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강해연구 - 주기도문 강해/공부 1 주기도문의 서론 마태복음 6:9a -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서론에서는 주기도의 구성과 내용, 그 사용의 주의와, 그리고“이렇게 기도하라”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주기도의 구성과 내용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역사(役事)처럼 무궁무진합니다. 외견상으로는 어린아이와 야만인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만 그 이면에 갚은 의미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말씀을 정신을 집중하여 살펴보면, 그리고 그 모든 의미를 알아보려고 노력하면. 우리가 푸른 창공을 바라볼 때 마치 하늘이 열리듯이, 우리가 물 속의 투명한 암흑을 굽어 꿰뚫어 볼 때 마치 바다가 열리듯이, 그 말씀의 의미가 열리게 됩니다. 지극히 부족한 자들과 지극히 연약한 자들이라도 그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강력한 도움에 관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지극히 마음이 깊은 이들이 경외와 사랑의 마음으로 그 말씀을 명상해 보면, (그리고 온갖 시대의 경험에 의하면) 그 말씀에는 언제나 새롭게 다가오는 깊은 진리가 있으며 아직도 배우지 못한 많은 내용이 숨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마시고 마셔도 다함이 없는 샘물 같고, 배불리 먹고도 남는 기적의 떡과 같습니다. 그들이 모두 먹고 배불렀으니 남자와 아이들이라 그들이 남은 조각을 거두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하였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주기도문에서 그러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면 그들은 이 간단한 주기도문을 작은 두 손을 합장하고 혀짤배기 발음으로 잘도 암송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내용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그리고 이를 우리 기 도의 견본으로 삼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그 충만하고 풍성한 의미가 더욱 놀랍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기도는“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옵소서”라는 제자들의 간청에 따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눅I1:12).
이 주기도의 내용 구성에 대해 먼저 살펴봅시다.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에 의하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의 대상을 부름,“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입니다. 둘째는 기도의 내용으로서, 그 전반부는 하나님에 관한 간구,“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며, 그 후반부는 인간에 관한 간구,“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셋째는 송영,“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입니다.
주후 3세기의 라틴 교부 터틀리안은 주기도문을 가리켜 '전 복음의 요약'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인격과 삶과 모든 사역을 대변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고, 인간의 사죄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시고, 마귀와 대결하여 투쟁하는 일생이었습니다. 주기도문에는 이러한 것을 위한 간구가 있습니다. 주님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고, 주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간단한 설명을 먼저 들어봅시다. - 우리가“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이 기도를 시작할 때 아버지와 우리와의 친밀한 관계를 새롭게 파악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능력이 나타나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소개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지금 여기서 그 나라가 우리 마음속에,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확립되기를 기도할 때, 세상적 기준을 역전시키므로 말미암아 사회를 변화시키며, 그 사회를 사랑의 법에 순응시키므로 말미암아 그 나라의 확장과 완성을 좀더 앞당기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기쁘게 수용하신 것처럼“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들을 어떻게 주실 것인지를 아시고, 그들이 구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아시는 아버지에게로부터 공급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우리 아버지는 몸을 위 한 양식과 영혼을 위한 양식으로 우리를 유지시키십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의 한 형제 자매로서 교제(交際)의 아름다운 비결을 배워 서로 친교하며 물질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우리의 떡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고 요 구하십니다(행2:44-47, 고전11:20, 29).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모두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고 우리에게 있는 것을 서로 나눕시다. 우리는 용서를 통해 몸과 마음과 영의 치유를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육적이든, 영적이든 우리의 질병의 어떤 것이 고백하지 않은 죄로 인해 발병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도전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채무자처럼 아무 런 댓가없이 완전히 용서함을 받은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자들에게 용서의 영을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어떠한 생활 형편에 처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실 수 있고, 또한 구하실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확언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여“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참조: M. Magdalen의 Jesus, Man of prayer - [예수의 기도] 이석철 역, 요단출판사 간, 1990).
이 주기도문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와 세상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을 밝혀 주는 지극히 고상한 계시,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계와 우리 상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진술, 인류의 미래에 대한 지극히 장엄한 비전, 일상 생활의 지극히 사소한 요망사항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 등등의 모든 것이 여기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서 우리의 영적, 또는 육적 행복을 위한 어떤 것도 빠져있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나의 [신학]으로서,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온갖 무가치하고 잘못된 사상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립니다. -주기도문은 [신앙에 관한 강해]로서 그 정신을 마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고집과 죄를 버리게 합니다. -주기도문은 [사회 윤리의 근본 초석]으로서. 참된 인간애의 유일한 토대로 군림합니다. 이 기도의 분위기 속에서 사는 사람은 모든 인류에 대한 자비와 도움의 손을 뻗치는 삶을 영위합니다. -주기도문은 [개인 생활의 지침]으로서, 온갖 인간 욕구의 상대적 가치 및 가치 순서를. 그리고 이와 아울러 우리가 추구할 일과 삶의 목표의 순서 및 종속 관계를 권위 있게 밝혀줍니다. -주기도문은 하나의 [기도]로서 온갖 영역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7가지 간구 속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며, 그 모든 내용을 하나님의 신적 이름에 기초를 두고 있고, 또한 그 모든 내용을 감사의 합창으로 종결시키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나의 [예언]으로서 이 세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나라, 투쟁하고 범죄하고 근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갖 악에서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나라로 변화될 것이라는 지극히 숭고한 환상을 펼치고 있습니다.
2. 주기도의 사용과 주의
주기도는 삶의 필수적인 영역을 다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도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분별하게 보편적으로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기도는 처음에 특정한 집단으로 뚜렷이 구별되는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순절 후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었으며 사도들 은“그 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교회의 규모가 커지고 전통이 세워지고 박해의 위협이 더해짐에 따라 입교자의 세례(침례)를 받는 밤에 주기도를 가르치는 것이 관습이 되었습니다. 주기도는 이교도까지 포함하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함부로 외어대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실제로 주기도를 알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어린 시절부터 주일 학교에서 배웁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참된 의미를 알고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느 원로 목사님은 목회만필에서‘19세에 예수님을 믿고, 주일학교 교사, 집사, 권사, 장로로 목사가 되어 90세가 되는 오늘까지 주기도문을 수없이 외워왔으나 금년에 와서 주기도의 깊은 뜻을 확실히 깨달았다. 철들자 망령이라더니 참으로 만감이 라고 하시면서 나의 깨달은 것을 여기에 적는다’고 하였습니다. 마틴 루터의 저작집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나는 오늘까지 어린아이와 갈이 주기도에서 젖을 먹고 있다. 노인이 되어서도 그 기도에서 먹고 마시지만 아직도 더 먹고 마시려고 갈망하고 있다. 이 기도는 최고의 기도이며, 내가 매우 좋아하는 시편보다도 더 좋아한다. 이 기도는 확실히 한 참된 스승만이 만들고 가르치셨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스승의 기도가 세상의 전 지역에서 그렇게도 무례하게, 경솔히 재갈거리는 것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한해동안 주기도를 수천번 이나 기도하고, 그들이 천년동안 그렇게 기도하기를 계속한다 할지라도 주기도의 일점일획의 진정한 맛도 맛보지 못하는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모든 사람이 그 기도를 남용한다. 그 기도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서 위안과 복을 얻는 사람은 극히 적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을 생각할 때 보통 일어나는 의문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지만 언급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기도의 한 형식을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아니면 오로지 한 실례를 들고자 하셨습니까? 어떤 교회(영국 국교회) 는 한 형식이라고 말하고 어떤 교회(비국교도들)은 한 실례라고 말합니다. 이 기도문이 한 형식이든 아니든, 주님의 주요 목적이 단어들 을 규정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은 단순히 그 내용을 반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이 기도를 하나의 형식으로 주셨다기 보다는 한 실례 또는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이 가지는 그 중요한 의미는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구두로 짜 맞추어야 할 형식(틀)을 주셨는지, 흑은 우리가 기도할 때 그에 준해 간구를 올려야 할 어떤 개요를 주셨는지 하는 문제보다 깊은 것입니다.
또 단어 하나하나 자체를 기도시에 사용해야 하는지의 문제는 각자와 각 교회가 알아서 결정할 일입니다. 이것은 일정한 기도의 형식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고상하고 참된 기도 방법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죄우될 것입니다. 어쨌든 그러한 형식을 사용한다 하여 그것이 최고도의 영성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기도의 틀을 사용하는 것, 특히 오로지 그 형식으로만 기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그러한 틀 속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쓸데없이 중언부언하는 이교도적 기도 형식의 교정책으로 주어진 이 주기도문 자체가, 모든 기독교 국가에서 바로 이러한 이교도적 과오의 가장 서글픈 한 실례가 되고 말았다는 점은 심각하고도 아이러니칼한 문제입니다. 손가락으로 염주 알을 굴리며, 주기도문을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것이 그러한 잘못입니다. 주기도문과 아베마리아를 외우는 횟수가 공로에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가련한 천주교인들과 주기도문을 수백, 수천번 암송하는 기도를 하면 놀라운 영적 경험을 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듣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유사한 미신 적 습관이 없습니까? 이런 어리석고 위험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3.“이렇게 기도하라”의 진정한 의미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접속사 운(헬3767)은‘그러므로, 그러면, 따라서’를 뜻하며, 여기서 어느 의미로도 가능하지만‘그러므로’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것과 이 주기도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에 해당하는 부사 후토스(헬3779)는‘이렇게, 이러한 방식으로’를 뜻하며, 일반적으로 상관관계가 있는 구문에서 앞에 있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고 뒤따르는 것을 가르키기도 합니다. 본절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앞에 말씀하신 것과 동시에 그가 지금 가르치고자 하는 주기도에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라는 말에 포함된 가장 중요한 사상은 기도에서의 삶의 정신과 주님께서 이 기도를 가르치시기 직전에 말씀하신 신자의 삶과 그 정신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주기도에서 보여준 삶의 정신으로 기도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세속심에서 자기의 욕망과 세속적 소원을 토로하는 것은 우상 앞에서 할 일입니다. 자기의 욕심에 끌려서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만족을, 고상한 삶보다는 저급한 삶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리고 기도의 자세. 순서, 방법, 언어 등을 배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라”에 해당하는 동사 프로스케스데(헬4336)는‘기도하다, 간청하다’를 뜻하는 프로스코마이의 명령 중간태 수동태 디포넌트 동사이며, 자신이나 타자와 관련하여 행해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주님께서“기도하라”명령하신 것은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하시는 것이며. 또한 기도 응답의 약속입니다. 전능자 우리 주님의 명령이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이렇게”기도하기만 하면 확실히 기도는 응답되고 은혜와 복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정신을 흡수한 자들, 자신의 만족에 앞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 하나님의 손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도 자신의 영적 굶주림을 채울 양식을 위해 탄원할 줄 아는 자들은, 이러한 주기도문의 용어들을 사용하든 하지 않든 확실히 “이렇게”기도하게 됩니다. 이 기도문은 세상을 수위에 두고자 하는 우리의 어리석은 욕망을 타파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기도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에 맞추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도록 굽히는데 있습니다. 분명코 자아 부정 과 순종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일진대, 그 점은 종교의 지성소라 할 수 있는 기도에서 가장 잘 표현되어야할 것입니다. 이렇게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 이것저것 해달라고 일방적으로 간청하거나 명령하는 정욕적인 기도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첫째로 두고 나는 둘째가 되는 기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이 기도는 그리스도의 엄청난 요구입니다. 누가 감히 이 거룩한 말들을 자기 입술 속에 함부로 담을 수 있겠습니까 ?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대로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 리의 삶이 우리의 기도를 뒷받침하고 확증하지 않는 다면. 우리는“이렇게”기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슴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있습니까? 투자되는 우리의 에너지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가장 고상한 목표로 삼고 있습니까 ? 아니면 우리의 심장속의 피가 세상적인 것들을 향한 뜨겁고도 정열적인 욕망을 품어내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영혼 속에 아무런 욕구도 불붙이지 못하고 우리의 삶을 다스리지도 못하는, 어떤 멀리 떨어진 꿈결 속의 대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까? 마치 멀리 떨어진 별들은 지상에 희미한 빛밖에 주지 못하고 조수의 흐름에도 영향을 주지 못하는 반면, 태양에서 빛을 빌리는, 지구에 가까운 달이 오히려 조류를 좌우하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기독교계와 사회에 어떤 선한 영향을 발휘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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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도에는 첫 부분이 중요합니다. 이제 주기도문의 모든 내용의 토대인 이 첫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기도의 토대와 대상입니다.
주기도문은 먼저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우리 아버지 여”라고 부름으로 시작합니다. 이 호칭은 어떤 편지의 서두에 쓰는 수취인 이름과 같은 단순한 호칭적 문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의 실상을 계시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기도드리는 그 하나님을 합당하게 인식하는 것, 우리의 영혼을 그 높이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노력은 모든 기도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비록 지극히 진실하다 하더라도 이점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결핍을 심각하게 인식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바램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실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 이 확고부동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느낌이 마음을 채우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단순한 이름 앞에 우리의 기도를 드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발아래 들어찬 빽빽한 구름 사이를 뚫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경우가 과연 얼마 나 있었습니까? 우리의 주위에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온갖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내면의 눈으로 베일을 꿰뚫고 거룩한 하나님을 주시하는 것은 모든 실질적 기도에 반드시 필요한 예비적 단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분명하고 확고한 주시는 모든 참된 기도의 기초와 시작입니다. 이러한 주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신다는 인식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자애로운 분으로 우리와 친족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 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인류 또는 만물의 아버지라는 사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주와 인류의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 곧 생명의 영을 불어넣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 바울은 에베소서 3:14이하에서 하나님을 이 세상의 창조주 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로,“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 히브리서 기자는 12:9에서 하나님을 인간의 영의 창조주 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라 는 의미로,“영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 바울은 아덴에서“우리가 다 신의 소생”이라고 희랍의 두 시인 아라투스와 클린데스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한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창조주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라는 사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라는 이름은 일차적으로 생명의 원천이라는 개념을 담고 있으며, 부차적으로 사랑으로 돌보신다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헬라인들과 이방인들조차도‘신(神)에 대해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라는 문구를 사용한바 있습니다. 이것은 아이를 낳은 원초적 행위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연적 육체적 자손이라는 신화적 사상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2)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보다 깊은 의미로“아버지”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 모세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묘사했습니다 (신l4:10이하; 32:6). - 호세아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 굽에서 불러내었으며, 그들의 아버지로서 그들을 팔에 안고 걸음을 가르치고. 사랑 의 줄로 이끌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호l1:1이하). - 말라기는“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말 2:10)라고 말했습니다. - 이사야는“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64:8).“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 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은 우리의 구속자시라"(사63:16; 참조, 시89:6)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이 우주 및 인간의 창조주라는 근거에서 하나님과의 부자관계를 나타내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은 자연적 상태나 특성보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구속의 기적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연관되어 창조와 출생의 언어가 사용된 곳에서조차도 그 뜻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이미 존재한 백성에 대한 역사적 선택과 구속의 행동을 나타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어(사63:16; 64:8)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신 것입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관한 진정한 기독교적 개념은 이 모든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인간이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보편적 부자관계와 육적 이스라엘의 선택적 부자관계 외에 새로운 출생이 있어야만 형성될 수 있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아버지 되심과 아들 되심의 관계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관계 성립의 조건을 복음서 기자가 명백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했습니다. 또 사도는“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가 된 자들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우리 아바”라 부를 수 있고 이 기도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아람어에서 아버지를 뜻하는‘압바(abba)'라는 말은 신약성경에는 세 곳에만 나타납니다. -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I4;36). - 바울이 주기도문을 생각하고 말한 두 구절에 나타납니다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 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l4, 15).“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아람어 원문에는‘압바’로 나타납니다(눅l:2).
아람에서 압바(abba)는 원래 그에 동등한 여성 명사 임마(imma)처럼 유아 언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어린애가 젖을 떼게 되면 그 아이는 압바(아빠)와 임마(엄마)라고 말하는 것을 배웁니다. 이러한 의미가 확장하여 아버지의 호칭형인 압바란 단어가 더 이상 아이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성인이 된 아들 딸들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단어의 유아적 성격(아빠)은 사라지고, 압바는‘사랑하는 아버지’라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러한 따뜻하고 친숙한 느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름으로서 완전히 새롭게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압바 라는 어린애답고 친근한 용어를 기도에서 사용한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한 것입니다. 고대 유대주의가 낳은 신앙에 관한 모든 문헌중 어디서도 압바가 하나님을 부르는 방식으로 사용된 경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레미아스(J.Jeremias)는‘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호칭형으로 압바를 사용했는지를 조사한 결과…모든 유대 문서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말로서 압바를 사용한 예는 단 한군데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심 깊은 유대인들은 일상 가정생활에서 사용되는 친숙한 언어로 하나님을 부르기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큰 격차가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전5:1). 하나님은 무한히 자애로운 아버지의 사랑을 가지신 분이시지만“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열국을 다스리시며, 파도를 명령하시며, 창조와 재창조를 하시며, 온 세상의 왕으로서 심판과 자비를 내리시며, 무한히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꺼려한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압바로 부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어린애답고 친근한 용어, 압바를 기도에서 사용하신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독특한 관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향한 예수님의 신뢰와 순종의 태도 뿐아니라(막I4:36) 비할 데 없는 권위를 표현합니다(마11:25).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 그들에게 자기를 따라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르는 권세를 주시고, 그렇게 함으로 그들을 아들인 자기의 지위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기도에서 압바를 사용하는 것을 이어받았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주기도문을 생각하고 있었던 두 구절에 나타나 있습니다(롬8:14,15; 갈 4:6). 바울은 사랑하는 아버지 압바를 부르는 것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아들로 삼으시는 증거와 성령을 받은 증거를 찾아보고 있습니다(롬8:14이하; 갈4:4-7).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압바 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은 또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내가…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후6:l8; 삼하7:14의 자유로운 인용). 0. Hofius.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살 찢으시고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시려고 작정하신 뜻과 그 성취에 대해 사도 바울은“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l:3, 5, 6)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을“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슨 생각입니까 ?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먼저 독생자 예수님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살 찢으시고 피 쏟아주신 우리 주님의 그 구속의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나와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이 우리의 기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됩니까?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생의 관계를 바로 잡아줍니다.
⑴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믿는다면 이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아 줍니다. 인간은 아무도 감히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그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이라도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이런 친숙한 말로 하나님을 부르기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큰 격차가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칭호의 사용을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에 소망과 친밀한 신뢰감을 가지고 그 앞에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서워하는 종들처럼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아버지에게 나아가듯, 그의 사랑 가운데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의 개선에 대한 이야기는 이를 설명해 줄 것입니다. 로마의 한 황제가 싸움에 이기고 군대의 선두에 서서 개선의 행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군중이 승리를 찬양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키큰 병사들은 군중을 정리하기 위해 연도에 한 줄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황제가 자기에게 가까이 오자 군중을 헤치고 연도에 늘어선 병사들의 다리 사이로 피하여 달려가 황제가 탄 호화로운 전차 위로 올라가려고 했습니다. 병사 몇 명이 이 아이를 가로막고 말리며‘전차에 타고 계신 분은 황제시다'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당신에게는 황제이지만 나에게는 아버지야’라고 말했습니다. 개선한 황제의 전차 위에 함께 올라 탈 수 있는 것은 아들인 아이의 권리였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분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자상하신 아버지이십니다.
⑵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믿는다면 이 믿음은 자기 자신과 관계를 바로 잡아 줍니다.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자신을 경멸하고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심한 연약과 철저한 굴욕가운데 처하여 외롭고 무력함을 느끼고 생을 포기할 때도 있습니다.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임을 강하게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업에 실패로 비참한 처지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낸 시련에서 욥과 같은 고난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질병에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냉흑하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우리는 늘 마음속에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아도 사랑과 전능의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는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분은 나를 참으로 붙들어주고 도와주실 것이라고 되새길 수 있을 것이 다. 이 믿음은 어떠한 절망과 무력감에서도 우리를 구해주실 것입니다.
⑶ 셋째로, 이러한 관념은 우리가 자칫 잘못 품기 쉬운 하나님에 대한 제반 개념을 바로 잡아줍니다. 이방인들은 신(神)을 잔인한 복수자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질투의 신(神)과 포악한 신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의 양심과 두려움이 잘못 형성하기 쉬운 신(神)에 관한 무서운 이미지를 품고 있지 나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커다란 간격을 두는 주종(主從)의 관계로만 생각하지 않습니까 ?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이 강력한 한 마디 말씀은 온갖 공포와 좌절과 그릇된 사상을 산산히 흩어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 되심과 같이 우리의 아버지도 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 나아가듯이, 사랑하는 아들이 자애로운 아버지 앞에 나아가듯이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 책망하시고 매로 치시기도 하지만, 무서운 재판관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돌보시고 용서하시는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대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용서하시고 자애로우신 참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는 자식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망하지도 망하지도 않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의 부름과 호소일 뿐만 아니라 서원이기도 합니다. 즉 그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대한 최고 사랑에,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 하나님에 대한 도덕적 순응에 묶는 끈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고상한 기도는 “아바 아버지”라는 부르짖음입니다.
2.“하늘에 계신”이란 말은 하나님 아버지의 초월성, 고귀성, 완전성을 인식시켜 주는 표현입니다.
“하늘”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라노스(헬3772)는 복수 명사로 문자적으로‘하늘들’입니다. 이 하늘은 천문학적, 물리학적인 하늘이 아니라 상징적, 영적 의미의 하늘로서, 하나님이 계시는 신적 공간들, 하나님의 존재의 초월성, 특별히 그가 계시는 천 국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하늘에 계신”이란 표현은 어떤 사실보다도 하나님이 지상을 초월하여 계심을 표현하는 상징적 문구로서 하나님은 피조물로부터, 지상의 한계와 제반 조건으로부터, 온갖 가변성과 불완전성으로부터 초월하여 있다는 관념을 암시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⑴ 우리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다는 사상은 인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알려 줍니다. 이 사상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외감을 깊게하여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하며, 우리의 사랑을 더욱 깊게하여 공포를 쫓아내어 줍니다. 그리하여 친밀감을 가지면서도 경외감으로 겸손히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M.막달렌은‘친밀감이 존경과 균형을 이루고, 친숙한 부름이 경외감과 균형을 이루며.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내재성이 그의 초월성과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⑵ 우리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다는 사상은 연약성과 가변성이 전혀 없는 고귀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지상적 아버지의 모습, 즉 시야가 좁고 목적이 확고하지 못하고 자애로움이 부족하고 힘이 유한한 존재를 뛰어 넘은 전지, 전능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를 계시해 줍니다.
⑶ 우리 아버지가 하늘에 계시다는 사상은 모든 장소나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이러한 영적 존재라는 사상은 우리를 가시적 존재에 대한 예배와 가시적 존재를 수단으로 한 예배에서 구해줍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예배의 외적인 것들과 부차적 형식, 시간, 장소 등에 대해 중점을 두는 것을 경계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게 하여 줍니다. 우리 아버지는 언제,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을 만나기 위해 어떤 장소를 구분하고 시간을 정하고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그분께 나아가 만나고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적 집회는 이와 다른 규정이 있습니다.
(4) 우리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다는 사상은 우리 아버지의 본향으로 우리의 마음과 소망을 끌어당깁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저 위로 끌려 올라가며, 세상과 상식에 대한 지나친 애착과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게 하여 저 천국을 바라보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그 분의 위엄과 거룩하심을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만한 태도나 주제넘은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공적 예배에서 우리가 불시에 기도를 드릴 지라도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하심을 느끼고 경외감을 가져야 합니다. 잘못하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신다는 생각이 감상적으로 흐르거나 안이한 위안이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그분은 좋은 아버지시니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와 결점과 잘못에 대하여 그 정당한 진노와 심판을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사랑과 거룩이 조화되어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그분의 크신 사랑을 상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상에서 우리 위해 살 찢으시고 피솟아주신 우리 주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그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그분의 전지, 전능하심을 상기해야 합니다. - 인간의 능력은 유한합니다. - 사람은 사랑과 열의가 있어도 때때로 무력감에서 좌절합니다. 얼마나 많은 자애로 운 부모들이 병든 자식의 침상 곁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는가! -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하게 한다든지 또는 하지 못하게 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 버릇이 나쁜 자녀를 가진 부모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 큰 비전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으나 중도에 실패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시 115:2).
여러분 우리는 거룩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접근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요. 우리를 위하여 그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와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 하나님은 모든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십니다. - 하나님은 부드러운 긍휼로 우리를 굽어살피십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과 기쁨과 번영을 가장 원하고 계십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 이상으로 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서 우리가 복주시기를 원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우리를 복주시려 열심이십니다. -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는 한도가 없습니다. - 하나님은 하늘의 모든 복으로 우리를 복주실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모든 자녀들을 하늘의 본향으로 모아들여 자기 곁에서 세세 무궁토록 복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이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을 접근하면서 그의 거룩하심과 우리를 위하여 그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그의 능력과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해내시는 그의 능력 배후에 역사하시는 사랑을 기억합시다. 그러면 소망 가운데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간구를 시작하기 앞서 여러분이 일용할 양식마저 구하기 전에, 그 무엇을 구하기에 앞서 여러분 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우리 아버지 존전에 있음을 반드시 인식하십시요. 그렇게 해야 합니다.
3.“우리 아버지”라는 이름은 신자들의 형제애와 공동체성, 곧 천국 자녀들은 한 가족으로 묶어주는 표현입니다.
“우리 아버지여”라는 이름에“하늘에 계신”을 부가한 것은 하나님과 신자들의 관계를 전통적인 가족 개념인 혈육관계가 아닌 새로운 가족 관계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하여 하나님 을 아버지로 모시고 섬깁니다. 누구든지 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는 모두 가 하나님을“우리 아버지”로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한 아버지를 가진 한 형제입니다. 침례교,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는 각기 그 신학적인 강조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다 한 아버지를 가진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자들은 서로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유명한 설교가 휫필드와 웨슬레의 이야기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에 관하여 잘 설명 해주는 아주 흥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웨슬레와 훳필드는 같이 영국에서 경건운동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신앙의 동지로서 복음사역을 같이하다가 영국 교회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 문제로 부딪겼습니다. 휫필드는 칼빈주의자, 곧 장로교도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예정을 믿는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은 절대 멸망받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레는‘아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받는다’고‘믿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이 문제로 마차 원수처럼 논쟁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훳필드를 열렬히 추종하는 한 여신도가 훳필드에게 찾아와서 목사님, 웨슬레같은 사람은 천국에 가면 보이지 않겠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웨슬레는 천국에 못간다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훳필드 목사가 하는 말이‘그래요, 천국가면 웨슬레는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그래서 이 여신도가 좋아하고 있는데 휫필드 목사가 이어서 말했습니다.‘웨슬레는 예수님 곁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 광체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아니하고 우리는 간신히 구원을 받아서 저 문가에 있기 때문에 웨슬레를 천국에서 못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형제를 존경하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의 의견이 틀린다고 하여 한 형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감리교의 하나님, 장로교의 하나님, 루터교의 하나님, 침례교의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이십니다.
⑴ 축복의 진정한 향유는 우리가 이 축복을 남과 나누어 갖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홀로만 간직하고자 하면 잃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커다란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게 되며, 이 기도를 통하여 이 공동체의 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표현합니다.
⑵ 이 공동체 의식이 우리 기도에 미치는 효과는 기도의 이기성을 파괴하는 역할을 합니다. 곧 천국 자녀들의 기도를 자기의 기쁨과 필요만을 구하는 이기적 몰입에서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한 가족입니다.
⑶ 이 공동체 사상이 우리 삶에 미치는 효과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날 때 감히 자신만을 위한 어떤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개인적인 적대감정, 허영심, 이기심, 남과의 경쟁심 둥 속에서 형제애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종의 차이. 교육의 차이, 직업의 차이, 지방색 등에서 일어나는 관념의 차이는 우리를 뿔뿔이 흩어지게 만듭니다. 부의 수준차와 지위의 차이는 우리 서로를 소원하게 만듭니다. 기독교 신앙에 관한 관념의 차이가 종종 우리를 서로 갈라놓고 마음 아프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우리 아버지”라 말할 때 이 모든 것들은 말끔히 사라집니다. 이 기도를 드리다가 무덤 속에 들어간 여러 세대들을 생각해 보시요. 이 기도는 하늘에 관한 얼마나 놀라운 예언입니까 ? 하늘에서 모든 사람은 함께 모여 서로가 한 아버지‘밑에 있는 형제들’임을 더욱 깊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들 사이에 진정한 동포애를 심어줄 수 있는 유일한 토대입니다. 의견의 일치가 진정한 동포애를 심어줄 수 있습니까? 인간들은 생각하는 기계가 아니다. 이권의 일치는 진정한 동포애를 심어줄 수 있습니까? 인간들은 계산의 통치를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동맹은 진정한 화합을 파괴시킵니다. 공통적인 목표들은 진정한 동포애를 심어줄 수 있습니까 ? 이것은 천박하고 피상적입니다. 국가 또는 민족의 일치는 진정한 동포애를 심어줄 수 있습니까 ? 이것은 인위적인 것으로서 보편성, 전세계성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에 기초를 둔 형제애 외에는 진정한 형제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제“나그네와 외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과 함께 우리를 상속자로 만드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가운데, 목소리를 드높여 “ 우리 아버지여”라고 외치도록 합시다. - 아멘 -
-------------------------------------------------------------------------- 주기도문 강해/공부 3 제1간구 / 아버지의 이름을 위한 기도 마태복음 6:9c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의 완벽한 일곱 종목의 간구는 두 부분으로 대별되며, 10계명의 전후 부분과 대층 상응합니다. 전반부는 세가지 간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나님 및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표의 시작, 중간. 끝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만이 홀로 이루어지는 영역입니다. 이 세 가지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와 일치합니다. 즉 구약성경에서는 언제나 '3'이 완전과 신성을 나타내는 거룩한 수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후반부는 네 가지 간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넷이라는 수는 피조물을 상징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개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다루심의 시작, 중간, 끝을 말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양식의 제공으로부터, 죄의 용서, 인도하심, 투쟁 중의 보호, 최종적 구원이 차례로 진술됩니다.
이 두 종류의 상호 순서가 주는 교훈에 대해서는 길게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첫째이고 인간은 둘째입니다. 우리의 욕구 이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순서입니다. 자발적으로 이러한 순서에 따르는 자는 정말 적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지향하고 다음으로 자신을 지향하고 있습니까?
1. 먼저 이 간구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문자적으로‘당신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시옵소서’입니다.
“이름”곧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름”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노마(헬3686)는 일반적으로‘이름’을 뜻하며, 본문에서는
(1)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 이름을 계시로 알리셨습니다(창l7:I; 출3:14; 6:2). 진실로 여호와의 이름은 그의 인격적 통치와 활동의 강력한 표현이기 때문에 여호와 자신을 말함에 있어서 그 이름이 대용될 수 있습니다(레 18 : 2l; 시 7 : l7;암 2 :7;미 5 :4). 따라서 그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우리가‘여호와’나‘야웨’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은 4문자(YHWH)로 구성되었으며, 이를 신성 4문자라 부릅니다. 이 이름이 너무 거룩하므로, 유대인들은 습관적으로 그것을 발음하지 않았습니다. 사본 필사자들이 신성 4문자를 기록할 때는 매번 완전히 목욕하고 완전히 옷을 갈아입었으며, 그 문자들을 기록하는데 사용한 붓을 부러뜨렸습니다. 감히 입으로 말하기가 황송한‘여호와’라는 이름에 대한 경외감 때문에 회당에서 성경을 낭독할 때 또는 읽는 자들이 그 이름을 볼 때 명사 아도나이, 즉‘나의 주님’으로 불렀습니다. 이는‘여호와’라는 실제 칭호를 피하기 위한 것이며,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곧 헛되이, 경솔히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옛적 유대인들에 대해 우리가 뭐라고 평하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장엄하심과 거룩하심에 대한 그들의 감각은 칭찬할 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겨서 헛되어, 경솔히, 함부로 부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존경하고 높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온 세계를 통해 하나님이 이렇게 존경과 높임을 받으며 영광되게 하옵소서 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인간과 접하시는 면이 바로 그의 이름이며, 이 이름으로써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계시합니다. 따라서 그 이름은 역사 안에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써 알려진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가지 이름을 통해 자기의 성품을 계시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들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엘, 또는 엘로힘 이란 용어를 사용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힘,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 이름을 사용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의 힘과 지배와 능력에 대한 감각(센스)을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특히 엘로힘 은 피조물과 관련하여 전능의 작용을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엘 은 모든 것을 아시며(창 14 : I8-22). 모든 것을 보시며 (창 I6 : l3), 그의 백성을 위하여 모든 일을 행하시는(시 5? : 2) 하나님임을 보여줍니 다.
그후에 하나님은 크고 놀라우신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계시하셨습니다. 이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 곧 영원히 자존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이름은 특히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구속받은 자들의 하나님을 보여 주실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엘로아 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그의 능력보다 그의 의지와 관련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명령하고 이루시며, 그의 백성의 예배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신32:15, l7).
엘 엘욘 은‘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번역되며 하나님은 이 이름으로 자신을 천지의 소유자와 지배자임을 나타내셨습니다(창 14:18; 시83:l8). 삿다이 는‘전능자’로 번역되며, 하나님은 이 이름으로 자신을 힘의 근원보다는 주시는 은혜 곧 그의 백성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능력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주'를 뜻하는 하나님의 세 가지 이름 아돈, 아도님, 아도나이 는 간단히 구별하면 아돈 은 통치자로서의 주를, 아도님 은 소유자로서의 주를. 아도나이 는 복을 주시는 자로서의 주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다른 표현들에서 이름이 성품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9:10에“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그분을 의지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며, 그분의 존재와 성품을 아는 사람이 그분을 의지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시편 20:7에서 시편 기자는“혹은 마차를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서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서“너는 칼과 단창으로 나에게 나오지만 나는 네가 모독하는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간다”고 외쳤습니다. 이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예를 지고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로페카(라파)-너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출I5:26). 여호와 메캇디쉬켐-너희를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출31l:13). 여호와 칫케누-우리의 의이신 여호와(렘23:6; 33:I6). 여호와 이레-여호와가 준비하시리라(창22:14). 여호와 닛시-나의 깃발(승리)의 여호와(출l7:15). 여호와 샬롬-평화를 주시는 여호와(삿6:24). 여호와 체바오트-만군의 여호와(삼상l:3).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겔48:35). 여호와 로이-나의 목자이신 여호와(시23:l)등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 대하여 이런 여러 가지 이름을 주심으로써 자기를 나타내셨고 그의 성품과 존재를 인간에게 계시하셨습니다.
다음에“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스테토 는 '거룩하게 하다, 성결케 하다, 성별하다'를 뜻하는 하기아조 (헬37)의 명령 과거 수동태로 여기서‘거룩하여지게 하시옵소서’이며, 과거형이 사용된 것은 완전한 실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행위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두가지 의미를 함축합니다.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시는 행동을 하실 때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거나 여김을 받게 됩니다. 두 번째 의미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길 때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거나 여김을 받게 됩니다. 힐(D. Hill)은‘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높인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예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로메아어(Krnst Lohmeyer)에 따르면, 주기도가 기원하고 있는 성화는 적극적인 의미와 소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상반되는 감각적 영역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림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존재와 행위에 있어서 거룩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봉사하는 천사와 같이 행위를 존재에, 그리고 존재를 행위에 일치시키는 사람이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둘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안에서 모든 인간적, 역사적 존재가 고양되고, 그리하여 완성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화의 과정은 또한 그 자체를 넘어섭니다. 왜냐하면 성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통한 세상의 성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통한 하나님의 성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와 인류도 결국은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을 나타내시는 성화 과정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 간구는 바로 이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2. 이 간구는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지고 영광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간구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간구는 자기 자녀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자신의 본 모습 그대로를 알려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부성애적 사랑에 대한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간구는 인간들에게 그 이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사람들이 그 이름을 거룩히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알려지지 않는 한, 인간이 그 이름에 대한 지식이 없는 한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해,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게 해 달라고 간구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본성(또는 성품)이 알려지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간구가 주기도문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고려해 볼 때,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온 인류에 대해 매우 중요한 점들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이 모든 인류에게 있어 가장 깊고 근본적인 요망 사항이라는 사실, - 그 지식이 인간의 사상과 삶의 전 구조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 -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모든 문제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 는 사실, - 내적인 것(inward) 이 외적인 것{Outward)에 선행한다는 사실. - 주기도문의 여러 간구의 순서가 보여 주듯이, 지식은 감정과 실제적 삶의 안내자라는 사실들을 시사해 줍니다. 그러므로 이 간구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알려는 갈망과 더불어 노력하겠다는 서약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보다 충분하고 깊은 지식에 도달 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는 열망과 관련된 한 사건이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어떤 분을 만나 날이 새도록 씨름하다가 마침내 그에게 굴복하여“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하면서 축복하여 주기를 간구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고 축복을 받기 전이었습니다. 야곱은 그분에게“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야곱은 그분이 누구인지 몰라서 그 이름을 묻거나 그분을 부를 이름을 물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은 그 본성 또는 성품의 표현이며, 야곱의 고별의 간청은 입술로 표현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친밀하고 깊은 어떤 것을 위한 것입니다. 야곱은 오로지 자기를 축복할 수 있는, 바로 지금 자기와 이야기하고 있는 그분 하나님에 대하여 보다 분명하고 깊은 지식을 갖기를 갈망한 것입니다. 사람은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친교의 시간을 끝내고 그곳에서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적어도 그의 가장 깊은 마음속에서 하나님에 관한 평화로운 진리가 위안과 격려를 주고 어떤 감미로움이 되는 속삭임을 사랑의 징표로서 지니기를 갈망할 것입니다.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라는 하나님의 응답은 처음에는 거절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정녕 나는 나의 성품을 네게 더 계시할 필요가 없다. 너는 충분한 빛을 가지고 있다. 네게 필요한 것은 통찰력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미 우리에게 알리신 것들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야곱보다 더 확실한 지식의 원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 자연 계시에서, - 성경 계시에서, - 하나님의 섭리에서, - 기도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얻는 그와 교제에서,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의 원천을 가집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알리고 거룩하게 하시는 위대한 매개체입니다. 그를 떠나서 인간 자력으로 하나님에 대한 고상한 지식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라”라 고 하셨습니다(요l7:26). 이것은 모든 구속사역의 결과이며, 하나의 장엄한 예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천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보다 충분하고 깊은 인식과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알 때 비로소 그의 축복을 받고 그를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서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을 반석으로, 하나님을 우리의 평화로, 하나님을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로, 하나님을 우리의 의로, 하나님을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시고 언제나 임재해 계시는 분으로 찬양하는 것을 기뻐했습니까? 시편 34편에 보면“나와 함께 여호와를 크게하며 다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자”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자존하시며 완전하십니다.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이러한 존재를 크게 혹은 더욱 크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 이름을 더 높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사람들 중에 더 크게 나타날 수 있게 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관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이 세상의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하고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크게 높이고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해야 하는 것과 관련된 한 사건이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신 광야에 들어왔습니다. 백성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모세를 향해 비난과 원망을 하면서 다투었습니다. 모세는 이 견디기 힘드는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민 20 : 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백성의 반역과 비난에 견디다 못해 그만 혈기를 내었습니다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물이 반석에서 많이 쏟아져 나오자 백성들과 짐승들이 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화가 나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물은 하나님이 내시는 것이지 모세가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화가 난 모세는 자신의 능력이 물을 내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이러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 후에 모세에게“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은 주기도문에 있는 이 간구에 적용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아니 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의 성품으로도, 그의 말로도, 그의 행위로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지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는 실수를 범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모세는 무거운 징계를 받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볼 수는 있었으나 그 땅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관심을 가지고 불타는 열정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나는 나의 영광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러 왔다. 내가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셨사오니,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7장). 주님은 아버지께 속하는 영광 곧“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를 아셨습니다. 주님은 이 영광을 보셨으며. 이 영광을 아버지와 함께 가졌으며,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 의식으로 층만하셨으며, 주님의 최고의 소원은 인류가 이 영광을 알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주기도의 이 간구에서 이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주님은 우리에게 온 세계가 하나님과 그 성품을 알 수 있도록 그리고 온 세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름을 위한 간구는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 을 바라는 강렬하고 깊은 소원의 표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특별한 관심과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서, - 하나님의 자아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 보이소서 - 인간의 인식을 통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 인간의 바른 감정을 통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 인간의 경배와 찬미와 감사를 통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이 기도에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곧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하겠다는 서약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생활을 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또 그렇게 생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로, 우리의 인격과 행위로, 우리의 바른 감정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과 그의 거룩한 속성들을 반영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경배와 찬미와 감사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헌신과 봉사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보다 온 세상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되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힘써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겨야 합니다. 또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든가 거룩히 여김을 받든가 한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든가 치욕을 당하든가 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즉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 그 이름을 기릴 수 있는 참된 길임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이 이름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합시다.
3. 끝으로 이 간구가 제일 먼저 나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간구가 제일 먼저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일상적 기도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일시적인 필수품이 나 심지어 자기 자신의 영적인 요망사항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한 것을 제일 먼저 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필요한 것을 제일 먼저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요망사항을 말씀드리기 전에, 그것이 설사 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먼저 구해 야 할 것은 그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최고의 소원이 되고 있습니까 ? 기도할 때마다 이것이 항상 우리 마음에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되고 있습니까 ? 여러분이 하나님께 나아올 때 어떠한 절망 상태와 환경에 처해 있을지라도 그리고 너의 생각과 마음에 어떤 큰 근심이나 문제가 있을지라도 잠깐 멈추고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행복이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없이 우리의 행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속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알고자 하며, 우리의 기도가 효과적이며 가치있는 것이 되게 하려면 이 순서를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참 지혜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여러분이 복을 받고 번영하고 싶으면, 여러분이 평화의 기쁨을 누리고 싶으면, 여러분이 가치있게 살다가 죽을 수 있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의 삶에 관하여 지혜를 원한다면,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곧 그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데서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요망 사항을 입밖에 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어떠한 절박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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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이 임하옵시며"
주기도문의 여러 간구에는 논리적 순서가 있습니다. 각 간구는 일종의 불가피한 신적 필연성으로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인간의 가장 깊은 요구이며 그 지식과 경외심의 확신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방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만이 홀로 이루어지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을 통하여 확립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이해를 통하여 인간에게 역사하는 통치로서, 무지한 복종은 요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 먼저 하나님의“나라”의 의미와 성격을 살펴보겠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문구는 문자적으로‘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입니다.“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아는 (l) 왕권, 왕의 통치 (2) 나라, 즉 왕의 통치에 예속하는 영토로서의 왕국을 뜻합니다. 그 나라는 한 나라의 왕이나 통치자 가 다스리는 영역입니다. “임하옵시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데토는‘가다, 오다, 나타나다’를 뜻하는 엘코마이의 명령, 과거, 능동태로‘오소서, 임하소서’란 의미를 지닙니다. 부정과거가 사용된 것은 그 나라의 완전한 실행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나 통치가 행사되는 영역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심으로 임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은 인간의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이 전파되면서 확장되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그 최종적 완전한 실현이 이루어집니다. -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대부분 천국(하늘 나라)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좀더 상세히 설명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도래의 약속과 더불어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국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⑴ 약속과 예언-①하나님은 하나님(혹은 하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약속과 예언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와 통치자십니다. 하나님의 통치 영역 안에 또 한 나라가 있는데 하나님을 반역하여 일어난 사탄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 는 하나님과 그의 영광과 영예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나라”가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당분간 세상에 들어와 세상을 정복하여 온 인류가 사탄의 지배 및 영향권에 있지만 하나님은 지혜와 능력으로 이 세상과 모든 나라를 다시 그의 영광스러운 나라가 되게 하신다고 인류 역사의 초기부터 계시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 성경은 일관해서 하나님의 나라 흑은 하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약속과 예언을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 땅위에 계셨을 때 세계 역사의 그 특정한. 결정적인 시점에서 이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②요한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임박하였음을 외쳤습니다(마 3 : 2이하). 요한은 그 타락한 백성들을 향하여“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외쳤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는 앞에서 지금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⑵ 과거- ①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언하셨습니다(마4:17). 우리 주님이 전도를 시작하셨을 때 정확히 동일하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에는 이제 천국의 왕이 백성들 앞에 아주 가까이 왔기 때문에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 시점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하늘 나라가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②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상의 사람들 중에 임하셨습니다(눅17:2l).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중 곧 사람들 중에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결국‘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 이 나라의 능력과 주권과 위엄과 통치를 행사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임했다는 뜻입니다. ③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를 믿는 자들 안에(마음에) 임하여 다스리기 시작하셨습니다.
⑶ 현재 - ①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이 순간에도 사람들 중에 임하여 있으며 사람에 대하여 역사하고 있습니다(눅17:20). ②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임하여 다스리며, 아직 진보, 성장의 단계를 걷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롬l4:17). 그 나라는 마음과 영혼 대한 통치이며, 내적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부적 제도에 보다는 내부적 체험 속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나 라는 누룩처럼 숨겨져 있으나 계속 그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 나라는 씨앗이 깊이 묻혀있으나 큰 나무로 성장하는 것처럼 성장합니다. 그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일종의 편재성을 띤 채 땅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모든 곳을 동시에 비추는 번개와 같습니다. 천국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나라이면서도 확실히 온갖 외적 행위를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땅의 모든 왕들이 그 나라 앞에 꿇어 엎드릴 것입니다.
(4) 미래-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을 넘어 완전한 형태로 나타날 미래가 또 있습니다. 그 미래는 우리가 죽음을 통해 천국에 들어갈 때입니다(마25:34).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 이미 나타난 나라임과 동시에 모든 비밀의 열쇠를 간직하고 있는 죽음 이후에, 우리가 들어가게 될 나라입니다.“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와 나라를 상속하라”는 말씀은 이 세상이 지난 후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하늘 나라인데 이는 그 나라의 왕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죽음을 통해 지상을 벗어나 천국문을 통과하여 하늘 도성으로 들어간 후에야 비로소 그 나라에 완전하게 들어갈 수 있거나 혹은 그 나라가 우리 속에 들어 올 수 있기 때문에 그 나라는 하늘 나라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설립된 나라이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국면을 가지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기도를 드리도록 가르친 그때나 지금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 임하여 진행되고 있는데도 이 기도“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간구는 그 나라를 다시 미래 속으로 내던져, 저 멀리 예언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게 합니다. 우리 는 이 간구에서 지상 위에 있는 이 세상의 나라들이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미래의 어느 날을 소리쳐 부르는 외침들이 흑암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듣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 기도에서 완전하고도 영원한 천국의 도래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 속에서는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 나라에 대한 개념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면서도 시간 속에 나타나며, - 여기 지상에 상존하면서도 장차 오게되며, - 장차 오게 되면서도 결국 지상에 오지 않으며, - 우리가 저 세상으로 갈 때 들어가게 되는 나라, -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 그 나라는 내적, 영적, 보이지 않는 나라이지만 또한 나라들과 기관들을 형성 할 가시적, 외적 나라, 온 땅에 가득찰 나라입니다. 이 간구는 그 나라의 최후 완성 시까지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이 다양성이 모순은 아니며 기자의 환상에 따라 이런 것 저런 것을 의미하는 모호하고 불완전한 개념의 영향도 아닙니다. 그 개념은 아주 분명하며 한계가 뚜렷합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인격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하나의 조직된 공동체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에는 종속관계와 대등관계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 하나님의 나라에는 통치자(하나님)와 백성(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에 나오는 간구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천국에 대한 다양한 의미 가운데 어느 것도 생각에서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제시된 여러 가지 개념들이 이 간구,“나라이 임하옵시며”의 성경적 의미를 표현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여러 개념들의 도움을 받아 이 간구가 시사하는 바를 확인하도록 합시다.
2. 이 간구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통치하시지만 그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에 대하여 그 창조주로서 절대적 권능과 통치권을 행사하십니다.“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땅이여 즐거워하라.”“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백성은 떨지어다”가 유대시인들과 선지자들의 시종일관된 논지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반역, 세상의 온갖 고난과 재난 등 어떠한 여건과 환경도“여호와가 지금부터 영원토록 유일한 주님이시라”는 그들의 확신을 뒤흔들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103:19)라고 노래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이 기도에서 사람들이 믿든 믿지 않든, 원하든 원치 않든 하나님이 만유의 주(主) 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최고의 주님과 종속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여 그것으로 족한 것은 아닙니다. 시편 기자가 노래한대로, 바다와 그 안에 충만한 것들이 하나님의 통치(즉 모든 만물의 존재 질서의 통제, 어거, 지탱, 지휘)를 받는 가운데 기뻐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한 통치가 인간에 대 한 하나님의 통치의 전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과 들 의 동식물이 공히 받는 그 통치가 전부는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섭리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러한 통치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하늘에 앉아 계신 자가 왕들과 통치자들의 계획을 비웃으시며 독재군주를 자기의 진노의 막대기로, 사람을 그의 손안의 막대기와 도끼로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그 장비를 불 속에 던져 버리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실로 인간은 무의식적인 도구로 전락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다스림이 인간 사회에 이룩되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우러난 삶의 자발적 복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인간이 짐승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짐승이 울부짖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짐승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짐승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지만 어떻게 돌보심을 받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먹을 것을 얻지만 누구에게서 얻는지 알지 못합니다. 살아가지만 왜 사는지 알지 못합니다. 행동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죽지만 언제 죽는지 알지 못합니다. 짐승들에게는 이 정도로 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지각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감각에 호소하는 굴레로 다스리지 않고 마음속에 말씀하시는 그의 눈빛으로 지도하십니다. -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길 수 있는 것, -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해할 수 있는 것, - 거기에 공감할 수 있는 것, - 공감하여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 이것이 우리의 특권입니다.
이 기도는 단순한 맹목적 복종과 인간의 참 목표 사이를 명확하게 구별해 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와는 다른 것이며 그보다 한 차원이 높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와 같이 복종하고 섬길 수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 기도는 보다 차원 높고 보다 훌륭한 형태의 그러한 순종과 섬김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고백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이 하나님과 그의 계명에서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의 그러한 이탈과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표적들을 보지 못하는 불신자들과 우리 자신을 분리하는 행위입니다.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리는 우리의 입장은 세상의 현재 상태가 인간들의 자연적 상태이며, 인간이 태어나 그 속에서 살아야 할 질서이며, 하나님이 목적하신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입장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가득찬 온갖 악과 쓰라린 슬픔을 보면서 이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인류가 하나님께 반역하였다는 타락의 교리를 믿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신조가 있습니다. 한 그릇된 신조의 말을 들어봅시다. 그들은 짐승 같은 죄악 속에 살면서 무지몽매하게 죽어 가는 이 사람들을 보라. - 살인, 강탈, 거짓, 싸움터, 상처받은 심령들, 열매를 맺어보지도 못하고 꽃망울 질 무렵에 사그러드는 희망을 보라. - 강같이 흐르는 슬픈 탄식, 비참한 저주, 가장 슬픈 떠들썩한 환락을 보라. - 이 모든 것들이 이 아름다운 지구 위, 황혼의 장관 가운데, 가을의 고요한 아름다움 속에, 차가운 별빛 아래 일어나는 것을 보라. - 가장 고귀한 피조물이 가장 비참한 피조물로 전락해버린 이 세계를 보라. - 이것이야말로 피조물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길임을 인정하라. - 이 모든 것이 다 어쩔 수 없는 신의 섭리임을 인정하라. - 이것이 신이 애당초 계획하신 그 세계임을 인정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신조, 진정한 기독교의 신조는 말하기를 - 이건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것이 아니다. - 어떤 원수가 이를 행한 것이다. - 원수 사탄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죽음이 왔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통치에 반역하여 일어난 사탄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 사탄은 이 세상의 신, 이 세상의 임금(요I4:30),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엡2:2) 불립니다. 그는 악의 나라, 흑암의 왕으로서 광범한 지배권과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에 온갖 죄악과 재난과 불행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세력을 멸하고 인간을 파멸에서 구원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나라가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바로 이런 교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간구는 사탄의 세력(왕국)이 파괴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은 하나님 곧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는데 있어서 큰 적대와 방해세력입니다. 동시에 지상으로부터 모든 가증한 것들-우상 숭배, 미신, 망상, 미혹. 무지, 신성모독, 불경 등을 뿌리 뽑아 주시기를 기도하고, 그릇된 철학과 사상, 그릇된 신조와 교리를 버리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의 마음에 임하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리고 이 간구는 참된 기독교의 신조를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와 파멸에서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이 간구는 그 나라가 임하였지만 그 나라의 성장과 확장과 완성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지상 모든 왕의 왕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그들의 의지의 힘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나라를 세우시고 이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하나의 영원한 사실과 역사적 사실, 이 양자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영원한 사실이란 그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으로서 태초부터 세상의 주와 임금이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역사적 사실이란 그 영원하신 말씀이 지상에 육체로 강림하여 모든 인간을 위해 죽음을 맛보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성육신과 희생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동기를 심어 놓으셨으며 이를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 의 나라를 창설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자기 보좌에 앉는 왕과 제사장으로서 사람들을 영원토록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지상의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는 그가 영원 전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역사 속에서 충성되고 참된 증인, 죽은 자로부터 처음 사신 자 되셨고 영원히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토대가 놓아지고 통치권이 확립되었으며,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유일한 소망인 그 나라의 확장과 완성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1) 우리는 그 영적 나라의 성장 확장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사람들 중에 임하여 있으며(눅17:20), 이 순간에도 여기 주님께 복종하는 모든 마음과 생활에,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 속에 있으며,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l4:17)입니다. 이 나라는 교회에 나타나 있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임하여 성장하며, 세상 속에서 서서히 확산합니다.
이 영적 나라가 어떤 성격을 띠고 있습니까? 우리는 - 이 나라가 순전히 개인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 - 그리고 개개인에 대한 그 나라의 지배 권능은 대중에 대한 지배 권능을 실질 적으로 보장해 준다는 것, - 그러한 개개인 통치가 전세계적 통치 방법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모든 인간은 한 종류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가 내게 혹은 다른 사람에게 행사할 수 있고 또 행사해온 권능은 모든 인류에게 일률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상이 주는 두어 가지 교훈을 명심합시다. 교훈은 세상의 질병인 악을 치료할 수 있는 진정한 길은 그리스도의 복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외적 조치, 보다 나은 법률, 교육, 기술의 진보, 상업 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것들을 사용하면 일시적 효과가 나타나지만 뿌리 깊은 악을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지진을 없애기 위해 알약을 사용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보다 훨씬 깊은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병에 걸려 있는 것은 인간의 영혼, 개개인의 의지입니다. 세상의 악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형성하고 마음을 다한 충성스러운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의 교훈은 이 나라를 성급히 이루기 위하여, 신정 정치, 국가 교회, 신앙촌 등등을 계획, 추진, 실행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천국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황금보석 꾸민 집, 열 두 진주문, 황금길,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 열 두 가지 실과를 달마다 맺히는 생명나무를 기대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기대하십시요. 그러나 천국의 가장 중요한 것은 보석 집이 아닙니다. 황금길이 아닙니다. 열 두 진주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천국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언급한 바처럼 천국의 왕이신 우리 주님의 다스림입니다. 천국은 주님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마음을 다스리시면 내 마음이 천국입니다. 우리가“나라이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를 다스려주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 주여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시고, - 주여 내 생각을 다스려 주시고, - 주여 내 지혜를 다스려 주시고, - 주여 내 판단을 다스려 주시고, - 주여 내 의지를 다스려 주시고, - 주여 내 경험을 다스려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주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주님이 우리 가정을 다스리시면 가정이 천국이 됩니다. 남편이 믿지 않으면 주여 제 남편이 예수님을 믿고 그의 다스리심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식이 잘못되어 가고 있으면 주여 우리 아이가 예수님을 잘 믿고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게 하옵소서 라고 합시다.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주님께서 가정을 다스려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그렇게 노력하면 머지 않아 그 가정은 천국으로 화합니다.
우리 주님이 교회를 다스리시면 교회가 천국이 됩니다. 교회가 왜 시끄럽습니까? 왜 싸웁니까? 사람이 다스리거나 다스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 목사가 교회를 다스리면 안됩니다. - 장로나 집사가 교회를 다스리면 안됩니다. - 우리 천국의 왕이신 우리 주님이 다스리도록 모든 권리를 다 내어 주어야 합니다. - 그리고 주님 우리 교회를 다스리시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진정 이렇게 기도해 놓고 예수님을 제쳐두고 제멋대로 살지 아니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가정이나 교회를 제멋대로 이끌어가지 아니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다스림과 함께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뜨거운 시련의 풀무 속에 있었지만 주님의 다스림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곳은 천국이었습니다. 불이 그들을 태우지 못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박해의 감옥에 갇혀 그 발이 착고에 채워 있었지만 주님의 다스림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천국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다스리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 - 실패의 그곳이라도 천국이 됩니다.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천국이 됩니다. - 고통과 시련의 장소가 천국이 됩니다. - 가난과 초막에 살아도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와 같이 주님의 다스리심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시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고, 이 천국 복음을 말로 전하고 행위와 생활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열 사람이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면 하나님 나라가 그만큼 확장되는 것이며 수백 수천명…이 예수님을 믿고 그의 다스리심을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만큼 확장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킨다는 것은 우리 특권입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서 확장되어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 우리의 책임의 중대성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2) 우리는 그 나라의 외적 성장과 확장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영(靈)이 있으면 그 다음 몸이 있습니다. 개개인들이 있으면 공동체(사회)가 형성됩니다. 그 나라는 포괄적, 범세계적 통치입니다. - 제도, 기술, 과학 등,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은 성화될 수 있으며, 또 성화될 것입니다. 한 선지자는 대제사장의 관(冠)에 새겨 붙인 문구처럼(출28:6) 말방울에“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문구가 새겨지고, 예루살렘 집 부엌의 솥과 냄비마다 성전의 그릇처럼 거룩해질 날을 환상 중에 바라보았습니다(슥14:20, 21).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기도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에는 - 세상이 잘못되어 있다는 확신, -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바로 잡을 유일한 수단이라는 확신, -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확신, -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을 바로 잡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 외에 세상의 구원 수단으로 어떤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위대한 새로운 수단에 의해, 어떤 새로운 사회개혁 방법에 의해 부정 부패를 없애고 보다 정의롭고 보다 좋은 세상을 기대하여 왔습니다. 시대마다 사람들은 그러한 희망이 좌절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으며, 세상의 갱생을 위한 멋 진 계획이 (입안자의 귓가에서 )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이런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간직하고 있습니다. 시대마다, 사람마다, 맹신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시대가 인간에게 꼭 필요한 새로운 일을 발견하였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그러들줄 모르는 이 고질적인 기대야말로, 과거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음에 불구하고 세상이 언젠가는 더 나아지고 좋아지리라는 굳은 신념이 인간들의 마음속에서 결코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그 기대가 번번이 무너지면서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서글프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언가 뜻깊은 면을 시사해 줍니다. 이러한 기대를 얕볼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기대가 하나님께로부터 발원되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들이 비록 잘못된 방향으로 그 기대감을 피력하고 그 기대를 입밖에 내면서도 그 실질적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러한 희망이 저급하거나 참되지 못한 것이라고 일축할 수 없습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세상의 그러한 온갖 희망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어떤 공감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그렇다, 그러한 희망은 옳다. 우리는 그 희망이 어떻게 현실로 나타날 것인가를 알고 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어떤 새로운 것의 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 천국이 임하고 그의 복음이 전파되면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 확장됨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의 주권, 곧 주님의 다스리심이 내 마음에, 내 가정에, 내 교회에 행사됨으로 말미암아 보다 정의롭고 보다 좋은 내 자신, 내 가정, 내 교회로 성장 발전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사회와 국가에 영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과연 보다 새로운 세상이 될 수 없습니까 ? 분명히 우리는“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통하여,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함으로 말미암아 보다 새로운 세상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를 위하여 희망을 버리지 말고 최선의 노력을 합시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때에 이 간구는‘의와 평강과 기쁨’의 완전한 실현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하나님의 나라는…오직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I7)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무의식적인 울부짖음들, 슬픔과 궁핍과 불의에 대한 원한의 부르짖음 들을 생각해 보시요. 그 울부짖음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귓전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탄식하며 큰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롬8:21). 모든 인간 이 눈물을 흘리고 무엇인가 희망을 피력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이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반역적 외고집에 대해 슬퍼할 때, 이 무질서한 세계의 온갖 압박을 느낄 때, 이 세상을 본래의 임금에게 되돌리려는 자신들의 노력이 거의 수포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애태울 때 이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또한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이“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계6:10)라고 외치는 가운데 이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과 더불어 의와 평화와 기쁨이 완전히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보다 슬프고 겸손한 부르짖음이 있어야겠습니다. 우리 각자 자신의 죄악된 마음의 상태와 행위를 통회하며 이 기도를 올려야 할 것 입니 다.
둘째로 우리가“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때에 이 간구는 주님의 재림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인사말은 마라나타였습니다(고전16:22). “주여 오시옵소서”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라 는 약속에 대하여,“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를 완성하기 위하여 확실히 재림하실 것입니다. 경건한 성도 호나티우스 보나르는 아침에 해가 뜨면 창문을 열고 커텐을 젖히면서,‘주여 이 한 낮에 오시겠습니까?’해가 지면 커텐을 닫으면서‘주여 이 밤에 오시겠습니까?’그는 이렇게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그처럼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주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드릴 수 있습니까? 가난하고 고생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은 그 좋은 천국을 그리워하며 이 기도를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사는 사람은 이 기도를 올리기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역경에서나 순경에서나 그리스도인들은 저 하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그 날을 고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가 완성되고 거기서 우리는 의와 평강과 영원한 기쁨의 완전한 실행으로 말미암는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4) 끝으로 이 간구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전도하고 잘 대표하겠다는 서약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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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그 뜻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의 자아 계시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부터 먼저 시작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먼저 시작하는 것,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세우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느냐, 이 양자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종교는 노예적이고 맹목적인 복종, 또는 달갑지 않은 의무와 내키지 않는 금욕이 되풀이되는 고통스럽고 지긋지긋한 행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 경우 미지의 존재인 하나님의 뜻은 인간들에게 있어서 보다 강하다는 이유로 통치권을 휘두르고 복종만을 강요하는, 독재적, 암흑적 숙명,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어떤 세력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떤 주권적 의지만을 가진 존재로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시고 이 목적을 위하여 모든 위대하고 아름답고, 질서 정연한 만물(창조물)에 자신을 반영하시고, 인간들의 복잡 다단한 세상사를 통해 역사 하시고, 자기 이름의 음절 하나 하나를 하나님의 말씀 속에 짜 넣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먼저 생각할 때, -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존경스럽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 우리는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임 을 확신하게 됩니다. - 우리는 의로우신 사랑의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선한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복종은 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복종은 기쁨이 되며,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우리의 의지의 굴복은 즐거운 사랑의 표현이 됩니다. - 그것은 노예적 복종이 아닌, 자식으로서의 효성의 순종이 될 것입니다. - 그것은 자기보다 힘있는 어떤 세력에 대한 내키지 않는 복종 대신, 사랑과 선의 근원에 대한 즐거운 순종이 될 것입니다. -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자기 체념대신 신뢰심 깊은 의존 행위가 될 것입니다. - 그것은 달갑지 않은 의무의 고통스런 억지 준행대신 자발적인 사랑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로 시작하는 사람은 노예이며, 실제로 그 뜻을 전혀 이행하지 못합니다.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로 시작하는 사람은 아들이며 충심에서 우러난 순종을 바칩니다. 바로 이것이 주기도문 각 구절의 상호 순서가 현재처럼 이루어진 한가지 이유입니다. 그리고 "뜻이 이루어지 이다"라는 간구는 "나라가 임하옵소서"와 관련된 보충 간구로도 볼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이 간구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뜻이…이루어지 이다"라는 문구는 문자적으로 '당신의 뜻이…행해지이다'입니다. "뜻"에 해당하는 헬라어 델레마는 '소원, 욕망{구), 의향, 의사. 기쁨. 뜻, 의지'를 의미합니다. "이루어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데토는 여기서 '행해지다'를 뜻하는 기노마이의 명령 과거 수동 디포넌트이며. '행해지게 하옵소서'입니다. 그리고 과거형이기 때문에 완전한 행해짐(실현)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그 뜻이 행해지는, 곧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표현을 살펴보면
(I) 하나님의 뜻은 그의 소원입니다. -요한복음 6:40에서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이란 말은 그의 "소원"을 의미합니다.
(2) 하나님의 뜻은 그의 목적입니다.- 디모데후서 I:9에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 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자기의 뜻'이란 말은 그의 '목적'을 의미합니다.
(3) 하나님의 뜻은 그의 기쁘심입니다.- 에베소서 1:9에서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뜻"이 '그 기쁘심'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의 뜻은 그의 계획입니다.-사도행전 2:23에서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이라고 말했고, 4:28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성에 모였나이다"라 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나 "하나님...의 뜻"은 그의 계획을 의미합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의 뜻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의사(意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생각하면 나라는 그의 주권이 행사하는 영역이고, 그의 뜻이란 그 나라의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사(意思)입니다. 주의 교훈과 명령도 포함합니다.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7:22이하에서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 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악한 자들은 하나 님의 법을 범한 자들입니다. 주님은 또한 마태복음 7:21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법인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인간 구원과 그것을 통한 의와 사랑과 진리의 실현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이…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간구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눅 22:32; 행 23:14).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요6:38; 엡6:6). 우리는 주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롬 l2:2; 골 4:l2}. 이렇게 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인 의와 사랑과 진리가 완전히 실현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모든 신적 계시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곧 하나님의 존재, 성품이 알려진 연후에 하나님의 뜻이 선포됩니다. 이 순서는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몇 가지를 시사해 줍니다. - 하나님의 뜻은 단순한 전능적 권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뜻은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뜻의 범위와 방향은 하나님의 이름{곧 성품)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상이 선하신 사랑의 하나님의 뜻, 곧 아버지의 뜻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 흑은 하나님의 뜻과 관련하여 전능한 독재자, 불가사의한 주권자, 무자비한 운명, 냉정한 숙명 등의 온갖 잔흑하고 무서운 관념을 일소시켜 버립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잘못된 관념에 의해 기독교 신앙이 상당히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경향은 성경이 아닌 우리 인간들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I) 어떤 사람은 실망하는 체념의 어조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합니다. 힘쓰고 애써도 불가능해서 어떻게 할 수 없어서, 하나님이 너무 강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을 전제로 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흑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힘의 붙잡혀서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 어떤 사람은 지긋 지긋한 반항심으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스위번은 하나님의 쇠발에 인간이 짓밟히는 느낌이라고 말했습니다. 베토벤은 외로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입술은 악물고 손은 부러지고 마치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 휘두른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적대하지만 그의 힘이 너무 강해서 어떻게 할 수 없이 의지로 굴복하고 속으로 격한 반항심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3) 어떤 사람은 분한 마음을 가지고 억지로 하나님의 뜻을 복종합니다.
(4) 어떤 사담은 냉랭한 의무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5} 어떤 사람은 믿음과 사랑에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이든 간에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건물을 지으려하거나 개조하거나 수선하려할 때 기사를 찾아가서 의논할 것입니다. 그 기사는 자기의 뜻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당신이 전문가이니까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전문가이시기 때문에 그에게 완전히 의지하고 맡기는 것이 가장 유익한 것입니다. 뉴톤은 '만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단 하나의 선택의 권한을 주신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그것을 선택해 주실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계약 교파의 일을 보던 리차드 케미론이 살해되어 머리와 손이 잘렸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같은 이유로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원수들이 그 아버지의 슬픔을 더해주기 위해 아들의 머리와 손을 그에게 가지고 와서 이것이 누구의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핼쑥한 아들의 머리와 손을 잡고 거기에 입맞추면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 아들입니다 내 귀여운 아들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주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주님은 나도 내 가족도 배반하신 일이 없고 언제나 우리를 위해 은혜와 긍휼만을 예비하셨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W.Barklay}.
여러분 욥은 그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에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다"라고 했으며, 또한 "그가 나를 죽이실찌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생활 전부가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사랑의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그의 사랑과 선하심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 이다"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알지 못할 어떤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분별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했고, 에베소서 5:17에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모든 신적 계시로 알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그의 뜻을 계시하십니다(시 l19:105; 딤후 3 :16.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하나로 묶어서 말한다면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인간의 구원과 성도의 거룩, 즉 의와 사랑과 진리의 완전한 실현입니다-요 6 : 40; 살전 4 :3). - 하나님은 섭리와 환경을 통해서 그의 뜻을 보여주십니다(잠 l6:1l, 9; l9:21; 행 4: 28). -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그의 뜻을 보여 주십니다(창 24:12이하). - 하나님은 꿈과 환상을 통하여 그의 뜻을 보여 주십니다(행 l6장). - 하나님은 시험을 통하여 그의 뜻을 보여 주십니다(고후 12:7; 벧전 l:6, 7; 4:12, 13; 야 1:2, 4). - 하나님은 지혜{경험, 이성적 사고, 지식)를 통하여 그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참 지식을 쌓는 수업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이제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 순종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과 거룩하게 여기는 행위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다음 사실에 주목합시다.
(1) 순종의 본질은 내적인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야 합니다.
(2) 즐거움과 사랑에서 우러나지 않은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 순종은 강제적인 일이 아닙니다.
- 순종은 기분 언짢은 일이 아닙니다. - 순종은 하기 싫은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어떻습니까?
(3)하나님의 진리의 원리들은 모든 삶을 아주 자연스럽게 지배합니다. 그 원리들을 배웁시다. 그 원리들을 알게 되면 온갖 안식이 뒤따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는 온갖 크고 작은 행위를 지배관리하는 권능이 있습니다.
(4) 신앙이 없으면 실질적인 의는 전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도덕의 진정한 토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 내지 그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강단에서 신조보다 실제 삶에 대한 교훈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양면을 다 지니고 있습니다. 이론적, 실천적 도덕률의 유일한 토대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해야 도덕적인 의로운 사회가 이룩됩니다.
(5) 실천적 순종이 없는 신앙은 불구이고 가짜입니다. 사상과 감정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신앙은 삶에 영향을 주도록 되어있습니다. 과연 신앙이 여러분의 생활을 영향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영향을 하고 있습니까 ? 하나님의 자아 계시의 궁극적 결과는,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됨으로 말미암아 오게 되는 궁극적 결과는 인간의 삶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치가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는 시금석입니다. 성품과 행동이 모두 중요합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 고백의 최종적 결과가 어떠해야할 것인가에 관해 우리 모두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에 대한 참된 경외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영적 복종, 이 모든 것의 최종적 영역은 인간성의 완전한 성화와 삶의 자유로운,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우리는 모두 기독교적인 감정과 의식(consciousness)을 일상 생활과 분리시키기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신앙적 감정을 가진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현장에서는 그들이 죄를 밥먹듯이 짓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확신, 결심과 행동 사이에 언제나 불균형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원리 원칙을 완전하게 실천하지 못합니다. 중력이라는 힘 때문에 날아가는 화살은 결국 밑으로 떨어집니다. 활의 성능이 제 아무리 좋고, 목표를 제 아무리 정확히 조준하고, 손의 힘이 제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활을 쏘았을 때 화살의 진로는 직선 아닌 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또 한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기계가 진공 속에서는 작동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찰력과 대기 압력이 기계에 작용하여 기계를 멈추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교리와 실천 문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신자의 순종 문제도 그렇습니다. - 우리의 순종은 죄로 인한 중단이 있습니다. - 유흑으로 인한 저항이 있습니다. - 무지로 인한 결함이 있습니다. - 연약으로 인한 실패가 있습니다. - 피곤으로 인한 휴지가 있습니다. - 반역의지로 인한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이행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못하고 간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일치나 간격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란 꾸준한 기도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꾸준한 노력과 회개로 줄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기도는 하나의 예언이며 소망의 불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합니까? 기도하고 노력해도 잘되지 않습니까? 실망하지 맙시다. 희망을 가지고 계속 기도하고 노력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여기서도 여러분의 생활에, 가정에 그리고 땅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의 하는 일이나 사업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입니다. 고아의 아버지이자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 목사는 어떤 사업이든지 먼저 하나님의 뜻에 합의한 것인가를 기도하여 보고 시작하고 분투할 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의한 것인가? 그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를 물어볼 것입니다. 만일에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당신에게도 좋지 않은 것이니 전혀 관계하지 마십시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될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또 끝까지 계속해 야 할 것입니다. 기도와 믿음으로 그 일을 착수하고 절대로 단념하지 마시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시오. 당신 마음에 부정한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일에 그러면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모든 죄는 다 내어놓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을 믿으시오. 하나님을 섬기고 믿으시오. 하나님께로부터 큰 일이 이루어질 것을 기다립시오. 만일 축복이 더디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시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시오. 오직 영원히 찬양 받으실 우리의 구주 예수님의 공로만 믿고 의지하십시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무한하신 주님의 공로에 의지해서만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우리가 하는 사업이 열납될 것입니다(엡4:l; 5:l7)라고 죠지 물러는 말했습니다.
4.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모든 바람의 총화입니다.
이것이 최후의 고상한 간구입니다.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되면 우리는 완전해지며 지극한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합시다.
(I) 인간의 가장 고상한 존엄성은 순종입니다. 우리 인간도 의지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도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인간의 의지는 복종을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의 의지는 다스림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 본연의 위치는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2) 하나님께 순복하는 인간의 의지는 자유와 힘과 안식을 누립니다. ①자유에 대해서-하나님께 순종하는 의지는 자유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가 뭉개지거나 흡수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순종가운데서 자유로이 작용되기를 원하십니다. 노예 상태와 그리고 죄와 악의 짐에서 벗어난 의지야말로 진정으로 자유로운 의지입니다. ②힘에 대해서-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의지력을 강화시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죄는 의지를 억압합니다. 순종은 의지의 힘을 길러줍니다. 안식에 대해서-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의지에 안식을 줍니다.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것은 자아 의지의 투쟁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인간을 통해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지속하는 살아있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까? - 힘을 가지고자 합니까? - 안식을 누리고자 합니까? -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시다. 목숨을 다하여 순종합시다.
(3) 순종의 결과는 완전한 지복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인간의 유익과 선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인간들과 국가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준수된다면 세상의 모습은 변할 것입니다. 이 기도는 자기 민족을 열렬히 사랑하는 자들이 소원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는 내부로부터 개혁을 일으켜 생명을 부여하며, 이것이 법률과 제도에 영향을 미치도록 만듭니다. 여기에는 모든 사회 개혁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기도를 통하여 그들의 일이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지식을 확산시키려고 노력하고, 그들 자신 하나님의 뜻과 조화하는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이라는 것을 배워서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있는 모든 재난과 불행은 인간이 자유를 남용하고 불순종으로 인한 것입니다. 불순종의 날로부터 이제까지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불행하다면 불순종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땅위에 이루어졌다면 슬픔과 질병, 고통과 죄악과 억압과 폭력 등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의 결과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행복의 비결이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불행하다면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를 섬기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기에는 새벽기도회, 주일 예배, 금요 기도회, 수요 예배, 그것 모두 참예하기 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이 좀 편하게 살아야지,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반쯤은 포기해버립니다. 그래서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반쯤 불행을 얻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목숨을 다해 주님을 섬긴다면 당신은 어느 때보다도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믿습니까?
다음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란 문구입니다. 이 간구는 외견상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을 순종의 표본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늘에서"란 말에서 우리는 가시적인 우주를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주를 주의 깊게 살펴본 자라면 거기에서 아름다움과 질서를 느꼈을 것입니다. 우주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의지의 본질에 대한 위대한 계시입니다. 평화로이 떠다니는 구름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합니다. 별들은 불타고 혹성들은 회전 운동을 합니다. 하늘의 천체들이 그들의 궤도를 유지하며, 계절이 계속 반복되었으며, 인간의 필요를 위하여 땅이 그 소산을 산출합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명하심에 따라 지금까지 계속됩니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고 있는가? 그러나 이것이 이 문구가 의미하는 전부는 아닙니다. 별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어떤 뜻을 맹목적으로 준행하며, 자기가 분별할 수 없는 어떤 세력에 의해 움직입니다.
둘째로, 유일한 참된 순종은 하늘에 있는 영적 존재들의 순종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또 자신들의 삶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을 명상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바다가 조류를 움직이는 달을 쳐다보듯이 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하늘의 이 영적 존재들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이행하고 있습니다. - 그들의 순종은 분명히 완전무결합니다. - 그들의 순종은 죄로 인한 중단이 있을 수 없습니다. - 연약 때문에 순종을 위해 노력하는 일도 있을 수 없습니다. - 유흑으로 인한 저항이 있을 수 없습니다. - 무지로 인한 결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 피곤으로 인한 휴지(식)가 있을 수 없습니다. - 반역적 의지로 인한 고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확실히 자유롭고 항구적이고 자발적이고 행복함이 넘치는 순종입니다. 순종은 그들의 모든 삶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전존재 행위가 그들 자신들이 바라보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봉사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활동적인 삶입니다. 이 기도에서 표본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하늘에 있는 완전한 영들의 충만한 지식이나 그들의 지복이 아니라 그들의 섬김입니다.
어떻게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합니까? 그 섬김을 살펴봅시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완전한 순종을 합니다. 그들의 순종은 완전합니다.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어디든지 신이 가려하면 생물도 신의 가려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신이 그 바퀴 가 운데 있음이라 저들이 행하면 이들도 행하고 저들이 그치면 이들도 그치는 것입니다(겔1:l2, 20, 21)". 그들은 하나님께 완전한 예배를 드립니다.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사6:3; 계4:8). 그러므로 그 천상적 존재 양식을 오직 한가로이 속세를 떠나 아무런 일도 의무도 없이 조용하고 평안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미래의 천상적 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지극히 순수한 행복의 비밀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응에 있으며, 현세에서는 그러한 순응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짐에도 그 행복을 맛볼 수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이 행하는 저 하늘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복락이 있을 것입니다. 그 복락이 어떠하겠습니까?
셋째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오신 것을 하나님의 특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루기 위해서 입니다. 요한복음 6:38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4:34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9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기도하면서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를 결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 곧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지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에게 바라시는 최고 최후의 요구는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하늘에 있는 영적 존재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에 뜻에 대한 인간들의 이행이 그의 세상 역사의 최후를 장식할 궁극적 목표입니다. "주께서 주의 뜻에 따라 하늘의 군대와 땅의 거민 중에 행하시도다"라는 말씀이 언젠가는 현실로 나타날 것입니다. 만유가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 협력하게 되고 한 목적, 한 뜻, 한 사랑이 온 피조계에 충만하게 될 그때 우주에는 얼마나 영광스런 조화의 소리가 울려 퍼지겠는가?를 생각하며 소망합시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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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연속되는 두개의 간구,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와 "오늘날 우리에게 주옵소서"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전자는 지극히 넓고 후자는 좁습니다. 전자는 순종적인 세계에 대한 큰 기대에 차 있고 후자는 개인적인 필수품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전체 구조 속에서 이 폭이 좁은 지상적 간구가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또 이 간구가 서 있는 위치도 그에 못지 않은 교훈을 줍니다. 주기도문의 전반부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서 최우선 순위를 점유해야 할 욕망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과 관련하여 행해야 하는 것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들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전반부는 인간 영혼과 삶의 성화 과정의 법칙처럼 내부에서 시작해 외부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출발하여 땅이 하늘처럼 될 수 있도록 그 하늘을 땅으로 끌어내립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은 상호일치하여 하나의 음악 을 만듭니다. 이어 주기도문의 후반부에서는 개인적인 요망 사항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요망사항들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정당하게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이름에 대한 경외와 명상만이 기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물론 이것이 기도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말입니다. 자아 몰입적 명상의 표현만이 기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기도는 어떤 본성적 욕구와 의존심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주적 욕망의 발언, 자아를 정복한 어떤 존재의 표현이 기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인간의 완전성은 욕망을 전혀 가지지 않는데 있거나 의지와 소원이 없는 어떤 상태로 몰입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소유하여 전혀 결핍이 없는 상태, 여기에 인간의 완전성이 있는 것은 더 더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심 없는 사랑, 즉 다른 사물이나 일에는 전혀 관심 없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상태(이러한 감정은 불가능하다)가 완전한 기도는 아닙니다. 기도에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의존을 인식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기도는 우리의 여러 가지 소원에 대한 표현입니다. 기도는 자기의 뜻을 하나님께 복종 내지 순응시킨 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솔직하게 아뢰는 행위입니다. 기도는 경배입니다. 기도는 또한 요구입니다. 우리는 한편으로 "우리 아버지여"를 외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주옵소서"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간청에는, 인간 이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선물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 전 후반부 양편이 어떤 식의 하나의 완전체를 이루고 있는지도 주목해 볼만합니다. 전반부는 하늘 아버지의 위대성에 대한 명상에서 출발하였으나, 후반부는 양식을 위한 부르짖음에서 출발하여 생의 온갖 재난을 통과하면서 서서히 울라 갑니다. 결핍으로부터 시작하여 침해, 인간의 무자비와 증오로 건너가 다시 인격적 연약성과 세상의 유혹, 죄악의 재난과 슬픔의 재난으로 나아가고 울부짖음과 눈물이 지난 후에는 원점에 이르러 하늘과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마지막 송영은 한바퀴 원을 그리면서 서두의 부름, "우리 아버지여"로 되돌아옵니다.
기도문 전체는 인간의 온갖 슬픔과 곤핍으로 범람하는 홍수를 통과하면서 지친 길을 비행하다가 노아의 비둘기처럼 그 비상 속에서 탄생한 평화를 물고 하나님 안의 본향으로 되돌아와 처음의 출발지점에서 멈춥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의 삶을 시작하는 자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확신과 찬양으로 마칠 것입니다.
1. 먼저 "일용할 양식"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일용할 양식" 이란 문구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 나머지는 해당 항목에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일용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우시오스(헬1967)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와 누가복음 11:3에 나오며, 그 밖의 유일한 예는 파피루스에 1회 나올 뿐입니다.
이 용어는 (l) 에피에나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면, '정규적인, 매일의, 적절한'이란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헤 에피우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면 '다음날을 위한'이나 '다가오는 날을 위한'이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오리겐은 이 단어를 에피 텐 우시안(생존을 위해 필요한)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오리겐의 모국어가 헬라어였으므로, 그의 해석이 지니고 있는 언어학적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잠언 30:8의 말씀으로 확증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6:4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날에 필요한 분량만큼의 만나만을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삶에 필요한 양식을 위해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4} 이 단어는 아마도 레요마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중의 의미를 가졌으며, 이 이중적인 의미를 헬라어로 나타낼 경우 두개의 용어 즉 에피우시오스(그날 필요한)와 세메론(오늘을 위한)을 결합시켜야만 표현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그 날에 필요한 양식을 위한 매일의 기도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 이미 시작되었으며 언젠가는 완성될 것으로 예상되는 새 시대에 사는 제자들에게 장기간의 양식을 위한 기도는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을 것입니다. 이 견해도 그럴듯합니다.
"양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토스(헬740)는 '빵'이나 '빵덩이'를 뜻하며, 빵은 분말가루로 구운 것으로 여러 종류가 있으며, 신약 시대의 성경상의 지역들에서 주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한글 개역판에서 이 단어는 '떡, 양식'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일용할 양식"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해석의 역사를 살펴보면, (l) 성만찬으로 해석했습니다. 주기도는 처음부터 성만찬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는 성만찬 때 영적 양식을 받기를 구한 기도라고 해석했습니다.
(2) 영적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요6:35, 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유대인의 해석을 따라 천국의 양식(떡)으로 해석했습니다. 누가복음 14:15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그의 택한 백성을 모아 놓고 큰 잔치를 베풀 것이며, 이 간구는 이 메시야 잔치에 참여시켜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5} 육신의 필요한 양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칼빈과 루터는 육적 양식으로 보았습니다. 루터는 이 일용할 양식을 광범위하게 육신 생활이나 생명 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용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우시오스란 말의 의미가 (4)번의 의미로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예수님께서 주로 육신에 필요한 것을 생각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것을 지지하는 한 파피루스 단편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파피루스 단편은 부인들이 물건을 사기 위한 메모지였는데, 어떤 물품에는 이 에피우시오스란 말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날에 필요한 식료품을 사기 위해 그 품목을 적어 두는 메모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간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것. 특별히 그 날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십시오' 하는 아주 솔직한 기도입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뒤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가 뒤따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곧 자신의 먹는 양식이었던 주님을 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영적 양식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양식에 대한 간구가 뒤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서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생각하고 계시며, 우리에게 맨 처음으로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생존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고 생명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존해 있다는 바로 이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간구는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것을 취급하고 있으며, 우리 주님은 이것으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살아있으니까 영혼을 중요시 여기며, 육적 생명이 있으니까 영적 생명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육적 생명을 무시해버린다면 영적 생명이나 신령한 것을 염려할 소지가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적 존재(생명)는 이 세상에서 영적 임무수행과 행복에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육신에 필요한 것을 먼저 구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양식이 오로지 영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양식이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 필요한 것들을 포함한다하더라도 주로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주기도문의 여러 간구들 중에서 이 하나를 제 외하고는 모두 우리의 영적 필요와 관련이 있습니다.
2. 이 간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한 양식에 관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1) 이 간구는 첫째로 정당한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될 수 있는 것들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여기서 세상적인 요망사항을 무시하고 인간의 물질적 본성에 뿌리를 둔 욕망을 죄로 간주하는 환상적인 신령주의를 배격합니다. 이 기도는 일상적인 선물들의 가치에 관하여 우리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놀라운 증언입니다. - 여기에 일용품에 대한 요구가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고자 하는 그 위대한 욕망과 나란히 서 있습니다. - 여기에 금생의 삶을 평가절하하는 잘못된 금욕주의는 없습니다. - 여기에 금생의 축복에 대한 욕망과 그것을 정당하게 누리는 것을 죄악적인 것으로 여겨서 경멸하는 병적인 어조는 없습니다.
물질적 요구와 세상적 이득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은 이교도적이고 비기독교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위한 간구가 천국에 관한 기도 뒤에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적 요구와 세상적 이득을 경멸하고 거기에 무관심하는 것도 역시 이교도적이요 비기독교적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위한 기도가 이 여러 기도 제목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를 바르게 이해하면, 육체 속에 있는 영을 망각하는 잘못된 감각주의와 영을 감싸고 있는 육체를 망각하는 잘못된 영성주의, 이 두 가지가 가져오는 해악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마음속에서 진리를 갈망하도록 만드신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도 갈망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양자를 모두 갈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에 위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되 오로지 그것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먼저 구할 뿐입니다.
(2) 더 나아가 이 간구는 건전한 자연적 행위를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지상적 사물들에 대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당연히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성결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응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 말속에도 역시 큰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적 요망 사항보다 영혼의 건강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금생의 온갖 일들에 대한 욕구에 '만일 주의 뜻이라면'이라는 전제 조건을 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본문이 말하는 보다 낮은 축복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우리가 갈망하는 모든 것,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요구는 기도로 전환될 수 있는 그런 욕구여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히 구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러한 것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실제로 좋아하지도 않는 것들을 위해 듣기 좋은 소리로 입술만을 가지고 유창하게 기도하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온갖 소원을 기도로 아뢰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감히 기도로 옮기지 못하는 욕망의 소유와 실제적 소원이 아닌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분야를 우리가 간구에 포함시키도록 합시다. 우리 자신의 영혼에 진실합시다. 누구든지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3) 더 나아가서 이 기도는 하나님을 일용한 양식을 주시는 자로 인식하는 행위입니다.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관련하여 성경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 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 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한다"라고 노래했습니다(시104:27-28). 하나님께서 어린 까마귀가 울부짖을 때 그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산 위에 풀잎을 자라게 하십니다. 만물의 눈이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시편 104편의 한 아름다운 구절에서는 밤중에 숲 속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사자의 포호소리 조차도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으로 여겼습니다-"젊은 사자가 그 잡을 것을 쫓아 부르짖으며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한다"라고 했습니다. 루터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하찮은 참새를 먹이기 위해서도 프랑스 왕의 수입 금액으로 살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것들을 지출하십니다'. 이 우주적 선물은 그의 운명이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자들에게 참으로 적용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도 해당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 히 기억하시리로다"(시111:5).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실 때 하나님의 손길(제 l원인)은 제 2원인 아래 감추어져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2원인이 우리 눈앞에서 그 진실을 가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의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자연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우리는 그 힘의 질서 정연한 작용을 자연법칙이라고 부릅니다. 그 힘은 하나님의 서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원대로 각 씨앗에 몸을 주지 않으신다면 성장도 수확도 없을 것입니다. 양식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 하신 결과입니다. 바울은 루가오니야의 거친 농부들에게 "하나님이...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행 14:6,11) 양식의 분배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우리 자신의 노력과 기타 수단등(의 제 2원인)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기계의 작동은 그것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연결되어 있는 동력으로 인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상에 나타나는 결과는 하나님이 그 원인입니다.
양식에 의한 양육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어떤 자연적 실체든지 그 고유한 속성들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의 작용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존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탱하고 유지하시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계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때, 우리의 건강, 우리의 생존이 그의 손안에 있음을 적어도 하루에 한번 이상 상기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자 주 상기할수록 그만큼 더 좋습니다. 양식과 필요한 모든 것은 그로부터 옵니다. 창세기 28:20절을 보면 야곱은 하나님을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라고 기도했습니다. 죠지 물러는 2,000명이 넘는 고아원과 성경 연구회를 운영하면서 단 한 번도 사람에게 꾼다거나 구걸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고 '날마다(오늘)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93세를 살면서 5만 번 이상 크고 작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이 간구는 실제로 배고픈 현실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박하게 느껴지는 기도가 되지만 재물을 창고에 가득 쌓아둔 사람들에게는 실감이 없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부자니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신다면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밤 네 영혼을 내가 취하겠다. 그러면 네 재물이 뉘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창고에 식료품이 가득 쌓여 있을지라도, 당신이 은행에 수천 수억을 저축해 놓았을지라도, 당신의 재산이 전국에 산재해 있을지라도 그것이 당신의 일용할 양식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이 분배해 주셔야 당신은 일용할 양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으로 철저히 신뢰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간구는 이상과 같은 모든 사실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을 가능한 한 일상 생활로부터 멀리 떼어놓으려는 현대인들의 경향과는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룹니다.
(4) 이 기도는 양식을 얻기 위한 우리들의 노동을 신성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간접적 방법 곧 노동은 크나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일용할 양식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기 위해서 우리는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노동의 책임을 느끼고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노동을 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공중에 새를 보라 백합화와 들풀을 보라 아무도 먹여주지 아니하고 아무도 입혀주지 아니해도 먹으며 입지 않는가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합니다. 그래서 노동의 책임과 중요성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새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새들이 얼마나 부지런히 먹이를 구하러 다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들풀과 백합화도 땅에 뿌리를 박고 부지런히 영양분을 취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잠6:6)은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말했습니다.
노동은 기도입니다. 가끔 이 말은 땀이 기도를 대신할 수 있다는 의미로 생각하지만 이 표현이 그런 뜻은 아닙니다. 이 문구는 활동적 삶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성별될 수 있다는 의미이며,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빵을 얻기 위한 우리의 온갖 노력이 기도처럼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 고귀한 것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한 다음, 밖에 나가서는 기도시에 감히 말하지 못한 떳떳하지 못한 수단을 동원해 그 양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재물을 모을 수 있겠습니까? - 나의 속임수를 축복하소서! - 나의 교활한 행위를 축복하소서, - 야곱이 그 아비를 속여서 축복을 가로챈 것 같이 축복해 주소서. 이런 기도는 옳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계비를 벌기 위해 행하는 일을 놓고 감히 기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오히려 죽음을 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5) 더 나아가서 이 기도는 우리가 받은 축복에 대해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고백입니다. 시인은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시136:26).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이 점에서 전혀 잘못이 없습니까?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망각하는 행위야말로 얼마나 이교도적입니까? 온갖 기쁨 가운데서 늘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가짐, 매일 매일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자세에서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자동차를 처음 사서 운전할 때는 하나님 오늘도 무사히...하며, 간절히 기도하지만 몇 달이 지나면 운전대를 잡자 말자 기도 없이 차를 몹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심을 먼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자비를 얻는다면 날마다 찬양의 노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침마다 주의 사랑이 우리를 깨웁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온종일 우리를 따라다니며 은혜를 베풉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식탁을 펼칠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교훈 또는 기쁨을 주실 때마다 그 사랑이 매일 새롭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감사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도 그의 주시는 선물처럼 끊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3. 이 간구는 나만의 양식이 아닌 우리 모두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는 형제들과의 연합하는 사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옵시고"라는 말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이웃에게도 주시기를 구하는 이웃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인간 삶의 법칙으로 묘사합니다. 빵을 위한 투쟁은 동료들에 대한 형제애적 관심의 크나큰 적이라는 것입니다. 장사나 상업은 전쟁이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한 사람의 소득은 다른 사람의 손실이라는 관념에서 출발하여 재산은 약탈물이라고 까지 선언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옵시고" 이 한 절의 기도문은 확실히 우리에게 보다 훌륭한 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배의 한 구석에 맺혀 있은 염기 어린 물방울을 위해 서로 싸우는 완악한 사람들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모두가 부족함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식탁에 둘러 않아 위대하신 아버지 앞에 함께 무릎 꿇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식탁 아래 누운 개까지도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이 기도를 통해 우리가 양식을 위한 간구에서 남과 일체감을 가지고 공동전선을 펴야할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제하는 일체성을 깨닫는 자는 자기의 소유물이 남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먹고 살 양식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모두 하나입니다. -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삶에 필요한 양식을 구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자라는 점에서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한 공동체의 일원인 자가 양손에 자기 몫을 가득히 움켜쥐고 한쪽 구석으로 가서 홀로 야금야금 먹는다는 것이 과연 바른 일이겠습니까? 그러한 행위는 좀 과한 말 같지만 늑대들의 잔치에서나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한발로 먹이를 밟고 눈을 이리 저리 굴리면서 도적을 경계합니다. 이것은 한 형제인 인간들이 할 짓이 못됩니다.
단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입니다. 이 간구는 각자가 자신을 위해라는 원칙보다 더 나은 생활 양식이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칼라하리 사막지방의 사람들은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합니다. 이러한 환대는 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규범이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사막에서는 누구든지 나누어야만 합니다. 사막에서는 어떤 사람도 자기를 위해서만 음식을 보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공동의 재산으로 간주됩니다. 그들에게는 나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 양식은 저장해 두는 것도 아니고 절약해야 하는 것 도 아닙니다. 단지 내 일의 필요는 공급을 신뢰함으로써 오늘 지금 먹고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방식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삶의 태도는 분별이 없고 사려 깊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삶의 태도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핵심적인 기도에 가까운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이 자기 가족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단지 '나'와 '나의 것'만이 배가 고프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것을 저장하기보다는 함께 앉아 그것을 나누어 먹는 그러한 생활 규칙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병이어를 생각해 봅시다.
오늘의 세계는 어떤 사람은 풍요를 누리고 어떤 사람은 굶어 죽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이 사막의 사람들과 같이 자기의 가진 것, 심지어 송아지까지 남과 나눌 수 있다면 식품은 남아돌아 갈 것입니다. 누가 우리와 함께 먹어야 할 것을, 나누어야 할 것을 숨기고 있습니까?
유숩(Yussouf)은 나그네를 환대하여 '이 장막은 나의 것이야 그러나 그보다 하나님의 것이지, 들어와 평안하게 있으라. 그대여 자유로이 내 모든 저장품에 참예하라'고 말했습니다. 초대 교회는 제 재믈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인간은 좌우지간 전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개인의 소유물에 대한 점유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각자는 자신의 소유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재산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마음대로 처분할만한 힘이 있으며, 법적으로 그러한 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에서, - 당신은 그것을 가지고 있으나 그럼에도 당신은 소유주가 아닙니다. 단지 청지기일 뿐입니다. - 당신이 재산을 가지고 있으나 자신의 것으로 점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위탁받아 보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 당신은 한 가족, 한 커다란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서 그 재산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 당신은 남에게 베풀기 위해서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 당신은 상호의 애정의 끈을 공고히 하고 위대한 수여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끈을 굳게하기 위해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간구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가지는 공동체적 유대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 우리는 자선을 원치 않습니다. 다만 공의를 원할 뿐입니다. - 가난한 자들은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 그들의 외침이 주님의 귓전에 울리고 있습니다. - 그들에게서 떠난 그것이 부정한 수단에 의해 감취어지고 있습니다. - 성경은 언제나 자비와 베풂의 자세를 가난한 자와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논리입니다.
모든 부유한 자들이여, 그대는 가난한 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이 빚을 갚지 않고 떼먹을 작정입니까? 그들로부터 입은 은혜를 갚지 않으시렵니까?
이러한 관점에서 고운 옷을 입고 호화로이 연락하던 부자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음식을 삼았던 나사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대조적 현상은 무수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와 같은 빈부와 격차가 기독교 문명, 상업의 원래 목적과 상치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격차를 좁힐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저 적색 공산주의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소유물을 하나님께 귀속시키는 진정한 공동체의 삶을 체득하여 실천에 옮기고 자신의 소유물이 공동체의 복지를 위한 것임을 깊은 깨닫는데 있습니다.
로버트 번즈는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이 있으나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나 먹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먹을 것도 주시고 먹을 수 있게도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 기도보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 님, 그들도 저에게와 같이 먹을 것을 주시고 또 먹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벌에게서 교훈을 받습니다. 벌은 6개월이라는 짧은 생명을 가지고도 열심히 일합니다. 벌통에 있는 잘 먹지 못하는 오층이 있으면 동료 벌이 꿀을 먹었다가 다시 토해서 이 유층에게 먹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먹이가 한정되어 있고 먹이를 더 구해 오지 못하면, 지금 남아있는 먹이를 똑같이 나누어 먹다가 함께 죽는다고 합니다. 또한 벌통 안에 적이 침입하면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적에게 침을 쏘고 자신은 죽는 것입니다. 어느 면에서 벌은 인간보다 더 훌륭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진 것을 함께 나눕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한 한 가족입니다. 형은 잘 번다고 하여 호화호식하고 아우는 못 번다고 하여 먹을 것도 얻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 회개합시다.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4. 이 간구는 오늘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오늘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론은 '오늘, 이날'을 뜻하며, 또는 '지금 시대를 나타내는 오늘날'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오늘날"이라고 번역할지라도 "오늘날"보다 '오늘' 필요한 것 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3의 주기도문에는 "날마다"{토 카드 헤메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을 얻지 못하여 불평, 원망할 때에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는 매일 매일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매일 아침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날에 필요한 양의 만나를 거두도록 하였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들이 내일 몫을 걷어 놓았더니 썩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매일 내리고 매일 거두어 먹은 것이 만나 입니다. 만일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 만나를 주셔야만, 그리고 사람들이 거두어야만 먹고 살 수 있도록 함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물은 광야의 이스라엘이 매일 아침마다 새로이 만나를 거두어 드렸듯이 현재의 긴급사태에 따라서 전달됩니다.
(l)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우리의 궁핍을 채우시는 이 방법의 아름다움과 복됨입니다. - 그 방법은 매 순간마다 그 특별한 성격을 보여줍니다. - 그것은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선물이 그 안에서 가지는 영광을 보여줍니다. - 그것은 매 순간마다 나타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행위와 매순간마다 출현하는 하나님의 빛나는 임재의 표식이 모두 합쳐서 무수한 점들로 밝고도 선명한 긴 선을 만들어 줍니다. -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생활에 매우 가까이 접근함을 실감케하여 줍니다. - 그것은 매 순간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된 존재임을 느낄 필요와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고, 매번 우리의 궁핍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 우리를 나아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끌어 줍니다.
매 순간처럼 매일 그 새로운 의무와 새로운 요망사항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옵니다. 어제의 음식은 오늘 우리를 부양하지 못합니다. 오늘의 힘은 오늘 하나님과 그의 새로운 공급으로 말미암아 임해야 합니다. 따라서 삶의 단조로움은 어느 정도 사라지고 매일 신선한 활기와 새로운 소망이 우리에게도 찾아듭니다. 밤의 잠이라는 고마운 벽이 어제의 임무와 피곤을 감싼 채 어제와 오늘 사이에 서 있습니다. 신선한 소망이 하나님을 새로이 의지하는 마음과 더불어 아침마다 우리를 깨우고 우리는 일어나 미지의 시간들을 바라보며,"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2) 그 다음 우리가 배우는 것은 미리 앞질러 미래사를 걱정함으로써 이 지혜로운 하나님의 법을 파기하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사전에 미래사를 계획하고 고려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개미나 꿀벌보다 못한 피조물이라 할 것입니다. - 자신의 인생에 어떤 확실성이 없는 사람, - 변화무쌍한 현상태와 조화될 수 있는 어떤 지속성에 대한 합리적 예견이 없는 사람은 지성적 혹은 도덕적 성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람이 빠지기 쉬운 앞일을 걱정하며, 염려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걱정은 무익하고 해로운 것으로써 우리로부터 힘을 빼앗고 우리의 지혜나 우리의 안전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이러한 걱정은 하나님의 공급법칙에 반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 필요할 때 자신 정량만 받습니다. 이를 더 일찍 받지 않습니다. - 우리가 그 지점에 올 때 비로소 길이 열립니다. 그때까지는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빌딩의 자동문을 보십시오. 그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서면 자동적으로 열립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행로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우리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의 물자 배급소를 돌보고 계시며, 우리가 물자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도록 우리의 수고를 덜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급법칙입니다.
우리는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고 불확실한 어떤 재난을 미리 그려보거나 혼자 멋대로 상상하여 걱정을 만들어 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염려는 오늘에 국한시키고 내일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맙시다. - 우리의 하나님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내 일도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 각 장소마다 무지개가 있듯이 매일 매일 밝은 빛이 있을 것입니다. - 우리가 메마른 땅으로 인도 받는다면(그렇다고 염려할 것 없습니다),거기서도 샘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가 주리기 전에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주실 것입니다. 빵이 주어지고 물이 확실히 공급될 것입니다. 내일도 오늘과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6:25}.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만이 자기 몫을 거두어 먹고서 오늘 자기를 먹이셨던 분이 내 일도 먹이실 것을 믿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밤잠자리에 들어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베일은 그대로 놓아두시오. 손으로 그것을 걷어 올려 앞일을 들여다 보려고 하지 마시오. - 지상적 수단에 의해 미래를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시오. - 오직 현재의 축복을 밝은 소망의 모체로 삼으시오. -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임을 명심하시오. - 그리고 자비로운 한계가 있는 하나님의 공급법칙을 수용하시오. - 당신의 욕망에도 그러한 한계를 두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그러면 형통하실 것입니다.
5. 이 간구는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만큼 양식을 구해야 합니까?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은 우리가 앞에서 이 간구의 의미를 살펴본바 '오늘'이라는 '그날에 필요한 양식'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양식을 의미합니다. 이와같은 간구는 우리의 욕망을 생활에 필요한 것에 국한시켜야할 것을 지적하여 줍니다. 우리가 가지기를 바라야 할 것,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권리가 있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 뿐입니다. - 더도 안되고 덜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 러한 간구는 우리 모든 사람을 하나의 평등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도록 그에게 내어 맡기는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가 왕의 입에서 나올 경우와, 거지의 입에서 나올 경우, 양자는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그러나 확실히 이 기도는 무절제한 욕망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생필품만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후하게 주시며 삶이 아름답게 장식되기를 원하십니다. 빵 이외의 것은 대개가 삶을 우아하고 세련되게 만들어 줍니다. 나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반대 운동을 전개 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호화로운 생활 양식과 이 기도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치스런 생활이 우아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시적인 소비 지출이 문화생활의 증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허영 심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양식을 구하는 것, 즉 우리의 욕구가 실제적 요망사항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이 기도를 올바르게 시행한다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나타나는 죄악적인 사치 행위는 종말을 고할 것이며 부를 축 적하는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수단들도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 검소한 생활과 드높은 사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 나의 부요는 소유물의 풍부에 있지 않고 나의 요구의 근소에 있습니다. - 사람이 원하는 것이 적을수록 신에게 더 가까워집니다.
이러한 말들이 진리 외에 매우 필요로 하는 것을 한 기준을 삼는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이 되겠습니까? 우리 각자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의 범위를 실상 이상으로 매우 크게 잡기가 쉽습니다. 당신이 젊든 늙든, 필요하다면 가난한 편도 택할 수 있는 용기 를 가지시오. 모든 사람이 다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 신의 욕망을 참으로 필요한 것에 국한시킬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굴은 잠언 30:8에서 "오직 필요한 양식을 내게 먹이시읍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6:6이하에서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는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고 말했습니 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3:5에서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고"(눅l2:l5),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보다 승한" 것입니다(시37:l6).
우리는 만나의 교훈에서 내일을 위해 더 많이 가지려고 남겨둔 부분은 벌레가 생기고 냄세가 난 것입니다. 얼마나 자주 재물이 사라지며, 그것을 얻기 보다 지키는데 더욱 힘이 들며, 때문에 그것은 소유자를 괴롭히고 그의 성품을 부패시키 거나 자녀를 파멸시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6:9에서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을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윤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간구를 앞의 더욱 고상한 기도들 뒤에 놓으셨다는 것과 이 간구를 잠깐 언급하고 곧 바로 보다 고상한 영흔의 요구사항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 유의합시다. 우리는 과연 제반 욕구 가운데서 물질적 욕망을 부차적인 위치에 놓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매일 매일은 복된 나날이 될것 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선물로 풍성할 것이며, 우리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참된 양식이신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여 도와 주옵소서', - 아멘 -
-------------------------------------------------------------------------- 주기도문 강해/공부 7 제5간구/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기도 마태복음 6:12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기도문의 후반부에 나오는 여러 간구의 순서를 보면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며, 매일의 용서도 필요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필요성도 양식의 필요성처럼 보편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빵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만드셨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용서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기도에 대한 응답도 양식을 구하는 기도에 대한 응답만큼 확실합니다.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용서를 보류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소서'와 '용서하소서'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욕구를 반영해 줍니다.
양식 곧 육신의 필수품 공급을 위한 기도가 다른 기도들에 선행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요망사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성에 있어서 뒤에 나오는 기도들보다 낮습니다. 용서는 영적 본성의 제일 욕구입니 다.
이 간구에는 죄 용서를 받는 4가지 단계를 암시해 줍니다. - 첫째로, 우리 인간은 죄인이며 죄를 계속 범합니다. - 둘째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근거로하여 죄인에게 용서를 베푸십니다. - 셋째로, 죄인이 하나님께 죄를 고백,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 네째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형제를 용서할 수있고 용서합니다.
이 간구는 이 네째 단계의 사람,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그의 자녀들이 날마다 짓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I. 이 간구는 죄를 의식하고 통회하는 기도입니다.
"죄지은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옵헤일레테스는 '빚진자, 의무를 지닌자, 자기가 상해를 가한 자에게 배상을 하지 않은 자'를 의미한다. 여기서 복수가 사용되어 문자적으로 '빚진자들'을 의미한다.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읍헤일레마는 '빚, 빚진 것' 또는 '의무'를 뜻합니다. 여기서 복수가 사용되어 문자적으로 '빚들, 빚진 것들'을 의미한다. 이 두 단어는 '빚지다, 의무가 있다(흑은 마땅히 해야한다), 은혜를 입다'를 뜻하는 헬라어 옵헤일로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단어들은 금전적인 빚만이 아니라 사람이나 국법에 대한 도덕적 의도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신적 규례를 위반하거나 신(神)의 은혜에 대한 댓가로 반드시 드려야 할 감사를 드리지 않을 때에도 그 사람은 빚진 자가 되어 제의적 참회 나 제의 행위를 해야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빚진자'는 '죄를 지은 자', '빚진 것'은 '죄, 죄짓는 것' 가리킬 수 있다.
'빚'과 '의무'는 한 단어입니다. '빚을 지다'와 '마땅히 해야 한다'도 한 단어입니다. 의무는 마땅히 해야할 일입니다. 의무는 남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여러 의무를 안고 있습니다. 양심이 속에서 우리가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속삭입니다. 이행하지 않은 의무는 빚입니다. 그 빚은 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하나님께 대한 것, 이웃에 대한 것, 자신에 대한 것으로 3분합니다.
(I) 우리 자신에 대해-우리는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는데 실패함으로 자신에게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의 영흔을 위해 신중하게 행동하고 자제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죄를 과중시킵니다. 우리의 기질, 혀, 정열을 조정하지 못하여 죄에 빠집니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이행하지 않는 의무, 악한 기질, 게으른 손, 밭고랑을 잡초가 가득하게 내버려두는 태만한 살림살이, 활시위를 최대한도로 잡아 당기지 아니하고, 거울을 밝게 닦아두지 않은 삶등에 대해 우리를 고 소합니다.
(2) 우리 이웃에 대해-우리가 이웃에 대해 짓는 죄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사랑과 도움을 주고 모든 선한 일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기, 증오, 앙심 등 나쁜 감정을 품을 때가 많습니다. 불친절하고 진실치 못한 말들을 발하며, 우리가 행한 일 때문에 남들이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양심은 이웃에 대한 의무 불이행, 불친절, 봉사의 기회를 무시하는 일, 기타 많은 과실 등을 놓고 우리를 고소합니다.
(3) 하나님에 대해-우리가 하나님께 짓고 있는 죄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전생명과 사랑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하여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우리는 이 형언할 수 없는 소증한 선물들을 어떻게 취급해왔습니까? 우리의 신앙 양심은 이러한 의무 불이행에 대해 고발합니다.
우리는 이와같이 우리의 의무를 3분하여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피상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이나 남에게 진 빚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빚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 없고...주를 위하여 살고"{롬l4:7, 8}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주를 위해 열심히 살았습니까? 우리가 주를 위해 열심히 살았으면 내 자신과 이웃에 대한 의무도 보다 더 잘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양심이 이에 대하여 우리를 고소하고 있지 않고 있다면 우리가 무지하거나 양심이 무디어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하늘의 제왕께서는 자기 백성에 대한 범죄를 자신에 대한 범죄로 간주하십니다. 우리의 과실을 하나님에 대한 죄로 돌리는 보다 엄중한 사상은 일면 불합리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상 지극히 복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무거운 빚을 제거할 수 있는 권한을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하늘의 채권주의 손에 두기 때문입니다.
죄의식은 육체적 배고픔처럼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러한 죄의식에 대해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대는 이러한 죄의식을 일깨우는 일이 몹시 시급합니다. 오늘날은 유전이나 환경에 관한 학설이나 죄를 견책하기보다는 동정심으로 대하려는 성향등으로 인해서 죄의식을 무시하는 자연적 경향이 오히려 강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죄의식을 병적인 불건전한 현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실패나 불완전함은 인정하면서도 죄를 별로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구원자에 대한 필요성도 느낄 수 없으며,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회개나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아무리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도 이 죄많은 세상에 사는한 범죄로부터 완전히 떠나 있을 수 없습니다. 무슨 죄를 짓든 죄를 짓지 않고 지나는 날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매일 내가 범한 죄를 의식하고 용서 를 구하십니까?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의식하고 통회하는 이 기도를 할 때, 우리 죄 때문에 당하신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기억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죄 때문에 수치를 당하시고, 멸시를 받고 배척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2. 이 간구는 죄의 고백과 용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사하여 주옵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압헤스는 '내어 보내다, 버려두다, 가게하다, 탕감(면제)하다, 용서(사면)하다' 둥을 뜻하는 압히에미의 과거 명령형입니다. 따라서 이 문구는 문자적 으로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옵소서'입니다. 과거형은 완전한 탕감을 나타냅니다. 자신에 대해, 이웃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짓는 죄는 빚입니다. 빚이란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갚지 않으면 언제나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빚을 갚지 않고서는 해결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혼자 뉘우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결단을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공로를 세운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빚은 빚진 그분에게 갚아야만 면제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이지 주관적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지금은 빚지고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지만 언제가는 독촉받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갚기 전에는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갚지 못하면 누군가가 대신이라도 갚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용서해야 하고 용서받아야 하는 당연한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곽선희의 산상수훈 강해 참조).
우리는 종종 용서를 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하는 용서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까? 진정한 용서는 쌍방에 어떻게 나타납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용서할 때,
(l) 용서하는 편에서, - 마음의 소원함이 사라지고 온갖 회의의 구름이 마음에서 걷힙니다. - 그의 행동과 느낌이 어떤 층격적 상처나 불쾌한 일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변합니다. - 그는 용서받는 자에게 그 기분을 생각해서 더욱 부드럽고 상냥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2) 용서받는 편에서, - 그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더욱 깊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 그는 용서받기 전보다 용서받은 후에 자기의 잘못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됩니다. - 그는 참으로 참회의 느낌을 가지고 겸손해집니다.
(3) 그리하여 쌍방은, / - 서로 사랑을 보이고 싶어합니다. - 이것은 교제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이 용서를 하고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으로 참회의 느낌이 없고, 죄의식의 느낌이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용서를 받았다는 확실한 느낌이 없다는 점에서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형제에게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한다면서 스스로 속고 있지 않는지, 오히려 우리 죄를 우리 자신에게 고백하고 우리 스스로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수없이 동일한 잘못된 행위로 떨어지고 우리의 기독교적 순종이 약화된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자기 죄를 용서함으로 살고 진정한 용서를 받음으로 살지 않는 사실에서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에 의해 받는 용서는 결 코 죄와 인연을 끊어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심판하시며 사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형제에게 지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을 때 예외의 경우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 형제 앞에서도 죄를 고백해야 함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에 우리는 형제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용서의 확신을 가지 게 됩니다.형제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이 청준의 작품 [벌레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의 아들 알암이를 둔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사랑하는 아들이 유괴를 당해 피살되었습니다. 아들이 피살체로 발견이 되고 그것을 목도한 알암이 어 머니는 극한적인 심정에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한 알암이 어머니에게 이웃집에 사는 김집사 아주머니가 끈질기게 접근하여 기독교 신앙에 의지하여 살아갈 것을 권고했습니다. 김집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결코 악의없는 접근이요 친절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알암이 어머니는 그 정성에 감복했던지 마침내 동의하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진범이 체포되었고, 그 범인이 바로 아들이 다니던 주산학원의 원장 선생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알암이 어머니는 격렬한 증오의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다시 김집사가 나타나 범인을 증오로 대할 것이 아 니라 사랑과 용서로써 대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러는 김집사의 말에 반발심을 느끼기도 했지만 알암이 어머니는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을 바꿔 먹고 범인을 용서해 주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알암이 어머니는 사형수를 찾아가 용서의 증거를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열려가던 알암이 어머니의 마음은 사형수를 보는 순간 갑자기 꽉 닫히고 말았습니다. 사형수는 처형을 앞두고 예수님을 믿고 마음의 평화를 누 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알암이 어머니가 보기에 너무나 침착하고 뻔뻔스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알암이 어머니는 이에 대해 침착하고 평화스러운 성인같은 모습을 한 범인의 너무나 뻔뻔스러움에 대해 반감을 느끼고 자기보다 먼저 자기가 용서할 필요도 없이 그 범인을 용서해버린 하나님에 대해 분노를 느끼었다고 말하면서, 자기 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가더니 이제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아 버렸다고 술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것이 신의 공평한 사랑이라면 자신은 차라리 신의 저주를 택하고 말겠노라고 외치었습니다. 우리는 그 범인의 거동이 그녀를 얼마나 분노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범인의 처형 소식을 들은 직후 그녀는 자신의 너무나 인간적인 절망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참조, 풀핏목회). 어쨌든 알암이 어머니가 그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었더라면 그의 인생은 그렇게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알암이 어머니는 아직 용서를 할 수 있는 기독교적 사랑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범인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는가 라는 강한 의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범인이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면 그는 용서받기 전보다 더욱 깊이 부끄러워 하고, 더욱 깊이 자기의 잘못을 느끼고, 더욱 겸손한 자세로, 그 피해자에게 용서를 빌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스스로에 의해 용서를 받고 있는지 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더나아가서 생각해봅시다.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용서한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매를 아낀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린 범죄자에게 사랑을 쏟아 붓는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용서도 재판관으로서 보다는 아버지로서 의 용서입니다. 자녀가 용서를 구하며 빌 때, 용서해 주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용서에 있어서 형벌의 면제는 용서의 한 요소일 뿐이며, 결코 최고 요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더더구나 그렇습니다. 인간들의 경우 죄를 용서받는 다하더라도 용서로 말미암아 지워질 수 없는 죄의 결과(주로 외적 부분}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자는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그 결과를 회피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을 때, 우리 영흔이 받는 은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막힘없는 사랑을 확산하게 됩니다. - 영흔이 거두어 들이는 죄의 결과는 더 이상 형벌이 되지 않고 교육적인 것이 됩니다. -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의 표현이 되지 않고 그 용서 받은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 관하여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쩍으로 징계하려니와...내 은총을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삼상7:14, l5)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확신하게 될 때, 그는 그의 마음에 평화가 넘치는 것을 느낍니다. - 그는 더욱 겸손쌔 집니다. - 그는 더욱 죄를 무서워하게 되고 의무에 더욱 층실하게 됩니다. - 밝은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됨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을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치르신 그 십자가의 희생을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에 근거하여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것이 없습니까?
- 나쁜 성질을 부리지 아니했습니까? - 해야할 일을 게을리 하지 아니했습니까? - 살림살이를 태만하게 하지 아니했습니까? - 열심으로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까?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의무를 등한히 하지 아니했습니까? - 남을 괴롭히거나 불친절하거나 해하지 아니했습니까? - 남을 위한 봉사나 동정의 기회를 무시하지나 아니했습니까? 여러 과오에 대하여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지는 아니 했습니까? - 예배 참석을 잘하는지, - 봉사를 잘하는지, - 십일조를 드리는지, - 전도를 하는지, - 열심히 성경을 보며, - 열심히 기도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잘못한 것이 생각나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주여 내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사소한 일까지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확실히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3. 이 간구에 부과된 놀라운 말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는 문구를 생각해봅시다.
이 말씀은 불층분한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내지 분량이 된다는 뜻입니까? 언뜻 보기에는 이 부가어가 하나님의 용서에 어떤 한계를 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절망에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이 간구에 대한 그릇된 사상이나 실행들이 있습니다.
(1) 어떤 기독교인들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처리되었기 때문에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2)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성결관(그들은 죄가 완전히 근절되어 무죄하다고 가르치는 성결관) 때문에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올 받은 자나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완전주의자도 이 세상을 통과할 때 죄를 범합니다(참조, 요I3장). 그러므로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우리 뢰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했습니다(요일1:8-10).
(3)어떤 기독교인들은 '나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합니다. 어느 교수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를 '예수님이 예수님에게 죄지은 자인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라고 이해하고는 '나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 오'라고 기도한다는 것 입니다. 이것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기만 용서받겠다는 아주 이기적인 발상입니다.
(4)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남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주기도문으로 기도하지 아니합니다. 혹은 주기도문으로 기도할지라도 입으로는 하지만 마음에서는 삭제해 버럽니다. 이것은 남도 용서하지 않고, 자기도 용서받지 않은 죄인으로 남으려는 행위입니다. 그래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기도할 수 없는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겠습니까?
그러면 이 문구의 의미를 생각해봅시다. 이 기도문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더욱 위로가 넘치는 그러면서도 엄숙히 경고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간구와 관련된 듯한 용서의 법 3가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성픔)을 따라 서로 용서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용서의 정신이 약화되어 남을 용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특별히 선민 이스라엘에게 서로 용서하라는 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이 그 법을 완전히 시행할 수 없었습니다. -최후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합으로 말미암아 서로 용서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은혜 안에 있는 인간은 용서의 본 성품을 회복하여 용서의 법을 완전히 실행할 수 있게 된 것 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용서하라는 명령을 받아 시행합니다. 이 3단계는 이 간구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 정도나 차원은 다르지만 남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조건이라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이 단계를 염두에 두고 이 간구를 생각해 봅시다.
(I) 이 기도는 우리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의 반영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의 빛의 희미한 반영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온유, 인내, 용서 등이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그러한 특질이 내재한다는 점을 얼마든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인간 속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무엇이든 존경할만한 것, 무엇이든 기릴만한 것, 무엇이든 사랑할만한 것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인간 속에 나타나는 그러한 특질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눈을 지으신 이가 보지 않겠느냐" "너회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녀에게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천부께서 원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하게 됩니다. 인간이 용서한다면 하나님은 더욱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만일 서로 용서한다면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이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의 본체이신 하나님은 무한히 완전히 우리를 용서할 수 있고 또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 어떤 현실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용서 행위는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율법아래서). 우리는 믿음과 회개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조건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지향될 때 믿음과 회개를 일으키는 인간 내면의 바로 그 성향이, 남에게 지향될 때 용서하는 기질을 낳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무가치성에 대한 깊은 의식이 나로하여금 남에 대해 판대하고 온화한 성향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반쪽으로 나누어 안으로 깊이 통회하면서 밖으로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베풀어주지는 않으면서도 하나님께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용서를 비는 우리의 기도가 실질적인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동 전체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남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 기도가 이러한 실제적이지 못하면 응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기도를 신명기 15:1-5과 연결하여 설명해 봅시다. 이 기도는 문자적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매 칠년 끝에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 하니라 무릇 그 이웃에게 꾸어준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찌니 이 해는 여호와의 면제년이라 칭함이라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 니와 네 형제에게 꾸인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는 것입니다.
이 해방법은 매 7년 끝에 채권자는 채무자를 용서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채권자가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채무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법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 기도는 '우리가 토라의 해방법에 따라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탕감)하여 주는 것같이 우리의 빚들도 반드시 용서(탕감)하여 주옵소서'라고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을 적용하면 용서에 대한 강청 (눅11:8)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이 신명기의 말씀은 우리의 용서의 범위를 암시하여 줍니다. 신명기에서 "형제"는 이방인과 대립된 의미의 유대인 동족을 뜻하듯이 주기도문에서 우리는 불신자와 대조되는 그리스도인들을 뜻합니다. 곧 신명기의 '동족끼리'가 주 기도문에서는 '우리 끼리'로 새롭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명기는 이 기도가 일차적으로 공동체 내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 즉 우리 믿음의 형제들 사이의 용서행위를 예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 용서는 믿음의 형제를 중심으로하여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3) 더 나아가서 이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남을 용서해야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용서 행위가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습니까? - 우리가 남을 용서해야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은 우리의 용서 행위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의 이유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 우리가 받는 죄사함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사역이며, 죄용서의 조건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모든 죄를 원천적으로 용서받았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의 축복을 향유하는 조건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를 본받아 시행하는 것입니다(엡4:32).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그리스도와 같이 남을 용서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매일 짓는 죄에 대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계속 체험하면서 의식적으로 향유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여부는 우리가 남을 용서하느냐의 여부에 좌우될 것입니다.
주인에게 빚을 탕감받은 종이 동료종을 만나서 그 멱살을 붙잡고 자기에게 진 빚을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으라고 다구쳤습니다. 이 행동은 자신의 탕감받은 빚을 원점으로 되돌리고 오히려 산더미 같은 빚을 자기에게 쌓는 결과를 가 져왔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를 거절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안에서, 그리고 그 피를 통해서만 용서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용 서해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알고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깨어지며, 강팍해질 수 없으며 용서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형제에게든지 용서하기를 거부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결코 용서반은 일이 없는 것입니 다. 자기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해 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의식이 매우 뚜렷해질 것이며 큰 만족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용서의 광선으로 따스해질 때, 가장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남을 온전히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보고 나의 복되신 주님께서 나를 위해 해주신 것을 인식할 때마다 나는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오 하나님이여, 주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것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나를 용서하여 주읍소서, 내가 구하는 모든 것은 주님께서 이와같 은 방식으로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하는 것입니다.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같은 정도로 용서하여 주읍소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방식으로'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 같이 나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마음 속에서 행하신 것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을 용저하는 것과 같이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아뢰십시요. 우리는 이렇게 기도를 함으로써 우리 안에 용서의 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속죄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기도의 내용을 반복하신 사실을 보아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기도를 끝내고 나서 뒤로 돌아가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회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습니 다( (O.M. LoydJone).
지금으로부터 약 l700년전, 초대교회에서의 일입니다. 크리소스톰이 목회하던 그 교회 신자들은 주기도문을 외우다가 바로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긍휼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살이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던 것입니다.
보물섬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스코틀랜드의 작가로 버트 스티븐슨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가정에서 가족들과 예배를 드리던 어느날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습니다. 부인이 놀라 뒤따라 나가서 남편을 붙들고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스티븐슨이 말하기를 '오늘은 내가 죄용서해 달라고 주기도문을 드리기가 몹시 괴롭소 마음이 편치가 않소' 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사례들이 비일비재하면서도 주일마다 또는 수요 예배마다 의젓하게 하나님 앞에 이 기도를 했습니다. 흑은 우리는 그저 앵무새처럼 외워댄 것입니다(옥한음의 '무엇을 기도할까?', 두란노간 ). 여러분 우리 마음에 용서가 없으면, 우리가 용서할 줄 모르면 우리의 기도는 진짜가 아니며 참된 것이 아니며 효과가 없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코리 텐 붐(Corrie Boom) 여사는 네덜란드의 유명한 부흥사였습니다. 제 2차 대전 때 그녀와 가족들은 유대인을 집에 숨겨주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독일의 라스부르크 수용소에서 온갖 학대를 받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여사는 독일인에게 용서의 복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용서의 복음이 선포되었으며 예배가 끝나면 많은 사람들이 여사에게 찾아와 손을 잡고 눈물을 홀리며,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어느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한 사람씩 여사의 손에 입맞추며, 혹은 악수를 하며, 여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사를 표하는데, 문득 손을 내밀면서 다가서는 한 남자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여사는 마치 심장이 멎고 온 몸이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그 남자는 포로 수용소에서 여사의 옷을 벗기며, 채찍질을 하고 침을 뱉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사의 언니는 그 남자의 손에 많은 고문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여사는 거기서 받았던 온간 조롱과 고통을 생각할 때 손을 내밀어 그 남자의 손올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여사는 용서를 바라며, 서 있는 그 남자를 생각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영흔의 진통속에서 하나님께 '주님, 나는 이사람을 사랑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어요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고는 손을 내밀 어 그 독일 간수의 손을 잡는 순간 하늘의 사랑이 자기의 영혼 속으로 파고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사는 후에 '그날 자기는 새로이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참으로 깨달았으며, 미움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깨닫는 엄청난 환회의 순간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시요. 용서하시요. 여러분은 용서받는 삶, 그리고 용서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다음 기도문을 읽고 우리도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서로 용서합시다. 남을 용서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당신만이 이 기도대로 살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실 수 있습니다. 남의 잘뭇을 곱씹고 지난날의 응어리를 풀 줄 모르는 용서를 모르는 심령에 어찌 당신의 용서가 이르겠으며 축복이 임하겠습니까? 당신의 십자가는 강렬한 빛으로 우리가 희미하게 알고 있던 진리를 밝혀 줍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 빚이 얼마나 작은지요 우리가 당신비게 진 빚이 얼마나 큰지요! 주님, 우리 영혼 속의 깊은 수렁을 정결케 하옵시고 우리의 응어리를 풀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들과 화목케 하여 주옵시고 우리의 삶이 당신의 평화를 전파하게 하옵소서. (J. I. 팩커의 '주기도문'). -------------------------------------------------------------------------- 주기도문 강해/공부 8 제6간구/시험에 대한 기도 마태복음 6:13a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바로 앞의 간구는 과거를 다루며, 이 간구는 미래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자는 죄에 대한 고백이며, 후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의식한데서 나오는 탄원입니다. 최선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이 양자가 다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를 묶고 있는 악의 끈을 끊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의식을 더욱 강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의식하는데서 오는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새로운 욕망 속에서 우리는 먼저 빈번하게 찾아오는 죄로 유혹하는 힘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은 순전히 생래적인 양심만으로도 죄의 유혹이 무엇인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힘은 그 유흑에 항거하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용서받았다는 의식과 새로운 욕구 및 그로 인해 나타나는 사랑의 감정은, 우리 주변에서 반짝이는 기만적인 유흑들의 정체에 대한 파악으로 이어집니다. 용서받은 자는 영적 시력이 좋아져 이러한 유혹들이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실상은 우리를 파멸시키는 마귀의 세력임을 간파합니다. 사실 십자가의 기호가 그 더러 운 마귀의 진정한 정체를 드러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 마귀가 자기의 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용서받은데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이 낳는 새로운 동정심은 이 두리엘( Ithurrel :밀턴의 [실락원]에 나오는 천사로서 사탄의 정체를 폭로함)의 창입니다. 즉, 사탄의 정체를 파악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자신을 용서하셨음을 믿게되고 그리스도를 사랑할 줄 알게 되었을 때, 그 매흑적인 유혹자를 보는 우리의 시각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때 햇빛 쪼이는 물 밑에 있는 물고기의 꼬리가 보이는 것입니 다.
용서는 우리에게 자신익 죄를 가르쳐 주는 주요한 수단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용서를 통해 자기 행동의 결과에 대한 온갖 두려움에서 해방되면, 우리는 자기 행동의 도덕적 성격에 대해 고요한 마음으로 명상해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죄용서를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자각하게 될 때, 우리의 양심이 깨끗해지고 예민해져 순결에 대한 표준이 높아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결과 바르게 살고자 애쓰게 되면, 먼저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존재인가를 철저히 배우게 됩니다.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려고 시도해 보면, 급류의 세기를 알게 됩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순백색으로 빛나는 하나님의 순결 앞에서 자신의 모습은 더욱 검고 추하게 느껴집니다.
죄용서 받은 체험이 범죄적 성향을 단번에 깡그리 없애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믿음이 성결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가진 각 사람에게는 새 생명이 나타나 가나안 땅 여 기 저기에 요새를 구축하고 있는 블레셋 사람들의 끈질긴 저항을 조금씩 정복해 나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성화의 과정은 점진적으로 느리게 전개되며, 악이 마음 속에서 제거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악은 혈관 속에 남아 있습니다. 핵심적인 죄악의 의지는 정화되지만 습성은 계속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영흔이 거듭남으로써 본질적인 저항력은 한없이 강해지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이 저항력이 약화됩니다. 또는 죄는 모종의 재발 경향을 남겨놓습니다. 한편으로 보건대, 반역죄에서 개심하여 깨끗함을 얻은 사람의 순결만큼 빛나는 순결은 없고, 그 사람의 순종만큼 확고 부동한 순종도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 그 궁극적 순결로 가는 도중에 죄사함을 얻은 당사자는 날마다 옛 자아의 쓰라린 잔재물과 투쟁해야 하며, 죄악과 싸워야 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죄악에 항거하고자 할 때 비로소 그는 죄악의 힘을 알게됩니다. 그리고 과거 죄악을 애무할 때는 술술 매끄럽게 넘어갔던 그것이, 일단 자기 마음의 굴혈에서 쫓아내려고 하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성화의 과정은 그만큼 고되고 힘듭니다. 죄사함의 체험이 죄를 단번에 정복하지는 못합니다. 죄사함 받은 것은 죄에 대한 보다 깊은 인식으로 가는 길입니다. 죄용서에 대한 간구와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간구가 전후로 배치되어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용서에 대한 간구에 뒤이어 유흑으로부터의, 유혹 중에서의 보호를 비는 간구가 나읍니다. 후자는 자신의 연약성과 타락 하기 쉬운 성질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나오는 기도입니다.
시험은 두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죄로 유도하는 환경이고, 하나는 그 환경에 의해 유발되는 욕망입니다.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은 자기 영흔 깊은 곳에서 죄를 미워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마음 속의 가연 물질에 불을 붙일 수 있는 불꽃(스파크)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불길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불꽃(스파크)은 물론 부싯깃도 있어야 합니다. 물이나 돌위에 떨어지는 불은 이내 꺼지고 맙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 는 인간이 만드는 것입니다. 본문의 기도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이 간구는 세상이 유흑으로 층만해 있는 위험한 장소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모스는 '실험 (experimen), 시도(attempt), 시련, 시험(triaI, test), 유혹(tenpta tron}'을 뜻하며, 여기서는 죄, 또는 믿음과 거룩함으로부터 타라으로 유흑하 는 외부 조건이나 정신상태인 시험으로, '유흑'을 의미한다.
"들게 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습헤로는 '데리고 들어오다(가다), ~안으로 인도하다, 이끌다'를 뜻하며, 여기서 가정 과거이지만 명령으로 기능하며, 완전한 구원을 요구한다. 매일 당하는 시험(눅8:13)뿐만 아니라 이 지구 위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계3:10) 종말론적 고난과 인간을 타락케 하는 시험(막13:22; 계2:10)에 대한 기도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로 요약된다. 이 간구는 문자적으로 '우리를 유흑에 들어가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번역할 수 있으며, 즉 '우리를 유흑에 빠지지 않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시험이나 유흑을 당한다. 아무도 이것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시험이나 유흑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유흑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 또는 유흑으로 이끈다는 사상이 없다. 단지 사탄과 그 속임수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시험과 싸운다. 때때로 그것은 너무 교모하게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시험을 심지어 깨닫지 못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셨다(고전 10:l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을 인지하고 그것을 능히 이길 힘을 얻고 하나님의 길을 택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존 번연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나의 여행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여행은 아주 위험한 나라들을 거쳐가야 하는 여행입니다. 곳곳에 함정과 덫이 놓여 있으며, 길을 따라 가노라면 절망의 구렁텅이, 옆으로 펼쳐있는 초장, 의심의 성, 과오의 산, 넓은 문, 죽은 자의 호수, 허영의 시장을 만납니다.
유혹은 도처에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유혹을 받는 입장을 벗어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도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때가 없습니다. 집에 있을 때나 외출했을 때나 일을 할때나 놀 때나 막론하고 우리가 시험에 빠져 들 수 있는 경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S.L. Roberts).
시험은 뱀과 같이 옵니다. 뱀이 어디에나 모든 장벽이나 방벽을 넘어, 모든 모퉁이와 구석으로 그 길을 찾아내는 것같이 인생이 시험을 떠나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시험은 우리가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 곳에 나타나며, 우리 자신 안전하다고 생각 할 때 나타납니다(M.D). 이 교활한 사탄의 시험을 경게하십시요.
성경은 죄로 유흑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시험자 사탄과 부귀와 명예와 영화 등 세상에 있는 것들과 그리고 우리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사탄은 세상에 있는 부귀와 명예와 영화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부패한 본성을 자극하여 죄에 빠지게 합니다. 사탄은 또한 가난, 역경, 환난, 박해 등을 퉁하여 시험으로 몰아넣고 죄로 유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을 직면할 때, 항상 사탄과 세속적인 것과 나의 욕심, 이렇게 삼각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고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을 하나님께 불복종하도록 유혹하여 인류를 타락시키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욥을 시험했습니다. 사탄은 광야에서, 군증들 중에서, 제자들을 통하여, 게세마네 동산에서,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시기 직전 조롱하는 무리들 중에서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을 방해하는 시험을 했습니다. 사탄은 욥이나 예수님의 경우와 같이 실패하는 경우도 있으나 수많은 사람들을 유흑하여 죄에 빠뜨리고 멸망케하거나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이 잔악한 사탄의 시험을 경계하십시요. 베드로는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다니며 삼킬자를 찾나니 너희는 마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유흑이 가득찬 이 세상에서 항상 시험에 들지 않도록 주의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2. 이 간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환경을 주관하신다는 인식을 표현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운명을 정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명확한 것은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관하시고 시험거리를 만들기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 하나님은 사탄이 아담을 시험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그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 몰아 넣어 시험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로 나아가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몇가지 실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관하시고 시험거리를 만들기도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시험한다는 것은 죄로 유인하는 자극물을 제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차적인 의미는 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악의적으로 유혹거리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이차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 야고보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고 했습니 다(약1:13, 14).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시험하고 악이 우리를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확실히 우리를 시험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넘어질 수도, 설 수도 있는 어떤 외적 환경을 조성하는 한에서만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험거리를 보내시고 시련을 보내십니다. 어떤 시험이 유흑이 되느냐 아니면 시련이 되느냐는 시험을 보내는 자의 의향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악의로 유혹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비로 시련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보내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유혹거리로 만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상시키기 위해 보내는 시련을 우리를 하락시키는 유흑거리로 만들지 맙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욥, 광야의 이스라엘, 그리스도의 경우와 같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시험을 하거나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시험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늘기도합시다.
3. 이 간구는 우리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의식을 표현합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무수한 시험과 시련을 받아 파멸되거나 치명상을 입습니다. 우리가 강하다면 시험이 많다는 사실이 그토록 우리의 삶의 큰 난제로 등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간구를 드리는 것은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간구가 언뜻 보기에는 시험을 면하고 싶은 소원을 피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이 간구가 그러한 의미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 및 성격의 전체 요소와 모순이 됩니다. 그러나 이 간구에는 그러한 소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시험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자각만이 우리가 시험을 회피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만일 우리가 게으름이나 고생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험을 회피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육신의 고통을 회피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육에 속한 사람들과 같이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탄하고 안락한 길을 원한다면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탄탄대로만을 걷고자 한다면 아직도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의 종들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약1:2).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연약성을 바로 이해한다면 죄로 유흑될까봐 두려워할 것 입니다. 우리가 자기의 불신 혹은 자기가 넘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드린다면 바람직한 일입니다. 기독교의 원수나 또는 위험과 격돌한다는 것은, 때로는 용기가 아니라 만용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오직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가 그것을 요구할 때,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유흑받기 쉬운 길목에 방치해 두는 것은 용기일 수 없습니다.
피해야 할 때는 피하고, 대적해야 할 때는 대적하고, 감당해야 할 때는 감당하고, 참아야 할 때는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대적하고, 정욕은 피하고, 자기 몫의 짐은 지고, 환난과 핍박은 참아야 합니다. 시험을 피한다는 것은 시험에 대항하는 가장 유력한 전략입니다. 앤드류 풀러는 '마귀와 교류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의 작업장에서 피해 가시요'라고 말했습니다. 새겨들을 말입니다. 피해야 할 때 피하는 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참된 지 혜의 용기 입니다.
시험이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어떻게 오는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l)사탄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공격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연약한 부분이나 약점이 있습니다. [아킬레스의 건]이란 신화가 있습니다. 아킬레스의 어머니가 제우스에게 '아킬레스가 불사신처럼 그 몸에 칼이나 창이나 불이 해하지 못할만큼 강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제우스는 '네 아이가 태어나자 마자 아이를 테베강에 완전히 집어 넣었다가 꺼내라 그러면 소원대로 되리라'고 그 비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킬레스의 어머니는 아이를 낳자마자 발뒤꿈치를 잡고 강물 속에 깊이 집어 넣었다가 꺼내었는데 그 아이가 강에서 나오자 마자 몸전체가 무쇠처럼 되어서 어떤 칼이나 활이나 창으로도 뚫을 수 없는 강력한 몸을 갖게 되었습니 다. 불사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묻지 않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부분은 약하여 있었으며, 어머니가 붙잡은 발뒤꿈치였습니다. 그 약점 때문에 아킬레스는 패리스의 독화살을 발뒤꿈치에 맞고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말은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다는 것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은 물질에 약합니다(딤전6:10; 수7:21). - 어떤 사람은 식욕에 약합니다(창25:34). - 어떤 사람은 이성에 약합니다(삿l6:1이하). - 어떤 사람은 명예에 약합니다. - 어떤 사람은 권력에 약합니다. - 어떤 사람은 정에 약합니다. - 어떤 사람은 호기심에 약합니다(창3:1이하). - 어떤 사람은 게으름에 속수무책입니다(잠I0:4; 6:I0). - 어떤 사람은 시기심이 많은 것이 약점입니다{잠14:30). - 어떤 사람은 의지가 약합니다. 이 마지막 문제에 대하여 한 말씀하겠습니다. 어느 학자는 '사탄이 지금까지의 많은 공작에서 가장 성공한 것 중에 하나가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주일 예배는 기독교인의 우선 순위에서 제 1순위 입니 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은 남편 때문에, 아이들 때문에, 친구의 결흔식 등으로 인하여, 주일 예배 참석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생을 산다면 그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나의 약한 부분이 무엇인지 알아서 주의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이 연약한 부분들을 노립니다.
(2) 시험자는 우리의 약점 뿐만 아니라 강점도 공격합니다. 우리의 강점도 심한 모욕이나 괴로움을 받을 때, 두려움이나 위험을 느낄 때, 방심할 때, 기타 이와 유사한 일로 인해서 급격히 약화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약해졌을 때 시험이옵니다. 모든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누구도 자만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를 보시요.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잡히신 예수님이 있는 집 뜰에서 저주하고 맹세하며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었으나 자기 생명의 안전을 위하여 아내를 부인하는 신실치 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온유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나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이 고조에 달했을 때, 화를 내므로 그 온유함을 잃었습니다. 엘리야는 기도와 용기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나 이세벨의 위협에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으나 육욕때문에 간음과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대표적인 인물들의 이와 같은 실례는 우리의 자신감에 경종을 울리고 우리의 강함을 자랑하거나 자만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항상 자신의 연약함을 의식하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합시다.
4. 이 간구는 우리의 최고 소원이 성결이고 최대의 두려움이 죄악이라는 인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가운데 이것만이 소극적인 간구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슬픔, 손실, 가난, 질병, 죽음으로 이끌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가 어찌 이러한 내용들로 우리의 기도를 채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수는 없습니다.
이 간구는 오직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그가 요구하는 한 가지는 외적 행복이 아니라 내적 성품인 성 결입니다. 우리의 삶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십니까?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로 유흑되지 않도록 늘 기도해야 합니다.
5. 우리는 시험에 대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험을 받는 것과 시험에 드는 것을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시험을 받는다'는 말은 죄의 유혹에 노출되는 것, 즉 죄를 행하도록 자극하는 요소에 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의미의 시험은 모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를 모면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시험에 든다'는 말은 죄의 유흑에 동의함으로써 시험거리를 포옹하거나 그 안에 빠지는 일보 전진한 단계를 의미합니다. 이 간구는 포로가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어느정도 의식하고 있는듯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히 바라야할 것은 시련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지 않고 시험을 통과해 벗어나도록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시련을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삶의 모든 현장, 모든 단계, 모든 관계, 모든 직업에는 죄로 이끄는 유흑물이 가득하며, 또 언제나 가득합니다.
어떤 주어진 환경이 그 대상자를 시험하느냐 못하느냐는 그 대상자가 어떤 존재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대상자 속에 어떤 흡수력이 전혀 없다면 그 시험(유흑)이 달라붙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시련을 면하게 하여 달라는 기도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험을 극복하고 통과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유익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인격에 유익한 영향을 미칩니다. 적을 죽일 자에게 죽임을 당한 적의 힘이 건너간다는 옛속설은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이겨냈을 때도 잘들어 맞는 말입니다.
- 시험의 극복은 진리 파악에 도움을 줍니다. -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의식에 유익한 영향을 줍니다. - 그것은 미래에 유익한 영향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의 면제를 바랄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 강해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우리가 이렇게 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능히 그 곳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의 도가니에서 벗어나기를 구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흑암의 골짜기에서 벗어나기를 구할 것이 아니라 그 곳을 통과할 수 있기를 구해야 될 것입니다.
-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표본입니다. - 주님의 생애는 우리의 귀감입니다. 그는 아들이라도 시험을 받았습니다. - 주님의 힘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는 시험을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울 수 있습니다.
이 간구에서 우리 자신도 범죄한 모든 사람들과 동일한 인간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정욕을 가지고 있고, 그들처럼 넘어질 수 있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부르짖는 것 입니다.
그러한 동기에서 이 기도를 을리는 자는 시험이 닥쳐을 때 최선을 다해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입니다.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전장에 나가는 군인은 적군의 힘과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길 승산이 매우 높습니다. 자신의 힘을 믿고 자만 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패배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 주기도문 강해/공부 9 제7간구/악에 대한 기도 마태복음 6:13b --------------------------------------------------------------------------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주기도문의 전반부는 마치 언제나 푸른 창공에 별들이 말없이 빛나는 고요한 하늘과 같고, 후반부는 폭풍에 휩쓸리고, 눈물이 쉴새없이 흐르는 변화와 파란이 많은 지상과도 같습니다. 전반부는 그렇게도 정적이 감도는데 후반부는 그렇게도 재난과 한숨이 가득합니다. 이 후반부의 간구들에는 인류의 암흑 상태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들어있습니다. 굶주림과 죄와 시험, 그리고 한층 더 넓게,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그 비극적인 낱말, 악이 있습니다. 용서와 보호와 구원, 이러한 것들이 있기 위해서는 얼마나 깊은 슬픔이 전제되어 있는가?를 보게됩니다. 이 후반부의 간구들은 매 단계마다 우리를 점점 더 깊은 그늘과 흑암속으로 끌고 가는듯 합니다. 그리고 각 간구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인간 삶의 실존이 지닌 보다 어두운 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이 최후 단계는 인생의 온갖 병패를 내포하는 포괄적인 외침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본문이 하나의 기도인 동시에 하나의 예언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간구에 표현된 소원이 애절할수록 성취의 소망도 그만큼 큰 것입니다.
이 간구는 인간의 어두운 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언가에 대하여, 또는 반대하여 기도할 때 그것은 곧 우리의 자아가 하나님의 뜻에 반한다는 고백이며, 하나님이 그것을 제거해 주시리라는 확신의 표현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 아버지여...우리를...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을 우리에게 명하셨다는 사실은 매우 광범한 이 단어에 표함된 모든 악이 제거될 수 있다는 산 소망, 주님이 모든 멍에를 끊고 압제받는 자기 백성을 해 방시킬 것이라는 참 소망을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이 이 한 간구 속에 모아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그 불행의 온갖 항목이 희석되거나 소멸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슬픈 저음을 발하는 듯한 이 간구는 실제로 가장 높고 고상한 위치로 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 아래서 벌어지는 온갖 불행에 대한 통곡처럼 울리는 이 간구 자체 속에 승리의 함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장 감미로운 노래들은 가장 슬픈 사상에 대해 말하는 노래들입니다'.
지극한 희열과 확신이 넘치는 기도는 죄악의 짐을 가장 예리하게 느끼며, 그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세상의 가장 큰 제단에 엎드려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다음 사상들을 살펴봅시다.
1. 이 간구는 악에서 구원을 호소합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문구는 앞 문장과 연결하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하옵소서"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다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라는 접속사로서 '그러나(but)'를 의미합니다. NASB, NRSV, KJV, NIV 등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는 6 간구와 대조되는 또 하나의 간구인 7 간구와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두 가 지 간구를 한 가지 간구로 생각하기도 한다. "악"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네로스는 '수고하다'를 뜻하는 포네오에서 유래했으며, '힘든, 고생스러운, 불행한, 불쌍한, 악한, 나쁜' 등을 뜻하며, 여기서 한 마디로 말하면,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에 붙은 관사는 남성도, 중성도 될 수 있는데, 중성으로 볼때는 '악', 남성으로 볼때는 '악한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악한자(사탄)의 세력까지도 '악'이란 말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구하옵소서"에 해당하는 뤼오마이는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다, 구(출)하다, 보존하다'를 뜻하며, 여기서 이 단어의 과거 명령형이 사용되었으며, 과거가 사용된 것은 '완전한 구원'을 나타냅니다. 이 간구를 '악한 자'에게서 구원받는 것에 대한 언급으로 간주하느냐 아니면 '악' 으로부터 구원으로 간주하느냐에 관한 문제에 대해 일반적으로 제자들이 이 시대를 지배하며 계속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악한 세력으로부터 해방받음을 간구 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간구에는 현재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어조도 있다. 구원의 목표인 영원한 구원 사상도 나타나 있다.
그러면 "악"이 무엇이며, 어떤 악이 있습니까? 이 "악"을 '악한 자나 사탄'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하면 그 의미를 제한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이 단어의 범위에 대하여 어떤 제한을 가할만한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영어나 기타 여러 언어에서는 '악'을 뜻하는 한 단어(evi1)를 사용하여 죄(의 세력)와 불행,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악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이 단어에 이상의 두 가지 의미를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할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안녕과 행복에 반하는 물리적 악, 즉 고통, 슬픔, 재난 등이 존재합니다. 또 우리의 순결에 반하는 도덕적인 악, 즉 죄가 존재합니다. 둘 다 악입니다. 인간의 양심이 죄를 악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감각이 물리적 고통을 악이라고 부릅니다. 악한 자 사탄의 온갖 술책과 공격이 초래하는 악도 이 모든 악에 포함됩니다.
어떤 사람이 육체적으로 엄청난 괴로움을 겪거나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받았을 때, 그에게 지금 당신은 고통을 겪고 있지 않다고 아무리 교묘한 말로 속삭여 보아도 그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 증에 있는 것은 악입니다. 허약, 불구, 피로, 굶주림과 각종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은 악입니다. 마음의 짐을 지닌 것은 악입니다. 판단의 과오, 기억의 실수, 계산의 착오, 말의 실수나 과실, 그릇된 사상과 논리와 그리고 배신. 불신, 의심, 원한, 절망으로 인한 마음 또는 정신적 고통은 악입니다.
이런 악의 몇가지를 열거해 봅시다. - 우리가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의지해온 어떤 대상이 상실되는 것은 악입니다. - 손실과 가난에 짓눌리는 것도 악입니다. - 사망자의 관을 삼키는 그 검은 구덩이 곁에 선다는 것도 악입니다. - 비방과 증오의 화살이 흔들리고 있는 우리 영흔으로 날아 오는 것도 악입니다. - 세상에서 변화와 불운의 충격을 연달아 받는 것도 악입니다. - 실패의 쓴 맛도 악입니다. - 힘에 겹도록 고달픈 일에 땀을 흘려야 하는 것도 악입니다. - 서로 언쟁을 벌이고 싸우는 것도 악입니다. -흥안 소년이 주름 투성이의 여윈 얼굴로 바뀌어 버리는 세월도 결국은 외적 측면에서 볼 때 악입니다.
이 기도에 별 공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단조롭고 평범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 기도를 배울 수가 있으며, 언제나 이 기도를 올릴 준비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자신의 전부로 삼는 자들은 세상의 악을 가장 예리하게 느끼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슬픈 세상 중에서 이 기도를 전혀 사용해 본적이 없는 입술로부터 매시간마다 사실상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를 의미하는 부르짖음이 얼마나 많이 올라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 기도가 이러한 외적인 악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간구에 표현된 악은 온갖 종류의 죄,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온갖 영역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이 간구는 "구하옵소서", 즉 '우리를 밖으로 끌어 내소서', '(악으로)부터 완전히 끄집어 내소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악과 악이 우리에게 미치는 온갖 영향력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그것의 '철저한' 소멸을 구하는 부르짖음입니다.
이 간구는 악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가운데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악이나 고통이 우리에게 유익하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이 지금 당장 모든 고통과 번민에서 구원받고 싶은 거친 욕망보다 낫다는 심오한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악은 어디까지나 악이라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는데서부터 출발하며,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이를 전제로 합니다. 욥은 선의에서 나온 친구들의 진부한 말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욥이 제위에 누워있음에도 마치 장미 침대위에 있는 것처럼 말하였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고 깊은 슬픔을 느끼면서, 때로는 불합리한 말을 쏟아내기도 하였으나 결국 하나님은 욥의 편을 들었습니다. 욥은 감각을 통해 고통이 쓰리고 악하다는 진리를 체득하여 고수하였으며,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선한 분이라는 진리를 체득 고수하였기 때문입니다. 욥은 이 양자를 조화시킬수 없었습니다. 욥은 의인이 고통을 받는 것, 그것도 죽음과 같은 고통을 받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조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기도에서, 사실들을 부인하거나 교묘하게 둘리댐으로써 양자를 조화시키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때 그 모든 넓이와 폭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모든 것과 우리의 양심을 쓰리게 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내포되어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간구를 드립시다. '선하신 주님이여. 모든 해악, 곧 재앙과 악한 병과 기근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시기와 증오, 위선 등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마귀의 온갖 술수와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부요하고 평안할 때나 죽음의 시간에나 심판의 날에 선하신 주님이여 우리를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2. 이 간구는 악의 단일성과 근원을 암시하여 줍니다.
이 간구에서 "악"이란 말이 단수로 표현된 것은 모든 악이 다양한 형태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임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코일과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같지만 하나의 근본 뿌리 가 그 안에 있습니다. 악은 느릅나무를 질식시키는 담쟁이 덩굴과 같습니다. 그 뿌리를 뽑아 뻐리면 모든 것이 파괴됩니다. 악은 '많은 평수를 차지하고 떠있는' 어떤 거대한 바다 괴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단 하나의 생명이 존재합니다. 히드라(hydra)는 머리가 일백개나 되어도 심장은 하나입니다.
이 간구가 주기도문에서 나오는 위치를 볼 때, 그 뿌리가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 그것은 죄입니다. 이러한 위치는 인간의 모든 불행과 고통이 인간 악의 결과임을 시사해 줍니다. 사실 많은 고통이 악의 자연적 결과로 나타납니다. 질병은 종종 방탕의 결과로, 가난은 게으름의 결과로, 친구가 없는 것은 이기심의 결파로 나타납니다. 대도시나 여러 국가에서 범죄의 방치와 불공평의 결과로 얼마나 많은 블행이 발생합니까! 인간에 대한 인간의 비인간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아 ! 모든 사람이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 이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많은 불행이 종식되겠습니까! 나아가 고통은 죄 때문에 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점에서도 역시 온갖 불행은 죄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심판을 행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샤랑할 때 불행이 주는 격동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볼 때 역시 불행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불행의 성격이 거의 완전하게 변화되어 불행을 옛 이름 그대로 부르기가 어려워지 며,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한다"는 역설을 우리도 체험하게 됩니다.
3. 이 간구는 악과 대립적인 위치에 있음을 암시하여 줌니다.
이 간구는 모든 악이 하나님의 뜻에 반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았습니다. 한 종류의 악(죄)은 절대적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반합니다. 또 한 종류의 악(고통)은 하나님이 이용하시는 방편입니다. 만일 처음부터 상황이 바로 전개되었더라면 하나님은 이러한 방편을 사용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간구는 하나님이 이 두 종류의 악을 모두 제거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 우리는 자칫 악이 영원한 것이라고 믿기 쉽습니다. - 우리는 참으로 절망에 빠지기 쉬우며, 자신과 동료들에 대해 실망하기 쉬우며, 과거에도 언제나 그랬으니 미래에도 항상 그럴 것이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 그러나 모든 사회개혁가들은 이 간구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로 잡기가 어려울 때를 많이 느끼지만 이 간구에서 그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분명히 세상의 악을 정복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 우리가 자신과 세상의 악에 대항해 싸우면서 이용할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는 이 기도를 간절히 드리는 것입니다.
불경건한 계획들이 실패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시요. 사람들이 정치적 천년왕국, 흑은 기타 수단에 의한 천년왕국을 세우려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죄를 해결하시는 하나님만이 세상의 병폐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행동 대신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행동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기도에 응답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라는 말에 유의하시요. 이 말은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위해 일하며, 우리의 불행의 총화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4. 이 간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에서 구원하는 방법을 암시하여 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악에서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 하나님은 앞의 간구들에 대한 응답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에 견디는 법을 가르쳐 주심으로써, 고난의 목적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를 고난에서 건지십니다. 악 속에서 악이 제거됩니다. 삼키는 불 주위에서 밝은 빛이 납니다(겔l:4).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룹니 다". -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에게로 취하심으로써 구원하십니다.
이 기도는 현재적 체험의 한계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완전한 구속에 대한 갈망의 표현입니다. 이 기도 속에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변모하고, 온갖 악에서 구원받을 그 위대하고 복된 때의 도래에 대한 분명한 예언이 담겨있습니다. 이 기도는 재난도, 죄도, 이 아름다운 세계의 모습을 영원히 망치지는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어디에서나 거룩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고, 우리의 모든 곤핍이 충족되며,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온갖 유혹이 사라지며, 온갖 종류의 악이 하나님의 우주에서 쫓겨나고,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날 것입니다(사35:10).
그때 이 강력한 기도는 완전히 응답될 것입니다. 모든 시대에 살았던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는 응답될 것입니다. 땅 위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셨던 주님께서 보좌 앞에 드리는 기도는 마침내 응답될 것입니다{요l7:l5). 흰 옷 입은 영흔들이 제단 아래서 "대 주재여,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며 울부짖는 기도가 마침내 응답될 것입니다{계6:10). 6천년 동안의 온갖 흐느낌, 울부짖음, 슬픔이 무의식적으로 드려왔던 그 기도가 응답될 것입니다. 이 기도는 끊임없는 자비를 통해, 수많은 용서와 은혜로운 인도하심을 통해, 지금도 매 시간마다 응답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꾸준히 그 완성을 향해 줄달음 치고 있습니다. 온갖 시대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들의 사랑 속에서 자라 왔습니다. 그의 뜻이 점점 더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더 완전하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행복에 넘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될 때, 그리고 높은 산 위에서 들리는 먼 바다의 희미한 물결 소리처럼, 흑은 온갖 바람이 잠잠해진 이후의 폭풍우에 대한 추억처럼 지상의 온갖 악의 소음이 우리의 기억속에서만 희미하게 들려을 그 때에, 마침내 이 기도는 완전하게 실현될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우리와 함케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리니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계2:4).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우리의 기도라면 우리의 삶의 체험도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지리라(고후1:10)는 바울의 말처럼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가면서도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창48:16). 죽음은 우리가 지상에 사는 동안 간구했던 완전한 구원을 안겨줄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순수한 선과 복과 순결의 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요란한 고해 위에서 이리 저리 흔들리며, 저 멀리 빚나는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소유하기를 갈망하고 있지만 죽음은 그것을 소유하러 들어가는 문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면 우리에게 이 약속, 곧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시91:14)는 약속이 실현될 것입니다. - 할렐루아 아멘 -.
-------------------------------------------------------------------------- 주기도문 강해/공부 10 송영/영광이 아버지게 영원히 마태복음 6:13c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 송영을 굳이 그리스도께서 직접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권위가 있는 마태복음의 사본들에는 이 송영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의 관념 연합을 통해 이 문구는 주기도문과 불 가분리의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세대들이 평소의 기도에서 사용해온 이 문구를 삭제한다면 이를 존증하는 사람들은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물론, 이 송영은 결론으로 적합하며, 주기도문 전체를 종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이 기도가 "악"에 대한 기도로 끝난다면 차겁고 우울한 느낌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느낌이나 관념에 적합하냐 적합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이것이 본문 비평상 정당한 것이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증거를 존중한다면 어쩔 수 없이 이 송영이 여기에 위치할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 니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괄호 안에 들어있습니다. 어떻게 하여 이 송영이 들어오게 되었는가하는 문제는 만족스럽게 답할 수 가 있습니다. 시편을 영창할 때 각 시의 끝 부분에서 송영(Gloria)을 반복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듯이, 주기도문이 공적 예배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도 끝에 송 영을 붙이는 것이 자연적인 관습으로 굳어졌던 것입니다. 이 송영은 원래 복음서의 난외에 기록되었다가 점차 본문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일단 본문 속으로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송영을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문구가 우리의 기도에는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한 자리를 차지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어떤 일정한 형식을 주신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본보기를 주셨다고 생각할찐대, 이 기도의 정신과 부합되는 어떤 부가어를 붙이는 것도 잘못은 아닙니다.
일견하기에는 이 부가어가 없을 경우 주기도문은 불완전한 것처럼 보입니다. 주기도문의 사랑이 깃든 소원. 겸손한 의뢰심, 회개, 정결해지기를 바라는 갈망 등은 있으나 모든 진정한 기도의 한 요소가 되는 희열이 넘치는 찬양은 전혀 나 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송영을 부가한 하나의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찬양과 기쁨의 부재는 단지 외견상의 현상이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기도문의 첫 절은 가장 고상한 형태의 찬양과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송영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이 송영은 이 기도가 앞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기도에 아무것도 추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이 송영은 전반부에 나온 내용이 끝에서 반복된데 불과합니다. 그리고 송영의 개념은 비록 고상하고 응장하지만 "우리 아버지"라는 개념보다는 수준이 낮습니다. 우리는 이 송영이 하나님에 관해 덜 찬양적이고, 덜 영적이고 덜 특유 한 기독교 사상을 전달해 주는 것으로서 주기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좀 지나친 말일수도 있으나 우리는 이 송영에서 신에 대한 가장 고상한 수준의 찬양에서 보다 낯은 양상의 찬양으로 떨어지는 어떤 변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란 찬양은 응장하지만 이것들이 주기 도문의 전반부에서 울리는 고도의 찬양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정당히 말하자면, 역시 이 송영은 주기도문의 구성 요소가 아닙니다. 송영은 두 가지 사항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앞의 모든 간구들이 영혼 속에서 일으키는,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명상입니다. 이런 점에서 송영은 주기도문에 대한 교회의 메아리라 하겠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기도에서 가지는 확신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송영은 소망의 근거를 찾는 명상의 발언이며, 하나님을 고수하고자 애쓰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사항들을 살펴봅시다.
1. 이 송영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 문구의 맨 앞에 있는 접속사 호티는 여기서 '왜냐하면(이는)...때문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구는 문자적으로 '이는 나라와 권 세와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전반부에 나오는 나라와 뜻과 거룩히 여김에 상응합니다. 순서는 같지 않지만 내용은 동일합니다.
(l) '나라가 당신의 것이옵니다'. 지상만물, 지상 인간들의 모든 운명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습니다. 전반부에서 이 기도는 세상이 그렇게 되기를 구했습니다("나라이 임하옵시며"). 그리고 여기서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우리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으나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이 권세를 가지고 통치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 확신이 우리 기독교와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볼 때 우리가 이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주변 환경은 나라가 인간들의 것이라고, 혹은 맹목적 운명, 우연에 속한 것이라고 생 각하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악한 마음은 나라가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암시하기도 합니다. 사탄은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니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사와 멀리 떨어져 계신 것으로 생각하기 쉽고, 여러 국가와 그들의 통치자들 및 정치의 장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 우리는 술수와 무력과 악행이 통치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 우리는 열국들이 사회가 인간을 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기원되었다는 개념과 너무나 거리가 먼것을 보게 됩니다. - 우리는 불신앙적 범죄와 비열한 음모의 기나긴 자국들을 목격하며, 여기 저기에서 어떤 영웅적인 희생 행위로부터 새어나오는 신적 섬광을 봅니다. - 우리는 통치자와 결탁하여 이권을 챙기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의 통치가 어디로부터 유래했는지 알아야 하며, 지금 여기 지상에서도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2) '권세가 당신의 것이옵니다'. "권세"에 해당하는 뒤나미스는 '능력, 힘, 세력'을 뜻하며, 육체적 일이든, 정신적 일이든, 군사적 일이든, 정치적 일이든 간에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어떤 사람 혹은 어떤 것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능력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뒤나미스은 그의 특성이며(수4:24; 렘16:2l),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한다{막14:62; 마26:64). 모든 권세와 능력은 하나님께 종속하는 것이다(엡1:20; 벧전3:22).
하나님은 단순히 지배권만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전세계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상존적 에너지의 장(field} 입니다. 모든 힘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고 심오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온갖 변화, 물리적 변화와 기타 모든 변화의 원인이십니다. 힘은 현존적 하나님의 의복입니다. 인간들 중에 존재하는 모든 권력과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will)는 창조적인 말씀입니다.
(3) '영광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영광"에 해당하는 헬라어 독사는 '믿다, 생각하다, (...인것) 같다, (...으로) 보인다'를 뜻하는 동사 도게오에서 유래했으며, 그 기본 의미는 '생각하는 것, 의견, 견해'입니다. 그래서 독사는 '기대, 견해, 의견, 명망, 명성, 칭찬, 찬양, 영예, 광휘, 광채, 영광' 등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영광'을 의미합니다. 독사는 성경에서 사람에게 표하는 '경의, 영예'의 뜻으로는 매우 드물게 사용되지만 하나님께 바치거나 드리는 '영광, 영예'의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이 독사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하나 님께 속한 특성을 말하며, 그의 인격의 빛나는 현현, 그의 영화로운 자기 계시를 뜻합니다(참조, S. Aalen).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성취되는데서 오는 찬양입니다. 이것이 모든 창조와 현현(Manifestation)의 목표입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성경의 사상입니다. 이것이 지극히 냉혈적이고 잔인한 교리로 전락할 수도 있고, 지극히 복된 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우리의 개념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신(god)은 어떤 능한 마귀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 우리...아버지"로 부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사상은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만일 주기도문이 "우리의 아버지"를 말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목표가 그의 영광에 있다는 사상은 그를 이기적인 폭군으로 만들고 말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사랑에 대한 계시, 그의 부성에 대한 계시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신다고 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성품을 실상 그대로 알리시기 위해 모든 것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 송영에서 우리는 놀라운 확신을 가집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당신의 것이읍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것을 상실하고, 어떤 일을 당하였든, 우리가 앞으로 그 어떤 불세례와 무기 또는 원칙의 싸움을 치르어야 하든, 어떠한 손실과 슬픔의 충격이 우리의 마음을 때리든, 우리 나라 또는 우리 민족이 어떤 미지의 바다를 횡단해야 하든,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시며, 언제나 우리의 아버지로 계시고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폭풍우와 구름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해와 별들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최고의 닻을 버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흥수 위에 좌정해 계십니다". 그리고 칠흑같은 밤의 흑암 속에서도 우리가 피곤에 지친 눈을 치켜 뜨노라면 하나님이 폭풍우를 건너 우리에게 다가 오는 것을 볼 것이며, 큰 놀이 잠잠해지면서 하나님이 갈 길을 내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에 파도가 자는 것 을 목도할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당신의 것이 옵니다'. 그렇다면 세계와 우리는 바른 길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며, 안전하게 보존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하고 선한 것이 통치할 것입니다. 연약한 대의(대의)가 승리할 것이며, 거짓된 명성은 모두 아침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고 인간의 행복을 위한 정직한 욕구와 노력이 영원한 영예를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갖 악에도 불구하고 꺼질 수 없는 큰 소망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뜻으로 맞서는 용기, 끝없는 인내와 끝없는 자비가 우리에게 맞는 옷이며, 우리 왕의 제복입니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우리 형제들을 모든 악에서 구원할 것이며, 그의 전능한 사랑으로써 자신의 우주적 왕국을 세울 것이고, 자기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그 영광은 자신의 모든 자녀를 사랑하는 영광, 그들에게 사랑을 받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
2. 이 송영이 이 기도의 끝에 위치하는 사실에서 얻는 교훈을 생각해 봅시다.
이 송영은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스스로 움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돌리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의 확신은 저 밑으로 깊이 내려가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서 거기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막는 피난처를 얻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을 바라봅니다. 그의 성품은 언제나 동일하며, 모든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모형이며 예언 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자기의 이유이며 동기이며 목표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라는 터위에 세울 때, 물밑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설 수 있으며, 환난의 소용돌이치는 바다 속에서도 우리는 그 밑바닥을 밟고 확고히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송영을 끝맺는 "아멘" 이 쓸데없이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의 아멘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는 물론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멘은 소원의 최후 피력일 뿐만 아니라 기대와 확신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소원뿐만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 그것에서 아무런 기대도 없이 허공으로 날아다닐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것에 대한 응답의 확신이 없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응답을 분간할 미래의 표지를 보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그리스의 궁수상을 보면 손을 펼치고 입술을 벌린채 눈으로 날아가는 화살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기도의 화살이 표적이 맞을 때까지 우리의 눈은 이를 주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으리라고 믿을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멘을 주기도문의 모든 간구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아멘은 하나의 예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기도문 속의 모든 간구가 성취될 것이라는 조용한 확신 속에 서 살아야 합니다. 이 모든 간구가 세상을 위해, 우리를 위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 기도가 응답될 것인지의 여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송영이 종결부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감사의 명상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 듯이 주기도문은 명상으로 시작하여 간구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모든 기도가 출발점에서 끝나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움직임이 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장 높은 하늘에서 술발하여 땅으로 내려온 다음 다시 위로 이끌려 을라가 출 발 지점인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안식합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 보좌 앞의 힘센 영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응시하는 동안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지상으로 날아내려가 인간의 슬픔을 위로해 주고 인간의 마음을 만족케 해 준 다음 나래를 펼 치고 처음의 자리로 다시 날아 올라가 날개로 얼굴을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지상에 축복을 가져오며 음료수 등 여러가지 용도로 봉사하는 대지를 흐르는 강물들은 원래 하늘로부터 비를 통해 옵니다. 맑은 물결이 흙탕으로 붉어지고 많은 오물로 흐려지지만 그 사명이 완수되면 대양으로 내려가서 안식하다가 거 기서 다시 하늘로 이끌려 올라가 구름이 됩니다. 우리의 기도도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명상에서 출발하여 다시 그 지점으로 되돌 아가야 합니다.
나아가 이 송영이 주기도문의 최후의 말이라는 점에서,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빵과 용서, 도움과 구원을 위한 기도는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 있을 때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함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 하나님 뜻의 성취등을 위한 기도도 그 내용들이 실현된 이후에는 쓸모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이 송영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영원히 을라갈 것입니다. 천둥처럼 강하게 울려 퍼질 마지막 새노래, 많은 하프 소리처럼 달콤하게 울리는 그 새노래는 지상의 이 찬양을 확대, 심화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않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5:l3).
이제 이 주기도문의 강해를 끝마치겠습니다. 이 강해는 주로 알렉산더 맥클라렌의 주기도문 강해를 대본으로 하여 국내외 주기도문 연구 서적을 참조, 필자가 크게 깨달은 바를 표현한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대해 내가 보고 읽고 듣고 깨달은 것을 말하면서도 나의 표현이 너무나 빈약함을 느끼며, 이 신적 기도의 분명하고 심오한 내용을 충분히 들어다 보지 못했음을 절감합니다. 그러나 아무쪼록 본 강해를 통해 독자 제위께서 내가 얻은 만큼이라도 도움을 얻어 이 기도가 얼마나 포괄적이고 웅대한 것인가를 크게 깨닫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미 서두에서 밝혔지만 여기에서 다시 힘 주어 말하건대, 이 기 도 속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인간의 관계, 기독교 신학과 윤리 및 기독교적 사회와 정치의 초석들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지극히 사소한 요망 사항을 위한 도움과, 매일의 의무를 위한 빛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죽음의 시간과 심판의 날을 위한 힘과 용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 지닌 영원한 깊이에 대한 계시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형제들을 위한 머나 먼 미래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다 사용할 수 없을만큼 이 기도는 넓고 광대합니다. 시대마다 자신들의 새로운 임무와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교훈을 이 간단한 몇마디 말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천국에서 쓸모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기도를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그 의미를 완전하게 궁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해석하십니다. 그리고 말없는 무수한 갈망, 수 많은 비통한 흐느낌, 수 많은 울부짖음, 모든 시대의 영원한 귀감이 될 주기도문과는 전혀 달라보이는 수 많은 무지한 욕망을 주님은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려지는 모든 기도에 영감을 주시고 응답하십니다. 가장 빈약한 기도라도 진심으로 아버지를 구하는 마음에서 나온다면, 그리고 죄를 자백하며 구원과 순결을 구한다면, 나아가 자기 아들을 보 내신 하늘 아버지의 큰 사랑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기를 소원한다면 그 기도를 주님은 '이렇게' 드리는 기도로 인정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라.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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