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 박사

[스크랩] 제4장 누가복음 서론 - 김세윤교수

에반젤(복음) 2021. 4. 27. 07:27

제 4 장 누가복음 서론 - 김세윤교수

 

 

1. 누가복음의 특징

 

(1) 헬라적인 성격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두 volume으로 되어 있는 한 book이다. 이 책은 제1권인 누가복음에서도 그렇고 제2권인 사도행전에서도 그러는데, 데오빌로 각하에게 헌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즉 헌정하는 문장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벌써 상당히 헬라적인 문장형식을 따르고 있다. 데오빌로가 누구냐? 실제로 살았느냐? 아니면 그냥 문체를 위해서 지어낸 가공 인물이냐? 즉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자 하는 독자를 지금 가상하고, 그 독자를 그냥 문체식으로 데오빌로라고 불러준 것이냐? 아니면 가이사 궁전에 진짜 높은 고관이었느냐? 해석이 구구하다. 하여간 1,2권으로 되어 있는 책의 양쪽에 이런 헌정서문을 단 것은 아주 헬라적인 문장양식을 따르고 있다. 벌써 헬라적인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2) 변증적인 성격

 

이 책들 1,2권에서 줄 곧 흐르는 주제 하나가, 예수가 로마법에 의거해 볼 때 무죄이며, 기독교 운동이 로마법 질서에 위협을 준다든가 위배되는게 아니고, 의롭고 무죄의 운동임을 밝히려는 정치적 변증의 의도가 상당히 강하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있어서 예수의 재판과 수난사에서 정치적 변증의 의도가 상당히 강하다. 누가복음에 있어서 예수의 재판과 수난사에서, 빌라도는 자꾸 예수를 내 줄려고 하는데, 유대인들이 자꾸 예수와 예수의 무리들을 핍박하고 송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예수의 재판과 수난의 책임을 로마인들에 대해서는 면케하고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지우는 경향이 상당히 강하다.

사도행전도 마찬가지로 로마관리들, 가령 고린도의 아주 공평한 관리 갈리오가 바울의 선교 message을 들었을 때, 이게 로마제국에 무슨 혁명이론을 도입한 것도 아니고, 가이사에 대한 반기를 든 것도 아니고 해서 바울을 무죄 석방하고 바울의 선교가 잘 진행되도록 했는데, 유대인들이 자꾸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자꾸 로마법에 저촉된다고 송사를 한다. 그런데 실제로 로마관원들이 기독교를 조사해 보았을 때, 기독교는 그렇게 로마제국을 뒤집어 엎는 그런 혁명종교가 아닌 것이 드러난다는 식으로, 사도행전, 누가복음에 흐르는 중요한 주제 하나가 예수와 그의 교회 운동이 로마법에 위배되는 운동이 아니고, 로마의 질서에 위협을 가져다 주는 그런 운동이 아니다는 정치적 변증의 의도가 상당히 강하다.

 

(3) 보편주의(universalism)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보편주의(universalism)으로 두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이방인들에 대한 열려진 태도, 가령 눅1:5, 2:1, 3:1-2등의 탄생기사부터 로마 역사에 연관시켜서 서술한다. 2:32에 예수가 이방인들에 대한 빛이다. 3;6에도 이사야40장이 인용이 되어서 모든 육신들이,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또 예수의 족보 부분에서도, 마태는 아브라함에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누가는 아담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든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태는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에게 거슬러 올라간 반면, 누가는 아담에게 거슬러 올라간다.

또 누가는 엘리야 시대에 엘리야가 이스라엘 사람에게 가서 도움을 얻는게 아니고 페니키아 과부의 도움을 받는 것, 엘리사도 이스라엘인을 돕지 않고 수리아 장군 나아만을 치료하는 사실등을 가령4:25-27등의 예로 들면서, 예수께서 이방인들을 돕는 것을 정당화하고 도리어 유대인들이 믿음이 없는 죄된 것을 말하고 있다.

또 24:47에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선포되어져야 할 것을 명령한다. 그의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령한다. 마태복음28:19-20과 마찬가지로 특별히 사마리아 여인들에 대한 그의 온후한 태도가 누가복음에 아주톡특하게 나타나고, 또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들을 굉장히 환영했다. 그래서 예수의 유명한 비유에 있어서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형식적이고 위선하는 유대인들과 대조되어 있고, 예수께서 병고친 열 문둥병자 중에서도 예수께 돌아와서 감사할 줄 아는 진정한 신앙있는 사람은 사마리아인이다(17:11-19).

또 야고보와 요한이 사마리아인들에게 하늘에서 심판의 불을 내려서 다 싹쓸이 해버리라고 할 때도 예수께서 호되게 꾸짖는 것을 볼 수 있다(9:51-56).

이렇게 누가복음에 이방인들에 대한 아주 열려진 태도 사마리아인에 대한 아주 온유한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반 이상이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를 하나의 영웅적인 주제로 삼아서 전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모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도록 하는 것을 그리고 있다.

 

2) 가난한 자들을, 억눌린 자들, 병자들, 여자들, 세리들 이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 이게 누가복음에 아주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이다.

복음서들이 다 예수의 가난한 자들, 죄인들, 세리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 다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이 주제가 누가복음에서 제일 강하게 나타난다. 가령 눅7:36, 50-56절 같은 데를 보면, 그 부도덕한 여자가 예수의 발을 씻기는 장면도 나오고, 19:1-10까지에 세리 삭개오 이야기, 23:31-43에 죄인 둘이 예수와 함께 못박히는데 그 중 하나가 회개하는 장면,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 그래서 이 탕자의 회개를 높이고 회개할 줄 모르는 그 형을 대조하는 것, 또 그 유명한 바리새인과 죄인의 기도(18:9-14), 또 Magnificat(1:46-55, 마리아의 노래)가 아주 혁명적이다. 하나님께서 비천한 자들을 높이고 그 높은 자들을 높은 위치에서 굴러 떨어지게 한다. 가난한자들에게,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채우시고 부자들을 빈 손으로 내쫓아 내신다(1:52-53). 또 누가복음판 산상수훈 그러니까 누가복음의 평지설교에 있어서 팔복가운데,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할 때에, 누가는 그 '심령이' 라는 말을 빼 버린다. 사실은 누가가 원래 예수의 말을 기록한 것이고, 마태가 '심령이'를 덧붙인 것인데, 그것은 '가난한 자'란 말이 구약의 시편과 선지자들로부터 오는 이중적인 의미 때문에 그렇다.

원래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해서 살려고 하는 자들이다. 이 세상에서 남을 속이고, 남을 착취하고 하는 자들이 아니라 선하고 의롭게 살려고 하는 자들이란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남의 것을 막 뺏고 도둑질하고 이렇게 해야 부자가 되는 세상에서 대개 물질적으로 가난하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가난한 자'란 말은 일차적으로 신학적인 숙어로서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게 살려고 하는 자들이다. 그들 중에 부자도 가끔 있다. 그러나 대개 물질적으로도 가난한 자들이다.

마태는 예수의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은, 그 때 '가난'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언약에 충실하게 살려고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예수께서 복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마태는 혹시 그것이 너무 물질적으로만 가난하다고 애기할까 봐 '심령이'라고 해석하는 말을 덧붙였다고 본다. 누가는 그럴 필요가없어서 그냥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한다.

또 마태복음 5:6에 '의에 굶주린 자가 복이 있다'고 그런다. 그런데 눅6:21에 '의를 위하여'를 빼버리고, '굶주린 자가 복이 있다'고 한다. 또 마태복음에서는 가난한 자와 굶주린 자에게만 복을 선언한다. 누가복음에는 가난한 자들과 굶주린 자에게 복을 선포함과 동시에 부자들과 배부른 자들에게 하나님의 화를 선언하는 장면이 있다.

 

이렇게 누가복음에 있어서 특별히 가난한 자들, 억눌린 자들, 세리들, 죄인들, 여자들에 대한 높임이 많다. 누가복음에 여자들이 참 많이 나온다.

예수의 탄생기사에도 마태복음과 비교해보면, 마태복음에는 겨우 마리아의 역활만 나타는데, 누가복음에는 마리아 뿐만 아니라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자벳, 또 안나도 아주 중요하게 나오고, 7장에 나인성의 과부 이야기, 8:1-3에 예수를 돕는 여자들의 이야기, 7:36-50에 나오는 예수의 발을 씻는 여자의 이야기, 23:27-31에 나오는 예루살렘에 대해서 우는 여자들, 23:49에 나오는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힘을 먼 발취에서 애통해 하는 여자들, 남자들은 다 도망가버리고 여자들만 남아 있다. 또 예수의 무덤에 제일 먼저 간 여자들, 여자들이 훨씬 더 충실한 예수의 추종자들이다. 그래서 이 여자들에 대한 강조가 많다.

 

반면에 마가복음에는 특별히 연약 자들 약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강조가 강하다. 그러니까 한국의 민중신학의 큰 역설이 하나 있다. 민중신학은 마가복음만 옳은 복음이라고 한다. 여러분들 민중신학을 잘 읽어보아라. 안병무 교수책 읽어보아라. 거기보면 마가복음만 옳은 복음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 왜곡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 친구들이(민중신학자들이) 책을 잘못 읽은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일부러 말을 하는 것이다. 마가복음만 옳은 복음이고, 나머지는 다 기득권의 세력의 입장에 서서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과 예수의 운동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신학의 가갸 몇 자만 공부한 사람도, 또 여러분들처럼 겨우 개론만 공부해도, 4복음서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동정심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게 누가복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민중신학자 같은 훌륭한 신학자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다. 꼭 우리 노동부 관리들하고 똑같다.

 

이 노동부 관리들은 다 코가 막혀가지고 다 냄새를 못맡는다. 여러분들 저기 구리시 지나 가지고 춘천을 가든지, 양평을 가든지 할 때에, 어느 지점에 오면 엄청난 구린내가 나는 데가 있다. 그 곳이 원진 레이온인데, 그 곳에서 지난 10여년간 사람들이 죽어 간 것이다. 하반신이 마비되고 -- . 내가 아세아 연합신학대학에서 가르칠 때에, 거기를 일주일에 몇 번씩 지나 다닐 때마다 거기만 오면 냄새가 진동한다. 그런데 우리 노동부 나리들만 냄새를 못맡아 온 거야. 지금까지 코가 다 막힌 것이지. 그 놈들은 거기 사람들이 다 죽어가는데, 항상 직업병 OK판정을 내리다. 이런 죽일 놈들이 세상에 어디 있어? 가난한 사람들 다 죽으란 말이야. 도대체 노동부가 누구를 위해서 있는 거야. 그러니 다 죽일 놈들이지. 누가복음도 공부 안한 놈들이야. 그러니 코가 다 메워가지고 --. 그것이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거기를 멀리 지나가도 냄새가 나는데, 거기서 날마다 일하는 사람들 생각해 봐? 안죽어 다죽지, 신경이 마비되고 말이야. 이 놈들은 완전히 살인자들이라고, 살인자들, 살인정권이야.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그런 자들에게 뭐라고 저주하지, "화가 있을찐저"한다. 그런데 화는 안 당하고 잘만 먹고 살더라고. 그래서 3공도 해먹고, 4공도 해먹고, 5공도 해먹고, 6공까지도 해먹고, 이제는 7공까지 해먹겠다고 저러는 거 아냐.

 

누가복음에는 이 부자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비판이 있다. 누가복음에는 그래서 예수의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선포한다는, 나사렛 회당에서의 메시야 취임연설만 보아도 누가복음에만 기록이 되어 있다(4:16). 그러니까 민중신학자들이 그 말은 열심히 인용하면서도, 누가는 틀렸고 마가만 옳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그들이 하는게 뭔지 모르겠다.

누가복음에 가난한 자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과 부자들에 대한 그 만큼의 경고가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만 바보부자의 비유가 있는데, 부자가 곡간에 양곡을 잘 쌓아놓았으니, 내 영혼아 편히 쉬어라 한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불러갔다. 이것이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도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또 여러분이 잔치를 베풀 때에, 친구들이나 부자들을 초대하지 말고, 가난한 자들, 절음발이들, 소경들을 초대하라고 한다(14:2).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욕을 한다.

 

질문: 가난한 자와 부자의 적용에 대한 기준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

답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가난한 자의 태도를 간단히 정리해보자.

다음과 같은 글로 정리할 수 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현대 이데올로기적 구분에 의해서 하나의 proletaria 또는 민중으로 보려는 시도들이 있는데 이게 이른바 해방신학이다. 그러면 복음서에 있어서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에 대한 태도 또는 부에 대한 태도를 한 번 정리해

보자.

첫째로, 예수는 가난한 자들과 억눌린 자들에게 심지어 편파적이라고 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 사랑을 보였다. 누가복음에 잘 나타나 있는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을 선포하고 부자들에게 화를 선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부유하고 권세있는 자들을 신랄히 비판했다(눅6:24-26, 13:31ff, 16:17ff, 마 6:24, 10:25, 막 12:38-40, 11:15 등).

부에 대해서, 그 우상성에 대해서 엄중히 경고했다. 누구도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으며, 부와 부의 우상성에 대해 엄중히 경고 했다. 또 반면에 예수는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부자들을 환영하고 사랑했다( 눅7:36ff , 8:3, 19:1, 막14:12ff, 15:43)

두번째로, 심지어 민중신학자들이 그들의 신학의 기본으로 삼는 마가복음에서도 예수가 부자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돕고(5:21-43),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번째로, 예수의 운동을 무산계급의 운동으로 보려는 사람들은 예수가 겨우 하나의 목수였기에 가난한 노동자 또는 민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목수는 기술자로서 갈릴리의 중산층에 속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에서 나왔다. 구태여 우리가 사회 계급적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 자신도 중산층에 속했지만 그의 가까운 제자들도 대개 비슷한 중산층에서 뽑았다. 그래서 세베대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은 바로 중소기업 가정출신이었다. 어떻게 아는가? 배도 있었고 일군들도 고용하는 집안의 출신이다. 베드로도 집을 소유하였으며(막6:29ff), 레위는 돈 걱정을 하지 않았을 세리였다.

네번째로, 당시 갈릴리의 큰 문제가 한국의 부동산 투기문제와 비슷한, 또는 일제 때와 비슷한 부재지주 문제였다. 갈릴리의 많은 땅들이 헬라인들과 결탁한, 로마인들과 결탁한 도시의 일부 지배층의 소유로 전락한다. 거기서도 빚을 못갚으면 농노로 전락하였다. 갈릴리에 부재지주의 수탈이 심했다. 소작농, 농노에 대한 수탈이 심했다. 이런 수탈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은 기술을 가진 경우이다. 예수가 손재주을 가진 목수였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수탈의 system 에서 빠져 나온 중산층에 속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지난 번에 어느 학년에 이 말을 했더니, 요새 목수일급이 일당이 7만원이라는 것이다. 교수보다 벌이가 낫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백 번 나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요? 목수가 저기 뙈약 빛 밑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얼마나 위험부담을 안고 일해요. 그런 사람들의 월급이 백번 더 나아야지, 교수보다 더 많이 받아야지,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들 교수는 자기하고 싶은 일을 하니 얼마나 좋아, 그런 사람들은 월급을 더 작게 받고, 이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 목수들은 훨씬 더 많이 받아야지. 그런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다.

하여간 여기서 목수들은 중산층이 아니라 고소득층이 되길 바란다. 그러면 경제질서가 다 망가지고 어쩐다 하는데. 뭐 요새 기업가들 한국백성들 노임이 올라가지고 국제 경쟁력이 다 떨어져서 수출이 안되어서 우리는 다 죽는다고 날마다 엄살만 죽어라고 피우는데, 한국노동자들 노임올라가서 뭐해. 노임 올라보았자, 1년내내 전세값 올라가는 것 감당못한다. 그러니 노임 올라가 보았자 뭐해, 이 부동산 투기 먼저 잡고, 주택문제 해결하고 해야한다.

그 다음에 노임이 너무 비싸다. 노임을 절대 가격으로 비교하자면,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제일 비싼 모양이야. 우리보다 두 배 세 배 잘 사는 싱가폴이나 홍콩이나 대만 노임보다, 한국노임이 비싼 모양이에요. 비싸서 뭐해, 아무리 비싸 보았자, 집한칸 마련 못하는데. 그러니까 이 정부가 틀려 먹었지. 그러니까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고 다들 잠 편안히 잘 수 있는 상황에서, 노임이 너무 비싸면 찐짜 경쟁력이 약해져 가지고 수출이 안되면 다 죽으니 노임을 올리지 말자, 이렇게 해야지. 농수산은 어디다가 무엇을 했기에 수서비리의 뭐, 정경유착해 가지고 대기업이 땅투기만 열심히 하도록 하지. 그래서 부동산 투기가 5공때 보다 6공에 훨씬 더 심각한 것이다. 이렇게 해 놓고는 공공요금을 10% 다 올려놓고는 그냥 노임만 한자리 수로 하자 이게 말이 되나. 또 말 안들으면 잡아다 집어 넣고--. 어제도 한사람 죽었더구만, 한사람 한사람 다 죽어가는데, 자기들은 냄새 못 맡았다고 그런다. 코가 메이고, 귀가 먹고, 눈먼 놈들만 거기 않아 있는 모양이다. 전부 뭘하는지 모르겠다. 눈 뜨고 뭘 볼 줄 아는지 아니면 귀가 진짜 열려 가지고 뭘 들을 줄 아는지, 꼭 아부만 듣는 귀만 있는 모양이다. 다른 냄새는 전혀 못맡고 돈 냄새만 맡는 모양이야.

그런데 객관적으로 보자. 예수와 제자들의 성향을 요새말로 하면 목수였기 때문에 한국의 전통적으로 하층이다. 그러니까 예수도 하층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사실 계층적으로 말하면 중산층 쯤 된다.

네번째로, 예수가 당시 수탈이 심했던 갈릴리의 사회환경을 반영하는 비유를 들면서, 그 불의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주 대표적인 예가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다(막12:1-12). 포도원 농부의 비유가 갈릴리의 부재지주의 현상을 비유의 재료로 삼은 것이다. 여러분들 그 포도원 농부비유 다 알지요. 주인이 포도원의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었다. 그게 갈릴리에서 상당한 수탈의 제도였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사회비판은 하지 않고, 예수께서는 그 비유에서 소작농들이 주인에게 세금을 안바쳤다는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한 비유로 삼았다. 수탈이 심한 갈릴리의 부재지주에 대한 제도를 주제로삼으면서, 거기에 내포된 사회부정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하지 않고 있다.

또는 달란트 비유에서 지금까지 자본주의 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이 마치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했었다. 장사 열심히 한 녀석은 칭찬받고, 장사 안한 녀석은 혼나고, 이익을 못남긴 녀석이 혼난거지. 이 장사이익에 담긴 자본주의적 이익남김에 담긴 착취의 원칙, 사회부조리에 대한 원칙은 전혀 비판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자료로 이 비유를 삼으면서, 은사를 잘못 쓴 녀석들은 혼냈다.

또 유산문제로 다투는 형제들에게 심판관(재판관)노릇하기를 거부한다(눅12:13ff). 이런 태도들이 나온다.

그래서 앞의 세 개와 여기 네번째는 정면대립하는 모순된 태도이다. 자,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예수의 부와 가난에 대한, 얼핏 보기에 이러한 모순된 태도는 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에서 나온 것으로서, 실제로는 아주 일관성이 있고 교훈성이 있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리심 만이 절대적인 구원임을 제시하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절대적인 구원임을 제시함에 따라, 부의 우상성을 경고하고 이 세상의 가치들을 과격히 상대화하고 뒤집어 버렸다. 그래서 그는 부를 이미 소유하고 있는 자들의 맘몬(mammon)에 대한 우상숭배를 경고한다.

부자들이 맘몬에 대한 우상숭배를 어떻게 하는가? 자기들의 부에서 자기들의 안전과 행복을 추구하려는 태도, 이게 부를 우상화 한 것이다. 부에서 자기 안전과 행복을 추구하려는 태도, 삶의 의미와 자기안전과 행복을 추구하려는 태도, 이게 돈을 믿는 태도인데, 이것에 대해서 엄중히 경고하고, 그에 따른 가난한 자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행위도 신랄히 비판했다. 부를 우상화시켰을 때, 부에서 삶의 의미와 안전을 찾고 행복을 찾을 때, 부를 더 축적하려고 하므로 자꾸 이웃을 착취할 수 밖에 없고 남을 속이고 도둑질하고 그래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행위를 신랄히 비판 했다.

그러나 맘몬에 대한 가난한 자들의 우상숭배도 권장하지 않았다. 가난한 자들은 맘몬에 대하여 우상숭배를 어떻게 하는가? 부를 추구하여 안전과 행복을 누리면서도, 모든 돈을 벌었으면 내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데, 내 인생의 의미가 성취되었다고 보는데, 내가 돈이 있으면 더 안전하고 행복할텐데 이렇게 하는 것, 그러므로 부를 이미 가진 자들인 부자들에 부에 대한 우상숭배도 신랄히 비판하고 경고했지만,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상숭배도 권장하지 않고, 부자에 대한 한을 붙돋으지도 않았다. 요사이 해방신학에서의 구원은 이 부로 결정이 되는데, 부의 공정한 재분배,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편안히 먹고 살면 그것이 구원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그런 구원을 선포하지 않았다.

그래서 민중신학이 자꾸 한의 개념을 붙돋으는데, 예수는 가난한 자로 하여금 부자에 대한 한을 가지라고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억울함, 질시, 복수성 이런 뭉퉁거리가 한인데, 이런 것들을 붙돋우지 않았다. 예수는 부자나 가난한 자들이나 맘몬에 대한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존하고 순종하여 구원을 얻으려 해야 될 것이며, 이 세상의 가치인 부를 과격히 상대화하여 가난한 자는 부를 못가졌다고 절망할 것이 아니고, 또 그것이 구원의 길이나 되는 양 결사코 얻으려 할 것이 아니고,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며 위로를 받으라고 한다. 왜 그들에게 복이 있는가?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므로 그렇다. 부자도 부란 가치를 과격히 상대화하여 자기의 안전을 도모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게 예수의 부와 가난, 부자와 가난한 자들에게 대한 태도의 요약이다.

요점은 첫째로, 하나님 나라에 비추어서 부의 우상성을 늘 염두에 두고, 우리가 부를 가진 자들이면 부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고, 부에서 안전과 행복을 추구하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 만약 그렇게 되면 바보부자, 부자관원처럼 되어서 하나님 나라를 잃고, 이 썩어지는 부에서 의미를 찾다가 그것과 함께 썩어져 버릴 것이다. 그러지 말고 부를 사랑의 수단으로 쓰라. 우리가 만약 가난하다면 부를 조금 우상화해도 되는게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위로를 받고, 부자에 대한 한을 키우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목사들( 여러분들도 목사될 사람들인데),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회의 부의 공정한 재분배에 관심이 없으라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갖고 예수처럼 부자들에게 자꾸 경고해서 부에 우상숭배를 하지 말고, 부를 자꾸 관대히 나누어 주고, 부정한 방법으로 남 착취해서 돈 별려고 하지 말라고 경고해야 한다.

둘째로, 부를 관대하게 나누어 주어서 이웃을 사랑하는 섬김의 수단으로 쓰라고 이렇게 자꾸 가르쳐야 돼요. 반면에 가난한 자들에게는 민중신학 자꾸해서 혁명일으켜서 부자들에게 한을 가지고 다 뒤집어도 된다 이렇게 가르치지 말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교회가 부의 공정한 재분배와 가난한 자들이 그 인권을 회복하고 자유와 정의를 회복하는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설교를 해야되며, 그 설교는 부의 우상성에 대한 경고를 중심으로 하는 설교를 해서, 부자들로 하여금 이 부를 단지 상대화하므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지 않도록, 그리고 공정하게 재분배하도록 권면해야 된다. 그러나 우리가 가난한 자들의 부에 우상화를 동조해서는 안된다 그런 말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아주 일관성이 있다. 얼핏보면 모순이 있는 것 같으나 아주 일관성이 있으며 이것 만이 해결책이지 어떤 해결책이 있어요? 자본주의 자들같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벌면 좋다는 부자의 입장에 서가지고는 인류를 파멸로 몰아 넣어요. 공산주의자 같이 그러니까 부자들을 다 때려죽이고 한을 풀어야 된다. 그래서 체제를 뒤집어 엎고 proletaria가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proletaria독재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도 안된다. 그 유명한 proletaria 독재국가가 우리 한반도에 있지 저 북한에 있어요. 김일성과 김정일은 그 유명한 화려한 궁전에 살고, 관원들은 그 화려한 옥류관인가 그런데서 밥먹고, proletaria 그 나라 주인들은 다 가난해서 지금 다 굶어 죽게 생겨가지고, 원수의 나라 남한에서 쌀을 가지고 갈 정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세상사람들이 제시한 경제체제, 사회체제 이데올로기(자본주의, 사회주의든)는 예수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이 인류에 대한 공정한 진정한 정의와 자유가 회복되는 그런 사회, 경제체제를 이루지 못한다. 교회의 할 일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잘 선포해서 부의 우상화를 막으므로 말미암아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4) 기도의 중요성, 기도가 아주 강조된다.

 

1) 누가복음은 누가가 예수를 기도하는 분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아주 중요한 정점에 항상 예수는 기도하는 분으로 그리고 있다. 그의 세례 때도 누가만 예수께서 기도했다고 한다(눅3:21). 무리를 섬긴 뒤에도 기도했다(5:16). 열두 제자를 뽑기 전에도 기도하므로 뽑았다(6:12). 베드로가 가이사 빌립보에서 그에 대한 메시야 고백을 하기 직 전에도 기도했다(9:18). 변화산에서 변화될 때도(9:28-29) 기도하였다.

이렇게 예수는 중요한 시점에 항상 기도하는 분으로 그리고 있다. 70명의 제자들이 그들의 복음선포, 하나님 나라 선포 선교후 돌아올 때도 기도하셨다(10:21). 겟세마네 기도, 십자가상에서 기도(두번이나 하심,23:34-46), 중요한 때마다 기도하는 분으로, 그리고 늘 외딴 곳으로 가서 기도하는 분으로, 기도로 자기 메시야적 과업을 성취해가시는 분으로 그리고 있다.

또 예수가 제자들에게 기도를 열심히 하도록 가르치시는 분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유명한 비유(눅11:5,13, 18:1,8)에서 참을성을 가지고 끈질기게 기도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꼭 주실 것을 믿음으로 기도하도록 가르치신다. 베드로에 대해서 예수께서 자기가 기도했노라고 말씀하신다(22:31-32). 그래서 기도가 아주 중요하다.

 

(5) 또 누가복음에서 강조된 주제가 성령의 역사가 강조되었다.

 

1:15을 보면 세례요한은 그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성령으로 가득찬 것으로,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되었고, 마리아가 엘리자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자벳이 성령으로 가득차서 마리아를 축복한다. 세례요한이 탄생했을 때, 스가랴는 성령으로 가득차서 충만해서 예언을 한다. 또 성령이 시므온에게 이르러서 시므온이 예언을 한다. 이렇게 성령이 강조된다.

또 예수는 세례 때, 성령으로 가득, 충만한 분이고, 성령이 임해서 광야에 나아가서 인도받아서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시고, 시험이 끝나고도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갈릴리로 돌아온다(4:4). 70여명이 돌아왔을 때 예수께서는 성령이 충만해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 그리고 그가 부활후 승천하기 직전에 성령이 충만함을 제자들에게 약속한다(24:49). 특별히 사도행전1:8에, 그러니까 누가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사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전개되는 것이고 인간들의 기도로 그 기도에 응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사를 진전시키는 것이다. 기도와 성령이 같이 가는 주제이다.

그래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전체흐름은, 아주 중요한 under-tone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역사가 어떤 인간들의 반대나 훼방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하게 되있다. 성령의 역사는 장애물을 인간들의 기도로 극복해가면서, 예수의 기도로, 초대교회의 기도로 극복해 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승승장구하게 되어 있다. 거기에 따른 기쁨 이런 것이 누가복음, 사도행전 전체의 밑바닥에 흐르는 조류이다.

 

(6) 누가복음의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구원사적 perspective 이다.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두 부분으로 되어있는 구원의 역사 (구원사)를 쓴 것도 벌써 구원사 perspective를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한다. 특히 예수의 탄생기사에서 잘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사의 중심으로서 그 전에 선지자들의 약속과 예언의 성취이고, 사도들은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된 구원을 선포하고, 온 인류에게 적용해서, 온 인류로 하여금 구원의 덕을 보게하는 시대 이런 perspective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 사도들의 선포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일어난 구원의 선포로 우리가 구원을 즐길 수 있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음, 이런 구원사적 perspective가 강하다.

H. Conzelmann등의 비판적인 학자들은 누가가, 바울이나 요한에게서 볼 수 있는 실존적 구원의 복음을, 이와같은 역사의 평면으로 구원사를 펼칠 것은, 예수의 재림이 임박한 것으로 봤던 초대교회의 신앙이 교회에 예수의 재림이 자꾸 지연되므로 현재 교회시대, 시간의 현재도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이미 계획되었던 중요한 시대이다. 곧 하나님의 구원을 벌써 체험할 수 있는 중요한 시대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재림, 완성될 구원만 바라보고 사는데 이 재림이 자꾸 늦어진다. 그래서 누가가 하나의 신학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구원사적 새로운 해석으로 지금 교회의 현재가 바로 이 구원의 시대이다. 성령에 의해서 그 구원을 우리가 벌써 체험하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그의 재림이 있기는 있는데, 언제든지 그 때만 구원이 이루어진게 아니고, 그 때만 바라보고 살다가 지금 현재가 길어지는 것에 대해서 당황해야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는데, 가장 중요하고 적절한 때에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의 시대이고, 지금 현재도 우리가 구원을 체험하는 시대이다. 이러한 변증을 목적으로 지연된 종말, 지연된 재림에 생기는 교회의 신앙에, 당황, 혼동에 대해서 변증의 목적으로 누가는 이런 구원사적 perspective로 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썼다. 그렇게 비판적인 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래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E. K emann같은 사람들은 누가가 이 가톨릭 교회의 시조라고 말한다. 누가에 있어서 'Early Catholicism(초기 가톨릭교회시대)'를 열어서 복음을 변질시켰다. 원래 예수와 요한과 바울의 실존주의적 복음을 변질시켰다. 구원을 이렇게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객관화,역사화, 제도화했다고 비판했다. 이래 가지고 비판학자들이 지난 50-70년대 초반까지 누가를 하나의 이단자로 몰았었다. 그래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한 20여년간 비판학자들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다. O. Cullmann같은 사람은 누가복음이 이와 같은 구원사적 perspective가 있는 것은 확실한데, 다른 신약의 저자들 보다 더 확실히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람이 보여준 것은 이런 구원사적 이해는, 첫째로 누가에게만 국한되는게 아니고 바울과 요한에게서도 현저하며, 신약의 모든 저자에게서도 현저하므로 이것이야말로 구약전통을 이어나가는 아주 전통적인 perspective이다.

둘째로, 이 사람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이렇게 구원사적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실존적 결단을 하고 그 믿음을 힘입고 지금 현재 하나님과의 관계를 체험하는 것을 배격하는게 아니고, 믿음과 구원이 전혀 객관화되어서 나중에 가톨릭신학이 되어버리는 그런게 아니고, 객관화된 구원사의 틀 속에 얼마든지 그때 그때의 믿음의 결단, 믿음의 순종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구원사적 perspective와 실존적 결단이 상호대치 되지 않는 그것을 열심히 보여주어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너무 비판적인 학자들의 견해가 너무 지나친 것 임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하여간 누가는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과 달리 1,2권으로 되어있는 책을 씀으로써, 신약의 모든 저자들이 다 가지고 있는 구원사적 perspective을 좀 더 확실히 보여주었다.

누가의 구원사적 perspective의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예루살렘의 중요성이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도성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사의 장이며 중심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예루살렘으로부터 구원의 메시지가 온 세상에 널리 퍼진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예루살렘 교회가 또 중심이며 복음서의 기원이다.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성) 즉 그래서 누가복음에 구조를 보아도 이게 잘 나타나 있다.

 

2. 누가복음의 구조 및 특징

 

누가복음은 신약성경에서 제일 긴 책이다.

 

(1) 누가복음의 구조

 

1) 그런데 처음에 서문이 있고 그 다음에 예수의 탄생기사가 나온다.

 

2) 3:1-4:13 예수의 세례 족보 시험이 나온다

 

3) 4:14-9:50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나온다.

 

4) 9:51-19:27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해가는 여행기록으로 되어있다. 이 기간 동안에 예수의 중요한 사역과 비유들이 말해진 것으로 되어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바보부자비유, 탕자의 비유,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러간 비유라든지 중요한 비유가 집중되어 있다.

 

(2) 누가복음의 특징

 

1) 예루살렘에 대한 강조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간다. 왜 예루살렘에서 그의 구원의 사역이 완성이 되어야 하는가? 예루살렘이 구원사역의 중심이기 때문에, 이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죽고 부활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승천하고, 그 후 교회는 바로 예루살렘에서 구성이 되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민족들에게 구원이 선포되도록 되어 있다.

전에 누가복음의 특징이 구원사적 강조, 예루살렘의 중요성이 특징 중에 하나이며, 누가복음이 독특하게 예수의 역사를 세계의 역사 로마사와 비교해서 쓴다고 했다. 누가복음 2:1에 탄생기사를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가 영을 내려서 호적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로마제국을 건설한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가 큐리오스(kurio")다. 이 主(kurio")가 명령을 내려서(가이사 아구스도는 세상의 왕이다), 그 명령을 쫓아서 만삭의 여인이 먼 길을 고향에 가서 등록하는 것으로, 호적하는 걸로 시작한다. 그 호적을 하는 것은 세금, 인두세를 정확히 징집하기 위해서 인데, 이것은 유대가 로마의 직속령으로 다시 귀환이 되었다. 헤롯 왕족을 통한 간접통치에서 이제 로마가 총독을 보내서 직접통치하는 그런 시대이어서,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가 이 식민지 백성들에게 세금을 먹이려 전부 호적하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 28:31에 읽어보면, 사도행전(2부작)은 예수가 '주'라고 담대히 선포함으로, 가이사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므로 2부작이 끝난다. 그래서 가이사의 나라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 세상의 주 가이사 로마황제와 진정한 큐리오스 예수의 대조, 이 중간에 가이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그 가이사의 대표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가이사의 왕권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십자가에 못박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으키심으로 그의 사도들이 가이사의 수도 궁궐 앞에서 가이사가 아니라, 예수가 큐리오스(kurio")라고 외친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의 승리, 예수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으로 2부작이 끝난다. 그래서 누가복음이 아주 재미있는 복음서이다.

 

2) 구원사적 관점(perspective)에서 서술

 

누가는 구원사적 관점(perspective)에서 구약시대를 약속의 기간으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약속의 성취기간으로 보고, 교회시대를 성취된 구원을 선포하고 적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구약시대 예수 그리스도 교회

종말

약속의 기간 약속의 성취 선포 적용

성령의 역사 부활

성령의 시대가 열림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이 이제 사람들에게 실제로 나타나는 그런 기간으로 본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에 특별히 성령의 역사의 기간으로 - 성령은 종말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이다-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취되기 시작했으므로 성령시대가 열린 것으로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기간 동안에 성령의 역사를 굉장히 강조한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들을 쫓고 병자들을 고치고, 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똑같은 일들을 하게 하고, 그래서 이 기간에 예수에게 충만히 있었던 성령의 역사가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제자들에게 퍼부어져서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세계선교를 감당한다. 이렇게 누가는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오순절의 성령 퍼부어짐의 역사를 기록함으로써 교회시대를 연다.

 

3)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강조

 

누가는 사도행전과 누가복음 전체에 걸쳐서 성령의 역사를 굉장히 강조한다. 성령의 역사도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두 단계로 기록한다.

 

ㄱ) 구원의 완성이 시작되는, 구원이 성취되는, 구원의 시대의 시작인 예수 그리스도 공생애 기간동안에는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만히 임재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힘이 나타나게 되고,

 

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후, 교회에 성령이 퍼부어짐이 되어(요엘 2장의 예언대로),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은 종말의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다 - 하나님의 구원의 힘에 의해, 전세계에 구원의 메세지를 선포하고, 구원의 힘을 시위하는 것으로 누가복음은 성령에 대한 강조를 한다. 그것이 누가복음의 특징 중 하나이다.

 

4) 기도에 대한 강조

 

누가복음의 또 하나의 특징이 기도를 굉장히 강조하는 것인데, 그래서 누가복음에만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가르침, 비유들이 나타난다. 이 기도와 성령은 구원사를 진전시키는 힘으로,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성령이 구원사를 진전시키는 힘이고, 기도가 우리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께 구원사의 진전을 요구하는 방도인 것으로 기도를 굉징히 강조한다.

어떤 사람들은 누가의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강조와 기도에 대한 강조가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를 구원사적 관점에서 조금 느슨하게 한 결과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곧 마가복음이나 Q같은 자료에서는 종말이 임박했다. 종말이 올 때, 하나님 나라가 올 때에 이제 구원이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보았다.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imminent parusia), 즉 예수가 곧 재림한다. 그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 그 때에 우리에게 구원이 이루어진다. 임박한 종말이 이루어짐,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파루시아가 지체됨으로, 즉 하나님 나라의 완성, 예수의 재림이 지체됨으로 가령 누가가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자기의 선포와 귀신 쫓아내고 병자고침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것, 곧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atology)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해서, 구원이라는 것이 예수의 재림 때 비로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 때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공생애 기간이 구약시대의 예언의 약속의 성취의 기간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기 시작한 기간이다. 예수의 공생애 기간과 교회의 기간, 이것이 애매한 구원사의 기간이 아니고, 종말 구약시대에서 약속되고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되기 시작한 기간이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가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후 교회에 퍼부어져서, 교회가 그 종말의 힘으로, 성령의 힘으로 이미 실현되기 시작한 구원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종말이 얼마나 연장이 되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종말은 항상 곧 오는 것으로 임박한데, 지금 여기서 벌써 이 기간이 점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실현되는 기간이기 때문에, 현재가 하나님의 구원사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 하나님의 구원이 종말에만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 현재라는 것이 무의미하고 짧아야 한다 - 현재가 하나님의 구원이 점진적으로 실현되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종말이 조금 늦게와도 괜찮다는 말이다.

초대교회에 이러한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임박한 종말이 오지 않음으로 - 소위 그런 것을 delayed parosia(지체된 종말)이라 한다 - 그 지체된 파루시아가 초대교회의 신앙에 위기를 가져왔다.

가령 A. Schweitzer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자기 제자들이 갈릴리 온 동네를 다 돌아다니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리라고 보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자기 생애 동안에 오도록 강요하기 위해서 유대인들과 대결해서 거기서 실패하여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 유대인의 교리에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 하는 물음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대답(랍비들의 정답)은 온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으라고 아무리 외쳐봐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과 마지막 대결을 함으로 그들을 회개케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기 위해 예수가 죽음을 무릅쓰고 대결했는데, 그들은 회개하기는 커넝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편을 들어서 이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A. Schweitzer말로 하면 예수가 그냥 계속 진행되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걸려 그의 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말아버렸다는 것이다.

A. Schweitzer의 예를 드는 이유는 그와 같이 이른바 철저한 종말론학파를 위시해서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초대교회에서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 임박한 종말에 있었다고 본다. 만일 그랬었다면, 종말이 자꾸 지체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옴, 그것과 더불어 있을 구원의 완성의 옴이 자꾸 지체되면, 그들의 신앙에 위기가 있었을텐데, 그래서 거기에 대한 답으로 누가가 ' 아 그런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공생애 기간동안에 구약성경에 약속되고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나기 시작했음, 성취되기 시작했음,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힘인 성령의 역사가 막강했음이다. 교회에 하나님 나라의 힘인 성령이 종말에 퍼부어져서 교회가 말씀을 선포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점점 더 완성되어 종말에 까지 이른다. 그러므로 종말이 조금 지체되어도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누가가 초대교회의 종말론을 수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가 가톨릭 교회의 신학, 즉 종말 전의 현재에 구원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현재의 제도적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의 모습으로 보는 가톨릭 신학의 선구자 노릇을 했다고 한다.

E. K emann같은 사람은 이런 누가의 신학을 Early Catholicism이라 하면서, 누가가 초대교회의 신학을 왜곡했다고 해서 지난 60,70년대에 누가의 신학,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공격의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도 임박한 종말에 대한 경고가 그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누가복음에 이 2가지가 다 있다. 구원사적인 perspective에서 교회의 현재에 대한 큰 의미 부여와 그러기 때문에, 이 종말이 언제 오는가 하는 것은 그렇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하는 사상과, 그러나 종말은 항상 도적같이 우리가 예비하지 않은 때에 곧 오리라는 임박한 종말론에 대한 가르침이 누가복음내에도 병존한다.

그래서 큄멜(K mel) 같은 사람은, 케제만(E. K emann)이나 콘젤만(Conzelmann) 등의 일방적인 누가복음에 대한 비판, 소위 초기 카톨릭신학(early catholicism)이라는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여간 케제만(E. K emann)이나 콘젤만(Conzelmann)이 누가복음의 신학은 초대교회의 종말론을 왜곡하고 가톨릭신학으로 발전시켰다고 하는 것이 좀 극단적인 평가일런지는 몰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누가복음이 구원사적인 관점으로 예수의 사역과 교회의 선교를 평가한다는 것, 그래서 구원사역의 지금 현재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성령에 대한 강조와 기도에 대한 강조로 나타난다는 것, 그런 것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다.

사실은 마가복음이나 Q에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있는 긴장, 즉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미래에 올 것으로 선포하면서 동시에 자기를 통해서 출범하고 실현됨을 장조했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서 출범하고 실현 됨과 미래의 완성 됨과의 긴장가운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이 있는데, 누가가 예수를 통한 출범과 실현을 더 강조했다고 해서(요한복음은 더욱 그러하다) 미래에 완성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또 이것의 긴장관계를 느슨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누가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늘날도 이 문제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오늘날 같이 종말론에 대한 열병이 일어나는 때에, 이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갖고 불안해 할 때, 우리에게 하나의 교정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누가의 신학이다. 또 요한의 신학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이 그 때에 처음 주어지느냐? 하는 것인데, 그게 아니고 지금 여기서 벌써 믿음을 통해서 종말에 임할 구원을 맛보고, 그 맛봄은 종말에 구원받을 것에 대한 보증이다. 첫 맛, 첫 열매이다. 구원의 첫 열매를 지금 여기서 볼 수 있고, 그 구원의 첫 열매를 보는 것은 종말에 확실히 주어진다는 보증금이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1992년파와 같이 열병을 앓을 필요가 없게 한다.

이래서 종말에 대한 올바름, 믿음의 올바른 태도(Gelassenheit)를 다시 한 번 생각케 해 준다. 이 믿음의 Gelassenheit는 종말에 관해서 어떻게 나타나느냐면, 한편으로 종말은 항상 임박한 것으로 늘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이 세상을 절대화하지 않고 상대화 하면서, 이 세상의 가치들에 혼을 빼주고, 이 세상의 가치들을 절대화, 우상화하면서 살지 않는다. 임박한 미래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 그러므로 이 세상은 임시적인 것, 이 세상의 가치들은 기껏해야 상대적인 것 그래서 이 세상의 가치들을 우상화하는데서 해방되어 자유로와 질 수 있다.

다른 한편, 그 종말이 언제 오든, 사랑과 지헤의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 즉 하나님의 손에 맡김, 하나님께 맡김이다. 종말이 언제 오든,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지혜로우시므로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그 시점에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전지하신 분이시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와도 괜찮다. 그래서 완전히 하나님께 맡김이다.

두 태도가 항상 같이 있어야 한다. 조금 긴장을 이루지만 같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신앙의 Gelassenheit에 들어간다. 이 말은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에 그냥 안겨서 포근함을 느낌을 뜻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에 안겨서 그냥 아무 걱정없이 포근하게 느끼는 그런 신앙이 있어야 한다.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만 있으면 삶이 불안 초조하고 안달한다. 그래서 자꾸 날짜 계산을 하게 된다. 이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다. 이건 데살로니가 교인의 신앙이다.

반면에 임박한 미래의 종말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의 신앙, 그들은 이 세상을 자꾸 절대화하고 이 세상을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고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해 아랑 곳 없이 지낸다. 이것은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이다. 이것은 고린도 사람들의 폐단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오늘날 세속주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도 옳지 않다. 이 둘다 있어야 올바른 신앙이 된다.

공관복음의 자료를 분석함에 있어서 Q라는 자료에서는 임박한 미래에 대한 강조가 있다면, 누가복음이나 요한복음에서는 지금 현재에 있어서의 구원의 성취와 실현과 그 구원에 대한 강조가 있는 것이 아주 좋은 조화를 이루어서 서로 보완한다고 말할 수 있다.

 

3.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복음의 저자는 전통적으로 아주 초기부터 가령 마르시온(AD160년경, 신약정경을 최초로 만들려 했음)이 누가복음과 바울서신 10개만을 성경의 권위를 인정, 부여하고 구약성경은 전부 부인하여 정경을 만들려 했는데, 이 때부터 제3복음서인 누가복음을 누가가 쓴 것으로 지칭을 하였고, 2C말에 영지주의자 마르시온의 이와같은 일방적이고 왜곡된 성경관에 대한 교정으로 성경의 정경(Canon)의 목록을 작성하려고 처음 노력한 Muratorian 단편(Muratorian Canon;2C말)에도 Paul의 여행동반자였던 누가가 이 책을 썼다고 하였다. 그 뒤 교회의 권위들이 계속해서 누가가 썼다고 하였다. Paul의 여행 동반자였던 누가가 이 책을 썼다고 하였다. 바울의 동반자 혹은 바울이 사랑하는 의사라고 지칭되는 누가가 썼다고 전승되어 온다.

그러나 최근 비판적인 학자들은 제3복음서의 누가의 저작설을 회의하는 경향이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한 저자가 썼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적, 문학적, 문체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특히 누가복음 서문과 사도행전 서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똑같은 저자가 쓴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여행기록의 저자가 'We' section으로 표현한다. 즉 사도행전 후반부에 바울이 죄수로서 로마에 재판받기 위해 가는 여행을 '우리가 --에 당도하고' 하는 식으로, '우리--'로 보고한다. 그래서 이 저자가 바울의 동반자로 나타난다. 누가를 바울의 동반자로 보는데, 골4:14, 몬24절, 딤후4:11 이런 곳에 '사랑하는 의사 누가도 인사한다'고 함으로써 바울선교단에 누가가 동반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누가를 바울의 선교팀의 동반자로 보아야 하는데, 문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신학과 바울의 신학이 아주 다르다는 데에 있다.

가령 1)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된다는 Universalism(보편주의)라든지, 2) 또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상이라든지(누가복음에는 그 사상이 강하다- 죄인, 소외된 자,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신다). 그런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게 한다는 사상과 일부 통한다. 3) 또는 swthria(구원)이란 말을 쓴다든지, 4) 누가복음 자체내에서 예수에게 kurio"(주)라는 말을 적용한다든가 하는 것은 누가와 바울간에 평행점으로 지적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보는 바처럼 이것은 아주 약한 것이다. 바울은 swthria말을 잘 안쓴다. 몇 번 안나온다. 그러나 동사는 많이 나온다. 예수의 swthr(구원자)라는 칭호는 한 군데 뿐이다(빌3:20). 또 kurio"라는 칭호는 바울서신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서신들에도 많이 나온다. 그래서 특별히 누가와 바울의 병행점이라 하기 어렵다.

누가의 신학과 바울의 신학이 다르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에 안나타나는 바울의 강조점이다. 즉 십자가 신학이다. 곧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 대속의 제사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심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의인된다는 'dikaiow' (이 동사는 우리를 의인되게 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준다는 뜻이다), 이 '의'(dikaiosunh)라는 카태고리들이 누가복음에는 아주 희박하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특징 중 하나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대속의 제사로서의 해석이 아주 약하다는 점이다. 특히 누가복음에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의 말씀에만 그것이 나온다. 만약에 누가가 마가복음을 보고 썼다면, 보고 쓸 때, 누가는 막10:45의 말을 생략한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강조하는데 누가는 이것을 굉장히 많이 생략한다.

또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설교들의 요약을 보면 예수의 죽음이 대속의 제사로서의 죽음임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을 강조하지만 바울 식의 믿음의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또 우리 구원을 의인됨의 카테고리로 해석하는 것이 아주 바울적인 것인데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에는 그런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누가복음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동반자였던 누가일 수 있느냐 고 회의 한다. 바울의 선교단의 일원이었으면 좀 더 이런 핵심적인 바울의 십자가 신학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더 강조되었을 것이 아니냐고 한다. 그런데 누가복음과사도행전에 강조 되기는 커녕 마가복음보다 더 생략되어있다.

지난 번에 마가복음을 할 때, 마가복음과 바울신학의 비슷한 점을 말했다. 가령 R. Martin 등은 마가복음을 바울의 십자가 케리그마에 역사적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 마가복음을 썼다고 까지 주장한다. 만약 두문서설이 맞다면 누가복음의 저자가 마가복음을 보고 썼는데, 마가복음에 그렇게 현저하게 바울신학과 일치점들이 많은데 그것을 약화시켰다는 것은 바울 선교단의 일원으로서 누가를 상상할 수 있겠느냐? 상상할 수 없다. 게다가 더 나아가 사도행전에 있어서 바울의 선교여행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바울의 편지들을 전혀 인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울선교단의 일원이었던 누가가 썼다고 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많은 비판적 학자들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바울 여행동반자 누가가 저자라는 전통적인 설을 많이 회의한다.

그러나 예수의 대속의 제사로서의 죽음이 약한 것이 누가복음의 특징 중 하나인 것이 사실이지만 - 어떤 과격한 신학자들은 그런 것이 없다고 까지 한다 - 그러나 그런 것이 없지는 않다. 다만 약하다. 강조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22장 최후만찬의 말씀, 눅22: 27b은 막10:45a와 같다.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후반부이다. 전반부(인자의 온 것은 -- 섬기려하고),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후반부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도 누가가 예수의 대속의 제사로서 죽음을 약화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잔치를 내다 보면서 예수는 자기 죽음이 그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필연적으로 중요한 것임을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가 내일 죽음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능케한다는 가르킴에서,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을 때에 자기들의 위상에 대해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래서 예수가 다시 한번 자기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곧 섬김의 의미이므로, 너희들도 서로 섬기고 서로를 위해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 큰 자가 됨을 다시 한번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막10:45에 보고된 이 말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떡의 말씀과 잔의 말씀을 예수께서 다시 한번 요약해서 이것을 제자들의 의미로 적용해 준 것이다. 마가는 이 말을 최후의 만찬석상의 context에서 떼어서 따로 제자도의 가르침에 썼다.

그러나 누가는 1) 원래의 순서대로 최후의 만찬석 상의 말로 보고 하면서, 2) 누가의 특징 중 하나인 중복된 것들을 생략하는 식으로, 막10:45의 '많은 사람을 위해 대속물로 준다'는 이 말은 이미 떡의 말씀과 잔의 말씀에 있는 내용이므로 누가가 이 말을 생략했다.

나는 내 책에서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다면 누가가 예수의 죽음을 대속의 제사로 해석하는 것이 싫어서 생략한 것이 아니고, 문체의 간결을 위해 생략한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누가가 예수의 죽음을 대속의 제사로 해석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하는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의 말은 지나친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예수의 죽음에 대한 대속의 제사로서의 해석이 바울서신만큼 강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서신과 비교해서 누가가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강조하지 않은 것을 그들이 지나치게 표현해서 누가가 그런 신학을 반대했다고 까지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바울이 그것을 굉장히 강조한 반면에, 누가는 크게 강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반대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어떻게 바울의 제자이며, 조수이며, 바울의 선교단의 일원인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썼다고 할 수 있느냐 하고 반론을 많이 제기한다. 이것이 하나의 문제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누가라는 사람은 바울의 편지 이곳 저곳에 그의 선교단원의 일부로 의사로 소개된 것외에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초대교회에서도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디모데, 디도 만큼도 유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제3복음서를 썼다고 아주 초대교회에서부터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제3복음서를 누가가 쓰지 않았다면 그래서 좀 그럴 듯한 이름을 대야 했다면, 어떤 사도 이름 아니면 적어도 초대교회에서 종요한 역할을 한 유명한 사람 이름, 예를 들면 바다바 랄지 디모데 이름을 대야 했을 텐데, 그런데 디모데만큼, 디도만큼 큰 역할을 하지 않은 것 같은 누가를 구태여 제3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로 초대교회가 인정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가가 썼으니까 그렇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인데 그것도 이방인인 것 같다.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된 누가가 제3복음서를 썼다고 인정하는 것은 초대교회로서는 그리 큰 명예스러운 일이 아니다. 일부러 지어 내어서 할 일은 절대 아니다.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보면 확실히 누가가 썼다. 그런데 왜 그러면 바울서신에 대한 인용을 않고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무슨 교회에 편지썼다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또 바울신학에서 중요한 주제들을 신학적으로 반영하지 않았느냐, 이것을 앞으로 좀 더 연구해 보아야 할 하나의 문제이다. 결론을 내리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누가가 썼다.

 

4. 저작 연대

 

이것은 2가지에 의해 결정된다.

 

(1) 사도행전에 의해 결정된다. 사도행전보다 먼저 썼다. 사도행전이 terminus ad quem이 된다. 즉 사도행전이 누가복음이 쓰여졌을 수 있는 그 마지막 기간이다. 그러면 terminus a quo는 어떻게 잡을 수 있는가? 어느 시점 이전에는 쓰였다고 볼 수 없느냐?

 

AD 70 사도행전

 

terminus a quo terminus ad quem

 

그렇다면 사도행전이 언제 쓰였느냐? 사실 잘 모른다. 그래서 이것도 절대적인 것이 못된다.

 

(2) terminus a quo는 어떻게 잡을 것인가? 이것은 AD70년과 관계가 있다. 예루살렘 성전파괴가 사도행전에 반영되어 있느냐, 없느냐로 결판난다. 성전이 멸망의 가증한 것에 쓰인다고 하는데, 그것에 대한 예고가 눅 21:20-24에서 막13:14ff과 달리 나타나는 모습은 왜 그런가? 그것도 70년의 성전파괴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냐 하지 않은 것이냐 에 대한 결정에 의해 누가복음이 70년이전에 쓰여졌느냐, 이 후에 쓰여졌느냐가 결판난다. 다수 학자들은 70년 성전의 체험을 반영한다고 보아 70년이후에 쓰였다고 본다.

사도행전은 분명히 1C이전에 쓰였다. 한 90년쯤에 쓰였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70-90년사이에 쓰였다고 애매하게 연대를 잡는 것이 비판학자들의 대부분의 의견이다.

그러나 J.A.T.Robinson은 누가복음 뿐 아니라 신약 어느곳에서도 AD70년에 예루살렘 성전파괴의 엄청난 체험이 아직 반영이 안되어 있다고 보므로 누가복음도 사도행전도 AD70년 이전에 쓰였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는 누가복음을 AD60-61년에 쓰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론 그래서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할 수 없다.

 

5. 저작장소

 

설이 구구하다. 가이사랴, 아가야, 소아시아, 로마 등 구구한데 확실한 것은 팔레스타인 밖에서 쓰였다는 것이다. 대개 학자들의 의견이 팔레스타인 밖에서 쓰였다는 것만 일치한다

 

 

 

출처: 예장 서울노회 원문보기 글쓴이: 다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