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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젤(복음) 2020. 10. 9. 01:24

사도신조의 유래와 그 변천과정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 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1. 사도신조의 유래와 그 변천과정



사도신조란 이름을 붙인 것은 권위를 더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붙인 명칭일 뿐 12 사도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지 전에 12사도가 모여서
우리가 믿고 가르치고 전파해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한 분의 사도가 한 가지씩 말해서 모아 보니까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신조가 나왔다고 해서 사도신조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아는 대로 사도 야고보는 일찍 순교해서 거기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그외에 다른 사도들도 일찍부터 여려 곳으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12 사도가 한 자리에서 신조를 만들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과 거의 같은 형태의 사도 신경이 채택된 것은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 431년의 에베소 회의, 451년의 칼케톤 회의를 거치면서 확정되어 진 것이다. 이런 형태의 신앙 고백문이 만들어진 것은 당시의 이단성 규명을 위해서였으며, 매회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수정(修訂)되어졌다. 그래서 사도신조를 니케아 신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초의 종교회의를 참고하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인 아리우스라는 신앙적으로는 상당히 덕목이 있는 사람과 같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아리우스 보다는 몇 년 젊은 아타나시우스라는 두 사람의 논쟁에서 출발하였다.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에 관한 것이었는데, 사실 이 문제는 초대교회 이후로 계속 거론되어 왔던 것이었다고 한다.


아리우스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교에 있어서 많은 신들이 있는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이 계실 뿐만 아니라, 아들 하나님이 별도로 계시다고 하는 두 하나님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모든 피조물의 제일 첫째되고 가장 높은 그리스도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아버지와 같은 관계이지만 본질이 아니라는 이론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라고 가르쳤다. 이 니케아 회의에서는 300명이 넘는 감독들이 참가했고 결국 아리우스를 이단자로 정죄하고 끝냈으나 완전한 논쟁의 종결에는 실패했다. 다시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성령의 신성에 관한 신앙적 의결이 첨부되었고, 다시 451년의 제 4차 종교회의인 칼케톤 회의에서는 예수의 양성론이 제기되어 정리되었다.


교회들이 암송하고 있는 사도신조는 A.D. 4세기경 라틴어 [Symbolum-Apostolicum]사도들의 상징이란 신조가 바탕이 된 [로마교회 구 신조]에서 형성되어 서방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를 통하여 보급되었지만 동방교회(희랍 정교회)에서는 한번도 사도신조를 공식적인 신앙 고백서로 채택한 적이 없다. 대신 그들은 이것과 비슷한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사도신조에 그 내용이 찜찜한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이다.
이 구절은 한글 사도신조로 번역되면서 천주교의 연옥 기분이 나고 개운하지 못하다 하여 삭제되었지만 영어 사도신조에는 그대로 남아 있어 가끔 질문을 받는다. 이 표현대로라면 예수님은 무덤에 장사되어 계셨던 삼일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뜻이 된다. 성경에도 주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말씀이 있으니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거룩한 공회"는

영어의 the Holy Catholic Church (거룩한 공교회)를 번역한 것이다. Catholic이란 뜻은 보편적 혹은 세계적인, 우주적인 이라는 뜻으로서 한영 사도신조를 보면 어떤 것은 Catholic이라는 단어를 감추기 위하여 이것을 풀어 Universal로 번역해 놓은 것도 있다. 이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개신교도 catholic church(보편 교회)라고 해서 별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사도신조가 쓰여진 배경을 살펴보면 이러한 보편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이 아니란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모시고 있던 당시의 가톨릭 교회로서는 땅 위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유일한 교회가 가톨릭 교회라고 주장하고 이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던 터였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것을 거룩한 공회로 번역하여 난관을 넘기고 있지만 한영 찬송가 등에서는 여전히 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표현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공회'란 표현은 애매하기 그지없다. 성경에서의 '공회'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마10:17, 마26:59; 눅22:66; 요11:47)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많은 사람들이 사도신조의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모든 세상의 성도들이 서로 영적으로 함께 교제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의 성도는 믿는 성도들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죽은 가톨릭의 성인들을 말한다. 그래서 이 말은 본래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것을 성자숭배의 근거로 삼고 있으며 산 자와 죽은 자가 교통하는 교리적 근거로 삼고 있다. 이러한 신앙고백으로 인하여 가톨릭 교인들은 지금까지도 죽은 자들의 이름으로 봉사하고 헌금하기도 한다. 물론 성경적인 의미의 '성자' 또는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신자들(고전1:2)을 가리키지만,
로마 가톨릭의 '성도'는 죽은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뒤에 특별 심의를 거쳐 서품 되는(복자, 성자) 죽은 자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책망하고 있는 바 강신술을 권장하는 것과 같은 미신에 속한 것이다.(신18:11; 사8:19-20) 트렌트 회의에서 결의한 교리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성인들이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실제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오늘 날 크리스마스에 싼타크로스에게 선물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 될 것이다.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원래의 사도신조는 이단분별의 기준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사도신조의 끝에 이러한 표현이 있는 것은 그들에게 당연한 논리이다. 그러나 현재의 사도신조에서 끝 부분에 붙어 있던 이러한 표현을 빼버린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초창기에는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라는 말로 사도신조는 끝맺음되어 있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사도신조라 하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사도들이 기록한 것이 아니며, 여러 차례 수정하였고 변형되어 왔으며 가톨릭적인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으며, 외우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이단의 판별을 위한 것이었다. 오늘 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여전히 주일 예배 시간에 '사도신조'를 고백하지 않는 교회는 이단이라고 정죄한다. 사도 신조를 예배 시간에 암송하지 않는다고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만약 사도신조에 명시한 어떤 교리를 인정하지 않고 다르게 가르친다면 이단일 가능성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도들의 신경(the Apostles Creed)은 예수님 당시의 사도들이 만든 신조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영어로 된 사도신조를 한글로 번역하면서 가톨릭적인 냄새가 나는 부분을 삭제한 것으로 이해하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2. 사도신조의 작성배경 및 논쟁 내용


사도신조에 대해서 우리는 크게 칼빈(John Calvin)과 바빙크(Herman Banck)의 설명을 통해서 자세한 내용을 배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2.1. 존 칼빈

칼빈의 1536년판 기독교 강요는 본문이 크게 6장으로 구성되어(1장: 율법-십계명 해설포함, 2장: 믿음-사도신경 해설포함, 3장: 기도-주기도문 해설포함, 4장: 성례, 5장: 거짓 성례, 6장: 기독교인의 자유, 교회의 권능, 그리고 정치 조직)있는데 그 중에 사도신경은 십계명이나 주기도문과 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다. 사도신조가 성경에 없다고 하여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칼빈은 종교개혁 당시 그의 저서에서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고 있는 바이다.


칼빈은 사도신조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얼마나 커다란 가치가 있으며, 그 내용이 성경과 어느 정도나 일치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1559년도 판의 내용을 발췌하는 것으로 칼빈의 입장이 얼마나 분명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신조는 우리의 구속의 중요한 점들을 간단히 요약하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분명히 보여 주는 일람표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나는 신경이라고 부르지만, 그 저자 문제는 전연 고려하지 않는다. 고대 저술가들은 신경을 사도들에게 돌리는 점에서 상당히 의견이 일치했다. 사도들이 공동으로 써서 발표했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전한 가르침을 충실히 수집하며 요약한 것이므로 넉넉히 사도들의 이름을 붙일 만하다고 생각했다.


사도신조가 어디서 나타났든 간에, 교회의 바로 초창기 즉, 사도 시대에 모든 사람이 이구 동성으로 그것을 공중 고백서로 인정했다고 나는 확신한다. 어느 한 개인이 사적으로 쓴 것 같지 않고, 사람들이 회상할 수 있는 가장 오랜 옛날부터 확실히 모든 경건자들이 그것을 신성한 권위로 인정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유일한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전연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즉, 우리의 믿음의 역사 전체가 신경에 간명하고 질서 정연하게 요약되었으며, 성경의 순수한 증언에서 보증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저자 문제로 불안을 느끼거나 남과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물론 성령의 진리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누가 그것을 말했다거나 썼다는 것까지 알지 못하면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가 다르다"


김영규 교수는 기독교 강요와 사도신경의 관계에 대하여, "칼빈에게 있어서 참된 신앙의 구성요소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notitia)이 포함하고 있다. 즉 사도신경이 기독교 강요 전체 내용의 지변을 이루면서 '우리가 믿는다(credimus), 나는 믿는다(credo)'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


이상으로 사도신경의 내용이 성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의 보증을 받고 있음과 칼빈 자신이 그 가치를 일찍이 깨닫고 기독교 강요를 집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2. 헤르만 바빙크

바빙크는 사도신조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되는 줄의 역할을 했다고 우리에게 밝히 가르쳐 주고 있다.


"사도신조는 가장 오래된 신조다. 그것은 사도들 자신들이 규정한 것은 아니지만 일찍이 2세기 초에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주신 삼위일체적인 세례 명령으로부터 발전되었던 것이다(마 28:19) 근원에 있어서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짧지만 기초형태는 같았다. 즉 그것은 기독교가 의존하고 있는 그 큰 사실들의 짧은 요약이었고 그와 같이 계속해서 그것은 공동체적인 근원이 되어 왔고 모든 그리스도 왕국의 통일의 끊을 수 없는 줄이 되고 있다."


바빙크는 사도신조의 처음 논쟁이 되었던 주제는 "당신은 그리스도를 누구라 하느냐?"였다고 한다. 이것은 교회가 주님의 말씀 자체로부터 모든 세계에 대하여 대답해야할 전 지배적인 물음이었는데 이것으로부터 잘못된 형태들이 나왔는데, 그 예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유대주의를 따르는 무리들이란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의 인간, 기이한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 선지자적 영으로 영감된 인간, 말에나 역사에 능력 있는 인간, 그러나 그 나머지에 있어서는 하나의 인간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하려는 모든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교주의 편에서는 예수 안에서 신들의 아들, 하늘로부터 온 신 형체(神形體, Godsgestalte)로 보려는 자들, 구약의 천사들과 같이 잠시 땅에 나타나 그림자의 몸을 취하였던 인물로 보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를 육신이 되신 아버지의 독생자로서는 고백하려고 하지 않았다.(이단)


이 두 이단들을 대항하여 교회는 성경에 맞게 그와 같이 그리스도는 참으로 육신으로 오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참된 독생자이심을 주장해야 했다. 이것을 교회는 긴 싸움 끝에 위에서 말한 신앙고백서들로 고백했고, 사도 요한과 더불어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모든 교리를 거절했다(요일 2:18, 22; 4:2, 3). 그와 같이 그리스도적 교회는 그의 본질이요 핵심이 기독교의 특별한 전체 특성을 주장했다.


이것이 이 큰 일을 행한 공의회와 종교회의가 전체 기독교에 있어서 근본적이고 커다란 의의를 가진 이유다(작성배경). 사도신조에서 요약하고 있는 기독교의 사실들, 그리스도의 인격과 하나님의 삼위적 본질 속에 그리스도 교회들 사이에 존립하는 통일점이 있으니, 이 통일점은 그들 모두가 서로 유대주의와 이교주의를 반대하는 데 하나가 되게 하고 교회를 분리하는 무서운 의견차이에서도 잊게 되거나 무시될 수 없게 한다."

 


3. 사도신조의 특징 및 영향

 

사도신조의 특징은 먼저 가장 오래된 신조라는 것과 매우 단순하고 간결하여 어떤 수준에 있는 사람이건 어떤 예배를 위해서건 다 만족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적 지식이 매우 수준급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적인 교리를 규정해줌에 있어서도 매우 적절하다는 것이다.


사도신조는 다른 신조들의 기초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니케아 신조는 사도신조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를 보다 분명하게 확대시켰고,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사도신조의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품위에 관한 교리 전체를 더욱 확대시켰다.

 


4 사도신조에 대한 평가

 

칼빈은 사도신조가 성경의 내용과 잘 일치한다고 평가할 뿐만 아니라 사도신조를 믿음의 요약이요 총체라고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사도신조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도신조는 우리의 구속의 중요한 점들을 간단히 요약하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분명히 보여 주는 일람표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A.A.Hodge)는 영국에서는 소요리문답을 처음 출판했을 때 주 기도와 십계명과 사도신조를 첨가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사도들이 작성했다거나, 성경의 일부분으로 여길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의 요약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며 그리스도의 고대 교회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라고 설명을 첨부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많은 평가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이상의 평가만으로도 사도신조가 초대 교회 이후에, 종교개혁 시대조차도, 아니 오늘도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5. 사도신조를 고백해야 하는 이유


첫째 : 신자에게 신앙고백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른 믿음인지 거짓된 믿음(이단)인지는 개인과 그 공동체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분별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은 이단 침투를 막고 기독교의 진리 수호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둘째 : 신자에게는 그가 믿는 믿음의 대상과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신조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이유는 내가 누구와 무엇을 믿는지 믿음의 대상과 내용이있어야 하며,

또 마음으로 믿는 신앙의 내용을 입술로 고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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