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계승과 성찬
심재승 교수(돌트대학 조직신학 교수, 미국 CRC교단, 전 백석대 교수)
심재승 박사는 미국 미시건 주 칼빈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칼빈신학교에서 M. Div.와 조직신학으로 Ph. D. 학위를 받았다. 1993년에 CRC(북미주개혁장로회)에서 목사로 안수 받은 후 미시건의 앤아버에서 영어목회를 그리고 새기노에서 성인목회를 전담한 바 있다. 2000년부터 한국의 천안대학교 기독신학대학원(현,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2004년도 가을부터 미국의 아이오와 소재 돌트 칼리지(Dordt College)의 신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바티칸 교리성(敎理省)은 지난 9월 5일 도미누스 이에수스라는 신앙 선언문을 발표하여 카톨릭교회만이 유일한 정통성을 지닌 교회이며 개신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합법적인 사도의 계승권과 성례전적 신비의 참되고 완전한 본질"을 보존하는 교회만이 참된 교회이며, 그렇지 않은 개신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닌 "교회적 공동체" 라는 것이다. 이 선언에 의하면 참된 교회는 사도의 합법적인 계승과 성례의 참된 본질의 유지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한다. 카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사도의 합법적인 계승은 사도 베드로의 수위권이 그들의 교황으로 이어져온다는 것이며 또한 교황은 그의 성직을 섬김에 있어서 무오하다는 것이고; 성례전적인 신비는 그들이 설명하는 성찬의 화체설 (transubstantiation)에 담겨져 있다. 따라서 이렇게 이해되는 사도의 계승과 성찬 위에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최근에 일부 개신교회와 교회 연합 운동을 전개해온 카톨릭 교회가 이러한 주장을 재개한 것은 적지 않은 신학적인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파장이란 그들의 주장이 우리의 개혁신학을 흔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개혁신학은 그들의 주장에 의해서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들은 이미 종교개혁 이후 충분히 논의되고 개혁신학에서 확고하게 형성된 신학의 주제들이다. 그 파장은, 첫째, 참된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종교개혁의 질문이 아직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을 일깨워준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서 고백하는 "거룩한 공회"가 가르치는 교회의 한 몸 됨에 대해서 건전한 시각을 가져야 한다. 둘째로, 카톨릭의 주장은 우리에게 성찬의 참된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찬의 올바른 의미를 교회에 적용하여야 한다.
I. 사도의 계승
A. 카톨릭교회의 주장
바티칸이 1993년도에 발간한 카톨릭교회 교리서는 사도신경의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를 우리는 신경에서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고백한다.' 서로 불가분의 관계인 이 네 속성들은 교회와 교회 사명의 본질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이 네 가지 특징 중에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의미는 다른 세 개의 특징과 의미를 규정한다. 이 말은 베드로를 계승하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카톨릭교회의 제도가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모든 권세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카톨릭의 제도 아래서 교회의 통일성, 거룩성, 그리고 보편성이 이해된다는 것이다.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그의 제자들을 보내신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리스도의 권세를 가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의 말씀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 10:40)의 말씀을 이해한다. 이렇게 파송된 사도들의 사명이 영구적으로 후세에 전달되어야 하는 것은 마태복음 28:20의 말씀, 즉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라고 카톨릭교회는 이해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사도들이 후계자들을 세우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고 말한다. 그러면 사도들이 세운 교회의 기초는 무엇인가? 카톨릭교회는 "무너질 수 없는" 교회의 기초를 마태복음 16:18-19의 그리스도의 말씀에 둔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그들은 또한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요한복음 21:15의 말씀도 인용한다. 결국 그들은 이런 그리스도의 말씀이 온 교회 위에 지배하는 교황의 사명을 부여한다고 주장한다.교황의 직분은 베드로의 수위권, 즉 사도들의 머리라는 카톨릭의 주장에 근거해 있다. 교회의 머리로서 베드로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로마교구를 가르치고 다스렸다고 한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카톨릭교회는 베드로가 로마로 이주하고 거기서 설교하고 거기서 순교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분은 카톨릭교회가
(1) 사도직의 계승이 주교단이라는 교회의 제도로 이어져온다는 것과
(2) 베드로가 사도 중에서 수위권을 가졌듯이 로마교구의 주교, 즉 교황이 주교단의 정점으로서 교회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3) 이렇게 이해되는 사도의 계승을 통하여 교회는 제도적으로 통일되며, 이러한 제도적인 통일 위에 거룩성과 보편성이 이루어진다고 그들은 믿는다.
이것이 카톨릭교회가 이해하는 사도직의 계승이다. 최근에 발표된 바티칸의 문서는 이러한 1993년도 카톨릭의 공식적인 주장에 어긋나게, 그러나 그들의 교회관의 결론에 더욱 일관되게, 그들만의 정통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개신교회는 그들의 참된 교회로부터 분열되어 나갔기 때문에, 비록 교회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참된 교회는 아니라는 점에서 그들의 주장은 과거나 현재나 일치된다.
B. 개혁신학의 가르침
참된 교회는, 카톨릭교회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도의 참된 계승과 성찬의 참된 본질을 보존하는 교회이다.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것에 동의한다. 문제는 사도의 참된 계승과 성찬의 참된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성경은 사도의 계승을 교회의 제도 안에서 개인 인물의 계승으로 가르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와 신앙고백으로 가르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우리의 이슈이다. 우선 우리는 성경 자체가 사도들의 계승인 것을 지적해야 한다. 성경이 전해주는 복음이 개인 인물에 앞서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의 계승이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 1:1-2에서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한 사람들로부터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사도행전 1:1-2에서 그의 복음서가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에 대한 사도들, 즉 "말씀의 목격자"들의 증언 기록이다. 성경 자체가 바로 사도들의 계승인 것이다. 그리고 교회도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진 사도의 계승이다. 바울은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사도의 계승을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 2:21). 이러한 교회는 하나인 그리스도의 몸으로 통일되고, 거룩하며, 보편성 안에 온 지체 교회들이 연합하며, 사도들의 참된 가르침 위에 세워져 있다.
칼빈은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로써 그리스도 외에 다른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직 복음에 대한 올바른 설교와 그에 대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다고 가르친다. 그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 16:18-19)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카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교황의 교리를 말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이 부분의 뜻을 헤아리면서 이와 동일한 내용을 말하는 부분을 언급하여야 한다. 위의 것을 말한 동일한 마태는 그의 복음서 18:18에서 같은 내용이 전체 사도들에게 말해진 것을 기록하고 있다: "...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요한복음 20:23도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칼빈은 베드로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온 교회를 대표해서 그가 그리스도를 고백한 것이며,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온 교회가 한 몸으로 연합함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동시에 칼빈은 카톨릭의 교회론 주장이 초대교회의 일치된 교회의 제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씨프리안의 말을 인용한다: "한 사람에게 열쇠를 주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며 모든 사람이 하나인 것을 알리신 것이다."
어거스틴의 주해는 좀 더 분명하게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바로 그 분, 그리스도 자신 위에 교회가 세워질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반석"으로부터 이름을 받은 베드로가 반석 위에 세워진 이 교회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네가 반석이다"이라 하지 않으시고 "너는 베드로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반석은 베드로가 옳게 고백하고 온 교회가 동의하여 고백하는 바의 그 분, 오직 그리스도 이시다 (고전 10:4). 그러한 고백 때문에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교회의 유일한 반석은 그리스도이시며, 교회는 그의 말씀 위에서만 참된 교회로 존재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이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을 하는 것은 비성경적이요, 사실적인 근거가 없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권리 침범인 것이다.
C. 결론
결론적으로, 카톨릭교회는 베드로의 직접 계승이라는 교황의 개인적이며 제도적인 통일과 일치로 사도의 계승을 이해하고, 이러한 기초 위에 교회의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을 설명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교리는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종교개혁이 바로 이러한 카톨릭의 교회관에 대한 부정이요 거부였다. 개혁신학은 전통적으로 설명되어온 교회의 특징들,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그리고 사도의 계승을 부인하지 않았다. 개혁신학은 이러한 네 개의 특징들을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머리시라는 진리 위에서 이해하고 인정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머리시요 반석이라면, 사람은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그리고 개혁신학은 교회의 기능적인 면을 중시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결하게 가르치고 고백하는 것에 참된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를 두었다.
따라서 이러한 기초 위에 이해되는 사도의 계승은 사도와 설교자가 교회를 다스리는 권세를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영광스러운 사명과 책임, 그리고 기능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서 개혁신학이 전통적으로 가르치는 목소리에 진실되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교회의 참된 표식의 시작은 바로 성경 말씀의 순결한 전파와 그에 대한 진솔한 신앙고백이다. 여기에 목회자를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뜨거운 심장이 있으며, 바로 여기에 목회자의 영광스러운 소명이 있다. 카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온 교회를 다스리는 권세로서의 "열쇠"의 잘못을 장로교회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열쇠"란 복음을 전파하여 성도가 구원을 받아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교회 위에 군림하는 다스림의 열쇠가 아니다.
II. 성찬
카톨릭교회는 그들이 주장하는 사도의 계승과 성찬의 이해에 근거하여 그들만이 교회의 정통성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지난주에 우리는 사도의 계승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이번 주에는 성찬에 대하여 논의하기로 하자.
A. 카톨릭교회의 화체설
카톨릭교회는 그들의 성찬을 화체설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화체설이란 그들의 미사에서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9세기에 이르러서 시작된 이 화체설은 중세의 형이상학적인 언어들과 개념들을 사용하여 형성되고 마침내 1215년에 제4차 레이터런 공의회에서 카톨릭교회의 공식적인 교리로 채택되었다. 그 후 카톨릭의 화체설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완성된 형태를 이룬다. 그의 가르침은 모든 중요한 카톨릭의 회의와 1993년도에 발간된 카톨릭교회 교리서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카톨릭의 트렌트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떡과 포도주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빵의 형상으로 내어주시는 것은 참으로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빵과 포도주의 축성으로써 빵의 실체 전체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포도주의 실체 전체가 그리스도의 피의 실체로 변화한다. 카톨릭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적절하고도 정확하게 실체변화라고 불러왔다."
그들의 주장처럼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본질적으로 변화하였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떡과 포도주는 무엇인가? 떡과 포도주의 근본적인 성질이 사라진 후에도, 그 사물의 외양이 자연적인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렇게 이해되는 성찬 자체가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토마스의 주장인데 이것은 최근의 카톨릭 문서에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화체설은
(1) 그리스도의 몸이 떡이라는 외양 속에 숨어있지 않다면, 성찬 때에 그 몸이 실제로 주어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이것이 내 몸이다" 그리고 "그것은 참된 양식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이 진실이려면, 성찬의식의 떡은 참된 그리스도의 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임재"를 주장하게 한다.
(2) 이 "육체적인 임재"는 몇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로, 떡 안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임재는 그의 속성상 불가능하다. 그리스도는 어떤 물체 안에 육체적으로 포함시킬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인식한다. (3) 둘째로, "육체적인" 그리스도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몸의 본질과 떡의 본질의 혼합이라는 또 하나의 실제적인 문제를 야기시킨다.
(4) (2)번과 (3)번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1)번을 만족하기 위하여 그들은 떡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본질적으로 변화하며, 떡의 본질은 더 이상 떡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구로 도망하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철학적인 궤변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카톨릭의 화체설은 결국 떡과 포도주라는 표징을 그것이 상징할 본체와 육체적으로 일치시키므로 성찬 자체를 "희생제사"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카톨릭교회는 성찬 자체를 변화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것이 근본적으로 희생제사라는 그들의 이해는 당연한 논리적인 귀결이다. 희생제사로서의 성찬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전 11:24)는 그리스도의 의도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칼빈이 언급하는 바와 같이, "받아 먹으라"는 그리스도의 뜻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사"로 만들고 만 것이다.
B. 성경의 가르침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과 "떡"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6장은 오병이어 기적의 사건으로 시작한다. 이 기적으로 배부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께 와서 "억지로 잡아 임금"을 삼으려 하였다. 이에 예수께서는 만나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살과 피가 성도들을 위한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라는 말씀을 하신다. 이러한 요한복음 6장의 흐름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떡"을 통해서 영적인 가르침을 주려는 의도가 있으신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6:32절에서 "하늘에서 내린 참 떡"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곧 이어서 그 떡이 "생명의 떡"인데 바로 자신이 그 떡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떡을 먹은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5절). 그리고 51절에서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비유를 따라서 예수께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말씀하신다 (55절).
결국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결론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는 48절의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떡"이라는 육신의 생명에 가장 중요한 양식을 통해서 영적인 가르침을 주신다. 그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복음을 "떡"을 통해서 가르치신다. 모든 사람들은 떡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먹지 않고 살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죄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얻어지는 소중한 영생을 예수께서는 이러한 "떡"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이와 동일한 가르침을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서 "물"을 통해서 배운다. 메마른 땅에서 물을 길러오는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물"과 "생수"의 비유를 통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구원의 풍성함을 말씀하신다 (요 4:14). 4장에서 물을 통해서 그리고 6장에서는 떡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믿음으로 얻는 영생의 풍부함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성찬을 제정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전 11:24). 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자신의 몸을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서 먹게 하시는 것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비유이다. 요한복음 4장과 6장에서 자신을 비유 안에서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로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은 이러한 비유를 성찬식으로 제정하고 계신 것이다.
C. 칼빈의 성찬 이해
칼빈은 카톨릭의 화체설을 "야만," "미신," 그리고 "궤변"이라는 표현으로 그것의 비성경적인 허구를 드러내었다. 그의 시대에는 카톨릭의 화체설 이외에도 루터가 가르친 공재설 그리고 즈윙글리가 가르친 기념설이 있었다. 공재설이란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하지는 않지만 몸이 떡 "안에, 함께, 아래에" 육체적으로 임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기념설이란 성찬은 단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을 상징하는 기념이라는 것을 말한다. 칼빈은, 카톨릭의 화체설에 대한 것처럼, 루터의 "육체적인" 공재설을 배격하고 동시에 단순한 기념설도 비판하였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성찬 안에 육체적으로 임재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는 승천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하는 것처럼 그의 능력과 영적인 유익이 거기에 임재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칼빈의 해석은 영적임재설이라 부른다.
1. 성찬의 정의: "...한 것과 같이, ...도 진실로 그러하다"
성찬을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가지의 중요한 정의를 이해해야 한다. 첫째, 성찬, 즉 성례는 "...한 것과 같이, ...도 진실로 그러하다" 라는 공식으로 설명된다. 이것이 바로 성례의 의미이다. 이러한 성례의 의미를 벌코프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감각적 또는 눈에 보이는 표적을 통하여 영적인 진리들을 표현하는 것이 성례의 한 특징이다."
성찬의 두 번째 정의는 상징에 관한 것이다. 성찬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그 나타내고자 하는 영적인 실제를 명백하고 진실되게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라고 그리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고전 11:24-25)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자신의 몸이 아닌 떡과 포도주를 가리키셨다. 여기 "...은 ...이다"라는 표현은 물론 비유이다. 그것은 "성령이 비둘기 같이" (요 1:32) 그리고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 10:4)의 표현과 동일하게 환유법으로서의 비유이다. 칼빈은 여기의 비유는 이순신 동상을 사람들이 이순신이라고 부르는 바와 같은 단순 지칭으로서의 비유와는 다르다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비둘기로서의 성령의 비유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성령의 임재"가 비둘기 안에 존재하므로, 이 비유는 성령이 계시는 명확한 보증으로서의 비유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찬의 떡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시다고 칼빈은 믿는다.
2.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성찬 안에 어떻게 임재하시는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떡과 포도주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영적으로 임재하시는 실재를 나타내는 명확한 보증으로서의 상징이다. 다시 말하면, 떡과 포도주는 "빈 형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과 효과가 그의 약속을 따라 임재하는 전달 매체이다. 칼빈의 말을 들어 보자.
"그러므로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속이지 않으며 우리를 빈 형상으로 우롱하지 않으시고 떡이라는 상징을 주실 때에 주님은 동시에 그의 몸을 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징에 실재가 결합된다는 것은 내게는 대낮과 같이 명백하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떡을 먹을 때에 우리는 진실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게 된다... 내 결론은 그리스도의 몸이 진정으로 성찬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져서 우리의 영혼을 양육하는 양식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그의 몸에 의해서 양육되어,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찬을 제정하실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그의 약속을 함께 주신 것이다. 그 약속이란 우리가 성찬에 믿음으로 참여할 때에 그의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는 약속이다. 우리는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성찬에 참여한다. 성찬을 행할 때에 당신은 떡을 본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의 표징이라고 듣는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 그 말의 의미를 진실로 실행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라. 즉 당신이 전혀 보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당신을 위한 영적인 양식이라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실행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라. "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칼빈은 다음과 같이 좀 더 평이한 말로 설명한다.
"일종의 유추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인도된다.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으로서 떡을 받을 때 우리는 곧 비교되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곧, 떡이 우리의 신체에 영양과 생명을 주어 신체를 유지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영혼에 힘과 생명을 주는 유일한 양식이다."
이것이 바로 성례 자체가 요구하는 "...한 것과 같이, ...도 진실로 그러하다"라는 공식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례의 의미이다.
D. 성찬을 통해서 얻는 유익
개혁주의 교회는 성찬의 올바른 시행을 참된 교회의 표식 중의 하나로 삼아 왔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절실한 의미가 있는 음식이라는 상징을 통하여 구원의 복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시고 우리와 연합하셨음을 우리 눈에 보이고 우리 입으로 맛을 보는 분명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따라서 성찬은 눈에 보이는 복음으로써 복음의 핵심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전달하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일년에 몇 차례 치루는 행사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도와의 연합이라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전달하는 소중한 기회로 시행되어져야 한다. 성찬은 믿는 성도들을 위한 표징과 인치심인데 아래의 내용에 대한 표징이요 인치심이다. 다음과 같은 순서로 성찬 설교와 의식을 인도하는 것이 성찬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유익할 것이다.
1. 성찬은 주의 죽으심에 대한 표징이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6).
2. 성찬은 성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사실에 대한 표징이요 인치심이다. "인자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심" (요 6:53)을 통하여 성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한다.
3.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는 영혼의 생명과 능력, 기쁨이다. 떡과 포도주가 인간의 육체적인 생명을 양육하고 힘을 공급해 주듯이 그리스도께서도 영혼의 생명을 유지시키시고 소생시키신다.
4. 성찬은 성도간의 연합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공유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영적인 통일성을 가지며, 이러한 지체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태그 성찬과 사도적계승
[출처]성찬과사도적 계승 작성자 엔젤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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