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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연구(上)

에반젤(복음) 2020. 10. 18. 18:19

하나님 나라연구

 

 

I.어휘의 문제

 

공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the Kingdom of God)’와 ‘하늘나라(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the Kingdom of Heaven)'라는 두 어휘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어휘의 공통어인 ‘나라(βασιλεια)’를 살펴본 후에 이 두 어휘의 차이점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A.‘나라(βασιλεια)’

 

이 단어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 해석하는데 매우 중요한 논점이다. 그러므로 언어학적인 출발에서 이 단어를 고찰해야 한다.

신약성서에서 ‘나라’라는 단어의 우선적인 의미는 ‘왕국’이나‘백성’보다 ‘통치’의 개념이다 1).최근에 이 주제에 대하여 비평 학자들에 의하여 많은 관심이 모여졌으며, βασιλεια 의 뜻으로 ‘왕국’ 혹은 ‘백성’보다 ‘왕의 능력,권세’란 개념이 더 기본적이라는데 실제적인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일반적인 언어 사용에서 보통 왕국, 나라로 번역되는 βασιλεια 라는 말은 모든 다른 용례보다 먼저 왕의 성격, 지위 등을 지칭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왕에 관한 말이므로 우리는 먼저 그의 위엄,그의 권세를 말한다.”1) 이 추상적 의미는 아마도 우리 주께서 그의 가르침에서 사용하셨던 아람어 말쿠트(malkuth)에서도 발견된다. 최근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달만의 판단을 확증한다.“구약 성서와 유대 문헌에서 말쿠트가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는 언제나 왕적 통치를 의미하며, 그것이 왕이 다스리는 영토를 의미한 것처럼 결코 그 나라를 의미하지 않는다는데 추호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2)

바실레이아의 이 추상적 의미에 대한 몇개의 실례가 신약성서에서 발견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곧 나타날 것으로 생각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바실레이아를 받기 위해서 먼 나라로 갔다가 돌아온 한 귀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여기서 바실레이아는 영토나 백성이 아니며, 그 백성에 대하여 주어진 영토에서 왕으로 통치할 권세임이 명백하다.(눅 12:19) 이와 동일한 용법이 계시록 17:12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바실레이아라는 단어의 이 정의는 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의 뜻을 위한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바실레이아가 나오는 모든 곳에 ‘통치, 왕권, 주권’을 대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왜냐하면 때로는 추상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이 단어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왕적 권세는 그 백성을 포함하며 어떤 영역이나 영토로 표현된다. 바실레이아의 의미의 정상적인 확장은 세속적 영역과 종교적 영역에 있어 모두 신약성서에서 발견된다.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다 연결시키는 것을 보게된다.4)

이와같은 연구에서 우리는 ‘나라’의 단어가 우선적으로는 주권을 뜻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으며, 이 주권에서 의미가 확장되어 다스리는 영토를 포함한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주권자의 의도가 ‘나라’라는 단어에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아야 한다.

 

B.‘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천국)’

 

이 두 어휘의 사용을 공관복음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 어휘가 마태복음에는 4번, 마가복음에는 16번, 누가복음에는 32번이 사용되고 있는 반면에5) ‘하늘 나라’ 어휘는 마태복음에 30번이 사용될 뿐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5)

마태복음 4장 17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선포하심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태복음 10장 6절,7절에서는 예수님께서는 12제자에게 ‘천국’에 대하여 가르치고 계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누가복음 6장 20절에는 예수님께서 12제자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계시며, 마태복음 13장에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나, 누가복음 8장 11절과 마가복음 4장 11절에서는 마태복음과 동일한 비유를 ‘하나님 나라’로 표현하고 있다.5) 이와같이 각 복음서에서 어휘가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복음서 저자들이 두 어휘에 대한 개념과 이해가 없었기 때문인가? 이와같은 의문점을 가지고 이 두 어휘에 대한 의미의 차이점을 발견하고자 하는 많은 연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저자들에게 있어서는 두 어휘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분명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마태복음에 사용된 ‘하나님 나라’의 어휘가 ‘하늘 나라’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9장 23절,24절을 예로 살펴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 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

라’에 들어 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

 

‘천국’과 ‘하나님 나라’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의미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왜 복음서 저자들은 편협된 어휘로 복음서를 저술하였을까? 이와같은 의문점은 복음서를 저술하게 된 동기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쉽게 이해된다. 복음서는 기록되기 이전에 Kerygma를 내용으로 한 것을 이어서 저술되었다.5) 그러므로 복음서를 읽거나 듣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하기 위한 목적이 복음서에는 있다. 때문에 복음서가 읽혀지거나 보는 사람들에게 좀 더 친숙한 표현과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복음서가 기록되기 이전에 흩어진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각기 독특한 복음의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는 사실5)도 다른 어휘를 사용하게 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마태가 ‘하나님 나라’의 어휘 보다는 ‘하늘 나라’라는 어휘를 사용한 이유는 그의 복음서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저술되었으며5), 복음서 저자들 중 가장 유대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의 표현은 히브리어의 ‘말쿧 샤마임(malkuth shamaim)’을 문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기를 회피하는 고정된 유대식 언어사용과 관련이 있다5).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기를 회피하는 간단한 방법 중 하나로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또한 마태가 ‘하늘 나라’ 어휘를 사용한 것은 마태 자신이 유대적인 사람이기에 ‘하나님 나라’ 대신에 습관적으로 ‘하늘 나라’를 사용한 것이다6)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가나 누가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의 복음서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저술된 것7)이기에 오히려 유대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적인 ‘하나님 나라’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8). 심지어 누가가 ‘그 나라’라고만 기록하였을 때도 이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9). 그러나 유대교적 표현으로는 이와같은 용법을 찿아볼 수 없다. 유대교에서는 단독적으로 사용되는 나라는 당시의 통치권을 가진 로마제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0).

이상에서 우리는 이 두 어휘의 차이점은 의미의 차이가 아니라 당시의 성서를 기록한 사람의 출신이나, 그 복음서를 누구에게 보낸 것인가?가 어휘의 선택을 가져왔음을 보게 되었다.

 

II.‘하나님 나라’ 사상의 역사적 변천과정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은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이다.(마4:17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선포 뒤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 곳인지에 대하여 본질이나 존재를 증명하는 설명이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11).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 사상에 매우 친숙하고 있었음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이와같은 선포에 대하여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요단강 사방에서 나아오고 있었다12). 그러나 후에 예수님께서 점차적으로 비유를 통하여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특징을 설명하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유대인들에게는 친숙한 사상이지만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와는 의미에 있어서 상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어떻게 변천하여 욌는지를 역사적인 흐름에 맞추어 살펴보기로 하자.

 

A.구약시대의 ‘하나님 나라’

 

고대 근동의 종교의 일반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의 신을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이었다.13) 그러므로 전쟁은 부족간의 전쟁인 동시에 부족 신의 세력 싸움으로 그들은 이해 하였다.이스라엘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구약성서 가운데 ‘하나님 나라’라는 어휘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어휘가 내포하고 있는 사상의 뿌리는 구약성서에서 출발하며, 구약성서 전체의 흐름이다.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상은 구약성서의 신적 계시와 신앙의 대망 가운데 숨겨져 있다14). 때문에 구약성서 가운데서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모든 선지자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이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기에 구약성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15). 이와같은 ‘하나님 나라’의 사상의 출발점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사실에 근거할 수 있으나 좀 더 구체적인 출발점은 히브리 종교사상에 있어서 실현 되었던 신정정치의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른 신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심과15)동시에 지상의 왕국을 다스리시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16) 이와같은 사상이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여러 세기를 지나는 동안에 발전하게 되었다17).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여호와의 계약을 알리어 주었으며(출19:5), 사사 기드온은 여호와만이 유일하게 이스라엘을 지배하실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자신에게 주어지는 통치권을 거절 하였으며(삿8:23), 사무엘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와 같이 강한 왕정정치를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이 사울을 왕으로 세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친히‘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고 말씀하셨다.(삼상 8:7 ; 12:12)

 

이와같이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나 ‘하늘나라’라는 어휘가 구약성서 가운데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피한 것과 같이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하는 문장도 피하였기 때문이다18). 둘째는 이스라엘이 신정왕국이라는 사상이 구약성서 전체에 깔려 있기에 굳이 이 어휘들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19). 대신에 자주 사용하는 어휘는 말락야웨(Malak YHWH )인데 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낸다. 이 통치는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심 (출 15:18, 민 23:21, 신 33:5, 사 43:15 )은 물론이요, 온 세상의 통치자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 왕하 19:15, 사 6:5, 렘 46:18, 시 29:10 ; 99:1- 4 )

 

이와같은 사상은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 가운데서 많은 갈등을 가져오면서 변천하게 된다.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있지 아니하고 청동기 시대에 있을 때 인접 국가인 불레셋은 강한 왕권과 함께 철기 문명을 가지고 있어 강한 군사력을 앞장세워 이스라엘을 자주 침략하자, 이스라엘은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당시의 선지자인 사무엘에게 강한 중앙 집권 체제인 왕정을 요구하게 되었고 사무엘은 자연히 군사적 승리로 인하여 인기가 많은 사울을 왕으로 등극 시켰다. 그러나 사울의 왕권은 과도기적인 왕권 이었으며, 다음으로 이어지는 다윗 왕조에 가서야 비로서 이스라엘의 군주체제가 확립된다. 다윗은 자신의 왕조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통치 사상을 국가의 부흥과 연결을 지었다.20) 이와같은 변천된 하나님 나라의 사상은 이스라엘이 찬란한 영광을 누릴 때에는 이와같은 사상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지나 바벨론이나 그밖의 강대국에게 이스라엘이 속국이 되었을 때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와 함께 하나님의 통치가 강대국의 압박 밑에서도 유효한 것인가? 라는 물음이 나오게 되었다. 이와같은 갈등 가운데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래의 ‘하나님 나라’ 소망이 싹텄다. 이스라엘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미래에는 왕권을 가지고 오셔서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강대국을 물리치시고 자유를 주신다는 소망을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다. ( 사 24:23 ; 33:22 ; 52:7 , 습 3:15, 슥14:9 ) 미래에 오는 그 나라는 이 땅위의 역사 가운데 한 지역을 배경으로 하여 ‘다윗의 후손에 의하여 성취될 것이다’라고 예언자들은 선포하였다20). 그러나 다윗의 후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목도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 가운데 다시금 그 나라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망이 점차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묵시문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B.묵시문학의 ‘하나님 나라’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나라’나 ‘하늘 나라’의 어휘가 없으나 신약시대에는 이 어휘들이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친밀하게 사용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이 어휘들이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의 중간기인 묵시문학 시기에 정립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21).

 

포로기 이후에는 예언활동이 점차로 사라진다. 그 뒤를 이어서 묵시문학이 새롭게 등장한다. 이 묵시문학은 구약시대의 예언과 상이한 점이 많으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왕이시다라는 사상은 지속적으로 계승하고 있다22). 구약시대에서 이스라엘이 정치적, 종교적 상황이 어려움 가운데 있었지만 언젠가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 강한 힘을 소유한 절대적인 왕이 등장하여 현실에 처해 있는 정치적, 종교적 어려움들을 해결하여 하나님을 마음놓고 섬길 수 있는 나라를 이룩한다고 하는 것이 유대인의 바람이며 ,또한 그와같은 믿음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살펴 보았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 가운데 이와같은 소망이 사라지자 예언자들의 외침은 호소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 사상도 바뀌게 되었다. 즉 ‘하나님 나라’가 자신들의 민족 가운데 왕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자를 통하여 임한다고 하는 생각에서 현실의 역사를 포기한 역사 밖에서 강권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게 되었던 것이다23). 그러므로 다윗의 왕국이 지상의 팔레스틴 지역에서 회복 되리라는 종래의 사상을 바꾸어 장차 앞으로 올 ‘하나님 나라’는 초자연적인 특성을 가지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행하시는 일이기에 현실의 역사적 발전이 아니라 갑자기 이 현실 가운데로 임하는 것이기에 현실 세계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사상의 변화는 이전까지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강대국인 바벨론이나 이집트를 이 세대 속에서 이스라엘의 적이라고 간주하여 그들과 현실적인 투쟁을 행하던 것을 중단하게 하였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강대국이 적이 아니라 강대국들을 주관하는 사단이 적이라고 판단하였고 이를 물리치는 것은 현실적인 투쟁이 아니라 영적인 투쟁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24). 이와같은 묵시문학에서의 ‘하나님 나라’ 사상의 변천은 현실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였다. 즉 현실은 악의 세력에 의하여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묵시문학가들은 현실에 희망을 가질 수가 없으며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 하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25).

 

이와같은 사상이 묵시문학 전체에 일관되이 흐르며 기록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약시대의 사상을 전통적으로 그대로 담아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과 다윗의 집이 다시금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작품도 있다26).또한 이 세상에 마지막 세대의 메시야가 통치한 후에 초역사적인 메시야가 나타나 새로운 천상의 세계가 된다고 하는 과도기적인 사상을 지닌 작품도 있다27).

그러나 이와같은 형태의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고 있으나 묵시문학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어떤 인간의 노력도 결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28).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묵시문학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묵시문학은 이스라엘 민족이 암울한 역사의 현실 속에 있을 때 미래에 대한 밝은 소망을 주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와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C.예수님 시대의 ‘하나님 나라’.

 

예수님이 출생할 때의 팔레스틴 지역은 매우 혼란을 겪고 있었던 곳이였다. 당시의 강대국 로마는 급기야 팔레스틴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고수하고 있던 팔레스틴 지역은 쉽게 헬라의 문화에 동화되지 아니하였다. 물론 외형적인 건축물 등은 헬라화 되어 갔지만 내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과 가정제도에서는 자신들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여기에 로마의 융화정책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28)헬라문화가 사유재산 제도를 기본으로 하는 개인주의적인 문화인 반면에 팔레스틴 지역의 문화는 공납제 생활양식 (a tributary model of production)의 문화로 촌락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같이 상이한 문화의 양식 가운데 이 지역을 통치하는 사람은 많은 갈등을 하여야 하였다. 무조건적으로 헬라문화를 이식하고자 하였던 통치자와 전통을 지키려는 유대인들 사이의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는 사례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원전 2 세기 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무리한 개혁을 단행하다가 마카베오 형제와 그의 후계자들이 단합하여 민란을 일으킨 것이다. 또한 때로는 팔레스틴 지역의 문화를 잘 이해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의 유대인들로 부터 합법성을 인정 받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헤로데이다. 그는 무력과 공포로 통치를 하여 부를 축적하는 한편, 큰 성전을 건축하였기에 유대인들로 부터 어느 정도 합법성을 인정받았다.

 

이와같은 혼란의 시기에 유대인 안에서도 이 혼란에 대처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그 첫째가 엣센파 이다.이들의 지대한 관심사는 성전 정화에 있었다. 이들은 부당한 사제직에 의하여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단정하고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민족적 생활과 성전 생활을 떠나 공동체 생활을 하며, 기도와 성서 연구에 치중하였다. 이와같은 생활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준비라고 이들은 생각 하였다. 다음은 사두개파 사람들로 이들은 로마와의 타협을 모색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로마에서 파견하는 관리들의 행정적인 조처들을 인정하고 지지하였다. 이들이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는 현실 세상으로 오는 것이며,현실의 이스라엘을 통한 도래였다. 다음은 바리새파 사람들로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백성들을 가르치면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있었다29).

이와같이 이 시대의 유대인들은 구약적 배경의 ‘하나님 나라’의 사상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30) . 묵시문학적 입장에서는 초자연적인 인물을 통하여 인간역사 가운데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이었다31). 즉, 현실의 역사를 종식 시키고 전혀 다른 차원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야에 매우 큰 관심과 희망을 표시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현실의 역사를 종식 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선하여 현실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일으키기를 유대인들은 원하고 있었다32).

 

이 시대에는 이와같은 두 개의 사상이 양립되어 있었으며 사상적인 정리가 되지 않은 혼란의 시기였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이 두 가지를 모두 기대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전자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요 7:26-27에 ,후자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마 2:5 ; 21:9 ; 22:4 ,요 7:40 - 42 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의 환호성으로 “다가오는 우리 조상,다윗의 나라에 복이 있도다.” (막 11: 10) 고 외친 사실과 유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기에 조롱의 어구로 십자가 위의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한 사실은 당시의 유대인들은 후자의 모습을 더 많이 기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의 변천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이를 종합하면 ‘하나님 나라’의 사상은 이스라엘이 왕정이 시작되기 이전인 신정정치 시대까지 거슬려 올라간다. 이때는 ‘하나님 나라’라는 사상 보다는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이 더욱 강조되었던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통치는 어느 한 국가만을 그 영역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을 영역으로 하는 것에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통치가 왕정으로 넘어오면서 이 사상이 이스라엘 국가의 이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바뀐 사상은 계속하여 전통적인 사상으로 후세에 전달되었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강성함을 기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윗 왕조의 몰락은 이와같은 ‘하나님 나라’사상에 일대의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것은 세상의 인간의 힘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새롭게 인식된 것이다. 묵시문학에서는 이와같은 상황 속에서 다른 방법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국가적인 도래가 아니라, 개인적인 의로 말미암아 참여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도 국가적인 구원이 아니라 개인의 의에 의한 것임을 밝히 말하고 있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통치가 우주적임을 밝히는 것이다. 묵시문학에서는 이방인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33) 이와같은 사상의 변화는 이스라엘의 민족의 개념을 바꾸었다. 예수님 시대에는 정치적, 종교적,경제적인 혼란기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도 혼란을 거듭하고 있던 시기였다. 전통적인 국가의 이념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가 하면 묵시 문학에서 새롭게 등장한 개인적인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무리들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III.‘하나님 나라’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견해들을 종합하면 종말론적인 견해와 비종말론적인 견해로 나누어진다.

오리겐( Origen )과 어거스틴( Agustine )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비종말론적인 해석을 내린 학자들이다. 특히 어거스틴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 하여 교회를 ‘신의 도성( City of God )’으로 여겼으며, 천년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세상에 들어왔으며 진행하고 있는 과정이므로 더 이상의 아무런 미래적 성취를 기대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34). 이와같은 어거스틴의 주장은 개혁주의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 되었다. 이들에게 있어서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구속받은 성도들의 각자의 마음 속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인 실제였으며 전적으로 종교적인 의미에 해당되는 것이다35).

근대 이전까지는 이와같은 견해가 지지를 받았으나 근대에 오면서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고 다시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근대의 비종말론적인 견해는 알버트 리츨 ( Albert Ritschle )로 부터 시작하고 있다. 리츨은 ‘하나님 나라’는 구약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창안한 사상으로 복음의 사랑의 법을 실행 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는 윤리-종교적 공동체 ( Ethical- Religious )로 이해하고 있다. 이 공동체는 이미 세상 가운데 있으며 사람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내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강한 힘에 의한 외부적인 도래가 아니며 이 세대의 종말도 아니며 이미 이 세상 가운데 온 것을 사람들의 사랑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다36)라고 리츨은 말하고 있다.

이와같은 주장은 하르낙 ( Harnack )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르낙은 그의 저서 ‘기독교는 무엇인가 ? ( What is christianity ) ' 에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며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되며 영혼의 무한한 가치를 인식 시키어 사랑의 윤리적 교훈을 인식하는 순수한 예언 신앙으로 이해 하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인류의 모든 사람이 함께 알 수 있게 임하는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각 개인이 우선적으로 체험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해 하였다37).

 

불트만 ( Bultmann )은 성서 가운데서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 의하여 창조된 신화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 하면서 그 중에 ‘하나님 나라’도 포함 된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이해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나라’는 외부로 부터 사람들의 역사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 의 요청이라고 이해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요청이 올 때 결단함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38).

 

이에 반하여 종말론적인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나타났다. 기독교 역사의 처음 2 세기 동안 교부들 사이에서는 ‘하나님 나라’는 전적으로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G.E.Ladd 는 “전형적인 종말론적 문구가 디다케 (διδακη)39) 에서 발견 되는데 그곳에 -주여, 당신의 교회를 기억하사 사면으로 부터 당신을 위하여 예비하신 당신의 나라로 거룩함 가운데 불러 모으소서 -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불러 모으소서의 기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아후에 경험될 미래적 축복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한다40).

 

또한 요하네스 바이스 (Johannes Weiss)는 리츨이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는 윤리-종교적 공동체’라는 사상을 반박 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창안한 사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유대의 묵시문학적 배경을 갖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없다고 전제 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종말을 뜻하기에 이는 전적으로 미래적인 사건이요, 종말론적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서 아직까지 이 세상에 종말이 오지 않았으므로 아직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 세계에 도래하지 않았다고 말한다41). 그는 1892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책자를 통하여 “....그 나라에 대한 예수의 견해는 유대인들의 계시사상와 같으며, 유대인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이 말한 ‘하나님 나라’ 둘 모두는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42)”고 주장하였다.

 

한편 종말론적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알버트 슈바이처 ( Albert Schweitzer )는 바이스가 연구한 예수님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예수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 하고자 하였다. 그는 예수의 행동을 살펴보면 예수에게 항상 종말론적인 미래를 바라보면서 살아온 행동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43).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거대한 종말론적 파국의 발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와같은 양쪽의 주장이 팽팽한 가운데 이를 종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도드 ( C.H.Dodd )는 그의 저서 「왕국의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세상에 도래하였다는 전제하에 예수님의 비유와 말씀을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인정 여부와는 상관없이 현재적 사실로 선포되어 졌음을 보게 되며, 그 종말은 미래에서 현실로, 대망에서 경험의 영역으로 옮겨 왔다고 그는 주장한다44). 그는 또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인격을 통하여 현실의 세계로 들어옴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앞으로의 세대 속으로도 예수의 인격을 통하여 들어갈 것이라는 실현된 종말론 ( Realized Eschatology )를 주장한다45).

 

예레미아스 ( J.Jeremias )는 예수의 사역 안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실현 되었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 실현은 완성된 실현이 아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이 소유할 보좌와 권세의 ‘하나님 나라’가 있다. 그러므로 현실 세계 안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는 실현 과정에 있는 나라이다46). ( Eschatology in process of Realigation ) . 이것이 그의 주장이다.

브루스 M 메츠거 ( Bruce M. Metzer )는 “....본질상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이 통치는 주권적인 하나님과 각 개인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이냐 ? 미래적이냐 ? 하는 질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이유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두 가지 모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인정하도록 촉구하시는 동시에 또한 사람의 강팍한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주권이 보편적이고도 완전한 수용이 더 이상 방해받지 않게 될 새 시대를 소망하도록 인도하신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47).

콘첼만 ( Hans Conzelmann )은 ‘하나님 나라’가 현실세계에 임한 것으로 완성이 되고 끝났다고 한다면 이미 회개의 기회도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닌가 ? 하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임박 하였으나 표징들은 이미 현실세계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48).

글로그는 「신약성경에서의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서 “....βασιλεια는 항상 추상적인 의미의 통치를 포함하고 있으며, 결코 왕국이나 백성들로 구체화 되지 않는다....”49)고 주장하면서 미래의 통치가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비종말론적인 해석과 종말론적인 해석, 그리고 이 두 해석을 종합하는 해석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지금까지의 개인적인 구원과 미래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는 견해도 생겨났다. 이 견해는 현재의 사회질서를 이상적인 사회 질서로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며 가난, 질병, 노사관계, 사회적 불평등, 인종관계 등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이다50).그러나 이 견해는 현실의 입장과 문제만을 바라보았기에 예수님께서 의도하시는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있다.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