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중요인물, 사건, 단어
1)권철신
유학자, 천주교 순교자, 교명 암브로스. 이승훈에 의해 천주교에 입교.
1777년 천진암 등지에서 강학회를 열면서 사학 교리 연구. 1
801년 신유박해때 정약용, 이가환, 이승훈등과 함께 피체 사형됨.
2)길선주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고 개종.
김익두와 함께 재림주와 저나라의 소망을 강조하여 3.1운동이후
그리스도인들을 불안과 좌절에서 종교적으로 해소 시키려함.
1927년 "말세론" 저술.
3)김 린
옥중에서 이승만에 의해 교회 최초의 지식인 계급, 상류층의 교인이 됨.
유신회 일원으로 YMCA를 총독부의 사주로 늑탈하려던 1913년의 음모 붕괴.
4)김대건
조선인 최초로 신부 서품을 받음. 1846년 9월15일 새남터에서 순교.
그의 순교로 근대조선과 서양제국과의 접촉 표면화, 그 결과에 의해 쇄국배외.
5)김범우
초기 천주교인, 세례명 도마. 이벽의 권면으로 입교, 가족과 친지 전도.
1785 년 명례방 자택에서 종교 집회중 체포, 홀로 단양으로 유배, 순교.
6)김익두
27세인 1900년 교인됨. 1901년 재령읍 교회 전도사로 시무.
10년 평양신학교 제3회 졸업생. 신유 이적 집회, 신사참배 솔선.
공산당에 의해 기독교연맹에 억지로 가입. 6.25동란때 순교.
7)김인서
1932년 1월 신앙생활. [신학지남]에 "무교회주의자 무찌무라"를 기고.
[신앙생활] 발간. (3.1운동후 신자들의 신앙적 인격과 지식을 향상시키는 목적)
신앙의 3대 강령은 복음, 역화, 인화를 체험 증거하기 위해 발간.
조선의 부활과 새생명을 부르짖는
[신생명]의 필자(특징:한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운영되었으며 교파를 초월)
15)박희도
3.1운동 거사 계획과 별도로 기독 학생 중심의 전민족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중
역시 기독 청년 운동의 지도자였던 YMCA간사 박희도는 학생 지도자들과
민족 대표들이 합작하여 공동 행동 할 수 있는 역할을 했다.
16)변성옥
1925년-26년 감리교 협성 신학교 "종교교육" 교수 역임.
1924년 조선 예수교 연합공의회의 선정 찬송가 위원회 위원.
1931년 새찬송가 개정, 7인별위원으로 뽑힘.
1930년 발행된 "종교교육"지의 필진으로 수고. (기독교교육의 토착화를 목적)
17)변홍규
1932년 4월 남녀협성신학교가 합동하여 실립된 "감리교 신학교"의 교장.
1940년 4월 신사참배 및 창씨 개명. 일본 학정등을 성토하는 격문이 살포 되었다는 이유로
학생들과 함께 연행되었고 국가봉공의 한 기관이 될 목적으로 설립된
"기독 신문"에 "기독교사"를 연재했다.
18)서경조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7인중 한명으로 1907년 9월 17일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대한민국 예수교 장로회(독노회)가 조직되었고,
독노회에서 목사장립을 할 때 목사가 되었다.
새문안교회 초대목사로 시무하였다.(1910 언더우드와 동시목사로서)
19)서상윤
서상윤은 만주에 있던 선교사 존 로스와 함께 누가복음을 1882년에 한국말로 번역하였고,
만주와 국내에서 권서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고향 황해도 솔내에 1884년 한국인 손으로 지은 최초의 교회당을 설립했다.
1887년 한국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20)서재필
독립협회 창설자 중 한 사람. 1896년 11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를 설립함으로
서 한국에서의 청년운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21)소현세자
병자호란으로 청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1644년 당시 북경 주교이던
예수회 신부 아담 샬 선교사와 접촉을 갖게 되어, 최초로 서양과학과 천주교에 접하게 되었다.
28)유길준
갑신정변으로 미국유학을 중단.
1885년 12월에 귀국. 반대파에 연금 되었다가 서양문물 소개하는 서유견문이란 책을 냄.
1895년 김홍집 내각의 개화정책 입안자로 음력폐지. 종두법시행 등 내정 개혁을 주도.
일제의 한국침략을 극구 반대. 말년에 기독교에 귀의함.
30)유억겸
1927년 감리교의 신흥우, 정춘수, 장로교의 함태영, 전필순 등과 적극신앙단을 창설,
기독교 청년회 회장을 역임. 국제 선교협의회 회원.
중앙 YMCA 회계로 활약하는 등 기독교 사회단체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함.
31)유형기
미 유학후 귀국 조선 감리교 교육국 간사로 취임. 다양한 종교교육사업 전개.
1934년 어빙돈 단권 성서주석 출판.
흥사단 회원으로 활동. 해방후 조선 인쇄 주식회사 관리.
감신대 9대 교장 역임. 피난민 구제 사업과 교회 복구사업에 전력투구 4백여교회 재건.
32)윤지충
김범우 집에서 <천주실의> 교리서를 읽고 감명받음.
3년후 정약전의 가르침에 따라 세례받음.
1789 북경에서 견진성사 받고 귀국. 천주교 박해시 고발 33세로 전주에서 참수당함.
천주교 사상 최초의 순교자중 한사람.
33)윤치호
상해 유학시 미국 남 감리교회에서 경영하는 중서서원에 입학.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남 감리교인이 됨.
미국 유학후 남부지역 순회 강연을 통하여 한국 소개하는 한편,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는데 기폭제 역활을 감당.
캔들러 및 알렌에게 한국 선교 착수토록 간청. 을미사변후 선교기지 개성에 마련.
35)이승훈
1783년 북경에서 세례받음.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으로서 1784년 3월에 귀국.
선교는 서울근교에서 5년동안에 신도수를 4천정도로 불림.
그러나 이벽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역사의 효시를 이루었지만 배교를 하고 세상을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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