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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치심 (마 7:28∼29)

에반젤(복음) 2020. 10. 8. 00:24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치심 (마 7: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오늘은 산상보훈 마지막 시간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전하신 메시지에 대한 무리의 소감과 반응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놀란 것은 그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마지막까지 예수님과 서기관들과 비교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왜 권세가 있었을까요?


1. 신적 권위로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자기들에게 유전을 전해준 장로들의 권위를 의존해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르칠 때 "옛 사람에게 말한바," 또는 "랍비 아무개는 말하기를."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그들은 불완전한 사람의 권위에 의존해서 가르쳤기에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르치심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르치심의 기원이 달랐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한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신적 권위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권세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처럼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영원불변의 성경에 근거하고 성령의 은혜와 감동 속에서 전한다면 우리들도 권세 있는 말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권세 있는 가르침이 되도록 항상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정확한 진리를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살펴본 대로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엉터리였습니다. 서기관의 출발은 바벨론에서부터입니다. 바벨론에서 유대 포로들이 신앙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 율법을 베껴 쓰는 일을 하기 위해 서기관 제도를 만들었는데 예수님 당시에도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서기관들이 베끼는 일을 하다보니까 성경에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성경을 가르침이 너무나 자의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장 문제점은 성경의 핵심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그 내용면에서 예수님과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근본적인 정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망각하고 편리에 따라 상황윤리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오늘날도 모든 종교는 사랑이기에 목표가 같다고 종교는 같다고 엉터리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웃 사랑보다 하나님 사랑이 더 큽니다. 다른 종교에는 하나님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종교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성경의 기본이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천국에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자신은 성경을 300번 읽었다고 은근히 자랑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그를 불러놓고 성경인물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하자 그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무안을 당했습니다. 또 한 번은 성경을 500번 읽었다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자랑스럽게 성경 말씀을 암송하다가 그만 중간에 막혀버려서 얼굴이 새빨개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예수님이 허허 웃으시면서 "세상에 성경을 이렇게 잘 아는 사람은 내가 오랜만에 보는구나!" 큰 소리로 칭찬하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아마도 신학교 교수이든지 아니면 성경을 적어도 1000번은 읽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칭찬 받은 사람은 주일학교 1학년 어린이였습니다.


중국 연변에 있는 한 조선족 교회의 유년부 1학년인 그 아이는 성경을 겨우 한 번 읽었을까 말까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만 학교에서 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만나 천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아이에게 물으셨습니다. "얘야, 성경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보아라." 그러자 그 아이는 더듬거리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성경은 고저 사랑입네다." 성경은 그저 다 사랑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의 말을 들으시고 성경을 제대로 알았다고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기특한 듯이 크게 칭찬해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서기관들은 어린이도 알고 있는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모두 거꾸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이웃은 사랑하되 원수는 갚아라.’ ‘음행한 연고 외에도 이혼증거만 주면 괜찮다.’ ‘하나님 이름이 아니라면 다른 맹세는 범해도 된다.’ 그 동안 서기관들이 엉터리로 가르쳤던 많은 예를 아시겠지만 정말 엉터리였습니다.


오늘날도 성경해석의 관점에 따라 온갖 잘못된 신학이 난무합니다. 민중신학, 투쟁신학, 사신신학,,, 무료신학이라 해서 개인을 숭상하도록 만들고도 있습니다. 엉터리입니다. 편지가 왔는데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잘 해석하는 듯하더니 결론에 예수를 이야기하지 않고 자기 교주를 이야기하더라고요. 이단이란 끝 즉 결론이 다른 것이 이단입니다. 성경을 정확히 잘 해석할 때 거기서 권위가 나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3. 성령의 은혜로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했고 영혼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또 그들은 믿음의 행함이 없었습니다. 마23:2-4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무슨 영감이 나오고 능력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요3:34에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신령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완악한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랬다는 말만 나오지 회개했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고향의 회당에서 가르치셨을 때도 사람들은 "이 사람의 이런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왔느뇨?"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육신적 배경을 안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교육에는 세 가지의 차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이른바 교육의 ABC라고 하는데 A는 Add(애드)입니다. 지식을 더함으로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B는 Broaden(브로든)입니다. 시야를 넓히고 이해를 넓혀주는 것입니다. C는 Change(첸지)입니다. 잘못된 관점을 바로 잡아주고 올바른 삶의 태도로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도 A와 B의 단계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삶이 바뀌는 C의 단계에까지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이 시간으로 산상보훈이 마쳐집니다. 은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Change입니다. 한 말씀이라도 붙들고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사람의 말은 힘이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두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가 전하는 말이 살리는 생명의 말씀, 힘 있는 능력의 말씀이 되어 수많은 영혼들을 살리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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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