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창/- 믿음의 사람

[스크랩] 스데반의 설교 (3) 사도행전 7 : 17-41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

에반젤(복음) 2021. 7. 3. 00:21

스데반의 설교 (3) 사도행전 7 : 17-41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



지난주에 우리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통하여 믿음의 조상을 삼으시고 저들을 인도하시고 축복하셨는가 하는 이야기 였습니다.
오늘은 스데반이 계속하여 ‘모세’ 라는 한 사람을 이야기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택하신 이스라엘의 지도자 였습니다.


17 ‘ -- ’ 여기서 우리는 모세를 인도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인도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하나님은 그냥 일하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약속하시고 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언하시고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때도 그냥 부르지 않았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내가 네게 명령할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실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창 12:2에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 첫번째 약속이었습니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면, 나를 신뢰하고 믿으면, 내가 너로 큰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두번째는, 내가 네게 복을주어 네이름이 지면에 창대하게 하겠다. 아므라함의 이름은 온지면에 창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므라함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축복의 약속은, ‘너로 복의 근원을 삼아 주겠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예수그리스도가 태어났습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인류가 구원을 받는, 믿음의 조상의 가정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들은 신실하게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성경이란 어떤 책인가? 약속의 책입니다. 그래서 구약 (Old Testament) 다른 말로하면 프러미즘. ‘하나님은 인간에게 약속하셨다’ 그 약속을 기록한 책이 구약입니다.
신약을 New Testament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구약의 모든 일들이 신약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을 우리는 약속과 성취라는 말을 씁니다. ‘구약의 약속과 신약의 성취’ 라는 이 구조가 바로 신구약을 뚫는 구조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약속과 성취라는 구조를 통해 볼때 예수님이 하신 모든 예언들과 요한계시록에 있는 모든 예언은 마지막날에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마지막 역사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심판주로 이땅에 다시오실 것입니다. 반드시, 약속하신 것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이것은 무슨 뜻이 있나?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이란 무슨 뜻이 있나?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선택된 백성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여러분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우리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선택받은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때만이 우리의 진정한 삶의 의미가 보여집니다.

약속의 때가 다가오니까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해지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다시보라. 때가 다가오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여자들이 애기를 잘낳기 시작했다. 눈에 띄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기를 낳으면 잘 죽지 않아, 병들지 않아, 아무리 악한 환경과 조건속에서도 건강하게 생존했습니다.
- 1 -
18-19 ‘ -- ’ 애굽왕이, 이스라엘백성들이 잡초처럼 무성하게 번성하는 것을 보고 두려운 것입니다. 이상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띄게 잘 번성해, 죽지를 않아,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중 남자아이를 다 죽이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산파가 아이를 받을때, 남자아이면 그 자리에세 죽이라고 면령했습니다. 국법으로 아이들을 죽이도록 결정을 했습니다. 얼마나 무섭게 번성해나가면 이런 일을 했겠습니까?

요셉을 알지못하는 새임금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무슨뜻 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이루기 위한 주변환경입니다. 그것은 우연한 일일수도 있고, 역사의 한 과정일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바로왕이 악한 꾀를 내어서 우리조상들을 괴롭힌 것도,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주변환경이었다는 것입니다. 남자아이를 죽이도록 법을 만든것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위한, 약속을 성취하기위한 하나의 주면 환경이었습니다.

역사에도 우연이 없습니다. ‘우연’이 존재하는 역사란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모든것이 필연이고 모든 것이 섭리입니다. 그냥되는 것이 없습니다. 나의 삶도, 나의 죽음도,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시한 일하나도 그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위한 하나님의 주변환경일 뿐입니다.


20-22 ‘ -- ’ 여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모세’ 라는 한 사람이 태어납니다.
그는 레위인의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입니다. 모세는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이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녁사의 이 싯점에서 왜 한국에 태어났습니까? 뜻이 있습니다. 절대로 우연히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자만이 자살합니다. 삶의 의미가 없기에, 그 고통을 견딜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더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기에 자살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사람은 결코 자살하지 않습니다.

스데반이 모세의 생애를 3기로 요약해 줍니다. 나이를 정해가며 설명해 줍니다.

그의 첫 생애는 40세 까지 였습니다. 모세의 첫 생애는 자아를 깨닫는 기간 이었습니다. 절망적인 환경에서 태어나서 영광의 자리까지 앉기까지의 생애가 제 1기에 해당합니다.
모세는 태어날 당시 죽음의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모든 남자아이를 태어날 때부터 죽이기로 국법을 만들었습니다. 모세가 태어났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을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6.25 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피란나와 자란 사람들은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된 주변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아무리 잘하고 싶어도 모든 면에서 어떻게 할수가 없습니다. 여기계신 분들중에도 연세가 많은 분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을 환경이 못되었습니다. 다 조각난 공부들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원해도 어쩔수가 없습니다. 환경이 그렇게 되어있으니까.

일제의 압박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런 주변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6.25의 환경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별방법이 없었습니다. 다 피란민의 생활을 해야 했고, 구제품을 먹어야 했고, 거지 노릇을 하며 살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변 환경이.

모세가 태어나던 그때는 태어나면 죽어야 했습니다. 살길이 없는 만약에 숨겨서 살려도 결국은 살수가 없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그럼데 모세가 죽비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을 한가지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가 있으면 죽을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지 않을 것 같았는데 쉽게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이는 죽을 것 같은데 끈질기게
- 2 -
안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스데반은 모세의 생애를 쉽게 4가지로 요약을 했습니다.
그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환경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탄생자체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를 북일수가 없었습니다. 3개월동안 그를 숨겨서 키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키울수가 없어서 그의 부모들은 갈상자에 역청을 발라서 아이를 넣고 나일강가에서 죽음의 여행을 시킨것입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할수 없었기에.

갈대 상자에 누워서 정처없이 떠나가는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하필 그 시간에 바로의 공부가 나일강가에서 목욕을 했다는 것입니다. 드라마 입니다.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공주가 그 갈대상자를 본 것입니다. 그 상자를 가져오게해서 보니까 천진난만한 아이가 있었어, 공주는 이 아기를 자기의 양아들로 삼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여행을 하던, 세달밖에 안된 모세는 하루아침에 공주의 아들로 변신한 것입니다. 공주의 아들이라고 하는, 왕가의 왕자라고하는 주변환경의 신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대의 최고의 학문인 애굽의 모든 학문을 다 배울수 있었습니다. 왕자의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말과 행사가 완벽한 신사가 된 것입니다. 그의 나이가 40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우리는 가끔 부모없이 태어난 아이를 봅니다. 부모없이 태어났겠나? 낳아놓고서 내팽개쳐 버렸겠지. 어떤 한 여자가 임신을 했습니다. 남편이 누구인지도 몰라, 애기를 맣고서 버렸습니다. 엤날에는 전쟁 고아가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향락의 산물로 버려진 아이가 많습니다.
어떤 아이는 태어나면서 선천적인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어떤 아이는 가마니 속에서 태어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유명한 소경 목사인 양정심목사는 여자 형제가 많았어. 그런데 또 딸이 태어나니까 가난하기에 아들이 아닌 딸을 또 키울수가 없어서 그 핏덩이를 죽으라고 가마니속에 둘둘말아 놓았답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아나서 목사까지 되었습니다. 그는 장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환경이 불행한 아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기막힌 인생의 여정과 우여곡절의 드라마 같은 인생속에도, 하나님은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요. 이 불행한 생애가 하나님께 촛점이 맞쳐질때는 그 생애가 고난이 깊을수록 더 귀하고 아름다운 생애로 변신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세의 생애를 통해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23-24 ‘ -- ’ 23절 에서 부터 모세의 제 2기의 인생이 시작됩니다.
그의 나이가 40입니다. ‘나이 40이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40이 되어서야 그는 민족을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동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제 1기의 생애가 자아가 눈을 뜰때면, 제 2기의 삶은 민족과 역사에 대해 눈뜰때입니다. 쉽게 말하면 모세가 철이 좀든것 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직도 철이 들지 않은 어른들이 참 많습니다. 나이 40이 넘어서도 민족과 역사를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 나이 40이 넘어서도 자기 삶의 주변만 맴돌고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라와 역사 민족은 그만두고라도, 자기가족하나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는 철없는 어른들이 참 많습니다. 남에게 신세만 지는 어른들, 어떤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철이 일찍든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세는 나이 40이 되어서야 민족에 대해서 눈을 떴습니다. 나이 40이 되어서야 자기의 동족 이스라엘을 돌아볼 생각이 난것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이 억울하게 종살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억울하게 재판받는 것도 보았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압제를 당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자기는 완족의 신분에 있지만 동족들이 압제를 받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어느날 애굽사람이 이스라엘백성을 핍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화가나서 거기에 개입을해서 동족의 편을 들다가 애굽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 3 -
여기에 바로 철이든 사람의 좌절감이 있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즉 선한 애국심이 살인하게 되었다는 논리입니다. 안중근과 이등박문을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안중근은 귀한사람입니다. 그러나 일본인에게는 기분나쁜 사람입니다. 이등박문 또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기분나쁜 사람이지만 일본사람에게는 영웅입니다.

누가 애국자이고 누가 영웅인가? 애국이란 그 민족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것이지만 상대편 민족에게는 상대적일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민족인 애국의 한계입니다. 내 민족은 내겍 중요하지만 다른민족에게는 우리가 원수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애국이나, 민족이나, 휴머니즘이나, 박애나 모두 다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선의 한계요, 인간의 진리의 한계입니다.

이스라엘사람과 애굽사람이 다툴때 모세는 본이 아니게 애굽사람을 죽였습니다. 민족적 동족애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같은 동족끼리 서로 싸울때 모세는 당황했습니다.
일제 시대때는 우리의 적이 분면했습니다. 일제를 거치고 6.25를 거치고난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민족끼리 서로 암투가 있었습니다. 서로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짓이겼습니다. 남의 민족하고 싸울때는 이해가 되는데, 우리민족 끼리 싸우는데 누구편에 사야 애국입니까? 이 정당에 가입해야 되나, 저 정당에 가입해야 되나? 여당이 되어야하나, 야당이 되어야 하나? 심각한 딜레머입니다.

모세의 경우 같은민족끼리 서로 심하게 싸우는 것을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또 개입을 했습니다. 서로 싸우지 말자 왜 같은 민족끼리 싸우느냐? 우리가 이렇게 설움받는 것도 억울한데 왜 같은 민족끼리 서로 싸워야하는냐고 얘기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응은 정반대의 반응이 나왔습니다.

‘네가 뭐냐?’ 오히려 말리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모세를 밀어뜨리면서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네가 우리까지 죽이려느냐? 네가 우리의 재판장이냐? 하면서 모세를 코너로 몬 것입니다.
모세 편에서 보면 얼마나 당황스럽고 섭섭했겠습니까? 얼마나 기막혔겠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정의 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애국심의 결과 입니다. 그는 할수없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의 애국이나 정의는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그는 말못하는 짐승과 함께 미디안 광야에서 나그네처럼 지내야 했습니다.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그리고 거기서 평범한 한 여자와 결혼을 해서 두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2기의 생애 전부입니다.
그의 나이 40에서 80, 한참 일할 나이입니다. 머리가 빤짝거릴 나이입니다. 정열이 있고, 건강이 있고, 아이디어가 있고, 뭔가 해볼수 있는 나이에 하나님은 완전히 그를 기죽여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가끔 그런 말을 합니다. 젊은 사람이 죽으면 ‘아깝다’ 그럽니다. 더 일할수 있는데 뭐가 아까워, 하나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건강이 있고, 머리가 있고, 정열이 있다고 일 시키지 않습니다. 그게 죽을때 까지 기다리십니다. 내가 능력있을때, 하나님은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무능하다고 고백할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내가 뭔가 할수 있다고 자부심을 가질때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돈이 있을 때 역사하시지 않으십니다. 그 돈을 하나님의 것으로 고백할때 역사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여러분의 돈과, 여러분의 재능과 여러분의 지위를 탐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완전히 꼬꾸라 질때 까지 그를 쓰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민족 선각자들을 봅니다. 그들의 눈물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년을 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도덕과, 인간의 애국과, 인간의 휴머니즘과, 박애주의의 한계인 것입니다.


30-32 ‘ -- ’ 40년이 차매 .... 그러니까 몇살이지요? 80살입니다.
- 4 -
80세에 모세 인생의 제 3기가 시작이 됩니다. 제 1기가 자아가 눈을 뜰때 였다면, 제 2기는 민족과 역사에 대해 눈을 뜰때입니다. 그러나 제 3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뜰때 였습니다.
인간의 절망과 좌절은 모든것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시작입니다.
우리교회 60세 이상 되신 분들은 이제부터 신앙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디금까지는 준비 입니다.

시재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시내산이란, 모세의 현실의 현주소입니다.
절망과 낮아질대로 낮아진, 약해질대로 약해진,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하게한 장소가 시내산입니다. 그 시내산에서 40년입니다. 똑 같은 생활을, 청춘을 송두리째 뺏겨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사람을 붙들고 일하십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그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에 너무나 교만합니다. 너무나 자리가 편합니다. 너무나 모든 것이 완벽하기에 하나님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껍질을 다 벗고, 거품이 사라지고, 지위, 건강, 돈, 모든것이 다 사라지고 여러분의 현실의 모습으로 돌아올때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불꽃속에서 나타나셨습니다. 타지않는 나무 불꽃속에 하나님은 임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임 말을 듣는 순간에 모세는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할만큼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방자하지 않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우리가 얼마나 경외해야할 대상인지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떨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모세가 이전에 하나님을 몰랐을 까요? 이스라엘백성으로 레위지파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하나님을 몰랐을까요? 율법을 안읽었을까요? 다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하나님을 만난것은 그의 인생 80세에서 였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을 결정적으로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결정적으로 그분을 만나냐 합니다. 보통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태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생애에 개입하셔야 하고, 내인생의 밑바닥에서부터 그 분과 만나냐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믿기도하고, 의심도 생기고, 별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모든 문학과 철학은 무엇인가? 요즘 베스트셀러들을 자주 봅니다. 요즙 사람들 무슨 얘가하나 싶어서 앞, 중간, 뒤를 보면 대충 뻔한 이야기 들입니다. 뻔한 이야기들을 열심히 수맥 수천 페이지에 쓰고 있습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얘기 입니다.
그 하나를 결론 내리기 위해서 서론이 그렇게 깁니다. 모든 문학, 철학은 하나님을 알기위한 서론입니다. 서론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기에 절대로 해답이 없습니다. 문학에 구원이 없습니다. 철학에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을 위한 서론에 불과 합니다.

드디어 모세는 하나님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Real GOD' 그는 진짜 하나님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모세의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모세 인생의 제 3기 입니다.

하나님은 모세 인생의 한 부분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 전체를 점령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부분에만 하나
- 5 -
님을 받아 드립니다. 그래서 갈등이 있습니다. ‘이 부분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 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자신을 생각했고, 민족을 생각했고, 역사를 생각했던 따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신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33-34 ‘ -- ’ 하나님을 정말 만난 사람들은 두가지 과정을 겪습니다.
첫째는 신을 벗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첫번째 음성은 ‘신을 벗어라’ 입니다.
네 과거를 단절하라, 네게 있는 옛 사람을 벗어버려라.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뛰어가려고 하면 과거를 단절해야 합니다. 배가 출발하려면 닻줄을 풀어야 합니다. 밧줄을 묶어 놓고서는 아무리 엔진을 돌려도 배는 안갑니다.

왜 나의 믿음의 진보가 없나? 왜 나의 믿음엔 기적이 없나? 왜 나의 믿음에 문제가 있는가? 밧줄로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부분은 하나님을 받아들였고, 어느 부분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믿음은 언제나 다람쥐 쳇바퀴돌듯 꼭 같이 돕니다.
세월이 지나 갔자만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나를 변화 시킬수 없는 무능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여러분의 생애에 부분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전부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차피 하나님을 피해서 살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죽는 순간에 소유한 재산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죽는 순간에 여러분들은 정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살았구나’ 하나님 앞에 갈때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했노라고 말하겠는가? 신을 멋어야 합니다. 심령이 거듭나야 합니다. 깨끗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얘기가 아니라 내 문제 입니다. 내 발에서 신을 벗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가치관, 여러분의 인생관, 여러분의 삶의 계획, 목적들이 다 벗겨져야 합니다. 그릇에 물을 담으려면 먼저 담겨있것을 없애야 합니다. 내 모습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비워질때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 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을 받고 있다. 내가 정녕히 그 괴로움을 보고, 탄식소리도 듣고 있다. 나는 저희를 구원하려고 지금 왔다. 그래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는 것이다.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선교명령’입니다.
너를 그래서 이땅에 두었느니라. 모세를 이땅에 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너를 한국땅에 살게한 이유가 여기있다.

오늘 우리를 이 사업을 하게하고, 이 학문을 하게하고, 이 삶을 살게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네가 존재하는 것이다. 너는 가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땅에서 해방시켜라. 이 명령입니다.
명령이 없는데 어찌 사명이 있겠습니까? 부름이 없는데 무슨 사명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가정으로 부르셨고, 직장으로 부르셨고, 사회로 불렀고, 이 교회로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교사로도 부르실 것이고, 목회자로도 부르실 것입니다. 우리 학문의 이유, 우리 삶의 모든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 애굽에서 고통중에 있는데 너는 가서 그들을 구해라.
살인자로 도망가야 했던 모세를,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시켜서,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지도자로 세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스데반의 설교의 주 요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택해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셨고,
- 6 -
모세를 택해서 압제 받는 이스라엘백성을 해방시키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주셨으며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이야기 입니다.

모세는 누구인가?
36 ‘ -- ’ 하나님은 모세를 택해서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홍해를 가르게 하시고 광야 40년 동안 기사와 표적을 통하여 이스라엘백성을 훈련시키는 훈련사였습니다. 그가 모세였습니다.

37 ‘ -- ’ 그를 선지자로 세웠습니다.

38 ‘ -- ’ 스데반은 40년동안 천막을 치면서 이리저리 방황하던 그 광야생활을 ‘광야교회’라는 말을 썼습니다. 광야교회의 목회자로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생애는 이스라엘백성들을 인도해낸 훈련사 였고, 선지자 였고, 광야교회의 목회자의 역활을 한 것입니다.

39-41 ‘ -- ’ 스데반의 설교의 목적은 첫째는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훈련사로, 목회자로 세워주셨던 하나님의 구원 얘기를 하고 있고, 또하나의 이유는, 이스라엘의 지도자 였던 모세를 이렇게 하나님이 세워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백성들 가운데 모세를 복종치 아니했던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한 개인이 아니고 집단이었습니다. 그 집단을 우리는 불평하는 세력이라고 말합니다. 불만하는 세력들입니다. 어느 조직이든지 불평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나, 어느 조직이나 완전한 사람, 완전한 조직이 있겠습니까? 좋은점이 있으면 또한 반드시 약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좋은점은 안봅니다. 언제나 그 약범을 걸머쥐고 얘기 합니다. 그리고 그 약점들을 들고 얘기하면 설득력이 있으니까. 그걸 가지고 마치 큰 문제가 있는것 처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조직을 파괴하게 됩니다. 본인은 파괴하려고 까지 했던 것은 아닙니다. 잘해보려고 했던 것이지만 결과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 조직에 불평의 세력을 심어 주었습니다. 누군지 모르게 그렇게 불평하던 그룹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슬슬 모세를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은 모세를 비판한 것이 아닙니다.
비판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여론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산에 기도하러 올라간 그 순간에 그들은 드디어 작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서,부정적인 여론을 만들어서 민중을 오도한 것입니다. 민중이 얼나나 간단하고 웃기는 것인지 아는가? 생각해보라. 이 민중이 바로 홍해를 건넜던 사람들입니다.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었던 그 사람들입니다. 기적을 목격해서 샘물을 먹었던 바로 그 장본인 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해주어도 잠깐 마음에 안들면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원망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생할 것이 무엇이 있나?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것이 그들을 선동한 첫번째 메세지 였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왜 가야하나? 그렇게 고생스럽게, 애굽으로 가자. 모세는 우리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이렇게 선동했다.
민중들은 현실적인 고난앞에서 쉽게 그들의 말에 동의 했습니다. 그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는 생각지도 않고, 쉽게 그들의 말에 동의 했습니다.

두번째, 그들의 멧세지는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금을 다 내놔라, 금 송아지를 만들겠다. 우리를 인도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금송아지다. 사람들이 흥분하고 좋아해서 그에게 절을 했습니다. 이엇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대중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민중을 신성화 시킵니다. ’대중‘을 너무나 신성화 시킵니다. 그러나 민중의 깊은 곳에는 우상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봅니다.
그렇게 불평하던 세력이, 스데반에 의하면 모세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있다는 것입니다.
- 7 -
그들이 누구인가? 사도들을 비판했던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 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그 비판은 결국 하나님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데반이 이렇게 설교를 했기 때문에 그들이 잘듣고 자기들이, 아브라함, 모세인줄 알고 기분좋게 잘 듣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바로 너희들이 선지자를 죽였던 사람들이다. 하는 순간에 알굴이 일그러지고, 이를 갈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인 것입니다.

그 불평하던 정체가 없던 세력은 지금도 존재합니다. 저는 우리교회의 여러분들이 불평하는 세력에 가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전적인 시각을 갖게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연약했던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열려진 미래를 생각하고 꿈을 가지십시요. 과거지향적이 되면 않됩니다. 하나님의 미래에 우리가 같이 가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을 할 것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십시요.

순간을 쪼개어 나갈때 ‘불평하지 말라’ ‘할렐루야’ 하라. 불평하지 말라. 자꾸 쪼개어 나가야 하나다. 구역도, 부서도, 늘어나면 자꾸 쪼개어 나가야 합니다. 안쪼개어 질려고 몸부림치지 마십시요. 왜? 우리는 하나님의 미래를 보기 때문에 쪼개어 나누어져서, 과거를 그리워하지 말고, 앞으로 또 채워나갈 미래의 환상을 가지고 기뻐해야합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정도, 사업도,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마십시요.

금송아지를 만들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던 사람들은 모세때도 있었고, 스데반 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성령의 음성을 들으십시요.

부정적인 생각을 아예 지워 버리십시요.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하면 부전적인 체질이 됩니다. 비판을 많이 하면 비판적인 체질이 됩니다. 그것이 굉장히 지성적이고 멋진것 같지만 늘 최후는 비참합니다. 모든것을 좋게 생각하십시요. 긍정적으로 생각하십시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황당무계라는 인간의 야망을 꿈꾸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비젼을 갖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천성을 향하여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 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