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이론>>>/- 주기도문 연구

스크랩주기도문 해설

에반젤(복음) 2020. 10. 5. 12:24

주기도문 해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이다. 어떤 기도든지 예수님 이름으로 명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제시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합하지 못하였더라면 어느 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확신 있게 부를 수 있었겠는가? 누가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세를 부여할 수 없다. 참 아들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형제로 주셔서, 그에게 본래부터 속한 것들이 양자의 은혜로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 이 큰 축복을 확실한 믿음으로 감싸 안기만 하면 된다. 요한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요1:12). 이렇게 감미로운 그의 이름으로 우리를 불신앙에서 해방해 주셨다. 왜냐하면 아버지 안에서보다 더 큰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은 우리 육신의 부모의 사랑보다 훨씬 크고 뛰어나다. 이는 그분이 선하심과 자비에 있어서 모든 인간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땅 위에는 수많은 아버지들이 있지만, 그들이 부성적 경건함이 부족하여 그 자녀들을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을 부정치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딤후2:13)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시27:10, 사63:16). 우리가 가진바 그의 약속은 이런 것이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그런데 어떤 자식이 어느 나그네나 이방인에게 자신의 신변을 내어 맡길 때는 자기 아버지의 잔인성이나 재산의 부족 등을 꼭 불평하면서 그렇게 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자녀들로서, 그가 아닌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 도움을 구한다면 이는 그가 가난하다거나 재산이 부족하다거나, 또는 잔인하다거나 과격하다고 비난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긍휼과 친절을 의심해서 자기를 도와줄 다른 어떤 대변자를 구하기보다는, 바로 자신이 눈물과 탄식으로 간청하는 자기의 자녀들에게 그분이 귀 기울이시기 낳겠는가?(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행동을 특별하게 권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넘치는 아버지로서의 긍휼을 한 비유에서(눅15:11-32) 생생히 나타내 주신다. 한 아들이 그 아버지를 떠나, 그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13절), 아버지에게 심히 죄를 쌓았다(18절). 그러나 아버지는 두 팔을 벌려 그를 감싸 안고, 그가 용서를 구하기 전부터 그를 기다리고,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기꺼이 뛰어 나가 맞으며(20절), 그를 위로하고, 자애롭게 그를 받아준다(22-24절). 사람들 가운데도 이렇게 큰 긍휼의 예가 있음을 보여 주시면서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그로부터 보다 넘치는 풍성한 긍휼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 자신들이 감사할 줄도 모르고, 반역적이고 방탕한 자식들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그분의 자비에 우리를 맡기기만 하면,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아버지들 중에서 가장 선하고 친절하신 아버지이신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대하여 이러한 아버지이신데 대한 확신을 더 강하게 해주시기 위해, 그는 우리가 그를 “아버지”라 부를 뿐만 아니라 보다 명시적으로 “우리아버지”라 부르도록 하셨다. “오 아버지 당신의 자녀들에 대하여 큰 열정이 넘치시며 또 기꺼이 용서하시려는 분, 당신의 자녀 된 우리는, 비록 당신과 같은 아버지를 모실 자격이 없는 자들이지만, 그래도 당신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자애로운 애정만을 품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또 명백히 설복되어 이제 당신을 불러 우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각자 개별적으로 그를 “나의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우리 모두가 공동적으로 “우리 아버지”라 부른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경고를 받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한 아버지의 동일한 자녀이니 형제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큰 위치를 가지는가 하는 점이다. 만일 한 아버지가 우리 모두의 공통적 아버지이며(마23:9), 또 모든 좋은 것이 그로부터 우리의 몫으로 오는 것이라면, 우리가 필요한대로 서로 서로 나누기 위해 마음의 큰 열정을 품고 준비해 두지 않은 것이라도 우리들 중에 없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옳다. 우리가 우리의 손길을 서로에게 펼치고 서로를 돕고자 원한다면 우리 형제들을 가장 선하신 아버지의 섭리의 보살핌 아래 이끌어 주는 것보다 더 크게 그들을 유익 되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친절하시고 자애롭다면 다른 어떤 것을 더 바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형제간의 이런 일도 우리는 우리 아버지께 힘입고 있다. 가족 중에서도 자기 아버지를 진정으로 또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동시에 그의 전 가족을 사랑과 선의로 대하는 천부에 대한 동일한 열정과 사랑을 기울이게 된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그의 독생자로 불러 높여 주셨다(엡1:23).

예수님의 기도는 형제 된 자들, 현재 인정되고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땅위에 거하는 모든 자들까지도 감싸는 것이 되기 위하여 위의 규칙에 합하게 하신다. 우리의 기도가 감싸야 할 그 대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작정하셨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믿음의 가족에 속한 이들에게 더 특별한 애정을 기울여야 하겠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도도 우리에게 특별히 명하고 있다(갈6:10).

요약하자면, 모든 기도는 우리 예수님께서 그의 나라와 그의 가족으로 세우신 그 공동체를 고려하심이다. 물론 이 말이 우리가 특별히 자신을 위해서나 어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에라도 우리 마음이 우리 공동체에 대한 주의를 잃어버리면 안 되고, 매사를 공동체와 결부시키도록 해야 한다. 비록 기도가 개별적으로 형성된다 하더라도, 이런 목적을 때문에 공동적이기를 그치지 말자. 이 모든 일은 하나의 비교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구제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일반적 명령이다. 그런데 자기로서는 알 수도 없고 또 도울 수도 없는 더 무거운 필요를 짊어진 많은 사람들을 간과하면서도, 자기들이 고통당하는 줄 알고 있고, 또 보고 있는 자들의 그 곤경을 도와주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교회의 이 공동체를 보고 또 생각하면서 어떤 특별한 기도를 작성하는 자들이 그들의 개별적 언어로, 관심 있는 공동 애정의 언어로, 자기 자신들과 또 하나님께서 친밀히 알게 하시기를 기뻐하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하여 기도한다면,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물론 기도와 구제의 이런 비교와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구제에 있어서는 자유롭게 주는 것이 우리가 그 빈궁을 볼 수 있는 자들에게만 시행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로서 도울 때에는 완전히 낯설고 미지의 사람에게, 그 떨어져 있는 멀고 가까움에 상관없이 기도로 자유롭게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포함되는 이 기도의 공동 형식을 통해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이 첨가되고 있다(마6:9). 이 말로써 우리가 하나님께서 마치 기둥을 박은 울타리 속에 갇히듯, 하늘이라는 환경 속에 묶여서 갇혀 있다는 식의 결론으로 비약해서는 안 된다. 솔로몬이 고백하듯이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 한다”(왕상8:27).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선지자를 통해 하늘이 그의 보좌요 땅이 그의 발등상 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사66:1, 행7:49).

그는 어느 특정지역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만물 속에 흩어져 계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는 너무나 제한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말 할 수 없는 영광을 그렇게 밖에는 생각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결국 “하늘”이란 말로써, 우리가 이보다 더 묘하고 위엄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그 영광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마치 그가 권세 있고 고귀하며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이 말을 들을 때, 하나님에 대해서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꿈꾸고 우리의 작은 잣대로 그를 재려 한다든지, 그의 뜻을 우리 감정에 제한하지 않도록 우리의 생각을 보다 높여야만 하겠다.

 

첫째 간구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마6:9하)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의 모든 탁월성들 곧, 그의 권세, 지혜, 의, 자비, 진리 등을 함축한다. 그는 의롭고 자비하시고 진실하시고 권세 있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크고도 놀라우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구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이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러한 탁월성들 안에서 거룩하여지기를 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부족함이 없고 또 뺄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의 이 위엄이 모든 사람들에 의해 거룩히 여김과 진정으로 인정되고, 확장되기를 우리가 기도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든지 그의 모든 사역이 본래 그러하신 대로 영광스럽게 나타나도록 하자. 만일 누가 벌을 주신다면 그가 의로우신 분이라고 선포하도록 하자. 또 그가 용서를 베푸신다면 자비로우시다 하고, 그가 약속하신 것들을 실행하시는 것을 볼 때 진실 하시다고 인정되도록 하자. 간단히 말해서, 어떤 것에든지 그의 영광이 비추이지 않는 곳이 없게 하고, 그리하여 그에게 돌리는 칭송이 모든 마음속에서, 또 모든 혀 위에서 울려나도록 하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불경건함이-그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고 욕하는 일이 소멸되고, 수치를 당하도록 하자. 이 같은 수치 속에도 하나님의 위엄은 더 찬란히 비추인다. 따라서 이 간구 속에는 감사가 또한 포함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어느 곳에서나 거룩히 되기를 기도할 때에 우리는 그분께 모든 선한 일들로 말미암아 찬양하는 것이 되고, 또 우리가 일단 한번 받은 모든 일들을 그분과 연관시키게 되고, 또 우리를 향한 그의 은총을 우리가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간구

“아버지 나라가 오게 하시며”(마6:10상)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자기 백성 위에 행하시고 다스리어 그의 선하심과 자비의 부요가 그들이 하는 모든 일 속에 나타나게 하시지만, 유기된 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과 예수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의 통치에 굴복치 안은 자들이다. 그들의 모욕적인 교만을 깨뜨리고 낮추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항할 세력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 줌도 아버지 나라에 속한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십자가와 경멸과 모욕 아래에서도 자라고, 지배하며 흥왕하고 또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속에 번창함을 보여 준다. 물론 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전1:21, 요17:14, 18:36, 롬14:17). 첫째는 그것이 영적인 것이요 또 모든 것들로 구성되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것이 부패하지 않고 영원하기 때문이다(눅1:33, 단7:14). 이에 따라 우리가 “아버지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고 기도하고, 예수님 안에서 날마다 중생되며, 그의 백성을 통하여 모든 방법으로 그의 영광을 찬양하기를 바라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그의 부요한 은혜로 살다가 마침내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하신다. 동시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그의 빛과 진리가 점점 더 밝히 비취어서 사탄과 그의 나라의 흑암과 오류가 소멸되고,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버지 나라가 오게 하시며” 이런 방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의 계시 속에서 마침내 완전해지고 완성되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그날에는 그분만이 높임 받고, 모든 것 가운데 계시고, 그의 백성은 영광 속에, 사탄의 나라는 심판으로 낮추신다(고전15:28).

 

셋째간구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6:10하)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늘과 땅 모두, 곧 어느 곳,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 뜻을 따라 다듬고 조성되기 바란다. 모든 일을 다스리시되, 모든 창조물을 그의 결정에 따라 사용하시고, 모든 존재들의 의지를 아버지께 복종시키기를 구한다. 그의 뜻에 꼭 같이 순종하되, 어떤 이들은 자의적으로 한다. 우리가 이 같은 간구를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모두 버리고,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애정을 예수님께 향하도록 조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우리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작정하신 대로 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그의 뜻에 반항하는 모든 감정들을 비워버리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새 정신과 새 마음을 창조하사 이것이 우리 자신의 것을 소멸해 가기를 바라는 것이다(겔36:26). 하나의 순수하고 또 하나님 뜻에 합치하는 뜻 외에 다른 어떤 욕구가 우리 속에 충동질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우리들에 대해 스스로가 의지하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서 의지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안으로부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사랑하도록 만들고, 그를 노엽게 하는 것을 우리가 싫어하고 혐오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간구들은 우리 눈앞에 하나님의 영광만이 뚜렷이 나타나게 하며, 우리 자신들의 이익 될 것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게 한다. 물론 우리가 이 기도를 통해 유익을 얻는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그 기도 속에서 그것을 구해서는 안 되겠다. 우리가 간구하는 이 일들은 다 그때가 되면, 우리의 생각과 바라는 간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일들을 여전히 바라고 구해야만 한다. 우리가 우리의 최선의 능력을 다해서 하나님의 영예를 섬기는 그의 종이요 자녀로서 합당한 자인지 이를 통해 시험하고 또 밝힐 수 있다. 이는 우리 예수님과 아버지께 빚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더 넓히고자 하는 욕망과 열정으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심과”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심과”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와 종이 아니다.

 

넷째간구(우리에 관한 부탁)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마6:11)

우리 육신이 이 세상에(갈4:3) 사는 동안에 필요로 하는 음식과 의복과 필요한 것, 하나님께서 아신 모든 것들을 전반적으로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평화로운 가운데서 빵을 먹을 수 있도록 구하는 것이다. 이 간구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의 보살핌에 맡기는 것이며, 그의 섭리에 우리를 의탁하면서 먹이고 자라게 하고 보존하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빵 한 조각, 물 한 방울과 모든 것을 그분께 기대하는 작은 것까지 우리 믿음에 훈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은 영혼보다 여전히 육신의 문제로 고민하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한다. 그들은 포도주와 곡식과 기름을 넘치도록 가득히 넣어 두지 않으면 두렵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면 큰일 곧 구원과 영생을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적 소망으로 우리 믿음을 훈련해 가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다. 이런 소망이 없이는 우리는 염려에 빠질 것이다. 우리가 염려한 믿음을 버릴 때에 큰 유익을 얻게 된다. 보통 불신앙은 사람들의 뼛속까지 그 뿌리를 박고 있다(마6:25-33). 따라서 차원 높은 믿음을 얻기 위해 육의 빵을 우리 아버지에게서 구한다. 우리가 이를 “일용할” 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만족을 모르는 욕망으로 감각적 쾌락과 과시와 사치와 겉치레와 휘황찬란하게 낭비에 벗어나도록 가르친다. 우리는 필요한대로 충분한 만큼만 구해야겠고 또 그것을 매일 매일 구해야겠다. 우리 천부께서 오늘 우리를 먹이시듯이 내일도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결과는 재산이 흘러넘치고 창고가 가득하고 보물이 쌓을 곳이 없어도, 이 모든 소유들이 아버지께서 축복 주심이다. 번성과 열매를 맺게 하시지 않는 한 아무 것도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항상 양식을 구해야 한다. 비록 우리 손안에 들어 있는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그 작은 한 부분까지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주시고 또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매일 양식에 만족이 없으면 무한정의 재물을 찾아 헐떡인다. 이런 자들의 기도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경우는 받고 싶지도 않은 것, 이미 있는 것이며 탐욕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양식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구한다는 사실은,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오든지, 우리의 기술과 근면으로 얻은 것처럼 보이고 또 우리 자신의 손으로 공급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단순하고도 자유로운 선물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다섯째 간구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마6:12)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죄의 용서가 우리에게 베풀어지기를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 “빚”이라 함은 원죄와 스스로 범한 죄 때문에 하나님께 죄 값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빚은 하나님의 탕감으로 면제되는 길 외에 만족시킬 방법이 없다(롬 3:23-24). 이 탕감은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비롯되고 그분의 관대와 면제로 풀어 주시며, 두 번 다시 그 빚의 지불을 요구하지 않고, 그분 자신이 대속 물로 아버지께 제물에 만족을 하셨다.(참고, 롬3:24). 누구든지 십자가 대속을 믿지 않으면 사죄의 은총을 통해 자유를 얻지 못하며, 자기들의 공로로 나아가면 스스로 빚진 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용서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마6:12), 즉 행동으로 우리를 부당하게 취급했든 말로 우리를 모욕했든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에게 해를 입힌 자들을 우리가 감싸주고 용서해 주듯이, 우리에게도 이런 용서가 오기를 간구한다는 말은 허물이나 불법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아버지께 있다는 말이다(참고, 사43:25).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 편에서 할 수 있는 용서이다. 즉 우리 마음에서 분노나 증오, 복수심 등을 기꺼이 내버리고,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기억을 자발적으로 잊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나쁜 일을 하는 자들의 잘못을 용서치 않으면, 하나님도 외면하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증오심을 품고 복수를 계획하면 사죄는 없다. 또한 우리 원수와 화해를 위해 각양 호의를 보이며 좋은 관계를 갖지 않는다면, 우리 죄를 용서치 말라고 기도이다(마7:12). 이 간구의 뜻은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심판을 부른 기도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것은(마6:12) 내가 베푼 용서가 아버지께 용서받는 자격이 됨을 유념하자. 우리 마음속에서 타인에 대한 모든 증오와 시기, 복수심을 비워버리면 타인에게 용서가 시작된다.

 

여섯째 간구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마6:13상)

유혹의 형태는 많고도 다양하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도록 꾀거나, 욕망을 부추겨서 생겨나든지 또는 마귀가 일으킴으로써 생겨나는 우리 마음의 악한 생각들이 바로 유혹이다. 이는 그 본성에는 악이 아니지만 마귀의 간계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약1:2, 14;참고. 마4:1, 3;살전3:5). 이러한 유혹들은 사방팔방에서 온다(참고 잠4:27). 예컨대 부나 권세나 명예 등 그 휘황찬란함이 선으로 사람들의 예리한 눈을 흐리게 만들고, 또 온갖 매력으로 치장하여 사람들이 그 계략에 포로가 되고, 그 달콤함에 취하여서 하나님을 잊게 만들고, 둘째는 가난과 수치와 경멸과 곤경 같은 것들이다. 이런 시험은 역경과 곤란에 위축되어져서 마음에 절망을 품고, 확신과 소망을 잃거나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다. 우리가 아버지께 시험에 대해 기도한 것은 방자한 욕망 때문에 우리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든 아니면 마귀의 간계로 생겨나는 것이든지 온갖 유혹을 이기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를 붙잡고 격려하심으로 우리가 그의 능력으로 인해 힘을 얻어 우리 마음속에 생겨나는 어떤 생각이든지 악한 대적이 일으키는 모든 공격에 맞서 든든히 서며, 밖으로는 선한 방향으로만 나가며 교만하지 않고 역경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도록 도우신다. 기도했다고 시험을 전혀 느끼지 못하도록 되기를 간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나 무감각이 되어서 둔해지지 않도록 이 시험들로 인해 경성하도록 하심을 알자(약1:2). 그래서 다윗이 시험받기를 원한 것도 경우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며(참고,시26:2), 또 주께서 매일 그의 택한 자를 시험하시되(창22:1, 신8:2, 13:3) 치욕과 가난과 그밖에 다른 곤경들로써 깨우치신다. 시험의 두 종류가 마귀는 멸망시키고 저주하고 욕하고 넘어뜨리기 위함이요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증명하고 연단하기 위함이다. 곧 육의 소욕을 억제함과 정결케 하고 소독하려는 것인데, 만일 이런 일이 없으면 육체는 방탕을 즐기고 또 도를 넘어 자기 자랑에 빠질 것이다. 사탄은 나태한 자들에게 갑자기 오고, 하나님은 시험과 피할 길을 같이 주신다(고전10:13, 벧후2:9). 즉 성도의 기도가 공적이어야 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과 성도들의 교제를 증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이 다 공동으로 우리의 빵과 죄용서와 시험에 빠지지 않고 악한 곳에서 구함 받기를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마6:13하).

우리 기도가 우리 자신의 어떤 가치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진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의 존전에서 입을 열 수 있겠는가? 우리가 미천할지라도 대속의 공로로 당당하게 기도할 이유가 있으며 영수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아버지의 것이기에 안 되는 게 없다. 그리고 누구에게 빼앗길 수도, 그리고 뺏길 수도 없다. 소유 자체가 아버지의 것이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아멘이 첨가되어 모든 것을 얻기 원하는 따뜻한 소원이 표현되며 마치는 기도이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이 확고한 이유는 이 모든 일들이 이미 우리에게 일어났고, 또 스스로를 속일 수 없는 진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들이니 그것들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기 큰 확신으로 기도한다.

 

사도신경 해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위의 고백에서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 모든 신뢰를 고백한다. 아버지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자로 인정한다. 창조는 말씀, 그의 영원한 지혜(곧 성자)와 능력으로 이루어졌다(시33:6, 104:24, 행17:24, 히1:2-10). 그리고 창조하신 후 지금도 유지하고, 보양하고, 보존하되 그의 선하심과 능력으로 섭리하신다. 주의할 것은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자라고 부를 때 전능보다 본질을 놓치면 안 된다. 그분의 본질 안에서 만물이 형성되고 보존된다. 믿음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이든지 행복, 슬픔, 순경, 역경, 몸에 속한 것이나 영에 속한 것 모두가 그분께로부터 오는 것을 인정하고(죄는 예외이다) 또한 그분의 보호로 안전하고, 방어를 받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어떤 적대적인 세력으로부터도 보존되고 있음을(호13:14) 인정하는 고백이다. 즉 그분께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은 무엇이나 행복으로 인도하신다. (롬8:28). 실제로 이 모든 일들은 그분에 의해 우리에게 되어 진 일들이 우리에게 어떤 자격이 있기보다 아버지 같은 자비로 선하심이 온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쉬임 없는 감사를 하자. 우리 마음으로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우리 입으로 그것을 선포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합당한 찬양을 돌려야 마땅하다. 아버지께 감사하는 경건과 타오르는 사랑으로 존경하며 섬기는 일에 전념하고, 매사에 그를 높이자. 그리고 역경들도 화평한 마음으로 받을 것은 그분의 손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의 섭리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또 그것이 우리를 괴롭게 하고 억누를지라도 우리 구원을 약속함을 잊지 말자(욥2:10). 그러므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의심치 말고, 자애로운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견고히 하자. 이것이 사도신경 첫 부분에서 배우는 믿음이 바른 믿음이란 것은 전적으로 확실하며 또 참된 진리이다.

 

둘째 부분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위의 고백에서 우리가 예수님은 성부님의 독생자란 것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내용은 우리가 확신함은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이다. 성도처럼 입양을 통해 은혜로 된 아들이 아니라 본성으로 영원부터 성부에게서 출발하심이다. 우리가 그를 “외” 아들이라 부르는 것은 그를 다른 모든 이로부터 구별함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인 하나님! 동일한 본성과 본질을 가지시며, 위격 아버지와 구별되신 것이다(시100:3 상). 이 점에서 인간의 지혜로부터 나오는 것은 무엇이나 복종하는 피조물이다. 왜 복종해야 하나? 유치한 호기심과 망설임은 예배로 이끌지 못한다.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부와 하나이며, 동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참 하나님이요 천지의 창조자로 받들어야 한다. 성부에 대한 능력 권세 영광이 성자에 대해서도 마땅한 것이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성부께 보냄을 받은 자, 동정녀 탄생, 우리 죄 때문에 고난을 받음, 영혼의 죽음에서 해방을 위해 죽으심과 부활로 재림의 소망을 주심,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주심이다.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로 올라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이다(사7:14). 그가 그의 신성을 우리에게 합하시고, 우리의 인간성을 또한 그의 신성에 합하시는 은혜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분을 중보자로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그를 “사람”이라 칭하였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이 중보자는 사람의 자식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일, 지옥 갈 자가 천국 상속자 됨은 예수님 공로 밖에 없다.

영혼이나 육체에 각각 따로 언급될 수 없는 것도 있다. 결국 영혼의 특성이 육체적인 것으로 바뀌기도 하고, 육체의 특성이 영적인 것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이렇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사람은 두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한 사람이다. 이런 표현이 암시하는 것은 사람 속에는 한 본성이 두 요소가 서로 결합된 채로 존재한다는 것, 또한 동시에 이 한 인격을 구성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본성들이 있다.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독단적으로 그의 인간성에 대해서만 언급할 것이 있고, 또한 신성에만 특별히 해당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때로는 양 성격을 다 포용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속성의 교류”를 통하여 그의 인성에 속한 것을 신성에 돌리고, 또 그의 신성에 포함되는 것들을 그의 인성에 돌리게 된다. 이런 말들은 성경에서 명백한 예들을 제시해 주지 않으면 의미 없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의 말씀하심은 신성이다. 그리고 그가 “아버지의 종”(사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라 불린 것이다. 그가 “나이와 지혜가 자라갔다”(눅2:52)는 말, 그리고 그가 “자기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요8:50)는 말 등은 그의 인성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그가 하나님이신 한에서는 성부와 동등하며, 자랄 수도 없으며, 또 모든 일을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해당하지 않고, 동시에 양자에 다 해당되는 예는, 그가 아버지로부터 죄를 사하는 권세를 받으셨다는 것, 죽은 자를 살리신 것,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자로 임명되신 것(눅5:20-24, 요5:21, 6:40-54, 행10:42)등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육체를 입고 오실 때 그 같은 특권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이 권세들은 그는 아버지와 함께(벧전1:20), 세상의 창조 이전에 가졌으며(엡1:4) 인성에게는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이런 형태에 대한 본문들이 많이 있다. 신성이나 인성 어느 한쪽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나타났다고 해야 맞는 그런 표현이다. 고린도전서 15장 24절에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닌ㅁ께 바칠 때라”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러나 그는 낮아지신 후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시고 모든 것 위에 계시지만 자신을 비우고 자기를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함으로써 드린 후에 그는 높여지셨고 그 앞에 모든 무릎이 끓을 이름을 받으셨다(빌2:8-10). 그리하여 그때에 그 이름 자체와 또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은 그 무엇이나 아버지께 드려서 하나님이 모든 것 가운데 모두가 되게 하셨다(고전 15:28).

우리가 단순히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인 그가 우리 육신을 취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이신 동일한 그리스도요, 하나님이며 또 사람이신데 그의 양 본성이 합하기는 하나 혼합되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그의 인성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는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가 처녀의 몸에서 난 사람으로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칭하여졌기 때문이라는 사상을 찬양하지 말고, 그 전에 계신 분이기에 찬양한 것이다. 미가서 5장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예수님! 곧 베들레헴에 나신 분이 “영원한 날로부터 나오신다.”는 말이다. 미가 때에는 말씀만 있었지 인성을 입지 않으셨다. 있다면 하나님이 아들이 계셨고(예수님 안에서 택하심) 그리스도는 오시지 않았다. 우리는 한 분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요, 사람이신 것을 부인하지 못하며, 또 그의 신성을 그의 인성에서 분리하지 못하고 다만 둘을 구분할 뿐임을 밝힌다. 잘못된 신관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속성들만을 그의 신성에서 떼어 붙들고 있다. 또 그의 신성만을 인성에서 떼어 붙들기도 한다. 또는 양 본질에 속한 것이 너무나 혼합되어 있어서 각각이 서로 교류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둘을 동시에 떼어버리기도 한다. 잘못된 신관의 결과가 무엇인가? 결국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니다. 또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니다. 또는 그는 동시에 사람과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다. 이런 말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가 참 육신을 취하셨을 때 또한 사람이 되셨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음성으로 또 하늘의 신탁으로 칭하여진 것과 같이(눅1:30-35, 2:21) 우리도 그를 진정으로 그러하다고 믿으며 또 이 이름이 “우리가 그 안에서 구원을 얻도록 사람들에게 주신”(행4:12) 이름인 줄로 믿는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의 모든 은혜와 함께 뿌려진 것을 믿는다. 이 은혜가 “기름”으로 부르는 것은(시45:7, 89:20)이것이 없이는 우리가 시들어 가고, 마르고 황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그의 위에 머무시고, 그의 다스림으로부터 우리가 모든 것을 받도록 하기 위해 성령님을 그 위에 다 쏟아 부으신 것처럼(사11:1-5, 61:1-3, 요1:16), 우리도 또한 믿는 것은, 이 기름부음을 통해 그가 아버지로부터 왕으로 임명되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스리고(시2:1-6), 또 그 안에서 우리도 왕이 되어 마귀와 죄와 죽음과 지옥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을(벧전2:9, 행0:36) 믿는 것이다. 또 우리가 믿는 것은 그가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아버지의 노를 풀고 우리를 그와 화목케 하기 위한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것과, 그 안에서 우리도 제사장이 되어, 우리의 중보자인 그와 함께,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감사와, 우리 자신과, 우리 모두를 아버지께 드리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계1:6, 시110:1-4, 히 5:1-10, 13:15-16).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에 의해 우리 위에 계시도록 하실 때, 우리는 그분을 유일한 주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성처녀의 태에서 성령의 놀랍고도 말 할 수 없는 능력으로 잉태되었음을 믿는다(눅1:26-38, 2:17). 우리의 구원을 이룩하기 위하여 제물의 인간으로 태어나, 가장 비참한 죽음에 그의 몸을 넘겨주시고, 그의 피를 구속의 값으로 쏟으셨다(참고. 마26:28, 엡1:7). 그는 십자가에서 못 박혔는데, 이 일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저주받을 일로 나타나신 바, 그는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저주를 짊어지신 것이다(신21:22-23, 갈3:10). 그는 죽으셨다. 이는 그의 죽음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죽음을 정복하기 위함이며 또한 우리를 삼키도록 된 그 죽음을 삼키기 위함이다(호13:14, 고전15:54). 그는 묻히셨는데, 이는 그의 은혜로써 우리가 죄에 대해 묻히고, 마귀와 죽음의 지배에서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함이다(히2:14-15, 롬6:4).

 

그가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고통을 받아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과 격심함을 느낌으로 말미암아(시21:9) 하나님의 진노를 중재하고 우리의 이름으로 그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함이며(사53:4, 11), 그리하여 우리의 빚을 지불하고 형벌을 제거하시되 그 자신의 죄(결코 있을 수도 없는) 때문에가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그같이 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언제나 그에게 대하여 노를 발하시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그가 자기 사랑하는 아들, “내가 기뻐한다.”한(마3:17) 그 아들에 대해 항상 노하실 수가 있겠는가? 아버지가 그를 원수로 여기신다면 어떻게 그가 중보의 일로 아버지의 노를 멈출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공의에 만족을 드렸다고 말하는 것을 그 순간 그가 원수와 같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채찍을 맞고 징계를 받았”고(참고, 사53:5) 또한 노하시고 복수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표시들을 다 경험하셔서 깊은 고뇌 가운데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22:1, 마27:46)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갔다”는 말은 장소성보다 선포성이다. 선포를 듣고 자기들이 하나님 안에 살아있다는 것을 이해하거나 전혀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앎이다.

 

우리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는 자연법칙 아래에서 죽는 죽음이다. 그리고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한 참 인간이 되어 이제는 더 이상 죽을 몸이 아니며, 몸과 영을 받되 부패되지 않고 영화된 상태임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죄의 죽음에서 일으켜 의롭게 된 상태에서 생명과 의의 새로움을 얻게 한다고 믿으며(롬6:4). 또 마찬가지로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일으킴을 받을 것을 확신한다. 이는 그의 부활이 가장 확실한 믿음이며 우리 사람의 부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고전15:13, 행1:22).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는 승천으로써 예수님이 아담 안에서 닫혀 진 천국의 입구를 뻥 뚫어주신 것이다(요14:1-3). 진정 그는 우리의 생명과 함께 하늘에 들어가셨기에 이미 우리가 소망 중에 이 천국을 그분 안에서 소유하게 되었고, 이제 후에는 천상의 존재들 사이에 우리의 자리를 얻게 되었다(히2:10, 13, 엡1:3, 2:6). 우리는 또한 그가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과 같이 “그가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믿는다. 우편의 의미는 예수님이 이제 왕과 심판자와 만유의 주로 임명받고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도 예외 없이 그의 주권에 속해서, 이제 그의 능력으로 영적 은사들을 우리에게 베풀 수 있게 되었다(고전15:27, 히2:8, 엡4:8).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성화시키시고, 우리 죄의 오물을 씻기시고,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되 우리가 죽음을 통하여 그에게로 나아갈 때까지 하실 것이다. 이제 우리는 축복의 시작이 될 것인 바, 우리가 이 축복을 그 안에서 받아 그의 나라와 영광이 우리의 저주요 능력이요 지옥을 이기는 승리가 될 것이다. 예수님이 아버지 우편에 계심이 우리에게 큰 유익이다. 이는 그가 거기에서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 앞에 나아감을 얻게 하며, 그 길을 닦고, 우리를 그분께 드리며, 그로부터 우리를 위해 은혜를 요청하시며, 우리의 영원한 지원자요 중보자로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우리 죄를 위해 중보기도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끊임없이 화해시키고 계신다(히7:24이하, 9:11이하, 롬8:26~27, 요일2:1). 그러므로 그가 비록 하늘에 오르심이 시야로부터 그의 몸을 감추셨지만 여전히 성도와 함께 계시고 힘이 되신다. 이것을 또한 약속하실 때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마28:20).고 하셨다.

 

“심판하러 오십니다.”를 믿는다. 그가 올라가실 때 보이셨던 그 모습대로(행1:11, 마24:27, 44). 공중림이 아니라 재림이다. 찌르른 자도 볼 수 있게 오신다.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에게 일시에 나타나실 때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수 있는 위엄으로 하늘로부터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재림하신다. 그때에 아직도 살아 있는 자와 이미 죽어 데려간 자들 모두를 심판하실 것이다(살전4:14-17, 마16:27-28).

 

셋째 부분

성령을 믿사오며

우리가 성령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지만 더욱 더 그 분이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계시고, 또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이며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본질이며 함께 영원하며, 전능하사 만물의 창조자이란 것을 믿는다. 성부, 성자, 성령님이 구별된 위격이 계시지만 본질은 하나이다. 이는 깊고 감추어진 신비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성이나 우리의 말로 표현하거나 자연으로나 능력으로나 이 신비들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들은 탐구되기보다는 오히려 경외함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와 그의 외아들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신뢰를 두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동일한 신뢰를 이 성령께도 돌려야한다. 그는 참으로 우리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나이시다. 우리가 인정하되 사실은 아버지께 이르는 그리스도 외의 다른 길이 없듯이 다른 지도자나 인도자가 우리에게는 없다. 또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은혜도 올 수 없다. 은혜는 그 자체가 성령님의 능력이요 활동이다. 은혜를 통해 성부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모든 선한 일을 이루신다. 은혜를 통해 그는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며 또 우리를 씻기시고, 그에게로 불러 가까이 가게 하셔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신다(롬8:11-17, 엡2:18, 고전12:1-13). 그러므로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다시 말하면 짝, 감싸는 것과 혹은 붙어 있음이라할 것이다. 도식으로 우리 속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그의 빛으로 비추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한 부요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소유했음을 명백히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고전2:10-16, 고후13). 그는 우리의 가슴속에 하나님을 향하여서와 또 이웃을 향하여 사랑의 불이 일도록 하시며, 또 날이면 날마다 우리의 과도한 욕망으로 일어나는 악을 소멸하셔서(롬8:13). 만일 우리 속에 어떤 선한 역사라도 있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그의 은혜의 열매요 능력인 것을 나타내신다. 그를 떠나서 우리가 빚어내는 일이란 모두가 지각의 어두움과 마음의 타락일 뿐이다(갈5:19-21). 성령님의 이런 은사들은 우리의 어떤 의무나 공적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써 자유롭게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믿는다. 그분이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우리의 한 분이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면서, 또 우리가 거룩한 복음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그 믿음 위에 굳게 서 있고, 이 사역과 능력이 그의 것 인줄 확실하고 굳게 주장하는 것이다. 성령님의 사역은 거저 주시는 것이므로 아무 것도 우리의 공적에 돌릴 수 없다. 이러한 일들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며 모두를 위한 믿음이어야 함이 마땅하다.

 

넷째부분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먼저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 즉 선택받은 자의 전체수, 천사들이나 사람들(엡1:9-10, 골1:16), 중에서는 죽은 자이든지 아직 살아 있는 자들, 어느 땅에 살고 있든지, 또 어느 민족 속에 있든지 이들이 한 교회요 사회이며, 하나님의 한 백성인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는 이 모두의 지도자요 통치자이며, 한 몸의 머리이며,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을 통해 그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기초가 있기 전에 택하심을 입어(엡1:4) 모두 함께 천국에 가도록 하셨다. 이제 이 사회는 보편적이요 다시 말해서 우주적인데 둘이 아니다. 이 하나님의 모든 택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가 되고 연합되어져서(참고, 엡1:22-23) 그들이 한 머리에 붙어 있는 동안 한 몸으로 함께 자라며, 함께 결합되고(엡4:16) 한 몸의 지체들과 같다(롬12:5, 고전10:17, 12:12, 27). 이들은 한 믿음, 한 소망, 한 사랑 안에서, 또 하나님의 한 영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기업에로 부름을 받아 함께 살아가는 하나가 된 것이다. 교회를 또 거룩하다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 선택되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 들여져서, 이 모든 이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기 때문이다(요17:17-19, 엡5:25-32).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의 이 순서를 말할 때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예수님이 사람들을 이끄실 때 자신을 보이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의 옷을 입혀 의롭다 하시는데, 이 옷으로 아름답게 꾸미시고 또 본래 그들의 불완전을 감추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육체의 부패를 매일 씻기 위해 성령님의 은혜로 소생시켜 그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며, 마침내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고 흠 없이 나타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왕국의 위엄이 모든 것 속에 그리고 만물을 통하여 나타나게 될 때에 그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불러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데 이 목적은 창세전에 작정하셨던 그의 영원한 선택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영광에 들어가는 자는 부름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이런 방법을 통해 택하신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시고 나타내시는 것이다. 성경은 가끔, 우리의 이해력에 맞추기 위해, “하나님의 선택”을 이 부르심과 칭의로써 이미 드러난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의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은 가끔 택함을 받은 자가 아닌 자에게는 그의 능력을 보여 주신 그런 예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진정으로 선택받은 자가 아직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백성의 숫자에 계산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롬9:11, 25-26, 10:20, 11:7, 24, 28: 호2:23).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요10:28), 택한 자가 소멸된다거나(요10:28) 또는 나쁜 결과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구원은 너무도 확실하고 견고한 터전 위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이 세상의 모든 구조가 무너질지라도 구원은 흔들리거나 쓰러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주께서 택하신 자들은 넘어지지 않는다.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39이하).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만 하늘의 신령한 것을 상속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자족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것인가?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소유이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만족을 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들 위에 일으키는 셈이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위엄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데(잠25:2-6). 필요 이상으로 헤아리기 때문이다(마 7: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또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이라면, 그분 자신이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또 천국의 상속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그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그의 친구와 동료가 되어 그가 받을 기업에 함께 참여함이 이루어진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또한 예수님이 영원부터 택하신 자, 그가 영원토록 보호하여 결코 멸하게 허락하지 않을 자들 속에 우리도 속하였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롬8:31-39).

 

만일 우리 자신이 구원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공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헛되고, 열매 없이 믿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이 교회에 속하였는지 결정하는 일이나, 또는 선택된 자를 유기된 자들과 구분해 내는 일은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아니다. 이 일은 하나님만의 특권인데, 바울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2:19). 그리고 인간의 성급함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매일의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판단이 얼마나 우리의 지각을 초월하는지에 대해 경고를 받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완전히 버린 자요 희망 없이 포기해 버린 자들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생명의 길로 다시 부름을 받고, 반면에 남들 앞 서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지던 자들이 넘어지는 경우를 우리가 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눈만이 누가 마지막까지 보전될 자인 지를 보실 수 있다(마24:13). 이는 그분만이 구원의 머리이기 때문이다(히2:10).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씀의 사역자들이 땅에서 풀고 맨 것이 하늘에서 풀고 맨 것이 되리라고 하신 것은(마16:19) 우리가 스스로 누가 교회에 속하는지, 또 누가 외인인지를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약속을 통해 그가 의도하신 뜻은, 그가 우리에게 어떤 외적 기준을 주어서 우리 앞에 드러낸다거나 또 매이고 풀린 자들을 우리 눈앞에 나타내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믿음으로 복음의 약속 곧 그리스도가 땅위에 구속과 자유를 주시고, 말씀 사역자에 의해 선포된 그 약속을 듣고 받아들이는 그 사람들이 하늘에서도 풀리고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 약속을 거부하고 경멸하는 자들은 이 약속으로부터 정죄 되어 그대로 매여 있을 것 밖에는 다른 어떤 것도 기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와.” 이는 그 공교회 안에서 모든 택한 자들이 상호 교제를 가지며 또 모든 좋은 것에 동참함이다. 물론 각 개개인이 다양한 은사를 가진 것을 바울도 가르치듯이 성령님의 은사는 나뉘어져서 다양하게 분배된다(고전12:4-11). 시민 질서의 구조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담당한다. 그러나 성도의 공동체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동시에, 공평과 필요에 따라 친절과 사랑으로 서로서로 나누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사가 각 개인에게 어떻게 주어졌던, 설혹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특별히 어떤 자에게는 주어지고 다른 자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 가진 것을 나눠야 한다(롬12:4-8, 고전12:12, 26). 한 몸의 지체가 일종의 공동체로서 서로를 살피듯이, 그러면서도 각자의 특별한 은사와 독립된 사역을 수행하듯이, 성도들은 서로 모여 한 몸으로 지어져 간다. 이것이 공교회요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이다(엡1:22-23). 이제 우리가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는 고백은 이 항목을 통해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믿는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무언으로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이 부분이 이런 사람들에는 이렇게 저런 사람들에게는 저렇게 해석하지 말고 천국과 공익과 모두에게 좋아야 공교회가 하나로 결속 된다.

 

“죄를 용서 받는 것과” 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만족을 주시는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 죄의 용서로 은혜가 몸인 교회에 입양되고 접붙여진 자들에게 용서가 왔다는 것을 말한다. 즉 사죄는 예수님의 공로 외에 다른 원천은 없다. 왜냐하면 교회와 성도의 교제 밖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교회 자체는 이 죄의 용서로 구성되고 또 이것이 기초가 되어 교회를 지탱한다(호2:18-23). 죄의 용서가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이요, 또 그분이 우리와 화해하게 되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이 죄의 용서만이 우리에게 교회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며 우리를 그 안에 머물게 보호해 준다(시 46:4-5, 87:1-3, 딤전3:15). 성도가 죄 용서를 받는 길은 하나님의 심판을 느끼며 두려워하고, 스스로에 대해 혐오하고, 무거운 짐 밑에서 탄식하고 허덕일 그때이다. 이 죄에 대한 혐오와 또 스스로의 혼란으로 그들은 자기 육체와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죄 때문에 망하는 자신들을 자각함으로써 모든 교만을 꺾고, 자신 의 무가치함을 분명히 알고, 예수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죄용서와 또 복된 구원이 자기들을 위함인 줄 확신하게 된다.

 

“몸의 부활과” 부활이란 육체가 썩음에서 썩지 않음으로, 죽을 몸에서 불멸로 일으켜 지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고전15:20-56, 살전4:13-17, 행23:6-9). 이미 죽은 자들도, 벌레가 먹었든, 흙으로 변했든, 재가 되거나 산화되었든지 간에 천국에 적응될 몸을 받을 것이다(요5:28-32). 그러나 그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들은 자기 육체의 부패성을 벗어버리게 될 것이다. 모든 자들이 갑작스런 변화를 통해 불멸의 본질로 건너가게 되고, 경건한 자들은 생명의 영광으로, 유기된 자들은 죽음의 정죄로 이르게 된다(마25:31-46).

 

“영생을 믿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몸과 영이 영화롭게 된 자들을 복락 가운데로, 영원히 지속될 그 복락 중에 영생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일은 우리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이 모든 좋은 것들을 자기 속에 충만히 가지신 예수님께 우리가 굳게 붙어 있을 때 생명과 빛과 의를 참되고 완전하게 성취시키는 일이다(고전15:28-53). 그 복락은 모든 밝음과 기쁨과 능력과 행복으로 가득 찬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지금은 우리가 귀로 듣지 못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고 인간의 마음으로 추측하지 못한다(고전2:9예비하신 모든 것을 막으심). 반면에 경건치 못한 자들과 유기된 자들은 하나님을 찾고 공경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먼 곳에 마귀와 영벌에 처한다. 거기서 모든 기쁨과 능력과 천국의 다른 좋은 것들은 맛보지도 못하고, 영원한 흑암과 영원한 형벌의 정죄를 받아(마8:12, 22:13) 죽지 않은 벌레에게 먹히며(사66:24, 막9:44),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태워질 것이다(마3:12, 막9:43, 44, 45, 46, 48; 사66:24). 우리는 진정으로 성도의 교제와 죄용서 그리고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어서, 우리 주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중에 이 모든 일들이 모든 성도들과 함께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을 확신해야 하겠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의 진리가 얼마나 확실하며 흔들리지 않는 것인지 표시하기 위해, 성도마다 예수님께서 구주인 줄로 믿으며 그의 몸의 부활과 영생을 기다리는 가운데 그 자신들을 이 믿음으로 굳게 하기 위해, 이 모든 고백의 마지막을 증명된 확실성의 부호인 “아멘”으로 끝맺고 있다.

 

출처: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세           글쓴이: 이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