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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연구(下)

에반젤(복음) 2020. 10. 18. 18:13

 

하나님 나라연구

 

IV.공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B.‘하나님 나라’와 교훈.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당시에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던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는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에로의 초청이었으며 선포는 종말론적인 메세지이지 묵시문학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72).예수님의 모든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다. 여기서는 공관복음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어휘가 직접 사용되고 있는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현실성,미래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예수의선포 ( 마 4:1ㅇ7, 막 1:15, 눅 4:43 ), 세례요한의 선포(마 3:2 ),파송된 자들의 선포 ( 마 10:7 )와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교훈을 요약하면 바로 예수님의 선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예수님의 선포나 세례요한의 선포가 그 내용에서는 일치하는 것 같이 보이나 실제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것 만이 아니라 이미 출현하고 있다고 친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구절에서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으로 임할 것을 의미하는 한편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데, 회개는 객관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경험하는 길임을 알려 주고 있다.

 

2.산상수훈과 ‘하나님 나라’.( 마 5:-7: )

 

이 부분에서 ‘하나님 나라’ 어휘가 집중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 ( 마 5:3, 눅 6:20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 마 5:10 ), 지극히 작은 계명이라도 행하며 가르치는 자 ( 마5:19 ), 바리새인의 의 보다 더 의로운 자 ( 마5:20 ),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 마 7:21 )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며 큰 자라고 일컫음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여러가지로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 부분의 공통점은 ‘하나님 나라’는 현실 세계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오는 것을 대망하며 준비함으로 성취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와같은 교훈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특성이 무엇인가를 밝히 보여주고 있다.

 

3.어린 아이와 ‘하나님 나라’. ( 마 19:14, 막 10:14, 눅 18:16 )

 

이 교훈은 뒤에 이어서 나오는 교훈인 부자와 ‘하나님 나라’ ( 마 19:23, 막 10:23, 눅 18:18 )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공관복음 모두가 이 두 교훈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서로 다른 전승을 따르며, 서로의 복음서를 읽는 대상이 다르며, 서로의 상황이 다른 공관복음이 왜 이 부분에서는 일치를 이루고 있을까?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부자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서 예수님은 부자는 재물이 많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물질이 많으면 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가? 물질이 많은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조건이 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와같은 논리라면 이 현실의 세계는 발전과 풍요로움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게 살아 배고픔의 상태로 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되지 않겠는가? 이와같은 물음에 대한 답은 위에 있는 어린 아이와 ‘하나님 나라’의 교훈에서 해결된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이 두 개의 교훈을 대조하여 어린 아이와 부자를 서로 대조하고 있다.

여기서 부자와 어린 아이는 외견상의 부자와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와 대조하기에 적절한 단어는 어른이며 부자와 대조하기에 적절한 단어는 거지이기 때문이다. 부자와 어린 아이를 대조하는 것은 사람의 내면 세계를 대조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내면적 특성에 대하여 교훈하고자 하는 것이 기록된 저자의 의도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예수님께서 교훈하시고자 하시는 것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여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이 없이는 그 도래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나라로 오신 예수님을 의지하여야만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교훈은 또한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도래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73). 이와함께 ‘하나님 나라’는 영접하는 자만이 갈 수 있다고 하는 교훈에서 영접하는 행위는 바로현실 세계 가운데에서 행하여야 하는 현재적인 행동인 것이다. 이 행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며 앞으로 종말론적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도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예수님의 교훈은 바로 메세지로 그 메세지 가운데 이미 ‘하나님 나라’는 도래한 것이다.

 

4.세례요한과 ‘하나님 나라’. ( 마 11:11, 눅 7:28 )

 

이 교훈을 통하여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현실 세계에 왔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 교훈은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당신이 오리라고 예언된 메시야 입니까 ?”질문을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행한 일들 가운데 이미 메시야의 통치가 일어나고 있으며 예언자들의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말한 후에 세례요한과 하나님 나라의 사람과 비교하여 교훈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객관적으로 이미 세상 가운데 들어왔다. 이제부터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육신의 여자가 낳은 가장 큰 사람인 세례요한 보다도 큰 자가 된다.

 

 

5.바리새인의 물음과 ‘하나님 나라’. ( 눅 17:20 )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는 바리새인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여기있다, 저기있다고 지역을 가리킬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너희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답변하고 계신다. 바리새인은 구약적 배경과 묵시문학적 배경 아래서 하나님 나라를 묻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현실 세계 가운데 한 지역을 택하여 건설한 후에 점차로 그 영역을 넓혀가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바로 그 한 지역이 자신들의 영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은 장소적인 ‘하나님 나라’가 아니며, 가시적인 건설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며, 오히려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왕권을 의미하는데 βασιλεια 가 공간적인 영역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이 교훈을 통하여 분명히 나타난다. 그 통치는 사람의 마음 속을 주관하기에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는 이 세대에 임한다. 예수님은 이미 이와같은 왕권의 통치가 세상 사람들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선언하신다.

 

6.세상의 일과 ‘하나님 나라’. ( 눅 9:60 - 62 )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버지의 장사(葬事)를 지낸 후에 따르기를 원하였으나 예수님은 단호히 이를 거절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가족과의 작별을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말씀하신다. 이 교훈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절대성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여러가지 일과 함께 그 중의 하나로 취급 되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 그러기에 생명을 소유하는 일과 이 생명을 전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일 보다 귀중하고 긴박한 일임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신다.

 

7.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 막 14:23, 눅 22:16,18 )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까지 포도나무 열매를 마시지 않으며, 유월절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세상 속에 온전히 이루어졌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릇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가 단지 개인에 의한 주관적 성취의 성격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은 이와같은 선언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너희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유월절 식사를 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셔야 한다. 그러기에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 종말론적으로 객관적으로 임하는 성격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어휘가 예수님의 교훈과 함께 사용된 부분들을 살펴 보았다. 여기에서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비유에서 나타난 것과 동일하게 현재성과 미래성 모두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 나라’는 그 어느 것 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임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와같이 임한 ‘하나님 나라’는 구약시대의 예언의 성취이며, 이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을 통하여 이 세대에 지속적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C. ‘하나님 나라’와 이적.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말씀과 비유를 통하여 이미 ‘하나님 나라’가 이 세대 가운데 임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 보았다. 이제 이와같은 비유와 말씀들이 사실로 증명되는 것이 이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어휘가 이적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부분은 유일하게 한 곳뿐이다. ( 마 12:28, 눅 11:20 ; 이 둘은 하나의 동일한 사건이다. ) 이 부분을 통하여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적이 ‘하나님 나라’의 이적이며 하나님의 통치하심이라고 인식하고 계셨다74).

예수님의 이적은 여러가지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마귀를 쫓아내며, 문둥병자를 깨끗케하며, 폭풍과 성난 물결을 잔잔케 하셨으며, 바다 위를 걸으셨으며,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는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이시다. 이와같은 이적은 과학적 사고양식을 가진 현대인에게는 과연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유발하고 있지만 당시의 사람들이나 초대 교회의 교임들에게는 전혀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이적의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 낸다는 사실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거짓이라고 몰아 부친 것이 아니라 누구의 권능으로 이와같은 일을 행하느냐 ? 가 관심의 촛점이였으며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셨다. ( 마 12:27 )

이적은 자연과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이요, 하나님의 주권 행사로 초대 교회는 받아 들이고 있었으며, 또한 예수님의 이적은 예수님이 곧 메시야 이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겼다75).

누가복음은 실제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낸 사건과 연결하여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반면에, 마가복음 3장 20절 부터 30절까지에서 단순히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Otto Betz는 “예수님의 귀신축출 현상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징조( proxy )로서의 행동이다76) ."고 이해 하였다.

 

한편, 이적 행위가 복음의 선포행위와 병행으로 나타나고 있는 곳은 세례요한이 사람들을 보내 예수님이 오실 메시야인가?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을 때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제자들이 해야할 일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한는 것과 이적을 함께 행하라고 명하실 때이다. 이와같은 것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됨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구약성서 사 35:5 -6; 61: 1 를 인용하는 장면까지도 나타난다. 예수님은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에 대하여 단순한 두려움이나 놀라움을 느끼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와같은 감정적 반응 보다는 이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세대 안에 임하는 것을 보아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을 바라고 계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적은 비유나 교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의 초대이다. 예수님의 이적을 경험한 사람은 비유나 교훈을 듣고 즉각적인 결단을 내린 것과 같이 결단을 하여야 한다. 이와같은 예수님의 행적은 바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선포하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와 동일한 메세지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도성을 향하여 책망하시는 부분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

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

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 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 까지 낮아

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

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1 참고 눅10:13 )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예수님의 이적 뒤에 숨어있는 비밀을 보게된다. 그것은 이적을 행하시고 난 뒤에 누가 이적을 베풀었는지 말하는 것을 금하시거나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돌려 보내시는 것에서 나타난다. 왜 어느 사람에게는 가서 이적이 발생한 것을 보이며 증거하라고 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에게는 증거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시는가? 예수님의 이적이 하나님 나라로의 초대라면 모든 사람들을 따르라고 하며, 또한 가서 이적이 일어난 것을 증거하라고 해야 맞지 않는가? 이와같은 것에 의문을 가진 브레데 ( William Wrede )는 ‘메시야의 비밀’77) 이라고 명명한다.

이 메시야 비밀을 초대교회나 마가의 창작으로 브레데는 규정을 하고 있으나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처음부터 왕의 통치를 가지고 행동하시기에 그 규정은 그릇된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행하신 이중적인 행동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예수님이 악령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금지 시킨 것은 악령들의 말이 인격적인 고백이 아니라는 것과 예수님이 자신의 실체를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각 사람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밝혀져야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78) .또한 치유의 이적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을 금지 시킨 것은 그들이 아직 이적에 포함되어 있는 메세지를 깨닫지 못하고 이적 자체에 대한 경이로움만 보고 매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인격을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금지시켰다79) . 또한 아직까지 ‘하나님 나라’를 자신들의 영토에서 화려한 영광과 함께 도래할 것을 기대하고 있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적 메세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에 침묵을 명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어휘가 이적과 함께 사용된 부분을 살펴 보면서 이적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이적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위에 실현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표시인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적을 경험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초대의 메세지이다. 초대의 메세지가 전해 졌다는 것은 이미 객관적인 ‘하나님 나라’가 도래 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그의 행위를 통하여 사람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추구하셨다. 이 만남은 곧 ‘하나님 나라’의 주관적인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적을 통해서도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이 이것이기에 이적은 우리를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으로 인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