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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비전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다(민13장17-33)

에반젤(복음) 2020. 11. 14.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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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다(민13장17-33)

<학생회헌신예배 설교>

성경본문: 민수기13:17-20

17. 모세가 가나안 땅을 탐지하러 그들을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남방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18. 그 땅의 어떠함을 탐지하라 곧 그 땅 거민의 강약과 다소와

19. 그들의 거하는 땅의 호 불호와 거하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20. 토지의 후박과 수목의 유무니라 담대하라 또 그 땅 실과를 가져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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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4

26.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회보하고 그 땅 실과를 보이고

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28.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29.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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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바란 광야에 있으면서 한 지파에서 한명씩 12명을 뽑아 가나안 땅을 자세히 정탐하고 오도록 한다. 12명은 자세히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하는데, 그 중 10명은 曰 “우리는 올라가서 저들을 이길 수 없다 저들을 우리보다 강하다 저들 앞에 우리는 메뚜기 같다(민13:31-33)”고 보고한다. 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밤새도록 애통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애굽에서 나온 것을 후회한다. 그리고 자기들 나름대로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결의한다.

 

이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백성들을 안심시키며 曰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고 말한다.

 

이들 12명은 똑같은 기간동안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것을 보고 왔는데 너무나 다르게 말했다.

그렇다면 한쪽은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다. 이들을 보는 것은 다 맞다.

단지 관점이 다른 것이다.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 앞에 나타났을 때, 병사들은 한결같이 생각했다. "저렇게 거대한 자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다윗도 골리앗을 보았으나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저렇게 크니 절대 빗맞을 일은 없겠군."

 

10명의 정탐꾼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본 것이다. 똑같은 상황을 보고 어떤 사람은 두려워 떨며 포기하자고 하고, 어떤 사람은 새 힘을 얻어서 도전해 보자고 한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그것은 볼 것을 본 사람과 볼 것은 보지 못하고 안볼 것만 본 사람과의 차이이다.

 

소련에서 우주선을 발사했다.

그리고 승무원이 돌아와 소리쳤다.

“내가 보니 하나님은 없다.”

 

10년 뒤 미국에서 우주선을 쏘아 올렸고 승무원이 돌아와 말했다.

“우주에는 하나님이 없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훗날 목사가 되어 세계를 다니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간증하고 있다. 무엇을 보느냐? 가 중요하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는 실로 크다. 비전문가는 ‘안 되는 이유’만을 보지만 전문가는 ‘되는 이유’만을 본다. 비전을 볼 것을 보는 것이다. 즉 꼭 봐야할 것을 보는 것이다. 이제 비전은 성공과 실패를 넘어 죽느냐 사느냐? 의 문제이다.

 

모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다. 그는 히브리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남자아이를 죽인다는 정책으로 부모가 그를 나일 강에 떠내려 보냈고 투트모스 1세의 딸이자 훗날 이집트의 왕이 되는 여인의 양자였다. 그래서 모세는 세상의 모든 학문을 공부했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과 히브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때려죽여 살인자가 되서 사람들의 얼굴을 피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간다(출2:11-15).

 

사람들은 모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부족함 없는 사람이 왜 사람을 죽여 살인자가 되었단 말인가?

 

그러나 <히11:24~26>은 잘 설명한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 말은 모세가 거절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부탁을 받은 것이다.

모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비전 혹은 사명)이 무언지를 안 것이다.

 

자신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가나안에 가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안 것이다.

남보다 더 가진 것이 사명이고 아픔이 사명이고 부담감이 사명이다.

 

그 사명을 붙잡고 녹슬어 없어지기 보다는 닳아 없어지는 인생을 꿈꾸라.

사명의 크기가 그 사람의 크기이다.

 

사람은 맡은일만큼 커진다. 나는 몸을 아끼고 천국 곱게 갈 마음은 없다.

마르고 닳도록 주를 위해 쓰임 받다가 완전히 낡고 헤진 몸으로 주님에게 가고 싶습니다.

 

워너메이커는 “내가 장관으로 일하는 것은 부업이고 나의 본업은 주일학교 교사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비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를 물으면 선생님, 공무원, 은행원, 정치가, 가수, 연예인, 목사...등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장래희망이지 비전이 되기는 힘들다.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은 비전이 아니라 비전을 이루는 중요한 방법일 뿐이다.

 

우리는 의사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의사’가 될 것인가? 를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목사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목사’가 될 것인가? 를 진지하게 묵상해야 한다.

 

그러므로 비전이란 “무엇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비전이란 공부를 많이 했건 적게 했건, 내가 생명이 있는 한 꼭 해야 하는 일이다. 나이, 직업, 성별, 학력, 재정적 능력, 건강도 상관없다.

 

이처럼 비전이란 내 삶의 목적이며 왜 사는가? 에 대한 해답이다. 또한 우리는 이 비전을 위해 살며 삶의 기쁨과 감사를 누리게 된다.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란 말이 있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향해 비전(=사명)의 종소리를 울리신다. 남보다 더 가진 것으로, 남다른 아픔으로, 남다른 부담감으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비전을 가르쳐 주고 계시다. 지금까지 못 알아들었더라도 이제라도 귀를 열어 인생의 목적을 알리는 하나님의 종소리를 알아들어야 한다.

 

주님은 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마6:25)”고 하신다.

이 말은 이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분명 있다는 것이다.

 

칼 힐티란 사람이 曰 “내 인생의 최고의 날은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발견한 날이다”고 했다. 인생을 살아야 하는 목적을 발견했을 때에 사람에게는 힘이 생기고 삶의 활기가 생긴다.

 

유목민이었던 아브람은 너무 가축이 많아져서 조카의 종들과 자기 종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조카와 헤어질 것을 결심한다. <창13:8-9>에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한다.

 

그러자 조카 롯은 삼촌에게 양보할 생각도 안하고 눈에 아름다워 보이고 풀이 넉넉한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다. 조카 롯을 떠나보내며 삼촌 아브람은 그가 잘 살길 기도하지만 소돔은 전통적으로 심히 타락한 도시였다. 한번은 적이 롯의 가족을 잡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사병 318명을 데리고 가서 구출해 온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너무 심해 하나님이 그 도시를 멸하기로 작정하신다(창18:20-21). 하나님의 계획을 안 아브람은 자신의 조카가 사는 땅이기에 하나님에게 간구한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겠습니까? 성중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들을 용서하시겠습니까?”라고 기도하고 생각해 보니 50명의 의인이 없을 듯 하다. 다시 기도하길 의인 40명, 의인 30명, 의인 20명, 아니 의인 10명이 있다면 주님 어쩔랍니까? 라고 묻자 주님 曰 “내가 의인 10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창18:28-32).”

 

결국 의인 10명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당한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가 많아서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 의인 10명이 없어 멸망당한 것이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의인이 없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10명’은 어떤 사람인가? 잘생기고, 많이 배우고, 힘센 사람인가? NO

의인10명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평생의 사명으로 알고 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10명을 말한다. 배부르든 배고프든, 힘들든 편하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목숨 걸고 살수 있는 10명의 사람을 말한다. 과연 우리 교회에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큰 교회란 사람들이 많아서 천문학적 헌금이 나오고 그것을 갖고 마음껏 사용하는 곳이 아니라 진정한 큰 교회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을 만들어서 그 사람이 세상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교회이다.

 

우리의 질문은 “교인이, 헌금이, 건물이 얼마나 되요? 가 아니라 베드로 같은 사람이, 디모데 같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요?”라고 물어야 한다.

 

리빙스턴 선교사는 “내 사명을 다할 때까지는 절대 죽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할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죽음은 두렵지 않다’고 항상 말했다.

단지 “주님 주신 사명을 다 이루지 못하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리빙스턴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마28:20>에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신입 선교사를 보내주기를 선교부에 연락했는데 1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것이다. 하루는 선교부에서 편지가 왔는데 曰 “선교사님에게 갈수 있는 길이 없다고 다들 돌아옵니다. 길을 가르쳐 주십시요.” 그 글에 대한 답신은 리빙스턴은 이렇게 적었다. “선교사는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 와야 하고, 다리가 없으면 만들고 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선교사의 자격조차 없는 자들이다”고 편지했다.

 

리빙스턴에게 있는 비전은 그를 두려움에서 자유하게 만들었고, 곁눈질하지 않고, 남과 비교도 하지 않고 오직 한길만을 보고 달려가도록 만들었다.

 

엘리야는 당대에 영적인 거인이었다. 그는 갈멜산에서 기도하여 하늘의 불이 내리게 함으로서 강력한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받은 자였다. 그런데 그에게 이세벨 여왕으로부터 ‘당신을 죽이겠다(왕상19:2)’는 경고장이 왔다. 영적 거인 엘리야가 그 편지를 읽는 순간 떨기 시작하더니 모든 것을 팽개치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길 정도 도망 와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 자기를 죽여 달라고 기도한다.

 

그런 엘리야를 하나님은 죽이지 않고 천사를 보내 먹이고, 재우신다. 왜? 아직 그에게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두려움으로 잊어버린 비전을 하나님은 그대로 갖고 계셨다. 엘리야에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그에게 할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에게 기름 붓는 일이다.

 

196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재건합시다’라고 인사를 했다. 아이들도 가슴에 ‘재건합시다’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고, 어른들을 새마을 복과 모자를 썼고, 그 당시 최고 유행곡은 ‘잘살아보세’였다. 그것이 조금 지난 뒤 우리는 [국민교육헌장-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을 외웠고, ‘새마을 노래’를 불렀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라는 노래였다. 당시 독일로 간호사를 수출했고, 베트남으로는 군인을 보냈고, 그 돈으로 경제개발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잘 사는 나라’는 우리 모두의 꿈이었다.

 

외적인 잘사는 나라가 진행되는 동안 내적으로는 민주화 운동이 계속되었다. 많은 대학생들이 허구한 날 두 주먹 불끈 쥐고 ‘아침이슬’ 노래를 불렀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이런 역사의 과정들을 거치며 오늘의 우리나라가 되었다. 정말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전을 이룬 것일까?

 

옛날에는 돈도 적고, 문명의 혜택도 적었지만 사람 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각종 혜택도 많고, u국민소득도 세계11위라고 한다. 그런데 잘산다고 말하긴 뭔가 부족하다.

 

<마6:25>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우리가 먹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입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마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정치인이 되고, 목사가 되고 등 ..., 무엇이 될 것인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마 6;33>의 말씀처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즉 무엇이 될 것인가? 보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가 더 중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무엇이 될 것인가? 에만 집중하고 노력했다. 그러니 그것이 된 후에 우울증이 생기고, 교만하고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목사, 정치인, 기업인이 되라”고 말이다.

 

당신의 비전은 무엇인가?

사장인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장님이 되라. 부자인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부자가 되라. 운동선수인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운동선수가 되라. 목사인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목사가 되라. 무엇이 되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이 당신의 비전이 되어야 한다.

 

이 한가지 목표에 당신의 남은 생을 불태우라.

어느 소년이 집근처 목수 아저씨 집에서 아저씨가 일하는걸 보며 무척 신기해 했다. 정말 신기한 건 목수 아저씨가 정확하게 못을 박는 것이었다. 자기는 아무리 흉내를 내도 번번히 자기 손등을 때리는 것이었다.

묻길 “아저씨와 제가 일하는 차이가 뭔가요?”

목수 曰 “너는 못질할 때에 못과 손을 번갈아 가며 보지만 난 못만 본단다.” 이것이 집중의 원리이다.

 

또 금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루빈스타인에게 “당신의 성공의 원리가 무엇이냐?”고 누군가 물었다.

뜻밖에 그는 답이 “무관심이요”라고 했다. 그는 음악 이외의 일에는 무관심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이제 한가지에 집중하자.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생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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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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