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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젤(복음) 2020. 10. 9. 01:39

사도신경의 의미와 역사

 

 

I.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예배 때마다 반드시 암송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이다. 이처럼 늘 암송하는 사도신경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도신경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형식적으로 또는 기계적으로 암송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번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본다. 초대교회부터 사도신경이 완성하기까지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도 불사하던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진리사수를 위해 피 흘린 흔적이 배어있는 사도신경을 그 의미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암송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의미가 있기에 사도신경 또는 신조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사도신경은 순례하는 교회가 물려받은 값지고, 빛나는 유산이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신앙의 내용과 방향을 규정하고 지시하는 산 표석이고 경계석이다. 기독교는 무엇인가? 기독교는 무엇을 믿고 선포하고 실천하는가? 기독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대답을 주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도신경은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보석같이 반짝이는 언어와 문장으로써 간결하게 대답한다. 역사적인 신앙의 공동체는 여기서 그 정체를 새롭게 확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와 만물의 목적과 완성을 이해하게 된다. 지상의 교회들은 이 사도신경 안에 스며있는 빛나는 진리를 통해서 빛과 생수가 솟아나는 신앙의 공동경험을 나눌 수 있다. 사도신경 안에는 신앙의 진수가 녹아 있다.

 

A.연구목적
본 논문의 연구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늘 암송하는 사도신경 속에 담긴 의미를 잘 이해함으로써 사도들의 신앙고백이 오늘날 우리 모두의 진솔하고 현재적인 고백으로 표현하는데 있으며, 기계적인 암송으로부터 탈피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정립하고 이단사상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특히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사도신경을 연구하고, 또한 조직신학적으로 분석을 시도함으로써 신앙을 확고히 정립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B.연구범위
본 논문에서는 사도신경이 발생하게 된 배경 및 역사, 신조의 의미와 필요성을 살펴보고 사도신경의 구속사적인 측면에서의 사도신경의 의미를 살펴보고, 조직신학적인 안목으로 삼위일체의 내용인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을 살펴보고, 교회론과 종말론적인 시각으로 분석을 시도하고, 사도신경의 구조적인 특징과 각 구절마다에 담긴 의미를 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또한, 논난이 되고 있는 구절인 ‘장사되어 음부에 내려 가셨다가’라는 구절에 대한 몇 개국의 사도신경을 살펴봄으로써 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고자 한다. 필자가 이 글을 전개하는데 있어 먼저 국내외에 발표된 문헌을 광범위하게 참고하였으며 개인의 의견은 종합적 의미라는 제목으로 제시하였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C.신조의 의미와 필요성
우리가 신조라고 부르는 것의 원어을 보면 Credo, κανον τηs πιστεωs, 또는 ευνβσλσγ란 말이다. “내가 믿는다”, “상징”, “표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creed라고 부르기도 하고confession이라고도 부른다. 신조라는 말은 이 creed라는 말에서 온 것이고, 신앙고백이라는 말은 confession이란 말에서 온 것이다. 다 같은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인 교회는 신앙의 내용과 인식의 문제로 갈등과 분열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문제가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거짓과 참을, 어둠과 빛을 구별하는 신앙의 눈, 깬 마음이 여기서 필요하다. 사도신경을 형성하여 공동으로 고백하게 된 동기가 바로 교회의 일치에 있다. 교회는 이단들의 공격을 받는다. 교회는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진리와 대결하고 대화하면서 복음의 빛을 드러내야 한다. 이단들의 정교한 교리를 분석하고 비판할 수 없을 때, 지상의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의 빛은 흐려지기 쉽다. 다른 종교의 바른 가르침과 대화하면서도, 교회는 독자적으로 어떤 진리와 말씀을 선포하고 증언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사도신경은 바로 이러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교회는 또한 시대를 지배하는 사조들과 맞서 신앙의 역설적인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복음은 결코 시대정신의 산물이 아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과 生命을 선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들에게 바른 구원의 진리를 제시하고 잘못된 가르침을 비판하고 수정해야 할 사명이 있다. 교회는 시대마다 부딪치는 도전과 시련을 믿음의 진리로써 극복하면서 세상을 구원하고 낡은 세계를 변혁하는 자유와 생명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어야 된다. 이러한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서 바로 사도신경이 필요하다. 사도신경은 개인의 신앙생활과 교회의 내적 생활에 있어서도 필수적이다. 예를 들면 어떤 성도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줄 때 그들의 신앙고백을 들을 때 사도신경은 기준이 되고, 자녀들에게 신앙을 교육할 때도 필요하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최근의 시대사조는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흔들 만큼 이단의 정교한 도전과 새로운 시대사조가 활개를 치는 현실을 볼 때 기독교 신앙의 사수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초대교회에서 사도신경이 필요했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바로 잡으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교회에 그릇된 견해가 스며들자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확충되어져야만 했다. 5세기 중엽까지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완성된 신학적 선언이 없었다. 그 때까지는 여러 종교회의에서 때때로 나타난 이단적인 견해들을 취급했다. 이러한 종교회의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AD 325년의 니케야 회의와 AD 451년의 칼케돈 회의였다. 니케야 신조는 초대교회의 이단인 아리우스파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교리를 수호했다. 칼케돈 신조는, 그리스도인이 항상 믿어온 사실, 즉 그리스도가 한 인격 속에 두 본성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증했다.
물론 신조의 사용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퀘이커 교도들과 유니테리안들과 이신론자들이 반대한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성서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을 방해하고, 양심의 자유와 개인의 판단력을 약화시키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에는 어느 정도 이유가 있다. 그러나 신조없이 자기들의 느낌과 판단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신조 이외의 어떤 다른 권위있는 글에 의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정적이고 신비적 체험에 중점을 둔다. 그러므로 신조가 없이 자기의 취향에 따라 제멋대로 믿은 결과 탈선해서 비성서적이고 비기독교적인 신앙생활을 하기보다, 일정한 신조에 따라 올바르고 규모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은 인간은 아담이후로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의 이성에 의한 성서의 자유로운 해석은 그 만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신조는 신앙을 정의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믿고 있는 내용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이것 때문에 나는 서 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더욱이 기독교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한 세계나 사람의 충성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다른 신앙들이 있는 세계에서는 그런 것이 더욱 필요하다. 만약 주관적인 경험에만 의존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기독교에 대한 이해의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또한 신앙의 규범과 모범과 표준을 제공하기 위하여 신조가 필요하다. 체험에 대한 남용적인 권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결국 주관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모든 위험에 떨어지는 것을 뜻한다. 아무도 이단을 사냥하는 데 도구로 사용될 신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있지만 거기에도 필요한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신조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신앙과 사상을 보편적 교회의 신앙과 사상에 의하여 검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가르침과 설교의 자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신조는 필요하다. 설교는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있는 교회의 신앙과 신념에 대한 해설이어야 한다. 따라서 설교자가 활동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해 주고 또 그가 만나게 되는 인간 상황의 모든 사건들에 대하여 적용해야 할 계시된 원리들을 그에게 제공해 주는 신앙의 선언과도 같은 신조는 필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항은 어떤 신조나 교리나 교리의 체계도 안내를 위한 길잡이가 되어야지 결코 붙잡아 매는 쇠사슬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어떤 신조도 完全할 수 없고 최종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Ⅱ. 사도신경의 기원과 구조적 이해

 

A.사도신경의 역사적 기원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의 기원은 주후 215년에 히폴리투스의 질문식 신앙고백과 주후 340년에 마르셀루스의 신앙고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그 내용들은 지금의 사도신경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주후 404년 루피누스의 신앙고백이 지금의 사도신경과 비슷한데, 루피누스는 사도신경에 대한 주석을 쓴 일이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사도신경의 형태는 히폴리투스, 마르셀루스, 루피누스 등과 같은 여러 교부들에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5세기 말과 6세기 초에 형성되었다. 사도신조가 교회의 공인된 신조로 사용되기 전에도 교회는 간결한 여러 가지 고백문들을 갖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사도신경과 비슷하면서 가장 큰 영향력을 준 것은 로마교회에서 사용한 ‘로마신조’였다(주후 250-400년). 여기에 다른 조항들이 첨가되고 보충되어 6세기 초에 스페인과 이탈리아 북부 지방 등에서 사도신경의 본문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오랫동안 정식으로 사용되지 못하다가, 칼 대제(주후 742-781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오토 1세(주후 936-937년)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여 로마교회의 예배시에 사용될 공식적인 신앙고백문으로 채택되었다. 우리는 한 가지 물음을 가질 수 있다. 사도들이 직접 본문을 쓰지 않았는데 왜 ‘사도들의 신앙고백’으로 불리우는가 하는 것이다.
루피누스(T. Rufinus)라는 초대 교회의 저술가는 전승에 의거하여 사도신경이 사도들로부터 직접 유래되었음을 증명하려고 했다. 곧 성령 강림 후 열 두 사도들이 신앙의 기본 규범들을 성령의 인도에 따라 만들었다고 말했다. 열 두 사도가 각자의 관심을 한마디씩 간략하게 표현하여 사도신경은 열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는 것이다. 루피누스는 다음과 같이 사도신경의 형성과정을 말한다. “베드로가 말했다: 나는 전능하신 천지의 창조자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 야곱이 말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동정여 마리아에게서 출생했다. 요한이 말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어 장사되었다. 도마가 말했다: 그는 삼일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 이와 같은 루피누스의 주장은 사도신경의 사도성을 강조하는 경건한 창작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사도성은 사도들이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 때문에 순교한 사도적인 신앙의 근본 내용들을 사도들이 승인하고 고백하고 가르치고 선포하는 복음의 진리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 ‘사도신경’으로 불리워지는 것이다. 이 사도신경이 가장 날카롭게 자각되고 목숨을 건 고백이 된 것은 세례 때였습니다. 사도신경의 뼈대를 형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나타난 신앙 고백들은 모두 세례와 관련되어 있다. 세례 베푸는 자가 수세자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묻는다. “너는 전능한 하나님을 믿느냐? 너는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시고... 부활하시어... 심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너는 성령을 믿으며... 몸의 부활을 믿느냐?” 이에 대하여 수세자가 “나는 믿는다”라고 대답함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처음 교회가 형성되던 때에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박해와 시련을 받을 각오를 하는 것이었다. 체포되고 처형될 수도 있었다. 세례를 받음으로 사자의 굴에 던져지기도 하고 삶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신앙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걸머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적인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그들을 통하여 이 신앙이 전승되어 왔음을 감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비싼 값을 치루었던 신앙의 증언자들과 함께 기억해야 한다.

 

B.사도신경의 내용과 구조
사도신경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즉 구원의 주체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부분, 교회에 관한 부분, 성도의 최종적인 문제에 대답하는 부분으로 구분된다. 첫째부분에서는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보혜사 성령에 대하여, 둘째 부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증거하며 선포하는 교회에 대하여, 셋째 부분은 성도들의 궁극적인 희망과 영원한 삶에 대한 신앙이 고백되어 있다. 좀 더 세분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12조항으로 되어 있다. 이 12조항은 고백의 대상에 따라 다시 세분되어 있다. 제1항은 성부에 대한 고백이다. 제일 처음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로 되어 있었으나, 7세기 말경에 가서야 “천지를 만드신”이란 말이 첨가되었다. 제2항에서 7항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님에 대한 내용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그 만큼 이 사도신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신앙고백서라 함을 알 수 있다. 이 조항에 있어서도 본래는 “잉태하사”라는 말과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 “죽으사”, “음부에 내려가사”,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말들이 없었으나 나중에 첨가된 것이다. 이 조항 중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말은 현재 한국 개신교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누락되어 있다. 제8항은 성령에 관한 고백인데 매우 간단하다. 제9항은 교회에 관한 조항이다. 여기에도 제일 처음에는 단순히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로 되어 있었으나, 이것이 약 4 세기경에 “공회”라는 말과 “성도가 교통하는 것과”라는 말이 첨가되었다. 제10항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조항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11항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로 번역되어 있으나 원문에는 “몸의 부활”로 되어 있다. 같은 내용이기는 하나 부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사도신경 전체가 대중성을 띠도록 번역했으므로 그 정신에 부합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제12항은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로 되어 있으나 이것 역시 처음 사도신경에는 없던 것을 후에 첨가했다. 초기 로마교회에서는 “몸의 부활”까지만 고백했으나 후에 “영생”의 조항을 첨가해서 사용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도신경의 처음과 나중에는 초자연적인 것에 관한 항목인데 반해, 중간에 있는 조항들은 현세적이고 지상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Ⅲ.사도신경 본문 주해

 

A.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1. 개요
사도신경은 누구를 고백하는가? 사도신경은 우리가 곧 고백해야 할 아버지, 전능자, 하늘과 땅의 창조자의 세 규정들로써 고백의 대상을 구체화한다. 여기서 언급한 하나님은 사도신경의 전체에서 표현된 하나님 아버지, 아들,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2.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
‘전능하신’이란 말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히브리말로 ‘샤다이’의 번역이다. 성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님의 주권의 한 측면을 나타낸다. 곧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주권을 의미한다. 이 사랑이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소개해 주신 것이다. 결국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사랑의 주권을 행사하는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전능이란 말의 뜻은 “전적으로 능하다”, “모든 것에 있어서 가능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것의 범위에 대한 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만일 모든 것의 범위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은 아름다운 것, 선한 것, 합리적인 것, 이성적인 것, 자연적인 것 등을 하시는 동시에 또한 더러운 것, 악한 것, 비합리적인 것까지도 하신다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면 기독교 신관은 매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즉 하나님은 악을 행하시기도 하고 또한 감정에 따라 인간을 감정적으로 취급하신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본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선하시고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와 같은 당신의 성품에 반대되고 모순되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 또한 ‘가능’이라는 의미를 인간적인 사고의 체계에 묶어두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본질적인 성품에 모순되지 않으면서, 그의 큰 뜻에 따라 이렇게도 하시고 저렇게도 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시각으로 합리적인 일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때로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기도 하신다. 그런데 20세기 불투만과 같은 신학자는 사실에 대한 모든 문제들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 확정되며, 모든 역사적 진술은 역사가들의 일상적 절차를 통해 입증될 때 비로소 수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실과 자신이 생각하기에 신화적이라고 보는 부분을 부정하는 오류를 낳기도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면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창조주 하나님을 과소평가하고 삼차원적인 인간의 기준이하로 끌어내리는 불신앙된 모습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인간의 편에서는 하나님의 기적이나 이적이 하나님 편에서는 결코 이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무소부재, 무소부지, 무소불능이라고 표현한다. 무소부재란 하나님은 안 계시는 곳이 없다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는 말이고, 무소부지는 사람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며, 마음속의 생각과 혀의 말까지 다 알고 계시는 그야말로 모르시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또한 무소불능이란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천지창조이다.
3. 우주의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
창조는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인 전제이다. 창조 신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증언을 포괄적으로 규정한다. 형식적으로 창조라는 개념은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창조라는 말은 지금도 창조를 해 가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뜻한다. 곧 만물을 신적으로 창조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소극적인 의미에서 창조란 하나님의 창조를 통하여 다양한 현실의 현존재에로 부름 받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이 소극적인 의미의 창조는 자연과 역사 속에 있는 일체와 함께 그 각각의 요소들이 창조주와 불변의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사도신경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그 안에 서식하고 있는 모든 생물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일체의 것을 창조하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전우주의 지배자이시다. 모든 인간의 생명의 주이고 역사를 지배한다. 그의 지배권은 교회와 믿는 자들의 삶의 영역을 넘어서 천체의 세계와 만물에 미친다. 그의 지배권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창조자 하나님 밖에 있는 것은 죽음과 무일 뿐이다. 사도신경은 바로 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물의 창조자시며 보존자이심을 고백한다. 세계는 하나님 없이 존재하거나 이해될 수 없다. 하나님은 홀로 계시지 않고 피조물의 자유를 기뻐하시고 피조물을 돌보시면서 세계 안에 피조물과 함께 계신다.
4.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근원
이스라엘은 이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을 어떻게 알고서 믿었을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신앙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의 역사적인 구원의 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은 그의 선택된 백성을 위하여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장소에서 구원과 해방의 역사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창조주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해방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분리될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다.
5. 구별되는 피조물과 창조자 하나님
하나님이 태초에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을 성경 첫머리에 고백하고 있음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흘러나왔으므로 신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강이나 산, 나무나 바위 등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은 창조신앙에 배치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선한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피조물들을 신으로 삼고 섬기는 것은 창조자 하나님을 거스리는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내가 하늘과 땅의 창조자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신앙고백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십계명을 지키는 신앙의 삶을 형성하는 것이다.
6.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과 인간의 책임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생명체들은 상호관계 안에서 번성한다. 그들은 깊은 영향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풍부한 생명력을 발휘한다. 그들은 조화 속에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 인간은 창조자의 이 깊은 지혜와 섭리에 따라서 창조되고 보존되는 창조의 세계를 관리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피조물을 돌보는 선한 목자로서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하나님의 지배의 방식처럼 모든 生物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섬세한 관심과 생에 대한 경외감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자연을 지나치게 이용하고 오용하고 착취만 거듭해 왔다. 그래서 자연은 인간의 죄악된 행동과 탐욕적인 착취로 중병에 걸려 신음하게 되었다.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만물, 인간을 기르고 먹이는 땅, 우리의 젖줄인 강물들은 오염되어 죽어가고 있다. 공기의 오염은 해를 거듭할수록 심각해져 가고 공장의 폐수와 세제 거품으로 물고기는 멸종되고 바다와 강은 악취를 풍긴다. 이리하여 인류의 생존마저 위태롭게 되어가고 있고, 자연환경이 죽어가므로 인간도 병들고 죽어간다. 이러한 위기에 기독교의 창조주 신앙은 자연에 대한 이해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계를 근본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들을 긍정하고 찬양하고 감사한다는 것은 피조물들의 겉모양에 피상적으로 도취하는 태도일 수 없다. 이제 피조물들의 수난, 고통, 치명적인 병들이 일어나는 인간적인 원인들을 근본적으로 규명하여 그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이것이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살아있는 신앙고백을 이루리라 생각한다.
7.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시는 하나님
무소불능하신 능력으로 천지와 만물을 만드시고 무소부재하신 능력으로 천지와 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어 우리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신다는 고백이다(시편19:1-6, 139:7-10).
아버지라는 말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시려 하신다는 말이다. 전적으로 우리의 모든 필요 즉 영적, 육체적, 정신적 필요를 책임져 주시는 아버지라는 뜻이다.

 

B.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1. 개요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에 해당하는 예수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신경의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소개에서 시작한다. 즉 그의 신분과, 출생, 죽으심, 장사지냄, 부활, 승천, 재림 등으로 세분적으로 구분해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인간의 측면에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속에서 비로소 주관적으로 구속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본 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인 성자 예수님의 신분과 속성 그리고 인간을 향한 역할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
2. 문자적인 의미
‘그 외아들’이란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나타낸 것이고, 외아들은 맏아들로 모든 유업을 이을 자로 하나님의 참 생명을 영원히 이을 자를 뜻한다. “우리 주”에서 ‘우리’라는 말은 세계 만민을 의미하며 ‘주(Lord)'는 모든 생명과 역사와 생사화복의 주관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님이 되신다는 이 고백은 단순한 교리 이상의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로, 지배권이 주님에게 있다는 말이다. 즉, 나를 지배하고 내 가정을 지배하는 이는 내가 아니고 주님이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소유권이 주님에게 있다는 뜻이다. 나의 인격, 재능, 소유, 재산, 자녀 등,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셋째로 명령권이 주님에게 있다는 뜻이다. 넷째로 생명권이 주님에게 있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는 과연 이런 신앙으로 주님을 부르고 고백하고 있는가? 우리는 각자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의 ‘예수’는 헬라어로 ‘구원’이란 뜻이며, ‘그리스도’란 말은 히브리어로 ‘메시야’란 말로써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으로 임금, 제사장, 선지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신앙이다. 또한 ‘믿사오니’는‘믿습니다’라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망 중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3. 종합적 의미
사도신경에서 두 번째 고백에 해당하는 성자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역사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의 주님이요 그리스도 즉 메시야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다. 예수님에 대한 주장은 기독교의 시금석인 동시에 기독교를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신약성경 전체가 이것을 주장하고 입증하기 위하여 기록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도신경이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에 대하여 가장 상세히 천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놀랄 필요는 없다. 사도신경에서 성자 예수님에 대한 부분은 사도신경의 구도상 중심에 놓여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긴 대목이 두 개의 짧은 대목, 즉 아버지와 성령에 대한 대목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주장은 사도신경에 나타난 믿음의 중심이 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삼위일체나 구원, 부활, 영생에 대하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대속하심으로 이 모든 진리를 나타내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4.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1)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성령에 의한 잉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뜻이 아니다. 엄격히 말해서 인간 예수님은 아버지를 갖지 않았다. 성령이 마리아를 상대한 것이 아니다. 성령에 의한 수태는 인간의 출생처럼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 예수님의 출생은 하나님의 고유한 기선적인 행동에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보통 인간의 생물학적 생식과는 달리 하나님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존재의 시작에 관여하신 것이다. 성령에 의한 잉태라는 말은 ‘예수님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라는 뜻입니다. 역사 안에 태어났지만, 인간의 생물학적인 영역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그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영원한 근원으로부터 시간 안으로, 하늘로부터 이땅으로 오신 것이다. 이것이 성령에 의한 예수님 잉태의 의미이다.
2) 마리아의 역할
사도신경은 아기 예수님을 낳은 동정녀 마리아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동정녀 출산을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이것은 생물학적인 대상도 아니고 또한 영웅의 탄생신화와는 무관하다. 여기에서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문제이다. 동정녀 출산은 바로 이 본질적인 증거에 봉사할 뿐이다. 세례 요한이 그 자신을 증거하지 않고 오실 자를 지시하듯이, 동정녀 출산의 교리도 말씀의 성육신, 예수님의 탄생에서 하나님의 주도적인 창조 행위를 증거하는데 봉사한다.

3) 종합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에 대한 설명으로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동정녀 즉, 순전한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났음을 선포하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출생과정과 전혀 어긋난다는 이론을 내세워 부정하기도 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의 한계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섭리를 알지 못하기에 아니 안다고 해도 그저 막연하게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태어나셔야 했던 이유를 알지못하는 이유라고 생각된다. 카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무죄성까지도 주장하고 있지만 그건 차지하고라도 우리를 구속하실 예수님은 그 자체가 죄가 없으신 분이어야 속죄제물로 가능하기에 예수님은 탄생부터 원죄를 가져서는 안되는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속죄제물로 이 땅에 오셔야만 했기에 인간의 측면에서보면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성자 예수님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다른 보통 사람들과 같은 방법으로 태어나셨다면 어떻게 원죄를 가진 상태로 대속제물의 역할을 감당하실 수 있는가? 그러기에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보지않으면 많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믿음은 인간의 사고와 체계와 상상으로 납득가능한 부분만을 믿는다면 그 자체는 믿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보편타당한 부분은 불신자들도 다 같이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역을 불완전한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완전히 파악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셔야 했던 사실속에서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느껴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방식으로 그야말로 신비로운 방법으로 죄인을 향한 구속의 역사를 전개하실 수도 있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인간의 형상으로 오셔야만 했던 그 이유는 죄인들의 모습과 적어도 인성적인 면에서는 같은 모습을 띠고 오시게 함으로 분명한 구속의 증거를 보여주셨던 것이다. 만일 신비로운 방법으로 구속사를 전개하셨다면 아마 많은 그 당시의 사람들은 물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자체를 부정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 사건이야말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사랑이요 은혜의 절정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럴때 비로소 진정한 감사가 나올 수 있다. 막연한 구속에 대한 감사가 아니고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감사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탄생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성령에 의해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출생되었다는 진술은 예수님의 생과 역사가 하나님에게서 인간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하나님의 영원에서 인간의 시간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말해서 아담 이후로 불순종한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들을 향한 죄문제 해결을 위해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차원을 포기하시고 인간세상의 3차원 속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5.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1) 수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죄를 심판하여 궁극적으로는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었다. 인간을 심판하시는 일을 유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셨다. 이 고통이란 인간이 가하는 고통이요, 동시에 인간의 죄값으로 오는 하나님의 진노와 배척이 주는 고통을 말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나를 대속하셨기 때문이다.
2) 화목제물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핵심에 도달한다. 성육신을 기독교의 성소라고 한다면 이 대속은 기독교의 지성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육신은 최고의 기적이지만, 그것은 아직도 하늘의 기쁨과 축복에서 시작하여 갈보리의 고통과 수치로 내려가는 일련의 단계 중 첫단계에 불과하다(빌2:5-8).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된 이유는 “온 세상의 죄에 대한 완전하고 완벽하며 충분한 제물, 헌물과 보속물”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다”(롬8:32).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롬5:5-8 참조). 하나님의 사랑이란 어떤 관용이나 인간의 호의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선물을 말하는 것이다.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한 위대한 선언, 그러나 크게 오해받고 있는 선언의 의미도 이와 같은 것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8-10).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여러 가지 면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 죄에 대한 제사로 볼 때 십자가는 화목제물이다(롬3:25; 요일2:2, 4:10, 히2:17). 다시 말하면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의 시야에서 도말함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수단이 된다. 이 화목제로 말미암아 우리는 불화했던 창조주와 더불어 화목, 즉 평화를 누리게 된다(롬5:9-11). 우리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가라앉힐 수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위하여 진노를 평화로 바꾸어 놓으신 구세주의 공로를 내세우는 일이다. 우리를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하였다는 의미에서 볼 때 십자가는 구속이 된다. 즉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속박과 불행에서 구출해 내는 것이다(막10:45; 롬3:24; 엡1:7; 계5:9). 그리고 구속으로서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의 은총에서 떠나 죄 가운데 머물게 했고 또 지금도 그렇게 하려 하는 모든 적대 세력들에 대한 승리이다(골2:13-15).
3) 종합적 의미
전 항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고 성장과정은 소개되지 않고 바로 공사역에 해당하는 과정도 생략한 채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당하시는 부분이 나온 것은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고난을 받으신 부분이 중요하기에 성장과정이나 공사역 과정은 생략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끝내는 자기 몸을 인류를 향한 대속제물 즉.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이 탄생하셨고 죄의 흔적조차도 없으신 분이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이사야서 53장 5절에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성경 눅23:4에 보면 예수님 당시 유대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하지 못했다. 자기 스스로는 예수님의 무죄성을 알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줌으로써 메시야를 죽이는 역사의 장본인이 되었다. 그 후로 그의 이름은 계속적으로 거론되게 되었다. 예수님의 무죄성은 그의 아내의 꿈을 통해서도 알려지고 그에게 예수님께서 무죄하다는 것을 알려음에도 불구하고 민란이 발생할 것이 두려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 주었던 그에게서 인간의 죄악된 모습, 한 치 앞도 못보고 살아가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속사의 전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진행되는 것을 또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은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처럼 악역을 담당하는 주인공이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본디오 빌라도는 역사의 오점을 남기고 영벌을 받아야 하는 운명을 자초했다. 우리는 이러한 빌라도의 모습속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아버지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공의를 실현하시고 반면에 죄인을 향한 용서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이중적인 섭리는 조금은 역설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6.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1) 구원과 화해의 십자가
이 고백은 예수님이 죽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부터 십자가를 향해 있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으며, 또 많은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시러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이 교차되는 만남이요,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랑과 용서의 팔을 내미신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랑과 용서의 팔이 십자가 위에서 못박힌 손이 되고 피흘린 몸이 되어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이 십자가에 매다시고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랑과 용서를 우리 인간들, 죄와 사망가운데 허덕이는 우리들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랑과 미움이 한데 섞여져서 미움이 사라지고 사랑만이 널리 퍼지게 되는 온전한 사랑의 상징이 된 것이다.
2)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
첫째는 죄없는 죽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는 예수님을 따르던 신실한 제자나 신자들이 증거한 것이 아니라 모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던 당사자들이나 원수들이 증거한 것이다. 빌라도가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증거했고(눅23:14-15, 요18:28, 19:4,6), 십자가에 함께 못박힌 강도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23:41)라고 증거했고, 예수님을 판 가룟유다가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4)라고 증거했고, 예수님을 처형하던 백부장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23:47)라고 증거했으며, 빌라도의 아내가 빌라도에게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주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마27:19)라고 증거했다. 둘째로 매우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다. 십자가는 극형의 죄수들을 사형하는 가장 잔인한 형틀이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죽음은 대신 죽으신 죽음이다. 성경에서 말한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고(롬6:23), 우리는 모두 죄를 지었으니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가 죄값으로 죽는 것을 보고 계실 수가 없어서 죽어야 할 죄인을 살리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해 내신 방법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신 것이다.
3) 종합적 의미
사도신경의 절정을 이루는 부분이요, 엄숙히 성도들이 고백해야 하는 부분임에 틀림이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이야말로 하나님의 죄인들을 구속하시려는 구속사의 절정이요 핵심이다. 한 마디로 죄없고 흠없으신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의 모든 죄가 그 치욕적인 십자가상에서 용서함 받았기에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십자가는 주전 4, 5세기 전부터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 형틀로 사용하였다.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가장 중한 죄를 진 사람에게 지우는 십자가 형틀에서 죽으셨던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최고의 비천의 자리까지 나아가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하나님을 향한 완벽한 순종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이천년 전 십자가상에서 그 피흘림과 죽으심속에 내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된 두 가지 은총을 끊임없이 적용시키는 회개의 생활이 병행될 때 진정한 사도신경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온 인류를 향한 대속제물이 되어서 피흘리시고 죽어주신 대속의 위대한 역사를 통해 예수님께서 준비해 주신 보혈의 은총 즉 한번 피뿌려 준비하신 사죄의 은총과 일곱번 피뿌려 영적할례은총 즉, 성결의 은총을 준비해 주신 그 은혜를 지금 순간순간 주관적으로 적용시켜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올바른 신앙고백이다. 여기에서 성도들은 감사의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무심코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그 십자가상에서 바로 ‘나’를 위해 피흘리신 예수님의 고난과 이 고난을 통해 준비해 주신 은총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개신교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고난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구교에서는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 놓으신 빛나는 영광을 바라보는 시각이 짙다. 모두가 다 맞다고 본다. 하지만 성도 개인의 입장에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먼저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고난을 무시하고 오직 영광만을 바라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십자가 고난을 바라볼 때 우리는 진정 죄인들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고, 회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로 나아갈 수 있기때문이다.
7. 장사되어 음부에 내려 가셨다가
1) 역사적인 고찰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사도신경은 두 가지 원본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는 옛 로마교회에서 사용하던 11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 것과, 그 후에 이 신조를 기초로 해서 발전되고, 또한 모든 교회가 공통적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사도신경은 그의 대부분은 동일하나 후자의 것이 더 길고 더 자세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옛 로마 교회에서 사용하던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조항은 없었으나 그 후에 형성된 신조에는 그 조항이 들어있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는 사도신경에는 그 조항이 빠져 있는데, 그 이유는 알 길이 없다. 옛 로마 교회가 사용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것을 빼 버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칼빈이 ‘음부에 내려가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칼빈의 신학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는 한국교회이기 때문에 그 조항을 빼버렸다는 것이 더 정당한 해석인 것 같다. 사도신경에서 이 부분은 교부들의 생생한 전승에 이어진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사이에 음부에서 지냈다는 신앙은 이전부터 잘 알려진 교설 중의 하나이다. 이미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그러한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는 가능성을 도외시하더라도, 이그나티우스, 폴리캅, 이레니우스, 터툴리안과 그 이외 다른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음부로 내려가셨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했다”. 또한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며, 음부에 내려가셨고,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이 구절이 신조다운 진술에 처음 나타난 것은 주후 359년 또는 360년에 나온 서미엄 신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구절이 맨 처음 사도신경에 오르게 된 것은 주후 570년의 일이다.
2) ‘장사되어’ 의미
장사되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반증하는 말이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죽으면 빨리 그들은 무덤에 매장하였다. 예수님의 경우도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십자가에서 운명했을 때, 곧 그곳에서 내려져 세마포로 싸서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의 가정용으로 미리 파 놓은 새 무덤에 매장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에 매장되었다고 고백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체로 위대한 인물은 죽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예수님께서도 죽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최후까지 가졌던 그러한 기대는 결국 빗나가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질 때의 시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사건과 그의 매장은, 일반인이 걸어가는 인생여로의 마지막 단계와 같은 그러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 단계를 넘어서 크게 도약할 준비 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그 도약이란 것은, 이 매장이 있은 지 사흘 후에 부활사건이다. 십자가와 매장사건은 바로 이 부활사건의 선행사건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3) 음부로 내려가신 목적
이 음부라는 말은 구약에서 많이 사용하는 스올과 동의어로서, 대체로 죽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이해하고 있다. 거기에는 모든 사람이 죽은 후에 일시적으로 머무를 곳이어서, 거기에서 심판을 받을 사람은 심판을, 축복을 받을 사람은 축복(연단?)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음부로 내려가셨는가?
옛날부터 이 점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베드로전서 3장 19-20절에 보면, 옛날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이 음부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갔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성육신 하시기 전의 그리스도의 영을 제자들이 받아서 음부에 갔다고 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신앙고백에서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성육신하신 후부터 죽을 때 까지 모든 인간이 걸어가는 행로를 그대로 걸어가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 인간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음부로 내려가셨다는 말은, 그의 지배권이 전 차원에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서 거기에 있던 모든 영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존재의 구주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구주가 되심을 입증했으며, 정말 예수님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깊은 음부까지 내려 가셨다는 것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갈 준비 동작이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기에 음부와 같이 깊은 곳에 내려가셨지만 거기에서 더 강력한 힘으로 도약을 했다. 이 도약의 사건이 바로 부활사건이다.
4) 종합적 의미
사도신경의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국내의 경우 카톨릭에는 포함되어 있지만 개신교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세계적으로 보아도 어떤 나라는 이 부분이 포함되어 있고 어떤 나라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이 부분이 삽입되었다가 언제 빠졌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명백한 문헌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이 음부를 지옥으로 해석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삼일 동안 지옥에 가실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명백히 지옥은 불신자가 가는 곳이요 죄인들이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하는 음부는 하데스라고 보아야 합당하다. 이곳이 바로 심판대가 있는 영역이다. 사도신경의 이 부분은 기독교인에게 주는 의미가 많이 있다. 특히 개신교 성도들은 대부분이 사람이 죽으면 천국 아니면 바로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에 신앙상에 중대한 오류를 안고 있는 셈이다. 성도가 죽었다고 해서 천국에 간다면 천국은 죄로 가득한 죄인들로 가득찬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천국은 죄가 전혀 없는 곳이요. 결코 죄를 가지고는 들어갈 수 없는 거룩한 곳이다. 그런데 모든 신자가 다 죄문제를 해결하고 죄의 뿌리인 원죄 즉, 죄악성의 뿌리가 뽑혀서 없어진 상태가 죽음의 순간에 다 순식간에 이루어 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대답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공의적인 측면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피흘리는 대속의 은혜를 통해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백성이 되었다고 성경은 알려주고 있지만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 편에서 본 시각이요 입장일 뿐이다. 다시말해서 하나님 편에서 준비하신 객관적 은총이요, 이제 성도들 편에서는 이렇게 객관적으로 준비해 주신 보혈의 은총을 개개인은 주관적으로 적용시켜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회개를 통해 죄용서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본성 즉, 원죄인 죄악성이 뿌리뽑힌 성도가 아닌 이상 엄밀한 의미에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셈이다. 이렇게 자범죄를 철저한 회개를 통한 사죄의 은총을 주관적으로 적용하여 용서받고 우리의 영에 뿌리박힌 죄의 본성인 원죄를 뿌리뽑아 주시는 은총을 받은 사람을 성결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러한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벽하게 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성도들은 지옥에 가는가? 그렇지는 않다. 여기서 우리는 난관에 부딪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바로 이 음부의 개념도입이 중요하게 대두된다. 음부는 다른 말로 심판대가 있는 영역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죽으면 일단 이곳으로 영혼이 들어간다. 여기서 불신자와 신자가 구분되어 각각 지옥과 천국으로 갈 준비를 하게 된다. 엄밀히 말해서 카톨릭의 연옥이나 림보의 개념과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다. 음부란 사람이 죽으면 일단 머무르는 영역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에서 이 부분의 실제 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성은 사도신경에 이 부분을 포함시키느냐의 여부를 떠나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현재 가톨릭에서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이 부분은 반드시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개신교의 뿌리가 구교인 카톨릭에 있고 어떤 의미에서 16세기 카톨릭의 부패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한 종교개혁 이후로 중대한 기독교 진리를 이루는 음부에 대한 사실이 부정되거나 약화되어가는 현실은 반드시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인간이 죽으면 어떤 단계를 거쳐서 천국 또는 지옥을 가는가를 알 수가 있다. 바로 음부라고 하는 심판대가 있는 영역에서 신자는 이 땅에서 다 해결하지 못한 죄문제를 연단을 통해 정결함을 얻고 마침내 죄성이 뿌리뽑힌 후 천국에 들어가고 불신자는 선이 제거되고 완전히 악으로 다 익어서 지옥에 가게 된다. 왜냐하면 지옥은 선을 가지고는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요 질서인가를 우리는 음부를 통해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8. 장사한지 삼일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1) 부활의 의미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삶, 행동, 업적, 설교가 전적으로 옳았다는 것을 인증하신 것을 뜻한다. 곧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경건한 성전 수호자와 율법가들이 전적으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긍정과 하나님 자신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죽인 자들에 대한 전적인 부정과 심판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가 구원의 하나님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근거를 본다. 하나님은 참이 거짓을, 생명이 죽음을, 정의가 불의를, 사랑이 미움을 궁극에서 이기리라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해서 나타냈다. 이 부활의 빛에서 비로소 예수님의 삶, 가르침, 행동, 고난의 의미가 바르게 이해되었고, 그분은 참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연합되고 일치된 메시야였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의미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우리 구원받은 죄인들을 위한 대제사장의 자격을 얻으신 것이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의미가 깊다. 그렇다면 부활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흩어졌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시 모인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교회가 유지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실면에서나 교리면에서나 교회 존립의 기초가 된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선교의 내용이 되었다. 복음서에도, 사도행전에도, 서신서에도 선포되는 복음선교의 핵심적 내용이 예수님의 부활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이다.(고전 15:20)
2) 종말론적 신앙
기독교인은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해 항상 생각하며 언제라도 달갑게 맞이할 수 있는 확고한 종말론적 신앙을 구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활의 진리를 거듭 확인하며 그것을 고백해야 한다. 기독교를 한마디로 가리켜 ‘부활의 종교’라고 한다. 여타의 모든 종교들은 죽음에서 생의 의미를 찾지만 오직 기독교만은 부활에서 그것을 찾는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라는 입장에서 삶의 지혜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며 삶의 지혜를 얻으려 한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진리가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계사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왔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세계를 두루 다니며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외친 것은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이었다. 2천 년 동안 이것은 기독교가 전하는 메시지가 되어 왔으며 그동안 쉴새없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반론들로 기절설, 도난설, 환상설, 또는 여자들이 새벽 미명에 길을 잘못 찾아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께서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주장등 많은 맹렬한 비판을 받아왔지만 이것을 무너뜨릴 사람은 이전이나 이후에도 한 사람도 없다. 오늘도 기독교는 이 부활신앙에 의해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3) 종합적 의미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혹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기 위해 예수님은 기절하셨다든지라고 주장하지만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죄의 삯은 死亡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은 죄가 없지만 대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또한 삼일은 완전히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을 확증해 주는 단어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사도신경이 끝난다면 그다지 큰 의미는 없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삼일 만에 부활하시므로 기독교는 살아있는 신앙과 부활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타 종교에서 결코 주장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부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고 장래 모든 인간의 부활에 대한 예표를 시사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했듯이 “그리스도께서 만약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나의 믿음도 헛것이며”(고전15:14)라고 지적한 대로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인들만큼 불쌍한 자들도 없다. 하지만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부활에 관해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막 8:31, 9:31, 10:34, 마 16:21, 17:23, 20:19, 눅 9:22등이 있다. 또한 부활의 순서도 성경에 제시되어 있다 즉. 고린도전서 15장 23절에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라고 부활의 순서가 제시되어 있다. 어쨌든 부활신앙이야말로 기독교가 참된 종교요 기독교인들이 타종교인들도 전도해야 하는 근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은 구속사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승천을 하시지도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뒤에 설명하겠지만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셨다는 고백은 곧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나라는 존재가 장사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라야만 부활의 능력에 의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9.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1)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이란 최고의 영예로운 자리를 지적하는 말이다. 십자가의 굴욕과 고통을 거친 후의 평화의 승리와 하나님의 권위에 다시 돌아가게 되신 것을 묘사한 말이다.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말 가운데에는 주님이 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심판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심판하시는 심판주이시다.
또한 하나님 우편이란 표현은 예수님께서 현재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기능을 지시한다고 보아야 한다.
2) 승천 사건
예수님의 부활 이후 승천하신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1:9). 이외에도 신약성서에는 예수님께서 승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몇 구절을 예로 들면 눅9:51, 24:51, 요6:62, 행1:11, 딤전3:16, 요20:16, 엡4:8-10, 히4:14등이다. 또 여기에서 말하는 하늘은 장소로서의 하늘과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특수한 차원으로서의 하늘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서의 하늘의 의미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곳을 말한. 영어에서는 장소로서의 하늘을 스카이(sky)라고 부르고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곳을 헤븐(heaven)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한 하늘은 어떠한 넓이를 갖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계시는 특수한 영역 또는 차원으로서의 테두리를 말하는 것이다.
3)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
여기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고백을 어떤 장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오른편은 좋은 편이고 왼편은 나쁜 곳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 나라에도 나쁜 것이 있다는 모순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신 후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데, 그와 본래의 관계, 즉 정당한 관계에 계신다는 것을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고 고백했다고 이해해야 한다. 성육신 사건을 통하여 일시적이나마 분리의 관계에 있다가 다시 본래의 관계로 돌아가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앉아 계신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 역시 문자대로 이해하기 보다 하나님과 같이 계시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4) 종합적 의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하늘에 오르신 승천사건은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구속역사를 완성하시기 위한 다시말해서 실제적인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속죄제사를 완성시키시기 위한 승천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지 못했다면 속죄의 사역을 완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피묻은 몸으로 승천하셔서 하늘의 지성소인 하나님의 보좌에서 사죄의 은총과 성결의 은총을 완성하시는 속죄제사를 단번에 완성하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승천사건은 구속사적인 측면 특히 속죄론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제부터 승천하신 사실을 고백할 때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하리라 믿는다. 또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성부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의미는 권능을 표시하는 우편에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도 모든 권세를 예수님께 주시겠다고 성경 마28:18에도 분명히 표시되어 있다.
10.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1) “저리로써”
“저리로써”는 “저곳에서”라는 의미이다. 즉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했으니 “저곳에서”라는 말은 “하나님 보좌의 자리에서”라는 의미가 된다.
2) “산 자와 죽은 자를”
예수님의 재림의 목적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산 자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당시에 살아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며, 죽은 자라고 한 것은 인류역사가 시작이 되고부터 그때까지 죽은 사람 전부를 의미한다고 본다. 실제적으로는 개인별로 사후에 심판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심판주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므로 어떤 역사철학자는 하나님은 모든 시간과 같은 거리에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전지하시다는 말이 이해된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과거와 미래는 현재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는 인류역사상에 나타났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할 것이다. 각기 자기가 행한 데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고후5:10).
3) 재림 신앙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은 항상 미래 지향적이다. 동시에 종말론적이다. 이 종말론과 미래 지향적 신앙을 떠난다면 기독교의 교리, 윤리 그 어느 것도 설명할 수 없다. 기독교는 종말론적인 종교이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내세의 기업, 영원한 기업에 대해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은 이 내세의 기업에 대한 기다림의 신앙이어야 한다.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마음이란 정적인 것이 아니다. 동적이며 행동적이다.주님이 재림하실 그 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여 최선을 다해 전도와 선교에 힘써야 한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개인의 종말을 향해 다시말해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적인 신앙은 우리가 게으르게 살지 않고 항상 깨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재림 대망의 신앙으로 이끌어 주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가장 값지게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이끄는 길임을 믿어야 한다.
4) 종합적 의미
이 부분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표현하고 계시며 재림의 목적을 분명히 심판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예수님의 재림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성도들의 경우에는 익은 곡식은 추수를 하듯이 죄문제를 예수님의 보혈의 은총을 의지하여 다 해결한 다시말해서 연단받아 정결해진 성도를 추수하는 작업 즉 휴거시키시는 것이고 나머지 성도들은 7년 대환란이라는 극심한 환경속에서 나머지 죄문제를 다 해결하고 천국으로 데려가시려는 목적과 불신자들은 악으로 완전히 익어서 지옥으로 보낼 그야말로 심판을 위해 재림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거시적인 시각에서 재림을 본 것이고, 미시적인 시각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특히 요즈음은 하나님의 인류를 이끌어가시는 역사적인 시간표상으로 보아도 인류의 종말 다시말해서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은 성도들에게 재림에 대한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준다. 그 구체적인 성경에서의 증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민족의 고토귀환이 시작된 점(겔39:25-29, 36:24-31, 롬11:25-26), 천하 만국에 복음이 전파되는 현상(마24:14, 롬11:25-26),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징조(계13:1, 요일2:18-19), 교통수단과 지식의 고도발달(단12:4)등을 종합해 볼 때 분명 지금의 시대는 인류의 종말 즉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시기임에는 틀림없다.(밝은빛 성경강요p26-28) 이외에도 도처에 전쟁이 일어나고(마24:6-7), 도처에 지진과 기근이 있으며(마24:7), 사랑이 식어지고 도덕적으로 부패한다고 나타나 있다(마24:9-10, 딤후3:1-5)
또한 예수님의 재림은 성경 사도행전 1장 11절에 “너희 가운데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라고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은 공중강림과 지상재림 이렇게 두번에 거쳐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아울러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공중강림은 예수님께서 7년 대환난 직전에 공중에서 강림하시는 사건을 말하며 그때 휴거사건이 일어날 것이다(살전4:16-17). 지상재림은 예수님께서 7년 대환난이 끝날 무렵에 지상으로 재림하시는 사건인데 그때 예수님께서 백마군대와 함께 내려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슥14:4, 살전3:13, 살후2:8, 계19:11-21). 공중재림의 목적은 교회시대 동안에 정결해진 성도들을 추수하시기 위해서고 지상재림의 목적은 7년 대환란 을 통하여 죄악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고(살후1:7-10), 천년 왕국을 건설하시기 위해서이다(계20:1-6) 그러고 공중강림은 7년 대환란이 시작되기 직전에 비밀리에 이루어진다. 하지만 지상재림은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게 이루어진다. 그 성경적 근거는 마24:30에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C. 성령을 믿사오며
1. 성령의 명칭과 의미
성령의 명칭에 대해서 이때까지 한국교회에서는 성신이라고 불러왔는데 성신보다 성령이 더 정확한 이름이다. 원어에도 ‘하기오스 프뉴마’라고 부르고 있는 반면 한 번도 성령을 ‘하기오스 데오스’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신보다 성령으로 부르는 것이 더 성경적이다. 우리가 성령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사도신경만큼이나 오래된 니케아 신조는 성령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성령은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그에게 관하여는 이미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느니라.” 성령은 성경의 둘째 절에 나올만큼 일찍 언급되었다. 창조 당시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셨다”(창1:2). 이것은 성령께서 처음부터 계셨음을 암시하고 있다. 단지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이 있기 전에는 은밀하게 인류의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다가 성자 예수님의 사역이 끝난 싯점에 본격적으로 활동하신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2. 성령의 속성 및 기능
성령은 단순히 신적인 능력이나 감화력이 아니다. 성령은 분명한 의지와 감정과 지성을 갖는 인격자로서 일하시고 행동하신다. 성령은 아무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숨은 비밀을 알고 나타내어 알게 하신다(고전2:11-16).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붙잡아서 그리스도의 뜻을 순행하게 한다. 생각하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한다(롬8:26-27). 성령은 우리의 비밀을 알고,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한다. 성령을 속일 수는 없다. 그것은 죽음을 가져온다(행5:1-6). 성령은 복음을 선포하고 전도하는 능력과 용기를 준다. 말씀의 신비를 이해하게 하며, 교회를 진리와 능력의 말씀 위에 세우고, 믿는 자를 의롭게 하고 성화시킨다. 성령은 환란과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교회를 붙들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내적인 자원을 선사하고 위로한다. 또한 성령은 은사를 베푸시며 교회의 넘치는 생명의 원동력이다. 성령은 죄악과 정욕의 노예로서 사는 옛 사람을 빛의 자녀로 만든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를 붙잡아 쓰시도록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야 한다.
3. 구속사적인 의미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이 부분은 또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구약시대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속죄제사를 드릴 때 속죄제사를 다 마치고 흰 세마포 옷을 제사장의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올 때 비로소 속죄제사가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만일 오랫동안 기다려도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은 것이므로 밖에서 제사장의 몸에 묶은 끈을 잡아당겨 그 시신을 처리하였다. 이것은 레위기에 나타난 모형적 속죄제사에 대한 설명이다. 이제 실제적 속죄제사를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에 피묻은 몸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보좌에 들어가셔서 단번에 드리심으로 속죄사역을 완성하셨다는 증거로서 성령강림이 오순절에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말해서 성령강림은 예수님께서 속죄사역을 완성하셨다는 반증인 셈이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약한 우리들을 위해 이처럼 확실한 증거로서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 7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 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속죄사역을 완전하게 마치심으로 말미암아 오순절 이래로 성령님을 성도들의 마음속에 모시게 된 것이다. 성령님은 성도가 출애굽하는 순간 우리 속에 들어오신다. 그때부터 성도가 천국가는 그날까지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해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엄밀한 의미에서 성화되는 것도, 정결하게 만드시는 것도 모두가 성령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다. 단지 우리는 의지를 드릴 뿐이다. 그러나 그 의지까지도 붙잡아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인 셈이다. 이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성도는 성령님께 다 내어드리고 마음껏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내어드리는 생활이 진정 성령님께 순종하는 길이요 살아있는 신앙고백이리라 생각한다.
4.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1) 거룩한 공회
옛 로마 사도신경에는 ‘거룩한 교회’라고 되어 있으나 우리말 번역에는 ‘거룩한 공회’로 되어 있는데 이 공회라는 말에는 ‘보편적 교회’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교회를 가르쳐서 거룩하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요,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할 수 있다. 교회에 모이는 사람이야 일반 대중과 다를 바 없지만,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그 머리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모든 성도가 모이고, 그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영의 양식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이 곧 교회이기에, 교회를 거룩하다고 한다. 보편적 교회라는 말은 catholicam ecclesiam을 번역한 말이다. 그런데 이 ‘카톨릭’이란 말이 문제를 많이 일으킨다. 왜냐하면 이 말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대명사처럼 쓰기 때문이다. 본래 카톨릭(catholica)이란 말은 희랍어 ‘카톨리케(καθολικη)’를 그대로 로마어로 쓴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희랍어의 ‘카톨리케’라는 말의 뜻은 ‘보편적’, ‘일반적’이란 뜻이다. 이 말을 사도신경에 넣은 이유는, 교회를 언제, 어디에서, 누가, 세워주었다 해도 그것은 그 교회를 세운 사람의 종교적 생활여하에 따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는 교회이든간에, 그 교회가 교회의 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면 그 교회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다른 교회와도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어떤 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전 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교회요, 전 세계의 교인들이 한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재발견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모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를 보편적 교회라고 불렀다.
2)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사도신경의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는 문자적 의미는 성도의 교제를 의미한다.이 성도의 교제는 사도신경의 문맥으로 보아 성령에 대한 고백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의 교제가 이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함을 의미한다. 성도의 교제는 신령한 교제이다. 교통이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ια)로 번역되는 라틴어 코뮤니오(communio)에서 나온 말인데 단순한 친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코이노니아는 연합, 결합, 교섭, 영적인 사귐, 친교, 친근한 관계, 참여, 나누어 가짐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말은 모든 참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서로가 각기 연합되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또 당신이 연합된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연합되는 것이다. 코이노니아가 성서안에서 쓰여질 때는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고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인간 상호간의 친교를 동시에 의미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말은 단순한 평면적인 관계가 아니라 입체적인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먼저 위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교제를 해야하고, 성도 상호간에 수평적인 교제를 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도간의 교제는 교파를 초월한 보편적인 교회의 개념안에서의 교제이며, 전 우주적인 의미에서 현재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도 다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의 미래까지도 현재적인 시각에서 보고 계시지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카톨릭에서 말하는 ‘통공’이라는 개념은 전 우주적인 성도의 교통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서 시간과 공간을, 하늘과 땅을 포괄하는 성도의 사귐을 엿볼 수 있다.
5. 죄를 사하여 주는 것과
1) 죄의 실제
죄는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참된 일치의 관계를 깨는 데서 발견된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만물을 지배하려 한다.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은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지만 진리, 정의,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를 지니지 못한다. 그들의 자유 의지는 악을 행하는 데는 자유하다. 여기서 죄의 본질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인간의 심령과 육체속에 들어온 죄성 즉, 죄악성이 근본임을 알아야 한다. 이 죄성이 인간의 부패된 정욕의 세력과 연합할 때 우리는 자범죄를 짓게 된다.
2) 속죄 은총의 준비
사도신경에서는 죄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이시오,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오, 사람을 살리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어떻게 죄를 사하여 주시는가 그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사도신경의 이전 부분 특히 예수님의 탄생,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 부활, 승천, 재림, 성령강림등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성경 말씀(롬6:23)대로 아담이래로 죄를 범한 인간에게 죄용서의 방법은 죽음 밖에는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공의의 분명한 한계이다. 이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 사건이다. 이렇게 탄생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버림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속죄의 은총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막연한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로 죄 용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양측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3) 속죄 은총의 적용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 보좌에 피묻은 몸으로 들어가심으로 사죄의 은총과 성결의 은총을 준비하시고 성령 강림을 통해 이제 준비된 사죄의 은총을 성도들에게 공급할 준비가 완료되었다. 이제 성도들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첫걸음을 내딛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 심령 안에 들어오시면서 그 때까지 지은 모든 자범죄를 용서해 주신다. 이 때부터 성도는 범죄할 때마다 회개를 하게 되는데 바로 이때 사죄은총이 이제 주관적으로 개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가 없이는 결코 객관적으로 준비된 사죄은총이 적용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죄 용서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4) 공로설의 오류
비성서적인 죄사함의 방법중에 대표적인 견해가 바로 공로설이다. 이는 보상주의가 교회에 침투하여 신학화된 개념이다. 예를 들면 도둑질한 것이 있으면 고아원을 세우기도 하고 악행을 했으면 고행을 하려고도 한다. 적선을 하고 고행을 함으로써 보상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죄의식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생각에 근거한 속죄 행위나 보상 행위가 결코 죄를 사해 줄 수는 없다. 이러한 사상은 중세기에 강하게 대두되었는데 이 이론에 근거하여 면죄부를 판 것이다. 즉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만들어 교인들을 상대로 팔았던 것이다. 심지어 죽은 사람이라도 그 후손이 면죄부를 대량으로 사면 그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가게 할 수 있다고까지 했다. 실로 엄청난 오류인 셈이다. 예수님의 보혈로 준비된 속죄은총을 제외하고 죄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은 그 은혜를 진실로 받았다면 우리의 행실 또한 그에 상당하게 빛된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므로 선행은 죄사함을 받은 결과 나타나는 것이지, 죄 자체를 사해주는 효과는 없는것이다. 요즈음은 너무 믿음을 강조한 나머지 행실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믿음과 행실은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6.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1) 부활 신앙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우리는 육체 부활에 대한 신앙을 확고히 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 따라야 할 모형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고 말했다. 또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중요하며 내세에도 육체가 있음을 믿는다.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으므로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범죄의 수단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의의 병기로 사용해야 한다. 우리의 육체가 완전한 부활체를 입는 순간이 완전한 구원을 이루는 순간인 것이다. 부활은 다음에 언급되는 영생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예수님께서도 궁극적으로 인간을 구원하셔서 그 자신의 생명인 영생을 주시는 것이 최종의 목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할례인 예수님의 생명의 내주합일을 말하는 것이다. 즉,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2) 영생
사도신경의 제일 마지막 조항에 이르러 사도들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사실 이 영생이야말로 전 인류가 언제든지 갈구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구약의 경우의 예를 들면 전도서 3장 11절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구약에 있어서도 사람에게 현세를 넘어서 내세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둘째로 구약의 구원관은 사람은 음부에서 해방되어야 완전한 축복의 상태로 갈 수 있다고 한다(시16:10, 49:14-15). 셋째로 구약의 부활관은 영생에 직결된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욥19:23-27, 시16:9-11, 17:15, 49:15, 73:24, 사26:19, 단12:2). 다음에 신약의 영생에 관한 가르침을 본다면 구약보다 더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첫째는 선한 사람의 영이나 악한 사람의 영이 육체의 죽음 후에도 그대로 남아있어서, 생전의 생활의 정도에 따라 상벌을 받는다는 것이다(마10:28, 눅23:43, 요11:25, 14:3, 고후5:1). 둘째, 선인이나 악인이 다같이 부활한다. 셋째, 신자들은 장차 부활하여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과 영원불변한 축복의 상태에서 계속 산다(마13:43, 25:43, 롬2:7, 10, 고전15:49, 빌3:21, 딤후4:8, 계21:4, 22:3-4). 이와 같은 증거를 볼 때 성경에 관한 한 부활이나 영생에 대한 사상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과거의 창조의 역사나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섭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관계나 예수님의 성육신 목적이나 사람의 부활의 목적이 다 이 영생으로 연결되는 것이며, 영생에 있어서 그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의 성질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신적이요, 지상적인 것이 아니라 천상적인 것이다.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것이며,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일체의 성질을 제거한 후에 주어진 생명이며 죄있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온갖 본성을 제거한 뒤에 주시는 생명이다. 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이므로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생은 오직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만 가지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생한다는 것은 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D. 아멘
"아멘"이라는 마지막 단어는 ‘틀림없습니다’, 혹은 ‘그렇습니다’라고 번역해야 하는 히브리어이다. 그래서 “아멘”이란 사도신경 전체를 훑어 보고나서 ‘옳습니다. 이것은 진리이며 내가 진정으로 믿는 내용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사도신경 전체의 내용에 대해 아멘할 수 있는가? 이 아멘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참되다는 것을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데서 우러나와야 한다.

 

 

Ⅳ.조직신학적인 분석

 

A. 신론적인 측면
사도신경에서 신론적인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하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첫 구절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부 하나님의 많은 속성중에서 특히 포괄적이고 가장 특징적인 전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이 전능성이야말로 다음에 소개되는 천지창조를 자연스럽게 뒷받침하고 있으며, 유일신으로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난다고 본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구속사적인 측면에서도 우리의 구원 섭리를 완전하고 완벽하게 시행하시는 하나님을 암시해 주고 있다고 본다. 성도들은 무능한 막연한 어떤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고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간섭하시고 운영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다른 종교의 경우 피조물인 인간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독교만이 참된 신을 믿는 종교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전능이라는 단어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그의 뜻대로 행할 수 있다는 뜻에서 전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본질에 모순되거나 대립이 되지 않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둘째로 과거 인류역사에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놀라운 일을 하셨다는 것을 토대로 하나님은 전능하다고 이해할 때, 가장 성경적으로 이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창세기 1장 1절은 기독교 교리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중에 하나이며 동시에 현대인들에게 가장 충격을 준 것이 바로 이 교리다. 그것은 현대인의 주권을 여지없이 박탈하고 인간의 모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부정하고 현대과학을 그 기초부터 흔들어버리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일방적 선포이기 때문이다. 이 교리가 그 많은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래로 인간으로부터 도전도 많이 받아왔다. 몇몇 과학자들은 천지창조의 사실을 부정하면서 진화론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정면으로 부정할 증거를 지금까지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 앞으로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뒷받침하는 성경의 근거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의 하나님의 전능성을 강조하는 구절들(사40:26, 28, 암4:13)과 위대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으로서 자연 위에 그의 뛰어나심을 언급한 구절들(시90:2, 102:26-27, 행17:24), 창조 사역에서의 하나님의 지혜를 언급하는 구절들(사40:12-14, 렘10:12-16, 요1:3), 창조를 하나님의 주권과 목적의 사역으로 언급하는 구절들(고전11:9, 골1:16)을 증거로 제시 가능하다.

 

B. 기독론적인 측면
사도신경은 그 내용의 대부분이 기독론을 표현한 것이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고 본다.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성자 예수님을 중심으로 전개시켰다는 것은 인류의 구속사역의 중심이 인간의 형상을 입고 성육신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체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성부 하나님의 속성은 인간의 제한적인 사고한계 속에서 완전하게 이해를 할 수 없지만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가 가능하고 그 만큼 우리의 연약하고 의심많은 인간의 속성을 잘 아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배려인 것이다. 이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기독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첫째로 예수님의 신분을 알 수가 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이 바로 신성을 지니신 근거가 되고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분이시라는 근거가 된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주가 된다는 결론을 자연스럽게 도출할 수 있다. 둘째로 구속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엄격함을 엿볼 수 있다. 다시말해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그 분의 원칙을 반드시 성취하시면서 구속사를 이끄시는 신실하신 면을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실 수 밖에 없었고 여기서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이단의 사상을 분석해 보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인정하지 아니하는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해왔다. 성자의 신성은 초대 교회 시대에 에비온파와 알로기파, 그리고 역동적인 단일신론자들과 아리우스주의자들에 의하여 부인되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소지니주의자들이 그들의 입장을 따라서, 예수님은 단지 사람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동일한 입장이 독일의 일부 신학자들, 특히 슐라이에르마허나 리츨에 의하여, 그리고 유니테리안파, 오늘날의 현대주의자들이나 인본주의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졌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성을 지니셨기에 하나님의 본체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자 예수님을 준비하시고 그 분께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을 당하고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강림을 통한 교회시대의 역사는 완전한 하나님의 계획속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마지막 재림의 사건만을 남겨놓은 싯점에 이르렀다. 여기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일면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시간표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대비해야 하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해서 고백해야 할 사항이다.

 

C. 성령론적인 측면
사도신경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세 번째 부분이 바로 성령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이다. 이 성령에 대한 부분을 예수님의 승천 이후 본격적인 교회시대를 열어주신 성령의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중 제3위이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신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인류구속의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구속의 역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분으로서 성령님은 교회시대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다시말해서 성령님의 역할은 성자 예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속죄은총을 전달해 주시는 메신저 역할을 담당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하에 구원받기로 예정하신 사람들의 출애굽부터 완전 구원을 이룰때까지 전 기간을 성도와 함께 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성도들을 연단이라는 환경속에서 마음과 행실을 정결케 하는 성화시키는 실질적인 구원을 완성시켜 가시는 분이시다. 그저 이신론자처럼 간섭하지 않고 방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성령님의 조명하시는 역사속에 구원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실질적인 역할은 교회시대에서 본격화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성령강림은 필연적인 사건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계셨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각 사람의 심령속에 머물러 계시면서 속죄은총을 공급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육신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교회시대를 활짝 열었던 것이다.
‘성령’이라는 용어는 성자 예수님 만큼 인격성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성령의 인격성은 성자의 인격처럼 사람들 가운데에서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는 인격적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 결과 성령의 인격성은 종종 의문시되어 왔으며, 따라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성령의 인격성은 초대 교회에서 단일신론자들과 성령파들에 의하여 부인되었다. 종교 개혁 시대에는 소지니주의자들이 그들의 부정적인 입장을 따랐다. 후대에 와서는 슐라이에르마허와 리츨, 유니테리안파, 오늘날의 현대주의자들과 현대의 모든 사벨리우스주의자들이 성령의 인격성을 거부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증거라 너무도 많이 있다. 첫째로 인격성에 적절한 칭호들이 성령에게 부여되고 있다. 요16:4에 사용된 ‘에케이노스’남성대명사이고 ‘파라클레토스’라는 호칭도 성령의 인격성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로 지식(요14:26, 15:26, 롬8:16), 의지(행16:7, 고전12:11), 감정(사63:10, 엡4:30)과 같은 인격의 특징들이 성령에게 돌려지고 있다. 게다가 성령은 인격성에 적합한 행동들을 실행하신다. 성령은 찾으시고, 말씀하시고, 증거하시고, 명령하시고, 계시하시고, 노력하시고, 창조하시고, 간구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등의 일을 하신다(창1:2, 6:3, 눅12:12, 요14:26, 15:26, 16:8, 행8:29, 13:2, 롬8:11, 고전 2:10-11). 셋째로 성령은 자신의 인격성을 의미하는 바, 다른 인격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분으로 나타난다. 성령은 사도들(행15:28)과 그리스도(요16:14), 성부와 성자(마28:19, 고후13:13, 벧전1:1-2, 유20-21)와 함께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건전한 주석은 이러한 구절등에서 성령을 인격으로 간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가에 대한 해답과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은 분명히 인격성이 있으므로 성도들은 모두 인격적으로 대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의미에서 성령보다는 ‘성령님’이라는 호칭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성령님의 인격성은 우리와 유사하므로 우리가 쉽게 친근함을 느끼고 의지를 드리고 간청하고 대화하고 느낌으로서 이질감에 따른 거부감 보다는 보다 용이하게 이해하고 순종을 가능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성육신 사건이나 성령 강림사건은 인격성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화시키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라는 생각이 든다.

 

D. 종말론적인 측면
오늘날 같이 종말론적인 측면에서 신앙고백을 드려야 하는 시기가 과연 역사상에 또 있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점진적인 계시를 통하여 그분의 섭리를 주관하고 계신다. 지금을 말세지말 또는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음을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고 공평한 분이시다. 교회시대만을 생각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그 당시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종말론적인 신앙은 계속 있어왔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공평하게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시대 시대마다 재림을 바라보는 나름대로의 시각과 필연성을 제시한 점은 특이한 일이다. 종말론적인 신앙이야말로 성도들로 하여금 게으른 신앙생활을 방지하는 깨어있는 신앙을 견지하게 만든다.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적인 종말은 틀림없이 다가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단지 망각하고서 살아갈 뿐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에 종말론적인 계시를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종말론적인 신앙은 두 가지를 암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는 개인을 향한 종말과 또 하나는 인류전체의 종말을 이끌어가시는 양측면을 바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현 시대의 상황은 인류전체의 종말을 향해 다가서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시기적으로 임박했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개인의 종말과 인류의 종말이라는 종합적인 분명한 신앙이 필요하다고 본다. 결코 초대교회나 중세시대와는 종말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을 하는 주체인 성도 개인 개인 각 교회들은 이 종말론적인 신앙을 마음에 새기고 지혜롭게 대비하면서 실천적인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기계적인 의미로 암송한다면 게으른 종과 같이 후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 교회론적인 측면
사도신경에는 교회의 대한 개념이 두 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첫째 유형적이고 보편적인 교회요 두번째는 각 성도 개개인을 지칭하는 무형적인 교회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거룩하다고 그 성격을 명시하고 있다. 왜 교회는 거룩한가? 표면상으로 보기에 교회에는 죄를 지은 죄인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거룩하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거룩하다고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어서 교회의 기초가 되셨기 때문에 그 분의 의로움, 거룩함을 인하여 교회를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하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성도들도 거룩해져야 하며, 그 거룩함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속죄은총을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도를 미래의 입장에서 본 결과는 모두 거룩한 성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실제적으로 보더라도 흠이 있는 성도를 의롭다고 불러주는 칭의 이후에 궁극적으로 득의의 단계까지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보더라도 거룩한 교회와 성도는 미래지향적인 최종의 시각에서 내린 결론이라고 본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지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파를 너무 내세워 상대를 비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본다. 오히려 교회나 교파끼리 반목하려는 것보다 서로 부족한 면을 깨닫고 보완하는 자세가 진정한 교회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교회 또는 어느 교파에 소속되어 있느냐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를 기준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다양성과 부패할 수 밖에 없는 속성을 아시기에 시대마다 믿음이 장성한 성도들을 중심축으로 교회를 세우고 교파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을 부정하는 단체조차도 인정하자는 말은 아니다. 사도신경과 연관하여 교회는 두가지 의미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우주적인 의미에서 본 교회는 이 세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며 동일한 그 성령에 의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오게 된 모든 사람으로 구성된다(벧전1:3, 22-25, 고전 12:13). 두번째는 지역적 의미에서 본 교회인데 이것은 어떠한 지방의 신앙을 고백한 신자들의 무리에 대해 쓰인 말이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에베소교회등이 그 예이다. 오늘날에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카톨릭등과 같은 교파로 지역적인 교회의 분리의 근거를 볼 정도로 교파에 치우쳐 있다. 그러더 보니 교파끼리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교파에 속한 교회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심지어는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지역적 교회는 우주적 교회의 신실한 재현이 되어야만 한다.

 

 

Ⅴ. 맺는말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모임 또는 예배의 시작을 주로 사도신경을 암송함으로써 시작한다. 이처럼 사도신경을 모든 순서에 들어가게 한 이유는 그 만큼 기독교의 핵심을 잘 표현하고 있고 반드시 바로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부분적으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부분을 배우고는 있지만 전체적인 의미를 잘 알지도 못하고 그저 기계적인 암송으로 일관한 면이 없지는 않다고 본다. 만약 신앙고백의 주체가 그 자신이 고백하는 내용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한 채 입술로만 암송한다면 별다른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모든 주체인 성도들은 각 개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경륜과 구원의 실제적인 성취인 성육신사건, 십자가 사건, 부활, 승천, 성령강림사건, 그리고 마지막 남은 예수님의 재림에 담겨 있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바로 이해하고 비단 초대교회의 고백만이 아닌 현재 나의 진실한 고백으로 되살아나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신경의 내용은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진리이며,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주로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사도신경을 살펴보았다. 다른 측면에서 또다른 많은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한번을 사도신경을 암송한다 하더라도 내 자신의 고백으로 만들지 아니하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별다른 유익은 없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위대한 사랑을 느껴야 하며, 많은 이단사상이 우리를 유혹할 때도 그러한 불순한 사상을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현대의 사조는 무서우리 만큼 우리의 믿음을 빼앗기 위해 인간을 현혹시키고 있다. 그래서 믿음의 뿌리가 견고하지 못한 사람들은 쉽게 현혹되어 마귀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현대의 사조들이 신본주의적인 신앙에서 인본주의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리려고 활개치리라 예상된다. 특히 예수님의 재림이 심히 임박한 현재의 상황은 우리 모두에게 어떠한 신앙자세가 지금 가장 지혜로운 것인가를 알려준다고 본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을 신실하게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의 성도들의 살아있는 신앙고백이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우리가 사도신경을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할 때, 우리는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순교정신 특히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고 뒤따르다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박해와 고난을 당한 신앙의 증인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본 받으려는 결단이 요구된다고 본다. 신앙고백은 믿는 사람에게 절실한 대답과 진실한 응답을 요청한다. 그것은 온 마음과 영혼과 몸을 드리는 산 제사의 응답이다. 생명을 걸지 않는 신앙고백은 예언자적이며 사도적인 신앙고백이 아니다. 초대 교회의 신도들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순수하게 지키기 위하여 잔인한 박해를 받아왔다. 오늘 우리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박해를 받으며 승리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신앙을 고백하는 그의 백성들과 교회를 전세계에 파견하고 생명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여기에 신앙고백의 신비로운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생명과 합일되는 은총을 통해 영생의 길로 이끄시는 것이 바로 사도신경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출처: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