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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주기도문 강해(곽선희 목사)

에반젤(복음) 2020. 10. 4.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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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6:9∼15

소망교회/곽선희목사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이처럼 귀중한 복음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실은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Let God be God)"고 외치면서, 루터 스스로가 해석하기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길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하였습 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합니다만 혹 찾으려 해도 결국 우상숭배에 빠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에 무서운 고통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또 돌아올 수도 없는 "전적인 타락"에 빠져 있으므로, 하나님을 찾는다고 애써 본 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예수 자신이 계시자가 되셔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피로써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어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그 길을 확실하게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주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만남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방신에게 제사하며 구하던 종교적 옛 풍습을 벗어버리지 못한 탓에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 자 세와 태도는 이방종교의 그것을 계속하고 있어, 마침내는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큰 죄를 다시 범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른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우며 귀중한 복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저희를 본 받지 말라"고 소극적으로 가르치셨고 본문에서는 적극적으로 "이렇게 기도하라"고 확실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내 욕망과 세속적인 소원을 그저 토로하는 것은 사실상 우상 앞에서 나 할 일입니다. 구하기 전에 내 소원과 또 무엇이 내게 필요한지를 나 자신보다 더 잘 아 시는 그 하나님께 욕망을 보고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으며, "정욕으로 쓰려고"(야 4:3) 정 욕에 사로 잡혀서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죄송스러운 행위입니까? 우 리는 기도의 자세, 기도의 방법, 기도의 마음, 그리고 기도의 말 등을 자세하게 배워야 합니 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기도의 모범들을 깊이 상고하며 많은 믿음의 조상들과 사도들의 기 도에서 그 바른 자세와 받은 바 응답을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른 자세 를 취할 수 있을 때까지 오늘 나의 기도의 자세를 성경적 자세에 비추어서 성실히 배우며 교정하자는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기도하라." 하심은 큰 축복이며 은총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 하심이며, 기도하라 하심은 곧 응답에 대한 약속인 것입니다. 벌써 허락이 약속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는 계명이며 주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약속도 있고 능 력도 지혜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한 다음에야 비로소 응답되고 은혜와 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며 뜻입니다. 기도하는 자세 기도하는 관계 안에서 주는 우리와 말씀하시며 복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구하는 관계가 사랑이며 주시는 응답이 곧 은총인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도 자녀가 구하며 부모가 주는 그 오묘한 관계 속에 깊은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늘 경험하고 있습니 다. 이 관계 속에서 구하는 자와 주는 자가 모두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화롭게 한다는 구체적 의미가 곧 기도임을 알아야 합니 다. 무슨 아쉬운 것이 있어서만 간구하며 답답한 사정이 있어서만 기도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기도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므로 쉬지 말고 기도해 서 기도를 중단하는 죄를 범하지 말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먼저 기도의 대상을 가르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의 대상에 대한 고백은 기도의 자세와 내용과 또 기도하는 자의 존재까지도 함께 결정해 주고 있습니

다. 기도의 대상을 아버지라고 하였으니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며, 자녀 된 자의 신분과 존 재가 분명해질 뿐 아니라 기도가 의무이기보다는 특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그의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이니 이것은 소중한 자녀 된 자의 특권임이 틀림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말이 그저 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 시고, 그 크신 권능으로써 "본래 진노의 자녀였던 자"들이 이제 하나님의 자녀 되었으며, 그 가 우리의 의를 위하여 부활하심으로써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가 되어서 (요 20:17) 이제 감히 아버지라 부르며 또한 성령의 은혜로 인하여 "양자의 영"(롬 8:)을 받아,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주의 기도문에는 "하나님"이란 말이 한번도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 뿐입니다. 하나님이란 말은 유대인들이 쓰는 "엘로힘"이란 히브리어로써 흔한 이름이고, 저들이 아주 소중히 여기 는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를 지칭하는 이름이었습니다.(출 3 : 15) 이 때문에 제 3계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명시하며 유대인들은 참으로 그 여호와를 부르기를 꺼려하여서 "아도아이"(주)란 말로 대칭해서 불러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버지라 부르라고 친절하게 가르치십니다.

일반적 의미에서 아버지의 개념은 생명의 근원이라는 데 있습니다. 자녀의 생명이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뜻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상징적 표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진리를 비유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가장 귀중한 진리들을 상징적이요, 비유적인 용어로써 간결하고 생생하게 그리고 실제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신을 독생자 곧 아들로, 또 성령을 영 곧 바람으로 설명하 십니다. 아버지로서의 표현 자체가 철학적이요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헬라적 방법에서 떠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상징적인 히브리적 방법을 취하신 신학방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 니다. 다시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또 아버지는 다스리시는 주관자로서 자녀를 보호하는 분입니다. 자녀들은 그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고 또 필요한 것을 청구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녀가 확실한 자녀된 존재와 그 자세를 분명히 할 때에 가질 수 있는 권리입니다. 자녀답지 못한 자로서 그 신분을 완전히 떠난 자가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욕이며 큰 불명예 를 끼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탕자의 비유(눅 15)에서 탕자가 돌아오면서 자기 스스로 뉘우칠 때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자기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은 곧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그 아버지는 사랑의 아 버지였습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은 탕자를 내 보내주며, 기다려 주시고 또 돌아왔을 때 그처럼 큰 잔치를 베풀며 영접해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였습니다. 또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며 "찾도록 찾으시는"(눅 15 : 4)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계시하고 계십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은 참으로 희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시된 사랑은 부성적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특징은 공의로운 사랑이며 구체적이며 적극적이고 효과적이라는 데 그 깊은 뜻이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몹시도 진노적이었고, 신약에 계시된 사랑은 자애로운 것으로 비쳐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들과 또 십자가의 큰 사건에 비춰진 하 나님의 사랑은 공의로우며 진노적인 부성적(父性的) 사랑임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의 사랑은 그의 진노 속에 구체화되어 집니다. 사랑하기에 진노하시며, 구체적이기에 진노로 나타나고, 효과적이며 적극적이며 행동적이기에 그의 진노는 불같이 나타납니다.

그 속에 부모적 사랑의 신비로움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감상적이고 힘없는 나약한 사랑이 라면 눈물 흘리면서 벌써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대로 실망 하든가 포기하지 아니하며 오래 참으시고 기다려 주실 뿐 아니라 반드시 그 사랑을 실천하시며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십니다. 이것이 그의 진노입니다.

또한 그 사랑은 창조적 사랑입니다. 사랑의 대상을 찾아 헤매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 을 창조하십니다. 사랑 받을 수 없는 사랑의 배반자를 사랑하며 사랑할 만한 대상으로 창조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창조, 이 새로운 인간 창조의 과정에 교육적인 진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실 때 그 만남에 있어서 의로움의 반응이 곧 진노입니다. 당연한 공의로움의 계시인 것입니다.

의로운 진노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뜻에서 참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자녀가 그 아 버지와 같이 의롭게 되기를 바라는 확실한 소원이 그의 진노 속에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것 입니다.

또한 이 진노적인 공의로운 사랑이 마침내 아버지의 자기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십자가의 사건과 그 뜻에 대한 여러 가지 논리적 해석이 역사적으로 있어 왔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 인 것이 보상적 해석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지불할 값을 예수께서 대신 지불하였다는 것 이며, 또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십자가로 충족하였다는 충족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희생을 통하여 그의 참된 사랑을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부성적인 공의로운 사랑이 이렇게 구체화되어서 십자가 안에 계시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호세아 6:1 이하에서 하나님은 때리시 고 치료하시는 진노의 사랑을 보여주셨음을 설명합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아버지를 불러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아버지 자신이 지불하신 그 큰사랑을 마음깊이 뜨겁게 느끼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기도는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 "우리"라는 말속에 하나님의 자녀된 공동체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웃을 형제로, 자기를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믿고 그 안에서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공동적으로 고백할 때에, 같은 고백을 한 두 사람은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공동체적 유대와 그 화목한 관계가 하나님을 부르는 기 도 속에 벌써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을 자기의 전매 특허된 개인 소유물처럼 독점하려는 어리석은 믿음을 보고 유감 되게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특징 중에 하나가 이 공동체 의식에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아버지인 동시에 네 아버지이며, 결국

우리 아버지입니다. 나에게 사랑을 베푸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십니다. 이 같은 바른 신앙고백이 우리의 기도 속에서 늘 새롭게 확증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크게는 하나님을 자기 민족의 하나님 또는 자기 인종의 하나님으로 독점하고 스스로 독선과 아집에 매이 며 자기 우월감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협소한 민족주의로 표방된 선민사상들은 언제나 이 "우리 아버지"의 뜻을 잘못 이해한 데 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성, 즉 앗수르 나라의 수도에 가서 "외치라" 할 때에 불평하며 다시스로 도망가려 한것도 사실은 그의 협소한 신앙관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내게는 원수이지만, 저들도 하나님의 자녀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이 "우리 아버지" 개념 안에서 우리들의 형제 관계가 분명해져야 합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면서 한 마음으로 형제의 사랑을 느끼면서 "우리 아버지"를 부 른다면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윤리적 관계가 될 것입니까? 교만한 바리새교인은 세리와 함 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고 세리를 멸시하다가 응답 없는 기 도를 드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는 바른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하늘에 계신"이란 말의 뜻을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늘의 개념을 헬 라적인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적 개념의 하늘은 결코 천문학적으로나 물리학적인 하늘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쳐다보는 푸른 하늘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뜻은 먼저 하나님이 계신 곳을 뜻합니다. 위냐 아래냐의 공간적 개념이거나 피조물의 세계가 아닌, 창조주의 계신 곳을 뜻하는 질적 차이와 차원적 차이가 있는 용어입니다. 마태복음에서 34회나 하늘나라라는 용어를 볼 수 있는데 그 하늘이란 결코 푸른 하늘을 지칭한 것이 아니고 신적 공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역시 이 하늘은 하나님의 차원 즉 비세상적으로, 땅에 속한 세계 를 떠난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 그곳을 가리키고 있는 용어입니다.

동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독특한 신관인 하나님의 존재의 초월성을 보여주는 용어입니다. 헬라나 로마신화에는 신은 언제나 땅에 속하였고 인간과 섞여서 함께 사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신관은 하나님은 초월해 계시며 인간과는 전혀 별도로 높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동시에 그 하나님이 계시하시며 따라서 인간 역사 안에 친히 내재(內在)해 오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불가전달성 속성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르나 그는 아시며, 내게는 불가능한 것도 그에게는 가능하 며, 우리는 시간 공간의 제한을 받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그는 영원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 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십니다. 그리고 오셨고 또 우리로 그 하늘에 거하게 하실 것입니다.(요 15:1 이하) 그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며 모든 것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의 대상으로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세 마디 고백 중에서 우리의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하고 또 그 대상에 대한 우리의 기도의 자세가 분명해져야 할 것입니다.




주기도문강해 2

마 6:9∼15

소망교회/곽선희목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앞장에서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공부했습니다.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 에게 기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 기도하는 대상에 대해 깊이 깨닫는 바가 있어야 바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만 "하나님 아버지" 로 시작하고, 그 다음은 방향을 돌려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나열하여 구한다면, 이것은 자기 욕망의 푸념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기도란 시작해서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내가 누구 앞에 서 있으며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기 도의 성장과 함께 점점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지고, 성경적인 지식도 늘어나서 기도의 대상 에 대한 이해가 보다 넓어지고 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해 부분적 으로 알던 것을 좀더 넓고 깊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므로 기도 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계속 깊어지고 온전해져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내가 누구인가 하는 자기 모

습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나는 하나님께 기도할 체면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놓고 볼 때, 너무나

잘못한 것이 많아 감히 무엇이라고 기도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기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8편에서 "인생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기도했고, 성 안토

니오는 "하나님은 누구시오며 나는 무엇입니까?"라는 한 가지 제목으로 무려 3년 동안이나

산 속에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기도할 때에, 먼저 기도의 대상을 생각하고 그리고 하 나님 앞에 있는 자기 모습을 바로 보면서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도의 간구 가운데 첫번째 간구로써,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조금 의역해 보면 "당신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기게 되기를 소원합니

다"라고 보다 쉽게 옮길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5에 보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

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께서 항상 우리 마음에 주인이

되시어 우리 생활 전체를 거룩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인이 거룩하니 그 전체가 거룩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당신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간구되어져야 합니다.

주기도문 가운데는 7가지 간구가 있는데 그 중 첫째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

으시옵소서"라고 하나님을 위한 기도임에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먼

저 생각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를 닮은 하

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보고 그리고 나를 보아야, 하나님도 바로 보

고 나도 바로 보는 것입니다. 흔히 경험하는 일입니다만 기도할 때, 나의 형편과 처지에 대

한 답답하고 다급한 이야기들을 먼저 쏟아놓기 시작하면 분하고 억울하고 안타까와서 나중

에는 내가 누구한테 기도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까지 가게 됩니다. 울다가 원망하다 보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나의 사정만 보여지니 이것이 기도입니까?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그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말씀하

시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다급하고 답답한 사정이 있더라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생각하는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첫째 "당

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제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생각하겠습니다. 첫째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

서"에서 이름에 대한 문제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서는 이름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

지고 있습니다. 이름을 부르게 되면, 그 이름은 반드시 존재가 공존하는, 즉 임재하는 것으

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람의 이름

을 지을 때도 심사숙고해서 짓지 않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인물 중에 야곱이란 이름은 간사

하다는 의미를 가진 좋지 못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평생 간사한 생을 살았습니다. 여기서 성명철학을 논하자는 것은 아닙

니다만 이름은 신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을 자꾸 부름으로 그것이

기도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저주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풍습은 이상하게도

나쁜 이름을 지어야 수명이 길다고 해서 귀한 자식일수록 이상한 이름을 지어서 애칭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어딘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이름은 정말 잘 지어서, 부를 때마다 기도요

축복으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나 많은 왕들의 이름들을 보면 모두

가 그 사람의 운명을 대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치 일생을 살고 난 뒤, 그 생의 결론으로 이름을 지은 것같이 그의 이름이 곧 그의 생애를 대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 니다. 사실 이름이란 살아보기 이전에 먼저 지은 것이 아닙니까?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름 이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고, 하나님이 함 께 하신 것을 의미하고 그 존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매우 소중히 여 겨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거룩이라는 문제입니다. 거룩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합

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관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거룩(holy)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헬

라어로는 '하기오스'로, 구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특별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섞는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옷을 만들 때도 경건한 사람들의 옷은 여러가지 색을 섞어서 짓는 것을 피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섞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므로 하나님의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 입니다.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거룩이 특별히 잘 이해되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서는 거의가 아버지의 수저와 밥그릇은 특별히 구별하여 좋은 것으로 장만해 놓고 그것은 아이들 이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똑같은 한 솥에서 나온 밥일지라도 어른의 밥은 먼저 떠서 따 로 구별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경건한 마음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올 때는 될 수 있는 한 옷도 구별해서 입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엌에서 입던 옷, 시장에도 가고 교회에도 간다면 구별된 마음이 아닙니다. 옷 도 생각도 행위도 구별하여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말도 구별 하라는 뜻입니다. 무엇인가 구별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 날이 그 날이면 주의 날이 섞여 져서 좋지 않습니다. 구별한다는 것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거룩입니다.

다음, 높이는 거룩입니다. 거룩이라는 말을 어원적으로 보면 무겁다는 뜻이 있습니다. 무겁

다는 것을 히브리적 개념으로 이해하면 중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구별할

뿐 아니라 무겁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부르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학교에서 가르치기를 애국가가 울려나오면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던 길을 멈추게

하지 않습니까? 어른들은 애국가가 울려도 교육이 잘 안되어 왔다 갔다 하지만 학생들은 잘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애국가를 구별하여 무겁게 여기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의 마음에는 무거운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높이는 거룩이 있습니다.

다음은 성결하고 깨끗한 거룩입니다. 즉, 성결 되고 깨끗한 자세로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

다. 필자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마이크나 오르간 등을 가능한 한 가장 좋은 것으로 사용합니

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이

것은 사치와는 다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이 이렇게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으로 구별되고, 하나님 편으로 높이고, 하나님 편으로 무겁게 여기고, 하나님 편으로 성결하게 하는 이것이 일차적으로 생각해야 될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거룩한 자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거룩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복잡하게 말할 것도 없이 하나

님은 스스로 거룩하십니다. 문제는 사람 편에서 그 이름을 거룩하게 사용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할 때에 누구에 의해서

거룩히 여김을 받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온 인류에 의해, 특별히 믿는 사람들에 의해,

아니 나로 말미암아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거

룩하지만 우리들의 사용에 의해서, 행위에 의해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사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세례 받

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줄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습니까? 즉,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 로, 우리 이마에는 그 이름을 도장찍었으므로 이제는 그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마치 결혼식과 같아서 예식을 하고 나면, 신부는 이제부터 그 집의 식구로서 호적에 올 리는 것과 같이,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떠 나면 나의 이름 석자 앞에 "성도 아무개" 라고 쓰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이 름을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을 이어 받았으니 우리는 그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높여야 할 큰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산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입니다. 육신적으로도 우리가 아무개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이 름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도리가 아닙니까? 그의 자녀이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생각지 않는 다면 자녀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 을 생각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이름이 높임을 받지 못합니까? 먼저 헛되이 부를 때 높임을 받지 못합

니다. 내가 나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도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 헛되이 맹세함으로 높임을 받지 못합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해 놓고

서는 실천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함으로

욕되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단사상이나 거짓 교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합

니다. 여기서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가 그 이름을 떠나서는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중에서도 자신 있는 이야기를 할 때에, "내 말이 참 말이 아니면 성(姓)을 간다"는 말을 쓰

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이란 내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정도로 확실하

다는 의지가 들어있는 말입니다. 성이란 불변하여 항상 누구의 자녀라는 것이 따라 다니므

로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 몇 가지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한 사람들의 소원을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

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

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다."(잠언 30:7-9) 솔로몬의 귀한 간구입 니다. 너무 배불러서 교만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도 있고, 또 너무 가난하면 가 난한 것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살아서 너무 가난하지 않 도록, 즉 남으로부터 구제 받지 않고 살도록 노력하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열심히 믿으면 서 지지리도 못살면, 너같이 될까바 예수 믿지 않겠다라고 하나님께 욕이 돌아갑니다. 또한 구제할 능력이 있으면 "내가 무엇이관데 남을 도울 수 있는 자리에 있게 하시나이까" 하고 감사하며 도와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를 통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서로서로 도와서 특별히 못사는 사람이 없도록 보살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 람들은 사업에 실패하면 자기네들끼리 모두 와서 도와줍니다. 유태인으로서 이렇게 가난하 게 살면 선민으로서의 망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면서도 똘똘 뭉 치어 서로 도와 잘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성도들도 이것을 해야 합니다. 가난한 그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한 것도 있는 것입니다. 건 강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몸이 너무 약해 매일같이 휘청거리면, 하나님께 덕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잠잘

때 잘 자고, 먹을 때 잘 먹어서 건강도 열심히 돌보아야 합니다. 내가 게으르고 관리 소홀로 병약하여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를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금송아지를 섬기며 하나님 앞

에 범죄할 때, 하나님은 진노하시어 모세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

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 : 9-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하나님, 이 백성을 버리고 혼자서 잘 되는 것 원치 않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놀라운 기도를 합니다. 모세의 이 중보기도 중의 한 부분을 그대로 옮기면 "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출 32 : 12)라는 내용입니다. 이 기도의 뜻이 무엇입니까? 쉽게 풀이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어 망하는 것은 어쩔 수 없 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나올 때 떠들썩하게 열 가지 재앙까지 내리면서 구출해 놓으시고, 이제 와서 광야에서 다 죽으면 애굽사람들이 무어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돌아간다는 것입니 다. 우리 백성이 망하는 것은 죄의 결과라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되니, 이 백성을 살려달라는 대단한 기도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기도를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 나님이여! 나는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의 자녀이오니 내가 잘못되면 하나 님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내가 고생하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서 나를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어찌하시겠습니까? 모세가 이렇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키시어 진노를 풀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위대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의 첫째 간구인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귀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루터가 말한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라"(Let God be God)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는 일에 나를 바치는 기도를 해야 합니

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먼저 보지 말고 하나님을 먼저 보아, 그 이름을 위해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는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웃입니다. 이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성도들에게 이야기 합니다만 물건을 살 때 너무 깎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라 하면서 악착스럽게 물건 을 깎으면 덕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를 짓기 위해서 땅을 살 때도 수고하시는 분들께 너무 깎지 말라고 부탁을 드립니다. 교회 지으려고 땅을 사는데 서로 좋은 마음으로 거래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금 더 주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 못쓰겠다"라는 말을 듣지 말라는 것 입니다. 예수의 이름 때문에 참고, 예수 이름 때문에 손해 보면 하나님께서 다 채워 주십니 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되도록 애써야겠습니 다. 가능하면 사도 바울처럼 "내 소문을 듣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갈 1:24)라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셋째는 자기 자신입니다. 내 자신의 의식 속에 항상 하 나님의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나 혼자 힘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의 이름과 나는 함께 있습니다. 이런 자아의식으로 늘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입장이 되어야겠습니다.

폴랜드의 유명한 천재 음악가 쇼팽은 피아노를 위시하여 작곡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인 사람

입니다. 그가 20살에 예술의 나라 불란서로 유학을 떠날 때 그의 아버지가 부탁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폴랜드의 자랑이 되어다오." 아들의 마음속에 국가를 심어주었습니다. 또한

쇼팽의 선생님 역시 훌륭한 분이어서 떠나는 그에게 조그마한 은컵에다 폴랜드의 흙을 넣어

정성스럽게 싸서 주며 "어디를 가든지 조국을 잊지 말게, 이 한 줌의 흙을 군의 따뜻한 마

음으로 사랑해 주기 바라네" 하며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공부하는 동안 힘들 때마

다 "나는 폴랜드 사람이다. 폴랜드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지" 하며 노력을 했다는 것

입니다. 불행히도 그는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만 누구보다 폴랜드의 이름을

높이며 산 생애였습니다. 그의 유언은 "나의 폴랜드 흙이 담긴 이 컵을 나의 무덤 속에 넣

어주시오"라고 조국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죽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 나의 마지막 생명을 부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오직 당신의 이름이 나의 생명을 통해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기

도가 항상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기도문강해 3

마 6:9∼15

소망교회/곽선희목사




"나라이 임하옵시며"




지금 계속해서 주기도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복습하는 의미에서 앞의 내용을 잠깐 정리하

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기도의 시작이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하늘에 계

신 우리 아버지시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내 마음

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인격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오직 당신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

서라는 기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 지 않는 자들이나 악한 자들 때문도 있고 또한 믿는 우리들의 잘못 때문으로 하나님의 이름 이 더럽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이렇게 하십시오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옵소서 하는 간구입니다.

언젠가 연세 많으신 장로님을 길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장로님은 저를 보자마자 차를 대

접하겠다고 해서 찻집으로 갔습니다. 저는 "장로님께서 차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연세도

높으시고 이제 집에서 쉬시니 제가 당연히 사야지요" 했더니 "목사님, 저 이래도 돈 넉넉합

니다"하고 자신 있게 대답하십니다. "어떻게 넉넉하십니까. 아드님이 용돈을 잘 주십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장로님의 대답이 일품이었습니다. 장로님은 아들에게 "내 수중에 돈이 있

어야 네가 효자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아버지입니까? 물론 이 정도로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자지간이면 참 좋은 사이입니다. 늙은 아버지에게 용돈이

두둑하면 아들 잘 두었다고 높임을 받으니, 아들 효자 만들기 위해서 남에게 구걸하기보다

는 대접하며 다닌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특별히 꼬집어서 말한다면 내가 잘 돼야 하나님이 영광되

고 내가 잘못되면 하나님의 이름에도 손해가 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주기도문에서 두 번째 간구로 "나라이 임하옵시며"(The Kingdom come)입니 다. 우리말은 관사를 잘 쓰지 않는 습관이 있어서 문법상으로 손해가 많습니다. '그 나라'든지 '한 나라'라는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관사 없이 둥글둥글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반드시 'the'나‘a’를 사용하여 의미상의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

니다. "I am the way"와 "I am a way"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그래서, 요즘 현대 신학에서는 The Christ냐, A Christ냐고 맹랑한 논쟁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A Christ는 그 리스도가 한 분이 아니라 누구나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신학자들이 오히려 이상한 말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원래 "그 의 나라" 또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인데 우리말의 번역에서 관사가 빠졌습니다. 영어 번역의 "The Kingdom come"은 대단히 좋은 번역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당 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충성을 약속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그의 나라」의 개념을 생각하겠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모든 설교에 제목을 붙여

본다면, 그것은「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생애의 첫 번째 선언도 "회개하

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4: 17)고 외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까왔다'는 이 말은

우리들에게 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천년동안 계속 천국이

가까왔다고 같은 소리로 기간을 연장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까왔다는 우리

말의 번역을 시간적으로 해석한 데 문제가 있습니다. 가까왔다는 말은 가까이 있다는 뜻입

니다. 영어 번역을 보면 "Kingdom of heaven is at hand"로, 'at hand'에 묘미가 있습니다.

헬라어로도 "엥키켄"이라고 손에 닿는다는 뜻으로, 아주 가까이 있다는 의미로 쓰여져 있습

니다.

그러면「천국」이라는 단어가 복음서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마태

복음에서는 천국이「하늘나라」로 30번,「하나님의 나라」로는 3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 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하늘나라」라는 말은 전혀 없고「하나님의 나라」가 마가 복음이 16번, 누가복음이 32번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천국이 영생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생 략하겠습니다. 단지 지금 문제되는 것은 왜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저기서는 하늘나라 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상의 문제입니다. 말이나 글은 언제나 대상이 누구냐를 생각 해서 말하고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단어라도 대상에 따라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북회담 때 우리측 대표들이 평양의 식당에서 봉사 하는 여자들에게 "아가씨"라고 불렀다가 그들에게 혼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냐 하면 이북에서는 아가씨라는 말이 마치 창녀와 같은 호칭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식당에서 서브하는 여자들을 접대부라고 부른답니다. 우리의 습관은 접대부보다는 아가씨라는 호칭이 훨씬 더 좋고 일반적인 호칭이 아닙니까? 이렇게 같은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대상에 따라 뜻 이 완전히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북과 우리 남한은 벌써 수십년 단절되어 있는 동안에 이런 예가 허다합니다. 같은 예로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이란 말을 쓰기를 대단히 꺼려했습니다. 십계명 중 "여호와의 이름

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 때문에 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

대칭 (subs- titute)을 찾아서 썼습니다. 그래서, 주(Lord) 또는 아도나이 라는 말을 썼고, 하 늘이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겉으로 부르기는 주 또는 아도나이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여 호와를 생각했고, 하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히브리 사람들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천국도 하늘나라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경 우에는 또 사정이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헬라인들은 3층천의 우주관을 갖고 있어 하늘에 대 해서는 좋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땅에는 사람과 생물들이 살고, 땅 위에는 공 중(보통 하늘)이 있어, 여기에는 각종의 귀신들이 산다는 것입니다. 귀신들끼리도 결혼하고 시기 질투하며, 그들이 싸우다가 꽝하고 터지면 비가 오는 등 헬라신화의 모두가 여기서 만 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공중보다 더 높은 곳에 높은 하늘이 있어 여기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하늘나라」라고 하면 중간층으로 헬라 사람들에게는 마귀의 나라가 되므로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할 때는 하나님이 계신「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상에 따라서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마태복음에서는 하늘나라이며 요한복음에는 좀더 다른 신학적인 차원에서 영생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이 용어들을 다 합치면 내용은 하나로, 천국입니다.

다음은「나라」에 대한 개념입니다. 이 용어는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알아야 합니다. 나라라

고 하면, 일반적인 개념으로 민주주의 국가인가, 공산주의 국가인가 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게 됩니다만 여기서는 상징적인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고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하며 그리고 성령을 바람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상징이란 어느 진리 하나를 말하기 위한 것이지 전체가 다 맞아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그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요, 창조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사랑하시 며, 또한 이 사랑은 공의로운 사랑이요 진노하시는 사랑을 가진 분으로 이해하기 위해 상징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해서 어머니는 누구일까? 언제 어떻게 결혼해서 우리를 낳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발전해 나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할 때, 아버지를 상징으로 해서 말하고자 하는 그 뜻이 무엇인가만 알면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나 바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단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그 뜻이 제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나라」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성경이 기록될 당시로 돌아가서 그 문화권과 역사적 배경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특히 그 옛날에는 나라를 잘 만나면 그것이 곧 행복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그 당시 로 마 시민권만 가지고 있으면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자신들이 출세하기 위해 유권자들에게 노예들을 배급해 주기까지 했었으니까

요. 이 때에는 노예 둘만 있으면 충분히 잘살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로마 시민권만 있으면 여러 가지 특권이 주어졌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나라가 없었으니, 그들의 소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다윗이 온 천하를 호령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했고, 지혜의 왕 솔로몬에게 이디오피아의 여왕이 예물을 바치며 경배하던 그 왕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나라가 다시 온다면 국방도 튼튼하고 사랑과 지혜와 축복이 넘치는 나라로써 편안하게 살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 간절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복이 나라에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옛날에는 왕만 잘 만나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할 것없이 백성들은 편안할 수 있었고, 반대로 왕을 잘못 만나면 죽으라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왕으로 하는 나라는 얼마나 좋을까를 자꾸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나라(Kingdom)는 희랍어로 "바실레이아 "로써 왕권, 왕의 통치, 또는 왕의 주권이라는 뜻입니다. 즉 왕국이란 왕이 모든 것을 통치하는 독재정치입니다. 원래 독재라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훌륭한 왕이기만한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민주주의다, 헌법이다 하는 것은, 통치자가 항상 좋은 방향으로만 나가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나쁜 방향으로도 기울기 때문에 이것을 견제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힘이 한 곳으로 많이 집중된다고 문제가 됩니까? 장기 집권이라고 여 기에 문제가 있습니까? 훌륭한 왕이기만 하면, 즉 하나님이 왕이 되시기만 한다면 이런 것 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나라를 생각해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문화권으로는 나라에 대한 개념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옛날에는 천국이라 하지 않고 천당이라고 말했습니다. 요즈음 다시 천국이라

고 고쳤는데, 필자 생각으로도 천국보다는 천당이 우리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필자도 하늘나라이니 천국이 옳다고 늘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좀 깊이 생각하니 천당 이 역시 우리에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천국이란 가장 행복하고 편안할 수 있는 곳을 상징해야 하는데, 나라보다는 집이 더 적합하지 않습니까? 집이란 곧 가정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손자 등으로 구성된 따스하고도 안락한 곳입니다. 나라와 가정을 놓고 비교해 볼 때 어느 쪽이 더 행복한 느낌을 줍니까? 우리에게는 어디까지나 집

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 즉 천당이지요. 그래서 필자는 천당을 영어로 번역할 때

"heavenly house"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천당 개념입니다. 왠지 우리 국민들은 나라에 대해서는 그렇게 행복하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항상 빼앗기고 침략 당하고 정치 혼란이 계속되어 왔기에 우리 문화로써는 "하늘나라" 하면 당연히 천당이 옳은 표현이다 하는 것이 필자의 주장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두 세계로 나누어서, 현재의 나라 (present age)와 앞으로 임 하는 나라(age to come)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이 행사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시간,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인격,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공간,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줄을 그어놓고 여기까지가 하나님의 나라다 하 는 것이 아니라. 어디나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곳이면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반대로 지옥은 자연히 하나님의 은총 밖으로 떨어진 세계를 말하게 됩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있습니다. 손을 펴면 닿을 정도로 가깝게 잡을 수 있습니다. 가령, 어머니가 먹을 것을 선반 위에 올려놓았는데 아이들이 그것을 꺼내려고 이불과 베개를 포개놓고 올라서면 손이 닿는 것처럼 이렇게 손이 닿는 곳에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지금 천국이 와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구체적으로 나타난 곳이 누가복음 11:20과 마태복음 12:28입니

다.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어 깨끗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하자, 사람들은 놀라며

말하기를 여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

입었다고 비난도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오묘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 지금 여기에 귀신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곳은 마귀의 세계요 지옥입니

다.

그런데 귀신이 쫓겨가고 성령이 들어와 깨끗한 정신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예수님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already has come)는 예

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고 마귀의 주권이 물러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성경의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왔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등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지금 와 있다는 뜻

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순종하

고 예수님과 사귀면서 어둡고 사탄에 매였던 권세가 물러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 마음속에

가정 속에 사회 속에 자꾸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접할 때마다 점점 밝아지고 어두움

이 조금씩 조금씩 물러가는 상태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누가복음 17

: 21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예수

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너희 안에 있다'고 해서 내

마음에, 즉 심중천국(心中天國)으로 해석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너희 안'이라고 할 때 '너

희'는 '네 안'이 아니라 복수로써의 너희 안(among you)입니다. 더군다나 이 말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므로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도 바리새인들의 마음속에

천국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천국이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말은, 앞

으로 천국이 있을 것이다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는 말이므로, 바리새인들 안에 있는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곧 예수님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구하라'(seek)

는 것은 찾고 애쓰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보다 극적으로 표현하신 것은 "율법과 선지자

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

하느니라"(눅 16 : 16)고, 천국이 공격받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침입한다는 것을 천국의 입장

에서 보면 침입 당한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졌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환도뼈가 부러지면서까

지 하나님을 꼭 붙잡고 복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 이름을 이스라엘

로 고쳐라", 이 뜻은 야곱이 이겼고, 하나님이 졌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우리들도 아이들이 계속해서 칭얼대고 조르면 마지막에는 "그래, 내가 졌다" 하고 아이의

소원을 들어줍니다. 이것은 힘이 모자라서 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진 것입니다. 이와같이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졌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천국이 빼앗 길 천국입니까? 그러나 빼앗기겠다고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빼앗아야 합니다. 전쟁에 임하듯 이 천국을 위해서는 온 생명을 바치는 노력이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천국은 임할 뿐만 아니라 전파되고 계속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

고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면, 행사되는 것만큼 천국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점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임할 천국도 예수

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하나님 나라에서 이 잔치에 참여할 때까지는 포도주

를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천국이 임할 때 어떻게 되겠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 가고 한 사람은 머물겠다고 심판적인 요소가 있음도 말씀하셨고, 열

처녀 비유에서 다섯 사람은 들어가고 다섯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는 종말론적인 천국도 시사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정리해 보면 천국은 세 차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천국이 임했고, 복음이 전파되면서 하나님의 나라(주

권) 즉 천국이 확장되고, 예수께서 재림하심으로 천국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

에 "나라가 임하시옵소서"라는 말은, 주님의 주권을 완전히 내 마음에 내 가정에 내 사회에

내 나라에 행사되게 하옵시라는 뜻입니다. 그리하면 어둠의 권세, 사탄의 권세, 더러운 권세

가 다 물러나고 주님의 권세만이 있을 것입니다. 극적 장면으로 표현하면, 여기 귀신들린 사람이 있는데 "나라가 임하시옵소서"라고 하면, "이 사람의 흐린 정신은 물러나고 맑은 정신이 되게 하옵소서"라는 뜻입니다. 누가 미워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 때에 "나라에 임하옵소서"하는 말은, 용서하는 마음이 되고 화평하는 마음이 되어 미운 마음은 다 사라지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원입니다. 병든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 하면, 병이 낫고

건강하고 명랑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더러운 마음이 성결케 되고 하나님의 뜻으로

화하는 그런 인격이 되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나라가 속히 임해 주시옵소서"라

고 기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관련을 지으면 더욱 중요한 뜻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

님의 종말론은 전쟁도 있고 기근도 있고 환난도 있고 배신도 있고 배교도 있겠다고 여러가

지 징조를 말씀하셨습니다만 결정적인 결론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된 후에라야 나라가 임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은, 복음이 땅끝까

지 전파된 후에야 이루어진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라에 임하시옵소서"는 무슨 뜻입니까?

어떤 분은 직설적으로 해석해서 빨리 복음을 전파해서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하나도 없

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건설된다고 주장합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빨리 이 땅에 임하게 하는 길은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전파되는 유일한 채널은 무엇입니까? 언어입니다. 우리 나라는 한 언어로 다 통하지만 인도 같은 나라는 그 안에서 40개의 방언이 통용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라도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언어가 통해야 복음을 전파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서로 통하지 않을 때는 죽인다고 해도, 살린다고 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금년 10월에 에딘버러에서 복음이 들어가지 아니한 언어가 없도록 국제회의를 가집니다. 지 금까지도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언어가 천이 넘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방송을 하고 책을 만들어 전파해도 알아듣는 언어로 전하지 아니하면 복음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라도 그 언어를 가진 사람이 예수를 믿어야 전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을 받지 못한 언어를 하나도 없이 하자고 알 윈터 교수가 제안해서 회의를 갖습니다. 한 나라에서 몇 개의 언어를 맡아, 책임지고 복음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복음을 전하는 데 세 가지의 큰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황색 인종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백인들은 흑인들과 불통이 고, 흑인들은 백인들과 불통입니다. 그러나, 희지도 검지도 않은 우리들 은 양쪽과 다 통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둘째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다른 나라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중요한 여건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점이 눌린 자(oppressed pe- rson)들 에게 대단히 유리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가 무당 종교에 살고 있다는 점입니 다. 아직도 미신이 많이 있어 푸닥거리가 여기저기서 행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복음을 받아야 할 곳이 모두 미신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논리적이고 이론적이고 기계적인 세계의 사람들은 미신이 많은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비슷한 도깨비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이어야 도깨비를 이해함으로 전할 자격이 있다는 것입

니다. 이것을 학술적인 용어로 말하면, animistic world에 산 사람이라야 animistic world에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경제적인 부는 없지만 전도할 자격은 충분

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아무튼 복음을 듣지 못한 민족이 하나도 없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빨

리 임할 것 아닙니까? 복음을 듣지 못해서 예수를 믿지 못한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종말론의 결론입니다.

그러면, "나라이 임하옵소서" 하는 기원은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해 서 "열심히 전도하겠습니다" 또는 "내가 주의 나라의 주권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충성하고 헌신하겠습니다"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주권이 확장되기 위해서 내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천국은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요, 그리스도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에 가정에 교회에 사회에 나라에 세계에 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원래의 뜻입니다.







주기도문강해 4

마 6:9∼15

소망교회/곽선희목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로써 가장 온전한 기도입니다. 필자는 가끔 마지막 숨을 몰아 쉬는 사람들에게 주기도문을 외우도록 권하며 또한 간호하는 분들께도 옆 에서 계속 읽어 드리라고 부탁 을 합니다. 정말 나의 정신이 혼미해져갈 때, 이 생을 마감하 는 자리에 서 어떤 기도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무의식 중에라도 주기도를 드릴 수 있어 야 하고, 이 기도에 연합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주기도문 중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세 번째 기원을 공부하겠습니다. 이 문장은 우리말로 옮기면서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원문대로는 "당신의 뜻이 땅에 이루 어 지이다.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의 순서로 "당신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가 주문장입니다. 이 기원은 앞 장에서 본 "나라 에 임하시옵소서" 하는 말과 표현만 다를 뿐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단 지 "나라이 임하시옵소서"는 보다 강한 표현이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는 나라가 임해주기를 바라는 것에 대 한 보충설명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두 기도의 제목을 갈라보면 또 그런 대로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즉, "나라가 임하시옵소서"는 강한 권력(power)이 임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고, "뜻이 이루어지이다"하는 것은 조금 더 부드럽고, 좀더 선교적이며, 자원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강하게 표현해서 죽일 사람은 죽이고, 살릴 사람은 살려서 하나님의 심판과 권세가 그대로 이 땅에 임하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있 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린 학생들이 하나님께 쓴 편지 중에서 "하나님, 나쁜 사람이 많습니다. 제발 힘 좀 내세요" 하는 순수한 기도문을 보고 크게 감동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생각으로는 악이 이기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힘 좀 내시라는 순수한 표현이었습니다. 사실 "나라이 임하시옵소서" 하는 말은 강한 권세가 그대로 임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속히 당신의 마음대로 온 세계를 다스려 주기를 바라는 힘의 통치

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그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이다" 하는 말씀은 자원적이요 선교적인 의미입니다. 강압적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뜻을 받아서 지키게 해 달라는 뜻입니 다. 다시 말하면, 온 세계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이 뜻을 지키도록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 "뜻을 지킨다"는 말은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나라는 주권을 의미하고 그의 뜻이

란 나라의 법입니다. 지금 우리는 민주 국가에 살기 때문에 민주화라는 말도 듣고 국민의 의사가 곧 법이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법은 국민의 의사가 종합되어야 하고 국민의 의사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극단적인 이야기이지만 열 사람 중 아홉 사람이 모두 못된 일을 하자고 동의했다 해서 그

나쁜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민주주의가 최선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방법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물론 진리도 아닙니다. 원래 악한 사람만 모아 놓고 민주주의 하자면, 악한 법외에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도둑들을 모아 놓고 민주주의 하면 도둑질 외에 무슨 다른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민주주의 보 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입니다. 100명 가운데서 99명이 동

의해도 틀린 것은 틀린 것이고, 한 사람이 주장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그 당시의 상황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은 대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민주주의적인 측면에서 보면 틀린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말하기를 "모두가 너를 죽이라 하는데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냐"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제자

들까지도 도망가고 없는 이 시점에서 혼자 진리를 찾아서 뭐하느냐고 비웃는 질문이었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디 엘 무디는 예수께서 일생동안 가장 마음 아픈 순간이 바로 이 때였을 것이라고 추리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는 예수님도 할 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는 말은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기를 바라는 마음

이므로 민주주의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뜻"이란 말도 그 나라의 법이므로 하나님 나라의 법, 즉 왕국의 법을 의미합니다. 옛날, 왕국의 법이란,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의 생각이 법이었습니다. 복잡하게 헌법을 만들어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말하면 그것이 곧 법이었습니다. 사실 지혜있고 능력이 많은 왕이 있어서, 그가 말하는 것이 곧 법이고 진리일 수 있다면 복잡하지 않고 얼마나 좋습니까? 백성들은 따르기만 하니 그야말로 편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 모두가 판단하고 만들어야 하니 문제가 많습니다.

최대 공약수를 찾아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이 "뜻"이라고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법이므로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백성들의 요구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는 것"은 권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이다"하는 것은 선교적이고 자원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2 이하에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그랬습니다. 여기서 뜻을 이룬다는 말은 병을 고치거나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

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는 말씀에서 "아버지의 뜻"이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고 구제하고 봉사하는 정도가 아니라 보다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그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의요, 사랑이요,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에 대해 좀 생각하겠습니다. 뜻이 하늘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하늘이란 하나님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과는 반대되는 세계로써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가 아니라 신령한 세계, 즉 형이상학적인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이 행사되는 그 세계인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졌다 하는 그 의미는 첫째, 천사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천사들이 그를 받들어 섬깁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종말적 계시자입니다. 그런 분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셨다는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도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는 율법을 지켰고 의롭게 살았으며 병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뜻을 이루러 온 것이 아니라 보내신 자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율법을 폐하러 온것이 아니라 완성케 하러 왔다" 등 계속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현실 속에서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면 보통 의(義), 진리, 사랑 등으로 모두가 추상적인 것들입니다. 이 추상적인 것을 현실 속에 옮기는데에는 대단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가령, 어느 처녀가 결혼을 하려고 합니다. 그 처녀의 신랑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건강은 좀 부족하더라도 진실하고, 돈은 좀 없어도 의로운 사람으로 신앙 좋은 청년이어야 함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한 남자가 있습니 다. 그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녀의 신랑감인지 아닌지는 대답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진실한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임을 알지만, 바로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인지는 알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희생하고 죽어야 하는 것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 일을 위해 온 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내일 아침에 빌라도의 손에 넘기워서 이렇게 죽어가야 하는 이것이 아버지의 뜻인가 하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추상적인 진리를 현실 속에 구현하고,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이 땅에 이루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가끔 사업하시는 분들이 필자에게 찾아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저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좀 구별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사실 제가 그들의 설명을 아무리 들어도 저 역시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리어 "당신에게 어느쪽이 좀더 이롭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거의 같은 비중으로 두 가지 방향을 이야기하면서 그래도 조금 자신에게 이로운 쪽이 이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저쪽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서슴치 않고 저는 대답합니다. 정말 때로는 둘 다 아름답고 의로운 길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둘 다 똑같이 좋다면 좁은 길로 가거나, 손해보는 길을 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손해보면, 누구에겐가는 반드시 이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조금이라도 더 이롭고자 하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뜻이 굽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추상적으로만 진리를 생각다면 현실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찾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내 뜻 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곡히 기도하시며 십자가를 결정합니다. 그런고로 십자가의 희생, 순종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건이 의미상으로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내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가지로 구분해 보면, 하나는 내 매일의 생활(daily life)에서, 즉 구체적인 현실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6:38이나 에베소서 6:6을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화 되어가야 합니다. 로마서 12:2, 골로새서 4:12을 참고해 보면, 내가 웃는 것, 우는 것,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조차도 정말 예수님의 마음 같아져야 되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어떤 신학자는 입맛신학(tasting theology)이라고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억지로 내 의지로 끊어 버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음식으로 말하면 입맛이 변해 주어야지 나의 노력으로 하려면, 작심삼일로 실패하고 맙니다. 흔히, 술을 먹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만, 결심한대로 성공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술맛이 싫어지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세계에 계속 매력을 느끼는 한 관계를 끊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강조하기를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인은 언젠가는 넘어질 것입니다. 비록 나는 손해를 보았더라도 내 편이 좋고 잘했다는, 그 의로움에 대한 만족과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의로운 길에 대해 늘 불만스럽고 괴로움을 가진다면 어떻게 그 길을 가겠습니까? 쉬운 예를 들면, 교회에 나오는 것이 시간 시간 즐겁고 기뻐야 하는데, 집사이니까 체면상 안나갈 수 없어 나가고, 누구 때문이라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중요한 것은 입맛이 변해야 합니다. 물질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사치품이나 보석 등이 자꾸 좋아지면 자기도 모르게 보석가게 앞에서는 발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필자는 본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다는 것은 내 것이나 남의 것이나 보는 그 자체는 마찬가지입니다. 먹는 것이 아니라 결국 보는 것이므로 구경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윈도우 쇼핑(window shopping)은 내 것은 아니지만 보고 싶을 때 언제나 볼 수 있어서 얼마나 좋습니까? 내 것이란 집에다 깊숙이 간직해 놓고 잃어버릴까 염려하며, 죽기 전에 어떻게 처분할까 고민하니 애물덩어리입니다. 그러니, 백화점에 두고, 보고 싶을 때마다 고루고루 구경하고 즐기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반드시 나의 것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조금만 방향을 돌리면 이렇게 편한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던 것을 나도 사 랑 하고, 그리스도께서 즐겨 잡수시던 것을 나도 즐거이 먹고,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이

나도 좋아, 점점 그리스도화 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도록 (imitating Christ) 늘 기도하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중동의 정치가는, 그가 다시 두 번 더 태어날 수만 있다면, 첫째 소원은, 이천년 전에 태어나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앉아 말씀도 듣고 그 얼굴을 직접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다시 태어나도 오늘 이 세대에 태어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대는 문제가 많고 도전적이므로 한번 살아볼 만한 때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천년 전보다야 요즈음 여러 가지 의미에서 더 살만한 세대입니다. 물론 부정적인 측면도 대단히 많습니다. 어느 때 보다 복잡한 세대여서 하루가 멀게 대형 사고가 터지고, 미국에서 감기가 돌면 우리 나라에서 재채기가 나올 정도로 모든 일이 민감하며, 중동이 삐걱하면 기름 값이 올라 내 생활에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니 걱정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심각하게만 생각하지 마십시다. 어떤 소용돌이를 치더라도 역사의 결국은 하나님께 있으니 너무 나와 연결 해서 걱정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좀더 초연한 자세로 바라보면 이 세상은 결국 하나님의 뜻 으로 이끌어져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마음, 즉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핍박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의 말씀처럼 천국을 마음에 두기만 하면 문제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로 앞에 놓고서도 "잠깐 후에는 네가 나를 보지 못하리라, 그러나 조금 후에는 보리라"고, 그 모진 고난도 잠깐이면 넘어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이 초연한 세계관을 닮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이 내 성품 속에서 내 인격 속에서 이루어지고 또 나를 통해서 이 가정 안에 사회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운명론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뜻이 아니라 특별히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나를 살려 두는 것입니까?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는 것입니까? 혹시 지난날에 어려운 시련이 많았습니까? 무슨 일이든지 의미 없는 일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우연이 있어도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실수라는 것이 있어도 하나님께는 실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제 지난날의 나의 생을 종이 한장 넘기듯이 한장 한장 넘겨보십시다. 의미 없는 것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하니, 모두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하기 위해 의미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우연한 사고 같고 우연한 기회인 것 같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함께 하신 하나님이, 앞날에도 함께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하고 그리고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긴 설명을 요하는 문제이지만 쉽고도 간단하게 그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나에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다 하는 것이 무엇이냐 말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음악이 제일 중요하고, 글쓰는 것이 중요하고, 운동하는 것이 중요하고, 돈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각자 나름대로 우선 순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필자의 경우는 설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아무튼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그 길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둘째로 자신에게 가장 쉬운 일이 무엇입니까? 쉽다는 것 은 하나님께서 그 방향으로 내게 달란트를 주신 것입니다. 그 일은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허락하신 일이므로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돌발적으로 사람을 기용하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을 쓰시기 위해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준비하셨고, 모세를 쓰시기 위해 80년을 준비하고 훈련시키셨습니다. 오늘 내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노래하는 것이 즐겁고 쉬우면 열심히 노래하고, 청소하는 것이 쉬우면 열심히 청소하고, 심방하는 것이 쉬우면 열심히 심방 하십시다. 무엇이든지 자신 있는 것으로 열심히 하면 그것으로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 일은 쉬울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줍니다.

만약에 하기 힘들고 불평이 생긴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하기만하면 즐겁고 미치기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열심히 하십시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부러워하지 말고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뜻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명론이라고 합니다.

둘째로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뜻은 다양합니다. 개별적으로 각각에게 주신 것이므로 모든 일이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중에는 무엇인가 하려다가 잘 안 되면 너도 나도 목사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목사가 되려면 우선 온 교인들이 쳐다보기에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용모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서양에서는 목사를 공동 애인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조금도 무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목사고시를 국가적으로 치르는데, 건강, 용모에서부터 음성, 지식, 신앙등 최고의 인격을 고릅니다. 그래서 독일 목사님들은 모두가 잘 생기고 진짜 멋쟁이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사정은 어떠합니까? 요즘 많이 좋아지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대학 학력고사 점수가 시원찮으면 목사나 하라고 권유하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은 다양하게 너무나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그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 길로 전적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어차피 여러 가지를 할 수는 없으므로 다른 생각일랑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일에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작고하신 이 동범 선생님은 찬송을 특별히 은혜스럽게 부르시는 분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세상 노래를 많이 불렀는데 어떤 사건으로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났었습니다. 그 후로는 죽을 때까지 찬송만 부르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에 유혹이 많았습니다만 모두 뿌리치고 찬송만 부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신 분입니다.

셋째로 명심할 것은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은 반드시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좋아 보이는데 하나님은 저것을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의 뜻을 고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잘 가다가 때로는 도중하차하여 내 뜻으로 돌아서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일단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다른 곳은 보지 말고 꾸준히 밀고 나가야합니다. 목사님 중에서도 도중에 방향전환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신학생들 중에서도 1학년 마치고 방황하여 좀 쉬다가 들어오고, 또 쉬다 들어오고 하여 갈지자 걸음을 걷는 학생들을 봅니다. 사실, 온 정성을 기울여도 잘 될 것인지는 미지수인데, 시간 낭비하고 방황하면 얼마나 손해입니까? 유혹이 있음을 알고 내 뜻을 포기하는 결단이 있어야겠습니다.

넷째로 명심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에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말하면,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희생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곧 순종을 낳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 붙잡힌 바 된 그것을 나도 잡으려고 좇아간다. 아버지의 뜻을 내 뜻으로 삼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순종이요, 최고의 선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 분은 교회 일에 너무 지쳐서 아주 피곤한 상태였는데 드디어 열흘 후에는 휴가를 얻게 되었습니다. 부인과 함께 오랜만에 얻은 휴가를 즐기자고 의논하면서 노끈으로 열 개의 매듭을 만들어 하나씩 잘라가며 기다리기까지 했습니다. 마치 초등학교 학생들이 소풍가는 것을 기다리는 것처럼 하루 하루를 세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틀을 남겨 놓고 목사님이 덜컥 앓아 누웠습니다. 휴가고 뭐고 다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 때에 목사님은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여보, 다시는 인간 마음대로 휴식할 때를 정하지 맙시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쉬라 하시면 쉬고, 일하라 하시면 일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내게 향하신 구체적인 뜻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임무요,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는 자를 보호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이 임무입니다.

이제 그 뜻을 알고 준행해 나가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단지 그 뜻에 순종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뜻을 따르는 자에게는 실패란 없습니다. 항상 승리와 감사와 찬양이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내게서 이루어지이다" 하는 기도로써 자신을 제물로 바칠 때 큰 영광이 있게 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갑자기 편도선이 부어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누워서 생각하니 설교도 못하고 심방도 못하니 여러 가지 불평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왜 편도선을 만들어서 부었다 내렸다 하게 해서 수술까지 받게 하시나 하고 원망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영감을 주시기를, 편도선은 이제 좀 쉬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적신호라는 것입니다. 목이 붓거든 과로했으니 쉬라는 표시기(indicator)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 표시가 없다면 "너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도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때에 붓게 하셔서 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오히려 감사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향하신 뜻이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감사할 것뿐입니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오늘 내게서 이루어지이다"







주기도문강해 5

마 6:9∼15

소망교회/곽선희목사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지금까지 공부한 주기도문은 모두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기도입니다. 그

러나, 이 본문부터는 사람을 위한 간구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우리 자신을 위한 첫째 간구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기도로써, 간단하면서도 의미깊은

내용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너무나도 유치한 기도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만 깊이 생각하

면 다음과 같은 의미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돌보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너무 영적으로만 생각해서 신령하게만 해석하려는 고집이 있습니다. 말씀 그대로 순

수하게 받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돌보

심으로 글자 그대로 먹을 것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도입니까? 이것은 이방인

들이 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들이 구하는 내용은 대개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것으

로 이런 것들만을 귀하게 여깁니다만, 성경은 물질적이고 대단히 현실적입니다. 그래서 윌리

임 템플은 "기독교는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물질적인 종교다"라고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물질을 부정적이거나 신앙과 위배되는 것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정신적인 차

원이나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것, 즉 신령한 것을 중하게 여깁니다만 동시에 하나님이 지으

신 이 세계와 인간의 육체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위한 양식도 구하라

고 주님은 가르치고 계십니다. 사람은 무엇보다 우선 먹어야 삽니다. 병원에서 치료하는 것

도 결국은 직접 간접(주사)으로 다 먹여서 치료하는 것입니다.

가끔 금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이 분들도 대부분은 물은 마시면서 금식을 합니다. 그렇

지 않으면 며칠 못 가서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

신 이 육체를 잘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몸

을 하나님께서 돌보고 계신다는 신학적인 귀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아프면 바로

직전에 적신호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둔해서 지나가고, 알면서도 무리하게 지나가

면 앓아 눕게 됩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성령의 전입니다. 그러므로, 사

는 날까지 건강하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

강보다는 오히려 집이나 보석 등 물질을 더 귀중하게 여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습니

다. 물질이 어떻게 건강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만 세상에는 물질을 더 우선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건강이란 그저 위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높은 차원에서, 즉

신앙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몸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양식이 필요한 것

입니다. 양식은 생명유지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식을 분석해 보면, 모두가 생명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썩은 것을 의미하므로, 썩은 것이

양식이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먹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엄밀한 의미에서 식물

도 동물도 살아있는 것만 먹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죽은 것을 먹는 것 같지만, 세포가

죽는다는 것은 썩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산 것을 먹는 것입니다. 필자가 미국에

서 어느 스테이크 하우스에 갔는데 스테이크가 굉장히 연하 고 맛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맛

이 좋다고 칭찬을 했더니 웨이터가 그 비결을 특별히 알려주겠다고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생색을 내며 다가왔습니다. 그 웨이터의 말에 의하면 고기를 잡아서 얼리지 말고 영

상 5℃에서 5일간을 보관했다가 구우면 가장 연한 스테이크가 된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 이

유를 물었더니 그는 굉장한 인생철학을 말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들을 창조하

시고 먹도록 하셨는데 이상하게도 먹는 양식에는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호랑이는

언제나 살아 있는 동물을 잡아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만을 먹고, 어떤 동물은 또 숨이 넘어

간 것만 먹고 이렇게 순서 껏 먹다가 마지막 정말 썩은 것은 여우가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

렇다면, 사람이 먹는 것은 어느 순서쯤 됩니까? 사람은 썩기 바로 직전의 상태를 가장 맛있

는 고기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로 잡은 고기는 질겨서 맛이 없고, 부패한 것은 냄

새도 나고 또한 먹었다 해도 몸에서 받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맛있는 스테이크란 5℃에서

보존하고 잡은지 5일정도 되는 고기라는 것입니다. 이 상태의 고기는 완전히 죽은 고기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산 것이므로, 결국은 생명을 먹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식물도 마찬가

지입니다. 결국 생명을 먹어서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

은 "하나님이여, 내 생명을 보존해 주옵소서" 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둘째로, 양식은 생명유지 뿐만 아니라 먹어서 즐기는, 즉 입맛을 즐기는 의미가 있습니다.

먹는다는 것이 반드시 먹고살아야만 해서가 아니라 즐기기(enjoy) 위함도 대단히 중요한 것

입니다. 그래서 껌과 담배가 생겼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먹는 것을 자주 즐기고 싶

으나 계속 먹으면 살이 찌고 부작용이 생기므로 씹되 넘기지 않는 것이 껌이지 않습니까?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튼 사람은 먹는다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입맛이란 하나님의 축

복입니다. 크롬웰 장군은 식사할 때마다 "하나님이여, 귀한 음식을 주시고 왕성한 식욕도 주

시어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입맛이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여자 분이 한

끼 먹어서 한달 정도 견딜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하루

세 번씩 반찬 장만하고 설겆이 하는 것이 귀찮아서 하는 불평인 듯 합니다만 그 분도 먹는

다는 것이 즐거움임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먹는 즐거움을 주시기 위해 하

루에 세끼를 먹도록 만드신 것 같습니다. 입맛은 하나님이 주신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먹는다는 것은 사람이 움직이는 힘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먹지 않으면 일할 수 없듯

이 모든 운동의 원동력은 음식으로부터 옵니다.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통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맛을 향유하며 일할 수 있는 힘을 얻는 중요

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예수님은 가르치

신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배후에는 또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음식은 많

이 장만되어 있으니 구하기만 하면 주시겠다는 허락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반

드시 구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구하는 자에게는 허락이 이미 기다리고 있는 것이므로 구

해야 하는 우리의 순서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공급자(support)로서, 아버지 되시고자 하심입니다. 적어도 하루 세 번씩

은 아버지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자식이 구할 때, 아버지 어머니는

베푸는 재미가 있습니다.

필자의 친척 가운데 8남매를 둔 가정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큰 식구를 이

끌기에 아버지 혼자 너무 힘이 들어 새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새 어머

니를 어머니로 부르지 않아 고민을 하다가, 가족회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필요한

것을 요구할 때 아이들이 "어머니, 주십시오"라고 말해야만 주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새 어머니는 옷을 빨아서도 자기 방에 모두 정리해 놓고 아이들이 어머니라고 불러야만 주

었더니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도 말씀하십니다. "내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즉 이 말씀은 적어도 하루에 세 번씩은 "아

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깊은 관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구하기만 하면 주겠다는, 즉 공급자가 되시고자 하시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친히 주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받는 기쁨이 있고 하나님은 주

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구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구할 것이 없는 자는 불행한 사람입니

다.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열심히 구해야만 되겠습니다. 혹 어떤 분은 하나님께는 신

령한 것만 구해야지 시시하게 양식 따위를 어떻게 구하느냐고 말합니다만 잘못된 생각입니

다. 사실 우리의 기도가 고상하면 얼마나 고상할 것 같습니까? 이런 것은 논하지 말고 그저

아쉬운 대로 아버지께 구하십시다. 주시는 자가 되고 싶은 아버지의 의도를 알아서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구하면 기쁘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사실, 양식이라고 하면 한 가지만은 아닙니다. 우선 육신을 위해 먹는 양식이 있고 둘째는,

정신(혼)을 위한 지식의 양식이 있습니다. 정신도 계속 양식을 먹어야 바른 정신으로 살 수

있으므로 여러 방면에서 계속 배워야 합니다. 지식을 먹지 않으면 정신도 녹이 납니다. 셋째

는 영의 양식, 즉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신명기 8 : 3에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

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

니다. 우리의 영은 만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먹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

해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 : 51에 보면, "나는 산 떡이다"라고 예수님 자신이 떡

이 되고 양식이 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우리들의 생명의 공급자이심을

알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음, 일용할 양식(daily bread)에 대해 생각하겠습니다. 양식은 그날 그날 필요한 것으로 매

일 먹어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한끼 먹고 여러 날을 견딜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습니

다. 즉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말씀은 날마다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묘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은 번역함에 따라 날마다의 양식, 다음날을 위한 양식, 그

리고 필요한 양식 등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날 그날 적절하게 필요한 양식이란

뜻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곳은 출애굽기 16:1-21절까지의 내용으로 만나가

내려온 사건입니다.

만나는 매일매일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미련한 사람이 내일 몫을 걷어 놓았더니 다 썩

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매일매일 내려서 매일매일 걷어 먹는 것이 만나입니다. 만약, 내일

만나가 내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굶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야말

로 일용할 양식만 허락하신 것입니다. 매일매일 계속 주셔야만 먹고 살 수밖에 없도록 매일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양식이란 필요한 분량 외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가령, 온 국민이 먹고 남는

쌀이 있다면 언젠가처럼 막걸리 해먹자고 쓸데없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요즈음은 세계

가 넓어져서 곡식이 넉넉하면 수출도 합니다만 잉여 농산물은 처치가 곤란할 때가 더 많습

니다. 미국은 때로 잉여 농산물 때문에 골치를 앓는다고 합니다. 언젠가 필자가 미국농촌을

방문했을 때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부분적으로 땅을 쉬게 한다고 했습니다. 농사짓지 않

아도 지은 만큼 나라에서 돈을 준다는 것입니다. 만약 땅을 모두 활용해서 농사를 지으면

과잉 생산으로 곡식 값이 안정이 되지 않아, 오히려 더 많은 문제가 생기므로 농사짓기 전

에 돈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량은 꼭 필요한 만큼만 있어야지 더 이상은 필요치 않

습니다. 일반 가정에서도 필요만 만큼만 음식을 장만해야 합니다. 때로 여분이 생기면 맛이

변질되고 결국 버리게 되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일용할 양식만 계속적으로 얻어야 하는 것

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진리는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은 신령한 면에서도 일용할 양식은 마다하고

잔치(부흥회)에만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잔치 집에 가서 한끼 실컷 먹고, 몇 달씩 굶을 생

각인 것 같습니다. 양식이란 된장국이라도 매끼마다 거르지 않고 먹어야지, 한 두끼 잘 먹어

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하루 저녁 부흥회 다녀왔다

고 그 다음 일주일은 새벽기도를 빠지는 분이 있습니다. 영적인 양식도 매일매일 시간시간

얻어야 합니다. 흔히 신앙의 질이 어떠냐고 따집니다만 교회 성장학에서는 시간시간 얼마나

교회에 출석했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의 질이라고 말합니다. 사실입니다. 한두 달만 교회에

빠지고 나면 주일이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다섯 달만 빠지면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시간시간 예배에 참석함으로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입맛을 너무 가려서 걱정입니다. 설교하는 분에 따라

서 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안 나가기도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음식이란 입맛이 있든 없든

여러 가지를 골고루 먹어야 건강합니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철저합니다. 입맛이

있건 없건, 아프건 건강하건 일정량을 반드시 먹는 것이 저의 철학입니다. 배가 아파도 굶지

않고 소화제를 먹어가며 식사를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사실 입맛이 까다로우면 자기 자신

에게 해롭습니다. 필자는 목사의 입장에서 변명을 겸하여 말씀드립니다만 설교를 매 시간마

다 어떻게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설교학에서는 일 년에 두번 정도 유명한 설교를 하면 된다

고 말합니다. 많고 많은 날에 무슨 수로 귀한 말씀만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들은 것

을 또 들어도 늘 귀하게 들려야 합니다. 그저 부지런히 듣다가 보면 성령께서 감화케 하시

어 일생 처음 느끼는 감동도 주시고 말씀에 부딪쳐 깨달음도 주시니 열심히 들어야 하겠습

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또한 적절한 방법으로 벌어야 합니다. 그

리고 양식이란 내 체질에 맞아야 합니다. 남이 좋다고 내게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서 알아서 주실 것이므로 주신 것에 대해 고맙게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가

가려서 되겠습니까? 다소 쓴맛이 나더라도 내게 유익한 것을 주시므로 기도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

입니다. 내게 양식을 주신 것과 함께 이웃에게도 주십사고 하는 이웃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

다. 유명한 썬다 씽이 인도에서 선교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그가 열차 안에서 쪽지 복음

을 돌리면서 전도를 하는데, 한 사람이 그 쪽지를 찢어 차창 밖으로 던졌답니다.

썬다 씽은 속이 상했지만 참으면서 "하나님이여" 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쪽지는 훨훨 날아 철로에 떨어져서, 마침 그 시간에 어느 청년이 자살하기 위해 철로에 나

왔다가 그 쪽지와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쪽지를 주워 보니, "생명의 양식"이라는 글이 있었

습니다. 죽으려는 그에게 생명의 양식이란 매우 자극적으로 들려,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행인은 기독교에 대해 좀 알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기독교를 반

대하는 입장에 있었기에 한 마디로 잘라 말해 주었습니다. "그 쪽지는 성경이라는 책에서

찢겨진 것인데, 그것을 읽으면 사람 못쓰게 되오, 그러니, 읽지 마시오. 아니 그것을 읽으면

사람이 죽게 됩니다"라고 인상깊게 일러주었습니다. 자살하려던 청년은 성경에 대한 호기심

이 일어났고, 철도 자살보다는 생명의 양식을 읽고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되어, 성경을 구

해서 열심히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마태복음부터 계속해서 읽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찢어진 성경 조각도 사람을 살리는 양식

이 되었습니다. 리빙스턴 선교사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항

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양식으로 받아, 그 힘으로 위대한 전도의 역사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육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계속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 내

게 필요한 양식은 오늘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성경 한 구절을 보기 전에는 식사

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영의 양식부터 먼저 취하겠다는 자세입니다. 오늘 양식 오늘 얻지

못하면 오늘 내가 살 수 없습니다. 비실비실하여 힘이 없고 시험을 이길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또 감사하며 받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또한 내 양식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양식을 위해 함께 구하는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

다.




주기도문강해 6

마 6:9∼15

소망교회/곽선희목사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기도문은 우리가 자주 외우는 기도이기에 생각 없이 그냥 줄줄 외우는 과오를 저지르기

쉽습니다. 생각 따로 입술 따로로 기도문의 깊은 뜻을 외면한 채 기계적으로 외우게 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공부하는 동안 다시 한번 그 뜻을 살려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귀

한 뜻을 알고 바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기도문은 분명하게 기도의 순서를 보여주고 있

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관한 것이 우선이고 그리고 우리들 자신을 위한 간구가 있습니다. 바

로 앞장에서 우리들을 위한 첫째 간구인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에 대해 공부했고, 이 장

에서는 둘째로 죄사함에 대한 간구를 공부하겠습니다.

사람은 육신을 입은 존재이기에 계속적으로 양식을 먹어야 삽니다. 그래서 첫째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양식을 위한, 즉 생명을 위한 간구를 했습니다. 또한 영적으로도 우리

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존재이기에 신령한 말씀을 계속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말

씀을 소홀히 여기든지 충실히 받지 못하면 영양 실조가 되어 문제가 생기는 줄 압니다. 사

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영이

사는 길은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 중에 가장 큰 말씀은 무엇입니까? "네 죄를 사했느니라"고 하는 죄

사함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할 복이 많지만, 반드시 받아야 하고 또

계속적으로 받아야 할 복은 사죄함입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지붕을 뚫고 내려보내진 환자에

게도 예수님은 먼저 "네 죄를 사했느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신령

상으로 하나님께 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는 사죄에 대한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양

식 다음에 구하고 있는 것이 용서인 것은 그만큼 용서의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들이 교회에 나오는 가장 큰 목적도 사죄함을 받기 위함입니다. 즉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존재와 목적도

죄사함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제목 가운데 가장 큰 기도의 제목이 "하나님이

여, 우리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잊어버리고 시시한 문제들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자식을 위해서나 남편 또는 아내를 위해서 하는 기도는 모두가 2차 3차의 문제입니다. 무엇

보다 우선되어야 할 기도는 죄사함의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서야 평화

를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고통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난 때문입니까, 혹은 명예

때문입니까? 고통의 이유는 오직 죄와 죽음 때문입니다.

몸이 아플 때에도 사실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것 때문에 죽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 크

지 않습니까? 병의 밑바닥에는 항상 죽음에 대한 고통이 짙게 깔려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죽

음보다 더 큰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죽어도 천당 간다는 것만 보장되면 죽음이 문제이겠

습니까? 결국 죽음의 뒷면에는 죄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콤플렉스(complex)다, 또는 인페리어리티(inferiority)라고 합니다만 신앙적 입장에서는 죄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고, 병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것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죄의 형벌로써 망한 것 같고, 형벌로써 병이 나지 않았나 하

는 두려움으로 고통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해야 할 최우선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의 기도는 귀한 복음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마 6 : 12),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 용서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실례를 들면, 어떤 아이들은 잘못한 뒤에도 부모에게 잘못했

다고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매를 때리면서까지 잘못했다고 말하기를 재촉하지

만 입을 꼭 다문 채 고집을 부리면, "이놈아 제발 잘못했다고 말하라"고 오히려 어머니가

애원을 합니다.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하면 어머니는 다 용서할 터인데 얼마나 안타깝습니

까? 주님께서도 얼마나 답답하시면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들이 알

아서 용서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잘못을 하고서도 잘못했다는 말을 할 형편이 못되니 예수

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용

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용서에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가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

입니다. 회개 없이는 용서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도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용서하지 못하신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가끔 임종의 자리

에서 안타까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숨이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신앙고백을 하게 하

기 위해서 "예수를 구주로 믿습니까?" 하고 물으면 숨을 헐떡이면서도 "아니오"라고 대답하

는 사람을 봅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래서 칼빈이 예정론을 말했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 마지막인데 하필

이면 "아니오"라고 대답하며 죽습니까?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못하십니다. 아

무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첫째 조건입니다. 둘째는 윤리적인 것으로, 먼저 남을 용

서하라는 조건입니다. 이웃을 용서하면서 용서해 달라고 해야지, 자기는 용서하지 않으면서

용서만 바란다면 그런 기도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종교성과 윤리성을 같이 말

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은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어야 할 존재이지만 그러한

의와 자격 또는 용기마저도 없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이런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벌써 용서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제사법입니다.

만약에 율법만 만들어 놓으시고, 이것을 지키면 살고 범하면 죽는다고 했다면 이것으로 끝

났을 것인데, 하나님은 또 제사법을 만드셨습니다.

아마도 인간들이 죄 지을 것을 미리 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죄값은 사망이라는 법을

만드시고 또 죄를 지으면 용서받을 길도 만드신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law and Grace)는

언제나 같이 있습니다.

다음, 이 본문에서 중요하게 생각할 문제는 죄입니다. 죄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기서 죄에

대한 개념을 정리했으면 합니다. 현대는 죄를 심리학적으로 보고, 사회학적으로 보고, 공리

주의로도 보고 그리고 상대주의로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서양 사람들은 남에게 해

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면 다 옳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 좋고 나 좋

은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나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무서운 생각입니다.

또한 공산주의 사상으로 "결과에 의해 방법을 정당화한다"는 이론입니다.(The end justify

means) 비록 나쁜 방법을 썼다해도 결과만 좋으면, 그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말이 안 되는 이론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좋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아주 잘못된 말입니다. 서울을 가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바로 가

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결과나 목적

이 좋았다 해서 방법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하는 것은 공산당의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상대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죄는 절대적인 것으로 실존하는 실재의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절대적인 관계에서 죄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에 쓰여진 죄의 용어는, 원래 헬라어로는 다섯 가지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것을 우리말

로 옮기면서 모두 죄라고 번역해 버렸습니다. 헬라어는 우리말보다 상당히 표현이 다양합니

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랑이란 용어도 헬라어로는 어원이 전혀 다른 네 가지 단어가 있듯이 죄에 대해서도 성격

이 다른 다섯 종류로 나뉘어져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어들을 한번 살펴봄으로써

죄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가 있었으면 합니다. 첫째, '하말티아'라고 하는 말로써, 과녁을 맞

추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화살이나 총을 쏠 때 과녁의 주위에는 몇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제일 중심부인 과녁은 새까맣게 칠해 놓아, 그것을 뚫어야 제대로 맞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빗나가서 다른 부위에 화살이 떨어질 경우, 이것이 하말티아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

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물건을 훔친 것은 물론 죄

지만 구제하지 않은 것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므로)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과녁을 바로 찔러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한 것은 빗나간 것으로 죄입니다.

둘째는 '파라바시스'로, 줄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줄을 그어놓고 그 줄대로 걸어가

야 하는데 줄을 잘못 건너갔다는 것입니다. 마치 도시 교통에서 차선을 위반하면 대단히 위

험한 일인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줄대로 똑바로 가지 않고 삐딱하게 갔다든지 줄

을 넘어섰다면 그것은 죄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정직하고 진실하게 정도(正導)를 걸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면 죄입니다. 소위 외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파라푸토마(Slipping across)'로, 미끄러져서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서 있어

야 될 사람이 자제하지 못해서 미끄러져 넘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감정이나 욕심 등

은 자기 스스로 다스려야 합니다. 먹고 싶다고 다 먹고 자고 싶다고 다 잘 수 있습니까? 그

런데, 만약 그 자제력을 잃어버렸다면 술 취한 사람같이 중심이 흔들려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됩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게 되고, 쓰지 말아야 할 돈을 쓰게 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게 된단 말입니다. 이렇게 자제해야 할 시간에 자제력을 잃고 감정에 치

우치고 욕심에 치우치는 것을 미끄러져 넘어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아노미야'로 불법(lawlessness)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노미야'는 법이란 말인데 '아

'자가 붙어 법의 반대인 불법이란 말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법이 없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

로 이것 역시 죄입니다.

다섯째는 '오훼일네마'로, 채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채무는 빚을 졌다는 말입니다. 오

늘 본문에 나타난 죄가 바로 채무를 뜻하는 내용입니다. 빚이란 미리 받은 바가 있어서 당

연히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갚지 않으면 언제나 남아 있게 되고, 또한 늘어납니다. 빚을 갚지 않고서는 해결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빚진 죄인이라는 말이 있나 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빚은 하늘나

라 장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 혼자 뉘우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잘못 생각하기를 혼자 뉘우치고 다시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결단하면 죄가 사해지는 줄 아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빚이므로 갚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떤 공로를 세운

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빚은 빚진 그 분에게 갚아야만 사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이지 주관적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의 개념입니다.(히브리

적 사상) 또한 빚은 장부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결산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대 앞

에서 계산할 때가 온단 말입니다. 지금은 빚지고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지만 언젠가는 채

근하게 마련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갚기 전에는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갚지 못하면

누군가가 대신이라도 갚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제 우리

는 용서해야 하고 용서받아야 할 당연한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 빚은 어떤 것들입니까? 하나님을 공경해야 할 부채를 졌습니다. 순종하고

봉사해야 할 부채입니다. 사랑해야 하며 헌신해야 하며 남을 이해해야 할 부채입니다. 이런

빚들을 잔뜩 지고 있으므로 이것을 갚지 않고서는 자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

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계속적으로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

하기를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아서 날마다 회개해야 하느냐고 못마땅해합니다만 하나님께 가

까이 갈수록 죄는 더 많이 느끼게 됩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더러움이 나타나지 않고 밝은

곳에서는 더러움이 환하게 드러나듯, 하나님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내가 더 큰 죄인

임을 깨달아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고 허탈한 상태에 있을 때 예수께서 깊은 곳에서 그물

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대로 던져서 물고기를 잔뜩 잡고서는 바로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려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백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

는 죄는 무엇입니까? 물론 베드로는 죄인입니다만 이 시간에 그가 말하는 죄는 어떤 것입니

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을 때의 베드로의 생각은 좀

고약했으리라 짐작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목수요 베드로는 어부로서 물고기 잡는 일

은 베드로가 프로급입니다.

그런데 목수가 어부에게 그물을 저쪽으로 던지라고 지시한다는 것은 베드로의 자존심을 상

하게 했으리라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리이

다"라고 대답하며 순종했지만 물고기가 잡히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빈 그물을 들고 "그곳이라고 물고기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이 잡히자 그는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믿지 못한 죄를 그는

자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라고 하면 살인이나 간음 또는 도적질한 것들만을 생각하게

됩니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의심한 죄도 대단히 큰 죄입니다. 절망하는 것도 큰 죄입니다.

필자가 자주 강조합니다만 죽고 싶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큰 죄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생

명에 관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로서는 정말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함

부로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자식이 부모 앞에서 한숨을 쉬거나 죽고 싶다는 절망적인

말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부모님께 이 이상 더 가슴에 못박는 일이 있겠습니까? 사랑

하는 자 앞에서는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마땅

히 감사해야 되고 기뻐해야 되고 찬양해야 할 우리들이 모두 절망하고 한숨짓고 눈물을 흘

리니 이것이 빚진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회개의 윤리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진 빚을 사하고

서야 나도 하나님 앞에 나의 빚을 사해 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내가 남을 용서하면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전혀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또 하나는 이웃

의 빚을 생각할 때마다 내가 하나님께 진 빚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좀 섭섭한 마음이 생길 때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섭섭하게 해 드렸냐는 생각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억울한 말을 했습니까? 돌이켜서 나는 하나님께 어떤 자세로

살았는지를 살펴보면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레이 선생님이 길을 지나가다가 잘 아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웨

슬레이가 잘 아는 친구와 사이가 나빠져서 서로 욕하고 저주하며 원수로 지내는 중이었습니

다. 웨슬레이 선생은 그에게 "형제여, 아직도 그 친구를 미워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럼

요" 당연하듯 대답했습니다. "이제 웬만하면 용서하시지요" 하고 화해를 권했지만 그는 여전

히 이를 갈면서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해도 그놈만은 죽어도 용서할 수 없다고 욕을 하더랍니

다. 이 때 웨슬레이는 한 말씀했습니다.

"좋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당신은 절대로 죄 지으

면 안 됩니다." "왜요?" "그렇게 남을 용서하지 못하니 당신도 용서받지 못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당신은 죄 지으면 안 됩니다"라고 따끔하게 일렀습니다. 그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

면 이 말 속에서 무엇인가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도 물론 죄를 지었습니다만 앞으

로도 죄 지을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아무리 맹세하고 결심해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미리 죄 지을 생각을 조금 해 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용서받을 여유를

두라는 뜻입니다.

과거의 죄를 용서받을 때에도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해야 용서받을 것이고 앞으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남의 죄를 많이 용서할 수 있어야 앞으로 내가 지을 죄도 용서받을 것이 아닙

니까?

그러므로, 내가 회개할 때에 그 속에 겸손의 윤리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14절

15절에서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

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주를 달아 한번 더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은 용서에는 조건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내가 무조건의 용서를 바란

다면 나도 남을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를 세우고

공로를 세우고 착한 일을 하는 이런 일에는 부족함이 있을 수 있으나 용서에 한해서는 절대

조건입니다. 혹시 원수 맺은 일이 있다 해도 마지막 숨 넘어 갈 때에는 완전히 용서하고 가

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주기도문

을 외울 때 이 부분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외우지를 못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남을 용

서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자기자신도 용서받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굉장한

의는 이루지 못해도 용서만은 완전해야 합니다. 나만이 특별히 억울하고 분하다고 자기 사

정이 특이함을 호소합니다만 아무리 억울해도 용서만은 완전해야 됩니다. 용서에 관한 한

부족이 없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들에게 다른 의는 없더라도 용서의 의만은 조건 없이 있

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큰 용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용서를 구할 때 내가 할 용서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무작정 용서만 구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용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기도 중에

원수를 용서하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순교사에 보면 순교하는 사람

들의 대부분이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기도를 본받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

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스데반도 이와같은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도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하여 용서를 빌면서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평생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왔고 의롭게 살았다 해도 마지막에 자기를 죽이는 자를 향해서

"두고 보자"라고 한을 품고 죽는다면 어찌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자기를 죽이는 그 원수까

지 용서하고서야 천국 문이 열립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우리 주위에 있는 여러 사건들은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용서는 천국에 가는 절대 조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천국은 무조건 가는 것으로 들렸

을지 모르지만 신중하게 살피면 반드시 세 가지가 구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과 어린

아이 같은 마음과 용서입니다.

이것들은 절대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사해 주겠습니다. 그와 같이 내 죄도 사해 주옵소서"라고 먼저 용서하면서 용서를 비는 그

런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기도문강해 7

마 6:9∼15

소망교회/곽선희목사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알게 하옵시고"




일반적으로 시험이라고 하면, 흔히 어려움을 당했거나 악에 빠질 지경이 되어서 신령상 곤

란한 상태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시험에 들었다고 하면 어떤 올무에

걸려들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즉, 선의로 생각하기보다는 악의 쪽으로, 긍정적이기보

다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은 축복의 반대 뜻으로 사용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병이 들었거나 실패했을 경우에는 시험에 들었다고 말하며, 돈을 벌었거나 출세

했을 경우에는 축복 받았다고 축하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때에 따라서는 성공이 더 큰 시험일 수 있고 칭찬이 더 큰 함정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나간 세월에서 이것을 누구보다 많이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성공

하고 출세한 사람에게 시험 들었다고 말해 본적이 있습니까? 아무튼 시험의 개념에 대해 잘

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을 이 기회에 수정하고 올바른 뜻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시험이란 어떤 뜻입니까? 신약에 나타난 시험은 원어로 '페이라스모

스'인데, 이 말은 영어의 템트(tempt)보다 테스트(test)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템트는 넘어뜨

리기 위한 올가미의 시험이고, 테스트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능력을 알아보는 실험

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시험은 우리말로 실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원 뜻에 보다 가깝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힘이 있나 없나, 또는 충성심이 있나 없나를 알아보고 싶다든

지, 선한 일에 대한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해 한번 그 사람을 흔들어 보는 것

이 시험인 것입니다. 물건을 살 때도 그 물건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것인지 아닌지를 실

험해 보고 사는 것이 안전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사람에게도 한번 시험을 걸어보면 그가 어

떤 사람인가를 아는 데 퍽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테스트를 당하는 입장에서는 과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만 때로는 필요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결혼을 앞둔 남녀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 한번씩 짖궂은 시험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시험하셨다고 창세기 22:1에

서 분명히 못박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 당시,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이삭의 나

이가 27세 정도라고 추측을 합니다. 이 나이는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결혼도 해야 하고

자식을 낳아 아버지께 손자의 기쁨도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로

이 시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주문을 하시니 얼마나 어려운 시험입니

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 시험을 넘어 섰습니다.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대

지 말라.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

리라"(창 22:16-17)고 큰 복을 주셨습니다. 이 복은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후에야 허락하셨

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복을 주셨지만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은 시험

후에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시험은 왜 주시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복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앞으로 내리실

복을 잘 감당할 자격을 준비시키느라고, 즉 복을 받을 만한 그릇을 미리 준비하게 하기 위

하여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잘 치루기만 하면 큰복을 듬뿍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험은 넘어뜨리게 하기 위한 악의는 전혀 없습니다. 야고보서에서도 말씀하셨듯이 하나

님은 악의로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마태복음 4 : 1 이하에서는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서 시험을 받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시험은 억지로 당한 것이 아니라 시험을 받으러 일부러 광야로 가신 것입니다.

그것도 성령에 이끌리어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으면 시험에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말입니다. 오히려 성령 받은 다음에는 더 큰 시험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을 이기시고 천사의 수종을 받았으며 곧이어 전도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시험은 예수님께서 전도전략(Strategy for mission)을 세우신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

다. 다시 말하면, 어떤 목적과 방법으로 전도할 것인가가 바로 이 시험에서 결정되었다는 말

입니다. 마귀와 더불어 싸우시면서 예수님은 중요한 전도 목표를 세우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시험의 보편성입니다. 시험은 언제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병든 것은 시험이고 건강한 것은 축복이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죠지 팍스는 "악마도

병들면 천사가 된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악한 사람도 일단 병이 나서 누우면 더 이

상 악을 행할 수 없으므로 착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악한 자의 입장에서 보면 건강하

고 돈 벌고 성공하는 것이 더 큰 화를 초래하게 하는 원인이 되지 않습니까? 그가 성공했다

는 그 사실은 성공한 만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공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또한 시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죄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인에게도 시험은 있습니

다. 의인에게 있는 시험의 대표적인 예로는 욥을 들 수 있습니다. 시험은 약한 자나 강한 자

를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성령을 충만히 받고 신앙이 돈독한 사람에게는 시험이

없으리라 고 생각하게 됩니다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 만 예수님

도 시험 당하셨습니다. 더우기 40일을 금식기도 하신 직후에, 어떤 의미에서는 신앙적으로

가장 절정에 이르는 그 시간에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일주일 정도 금식기도 하고

나서, "이제 이만큼 기도했으니 나는 어떤 시험도 문제없다"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

까? 시험은 항상 누구에게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험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남대문 시장에도 있고 가정에도 있고 교회에도 시험은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에도 있습니다. 시험이 없는 곳이라고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하지만 그 곳에도 시험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없는 곳으로

피해 다닐 생각은 포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필자는 절에 갈 때마다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정좌하고 계시는 부처님의 눈이 감았는지 떴는지가 구분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

니 명상을 할 때에는 눈을 완전히 감으면 잡념이 생겨서 눈을 감지 않고 전방 2m 정도에

눈길을 두어, 보는 것도 아니고 안 보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명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설명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부처님의 곱슬머리였습니다. 그분은 인도사람인

데 왜 아프리카 사람처럼 곱슬머리인가 하고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알고 보니 곱슬머

리가 아니라 머리에 있는 것이 모두 달팽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명상을 해도 머리 위에는

달팽이가 우글거린다는 것입니다. 즉, 시험은 어디에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시

험은 언제나(whenever), 누구에게나(whoever), 어디서나(wherever)있는 것입니다. 특히 성

경은 악마의 시험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룰 것입

니다.

또한 시험은 여러 곳에서 옵니다. 첫째, 외부로부터 오는 것으로 나의 생각과는 전혀 관계없

이 원치 않는 악이 나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의 화려한 물질 문명은 젊은이들

로 하여금 향락적이며 감각적인 방향으로 몰고 갑니다. 정말 물질이란 과거나 오늘이나 누

구에게나 큰 시험이 되고 있습니다. 가난이나 부유함이나 둘 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합니

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부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교만할까 걱정이며 가난해서 도둑질할까

걱정입니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인간들은 부해도 걱정이고 가난해도 걱정인 나

약한 존재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그릇이 달라, 부자로 살아서 좋을 사람이 있고 가난

하게 살아서 좋을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경제적인 그릇을 알아내는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십일조 생활로도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만원을 벌었

을 때 천원을 잘 바치고, 십만원을 벌었어도 만원은 잘 바쳤습니다. 그러나, 백만원을 벌자

십만원이 아까와 조 금 떼어내고 바치고, 드디어 천만원을 벌자 백만원은 도저히 낼 수 없

어 아예 포기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의 그릇은 얼마짜리 입니까? 십만원 이상은 벌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분은 십일조를 다 바치지 않는 변명을 그럴 듯하게 말합니다. 이 돈

을 모두 내면 교회에서 남용할까 걱정이고, 또는 우리 교회 보다 더 가난한 교회에 주고 싶

고, 기타 더 많이 필요한 곳에 자신이 직접 쓰겠다고 그럴싸하게 말합니다. 여기에는 크게

잘못된 점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하든 일단 내 손에서는 떠나야 합니

다. 내 마음대로 내가 주관해서 쓰는 돈은 십일조가 아닙니다.

외부에서 오는 시험 중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시험이 있

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시험이 있습니다. 그가 나를 매우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시험에 빠지게 되며, 또한 내가 그를 지극히 사랑하여 판단력이

흐려져서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네 원수가 네 집안 식구이니라"고 심각한 말

씀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시험이 되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시험이 됩니다. 사

랑하기 때문에 그들이 오히려 나를 넘어뜨리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둘째, 내적으로 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외적인 시험보다 더 어렵고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날에 청산하지 못한 죄는 마치 갚지 못한 빚과 같아서 어두운 그림자로

나를 따라 다닙니다. 또한 허물이라는 것이 타성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 회개하고 용서되었

지만 타성이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상처가 생겼다가 아물어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처럼

과거의 좋지 못한 흔적을 깨끗이 지우기란 어렵습니다. 전과자들이 새롭게 결심하고 새 사

람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보아주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것과 마

찬가지입니다. 아무튼 죄와 허물은 큰 시험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에 맺어진 친구 관계

물질 관계 등 모든 관계들이 계속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의심과 나약성, 고치지 못하는 교

만한 성격, 게으름 등이 시험이 됩니다. 예수를 잘 믿으려면 상당히 부지런해야 되지 않습니

까? 그러니 과거에 내가 가졌던 세계관, 타성이 바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시험 중에 가장 큰 시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불신입니다.

이 시험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을 수 있는 시험입니다.

가령,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대로 일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고 하고, 자기 생각

밖으로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

까? 사랑을 이해할 때는 언제나 두 가지 경우를 다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내 입장에서

사랑을 이해하고 또 하나는 나를 사랑하는 그분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나의 입장에

서는 사랑인 것이 그의 입장에서는 사랑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각자의 세계

관 문제입니다. 많은 여자들은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곧 관심이라고 믿기 때문에 남편의 사

회 생활까지 꼬치꼬치 알고자 합니다. 그래서, 하루종일 직장에서 피곤한 남편을 편안하게

쉬게 해 주기보다는 그날 하루의 행동 반경을 일일이 물으며 궁금해하는 것입니다. 남자들

은 직장에서 있었던 일, 더욱이 유쾌하지 못했던 일은 정말 되풀이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아내들은 자기 입장에서 사랑하지 말고, 남편의 입장에서 사랑하여 그가 원하는

대로 조용하게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내조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물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입장에서만 이해하려 들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으로 돌아

가서 베풀면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약을 해서, 하나님 입장에서 한번 사랑을 이해해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깨

닫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리석고 미련해서 너무 자주 자기 입장만 고수하려

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범주 안에 있어야 하나님이 계시고, 그렇지 않으면 안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들여다보는 구멍으로 보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면 사랑 의 하나님

이고, 아니면 사랑이 없는 하나님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시험입니

다. 이제 나의 방식으로 보는 그 터널 (tunnel)을 뛰어 넘어, 하나님 편에서 그 사랑을 볼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시험을 이기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

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 : 41) 기도만이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을 이기지 못해 기도하다가 쓰러지고 기도하다가 또 쓰러졌

습니다. 이 것을 본 예수님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고 타

이르셨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베드로는 다음 날 아침,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에게 칼을 휘두르는 만용을 저지르게 됩니다. 무력으로 문제가 해결됩니까? 기도없이 자

기 힘과 의지로 해결하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싸움이란 적을 알고 자신을 바로 알

아야 이기지 않습니까? 이것을 아는 길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

한 것을 가능케 합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기 위해 기도하라고 말

씀하신 것입니다. 시험에 넘어져서 실패한 일이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셨

습니까? 여러가지 변명과 이유를 나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되어진 일은 성공한 것 같아도 실패입니다. 오직 기도하고 이루어진

일만이 승리요 축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개선입니다. 시험은 물

질에도 있고 사랑에도 있고 명예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해결은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횡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종적인 관계에서 먼저 해결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 시험에서 먼저 승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기 모습이 의미를

바로 찾기 전에는 시험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방심이란 말이 나오면 인도의 유명

한 살인 호랑이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산 속에서 살고 있는 살인 호랑이는 으슥한 골목길에

숨었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갑자기 습격해 잡아먹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인도 정부에서

포수 네 사람을 동원하여 살인 호랑이를 잡으러 나섰습니다. 호랑이가 잘 나타나는 으슥한

골목길에 차를 세워놓고 네 사람을 배치했습니다. 자동차 앞뒤로 한 사람씩 서고 자동차 위

에도 한 사람, 그리고 차안에 한 사람, 이렇게 네 사람이 밤을 새우며 호랑이를 기다렸습니

다. 사람만 보면 나타난다는 호랑이가 웬일인지 밤이 다가도록 나타나지 않습니다. 거의 새

벽녘이 되어 포기하고 자동차를 타기 위해 문을 여니, 그 안에 있던 사람이 죽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웬일입니까? 네 사람이 함께 총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지만, 밖에 있던 사람들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고 차안에 있던 사람은 다소 마음을 놓아 졸았기에 죽었다는 것

입니다. 위험은 방심할 때 그 틈을 노리는 것입니다.

셋째,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표본(example)을 따라야 합니다. 남이 실패한 것을 보았으면

왜 실패했는지, 넘어졌으면 왜 넘어졌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이겼

다면 이긴 자의 그 표본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나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능

한 한 많은 사례를 아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 안에 있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다윗, 솔로몬등 그 많은 인물들을

보면서 왜 실패했고 왜 승리했는지를 이해하면,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

입니다.

가령, 예수께서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당하실 때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돌로 떡을 만들라는

첫째 시험에서는 말씀으로 이기셨고, 천하를 다 주겠다는 둘째 시험에서는 충성으로 이기셨

으며, 셋째 시험은 믿음으로 이기셨습니다. 이 시험을 잘 이해하면 우리들도 사탄의 시험에

서 이길 수 있습니다. 시험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묻지 맙시다. 마귀로부터냐 사탄

으로부터냐고 묻지 말자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시험은 자기 정욕으로부터 옵니다. 내게

정욕이 없고 욕심이 없다면 시험이 시험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만약 병원에 입

원한 환자가 입맛이 없어 음식을 먹을 수 없는 형편이라면, 그에게 음식이 시험될 리가 있

습니까? 돈에 욕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돈이 시험될 이유가 없습니다. 언제나 시험의 요인은

우리들의 정욕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도 "모든 시험은 우리들의 정욕으로부터 온

다"(야 1 : 14)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을 주

시기 위해 치루는 시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한 것이므로 그 분의 능력을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시험 후에는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중간에 마귀가

개입되었다 하더라도 욥기에서처럼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므로 염려할 것이

못됩니다. 사탄도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이기기만 하면 어떤 시험이든 다 이로

운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 때문이다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시험을 시련으로 받으면, 머지 않아 축복으로 전환되는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면 천사가 시중 들고 더 많은 축복과 능력을 얻게 됩니다.

사실 시험이 없는 인생은 허수아비입니다. 사람이란 시험을 통해서 믿음이 강해지고 시험

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게 오는 시험이 축복이 될 수 있도

록 늘 기도로서 무장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기도문강해 8

(마 6:9∼15)

소망교회/곽선희목사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가장 힘든 기도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이며 가장 쉽고 평범하며 일반적인 기

도는 "악에서 구하옵소서"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인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간구는 일곱번째 간구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 기도가 가

장 실제적이며 최종적인 기도인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언제나 확실한 믿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받은 줄로 믿으라" 하시는 그 엄청

난 주님의 귀한 당부를 마음 깊이 새기면서 확실한 믿음으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고백하며 그의 능력과 지혜에 자신을 위탁하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사 내

가 시험을 당해도 이 시험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확실히 나타나 있음을 의심치 아니하며 이

사건을 통하여 더 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과 그의 사랑의 경륜을 믿으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해도 피할길 주시고(고전 10:13), 또 경건한 자를 반드시 시험에서

건져주실 것을(벧후) 믿으며 또한 시험의 때에 우리를 지켜 면케하실 것을 분명히 믿고 기

도해야 합니다.(계 3:10)

주님은 이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 이것은 소극적

인 기도이며 좀더 적극적인 기도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인 것입니다.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빌 2:12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이란 물론 종말

론적 의미가 먼저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을 뜻하며 그 언젠

가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 숨을 몰아 쉴 때 우리가 드릴 임종 기도의 끝부분이 될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은 가장 무겁고 실제적인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

원은 헬라어 자체가 표현해 주듯이 현재와 과거, 미래로 구분해서 생각되어야 합니다. 과거

는 주 예수의 십자가로 이미 청산된 것으로써 벌써 구원을 이루었고, 또 앞에 있는 미래적

이면서 종말적인 구원이 저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적인 구원입니다. 헬라어의

현재사는 반복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사건, 사건마다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

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바 출애굽사건에 비하여 설명한다면 애굽에서 나와

서 홍해를 건널 때에 바다의 세례(고전 10:2)를 통하여 애굽으로부터 분명히 구원받았습니

다. 또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진정한 뜻에서 최종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광야 교회에 있는 동안 매일 당하는 시험과 악으로부터 계속적으로

구원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계속적인 구원을 받아야 하고 또 이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에는 악한 자가 와

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느니라"(나 13 : 19)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악의 실재를 인정

하셨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구원이란 죄와 사탄과 사망과 율법과 진노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뜻한다고 종교개혁자 마

틴 루터는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악의 실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악(evil)이란 넓은 의미에서 해석하면 여러 가지 뜻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직선적으로는 형

이상학적인 악마의 세력을 지칭하는 말임을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넓은 의미로 본다면 첫째,

먼저 신체적인 악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의 구원은 치유이며 자유로서, 온전한 인

격과 자유로운 생활을 뜻합니다. 모든 육체적인 고통으로 연약함, 불구됨과 질병, 피로와 굶

주림 그리고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모든 여건들을 가리킵니다. 둘째, 마음의 병고가 있습

니다. 판단의 과오, 기억의 실수, 상상의 그릇됨 또한 논리적인 과오 등입니다. 병리적 이상

심리로 인한 병고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셋째, 마음의 악이 있습니다.

배신, 불신, 의심 그리고 교만과 허무함 또한 절망 같은 악이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 모든

악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기도 없이 스스로는 자기를 구원

하지 못할 것을 인정하고 기도로써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악의 직선적인 의미는 악마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사탄의

세력을 뜻합니다. 어떤 분은 악을 심리적 현상으로 보고 악의 실재를 믿지 아니하려고 합니

다. 이상 심리나 병리적 심리 현상으로 간주해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악의 실재를 말씀하셨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으며 또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어쫓으라고 명하시고 계심을 분명히 봅니다. 어떤 분은 "마귀로서는 사탄이 자기

존재를 믿지 않도록 설득해서 성공할 때처럼 성공적인 때는 없다"고 재미있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악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아니하려 듭니다. 이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악에 빠

지며 악의 종이 되어 버리는 것을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악을 단순한 관념이나 추

상적 논리의 전제처럼 이해하여서는 안 됩니다. 악은 인격적으로 존재함을 성경적 근거와

경험을 근거로 해서 믿고, 이를 대항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루터의 기록에 의하면 마귀를 보

았으며 마귀와 구체적으로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악으로부터의 승리만이 진정한 구

원을 이룬다고 그는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따라서 내부의 악에서도 구원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은 본래적으로 "거짓말하는 자"

요, 또 "교만한 자"요, 불신앙의 존재입니다. 이로써 악은 우리 마음속에 불신앙적 교만과

거짓을 심어버립니다. 이 같은 악으로부터 속히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 내적인 악이 곧

죄악입니다. 죄는 악의 성공의 열매입니다. 죄는 행복의 파괴자입니다. 행복한 병이 있고 행

복한 고난도 있으나, 행복한 죄는 없습니다. 그래서 "고통의 바다 속에는 행복이 있을 수 있

어도 죄로 물든 화려한 방안에는 어떤 행복도 없다"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

은 "주여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였으며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기 안에 있는 싸움을 적나라하게 고백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울부

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

다. 우리들은 내 안에 있는 엄연한 악의 존재를 확실하게 깨닫고 시인하며 이것과의 싸움의

승리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외부의 악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악한 세대를 뜻합니다. 사도 베

드로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다니며 찾는" 악을 의식하고 이를 경계하였습니

다. 정치적인 악, 사회적인 인조적인 악이 존재하며, 경제와 문화 안에 깊이 뿌리박은 무서

운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를 소홀히 여기고 겟세마네 동

산에서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었다가 그만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하는 결정적인 시험에 빠졌

습니다. 이 악한 세대의 무서운 세력을 의식한다면 더욱 더 열심히 기도해서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갖가지 재난이 악한 세력의 기구로 쓰여집니다. 재난 자체는 하나님의 섭리 중에 있으

나 그 재난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케하는 악마의 세력이 작용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함으

로써 슬픔에 잠기게 하며 결국 하나님을 의심하며 원망하게 되어서 시험에 빠지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우리를 어떻게 건져주시는 것입니까? 여기서 주님의 놀라운 말씀을 기억

해야 합니다. "…데려 가기 위함이 아니요,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기 위함이라"(요 17:15)

고 하신 예수님의 중보의 기도를 듣고, 그 뜻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대체로 두 가지 방향

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첫째는, 권능과 섭리로 직접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져내시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같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친히 건지시며 때로는 피할 길을 주셔서 그 악의 역사를 모면케 하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는 더 많은 경우에 기도하는 당신의 자녀에게 힘과 지혜와 용기와 사랑을 주

셔서 그 악을 이기게 하십니다. 승리가 곧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이루

십니다. 깨닫는 지혜를 주시며 신령한 총명과 영적 판단력을 주셔서 악을 분별하며 그 정체

를 민첩하게 판단케하며 신령한 경건을 주셔서 이를 물리치며 그 악한 계책에 빠지지 않게

하십니다. "계시의 영"을 주셔서 악의 정체를 바로 알게 하셔서 승리케하십니다. 또한 그 악

의 유혹에 빠질 때 어떤 비참한 현상이 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게 하여서 그 진상을 예견

하며 경험하기 전에 먼저 강하게 느끼고 이를 떠나게 하여서 구원하십니다. 서양 속담에 마

귀는 네 가지 말로 사람을 유혹한다고 합니다. 첫째 "누구든지 하니까" 둘째, "이까짓 일이

야!" 셋째, "한 번만 하라" 넷째, "아직도 앞날이 많으니…" 하고 속삭입니다.

가장 귀한 비결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증해줌으로서 이기게 하십니다. 더 큰사랑 더 확실

한 사랑을 깊이 체험하게 하면서 그 사랑의 감격으로 악의 세력을 이기게 하십니다. 개인적

이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확실하게 포로 되어 있으면서 그 큰사랑에 "미쳐서"(고후 5

장) 주를 찬송하며 감사하고 있는 동안은 모든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보

다 마귀를 이기는 더 강한 무기는 없는 것입니다. 그 귀한 사랑의 힘으로 악을 물리치는 것

입니다. 또한 믿음으로이깁니다. 세상을 이길 힘은 오직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성령의 은

혜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사 충만한 믿음의 힘으로써 "넉넉히"(롬 8장)이기게 하시는 것입

니다. 이에 비상한 능력과 비상한 지혜가 기도의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더욱 깊이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악을 이기는 힘의 근본은 의로움에 있고 의의 힘에 달린 것

입니다. 루터의 경험 중에도 마귀는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고 또 고소하였다고 했습니다. "너

같은 죄인이 무슨 종교개혁이냐! 너는 죄인이다. 오늘도 또 너는 죄인이다"라고 그를 비난하

였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루터는 죄인입니다. 이 고소에 굴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

나 루터는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을 것을 다시 확실히 하면서 "그럼에

도 불구하고…" (Nevertheless!)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주는 십자가로 나를 구속하셨으

며 주는 나를 의롭다 하셨다… 누가 나를 정죄하리오!"(롬 8:33)라고 외치면서 의롭다 함을

얻은 그 의를 내세운 것을 그의 저서에서 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내 의가 아

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음으로써 "힘입은 그 의"로써 악을 이기며 율법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죄는 죄책과 오염으로 우리의 영혼을 파괴합니다. 악마는 죄와 죄책 그리고 무서운 율법의

심판을 무기로써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

으로 얻은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그 믿음이 더욱 확실해지며 견고

해져서 죄책과 율법의 심판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고 이로써 악의 세력을 이기고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할 때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서 성화(聖化:Sanctification)하게 되면서 더욱 악을

쉽게 이기게 되고 악의 도전을 예지하며 또 예방할 수도 있게 됩니다. 이 때문에 항상 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악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를 믿는 큰 죄가

됩니다. 예수께서도 기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40일 금식하시고 악마의 시험을 물

리친 그 승리를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하셨고 또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6

장에는 성령이 "내가 말한 것을 기억나게 하여 감당하게 하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읽고 깨달으며 믿고 받아들이는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역사이지만, 이 들은 바 말씀

을 시험당하는 현장에서 기억나게 하여 "말씀이 능력화"하여서 악을 이기게 하는 귀한 역사

도 역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즉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역사하며 성령이 내가 들은 말씀

을 생명의 능력으로 화하게 하여서 악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라" "구원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은, 이 같은 기도의 역사 없이는

악을 이길 수 없음을 뜻하며 연약한 우리의 처지를 파악하시는 주님의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권면인 것입니다. 우리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 외

에 다른 것으로는 이러한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 : 29)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기

도 없이 사는 것은 무기 없이 전쟁터에 나아가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기도하라"

하심은 응답하시고자 하는 약속이 있고 또 응답하셔서 악에서 구원하시려 하는 약속과 허락

이 보장되는 말씀입니다.

악을 이기기 위해 작전 계획을 세우거나 악의 세력이 강하다고 공포에 떨 필요가 없습니

다. 문제는 기도하면 주께서 싸워주시며 주께서 우리로 승리케 하시며 구원해 주실 것입니

다. 승리와 구원을 벌써 보장받고 기도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이제라도 악으로부터의 구

원을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주기도문강해 9

(마 6:9∼15)

소망교회/곽선희목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지금까지 산상보훈 중에서 주기도문을 공부했습니다. 이 기도는 먼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

백이 있고 그리고 우리들을 위한 일곱 번의 간구가 있었습니다.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정

리하면 첫째,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둘째, 나라이 임하옵시며 셋째, 하나님의 뜻

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며 넷째,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다섯째,

우리 죄를 사해 주시며 여섯째,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그리고 일곱째가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상으로 7가지 간구가 있은 다음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송영으로 기도가 끝나고 있습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 이 본문은 성경에서 보시

는 바와 같이 괄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내용이 고대 사본에서 없기 때문에 아

마도 원문에 없는 내용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괄호 안에 넣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보

는 성경은 어느 것 한 장도 친필로 쓴 원문은 없고, 모두가 필사한 사본뿐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고대 사본에서 없고 후에 필사된 사본에만 있기 때문에 혹시나 원문에는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괄호 안에 넣었으므로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원문에 없는 송영이 어찌해서 중간에 필사하면서 들어갔을까를 추리해 보면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본하는 필사가 이 기도문을 옮기다가 너무 감격해서 기도문 끝에 "대개 나라와 권

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신앙고백으로 삽입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

다. 즉 필사가 감격한 나머지 임의대로 이 송영을 넣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당시 일반 교회에서 예배시에 지금 우리들처럼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의 기도 방식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는 송영으로 기도를 끝마쳤기 때문에 여기

에 익숙한 필사가 이 성경 본문을 적어 나아가다가 늘 기도하던 그대로 삽입하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당시에는 이 내용이 없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러나, 기도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송영이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주권을 인정하는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셋째로, 기도에는 일반적인 순서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둘째로

회개하며, 셋째는 이렇게 되어지기를 원합니다하는 간구가 있고, 넷째는 헌신입니다. 예수님

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

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헌신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의 마

지막 부분에는 반드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 이렇게 해 주실 것을 믿

습니다. 아멘" 하고 다소 고집스런 기도로 끝내는 것을 봅니다만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 낮추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기도할 때는 무엇보다

겸손한 자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구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잘된 일이라고

보장할 수 있습니까? 비록 병에 걸렸다 해도 이 병이 꼭 나아야 하는지 아니면 좀더 앓아야

될는지는 잘 모릅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께 겸손한 자세로 아뢸 뿐입니다. "하나님, 이것

은 나의 소원입니다. 이 사건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대로 실패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하다면 겸손하게 받겠습니다"

하는 자세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지나치게 내 뜻을 고집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들

어주실 것 같습니까? 아무튼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는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헌신이란 신앙고백이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내용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위해 기도하실 때도 "하나님이여, 나의 기도를 들어주심을 감사하

나이다"(요 11 : 41)라고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억지 기도와는 거리가 먼 기도입니다. 요

한복음 17장에도 보면 예수님은 시종일관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에 감사하

다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또한 십자가상의 마지막 기도에서도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

라 남겨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튼 기도

는 감사와 회개와 간구, 그리고 헌신의 순서로 드려져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

라를 위해서 "나는 이렇게 저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드리는 것도 좋습니다. 가능하면

서원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기도문의 마지막을 하나님께 영광 돌

리는 신앙고백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바람직한 기도입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을 순서대로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는 기도문에서「대개」의 의미를 생각하겠습니다. 대

개는 대충 또는 대략이라는 뜻으로 잘못 이해하여 문제가 되고 있는 단어입니다. 대개란 요

즈음은 잘 쓰지 않은 말로써 다소 생소하게 들립니다만 헬라어로는 "갈"이고 영어 번역에는

"For"로 되어 있습니다. 이를 직역해서 옳기면 "왜냐하면"으로 앞 문장을 연결해 주는 접속

사입니다. 지금까지 앞에서 말한 것에 대해 왜냐하면 이러이러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한

내용에 대한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연결시켜 보면, 하나님이여 내게 양식을

주옵소서. 왜냐하면 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다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양식을

구하는 것은 당신이 양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내가 권세를 구하는 것은 당신이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죄를 사하여 주십사고 구하는 것은 당신만이 죄사함의 권세

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대개」란 얼마나 귀중한 말입니까? 그런

데 요새 번역에는 이 말을 생략해 버렸습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아마도

대개라는 뜻이 대충이라는 말로 잘못 해석될 것을 염려하여 생략한 듯합니다만「대개」는

아주 중요한 접속사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

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나라」는 주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원어로는 바실레이아이며 영어로는 킹덤

(Kingdom)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모든 주권이 하나님의 것이며 앞으로도 영원한 당

신의 것이니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는 말이 되겠습니다.

다음,「권세」는 원어로 "두나미스"라고 하며, 영어로는 파우어(power)입니다. 물론 우리에

게도 가진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권세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우리가 가진 것 뿐입

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신앙고백이 여기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

일에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는 모르지만 한번 구해 봅니다"하는

자세로 기도한다면 얼마나 모독적인 기도입니까? 마가복음 9:14절 이하에 보면 악령에게 사

로잡힌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선생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자비를 베푸셔서 도와주십시

오"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책망하시며 "할 수만 있다면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믿음 안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함을 말씀하셨습

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모든 권세가 당신에게 있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하는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만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것

을 믿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영광」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있으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기도

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은 내가 편하고 불편하고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여기에 참 신앙의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내용으로 기

도를 했더라도 목적이 나를 위한 것이고 내 정욕을 위한 것으로 귀결된다면 이 기도는 미신

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소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영광"이란 "뿌리"라는 말로써 무겁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은 하나님께 무거운 비중을 드린다는 뜻이

됩니다.

영광」이란 말을「칭찬」이란 말로 바꾸어 보면 보다 쉽게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내가 어떻게 살든지 어떻게 구하든지 간에 나의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칭찬이 돌아가

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단어를 바꾸고 나면 좀더 친근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다음은「영원히」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영원이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는 영원성입니다.

권세도 영원히, 나라도 영원히,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설사 세상이 어

떻게 변하든지 전쟁과 죽음과 갖가지 부조리 속에서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만은 영원히 하나

님의 것입니다 하는 것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같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고백이며 위대한 기

도입니까? 어떤 상황하에서도 당신의 영광은 나타날 것이며 당신의 나라가 임할 것이며 당

신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신실하고도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기도입니다.

이제 기도의 마지막으로「아멘」이 나옵니다. 아멘은 원래 히브리말인데 헬라 발음으로 아

멘입니다. 아멘이란 진실, 충성, 믿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도가 끝난 다음 아멘이라고

하는 것을 직역하면, 지금까지 기도한 그대로가 진실입니다 하는 뜻이기도 하고, 말한 이대

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멘이라고 했으면 도장을 찍은 것으로

그 이상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아멘하고 나면 그 이상 잘 되었든 못 되었든 그대로 받아들

이고 이견이 없어야 한단 말입니다. 전적으로 신뢰와 헌신과 위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필

자가 신학교 시절에 아멘을 우리말로 고쳐서 하면 어떨까 하고 곰곰이 생각한 적이 있습니

다. 그러나, "아멘"이나 "할레루야"같은 단어는 번역하기보다는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더 좋

다는 결론을 보았습니다.

이상으로 주기도문의 강해는 끝났습니다. 다시 부탁하고 싶은 것은 가슴이 답답하거나, 괴

롭거나 또는 기도가 잘 되지 않을 경우에 항상 주기도문을 외우시기 바랍니다. 특히 세상을

떠날 때는 이 기도 이상의 기도가 없는 줄로 압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떠나실 때 모범

으로 우리에게 보이시지 않았습니까? 나의 생애를 마감할 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로 끝

낼 수 있다면 정말 축복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바로 됨으로써 신앙 생활 전체가 바로 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낙송 사랑방          글쓴이: 나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