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이론>>>/- 사도신경 연구

스크랩 부록(1) 사도신경의 배경

에반젤(복음) 2020. 10. 9. 01:41

사도신경 강해 부록(1)

 

 

사도신경의 배경

 

우리가 지금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어떤 한 사람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어떤 교회의 공의회에서 의도적으로 제정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성경말씀의 가르침을 가장 분명하게, 해석적으로 요약해서 교육과 비기독교 사상으로부터의 변증, 그리고 이단에 대한 성경적 기독교의 보호 등의 목적으로 사용해 보려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오랜 시도(試圖)들이 쌓이고 걸러져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역사적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고백이 신구 기독교의 공통적인 신앙고백으로 남아있게 된 것은 분명히 성령의 역사라고 믿어야 할 것이다. 특히 사도신경이 형성될 즈음 미사가 많이 행해졌는데, 미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설명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다. 성령의 간섭이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사도신경의 배경을 이루는 신앙의 요약, 신앙규칙, 신앙고백 등은 벌써 2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다음에서 그 중 중요한 것들과 그 외에도 교회의 공의회에서 공인된 몇 가지 신앙고백들을 소개하고져 한다. 그 내용은 레이스가 편집한 <교회의 신조(信條)> (John E. Leith ed. Creeds of the Churches. Atlanta. 1977)의 몇 부분들을 아세아 연합신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김유찬군이 번역하고 본인이 감수한 것이다. 오역이 있다면 그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

 

2세기 신경의 발전

 

안디옥의 익나티우스(Ignatius)(약 주후 107년)-기독교 신앙은 정교하면서도 일정한 형태로 압축된 표현들로 정착되었음이 특히 교부 익나티우스의 저서에서 잘 증거되고 있다. 당시에 이러한 신앙의 압축된 표현들이 교회의 교육, 예배, 그리고 설교 등에서 꼭 필요하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직 공식적으로 확정된 신앙고백은 아니었다.

익나티우스의 서신 가운데 아래의 신앙 요강(要綱)(Trallians 9:1-2) 대표적인 것으로서, 인간 예수의 역사적 삶은 실제가 아니었다는 도세틱(Docetism) 교리에 대한 교회의 반박을 나타낸다. 익나티우스 서신의 연대를 어떤 학자들은 하드리안 황제시대(주후 117-138)라고도 하지만, 역시 주후 107년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는 쓰기를,

“ 그러므로 당신은 누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는 다윗의 줄기에서 나시며, 마리아에게서 참으로 태어나셨으며, 먹고 마시었으며, 참으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으며, 참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하늘과 땅과 지하의 모든 것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죽으시고, 참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던 분이시다 라고 고백하지 않을 때는 언제나 귀를 막으십시오”라 했다.

 

 

사도의 편지(Epistula Apostolorum)(주후 약 150년)

이것은 기독교 신앙 요약으로서 초기의 신경과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사도들의 편지>라는 문서에 들어있다. 한 편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나누신 개화’라고도 불리운다. 자료의 연대는 약 2C 중반으로 터툴리안과 이레니우스의 것보다 이전의 것이다. 기록된 곳은 소아시아 또는 에집트 이다.

“우주의 지배자인 아버지를 믿사오며, 또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며, 보혜사 성령님을 믿사오며, 거룩한 교회를 믿사오며, 또한 죄를 사하여 주심을 믿나이다”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증언(Justin Martyr)(주후 약 165년)

 

이것은 개인적 신앙고백에 가까운 것인데, 이것은 신경과 같은 형식을 취한 것으로 그의 순교사에서 그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대는 아마도 165년일 것이다.

 

“태초로부터 계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 곧 기독교도들의 하나님을 우리는 경배하오며, 인간 종족과 함께 거하실 것으로 선지자들이 예언하시고, 구원의 선포자와 선한 교훈의 선생이신 하나님의 종,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나이다”

 

서머나 장로들의 신앙고백(주후 약 180년)

 

약 180년경 서머나에서 노에투스(Noetus)를 정죄했던 바로 그 장로들이 그들의 신앙을 고백했는데, 히폴리투스(Hippolytus)에 의해 그 형식이 보존되어 왔다.

 

또한 우리는 참으로 한 분 뿐이신 하나님을 알며,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아들을 아노니, 그는 바로 그가 당하셨던 바 고난을 받으셨고, 그가 죽으셨던 바 죽음을 당하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분이심을 우리는 아나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고백할 때 우리에게 전해진 바를 그대로 말하나이다“

 

발리제 파피루스(주후 200년경, 또는 그 후)

 

1907년에 발견된 한 파피루스에는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 매우 흥미로운 신경이 담겨져 있는데, 그것은 꽤 제대로 된 신경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파피루스의 연대는 2세기 후만인 것 같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4세기 중반 이전이라는 증거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신앙을 고백하기를,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그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며, 그리고 성령을 믿사오며, 육체의 부활을 믿사오며, 거룩한 보편적 교회를 믿나이다”

 

신앙의 규칙들

2세기 후반에 기독교 신앙의 압축된 표현들은 신학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신앙의 규칙들로 널리 알려졌다.

치밀하면서도 법에 투철한 정신을 가진 터툴리안(Tertullian)은 확실히 신앙고백에 모종의 고정된 형식을 갖추고 싶어 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세 가지 다른 형식의 신앙규칙을 제시했는데, 이 신앙 규칙들은 점차 신앙의 기준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신학적 창의성과 지역적 필요에 적응할 수 있도록 그 규칙들은 유연성을 가졌다.

이 신앙의 규칙들은 요리문답 교육의 기초와 성경 해석의 지침서로서 교회에 사용되었으며, 또한 이단에 대항하여 지키기 위한 신학적 자료로서도 역할을 했다.

 

이레니우스(Irenaeus) (주후 약 190년)

 

“교회는 비록 전 세계로 지구 끝까지 퍼져 있긴 하지만, 이 신앙을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로부터 전해 받았다. 교회는 한 분 뿐이시며 전능하신 아버지시며,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리고 그 가운데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한 분 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시고 드러내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동정녀에게서 태어나게 하시며, 고난도 받게 하시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케 하시며, 사랑하는 그를 육체로 승천케 하시며, 만물을 주 안으로 모으기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 가운데서 하늘로부터 재림케 하시며 또한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이시며 구원자이시며,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하늘과 땅과 지하의 모든 존재자들의 무릎을 꿇게 하시며, 모든 혀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케 하시며,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심판을 행하시기 위하여 모든 인류의 육체를 다시금 새로이 일으키시는 성령님을 믿으며, 또한 그는 거역하여 배신자가 된 천사들, 즉 악한 영들을 믿음이 없고 불의하고 사악하고 속된 자들과 함께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보내실 것이며, 그러나 그의 명령을 지키고 그의 사랑안에 거하여 왔던 자들, 즉 올바르며 거룩한 자들(그 가운데 어떤 자는 처음부터 기독교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며, 그들을 영원한 영광 가운데서 보호하실 것임을 우리는 믿나이다.(이단에 대항하여 I. XI).

 

터툴리안(Tertullian 주후 약 200년)

 

“모든 진리에로 인도하시는 보혜사 성령에 의하여 지금은 더욱 더 잘 진리로 무장되어 있는 우리는 언제나처럼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다음과 같은 경륜을 따른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한 아들을 두셨으며, 그 아들은 그로부터 나오신 말씀이며, 그 말씀에 의하여 모든 것은 만들어졌으며, 그 말씀이 없이는 어떠한 것도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그리고 이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 동정녀에게로 보내어 져서, 그녀로부터 사람과 하나님으로 즉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ㅡ아들로 태어나셨으며,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성경에 따라서 고난을 받으셨고 죽으셨고 묻히셨으며, 아버지에 의하여 부활하셔서 승천하셨고,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약속대로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믿는 자들의 믿음을 거룩케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신다 - 이 규칙들이 지난 날의 프락세아스는 물론이며 그 이전의 모든 이단자들의 주장들이 있기로, 전에 복음의 시초서부터 내려왔다는 사실은 지난 날의 프락세아스뿐만 아니라 모든 이단자들의 주장들이 비교적 최근의 것들이라는 사실에 의하여서도 잘 증거될 수 있다.(프락세아스에 대항하여 2).

 

로마신경과 사도신경

 

전설에 의하면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10일 후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사도들이 한 구절씩 만들었다고 전해져 내려왔다. 틀림없이 이 전설은 사도신경에 그 권위를 더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로렌쪼 발라(Lorenzo Valla)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단순한 전설에 불과하 것임이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그러나 이 사도신경의 모든 구절들은 주후 100년경에 알려졌다던 신학서들에서 자주 발견되곤 하는데,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생각해 볼 때 이 신경이 사도신경이이라고 명명 되는 것에는 그런대로 합당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이 사도신경의 계보는 2세기 말경 로마에서 발전했던 신경들에로 추적해 볼 수 있다. 물론 이 신경의 기원은 분명치 않지만. 이 신경의 초기 형식은 아마도 히폴리투스의 <사도작 전통의 문답식 신경>(주후 약215년)과, 마루셀루스가 <율리우스 1세에게 바친 신경>(주후 340년)과, 그리고 루피누스의 <사도신경 주석>(주후 약 404년)속에 보존되어 있었던 것 같다. 루피누스의 주석은 그의 아킬레이아 교회의 침례신경에 기초해 있는데, 그는 그것과 로마신경과 다른 점들을 상세히 지적하여 놓았다.

 

히폴리투스의 문답식 신경(주후 약 215년)

 

“당신은 전능의 주재자 하나님 아버지를 믿나이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었으며, 본디오 빌라도에게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죽으셨고, 그리고 장사 지낸 바 되었으며, 그리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장차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그분을 믿나이까?

당신은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그리고 (육체의 부활)을 믿나이까?

 

마르셀루스(Marcelluce)의 신경(주후 약 340년)

 

“저는 전능의 주재자 하나님을 믿나이다. 그리고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그는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본디오 빌라도에게서 못 박히셨고, 장사 지낸바 되셨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 나이다”.

 

루피누스(Ruffinus)의 신경(아퀼레이아) (주후 404년경)

 

“저는 전능하시고 볼 수 없으며 가까이 갈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나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이는 성령에 의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장사 지낸 바 되셨습니다. 그는 음부에 내려 가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 하늘에 오르사 거기서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그리고 (저는) 성령과 기룩한 교회와 죄를 사하여 주심과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나이다.”

 

옛 로마 신경의 출현에 뒤이어 3세기가 지난 후, 수많은 신경들이 로마의 영향권내 지역에서 나타났다. 이 신경들은 지역적 영향의 흔적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긴 하지만, 반면에 너무나도 로마신견과 유사해서 “딸 신경”들이라고 불리운다.

현재의 형식을 갖춘 사도신경은 기원된 연대와 장소를 정확히 확정할 수 없지만, 그것은 아마 6-7세기 이후 프랑스 남서부일 것이라는 상당한 증거들이 있다. 최초의 사도신경으로 공인될 수 있는 것이 나타난 것은 Priminius의 란 책 가운데서인데, 그 연대는 아마 710-724년경일 것이다. 로마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이 신경은 마침내 서방교회의 공동신경이 되었다. 하지만 프로렌스 회의(Florence council)에서 동방교회의 대표자들은 사도신경에 대하여 아는 바가 전현 없었다고 말했다.

 

사도신경의 공인된 형식(주후 약 700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며,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서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으며, 지옥으로 내려 가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보편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함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 사옵나이다. 아멘.”

 

아프리카의 변형(주후 약 400년)

 

히포(Hippo)에서 분명히 사용되었던 이 신경은 사도신경을 해석하는 어거스틴의 설교에서 재구성될 수 있다. 이 신경은 꽤 흥미있는 아프리카의 변형들을 대표할 만한 것인데, 그 특징들을 잘 보여 주고 있다.

“ 우리는 전능하시고 모든 것들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시대의 주재자이시며 영원하시며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나이다.

우리는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그는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서 십자가에 못 박히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으며,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거룩한 보편 교회를 통하여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동방의 신경들

 

동방의 신경들은 그 어느 것도 당시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서방 로마신경의 영향을 전혀 믿지 않았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동방교회는 서방 로마교회와 영향을 서로 주고 받지 않았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동방 신경들의 발상 역사는 모호하다. 어떤 학자들은 그것들의 기원이 로마신경일 것이라고 논리를 전개한다. 또 어떤 이들은 동, 서방의 신경듪이 모두 거슬러 올라가면 그 근본이 되는 모종의 인적 형식이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점은 비록 공동의 조상을 가졌는지 아닌지 분명히 모른다고 할지라도, 많은 동.서양의 신경들이 다같이 교회를 중심으로 그 형식과 신학에 있어서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한스 릿츠만(Hans Lietzmann)은 동방신경 발전의 원천이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한 가상의 신경을 구성했다. 비록 이 신경은 한 학자의 연구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지만 만약 동방 신경의 기원이 존재한다면, 이 릿츠만 신경은 바로 그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방의 신경들은 서방의 것들보다 훨씬 정교하고 신학적이다. 그리고 동방의 신경들은 우주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사역에 보다 역점을 두고 있다.

 

동방의 신경(릿츠만)

 

“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창조자이시며 모든 것의 주재자이신 한 분 하나님 아버지를 믿나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그는 만세 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며, 그를 통하여 모든 것이 존제케 되었으며, 그는(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셨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사 한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믿나이다.

 

가이사랴(Caesarea) 신경(Eusebius, 주후 325년)

 

“우리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자이신 한 분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그리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시며 빛에서 나오신 빛이시며, 생명에서 나오신 생명이시며, 아버지의 독생자이십니다. 모든 창조물 가운데 처음 나셨으며, 만세 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며 그에 의하여 모든 것이 존재케 되었으며, 그는 우리를 위하여 성육신하시어 사람 가운데서 사셨으며, 고난을 당하셨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아버지께로 올라가셨으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시기 위하여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니케아 신경(주후 325 년)

 

신경의 발전은 니케아 공의회에서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교회 통합회의는 신앙 정통의 기준으로서 그리고 모든 교회에 대한 권위로서 신경을 채택(採擇) 했었다. 이와 같은 일의 전조는 안디옥 회의에서부터 보이는데, 안디옥 공의회는 고의회의 신앙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니케야 공의회는 신경 형성사에 신기원을 이룩한 공의회로서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만한 것이 없다.

그때에 격렬하게 논쟁되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에 관한 문제였던 아리우스 신학에 대한 것이었다.

모든 기독교신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사람인 것으로 믿어왔는데, 아리우스 신학은 교회로 하여금 어떤 의미에서 예수는 하나님인가에 대하여 분명히 밝히도록 하였다. 아리우스는 아들 또는 말씀은 하나님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며 시작이 있으며 가변적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아리우스 자신이 지적하였듯이 아들은 아버지의 충만하고도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니케아 신경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 역사 가운데 충분하고도 깊숙이 개입하셨음을 주장한다. 신경의 다음과 같은 주요 대목들에서 이 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아버지의 본체이시다”(of the Essence of Father), “참 하나님으로부터 온 참 하나님이시다”(Ture God from Ture God), “태어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다”(Begotten, not Created), “아버지와 하나의 본질이다”(of One Essence or Reality with the Father)

이 마지막 구절은 결정적인 것이기는 하나 상당한 논란의 주제가 되었다. 이 구절은 성겨에서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이러한 진리를 의심하고자 하는 다른 신학적 문제들 속에서 사용되어져 왔었던 것이다.

니케아 공의회 후 50년 동안 교회는 위의 “아버지와 하나의 본질이시다”(of One Essence with the Father)라는 확정을 두고 논쟁해왔다. 거기서 여러 가지 대안들이 시도되었는데, 그 예로 “하나님과 똑같은 형상”(Second Creed of Antioch, 341), “성경에 따라서 그를 낳으신 아버와 닮은”(Dated Creed, Fourth of Sirmium), “만물 가운데서 아버지를 닮은 ” (Dated Creed, Fourth of Sirmium), “아버지와 닮은 본질의”(Ancyra, 358), “아버지와 닮지않은”(the teaching of Aetius and Eunomius and, by implication, of the Second Creed of Sirmium 357) 등이다. 결국 기독교 신앙의 공동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바로 그 하나님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을 저당화하는 유일한 확저으로서 위의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하나의 본질이시다”라는 니케아 공회의 선언을 확정했다. 신학적으로 아들이 단지 아버지를 닮기만 했다는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성에 대한 기독교인 공동체의 확신을 침식(侵蝕)시키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닮아다는 주장은 닮았다는 것과 어느 정도까지 닮았는지를 결정하여야 할 모종의 기준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언젠가 하나님을 더욱 닮은 자가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많은 가능한 종교들 가운데 그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그러나 만약 하나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서 육신으로 오셨다면, 그것ㅇ른 바로 궁극의 말씀이실 것이며 거기에 더 어떤 말을 첨가할 수 없을 것이다.

니케아 신학의 문화사적 의의는 정치적 제국주의자들의 의도가 “아리아니즘”이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이었다. 정치 전략상 제국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보다 훌륭하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좀 못한 무엇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그들의 이념에 부합되는 이론이라고 생각하였다.

 

니케아(Nicaea)신경(주후 325년)(318 교부들의 신경)

 

“우리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창조자이신 한 분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그리고 한 분 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며, 즉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독생 하셨으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온 참 하나님이시며, 빛으로부터 온 빛이시며, 태어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았으며, 아버지와 똑같은 본질이시며, 그를 통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이 존재케 되었으며, 그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셔서 성육신하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시어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장차 산 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았다거나, 그의 시대 이전에는 계시지 않았다거나, 또는 그가 무로부터 존재케 죄었다거나, 또는 하나님의 아들 그는 다른 실제 혹은 본질을 가지고 계신다거나, 또는 그는 피조물이라거나 가면적이라거나, 변덕스럽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편적 사도 교회가 저주합니다.

 

콘스탄티노플(Constantinuple) 신경(주후 381년)(150 교부들의 신경)

 

일반적으로는 니케아 신경이라고 알려져 있는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칼케톤 회의(주후 451) 이후에야 비로소 콘스탄티노플 회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콘스탄티노플 회의의 정확한 기록에는 이 시경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또한 칼케돈 회의 이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해서 많은 학자들은 이 신경이 콘스탄티노플 회의와 상관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결론에 따르자면 칼케돈 회의는 어떠한 근거에서 이 신경를 콘스탄티노플 회의의 유산이라고 받아들였는지 설명하기 곤란하게 된다.

슈바르츠(Schwartz), 그리고 켈리(Kelly) 등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이 신경은 비록 회의의 기록이 모호한 채로 남아 있지만 콘스탄티노플 150 교부들의 신경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는 것이다.

이 신경은 니케아의 신학을 확정했다는 점에서 니케아적 이지만, 니케아 회의의 동본질(homoousia)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성서적 언어의 표현으로서 성령의 충만한 신성을 확정했다는 바로 그 점에서 니케아를 넘어서고 있다. 말할 것도없이 성령의 확실한 신성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를 받으시고 함께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라는 구절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이 회의는 “아폴리나아주의”(Apollinariaism)를 정죄했는데,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로부터”라는 구절은 아폴리나리아 주의를 논박할 수 있는 소지(素地)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서 전통적으로 아폴리나리아 주의에 대한 논박으로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이 구절이 특별히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쓰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또한 이 신경은 예배의식에 적합하다. 그래서 이 신경은 주로 교회의 예배의식 속에서 발전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튼 이것은 일찍이 세례신경으로 사용되었고, 6세기 이후에는 성찬의식에서 사용되었다. 칼케돈 회의 이후 이것은 모든 신경들 가운데서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되었다.

서방교회에서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신”이라는 원본이 “나버지와 아들로부터”라고 바뀌어 얽혀졌다. 이같은 변화는 서방교회의 신학, 특히 어거스틴의 신학에 근거해 있다. “아들로부터 나오심”은 589년 톨레도(Tolredo)에서 격앙된 어조로 확정되어졌는데, 그것은 점차로 신경에 대해져 갔다. 그런데 이것은 수세기가 지나기까지 로마에서 신경의 한 부분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천지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창조주이시며, 한 분 뿐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만세 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며, 빛으로부터 나오신 빛이시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참 하나님이시며, 태어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으며, 아버지와 같은 본질이시며, 그를 통하여 모든 것이 존재케 되었으며,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의 구원 때문에 하늘로부터 내려 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 의해 성육신하시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서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고난당하시고 장사지낸 바 되셨으며,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시어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영광중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영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성령을 믿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셔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이며 거룩하며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를 사하여 주시는 한 세례를 고백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과 장차 올 세상의 삶을 기다립니다. 아멘.

 

칼케돈(Chalcedon) 정의(주후 451)

 

니케아 종교회의는 아들 그리고 말씀은 참 하나님이신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이심, 즉 인성에 관한 문제는 그대로 남겨 두었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는 어떤 의미에서 참 인간이셨을까? 그리고 그는 어떻게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실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대답이 시되어졌다. 마폴리나리아주의는 인성을 절단해버림으로써, 네스토리안주의(Nestorianism)는 인간의 통일성(統一性)을 위태롭게 함으로써, 유티키아주의(Eutychianism)는 인성의 신성으로 흡수되어진다는 교묘한 이름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라는 것이 교회의 믿음이었기 때문에 교회는 이 모든 이론들을 배치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신앙을 공고히 해나갔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교리는 독립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전 신학의 범위-구원과 성례, 그리고 역사에 관한 모든 교리- 와 연루(連累)되어 있다. 게다가 이 기독논쟁은 추상적 신학이 아니라 한 시대의 사회적 문제들과 그 시대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쟁점인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의 역사적 생을 심각하게 취급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교리는 역사 자체도 그리 심각하게 다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칼케돈에서의 기록론의 정착은 당시 고대 교회들에게 신학의 보편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학의 주요 세 학파(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서방교회)들은 기독론쟁 속에서 상호 융화되어 칼케돈 회의에서 그 총의가 표명되었다. 물론 최종 결과는 어느 한 학파의 이론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가 나누어 가지고 있었던 신학적 지혜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참으로 보편적이라고 하겠다.

칼케돈 정의가 5세기의 교회와 그 이후의 교회들에게 충분한 만족을 주지는 못했지만, 교회의 판단으로 볼 때 그 비평가들도 칼케돈의 것보다 나은 정의를 내놓지는 못했다. 기독론쟁 속에 관계되어 있는 모든 비신학적 요건들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본받기 쉽지 않은 순수한 관심과 논쟁의 균형을 유지시켜 줄 수 있었던 보편적인 태도로 이 문제에 그 신학적 재능과 정열을 쏟았다.

칼케돈 은 기독교 사상사에 있어서 신약성경이 편집된 곳이기도 한데,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으로 오실 수 있음에 대하여 보통으로 빠지기 쉬운 오해의 4가지 방식이 있음을 주지시키고, 이에 대헤 적덜한 균형으로서 경계를 해 주었다,

 

칼케돈(Chalcedon) 정의

 

“그러면 우리는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 모든 사람이 유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침에 있어서 일치 한다. 바로 이분은 신성에 있어서나 인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다”

바로 이분은 이성적 혼과 몸을 가지신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 그는 그의 신성에 관한 한 하나님과 같은 본질이시며, 그의 인성에 관한 한 우리들과 같은 본질이시다 따라서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으시나 다만 죄는 없으시다. 신성이란 점에서 우리와 같으시나 다만 죄는 없으시다. 신성이란 점에서 그는 창세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며, 인성이란 점에서 이제 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우리는 유일하신 그리스도, 즉 아들이시며 주이시며 독생자이신 그분을 두 가지 본성에서 이해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 가지 본성을 혼동하지도 않고, 한 본성을 다른 한 본성으로 변형시키지도 않고, 그 두 본성을 두 개의 별다른 범주로서 나누지도 않고, 또 그것들을 영역이나 기능에 따라서 대조시키지도 않는다. 각 본성의 특성은 연합에 의하여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각 본성의 특성은 보존되고 양 본성은 한 인격과 한 실재 속에서 공존한다. 그것들은 나누어지거나 두 면으로 갈라질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함께 유일하시고 독생하신 하나님의 말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이렇게 옛 선지자들이 증거하였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셨고, 마찬가지로 교부들의 신경도 이렇게 우리에게 전승한다.

 

 

 

 

 

 

 

 

 

 

부록 (2)

 

창조의 철학적 의미

 

하나님 말씀을 믿고 창조를 믿는 사람으로서 과학적으로도 창조가 간접적이나마 증명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용기를 준다. 철학적 입장에서 보면, 창조에 관한 태도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비기독교적 세계관의 분수령이라고 생각된다. 창조가 사실이냐 아니냐에 관계되어지는 일은 너무나 많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그 학교의 교장인 반 틸(Van Til)박사는 한 학기 내내 공 두 개를 그려 놓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하려고 했다. 공 하나는 하나님, 다른 하나는 피조세계를 뜻했다.

신학적으로, 혹은 변증학(기독교를 비기독교적인 철학으로부터 변명하는 학문)적으로 보다는 철학적인 입장에서 창조의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그러나 역시 기독교인이니까 변증적인에서 요소가 있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첫째, 창조 그 자체 보다도 창조에 대한 우리의 의식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철학적인 용어를 구태여 쓴다면, ‘인식론적’으로 창조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검토하고 지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바꾸 어 말하자면 창조, 즉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사실이 인간의 경험이나 죽은 인간의 상상력이나 인간의 직관으로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식론적 문제이다. 즉 계시의 도움이 없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창조하셨다는 생각을 사람이 과연 만들어 낼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두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그의 <신의 도성>이란 책에서는 창조의 생각이란 하나님의 계시 없이는 도저히 안 된다고 했고, 그의 <참회록>에서는, 하나의 피조물만 보아도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많이 인용하였다. 즉 세계는 변하는 것이며, 변하는 것은 무한하지 못하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세계는 창조되었다는 비교적 간단한 논리로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계시의 도움 없이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쓴 <신의 도성>이란 책에 보면, 창조에 대한 인식은 다만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면 처음 문제로 다시 돌아가서 정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는 기독교의 창조설이 인가느이 상상력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이것이 왜 문제가 디는가 하면, 창조 신화라는 것은 기독교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많은 종교에서도 나타난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창세기의 기록을 하나의 신화라고 말하며,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의 서술로 보지 않는다. 바벨론의 ‘길가미스’신화에도 창조의 신화가 있고 플라톤의 철학에도 창조의 이야기가 있으며, 중국의 신화에도 창조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 만큼, 성경에 나오는 창조란 것이 그렇게 독특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도전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그리고 우리 기독교의 창조와 이들이 말하는 창조와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말하기 전에 우선 우리의 창조개념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기독교적 창조관은 무엇보다도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다. 그런데 길가미스 신화나 플라톤의 창조 이야기나 혹은 다른 종교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물론 창조는 창조이지만 무(無)로부터 유(有)를 창조한다는 사상은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길가미스 신화에 보면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벌써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원물질(原物質)이 있었고 거기에서 질서있는 이 우주가 생겨났다고 되어 있고,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창조했다는 사상이 없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유명한 이야기에도 ‘메미우르고스’(Demiurgos)라는 신(神)이 이 세계를 만들어었다고 하는데, 그 신이 세계를 창조하기 이전에 ‘물질’과 ‘형’(이데아)이 있었다고 한다. 데미우르고스가 한 일은 있는 물질과 있는 형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소위 ‘카오스’ 와 ‘코스모스’의 대조가 보인다. 카오스란 것은 무질서이고, 코스모스는 질서가 있는 세계라는 뜻이다. 데미우르고스가 세상을 만들 때 주어진 물질은 하나의 ‘카오스’이다. 거기에 질서를 제공하는 것, 그것이 곧 코스모스를 형성하는 것이다. 아무것도ㅜ 없는 것에서 무엇이 가자기 나왔다는 것은 인간의 경험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경험이란 것은 항상 있는 것에서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사람이든지 동물이든지 무엇이든지를 만들어 낸 일은 없다. 경험과 논리를 초월한 상상력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도저히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무’라는 것이 마치 그 자체가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무란 그런 무가 아니라 간단하게 아무것도 없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지식은 항상 유추적이고 의인적이다. 의인적이란 말은 신을 인간의 형태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신(神)에 대해서 우리의 형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소크라테스 이전에 희랍의 유명한 철학자 제노파네스(Xenophanes)는 “만약에 말 (馬)에게 손이 있어서 신(神)을 그릴 수가 있다면 말은 말 같은 신(神)을 그릴 것이고, 에디오피아 사람은 코가 납작하고 입술이 두껍고 얼굴이 까만 신(神)을 그릴 것이고, 페니키아 사람은 머리가 곱슬곱슬하고 눈이 파란 신(神)을 그릴 것이다”라고 하여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신(神)이란 것은 인간의 경험과 인간의 상상력 이상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아도 분명하다. 한국의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예수님이 한국 사람이고 마리아는 한국의 시골 여자이며, 요셉은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버스 운전석 앞에 걸려 있는 “오늘도 무사히”에서 기도하는 사무엘은 유대인이 아니고 서양 사람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리 잘 생각해도 의인화(擬人化)의 정도를 넘어갈 수가 없다.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 “하나님의 발등상”같은 의인적 서술은 성경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 의식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하는 수 없이 의인화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우리가 계시에 의하지 않으면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것도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성경의 창조관은 인간 상상의 산물이 될 수도 없고 인간 소용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 하나님께서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했다는 생각은 인간의 산물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땅이 혼돈하고 어둠이 그위에 덮여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위에 운행하시더라는 것이 카오스 상태라고 해석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는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이런 해석이 마치 히브리적인 것처럼, 곧 희랍적이 아닌 것처럼 해석하는데 사실 그것은 매우 희랍적인 성경해석인 것이다. 히브리 사상에는 전혀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해석은 희랍적인 사고로 성경을 해석하는 결과인 것이다.

무로부터 유를 창조했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근본적적인 이질성을 말한다. 물리학적 인과관계에서는 아주 엄격하게 따지면 동질성을 말한다. 물리학적 인과관계에서는 아주 엄격하게 따지면 동질성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계의 원인(原因)이라고 했을 때, 즉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창조하신 경우에는 세상과 하나님의 사이에 물리학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아무런 공통성이 없다는 것, 근본적인 단절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대개의 창조 신화에는 두 종류의 신이 있다. 하나는 ‘generator'이고 하나는 ’fabricator'이다.

‘generator'라 함은 새끼를 낳듯이 낳는 자란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신이 세계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의 신화 가운데 매우 많다. 희랍 신화에도 ’우라노스‘란 말은 하늘이란 뜻이고, ’게이‘라는 말은 땅이라는 뜻인데 이 ’우라노스‘와 ’게이‘가 결혼해서 이 세계를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fabricator'란 손으로 만드는 자를 말하는데, 익서은 ’generator'보다 좀 더 성경적이라고 하겠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낳은 분이 아니라 제조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해야 할 것은 역시 ‘fabrication'도 이미 있는 불질을 고쳐 맞춘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그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성경적인 의미로서의 창조는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범신론(汎神論)에서는 신과 인간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즉 우주 전체가 곧 신이요, 따라서 인간도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고 한다. 불교나 힌두교만 범신론이 아니라 사실은 성경의 창조설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종교는 다 범신론이다. 서양 철학에서 헤겔 같은 철학자는 자기가 기독교적 철학자라고 했지만 사실은 범신론적 요소가 있다. 그는 신과 인간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로부터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 모든 종교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최근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천주교 신부 떼야 드 사르댕(Teilhard de Chardin)은 20세기 사람인데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떼야 드 샤르댕은 철주 철미한 범신론자이다. 그의 생각은 우리의 관심사로 되어 있는 진화론적인 것이다. 원물질이 있었고 그 원물질 속에 이미 세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졌고, 이것이 진화적 과정을 거쳐 단세포 동물, 식물, 동물, 인간으로 진화하고 따라서 지금은 그것이 가장 확장된 시대이며, 그 후로는 세계가 점점 TV, 전화 등으로 하나가 되어 오메가 포인트에 이르며, 그것이 바로 신비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범신론이라는 것은 결국 신비주의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도 범신론과 아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낭만주의 문학자 괴테(Goethe)는 헤르더(Herder)의 영향을 받았고 헤르더는 범신론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 사람들이 매우 낭만주의적인 이유는 우리의 종교가 사실은 근본적으로 범신론적 세계관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 동질성을 인정하는 사상이다.

그러면 성경의 창조관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창조주와 피조물을 근본적으로 구별하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장녀의 세속화이다. 장녀의 세속화라 하는 말은 장녀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창세기에 분명히 나타난다. 모세가 창세기를 쓸 때쯤에는 주위의 사람들은 다 범신론이거나 다신론이었다. 해와 달, 바위도 모두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독 창세기에서는 그것들이 신이 아니고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자연에는 신적인 요소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자연은 그렇게 거룩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신비로운 것도 아니고 따라서 얼마든지 사람이 조작할 수가 있고 사용할 수 있다 하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도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결국 자연 과학의 발전을 가능케 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성경이 자연을 비신격화했지만 그것이 제대로 받아들여진 것은 종교개혁 이후이었다. 그때 비로소 창세기의 의의 깨닫게 된 것은 불행하게도 천주교 신학이 범신론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영향에 너무 깊이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성경의 우주관을 순수하게 발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중세 신학은 성경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종교개혁 이후에 비로소 자연 과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연이라는 것을 인간이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을 이때 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의 현대 자연과학은 이때부터 생겼다고 볼 수 있다. 그 전에는 이론적으로만 자연을 연구 했지 실험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종교 개혁 이후의 분위기가 실험을 가능하게 한 것은 잔연의 세속화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자연을 충분히 세속화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는 지구상에 아직도 매우 많다.

성경에 의한 자연의 세속화로 말미암아 현대의 심각한 환경(環境) 오염(汚染) 문제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대하여 기독교는 책임을 져야할 이유가 있다. 성경이 자연을 세속화시켰고 따라서 성경으로 말미암아 자연 과학이 발달될 수 있었고 현대 과학 기술이 발달할 수 , 있었으며, 그 때문에 오늘날 환경(環境) 오염(汚染) 문제가 생겼으므로 여기에 대해 우리가 도의적인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고 본다.

둘째는 시간의 문제이다. 창조는 없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있게 했다는 것으로, 시작이 있다는 말이고 여기서 새로운 시간관이 나왔다. 시간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순롼적인 시간관’(eircular view of time)이고, 또 하나는 ‘직선적인 시간관(Iinear view of time)이다. 이 두 시간관의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한 사람은 어거스틴이였다.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에서 직선적인 시간관과 순환적인 시간관을 구별했고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조금도 변경되지 아니한 체 모든 철학자들에 의해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순환적인 시간관이란 시간은 영원히 돌고 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세상에는 처음도 없고 끝도없다는 생각이 순환적인 시간관의 내용이다. 그것은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 사상에 공통적인 것이다. 흰두교에서도 그렇고 불교에서도 더욱 그렇고 심지어는 유교에서도 그러하다. 희랍 신화 에서는 영혼을 원(圓 O)으로 표시했다. 원이라는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데 이것은 영원을 표시한다. 순환적인 시간관은 전도서에도 언급되어 있다. 해 아래 새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옛날에 있었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옛날에 있었던 것이 다시 돌아온다고 하는 것이다. 전도서의 그 말은 하나님을 ㅡ모르는 사람들의 상황을 서술한 것이다. 영원한 회귀(回歸), 이것은 니체(Nietzsche)사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고 니체만큼 철저하게 순환적인 시간관을 믿은 사람은 없었다. 니체는 모든 것이 꼭 이 모양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다. 이것은 니체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많은 사상가들에게 자연적으로 있게 되는 사상이다.

그런데 이 순환적인 시간관과 결부되어 있는 것은 새것이 없다는 것이요, 따라서 과거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즉, 과거가 현재보다 낫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볼 수 있는 것은 유교에서이다. 유교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인간이 타락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로마의 사학자 플루타르크(Plutarch)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시간은 인류의 원수다”라고 그가 말한 적이 있다. 즉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인간은 점점 타락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거스틴은 창조의 교리에 의하여 “세계는 영원한 원으로부터 끊어져 나갔다”고 표현하고 있다. 창조라는 시작이 있으니까 끝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직선적 시간관이 가능하다. 그리고 직선적 시간관에서 비로소 발전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발전이란 과거에 없었던 것이 새로이 생겨나는 것이요 점점 나아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순환적인 시간관에서는 발전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발전이란 것이 없으면 역사가 불가능하다. 자연에는 역사가 있을 수 없다. 똑같은 것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원시 사회는 대개 순환적 시간관에 사로잡혀 있고 따라서 문화가 침체되어 있었다. 발전을 믿지 않았고 발전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요소가 존재 했는지, 아니면 불가피하게 세계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 있었는지 알아보자.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원해서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원했다는 말에 우리가 조금 더 관심을 써야 하겠다. 이 원한다는 것은 의지(意志)를 전제한다. 의지(意志)란 원인이 없어야 의지(意志)가 된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실 이유가 있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自由意志)에서 였다. 하나님 자신 외에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자유의지(自由意志)라고 부르는데, 이 자유의지란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희랍 철학(哲學)에는 자유의지라는 관념(觀念)이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 철학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자유라는 사상은 성경으로부터 도입된 것이지 희랍 사상에서 온 것이 아니다. 희랍에는 모든 것이 다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희랍의 영향을 많이 받은 중세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이유가 있는 것으로 늘 가르쳐왔다. 그것을 ‘실체(實體)주의(主義)’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인격자라고 가르친다. 즉, 하나님은 어떤 자연법칙도 아니고 어떤 물질도 아니며 인격체이시다. 인격체라고 하니까 우리는 하나님도 사람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본래 인격이란 말은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형상이란 말이 무슨 뜻인가에 대해서는 신학에서도 그동안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 이라는 말을 인격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도 상대적인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어떤 사람의 신관과 인간관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와 직접 관계가 있다고 본다. 기독교인들의 인간관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격자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특별히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오늘날 문화가 인간을 비인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관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서 생기고, 창조의 의미를 바로 터득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끝-

 

저자 손 봉 호

발행인 윤 종 하

발행소 한국성서 유니온

 

출처: 인터넷신학             글쓴이: 브니엘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