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공관복음의 문제 - 김세윤교수
1. 서론
신약 전체의 서론적인 문제로서, 첫째로 신약의 배경을 다룰 수 있고, 둘째로 신약의 여러 문서들이 어떻게 쓰였으며, 누구에게 쓰였으며, 언제 쓰였으며,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즉 저자, 쓰인 연대, 독자, 쓰인 정황, 쓰인 목적, 이런 것들을 다룰 수 있고, 또 신약의 문제를 다루기도 하고 내용도 간단히 요약한다.
이런 것들을 고찰함으로써 신약의 문서들에 대한 일반적인 orientation을 얻으려고 한 것이 신약개론이라는 과목이다. 신약개론에서 주로 둘째번의 문제를 다룬다.
첫번째의 배경사를 할려면 시간이 굉장히 걸린다. 이번 학기에 4복음서의 서론과 사도행전의 서론을 다루고, 다음 학기에 바울서신에서 계시록까지 다루게 된다.
신약개론을 잘 하려면 책을 많이 읽을 수 밖에 없다. 대표적인책이도날드거스리(D.Guthrie),신약개론(NewTestament Introduction) CLC : 복음주의 보수 입장에서
대표적인 책이다. 모든 개론적인 문제, 모든 비판적인 문제를 아주 자세히 토론하고 있다.
큄멜(Kmel),신약개론(The New Testament : The history of the Investigation of its Problems ): 비판적인 교과서로 제일 많이 쓰인다.
마틴(Ralph Martin), New Testament Foundation(Vol 1,2) 복음주의 책으로 좋다. 1권: 복음서, 2권: 사도행전, 서신서 교과서로 쓰기에 아주 좋은 책이다.
2. 독특한 문학 장르로서 복음서
(1) 복음이라는 단어의 의미
복음이란 eujaggelion이란 말로 '좋은 소식에 대해서 상을 줌'이라는 뜻이다. 거기서부터 파생되고 발전되어서 '좋은 소식'이라는 뜻이 되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말을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Message에 적용을 했다. 헬라어 동사 euj-aggelizein(복음을 선포하다)의 동사에서 eujaggelion이 나왔다. 히브리말로 rcb을 번역한 것인데, 이 히브리말은 사40:9에, 특별히 의미 깊게 52:7, 61:1, 시96:2 등에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선포한다'는 뜻으로 쓰인 동사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소식을 선포한 것에 대해서 쓰는 동사이다. 그것의 번역이 헬라어로 eujaggelizein이다. 명사형으로 eujaggelion(복음)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셨다는 소식을 eujaggelion이라고 정했다. eujaggelion(복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선포 즉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신 분, 좀 더 집중해서 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소식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니까 그렇다. 그러므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소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eujaggelion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소식,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사건이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에게 기쁜 소식이다. 초월자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서 구원을 이루셨다. 구원의 사역을 행하셨다. 그래서 거기에다 eujaggelion이란 말을 붙였다.
(2) 복음이라는 문학장르가 나오게 된 이유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하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eujaggelion이란 말이 나온다. 막1:2부터 나온 이야기에 제목을 달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했다. 그런데 막1:2이하에 나온 이야기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그의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를 간단히 '복음'이라 한다. 마가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이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다는 것이다. 바로 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구원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그것이 eujaggelion이다 라고 선언하고자 했다.
원래는 eujaggelion이란 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한 구원을 이루셨다는 말로 하는 선포를 복음이라 했는데, 이제 마가복음과 더불어 처음으로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글을 - 하나의 문학작품을 - '복음'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은 최근까지 대부분 비판적인 학자들은 마가복음의 이 부분(1:1)은 후기에 부착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글을 - 우리 4복음서를 - 복음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AD 2C이후의 일이었다고 말한다.
Tingen 대학의 헹겔(Hengel) 교수는 그의 아주 자세한 연구에서, 그것이 아니고 마가복음이 처음 쓰여서 출판될 때, 벌써 복음이란 말을 달고 쓰였다고 한다. 헹겔은 마가복음이 AD 67년에 쓰였다고 못을 박는다. 그렇다면 AD 67년에 복음이란 말이, 선포된 예수에 관한 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그린 글에까지 즉 문학장르에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복음이란 말이 문학장르가 된다. 이것은 우리 신약에 독특한 현상이다.
(3) 복음이라는 문학 장르와 다른 고대 문학장르와 비교
- 복음이라는 문학장르의 독특성
복음이란 문학장르를 고대의 문학장르들과 비교하고, 오늘날의 여러 문학장르들과 비교해 볼 때, 어떻게 분류를 해야 되느냐? 복음이란 문학장르가 마가 이래로, 마태도 그 형식을 따라 썼고, 누가도, 요한도 그 형식을 따라 썼다. 그 외에도 이른바 신약 외경이란 것들이 많다.
그래서 복음이란 문학장르가 형성이 되었는데, 이것을 보면 고대의 전기 영웅에 대한 전기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또 고대 헬라세계의 전기와 다른 점이 있다.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가령 알렉산더 전기, 헬라 유대 문서중에 '모세전' 이런 것과 복음서를 순전히 문학장르로서 비교한다.
또 최근에 와서 헬라의 드라마 - 비극이라든지 -와 또 비교한다. 거기에도 유사점이 있고 다른 점이 있기도 하다. 이것은 eujaggelion이란 문학장르는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 신약적인 - 현상으로서 주제의 독특성에 의해서 독특하게 생성된 문학장르이다. 그래서 고대의 어떤 문학장르의 패턴을 따른 것이 아니고 오늘날에 어떤 문학장르와도 특별히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 복음이라는 장르가 고대 전기와 다른 점
한동안 eujaggelion을 고대세계에서의 전기의 일종으로 보려고 한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 차이점은 첫째로, 고대 전기에는 주로 그 전기의 주제가 되는 자의 성장과정 - 외적성장과정, 내적성장과정- 과, 어떻게 교육을 받고, 어떻게 심성이 성숙해 가고 하는 성장과정에 대한 관심들을 가지고 기록을 했다. 또 그 사람의 성격이 어떻게 형성이 되었고, 어떤 성격이었는가 또 그 사람의 시대적 상황, 그리고 그 사람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순서 이런 것들에 관심을 많이 나타내고 그것과 연결시켜서 썼다.
그런데 우리 복음서를 보면 그러한 것이 없다. 예수의 성장과정, 예수의 성격 등이 거의 없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약간의 출생기사외에는 예수의 성장과정이 하나도 없다. 우리 복음서는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죽음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첫 복음서라고 보는 마가복음을 '긴 서문이 달린 예수의 수난사이다' 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적어도 막 8:27-31를 분수령으로 해서 그 뒤에서부터 막16장까지는 전부 예수의 수난사이다. 그러니까 절반이 수난사이다. 앞에는 예수의 가르침을 잠깐 잠깐 요약했다. 그런데 벌써 여기서도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서 적대자들과 계속 갈등함으로 이 수난사로 이끌어 간다. 그러니까 마가복음 전체가 예수의 수난에 집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째로, 또 복음서들이 연대에 관심이 많으냐 하면 그렇지 않다. 네 복음서를 비교해보면 사건들 마태는 마가의 순서를 거의 따른다. 그러나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의 하신 가르침의 순서, 사건들이 뒤죽박죽이다.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요한복음을 보면 더 더욱 그렇다. 이런 것이 고대 전기와 다른 점이다. 그러니까 복음이 예수에 대한 전기를 쓰고자 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다.
양식사 비판(form criticism)이란 것이 발달하면서 나온 통찰력중의 하나는 우리 복음서에 있는 한토막 한토막 이야기들 가령 마가복음에 보면 "그리고 나서 --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러서 " 이런 시간과 장소를 알리는 서문으로 시작해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시간과 장소를 알리는 서문은 앞이야기와 뒷이야기를 시간적으로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양식사 비판의 가장 근본된 통찰력 중 하나는, 이 시간과 순서를 알리는 서문은 복음서 저자가 하나의 이야기를 꾸미기 위해서 한 것이라 한다. 원래 이야기는 개별적인 독립적인 토막으로서 그 이야기 하나하나가 독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자이며 구원자임을 알리는 복음 자체라는 것이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한 편의 설교이다. 그 한 편 한 편의 설교는 독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라는 복음을 다 담고 있다.
그렇게 독자적으로 전승된 것을 저자들이 모아서 하나의 연결된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서 시간과 장소라는 틀을 주어서 연결시켰다고 이렇게 양식사 비판가들이 보기 때문에 그들은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이 전기가 될 수 없다고 강조를 했다.
2) 복음이란 장르와 고대 전기와 유사점
그러나 최근에 와서 양식사 비판에 의해서 완화된 견해에 의거해서 고대의 전기와 우리 복음서가 유사성이 전혀 없다고 비유사성만 강조 할 것이 아니라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한다.
또 최근에 와서 고대 헬라의 유명한 극작들 특히 헬라의 비극과 그 형태에서 비교할려는 경우가 많다.
가령 마틴 헹겔같은 사람은 마가복음이 3막이나 5막으로 되어있는 고대 고전적인 극작의 형태와 견주어 볼 만하게 썼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것을 우리가 알고 마가복음을 읽으면 마가복음을 더 잘 이해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드라마와 비교하면 거기도 유사성이 있고, 비유사성이 있고 그런다.
하여간 한면으로는 고대사의 전기와 회고록 또는 드라마와 견줄 수 있으면서도, 완전히 그런 장르로는 분류될 수 없는 독특성 때문에 독자적인 문학형식이 발달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라는 원래의 복음선포(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라는 설교 - 복음선포)의 역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 즉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가르쳤고 어떻게 죽고 부활했기에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고 신앙고백하고 선포하는가에 대한 역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 그 선포된 복음을 illustration하기도 하고, 이 선포에 대한 변증, 이 선포에 대해서 이유를 다는 자들 특히 유대인들, 헬라인들은 예수를 범법자로 보는데 예수가 범법자가 아니고 메시야로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신 분이라고 변증하기도 하고, 또 그리스도인들 이미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났다고 믿게 된 그리스도인 그래서 교회안에 들어온 자들에게 학습용으로 - 예수가 어떻게 가르쳤고, 어떻게 죽고 부활하셔서 우리 믿음이 발생했는가 하는 그 믿음을 확실히 하고, 깊게하고, 또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제자들을 위한 학습용으로 -, 또 간혹 예배에 도움이 되는 이런 여러가지 용도를 위해서 복음서가 eujaggelion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문학 장르가 - 곧 예수의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기록한 문학장르가 - 발달을 한 것이다.
(4) 복음이라는 문학장르속에서 4복음서의 비교
1)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비교
그러면 우리에게 복음서가 정경에 4개가 있다. 그런데 이 복음서들을 보면 처음 3복음서(Synoptic Gospels)는 비슷한 점이 많은데, 요한복음은 비슷한 점이 있지만 상당히 다르다.
가) 비슷한 점
1)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과 제자들 이름도 비슷하다.
2) 크게 이야기 줄거리가 비슷하다. 갈릴리에서 일하고 원수들에 의해서 붙잡히고 산헤드린에서 재판받고 빌라도에 의해서 처형되고 장사되고 부활했다는 줄거리가 비슷하다
3) 예수가 이적을 행한 분이다는 것도 비슷하다. 안식일날 병고친 것, 5000명 먹인 사건, 병자 고치는 이적 등도 비슷하다.
4) 예수께서 주로 비유로 가르친 것이 비슷하다.
죽은 자를 살리신 것도 비슷하다. 나인성 과부를 살린 것, 나사로를 살린 것이 다르다.
나) 다른 점
줄거리가 비슷하다고 했는데 자세히 보면 확실히 다르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주로 유대 땅에서(예루살렘 언저리) 일하고, 공관복음은 갈릴리에서 일하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처음 간다. 제자들을 거느리고 갔는데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입이 떡 벌어진다. " 아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을 보라" 하고 입이 이만큼 벌어진다. 이것이 막13장에 쓰여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몇 번 올라가느냐면 최소한 3번내지 4번 올라간다. 그리고 주로 유대 땅에서 일하시다가 갈릴리에 갔다가 다시 유대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에 와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거기서 원수들과 논쟁하고 하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
또 이적도 다르다. 자세히 보면 다르다. 또 비유도 다르다. 요한복음적인 비유는 공관복음적인 비유와 완전히 다르다. 요한복음에 가령 선한 목자, 포도나무비유, 또 가령 요5장에 나오는데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목수가 그의 아들에게 기술전수하는 식으로 말한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완전히 다르다. 공관복음에서 주로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데 요한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안나온다. 요한복음에는 주로 생명, 영생 이런 말이 나온다.
또 공관복음에는 예수가 자기에 대해서 인자(그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자기 계시를 은근히 간접적으로 한다. 요한복음은 아주 직접적으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고 주장을 한다. 이렇게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이 같으면서도 또 굉장히 다르다.
2) 공관복음 내에서의 비교
가) 비슷한 점
그러나 공관복음내에서는 그런 문제가 없다. 언어나 예수의 사건들이나 아주 비슷하다. 비슷할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을 분석해 보면 마가복음이 거의 다 들어있다.
또 누가복음을 분석해 보면, 마가복음의 percentage로 말하면, 마가복음의 50%이상이 들어있다.
언어도 비슷하다.
또 이야기의 줄거리도 갈릴리에서 가르치고 제자들을 데리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성전에서 소란을 피우고 체포되고 재판받고 십자가에서 죽고하는 것도 아주 비슷하다. 그래서 공관복음이라 한다. 또 이 비슷한 점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미세한 점들과 언어에 까지 똑같은 경우가 많다.
나) 다른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3복음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형태와 언어에서 많이 다르다.
가령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출생기사가 없다. 마태와 누가에는 예수의 출생기사가 있다. 그래서 마가복음과 마태, 누가복음이 한편 다르다. 마태와 누가의 출생기사를 또 상호 비교하면 또 완전히 다르다.
예수의 부활기사도 마찬가지이다. 마가에는 있는둥 마는둥 하지만, 나중에 보겠지만, 마가복음은 16장 8절에서 끝난다. 그래서 짧은 마가 긴 마가 그러는데, 긴 마가에 예수의 부활기사가 간단 간단히 나온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는 길게 나온다. 또 마태와 누가에 나오는 예수의 부활기사를 보면 완전히 다르다. 특히 마태와 누가를 또 상호 비교해 보면, 마가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자료이외에 자기들끼리 공유하는 자료가 있다. 또 마태에만 독특하게 나오는 자료가 있고 누가에만 독특하게 나오는 자료가 있다. 이것이 지금 공관복음서들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다. 이 현상을 간단히 간추려서 말하면 공관복음에서 공통점들과(유사점들과) 상이점들이 있다.
3. 공관복음의 문제(The Synoptic Problem) -김세윤교수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 왜 이 세 복음서가 요한복음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상호공통적이면서 동시에 상이점들이 있느냐? 이것은 다시 말하면 이 세 복음서가 어떻게 쓰여졌느냐, 어떻게 기원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것을 소위 공관복음의 문제(The Sy-noptic Problem)라 한다. 이것은 하나의 신학 전문언어이다.
공관복음의 문제라 하면, 세 복음서들의 공통점들과 상이점들을 염두에 두고, 어떻게 공관복음이 쓰여졌는가 하는 공관복음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는 것을 공관복음의 문제라 한다.
이 공관복음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공관복음의 문제인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난 200년 동안 특히 금세기 초 1930년대까지 신약학자들의 관심이 가장 많이 여기에 집중됐다.
A) 문서비평(Literary Criticism)
그런 작업을 문서비평(Literary Criticism)이라 하기도 하고, 또는 자료비평(Source Criticism)이라 한다. 자료비평(Source Criticism)이란, 공관복음의 자료들을 분석해서 공관복음이 어떻게 쓰여졌기에 이와같이 공통점과 상이점들을 갖게 되었는가, 공관복음이 어떤 상호관계를 갖고 있기에 이와 같이 공통점과 상이점을 갖고 있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설이 엄청나게 많다. 왜 그러냐하면 이들의 공통점과 상이점들을 정확히 비교분석해서 이것이 어떻게 상호관계가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무지무지 어렵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거의 모든 학자가 만족할 만한 설명이 없다. 60년대 70년대 당시 신학과를 대학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운동이 유럽에서 있었는데, 그 이유는 신학이 하나의 Science 이냐(또는 독일 말로 Wissenschaft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현대의미로 Science 또는 독일 말로 Wissenschaft는 자연과학에서 발전된 관찰과 분석과 연역의 논리와 그 증거대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것을 사회과학에 적용을 해서 사회학이니 심리학이니 경제학이니 이런 것도 자연과학적으로 전부 수량화하고 물량화하는 증거를 확보함으로써 학문을 해가는데 그런 criterion에서 볼 때, 신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도 신학을 Science, Wissenschaft라 볼 수 있느냐는 논쟁이 벌어져서 신학은 Science, Wissenschaft 라는 University setting에 있어서는 안되고, 이것은 독자적인 학문이니까 독자적인 지혜책이니까 신학교가 따로 University밖에 있어야 된다 하는 신학과를 대학에서 몰아낼려는 운동이 있었다.
그때 런던 대학의 Cristoper Evance라는 신약학자는 Science 또는 독일 말로 Wissenschaft는 우리 인간의 이성, 분석력, 비판력를 예리하게 하는 것도 하나의 어떤 학문의 한 dicipline의 science됨의 crite-rion이다. 그런 criterion 에 비추어 볼 때 신학은 어떤 학문보다도 더 과학적이다. 왜그러냐면 신학생이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에, 공관복음의 문제 - 세 복음서들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는 - 하나만을 material로 삼아서 연구를 하면 수학이나 물리학, 화학을 4년 배운 것보다 우리 지성, 이성이 더 예리하게 되고 분석능력이 더 뛰어나게 되고 더 논리적이 되고 추리적이 된다. 그래서 이 공관복음의 문제 하나만을 열심히 공부해도 수학을 통해서, 물리학을 통해서, 화학을 통해서 얻는 것 보다 더 많은 분석력, 비판력을 갖게 된다. 그러니까 신학이 다른 학문보다 학문적이다 하는 이런 주장을 했다.
왜 이야기를 길게 하느냐면 공관복음의 문제가 그렇게 어렵다. 여러분이 대학 4년에 배운 수학보다 더 어렵다. 그러니까 수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해도 아직 해결을 못했다. 도날드 거스리 책을 읽으면 이 부분이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지금 두개의 큰 가설이 지배적이다. 하나는 소위 두 문서설(Two documents hypothesis 또는 이것을 4 자료설(Four source theory)라 한다. 영국 사람들은 4자료설, 4문서설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독일 사람들은 두 자료설, 두 문서냅繭遮?말을 많이 쓴다. 그런데 사실 똑같은 것을 말한다.
또 하나는 Griesbach hypothesis라 하는데, 이 두가지설이 학자들 간에 주종을 이룬다. 전자가 다수설이고, 후자가 소수설인데, 후자가 최근에 부활하는 경향이 있는데 절대 소수설이다.
(1) 두 문서설(Two documents hypothesis) 또는 4자료설(Four source theory)
두 문서설은 마가가 제일 먼저 쓰였고, 그 다음 마태와 누가가 쓰였는데, 이 둘다 다 마가의 틀을 빌렸는데, 마태는 완전히 거의 마가의 자료를 가져다 썼고, 누가는 조금 덜 그랬지만 마가의 틀을 거의 다 썼다는 설이다.
마가의 자료를 거의 쓰면서 동시에 그들의 공통자료가 또 있었다. 이것을 Q라고 한다. 그러니까 Q라는 것은 마태와 누가에 있으나 마가에 없는 공통자료이다. 그러니까 마태와 누가에서 마가와 공통되는 것을 다 빼내면, 또 마태와 누가끼리만 공통자료가 있다. 이것을 Q라고 한다. 그래서 공관복음이 근본적으로 두 문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설이다.
그러기에 '공관복음에 이런 공통점들과 상이점들이 있는 것이다' 라고 공관복음의 상호관계를 설명한 것을 두 문서설이라 한다. 공관복음이 원래 두문서 - 마가와 Q - 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태도 마가와 Q로 되어있고, 누가도 마가와 Q로 되어있으니까 두문서 - 마가와 Q - 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마가복음에서 온 자료와 또 하나의 공통자료 Q를 빼고나면, 마태만의 독특한 자료를 M이라고 한다. M은 마태의 특수자료이다. 누가도 마찬가지이다. 마태와의 공통자료를 빼고나면 누가 만의 특수자료가 남는다. 이것을 L이라 한다.
자 그러니 크게 두 문서(마가와 Q) 와 각기 독특한 자료(M, L)가 있었다. 그래서 이 가설을 또한 4자료설이라 한다. 이것(M, L)을 문서라 보면 4문서설이라 한다.
그러니까 이 두 문서설, 4 문서설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무엇인가?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쓰였고, 또 마태와 누가의 또 하나의 공통자료 Q가 있었다는 이 두 전제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이 설은 곧 마가의 우선설 -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쓰였다는 것 - 을 천명한다.
(2) J. Griesbach hypothesis
또 다른 설은 마태복음이 제일 먼저 쓰였다는 마태 우선설이다. 그다음 누가는 마태를 보고 썼고, 제일 나중에 마가복음이 쓰였는데 마가는 마태의 요약이다는 그런 설이다. 마태에서 모든 것이 다 나왔으니까 당연히 공통점이 있다. 아까 마가의 거의 모든 것이 마태에 들어 있다고 했다. 이 설에 의하면 마가는 마태의 요약이기 때문에 그렇다. 누가는 자기의 자료와 마태를 보고 썼기 때문에 마태와 공통자료가 있다. 이 설에 의하면 Q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문서를 가설로 삼을 필요가 없다. 이 설은 Q라는 문서를 부인한다.
왜 이 설들이 나오게 되며 이런 설들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이런 것을 토론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이 들고 범인으로서는 해결 못한다.
첫번째설이 다수설이고, 두번째 설이 요즈음 미국 일부학자들에게서 유행한다.
(3) 문서설과 성경 영감과의 관계
아마 신학을 조금 공부하는 친구들은 마음 속에 두 가지 질문이 있을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됐다는데 이것이 다 무슨 소리인가하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영감설에 대해서 잘 몰라서 하는 소리이다.
우리가 두 문서설을 따른다 했을 때, 성령이 마가를 영감해서 마가복음을 쓰게 했고, 성령이 마태를 영감해서 마가복음을 자료로 쓰고 누가복음의 자료를 쓰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쓰는 과정에 다 성령의 인도로 썼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과정을 통해서 쓴 것이다. 그래서 마태가 마가복음을 보고 배겼다고 해서 영감설이 부인 된 것이 아니다. 성령이 마태로 하여금 마가를 보고, 나중에 보겠지만 마가의 거친 문장을 훨씬 부드럽고 아름답게 쓰게 했다. 그 과정이 전부 인간적인 과정이면서 마태가 한 것이다. 마태가 자료를 모으고 편집하고 고쳐쓰고 다했다. 그런데 결국 누가 마태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영감하시고 인도하셨느냐면 성령이 하셨다. 그래서 문서설을 주장한다 해서 영감설이 부인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 무조건 복음서를 분석하면 전통적인 신학과 어긋나는 줄 알고 겁먹고 어쩔줄 모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신앙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하나님 걱정해 줄 필요가 하나도 없다. 우리가 성경을 걱정해 줄 필요가 하나도 없다.
옛날의 그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이 유명한 말을 했다. 19세기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일어나서 성경의 권위를 짓밟는다 해서 성경의 권위를 방어해야 된다고 하니까, 스펄전이 "성경을 방어하다니, 성경은 사자 같아서 스스로 사자같이 표호하고 크게 외치고 하는 것이 성경인데 감히 인간이 어떻게 성경을 방어해, 그것은 사자를 방어하겠다는 것과 마찬 가지이다"라고 했다.
영감설은 곧 성경이 어떻게 쓰여졌는가를 분석하는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성경은 인간에 의해서 쓰여진 책이다. 성경이 인간에 의해서 인간의 언어로 쓰여진 책인 한, 하나의 역사적인 문서로서 인간의 이성에 의한 분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인간에 의해서만 쓰여진 책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쓰여진 책이라고 믿는다. 그 성령의 인도는 마태가 마가복음을 보고 베껴쓰도록 인도할 수도 있고, 또는 Q라는 자료가 있으면 그것을 보고 쓸 수도 있고, 이런 것이 다 허락된 것이다. 오로지 성령이 하늘에서 불러주고 마태는 타자기 노릇만 했다는 typewriter설(기계적 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마태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마가의 자료도 사용하고, Q라는 자료도 사용하고, M이라는 자료도 사용해서 마태복음을 쓴 것이다. 이렇게 분석할 수 있다. 이처럼 분석해야 마태복음을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여러 다양한 학자중에 이것이 다수의 학자들이 쓰는 의견이다.
둘째 의견은 마태복음 우선설을 주장한다고 그랬다. 그러니까 보수 복음주의 학자들은 무조건 이 설이 더 좋다. 왜냐하면 마태는 12제자중의 하나이니까, 열두 제자가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했으니 그 사람이 증거한 것은 더 신빙성이 있을 것이 아니냐, 그래서 마태복음이 우선하고 마가가 마태를 요약하고, 누가가 마태를 빌려 썼다고 하면, 복음서가 증거하는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할 것이 아니냐 그래서 복음주의 학자들이 이 설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 이것은 아주 원시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냥 복음주의라는 이름아래 신약하기를 무서무서하는 사람들의 원시적인 태도에서 하는 소리이다. 그러니까 신약의 기초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에 마태가 썼다는 말이 있는가, 없는가? 제일 앞에 Kata Maqataion(마태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나중에 붙인 것이다. 마태복음, 마가복음내에 마태나 마가가 썼다는 말이 있는가? 그러면 어째서 이것을 마태, 마가가 썼다고 주장하는가? 그것은 2C에 그리스도인 파피아스라는 사람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파피아스(Papias)는 증거하기를,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설교를 그의 통역관이었던 요한 마가가 적은 것이다" 라고 증거한다. 마태복음은 마태가 히브리말로 쓴 것이다 라고 증거한다. 그 증거에 의해서 두번째 복음은 마가가 쓴 것이고, 첫번째 복음은 마태가 쓴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비판적인 학자들은 첫번째 복음이 예수의 제자 마태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것을 부인한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마태복음을 자세히 분석하면 파피아스 증언이 옳다고 본다. 그래서 나도 마태가 썼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적으로 파피아스 증언에 의거한다.
파피아스 증언에 의하면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설교이다. 그래서 설령 마태복음이 마태에 의해서 쓰였다 한들, 어느 것이 더 사도적인가? 둘다 다 사도적이다. 마태와 베드로를 골라 잡아야 한다는 이런 식의 원시적인 사고방식으로 어느 것이 더 좋냐, 복음주의 신학에 더 유리하냐 등의 식으로 원시적으로 생각한다면 베드로를 골라잡을까, 마태를 골라 잡을까 하는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베드로를 골라잡을 것이다. 이것은 다 필요 없는 설이다.
4) 공관복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두 가지 설 전제의 필요성
공관복음서들 간에 공통점들을 다 놓고 보았을 때, 오로지 그것만으로 이 설이 가장 설득력있게 공관복음의 상호관계를 다 설명하느냐, 아니면 이 설이 설명하느냐, 오직 그것만으로 이 설을 추종할 것인가, 저 설을 추종할 것인가를 결정해야지, 이 설을 추구하는 것이 복음서의 권위와 신빙성을 더 높이느냐, 아니면 이 설을 해야 더 높이느냐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신학을 꽤 많이 했다는 친구들도 아주 원시적으로 생각을 해서 그런 관점으로 이런 것을 많이 하는데, 처음에 이야기한데로 이런 것을 토론하면 안 된다 하는 사람들은 성경 연구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둘째로, 어떤 사람들은 " 가급적이면 마태복음을 골라 잡자, 왜냐하면 열두제자중에 하나인 마태가 했으니까" 그러는데, 이런 사람은 무엇을 모르냐면, 파피아스 증언에 의하면 마가복음은 열두 제자중 우두머리 베드로의 증언이다. 그보다 더 훌륭한 증거가 없다. 그래서 둘 다 다 좋다. 마태복음을 골라잡으나 마가복음을 골라잡으나 걱정을 말아야 한다. 성경을 연구하는데 너무 걱정을 하면 아무 것도 못한다. 우리의 신앙이 불트만이 몇마디 했다고 무너질 것인가? 그렇게 약한 신앙을 가져서 뭐해요? 천지를 지으시고 역사를 다스리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뭐 물리학을 전공해서 조금 알았다는 사람이 하나님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어지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두 문서설을 주장하는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나는 두 문서설을 따른다. 왜 그러느냐면 공관복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완전한 설명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복음서를 연구할려면 복음서의 상호관계가 어떤 것이라는 하나의 가설을 가지고 있어야 복음서를 연구할 수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redaction criticism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마가가 제일 먼저 쓰였다고 가정한다면, 마가와 마태가 똑같은 예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데 마태가 마가의 것을 조금 고쳐썼다.
또 우리가 여기서 Griesbach Hypothesis를 따르기로 하면 마태의 원래 말을 마가가 고쳐 쓴 것이다. 그러나 두 문서설을 따르기로 하면 마가의 원래 말을 마태가 고쳐 쓴 것이다. 왜 고쳐썼느냐? 그것은 자기의 신학을 더 잘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예수에 대해서 더 잘 증거하기 위해서 고쳐 쓴 것이다. 그런 것들을 쭉 관찰해 가면, 마태의 하나의 신학적 경향이 나타난다. 또는 마가의 신학적 경향이 나타난다. 그래서 이것은 마가의 신학이고, 저것은 마태의 신학이다고 말한다. 이 소리는 이것은 마가의 설교이고, 이것은 마태의 설교이다는 말이다. 우리가 똑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대해서 설교할 때, 똑같은 text로 둘이 설교하면, 똑같은 진리를 선포하는데 그 설교가 똑 같은가? 조금 다르다. 그 다른 것은 어느 하나가 틀리고, 어느 하나가 맞아서 다른 것이 아니고 서로 보완되는 것이다. 서로 자기의 관점에서 특별히 더 똑똑히 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의미를 더 부각시키는 것이다. 우리 복음서들은 다 그런 것이다. 어느 하나가 더 옳고, 어느 하나가 덜 옳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마가의 설교, 마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누가의 증거 이것이 서로 어느 것이 더 좋고 어느 것이 더 나쁜 것이 아니고, 서로 자기들의 신학적인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더 환히 드러내 보이므로 상호 보완적이다.
그러면 마가의 설교의 특징을 알려면 Griesbach Hypothesis는 마태를 요약했는데, 어떻게 요약했느냐를 쭉 보면 마가의 특징이 나올 것이고, 반면에 두 문서설을 따른다면 마가를 마태가 어떻게 변형하고 고쳐쓰고 문서를 달리하고 하는 것을 쭉 관찰해보면 마태의 특징이 나올 것이다. 이런 것을 해야 복음서가 왜 4개가 있느냐 하는 것을, 또 왜 4개를 하나님께서 신약성경의 canon으로 허락하셨느냐 하는 그 의도를 알게 된다.
그럴려면 우리가 그 결정을 해야 된다. Griesbach Hypothesis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두 문서설을 따를 것인가를 결정을 해야한다. 그런데 둘다 다 완전히 설득력있는 설명은 아니다. 둘다 다 문제가 조금씩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각 학자마다 대개는 어느 것이 더 만족스럽고 문제가 적다고 잠정적으로 결정을 해야 한다. 그래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이른바 working hypothesis를 가지고 출발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복음주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두 문서설을 working hypothesis로 쓴다. 완전한 해결책이라서가 아니고, 지금까지 인간이 발견한 해결책 중에서는 가장 문제가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Griesbach Hypothesis가 부활하는 경향이 있고, 일부 복음주의 학자들도 그 설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여러분들도 그 설을 따라도 좋고 두문서설을 따라도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보통 두 문서설을 따른다.
가) 두 문서설을 지지하는 이유
그러면 두 문서설이 다수의 의견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쓰였다고 주장하는 이유, 마가의 우선설을 뒷받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마가복음에는 661절이 있다. 그 중에 601절이 마태와 누가에 있다. 마태는 마가의 90%을 담고 있고, 누가는 50%이상을 담고 있다. 마가의 88단락(pericopae units)중에 마태나 누가에 없는 것은 3-4개 밖에 안 된다. 이 소리는 마가의 모든 자료가 마태나 누가에 다 있다는 말이다.
2) Outline과 순서가 같다. 여기서 참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마태와 누가가 주로 마가의 순서를 따르는데, 마태가 마가의 순서를 따르지 않을 때는 누가가 마가의 순서와 일치한다. 반면에 누가가 마가의 순서를 벗어날 때는 마태가 마가의 순서와 일치한다. 그래서 마가의 순서가 원래 순서이고 마태와 누가가 기본적으로 마가의 순서를 따르다가 가끔 자기들의 특수자료들을 집어넣기 위해서 가끔 이탈하는구나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3) 언어의 공통점을 볼 수 있다.
마태는 마가의 언어를 51%을 그대로 인용을 하고, 가끔 마가의 복잡한 언어를 요약하거나 마가의 거친 스타일을 향상한다. 누가도 마찬가지이다. 누가도 약 50%정도의 마가의 언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4) 또 비슷한 이야기로 마태, 마가, 누가의 언어와 스타일을 비교해 보면 항상 마가의 거친 언어 또는 문법이 마태, 누가에서 향상되어 있다. 그것은 마가의 우선설을 시사한다. 원래 마태에 잘 쓰여져 있는 문장을 마가가 우스꽝스럽게 고쳐 썼다고 보기는 힘들다. 거칠게 쓴 것을 나중에 마태가 누가가 향상해서 썼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순리적이다.
5)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복음서에 다같이 나온 자료들을 분석해 보면, 마가에 대항해서 마태와 누가가 서로 상호일치하는 것은 6%밖에 안된다. 마태, 마가, 누가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자료 중에, 마태의 자료가 마가의 자료와 약간 다를 때는 누가의 자료가 마가와 일치한다. 순서도 그런다고 그랬는데, 언어에서도 그렇다. 마찬가지로 역으로 누가가 마가와 조금 다를 때에는, 마태가 마가와 일치한다. 반면에 마가에 대항해서 누가와 마태가 일치하는 것은 6%밖에 안된다. 이것도 마가가 기본이고 마태가 마가를 가끔씩 고쳐쓰고, 누가는 그 때 마가의 언어를 그대로 쓰고, 역으로 성립하기도 하고 그런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마가가 제일 먼저 쓰여진 것이고, 마태와 누가는 마가를 보고 썼다고 주장을 하는데, 또 이 주장에 대한 문제가 몇 개 있다.
나) 두 문서설을 반대하는 이유
지금까지는 마가의 우선설을 주장하는 이유였는데, 이제는 이것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막6:45-8:26까지가 누가에서 빠졌다. 만약에 누가가 마가를 보고 썼다면, 왜 유독 이 부분에서 이렇게 많은 자료를 뺏을 것인가? 이것은 무엇을 시사하느냐면 누가가 마가를 보고 쓰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면 앞에서 누가가 마가를 본 것 같은 여러 이유가 있었지요. 이것과 이 반대이유를 종합해서 어떤 사람들은 누가가 본 마가복음판은 그 부분이 없었다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2) Miner agreement 라고 하는데, 이 말은 마태가 마가와 다를 때는, 누가가 마가와 같고, 누가가 마가와 다를 때는, 마태가 누가와 같다고 그랬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마가에 대항해서 누가와 마태가 일치할 때가 6%정도 된다고 했다. 이 6%를 가만히 살펴보면 참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아주 예리한 점에서 일치한다. 아주 소소한 점(Miner agreement)에서 마태와 누가가 마가에 대항해서 교묘히 일치할 때가 있다. 한 예만 들어 보겠다. 이것은 Synopsis을 보고하면 쉽게 알 수 있다.
공관복음을 자세히 연구할려면 4복음서를 한눈에 보게한 synopsis를 보면 된다. 3종류가 있는데 Kurt-Aland가 편집한 것이 제일 많이 쓰인다. 또 1981년에 새로 나온 synopsis가 많이 쓰인다. 이 synopsis들은 공관복음의 문제, 이른바 두 문서설 또는 4문서설 즉 마가복음 우선설을 전제하고 그 마가복음 우선설이 잘 눈에 띄게 배열했다.
또한 이것에 반기를 들고 나중에 소개할 마태복음 우선설을 중심으로한 synopsis가 또 하나 있다.
제일 편리하게 배열한 것이 Kurt-Aland의 synopsis이다. 나중에 복음서들을 많이 연구할려면 이런 것을 가지고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 예를들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심하면 마태, 누가, 마가복음의 병행구절을 배열해 놓았다. 그래서 아주 편리하게 연구할 수 있다. 한 눈에 3판을 비교할 수 있는데, 가끔씩 중간에 띄어져 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이만큼 다른 판에 없다는 뜻이다. 이 synopsis가 영어로 된 것도 있다.
그러면 Minor agreement 의 예로 막1:41를 보자.
문둥병자를 고친 사건인데 세 판이 거의 비슷한데 마가판이 조금 길고 마태는 많이 요약을 한다. 누가도 일부 요약을 한다. 그런데 보다시피 교묘하게 마태와 누가가 소소한 점에서 일치한다. 어떤 점에서 일치하느냐면 막1:41에 splagcnisqei"(동정심을 가졌다)는 말을 마태와 누가에서는 생략한다. 그 다음 손을 뻗었다를 마가복음에서는 ceira autou hJyato 라 하는데 마태, 누가복음에서는 hJyato autou 라고 하므로 autou를 뒤에 붙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래서 두가지 점에서 마태와 누가가 마가에 대항해서 소소한 점에서 일치한다. 또 마가는 kai legei autw/ 이라고 하는데, 마태와 누가는 autou legwn으로 일치한다. 이런 것을 소위 Minor agreement라고 한다. 마태와 누가가 소소한 점에서 마가에 대항해서 교묘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자료가 많지는 않는데 몇 개 있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또 하나의 예는 막9:14-29까지 예가 나온다. 이것이 마가복음 우선설을 좀 어렵게 만드는 현상이다.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쓰였고 마태와 누가가 독립적으로 마가복음을 베껴 썼다면, 어떻게 기묘하게 소소한 점에서 일치하는가? 마태와 누가가 서로 보고 썼는가? 이렇게 일치하는 것이 많지는 않으나 우연히 일치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Griesbach Hypothesis - 마태복음 우선설 - 을 주장하는 W. Farmer 라는 사람은 Minor agreement 현상을 하나의 논거로 삼아서 마태복음 우선설을 주장한다. 마태복음 우선설은 누가가 마태를 보고 베끼고, 마가는 마태의 요약이라고 한다. 그래서 마가는 제일 늦게 쓰였다고 주장한다. 누가가 마태를 보고 썼기 때문에 위의 Minor agreement의 부분이 일치할 수 있는 것이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다. 그러니까 뜻이 일치한다거나 이런 것은 요약하면 일치할 수 있는데, 이렇게 소소한 점에서 일치하는 것은 아주 기묘한 현상이다. 그래서 Farmer는 마가의 우선설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마가가 우선하면 그리고 마태와 누가가 독립적으로 마가를 보고 베겼다면 어떻게 이렇게 소소한 점에서 기묘하게 일치하는가? 이것은 마가복음 우선설에 문제를 제기하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의 우선설을 주축으로 하는 두 문서설, 또는 네 자료설이 문제가 하나도 없는 공관복음의 상호관계를 완전히 문제없이 설명하는 그런 설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문제가 적게 있는 설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어야 공관복음을 연구할 수 있다면 공관복음을 연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냥 이 설을 공관복음의 working hypothesis로 따른다.
그러면 지난번에 마가복음이 세 복음서 중에 먼저 쓰인 것 같다는 긍정적인 이유를 대고, 또 거기에 대한 두 가지 문제를(반론을) 제시했다. 하나는 왜 누가가 마가복음의 중간 부분을 일체 생략해 버렸는가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Minor agreement이다.
다) Q가설을 성립시키는 이유
왜 학자들이 Q라는 자료가 있었다고 보는가?
1) 마가에 없는 자료로서 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가 꽤 많다. 약 200절이 있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만의 공통자료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어떤 것은 거의 똑 같다. 어구까지 똑같다. 그 예로 마3:7-10와 눅3:7-9까지 읽어보자. synopsis를 보면 마가에는 없다. 마태와 누가만의 공통자료이다. 그런데 똑같이 쓰여 있다. 이런 경우는 거의 똑같다. 처음 부분만 약간 다르다.
이것은 이 둘이 어떤 공통 자료를 보고 썼는데 그 자료가 구전된 것이라면 내용은 같을지 모르나 어법이 틀릴 수도 있는데, 아마 쓰여진 자료를 보고 썼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공관복음의 현상이 이렇게만 되면 간단한데 또 정반대의 현상이 많다. 아주 서로 다른 것이 있다. 내용은 비슷하나 문구상 서로 다르기도 하고 내용도 조금 다르기도 하다.
주께서 가르쳐준 기도가 대표적인데, 마6:9-15까지 보고, 눅11:2-4까지 읽어보라. 마태판과 누가판을 보면 끝부분의 기도가 누가판에는 없다. '악인으로부터 구해주시요' 하는 것도 누가판에는 없다. 마태판의 주기도와 누가판의 주기도가 조금 다르다. 적어도 두 기도문이 없다. 이것은 곧 마태와 누가만의 거의 200절에 해당하는 공통자료중에 일부는 문구가 거의 똑 같다는 것은 이들의 공통자료가 따로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로 그 공통자료가 쓰여진 자료였을 것이라는 것이고, 또 이제 상당히 다르는데 그 공통자료가 원래 누가적인 것이였으면 마태가 거기다가 두 개를 끼워 넣을리는 없다.
반면에 그 공통자료가 원래 마가복음판에 나온 것과 똑같았으면 누가가 그 중요한 두 기도를 빼버렸을리 없다. 이것은 Q도 서로 다른 판이 있었나 보다 하고 상상할 수 있다. Q자료도 마태가 쓰던 판이 하나 있었고 누가가 쓰던 판이 있었나 보다 하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마태는 헬라어판을 쓴 모양이고, 누가는 마태판 보다 조금 오래된 아람어판을 쓴 모양이다' 하는 이론을 제기한다(M. Black의 주장이다). 즉 공통자료도 서로 다른 판이 있었는데 마태와 누가가 서로 다른 판을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Q가 두 판이 있었는데 이 두 판이 어떤 때는 서로 일치하고, 어떤 때는 서로 다르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마태는 헬라어판을 쓰고, 누가는 그보다 조금 오래된 아람어판을 써서 아마 서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현상이 나타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Q라는 자료가 있었다고 가정하는 두번째 이유는, 이 200절에 해당하는 공통자료의 순서가 대강 비슷하다. 또 많이 뒤집어 지기도 했다. 순서가 서로 안 맞기도 한다. 대강 순서가 비슷하다는 것은 공통자료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냥 굴러 다니는 예수의 말씀들을 마태와 누가가 그냥 자기들의 복음서의 저술에 가져다 썼는데 교묘히 순서가 대강 일치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우연이다. 따라서 공통자료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우선설을 주장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마태는 마가의 순서를 대개 따르고 누가도 그렇다. 그런데 마태가 마가의 순서를 벗어나면 누가가 마가와 일치하고, 누가가 마가의 순서를 벗어나면 마태가 마가와 일치한다. 그러니까 대개 마태 누가가 순서를 같이 가는데 마태가 따로가면 마가와 누가가 연합을 하고, 누가가 따로 가기로 하면 마태와 마가가 연합을 한다. 그러면 여기서 마가가 원래의 순서라고 보는 것이 마가 우선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Q도 마찬가지이다. 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가 대개 순서가 비슷하다. 이것은 우연히 떠돌아 다니는 독립된 자료들을 마태와 누가가 우연히 썼는데 대개 순서가 비슷하다고 이렇게 말하기 힘들다. 그래서 아마 공통자료가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가끔 마태와 누가가 순서가 뒤틀릴 때가 있다. 그 때는 누가 더 오래냐? 이 때도 Q의 서로 다른 판이 있었는데, 가령 헬라어판이 있고 아람어 판이 있었는데, 이 판의 배열도 조금 달라서 그러는가 보다 하는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복음서 저자들의(마태와 누가의) 강조점과 신학적인 견해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갖는다고 보는데, 이 때 편집의 두드러진 경향은 누가는 자기의 자료를 순서에 있어서 상당히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누가는 자기의 특수자료를 쓸 때 마가나 Q와 섞여서 쓰는 것이 아니고 마가를 쭉 다르다가 자기의 특수자료를 block으로 넣고, 또 Q을 쭉 따르다가 자기의 특수자료를 block으로 넣고 그렇게 한다. 마태는 조금 섞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런 점에서 누가가 좀 보수적인 편집자라고 그런다. 그래서 Q의 원래 순서는 누가가 더 잘 보존하고 있다고 본다.
3) Q가 존재했다고 보는 세번째 이유는, K mel은 결정적인 증거라고 주장하는 이중 전승(doublet : 똑같은 이야기가 한번은 마가판에 나오고 한 번은 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에 나오고 하는 경우인데 예로 마16:27, 막8:38, 눅9:26 와, 마10:32,33, 눅12:8,9(내용이 비슷하다)을 볼 수 있다.
전자는 마태, 마가, 누가에 다 있는 판이고, 후자는 마태와 누가에만 있다. 이것을 이중전승(doublet)이라 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왜 이런 현상이 있다고 보는가? 이 가르침은 전자는 원래 마가에도 있었고 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는 Q에서 오고 하나는 마가에서 온 것이다 라는 것이다. 이런 예가 더러 있다. 또 하나의 예로 마13:12, 막4:25, 눅8:18 이와 비슷한 말이 또 마25:29, 눅19:26에도 나온다. 또 마16:24,25, 막8:34,35, 눅9:23,24 이것이 또 마태와 누가만의 공통자료에도 또 나온다. 마10:38ff , 눅14:27, 17:33등등.
이렇게 하나는 마가복음에 있는 판에도 나오고, 하나는 마태와 누가에만 나오는 판으로 본다. 마태와 누가의 입장에서 보면, 만약에 이들이 마가복음을 보고 썼다면, 마가복음에 비슷한 말이 있으니까 이것과 비슷한 떠돌아 다니는 예수의 말이 있다면 그것을 그냥 생략해 버리든가, 아니면 거기서 마가복음에 없는 부분을 약간 여기다 보충해서 쓰던가 하는 것이 보통 편집자가 하는 일인데 그렇지 않고, 비슷한 말을 또 기록하는 것은 이것은 이미 형태를 갖추어서 모아져 있는 자료에 있는 중요한 말이기 때문에 마가에서 한번 썼으면서 또 한번 썼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바로 이 doublet현상은 Q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들을 들어서 Q라는 자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Q라는 자료가 구전된 자료가 아니고 문서로 이미 쓰여졌을 것이다. 대개 순서가 정해져 있고 마태, 누가가 어구까지 들어 맞는 경우가 있다고 했는데 이런 것은 구전된 상태에서 힘들다. 그래서 문서로 쓰였을 것이다고 본다. 어떤 사람들은 문서로 쓰였기 보다는 구전된 상태일 것이다고 한다. 이들은 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가 틀린 것이 많은 것을 보고 이와같이 구전된 상태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왜 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에 Q라는 symbol을 주었냐면, Q라는 말이 독일말 Qualle(= Source, Spring)의 머리글자이다. 그래서 Q라고 한다.
Q가 문제가 있는데 지금까지 이야기가 3가지 이유를 보면 Q가 존재했던 것 같은데 이것이 문제가 상당히 많다.
라) Q가설을 성립시킬 수 없는 이유
1) 내용상 수난사는 없고 예수의 말씀들만 모았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내용상 Q에는 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가 200절 쯤 된다고 했는데, 이 절을 다 분석해 보면, Guthrie책에 Q의 내용이 나오는데 한번 살펴 보아라. Q는 대개 예수의 말씀들만 모은 것이다. 그래서 Q를 가끔 Logia 모음이라 한다. 영어로 Sayings(말씀들의 모음)이라 한다. 예수의 행적, 예수의 역사에 대한 기술은 하나도 없다. 특히 예수의 수난사가 전혀 없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예고도 없다. 예수가 체포되고, 재판 받고, 죽고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 예수의 말씀들만 모은 것이다.
다음의 문제는 당시 고대에 한 선생의 말씀들만 모은 예가 있느냐? 당시 문서의 장르(Gattung)에 지혜로운 스승의 말씀들만 모은 예가 있느냐? 예수 당시 유대인들간에, 헬라인들 간에 그런 경우가 있느냐? 지금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kerygma - 예수에 대한 선포 -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것이 구원의 사건이라는 복음인데 - 고전15: 1-5에 보면 이것이 복음인데 - 그런데 이 복음과 관계없이 예수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이라 해석하고 선포하는 것과 관계없이, 예수의 말만 모은 일이 초대교회에서 상상이 가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당시 유대 사회나 헬라사회에 지혜로운 자, 현인들의 가르침만을 이렇게 모은 예가 있느냐를 살핀다. 가령 이집트 나일강변에서 나온 영지주의 문서들 중에 도마의 복음이란 것이 있다. 신약외경인데 이것이 그런 점에서 조금 비슷하다. 예수의 수난이 없고 주로 예수의 가르침을 모아 놓은 것이다. 또 유대 랍비 운동의 초창기에 쓰여진 랍비들의 책중에 하나인 Kirche Abot라는 책이 있는데, 이런 책들도 랍비들의 가르침만을 모아놓은 것이 있고, 또 헬라인들도 지혜로운 자들의 가르침만을 모아 놓은 예가 있다.
그래서 가령 J. Robinson같은 사람은 말하기를 이런 예를 들면서 초대 교회에서도 예수를 지혜의 선생으로 보고, 또는 종말의 선지자로 보고 그의 지헤로운 말씀들, 또는 그의 종말에 관한 예언들만을 모아서 이렇게 하나의 자료를 만든 것을 상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아직도 논쟁이 있다.
그래서 Q의 중요한 문제의 하나가 수난사도 없고 예수의 말씀들만 모았다는 독특성을 보았을 때, 초대교회의 어떠한 삶의 정황, 소위 Sitz im Leben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이 말씀들의 모음이 효용이 있었는가? 이것을 설득력있게 설명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설이 구구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Q를 마가복음의 라이벌로 보기도 한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구속의 사건으로 선포하는 케리그마이다. Q는 그것이 없다.
그래서 마가식과 바울식의 기독교에 대항해서, Q의 예수운동, 즉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강조되지 않고 예수를 다만 지혜의 선생으로, 종말의 선지자로 보고 그가 미래 올 인자로 기다리는 공동체에서 그동안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한 사람들이 Q를 모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Q공동체는 마가, 바울같은 기독론 구원론을 배격한 전혀 다른 종교를 나타낸다. 그래서 Q기독론은 마가, 바울식의 기독론과 다르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아니고 Q라는 것은 말씀들의 모음으로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구원의 사건으로서 선포하는 교회가 구체적인 교회 생활에서 어떻게 올바로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교회생활의 교본으로 메뉴얼로 예수의 가르침들 만을 모은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된다면 마가, 바울의 케리그마와 Q의 말씀들의 모음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된다.
마가, 바울식의 케리그마를 선포해서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서 교회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이 어떻게 교회생활을 하고 어떻게 선교하느냐 하는 것을 가르치는 가르침의 교본으로 (케리그마, 디다케에 해당함) 예수의 말씀들을 특별히 모았다. 따라서 이 케리그마를 전제하기 때문에 이 예수의 말씀들에 수난사는 넣지 않았다.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겠다.
그래서 Q에서 주로 가르치는 것은 이방선교의 중요성도 있고, 종말에 대한 기다림의 중요성, 또 유대인들이 교회를 공격하는데 대한 변증, 이런 것을 위해서 그런데 쓸 유용할 자료가 Q이다. 하여간 초대교회의 삶의 정황에서 Q와 같은 이런 자료들의 모음의 예가 있느냐? 그런 문체적 예가 있느냐? 또 초대교회의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그런 것을 만들었을까? 이런 것에 대해서 방금 이야기한대로 구구한 설들이 있는데 이런 것이 좀 더 확실하게 증명되기까지는 Q를 확실히 있었던 자료로 의심의 여지 없이 보기가 어럽다.
2) 또 하나의 문제는 Q는 마가에 있지 않는 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인데, 그럼 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들에 Q라는 자료가 다 나타나느냐? Q라는 자료가 있는데 마태는 이 만큼만 쓰기로 하고, 누가는 이만큼만 쓰기로 한 것이냐? 그리고 자료의 순서에 있어서도 불분명하고, 이처럼 Q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제일 불분명한 문제가 수난사가 없는 것이다. 왜 이처럼 중요한 자료가 없어졌는가? Q라는 것은 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에서 가정을 한다. 그래서 진짜 있었다면 그 자료가 예수의 말씀들의 모음인데, 왜 그 자료가 사라져 버렸느냐? 교회에서 굉장히 아꼈을 것 아닌가? 무슨 이름을 붙였는가? 하여간 원래 모아진 자료가 문서로 있어서 마태와 누가가 썼다면 그 자료가 왜 없어지는가? 바로 그 점도 Q를 확실히 받아드리기 어려운 점이다.
그래서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앞부분에서는 Q를 가정하는데 도움이 되는 증거들이 3-4개 됐는데, 지금 이제는 Q라는 자료를 가정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증거됐다. 따라서 Q는 기껏해야 가설에 불과하다는 가정이다. 공관복음의 상호간에 공통점들과 상이점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이것을 가정하면 설명이 용이하다는 그런 정도이다.
그러면 이제 Q가 문서였느냐? 구전 상태였느냐? 이런 것은 가설에 가설을 더 쌓아 올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점점 불분명해진다. 그래서 Q의 기독론, 구원론이 정말 있었느냐? 그것이 정말 마가, 바울의 케리그마를 보완하는 것이냐, 그것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이냐? 그래서 전혀 다른 기독교를 나타내는 것이냐? 그래서 Tot 같은 친구는 Q의 기독론은 마가의 기독론과 완전히 상충된다고 본다. 다른 기독교를 대표한다고 본다. 이런 것들이 많아 토론되는 문제이다. 이런 것들은 신학자들이 실업자가 되지 말도록하기 위해서 존재한지도 모른다. 그런 문제가 해결되면 신학자들 다 실업자 되라고---
Q를 자세히 보면 재미 있는 점도 많이 있다. Q가 예수의 가르침이라 했는데 거기에 보면 이른바 예수의 지혜의 말씀들이 있다. 마11장에 나오는 그런 말씀들이 Q에 나오고, 미래에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들도 Q에 나오고, 이방인 선교의 중요성 같은 것도 Q에 나온다. H. Sch mann이라는 통독의 유명한 가톨릭 신학자는 누가복음을 많이 연구한 사람이다. 이 사람의 책을 읽으면 놀라운 방법론들을 알 수 있다. 얼마나 철저하게 자세히 누가복음을 토론하는가 아주 모범이되는 사람이다. 이 사람에 의하면 Form Criticism을 볼 때, 양식사가들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 후 초대교회가 성립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생활에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교회에서 discipline은 어떻게 하느냐? 이방인들에게 선교는 어떻게 하느냐, 교회가 성전에 세를 계속내야 하느냐, 교회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느냐, 이런 문제들이 발생했지, 그때 누가 그러면 권위있는 가르침을 내리느냐? 이 때 초대교회 선지자들이 부활해서 영으로 역사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초대교회가 처한 Sitz im Leben에서 나오는 문제, needs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선포해서 말을 많이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역사적인 예수가 가르친 진짜 예수의 가르침과, 초대교회 선지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영으로 역사하신 영감으로 선언한 자기들의 상황에 필요한 말과 나중에는 다 섞여서 오늘 우리의 복음서들의 전승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복음서들의 전승은 역사적인 예수의 말과 부활 후 선지자들을 통해서 한 主 예수 그리스도의 말이 다 같은 예수의 말로 뒤섞여졌다. 다시 말하면 복음서는 전부 역사적 예수가 한 말 같은데, 그 중에 일부는 양식사가들에 의하면 거의 대부분은 사실 예수가 한 말이 아니고 초대교회 선지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이렇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반해서 H. Sch mann과 E. Ellis은 그게 아니고 혹 그런 것도 더러 있지만 예수 당시, 예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 여러 동네로 보내서 복음을 선포하게 했다. 그것은 유대 여러 동네에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여기저기 있었다. 이들을 위해서 역사적인 예수의 말씀들이 벌써 예수 당시에 기록되고 모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지금 한 곳에서만 사역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다른 지방의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예수의 가르침들이 쓰여져서 모아져 가지고 예수의 제자들을 통해서 보내져서 그 가르침을 보고 예수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런 연고로 벌써 예수의 생전에 예수의 말씀들, 예수의 가르침들이 모아졌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Q를 이루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말씀들이 모아진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해서 지상에서 그의 제자들과 같이 있지 않기 때문에 그역사적인 예수의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서 글로 쓰고 모았다고 (시간적인 거리 때문에) 본 것이다.
그런데 H. Sch mann과 E. Ellis의 이론에 의하면, 예수의 생전에 지리적인 거리 때문에 예수 운동하면 예수 제자하면 꼭 12제자만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수 제자들은 굉장히 많았다. 그런데 그 중에 대표로 새 하나님의 백성의 기둥들로서 옛 하나님의 백성들의 12지파에 상징적으로 상응하는 12을 대표해서 세웠다는 것이지 12제자만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제자가 굉장히 많았다.
그래서 하도 많으니까 유대 지도자들이나 유대 총독이 예수 운동에 위협을 느껴서 예수를 정치범으로 처형한 것이다. 또 예수 운동은 예수를 따라 다닌 사람만 한 것이 아니라 갈릴리 유대 곳곳에 그의 추종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보낼 때 전대도 갖지 말고 지팡이도 갖지 말고 그냥 맨 몸으로 동네에 가서 평화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들을 영접하는 자 집에서 유하며 그들의 음식을 대접받고 그 다음 동네에 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믿음만 가지고 선교하러 나가면 하나님께서 다 공급해 준다.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는데 그점도 없지 않아 있는데 이 가르침의 전제가 되는 것은 이 동네마다 예수의 추종자들이 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가 가서 복음을 선포하면 그들이 예수의 제자들의 support group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영접해서 밥먹여주고 그 지역에서 복음선포할 때 까지 유하게 하고 그런 것이다. 예수께서 그런 당시 팔레스타인에 널리 흩어졌던 자기의 지원자들 그룹을 많이 이용한 것이다. 그런 것을 잘 밝힌 책이 G. Lohfink(튀빙겐 대학의 가톨릭 신학자)의 '예수께서 어떤 교회를 세우실려고 했나' 의 책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
그러면 Q에 대해서 그 정도로 생각하자. 하나의 가설로 생각하자. Q라는 자료가 있었던 것 같다.
공관복음 문제에 있어서 두 문서설은 공관복음이 근본적으로 두 문서로 구성이 되어있다고 본다. 즉 마태도 마가의 뼈대에다가 Q라는 가르침의 자료를 덧붙여서 마태의 근간을 이루고 누가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공관복음의 근간이다. 그런데 마태를 또 분석해 보면 마태만의 특수자료(M)가 있다. 아까 이야기 했던 것 처럼 Q의 범위가 어느정도인지를 우리가 몰라서 M도 Q의 일부였는지 잘 모른다. 또 누가도 누가만의 특수 자료(L)가 있는데 그것도 Q의 일부였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우선 Q를 우리는 마태와 누가만의 공통자료라고 정의하므로 할 수 없이 이런 소리를 한다. 그래서 두 문서설, 네 자료설이 대개 공관복음의 생성을 설명하는 다수설이다.
마) Griesbach의 이론 - 마태복음 우선설
그런데 마가의 우선설이라든지 Q가정에 대해서 설득이 안된 사람들은 가령 A. Farrer(옥스포드대 교수), W. Farmor(달라스신학교 교수)같은 사람들은 이설에 설득이 안되서 Griesbach의 이론을 부활시키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마태가 제일 먼저 쓰이고 누가는 마태를 베껴썼고, 물론 자기의 특수자료를 넣고 다음에 제일 마지막으로 마가가 마태를 요약하고 누가도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Q라는 자료를 가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Q의 공통점은 누가가 마태를 보고 썼으니까 생기게 된다.
그러면 마가는 왜 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가 안나오는가? 마가는 예수의 수난사 중심으로 쓰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생락해 버렸다고 생각 할 수 있다. 이것이 Griesbach의 이론이다.
이것이 최근에 부활하는 경향이 있다. 이 설이 옳다면 마태복음이 제일 먼저 생긴 것이다. 그러나 두 문서설이나 Griesbach 설이나 어느 것이 더 보수신학에 유리하느냐? 그런 것이 없다. 둘다 다 유리하다. 일부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Griesbach의 이론이 더 유리하다고 하는데, 마태복음이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마태가 썼다고 하니까 복음의 신빙성이 더 있지 않겠나 하는데, 그런데 그것은 파피아스가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설교라고 하므로 마태보다는 베드로가 조금 낫지 않는가? 그런 식으로 논리해가면 그런데 이런 식의 논리는 그들이 믿는다는 성령의 영감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어떤 이론이 더 우리 복음주의 신학에 유리하느냐 하는 것이 없다. 다 똑 같다. 순전히 공관복음의 현상의 관찰에서 그래도 이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넘어 갈 일이다. 중요하지 않다. 지금까지 한 것을 자료비판(Source Criticism)이라 한다. 이 Source Criticism은 다른 말로 하면 공관복음문제(Synoptic problem)의 해결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공관복음이 어떻게 생성이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자료들을 criticism했다 할 때, 나쁘다고 정죄했다는 말이 아니고 구분했다는 말이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고 그냥 중립적인 자료들을 분석했다는 소리이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공관복음 문제를 토론했다. 거기서 이른바 문서비평 또는 자료비평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공관복음이 어떻게 쓰여졌고, 어떻게 구성이 되었는가를 대충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아마 가장 무난한 견해는 공관복음은 원래 마가복음과 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인, 보통 학자들이 Q라고 기호를 붙이는 그 자료를 근간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대충 하나의 가설로 결론을 내렸다. 그것에 대해서 이제 더 자세히 공부하기로 하면 끝이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어느 가설도 완전히 만족할 수 있는 그런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B)양식비평(Formgeschichte,영어로 Form Criticism)
가) 양식비평 발생의 근거들
금세기 초 쯤에 특히 1910년말부터 1920년쯤에 와서는 이 자료비평, 문서비평이 한계에 도달했다. 그래서 학자들이 이것을 더 연구해 보아도 복음서들이 어떠한 상호관계에 있으며, 어떻게 쓰여졌는가를 자료비평, 문서비평의 방법으로서는 더이상 규명할 수 없다는 점에 도달 했는데, 그 때 마침 새로운 복음서 연구방법이 개발되어서 적용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을 독일사람들이 먼저 개척을 했다.
그 개척자들의 이름들은, 주로 많이 언급되는 사람들은 K.L.Sch-midt, M. Dibelius, R. Bultmann 이다. 이런 사람들이 보통 개척자로 꼽히는데, 사실은 나중에 학자들이 Formgeschichte, 영어로 Form Criticism이라 하고 이름 붙이는 이 방법론에 대한 통찰력을 그 전에도 학자들이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의 복음서 연구의 방법론으로 개척한 사람들은 사실은 M. Dibelius, R. Bultmann 이 두사람 이라 할 수 있다.
K.L.Schmidt는 복음서 특히 마가복음의 이야기들의 이음새를 연구했다. 마가복음을 펴서 2:1부터 누가 한번 읽어 보라. 거기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갔다. 그리고 또 집안에 들어가 계시는데 사람들이 많이 몰려왔다. 그 다음에 2:13, 또 2:15을 보라. 이런 식으로 각 이야기 하나하나가 정소와 시간을 알리는 첫 문장으로 시작이 된다.
K.L.Schmidt가 자세히 장소와 시간을 알리는 첫 문장과 그다음 이야기의 장소와 시간을 알리는 그 다음 이야기의 첫문장, 이와같이 단위 이야기들을 연결시킨 그 이음새를 연구해 보았더니, 그게 요즈음 역사
적으로 정확한 사건의 전후관계를 말하는 이음새라기 보다는 마가, 마태, 누가라는 복음서 저자들이 인위적으로 나중에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전부 이어가지고 정연한 이야기들을 만들기 위해서 덧붙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결론은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 누가복음은 어느 하나도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을 역사적으로, 순서적으로 기록했다기 보다는 다른 criterion에 의해서 이 복음서의 저자들이 예수의 이야기들을 이와같은 장소와 시간을 알리는 서문을 달므로 자의적으로 이어갔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원래 복음서의 하나하나의 단위 이야기들은 원래 서로 이어져서 전승 된게 아니고 원래 독립된 이야기들로 서로 독립된 이야기들의 단위로 전승되었다. 이것을 우리 복음서의 저자들이 모아가지고 예수에 대한, 예수의 삶과 사역, 가르침에 대한 하나의 전반적인 이야기로 꾸미기 위해서 이음새를 만들어서 장소와 시간 앞뒤 관계를 알리는 이음새를 만들어서 서로 연결시켜 놓았다고 본 것이다.
사실 여러분들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이 세복음서를 이렇게 대조해서 비교해 보면, 이른바 두문서설에 큰 주장되는 근거중의 하나가 마태와 누가가 대개 마가의 순서를 따른다고 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대개 마가복음의 순서를 따르는데 간혹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면, 마태복음이 마가의 순서를 따르지 않을 때, 누가가 마가의 순서를 따른다. 그 반면에 누가가 마가의 순서를 벗어날 때는 마태가 마가의 순서를 따른다. 이것은 무슨 의미이냐면 마태와 누가가 대개는 마가의 순서를 따르나 가끔씩 마가의 순서를 벗어난다. 거꾸로 하기도 한다. 이런 것은 결국 무엇을 가르치는가?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역사적으로 순서적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역사적 순서, 그 발생 순서적으로 기록이 되었다기 보다는 원래 떠돌아 다니던 예수의 가르침의 전승, 예수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른 이유들로 편집됐음, 모아져 있음 그리고 배열되었음 이런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가령 마가복음을 보기로 하면 마가복음 1:16부터 예수께서 가르치고 이적을 행하는 이야기가 쭉 나온다. 그 다음에 2장 1절부터
3장 끝까지 예수와 예수의 적대자들 간에 논쟁이 나온다. 논쟁들의 이야기가 쭉 모아졌다. 거기의 중간에 가면, 또 예수의 논쟁 이야기들이 쭉 모아졌다. 7장에 예수와 바리새인들, 서기관들과 논쟁하는 이야기들, 11:27부터 12장 끝까지 또 예수의 논쟁하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많이 모아졌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을 보아도 논쟁설화, 논쟁이야기들이 한 곳에 모아졌고, 또 예수께서 이적 베푼 이야기들 이것들이 또 한 곳으로 모아졌다. 이것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논쟁이 한꺼번에 모아져서 일어났고, 또 예수께서 이적을 한꺼번에 모아서 행했고, 이런 것보다는 예수는 가끔 논쟁도 하시고 이적을 베풀기도 하고, 또 이적을 베풀기도 하고 그 이적에 근거해서 논쟁도 벌어지고 그랬는데, 마가가 편집의 구조상 이야기들을 역사적인 발전의 순서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그 편집의 구조상 이야기들을 모았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K.L.Schmidt는 원래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서로 독립된 이야기들로 기록된 것이고 그것에 시간적인, 장소적인 틀(framework)인 이음새들은 2차적으로 붙인 것이다고 한다. 즉 복음서의 저자들이 떠돌아 다니는 독립된 이야기들을 모아서 복음서를 쓸 때에 2차적으로 붙인 것이라고 보았다. 이게 여기에 상당한 통찰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H.Dodd라는 학자는 이 framework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역사성이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한다. 특히 고린도 전서 15장 3절에서 5절이나 또는 사도행전 전반부에 요약된 사도들의 복음선포의 요약들에서 초대교회의 kerygma를 - 초대교회의 복음선포의 형식의 틀을 - 재구성 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가령 구약의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는 종말의 시작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세례와 하나님 나라 선포의 운동으로 시작이 된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부활하였다. 그 분의 이름으로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 그 분이 재림함으로 우리 구원이 완성된다는 이런 내용으로 초대교회의 선포가 이루어졌는데 바로 이러한 내용의 틀을 마가가 감안해서 이 복음서를 쓴 것이다라고 C.H.Dodd라는 학자는 말한다.
이런 복음선포 - 초대교회의 kerygma - 를 역사적으로 illustra-tion하기 위해서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 관한 전승들을 이음절을 가지고 이어 놓은 것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가복음의 framework이 전적으로 역사성이 없는게 아니고 상당히 역사성을 둔 것이다는 그런 주장을 하기도 하고 그런다.
그래서 아마 K.L. Schmidt나 C.H.Dodd 둘다 다 통찰력을 보인다고 보아야 된다. 마태와 누가가 마가를 보고 썼다면 적어도 마가복음의 이야기 순서가 예수가 실제로 가르치고, 이적을 베풀고, 논쟁하고 이렇게 한 역사적인 순서 그대로 일 것으로 보았는데 그것 보다는, 크게는 그럴찌 모르나, 자세한 이야기의 앞 뒤 순서에 있어서는 그런 것이 아니고, 떠돌아 다니는 원래 독립된 이야기들이 마가에 의해서 2차적으로 만들어진 이음새에 의해서 서로 이어짐으로 이 틀을 갖게 되었다고 보게 된다.
나) 양식비평의 복음서 연구 방법
그러면 이제 복음서 연구의 대상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전체로 각 이야기들을 마가가 편집하기 전의 독립된 상태에서 어떻게 그것이 전승이 되었으며,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었으며, 초대교회의 어떤 상황에서 그 이야기가 전승이 되었는가,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이 변화게 될 것이다. 각각 이야기를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보고 그 독립된 각 이야기가 어떠한 상황속에서 발생하였으며, 어떠한 상황속에서 전승이 되었고, 어떠한 상황속에서 마가복음에 있는 지금 현재의 그 틀(framework)속에 들어가게 됐는가? 이렇게 이제 연구가 변하게 되었다.
그래서 19C에 이런 사람들이 민속자료 - 민속이야기들, 그러니까 교육받은 문필가, 문학자들이 쓴 문학작품이 아니고, 교육받은 문학작가가 창작한 그런 문학작품이 아니고 민속이야기로 전래되는 이야기들, 민속동화라느니, 민속 무슨 신화라나느니 이런 옛날 이야기 - 들이 어떻게 발생을 하고 어떻게 전승이 되는가, 전승이 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점점 더 발달하는가, 또 그런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전승된 공동체에서 어떠한 사회학적 기능을 하게 되는가? 이런 것에 대한 연구가 19C에 발달해 가지고 하나의 민속문학에 대
한 이론의 틀이 잡히게 되는데, 이 사람들은 바로 우리 복음서의 자료들을 헬라고전적인 문학작품이라기 보다는 이런 민속이야기와 비슷한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에 대한 이야기들이 민속문학과 같이 발전을 하고 전승되고, 또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이 민속문학과 같은 기능을 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다) 편집비평의 몇가지 통찰력
그래서 이 편집비평은 이른바 제 3단계의 Sitz im Leben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한다.
1) 첫째 단계의 상황은 예수의 상황(Sitz im Leben)을 알 수 있다. 이 복음서의 자료들의 예수의 상황(Sitz im Leben)을 알게 한다. 양식비평을 하면 원래 예수께서 어떠한 상황(Sitz im Leben)속에서, 그 상황의 어떠한 문제와 need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했나, 이 가르침을 했나, 이 치유 이적 이야기가 발생했나, 그리고 교회가 어떻게 그것을 전승했나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첫 상황이 예수의 상황(Sitz im Leben)인데, 그 첫 예수의 상황(Sitz im Leben)을 알 수 있다.
2) 둘째 단계의 상황은 교회의 상황(Sitz im Leben)을 알 수 있다. 이 예수의 이야기를 초대교회에서의 어떤 Sitz im Leben, 초대교회에 복음서 자료들이 구전되는 당시에 이 예수의 이야기가 자기들의 어떤 상황에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계속 설교되어서 전승되었는가 하는 교회의 상황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양식사 비판을 하면 이 두 상황을 알 수 있다.
지난 번에 이야기 한대로 양식비판은 많은 제한점이 있고 문제점이 있는데, 그런 것들 극복하고 양식비판은 적용할 만한 자료가 한 두가지 있다고 그랬다. 모든 자료에 다 적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야기가 진짜 예수의 말씀이면 그것이 어느 상황에서 예수께서 무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말을 했느냐 하는 예수의 상황을 알게 한다. 예수가 많은 가르침을 했을 것이고, 많은 행적을 했을 터인데, 왜 이야기들만을 초대교회가 전승을 했나, 구전을 했나? 자기들의 삶의 자리에 그 이야기들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용을 했기 때문에, 기능을 했기 때문에, 예수의 그 이야기들만을 계속 설교하고, 설교한다는 것은 전승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을 누가 모았는가? 복음서 저자들이 전부 모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모을 때, 왜 이런 순서로 모았나? 그리고 왜 이런 편집을 했나? 왜 그랬을까요? 신학적인 강조, 관점, 의도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왜 그런 신학적인 관점, 의도를 나타내야 되는가? 자기 상황에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답으로 편집비평에 있어서는 복음서 저자들이 복음서를 저술할 때의 교회의 상황, 교회의 Sitz im Leben을 우리가 알도록 한다.
그래서 양식비평, 편집비평을 우리 복음서에 적용을 하면 무엇을 재구성할 수 있는가? 초대교회의 Sitz im Leben을 구성할 수 있다. 그들의 Sitz im Leben을 재구성하면, 우리들은 어떻게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했는가, 어떻게 그들이 신학화(神學化)해 갔는가? 어떻게 그들의 신앙고백이 전개되었는가? 신학이 전개되었는가 하는 이런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삶에서 우리 기독교 신앙의 생성과 전개과정에 대해서 아주 생생한 그림을 갖게 된다.
지금 마태, 마가, 누가가 받은 전승에 편집을 했다. 편집을 했다는 것은 어떤 것은 좀 덧붙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좀 생락하기도 하고, 순서를 바꾸기도 하고, 고쳐쓰기도 하고, 이런 편집활동을 했다는 말이다.
가령 막8:14-21, 마16:5-12, 눅12:1에 바리새인들의 누룩에 대해서 조심하라는 예수의 말이 있다. 마태, 마가는 빽빽히 쓰여 있으나 마태는 아주 조그만한 하게 간략하게 대개 생락해 버리고 짤말 짤막하게 써 놓았다. 누가는 더 그렇다. 이렇게 대조해 보면 금방 편집활동을 알 수 있다.
또 수로보니게 여인의 고침 이야기를 보면 마태복음, 마가복음에는 있고, 누가복음에는 없다. 왜 누가는 이 이야기를 생략했겠는가? 가령 이런 것을 보면 금방 우리가 편집활동을 알게 된다.
그러면 여러분들 가운데 문제가 하나 생겼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감히 마구 편집을 하고, 고쳐 쓰고, 순서를 바꾸고 했을까? 지난번에 했지만 양식비평을 하면서, 우리 복음서에 이 이야기들을 역사적으로 발생한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 아니라고 배웠다. 크게 보면 역사적으로 발생한 순서대로 되어있다. 아주 철저한 양식사 비평가들은 물론 그것을 부인하지만, 가령 C.H. Dodd가 보여 줄려고 했듯이, 크게 보면 마가복음이 예수의 역사적인 활동의 순서를 대개 우리에게 보여준다. 특히 수난사는 더 그렇다. 이것은 원래부터 연결된 이야기로 전승된 것이다. 그래서 크게 보면 대개 이 역사적인 순서로 배열되어 있으나, 그 안에서는 가령 갈릴리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기술할 때에 모든 것이 꼭 일어난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일어난 순서대로 적어졌다면 문제가 하나 발생하는데, 세 복음서의 순서가 다르다는 것이다. 어느 순서가 더 역사적인 순서인가, 누가 이것을 바꾸어 놓았는가 하는 문제에 부딛친다.
이런 것을 볼 때 복음서 저자들이 순서를 바꾸고 할 때에, 그런 순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순서를 자기들이 배열할 때는 자기들의 신학적인 강조점을 더 확실히 나타내기 위해서 순서를 배열했다.
출처: 예장 서울노회 원문보기 글쓴이: 다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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