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예식에 대하여/예식

성찬식의 사중행위와 한국교회 예배의 내일, 성찬식의 신학 [출처] 성찬식의 사중행위와 한국교회 예배의 내일, 성찬식의 신학

에반젤(복음) 2020. 12. 8. 02:07

성찬의 4중 행위(Four Actions)와 한국교회 예배의 내일

 

들어가는 말

한국 개신교회의 대다수는 그 동안 교파와 교단에 상관없이 내용과 형태가 서로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설교가 중심이 된 예배를 드려왔다. 이런 양태에 이렇다할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많은 교회들이 전통적인 예배에 대한 관심이나 동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한 예배에 대한 관심을 확대해 가면서 예배의 다양성이 눈에 띄게 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 가운데는 전자와 같이 예배의 예전적인 측면의 중요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성찬의 위상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후자와 같이 현대적인 구미를 살려 예배에서 형식의 자유를 크게 허용하고 예술적 장르를 다양하게 활용하여 예배의 대중화를 시도하는 그룹들이 있다.

이러한 동향과 시대적인 현실에 직면하여 많은 교회들이 예배를 바라보면서 과연 전통적 예배의 회복은 어느 만큼 필요한가 하는 것과 또 그것은 오늘날 어느 만큼의 가치와 한계를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비롯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적절한 요소, 형식, 스타일을 갖춘 예배는 과연 무엇이냐 등에 대한 궁금증과 관심을 더해 가는 것 같다.

본고는 최근의 다양한 예배신학적 동향에 대해 특정의 경향에만 긍정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가치중립적 입장에 서서 오히려 예배의 목적과 본질에 대한 이해를 정립하고 그 전범을 제시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이를 위하여 먼저 한국 예배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이어 특별히 성찬의 4중 행위에 대한 실제와 신학적 의미들을 탐구하면서 산발적이나마 한국교회 예배의 과거 혹은 현재의 모습들을 다루면서 그 바람직한 미래의 지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I. 세계교회와 한국교회예배의 현주소

A. 예배의 예전성(禮典性)

예배의 예전성 회복에 대한 관심은 최근 예배개혁에 관한 논의의 중심적 화두가 되고 있다. 구미 개신교회들에 비해서 한국교회가 예배개혁에 대한 필요의 인식과 그에 상응하는 반응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그간의 개신교회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기초하여 예배의 예전성(liturgicality) 회복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가고 있는 형편이다. 예전성은 예배의 의식적(儀式的) 측면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교회력에 따른 예배, 상징적 행위나 사물--건축물, 예복, 상징물 등을 포함해서--의 사용, 말씀과 성만찬의 연계성, 그리고 전통적 예배본문들에 대한 의존정도 등에 의해서 예전성의 정도가 가늠될 수 있을 것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말씀과 성만찬과의 관계는 논의의 핵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에 한국교회는 전통적 개신교회의 특성상 말씀과 성만찬이 분리된 양태의 예배가 지배적이었다.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한국교회 예배의 예전성의 여지는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예전성의 결여는 곧 상징성의 황폐화와 연계되어 있다. 이 상징적 영역은 언어적 전달이 다 이룰 수 없는 심오한 단계의, 실재와 맞닿아 있는 영역을 차지한다. Paul Tillich는 현대 세계가 신학과 철학에 있어서 언어의 한계와 혼란에 직면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상징에 대한 역할의 강화로 이러한 한계가 극복될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상징이야말로 일상의 비상징적 언어가 다룰 수 없는 실재의 단계를 열어놓으며 인간의 종교적 영역을 움직일 수 있고 상징만이 궁극자(the Ultimate)를 나타낼 수 있다고 이해하였다. 그런데 Horton Davies는 이 상징과 성찬을 의미 있게 관련지었다. 즉, 그는 성찬을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 상징으로 보고 중시하였다. 중세의 성례전주의가 말씀의 부재로 인한 신앙의 왜곡을 초래한 반면, 개신교회는 이러한 상징의 힘이 약화되어 예배의 지성화라는 또 다른 역기능을 가져왔다. 복음이 전해지는 매개로서의 지적 호소가 필요한 것임은 분명하나 문제는 오늘의 교회들이 현실적으로 말씀만의 예배에 지나치게 경도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최소한의 감성적 인식의 영역인 시(視), 청(聽), 후(嗅), 미(味), 촉(觸)의 감각을 사용한 전인적 예배의 모습과 동떨어져 자칫하면 상당수 신자들이 지나친 지성화로 인해 예배로부터 소외될 가능성을 낳고 있다. 더 나아가서 말씀만의 예배는 오히려 말씀의 왜곡 가능성을 더 심화시켰다. 이는 설교자의 인간적, 또는 개인적 한계로 인한 부정적 역기능들도 함께 증폭시킨 것이다. Charles Rice는 설교는 성찬에 의해서 규정되고, 그 범위가 정해지며 성만찬은 현장에서 구체화되는 본질적 복음이라고 말한바 있다. 또 성찬 앞에서 설교하는 자는 그 성찬이 담고 있는 복음적 본질과 반하는 설교를 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예전성의 결여는 상징성의 황폐화를 가져오며 이것은 나아가서 전인적 신앙을 방해한다. 몸과 영혼,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사이의 이원화, 그리고 그들 사이의 가치의 차이를 두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바탕과는 배치된다. 예배는 신체적 현실로부터 물러난, 단지 영적인 것을 다룸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며 영혼과 몸을 포괄하는 전인적 예배를 지향해야 한다.



B. 예배의 신학적 바탕

한국교회의 예배의 갱신 논의 가운데 신학적 바탕의 건강성에 관한 지적이 적지 않게 있어 왔다. 이와 관련하여 아마도 예배가 하나님이 베푸신 자리로서 그의 기선성(initiative) 혹은 주도권이 드러나고 있는가? 하나님이 예배의 중심에 있는가? 또 예배에서 기독론적 전망은 견지되고 있는가? 따라서 예배가 구속사건을 균형 있게 드러내고 있는가? 등의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기선성은 예배의 성립의 기초를 이룬다. Robert Webber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계약사건(출 19-24)을 예로 들면서 예배의 시작이 하나님의 소집에 의해서 비롯되었음(convoked)을 지적한다(출 19:1-6, 20).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찾거나 갈망하여 시작된 것이 아닌, 하나님이 먼저 부르심으로 예배 사건이 시작된다는 것으로서 계시적 신앙의 근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는 인간의 고안이 아니며 인간이 그 시초를 연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여신, 약속이 있는 사건이다.

또한 예배는 인간이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서, 자신들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는 자리가 아니다. 인간은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불리어진 위치이다. 그러나 오늘날 종종 예배가 흔히 인간 편에서 그 바램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예배로 오해할 때가 많다. 하나님의 중심성에 대한 올바른 관점은 예배의 성격과 설교의 방향에 중요한 지침이 된다. 인간 편에서, 상황 편에서 복음을 해석하고 예배에서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편에서 현실을 바라보고 그것의 변화를 모색하는, 예배의 중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하다.

다른 하나는 예배의 신학적 균형의 문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학적 균형이란 구속사건에 대한 고른 반영이 이루어지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오늘날 실상 많은 이름의 예배들이 특정의 목적을 위해, 특정한 측면에만 강조를 두어 진행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기복성 집회로 자주 표출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신앙적 회합이 하나님을 향한 경배(worship)란 의미로서의 예배라고 지칭될 수 있을는지 모르나 보다 정당한 의미의 예배는 전체 공동체가 모인 가운데 예배 신학적 관점에서 기독교적 가치들이 균형 있게 고루 갖추어진, 정체성이 분명한 예배를 가리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예배의 신학적 건강성을 지키는 한 방법으로서 기독론적 전망에 충실하고 있는지의 문제가 중요하게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예배는 초대교회로부터 예수의 부활 사건, 넓게는 일련의 구속사건 전체를 중요한 예배의 주제로 다루어 왔다. 이런 목적을 위해 교회는 초대교회 때부터 기독론적 주제를 담은 교회력을 사용하여 주기적으로 따라가면서 예배의 신학적 주제의 균형을 추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대망--초림과 재림을 포함하는, 탄생, 세상에 드러내심, 고난, 죽으심, 부활, 교회의 성장 등이 그 내용이었다. 예배가 기독론적 초점과 전망을 갖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재연하는 체계적 틀과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예배의 신학적 바탕은 곧 예배를 통해 존속되고 양육되는 신앙공동체의 건강성을 좌우하는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의 예배가 지금까지 과연 올바른 예배 신학적 기초 위에서, 또 그에 따른 끊임없는 검증에 의해 자정적 과정을 통해 시행되어 왔는지에 대해 질문한다면 그다지 긍정적인 답을 얻기가 어려우리라고 본다. 교회의 중심적 행위인 예배가 중요한 만큼 올바른 예배 신학적 바탕 또한 중요한 관건이 아닐 수 없다.



C. 예배 속에서의 회중(會衆)

예배 및 설교학자인 Charles Rice는 그의 책 Embodied Word에서 오늘날 예배를 위해 모인 회중(會衆, congregation)이 점차 단순히 청중(聽衆, audience)으로 전락해 가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있다. 청중(聽衆)이란 그야말로 듣는 무리를 말한다. 이 말은 라틴어의 듣다라는 의미의 audire에서 나온 반면 회중(會衆)이라는 말은 모이다를 뜻하는 gregare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은 함께를 뜻하는 접두어 com(n)과 더불어 함께 모인 무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배에 참여하는 공동체는 개인의 참여나 결단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방관자와 같은 듣는 무리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함께 모여 예배의 공동집례자(co-celebrant)가 되어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 책임적 연대를 새롭게 해야하는 것이 예배다. 여기서의 진정한 청중은 바로 하나님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배 공동체인 회중(會衆)의 두 가지 당위적 특징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회중은 함께 하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오늘날 첨단정보화시대의 이기인 컴퓨터로 인해 많은 특혜를 누리고 살지만 동시에 사이버 공간에 형성되는 비 물리적 공간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이나 그 유용성에 대한 과신으로 인해 인간의 만남이 온전하여지지 못하고 더불어 서로에 대한 연대와 책임을 상실해 갈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아직 한국교회에 이런 움직임이 미미하지만 마치 현재의 예배가 미래에는 사이버 예배로 대체(代替)할 수 있는 양 기대하는 목소리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예배를 통해 일어나야 할 전인적 헌신과 성도간의 수평적 연대 및 책임을 깨뜨리는 위험한 가정이 될 것이다. 시대와 문명이 아무리 변하여도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예배는 신체적 참여(physical presence)가 동반되는 함께 모이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함께 함을 통해서 서로에 대한 공동적 관심(common concerns)을 나누는 일은 기독교 예배의 중요한 바탕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곧 대 사회적 봉사의 영역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수 없는 교회의 자세를 예배가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회중은 예배의 능동적 참여자라는 것이다. 앞서 예시한 예배신학자인 Robert Webber가 관찰한 성서상의 예배는 모든 참여자가 능동적이었다는 것이다. 즉, 모세에게 지도력이 부여되었는가 하면, 아론, 나답, 아비후, 칠십 장로, 그리고 청년들에게 나머지 다른 역할들이 주어졌으며 각자 주어진 역할들을 수행함으로써 수동적인 관객이 아닌 능동적 참여자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지도자와 청중(audience)의 관계가 아니라 모두가 회중(congregation)의 일부로서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수행하는 조화로운 참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출 24:1, 5).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회의 말씀중심의 예배는 자칫하면 설교자의 부각과 함께 회중의 주변화 및 무관심을 야기 시킬 수 있는 구조를 띄고 있다. Craig Erickson은 수동적 예배는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고 지적한 뒤 활동적 예배의 형태가 되려면 신자들의 참여가 충분하고도 의식될만한 수준에 이르게 하며 또 그것을 고무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예전적인 예배에서 흔히 등장하는 환호사(acclamations)--사람들이 예배 중에 응답의 방법으로 외치는 고정형식, 응답, 시편가의 교송, 상징들의 사용, 교창(antiphone), 교회력에 따른 색깔(colors)의 사용, 제스쳐, 행동, 침묵 등을 사용하는 것이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종교개혁이후 예배의 순서들이 비교적 많이 일반 신자들에게 위임되고 있지만 여전히 오늘의 우리의 예배는 회중이 참여자로서 관여하는 예배 양태이기보다는 설교자와 사회자 및 성가대 등에게 대체적으로 집례가 국한되어 있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야말로 수동적인 상태로 남아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초대교회 예배에서의 신자들의 역할은 예배의 유효성을 결정하는 파트너였다. Justine Martyr가 소개한 예식에 보면, 집례자가 재량껏 성만찬기도를 마치고 나면 사람들의 아멘으로 답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것을 Bard Thompson은 회중이 아멘이라는 응답을 통해서 기도를 승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회중은 개인적인 관심에만 묶여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아니라 서로 서로에 대해서 책임적인 연대감을 나누어야 하는 무리인 것이다. 예배는 바로 이러한 성격을 지닌 회중의 참여에 의해서 드려지는 공동의 행사인 것이다. 이에 참여하는 각 개인들은 결코 수동적인 관망자가 아닌 예배의 성립을 가능케 하는 참여자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II. 성찬의 4중 행위와 예배의 본질

한국교회의 예배의 현황에 대한 비평적 지적과 더불어 상응하는 대안들은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러한 주제들에 대해 성찬, 그 중에서도 특히 4중 행위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대안들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성만찬의 사중행위는 개신교 성찬에서 오랫동안 구체적 형태로 지켜져 왔던 것은 아니었다. 공관복음서(막 14:22-26; 마 26:26-30; 눅 22:14-22)와 바울 서신(고전 11장 23-26)에 나타난 제정기사는 비록 각각의 순서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4가지 핵심적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그 내용은 떡을 취하고(take), 축사한 뒤(bless), 떼어(break), 주는(give) 행위이다. 이 네 가지 행위는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 예배 역사 안에서 봉헌예식(Offertory), 성찬기도(Eucharistic Prayer), 분병(Fraction), 수찬(Communion) 등의 네 가지 성만찬의 장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상호 보완적이며 깊이 연관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예배의 정신을 통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들 각각의 내용과 의미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오늘의 예배가 추구하는 갱신의 방향에 중요한 자료들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은 전통적인 예배문서들과 현대의 주요 개신교 교단들의 성만찬 예식문 속에서 발견이 되는데 그에 대한 검토는 예배에 대한 개신교적 이해들을 통시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A. 성물의 봉헌 - 떡과 포도주를 취함

보통 설교부분이 끝나고 성찬이 시작되면서(성찬이 시행되는 경우를 전제하여) 첫 번째 행위는 떡과 포도주를 취하는(take) 일이다. 이 부분은 바로 집례자가 회중으로부터 성찬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봉헌물을 받는 순서이다. 바람직한 경우는 아니나 과거에는 성물(elements)들이 예식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성찬상에 배열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경우에는 덮고 있던 성찬보를 조심스럽게 걷는 것이 성물을 들고 제단 앞으로 행진하여 나아가는 일을 대신하였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문서들에는 회중의 무리가 집례자에게 성물을 가져다 드리는 일종의 봉헌(Offertory)절차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오늘날의 교회들도 상당수 이와 같이 성물을 헌금과 함께 헌금위원이나 성물운반자들을 통해 단까지 행진하여 나가 드리도록 한 뒤 이어서 집례자가 성물과 헌금을 분리하여 성물은 성찬상에, 그리고 헌금은 따로 놓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 행위가 있는 시점에서 집례자가 드리는 봉헌기도는 성만찬의 첫 단계의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성공회의 Book of Common Prayer의 79년 판에 따르면, "우리가 가져온 일상적인 것을 받으시고 신성한 은총의 선하심으로 우리에게 가져온 그 이상으로 갚아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오려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강건해 지기를" 기도한다. 또한 여기서 드려지는 성물의 내용에 관하여 Justine Martyr의 제 1 변증론에 보면, 오늘의 관행과 비교해서 볼 때 색다른 부분이 있음을 확인케 된다. 성만찬 성물과는 구별해서 드리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예배 안에서 고아, 과부, 몸이 아프거나 어떤 이유로 인해 궁핍한 자, 그리고 나그네들을 위해서 따로 헌금을 하였고 이것을 회중의 의장--당시로는 성직자--은 그들을 돌보기 위해 이것들을 관리하였다. 그러나 성만찬의 봉헌행위(take) 중에 아예 직접적으로 성물 이외의 요소들을 드렸던 한 사례를 5, 6세기 비잔틴 예식에서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바쳐진 봉헌물들의 일부는 성물로 사용키 위해, 일부는 성직자의 생활비를, 그리고 일부는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물을 위해 함께 드려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성만찬의 첫 번째 행위에서 오늘을 위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회중이 그들의 땀과 수고를 드려 생산한 수확물을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일이 상징적 행위인 성물운반 및 행진을 통해서 실행되는 것이 고전적인 모범이라는 점이다. 예배는 인간이 자신들의 노력과 삶을 투자하여 획득한 것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려서 인간의 소유 전체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물론 여기서 사람들이 드리는 소재의 근원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이 사실을 봉헌기도의 내용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나눔이 하나님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시적인, 혹은 불가시적인 모든 것의 주도권을 가지시고 예배를 통해 인간과 대화를 나누시는 것이다.

둘째, 여기서 드려지는 산물은 특정지역, 특정 예배자들에 따라 다른 것들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은 자신들이 속한 삶의 터전에서 산출된 것들이기에 그렇다. 이것은 곧 개개 지역교회들의 문화적인 환경과 삶에 대해 예배는 다양성에 대한 포용적 입장을 지닐 필요를 시사한다. 오늘날 예배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문화의 옷을 입는 일에 대해 많은 공감이 확산되고 있다. 자신들이 속한 문화권에서 나온 상징물들--한국의 경우로 예를 들자면, 밀로 만든 빵 대신에 쌀로 만든 떡--은 그들의 신학과 예배의 독자성을 위해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다양성이 필연적인 지구촌 각 교회 공동체들이 각자 자신의 문화의 결과들에 대한 긍정이 없이는 자신에 대한 정체도 잃어버리기 쉽거니와 나 아닌 남을 향한 끝없는 종속성의 틀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셋째는 봉헌물의 종류는 예배가 사회적 영역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앞서 소개한 동방정교회에서는 오늘날로 말하자면 금전적 의미의 헌금과 기타 구제를 위한 물품이 성물과 함께 드려지고 있다. 초대교회 때부터 이웃에 대해 관심은 교회의 선교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부유한 자는 예배처소에 물건을 선물로 가져와 예배 목적을 위한 성물과 성직자의 삶에 필요한 것을 드릴뿐만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의 생활을 지원하였다.



B. 성찬기도 - 감사를 드림

드려진 성물을 놓고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두 번째 행위는 오랫동안 성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real presence)가 일어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또 개신교 내 여러 진영들 간의 분열의 중심 축에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임재양식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중요한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 부분은 전체적으로 집례자가 행하는 기도로서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위대한 행적에 대한 찬미,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 대한 기념, 성령의 초빙(Epiclesis)을 위한 기도, 영광송(doxology) 등이 포함되나 히브리적 전통(시편 148편)에서 발견되는 기도의 스타일로서 제정사(the words of institution)와 같은 내레이션이 삽입되고 있다. 흔히 이 부분은 초대교회의 성만찬의 명칭이 감사라는 의미의 헬라어, eucharistia에서 온 것임을 강조하면서 대감사(the Great Thanksgiving)라는 명칭으로 많이 불리어지고 있다.


기도를 드리는 몸자세 역시 성만찬 신학의 의미들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검토자료이다. 중세기에는 이 성만찬 기도 시 사제는 제단이 놓인 동쪽 벽을 향한 채 회중에게는 등을 돌리고 행하였다. 성만찬의 성격을 희생제사로 부각시켰던 시대상황에서 사제는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향해 선 일종의 제주(祭主)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의 성찬은 더 이상 희생제사--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한 것을 쪼개고, 부어 제물로 바치는--의 의미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부활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식사요 잔치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회중을 바라보면 서는 것이 일반적이다. 집례자는 잔치를 여신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거기에 서있는 것이다. 지상의 그 어떤 주최인도 식탁에서 벽을 향한 채 손님과는 등을 돌리고 식사를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집례자의 이런 자세는 그의 이중적 대표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는 참된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대표하며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대표한다.

또 일부 어떤 전통에서 참회나 겸손을 표상하여 집례자가 무릎을 꿇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오늘날 대체적으로는 유대인과 초대기독교인들이 하던 관습대로, 또 디모데 전서 2장 8절에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라는 말과 같이 서서 기도한다. 이 기도 중에 회중은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감기보다는 집례자의 기도와 몸짓에 주목하며 참여한다. 이러한 자세들은 집례자와의 일치감 속에서 기도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기쁨과 감사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여기서 성령초빙(Epiklesis)은 과거와 같이 떡과 포도주의 성변화(consecration)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회중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해달라 혹은 성령이 회중에게 임하시어 그들을 변화시키시기를 구하는 기도가 드려진다.

성만찬의 두 번째 행위인 대감사기도 안에서도 역시 오늘의 예배신학적 지침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대감사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에 대한 내레이션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먼저 성부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섭리, 성자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성령 하나님의 내재적인 역사 등이 칭송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오늘에도 현재화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예배는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항구적으로 이 사실이 늘 회상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위대한 행적과 그의 현재적인 역사를 반복적으로 재연하는 것은 곧 기독교 신앙의 건강한 형성을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며, 동시에 회중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힘이 되고 있다.

둘째는, 예배 안에서 내재적인 성령의 역사가 긍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따르면 성령은 곧 가장 중요한 사건의 주체로 기능하고 있다. 예배 안에서 초자연적이고 주체적인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개방된 태도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오늘의 개신교회의 성만찬 기도는 성변화의 대상을 성물로 보지 않고 회중에게 두고 있다는 변화가 목도된다. 과거 중세기와 오늘날의 일부 전통에서는 여전히 변화의 대상이 떡과 포도주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현대 예전의 모범이랄 수 있는 3세기초의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의 성령초빙기도에도 그 대상이 회중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셋째는, 회중이 능동적 참여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집례자는 과거와 달리 회중을 향하여 선다. 이것은 곧 회중이 예배의 참여자로 포괄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집례자가 홀로 주관하는 제사적 예배에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참여자로서 하나님이 베푸신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오늘날 예배 안에서 신자들이 구체적 순서에 참여하는 추세가 증가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 외에도 성만찬은 감사를 드리는 장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떡을 떼시며 감사했던 것처럼 집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감사(thanksgiving, eucharistia)를 드리는 것이지 결코 제사를 준비하는 사전적 절차가 아니다. 예배 또한 감사를 드리는 사건이지 우리의 공로를 하나님께 드리는 장이 아닌 것을 시사한다.



C. 분병 - 떡을 뗌

이 행위는 대감사기도가 끝난 후, 떡을 떼는 순서이다. 소위 분병(Fraction, 聖體分割)이다. 떡은 상징적 행위로 한번만 떼며 회중들이 충분히 관찰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예식서들을 보면 이 부분에 그 의미를 반영하는 한 개 이상의 적절한 구절들을 삽입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미국 장로교회의 Book of Common Worship에서는 바울의 고전 10장 16-17의 말이 인용되는데 집례자는 사람들 앞에 떼지 않은 떡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라고 한 뒤 떡을 떼고 이어서 말한다.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은 그런 다음 성찬상에 놓여지고 주전자로부터 포도주를 잔에 채운 다음 그것을 회중들 앞에서 들면서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냐?"라고 한다. 이어서 떡과 잔을 들은 채 초청의 말을 잇는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준다. Thomas Oden은 이 분병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부서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만이 아니다. 그의 심장, 곧 모든 인간의 고뇌 속에 상징적 으로 참여하는 그의 심장이다. 떡과 포도주는 상징적으로 전체 그리스도(그의 몸과 영 혼)을 상징한다. 고대사회의 생리학에서는 피는 탁월한 생명의 상징이었다. 유대인들의 제사에서 피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었다...하나님은 우리의 양식이 되셨다. 이러한 부서짐이 없이는 어떠한 영적인 양육(nurture)이나 먹임(feeding)이 가능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집례자는 예식에서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게 사람들 앞에서 이 떡을 부수는 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견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성찬이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의미가 한편으로는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어 중세는 물론이고 개신교회 안에서도 여러 세기를 거쳐오는 동안 성찬의 전체 의식이 대체로 이 떡을 뗌(the breaking of bread)의 단계에 지나치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정서를 너무 지배적으로 반영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종종 비판되듯 성찬이 장례식 분위기를 연상시킨다는 힐난을 받아 왔다. 이 정서는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성찬식이 귀결해야 하는 지배적 정서는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떡을 떼는 행위 속에서 나타나는 오늘의 예배 신학적 지침들은 어떤 것들인가?

첫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분병은 곧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건이요, 자기를 내어줌의 사건이다. 유대적 전통에서는 희생은 곧 피흘림을 수반하였다. 비록 동물을 잡아서 드리는 희생제물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혐오스러우나 희생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희생을 은유하였다. 회개와 화해의 가시적 표시로서 하나님께 가치 있는 어떤 것을 드림으로써 자신을 줌을 상징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죽는 것이며 속죄를 이루는 것이며 화해를 성취하는 것이다. 분병에 참여함으로써 신자들은 자신을 위해 대신 죽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참여한다. 이것은 곧 슬픔의 자리요 참회의 자리이다. 간혹 성만찬을 단순히 축제적 분위기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만일 이 분병, 곧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정서를 먼저 거치지 않는 축제성은 무의미하다. 이러한 정서는 예배에서 반드시 반영되어야 할 부분이다. 미국장로교회는 칼빈의 전통을 이어서 고백과 용서(confession and pardon)의 항목을 예배의 초두에 두고 있다. 또 미국 루터교회는 입례송이 있기 전에 고백과 용서(confession and forgiveness)의 의식을 선행하고 있다.

둘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오늘날 이 부분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과도하게 무시되려는 경향이 있다. 부활의 기쁨에 앞서서 고난에 참여하는 과정이 있다는 점이 무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은 곧 예전적 교회들의 예전갱신운동과 개신교회의 갱신운동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이다. 개신교에서의 예배정서에 비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오랜 전통을 지내오면서 미사의 중심이 희생제사였기에 미사 전체가 장례식 분위기(funeral mood)에 지나치게 경도 되어 있다는 자체적 비판이 있어 왔다. 그러나 개신교회의 예배 분위기는 대체로 축제적 성격을 견지하는 편이다. 성찬식도 전체적으로는 이런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무거운 분위기의 찬송가가 선택될지라도 축제성의 회복을 강조하리만큼 장례식 분위기는 아니다.

아울러 셋째로, 이 분병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신자들이 동참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름에는 고난의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그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예배는 위로와 환희뿐만이 아닌 십자가의 삶에 대한 다짐과 실천을 요청하는 자리임을 보여주고 있다.



D. 수찬 - 떡과 포도주를 나눔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고 받는 수찬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이루는 극적인 순간이다. 중세교회는 여기서 받게 되는 성물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살이며 피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 그 결과 성만찬 신학의 초점이 대상화되는 문제를 낳았다. 그러나 개신교의 성만찬 신학은 앞서서 지적한 대로 성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성만찬 행위에 참여하는 회중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떡과 포도주를 받는 무리들은 여기서 다시금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진정한 임재를 맛보며 그와 더불어, 또 사람들과 교제(communion)를 나누게 된다.

이 수찬은 또한 세상의 끝 날을 지시한다. 그 날은 영화(榮華)된 주와 함께 인간역사의 완성된 모습을 나누게 되는 때이다. 그것이 성찬 속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BEM 문서는 성만찬은 약속되어진 대로 하나님이 온전히 통치하시는 모습을 열어 놓으며 그것은 창조가 궁극적 갱신에 이르는 미래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성만찬은 이런 상징들--창조의 궁극적 갱신--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오심을 기쁘게 경축하며 기다리는 잔치라고 표현하였다. 미연합감리교회의 Book of Worship에는 수찬을 마친 후 파송 하기에 앞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여, 당신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이 거룩한 신비에 대해 우리가 감사하나이다. 성령의 권능으로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옵시고 우리 자신들을 다른 사람을 위해 드리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마감한다. 그 나라에 들어감을 간절히 간구하고 있다. 성만찬의 참여는 곧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물씬 담고 있다.

교단 및 교파별로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는 수찬의 양태 속에도 중요한 성만찬 신학들이 내재하여 있다. 예를 들어 침례교, 장로교, 제자교회 등은 의자에 앉은 채 배찬을 담당한 평신도들에 의해서 각자에게 분배해주며 한국의 대부분 개신교회들도 이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공회, 루터교회, 감리교회들은 단(檀)에 설치된 난간(communion rail)으로 나아가서 계단에 무릎을 꾼 채 떡과 포도주를 받는다. 이들 중에서 어떤 교회들은 제 2차 바디칸 이후의 자세, 즉 서서 받는 자세를 취한다. 어느 곳에서는 무릎 꿇는 계단을 없앴다. 어떤 예에서는 예배자들은 서서 떡을 받은 다음 기도를 위해 난간에 무릎을 꿇도록 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체적으로 많은 교회들이 성만찬 신학의 갱신을 통해 서서 떡을 받도록 하는 추세이다. 떡과 포도주를 받는 것은 부활의 주와 깊이 만남을 상징하며 일종의 미래를 향한 희망을 나타낸다. 성찬은 참회의 예식으로 끝나지 않고 감사와 소망으로 맺는 예식이다.

수찬은 예배의 절정을 시사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예배 신학적 의미들이 담겨져 있다.

첫째는, 수찬은 곧 부활에 동참하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성만찬, 더 나아가서 예배 또한 부활의 주를 경축하는 중요한 장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원시교회 때부터 안식 후 첫날인 제 8일, 곧 주일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었다. 사순절 기간 속에 들어있는 6개의 주일마저도 원칙적으로는 사순절의 분위기에 종속되지 않고 여전히 부활을 경축하는 시기로 보았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수찬에서 상징되는 부활의 경축과 참여는 분병의 정서가 전제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둘째로, 수찬은 미래의 하나님나라를 가리켜 준다.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활의 주와 더불어 나누게 되는 온전한 축제의 식사를 지시한다. 이러한 성만찬의 의미는 예배의 지향점을 드러내고 있다. 예배는 곧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완성을 대망하는 이중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의 잔치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있게 되는 혼인잔치와 잇대어 있는 소망의 잔치이다. 예배는 이와 같이 현실에 안주하도록 하지 않고 미래의 완성된 현실을 향해 나아가도록 격려하여야 한다.



III. 실제적 적용의 방법과 그 지향

전통적인 성찬예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행은 예배의 정신을 지켜 나가는 중요한 근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단순히 간결하게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성찬예배의 목적이 올바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성찬식은 앞서 논의한 대로 그 속에 담겨진 축적된 내용들이 상징적 행위와 사물을 통해서 얼마나 구현되느냐의 여부에 성패가 달려있다.

따라서 예배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져 있는 성만찬의 4중 행위는 성찬의 비중의 회복과 더불어 더욱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4중 행위에서 나타난 예배의 정신은 그 적용의 과정에서 과연 어떤 실제적 문제들을 지니고 있으며 적용상의 어떤 방법적 혜안(慧眼)들이 요청되고 있는가?



A. 전통과 동시대적 요청

전통과 동시대적 요청은 기독교 예배가 끊임없는 긴장을 가지고 견지해야 할 중요한 두 기둥이라고 볼 수 있다. 전통은 곧 시대와 상황과 문화를 뛰어 넘어서 기독교의 본질적 메시지가 적용되면서 나타난 구체적 해석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오늘 우리의 신학적 전개를 위한 좋은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예배와 관련해서 전통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성서는 복음에 대한 신학적 진술을 기초로 하여 쓰여진 것이기에 예전적 내용이나 체계에 대한 자료들은 오히려 후대의 교회의 전통 속에 보존된 본문들에 의해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말은 성서 속에 나오는 예배의 단편적 기술들이 후대의 발전적 형태의 예배들과 본질적으로 상이한 점들을 갖고 있다거나 결여된 부분이 있다거나 하는 말이 아니라 복음과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이 시대가 지나가면서 당대의 상황적 요청에 부응하여 발전적 형태로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예배의 형태가 선험적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므로 동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표현방식의 변용이 필요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시켜서 Baumstark의 말에 따르면 오래된 본문일수록 성서의 표현을 덜 직접적으로 담고 있다고 한다. 즉, 성서적 정신을 담고는 있지만 문자적으로 본문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반면 이후의 것일수록 더욱 분명하게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잘 정리된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성찬의 전통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다양한 상황과 처지에서 복음의 본질을 담기 위한 고투 속에 피어난 발전적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동서방을 막론하고 심지어 같은 서방 안에서의 여러 가지 예전들이 존재하지만 그들 예전의 틀은 비록 성찬신학의 차이가 있고 그 내용들의 첨삭 및 순서의 바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제적 실행의 모습은 놀랍도록 본질적 일치를 이루고 특정한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통에 대한 신뢰를 한층 높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성만찬의 전통적인 형식과 의미에 대한 바른 회복이 필요하다. 오늘날 일부 개신교회에서 시행하는 대로 전통적 예문은 배제되어 있거나 거리가 먼, 성만찬의 실행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중세적 성례전주의의 다른 얼굴이 될 수 있다.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고 마시는 그 자체에 성찬의 의미를 두는 것은 곧 성물에 대한 마술적 효험을 기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상징적 행위와 더불어 복음을 수용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성만찬을 매주 시행해야만 된다든지, 성만찬이 설교보다 더 중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논의의 본질적 핵심은 아니다.

전통의 복원과 관련해서 또 한가지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에 이 성찬을 구현하는 방식으로서 창의성의 범위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인가? 목회자나 신학자가 성찬을 시행함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언어를 채택하고 사용하는 일이나 혹은 그의 개인적인 문학적 창의성을 사용하여 성례전적 행위의 내용을 독립적으로 바꾸는 일은 매우 신중성이 요구되는 일이다. 개인적인 창의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통의 복원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다만 사용되는 언어의 동시대성, 기도의 목표가 되는 동시대적 주제들의 적절성, 풍성한 정보에 노출된 오늘의 시대적 상황에 맞는 간결성, 변화된 상징체계 등을 현실화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라고 여겨진다.



B. 사중행위의 의미와 적용

성만찬의 4중 행위는 예배가 지향해야 하는 정신들을 골고루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것들은 그 가운데서 어느 특정의 행위나 그 의미만이 강조되거나 또는 역으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예배의 정신에 고르게 반영되어야 하는 통전적 일부이다.

먼저 성물의 봉헌은 곧 인간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성찬에 임하면서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을 드리고 그에게로 나아감을 필요로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헌신의 산물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대화이지만 동시에 그 대화의 이니셔티브는 하나님께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예배의 정신의 근본적 배경에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주도적인 도움이 있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형태의 예배순서를 크게 네 개의 장, 도입(entrance) 혹은 모임(gathering)--예배를 준비하는 부분, 말씀(word)--성경봉독과 설교가 중심, 성찬(table)--세례가 있을 때는 세례를 포함하는 성례전 부분, 파송(sending forth)--예배자들을 세상으로 다시 보내는 장--으로 구분할 때, 그 첫 장에 해당되는 도입, 혹은 모임 부분에 모두 예배에의 부름--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예배로 부르심--이라는 순서가 첫 요소, 혹은 중심요소로 들어가 있다. 하나님이 예배를 여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으면 예배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경시하고 인간의 가치를 강조하게 된다. 예배는 인간이 지니는 한계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한다.

다음으로 성찬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감사이며 하나님이 그곳에 모인 자들을 위해 축복하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창조와 섭리를 행하시는 성부 하나님, 구속의 역사를 이루신 성자 하나님, 그 완성을 오늘의 현실에 구현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이 기도문 속에 들어 있다. 여기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의 역할이 분담된 가운데 그 역사가 골고루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곧 예배의 대상은 바로 삼위적(Trinitarian)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예배는 기독론적 전망을 견지하되 삼위일체가 예배의 대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성찬기도를 통한 축복의 수혜자는 대상물이 아닌, 모인 무리이다. 과거 성찬기도는 그 핵심이 성물의 성변화(consecration)에 국한되어 결과적으로 여러 모순을 남겼다. 그러나 개신교회의 성찬기도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찬미의 내레이션과 함께 그곳에 모인 자들의 변화를 통한 온전한 교제(communion)를 지향한다.

세 번째 행위인 분병은 곧 죽음과 희생의 사건에 대한 기념의 측면이 강하다. 이미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서 나온 대로 제정사는 곧 예수의 죽음의 기념이었다. 그러나 또한 부활 후의 성찬은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것이었다. 이 둘은 균형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지난 서방교회의 역사 속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이었다. 화체화된 예수의 죽음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에 예배 자체가 장황하고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가 지배했다. 성만찬의 4중 행위 중, 이 부분에 특별한 강조가 있었던 셈이다. 이 부분이 분명 예배의 주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음에는 이의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오늘에 와서 성만찬은, 혹은 넓게 말해서 예배는 기쁨과 축제의 잔치였다고 만 주장하는 것은 균형을 잃은 견해가 될 수 있다. 이 부분은 결코 기쁨의 축제로서의 예배라는 이름으로 무시되거나 약화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이 또 예배의 전형적 의미인양 강조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찬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에의 참여를 의미한다. 이 부분은 분명 오늘날 기쁨을 잃어버린 예배, 축제성을 상실한 예배 등에 도전을 가하는 예배의 측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만이 지배적인 예배의 정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배가 부활의 잔치로서 일찍부터 자리잡았지만 그 부활의 축제성은 종결로서 주어지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몸의 고난도 전제되지 않은 예배의 분위기가 시종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무가치성과 죄성의 극복을 위한 준비적 자세를 불필요하게 만들 수 있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다 중요한 것으로서 그 중의 하나만 강조되고 다른 것이 배제되면 안될 것이다. 오늘날의 예배와 성찬은 이 네 가지의 고른 균형 속에서 특정 주제에 편중되지 않는 가운데 시행될 때, 예배의 목적을 올바로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성찬은 준비하고 희생의 과정을 거친 뒤, 축제적 분위기로 나아가는 일이 필요하다.



C. 본문과 상황의 관계

전통적 성만찬에 관한 내용과 형식에 대한 존중의 필요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논의가 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것을 개인이 속한 각각의 문화 속에서 실제 시행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문화적인 차이가 뒤따를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서 성만찬 성물인 빵과 포도주는 유대적 농목축 환경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이것들을 사용하는 것은 비교적 오랜 역사를 통해서 정통교회의 관례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지구촌 어느 환경과 사회에서나 이견이 없는 공통된 상징성을 갖게 할 것인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밀이 유대인들의 주식이었던 만큼 한국인에게는, 더 나아가서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는 쌀이 주식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극의 에스키모에게 밀이든 쌀이든 모두가 철저히 그들의 삶과는 무관한 것들이었다. 여기에서 문화적인 변용의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오늘날 개신교 예배학자들 가운데 성물에 대해 너무 가벼운 것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현실성과 위엄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의 식탁에서 나눌 수 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일반식사와는 거리가 먼 어떤 것을 성찬 상에서 먹으라고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예수께서 사용하지 않은 어떤 것을 채용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말한다. 즉, 일반인들의 식사에 가까운 것의 사용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문화적인 변용을 위한 노력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인 편이다. 성만찬의 빵으로 사용되어온 자료(속칭, 카스테라)는 지금 구미에서도 낯선 것으로 기독교 예배전통을 따른 것도 아니거니와 우리에게도 실상은 낯선 것이었다. 우리 문화 안에서 오랜 역사를 통해 잔치의 음식이며 의식(儀式)의 매개였던 떡도 아닌 것으로서 성만찬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도,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취급되기 어려운 형태를 띄고 있다.

한 가지 더 부연하자면,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도 마찬가지다. 한국선교 2세기에 접어든지 오래지만 찬송가의 대다수가 외국 곡조에, 외국가사로 된 것을 번역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세계교회와 동일한 곡조와 내용의 찬송가를 부른다는 것도 교회일치의 차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우리에게 친숙하고 우리의 정서를 반영하는 곡조가 희소하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예배의 문화적 변용의 문제는 우리 신학의 세계신학에 대한 독자성을 확보하고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고 회복할 수 있으며 예배의 효율을 높이는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배의 중심적 상징행위인 성찬은, 그 중요성을 감안해 볼 때 상응하는 적절한 문화적 변용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라고 본다.



나가는 말

오늘날 예배의 개혁에 대한 움직임 가운데 예전성의 회복을 통한 개혁의 필요를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 예배에서 성찬의 비중과 가치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함께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평가의 근저에는 성찬의 단순한 행위보다도 그 행위가 동반하는 예배 신학적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성찬과 관련된 해묵은 교리적 논쟁에 대한 또 하나의 주장이 아닌, 그 속에 녹아 있는 오늘을 향한 예배의 소중한 원리와 내용에 대한 재발견을 염두에 둔 말이다.

특별히 성만찬의 틀인 4중 행위는 현대의 예배에 대한 여러 개혁적 고려들에 대해 중요한 방향과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그 내용과 실행의 방법과 거기서 울어나는 상징성을 통해서 4중 행위는 역사적 과정에서 교회가 갈고 다듬은 건전한 신학을 담고 있는 중요한 태(胎)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대적인 상황에서 비록 예배가 동시대적인 요청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하겠지만 전통에 대한 겸손한 의뢰는 여전히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성만찬의 4중 행위의 올바른 이해와 실행은 자칫 황폐해지거나, 왜곡되거나, 균형을 잃거나, 심지어 방향마저 상실할 수 있는 오늘 우리의 예배를 위한 필요한 좌표가 될 수 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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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근환교수 은퇴기념 논문집: 성결과 하나님 나라』서울: 한들출판사, 2000.
김순환, "한국교회를 위한 예배신학적 재고와 방향," 『복음주의신학논총』 통권 제 2권: 214-215.
정장복, 『예배의 신학』서울: 장신대 출판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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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성찬식의사중행위와 한국교회 예배의 내일, 성찬식의 신학     작성자 엔젤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