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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의 믿음(히11장4;창4장1- 7)
성경본문: 히브리서11:4; 창세기4:1-7
히브리서11:4;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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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4:1-7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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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들어 세 번째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새해 세 번째 주를 잘 달리고 있습니까?
한 유대인 랍비가 길을 걷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아주 바쁘게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랍비가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어디를 그렇게 빨리 가시오?”
남자는 뒤도 안 돌아본 채 말했습니다.
“행운을 잡으러 갑니다”.
이 말을 들은 랍비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참 어리석소. 지금 행운이 당신을 잡으려고 좇아가고 있는 데 당신은 행운보다 너무 빨리 달리고 있지 않소?”.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의 특징은 부지런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부지런한 나머지 행운보다 먼저 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 열심인 나머지 하나님보다 더 열심히 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방법보다 중요한 것은 원리입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 목표를 안다면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한 해 목표는 분명합니까? 하나님이 한 해동안 우리 모두가 열매맺는 큰 나무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올 한 해는 놀랍게 열매맺는 한 해입니다.
그것이 학업이든, 사업이든, 가정이든, 교회든, 세상적이든, 영적이든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믿음에 굳게 서야 감사함이 넘칩니다”.
믿음에 굳게 서기 위해 우리는 지난 주부터 히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사람, 아벨입니다.
4절을 다시 읽겠습니까? 히11:4, “믿음은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브리서는 아벨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말합니다.
믿음을 예배와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우리 생의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믿습니까?
시27:4절입니다.
“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우리 생의 최고 우선순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오트란드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예배는 인간이 하는 일 중 가장 숭고한 것이요, 가장 가치 있는 행위다”.
영국의 C.S.루이스도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유로워지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예배하려고 태어났다.”
오늘 아벨의 예배를 통해 우리의 예배를 돌아봅시다.
말씀을 통해 올 한 해 우리가 최고의 예배자가 되고 예배를 통해 또한 우리 믿음이 자라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예배는 어떻게 시작될까요?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로 시작됩니다.
오늘의 주인공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창4장에 나타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에덴을 쫓겨난 후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둘은 하는 일이 달랐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농부가 되고 아벨은 양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의 농사와 아벨의 목축은 고대 사회의 두 가지 생활방식을 말합니다.
어느 것이 우월하고 어느 것이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직업의 귀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직업에 대한 태도에 귀천이 있을 뿐입니다.
골3:23에도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상관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것이 범죄만 아니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하나님이 주신 일로 알고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어느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4:3에 “세월이 지난 후에” 했습니다.
이 말은 “때가 되어” 이 말입니다.
사람이 어리면 예배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나이 뿐 아니라 영적으로 어려도 예배할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자라면 예배를 알게 됩니다.
예배는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어야 예배를 드립니다.
왜 예배는 믿음과 관련될까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았으면 그를 높힐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분이 나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알았으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면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면 예배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믿기 때문에 예배하고 예배한만큼 믿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자라서 하나님앞에 예배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그런데 같은 예배인데도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고 아벨의 예배만 받았습니다.
둘이 똑같이 예배드렸는 데도 왜 아벨의 예배는 받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은 것일까요?
흔히 말하듯이 가인은 농산물로 예배하고 아벨은 동물로 드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희생제사와 관련하여 아벨의 제사만 받은 것입니까?
그렇다면 농사밖에 짓지 못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예배해야 합니까?
예배할 때마다 양이나 소를 밖에서 사와야 합니까?
그러다가 구하지 못하면 예배도 드리지 말아야 합니까?
문제는 예물이 아니라 예배자입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에 그 해답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가인”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카니티”입니다.
이 말은 직역하면 “내가 얻었다. 내가 획득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직접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죄를 짓고 에덴을 떠나면서 일하는 고통과 해산하는 수고를 죄의 대가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와는 가인을 힘들게 낳았습니다.
너무 힘들어 “카니티” 했는 데 이 말은 “아, 힘들다. 애 낳느라 죽을뻔 했네” 하는 뜻입니다.
이 말이 더 발전해서 “내가 낳았다, 내가 얻었다, 내가 회득했다” 뜻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가인의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강조된 말은 “내가”입니다. “내가 고생하고, 내가 힘들었고, 내가 수고했고, 내가 낳았고, 내가 얻었고”, 가인의 이름은 이렇게 지어졌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예배와도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창4:3절에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다“말을 히브리어 원어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가인은 자기 밭에서 자기가 거둔 곡식을 하나님께 제물로 가져갔다“.
여기서 ”자기“란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이 말속에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이유와 하나님이 제물이 받지 않았을 때 가인이 화를 낸 이유가 나타납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자기 것을 드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힘들게 농사해서 얻은 자기 것,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가인에게는 은혜의식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는 생각이 없이 모든 것이 ”카니티“, ”내 것이다. 내가 힘들게 농사지었다. 내가 얻었다. 그래서 내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예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까운 것을 드렸는데 하나님이 안 받았다. 그럴 수 있나? 내가 어떻게 지은 것인데? 내가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밤잠을 자지 않고 지은 것인데 이것을 안받다니? 그럴 수 있어?” 그래서 가인이 분노하여 안색이 변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을 통해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무엇이 없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롬5:1-2절을 또 드립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서 “나아간다”는 말은 왕을 만나려고 궁정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궁중에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최 누구처럼 아무 때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은혜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허락받았습니다.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얻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가 농사한 곡식때문이 아닙니다.
곡식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왕이 볼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정성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목회자도 장로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은혜로 허락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나아간다”는 말이 신약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
롬5:2절에 나오고 엡2:18, 엡3:12에 나옵니다.
엡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댐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 그래서 감히 왕이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은혜, 이것이 예배입니다.
저는 이스라엘에서 회당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매주 토요일, 안식일에 드리는 회당예배는 그 뒤에 탄생한 기독교 예배의 원형입니다.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남녀노소, 모두 가족이 함께 드립니다.
둘째, 성경읽기와 기도를 중심으로 2시간 이상 드립니다.
셋째, 그 시간동안 내내 서서 예배드립니다. “서서” 드린다는 것에 저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왜 의자에 앉아서 드리지 서서 드릴까?
의자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앞에 차마 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서서 드리는 예배를 “아미다” 예배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도 “아미다”는 “선다”는 뜻입니다.
서서 드리는 예배의 원형은 옛날 성전의 지성소입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에서 예배할 때 먼저 이방인의 뜰을 거쳐 성전구내에 들어가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을 거쳐 지성소로 나아갑니다.
문을 여러 개 거쳐 하나님이 임재하는 성소로 나아갑니다.
그 성소에 들어가면 빽빽한 구름과 연기로 하나님의 “쉐키나”, 임재가 있어서 감히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얼굴을 들수가 없는 데 어떻게 앉습니까?
그래서 서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몸만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일어섭니다.
죄인인 내가 감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들어오다니.
그 은혜가 너무 크고 황송해서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미다’, 섭니다. 그리고 찬양합니다. “왕되신 주앞에 나 경배합니다. 주님만 찬양받기 합당하시니 큰 존귀와 영광 홀로 받으소서. 오, 주앞에 나아갑니다”.
이렇게 자격없는 자를 부르셔서 왕되신 하나님앞에 나아오게 하신 은혜를 입으면 어떻게 예배할까요?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에서 한 축사의 마지막 부분이 있습니다.
“졸업생 여러분, 마지막으로 제가 제 마음에 항상 두는 두 마디 말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픈 채로 머무십시오. 그리고 어리석은 자로 사십시오. 배고파야 채우고 어리석어야 겸손합니다”.
하나님앞에 예배하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Stay hungry!, 하나님앞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서십시오.
Stay foolish! 하나님앞에 어리석고 겸손한 자로 서십시오.
예배는 은혜입니다.
은혜없다면 예배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하나님앞에 나왔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배드려야 합니까?
예배의 부정적인 요소를 가인이 보여줬다면 예배의 긍정적인 요소를 아벨이 보여줍니다.
가인이 농산물로 예배드린 반면에 아벨은 양을 잡아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예배는 예물의 문제가 아니고 예배자의 문제입니다.
아벨은 어떻게 예배드렸을까요?
창4:4절입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아벨은 양을 잡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이 부분이 더 자세히 번역되어야 합니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아벨도 자기가 기르는 첫 새끼 가운데서 가장 좋은 부위를 골라 제물로 가져왔다”.
그냥 양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양의 첫 새끼를 드렸는 데 그나마도 그중에서 가장 좋은 부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가진 최상의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벨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이름에서 힌트를 얻습니다.
히브리어 “아벨”은 “하벨”에서 왔습니다. “하벨”은 “숨, 호흡”이란 뜻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숨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숨쉬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이 “하벨”에서 “아벨”이 나왔는 데 “아벨”은 “헛되다”는 뜻입니다.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할 때 “헛되다”는 말이 “아벨”입니다.
그러면 아벨이 왜 헛되다는 말입니까?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말이 아니라 나에게서 하나님 떠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명, 마치 숨과 같습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살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한 순간 한 순간 사는 데 하나님 떠나면 ”아벨“, 그때부터 우리는 헛된 존재입니다.
“그러니 주여, 나를 떠나지 마시고 나와 영원히 함께 하옵소서“.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나오는 은혜를 입은 성도가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 없으면 저는 못삽니다. 저는 아벨입니다. 하나님의 하벨, 생명이 없으면, 아벨, 나는 헛되고 헛된 존재입니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는 시인 정호승을 좋아합니다.
그가 쓴 시중에 “어느 벽보판 앞”이란 시가 있습니다.
어느날 그가 길을 지나가다가 그가 현상수배범이 걸린 전단지를 보고 쓴 시입니다.
“현상수배범 전단지 사진 속에0 내 얼굴이 있었다.
안경을 끼고 입꼬리가 축 처진 게 영락없이 내 얼굴이었다.
내가 무슨 대죄를 지어 나도 모르게 수배되고 있는지 몰라
벽보판 앞을 평생을 서성이다가 마침내 알았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
딩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린 죄.
우리는 보통 무엇을 무엇을 한 죄를 죄로 봅니다.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그러나 죄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 무엇을 한 죄도 있지만 무엇 무엇을 안한 죄도 있습니다.
젊은 때는 무엇 무엇을 하는 것만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 먹으면서 보니까 안한 것이 더 많습니다.
부모에게 젊은 때같이 불효는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더 자주 전화하고, 더 살펴드리지도 못합니다. 아내를 보면서 젊을 때처럼 자주 다투지만 않지만 그렇다고 여기 저기 아플 때 더 다정하고 위로하며 의지하지 못합니다.
그때 “아, 내가 더 사랑해야 하는데 바쁘다고 못하고, 나이는 먹어가는 데 언제 사랑하나? 미안하다” 생각합니다.
아들에게, 딸에게 더 사랑한다는 말을 못한 죄, 목회자로서 교인들이 아프고 고통당할 때 더 가까이 있어주지 못한 죄, 정호승이 말한대로 “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린 죄”는 얼마나 큽니까?
사람앞에 이러한 데 하나님앞에서는 또 어떻습니까?
툭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뻔히 죄인 줄 알면서 죄짓는 것은 그만 두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데 사랑하지 않은 죄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평생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해서 장로, 권사, 목사로 세우니까 첫 사랑 다 잊어버리고 예배도 제대로 못 드리고 심지어 십일조도 제대로 못하면서 하루하루 겨우 사는 우리, 나이는 먹어가고 은퇴는 다가오는 데 언제 하나님을 섬기려는지, 참 한심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하나님앞에 “아벨”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한 시도 못사는 존재들 아닙니까?
요즘 제가 배운 노래중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보소서 주님 나의 마음을 선한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모든 것 주께 드립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날 새롭게 하소서.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내 아버지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
이 고백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런데 아벨의 예배에서 빠져서는 안되는 요소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양을 잡아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예배의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아벨의 시대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법도 없고 전례도 없고 제단이나 성전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린 것은 노아였습니다.
그뒤 출애굽시대에 성막이 만들어 지고, 솔로몬 시대에 성전이 지어져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의 시대는 누구도 동물을 잡아 예배한 적이 없는 데 아벨이 처음으로 양을 잡아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벨의 예배가 두고 오는 모든 시대 예배의 표준이 되고 모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는 반드시 희생이 따라야 하며 희생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출애굽시대의 성막이나 솔로몬 시대의 성전제사에서 양이나 소를 잡아 드린 것은 훗날 우리 죄를 위해 대신 죽을 예수님을 예표한 것으로 예배의 본질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 희생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예배의 중심에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이 있습니까?
한국교회 침체의 원인을 분석하는 사람중에는 한국교회 예배의 타락을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배의 가장 큰 타락은 예배가 하나님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 어땠어?” “응, 은혜 많이 받았어.” “아니, 별로였어. 찬양도 지루하고 설교도 그렇고 그랬어”.
하나님께 드린 예배가 별로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어떻게 그렇고 그럴 수가 있습니까?
목회자는 신자들의 입맛이나 감정에 호소하는 인터테인먼트 예배를 추구하고 신자들은 자기 몸을 드리기보다 예배를 통해 오로지 자기 만족이나 위로만 받고 있습니다.
조금만 듣기 싫은 소리를 해도 “치는 설교”, “표적 설교”라고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예배를 찾아 주일마다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다니는 교회 방랑객이 10만 가량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배드리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예배보러 다니는 것입니다.
예배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의 희생양,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은혜는 예배를 통해 내가 받는 결과요 선물이지만 은혜받는 것이 예배의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가 왕이신 하나님앞에 예배자로 부름받았을 때 이미 은혜받았습니다.
예배는 행복해야 하지만 느낌이 좋아야 행복한 예배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추구해야지 느낌이 좋은 예배를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예배는 나에게 무엇을 하라(do)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미 하신 일(done)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벨이 드린 어린양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재미있는 것을 아벨은 예배드린 후 가인에게 죽었다는 것입니다.
히11:4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양을 잡아 예배하고 자신도 산 제물로 내놓고, 그래서 아벨의 예배는 예수님의 예배를 닮았습니다.
오래전 미국에서 차를 몰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기독교방송에서 한 여성이 나와 찬양하는 데 제가 너무 눈물이 나와 사고날까 봐 차를 옆에 세웠습니다.
찬양은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였습니다.
목소리로 볼 때 흑인인듯한 그 여성의 찬양은 그날 제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님이 우리의 중심에 있습니다.
예배의 중심도 피묻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어린 양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예배는 자기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예배를 통해 배울 마지막 교훈이 있습니다.
창4:4-5절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아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여기 “아벨과 그의 제물”이란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물드리면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물보다 우리 자신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아벨의 예배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제물을 받기 전에 먼저 아벨을 받으셨습니다.
가인의 예배도 문제는 제물이 아닙니다.
제물보다 먼저 받지 않은 것은 가인 자신입니다.
“가인과 그가 드린 제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배의 근본적인 문제는 예물의 문제가 아니고 예배자의 문제입니다.
실컷 예배는 드렸으나 나를 드리지 못한 예배는 실패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나를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롬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에 “산 제물”이 나옵니다.
구약의 예배는 동물을 잡아 드린 희생제사였습니다. 양이나 소를 드릴 때 반드시 몇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반드시 양이나 소, 희생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드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희생제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입구에 제사장이 서서 제물을 가지고 오지 않은 사람은 아예 입장도 못하게 했습니다.
☞둘째는 희생제사는 양이나 소로 하되 반드시 1년된 수컷으로 드려야 했습니다.
암컷은 새끼를 낳아야 하기 때문에 아마도 보호했던 것 같지만 1년된 수컷이 동물로는 최상의 상태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좋은 것을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33살, 인생의 최고 절정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마지막은 제물을 드리되 반드시 살아 있는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제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 죽은 것을 드리거나 죽여서 드린 것이 아니라 산 것을 드리고 다음에 죽였습니다. 레1: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1년된 소나 양의 수컷을 끌고와 먼저 회막문에서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장의 안수를 받은 후 번제단에 올려 불살랐습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안됩니다.
이것이 롬12:1절의 “산 제사”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 나올 때마다 드릴 희생제물이 있나요?
하나님께 나올 때 무엇을 드리고 무엇을 희생하시나요?
구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 예물드리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 정성을 다해 예물을 준비하십시오.
“사랑하지 않고 줄 수 있지만 주지 않고는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주지 말래도 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버지가 예배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참 따분하고 길고, 성가대 찬양은 그게 뭐야? 아, 오늘 은혜가 없었어”.
이 말을 듣던 고등학생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헌금시간에 주섬 주섬 호주머니 뒤져서 겨우 천원짜리 한 장 헌금하시고 예배에 대하여 뭘 기대하세요?”.
아들이 썩 잘한 말은 아니지만 제대로 예배드리지 못한 아버지를 깨닫게 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우리는 예배때 이것 저것 받기만 바라지만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릴 생각은 잘 안합니다.
어떻습니까?
예배시간을 잘 지킵니까?
우리 교회 권사님중 하남으로 이사간 분이 계십니다.
이 권사님이 교회오는 데 약 2시간 정도 걸립니다.
집에서 버스타고 지하철가고, 지하철 두 번 갈아타고 판교역으로 와서 걸어서 교회까지 2시간, 그런데도 항상 일찍 옵니다.
수원 화성 향남에 사시는 장로님도 2시간 걸립니다. 버스로, 지하철로, 걸어서, 그런데도 늦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업을 하는 데 사업상 이권이 걸려 있는 만남이라면 1시간 늦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친구와 영화보러 간다면 20분 늦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해외여행가기 위해 공항간다면 30분 늦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는 늦습니까?
하나님이 영화보다 사업보다 여행보다 못합니까?
어떤 분은 설교가 다 끝난 다음에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는 안 드리고 예배끝나고 사람만나기 위해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배자가 아닙니다.
구경꾼입니다.
“10분 일찍 옵시다”.
적어도 예배전에는 도착합시다.
그래서 온전한 예배를 드립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립시다.
시간도, 정성도, 물질도, 찬양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배드린만큼 살고, 세상 또한 우리가 예배한 만큼 변화됩니다.
예배의 수준이 내 영적 수준이고 그 시대 교회가 드리는 예배의 수준이 곧 그 시대의 영적인 수준입니다.
한 해동안 예배 잘 드리겠습니까?
예배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임을 믿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부르신 은혜를 받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희생의 은혜를 찬양하겠습니까?
최고의 은혜를 받았으니 최고의 희생으로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까?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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