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인설목사/교회사에 나타난 영성
이 글은 영성신학원 세미나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1. 서론 : 성서적 영성
영성은 개인의 영적 성품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래서 영성은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성은 복음이 개인의 영혼에 적용된 것이고, 하나님의 구속사가 개인에게 실현된 것이다(렘31:31, 고전11:25).
특히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근거하여 이중적으로 역사한다. 하나는 "성령의 은혜"의 역사로서 우리 영혼을 중생 시키고 성장시켜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고, 또 하나는 "성령의 은사"의 역사로써 영혼을 강하게 하고, 교회를 성장시키고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케 한다(성령의 이중적 사역: John Owen의 'Discourse of Spiritual Gift', Works IV: 420-520).
결국 영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고, 성령의 전이 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성령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적 영성은 "삼위 일체적 영성"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사에 나타난 영성을 시대별로 살필 것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종말론적 영성, 고대 교회 교부들의 영성, 수도원 운동의 영성, 개신교의 영성, 오순절 교회의 영성, 에큐메니즘의 영성 등을 다를 것이다. 그리하여 각 시대의 영성이 상호 배타적이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보완해 줄 수 있기 때문에 현대에 이르러 종합되고 수렴되어 갈 수 있다는 입장을 제시해 보려 한다.
2. 교회사에 나타난 영성
1) 초대 교회의 종말론적 영성
초대 교회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공동체였다.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너무 컸고 이 세상에 대해 아무런 미련도 없었기 때문에 유무 상통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를 수 있었다.
또한 당시는 박해 시대였기 때문에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 육적인 생명을 포기하는 순교의 영성이 있었다. 누구나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차이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또한 성령의 역사가 아주 강력하여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고 풍성한 은사와 기적을 체험하였다고 한다.
2) 고대 교회 교부들의 영성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죽음으로 종언을 고하였다. 그 다음 고대 교회 교부들의 관심은 복음에 대한 사도적 전승을 계승해 가는 것이었다. 이레니우스(c.130-c.200)는 영지주의의 비밀 전승을 반박하면서 바로 카톨릭 교회가 사도적 전승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단 논박'에서 사도들로부터 전해 받은 신앙으로써 "신앙 규범"(regula fidei)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사도신경의 전 단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둘째 아담 그리스도가 순종으로 첫째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여 완성했다는 그리스도의 "총괄갱신"(recapitulatio) 교리를 주장하였다. 인류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을 닮도록 부름을 받았으나 불순종하고 큰 고통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한 본을 따라, 이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닮아 "신화"(defication)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레니우스의 성서적 구속사 신학을 보게 된다 이레니우스의 구속사 신학은 이후에 니케아 공의회(325-381)의 삼위일체론과 칼케돈 공의회(451)의 그리스도의 양성론으로 교리화 되었다.
한편 동방 교회는 구원을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을 끊임없이 닮는 "신화"로 규정하였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특히 성육신은 신성과 인성의 연합의 표본이었다. 또 성령은 신자들로 하여금 실제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게 한다고 하였다. 신자들은 성령의 역사로 교회의 성례전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신화되는 것이다.
동방 교회의 영성은 이렇게 성령론 중심적 영성으로서 영혼이 끊임없이 진보하는 성장 과정을 강조하였다.
다음 서방 교회의 영성은 어거스틴(354-430)에 의해 기초가 놓여졌다. 어거스틴은 무엇보다 영혼의 실체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독백'에서 "나는 하나님과 영혼을 알기를 원한다 나는 하나님과 영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하였다(1, 2, 7)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이탈하여 인간 내면의 영혼 안으로 들어가서 진리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내면적 영성의 길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그는 '고백록'에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우리의 영혼은 불안하다"라고 말하였다(1,1,1)
그는 또한 헬라 철학의 영혼불멸론과 대결하여, 영혼이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며 안식한다는 성서적 영혼불멸론을 주장하였다('신국론'166,1).
"영혼은 육체를 다스리기에 알맞은 이성을 갖고 있는 하나의 실체이다"('영혼의 중요성에 대하여'12, 22). 영혼은 비물질적이고('편지' 166, 11), 자유의지가 있고('편지' 166, 11) 추론하고 판단할 정신을 갖고 있다('신국론' 22. 24).
어거스틴은 또한 인간의 "전적 타락"과 "오직 은총"의 교리를 토대로 "성화" 구원론을 주장하였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오직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자연과 은총을 구분하고 창조와 구속을 구분하는 신학적 예리함을 보여 주었다. 또한 구원은 은총의 도움으로 인간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화의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이후 서방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 사역을 강조하였고, 이 갈보리 회생 제사의 반복으로서의 성만찬과 회개를 위한 성례로서 고해 제도를 통해 교회론적 영성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서방 교회 안에서는 성령에 대한 논의가 적었고, 주로 수도원의 성자들의 삶에서 신비한 영성이 흐르게 되었다.
교부들 중 후대의 신비주의 영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위 디오니시우스(C. 500)였다
그는 먼저 정화, 조명, 연합이라는 세 가지 단계 혹은 세 가지 길의 교리를 공식화하였다. 그는 '천상의 위계 질서'에서 정화된 영혼들, 조명을 받은 영혼들, 완전한 영혼들에 관하여 말하였고, '교회의 위계 질서'에서 정화와 조명과 연합을 위한 성례들에 대해 설명하였다.
여기서 정화는 정결케 하는 것을 말하고, 조명은 하나님의 빛이 영혼을 비추어 주는 것을 말하고, 연합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체험을 말하였다. 이 세 가지 길은 오리겐에서 시작되었지만, 위 디오니시우스에 의해 교리화 되어 이후 동서방 전체 수도원 영성의 규범이 되었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또한 그의 '신비 신학'에서 영혼이 상승하여 하나님과 연합되는 길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그는 "부정적 신학"(negative theology)을 전개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신 분이므로, 인간이 지성의 추론과 감각의 지각을 포기하는 무지의 방법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성신학에서는 이렇게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합일을 추구하는 영성적 방법을 "무념적 방법"(apophatic way)이라고 한다.
이 무념적 방법에 의하면, 인간의 육체적 감각이 멈추는 곳에서 순수한 우리의 영혼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바로 이 때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위 디오니시우스의 영성이 "무념적" 영성이라면 어거스틴의 영성은 묵상과 관상 훈련을 강조하는 "유념적"(kataphatic way)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3) 수도원 운동의 영성
수도원 운동은 고대 교회가 국가 교회가 되며 세속화 되기 시작하자 세상의 소란함을 떠나 사막을 찾아 고요한 영성을 추구하던 사막 교부들에게서 유래하였다.
최초의 사막 교부는 안토니우스이고, 공동체 수도원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파코미우스였다. 또 동방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는 대 바질이라고 한다.
바질은 영혼이 세례에서 시작하여 성장하고 결국 "하나님을 봄"(visio Dei)으로 완성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수도원 신학을 정리하였다. 동방 교회는 이러한 수도원의 신비 신학을 계속 발전 시켰고 14세기에는 빛의 신비주의라고 하는 "헤시카즘" 같은 신비주의 전통을 정통적인 것을 받아들였다.
동방 교회는 교회론 중심적인 서방 교회와 달리, 이렇게 성령이 계속 강조되었고. 신비적 영성이 지속적뜨로 추구되었다.
서방 수도원의 아버지는 베네딕트(c.480-c.550)였다. 그는 그의 수도원 영성훈련의 체험을 토대로 '수도 규칙'을 써서 후대 서방 수도원의 기틀을 놓았다. 그러나 베네딕트 수도원은 타락하기 시작하였고, 10세기 클뤼니 수도회, 12세기 시또 수도회을 통해 거듭 갱신되어야 했다. 특히 시또 수도회 소속 클레르보의 베르나르(1090-1153)는 고대 교회가 잃어버린, 그리스도와 인성을 다시 부각시킴으로써 영성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서방 수도원의 꽃은 누가 뭐래도 앗시시의 프란체스코(1182-1226)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여 그리스도의 가난과 고난을 문자 그대로 경험한 성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먼저 도시 근교에 수도 공동체의 터를 잡고 선교와 봉사의 일을 동시에 하는 전통을 세웠다.
또한 그의 제자 보나벤투라(c.1217-1274)에 의하면, 프란체스코는 피조물과 교제하는 아름다운 영성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보나벤투라는 그의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여행'에서 영혼의 영성에서 가장 뛰어난 이는 어거스틴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영성에서 가장 뛰어난 이는 위 디오니시우스이었으며, 자연의 피조물에 대한 영성에서 가장 뛰어난 이는 바로 앗시시의 프란체스코였다고 하며, 이 셋을 종합하는 시도를 하였다.
14세기에 이르러 서방 수도원은 공동생활형제단, "현대신심운동"(devotio modema)등 평신도 영성운동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나온 가장 유명한 책은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였다 16세기 개신교 종교 개혁 때 서방 카톨릭 수도원은 마틴 루터에 의해 개신교 지역에서 존폐 위기에 몰렸으나, 로욜라 이그나타우스의 예수회를 통해 카톨릭 자체 개혁에 성공하였다.
이그나티우스는 그의 '영신 수련'에서 4주에 걸쳐 묵상과 관상 기도에 이르는 영성훈련 과정을 소개하였다. 또한 16세기 후반 개혁파 갈멜회는 아주 탁월한 두 영성가, 아빌라의 테레사(1515-1582)와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을 배출하였다.
특히 아빌라의 테레사는 '영혼의 성'에서 영혼을 성으로 비유 하며, 기도로 이 영혼의 성에 들어가 제1궁방에서 제7궁방까지 나아가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도의 과정을 그림처럼 묘사해 놓았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갈멜의 산 길'과 '어둔 밤'에서 감성과 영성의 능동적 정화와 수동적 정화의 과정을 잘 서술하여, 후대에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
4) 개신교의 영성
중세 후기 로마 카톨릭 교회가 혼돈에 빠졌을 때, 마틴 루터(1483-1546)는 성서를 깊이 연구하다가 로마서에서 복음을 재발견한 후 자신의 체험을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의 교리로 정리하였다.
이것은 오직 믿음에 근거하여 순간적으로 죄 용서를 받고 의롭다고 칭해지는 구원의 교리였다. 우리가 십자가의 피 공로만을 신뢰할 때,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다는 것이다. 루터에게서 특징적인 것은 믿음을 전적인 신뢰로 보는 새로운 믿음의 이해였다. 그래서 "오직 성서"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을 원리로 하는 개신교 교회가 탄생하였다. 개신교 교회는 이처럼 말씀 중심의 교회요, 만인 제사장 교리에 근거한 수평적 교회요, 성령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중시하는 역동적 교회였다.
이처럼 개신교의 칭의 구원론은 구원을 순간적인 신분의 변화로 본다. 누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히 신뢰하기만 하면, 세상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순간적으로 신분이 바꿔다 이런 의미에서 칭의의 순간은 곧 "중생"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아직 거룩해지지 않은 채로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믿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 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특히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이신칭의의 구원론을 영성적 차원에서 서술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은 자발적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으로서 놀라운 영적인 자유를 누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여기서 신앙의 세 가지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첫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고, 둘째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경배하며 순종하는 것이고, 셋째는 영혼이 신부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와 생명과 구원을 자기 것처럼 받는 것이라 하였다. 우리는 루터의 이신칭의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중세 수도원 신학의 엘리트적 영성이 민주화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루터 이후 개신교의 칭의 구원론은 로마 카톨릭의 성화 구원론과의 논쟁 속에서 칭의와 성화를 연결시키는 문제로 고민하였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의식하여 성화란 말을 잘 쓰지 않았다. 그래서 루터 이후 루터교는 성화를 칭의에 보다 더 익숙해지는 과정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이 문제는 장로교의 칼빈에 의해 해결되었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는 "이중의 은총"(double grace)으로서 서로 구분할 수는 있으나 분리할 수 없고, 칭의의 순간부터 성화가 시작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루터의 칭의 구원론과 로마 카톨릭의 성화 구원론을 종합시킨 것으로서, 구원론의 발전에서 찬사를 받을 만한 업적이었다
그러나 루터가 말하는 칭의는 쉽게 일어나기 힘든 사건이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수동적인 일이었고, 인간이 믿음으로 철저히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경우에만 가능한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어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래서 개신교 역사 안에서는 회개와 믿음을 통한 중생을 재 강조하는 부흥 운동이 많이 일어났다. 영국의 청교도 운동,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 영국의 감리교 운동, 미국의 대각성 운동 등이다 이러한 부흥 운동에 해당하였다.
한편 칼빈 이후, 개신교 구원론은 칭의론을 공통 분모로 한 채, 성화론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18세기 감리교 부흥 운동의 중심이었던 요한 웨슬리(1703-1791)는 칭의(중생) 이후에 순간적으로 "온전한 성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이것은 칼빈의 점진적 성화론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칼빈은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며 평생 동안 성화되어 갈 수 있을뿐,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었다. 이후 개혁 교회 전통과 웨슬레 전통은 계속 이 문제에 대해서 일치점을 찾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웨슬레의 완전 개념은 철학적, 윤리적으로 절대적인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의 완전을 말하는 상대적, 성서적 완전이었다. 웨슬레에서 온전한 성화 혹은 완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동기가 모든 삶을 지배하게 되는, 완전성 결과 완전 사랑이었다. 더욱이 웨슬레는 죄론에 있어서도 죄를 엄격하게 보는 칼빈주의와 달리, 자의적으로 율법을 어긴 것만 죄로 인정하였을뿐, 비의도적인 죄나, 연약함, 무지, 실수 같은 것은 죄로 보지 않았다.
이 웨슬리의 온전한 성화론은 19세기에 중생 이후 신자들에게 남아 있는 죄를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 미국의 "성결 운동"(Holiness movement)에 의해 계승되었다. 성결 운동은 1835년 피 비 팔머(Phoebe Palmer)의 기도회에서 유래하였다. 이 웨슬레파 성결 운동은 "본성의 비관주의"와 "은총의 낙관주의"를 동시에 주장하였다. 인간의 타락한 죄성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조지 펙(George Peck)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성서적 교리'(The Scripture Doctrine of Christian Perfection, 1843)에서 펠라기우스적 완전이 아니라 복음주의적 완전을 주장하였다.
그는 여기서 원죄는 타락 이후 첨가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제거될 수 있고, 이 땅에서도 영과 육의 갈등은 끝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웨슬레파 성결 운동에서 성결은 바로 죄성(sinful nature)의 제거(eradication)였다.
한편 개혁파 성결 운동인 케직사경회와 "고상한 그리스도인의 생활"(Higher Chnstian Life) 운동은 인간의 죄성보다는 죄의 권세로 인한 죄악의 경향성(sinful tendency)을 주장하면서, 성령을 통해 이 죄악의 경향성에 대해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지상에서 육체와 영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승리의 삶(victorious life)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서 성결은 죄악의 경향성에 대한 반격(counteraction)이었다. 이에 반해 구파의 정통 장로 교회와 세대주 의는 인간의 부패한 죄성에 너무 눌린 나머지, 옛 본성과 새 본성 사이의 갈등은 극복할 수 없고, 이 죄성이 억제(supression) 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19세기 성결 논쟁에서, 우리는 성결을 죄성의 제거, 죄의 경향성에 대한 승리, 죄성의 억제 등으로 보는 시각들을 볼 수 있었다. 한편 19세기 성결 논쟁의 과정에서 "성령 세례"란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Asa Mahan. 'The Baptism of the Holy Ghost'. 1870).
그런데 웨슬레파 성결 운동에서는 성령 세례를 중생 이후의 성결을 위한 것으로 보았고. 개혁주의 성결 운동에서는 봉사를 위한 능력으로 보았다.
5) 오순절 교회의 양성
20세기 오순절 운동은 초대 교회의 영적 능력 즉 성령의 은사를 회복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이것은 1901년 1월 1일 찰스 파햄(Charles Parham)이 토페카(Topeka)의 벧엘 성경학교에서 체험한 방언을 성령 세례의 육체적 증거로 본 것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이 전 세계로 퍼진 것은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거리의 윌리엄 시모어(william J. Seymore)의 부흥 사역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로써 교회는 사도 시대 때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고린도전서 12장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특징은 회심 이후의 제2의 은총으로서 성령 세례가 방언에 의해 증거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순절 교회는 영혼의 성결보다는 성령의 은사에 의한 사역에 치중하여 가장 빠른 교회 성장을 거둘 수 있었다. 또한 역사적으로 오순절 운동은 다섯 가지 근원을 갖고 있다.
첫째는 중생과 제2의 은총으로서 온전한 성화를 구분한 웨슬리 구원론이었고,
둘째는 중생과 봉사를 위한 성령 세례를 구분한 찰스 피니와 "고상한 그리스도인의 삶"운동이었고,
셋째는 전천년설적 종말론을 주장한 세대주의였고,
넷째는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의 치유를 주장한 신유 운동이었고,
다섯째는 신약 성경의 교회의 활력과 기적을 회복하려는 "늦은 비"(latter rain) 운동으로서 회복주의 운동(restorationism)이었다.
처음에 오순절 운동은 주류 교단 밖에서 멸시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런데 1960년 반 누이스의 미국 감독 교회의 감독인 데니스 베넷(Dennis Bennett)이 은사를 체험한 후, 오순절 운동은 주류 교단 안으로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류 교단의 초교파적 은사 운동을 보통 카리스마 운동(Charismatic movement)이라고 부른다.
이 카리스마 운동은 전통적 오순절 교회와 달리 세상 문화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가지고 있고, 성령 세례의 증거로 방언 이외의 은사를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현재 오순절 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고. 모든 지역에 침투하는 유연성과 역동성을 보이고 있다.
3.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사에 나타난 다섯 가지 영성의 유형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다섯 가지 영성의 유형은 하나의 포괄적 영성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초대 교회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차이를 구분하는 영성이 있고, 고대 교회에서는 사도들의 복음 전승의 기초에 근거한, 영혼의 중요성, 정화-조명-연합을 통한 신화의 영성이 있으며, 또 수도원 운동에서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실제로 닮기 위해 세상과 거리를 두고 홀로 있으며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영성이 있다.
다음 개신교에서는 루터의 이신칭의를 통한 중생과 일상 생활에서 성화, 성결을 추구하는 영성이 있고, 마지막 오순절 운동에서는 교회가 한동안 잃어버린 성령의 은사가 회복되어 있다.
우리는 앞으로 이러한 영성의 다섯 측면이 서로 배치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모두 다 동일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 유래한, 성령의 다양한 역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최근 선교, 일치, JPIC 운동 등 에큐메니즘의 사회적 영성이다. 더욱이 에큐메니즘의 에큐메니칼적 사고는 기독교 전체의 에큐메니칼적 영성을 위해서 많은 유익을 줄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 야곱의 우물가 원문보기 글쓴이: 장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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