티니아누스 2 세를 그의 방안에서 목 졸라 죽이고, 에우게니우스라는 수사학자를 괴뢰로서 제위에 앉힌 후 배후 실력자가 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교살 당했을 때의 나이는 21 세였고, 날짜는 392년 5월15일이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대제) Theodosius I. (재위 379-395) 東.

그라티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처형된 테오도시우스 장군의 아들로서, 야인 생활 4개월 만에 그라티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동방황제로 선임되었다. 스페인 출신으로서 그의 아버지 테오도시우스는 발렌티아누스 1세 치세 시, 브리타니아 속주.상 다뉴브 지방. 아프리카 등지에서 독군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움으로써 명성이 갑자기 올랐지만, 이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실각당한 후 사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아들인 테오도시 우스도, 군대 사령관으로서 여러 번 공훈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강제전역 당한 후 고향인 에스파냐 벽지에서 아무런 야심이나 불만도 없이 유유자적한 은거생활을 즐기 고 있었다.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숙부인 발렌스 황제가 전사한 후 그 후계자를 누구로 지명할 것 인가에 대하여 고민 끝에, 이 은거 중이던 테오도시우스를 지명한 것은 위와 같은 경 위가 있었던 만큼 얼마간 기이한 감도 있지만, 워낙 국가가 다사다난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만큼, 그를 지명한 것은 테오도시우스 부자 2대가 세운 공훈과 명성, 그리고 그의 인물됨됨이에 모든 것을 기탁할 생각 외에도 어떤 면에서는 속죄 보상하려는 심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당시 그의 나이 33세로서 국민이나 군도 놀랐지만 일제히 환호로서 그를 맞이하였다. 제위에 오른 그는 용기와 지략으로 고트 군의 침구에 대항함으로써 한때 거의 완전하게 상실했던 자신감을 로마 장병들 사이 에서 부활시켰다.

 

뿐만 아니라 끝내는 고트족의 왕인 아나타리쿠스(아나타릭)의 환심을 얻었고, 또 그 를 성대하게 장사 지내 주는(381년) 등으로 그들의 신용을 얻음으로써 기적적으로 전면적인 항복을 받은 바, 이것은 발렌스 황제가 패사한지 불과 4년 후에 올린 성과 이다.

 

383년에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비운으로 갔을 때에는, 사태가 너무도 급박했기 때문 에 은인의 구원에 달려가지 못했고, 그후의 정세도 참제 막시무스의 세력이 너무 강 했기 때문에 부득이 하게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참가시켜 3제 공치의 형태로 로마제 국을 분담 통치하되, 다만 참제 막시무스에게는 알프스 이북 영토만으로 만족한다는 내용의 서약을 받아내어 타협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일시 평화를 유지하게 된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전 영역을 통하여 완전히 우 상숭배를 폐지시키고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탄압하는 등 국내의 종교문제 개혁에 열 의를 보였다. 그런데 막시무스가 자기에게 주어진 영역만으로 만족했더라면 오랬동안 3제 정립(鼎立)형태가 계속되었을지 모르나, 원래 야심 만만한 그였던 만큼 387년에 이르러 알프스 산맥의 험한 고개를 속여서 넘은 다음, 약체였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 의 이탈리아에 침공해 들어갔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테오도시우스 황제도 궐기하지 그냥 잇을 수 없어, 양 자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었는데 사태는 어이없이 끝났다(388년). 민심이 이미 참제에 게서 떠나가 있었는데, 붙들린 막시무스는 격분한 병사들의 손에 참수되었다. 황제치 하에서는 불행하게도 또 한번 내전이 있었다. 그것은 아르보가스트(아르보가스테스) 가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시해했을 때인데, 이의 뒤처리로서 아르보가스트 장군은 프 랑크족인 자기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 데에는 저항감이 많다고 생각하여 에우게니우스 라는 로마인 수사학자에게 자의(紫衣)를 주고, 자기는 배후에서 실권을 장악하여 괴 뢰인 에우게니우스를 조종했던 것이다.

 

이탈리아로 재차 침공해 들어가는 데에는 상당히 주저했지만, 결국 테오도시우스는 2 년 간의 준비 끝에 감연히 군을 진발시켜 악전고투 끝에 신풍(神風)의 도움으로 결정 적인 승리를 거두고 괴뢰참제인 에우게니우스는 참수로, 괴수 아르보가스트는 자진케 함으로써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이어서 황제는 밀라노에 입성하여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지만, 국사다망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침식되어 있던 황제의 건강은 전쟁의 피로 가 겹쳐, 전승 후 불과 4개 월 만에 국민의 통석 속에 일생을 마쳤다. 당시의 나이 48세. 일찍이 이미 정제(正帝)칭호를 받고 있던 그의 두 황자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 노리우스가 각각 동과 서의 제국을 승계하게 된다.

 

아르카디우스 Arcadius. (재위 395-408) 東. & 호노리우스 Honorius. (재위 395-423) 西.

두 사람 모두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장남과 차남으로서, 다 함께 어릴 때에 정제(正帝) 칭호를 받았고, 395년 1월, 부황(父皇)의 사망과 더불어 동.서 로마 제국의 통치자 지위에 올랐다. 두 제국 사이는 점차 서먹서먹해졌고, 끝내는 아주 타국처럼 되어 버렸지만, 두 황제는 다 함께 시대를 같이 하였고, 또 공통의 외적에게 시달림을 받았으므로, 여기서는 편의상 일괄하여 취급한다.

 

즉위 당시 형인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17세, 동생인 호노리우스 황제는 10세였는데, 부제(父帝)의 유지에 의하여, 루피누스(Rufinus, 東)와 스틸리코(Stilicho, Flavius. 西)를 각각 사부와 보좌 역으로 삼았다. 루피누스는 전형적인 간신으로서, 전적으로 자기권세의 확대와 치부에 노력하였는가 하면, 자기 딸을 황후로 들여 보내어, 막강한 절대 권력을 휘두르고자 기도했지만, 그를 좋게 보지 않은 환관 에우트로피우스(Eutropius)의 교묘한 술책으로, 황제는 다른 여성인 에우독시아(Eudocia/Eudoxia)를 황후로 맞아들였다. 이것이 그가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시작으로서, 이후 황제는 미모에 재기발랄한 새 황후와 환관 에우트로피우스의 뜻대로 움직이게 된다. 어떻게 해서든지 실권을 회복하고자 몸부림치던 루피누스는, 결국 395년 서로마 제국 황제의 후견인격인 스틸리코의 뜻을 받든 고트족 출신 장군 가이나스(Gainas)의 손에, 황제 면전에서 살해되고 만다.

 

스틸리코는 루피우스와는 달리 지용을 겸비한 충직한 장군으로서, 충성스럽게 유고(遺孤)인 호노리우스 황제를 보호하였다. 선제인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조카딸이며, 대제의 양녀가 된 세레나(Serena)를 384년 이래 아내로 맞아들인 것도, 그가 충성을 다한 커다란 이유였을 것이다. 선제사후에 동서 두 제국은 차례차례로 이민족들의 반란과 침구에 고민하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아프리카에서 무어인 길도(Gildo)가 일으킨 반란이다. 길도는 선제에 의하여 아프리카의 독군으로 등용되었던 자로서, 397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스틸리코는 다음해 길도에 강한 원한을 가졌던 그의 실제(實弟) 마스케젤(Mascezel)을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 파견하여 급속히 이를 진압하였다. 그런데 이 마스케젤도 이탈리아로 개선 후 강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것은 스틸리코의 모략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번의 전승은 우연하게도 호노리우스 황제의 결혼식과 시기를 같이 이뤄졌다. 황후가 된 것은 다름아닌 스틸리코의 딸 마리아(Maria)로서, 황제는 이때 14세이고 황후는 이보다 좀더 나이가 어렸던 모양으로, 황후가 된지 약 10년 후에 그녀는 아이도 낳아보지 못하고 죽었다. 황제는 허약 체였을 뿐만 아니라 통상적인 남자로서의 생식능력도 결여되어 있어서. 죽을 때까지 동정(童貞) 그대로 였다고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다. 선조들과는 달리 호노리우스 황제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궁정 안에서 붙들린 죄수와도 같은 생애를 게으른 잠으로 보내면서 국민들과도 친숙하지 못한 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끈기있게, 아니 거의 무관심으로 쳐다 본 방관자였다. 그의 치세 28년이라는 다사다난한 역사 속에서, 황제 호노리우스의 이름을 들출 필요가 거의 없을 정도로 그는 무능했다."라는 말이 그에 대하여 모든 것을 이야기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연이은 외환으로 시달렸다.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건재할 때는 감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조용히 있던 이민족들은, 마치 그가 죽기를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고트족 대군이 걸출한 인물 알라리크(Alaric/Alaricus I)의 지휘하에 북방으로부터 침입하여 동방제국의 여러 속주들을 휩쓸었고, 마케도니아에서 테살리아에 걸친 그리스 땅을 무인지경을 달리는 기세로 석권하였다. 동방제국이 배치하고 있던 속주의 총독이나 군대가 저항다운 저항을 거의 보이지 않고 있는 사이에, 알라리크의 군대는 금세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각 도시를 유린했는데, 이들을 쫓고 이 지역을 구출한 것은 서로마 제국에서 온 스틸리코와 그의 군대였다(397년).

 

이때는 알라리크도 북쪽 에피루스로 도망가 동방제국과의 사이에서 타협을 성립시켰기 때문에, 스틸리코도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지만, 5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서고트족의 왕으로 추대된 알라리크는 401년, 이탈리아로 침입하였다. 알라리크는 궁정이 있던 밀라노를 위협함으로써 전체도시가 금세 혼란에 빠졌지만, 이때도 스틸리코의 지모와 분투로 간신히 호노리우스 황제의 위급한 국면을 건져내었다. 황제는 404년, 궁정을 위험한 밀라노에서 아드리아해에 면한 라벤나로 옮겼는데, 이후에는 대략 이 안온한 곳에서 나날을 보냈다. 다시 라다가이수스(Radagaisus)가 이끄는 동고트족의 침구도 있었지만, 그처럼 막강했던 스틸리코도 점차 인기를 잃고 408년 실의 속에 참살되어 생애를 마쳤다.

 

이해는 마침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도 사망하였는데, 같은 해 알라리크의 두 번째 이탈리아 침구가 시작되고, 410년에는 제3회 침구로 로마까지 점령 약탈당하는 한편, 로마의 수도장관이던 아탈루스(Attalus)가 일시 참제로 옹립되었다. 알라리크는 이윽고 로마에서 철퇴하여 이탈리아 남부지방으로 약탈행각을 계속했고, 다시 아프리카를 정복하고자 시칠리아로 향하려고 할 때, 폭풍우의 방해로 머뭇거리던 중, 병환으로 급사하였다(410년). 고트족은 그의 후계자로 선출된 아돌푸스(Adolphus)에게 통솔되어 갈리아 방면으로 철퇴했지만, 서로마 제국은 알라리크의 약탈이 있은 이후,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게다가 아프리카로의 반달족의 내습, 훈족의 왕 아틸라(Attila)의 침구로 이어져 줄곧 쇠망의 길을 걷게 된다.

 

테오도시우스 2세 Theodosius II. (재위 408-450) 東.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들. 부황이 3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기 때문에, 이 황제는 겨우 7세에 제위에 올랐다. 아르카디우스 황제도 무능한 점에서는 서방황제인 동생 호노리우스와 큰 차이가 없어서, 그의 치적을 개략적으로나마 기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역사적 자료가 엄청나게 많은 그런 시기인데도,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정당한 이 맏 아드님의 업적이란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임종시 나이 어린 자기 아들의 신상문제를 걱정한 바, 궁정 안에 신뢰할 수 있는 신하가 없고(황후 에우독시아는 이미 사망하고 없었다), 서방황제는 약체인데다가 벌써 타인과 마찬가지였으므로 고민하며 망설이던 끝에, 굳이 이웃나라인 페르시아 황제 야즈데게르드 1세(Yazdegerd/Jazdegerd I)에게 후견인이 되어줄 것을 대담하게 부탁하는 수단을 썼다. 상대방도 이런 영예로운 신뢰에 보답하여 그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일찍이 적국이던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려 하지 않았다. 궁정 안에서 이처럼 나이 어린 황제를 성실하게 수호하고 훌륭하게 선정을 베푼 것은 405년에 집정관 겸 민정총독으로 임명되었던 안테미우스(Anthemius. 훗날인 467년에 서로마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는 동명인의 조부되는 사람)이고, 이 시대에 로마제국을 지탱한 또 사람은 황제의 누님인 풀케리아(Pulcheria)였다.

 

불과 2살의 연장자였지만, 16세로 여제(Augusta)의 칭호를 받았고, 동생인 테오도시우스 2세의 긴 미성년기와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2세가 죽은 뒤에는 그녀 자신의 이름과 또 명목상의 남편인 마르키아누스(Marcianus)의 이름으로, 결국 40년 가까이 되는 오랜 기간동안, 그녀는 동방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생애를 처녀의 몸으로, 경건한 신앙생활로 보냈으며, 오랜 세월의 시정은 그녀의 강력성을 찬양할 정도는 아니었다 해도, 그녀의 온건성과 번영을 가져오게 한 치적은 상당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동생인 테오도시우스 2세가 "굳이 무능력의 정도에 차등을 두는 것이 허용된다면 부황과 숙부황제의 약체성보다 더 밑돌았다고 할 수 있다."고 혹평되는데 반하여, 누나인 풀케리아는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자손들 중, 대제의 웅대한 기상이나 능력을 얼마간이나마 이어받은 것은 그녀뿐인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이 어린 테오도시우스 2세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던 페르시아 황제 야즈데게르드 1세는 그가 죽을 때(420년)까지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신뢰에 충실시 부응했지만, 그의 후계자인 바흐람 5세(Varanes/Vahram V)는 422년이 되자 동로마 제국과 분쟁을 일으켰다.

 

이때는 격전도 별로 없이 완만한 형태에서 오랬 동안 계속되던 중, 428년에 이르러 양국의 중간에 껴있는 아르메니아를 양국이 분할 소유함으로써 결말이 났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 분쟁에 거의 무관심했던 것 같지만, 쇠퇴일로를 걷던 동방제국에 대해 이 분쟁은 얼마 간의 광휘를 던져 준 사건이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 Valentinianus III, Flavius Placdius. (재위 425-455) 西

동.서 로마에서는 호노리우스 황제 만년에 그의 이복누이 동생인 플라키디아(Placidia. 그녀의 생애는 고트군의 포로가 된 후 고트족 왕 알라리크의 후계자인 아돌푸스의 왕비가 되는 등 기구한 운명을 거쳤다)의 새 남편이 된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가, 야망에 사로잡혀서 황제칭호를 탈취(421년 2월에 제위에 올라, 동년 9월에 사망)하는 등의 사건이 있었고, 다시 남매간의 불화로 플라키디아가 두 어린 자식을 데리고 동로마 황제를 의지하여 망명 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녀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지 몇 달 뒤에, 호노리우스 황제 자신이 수종 증으로 급서하였다(423년).

 

플라키디아는 유아(당시 4세. 훗날의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데리고 동로마 군의 호위하에 서로마 수도 라벤나에로의 귀환 길에 올랐다. 그 사이에 요안네스(Joannes/John)가 서방황제를 참칭하였으나 그가 동로마 제국 기병대의 손에 처형되자, 플라키디아 모자는 행운을 얻어 라벤나에 돌아왔고, 이어서 동방황제의 승인으로 425년 플라키디아와 어린 아들이 서로마 황제로 정식 등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황제도 아직 유약하였으므로, 그를 대신하여 사실상의 통치권을 행사한 것은 모후인 플라키디아였다(450년 그녀가 죽을 때까지 25년간). 그녀의 군수통치권을 맡아서 지휘에 임했던 사람들은 아에티우스(Aetius)와 보니파티우스(Bonifatius)라는 두 장군이었는데, 두 장군이 협력했더라면, 서로마 제국의 여명(餘命)은 어쩌면 좀더 연장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불화가, 아에티우스의 모략공작으로 모후인 플라키디아와 보니파티우스를 이간시키는 것으로 표면화되었고, 나아가서는 아프리카의 상실이라는 중대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아프리카의 독군(督軍)이었던 보니파티우스는 모후가 유랑하던 시절부터 그녀를 지지원조하고 있었지만, 아에티우스의 이간책으로 모후로부터 소외시 당함에 이르자, 자위상 반달족의 아프리카 내원을 요청하자, 반달족의 지도자인 게이세릭(Gaiseric/Genserich)이 에스파냐로부터 아프리카로 건너 온 것이다(429년). 다음해에 보니파티우스와 모후가 모두 자기들의 잘못을 통절히 후회하였지만, 그것은 이미 과유불급(過猶不及) 격이 되고 말았다.

 

또 하나의 가공할 외적인 훈족의 왕 아틸라도 430년대부터 침구하기 시작하여 먼저 페르시아, 뒤이어 동로마 제국에 마수를 뻗쳤는데,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아틸라와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고, 몇 번이고 사절을 교환하는 등 그와 교섭을 가지던 중, 콘스탄티노플 교외에서 낙마 사고가 원인이 되어 역시 급서하였다.

 

마르키아누스 Marcianus. (재위 450-457) 東.

테오도시우스 2세가 죽은 뒤, 얼마동안은 그의 누님인 풀케리아가 로마제국 건국 이래 최초의 실질적 여제(女帝)로 군림하면서 어느 정도의 인기도 있었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편견과 불만의 대상이 될 것을 염려하여, 급히 명목상의 결혼만을 통하여 형식상의 부군으로 맞았고 또 공치제로 삼은 인물이 바로 마르키아누스 황제이다. 마르키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것은 나이 50세를 넘긴 뒤로 선제(先帝)보다 연장자였다. 군인출신 원로원 의원이며, 온후한 성격과 유용한 재능 등이 모든 사람들의 신망을 모았다. 훈족의 왕인 아틸라의 침구로부터 제국을 보호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단성론에 의해 야기된 종교분쟁을 해결하는데는 실패하였다. 457년 마르키아누스 황제가 죽으면서 테오도시우스 가계의 혈통은 완전히 단절되고 만다.

막시무스 Maximus, Petronus. (재위 455) 西.

재위기간은 즉위한 그 해의 3개월 뿐이다. 동로마 제국은 찬탈자로 규정하여 그의 제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발탁되어 원로원 의원, 집정관으로 임명되지만, 자기 처가 황제에 의하여 폭력으로 정조를 빼앗긴 것을 원한으로 품고 복수할 것을 맹세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친위대들을 교사하여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살해하였고, 뒤이어 미망인이 된 황후 에우독시아(Eudoxia/Eudocia)를 스스로 빼앗아 아내로 맞이하여 제위에 올랐으나, 이윽고 반달족 군대의 로마침입을 맞아 피아 쌍방으로부터 증오의 대상으로 지목되어 학살된 후, 그 시체는 토막 처져 티베르 강에 던져졌다. 동로마 제국이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후인 에우독시아가 테오도시우스2세(Theodosius II. 재위 408-450)의 딸이었기 때문인데, 막시무스는 확실히 전형적인 찬탈자로서의 운명을 겪은 것이다.

 

아비투스 Avitus, Maecilius. (재위 455-456) 西

갈리아의 명문가 출신.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치세기간을 통하여 오랫동안 아에티우스(Aetius. Flavius. 390년경-454. 서로마의 장군)휘하에서 군에 복무하여 갈리아군의 사령관으로 승진하였다. 그러자 전제 막시무스 참제의 참살과 반달족의 로마 침구소식을 듣고, 서고트족 왕 테오도릭(Theodoric)에게 지지되어 제위에 올랐지만, 혼잡한 틈을 탔고 또 외지의 이민족 왕의 지지를 받아서 제위에 오른 갈리아 시골뜨기 찬탈자라는 인상은, 그를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극히 인기없는 황제로 만들었다. 이탈리아 수비대의 이민족 출신 사령관 리키메르는 이윽고 자신의 대 반달군 최초 전승기회를 포착하여 아비투스의 퇴위를 강요하였다.

 

마요리아누스 Majorianus, Julius. (재위 457-461) 西.

5세기를 통하여 나타난 무력한 허수아비 황제들 중에서, 인격과 사적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송된 유일한 예외적인 인물이다. 그는 군인으로서 전제인 아비투스와 마찬가지로 아에티우스 휘하에서 전공을 세움으로써 독군 리키메르와 친한 관계를 맺었다. 아비투스가 퇴위당한 후, 이 국왕 메이커인 리키메르는 로마 시민들의 압도적인 요망에 동의하여 마요리아누스의 등극을 승인하였다. 고대 로마법과 자유관념을 국민에게 심어주었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아이스레벤에있는 농부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

 

 

으며, 재정을 재정립하고, 로마시 건조물의 파괴를 처벌하는 시책을 강력히 밀고 나갔으나, 제국 내에서의 기득권 폐지를 은근히 겁내던 리키메르 등의 반감과 원한을 사게 되자, 마침 황제의 대 반달족 정벌작전상 조그마한 실패를 이유로 리키메르가 사주하는 이민족 호위병의 강요된 퇴위로 물러난 뒤 살해되었다.

 

세베루스 Severus, Libius. (재위 461-465) 西

유능한 황제에 의하여 자기의 전제적 권력행사를 방해 받았던 리키메르가, 선제에 이어서 옹립한 괴뢰황제. 마요리아누스 황제의 사망으로부터 다음 안테미우스 황제의 등극까지의 사실상의 공위(空位) 6년간을 이 세베루스의 치정(治政)으로 특정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과 같다. 이 기간의 정권은 전적으로 이 이민족 출신의 국왕 메이커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 황제는 사실 생애를 통하여 이름없는 사인(私人)이었고, 그의 사후 2년간은, 제위는 문자 그대로 공위로 비어 있었다.

 

안테미우스 Anthemius. (재위 467-472) 西.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오 1세가 서로마의 국왕 메이커인 리키메르의 요청을 받아 들여, 서로마 제국의 황제자리에 앉힌, 말하자면 동로마로부터의 수입황제. 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는 반달족 왕 게이세릭의 위협에 겁을 먹은 리키메르가, 자신의 보신(保身)을 위하여 더 이상 제위를 비워 놓을 수 없게 되자, 동로마 제국과 공동으로 로마제국의 방위를 도모하고자, 동방으로부터의 황제파견을 받아들여서 앉게 된 서로마 황제이다. 안테미우스는 동로마 제국의 전 황제인 마르키아누스(Marcianus. 재위 450-457. 풀케리아 여제의 명목상의 부군)의 사위로서, 동로마 제국의 집정관과 명예현관(patriocius)을 역임하였는데, 원래대로 라면 동로마 제국의 제위를 계승할 후보자였던 것이 정략적으로 서로마의 제위로 미끄러진 것인데, 여기서 안테미우스는 자기의 집권체제를 굳히고자 정략적으로 자신의 딸을 리키메르에게 출가시켜 그와 장인과 사위관계까지 맺었다.

 

그는 그리스 인이며 철학자라 하여 종교상 카톨릭 교도들로부터 경계되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정치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각한 정치문제로는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군의 반달족 원정이 실패하자, 리키메르가 게이세릭의 협박에 굴복하여 말을 올리브리우스 쪽으로 바꾸어 타고, 올리브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한 리키메르 군이 로마 시가전을 벌인 끝에 안테미우스를 타도하였다. 여기서 안테미우스는 일단 도망쳐 거지로 변장했지만 결국에는 이 악랄한 자기 사위에게 발각되어 참살되었다.

 

올리브리우스 Olybrius. (재위 472) 西.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 플라키디아(Pulacidia)의 남편이라는 배경으로 말미암아, 안테미우스에 대항하고 리키메르에 떠받들어 지면서 동로마의 집정관이며 원로원 의원의 신분으로부터 일약 황제가 되었다. 안테미우스가 살해된 직후에 리키메르도 사망하였는데, 그러자 올리브리우스도 불과 재위 7개월만에 수종 증으로 로마에서 사망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올리브리우스 역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통황제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글리케리우스 Glycerius. (재위 473-474) 西.

서로마 제국에 일어난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리키메르의 조카이며 그의 후계자가 된 부르군드 족의 공자 군도발트(Gundobald)에 의해 옹립된 무명의 군인출신 황제. 얼마 후 군도발트의 신임과 비호를 잃게 되자 퇴위당하여 달마티아 교구의 주교로 은퇴하였다. 그도 전형적인 괴뢰이며 찬탈자로 규정되고 있다.

 

네포스 Nepos, Julius. (재위 474-475) 西.

서로마의 제위가 공석인 기회를 이용하여 동로마 제국의 레오 1세가 또다시 파견한 황제로서, 동로마 제국으로서는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정통황제로서 인정하고 있는 황제이다. 네포스는 레오 1세의 황후인 베리나(Verina)의 조카사위이다. 베리나 황후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서로마 제국의 행정수도 라벤나에 들어가서, 글리케리우스를 폐위시키고 제위에 올랐지만, 얼마 후 휘하에 거느린 이민족 연합군의 이반(離反)에 부딪혀, 판노니아 출신이며 로마군 총사령관인 오레스테스의 진격 앞에 수도를 탈출하여 도망쳐서, 그전에 자기가 군 총사령관으로 있던 달마티아 지방으로 내려가 숨어 살면서 굴욕적으로 퇴위당한 덕분으로 그 후 5년동안 더 연명하였지만, 결국은 그에 의해 축출되어 그 당시 달마티아의 카톨릭교 주교로 있던 전임 찬탈자이며 숙적인 글리케리우스에게 발각되어, 480년에 암살되었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Romulus Augustulus. (재위 475-476) 西.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이후 서로마 제국은 멸망한 것으로 된다. 그는 로마군 총사령관 오레스테스의 아들이다. 오레스테스는 쿠데타로 대권을 잡은 후, 스스로 제위에 오르지 않고, 나이어린 자기 자식을 명목상 황제로 앉혔다. 오레스테스는 훈족의 왕 아틸라에게 봉사한 후에 이탈리아로 돌아왔지만,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의 반란에 의해 체포 처형되었고, 황제자리에 앉아있던 의지할 곳이 없어진 이 유아는 퇴위당하여 캄파니아의 루쿨루스로 유배되었다. 한편 오도아케르는 동로마 황제 제논(Zenon/Zeno. 재위 474-475, 476-491)에게, 서로마 제국에서의 제위계승의 최종적인 정지를 통보하였다. 그런데 동로마 제국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네포스를 최후의 황제로 규정하고 있다. 부언한다면, 이 비운의 황제 Augustulus라는 이름의 어미인 lus는 지소사(指小辭, diminutive)이고, 또 Augustulus라고 이름지은 것은 초대 로마황제인 Augustus(재위 BD 27- AD 14)와 대비하여 최후의 서로마 황제에게 붙인 암시적인 호칭이라고도 한다.

레오 1세 Leo I. (재위 457-474) 東.

트라키아 지방 출신이며 아스파르(Aspar)가의 집사였다. 마르키아누스 황제의 사망으로 새 황제의 옹립문제가 제기되자, 당시 비잔티움 궁정의 실력자이던 아스파르의 적극 지지로, 당초에는 허수아비 황제로서 제위가 주어졌으나, 이 게르만 출신 친위대장의 구속으로부터 독립하고자 게르만군에 대항하는 이사우리아인을 포섭한 끝에, 아스파르 일족을 궁중 쿠데타로 모살 제거하였다. 이에 자신을 얻자 원수인 반달족의 정벌을 시도했으나, 이것은 황후 베리나의 남동생인 바실리스쿠스(Basiliscus)에게 지휘를 맡겼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한편 서로마 제국에 대해서는 마요리아누스 황제가 죽은 후, 리키메르가 기용한 세베루스 황제의 승인을 거부하고, 최종적으로 안테미우스를 서로마에 파견하였으나,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가져오게 했고, 다시 황후의 조카사위인 네포스를 서로마의 황제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레오 2세 Leo II. (재위 474) 東.

레오 1세의 딸인 아드리오네(Adrione)의 아들이며, 따라서 레오 1세의 외손자지만, 불과 재위 수개월만에 7살로 요절하였다. 공치제였던 실부 제논(전의 이름은 Tarasicodissa. 이사우리아 민병대의 대장)에게로 왕관이 돌아갔다.

 

제논 Zenon. (재위 474-475, 476-491) 東.

레오 1세가 아스파르에 대항하여 등용한 이사우리아 출신이며, 황제의 딸 아드리오네를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에 그는 처음에는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레오 2세의 부황제로, 그리고 그의 사후에는 정제가 된 것이다. 우유부단하여 선제의 황후 베리나가 사주한 바실리스쿠스에 의하여 한때 제위에서 추방되었으나 얼마 후 복위하였다. 황후 아드리아네의 인망의 도움을 받았지만, 반란과 종교상의 분쟁으로 교란된 치정(治政)이었다. 복위 후 오도아케르로부터 서로마 황제제도의 폐지를 통고받자, 명목상으로는 서로마의 황제를 겸한 생각으로 기분이 좋았으나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릭의 이탈리아 진격을 승인함으로써 오도아케르를 정벌하는데 성공하였다.

 

아나스타시우스 Anastasius I. (재위 491-518) 東.

제논 황제의 호위병으로부터 입신출세하여 수기밀관(守機密官)까지 올랐으며, 황제 사망 후에는 미망인이 된 황후 아드리오네와 결혼함으로써 61세의 나이에 제위에 올랐으며, 제논을 추종하던 이사우리아인들을 배제하는데 성공하였다. 흑해연안에 장성을 구축하여 국내정치에 볼만한 실적을 올렸고, 특히 재정을 정비 확립하여 훗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마구 뿌린 낭비의 재원을 축적했다. 본래는 가톨릭 신자였으나 후에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에 심취 귀의함으로써 동방교회 및 정통파 신자인 콘스탄티노플 시민들과 여러 가지로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것도 후에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한 정통파 신앙에 입각한 제국통합에의 복선이 되었다.

 

유스티누스 1세 Justinus I. (재위 518-527)

일리리쿰 지방의 농촌출신으로서, 유년시절에는 돼지치기 목동이었다고 한다. 20세 무렵에 콘스탄티노플로 상경하여 황제 아타나시우스 1세의 경호대에 입대한 후, 무공에 의하여 순차적으로 승진하여 명예현관, 궁정 경호대장이 되었다. 황제가 죽자 60대 중반의 나이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문맹상태 그대로 제위에 올랐다. 전임 황제와는 대조적으로 정통파 가톨릭을 신봉하여 519년에는 선제 치세하에서의 아카키우스(Acacius. 아리우스파의 한 분파인 아카키우스파의 창시자. 그리스도는 신과 본질을 같이하지 않으며, 양자는 의지에서만 서로 닮았다고 주장)분리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로마교황과 화해하였고, 523년에는 아리우스파의 교리를 금압함으로써 당시의 이탈리아 지배자인 동고트족 출신 이탈리아 왕 테오도릭과 대립하였다. 동방에서는 페르시아 황제 카바드 1세(Kavad I)세에 대항하여 라지카 전쟁을 수행하였다. 친자식이 없어 재위 중에는 줄곧 조카인 유스티니아누스의 강력한 보필을 받았고, 죽기 수개월 전에 그를 정식으로 공치제로 세워 후계자로 삼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대제) Justinianus I. (재위 527-565)

일리리쿰의 농촌출신으로서 유스티누스 1세의 조카이자 양자였다. 아나스타시우스 황제가 죽은 뒤 제위에 오른 백부 유스티누스 1세에 의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불리어 가서, 제국 통치의 숨은 실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백부의 죽음과 동시에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어, 로마 제국의 역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측근들의 통솔에 뛰어났으며 원형경기장의 무희 출신이었던 황후 테오도라의 뛰어난 조언은 황제의 정책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황후 테오도라는, 이집트, 시리아 등의 주민들이 믿고 있던 그리스도교에서의 이단인 ‘단성론(單性論)’에 대하여 깊은 이해심을 가지고, 황제의 종교정책이 로마에 치우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게르만 민족 대이동 결과 5세기에 잃은 옛 로마 서방의 영토 재 정복의 꿈을 실현시킬 명장 벨리사리우스와 환관 나르세스를 기용하여, 반달 전쟁(533∼534) 및 동고트 전쟁(535∼540, 541∼552)을 일으키고, 또한 552년에는 서고트 왕국에도 군대를 파견하여, 카르타고, 이탈리아 및 에스파냐 남부를 탈환, 지중해를 다시 ‘그들의 바다’로 할 수 있었다. 그 막대한 전비를 처리하기 위해 황제가 국가 재정을 맡긴 사람이 카파도키아의 요하네스였고, 국가 행정의 운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로마법 정비의 임무를 맡긴 사람이 법조가인 토리보니아누스였다.

 

이리하여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고대 로마 법학자들의 ‘학설집’, ‘법학 입문’ 및 법전 편찬 이후에 유스티니아누스가 반포한 ‘신법’으로 이루어진 《로마법 대전》이 완성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또한 위대한 건축 활동가로서, 특히 이시도로스나 안티미오스 등 당대의 으뜸가는 건축가를 발탁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세웠다. 이런 일체의 활동에서 유스티니아누스를 인도한 것은, 신으로부터 지상의 모든 일을 위탁받아 최고의 권력자로서 행동한다고 하는 그리스도교적 은총황제로서의 이념이었다.

 

하지만, 그의 치세는 결국 옛 로마제국의 위세(盛世)를 되찾지 못하고 종말을 고했다. 그가 벌인 정복사업과 토목, 건축 사업들은 제국에 심각한 재정난을 초래하였고, 541에서 543년 사이에는 페스트가 유행하여 막대한 인구의 손실을 입었으며, 곧 이어 561년 아바르 족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마저 받게 되었다. 그의 사후 헤라클리우스 왕조가 등장하였고, 이 때부터 비잔티움 제국은 독자적인 행로를 걸어가 완전히 그리스화하게 되었다.

 

그의 통산 38년 간에 걸친 통치사적을 살펴볼 때, 고대의 전통적인 로마제국의 재흥을 시종일관 겨냥한 그의 이런 사업들은 지금까지는 주로 유스티니아누스 개인의 고립된 야심적 기도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일면에서는 이것이 로마법대전 편찬과 같이 고대로마의 지적유산(知的遺産)의 획기적인 집성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전형적으로 그가 비극으로 끝낸 시대 착오적인 외정면(外征面)과 더불어 여러 가지로 역사적 평가를 받아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틀림없이 변경지방의 이름없는 가문출신의 이 대제가 원대한 야심과 웅대한 시야 그리고 강인한 지력과, 또한 명장 벨리사리우스를 비롯하여 뛰어난 문무양면의 인재를 발굴하여 국 내외 정책에 등용한 높은 안목과 식견에 입각하여 이 시기의 역사 상황에 직면하여 시정한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후 역대 비잔티움 제국 황제들의 선천적이며 숙명적인 정책의 장대(壯大)한 규모에서의 발동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유스티누스 2세 Justinus II. (재위 565-578)

동로마 중흥의 영주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조카. 장기간에 걸친 선제(先帝)치세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기도하여, 독자적인 정책을 수립 추진시켰으나 종교상 단성론자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였고, 페르시아 황제 호스로 1세와 대결하려고 한 여러 정책들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롬바르드 족의 이탈리아 침입을 허용했는가 하면, 동부에서의 요충지인 다라(Dara)의 함락보고를 듣고 난 후에 발광해 버렸다.

 

티베리우스 2세 Tiberius II. (재위 578-582)

황제 유스티누스 2세 밑에서 발칸 방면 군 사령관으로 있던 중, 황제가 발광(574)후에 그의 양자가 되었고, 이어서 제위에 올랐다. 페르시아 전선에서는 일단 성공하였지만, 북부의 아바르 족의 침공을 받았고, 다시 이 무렵에 트라키아와 그리스에의 슬라브족의 남하가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 자신이 중대한 병환에 걸렸음을 깨닫고 마우리키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제위에 오르게 한 바로 다음날 사망하였다. 덧붙여 말한다면 로마제국 제 2대 황제 티베리우스(재위 14-34)를 계산에 넣지 않으면 이 동로마 제국의 티베리우스는 2세가 아니라 통상 1세로 호칭된다.

 

마우리키우스 Mauricius. (재위 582-602)

페르시아 전선에서의 공적이 인정되어 티베리우스 황제의 딸과 결혼한 후에 제위에 올랐다. 페르시아 황제 호스로 2세(Chosroes/Khusru II. Parvez. 재위 590-628)의 간청을 받아들여서 그의 복위를 도와 준 후에, 북부의 아바르족 회유에도 성공하였다. 이탈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의 방위를 위하여 그가 창설한 라벤나(584년)와 카르타고(591년) 총독령에 대한 군정(軍政)은, 훗날 소아시아 반도 내에서 시행된 테마제도의 선구로 일컬어진 것으로서, 제국 중흥에서 상당한 효과를 올렸다. 그러나 도나우강 대안에서 동계야영하라는 명령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포카스 휘하의 군대가 수도에 침공함으로써 황제와 황제일족이 모두 학살되었다.

 

포카스 Phocas. (재위 602-610)

트라키아 군단의 100인 대장(centurion)에서 반란으로 제위에 오른 전형적인 찬탈자형 황제. 로마교회의 수위(首位)를 인정함으로써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Magnus. 재위 590-604. 성인)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오늘날까지도 그를 칭송하는 원주(圓柱)가 로마의 포룸에 있다.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걸은 페르시아 황제 호스로 2세의 침공을 받았고, 다른 한편으로 제국 내의 단성론자 적 유대교도에 대한 박해 등 공포정치를 실시함으로써 제국을 해체위기로까지 몰아넣었는데, 결국에는 카르타고 총독 헤라클리우스의 아들인 헤라클리우스의 수도공략으로 체포, 처형되었다.

 

헤라클리우스 Heraclius. (재위 610-641)

카르타고 총독인 헤라클리우스의 아들로,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 공포정치를 행한 포카스 황제를 폐위하고 황제가 되었다. 최초의 십자군으로 평가되는 페르시아 원정을 감행하여 호스로 2세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고, 예루살렘을 수복하고 성 유물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조각을 되찾음으로써 중세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경건한 그리스도 교도인 동시에 뛰어난 현실적 통치감각을 가졌던 그는 해묵은 그리스도 교리논쟁에서 정통파로부터 분리되어 나간 동방교회들을 붙들어 놓고자, 일신교리(단의론)의 제창으로 제국 내의 종교적인 화해에 노력하였지만, 이미 때가 늦었던 것이다. 이슬람교의 신앙으로 통합된 신흥 아랍군대가 사회적으로 피폐하고 신앙으로 분열되어 있던 시리아에 침공하여, 야르무크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을 격파한 것을 시작으로, 몇 년 후에는 페르시아로부터 반환받은 팔레스티나,시리아,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이집트를 잇달아 상실하였는데, 이러한 여러 지역들이 영원히 그리스도 교권으로부터 벗어나 버림으로써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페르시아 원정의 영광도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렸지만, 그가 대 페르시아 방어책으로 소아시아에 창시한 테마제도는 이후 4세기 동안, 제국의 사회적인 생명력의 지주가 되어, 이 지역이 제국멸망의 마지막 시기까지 이슬람 세계의 서방진출을 저지시키는 중핵적인 판도로 계속 남아있게 하였다.

 

콘스탄티누스 3세 Constantinus III. (재위 641)

헤라클리우스와 그의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부황(父皇)사망 후 3개월간만 재위.

 

헤라클로나스 Heraclonas. (재위 641)

헤라클리우스와 그의 후처 마르티나(Martina)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형인 콘스탄티누스 3세가 죽은 후, 짧은 기간 동안 단독황제가 되었으나 민중의 반란으로 로도스섬으로 추방되었다. 그가 생모와 공모하여 콘스탄티누스 3세를 독살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는 설이 유력하다.

 

콘스탄스 2세 Constans II. (재위 641-668)

콘스탄티누스 3세의 아들로 11세에 즉위했는데, 즉위한 직후 이집트와 아르메니아를 연이어 아랍군에게 빼앗겼지만,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직접적 위협은 칼리프 오스만(Othman b. 'Affan. 3대 칼리프. 재위 644-656)의 피살에 의한 이슬람권의 내분으로 겨우 회피되었다. 국내에서의 그리스도교 교리논쟁을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교서 티포스(Typos)가 교황에 의하여 반대되자 교황 마르티누스 1세(Martinus I.)를 강제로 체포 추방함으로써 서방교회들과 충돌하였다. 그 후 이탈리아에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아랍에 대한 서방지역 방위 근거지로 삼을 목적으로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지만, 얼마 후 암살되었다.

 

콘스탄티누스 4세 Constantinus IV. (재위 668-685)

포고나투스(Pogonatus:수염있는 사나이)가 별명. 콘스탄스 2세의 장남. 그의 치적은 674년부터 5년 동안에 모두 4회에 걸친 아랍군의 콘스탄티노플 공위(攻圍)를 막아냄으로써, 비잔티움의 위신을 높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서유럽에서의 카를 마르텔(Karl Martell. 689-741. 프랑크 왕국의 궁재. 피핀 2세의 서자)이 732년 투르.푸와티에 전투에서 사라센 군을 격파한 영광을 능가하는 공훈으로 평가받고 있다.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칼케돈 신경을 승인함으로써 로마와 화해했지만, 발칸반도에 대한 불가르 족 침공저지에는 실패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 Justinianus II. (재위 685-695, 705-711)

별명이 리노트메투스(Rhinotmetus:코 베인 황제). 전제자였지만, 기략에 뛰어난 유능한 황제로서 대외적으로는 마케도니아를 회복하고 그 지역의 슬라브족들을 소아시아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그는 한번 추방되었으나, 천신만고 끝에 10년 후에 복수귀가 되어 불가르 족의 칸인 테르벨의 원조로 권토중래하여 복위했지만, 너무나 보복적인 압제를 강화했기 때문에 결국 민중봉기로 살해되었다. 이로써 헤라클리우스 왕조는 단절되었다.

 

동방교회 ; 모하메드 교도들이 성 소피아 회당을 점령했고, 기독교인은 전도는 할 수 없었 으나 신앙 유지는 가능하게 했다. 교리,조직, 예배는 변함이 없었으나 점점 쇄퇴 해 갔다. 교회의 재산은 몰수를 당하고 학교는 붕괴되었다. 또 교직자의 권위가 추락되고 황제의 종속에 불과하게 되고 모하메트교는 우대하게 되고 기독교는 학대 하였다. 크리스챤 소년중 건장한자를 징집하여 모하메트식 훈련과 교육으 로 군대를 편성 하였다.

 

 

 

 

● 종교개혁의 원인과 형태 그리고 공과를 쓰라

원인 : 교회의 타락, 교직의 타락으로 휴머니즘이 발생하고, 개혁 전 개혁자 위클리프, 후스 등의 개혁론이 영향을 끼쳤고, 교황 레오 10세의 속죄표 판매에 대한 루터 의 봉기가 원인이 되었다.

정치 형태 : 루터파 : 확정된 양식이 없었고

칼빈파 : 장로 정치를

영국교 : 구교 정치를

재세례파 ; 침례교 회중 정치를 했다.

공 과 : 공 : 성경의 근본 사상으로 환원 하고, 우상화와 의식화한 예배를 성경 중심 으로 환원하였으며, 전체주의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성경해석 의 길을 제시 하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할 수가 있게 되었다.)

로마 교회내의 자체 혁신운동 전개토록 자극을 하였다.

화 : 신교 안에 여러 교파가 생기고, 전쟁 유발로 많은 인명 피해와 경제적 파탄이 있었다.

※ 봉건주의 몰락으로 중산 계급의 부흥을 가져왔고, 일반적 지식의 발달로 문화가 향상 되었으며, 개인주의 부흥으로 자본주의가 형성되고, 각종 공업의 발달의 계 기가 되었다.

 

● 루터의 생애와 개혁운동을 쓰라

생애 :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아이스레벤에 있는 광부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머 니는 독실한 신자였고, 19세에 에르프르트 대학에서 스콜라철학과 라틴문학을 전공하고 법학을 전공하려다가 아우쿠스티누스 교단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루터 는 베텐배르크 대학의 논리학, 물리학 교수를 거쳐 신학교수가 되었으며, 1511 년 수도사 회의 명령을 띠고 로마 여행을 하면서 교회의 여러 가지 부조리를 알 게 되었고, 1512년 신학박사가 되었다. 1525년 카타리나 본 포라 수녀와 결혼 하였으며 1546. 2. 18일에 죽었다.

개혁운동 : 발 단 : 교황 레오10세의 속죄표 판매에 반대하여 1517년 10월31일에 95 개 조 논제로 공격하므로

추방 장 : 1519년 라이프치히대학 카톨릭교수 에크의 재빠른 고발에 따라 추방 장을 전달한다.

저서를 불태우게 하고 60일이내 회개치 않으면 그 일당 까지 체 포한다고 했으나 루터는 1520년 12월 10일 대학에서 교수와 학 생들을 모아 놓고 추방 장을 불태워 버렸다.

95개조 항의 문 : 1517년 요한 테칠이 교황을 대신하여 독일에 와서 속죄 표를 판매하는 것을 보고

1. 속죄표는 하나님의 징벌을 없고, 교회의 정죄만 없게 할 뿐이다. 속죄표는 죄를 사할 수 없다.

2. 속죄표는 죄인이 하나님께 마땅히 받아야할 형벌을 없이 할 수 없다.

3. 연옥에 있는 영혼에게는 속죄표가 쓸데 없다.

4. 죄를 참회한 신자는 하나님께 죄사함을 이미 받은 고로 속죄표는 쓸 데 없다.

5. 선행, 공로, 보화가 무엇인지 평민이 깨달을 수 없고 그 보화 창고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가르친 복음 뿐이다. 교황은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나 성도들의 공 로를 팔 권한이 없고 정죄만 없엘 권한이 있다.

95개 논조의 내용 : 1 ~ 7 - 회개와 교황

8 ~ 29 - 연옥에 있는 자 사면 문제

30 ~ 80 - 살아 있는 자 사면 문제

81 ~ 91 - 평신도로서 반대

92 ~ 95 - 판매동기의 잘못 지적

결론 : 고난의 유익


●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에 대하여 쓰라

67개 논조 (루터의 95개조 논제와 비슷)를 걸고 토론하여 통과 시킴

예배의식의 근본적 개혁을 하고, 교회 정치의 주권은 교회에 있다고 주장을 함

 

● 칼빈의 생애와 사상을 쓰라

생애 : 1509년 7월 10일 파리 동북방에 있는 느와이용에서 5형제중 둘쩨로 출생 했다.

부친 제라드는 법률가로 감독, 서기로 근무를 했고, 모친은 경건한 신앙인 이었 다. 1523년 8월에 파리대학에 입학, 라틴어, 철학, 인문, 과학을 공부했고졸업 때 에 법과로 전과 했다. 1533년 11월 1일에 친구 니콜라스 코프가 파리대학 학장 으로 취임할 때 취임연설의 기초자로 복음주의를 강조하였다. 그 결과 코프는 바젤로 피난하고 칼빈은 앙귈렘의 뒤틸레의 집에 피신하였으며 이 집은 은퇴 교 역자의 집으로 윤곽을 잡았다.

1535년 바젤에서 역사적 명저인 기독교 강요를 발행 하였다. 스트라스브르로 가 는 도중 제네바에서 파렐과 만나 제네바에 끝까지 머물며, 개혁사업에 종사하였 다. 1540년 8월 네델란드에서 피신해온 과부와 결혼 하였다. 1564 5월 24일 55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는 분주한 개혁 사업소에서 과로로 신체가 허약 하 였는데, 수년간 1일 1식 하였고 매일 설교 하였으며, 주 3회 신학강의를 하고, 저술에 종사 하는 한편 왹구의 신앙 동지들과 연락 하는 등, 과로 속에서 지냈 다.

사상 : 신학의 기초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하나님의 섭리를 주장, 그리고 인간과의 밀 접한 관계에 두었고, 성찬론은 기념설을 주장 하였다.

신앙의 5개 신조 :

1. 인간의 전적타락, 2. 무조건적 예정, 3. 제한된 선택, 4. 불가항력적 은총

5. 성도의 견인

 

● 칼빈의 개혁운동의 특징을 쓰라

1. 신학이 통일적 이었다.

2. 교회의 기치가 선명하고 교회정치는 세계 각국에서 적용하여도 편리한 점이 많았다는 점

3. 기독교 생활 훈련에 치중하여 실효를 거두었다는 점

4. 재세례파, 루터파, 쯔빙글리파들을 폭넓게 포용하였다는 점

5. 테오도르 베자 와 같은 훌륭한 후계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 재세례파에 대하여 쓰라

1527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총회가 소집되어 재세례파가 조직 되었으나, 종교개혁 이 전부터 독일, 네델란드, 이탈리아 등지에 흩어져 있던 개혁신앙을 소유한 작은 무리들 이 있었다. 초대교회 형태로 교회를 회복시키자는 의도에서 출발 하였다.

재세례파란 명칭은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장년 세례만 주장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이 들은 교회는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의 집단 체 라고 주장하며, 중세교회의 조직, 의식 의 예전을 반대하고 예배는 자국어로 하고 기도에 힘썼다.

로마교회, 루터 파, 칼빈 파의 반대로 박해를 받았으며 오늘 날의 침례파 형성을 가지 고 왔다. 교회정치는 - 목사, 장로, 집사 직을 두었다. 대표자는 발다자르 휘브마이어 (Balthasar Hubmaier) 와 한스 뎅크(Hans Denk)였다.

신앙관 : 초대교회 신앙생활을 모방하고, 신앙적 의식을 가지고 신앙고백을 할 때라야 세례의 의의가 있다고 주장하여 유아세례를 반대 했으며, 무저항주의 였으 며, 국가 지배를 반대하고, 세금 납부를 반대 함, 예정론을 배격하고 자력구 원설을 주장함.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설교나 말씀은 문자대로 복종하려고 노 력했고, 예배는 단순하고 신앙은 의식적 이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 트렌토 회의에 대하여 쓰라

교황 바울3세 가 황제 카알의 청원에 의해 소집되었다. 1545년 ~ 1563년 19회째 세계 종교회의로 18년간 진행이 되었다. 이사이 5대 교황이 교체되기도 했다.

의제는 : 황제 편에서 : 교회의 개량과 신교와 가급적 타협을 주장

교황 편에서 : 신교 혼동 방지를 위해 교리 제정을 주장.

회의 및 결의 : 제 1기 ~ 1545 - 1549. 9. 17 = 교리문제에 치중하여 교황과 황제의 충동을 피하기 위해 무기 정회(1547. 전염병으로 볼로냐(Bologna)로 옮겨 모임) / 성경과 교회 전통의 동권(同權), 세례, 경신을 인정 함.

제 2기 ~ 1551 - 1552 율리우스 3세에 의해 트랜토에서 열리게 되었 다. (황제의 타협 정책) / 성찬, 참회, 예전을 인정 함.

제 3기 ~ 1562 - 1563 피우스(Pius)4세가 회의를 소집함, 비 타협파 가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생사자(生死者)간의 중보기도 유효, 성자숭배, 속죄 표를 인정했다.

결과 ; 로마 교회의 수뇌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 하여 비타협적이며 신교의 언권(言權) 을 봉쇄 했고, 로마교회교리를 재확인 했으며 교회규율을 바로 잡았고, 로마교 회의 개혁 운동과 전도운동의 계기를 마련하여 신학교와 감독선거가 개혁됐다.

 

● 청교도 운동에 대하여 쓰라

카톨릭식의 의식과 미신적 교회풍토에 대한 청결운동으로 영국의 종교개혁을 신학과 제 도적으로 철저화 하려는 신앙인들의 무리이다. 제임스 1세의 즉위때부터를 청교도 시대 라고 불렀다.

헨리 8세 때 대륙으로 가서 교회 앞에 제단을 설치하는 것을 반대 하는 개혁운동을 배 운 존 후우퍼(John Hooper, 1495 ~ 1555년, 1550년 글로스토 감독이 되었을 때 임 직에 제복입는 것을 거절하여 투옥이 되었고, 메리 여왕의 박해 때 화형을 당함) 의 뒤 를 이어 대륙에서 돌아온 개혁파 신자들이 국교의 근본적 개혁을 주장 함.

이들은 성경의 감화를 받고, 하나님의 의지를 최고의 법칙으로 지키며 가정에 대한 고 상한 이상을 실현하고, 안식일을 성수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했다.

 

● 웨스트민스트 회의에 대하여 쓰라

동기 : 1. 찰스 1세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국회를 탄압하고 1629 ~ 1640년간 국회 를 소집 하지 않았다.

2. 1640년 11월에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때문에 국회를 회집 한다. 이 국회를 장 기국회( The Long Parliament) 라고 하며 지도자는 청교도 측의 장로교정치 를 주장하는 햄프던(Hampden), 핌(Pym)등이 있었다.

3. 감독정치를 폐지하고 국회 결의로 1643년 7월에 웨스터 민스터 신학자 의회 를 개회케 된다.

목적 ; 교회의 신조와 정치, 의식 등을 새로 제정하기 위하여

회원 : 목사 121명, 귀족 10명, 하원 의원20명이었다.

결의 : 1. 예배 모범을 채택

2. 신앙고백서를 채택

3. 대소 요리 문답서를 제정 하였다.

- 참고 -

대소요리문답서란? 은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을 함께 부르는 말이다.

1647년 웨스트민스터 사원 에서 칼빈주의 신앙 원리에 입각한 신앙고백과 대소 요리문답서를 신학자, 목회자, 장로들이 함께 모여 장로교는 이 신앙 원칙 속에 신앙생활 할 것을 결정하였다. 한국 장로교회는 “1907년에 발간한 요리문답을 위시하여 1917년 9월 제6회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적당히 수정 채용한 이래” 그것을 신앙의 원리로 삼아 전 교회에게 학습시키도록 명하여왔다.

 

이 헌법의 신조 서언에서는 “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와 성경 대소 요리문답은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인정한 것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성경 소요리 문답은 더욱 우리 교회 문답 책으로 채용하는 것이다” 장로교인들은 웨스터 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소요리 문답 107 항목 대요리 문답 196 항목은 누구든지 한번은 꼭 정독해야 하는 필독서이다.

 

● 청교도의 대표적 학자들을 쓰라

1. 존 밀톤(John Milton, 1608 ~ 1674년) (회중교회)

철저한 청교도로서 소경이 되었으나 크롬웰의 비서관을 지냈으며 저서로는 실낙원, 복 락원 등이 있다.

크롬웰은 ~ 헌팅턴(Huntington) 출신으로 후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국왕과 국회와의 전쟁에서 국회군을 이끌고 국왕군을 격파했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고 공화 정치를 선포함 1652년 공화국 통령(Protector)이 되어 종교 자유를 허락하고 신교도 들을 보호함.

 

John Milton은 영국의 시인으로서 런던 출생이다. 대서사시 《실낙원(失樂園) Paradise Lost》의 저자로서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대시인으로 평가된다. 신흥 중산 계급인 공증인 ·금융업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로마 가톨릭교도로 자영 농민이었는데, 아버지가 신교로 개종하였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는 절연되었다고 한 다. 형제로는 누나 앤과 나중에 법률가가 된 남동생 크리스토퍼가 있다. 밀턴은 작곡 에 재능이 있던 아버지로부터 청교도적인 강렬한 기질과 음악 애호의 소질을 이어받고 문예부흥적인 교양을 몸에 익혔다. 7세에 성 바울 학원에 입학하여 라틴어 ·그리스어 · 헤브라이어를 배웠고, 청교도 신학자 T.영으로부터 신학 지도를 받았다. 이러한 환경에 서 인문주의와 청교도주의가 밀턴의 생애와 사상의 틀이 되었던 것이다. 1625년 케임 브리지대학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단정하고 수려한 용모와 청순한 생활태도 때문에 ‘크라이스트대학의 숙녀’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미 이때의 밀턴의 라 틴어 시는 다른 어떤 영국인에게도 추종을 불허하는 높은 수준에 도달하여 있었다. 1626년에 쓴 짧은 반가톨릭적인 서사시 《11월 5일》에서 생생하게 악마와 지옥을 묘사하였다.

최초로 영어로 쓴 걸 작시 《그리스도 강탄의 아침에》(1629)는 종교적 주제에 있어 서나 기교적 원숙에 있어서 성년에 도달하였고, 또 그의 장래의 방향을 선언한 작품이 었다. 1631년에 발표한 《쾌활한 사람》과 《침사(沈思)의 사람 Il Penseroso》은 엄 격한 청교도적 정신과는 아주 대조적인 문예부흥적인 향기가 높이 풍기는 우미(優美) 한 심정을 토로한 작품이다. 이때부터 아버지가 희망하였던 성직자가 되는 길을 버리 고, 시작에 전념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1632∼1638년의 약 6년간 런던 서쪽 교외 의 호튼에서 전원생활을 하면서, 그의 위대한 테마인 선악 갈등의 최초의 연극적 표현 이며, 후기의 3대작의 시풍을 암시한 가면극 《코머스 Comus》(1634)와, 신의 섭리 를 소원하면서 새로운 희망으로 사는 결의를 피력한 목가적 작품이며 불의의 해난사고 로 죽은 친구를 추도한 시 《리시다스 Lycidas》(1637)를 발표하였다. 1638년 대륙으 로 건너가, 파리에서는 그로티우스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갈릴레이와 알게 되었으 나, 고국의 정치적 동란이 위급함을 듣자 그리스 여행계획을 취소하고 1639년 귀국하 였다

 

2. 존 번연(john Brnyan, 1628 ~ 1688년) (침례파)

베드파드(Bedford)출신으로 대장간에서 일했다. 침례교회에 속하여 설교, 불법집회 죄 로 12년간 투옥 되었고, 석방되어 다시 16년간 설교 하였다. 천로역정, 성전 등 59권 의 저서를 냄

 

3.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 ~ 1692),(국교회)

국회군의 종군목사였으며, 저술에 종사 하였다.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조 화에 노력했다. 저서로는 성도의 영원한 휴식, 목회자 상

 

4. 존 오우엔(John Owen, 1619 ~ 1683년) (회중교회)

영국 국교회 목사로서 장로파에 가담 하였다가 후에 독립파가 되었다. 크롬웰이 궁중 목사가 되었다가 옥스퍼드 교회의 수석목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히브리서 주해가 있 다.

- 참고 -

존 오웬은 1616년에 태어나서 1683년에 서거한 영국의 청교도 목사이다. 1628년에 옥 스포드 대학에 진학한 그는 1632년에 문학사를 , 그리고 1635년에 문학석사(M.A.) 학 위를 취득하였다. 오웬은 수 년동안 4시간 이상을 자지 않을 정도로 학업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옥스포도 재학 시절에 그의 영혼에는 중생의 확신이 없었다. 그러던 그가 구원의 은혜를 맛보고 확신하게 된 것은 런던에 체류하던 1642년 무렵이었다. 어느 무명의 설 교자가 마8:26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을 듣고서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라는 내적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 부터 시작해서 나머지 생애동안 존 오웬은 심오한 신학적인 깊이 와 체험적인 경건을 균형 있게 보여주는 수많은 작품들을 저술하였다.

1646년에는 오바댜 세즈윅의 후임으로 코게살 교회의 목사로 시무를 시작하였으며, 1651년에는 올리버 크롬웰경에 의해서 옥스포드 대학 부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657년 에 크롬웰이 왕권에 도전하는 시도를 막으려다가 부총장직을 사임하였다. 1660년 왕권 복고가 이루어지고 난 이후 수많은 청교도 목사들이 시련과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 다. 존 오웬은 다른 동료들 만큼 크게 고생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목회 사역은 소규 모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대신에 그는 20여 년간을 수많은 신학적인 저작을 저 술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 존 오웬의 이름이 들먹여지는 것은 바로 그 의 저작들 때문이다.

5. 리처드 후커(Richard Hooker 1533 -1600년)

독특한 성공회 신학을 주창한 영국의 신학자, 영어 산문과 법철학의 대가. 미완 성으로 남긴 걸작 〈교회정치법에 관하여 Of the lawes of ecclesiasticall) 옥스퍼드 대학의 조교수 역임.


6. 재러미 테일러

영국교회의 교구장이었다. 저서로는 거룩한 생활, 거룩한 죽음 이 있다.


7. 조오지 허어비트

캠브리지 대학 출신으로 제임스 1세의 부름으로 궁중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시집 으로 성전(Temple)이 유명하다.

 

8. 메튜헨리

법률을 수학하고 체스터에서 장로교회 목회를 하였다. 메튜헨리 주석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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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세 철학의 발달에 대하여 쓰라

- 참고 -

서양 철학의 역사를 시대로 나누면 그리스 철학을 중심으로 하는 고대철학, 기독교철학이 지배한 중세철학, 르네상스이후 19세기까지의 근세철학 및 20세기의 현대철학으로 나눈다. 근세철학은 사상적으로는 중세의 신(神)중심사상에 대하여 고대 그리스철학의 인문주의적 사상을 다시 부흥시킨 인간중심사상의 철학으로서 출발하였다. 서양 철학사 전체를 통하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근세철학은 13-14세기의 르네상스 시대에 근대시민사회의 발달과 함께 나타난 근대적 개혁사상이며, 그것은 여러 발전 단계를 거쳐 19세기 말까지 계승되어 오늘날의 서구사상의 근간을 이루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서양에서의 그리스철학과 기독교사상의 중세적 조화는 깨어지게 되었다. 즉 이성과 신앙의 분리로 부터 비로소 근세 철학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된다. 중세 철학이 신 중심의 철학이었다면 근세 철학은 인간 중심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세 철학은 교회의 권위 대신 과학의 권위가 높아지면서 발달하게 된다. 그러나 근세 철학에서 논의된 인간은 역사적, 사회적 인간이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인간이었다. 때문에 근세철학에서는 자아의 자각이 그 중심문제로 옮겨갔다. 그래서 근세 철학은 예전과는 달리 내면적 신앙, 개성과 인격존중, 진리인식의 문제를 철학의 주제로 삼고 인식론적 방법의 연구에 주력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신앙보다 이성을 우위 두려는 경향의 결과로서 자연철학이 발전하였다. 오캄의 유명론에서 발전한 쿠자누스의 범신론은 장차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적 우주론을 낳게 된다. 쿠자누스가 생각한 세계는 일종의 계층적 질서를 가진 점에서는 중세적이지만, 공간적으로 무한하고 중심도 주변도 없다고 하는 점에서는 중세를 넘어서 있으며,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면서 자전하는 유성이고 불완전한 구형이라고 주장한 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프톨레마이오스적 우주관을 넘어선 근대적인 것이다. 또 ?반대의 일치?를 둘러싼 동일과 차이, 필연성과 우연성, 가능성과 현실성에 대한 그의 변증법적 사고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1.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민족적. 국제적 문제가 새롭게 관심의 초점이 되자 유럽에서는 정치철학이 성장했다. 이탈리아의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과 그 밖의 저서에서 국가이성을 도덕성보다 높이 평가하며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기술을 연구했다. 마키아벨리의 연구 동기는 이탈리아를 완전히 통일하려는 애국적 희망과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낮은 도덕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고대 로마의 덕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신념 이었다.

 

근세철학의 시대적 배경

근대로 접어들면서 중세의 국가와 교회의 정치적 역학관계 및 권위주의적 종교가 많은 모순을 야기했고, 사회적으로는 그동안 누적되어온 불만이 그것에 대한 반기를 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모든 새로운 사상들이 그러하듯 근대철학은 결국 중세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근대 철학은 자연과학의 발달과 스콜라 철학의 붕괴 그리고 르네상스 즉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정신적인 혁명들을 바탕으로 시작된다.

1) 자연과학의 발달

십자군 원정으로 선진 아랍문명이 흘러들어옴에 따라 중세와 근대의 과도기에 자연에 관한 새로운 지식들이 나타났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다.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며 천체는 오직 지구를 중심으로 선회한다는 천동설을 믿고 있던 기독교인들에게는 ‘지구는 태양주위를 돌고 있는 많은 위성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지동설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충격을 주었다. 코페르니쿠스의 뒤를 이은 인물로 케플러와 갈릴레이가 있는데, 갈릴레이는 케플러보다 더 양적, 수학적 기초 위에서 자연과학의 원리를 제창하였다. 사물의 본질을 중심으로 질적 측면에서 자연을 관찰했던 고대인들과 달리 이제 근대의 과학자들은 양적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자연을 탐구하게 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갈릴레이의 이같은 과학적 사고는 당시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2) 르네상스와 스콜라철학의 붕괴

중세 철학자들의 관심은 현실을 넘어선 초자연적인 대상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대로 넘어오면서부터, 관심의 초점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바뀌었으며, 신학 대신에 자연과학이 모든 학문의 앞자리에 나서기 시작하였고, 종교에 있어서도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개인적으로 신앙의 대상과 접촉하길 원했다.

 

중세 시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스콜라 철학은 계시의 내용이 학문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는 스콜라 철학 자신의 내부적 붕괴와 더 이상 철학이 종교의 시녀로서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철학적 독립성과 자주성을 강화하려는 각성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물론, 스콜라 철학이 종교를 위한 철학 즉 신학으로 출발한 것이었으나 그역시 하나의 학문임을 부정할 수 없었고 그로인해 자유로운 연구심과 지식욕을 촉발시켰으며 결국 낡은 교회의 원리와는 전혀다른 “사고하는 정신”의 원리, 즉 이성의 자기의식을 산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인간성의 회복 및 고전의 연구와 고대문화의 부흥운동이 곧 르네상스(Renaissance)운동이다. 고대에 대한 관심은 14세기에 접어들면서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와 같은 인물들에서 출발하였다. 이들은 중세에 이르러 거의 자취를 감춘 고전 문학 작품을 재수집, 발굴하는데 열중함으로써 인간적인 것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인본주의는 문학적인 것에만 치중하지 않고 정신생활의 모든 영역을 대상으로 확산되어 갔다. 에라스무스와 로이홀린, 홋텐 등은 고대철학의 진정한 의미를 부활시키고자 하였고 동방의 희랍 신학자들은 고전연구를 위해 이탈리아로 모여들었다.

 

르네상스의 중심적 내용은 인간 회복을 위한 인본주의 정신이었다. 중세기에는 인간이 신을 위해 존재했으며, 사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파악과 자율성은 종교적 전통과 인습 때문에 소외당했고 종교적 제도와 전습은 인간과 사회를 동시에 묶어두는 폐습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이 시대의 여러 예술가들은 고전과 고대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활발히 전개 시켰다. 고대의 정신과 예술 속에는 인간의 본성과 꾸밈이 없는 삶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것이 중세로 들어오면서 신앙적인 허위의식과 권위 때문에 상실되었던 것이다.

 

인본주의자들의 노력 덕분에 이제 서구 유럽인들은 스콜라철학의 색안경을 벗고 편견 없이 희랍과 로마철학을 연구하게 되었고 거기서 자극을 받아 후세의 새로운 창조적 성과들이 나타날 수 있게 되었다. 인본주의는 세계와 인간의 재발견인 동시에 인간의 자기긍정 이라 할 수 있다.

 

3) 종교개혁과 농민운동

15세기초 체코인 잔후스는 교회가 광대한 토지를 점유하고 있다는 것이 모든 죄악을 생기게 한 원인이라고 생각하여, 교회 재산의 몰수를 주장하고, 신의 눈에는 도덕을 판별할줄 아는 가난한 농민이나 부녀자들이 죄 많고 부유한 사제들보다 훨씬 고귀하게 보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농촌에서 전도할 때 공공연하게 농민 착취제도를 공격하여 많은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농민전쟁을 발발시키는 계기를 가져왔다.


16세기 초 독일에서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한 종교개혁과 토마스 뮌쩌에 의한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신학 교수였던 루터는 1517년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대하여 95개조의 반박문을 통하여 인간이 각자 자신의 이성을 신뢰하고 자신의 이성에 기초하여 신을 믿는다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교회는 여기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토마스 뮌쩌는 루터가 농민전쟁을 두려워한 나머지 봉건귀족에게 가담하자 단호히 루터를 반대하고 민중에 의한 종교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천국이 결코 보이지 않는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 가운데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독교의 사명은 현실세계에 천국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2. 현대 철학으로의 이행

근대의 새로운 경제 질서의 담당자는 스스로 자유롭고 자의식에 가득 찬 부르주아지였다.

(부르주아지(프랑스어: bourgeoisie)는 원래 중산층이란 뜻이었으나, 마르크스주의 이후 현대에는 자본가 계급을 의미한다. 형용사형은 부르주아(프랑스어: bourgeois)이다.) 이제 정신생활에 대한 영향력은 성직자에게서 평민으로 이양되었다. 최하위 신분이었던 농민들은 격렬한 투쟁을 했지만, 정치적으로 미숙한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곳곳에서 격파당하고 말았다. 결국 농민전쟁에서 이득을 본 자들은 왕들이었다. 단일화된 거대한 상업경제권을 위해 국가의 중앙집권이 필요했고 그 결과 왕들은 강력한 권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서유럽의 상황변화는 새로운 법 이론과 국가이론을 필요로 하였다. 이탈리아가 분열되고 열강들이 이탈리아를 할거하려고 했던 시기의 마키아벨리(Nicolo Machiavelli)는 [군주론]을 통하여 오직 국가의 자기보존과 권력 장악만이 모든 정치행위의 유일한 목표이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군주는 여우의 간교함과 사자의 용맹함을 아울러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의 사상은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된다면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영국의 홉스(Thomas Hobbes)는 윤리와 정치이론에서 신학적 관점을 배제하고 전적으로 경험에만 의존하였다. 그는 인간이란 본래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이기적 본능에 따라서 행동하는 자연 상태에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지배하게 되는데,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사회계약 즉 법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홉스의 뒤를 이어 나타난 로크나 루소 같은 계몽 사상가들에 의해 마침내 시민혁명의 토대가 될 사상들이 나타나고 유럽은 이제 근대적인 국가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러나 현대 철학으로의 넘어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헤겔이었다. 그에 의하면면 근대가 발전시켜온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는 계몽 철학 안에서 서로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계몽 철학의 사유는 그 자신에 대해 경험주의로서 성취되는 합리주의로 일어난다. 여기서 사유는 스스로의 합리적 원칙들이 사유하는 인간의 사실적인 삶의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계몽 철학 안에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가 하나가 되며 이성 자체가 스스로를 경험으로서 받아들이고자 한다는 헤겔의 주장은 인간이 이제 더 이상 추상적인 원칙과 법칙에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직접적 사유를 통해 실재의 본질을 획득한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섭리하시고 운행하시며, 다스리셨다. 이 자연과 우주에 대한 학문이 과학이다. 1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은 지구가 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있으며, 나머지 우주는 지구를 중심하여 돈다고 믿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과학의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이론의 결과를 낳았다.

 

본 연구에서는 이와 같은 과학의 발달을 그 시초부터 고찰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온 우주가 태양을 중심으로 존재한다는 설을 주장하였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입증하였고,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뉴튼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공식화하고 미분학을 발견하였으며 최초로 백광을 분석하였다. 이렇게 과학이 발달함으로 신비한 우주의 법칙이 설명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아쉽게도 기독교의 평가절하 문제를 가져왔다.

 

문예부흥은 자연에 대해 인간의 눈을 뜨게 하였고 종교개혁은 로마 교회의 교리 및 전설의 구속을 벗어나 개인적 판단의 권리를 인식케 하였다. 스콜라 철학이 무너진 후 새로운 철학과 세계관이 그 자리를 채워야 했는데 근대 과학과 철학이 그 역할을 감당하였다. 자연 과학의 발전은 우주와 인간의 위치에 대한 전망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부르노, 갈릴레이, 뉴튼과 같은 학자들이 과학의 발달에 기여하였다.

1)과학의 발달 : 코페르니쿠스(1473 ~ 1543년) - 태양 중심설 주장

코플러(1571 ~ 1630년) - 천문학 연구

브루노(1548 ~ 1600년) - 천문학 연구

갈릴레오(1564 ~ 1642년) - 망원경 개발과 코페르니쿠스 학설 입증

뉴우톤(1642 ~ 1727년) -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

 

- 참고 -

1.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 :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2월 19일 동부 폴 란드의 토룬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91년에 크라코우 대학교에 입학 하여 천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497년에는 볼로냐 대학에 들어가 헬라어, 수학 그리고 플라톤의 저서들을 공부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앨데버란 성의 엄폐를 관측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최초의 천문 관측이었다. 그는 수학·의학·신학 및 천문학 에 모두 능했지만 특히 천문학의 체계적 연구에 열중하였다. 1510년에서 1514년경 에 그는 태양 중심적 견해(지동설, 地動設)를 간단하게 서술한 사본을 준비하여 친 구들에게 회람시켰다. 1533년 드디어 그는 교황 앞에서 이 원리를 설명하여 지지를 받았다. 1536년에 저서 발표의 공식요청을 받고 1540년에 완성된 원고를 인쇄하기 시작하여 1543년에 발간되었다.

 

태양중심설 :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은 당시 많은 천문학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의 이론이 환영을 받은 이유는 부분적으로 전통적 학설들과 단절된 데 있었다. 당 시 기독교 교리의 수준으로까지 높아져 있던 지구 중심적 우주에 대한 대안을 제시 한 것이었다. 과학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관점상의 두 가지 중대한 변경을 요구하였다. 첫 번째 변경은 우주의 외견적 크기에 대한 것이었다. 두번째 변경은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는 이유와 관계된 것이었다. 지구는 이제 더 이상 창조의 축도 로 생각 될 수 없었고, 변화 없는 우주에 둘러싸여 있는 모든 변화와 쇠퇴의 중심이 아니었다. 이제 우주에 대한 철학적 개념은 완전한 변화를 요구하였다.

 

2. 갈릴레이(G.Galilei 1564-1642) : 갈릴레이는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였 다. 그는 1564년 피사에서 태어나 11세 때 수도원 학교에 입학하여 인문학을 배웠 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불만을 가졌다. 1581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 학을 배우기 위하여 피사 대학의 기예학부에 입학하였고, 1583년 이후에는 수학연구 를 시작하여 반(反)아리스토텔레스 학도가 되었으며 1585년 피사 대학을 중퇴한 후 피렌체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수학연구를 계속했다. 1589년에는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고 강의와는 관계없는 운동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운동에 관하여」를 썼다. 1592년에서 1610년까지 18년간 파도바 대학 교수로 근무하였는데 이 기간은 그에게 있어 가장 결실이 많은 때였다.

 

"그러나 지구는 움직인다." : 1583년 갈릴레이는 피사 성당의 조등을 보고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하여 그것을 맥박계에 응용하였다. 또 1604년에는 낙체의 법칙을 발 견하여 1609년에 정식화하였고 같은 해에 망원경을 발명하였다. 그는 망원경을 천 체 관측에 응용하여 목성의 위성, 달의 반점, 태양의 흑점을 발견하는 등 천체에 관 한 수많은 신발견을 하였고, 특히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의 정당성을 입증하였 다. 그의 이러한 연구 결과에 많은 반대가 생겨 로마를 방문해 변호했으나 결국은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지동설의 포기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천문 대화」를 저술하여 그의 이론을 설명하였다. 이것 때문에 그는 로마에 유폐되었다가 수개월 후 석방되었는데, 그때 "그러나 지구는 움직인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밖에도 그는 보편적 수학법칙과 경험적 사실의 수량적 분석을 확립하였다.

 

3. 뉴튼(I.Newton 1642-1727) : 뉴튼은 시골의 중류농민 출신으로 1667년 케임브리 지의 트리니티 칼리지 특별연구원 위원으로 촉탁되었으며, 1669년에는 루카시안 수 학교수로 배로우의 뒤를 이었다. 1688년에서 1689년, 1703년부터 1705년까지는 하원에서 대학을 대표하였고, 1694년 이후에는 화폐제조국장으로 임명되어 런던으 로 갔다. 1705년 앤여왕으로부터 기사 임명을 받았고 1672년 이래로는 영국학술원 의 회원이었으며, 1703년부터는 사망할 때까지 학술원장을 지냈다. 뉴튼은 당대 가 장 뛰어난 물리학자였으며 그의 업적은 수학연구에 있어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주 요 업적은 만유인력법칙의 공식화, 미분학의 발견, 최초의 백광 분석 등이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 1687년 뉴튼은 그의 유명한 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발견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하늘의 운동을 설명하고 중력은 질량과 비례 한다고 하였으며, 또한 유명한 4대 법칙을 싣고 있다. 제1법칙은 자연 사물들의 모 양을 설명하는 것이 진리인 데 반하여 자연사물의 원인들은 그렇지 못하다. 제2법 칙은 동일한 자연적 결과는 동일한 원인을 나타낸다. 제3법칙은 우리의 경험으로 감지할 수 있는 신체의 질들은 모든 신체의 보편적인 질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다. 제4법칙은 경험철학에서 우리는 매우 근사한 진리나 정교한 명제들을 직시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현상들이 일어날 때까지는 반대되는 가설이 정교하 게 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데 용이하다. 뉴튼의 이러한 이론과 법칙은 즉시 대중 화되었다.

 

이들의 자연의 조직적인 탐구는 인간의 상상에 획기적인 전환을 거쳐왔으며, 발견 들은 이 세계가 인간의 능력으로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천문학자들은 망원경으로 달·별·행성들의 정기적 운행을 관찰하였고, 현미경으로 세포조직과 식물 의 성별을 밝혔으며 피의 순환을 증명하기도 했다. 마치 인간이 우주의 신비스런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한 듯하였다. 이제 우주는 설명 가능한 법칙 영역임이 드러났고 지구는 더 이상 만물의 중심이 아니었다. 이러한 과학의 발달은 종교에도 영향을 주어 결국 기독교를 평가절하하게 했다.

3. 천동설(지구중심설) :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기 전인 16세기까지 일반적 으로 인식된 우주의 구조에 관한 견해이다.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인들의 일상 적인 경험을 고려한다면 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고대 바빌로니아 이집트인들은 육 지가 산맥에 둘러싸여 있고, 그 산맥에 '하늘의 지붕'이 걸려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만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는 우주가 구형(球形)이라고 생각하였고, 그 중심에 역시 둥근 모양의 지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도 지구가 정지해 있고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한걸음 더 나아가 천체가 원운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견해를 플라톤 학파가 이 어서 발전시키고, 점차 정밀한 천체 관측법이 등장하자 혹성의 원운동은 불규칙한 것이라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에 대해 에우독소스(Eudoxos)는 천문학에 수학적 이론을 적용하여 '동심천구설'(同心天球說)을 주장한다. 이것은 불규칙한 운동이 몇 개의 원운동을 합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도 미흡하며 아 리스타르코스(Aristarchos)는 마침내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어 히파르코 스(Hipparchos)와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가 중심원이 아닌 주변을 회전하는 주전구나 중심을 떠나 회전하는 이심구 개념을 도입하였고, 대심(對心)이라는 설명 을 추가하여 혹성들의 궤도를 정확히 추적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동설의 기운은 쇠퇴하였으나 점차 관측이 정확해지고 발견되는 혹성수가 늘어남에 따라 자연과학의 모순이 격화되었고 천동설은 차차 그 빛을 잃게 된다.

 

4. 지동설(태양중심설) : 태양이 천체의 중심이여 지구가 그 주위를 도는 혹성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물론 고대에도 태양이 아닌 중심화(中心火)의 주위를 지구가 다른 혹성이나 태양과 함께 회전한다는 주장을 한 사람들이 있다. 필롤라오스(Philolaos) 나 히케타스(Hiketas)가 그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태양을 혹성 운동의 중심에 놓고 있지 않으므로, 본격적인 지동설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아리스타르코스 (Aristarchos)가 최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단순한 논거로 접근했는데 거대한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보다는 반대의 경우가 더 자연스럽다는 논리적 근거였다. 하 지만 그도 혹성의 궤도를 단순히 원이라고만 하여 히파르코스(Hipparchos) 등이 천동설을 보충하는 주장을 하자 그 가치를 잃고 만 것이다.


보다 과학적인 지동설은 바로 16세기에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하였다. 이제까지의 천 동설을 가지고는 역학(力學)의 법칙을 적용시킬 수가 없었기에 지동설이 제시되었 으나 사실상 그에게서도 역학적 근거는 빈약한 것이었다. 지구가 움직이는데도(회 전) 날아가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그는 혹성들이 지구의 본성에 참여하기 때문이라 고 하였다. 그러나 케플러(J.Kepler)는 별들 사이에 자기장이 형성되어 생기는 인력 (引力)이 있으며 혹성은 원운동이 아니라 타원 운동을 한다는 '혹성의 제3법칙'을 발견하였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갈릴레이(G.Galilei)가 관성법칙을 발견하고 뉴튼 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지동설은 완전한 역학적 타당성을 인정받게 되 는 것이다.

 


2)철학자들 : 베이컨(1561 ~ 1626년) - 귀납법적 학문연구

홈즈(1588 ~ 1679년)

데카르트(1596 ~ 1679년)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스피노자(1632 ~ 1677년) - 유대인 으로 유대인의 교리와 학문을 배웠으나

자유파와의 친교로 유대교에서 파문당함

존 로크(1632 ~ 1704년) - 인식론적 경험 철학을 개발함


● 장세니즘(잔세니즘 Jansenisme, 얀세니즘Jansenism) 에 대하여 쓰라

프랑스 루이 14세는 “짐은 국가다” 라는 표현과 같이 독재주의를 실시하였고 그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안에서 아우쿠스티누스 신학의 부흥을 주장 하는 장세니즘

(Jansenisme,)에 대해 박해를 가하였다.

 

1. 코블넬이우스 장세니우스(Cornelius Jansenius 1585 ~ 1638년)

네델란드 북부지방에서 출생 루뱅대학에서 수학 루뱅대학의 교수 바휴스의 사상을 받 아아우쿠스티누스를 존경하고 스콜라 철학을 미워했다. 루뱅대학 학장과 이프르 (Ypres)의 감독이 되었다. 저서 - 22년에 걸쳐 아우쿠스티누스를 출판 함.

2. 블래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 ~ 1662)

명문가에서 출생, 비범한 두뇌의 소유자로 어릴 때부터 수학과 물리학을 연구 함 24 세때 부친의 병을 치료차 초빙 받아온 의사들의 감화로 장세니즘과 접촉, 수도원에 들어간 누이와 자신의 실연 그리고 마차에서 떨어진 경험등이 회심의 동기가 되었다.

저서로는 1. 향촌서한 - 고향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예수회를 풍자 비평한 것 이다. 도처에서 환영을 받았고 예수회에는 치명타가 되 었다.

2. 팡세(Pensees) - 기독교 진리를 인생구조에 비교하여 변증한 것이다. 파스칼의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 모라비안 교회(Moravian Brethren : Unetas Fratrum)에 대하여 쓰라

30년 전쟁 당시 로마교회의 박해로 모라비아로부터 보헤미아에 피난온 장 후스 일파를 찐젠돌프(Zinzwndolf, 1700 ~ 1760년)백작이 자기 영토 내에 거주케 하였고, 1727년 8 월13일에 모라비아 교회를 세우기에 이르렀고, 그들의 경건주의를 영어로 Moravianism 이라고 했다.

반 수도원적 신앙 수양과 세계복음화에 목적을 두었다. 세계 각지에 전도 하였다. 정열 적 독신자들로서 웨슬리(John Wesley) 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 퀘이커파에 대하여 쓰라 = 프로테스탄트교의 신비주의 단체인 퀘이커(Quaker, Friends, 친우회)

내적 광명(성령)을 중요시 했고, 세례, 성찬등 예전은 전연 없고 예배순서도 없으며 영 감자가 인도 했으며 교인은 전부 성직자이며 산상보훈을 지켜 전쟁을 반대하고, 노예제 도를 반대 하며, 의복과 생활은 검소, 단순 했고, 성실을 주장 했다.

신학 계통이 전혀 없고 정치 조직이 미약하다.(기독교 역사상 특이한 현상) 극단적 신비 주의로 많은 박해를 받았으나 영국에서는 1687년 제임스2세의 신교 자유 령으로 예배 의 자유를 얻었다.

조오지 폭스(George Fox, 1642 ~ 1691년) ; 창시자 페리 드레이트에서 직조업자의 아들로 출생, 그의 부모는 청교도이어서 그는 청교도 사상을 가지고 자랐으나 정규교육 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청교도 사상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 폭스는 19세에 참 종교를 찾기 위하여 집을 나왔다. 그는 카톨릭교회나 영국성공회나 청교도의 가르침에 회의를 느끼고 방황하는 삶을 살았다. 23세가 되는 해에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하였 다. 폭스의 삶은 너무나 특별하고 신비주의적이어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프로테스탄트교 의 아시시 프란시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나 의식보다도 신자의 주관 적인 체험을 강조하였다. 폭스의 대표되는 사상은 내적 빛(the Light within)이다. 모든 인간 안에 내적 빛이 존재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안에 존재하는 내적 빛을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할수 있다는 것이다. 폭스의 이런 사상은 프로테스탄트 교의 신자들의 주관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퀘이커는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이다. 그는 1978년에 영성훈련 (Celebration of Discipline, 생명의 말씀 사에서는 제목을 영적훈련과 성장이라고 번역 을 했지만 영성훈련이 더 옳을 것이다)이란 책을 출간하여 20세기 후반부터 프로테스탄 트교의 신자들의 영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17세기의 폭스의 추종 자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윌리암 펜(William Penn)이다. 그는 영국의 유명한 펜 제독의 아들이다. 펜 제독은 나라의 공신이어서 영국 왕 찰스 2세가 그의 아들 윌리암 펜(펜)에게 상급으로 미국의 땅 얼마를 주었다.

1682년 펜은 영국에서 핍박받는 퀘이커를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와서 이 땅에다 모든 종 교의 자유가 있는 식민지를 세우고 이곳을 펜실바니아(Pennsylvania)라고 불렀다. 이곳 은 물론 지금 필라델피아와 피츠버그가 위치해 있는 펜실바니아 주이다. 폭스는 영국에 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네덜란드, 미국, 인도까지 돌아다니며 열정적으로 퀘이커 사상을 전하였다. 1691년 폭스는 "모든 것은 평안하다. 하나님의 씨는 죽음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말을 남기고 이 땅의 삶을 마감하였다. 오늘날 퀘이커는 미국에 약 12만 5000명, 전 세계에 30만명으로 추정된다. 숫자는 작지만 이들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미국과 영국의 종교 친우회(Religious Society of Friends, Quakers)는 1947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리차드 닉슨 대통령은 퀘이커 가정 에서 태어났다.

윌리엄 펜 (William Pen 1644-1718) : 런던 태생으로 그의 집안은 스튜어트 왕가의 총 애를 받았다. / 1667년 폭스의 설교에 감도을 받고 추종자가 되었다. / 미국 펜실바니아에 식 민지를 개척하고 궤이커 파를 이주시켰다. / 많 은 저서가 있다.

대표작 :

<신앙 고백과 요리 문답> (A Catechism and Confession of Faith,1673)

<참 기독교 신학의 변증> (An Apology for the True Christian Divinity 1678)

 

● 미국의 영적 대 각성 운동에 대하여 쓰라

미국에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인종이 혼합된 도가니가 되어 여러 인종이 여러 교파로 혼합되어 신앙의 무질서를 가져왔고, 계급분화와 경제적 팽창이 종교적 열 정을 냉각시켰으며, 세속화를 축진시켜 미국원래의 청교도 신앙의 열정을 식게 만들었 고 시대의 조류인 개몽주의와 합리주의, 자유주의가 개신교에도 침투되어 성경의 권위와 신앙을 파괴 시켰으며 종교에 무관심 하거나 적대시 하는데 까지 이르러 새로운 영적 부 흥이 요구되게 된 것이다. 이 운동으로 인하여 회개와 신앙 및 영적 회복과 도덕적 경건 을 알게 함으로서 미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단 분 열 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도 가지고 왔다.

 

18세기 1차 지도자들 :

윌리암 테넨트 : 윌리암 테넌트는 1673년 스코틀랜드 Linlithgowshire, Mid Calder에서 태어났다. 그는 1695년 에딘버러 대학을 졸업했으며 1706년 아일랜드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아이리시 퀘이커이며 윌리암 펜과 친한 관계에 있는 처조카 James Logan의 강권으로 1718년 펜실베니아 로 이민을 갔다.

1727년 그는 통나무 대학(Log College)을 설립하였다. 그는 복음적 열 심히 후일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들이 될 학생들을 가르쳤다. 통나무 대 학의 교육적 영향력은 지대하였다. 통나무 대학이 발전하여 결국 프린스 톤 대학이 된다. 그러나 사실 원래 통나무 대학은 유럽의 대학과 비교하 여 조롱하는 의미의 별명이었다. 사람들은 어린 학생들을 농장과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가르친다고 테넌트를 꾸짖었다. 테넌트는 두 아들을 두 었는데 초기 미국 기독교의 목회자로 지도력을 발휘했던 길버트 테넌트 와 주니어 윌리암 테넌트가 있다.

테넌트는 1746년 Warminster에서 죽었다. 그의 무덤은 지금도 Neshaminy-Warwick 장로교회에서 볼수 있다.

 

데오도르 J. 프리링 휴센 (1691 - 1748년경) : 뉴저지 화란개혁파 동부 프리슬랜드 태생 으로 1720년 래리턴강 유역에 정착하였다.

교회지도자들의 요구를 거부함으로 인해 교 구민들로부터 소외되었다. 미국 화란개혁교 회의 설립에 기여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 (1703 - 1758) : 매사추세츠 회중교회 솔로몬 스타다드의 손자로서 13 세때 예일대학에 입학하였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 어를 습득하였고 매사추세츠주의 노스햄톤의 목사가 된 후 인디안 선교사로 사역하였고 1758년 프린스턴대학 총장 에 선임되었다.

금세기 최고의 미국신학자로 추앙받았으며 저서로는 "종 교적인 심성", "의지의 자유", "신(神)의 초자연적인 사역 "등이 있으며 천연두 접종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길버트 테넨드 (1703 - 1764) : 펜실베이니아 뉴저지 장로교회 윌리암 테넨트의 장자로 서 로그대학 출신으로 프리링휴센과 함께 사역하였고 조오 지 휫필드와 전도여행을 하였고 "회개치 않는 목회자들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뉴저지대학(프린스턴) 창설에 일조하였다.

슈발 스턴즈 (1706 - 1771) : 남부 식민지 침례교회 보스턴 태생으로 휫필드 설교에 회 심하였고 1758년 노스캐롤라이나 샌디크릭에 침례교협회를 결성하였다.


다니엘 마샬 (1706 - 1784) : 남부 식민지 침례교회 코네티컷 윈저 태생으로 2년간 인 디안 선교사로 사역하였고 스턴즈의 동역자이자 처남매부 사이로 조지아 침례교협회를 창설하였다.


엘리제르 휠로크 (1711 - 1787) : 남부 식민지 회중교회 예일대학 졸업 후 조나단 에드 워즈의 동역자가 된 다음 인디안 선교사양성을 목적으 로 다트머스대학을 설립하였다.


헨리 멜콰이어 뮬렌베르크 (1712 - 1751) : 코네티컷 루터교회 미국 루터파 교회의 시조 로 알려진 그는 독일 하노버 태생으로 괴팅겐 대학을 졸업하고 할레에서 경건주의파에 영향 을 받았다. 1742년 펜실베니아에 정착하였다.

미국 루터 파 회의를 최초로 개최하였다.


사무엘 블레어 (1712 - 1751) : 펜실베니아 장로교회 로그대학 윌리암 테넨트에게서 공 부한 후 뉴저지와 펜실베니아에서 목회한 후 길버트 테넨 트의 동역자가 되었으며 펜실베니아 폭스 마너에 학교를 세웠다.


조오지 휫필드 (1714 - 1770) : 펜실베니아 뉴 저지 영국국교회 옥스퍼드 신성구락부 회 원이었다. 초기 웨슬레 형제의 친구였고 당대의 훌륭한 복 음전도자였으며 미국 식민지 전역을 7차례나 전도여행을 하였다. 대각성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담당하였고 조나단 에드워즈, 프리링휴센, 테넨트 형제들과 교분이 있었다.


사무엘 데이비즈 (1723 - 1761) : 버지니아 장로교회 사무엘 블레어에게 공부한 후 1747 년 버지니아, 하노버주 장로교회(협회)를 결성하는데 일익을 담당했었고 뉴저지대학(프린스턴)의 총장을 역 임하였다.

19세기 2차 지도자들 :

프란시스 에즈버리 (1745 - 1816) : 영국 버밍행 감리교 1784년 요한 웨슬레에 의해 북미 감독으로 임명되어 미국독립혁명에 웨슬레와 견해 차 이를 보였고 순회전도여행의 선구자가 되었다.

말을 타고 30만 마일을 여행하였으며 미국 감리교회 의 20만 명 이상이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


티모디 드와이트 (1752 - 1817) : 매사추세츠주 노스햄턴 회중교회 예일대학 총장 1795

- 1817) 조나단 에드웨즈의 손자로서 예일에서의 부흥 운동이 곧바로 타대학에 퍼졌다. 시인이요 찬송가, 작곡 가였다.


제임스 맥그레이디 (1758년경 - 1817년) : 서부 펜실베니아 장로교회 노스 캐롤라이나, 켄 터키에서 목회하였다. 1800년 7월 캠프모임의 기초를 세웠다. 컴벌랜드장로교회를 세움에 일 조하였다.


토마스 캠벨 (1763 - 1854) :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1807년 아메리카에 정착하여 장로교 목사직을 사임한 후 독립하여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의 아 들에게 전해준 이 사역은 추종자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제자 단으로 형성되었다.


바턴 스톤 (1772 - 1844) : 메릴랜드주 토바코 항구 장로교회 맥그레이디의 설교에 감명받 아 회심하였다. 1801년 켄터키주 케인 리지 캠프모임의 창시 자였다. 그리스도 교회를 설립한 후 캠벌파와 병합하였다.


라이만 비처 (1775 - 1863) : 코네티컷주 뉴헤븐 장로교회 레인신학교 (교장 : 1832 - 1852) 예일대에서 드와이트에게 사사받은 후 성공적인 목사와 전도사가 되었다. 주목할 만한 사회개혁가로 - 노 예제 폐지, 금주 운동, 폭력 추방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미국성서공회 설립에 일조하였고 헨리 워드 비처와 해리엣 비처 스토우의 아버지였다.


아사헬 네틀턴 (1783 - 1844) : 코네티컷주 노스 킬링워드 회중교회 코네티컷신학연구원 (1833년설립에 일조했으며 수시로 강의를 담당하였음) 해외선교사로 부름 받았으나 건강 때문에 포기하고 코네티 컷의 농촌에서 전도생활을 하다 1820년부터는 반(半) 은 퇴생활을 했다. 뉴헤븐신학과 피니의 가르침을 반대하였 다.


베넷 타일러 (1783 - 1858) : 코네티컷주 회중교회 다트머스대학(총장:1822 -1828)

코네티컷 신학연구원(원장:1833 -1858) 예일대학에서 드와 이트에게 수학한 후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목회하였다. 뉴헤 븐신학의 개혁에 반대하였고 네틀턴의 전기(傳記)를 저술하 였다.


나다니엘 윌리암 (1786 - 1858) : 코네티컷주 뉴 밀포드 회중교회 예일대학 신학부(교 수:1822 -1858) 예일대 드와이트에게 수학한 후 네 티컷의 뉴헤븐제일교회를 담임하였다. 뉴헤븐 신학의 대표주자였다.


알렉산더 캠벨 테일러 (1788 - 1866) : 북아일랜드 장로교회 베다니대학 (설립자겸 총 장: 1840 - 1866) 토마스 캠벨의 아들로서 글래 스고우 대학에서 공부한 후 크리스천 신앙 지 성 격의 침례교지를 발간하였고 그리스도의 제자단을 설립하였으며 바턴 스톤과 통합하여 그리스도 교 회를 만들었다.


찰스 피니 (1792 - 1875) : 코네티컷주 워렌 장로교회 오벨린대학 (교수:1835 -1866, 총장:1851 -1866) 법률학도로 1821년 회심 이후 세상에 널 리 알려졌다. 복음전파의 새로운 방법을 착안해냈으며 완전 한 성화를 가르쳤고 비처와 네틀턴의 반대를 많이 받았다.

정열적인 노예폐지론자였다.


● 칸트의 생애와 사상을 쓰라

 

- 임마누엘 칸트의 생애와 사상 -

생애 :

임마누엘 칸트(1724-1804) 는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출생한 철학자로 일생 자기가 태어난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는, 내성적이고 겸손한 청교도적 철학자이다. 칸트는 일 생 독신으로 지내며 진리탐구에 전념하였는데, 그는 대학입학 초에는 신학을 공부 했으 나 곧 수학, 철학, 자연과학 등에 열중하였다. 병약한 그는 집에서 사색하고 독서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가 유명해 진후에도 별로 외출이나 사교 모임 등에 나가지 않았으나 그의 인격과 학문을 사모하여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아 담화하는 것을 즐겼다는 것이다.

 

그는 건강을 위하여 엄격한 규칙생활을 하였는데 매일 동일한 시간에 일어나서 동리를 한 바퀴 도는 산보를 하루도 거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그 거리 이름이 ‘칸 트의 거리’라고 부른다지만, 당시 동리의 주부들은 칸트의 산보시간에 시계를 맞출 정 도로 정확 무오 하였다는 것인데, 일생 중 단 한번 칸트의 이 규칙이 어긋나서 동리 아 줌마들에게 혼란을 준 중대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알아본즉 ‘장 자크 루소’라는 프랑스 교육가가 쓴 “에미엘” 이라는 책에 너무 감동을 받아 꼬박 밤을 새우며 읽다가 그만 기침 시간을 어긴 것이다. 칸트의 사상 속에 루소 의 자연주의적 사상이 물씬 배어 있는 것은 그 날 밤의 독경삼매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 된다.

 

냉철 해 보이는 철인 칸트에게도 가슴속에는 진리 탐구의 정렬이 타오르고 있었다는 좋 은 일화이다. 밤새 책을 읽으며 눈물 흘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정의를 위하여 자기 한 목숨 바칠 각오를 하는 사람을 이 세대에 찾아 볼 수 있을까? “가슴 뜨겁고 머리 찬 사람!” 그 사람을 이 세태가 부르고 있다. 사회와 교회에 그런 사람이 많아야 하는 데 그 반대로 가고 있으니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칸트는 대학 졸업 후 자연과학에서 철학으로 방향을 바꾸었지만. 그의 운성 설 Galaxy Theory 은 “칸트-라플라스 가설”로 오늘까지도 유명하다.

 

자연과학과 철학을 겸하여 연구한 칸트의 지성은 역시 유별난 바가 있는 듯하다. “내가 두고두고 감격하여 마지않는 사실 둘이 있는데 그 하나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과 또 하나는 내 마음속에 빛나는 양심의 도덕률이다.”하였다. 칸트는 자연을 대할 때 놀라운 감격을 갖고 바라보았고 그리고 자연 속에 살아가는 자기 자신이 존재를 성찰하며 감격 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그가 얼마나 진리탐구에 진지했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고 하 나님 앞에 얼마나 경건한 마음을 가졌는가를 쉽사리 발견하게 된다.

 

그는 퀘니스베르크대학의 교수직을 지키는 한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의 판단, 영구평화론 등 위대한 저술을 통해 정신계에 길잡이가 되었고, 자기 일을 다한 후 별세할 때 “그만하면 됐다”라는 외마디를 남겼다 한다. 칸트다운 임종이었다.

 

칸트의 사상 :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는 1963년에 시카고 대학에서 신학강의를 하든 중에, ‘19세기 철학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임마누엘 칸트다’ 라고 말한 후, “역사상 세 사람의 위대한 철학자가 있고 세 개의 위대한 그리스도교의 집단이 있는데,

 

첫째는 그리스 정교, 거기에 철학자 플라톤이다.

둘째는 로마 가톨릭 교회, 여기 철학자의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셋째는 프로테스탄트 교회, 여기 철학자는 임마누엘 칸트이다.”라고 말을 하였다.

 

폴 틸리히는 칸트를 얼마나 좋게 보았기에 세기의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옆 에 임마누엘 칸트를 세워 놓은 것일까? 칸트의 철학적 공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는 가?

 

 

- 순수이성비판(인간의 인식 능력) -

당시 유럽의 철학 계는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관념론으로 갈려져서 끝없는 논쟁만 되 풀이하였다. 칸트는 그들의 논쟁을 신중하게 분석한 후에 자기가 철학 계에 공헌해야 할 과제와 사명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같은 어지러운 논쟁을 종식시키고 정 신계를 정화하므로 사회에 질서를 세우고 문화를 꽃피우고 유럽에 평화를 수립할 것을 염원하게 된다.

 

칸트는 먼저, 당시의 철학 계와 자연과학계를 냉정이 비교하여 보았다. 자연과학은 뉴 턴이 나와서 물리법칙을 찾아내고 그것을 공리화하여 일반화 한 것처럼, 철학계도 인성 을 비판하고 그것을 과학적, 논리적으로 재정립을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요새 말로 표현하면 비판정신의 대두이며 자기성찰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칸트 자신의 표 현을 따른다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시작된 것이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점이라고 잘못 생각하던 것을 과감하게 떠나서 다른 곳으로 중심점을 옮기는 행동과 같은 것이 다.

 

그리스 합리주의 철학의 대 명제는 “이성은 만물의 척도”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칸트 당시의 철학자들은 ‘이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철학자들의 토론이 왜 피차 이해 점에 접 근하지 못하고 논쟁만 지속되는지를 냉철하게 규명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 너는 너 자신을 알라” 라고 입을 열었고 또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하고 입을 다물었었다.

 

사실은 이 한마디에 비판정신의 핵심이 담겨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칸트는 소크라테스 의 이 논법을 좀 더 깊이 파고들었을 뿐이다. 즉 철학은 모른다는 것과, 안다는 것을 철저히 구분하고 그것을 깊이 인식하고 반성하는 공부이다. 예수는 산에 올라가서 언어 생활의 중요성을 가르치실 때에, “ 너희는 그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만 하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5:37)라고 엄하게 경계 하였다. 사상계를 정돈하기 위해서는 우선 언어를 정연하게 정돈할 필요가 있다. 말이 그의 인격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요1:1-3). 진리생활에는 이 같은 선택적 결단이 수 반되어야만 지적 혼돈에서 탈출되며 사회에 정의를 수립할 수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은 현상계의 이해에는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아주 중요한 실재 계의 인식은 전혀 인식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즉 인간은 감각이 주는 ‘느낌’(감성)을 통해 시간과 공간(선험형식)과 함께 경험을 쌓게 되면서 그것이 깨달음(오성)에 이르게 되고 그 깨달음이 쌓이고 쌓여 이성판단이 생기 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상세계 까지도 인간은 그것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것 은 아니고, 물질자체(물질의 본질)는 인간의 인식능력 밖이라고 주장하였다. 쉽게 말하 면 감각을 통해서는 ‘실제’는 인식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물며 초자연적인 사물 을, 우리 감성을 통해 경험될 성질의 것이 더더욱 아니므로 ‘실재’의 세계는 우리가 어 떤 방법으로도 인식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세상만사 혼자 다 아는 것같이 행세하다가 독단에 빠져지 거나 회의에 떨어진다고 경고 하였다. 칸트가 인식론에 끼친 최대 공헌은 ‘인간의 인식 능력은 제한이 있다’는 점을 그의 철학적 방법론을 통해 철저하게 규명하고 강조한 점 이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 방식이 나온다. 신학강의를 듣던 학생이 “이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 신은 무엇을 하였는가?” 라고 물으니, 교사는 그 학생을 한참 노려보다가 “너같이 건방진 놈을 집어넣을 지옥을 만들고 있었다”하고 말하려다 꾹 참 았다는 이야기다.

 

신은 시간까지 초월하여 계시다는 이야기이다. 어거스틴은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나는 평상시에는 ‘시간’을 아는 줄로 알고 살다가 누군가가 시간이 무어냐고 물으면 그 때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한다” 라고 고백하였다. 우리는 시간도 공간도 실상은 파악 하지 못하고 사는 존재들이다. 그 까닭은 우리 자신도 시간과 공간과 함께 창조 되었 기 때문이다. 어떤 천재도 자기가 핏덩이로 어머니 배속에서 있다가 어느 날 출생한 일을 절대 알지 못한다.

 

성경은 “신에게는 하루가 천연과 같고 천연이 하루와 같은 것이다(벧후3:8)”라고 가르 친다. 시간도 공간도 그 무엇도 없었다고 믿은 것이 바른 창조 신학이다. 히브리어의 ‘창조’란 뜻은 “아무 것도 없는 데에서 무엇이 만들어지는 행동이다”. 창조신앙을 터득 하지 못하면 사람이 우매해지고 어리석게 되며 교만해 지는 것이다. 욥에게 하나님은 “내가 천지를 만들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그렇게 세상 물정을 잘 알거든 어디 한번 말해 보라”(욥38:4). 우리는 여기서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루터와 같이 ‘나 와 함께 천지 만물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라고 바르게 고백 될 때 생존의 희열과 생활의 감격을 뜨겁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창조 이전의 시간이나 공간이나 어떤 무엇을 마치 남의 이야기나 옛 말처럼 담론하는 것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의 이야기에 착념하는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딤전1:4).

 

칸트는 철학사상, 가장 탁월한 인식론의 대가이다. 그는 마침내 오래 동안 둘로 나누 어져서 대립되어오던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관념론을 선험이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도입하여 하나로 통합하는 학문적 작업에 성공하였다. 여기서 ‘선험’에 대해서 간단하 게 집고 지나 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영국의 경험론자인 존 로크나 테이비드 흄은 사람은 날 때는 백지상태로 태어난다고 보았고 그것이 외계로의 사물들이 인간의 감각을 통해 접촉되면서 온갖 경험이 지식화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니 인간은 경험된 대로 형성되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형성될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외계의 물질에 의해 이끌리어 가는 존재에 불과하게 되니 인간에게서 주체적 확신이나 창의성 등은 약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 립한 대륙의 관념론은 인간의 특징은 정신이라고 주장하며 이 정신에 의해 인간은 인 간답게 사는 주장자가 될 뿐 아니라 모든 외계의 만물도 인간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할 것이고 만일 존재한다 하더라도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여 끊임없는 논쟁이 이어졌었다.

 

칸트는 ‘선험(Apriori)’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도입하여 ‘인간은 주체이면서 객체라고 가 르친다. 인간이 외계에서 오는 현상을 감각할 때, 물질이 주는 대로 그대로 받아들이 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갖는 선택방식에 의해 수납한다는 말이 된다. 즉 내가 좋아 하고 원하는 방식대로 받는 선험기능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아주 획기적인 개념이다. 신앙세계에서는 인간 속에 주신 성령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는 “이것을 안 것은 혈육이 아니고, ‘아버지의 성령이다’"라고 감격하셨다. 예수는 제자가 스승을 알아보는 것이 기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자가 주체적으로 예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신적 주체이신 성령이 베드로 안에서 그 같은 고백을 하게 했다는 점에서, 예수는 인간 구원의 가능성에 대 해 기뻐한 것이다(마16:17). 바울 사도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도 예수를 주라고 시인 할 수 없다(고전12:3)라고 겸손히 자기 체험을 고백했다.

 

그리고 구원은 관계성의 회복인데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결합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합은 배타적으로 성령의 띠로 매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셨다(골3:14, 엡4:3)

 

이로서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 극복이 되어, 서양 철학에 뿐만 아니라 현대물리학에까 지 지대한 영향을 주어서 근자에 이르러 인과율적 기계론적 고전물리학과 불확정성인 현대양자물리학과의 첨예한 대립을 ‘보어’의 상보성적 이론으로 누그러트렸다가, 1949 년에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에 의해, 두 개의 학문분야를 하나로 결합하는데 일단 성공하여 1964년 노벨상을 받게 된다.

 

이것은 현재에 와서 볼 때는 그리 대단한 공적이 아니지만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을 통일하려는 다년간의 노력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뒤에 얻은 성과이므로 학계에 적 지 않은 격려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것들은 칸트의 심오한 철학사상이 후학들 에게 끼친 상상력과 창의성의 결과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칸트의 선각자적 감각 에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

 

이 같은 칸트의 영향을 통해 쉴라이에르 마허나 리츨 등 합리주의적 신학이 나왔고, 이에 대응하여 ‘말씀의 신학’을 제창한 칼 바르트도 자기의 신학체계의 틀을 칸트의 사상에서 빌어 왔다는 것은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인정하고 있다.

가령 바르트의 ‘인간에게 신은 절대 타자’라는 신학적 전제, 또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 이 불가능하고 오직 은혜로 된다는 선언 등은 칸트의 인식론적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고 보게 된다.

 

또 주체와 객체와의 변증법적 통합이론은 바르트가 주장한 ‘신은 주체만 되고 객체가 되지 않는 다’는 신학사상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또 바르트가 합리주의와 정통주의 를 통합하여 ‘신 정통주의’신학을 수립하였던 것도 칸트가 경험론과 관념론을 선험이 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하나로 통합한 사상적 영향이 없지 아니 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칸트를 연구하면 할수록 그는 ‘현대 철학의 아버지’라는 세인의 평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 실천이성비판 - (참 인간은 양심으로 산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는 하나님, 영혼의 불멸, 천국과 지옥 같은 형이상학적 명제 는 애써 배제하였지만, ‘실천이성비판’에서는 하나님의 주재와 인간영혼의 불멸도 다 필요하다는 생각을 유입하였다. “당신은 왜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가?” 라고 물을 때, 개혁자 루터는 “다른 그 무엇은 하늘과 땅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라고 그의 교리 문답서에 고백하였다. 파스칼이 유언장에 썼다는 글귀처럼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을 내가 믿는다’ 한 바로 그 믿음을 칸트가 자기 글 에 고백한 격이다.

사실 인간은 한 작은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은 우주의 한 부분인 것이 확 실하다. 인간이 우주의 한 부분이라면, 결국 인간은 우주의 중심부가 될 것이다.

 

“발만 씻어도 온 몸이 깨끗하다” 하신 예수의 말씀은 ‘부분과 전체’를 아주 심오하게 통합한 진리이고 이 말씀은 우리 약한 사람들에게 한없는 용기가 된다.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의 가능성이 전체를 변혁시키는 ‘누룩 덩어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은 작은 우주다’라는 말이 설득력이 생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온 천하보다 귀한 인간이 작은 자아 만의 행복에 안주하거나 부귀영화 에 연연해서 될 것인가? ‘남을 위한 존재로’ 사는 법을 배워 나가야 되는데 이 같은 배움의 길이 그리스도가 살다 가신 길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적으로 약하고 가난하고 고통 받으며 살다 십자가에 처형되지만 그는 누구보다 강력한 능력을 갖고 세상을 이 기신 분이다. 칸트는 ‘예수는 인류의 생의 모범이다’하고 고백하였다.

 

칸트는 인간에게 각기 주어진 의무가 있는데 이것을 준수하는 것이 인간다운 자세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모든 의무는 신의 명령이라는 인식’ 이기 때문이다. 따라 서 이 같은 양심의 명령은 ‘지상명령’이며, 이것은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과제 라고 했다.

 

칸트는 “만일 도덕률이 없었더라면 사람은 그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 조차 몰랐을 것이 다”라고 했다. 또 그것이 칸트가 강조하는 인간 양심의 윤리학이다. 참된 도덕률은 타 율에서 자율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인 것이다.

즉 ‘너는 해야 한다’가 ‘너는 그것을 할 수 있다’라는 뜻으로 듣게 되는 것이다. 율법 종교에서 복음의 자유로 발전하는 생명종교의 자유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듯하여 매 우 기쁘다. 여기에 인간의 자유가 권장되며 자유 하는 인간은 억압된 인간을 해방시키 려는 책임감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칸트는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이미 그것을 실행 할 능력도 주어졌다는 증거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자연을 보며 놀라며 밤하늘의 별빛과 인간 속에 숨겨진 마음속의 도덕률을 보면서 창 조주를 찬송하는 마음은 아름다움의 극치가 되는 것이다. 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선과 악의 문제도 제기하며 종말의 때에 역사를 심판할 하나님의 정의로운 법정과 그리고 천국과 지옥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유명한 당위성이론이 나온 것이다. 이쯤 되면 폴 틸리히가 칸트는 19세기의 최대 의 철학자, 세기의 3대 신학자라고 칭찬한 연유를 알 듯 하지 않는가? 칸트는 영구 평 화론 이라는 유명한 논문을 썼는데 전쟁 없는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한 그 의 열정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에게 칸트를 읽으라고 권했던 의과 대학생 탈 메이어는 정말 현명한 선배였 고 선배의 권고를 받아 칸트를 고지식하게 파고 든 아인슈타인 또한 훌륭한 후배였다. 신학은 이론이 아니라 삶의 능력(열매) 이어야 한다는 말을 간직하며 ......


생애 - 독신생활과 규칙적인 생활로 유명하다.

저서 - 순수 이성 비판(1781), 실천 이성 비판(1788), 판단력 비판(1790)

프롤레고메나(1783), 도덕철학원론(1785), 이성의 한계내의 종교(1793)

인간학(1798)

사상 - 사색의 자유를 추구한 나머지 개인적 주지주의 사상, 사색의 자유를 추구한 나머지 개인적 주지주의 에만 집착하여 자연과학의 가설위에 서 있는 학문만 을 진리라고 하는데 대하여 지식적 비판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

순수이성 비판 : 인식론과 형이상학

인식론 : 모든 인식에는 밖으로부터 공급되는 요소와 안으로부터 공 급하는 요소가 있다. 하고 시간과 공간은 객관적으로 실재 하는 것 이 아니고 우리가 실제를 인식할 수 있는 주관적 형식에 불과 하다고 주장. 이러한 형식에 맞추어 우리의 정 신은 현상세계를 창조한다고 한다.

형이상학 : 인간은 주관적 지식과 경험으로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라고 불가지론을 주장 함.

실천이성 비판 ; 신을 도덕의 근본적인 전재라고 하였다. 즉, 실천이성의 요청에 의한 신을 주장 한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의 윤리적 의무를 어 떻게 이행케 하는 존재자로 생각하였다. 칸트는 기독교회의 영적인 신비주의 경험이나 인간의 구원, 그 밖의 교리들을 인식 할 수 없다 고 하였다.

 

● 실라이어마허(Schleiermacher 1768 ~ 1834)의 신학을 쓰라

실라이어마허는 1768년 동부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르비 (Barby)신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할레(Halle)대학으로 옮겨 칸트를 연구 했다. 할레 대학과 베르린 대학에서 강의를 함.

신학(종교적 체험의 신학) ;

(1) 종교론 : 감정이나 감정영역에 속한다 하고. 인간 정서에 기초하여 신을 의지 하는 생활 이라고 한다. (객관적 계시 보다 주관적 감정에 권위를 두어 종교를 인간학으로 대치 시켰음)

종교란 무한한 감촉을 맛보는 것이라 한다.(경험)

(2) 기독교의 본질 ; * 그리스도 중심이 있었다. (합리주의자는 구속의 역사가 그리스 도 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지 않음)

* 그리스도의 사업이 곧 구속이라 한다.(신앙은 하나님을 의지하 는 체험 속에 뿌리박고 있다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만으 로 가능 하다고 했다.)

* 신조나 성경보다 종교적 개인의 체험을 중요시 했다.

(3) 기독론 : 예수는 인류의 원형이며, 제1창조를 초월하는 제2 창조라고 한다.

성육신은 기적이요 초자연적인 사건이라 했으며, 그가 고난당함으로 인류 와 완전히 결합 되었다고 한다.

저서 : 종교론, 독백, 기독교 신앙 이 있다.


● 헤겔(Georg W. F. Hegel 1770 ~ 1831) 의 사상을 쓰라

헤겔은 시투트가르트(Stuttgart)에서 출생하여 튀빙겐 대학에서 수학 했다. 가정교사, 에 나대학강사, 신문기자, 고교교장등을 거쳐서 181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가 되었다 가 베르린 대학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사상 : 1. 관념론을 논리적으로 발전시켜 범신론을 주장 했다.

2. 셀링(Schelling)의 세계관을 근거하여 체계화 하려고 시도 하였고, 논리와 형 이상학을 동일시하였으며, 실재를 활동과 발전과정으로 보았다.

3. 라이프니찌 의 주지설을 발전 시켜 이성과 절대자를 동일시하고 이성은 논리 적 과정 그 자체라고 했다.

4. 변증법적 과정에 있어서 3가지 요소를 제시 했다.

a. 정 - 추상 보통의 개념

b. 반 - 모순 개념

c. 합 - 제 3의 개념

즉 변증법적 과정이란 실제의 진화를 따라 결국은 보통이 되므로 일체의 모순은 해결된다는 것임

저서 : 정신 현상학, 철학개론, 법철학, 종교철학, 논리학

 

●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에 대하여 쓰라

1833 ~1841년 에 옥스퍼드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운동으로서 일명 소책자운동이 라 고도 한다. 1822년의 선거법 확장안과 1828년 종교 자유법안으로 중산층의 국회 진출이 늘고 개혁파 세력이 커지자 고교회의 권위 보존을 위해 일어났다. 그 발단은 1833년 7월14일 존 키어블(john Keble)이 국민적 배신이란 설교를 함으로 시작 되었다.

목적 : 1. 종교의 침체를 구출코자 2. 건실하고 순수한 교회를 육성코자,

3. 도덕 재무장코자 4. 교리와 규칙을 지키고

5. 전통의 계승을 위하여 일으킨 것임

중심인물 : 존 캐이블(John Keble 1792 ~ 1866년) - 목사의 아들로서 옥스퍼드에서 수 학을 했다. 시인으로 고문학을 연 구하고 “크리스챤이여” 라는 시집 을 간행하여 25년간 10만부가 발 행되었다. 권리와 장엄함을 좋아 하며 국교회의 풍속을 좋아했다.

프루오드(Richard H. Froude, 1803 ~ 1836년) - 오오리얼 학교에서 케이블 에게 사사받고, 개혁교회 를 공격하고 수도원의 부 흥을 부르짖었다.

뉴우만(John H. Newman, 1801 ~ 1836년) -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고, 후에 목사가 되었다. 신앙심이 독 실하였고, 나중에 자유사상으 로 기울어졌다가 1827년에 케이블의 저서에 감동을 받고 사상에 전환이 왔다. 소책자 를 발행하고 주일 오후마다 성 메어리 교회에서 설교 하 였고 대학을 중심으로 옥스퍼 드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과 ; 영국교회에 경건 정신을 환기 시켰고, 건전한 음악, 미술, 종교 정서를 고취했으 며, 교회의 예전을 존중하는 기풍을 세웠다.

 

● 리츨(Albrecht Ritschl, 1822 ~ 1889년) 의 신학을 쓰라

리츨은 1822년 루터교 감독의 아들로 베르린에서 출생하였다.

저서로는 칭의와 화해 3권, 경건주의 역사 가 있다.

신학의 특색 ; 신학과 철학을 분리 시켰고, 형이상학과 자연종교로부터 독립시키고 그리 스도에 의하여 주어진 계시를 기초로 신학을 건설하였다.

가치 판단설 : 가치판단은 주관의 가치판단에 의하여 그 인상을 평가 하 는 것이다. 주장하고, 종교적 지식은 순연한 가치 판단의 범위 안에 있다고 한다.

기독론 : 1. 삼위일체 하나님, 신인양성, 선재 등의 교리는 형이상학적인 관념들이며 우리들의 경험이 도달하지 못할 영역에 속한다 고 한다.

2.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분이되시며 어떤 가치가 있는 가

에서 출발점을 구해야 한다고 했다.

3. 그리스도의 사업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있으며 이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다 한다.

4. 그리스도는 왕국을 건설하며 사람은 그 일원이 된다 한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감화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 관계에 들어감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으며 여기서 하나 님의 나라가 우리 구원의 중대 한 요소가 된다 한다.

5.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정신이 살아 계시는데 그것이 그리스 도의 역사이며,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것만으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신의 가치가 있는 것 이라 한다.

 

 

● 키엘케골(Kierkegoard) 의 사상을 쓰라

1813년 코펜하겐(Copinhagen)에서 출생했다. 엄격한 부친 아래서 우울, 변태성, 내성적 성격을 상속 받았다. 신학을 하였으나 목회자가 되지 않았고 약혼자와의 파혼이 큰 상 처를 주었다.

사상 : 헤겔 철학을 연구하였으나 기독교 진리에 비할 바 못된다고 반박했다.

신과 인간의 부조화를 말하고, 실존적 인간의 모습을 강조 했다.

그의 세 가지 실존론은 1. 미적 실존 2. 윤리적 실존 3. 종교적 실존이다.

 

● 칼 바르트(Karl Barth, 1886~ 1968년)의 신학을 쓰라

1886년 바젤에서 출생했고, 베른, 베르린, 튀빙겐,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했다. 1911 년 목사가 되어 농민과 노동자의 교회를 섬겼다. 본(Bonn), 뮌스터(Munster),바젤 대학 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나치 정부에 반대 투쟁하다가 교수직 박탈당하였다.

- 신학 -

1. 신관 : *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초월하신, 거룩하신 분이시다.

* 죄인 된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찾아오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 인간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의 자리로 올리려 하신다.

* 하나님은 도성인신 하신 그리스도께 계시 되었다고 함

도성인신 = 하나님이 (동시)에 감추어지고 (동시 )에 나타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성경관 : *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행위가 중요하며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응답적 행위에 불과 하다.

* 하나님의 주체성이 성경에 나타나있다. 이것을 계시라고도 하고 하나님 의 말씀이라고도 한다.

* 계시와 말씀을 동일시하지 않았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지만 이 성경 은 사람의 손을 빌려서 썼다는 점에서 계시와 말씀이 전적으로 일치 할 수 없다고 한다.

3. 교회관 : * 교회는 의롭다 함을 입은 죄인들의 집단이다.그러므로 교회는 자기 약한 것을 서슴없이 인정 할 수 있을 만큼 강한 교회라야 한다.

* 교회의 권위와 자유는 말씀아래 있다고 한다.

4. 속죄관 : * 인간의 도덕적 열의나 모험 정신으로는 죄를 극복 할 수 없다.

* 하나님의 사죄 선포로 가능하다 고 한다.


● 각종 신흥 종파에 대하여 쓰라

1) 멘노나이트 교회 (Die Mennoniten;Mennonite Church)

(1) 원인

1512년 쯔빙글리가 교회와 국가의 연합을 제의하였을 때 이를 반대하는 개혁파들 이 스위스 쮜리히에서 교회를 설립하였다.

(2) 신조

1632년 화란 도르트레히트회의 18개조를 기초한 것이다.

a. 하나님은 창조주이다.

b. 인류는 타락하였으나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회복되었다.

c. 복음서에 기록된 법을 순종해야 한다.

d.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십자가에서 인류를 구속하였다.

e. 구원을 얻으려면 회개. 자복해야 한다.

f. 세례는 신앙의 공적 표시이다.

g. 성찬은 서로의 단합, 우정 맺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h. 결혼 생활은 영적으로 같은 사람끼리 해야 한다.

i. 무기 사용 외에는 정부 방침에 순종해야 한다.

j. 고의적으로 죄를 범한 자는 출교할 것 등이다.

 

2) 그리스도 교회 (Disciples of Christ)

(1) 원인

a. 1801년 장로교 부흥사 P.W.스톤에 의하여 창설되었다.

b. 부흥회에서 2만 명이 큰 은혜를 받았다. 집회 절차가 교회 규례에 어긋낫다고 계 속 말썽이 되므로 장로교에서 탈퇴하였다.

(2) 영향

a. 메더디스트 교회가 감독권 반대하여 탈퇴했고(제임스 오리게 중심)

b. 침례교 신조를 반대하여 분파했으며 (아부나 존스 중심)

c. 종파 분렬이 심하므로 1809년 토머스 캠플이 크리스찬 협회를 조직했다

(3) 신조...성령을 기초로 초대 교회 회복을 주장한 것이다.

(4) 주장

a. 정치는 회중 정치를

b. 교회나 교인의 이름은 성경 이름대로.

c. 세례는 침례로

d. 성찬은 주일마다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5) 업적 : 전도회, 선교회, 교회당 건축 회사 등 다방면으로 활동한 것이다.

 

3) 나사렛 교회 (Church of thel Nazarene)

(1) 발생

미국 남북 전쟁 후 각 주에서 일어난 전국적인 성결 운동의 결과이다. 위슬리의 거룩 과 성화의 교리와 신학에 기초를 둔 성결교파 중에 가장 큰 교파가 되었다.

(2) 교리

a. 성화 후 중생을 주장하고

b. 교역자와 직원의 성화의 체험을 주장하였고

c. 성경의 완전 영감설을 주장했으며.

d. 속죄, 의인, 중생 통해 양자가 됨과 부활과 심판을 믿으며

e. 세례는 물을 뿌리는 것이나 침례를 동일 시 하였다.

 

4) 무교회 주의 (Non Churchism)

(1)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오 (1861-1930)가 제창한 것으로서 기성 교회에 대한 불만 과 독립과 자유가 그들의 중요 신조였다.

(2) 현대 교회가 지나치게 비성경적이어서 성경 중심, 하나님 중심 신앙 중심이 아니 므로 개혁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 <에클레에시아>로서의 단체는 인정하나 교역자의 선정과 기타 교회 형식과 예전 을 부인했다.

(4) 한국에서는 김교신을 비롯하여 함석헌, 노평구, 유달영 등이 있으며 성경연구와 간 행물을 발간하였다.

 

5) 오순절 교회 (Pentecostal Church)

(1) 원인 : 미국 교회 안에서 초대 교회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동경하는 신자들이 조 직 하였다.

(2) 조직 발전

a. 1898년 남 캐롤라이나주 앤더슨 (Anderson)에 모여 불세례 성결 교회를 조직 했고

b. 일부는 오순절 성결 교회를 조직하였다.

c. 1911년 두 단체가 합동하여 오순절 교회를 조직하였다.

(3) 교리

a. 감리교와 침례교 혼합 교리를 채용했고.

b. 성경 무오설을 따랐고.

c. 예배는 감정적 분위기였고.

d. 침례는 전신 침례를 행했으며.

e. 성찬은 서로 발을 씻기며 했고

f. 성령으로 신유 은사를 믿었다.

(4) 정치...감독 정치를 하였다

 

6) 하나님의 성회 (Assemblies of God General Council)

(1) 원인 : 1914 년 미국에서 오순절 교회 목사들이 복음주의파 목사들보다 열렬한 복음전도 사업을 위하여 합동하였는데 각기들이 본 교회에서 승인하지 아 니하므로 하나의 교파를 만들게 되었다.

(2) 신학과 정치

열렬한 근본주의자들이며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그들의 신학으로 하며 교회정치는 장로정치와 회중 정치를 겸한 것을 채택하였다.

(3) 신조

a.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성 확신

b.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속량.

c. 성령,세례와 방언,신유 은사

d. 거룩한 생활을 강조하며.

e. 예수 재림을 강조하였다

(4) 한국에는 1947년에 들어왔으며 일명 순복음 교회로 알려지고 있다.

 

7) 하나님의 교회 (Church of God)

(1) 설립...1830년 미국인 톰린슨 (A.S.Tomlinson)에 의해 설립되었다.

(2) 분파...톰린슨이 죽은 후 2백여 분파로 분립되었다

(3) 조직: 목사 A. 안수 목사.

B. 임명 목사

a. 설교 목사 b.전도 목사. c.권면 목사로 하였다.

(4) 주장 ; 의인, 성결, 성령의 세례, 방언, 중생, 예수 재림 맞을 준비를 강조했다

(5) 예전 : 성찬은 발 씻기기, 세례는 침례로 거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