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신학이 골치 아프다하는 분들이 있어서 초간단 정리해본다. 이하 내용은 실제 역사와 신학을 대화체로 '각색'해 본 것이다. 현대적 논의는 제외했고, 종교개혁시대 중심으로 풀었다.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싶지만 수면효과가 클 것 같아 최대한 간략히 요약한다. 아무리 좋은 내용의 글도 읽혀지지 않으면 쓰레기이기에......
<대전제>
예수: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anamnesis)하라”
<1. 성찬의 효력>
초대교회:
“예수는 부활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불사의 몸이다. 성찬은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례는 불사(영생)의 능력을 받는 것이다.”
중세교회:
“성찬엔 불사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불치병 정도는 우습게 나을 수 있다. 성찬은 만병통치약이다. 고로 사제가 축성한 떡으로 내 병도 고치고 엄마 병도 고쳐야지! 앗, 그렇지! 밤에 몰래 들어가 도둑질이라도 해야겠다! 어차피 축성한 것은 이미 만병통치 가능한 예수의 살과 피니까!”
루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래, 사제가 축성해서 떡이 예수의 살로 변했다고 치자. 그럼 제일 먼저 구원받을 이들이 교회 성도들일 것 같나? 천만의 말씀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구원 서열 일위는 교회 안에 돌아다니는 쥐새끼들이겠지! 쥐들도 빵은 갉아먹고 포도주를 찔끔거리면서 마실 수 있지 않는가?” ‘성찬에 실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헛것이다. 사제가 축성하건 않건 간에 그런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다. 그 믿음 만이 효력이다.’ (WA10, III,48.7-54.12, 1522년 설교)
* 루터의 실재설은 초대교부였던 이레네우스까지 소급된다.
<2. 성례전 신학>
초대교회:
“성례전(Sacramentum)은 하늘 위에서 내려온 ‘선물’(은총의 도구: 카리스마)이며 ‘히에라르키아’(위계질서의 힘)이다. 이것은 사람이 땅에서 만들어 하늘 위로 올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sacrificium). 그러므로 성찬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영생의 힘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은총의 도구(Means of Grace)다.”
어거스틴(4세기 교부):
“성례전은 말씀과 표지(signum)가 결합된 은총의 도구다. 말씀은 보이지 않지만 표지는 우리의 감각으로 체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례전은 보이는 말씀이다.”
중세교회:
“성례전은 은총의 도구다. 하나님은 은총의 보화가 가득한 천국창고 열쇠를 교회에 주셨다. 이 열쇠를 가진 자들이 사제다(천국열쇠의 직무). 사제들은 이 열쇠를 사용하여 ‘요람에서 무덤까지’ 성도의 삶을 책임지는 직무를 받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회가 책임진다. 봐라! 태어나면 성세성사(세례), 자라서 자기 입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을 나이가 되면 견진성사(입교), 미사에 들어오면 성체성사(=성찬), 살다가 죄 지으면 고백성사(=고해), 혼기가 차서 결혼할 때 혼인성사(=결혼), 사제가 되기로 했다면 신품성사(=사제서품), 죽기 직전엔 종부성사(병자도유). 맞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교회는 이렇게 너의 모든 인생을 하나님 품에서 관리하는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다!
(* 참고: 7성례는 2차 리옹 공의회(1273)에서 결정되었고, 종교개혁시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때 재확인 후 지금까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루터:
"성례전이 은총의 도구인 것도 맞고, 보이는 말씀인 것도 맞는데 왜 그런 은총의 도구로 가난한 자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성당 건축하고 사제들 배나 채우나? 어디 한번 제대로 따져보자!"
(참고: 이래서 나온 글이 종교개혁 3대 논문 중 하나인 1520년 <교회의 바벨론 포로>다. 이 글에서 주된 논점은 가톨릭 7성례전이 성서적 조건에 부합하는가의 문제였다.)
“그래 성례전이 되기 위해선 어거스틴 할배 말대로 말씀과 표지가 결합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씀'이란 예수님이 하라고 명령한 것이어야 한다(제정의 말씀). 하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성례전이라고 우겨대면 그건 사기일 뿐이다......... 그래 성경 한 번 죄다 훑어보자!..... 어? 세 가지만 여기에 부합하네! 세례, 성찬, 죄고백과 용서(고백성사). 그럼 나머지 네 가지는 아웃! 아, 그런데 여기서 ‘죄고백과 용서’는 세례 때도 약속된 것이고, 게다가 물질의 표지가 없군! 그럼 이것은 패쓰! 결국 둘 만 남았네..... 세례와 성찬. 예수님이 하라고 명령하신 성례전은 일곱 개가 아니라 딱 둘이군!”
*이로써 개신교회의 성례전은 세례와 성만찬이 된다.
heart 이모티콘. 성찬신학>
가. 가톨릭-화체설
“사제는 서품 받으면서 천국열쇠를 받는다. 이 열쇠의 직무는 영원히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고 빼앗기지도 않는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제가 축성한 떡과 잔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하고, 불사의 능력이 그곳에 임한다. 너희가 믿든 안 믿든 상관없다. 축성하면 이것은 이미 변한 것이다. 철학적으로 설명해 볼까? 너희 눈으로 볼 땐 아무것도 안 변한 것 같지? 근데 축성한 순간 변했어.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철학에 나오는 개념 하나 들려줄게.(친절한 목소리로...)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사물의 모습은 일종의 ‘우연’이야. 그런데 모든 물질이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우연이나 현상이 아니라 실체(substantia) 때문이지. 실체란 말을 좀 풀어 말하면 ‘sub- 밑에 + stantia-stand 서 있다.’라는 뜻으로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진짜 모습이란 뜻이야. 그래서 존재한다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우연의 세계를 넘어서는 신비에 속하지. 대부분 우연과 실체는 일치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아. 특히 성례전에서 사제가 축성하는 시점이 바로 그런 사건이 일어나는 때라고 할 수 있지. 사제가 축성하는 순간, 물질의 ‘밑에 서 있는’ 실체는 변하게 되지. 그러니 눈으로 보기엔 떡이지만 실은 떡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어. 어떻게 변했냐고? 사제가 서품 받을 때 그런 능력(히에라르키아)를 부여받았기 때문이지. 그래서 사제가 축성하면 어느 순간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떡이 예수의 몸으로 변하게(trans-sub-stantia: 화체) 되는거야!”
나. 루터- 실재설
“뭐가 그리 복잡해? 성경에서 예수님이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 했으면 그만이지, 무슨 복잡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찾고 난리인가? 게다가 토마스 아퀴나스 할배는 도대체 성경의 말씀을 믿는 거야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를 믿는건가? 단문으로 구성된 성찬제정의 말씀은 해석의 여지가 없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거기에 철학 같은 것 필요 없다. 게다가 성례전이 무슨 마술이냐? 사제가 축성한다고 다 변하게? 성례전은 인간의 어떤 마술적인 힘과 상관없는 하늘의 사건이다. 게다가 예수님은 성찬제정의 말씀을 하시면서 어떤 방식으로 떡과 잔이 변하는지 관심도 없었다. 오직 하나, 제정의 말씀을 믿는 믿음 가운데 예수님은 현존(실재 Real Presence)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 할배는 성례전을 말씀+표지(물질)로 설명했지만 여기에 수찬자의 믿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실재설=제정의 말씀+물질(떡과 포도주)+믿음)
다. 쯔빙글리- 상징설
“제정의 말씀을 다시 잘 봐라. 마지막 구절에 ‘기념하라’(anamnesis)로 되어 있잖나? 그럼 말씀 그대로 보면 성찬의식은 그 날 그 때를 상징하는 행위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잖은가? 좀 생각하면서 성경 좀 읽어라!"
*인문주의 영향을 받은 쯔빙글리는 문자적 해석에 매달리는 루터가 못마땅했다.
라. 루터의 답변
“‘이것은 내 몸이다.’(est)라는 구절은 왜 쏙 빼먹나? 1형식으로 쓰인 이것은 해석의 여지가 없는 주님의 말씀이고, 이것은 그분의 현존(being)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게 상징이라고 자꾸 우겨대는 너(쯔빙글리)는 나와 영이 다르다!!! 결별!!”(1529년 Marburg 회담)
마. 칼뱅- 영적 임재설
* 격동의 한 세대가 지나고 2세대 개혁가를 자처하고 나선 칼뱅은 이 둘(상징설과 실재설)의 강점과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칼뱅은 쯔빙글리와 루터 사이에서 갈등했다. 결국 이런 결론을 내린다.
“쯔빙글리도 맞고 루터 선생님 말씀도 다 일리 있습니다. 다만 제 생각(extra calvinisticum)에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습니다.(finitum non capax infiniti) 이 말을 곧 작은 컵에 무한한 바닷물을 모두 담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유한한 이 작은 컵 속에 무한한 예수님의 몸을 온전히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쯔빙글리 삼촌 손을 들어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루터 샘 말씀대로 주님은 떡과 잔에 분명히 실재하십니다. 다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님이 이 작은 잔에 ‘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이 이 떡과 잔에 실재(현존)하는 것은 신비입니다.”
라. 루터주의자들의 답변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는 칼뱅 말은 옳다. 그러나 시각을 바꿔보아라. 성례전은 하나님의 선물이니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꿔 보아라.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는 칼뱅의 주장은 인문주의 영향을 너무 받은 탓이다. 신학적으로 바꿔야 한다. 루터의 신학을 따르면, ‘무한자(하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아주 간단히 유한 속에 들어오실 수 있다!’ 이것은 신학적 관점이다. 자 무엇이 옳은가? 칼뱅의 관점이 옳은가 아니면 루터의 관점이 옳은가? 성경은 어떤 관점을 가지라고 하는가?”
* 16세기 중반부터 벌어진 칼뱅주의와 루터주의자들의 성찬논쟁은 1973년 이전까지 끝나지 않았다. 결국 이 논쟁은 스위스 바젤 옆 시골 산동네인 Leuenberg에서 종결된다.
1973 Leuenberg Konkordie의 결론: “성찬에 관해 루터나 칼뱅은 결국 같은 얘기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호호....목숨 걸고 근 5백년 원수처럼 지냈는데 너무 싱겁게 끝났나?
출처: 김광석 목사와 함께 하는 성경 공부 글쓴이: 김광석
[출처] 성찬신학 간단히 정리하기, 성찬의효력, 성례전 신학, 화체설에 관하여, 실재설에 관하여, 상징설에 관하여, 작성자 엔젤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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