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 박사

[스크랩] 제5장 요한복음 서론 - 김세윤교수

에반젤(복음) 2021. 4. 27. 07:17

제 5 장 요한복음 서론 - 김세윤교수

 

 

1. 요한복음 연구에 있어서 두가지 관점(Old look, New look)

 

제4복음서 연구에 있어서 최근의 경향은 이른바 '제4복음서에 대한 새로운 관점(A new look on the Forth Gospel )' 이라는 구호로 대개 특징지워 진다. 이 말을 제일 처음 제창한 사람은 J.A.T.Robinson이다. 그는 C.H.Dodd의 제자로서 Dodd학파의 요한복음 연구 경향을 가장 잘 표현했다. J.A.T.Robinson이 1957년 Oxford대학에서 '제4복음서에 대한 새로운 견해 (A new look on the Forth Gospel )'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뒤부터 독일을 제외한 영미의 제4복음서에 대한 연구 경향은 'A new look on the Forth Gospel '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1) 옛날의 관점(Old look)

 

먼저 이 새로운 경향을 연구하기 전에 Robinson이 지칭하는 제4복음서에 대한 '옛날의 관점(The old look)'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 '옛날의 관점'은 5가지 명제로 표현된다.

1) 제4복음서는 자체적인 자료보다는 공관복음들 중 적어도 한 복음서를 포함한 다른 자료들에 근거하고 있다. 즉 공관복음서 중 하나 혹은 두 복음서를 자료로 삼았다.

2) 제4복음서의 배경은 공관복음서가 보고하는 전승의 배경과 다르다. 즉 공관복음서는 Palestine에서 일어난 예수의 이야기로서 이 전승의 배경은 팔레스타인 유대교인데, 제4복음서의 배경은 헬라사상이다. 즉 제4 복음서는 Palestine에서의 예수의 이야기를 보고하므로 유대교 배경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 복음서 자체의 배경은 헬라사상이라는 것이다.

3) 제4복음서는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증거라기 보다는 믿음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니까 역사적인 가치는 없고 신학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4) 제4복음서의 저자는 1C 기독교의 신학발전의 마지막 단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즉 신약내의 신학의 전승사적 전개과정에서 가장 발달된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역사적인 책이라기 보다는 신학적인 책이다는 것이다.

5) 그러므로 이 복음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일 수도 없고 예수에 대한 목격자 즉 증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섯가지 명제로 '옛날의 관점'이 표현되는데 지금도 독일학자들은 요한복음을 이 '옛날의 관점'으로 보고 있다. 즉 제4복음서는 자체의 독립된 자료보다는 공관복음서들 중 적어도 한 복음서를 위시한 다른 자료들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C.H.Dodd학파에서는 그런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에 대한 전혀 새로운 접근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옛날의 관점(Old look)'은 제1명제에서 부터 시작된다. 나머지 4개의 명제는 모두 제1명제에서 부터 나온 것들이다. 왜냐하면 제4복음서가 만약 공관복음을 보고 썼다면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공통점들은 쉽게 설명되는데, 이 둘의 엄청난 차이점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 차이점은 신학적인 이유로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을 완전히 다시 썼다는 것이다. 공관복음이 제공하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신학적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요한복음이 창작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4개의 명제들도 다 그 입장에 따른다. 또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헬라적 배경을 가진 사람으로서 공관복음의 팔레스타인 전승을 헬라식으로 재해석 했고 역사적 예수에 대한 증언보다는 믿음의 그리스도의 의미를 부각시키려 했고, 1C 마지막 단계의 신학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그는 사도 요한 일수 없고 목격자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다 제1명제에서 나온 것 들이다.

그러므로 지금 요한복음에 대한 접근방법에 있어서, 옛방법과 새방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Issue는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을 보고 썼느냐, 아니냐에 있다.

다시 말하면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같이 독립적인 사도적 전승에 근거한 것이냐, 아니면 공관복음에 의존해서 쓴 책이냐에 달려 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공통점들은 다음과 같은 것 들이다. 예수에 관한 것 - 즉 예수의 갈릴리 사역과 유대 사역, 예수의 제자들의 이름, 1C의 시대적 배경, 기적사건들(치유,5000명먹이심 등), 수난사중심 - 즉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Outline이 대개 비슷하다. 예수가 종교지도자들과 갈등하고 그들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고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 처형되고 하는 Outline이 비슷하다.

반면에 다른점은, 공관복음이 갈릴리 중심(예수가 예루살렘에는 마지막에 한번간다)인데, 요한복음은 유대중심(예루살렘에 적어도 서너번은 간다)이다. 또 공관복음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들로 선포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거의 안나오고 '영생' '생명'이라는 말이 나온다. 비유의 성격도 공관복음과 다르다(예를들어 포도나무, 선한목자비유 - Allegory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는 비유들), 이적들도 성격이 다르고, 묵상을 동반한 긴 설교들이 있는점, 예수님의 못박힌 시점(유월절 전날 vs 유월절날). 성령론에 있어서 paravklhto", 예수의 고별사들이 다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차이점은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가 자기의 메시야됨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도리어 숨김이 있는 메시야적 비밀이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드러내놓고 예수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설명하고 선포한다.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분으로 선포한다. 요한복음적인 메시야적 비밀이 없잖아 있지만 그러나 성격이 다르다. 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수난으로 보지 않고 영광으로 본다.

이러한 공통점과 다른점이 왜 있다고 보는가? 이것을 만약에 'Old look'식으로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을 보고 썼다고 한다면 공통점은 거기서 나온 것이고 차이점은 요한이 신학적인 이유로 공관복음의 내용을 변경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역사적 신빙성이 있는 책이라기 보다는 예수의 메시야적 의미를 신학적으로 선포한 의미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Old look명제 중 제일 중요한 명제가 첫명제이다. 거기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그러면 실제로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에 의존한 복음서인가? 이 문제에 대해 영국학자 P.Gardner-Smith가 1938년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서들(St. John and Synoptic Gospels)'이란 책에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에 같이 나오는 자료들(예를 들어 5000명 먹이신 사건 등)을 자세히 분석하였는데, 이 공통자료들 중에도 자세한 점에 있어서는 차이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옛이론(Old look)에 의하면, 공관복음과 차이점이 있는 것은 요한복음이 신학적으로 변경했다고 보기 때문인데, 그러나 이런 차이점들은 무슨 신학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이것은 요한복음이 신학적으로 변경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을 보고 쓴 것이 아니고 독자적인 전승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독자적 전승은 어느 점에 있어서는 공관복음과 공통적인 것이고, 어느점에 있어서는 다른 것이다.

P.Gardner-Smith가 이런 자료들을 검토하여 자세히 비교하였을 때 거기에서 드러나는 자세한 차이점들이 과연 신학적 의도로 요한이 바꿔 썼다고 보아야 되느냐? 할 때, 크게 보았을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을 보고 쓴 것이 아니고 독자적인 전승을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P.Gardner-Smith의 결론대로 하면,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차이점은 공관복음의 전승과 요한복음의 전승이 똑같은 예수에 대한 전승이다. 따라서 요한이 공관복음을 보고 쓰면서 그 자료들을 신학적 의도로 바꿔 쓴 것이 아니고, 같은 예수에 대한 예수의 전승을 보고함에 있어서 크게 갈라진 두개의 다른 전승이기 때문에 일부 공통적 자료이면서 일부 다른 자료라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다른 독립적인 요한복음 자체의 전승을 가지고 있다. 즉 공관복음은 예수의 갈릴리에서의 가르침을 주로 보고하고, 요한복음은 예수의 유대 땅에서의 사역을 주로 보고하고 있는데, 아마 이런 이유도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자료면에서의 다른점들의 큰 이유일 것으로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을 신학적으로 바꿔 썼다는 전제가 성립이 안된다. 공관복음은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증언인데, 요한복음은 다만 역사성은 없고 공관복음을 받아서 신학적으로 각색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인 증언에 불과하다는 그 결론이 성립이 안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New look'이 시작되었다. 즉 요한복음을 새롭게 보게된 것이다.

 

2. 요한복음의 사상적 배경

 

요한복음은 전적으로 헬라적 배경인가? 아니면 원래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일어난 역사적 예수 운동을 헬라적 사상 배경을 가진 저자가 헬라적으로 재해석하고 변경시킨 것인가? 요한복음에는 부인할 것 없이 헬라적 배경과 유대적 배경이 둘 다 있다.

 

(1) Hellenism배경

 

요한복음에는 플라톤 사상, 스토아사상, Philo(BC와 AD의 경계에 걸쳐 활동한 알렉산드리아 철학자)의 글들, Corpus Hermetica(유대사상과 헬라 영향을 동시에 보여주는 일종의 종교적, 신학적 문서들), 또는 영지주의 등과 일부 사상구조에 있어서, 어휘에 있어서 비슷한 점들이 꽤 있다. 가장 근본적으로 헬라적 이원론의 사상구조와 어휘가 요한복음에 잘 반영되어 있다.

플라톤에 의해 잘 정리된, 그러나 전문적인 의미로 플라톤 사상뿐만 아니고 헬라세계 전체의 근본적인 사상구조인 이원론(영과 물질의 이원론)의 사상구조가 요한복음에 잘 나타나 있다.

 

 

 

영원의 세상 - 불변, 진리(reality)의 세계

(영) 본질(essence)세계, Idea의 세계

 

(물질) Idea 의 복사판(copy, shadow)의 세계

현상(phenomena)의 세계 - 본질적인 것 같이 보이나

사실은 본질이 아니고 모조품이나 그림자와 같은 세상.

시간의 세계 - 변함(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변화), 가짜세계

 

이와같은 이원론적인 세계관이 헬라세계관의 근본적인 구조인데 이것이 요한복음에 반영되어 있다. 헬라사람들은 영과 물질(육)의 세계가 위/아래 세계로 공존한 것으로 보았는데 이러한 사상적 구조가 요한복음에 잘 나타나 있다.

Ta anw(윗세상) 가령 요한복음3장(요한복음1장은 말할 것도 없지만)에 보면 그 사람의 아들 인자

가 '위에서' 내려오신 분으로,'밑에 있는'

Ta katw(밑의 세상) 우리들을 다시 데리고 갈 분으로 묘사 되어 있다.

 

또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가 '위에서부터 오는' 힘으로 다시 나야된다고 하는데( 개역성경의 '중생한다'는 말이 하나의 전문언어가 되어버렸는데 요한복음의 큰 특징중 하나가 '이중의미'이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gennhqh' a[nwqen)'고 말하는데, 이것은 1)'위에서부터 나야 된다', 2) '다시 나야 된다'는 두가지 뜻인데 개역성경은 두번째 의미로만 해석했다. 사실은 더 근본적인 의미인 '위에서 남', '위에서 오는 성령의 힘에 의해 나야 함'을 말한다. 그 '남'은 물론 중생이라는 의미도 같이 있다. 이와같이 여기에서 위/아래의 세계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요한복음에 이런 헬라적 사상구조와 어휘가 부인할 것없이 존재한다.

또 요한복음 6장에 '영은 살리는 것이고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은

5000명을 먹이신 사건에서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사실 예수가 '위에서 온 떡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이라는 하나의 표징(sign)인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관심만 가지고, 세상적인 육의 양식을 해결할 그런 메시야로 그를 따르는 자들을 예수께서 비방하신 의미로 하신 말씀이다.

바로 이와같은 헬라적인 사상구조에서 예수의 독특한 언어중의 하나인 sign(shmei'on)이란 말이 나온다.

요한복음의 첫 책 2장-12장은 표적의 책(Book of sign)이라 하는데, 거기에 7개의 표적(sign)이 나온다.

7개의 표적은 다음과 같다.

1) 가나의 혼인잔치(2장),

2) 고관의 신하 아들을 고쳐줌,

3) 38년된 병자를 고쳐줌,

4) 5000명을 먹이심,

5) 물위로 걸으심(6장),

6) 소경을 고치심(9장),

7) 나사로를 살리심(11장)

 

이런 sign들의 구조는 예수께서 이적(sign)을 행하심 - 청중들이 오해함(예수가 베푼 이적이 이 세상(물질)의 세계, 시공의 세계에서 일으킨 물질적인 행위이지만 이것은 사실은 윗세상, 영원의 세계의 진리를 sign해 주는데(나타내주는데, 계시해주는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을 오로지 아랫 세상의 물질적인 현상으로만 깨닫고 그 물질적 현상이 어떠한 영원한 본질적인 진리를 계시하는지를 터득하지 못한다. 청중들은 아랫 세상, 현상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므로 오해한다. 위는 빛의 세계이고 청중은 암흑의 세계에 있으므로 오해한다) - 그러면 예수께서 이들에게 긴 강해를 통해서 자기가 행한 이적이 무엇을 sign 하는가를 해석(설명)해 준다.

요한복음의 제1권의 구조가 대개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

즉 표적 - 오해 - 강해 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요한복음의 제2권(13장 -20장)은 영광의 책(Book of Glory)이다.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으로, 영광을 드러내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받는 사건으로 나타낸다.

그런데 7개의 sign중 '물위로 걸음'만 이런 구조와 다르다. 이것은 오해도 없고 해설도 없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은 요한이 sign으로 의도하지 않았다. ' ejpi th' qalavssh '는 '물위'가 아니라 '물가'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 대신에 21장 에필로그에 나오는 153마리 물고기 잡는 것을 7번째 sign으로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같이 sign이라는 언어와 그것에 대한 오해와 해설은 바로 이와같은 헬라적인 사상적 구조를 잘 나타내는 언어들이다.

이와같은 요한복음의 근본적인 사상구조는 logo"라든지 또는 ajlhvqeia, ajlhqinov", 또는 암흑 등과 같은 이원론적인 구조 외에, 조금 더 헬라적 사상적 영향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요한복음이 영지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R.Bultmann이나 E.K emann등은 요한복음이 영지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영지주의의 구원자 신화를 예수에게 적용해서 역사화한 것이 요한복음의 기독론이다고 주장한다.

언뜻 보기에는 요한복음이 지식을 굉장히 강조한다('안다'는 말, '하나님을 앎'등). 그래서 요한복음에 '지식'이라는 말과 '믿음'이라는 말이 상호교환용으로, 또는 같은 의미로 쓰인다. '하나님을 믿는다' = '하나님을 안다'이다.

영지주의에서는 지식이 구원의 수단이다. 영지주의는 근본적으로 헬라적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헬라적 세계관을 전제하면, 인생관을 물질인 몸, 육신속에 영의 세계에 속하는 영혼이 타락해서 갇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몸을 영혼의 무덤 혹은 감옥이라 한다. 영혼은 원래 진리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 영원의 세계에 속한 것인데, 그것이 물질인 몸, 육신에 타락해서 갇혀 있다, 또는 무덤에 시체로 누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영혼은 이 세상이 자기의 본향이 아니고 영원의 세계가 자기의 본향인 것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한다. 그러나 많은 영혼들은 이 몸속에서 그냥 잠자고 있거나 아니면 죽은 상태로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이 세상의 현상의 세계의 가짜 가치들, 육신적인 가치들을 높게 평가하면서 그것을 추구하고 산다. 이런식으로 인생관이 결정된다.

그러면 이 구원론은 어떤 것인가? 구원론은 당연히 몸에 갇혀 있는 영혼이 몸에서 해방되어 영혼의 세계(영의 세계, 본질의 세계, 빛의 세계)로 귀환하는 것이 구원이다. 몸은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고 몸은 본질적으로 물질의 세계, 암흑의 세계에 속한 악한 것이다. 영혼이 몸에서 해방되어 영혼의 세계로 귀환하는 것이 구원이다. 어떻게 귀환하느냐면 지식을 통해서 귀환한다.

플라톤의 철학에 의하면 - 플라톤의 대화록 중 Phaedo ( 혹은 Phaedrus)에 보면 자세히 플라톤적인 구원론이 설명되어 있다. 철학을 함으로써 곧 지식을 얻어서, 이 세상은 현상의 세계, 시간의 세계, 변화의 세계(늙고 쇠퇴하고 죽는 고통이 다 여기서 온다)인 것을 알고 본향, 영원의 세계, 진리, 빛에 대해서 자꾸 깨우침으로써 영혼을 붙들고 있는(가두고 있는) 몸으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져서 영원의 세계로 귀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적인 구원이다.

이것이 대중화 된 형태가 영지주의다. 그래서 플라톤 철학에서는 철학활동을 통해 지식을 얻어 구원을 얻는데, 영지주의에서는 이 지식이 아주 천박하게 되어 철학적인 우주의 진리에 대한 깨우침에 의해서 영혼이 자유로워져서 구원을 얻는다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영지주의 Sect들(파벌들)에 소속하면 그곳 자기들 단체에서만 전수되는 비밀지식을 얻게 되어 영혼이 몸으로부터, 이 세상의 시간의 세계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얻는다 하는 것이다.

그런데 Bultmann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영지주의에 구원자 신화가 있었다고 한다. 영원의 세계에 속하는, 원래 빛의 몸으로 되어있던 Anthropos 가 암흑의 세계와 싸워서 져서 그 몸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 조각들이 몸속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의 영혼이 되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영혼들은 태초의 인간(Urmensch)의 파편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파편을 많이 받아서 아직도 본향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고 어떤 사람들은 파편들을 조금 받아서 영혼의 세계, 본향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이런 사람들은 땅에 속한 자들로서 구원에 대한 가망이 없다. 본향에 대한 기억이 있는 자들만, 영지주의적 인간들로서, 지식을 얻어서 다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다시 Anthropos가 물질의 세계에 와서 암호

(비밀지식)을 발하면 자기 몸의 파편을 가진 자가 모두 이 암호를 알아듣고 다시 모여들어서 산산조각난 Anthropos가 원래의 몸을 빛의 몸을 이루어 이들을 이끌고 영원의 세계로 귀환한다. 이것이 영지주의의 구원받는 '스스로 구원받음으로써 남을 구원하는 신화(the redeemed redeemer myth = erl te erl er mythos)'이다.

불트만은 바울과 요한이 바로 이런 구원자 신화를 빌려서 예수에게 적용해서 신약의 기독론을 형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태초의 Adam이 암흑의 세계에 져서, 타락해서 모든 인간들이 이 암흑의 세계에서 죄의 권세에서 고난가운데 있었는데, 또 하나의 Adam이 즉 그리스도가 마지막 인간

(Anthropos)로서 이 세상에 와서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모아서 자기의 몸을 이루어서(교회를 이루어서) 다시 하늘의 세계로 귀환함으로 구원을 이룬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느냐? 믿음으로 혹은 지식으로 한다. 이렇게 바울의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이 발생했다고 한다. 또 요한복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도 태초에 logo"가 인자로서 위에서 아래로 와서 우리를 데리고 같이 하나님의 우편에로 귀환시키는 3단계 기독론(선재한 그리스도, 성육신한 그리스도, 고난받고 다시 영광으로 승귀하는 그리스도)도 전부 영지주의 신화의 역사화라는 것이다. 즉 영지주의의 신화를 빌려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구원자로, 하나님의 계시자로 선포했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런 주장으로 불트만은 유명한 요한복음 주석을 썼다. 1960년대까지 한동안 이 설이 유행했다. Bultmann은 R.Reitzenstein이나 W.Bousset같은 사람들의 종교사적 연구에 근거해서 그의 영지주의 신화를 재구성했다. 불트만의 신약신학 제1권, '바울전의 기독교'를 보면 영지주의라는 항목의 내용이다.

1950년대 이래로 많은 학자들이(C.Colpe,H.M.Schenke, R.Mcl. Wilson) 불트만과 그의 선생들이 고수하는 고대문서(이란, 인도, 바빌로니아, 헬라, 이집트)들을 다 점검했을 때 이런 신화가 존재하지 않은 것을 밝혀냈다. 즉 불트만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이런 엉터리 영지주의의 신학에 호소해서 바울신학과 요한신학을 해결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다만 AD 2C이후 헬라유대교(지혜신학, 말씀의 신학, 천사신학)와 기독교의 영향(바울과 요한의 기독론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에서 간혹 조금 비슷한 신화가 나타난다. 그것은 원래적 헬라적 이원론에 있어서의 영이 타락해서 물질의 세계인 몸에 갇혔다가 다시 해방되는 과정을 객관화하고 극화(dramatize)한 결과가 이른바 영지주의적 신화이다. 그런데 이신화는 이 영지주의 자체내에서 일어난 운동이 아니라, 유대교의 지혜신학이라든지 신약의 기독론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영혼의 물질에의 타락과 물질로부터의 해방의 과정을 객관화하고 극화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요한복음이나 바울 신학에서 영지주의에로 영향이 끼쳐졌다.

그러기 때문에 최근의 학자들은 발아기적(배태기적) 영지주의(Inci-pient Gnosticism)이라 한다. 이것은 불트만이 이야기하는 영지주의적 신화가 아니라, 그런 신화를 가진 하나의 사상체계가 아니고, 헬라세계의 근본적인 이원론과 인도 동방계의 이원론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 영지주의라고 대개 책들에 쓰여졌는데, 그게 맞는 말이겠지만, 사실은 인도 사상이 플라톤 사상과 똑같다. 그것은 원래 일원론(Monism)에서 이원론(Dualism)으로 전개되는 과정에 있어서 세계관 인생관이 꼭 이렇다.

인도철학에서도 원래 신인, 우주적 본질이 형상으로 Projection된 것이 우주이다. 이것을 수레바퀴로 표현한다. 그래서 우주의 본질은 바퀴의 기하학적인 축과 같다. 바퀴의 기하학적인 축은 돌지 않는다. 즉 변화가 없다. 영원의 세계이다. 본질의 세계, 진리의 세계이다. 그런데 그것의 투영된 상태, 그것은 바퀴의 겉과 같은데 그것은 현상의 세계이고 삼라만상의 세계이다. 즉 하나의 본질이 삼라만상으로 만가지의 현상(Phenomena)으로 나타나는 것이 시간의 세계이다. 그래서 윤회한다. 변화한다. 이 변화가 바로 인간의 고난의 근본이다. 낳고 늙고 병들고 죽고 낳고... 이 윤회의 변화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다. 본질의 세계로 뛰어듬으로, 그래서 변화없는 우주의 본질과 합일된다. 이것을 열반이라 한다. 즉 현상으로서의 자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무아, 적멸, 입적)가 된다. 그런데 그것은 지식으로서 가능하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구원의 수단은 1)깨달음, 자각 즉 지식, 2) 선행, 3) 요가, 참선이다.

이와같이 플라톤적인 세계관이나, Monism에서 Dualism에로의 전개과정에 있는 세계관이나 인도철학에서의 세계관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본질적으로 같다.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의 수단은 지식이다.

역사적으로 헬레니즘 세계에서, 이러한 근본적으로 같은 사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인도철학과 플라톤 철학과 또는 그런 철학에 근거하고 있는 종교성들이 만나서 이루어진 것이 영지주의이다. 그것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도의 힌두교를 아리안 족속은 헬라유럽족속과 같은 인종들이고 언어도 같다. 산스크리트어는 헬라어와 팔촌쯤 되는 언어이다. 힌두교의 중요한 경전 Veda(지식이라는 뜻)는 헬라어의 oida(안다)와 같은 말이다. 이런 영지주의 경향이, 즉 영지주의적 신화를 발달시키지 않는 상태에서 이와같은 이원론적인 세계관과 인생관 그리고 그것에 근거한 구원론을 가지고 지식을 구원의 수단으로 강조하는 그런 종교적 경향을 Incipient Gnosticism이라 한다. 이런 종교적 경향은 육적인 것을 부인하고 멸시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지식을 추구한다.

이러한 Incipient Gnosticism이 요한복음이나 요한서신(특히 요한일서)이 일부 반영되어 있다. 어떤 이는 고린도 전서에도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어떻게 반영되어 있나?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들의 언어를 일부 쓰면서 동시에 그들의 가장 기본되는 사상을 배격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이나 고린도 서신들에 반영되어 있다.

초대교회에 발달한 이단 중에 가현설(Docetism)이 있다. 이들은 예수의 진정한 성육신을 부인하고 인간 예수에게 영원한 로고스가 성육신한 것 같이 보였을 따름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영원한 로고스, 하나님의 아들은 고난받을 수 없고 그냥 승천한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다. 인성은 다만 보였을 뿐이다(dokew). 이런 이단이 초대교회 기독론에 발달했다. 그것은 이와같은 영지주의적 근본적인 사상구조 체계에서 발달하는 영지주의 영향 때문이다. 그것이 벌써 요한복음에, 특히 요한일서에서 강력히 배격되어 있다.

이러한 요한복음의 사상적 배경이 이와같은 헬라적인 이원론, 그리고 그것의 좀더 대중화된 천박한 형태로의 영지주의, 그러나 그때의 영지주의는 Bultmann이나 E.K emann이 이야기 한대로 발달된 영지주의가 아니고, 이제 배태되는 이런 이원론적인 세계관, 인생관에 근거해서 육을 무시하면서 영혼의 구원만을 꾀하면서 지식을 강조하는 그런 종교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언어를 써서 선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사상적인 언어와 구조가 기독교의 근본적인 신앙고백과 위배될 때(예를들어 가현설), 그것들을 배격하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을 요한복음에서 보여준다.

 

(2) 유대교적 배경

 

1) 요한의 세계는 완전히 유대교적 세계이다.

 

요한이 보고하는 모든 사건은 유대인 예수와 그의 유대인 제자들의 갈릴리와 유대 땅에서의 사건들이다. 특히 남부유대(예루살렘을 중심으로)땅에서의 사건들을 보고한다.

요한복음에 이방인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요한복음내에 유대교와 상호작용이 현저하다. 유대교의 제도, 관습, 신학적 범주, 개념이 풍부하게 나타난다.

 

2) 요한복음의 언어

 

F.C.Burney는 요한복음은 원래 아람어로 기록되었다가 헬라어로 번역된 것 같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런 주장을 받아드리는 사람이 없다.

M.Black은 원래 요한 복음이 아람어로 쓰여졌다가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아닐지는 몰라도, 요한복음의 기본전승은 아람어로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즉 원래 헬라어로 쓰였을지라도 쓰이기 전의 기초 전승은 아람어로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에 아람어 문구가 상당히 강하기 때문이다.

 

3) 요한복음에서 구약 사용

 

요한복음에서의 구약사용은 신약의 다른 책에서의 구약 사용과 조금 다르다. R.Harris, C.H.Dodd의 주장에 의하면 신약의 여러 책들에서 저자들이 인용하는 구약책들을 살펴보면, 초대교회가 구약에서 메시야 예수에 대한 예언이라고 본 그 구약의 본문들을 모아서 하나의 List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을 Testamonia(구약에 있어서 메시야 예수에 대한 증언들)이라 하는데, 초대교회가 그런 거의 합의된 Testa-monia의 List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이나 공관복음의 저자들이 또는 히브리서의 저자들이 전혀 다른 Context에서 책을 쓰면서 똑같은 구약을 인용하고 비슷하게 해석한다. 예를들어 시110, 시2, 사53, 합2:4... 이런 Testamonia가 있었던 것 같다. 신약에서 예수에 대해 증거하면서 바로 구약에서 예수에 대한 예언이라고 된 Testamonia들을 인용하면서 예수가 바로 이점을, 이 예언을 성취했다고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구약의 가르침으로 뒷받침함으로써 예수의 메시야됨을 증거한다. 그것이 대개 신약에 있어서의 구약의 사용방법이다. 이것이 아주 현저하게 나타난 것이 마태복음이다. 마태복음에 '이것은 구약의 이 말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수난사(18장-19장)에서는 그런식으로 구약을 인용하지만(예를들어 병사들이 예수의 팔을 꺽지 않았다는 말을 해놓고 이 말은 이사야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성취하기 위해서 였다고 하고, 또는 예수께서 목마르다 하시고 이것은 성경으로 응하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구약의 어느 한 본문을 인용해서 그것을 예수가 성취했다고 하지 않고(Testamonia적 방법) 구약의 중요한 사상들을 예수가 성취한 것으로 본다. 가령, 예수가 유월절의 의미를 성취한 것으로, 예수가 제2의 출애굽을 이루신 분으로(5000명을 먹이신 사건), 예수가 목자, 포도나무라든지 하는 것(이런 언어들은 구약의 중요한 사상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되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포도원이라는 사상들을 예수가 성취한 것을 뜻함), 그리고 초막절의 성령(성령론에 있어서도 에스겔, 스가랴, 요엘이 예언한 성령의 강림을 예수께서 성취한 것으로 나타난다)등 이처럼 요한복음은 구약의 어느 한 본문을 들어서 그것을 예수께서 성취했다고 주장하기 보다는 구약전체에서 나오는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들, 중요한 사상들, 가르침들을 예수께서 성취했다고 보여준다. 그래서 요한복음 전체에 구약이 기반(substructure)으로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4)Rabbi적 해석방법

 

요한복음에 있어서 구약해석을 살펴보면, 당시 랍비들이 구약을 해석한 것과 비슷한 것이 많다. 예를들면 요한복음1장 51절에 예수께서 나다나엘과 교회전체에게 '하늘이 열리고 인자위에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고 약속한다. 이것은 랍비들의 신앙의 아주 중요한 야곱의 베델 꿈이야기이다. 그것을 예수께서 자기에게 적용하는데 이것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랍비들의 토론한 것과 비슷한 것이 많다. 즉 요한복음이 유대교와 긴밀한 사상적인 연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Qumran

 

최근 Qumran문서들이 발견되었을 때에, 신약 연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Qumran문서들의 이원론적 사상구조나 그 언어들이 요한복음의 이원론적 언어들과 사상들과 아주 비슷하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도 원래 구약 유대교의 종말론적 이원론(이 세대와 오는 세대로 나누는 시간적 이원론)과 헬라적 이원론(위/아래로 나누는 공간적인 이원론)이 같이 조화되어 나오는 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이다. 이것은 분명히 구약 유대교적 배경(이세대/오는세대)과 헬라배경(위/아래)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Qumran문서도 시간적인 이원론과 공간적인 이원론이 같이 나타난다. 이와같은 이원론에서 온 언어들, 빛-암흑, 진리-거짓, 영-육, 빛의 자녀들-암흑의 자녀들, 이런 언어들이 Qumran문서에 다 나온다.

Qumran문서가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요한복음에 이와같은 이원론적인 사상구조와 거기서 나오는 대조적인 언어들 때문에, 요한복음은 무조건 헬라인에 의해서, 헬라세계에서 헬라적 종교의 영향을 직접 받은 사람이 썼기 때문에 그렇다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었다.

B.C. 323 알렉산더 대왕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해서 그 이후로 줄곧 끊임없이 유대인들이 헬라세계의 지배하에 있었다. B.C. 323 - B.C. 164 까지 이른바 마카비 전쟁의 성공으로 하스모니아 왕조가 있었는데 이것은 사상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마카비 후손들이 원래 자기들이 혁명 이상을 저버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중 하나였던 시리아의 종주국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사상적 영향을 받으면서 하스모니아 왕가가 완전히 삶의 형태에서 종교적으로 헬라화해 버렸다. 그러니까 이 이후로 끊임없이 400년간을 헬라세계의 통치를 받았다. 그래서 예루살렘 같은 곳에는 아람어와 헬라어가 동시에 쓰이는 이중언어 나라였다.

그래서 이 기간의 유대교는, 그것이 팔레스타인에서 실행된 유대교든, 디아스포라에서 실행된 유대교든 무조건 헬라적 종교와 문화의 영향을 받은 헬라 유대교라 할 수 있다. 그것의 증거가 Qumran문서이다. 에센파만큼 민족주의적, 국수주의자들도 없는데 그들에게도 벌써 헬라적인 사상구조와 언어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도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 나타난 현상이지만 얼마든지 헬라적인 사상구조와 언어들을 반영할 수 있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팔레스타인 유대교와 관계없이, 헬라세계에서 살면서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공관복음의 한 복음서를 헬라식으로 번역, 완전히 토착화 해버렸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최근 20C의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서 요한복음이 주로 보고하는 남부 유 대 땅의 지리와 관습들이 많이 재확인 되었다. 예를들어 솔로몬의 행각(요한복음5장), 베데스다 연못 이런 곳들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전부 요한의 상징적 언어로 보았다. 그런데 실제로 그 연못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에논, 살렌 등 요한복음에 언급된 이런 위치들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되었다. 또한 팔레스타인에서 나온 질그릇, 묘비들에 사람들의 이름이 헬라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아니면 적어도 요한복음의 전승의 저자가 남부 팔레스타인의 지리와 당시의 형편을 상세히 알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것은 곧 요한복음이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은 근본적으로 구약과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당시 유대교가 오랜 헬라사상의 영향으로 헬라적 요소를 수용하고 있다. 즉 Qumran문서와 비슷하게 헬라의 사상적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헬라인에게 또는 헬라세계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위해서 일부 헬라적 사고 구조와 어휘들을 쓰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배경을 가지고 요한복음의 역사성을 부인할 필요가 없다.

 

3. 저자

 

1) 외적증거

 

2C부터 요한복음의 저자는 세베대의 아들 사도요한으로 증거된다.

첫 증거자는 이레니우스(소아시아 출신, 리용의 주교)이다. 이레니우스는 요한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는 폴리갑에게서 받은 전승이라고 한다. 폴리갑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폴리갑에 의하면 요한이 그의 말년에 에베소서에서 이 복음서를 썼다고 이네니우스는 증거하고 있다. 이레니우스 전에는 요한복음의 사도성이 교회에서 인정이 되지 않아 시간이 오래 걸렸다.

 

2) 내적증거

 

요한복음 본문에는 누가 저자라고 밝혀있지 않다. 다만 요한복음 21장24절에 나오는 " oJ gravya" "를 어떻게 번역하느냐" 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은 2가지, 즉 첫째 '이것들을 쓴 이', 둘째 ' 이것들을 쓰도록 한 이'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와 같이 해석하면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한사람이다.

둘째와 같이 번역하면 예수님의 제자중 하나가 예수의 전승을 넘겨주었고 그것을 쓴 사람은 그 제자의 제자이다.

또 하나는 요한복음 21:24에서, '우리는 그의 증거가 옳음을 확인했다(oi[damen)'에서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인데, 이것은 '쓴 이' 또는 '쓰도록 한 이의 제자들'이다. 즉 요한공동체의 지도자들 또는 요한공동체 전체이다.

그러면 이 제자가 누구인가? 아마 이 본문에서 나오는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일 것이다. 그러면 예수가 사랑한 제자가 누구인가? 아마 세베대의 아들 요한일 것이다. 그것은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서를 비교하면,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는 공관복음에 나오는 세베대의 아들 요한의 위치를 차지한다. 예를들어 요한복음의 최후의 만찬 장면(13장)에서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베드로와 항상 같이 나온다. 그는 공관복음서에서의 최후의 만찬석상에서의 요한과 같은 위치이다. 또 예수의 수난사와 부활기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는 세베대의 아들 요한일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러면 요한이라 하지 않고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했느냐? 그것은 아마 요한 스스로가 예수의 사랑을 특별히 생각해서 자신을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추론한다. 물론 자유주의 학자들은 신빙성이 없다고 부정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4. 저작 과정

 

요한복음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쓰여졌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요한이 한자리에서 한꺼번에 다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복음주의자들, 근본주의

자들은 한꺼번에 쓰여졌다고 생각한다.

 

S.S Smalley는 요한복음이 3단계에 걸쳐서 쓰여 졌다고 한다.

1) 세베대의 아들,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인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오래 목회하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의 행적(주로 이적들)과 예수의 말씀들, 가르침과 그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구두로 전승했다.

2)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공동체(교회)의 핵심인들이 요한의 이 전승을 썼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제1판이다. 사도요한의 증거와 해석의 특성들 즉 요한복음의 신학적 주제들을 발전시켜서 요한복음의 첫판을 완성한 것이다.

3) 사도요한이 죽은 뒤 에베소서에서 요한의 교회가 더 다듬어서 요한복음의 최종판(제2판)을 출판했다. 이때 logo"서시(1:1-12)와 21장의 에필로그(부록)을 덧붙여서 썼다. 여기에 logo"서시를 덧붙인 것은 헬라사람들에게와 헬라적으로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요한복음 전체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R.E.Brown은 요한복음이 5단계에 걸쳐 쓰여졌다고 하는데 그건 너무 복잡하다. Smalley의 3단계가 옳은 것 같다. 그렇다면 요21:24의 oJ gravya"는 둘째번 해석 '이것들을 쓰도록 한 이'로 번역해야 한다. 즉 '이분은 이것들에 대해 증거하고 이것들을 쓰도록 한 제자이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이 예수에 관해 증거하고 그것을 그 제자에게 쓰도록 하였다. 사도요한이 저자이고 쓴 사람은 비서이고 편집정도 한 것이다.

 

5. 저작연대

 

보통 학자들은 9:22, 16:2이 유대교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자들이라고 출교하는 장면이라고 하면서 이 시점을 terminus a quo를 정한다.

출교현상이 나타나는 그 시점이 바로 요한복음이 쓰여지기 시작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 기도문 중에 '18축복기도(shmone esre - 하나님이 복있는 분이시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기도가 18번)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 이단자들을 저주하고 그 이단자들 중에 그리스도인들을 언급하는 이른바 축복기도 조항이 있다. 그것은 AD 85-100에 크게 활약한 Gamaliel 2세 (Paul의 선생 Gamaliel의 아들)가 제정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terminus a quo가 85년쯤 된다.

그러면 terminus ad quem는 어떻게 정하는가? 조그만한 크기의 파피루스 P52조각 하나가 나일강 유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요한복음8장의 일부가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의 연대를 AD 135년쯤으로 추정한다. 에베소에서 저작되어 나일강유역까지 가는데는 1세대(약30년)쯤 걸릴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terminus ad quem이 AD 100년경쯤 된다.

더 나아가서 아까 이야기 한 이레니우스나 폴리갑등의 저서에 요한복음이 인용되므로 보통 AD 100년쯤을 terminus ad quem으로 잡는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AD 85년 - 100년에 쓰인 것으로 본다. 이것이 보통 학자들의 견해이다.

그런데 J.A.T.Robinson은, AD30-50년사이에 요한 전승과 요한복음의 Proto-Gospel(예비판)이 예루살렘에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즉 AD30년 - 50년 요한복음의 예비판,

AD50년 - 55년 요한복음의 초판(소아시아에서),

AD60년 - 65년 요한2서, 3서, 1서 순으로,

AD65년 - 70년전 요한복음의 최종판( logo"서시, 21장 에필로그 포함)이 쓰여졌다고 한다.

그래서 Robinson은 요한복음의 첫전승이 성립되기는 공관복음보다 앞섰다고 한다. Robinson은 4복음서에서 요한복음이 모든 복음서보다 가장 먼저 쓰여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출처: 예장 서울노회 원문보기 글쓴이: 다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