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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강해

에반젤(복음) 2020. 10. 5. 12:21

주기도문강해




김세윤 교수


오늘과 내일, 이틀간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묵상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제가 미국에서 상주하고 있기 때문에 거리감이 주는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이 있어 가지고 내가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오늘 2시간 강의하고 내일 4시간 강의해서 전체 6시간 강의하는 것으로 알았어요. 그렇게 해서 6시간에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좀 더 심도 있게 묵상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준비해 가지고 왔는데, 와서 보니까. 매 시간이 두 시간짜리 한 시간씩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4시간 내일 6시간 그래서 온 나라가 구조 조정한다고 난리를 피우는데 저도 부랴부랴 제 강의를 구조 조정해서 원래 6시간 할려고 했던 강의를 12시간 자리로 늘리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사이 경제계에서 구조조정은 줄이는 것인데 저는 늘리는 방향으로 구조 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드린 outline은 6시간에 할 수 있는 좀 간단히 묵상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택한 강의였는데 시간이 있다고 하니 제가 모험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강의를 준비하면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을 몇 가지를 함께 논의하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중심 메시지에 대해서 조금 더 심도 있게 토론하고 묵상을 해 보려고 합니다.




다함께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의 자녀들로 불러 모아 주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며 당신 앞에 나아가는 큰 특권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저희들이 이제 앞으로 함께 상고할 때 주의 성령으로 저희들의 마음을 인도하여 주셔서 이 기도의 가르침을 잘 깨닫고 우리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으며 그래서 우리의 신앙과 삶이 더욱 풍성하게 하여 주시고 우리들의 복음선포와 봉사가 더욱 큰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우선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우리에게 두 판으로 마태 복음판과 누가 복음판으로 주어진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마태복음 6장 9-13절까지와 누가복음11장 2-4절에 주어졌습니다. 이 두 복음서들에, 두 공관복음서들의 마태와 누가, 마가에 없는 마태와 누가의 공통 자료들을 보통 학자들은 Q 자료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두 자료가 원래 이른 바 Q 라는 우리가 보통 편리하게 Q 라고 붙이는 마태와 누가에 있는 Q 라는 자료에서 온 것일 수도 있구요. 하나는 마태복음판은 마태의 소위 특수자료 보통 우리가 M 이라고 편리하게 기호를 붙이죠. 누가복음판은 또 누가의 특수자료 보통 우리가 L 이라고 부호를 붙이는데 각기 마태는 자신의 특수자료, 누가는 자신의 특수자료에서 전승을 받아가지고 이 본문에 기록했을 가능성이 하나 있구요. 또 하나는 마태나 누가 중의 하나는 Q 에서 자료를 받았는데, 또 그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특수 자료 M 이든지 L 이든지 자신의 특수자료에서 전승 받았을 가능성이 또 하나 있구요. 마지막으로 누가가 마태에 의지해서 썼을 가능성이 있구요. 이 그리스 바흐 가설에 따라 해결에 따르면 그런 해결책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자료를 복잡하게 생각하느냐하면 여기에 여러분들에게 편리하게 나누어 드린 마태복음판과 누가복음판이 보여주듯이 상당부분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상당 부분 다른 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중에 어느 가설이 가장 합당하냐? 그것은 판정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이 네 가능성 중에 어느 것이라도 가능하면서도 그러나 확실하지 않죠. 아마 지금 대다수의 학자들 중에 이 3가지 중에 처음 세 가지 중에 하나의 가능성을 많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아마 첫 가능성을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문학적 맥락을 보면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커요. 우선 누가복음 11장 1-2에서 읽어보면, 본문을 누가 한번 읽어 주시겠습니까? 누가는 주께서 이 기도를 가르치신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서문을 다냐면은 요한도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으니 선생님도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것은 어떤 배경을 지금 두고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 당시에 소위 쉽게 말해서 유대인들 중에 유대교 내에 종말을 대비한 부흥운동을 하는 사람들, 단체들이 참 많았죠. 우리가 잘 아는 바리새운동도 그런 운동 중에 하나였고,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제사장 민족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던 중산층 평신도 경건운동도 바리새운동 아니었습니까? 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에센파 운동도 그런 운동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크게 세력을 얻어서 유대 전쟁을 일으키는 열혈당 운동도 그 운동 중에 하나였고. 그 중에 하나가 세례요한 운동이죠 세례요한이 임박한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그 심판에 대비해서 회개하고, 회개를 표징으로 세례를 받는 그런 회개와 부흥 운동을 했었죠.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이 원래는 이 요한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이었죠. 그것은 사복음서에 여러 곳에 그 흔적을 보여주는데, 특별히 요한복음 1장 18절 이후에 그것을 우리에게 잘 암시해 주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원래 요한의 제자로서 요한 운동에 동참하다가 독립을 해서 복음서들은 그의 세례와 더불어 독립한 것을 보여주는데, 새로운 예수의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운동을 새롭게 시작한 것입니다. 일부 예수와 함께 요한의 제자였던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또는 예수를 따라서 넘어와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을 한 것입니다. 아마 요한은 자기의 회개와 부흥운동을 신학적으로 잘 표현하고 그 운동의 소망과 이상을 잘 표현하는 기도를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그 관행으로 보통 있었던 일이죠. 그래서 예수께서 이제 요한 운동으로 독립해서 새롭게 독립운동을 하니 요한의 가르침과 비슷한 가르침을 하면서 상당히 새로운 가르침을 하시면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강조점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시죠. 요한은 불로 심판을 강조하셨다면, 하나님이 곧 오셔서 하나님이 오셔서 불로 심판하는 것을 강조하셨다면 예수는 무엇을 강조하셨어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요한이 그래서 심판에 대비한 극도의 절제적 삶, 금욕적 절제의 삶을 요구했다면, 예수는 그와 반대적인 방향으로 나갔어요. 자신의 하나님 나라 복음에 의한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에 하나님의 용서를 선언하고, 그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많이 벌리시는 그런 것을 한 것을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이렇게 그 외에도 여러가지 비슷한 점과 대조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만은 이렇게 예수께서는 요한 운동에서 시작하시고 독립하여 새로운 정신, 새로운 이상, 새로운 소망, 새로운 태도 이런 것을 표방하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한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이 예수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신학과 자신들의 이상과 소망을 담아서 표현하는 새로운 기도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의 가르친 기도가 요한의 신학을 담아서 요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었듯이 예수운동에 있어서도 예수의 가르친 신학과 예수의 이상과 예수의 소망 이런 것을 잘 담아 표현함으로 예수 공동체, 예수께서 지금 새롭게 구성하시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정체성(Identity)을 가장 잘 나타낼 그런 기도가 필요하게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이런 기도를 가르쳐 달라 한 것으로 이 기도가 주어진 것으로 되어있어요. 누가복음에 보면,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우리가 요약해서 주기도문이라 하는데 이보다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기도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 새롭게 창조하고 구성하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신앙과 이상과 소망을 가장 잘 담아 표현하는 기도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그런 기도이죠. 그래서 이 기도는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기도로 원래부터 주어진 것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아마 몇 개의 기도들이 유대교에서 공적인 기도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 중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두 개의 기도를 소개했습니다. 하나는 Kaddish라는 기도로 이 기도는 유대의 회당에서 설교 끝에 함께 낭송했던 기도인데, 짤막한 기도입니다. 또 하나는 18-축복기도(Shemone Esre) 이 기도는 유대인들이 하루에 세 번씩. 아침에, 오후 시작에 , 저녁시작에 하루에 세 번씩 꼭 드려야 하는 기도였습니다. 18번 축복기도야 말로 모든 유대인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기도였죠. 그래서 아마 예수 당시 처음에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18번-축복기도와 함께 드려졌다가 점차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18번-축복기도를 대처하고 교회의 유일한 공통기도가 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처음에 교회가 이방인 선교를 통해서 교회 이방인들이 많이 늘어나고 그래서 18번-축복기도의 전통을 안 받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특히 A.D. 66-70년까지의 유대 전쟁을 기점으로 해서 교회와 유대교는 이제 분리하게 됩니다. 특히A.D. 66-70년의 유대전쟁 직후, 유대교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자로 규정을 하고 유대 회당에서 많이 축출했습니다. 여기 18번-축복기도의 12번째 기도를 보시면 "배교자들에게는 소망이 없게 하시고 교만한 나라는 빨리 우리의 생애에 뿌리 뽑히게 하소서. 그리고 나사렛 당원들과 이단자들은 빨리 망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하시며, 그들이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교만한 자들을 겸손케 하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여기 18번-축복기도에 무엇이 들어있어요?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항목이 들어 있어요. 이것은 벌써 무엇을 반영합니까? 이 무렵에 명백히 예수당, 나사렛당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자들로 규정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유대회당에서 축출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이때 교회와 유대회당이 명백히 분리되면서 교회가 유대교와 공식적으로 관계를 끊게 된 것입니다. 그런 무렵, 즉 이방인들이 점점 교회의 다수가 되어가는 상황, 다른 한편으로는 이 유대인교에서 교회가 분리되는 그런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18번-축복기도는 이제 교회의 기도로서는 사라지고, 그 대신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기본적인 공중기도가 된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살펴보면 마태복음 6장을 살펴보면 노트에 간단히 OUTLINE 한 것과 같이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이른바 산상수훈 한 중심에 즉 한 가운데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싣고 있어요. 여기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16절까지는 소위 팔복의 선언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창조하고 구성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예수께서 복을 선언하는, 축하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백성에 정체성(Identity)에 대해서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제일 먼저 무엇이 되어야 한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내조의 자원으로 자신들의 자기의 생명과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그들의 소망을 거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에. 둘째로, 지금 이 세상에서 사탄의 악과 고난으로 통치하는 세상에서 애통해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곧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셋째로 온유한 사람들이다. 또 의에 대해서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이다. 등등 8가지로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에게 축하하는 예수의 말씀이 있고, 그 다음에 13절에서 16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세상에서 소금이어야 되고 막고 세상에 살 맛나게 하는 그런 공동체는 세상에 대해서 빛이 되어야 한다라는 하나님의 빛 곧,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자.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전달자여야 한다. 여기까지가 산상수훈의 서문이라 한다면 5장 17절부터 7장 11절까지가 산상수훈의 본론이겠죠.




여기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법, 그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원리를 주시는데, 자세히 보면 사실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법으로 내세운 사랑의 이중계명,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하나님에 대해 혼신을 다하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사랑, 의지와 순종, 그리고 이웃에 대한 내 몸 같이 사랑을 부연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순종의 요구로 오는 것이고, 이웃 사랑에 대한 요구로 오는데, 너희가 그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너희가 바로 세상의 소금 노릇한 것이고, 빛 노릇한 것이고 그런 너희에게 복이 있다. 축복이 있다고 지금 산상수훈은 그렇게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그 산상수훈에서 가장 한 복판, 중심에 위치했다 그런 말입니다. 거기 보시면 처음 5장 3절- 16절에는 팔복이 있죠. 17-48까지에 예수의 새로운 법, 모세의 법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 모세의 법은 모세를 통해서 시내에서 계시된 법은 행위의 외형적 최소한을 규제하는 그런 법이었다면 예수께서는 뭐라고 그래요? 반대어법으로 소위(??? statement)으로 예수께서 뭐라고 그래요. 행위의 외적인 최소한이 아니고, 그 행위를 유발시키는 동기의 내면적 최대한을 규제하고 요구하는 그런 법이다. 그래서 가령 "너희가 옛 사람들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말해졌다고 들었다" 옛사람들에게 말해진 법은 무엇입니까?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시내의 법 아닙니까? 시내의 계시 살인하지 말라.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옛사람에게 주어진 말-십계명.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를 미워하거나, 형제를 바보 멍텅구리라고 하거나, 형제에게 분을 내는 사람은 어떻다구요? 살인을 한 것이다." 그래서 공회에 잡혀 재판에 넘겨진다. 옛사람들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계명이 주어졌다고 들었다. 그것이 뭐예요? 모세의 법을 얘기하죠? 십계명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예수께서 주시는 새 법은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으면 이미 그 마음 속에 간음한 것이다. 살인이라는 외형적 최소한 남의 목을 치지 않으면 살인이 아니라는 옛법에 대해 예수의 새법은 그런 살인 행위를 유발시키는 형제에 대한 무시의 태도라든지 증오의 태도라든지 동기의 내면의 최대한을 규제하는 그런 법이다. 간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법을 훨씬 더 모세의 권을 능가하는 권으로 모세법을 훨씬 더 완벽하게 계시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죠. 이것이 5장입니다.




그리고는 6장 1-18절까지의 종교 행위들, 경건 행위들에 대해서 가르치는데 거기에 주기도문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6장 19절에서7장 11절까지는 사실은 사랑의 이중계명 입니다. 제 1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우상숭배를 배격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반대말은 그것은 우상숭배인데, 예수께서 가장 절실히 지금 우리 모두에게 위협으로 내세우는 우상숭배의 형태는 Mammonism이예요. 누구도 하나님과 Mammon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Mammonism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그래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한다면,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 들에 피는 백합화를 보면서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시고, 아빠 노릇해주시는 그 하나님께 의지하여 일용할 양식을 그 하나님께로 얻는 그런 자세로 살아야 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6장 19절- 7장 11절까지는 제 1계명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김, 우상숭배 반대에 대한 설교라고 할 수 있고 또는 예수의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그 긴 설교가 거기에 이어지고 마지막 결론적 권면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 열매, 행위의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더니, 이 예수께서 새롭게 계시하시는 법을 듣기만 하는 자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요. 이것을 행하는 자라야 반석위에 집을 짓는 지혜 있는 자라는 그 비유로 마지막 권면을 합니다.




그 산상수훈을 다섯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만은 그 가운데 부분이 종교행위에 대한 가르침인데 거기에 주기도문이 들어 있습니다. 종교행위에 대한 부분 6장 1절에서 18절까지가 또 세 부분으로 되어있습니다.




세 개의 대표적인 종교행위, 경건행위를 다루고 있는데 거기에는 첫째는 자선,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당시 유대인들과 같이 내놓고 자랑하면서 자선하지 말라고 자선행위에 대해서 가르치고 그 다음에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고, 금식에 대해서 가르치고, 금식도 금식한다 사람들에게 얼굴을 드러내지 말고 금식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습니까? 자선, 기도, 금식. 거기에서 기도를 또 그 가운데 넣어 놓았어요. 기도 부분에서도 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중심부분에 넣어 놓았어요 6장 5절에서 15절까지 기도에 관한 가르침인데 거기에 보면 6장 5절 - 9절 전반부까지는 그릇된 기도들, 첫째, 유대인들의 그릇된 기도, 둘째, 이방인들의 그릇된 기도를 비판하고는 너희들은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라고 하시고, 이제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고 주기도문의 강조점을 다시 한 번 되새김으로 이웃에 대한 죄 용서를 요구하는 강조를 하시고 마쳐요.




자! 마태가 이렇게 아주 정교하게 마태복음 사실 굉장히 문학적으로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는 복음서라는 것을 아시죠. 5개의 강론과 5개의 설교와 5개의 이야기들로 되어 있는 강론 이야기, 강론 이야기, 강론 이야기, 강론 이야기, 강론 이야기, 5개의 이야기와 5개의 설교들로 정교하게 교직되어 있는 마태복음이죠. 마태가 그렇게 정교하게 전체를 교직할 뿐만 아니라 산상수훈도 굉장히 정교하게 구성을 했는데, 혹 한 가운데 주기도문을 넣어놓았어요. 이것은 뭘 우리에게 말하려고 한 것입니까? 마태는 기도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가장 근본 도리이다. 이 기도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힘을 얻는다 이런 것을 말하고자 함이죠. 우리 제자도의 가장 중심에 기도가 있다. 이런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 됨의 가장 핵심에 바로 기도가 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어떤 기도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하나님 백성 됨의 가장 근본에, 중심에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있다. 이렇게 기도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되는 것이고, 예수의 제자들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은 6장 주기도문의 바로 위, 아래를 조금 다시 분석해 봅시다. 마태는 거기도 아주 정교하게 구성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6장 9절에서 13절까지가 주기도문(Lord's Prayer)이라면 이 기도를 마태는 6장 8절과 6장 14,15절로 틀을 짜고 그 틀 속 가운데 넣어 놓았어요. 누군가 마태복음 6장 8절 한번 읽어보십시오.1) 네, 거기에서의 핵심이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하나님 너희 아빠께서, 너희들의 필요한 것들을 다 이미 알고 계시다. 그 다음에 6잘 14-15절은 누가 한번 읽어 보십쇼 2).




그러면 그렇게 우리 모두에게 우리 실존에 가장 중요한 양식 청원과 죄 용서의 청원은 우리에게 부수적으로 우리에게 함께 주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이런 것을 마태는 그의 문학적 구조상 우리에게 미리 암시를 해 주고 있어요. 그래서 주기도문을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해석을 함으로써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정확한 이해와 그 강조점에 대한 정확한 음미를 하라. 그렇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죠. 우리가 주기도문에 대한 서문을 하고 있어요,




세 번째, 지금 마태판과 누가판이 있는데, 그것이 많이 다르단 말이예요. 그러면은 어느 판이 더 예수의 원래 가르침에 더 가까운가? 혹 예수의 원래 가르침을 재구성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우리가 생각해 봐야합니다. 예수의 원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문자까지 재구성하려는 노력은 이런 자리에서는 할 수 없고요. 중요한 것은 마태와 누가판을 비교함으로써 어떤 것이 추후에 덧붙여졌는가? 어떤 것이 원래부터 있었는가? 이런 것은 우리가 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것을 먼저 해 보겠습니다.




자! 마태판과 누가판을 비교할 때에 제일 먼저 원래 사본에는 없으나 우리 교회의 예배 의식에서 항상 덧붙여 나오는 것이 마지막 송영이죠. 송영(doxoiogy). 이것은 원래 누가판에는 일단 없는 것이고, 마태판에도 오래된 중요한 사본들은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나중에 덧붙여진 부분임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기도문이 원래는 송영이 없었던 것인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유대의 모든 기도는 항상 송영을 답니다. 송영을 "마지막 도장"이라 이렇게 불렀어요. 그래서 유대의 모든 기도는 항상 송영으로 끝남으로 예수께서도 그의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분명히 송영을 다셨을 것이다. 또는 예수에게서 이 기도를 받은 원래 제자들도 이 기도를 할 때 항상 송영을 덧붙여 했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짐작할 수 있어요. 송영이 어떻게 덧붙여졌겠는가? 어떤 내용이었겠나? 그런데 나중 교회 전통에는 지금 우리 정형화된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란 그런 송영이 덧붙여지게 되었나? 그것을 생각해야 되겠죠.




이런 것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교부 중에 터툴리안이라는 사람 아시죠? 터툴리안은 "그의 기도"라는 논문에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그러니까 "우리를 악으로부터 악한 자로부터 구출하소서" 다음에 각 개인이 거기까지는 공적인 기도, 함께 하는 거구요. 그 다음에 각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기도를 덧붙여진 것이다라고 가르쳐요. 아마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한 뒤에 고대교회 터툴리안이 속한 서방교회에서는 자기들의 특별한 청원들을 올리고 그리고 송영들을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동방교회에서는 회중은 "악한 자에게서 우리를 구출하소서"라고 거기까지만 기도하면, 사제가 송영을 함으로 예배의 그 부분을 기도 부분을 마쳤어요.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 동방교회의 예배의식(liturgy)에서는 회중은 "악한 자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소서"까지만 하면, 이제 예배를 인도하는 사제가 "왜냐하면 나라와 영광과 권능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송영을 덧붙여요. 그래서 이 송영이 동방교회에서는 사제가 하는 것이었는데, 원래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그랬느냐?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하여간 송영이 없이 이 기도가 드려진 것 같지는 않다.




지금 디모데 후서 4장 18절을 누가 한번 읽어주세요. 예, 거기 18절에 "주께서 모든 악으로부터 나를 구출하시고 그의 하늘의 나라를 위해서 나를 구원하셨다". 이것은 지금 주기도문의 요약 아닙니까? 그런데 주기도문의 요약이 무엇과 함께 나와요? 거기에서도 송영과 함께 나오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송영과 함께 나오죠. 그래서 송영이 없이는 처음부터 항상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송영과 함께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왜 송영이 첫 사본에는 없느냐? 아마 이 부분은 사제가 그때그때 적절하게 만들어서, 지어서 했든지 아니면, 기도를 올리는 회중이 그때그때 적절하게 만들어서 했든지, 그래서 자유롭게 지어서 만들 수 있는 것이어서 원래 주기도문 본문에는 포함되지 않았지 않겠나 그렇게 볼 수 있어요. 그러다가 점점 송영이 예배 의식에서 정형화되어 가지고 오늘 마태복음 일부 늦은 사본에 나오는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 하나님께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칭송하는 송영으로 정형화 된 것 같다.




그런데 가만히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칭송하는 것을 보면 혹 이것이 다니엘서 7장 14절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다니엘서 7장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자 같은 이에게 그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위임하죠. 그래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말할 때 이렇게 삼중으로 말하는 것이 다니엘서 7장에서 나오는데,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 가지고 나중에 주기도문에 덧붙여진 송영이 이렇게 삼중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그렇게 우리가 말할 수 있겠어요. 또 이 송영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칭송하는 송영은 이 주기도문의 제일 첫 청원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와 소위 Inclusio를 이루어요. 제일 처음에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기도하죠? 그리고 기도 끝에 하나님의 초월자 되심, 거룩하심, 하나님의 우주의 주되심, 그의 영광스러움을 천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김을 서약한다고 하죠. 그래서 첫 청원과 송영이 짝을 이룬다. 이것을 우리는 Inclusio라고 한다. 그런 구조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자! 그 다음에 우리가 토론해야 할 것이 마태가 덧붙인 것인가? 아니면 누가가 생략한 것인가?




그런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겠죠? 거기 보면 누가판에는 어떻게 되어 있어요? "아빠"이렇게 만 되어 있어요. 하나님에 대한 부름이 "아빠", "아버지" 그런데 마태는 "하늘에 계시는" 이라는 절을 달아 놓았죠.




그 다음에 셋째 청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에서도" 이 마태의 셋째 청원은 누가에는 나타나지 않아요.




그 다음에 마지막 마태의 6번째 청원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우리를 악한 자로부터 구출(구원)하여 주소서" 여섯 번째 청원의 두 번째 부분- "악한 자로부터 구출하여 주소서" 그 부분이 또 누가복음에는 없어요. 그래서 이 세 부분에 있어서 누가가 원래 있었던 것을 생략한 것인지, 원래 없었던 것을 마태가 덧붙인 것인지 우리가 따져 봐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주석가들이 동의하기는 마태가 덧붙인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누가가 예수의 원래 기도를 전달하고 마태가 확대한 것으로 봅니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판은 그 송영이 이미 잘 보여주듯이, 그리고 하늘에 계시는 이런 문구가 잘 보여 주듯이 주기도문이 교회 예배의식(Liturgy)에 있어서 오래 사용되면서 굉장히 풍부하게 발달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누가에 없는 것들이 마태에 있는 부분은 마태가 확대한 것으로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그러면 마태가 왜 이런 부분을 더 확대했느냐? 이 주기도문의 뜻을 분명하고 더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마태가 그렇게 확대한 것이죠. 그리고는 각 질문마다 표현이 다르기도 한데 그런 것들은 하나하나 청원에 대해서 공부할 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또 하나의 질문은 지금 그러면 이 주기도문에 몇 개의 청원들이 있는가? 원래 짧은 시간에 주기도문을 강의하려고 생각해 가지고 그냥 주기도문의 풍부한 판인 마태복음 판을 여섯 개의 청원들을 하나씩 하나씩 묵상해 가는 그런 구도로 하려고 했는데 조금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오늘은 근본문제를 다루고 넘어 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다루어야 주기도문의 어디에다 강조점을 두어서 해석을 해야 되는가 알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지금 우선 마태와 누가를 비교해 보면 누가는 몇 개입니까? 누가는 5개입니다. 마태는 6개입니다. 누가판에는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마태가 나중에 교회의 예배 때의 공식기도로 발달된 상태의 주기도문을 반영하는 것 같다는 판정을 이미 우리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내가 관찰해 보기에는 주기도문이 사실은 4개의 청원으로 되어 있다라고 봅니다. 왜 그런가? 첫째로, 마태의 셋째 청원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것은 분명히 바로 앞에 가는 하나님 나라의 청원을 설명하는, 그것을 부연하는 그런 청원입니다. "당신의 나라가 땅위에서도 임하게 하소서" 그래서 "땅위에서도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래서 마태가 덧붙이는 셋째 청원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바로 앞서가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빨리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청원에 대한 부연이라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의 세계관은 세계가 하늘과 땅으로 되어있지 않습니까?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을 하나님께서 그의 대리자로 세웠어요. 아담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창세기 1장 26절, 28절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땅위에 자기 대리인으로 세웠다. 아담을 통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을 통치하시는데 그 대리인이 어떻게 된 거예요? 대리인이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사단의 통치에 빠지므로 아담이 도리어 사단의 통치의 대리인이 되었어요. 그래서 땅이 지금 하나님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킨 상황이 됩니다. 그래서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나 땅위에서는 지금 안 일어나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에서 땅위에 내려와요. 그래서 땅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와야 된다구요. 다시 말하면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나 땅위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거역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이 되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빨리 땅위에 임하게 하소서. 그래서 땅위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게 하소서에 대한 부연 설명입니다.




그런데 또 우리가 마태의 셋째 청원을 우리가 부연설명으로 보도록 도와주는 것은 마태복음 7장 21절 보면 됩니다. 누가 읽어보시겠습니까?3)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네, 거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과 무엇이 동일시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함"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과 하나님의 뜻은 거의 동의어로 쓰여요. 그래서 여기 지금 마태복음에서 연달아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와 "당신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는 사실은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단 마태의 셋째 청원은 1)누가에 없고, 2) 마태복음 내에서도 동일시 할 수 있는 것이고, 3)유대 세계관에서도 같은 동의어이기 때문에 이것은 원래 있었던 청원이 아니고 마태가 "하나님 나라가 땅에 임하게 하소서"를 더 풍부히 그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부연 설명한 덧붙인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 하나가 줄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그러면 우리가 누가의 다섯 번째 청원이 왔어요.




그 다음에 내가 주장하는 것은 첫 청원이라고 하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소서" 그것이 진정한 청원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의 찬양으로 봐야 된다. 진정한 청원이라고 보기보다는 하나의 기도를 처음 여는 부분에 해당하는 찬양으로 봐야한다는 것이 내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자! 여러분들 그 당신의 이름이 "아빠", 그 다음에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소서" 그 이른 바 마태복음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첫 청원이라고 하는, 그것은 누가복음도 마찬가지죠. 첫 청원이라고 하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하는 말을 여러분 outline에 있는 Kaddish 기도와 비교해 보세요. Kaddish 기도의 첫 line을 보십시오. "그분의 이름이 높여지고 거룩히 여겨지이다" 이렇게 기도를 처음 열 때의 찬양, 그 다음에 18번 축복기도(Tepillah, Shemone Esre)의 - Shemone Esre는 지금 이런 구조로 되어있죠. 이것을 배라코트(영문 모름?)라 하는데 1-3절은 서문의 찬양이고, 4-9절은 나의 일상의 필요에 대한 청원들이고, 그 다음에 10-16절까지는 종말론적인 청원입니다. 그 다음에 17-18절은 결론 부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처음 찬양 부분을 보세요. 처음1-3절까지의 찬양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특히 3절에 보면 "당신은 거룩하시고 당신의 이름은 경외로우시며 당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지금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우리가 보통 첫 청원이라고 하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것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유대문서에 보면 랍비문서라든지 쿰란 문서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하고는 곧 그 이름에 거룩한 또는 그 이름에 복을 선언하는 이렇게 항상 소명과 같이 따라 다닌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하고는 그의 거룩함을 송축한다든지, 그 이름에 복을 송축한다든지 이것이 유대인들의 어법입니다. 예수님도 그 어법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 "아빠" 그의 이름을 따라 하나님의 초월자에 대한 되심을 선언함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만약에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되심을 받으십시오"라는 것이 첫 청원이었다면 아마 여기 Kaddish 기도의 둘째 line에서와 같이 "그분의 이름이 높여지기를 원합니다" "그분의 뜻과 그분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세상에서"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위에서" 이런 말들이 덧붙여졌을 것이다. 마태가 새로 집어 넣는 세 번째 청원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는 말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런 문구가 아마 들어갔어야 맞을 것이에요. 만약에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말이 원래 청원이었다면 찬양이 아니고 그냥 청원이었다면 그 말 뒤에도 "당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말과 같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런 문구가 들어갔을 거예요. 그런데 "하늘에서와 같이 땅위에서도" 이 말은 그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말을 수식하지 않죠. 왜냐하면 그 중간에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는 말이 때문에 이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위에서도" 어디까지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그 말만 수식하는데 이런 저런 것을 볼 때에 그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는 청원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이름에 대한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마태복음 6장 32절 전반부를 보세요. 누가 읽어주시겠습니까? 이방인 구하는 것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6장 32절 후반부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네, 하늘에 계신 아빠께서 아신다. 이것은 무엇과 Inclusio를 이루어요. 6장 7절과 Inclusio를 이룹니다. 6장 7절에 이방인들은 이렇게 이렇게 기도하는데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 이방인들의 기도는 어떻게 기도한다구요? 이방인들은 중언부언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기도. 6장 32절은 후반부는 하늘에 계신 아빠께서 다 아신다는 어디와 Inclusio를 이루어요. 6장 8절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 천부께서 너희 기도를 미리 아신다"와 Inclusio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6장 7절과 8절이 6장 9절에서 13절까지의 주기도문에 대한 서문 아닙니까? 이것이 서문이죠. 마찬가지로 6장 32절 첫 부분과 32절 둘째 부분이 6장 33절에 대한 서문입니다. 그러면 6장 33절에 뭐라고 해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런 것들이 다 채워진다". 자 잘 보세요. 6장 32절 전반부는 6장 7절과 Inclusio를 이룹니다. 6장 8절은 6장 32절 후반부와 Inclusio를 이룹니다. 6장 7-8절 이방인들의 구하는 것들 먹고 마시는 것 그러나 "너희들은 그런 것들을 염려하지 말라" 왜? 너희 하나님 아버지께서 미리 다 아신다. 그것이 주기도문에 대한 서문이었다구요. 그런데 그것과 완전히 내용과 같이 하는 6장 32절 전반부와 후반부는 6장 33절에 예수에 대한 권면에 대한 서문 노릇을 하고 있어요. 6장 33절 내용이 무엇이예요. 하나님 나라와 이런 것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함. 이런 것들은 지금 본문의 맥락에서 무엇입니까? 양식과 입는 것들. 그래서 이것과 이것이 병행인데, 이 6장 7-8절은 6장 9-13절에 대한 서문이고 6장 32절 a.b는 6장 33절의 서문이니까 자연히 우리가 어떻게 봐야 됩니까? 다시 말하면, 6장 33절은 주기도문의 요약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요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와 의에요. 주기도문의 핵심이 뭐예요. 하나님 나라의 청원이다. 이런 것들은 무엇입니까? 양식청원, 죄용서 청원은 이런 것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양식청원과 죄 용서 청원과 이 시험에 관한 청원이라고 할 수 있겠고 또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에 유의를 한다면 이런 것들은 엄격히 양식 청원만을 말하는 것이고 맥락에서 이런 것들은 무엇에 해당해요. 의식 먹고 입는 것, 죄용서와 시험 청원은 하나님의 의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주기도문의 내용을 하나님 나라와 의라고만 요약하고 이런 것들을 양식 청원으로만 요약한 것을 볼 때에 지금 주기도문의 몇 가지 청원만? 네 가지 청원만 포함됩니다. 앞에 제일 처음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 옵소서"는 여기에 포함이 안 되고 있음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분석해 볼 때에 이 주기도문에 있어서 중심 내용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청원이고 그 뒤에 나오는 세 개의 청원들. 양식, 죄용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말게 해달라는 청원들은 부수적인 청원이고 그렇게 해서 네 개의 청원이 원래 예수께서 의도하신 청원들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은 제일 처음에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는 유대의 관행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명되는 상황에서 그 이름이 찬양형식인 것으로 봐야 한다.




또 이런 결론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관찰은 마태판과 누가판을 자세히 보세요. 마태복음 6장 10절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 11절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12절에 kai;(and) 그리고 "우리의 빚을 사하여 주소서" 12절 거기는 청원이 아니고 서약이죠.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주겠습니다"하는 서약이라고요 설명하겠지만 거기에서도 kai;로 쓰이지요. 13절 또 kai;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게 하소서" 이렇게 "kai;, kai; 연결 그리고 그리고 연결을 보세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주시고, 그리고 우리 죄 사하여 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그래서 이 세 개의 청원은 서로 연결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줘요. 이것은 누가도 마찬가지이다. 누가복음 11장 3절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kai; a[fe" hJmi'n ta;" aJmartiva" hJmw'n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소서" 그리고 반면에 앞에 이른바 전통적인 해석에서 세 개의 청원을 한번 보시겠어요. 거기에는 이런 kai kai 계속 없어요. 마태복음판에 보시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kai 없죠,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kai 없죠, 이 구조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앞의 세 개의 청원은 하나의 청원이고 하나님 나라의 청원이고 그것이 중심 청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기도문의 중심 청원은 이것이에요. 하나님 나라의 청원입니다. 아까 6장 33절을 요약한 것은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예수께서 6장 33절에 뭐라고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요약합니까? 먼저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니까 주기도문의 중심 청원이 뭐예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러면 이런 것들이 주어진데요. 이런 것들은 일용할 양식, 우리의 죄용서, 악으로부터 구출. 그럼 이런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세요. 자 그렇게 말해서 두 가지를 결론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주기도문이 네 개의 청원으로 되어있다. 첫째로, 하나님 나라의 오심에 대한 청원. 둘째로, 일용할 양식에 대한 청원. 셋째로, 죄용서에 대한 청원. 넷째로 지금도 완전히 박멸되지 않는 사단의 보호로부터의 청원. 이 네 개의 청원으로 되어 있는데, 그 네 개의 청원이 다 동등한 것이 아닙니다. 그 네 개의 청원이 두 개의 구조로 되어 있다. 중심, 가장 중요한 것이 뭐예요? 하나님 나라의 오심에 대한 청원 그리고 다음 세 개는 서로 같은 것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오심과 함께 오는 우리에 대한 축복 청원들이다. 이렇게 결론을 맺을 수 있겠어요. 조금 설득력이 있습니까? 그럼 조금 쉬고 하겠습니다.

 

 

 

 

주기도문 강해




김세윤 교수



여러분 첫 시간에 우리가 한 것을 간단히 요약하면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해서 새롭게 창조하고 구성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공동체의 Identity를 결정하는 주된 기도문이다. 그래서 이 마태는 이 기도를 산상 수훈에 한 중심에, 한 복판에 넣음으로써 이 기도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 제자도의 삶에 원천적인 힘을 제공하는 기도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이 기도의 청원은 4개의 청원들로 되어 있다. 나중에 마태가 이것의 그 뜻을 더 풍부히 하고, 교회의 예배 의식으로 더 균형 있게 잘 쓰기 위해서 확대를 했지만 원래는 4개의 청원들로 되어 있다. 4개의 청원들은 첫째로, 하나님 나라의 옴을 청원하는 것, 이것이 주기도문의 가장 중심이 되는 청원이고, 하나님 나라의 옴과 함께 우리가 얻게 되는 축복. 이것이 양식에 대한 것과 죄용서에 대한 것, 그리고 주의 재림 때에 완성되는 우리가 아직도 노출되는 사단의 시험으로부터의 보호 말씀을 의미하는 청원들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중심 부분은 예수의 중심 메세지인 하나님 나라의 옴에 관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주기도문을 강의할 때는 이 하나님 나라의 옴 또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 전체를 음미하면서 주기도문을 강의해야 할 것이며, 주기도문을 드릴 때에 강조점이 하나님 통치가 임하게 하는 것임에 강조를 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유대교와 비교를 해 보면서 주기도문의 특성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유대기도와 비교를 해보심으로 생각해 봅시다. 거기 대표적인 유대 기도 두 개를 번역해서 적어놨는데요. 카드쉬 기도와 열여덟 번 축복기도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카드쉬 기도는 회당에서 설교 끝에 회중이 함께 드렸던 기도이고, 18번 축복기도는 하루에 3번- 아침, 오후의 시작, 석양에 즉 저녁의 시작에 유대인들이 꼭 드려야 했던 의무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한번 그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 이 기도들을 비교하면 어떤 공통점들이 발견됩니까? 여러분들. 카드쉬 기도는 특히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전반부와 내용이 상당히 비슷합니다. "당신의 위대한 이름이 높여지고 거룩히 여겨지이다", "그분이 그분의 뜻에 따라 지으신 나라 안에서. 그분이 자신의 나라/ 자신의 다스리심이 다스리게 하시길 너희들의 생애에 그리고 너희들의 날들에 그리고 이스라엘 집안 전체의 생애에, 신속히 그리고 조만간. 그분의 위대한 이름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되소서 이에 대해 말하라. 아멘" 이렇게 카드쉬 기도는 주제로 보면 마태판 주기도문의 전반부와 상당히 비슷함을 알수 있다. 그러면 무슨 차이점들이 금방 눈에 뜁니까? 카드쉬 기도는 3인칭 명령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기도는 당신, "아빠" 당신에게 아뢰는 즉 친근감의 도가 상당히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의 기도는 친근감의 도가 상당히 떨어지는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그분의 나라가, 그분의 뜻이 3인칭으로 되어 있다. 그런 반면에 예수의 기도는 2인칭으로 하나님께 직접 아주 친근한 표현이다.




둘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카드쉬 기도는 이 3인칭과 함께 그 명사들. 당신의 이름이 높아지고 그분의 나라가 다스려지고 그분의 이름이 찬양되게 하소서하는 표현한 것에 비하면, 예수의 기도는 굉장히 단순하게 되어 있다. 18번 축복기도는 두 판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팔레스탄인 판과 바빌론 판이 있다. 바빌론 판이 더 길고 더 복잡하다. 팔레스타인 판이 더 오래된 판이어서 이판을 여러분들에게 표현했습니다만은 그것에 비하면 예수의 기도는 얼마나 단순합니까? 심지어 예수의 기도와 카드쉬 기도와 비교해도 예수의 기도는 아주 간략하고 단순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차이가 뭡니까? 특히 18번 축복기도는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대로 1-3절까지는 찬양의 서문이고, 17-18절은 결론부분이고 나머지가 중심 되는 청원부분인데 그 부분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 졌다. 4절에서 9절까지와 10에서 16절까지입니다.




4-9절은 일상적인 필요한 것들. 우리에게 지식을 주시옵소서, 우리를 회개시켜 주시옵소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고난으로부터 구원해 주시옵소서. 슬픔을 종식시켜 주시옵소서. 금년에 농사가 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등 일상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을 구하고 있고, 그 다음에 10-16절까지는 종말론적인 청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의 해방 종말에 해방을 가져다 주시고 흩어져 사는 유대 디아스포라를 모아주셔서 옛 이스라엘의 영광된 역사를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등등 종말론적인 소망을 말한다.




이것과 예수님의 주기도문과 비교해 보세요. 주기도문의 순서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옴을 먼저 구하라 한다. 주기도문을 요약해서 말한 마태복음 6장 33절에 뭐라고 했어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런 것은 다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유대교의 대표적인 일상의 기도인 18번 기도와 순서가 바뀌어졌다. 필요한 것들을 먼저 구하고 종말론적인 소망이 뒤에 나오는데 그런데 주기도문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이 먼저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기도는 바뀌었어요. 하나님 나라의 축복으로써 함께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단순하고, 하나님에 대해 아주 친밀하고, 종말론적인 오리엔테이션이 아주 강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전체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기도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서문을 말할 때 마태복음 6장 7-8절에 유대인들이 외식하는 기도와도 대조를 이루었지만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와도 대조를 이루었다. 그런데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18번 축복기도를 보면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중언부언하는 기도였다. 예수님의 기도는 만약에 4개의 청원들로 되어있다면 얼마나 더 단순한 기도였습니까? 그보다 더 언어를 절약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옵소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그것보다 더 요약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되나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기도를 어떻게 합니까? 중언부언합니다. 교회마다 대표 기도는 "3분만하라"고 강대상 옆에 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설교하러 교회에 가면 강대상에다가 "기도는 3분만 할 것"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하도 중언부언하며 10분 이상 씩 하니까? 철야 기도할 때 가만히 보면 중언부언하려고 철야기도를 하는 가 봐요. 통성기도 할 때 보면 얼마나 중언부언하는지...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라 하십니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말을 돌려 복잡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명료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에 강조점을 두라고 하십니까? 그의 나라에 강조점을 두라고 하십니다. 그의 나라와 의에 강조점을 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유대인들과 같이 우리의 먹을 것과 입을 것, 우리의 농사도 모두 잘 되게 하고, 마지막에 가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도 확장되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는데, 예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런 것을 다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주기도문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명료하고 간략하고 하나님께 직접적이고 하나님께 친근한 이런 기도는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유대기도와 비교해 봄으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위대함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4개의 청원들을 가만히 보면 우리 삶(실존)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하나하나 묵상을 하겠습니다.




첫째로, "아빠" 주기도문의 제일 처음 "아빠" 이것을 마태는 풍부히 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빠"로 확대했습니다. 원래에 예수께서 "아빠" 이렇게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름은 예수의 독특한 어법임을 신학교 다니실 때 다 들었을 것입니다. 이 "아빠"라는 말은 우리말 "아빠"와 똑같은 말입니다. 원래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아이 언어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하는 것은 언약 신학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으셔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언약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가 나의 백성이다" 이것이 구약의 이른바 언약의 형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자기 백성 삼아주셔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주겠노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언약의 관계를 표현하시기 위해서 구약은 여러 가지 그림들을 쓰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왕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이다. 즉 왕과 백성의 그림의 짝,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아들'이라. 대표적으로 출4:23절 '이스라엘이 나의 맏아들이다'. 구약의 곳곳에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하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다. 구약의 곳곳에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이스라엘을 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목자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양떼라'. 또는 '하나님이 농부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가꾸시는 포도원이라'. 또는 '하나님이 군대의 사령관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징집된 군대라'. '하나님이 신랑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신부라' 등 여러 그림의 짝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 언약의 관계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과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으로서 그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지해서 사는 관계를 나타내는 짝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아버지와 아들의 그림의 짝이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언약의 관계로 나타내는 중요한 사상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어린아이의 언어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부분이 거의 없다. 원래 이 현상을 관찰한 분은 영국의 토마스 월토 맨트 교수였습니다. 1930년대 중요성을 그러나 그것을 독일의 신학학자 요한 예레미아스가 훨씬 더 확대 연구해 가지고 예레미야스는 주장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전후한 유대문서 어느 곳에서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적이 없다. 사실 유대신학의 틀 속에서는 거룩한 하나님, 초월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졌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친근하게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아주 혁명적으로 하나님을 이렇게 "아빠"라고 불렀다.




이것이야말로 예수의 독특한 어법으로 첫째로, 예수에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 됨을 나타내는 것이고, 자신이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라는 자기 이해를 나타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마찬가지로 "아빠"라고 부르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마디를 하늘과 땅을 지으신,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한 마디로 "아빠"라고 부르도록 한 이것이 바로 예수의 자기의 사역에 대한 이해임을 볼 수 있다. 자기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로 새롭게 창조하고 모으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주의 부요함을 덧입게 하는 분, 예수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독특한 사역을 자기 이해를 이 한마디로 닫는다". 이렇게 자기가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기도하게 하는 것의 의미를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그것이 너무 강조되다 보니까 추후에 이에 반발하여 예수의 하나님 "아빠"사용이 그렇게 독특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제임스 바(James Bar)같은 사람을 들 수 있다. 이 사람은 상당히 예리한 구약학자였습니다. 이 사람은 굉장히 예리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남의 풍선에 바람을 빼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학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론으로 성립된 이론을 그렇지 않다고 바람을 빼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자였다. 또는 온건한 구약학자 한스 리버 같은 사람은 유대문서를 보면, 랍비문서를 보면 5-6곳에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데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예레미야스도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른 데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의 언어로 친근하게 부른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 잘 보면 결국 5-6곳에 이렇게 친근하게 부른 흔적이 유대문서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런 표현이 절대적으로 독특하다고 볼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므로 예레미야스가 크게 바람을 불어넣은 풍선에 약간 바늘을 가져다 넣었습니다. 그러나 풍선의 바람이 다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 15-16절,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보면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영이 우리 안에 내주해서 우리 안에서부터 하나님께 "아빠"라고 부르짖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 셈족 언어인 아빠를 먼저 쓰고 이 아빠가 무슨 뜻이다라는 설명을 위해서 호칭으로 번역해 주기 위해서 아빠는 곧 아버지라는 말이다라고 써주고 있습니다. oJ pathvr. 우리 번역에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아버지'는 번역어이다. 바울이 구태여 "아빠"라는 셈족 언어를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헬라어로 쓰여진 편지에 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으로 제자들이 따라하는 기도였기 때문에 실제로 헬라어를 쓰는 사람들도 이 예수의 독특한 기도 칭호는 따라 했기 때문에 그 관행을 바울 여기에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만약에 바울이 누구입니까? 유대신학자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유대교에서 보편적이고 독특한 것이 아니었다면 구태여 로마서8장과 갈라디아서 4장에서 셈족 언어로 음역해서 "아빠"라고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독특한 예수의 언어로 인정했기 때문에 그것을 심지어 헬라어를 쓰는 그리스도인들도 따라했기 때문에 쓰는 것이고 그것을 혹시 못 알아들을 것을 염려해서 괄호 속에 "아버지"라고 번역해 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