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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대윤 목사 /주기도문 강해1

에반젤(복음) 2020. 10. 4. 21:58

조 대윤 목사 /주기도문 강해1



주기도문의 배경이해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전문 교육기관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소규모 단위로 한두 명의 스승이 제자들을 입문시켜 교육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교육 형태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러한 스타일의 교육에 익숙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랍비 제도입니다. 주로 랍비가 제자들에게 율법을 암기시키고 그것에 대한 간단한 해석을 주는 과정이 교육의 대부분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모든 부모의 소원이 다 비슷하듯이 당시 유대인들도 훌륭하다고 소문난 스승 밑에서 자식들을 교육시키고자 열심이었고 스승의 문하에 들어간 사람들은 스승을 좇아 다니며 수년씩 가르침을 받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그들의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기 시작하여 존경받는 랍비가 되는 것이 드들에게 있어 가장 큰 명예였고 큰 성취였습니다.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하나씩 가슴에 새겨 그대로 전달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그 가르침을 해설하는 해설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루는 예수님께 나아와 세례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기도문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전통으로서 랍비들은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지혜로운 기도를 가르쳐 주어서 이를 통해 그들 자신이 누구의 문하에 속한 사람인지 구별되게 하였고 또한 그들에게 나름대로 규칙적이며 습관적인 기도를 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문은 다른 랍비들의 기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질적으로 다른 많은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문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중에 놀라운 영감과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수 없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을 공부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기도문을 공부하기에 앞서 이를 통해 깨달아야 할 사실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 기도에는 모범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우리의 소원과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고 구하는 것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즉 기도는 다른 우상 숭배자들의 그것들처럼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인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를 통하여 우리와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기를 원하시며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이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는 이처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며 대화이기에 반드시 이래야만 한다는 규정이나 규칙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보다 깊은 만남과 교제를 가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에 특별한 규정이나 규칙이 없다고 해서 모든 기도가 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무엇을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완벽한 모범을 제시해 주시면서 제자들과 청중들을 향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눈을 감고 기도할 때 무엇을 아뢰어야 할 것인지 알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서도 없이 무엇인가를 달라는 기도부터 시작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경중이 있듯이 기도에도 먼저 기도해야 할 것과 나중에 기도해야 할 것이 있고 기도의 내용에도 경중이 있음을 주기도문을 통해 제시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며 기쁘시게 하는 기도이며, 하나님과 보다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기도인지 예수님께서는 최상의 기도의 모범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주기도문을 하나씩 하나씩 되짚어 보면 그 안에는 무궁한 영적인 원리와 원칙을 발견하게 되며 또한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건강한 기도였는지 잘못된 기도였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기도에도 훈련이 필요하고 올바른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교회를 나오면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사교적이며 말도 잘 하지만 기도할 때에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앉아 있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심지어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도 기도 시간에 기도를 하거나 대표기도 하는 것을 가장 큰 부담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인간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기도를 매우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잘 한다고 자부하는 성도들 중에는 또한 매우 잘못된 형태와 습관을 가지고 기도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기도에 대한 바른 가르침과 훈련이 부족하기에 생겨나는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경이나 교리나 기독교와 관련된 다른 분야를 배우는 것만큼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나 훈련 받기를 꺼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무슨 기도에 가르침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한가 하는 물음을 던집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일례로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모두가 랍비나 부모로부터 기도의 방법을 배우면서 자라납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기도에 대한 규칙과 절차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기도할 때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고 자세는 어떠해야 하며 행동은 어떻게 해야 하고 심지어 기도의 음조와 가락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도의 규칙과 규범이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기도할 때 잘못된 기도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도록 열여덟 가지의 기도문을 만들어 그것을 철저히 외우도록 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이들의 형식적이며 타성에 젖어버린 신앙은 매우 잘못된 것이지만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기도에 대해 훈련하고 올바른 가르침을 받는 것은 신앙의 성장을 위해 매우 필요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의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매일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들을 똑같은 순서대로 읊어대는 수준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기도를 배우십시오. 기도를 훈련하십시오. 기도의 대상을 명확히 인식하는 훈련, 기도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리는 훈련, 무엇을 먼저 기도하고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꾸준한 훈련과 가르침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기도는 성도의 일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비록 하나님 자신이셨지만 또한 철저히 인간이시기에 기도를 잊지 않으셨고 빠듯한 사역의 일정 속에서도 기도의 시간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님과 교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예수님의 사역의 원동력이었고, 또한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9장을 보면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치셨을 때 제자들이 종용히 나와 그 비결을 물었을 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그의 사역 내내 항상 깨어 기도할 것을 끊임없이 권면하고 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우리 신앙 생활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항상 깨어 기도하지 않고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해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고 봉사도 열심히 할지라도 기도 생활에 소홀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진짜 병든 사람인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인간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마주하고 앉을 때 가장 위대하고 가장 높아진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그만큼 우리에게 큰 힘과 능력을 주며 영광과 존귀를 안겨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주님 앞에 나가 주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서 은혜의 보좌 앞에 마음을 열고 얼굴을 구하며 교제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은혜와 은총을 얻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인생에 항상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주기도문 강해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통하여 기도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 응답받는 기도에는 그에 맞는 모범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성숙한 기도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과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기도는 성도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요소이기에 그것이 삶이 되고 일상이 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가지 사실을 기억하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하나씩 배워가면서 우리의 기도의 수준이 높아지고 보다 성숙된 기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는 기도,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2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독교의 기도는 뚜렷한 대상이 존재합니다. 다른 이방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지의 신이나 대답 없는 우상을 향한 기도가 아니라 분명한 인격을 가지신 절대자 하나님을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기도입니다. 또한 기도는 우리 양심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를 향한 독백도 아닙니다. 소크라테스의 양심을 향한 기도나 내적인 광명을 찾기 위한 묵상을 하는 퀘이커 교도들의 기도, 내 안에 존재하는 신성을 찾고 일깨우기 위한 뉴에이지 명상가들의 그것과 기독교의 기도는 명백한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명상과 참선이 큰 관심을 끌어 여기저기 명상과 참선이라는 플랭카드를 걸고 회원들을 모으는 것이 붐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일부 교회에서도 이러한 문화 조류에 발맞추어 명상과 참선을 기도와 접목시킨 영성훈련을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도는 결코 명상이나 참선과 그 시작부터 다른 전혀 별개의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기도라고 말하는 모든 것은 그 대상이 철저히 살아계시며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 아버지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분명한 대상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고정할 때 진정한 기도는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밀러라는 성경학자는 이 주기도문 초두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씀을 기도의 황금문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하나님 앞에 다가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황금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내려 놓고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고 응답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도 예수님처럼 이 황금문을 통과해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씀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사람에게 있어 ‘하늘’이라는 것은 미지와 초월의 세계입니다. 지금은 지구의 창공이 인간의 문명 앞에 정복당하여 그렇지 못하지만, 중세기까지만 해도 하늘은 성스러움의 대상이었으며, 숭배의 장소였습니다. 지금도 인간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능력을 얻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드넓은 우주공간과 무한한 하늘의 세계는 역시 인간의 경외심을 배우는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하늘에 계시다’라는 말씀은 이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늘의 개념은 헬라적인 사고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히브리적 개념의 하늘은 결코 천문학적으로나 물리학적인 하늘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쳐다보는 푸른 하늘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을 뜻하였습니다. 위, 아래라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피조물의 세계와 구별되는 창조주의 세계를 뜻하는 질적 차이와 차원적 차이가 있는 용어입니다. 마태복음에서 34회나 하늘나라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 하늘도 결코 푸른 하늘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신적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차원 즉 비세상적, 빗물질적인 세속을 떠난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 그곳을 가리키고 있는 용어입니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존재의 초월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헬라나 로마신화에는 신은 언제나 땅에 속하였고 인간과 섞여서 함께 사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고에서 하나님은 세상에서 초월해 계시며 인간과는 전혀 별도로 높이 존재하시지만 인간을 향해 그 자신을 계시하시며 인간 역사 안에 친히 내재(內在)하셔서 세상을 주관하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인간을 초월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셔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며 우리의 모든 간구에 응답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시며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은 우리의 찬양의 대상이 되시며 또한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능한 우상이나 제한적인 인간이 아닌 영원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대상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기도 당사자는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모든 기도자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이며 자녀의 신분과 특권을 가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그의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이니 이것은 소중한 자녀 된 자의 특권임이 틀림없습니다. 신약 성서 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많은 유대 문헌을 검토해 본 결과 예수님 당시까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기도 시간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매달린 사람도 없었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준 분도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호칭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쉬운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던’ 인간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고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주의 기도문에는 ‘하나님’이란 말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버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식을 무척이나 사랑하여 무엇이나 해 주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아까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이해와 논리와 경제적 개념을 넘어서는 무한한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헌신적인 사랑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요구할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요구하면 그것을 들어주고자 하는 것이 아버지입니다. 그를 위해 하루 종일 일하여도 아깝지 않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어떤 왕이 나이 많은 노 재상(宰相)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더 슬펐습니까? 자식이 죽었을 때가 더 슬펐습니까?” 그러자 노 재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대답을 했습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어느 쪽이 더 슬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계속 어느쪽이 더 슬펐느냐고 차이를 물으신다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의 안개 속에 가끔 뽀얗게 남산 끝머리가 보일락 말락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죽었을 때는 아무 것도 안보였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참 아버지로 생각지 않고 하나님을 아도나이라고 부르며 철저히 거리를 두고 멀리 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어려워하기만 했던 유대인과 같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는 부르면서도 그 안에는 아버지가 아닌 나와는 전혀 별개의 다른 존재요 무서운 존재요 어려운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어떤 마음을 가집니까? 하나님에 대한 어떤 사랑과 애정도 없다면 성경을 펴십시오. 창세기를 시작으로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을 묵상하십시오. 이 말씀 한 장 한 장에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하나님의 피와 땀이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당신의 외아들을 아낌없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활화산 같은 사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느끼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되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 ‘우리’라는 말 속에는 우리 성도 각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된 공동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웃을 형제로, 자기를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고백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우리가 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함께 고백한다면 이 고백을 한 두 사람은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전 세계적인 스포츠 행사를 치르면서 스포츠가 인종과 이념과 사상을 넘어서 모든 인류를 하나 되게 하는 힘이 있음을 느끼곤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인종과 이념과 사상, 민족을 넘어 온 인류를 하나 되게 하는 가장 큰 존재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그 순간 모든 성도는 인종과 이념과 사상, 민족을 뛰어 넘어 한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마치 자기들의 전매특허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개인 소유물처럼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라고 오만불손한 말들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인류의 아버지가 되셨고,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그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시 103:13).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 아버지인 동시에 네 아버지이며, 결국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주 안에서 한 형제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화목하고 화평하며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좇아 하나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 성, 즉 앗수르 나라의 수도에 가서 "외치라"할 때에 불평하며 다시스로 도망가려 한 것도 사실은 그의 협소한 신앙관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내게는 원수이지만, 저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우리 아버지’라는 고백을 통해 우리들의 형제 관계가 분명해져야 합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면서 한 마음으로 형제의 사랑을 느끼면서 ‘우리 아버지’를 부른다면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윤리적 관계가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기도의 호칭에 대한 중요한 세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호칭은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의 임재속으로 이끌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되게 합니다. 무디는 이에 대하여 “기도는 아버지와 더불어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는 순간 우리는 보다 담대하고 당당히 하나님께 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보다 확신에 차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되시는 그 하나님은 바로 전지전능하시며 부소부재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의 버리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어떤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어떤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풀 수 없는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하늘 아버지를 부르십시오. 주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주기도문3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어느 세 사람이 항해를 하다가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간신히 어떤 무인도에 상륙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는데 그중의 한 사람은 몹시 부자였고 한 사람은 유명한 연예인이었고 한 사람은 실업자에 백수였습니다. 부자와 연예인은 날마다 자신이 살던 세계가 그리웠지만, 백수에게는 먹을 것만 있다면 전에 살던 세상이나 여기 무인도나 별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세 사람이 함께 바닷가에 앉아 지나가는 배가 나타나기를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천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천사는 세 사람이 마음을 깨끗이 하고 기도했기 때문에 한 가지씩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부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살던 대저택에 돌아가 하인의 수종을 받으며 점심식사를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자 그는 당장 자신의 저택으로 옮겨졌고 진수성찬이 그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연예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대군중이 모인 공연장에서 조명과 환호를 받으며 다시 한 번 멋있게 재기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자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천사는 마지막으로 백수를 쳐다보았습니다. 백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천사를 향하여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별로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저 그런 세상에 돌아가 봐야 별로이고, 그냥 여기 살면 족합니다. 그런데, 저 혼자 있으려니 그건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군요. 아까 같이 있었던 친구들이 계속 같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그것도 그대로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마다 소원의 순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능력을 중요시 하고, 어떤 사람은 물질을 중요시 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어떤 사람은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외적인 활동을 통하여 사회적인 지위와 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의 가정을 지키는 것은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테러범이 자기의 목에다 칼을 겨누었을 때에는 용기를 내던 사람도 그의 가족을 앞에 놓고 위협하면 거의 항복하는 것이 미국영화의 특징입니다.




반대로 동양적인 것은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를 위하여는 가족이라도 버리는 것이 용기이며 정의입니다. 그래서 가미가재 같은 일본의 특공대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적인 소원의 순서를 보면 작고 개인적인 것부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동양적인 소원의 순서를 보면 크고 공적인 것부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곧 그들이 사는 사회의 가치관이며 생각을 대변하는 일면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소원을 아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에 있어 속옷을 보는 것과 같은 성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바라며 살아가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앞으로 가지게 될 성격과 과정을 대충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함에 있어서 가장 첫째되고 우선되어야 할 간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간구였습니다. 주기도문에는 모두 7가지의 간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가 기도해야 할 첫 번째 간구는 양식에 대한 것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소원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즉 내가 나를 먼저 생각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본다 해도 그것은 내 생각과 가치관에 의해 변형된 하나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보고 그리고 나를 보아야, 하나님도 바로 보고 나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의와 선을 구하게 될 때 내 문제로 올바로 보이고 올바른 기도를 드리게 되며 올바른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로 여기서 말한 하나님의 이름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1.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신분을 대표하며 사람의 됨됨이, 취미, 성격, 기질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이란 그분의 전능하시며 거룩하시며 선하시며 자비로우시며 인자가 많으신 모든 속성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부르게 되면 그 존재가 반드시 임재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철저히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하게 하였고, 유대인들은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성경 필사가들은 여호와라는 글자가 나타나면 붓을 내려 놓고 목욕재개 하고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두려움으로 그 글자를 써 내려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여호와라는 히브리말은 학자들마다 발음이 제각각인데 그 이유는 수천년 동안 이 글자를 말한 사람이 없어서 히브리 자음에 해당하는 모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이란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성품을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모든 활동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여호와라는 단어 외에도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는 어떤 이름이 있습니까? ‘여호와’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출애굽을 위하여 모세를 애굽의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실 때에 주셨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의 의미는 스스로 계신 자존자이며 어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전능자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구원자로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항상 이 이름을 사용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엘로힘’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의 창조와 연관하여 드러나는 이름인데 ‘엘’은 하나님을 뜻하고 ‘로힘’은 바로 복수형 어미입니다. 그러니까 삼위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이름인 것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무언가를 창조하실 때와 권능을 나타내셔서 창조주로서 능력을 드러내실 때에 사용되어졌습니다. 이 이름도 성경에서 4,000여회나 사용되어서 빈도수가 높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여호와이레’는 미리 알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여호와샬롬’은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이며, ‘여호와닛시’는 승리하시는 하나님, ‘여호와라파’는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저희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이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붙드시며 간섭하시며 역사하셨다는 놀라운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수욕과 수치를 안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사 41:10-12)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자이시며 자존자이시며 구속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두고 그들을 도우시며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가지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의미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본문을 잘못 오해하면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해 거룩해지기도 부정해지기도 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그 자신이 점점 거룩해질 필요가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완전무결하신 절대자이십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받아 마땅한 그 자신의 영광을 받으셔야만 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한다는 뜻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과 찬송을 돌림으로 그 이름이 온 땅에서 높임을 받기 원한다는 간구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까?



1. 우리의 삶을 구별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기오스’로서 ‘구분하다’, ‘구별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은 특별히 구별되고 구분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한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집에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분명한 구별이 있었습니다. 밥을 해도 가장 먼저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밥을 먼저 떠서 따로 구별하여 놓고 상을 차립니다. 수저나 밥그릇에도 특별한 구별이 있었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부모가 먼저 수저를 드시면 그 후에야 수저를 들고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과는 많이 다르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부모나 어른에 대한 최소한의 공경이며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특별히 구별한다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을 뜻하는 것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내 자신을 정결하게 구별하고,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안식일을 구별하여 지키는 것, 거룩한 존재로 구별하여 세우신 성도로서 세속과 철저히 구별되어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하는 일입니다.




러시아 병사 하나가 나폴레옹 군대에 붙잡혀 왔습니다. 러시아의 군인되기를 포기하고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살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병사는 나폴레옹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나는 영원한 러시아의 황제 즉 나의 황제에게만 충성을 다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병사를 시켜 러시아 병사의 팔에 자신의 이니셜인 N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게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러시아 병사는 블란서 병사의 허리에서 칼을 빼서 N자가 새겨진 자기의 팔을 잘라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나의 황제에게만 속할 것이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의 영향력에서 나를 구별하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 구별된 자로 살고자 하는 열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내 팔을 자르고라도 하나님께만 속하고자 하는 진실한 신앙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




2. 성결하고 깨끗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주께 드릴 예물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시면서 여호와께 드리는 자는 열납될 만한 흠이 없고 온전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흠있고 온전치 못한 예물을 예를 들어 열거하시면서 “눈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괴혈병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 지체가 더하거나 덜하거나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 보아도 상품으로서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입니다. 사람이 받아도 기분이 상할 그러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시겠습니까?




폴랜드의 유명한 천재 음악가 쇼팽은 피아노를 위시하여 작곡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인 사람 입니다. 그가 20살에 예술의 나라 불란서로 유학을 떠날 때 그의 아버지가 부탁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폴랜드의 자랑이 되어다오." 아들의 마음속에 국가를 심어주었습니다. 또한 쇼팽의 선생님 역시 훌륭한 분이어서 떠나는 그에게 조그마한 은컵에다 폴랜드의 흙을 넣어 정성스럽게 싸서 주며 "어디를 가든지 조국을 잊지 말게, 이 한 줌의 흙을 군의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해 주기 바라네" 하며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공부하는 동안 힘들 때마다 "나는 폴랜드 사람이다. 폴랜드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지" 하며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는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만 누구보다 폴랜드의 이름을 높이며 산 생애였습니다. 그의 유언은 "나의 폴랜드 흙이 담긴 이 컵을 나의 무덤 속에 넣어주시오"라고 조국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이처럼 가장 성결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가장 성결하고 깨끗한 예배, 찬양, 존귀와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성결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고 흠없고 온전한 예물이 되어 주님을 섬겼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자랑하고 높일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누구나 아는 만큼 보고 아는 만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모르고서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 6:3)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항상 우리의 마음에 모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할 첫째 자리는 우리 마음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이 시작되며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시 16:9)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항상 그와 교제하며 살 수 있다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케 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어느날 전장에서 막사를 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병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던 나폴레옹은 그만 크게 화가 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병들의 말이 ‘보나파르트는 사기꾼이며, 협잡꾼이고, 질이 나쁜 자식’이라고 욕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성큼 막사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이 괘씸한 녀석들! 아무리 보지 않는 곳이라지만, 너희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서운하게 했다고 나를 그리 심하게 욕하느냐?” 그런데 병사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폐하, 저희가 언제 폐하를 욕했다는 말입니까?”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보나파르트가 사기꾼이며, 나쁜 놈이라고 욕하지 않았느냐?” “하하, 그거 때문이군요. 그건 전하가 아니라, 저희 소대에 있는 보나파르트라는 병사의 얘기인데, 그는 정말 질이 나쁜 녀석입니다...” 나폴레옹은 그제서야 일의 전말을 알고서 자기의 막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의장대를 시켜 그 소대의 ‘보나파르트’를 붙잡아 오게 하였습니다. 장군들조차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천하의 황제, 보나파르트 앞에서 이 사병은 바짝 얼어 덜덜덜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황제가 입을 열어 명령합니다. “네 이놈, 너는 둘 중에 하나를 고쳐야 한다. 네 이름을 고치든지 아니면 네 행실을 고치든지... 알겠느냐?”



하나님도 우리에게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성도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이름을 가졌으면서 나 스스로를 구별하지도 정결케 하지도 못하고 마음 속에는 온갖 탐욕과 죄악의 생각들로 가득차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입에서 서슴없이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오고 저주의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겠습니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소원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이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거룩하게 여김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주기도문4



나라이 임하옵시며



오늘은 주기도문의 두 번째 간구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서 신학자들은 흔히 이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씀을 주기도문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첫 번째로 외치셨던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 후 승천하실 때까지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의 주제도 역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하나님 나라는 주기도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두 번째 간구로 전혀 손색이 없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역본 성경들이 주로 사용한 Kingdom이라는 말은 영토를 전제로 하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영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중세 교회에서 한 때 하나님 나라를 영토의 의미로 해석을 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는 구실 하에 전쟁을 일으키고 침략을 일삼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으로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영토를 소유한 세상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라라는 말은 사실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고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하며 그리고 성령을 바람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이 가지는 분명한 지적 언어적 한계가 있기에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개념들을 이러한 상징이라는 도구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이 행사되는 곳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옛날에는 훌륭한 성군을 만나면 그것이 곧 행복이며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 시민권이라는 이유로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살인이나 중형 죄가 아니면 로마 시민을 구금하거나 취조할 수도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러했기에 누구나 로마의 시민이 되기를 원했고 심지어 돈을 주고 사고파는 행위도 비일비재하게 성행하였습니다. 여러분, 로마 시민이 이스라엘 땅에서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로마의 군대가 그를 호위하는 것도 아니며 특별히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팔레스틴의 한 귀퉁이에도 로마 황제의 영향력은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통치와 영향력이 미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시간,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인격,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공간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줄을 그어놓고 여기까지가 하나님의 나라다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나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곳이면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도란 내가 나를 다스리고 나의 영향력 속에 나를 가두어 두는 사람이 아닙니다. 참 성도는 주님의 통치와 주권 가운데 나를 내려 놓고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나를 통해 주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예수께서 바알세불의 힘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낸다는 사람들의 오해를 책망하시면서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주권이 임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에 귀신은 쫓겨가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옥은 자연히 하나님의 은총 밖으로 떨어진 세계를 말하게 됩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있습니다. 손을 펴면 닿을 정도로 가깝게 잡을 수 있습니다. 가령, 어머니가 먹을 것을 선반 위에 올려놓았는데 아이들이 그것을 꺼내려고 이불과 베개를 포개놓고 올라서면 손이 닿는 것처럼 이렇게 손이 닿는 곳에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하는 심령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임하며 그의 주권 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자란 자기가 죄인임을 나는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구원받기를 사모하는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이런 심령이 가난한 자라야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다고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부조리하고 악한 삶을 살았던 내가 내 삶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생의 주인으로 삼는 놀라운 고백을 할 때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회개는 정권교체’라고 고백했던 한 목사님의 설명은 너무도 정확한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는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영국 탄광촌에서 대규모 파업과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는데, 그곳에 부흥회가 열려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가슴에 들어갔고 눈물로 새사람이 되겠다는 결심과 돌이킴이 있었던 것입니다. 고용주는 근로자를 불신했고, 근로자는 고용주를 착취하는 사람으로 미워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참된 회개 운동이 일어나고 자신의 삶을 지배했던 모든 자아의 권리를 하나님께 내려 놓고 이양했을 때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그들 가운데 임하였고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근로자들은 고용주 몰래 빼돌렸던 물건들을 가지고 고용주를 찾아가 뉘우쳤고, 고용주는 근로자들에게 합당한 대가를 주지 않았던 것을 눈물로 뉘우쳤습니다.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 줄 아십니까? 술집이 장사가 안 되어서 곳곳에서 문을 닫았고, 더러는 술집의 주인이 새사람이 되어서 자기의 가게를 부랑자들에게 전도하는 장소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임하게 되었을 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의 삶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와 주권 이양이 없습니까? 아직도 우리가 철저히 죄인이며, 하나님만이 내 삶을 고치실 분이며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고 전적인 회개와 자복이 없기 때문은 아닙니까? 회개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내 안에 이루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해 점점 확장되어야 합니다.



천국은 우리 가운데 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전파되고 계속 확장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의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극히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와 함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 복음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로마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이르렀고 미국을 통해 한반도에까지 이르는 놀라운 확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한국을 들을 21세기 복음 전도의 막중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셨고 앞으로도 확장시키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하여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지금까지 이루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한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꺼질듯한 복음의 불씨를 들고 이 나라를 밟았던 선교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셨고 수많은 성도들을 통해 그 나라를 확장시키셨고 견고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신 놀라운 역사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연 이 놀라운 하나님의 부르심에 얼마나 순종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있으며 얼마나 땀흘려 헌신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주역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여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4.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종말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단지 비유적이거나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다양한 종말론적 예언에서도 알 수 있으며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는 말씀 등을 통해서도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는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심판자로 이 땅에 오셔서 죄와 악에 대하여 심판을 하실 것이며 그 때에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는 말씀처럼 새로운 세상 즉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 뜻이며 예수님께서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게 하신 궁극적 목적이라고 볼 때, 우리는 마지막 날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며 고대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은 그날을 사모하며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감격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드리면서 날마다 마지막 날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지금도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하며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간절히 외치며 고대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한 세 가지 시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천국은 이미 이 땅에 임했고, 복음 전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확장되고 내 안에 건설되고 있으며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지막 날 천국은 완성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세가지 시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기도의 고백은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 가운데 내 자신을 드리며 그의 통치가 행사되기를 소원하는 기도이며, 이를 통해 어둠의 권세, 사탄의 권세, 더러운 권세는 물러나고 오직 이 땅에서 주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또한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이 세상을 살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겠다는 기도이며 또한 마지막 날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의 온전한 완성과 성취를 소망하며 고대하는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은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요, 그리스도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에 가정에 교회에 사회에 나라에 세계에 임하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며 최선의 삶을 경주해야 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뜻입니다.






주기도문5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오늘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 강해 네 번째 시간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도는 주기도문에 나오는 7가지 간구 중 세 번째 간구입니다. 사실 이 기도는 매우 드리기 어려운 기도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 못지않게 우리 자신이 소원하고 비중을 두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며 간절히 바랍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이 항상 일치한다면 이 기도는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뜻은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뜻을 반할 때가 많기에 이 기도는 매우 어려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는 기도는 ‘주님 내 모든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그 뜻에 순종하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기도를 친구의 번영과 행복을 비는 기원이나 덕담 정도로 생각합니다. 즉 ‘사업이 번창하기를 바란다’거나 ‘뜻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라는 식의 말 쯤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이러한 기원이나 덕담이 아닙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기도이며 내 모든 소원과 욕심조차도 철저히 주님의 뜻 앞에서 죽고 주님의 뜻만이 서기를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기도가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고난과 역경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지만 그 조차도 모두 하나님 앞에 내려 놓고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던 이 기도야 말로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의 진수이며 절정입니다. 이렇게 볼 때 누가 부담없이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쉽게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무책임한 신앙의 자세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1.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과 인간을 향해 가지고 계신 목적과 계획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라고 말씀하였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온 인류의 구원과 회복이야 말로 하나님의 첫째되는 뜻이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와 관련된 인간 개개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세부적인 뜻이 있는데 성경은 인간을 향한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담아놓은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것을 매우 어렵고 힘들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하는 가장 큰 잘못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혹 그 뜻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해도 충분한 시간을 내어서 그 뜻을 발견하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앤드류 머리의 말처럼 하나님의 뜻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알고자 수고하며 노력하는 자세가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펼치고 나를 향하신 이 나라와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수고를 보일 때 그 안에서 우리는 무궁무진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졌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서 하늘의 현실 세계가 아닌 하나님의 세계 즉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을 말합니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실현되며 성취되는 나라이며 또한 오직 그분의 통치와 주권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이러한 하늘에서 그의 뜻이 이루어졌다 고 하는 말은 첫째 천사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왕이시며 천사들은 그를 받들어 섬기며 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실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고 말씀하셨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뜻이며 계획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모든 성취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6,7)는 말씀처럼 내 안에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계획이 성취되어 그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기뻐하고 슬퍼하며 좋아하고 싫어하는 모든 것조차 예수님을 닮아가고 그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모습을 말하는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이나 담배를 끊게 되고, 부정한 입술의 습관을 버리게 되며, 불만과 투정으로 가득찼던 그의 삶이 새롭게 변화되는 삶을 경험하게 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이 온 인류의 구원이며 예수님께서도 이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고자 오셨기에 우리도 하나님의 지상 최대의 뜻을 이루고자 최선을 다해 살아가게 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룰 수 있을까요?




첫째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기도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강물에 비교한다면 기도란 수도관과 같아서 기도라는 수도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인 강물이 거세게 밀려오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기도없이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으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은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에게 후레드릭 미코니우스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루터에게 큰 힘이 되는 친구로서 루터는 그를 통해 많은 위로와 기쁨을 받고 있었습니다. 종교 개혁이 한창인 무렵 후레드릭은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음을 앞에 두고 루터에게 최후의 유서를 보냈습니다. 이를 받은 루터는 친구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 기도를 통해 그의 친구가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후레드릭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살 것을 명령한다. 종교 개혁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아직 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결코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않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나는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이 편지를 받은 후레드릭의 병은 급속히 회복되었고, 6년을 더 살면서 루터를 도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사업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위해 우리의 온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내 필요와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는 기도와 그 뜻이 이루어 지기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철저히 하나님의 뜻만을 드러내며 그것을 이루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고 말씀하셨고,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3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말이나 사소한 행동조차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전적인 순종과 자기 부인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았고,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만을 위해 끊임없이 달려가서 거룩한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했던 예수님의 기도를 보십시오. 인간이기에 그 안에 존재하는 선천적인 본능으로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예수님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극복하시고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의 수고와 몸부림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고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안락과 즐거움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으며 야심이나 포부를 접어두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일이 힘들고 어렵지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주신 수고와 몸부림의 기도를 통해 이일을 성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나 자신을 철저히 죽이는 삶을 살 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인생 방향과 목표를 하나님의 중심에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중심이 세상 구원에 있다면 우리 인생의 방향과 목표는 그것에 맞추어 져야 합니다. 이러한 인생 방향과 목표가 하나님 중심에 맞추어 지면 인생의 설계, 선택 모든 계획 또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못한 삶, 선택 행동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초점이 비뚤어져 있고 왜곡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주류를 유통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술을 많이 마실 뿐만 아니라 자주 주일 성수를 어기게 되었고 치열한 경쟁을 이기고자 갖은 불법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제 직업이 집사로서 합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집사님, 집사님의 직업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합니까?” “ 아니요, 오히려 정반대인듯합니다.” “그렇다면 집사님 그 직업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잡고 그에 합당한 새로운 직업을 찾으십시오” 그 집사님은 목사님의 권면을 받아들여 즉시 사업을 정리하고 기도 중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떤 회사를 다니고 얼마를 버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었다면 우리의 사업과 학업과 모든 선택에 대한 해답은 명료해 질 것이며 분명해 질 것입니다.



넷째 일상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인도에 맡기십시오.




이 세상에서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걱정하고 근심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인도에 맡기고 전적으로 의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교회 일에 너무 지쳐서 아주 피곤한 상태에 처해서 휴가를 신청하였습니다. 드디어 열흘 후에는 휴가를 가게 되었는데 부인과 함께 오랜만에 얻은 휴가이기에 매우 즐거워하며 마치 초등학생이 소풍 가는 날을 학수고대하듯 열 개의 매듭을 만들어 하루에 하나씩 잘라가며 그 날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틀을 남겨 놓고 목사님은 덜컥 앓아 눕게 되었습니다. 휴가고 뭐고 다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때 목사님은 아내의 손을 꼭 잡으며 “여보, 다시는 인간 마음대로 휴식할 때를 정하지 맙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쉬라 하시면 쉬고, 일하라 하시면 일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일상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갈 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그것을 이 땅에서 이루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 안에서 아무 것도 작은 것이 없다. 그리고 그 뜻 밖에서는 아무 것도 큰 것이 없다.” 하나님의 뜻이 최고라는 말입니다. 이 놀라운 뜻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합니다.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날마다 기도하며 나 자신을 철저히 그 뜻에 복종시키고 모든 인생의 초점에 그 뜻에 맞추고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감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6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기도문에는 7가지의 간구가 들어 있습니다. 그 중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했던 세 가지 간구는 하나님을 위한 간구이며 오늘부터 공부할 네 가지의 간구는 우리 자신을 위한 간구입니다. 오늘은 이 네가지 간구 가운데 가장 먼저 기도해야 할 간구인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잘못된 착각에 빠지는데 신앙이 깊어지고 성숙해 질수록 인간의 모든 욕구와 욕심, 본능자체를 철저히 포기하고 버려야 하며 세상과는 단절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종 많은 사람들이 금욕주의를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육적인 모든 것을 멀리할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임 템플은 "기독교는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물질적인 종교다"라고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물질을 부정적이거나 신앙과 위배되는 것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정신적인 차원이나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것, 즉 신령한 것을 중하게 여기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와 인간의 육체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위한 양식도 구하라고 주님은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노력하고 그 안에서 거룩히 구별되어야 하는 존재이지 결코 이 세상을 외면하거나 인간의 모든 속성 그 자체를 부정하면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한 때 금욕주의가 번성하여 자기의 육체를 학대하고 육신을 악한 것으로 정죄하며 인간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하나님만 생각하고 철저히 단절된 삶을 살려고 하는 금욕주의와 신비주의 은둔주의가 성행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사조가 성행할수록 기독교는 그 힘을 잃고 약화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그 스스로 자신의 빛을 가리우고 어둠 속으로 숨어 버렸기에 역사는 암흑의 시기를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숙한 신앙, 올바른 영성은 육신과 세상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의 삶, 육신의 삶을 귀하게 여기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영성이며 성숙한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분명히 하고자 인간 자신에게 필요한 네가지 간구 중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를 그 첫 번째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양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양식’이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알톤’인데, 이는 유대인의 주식이었던 빵을 나타낼 뿐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에서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필요한 일련의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양식’은 단지 먹을 ‘쌀’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 본문의 기도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이라는 말은 그날에 반드시 필요한 만큼, 없어서는 안 될 최소한의 양을 의미합니다. 즉 이 기도는 필요 이상의 욕심과 탐욕에 의한 기도와 간구에 대한 간구가 아니라 우리가 사용해야 할 만큼의 풍성한 것들로 채우시고 입히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먹지 않고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돈이 없으면 비참한 처지가 될 수밖에 없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제약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의 의미를 보다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한 공급자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밥 콕이라는 사람은 “이 떡의 배후에는 방앗간이 있고, 방앗간의 배후에는 농부의 수고가 있고, 그 배후에는 미풍과 비와 해가 있고 그 배후에는 이 땅의 아름다움이 있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 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밥상에 앉아서 반찬의 가지 수를 가지고 불평하는 사람은 그 밥상이 자기 앞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땀이 있었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양식의 주권자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 앞에서 구하라고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먹고 마실 때마다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밥을 먹으면서 밥만 생각하지 말고 밥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스위스에서 수 천 명의 고아들을 길러낸 고아들의 아버지, 조지 뮬러는 기도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일생동안 기도의 응답을 5만 번이나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어느 날, 고아들과 먹을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그가 운영하는 고아원은 2차 대전 이후의 어려운 여건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늘 그런 어려움에 처할 때가 무척 많았습니다. 그는 이 어려움 속에서 당황하지 않고 모든 원생들을 식당으로 모았습니다. 빈 접시를 식탁에 차려놓고, 포크와 수저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이들과 함께 눈을 감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루를 살게 하시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끝났을 때,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아십니까? 마을의 빵장사가 빵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아침부터 빵을 굽는데, 자꾸만 ‘고아들에게 한 번쯤은 빵을 가지고 가야 할텐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아서 견딜 수 없어 그 아침에 구운 빵을 모두 가지고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우유배달부가 들어왔습니다. 우유를 가득 싣고 이웃마을로 배달을 가다가 마침 고아원 앞에서 차가 고장이 났는데, 쉽게 차를 고치지는 못하겠고 시간을 더 허비하면 우유가 다 상해서 못 먹을 것 같아서 이왕이면 고아원에 기부나 하려고 들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아들은 감사의 기도대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시며 유일한 공급자 되심을 믿고 항상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성도는 나만의 양식이 아닌 ‘우리’의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만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나만 잘 먹고 잘살기 위해 구하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인간을 위한 4가지 간구에 대한 수혜자가 모두 ‘내’가 아닌 ‘우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독단적이며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함께 화목하며 더불어함께 누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전 세계에서 한해에 거두어들이는 양식을 모두 합하면 전 인류가 모두 먹고도 남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한해에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양식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한 나라 인구를 먹일 만큼의 음식물 쓰레기가 버려지고 있는데 한 쪽에서는 먹을 쓰레기조차 없어 굶어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죄입니다. 우리가 아닌 나만을 위한 양식을 구하고, 나만을 위한 재물을 구하고 나만을 위한 안락과 부귀와 영화를 구하는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신앙과 가치관이 이러한 결과를 낳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양식이 그득하다고 만족하며 웃을 것이 아니라, 우리 중에 누군가의 양식이 핍절하지 않았는지 살피는 겸손과 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보다 직접적으로 “너희가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일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히 10:24)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오늘 주께서 가르치신 이 기도를 드릴 자격이 있습니다.




셋째, 날마다 하나님께 필요를 따라 구하고 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의 평생 먹을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을까요? 일생에 한 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인데, 이왕이면 제자들과 그 이후에 믿어 이 기도문을 대하는 우리들을 위하여 ‘평생’을 보장하는 기도를 해주시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셨고 하나님과 긴밀한 영적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16장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광야에서 만나가 처음 내려온 사건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만나는 매일매일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말씀에 순종치 못하고 내일 몫까지 걷어 놓았더니 다 썩어 버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내려서 매일매일 걷어 먹는 것이 만나입니다. 오늘 주신 양식은 오늘 먹고 다음 날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만나를 구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매일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그분을 의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8남매를 둔 가정에서 어머니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 식구를 이끌기에 아버지 혼자 너무 힘이 들어 새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새 어머니를 어머니로 인정하려 하지를 않고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긴 고민 끝에 가족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새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 건 너희 자유다. 그러나 새어머니를 향해 ’어머니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으면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주지 않겠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새 어머니는 옷을 빨아서도 자기 방에 모두 정리해 놓고 아이들이 ‘어머니’라고 불러야만 주었더니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필요와 소원을 만족케 하시며 채우시는 아버지심을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의 네 번째 간구인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와 소원을 아시는 분이시며 그것을 채우실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육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계속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며 나만의 유익이 아닌 우리 모두의 양식을 구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도 그대로 이루어져서 항상 주님께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하루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7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오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간구를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가장 최고의 말씀을 꼽으라고 한다면 어떤 말씀을 꼽겠습니까? 아마도 성경에서 꼽을 수 있는 최고의 말씀은 “네 죄를 사했느니라”는 죄 사함의 축복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할 복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우리가 반드시 받아야 하며 끊임없이 받아야 할 복은 죄사함일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지붕을 뚫고 내려 보내진 중풍병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은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는 말씀이 아니라 “네 죄를 사했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양식이 우리의 육신을 살찌우고 강건케 하는 것이라면 죄사함의 축복이야 말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강건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가장 큰 목적도 사죄함을 받기 위함입니다. 즉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잊어버리고 시시한 문제들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자식을 위해서나 배우자를 위해서 하는 기도는 모두가 부수적인 것입니다. 보다 우선되어야 할 기도는 죄사함의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서야 평화를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고통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난 때문입니까? 질병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고통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오직 죄와 죽음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죄의 개념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죄라는 말은 다섯 가지로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을 한글 성경은 모두 죄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하말티아’라는 말로서 과녁을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화살이나 총을 쏠 때 과녁의 주위에는 몇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제일 중심주를 맞출 수록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데 이 하말티아라는 말은 과녁을 완전히 벗어나 다른 곳에 떨어져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 생각, 행동의 반경을 완전히 벗어난 모든 행위는 다 죄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파라바시스’라는 말로 그어 놓은 줄을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차가 다니는 도로에는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일단 차를 타고 도로에 올라가면 운전자는 그어진 선을 따라 나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특별히 정 중앙에 그어진 노란 중앙선은 절대로 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파라바시스는 이런 모든 규정을 무시하고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을 하고 차선을 지키지 않고 아무렇게나 달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분의 공의와 진리의 원칙으로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과 원칙을 제시해 주셨는데 그 길을 어기고 위반하는 모든 행위가 다 죄라는 말입니다.




셋째는 ‘파라푸토마’라는 말로 미끄러져서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서 있어야 될 사람이 조심하고 자제하지 못하여 미끄러져 넘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감정이나 욕정 등은 우리가 순응하여 따라야 할 대상이 아니라 다스리고 제한해야 할 대상입니다. 먹고 싶다고 다 먹고 자고 싶다고 다 잘 수 있습니까? 그런데, 만약 그 자제력을 잃어버렸다면 술 취한 사람같이 중심이 흔들려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게 되고, 쓰지 말아야 할 돈을 쓰게 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게 된단 말입니다. 이렇게 자제해야 할 시간에 자제력을 잃고 감정에 치 우치고 욕심에 치우치는 것을 미끄러져 넘어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아노미야'로 불법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노미야'는 법이란 말인데 접두어가 붙어 법의 반대인 불법이란 말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법이 없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 역시 죄입니다.




다섯째는 '오훼일네마'로, 채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채무는 빚을 졌다는 말입니다. 오




늘 본문에 나타난 죄가 바로 채무를 뜻하는 내용입니다. 빚이란 미리 받은 바가 있어서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갚지 않으면 그 빚은 결코 줄지 않고 오히려 점점 늘어날 것입니다. 빚을 갚는 길만이 빚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빚을 갚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마지막 날에 하늘에 쓰여진 장부에 의해서 심판대 앞에서 계산할 날이 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결코 이 빚을 우리의 힘으로는 갚을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이 일만 달란트는 지금의 가치로 수조원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그 이자만해도 하루에 수천만 원에 달하는 엄청난 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종이 일만달란트 빚졌다고 말씀하신 것은 도저히 그 돈을 갚을 수 없는 지불불능의 존재임을 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바로 우리들 자신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지불불능의 엄청난 죄의 빚을 하나님께 졌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가 대신 갚아 주는 길 뿐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죄의 기도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영적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경건한 성도라 해도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 솔직히 말해 단 한 순간도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정도의 차이일 뿐 수많은 죄를 범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매일처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하듯이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십자가의 피로 씻는 사죄의 기도를 날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을 나서면서 온 몸을 샤워하고 밖으로 나갔다고 해서 하루 종일 우리의 몸이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손이나 발, 얼굴과 머리는 무수한 먼지와 매연 등으로 인해 심하게 오염됩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깨끗이 샤워를 했다 해도 틈틈이 손을 씻고 얼굴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막에도 물두멍을 두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은 매일같이 그 앞에서 자신의 몸을 씻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파스칼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은 크게 두 종류로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죄를 범하고도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또 하나는 죄를 범한 후 자신의 죄를 깨닫는 사람인데 전자를 희망이 없는 죄인이라 하며 후자를 희망이 있는 죄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죄를 망각하는 희망이 없는 죄인이든지 아니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희망있는 죄인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죄인입니까?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하며 용서를 구하는 희망있는 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죄는 자백과 사죄의 간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회개 없이는 용서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나님도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용서하지 못하신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훈육하다보면 아이가 가끔 명백한 잘못을 하고도 좀처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부모는 그로부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고백을 듣고자 기다립니다.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끝날 텐데 그 말을 하지 않아 더 큰 훈계를 받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했다는 마음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우리의 죄를 소상히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에 대하여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아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고 반드시 하나님께 나와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주기도문 전체 가운데 본문을 성도들이 가장 어렵고 힘들게 생각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다른 사람을 이렇게 용서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남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기보다는 증오와 미움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욱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받은 은혜만큼 베풀고 용서함 받은 만큼 용서할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물론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구원과 사죄의 전제 조건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보다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데 본문은 결코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대상은 이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생의 다양한 문제들을 하나님께 가져오기 전에 하나님의 이름과 그 나라와 거룩한 뜻을 이해하고 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자들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과 용서를 받은 구원받은 백성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를 전제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아 그의 백성이 되었기에 우리에게는 다른 형제를 용서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전히 하나님께 용서 받아야 할 죄가 있어 하나님께 나오면서도 고의적으로 형제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그의 기도에 응답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용서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행한 모든 잘못을 완전히 내어 버리고 다시는 기억지 않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그러나 말처럼 용서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오랫동안 큰 상처를 받아 왔거나 큰 피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펄전은 “형제 여러분, 용서하고 잊어버리십시오. 당신이 미친 개를 땅에 묻을 때 꼬리만 땅위로 기념탑처럼 남겨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면서 완전한 용서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렇게 어려운 일 또한 아닙니다.



에밀리 브란트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성장 과정에서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어머니에 대한 강한 증오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증오감은 나이가 들수록 사그라들지 않고 더욱 이글이글 타올랐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목사님의 권유를 따라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증오감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어머니를 용서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는 내심 언젠간 어머니도 달라기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그를 향해 욕하고 악한 감정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용서하는 것이 한 번의 용서로 끝나는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어머니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선물도 보내고 카드도 써서 보냈지만 어머니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자로서 몇 번이고 용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날마다 눈을 뜰 때마다 인간의 용서가 부스러지기 쉬운 것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내가 용서를 자연스럽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밀접하게 동행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러분 이제 용서라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지만 또한 그리 힘든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우리에게 임할 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죄와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용서는 한마디로 천국에 가는 절대 조건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렇고 또한 용서받은 자로서 형제의 잘못을 용서 해야 한다는 사실이 또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은 어쩔 수 없는 구제 불능의 죄인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고 정결함을 받으십시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와 이웃을 용서하고 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십시오. 그리고 당당히 “우리가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8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는 지금까지 주기도문을 공부하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다섯 가지의 간구의 내용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세가지 청원과 우리 자신을 위한 두가지 청원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마지막 간구로서 우리 자신을 위한 두가지 청원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설 때 무슨 기도를 드려야 하며 어떠한 기도가 중요한 기도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며 그렇기에 기도를 매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와 간구의 제목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자신을 위해 항상 기도해야 할 기도의 제목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첫 번째 청원은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청원은 죄사함과 용서받음에 대한 청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면하게 될 시험과 죄의 유혹에 대해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청원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볼 때나 의미로 볼 때 이 두 가지 청원은 한 가지 의미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시험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경을 보면 성도가 당면하는 시험을 두가지의 의미로 말씀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강하게 하시기 위하여 주시는 일종의 훈련으로서의 시험입니다. 성도가 어려움을 만나면 세상의 사람들과 다른 것이 이것을 기회로 여겨 더욱 믿음을 강하게 하며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계기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고 말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도에게도 무수한 어려움과 환난이 존재합니다. 성도라고 해서 그의 삶이 항상 형통하고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성도가 되는 순간 모든 물질적 육체적 관계적 어려움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험들을 믿는 성도들에게 허락하셔서 이를 통해 보다 성숙하고 아름다운 신앙과 인격으로 변화되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이 ‘시험’은 사랑과 축복 그 자체이며 그것을 잘 통과하기만 한다면 인격의 성장과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갑절의 축복이 보장되는 큰 선물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또 다른 시험은 마귀가 우리를 신앙적으로 넘어뜨리기 위하여 주는 유혹을 말합니다. 즉 성도로 하여금 낙심하고 절망하며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게 하기 위한 악한 의도의 시험을 의미합니다. 사단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부패한 본성을 자극해서 죄에 빠지게 하며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에 현혹되어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시험이 우리 안에 존재하는데 이러한 시험은 모두가 사단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며 사단의 조정 하에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감사와 찬양으로 견디어가는 감격의 시간이라면 이 시험은 사람의 마음에 증오가 끓어오르고 미움과 절망으로 일관하는 암흑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마이어(F.B.Meyer)라는 설교가는 “하나님은 우리를 오르게 하기 위해 시험하시지만 사단은 우리를 내려가게 하기 위해 시험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 가장 싫어하는 것, 가장 큰 약점과 강점, 성향 취향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공격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포기하게 합니다. 성도들이 이러한 마귀의 시험에 잘 이끌리는 것은 죄의 소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욕심이 있고, 자만이 있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 죄의 소욕은 곧잘 우리에게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들어서 마귀가 의도하는 어려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주기도문에서 말씀하는 시험이란 마귀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악한 목적을 가진 시험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와 악에서 구하옵소서를 함께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는데 시험이 마귀가 가져오는 유혹이라고 볼 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와 같은 의미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갈 미래의 어느 시점에선가 마귀가 넘어뜨리기 위하여 우리를 시험할 것을 예비하기 위하여 이 기도를 하도록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사단이 악한 목적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시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생각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일상의 모든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며 반드시 어떤 의도와 목적이 그 안에는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이 하나님으로 인한 선한 목적이냐 아니면 사단에게서 비롯된 악한 목적인가만이 다를 뿐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날 갑자기 아이가 아프다거나 자동차가 고장이 난다거나 친구로부터 전화가 온다거나 하는 일들에서부터 잘 나가던 회사가 갑자기 문을 닫는다거나 절친한 친구로부터 큰 배신을 당한다거나 하는 일들까지 이 모든 일에는 분명한 뜻과 목적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영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신앙인은 이런 일들이 결코 의미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성숙과 발돋음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거나 우리의 신앙적인 발목을 잡기 위한 마귀에 의한 것일 수 있음을 알고 심각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악한 세력의 시험에서 나를 지키는 잘 지킬 수 있을까요?




첫째,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을 이기지 못해 기도하다가 쓰러지고 기도하다가 또 쓰러졌습니다. 이것을 본 예수님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타이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에 모두가 뿔뿔히 흩어져 버렸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에게 칼을 휘두르는 만용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는 큰 잘못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힘과 의지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그는 곧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싸움이란 적을 알고 자신을 바로 알아야 이기지 않습니까? 이것을 아는 길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합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기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험에 넘어져서 실패한 일이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여러 가지 변명과 이유를 나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되어진 일은 성공한 것 같아도 실패일 뿐입니다. 오직 기도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와 축복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기도를 통해서 개선되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물질에도 있고 사랑에도 있고 명예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해결은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횡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종적인 관계에서 먼저 해결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을 받고 그분의 음성에 귀기울일 수 있게 될 때 마귀의 시험을 가장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게 될 것임을 기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시험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인도의 한 마을에서 깊은 산 속에서 살고 있는 살인 호랑이가 으슥한 골목길에 숨었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갑자기 습격해 잡아먹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인도 정부에서는 포수 네 사람을 동원하여 살인 호랑이를 잡게 하였습니다. 호랑이가 잘 나타나는 으슥한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네 사람은 자동차 앞뒤로 한 사람씩 서고 자동차 위




에도 한 사람, 그리고 차안에 한 사람이 서서 밤을 새우며 호랑이를 기다렸습니다. 사람만 보면 나타난다는 호랑이가 웬일인지 밤이 다가도록 나타나지 않습니다. 거의 새벽녘이 되어 포기하고 자동차를 타기 위해 문을 여는 순간 다른 세 명의 포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안에 있던 사람이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웬일입니까? 네 사람이 함께 총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지만, 밖에 있던 사람들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고 차안에 있던 사람은 자신은 차 안에 있기에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놓고 졸고 있었는데 호랑이는 이것을 놓치지 않고 그를 노려 죽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시험을 얕보아서는 안됩니다. 사단은 인간의 어떤 지혜보다 뛰어나며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주님께 기도하며 주의 도움을 구하며 항상 깨어 사단의 시험에 대비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항상 기억하며 모든 사단의 시험에 대하여 경각심을 갖고 깨어 대비하며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나 자신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 다윗, 솔로몬, 모세, 여호수아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론 이들은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신 믿음의 선진들이라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공통점은 이들 모두가 시험에 빠져 낙심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처럼 뛰어난 믿음의 소유자이며 성숙한 신앙인들조차 일순간에 시험에 빠져서 큰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보면서 결코 인간의 힘으로는 어떤 사단의 시험도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들을 되돌아보십시오. 우리는 이것이 과연 시험인지 아닌지초자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에게 마음을 빼앗겨 간음을 행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모살할 때까지도 그는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셔서 그를 책망하실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인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설명하실 때에 베드로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적극 만류하면서 그러한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과연 그 가운데 누가 그것이 사단의 역사임을 알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 자신조차도 그것이 사단의 시험인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것이 사단의 시험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알고도 그것을 거절하지 못하고 끌려갈 정도로 연약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한 목사님이 나이트 클럽을 방문하셨습니다. 입구에서 ‘사장이 누구야 나좀 보자고 그래’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도 당당한 모습을 본 직원이 사장을 데리고 왔습니다. 목사님은 다짜고짜 ‘당신이 사장이야? 나랑 얘기좀 합시다’라고 말씀하시고 함께 룸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사장은 매우 불쾌한 얼굴로 ‘당신 누군데 나를 보자고 했어?’라고 말하며 금방이라도 어떻게 할 태세였습니다. 목사님은 그제서야 ‘나 바로 옆 건물에 있는 교회 목사요’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금세 태도를 바꾸면서 어쩔 줄을 몰라서 허둥대는데 목사님 말에 의하면 꼭 ‘고양이 앞에 쥐’처럼 해동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목사님과 대화하는 내내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목사님께 기도해 주실 것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나쁜 일을 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자신이 잘못하는 것을 모릅니까? 대부분 다 압니다. 하지만 정욕과 욕심에 이끌려 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에 대하여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즉 죄인줄 알면서도 마음 속의 다른 욕망들에 사로잡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며 연약함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 자신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게 될 때 우리는 능히 이 모든 사단의 시험에서 구원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시험에 들게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시기를 구할 것을 명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하고 귀중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우리는 사단의 유혹과 시험에서 결코 자유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악한 사단의 유혹에서 나를 지키고자 끊임없이 깨어 기도하며 사단의 시험을 잘 분별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결코 사단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만 우리는 승리자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고 날마다 사단의 시험과 유혹에서 건지시며 보존하시기를 기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9




대개 주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오늘은 주기도문 강해 마지막 시간으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본문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괄호 안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흔히 본문을 영광송, 송영이라고 부르는데 누가복음에는 본문 자체가 없으며 마태복음에는 본문이 괄호 안에 들어가 있는 이유는 신약 성경의 원문이라고 할 수 있는 권위있는 사본 중에는 이 본문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학자들에 따르면 마태복의의 사본은 수백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 많은 사본들은 조금씩 그 내용이 다릅니다. 그 이유는 원본을 필사하고 또 그것을 구전으로 전하고 다시 그것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오류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러한 많은 사본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역사가 오래되고 초대교회 때부터 널리 읽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몇 개의 사본들에 가장 큰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본에는 이 영광송이 빠져 있으며 이 사본들보다 조금 후대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본들에는 이 영광송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이 영광송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이 아니며 후대에 초대교회가 첨가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히브리인들은 기도문에서 마지막 맺을 때에는 항상 하나님을 찬미하는 ‘송영’을 넣어서 드렸던 전통을 따라 초대교회의 누군가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다 신앙의 화답으로 본문을 첨가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용적으로 보면 대단히 잘 어우러진 내용입니다. 그 사연이 어떠하든 우리가 읽는 성경 중에 본문의 내용이 들어있는 것은 분명히 기이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성도들은 이를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로 여기고 함께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또 다른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항상 외우는 주기도문에는 있지만 본문에는 없는 단어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대개’라는 말입니다. 이 대개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일의 큰 원칙으로 말하건대’입니다. 좀더 짧게 말해본다면 ‘요컨대’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킹 제임스 성경에서는 대개 대신에 ‘for’라는 인과 접속사를 사용하여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대개’라는 말은 앞의 간청의 부분과 송영의 부분을 연결하는 접속사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이 ‘대개’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고 또는 그것을 빼기도 합니다. 교회가 계속해서 사용해 왔고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기에 그것을 사용하는 것도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습관적인 말이기에 빼는 것도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이를 근거로 나와 다른 이들을 비방한다거나 공동체성을 해치는 교만한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내용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나라가 아버지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미 ‘나라이 임하옵시며’에서 살펴 보았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통용되는 영적인 왕국(Kingdom)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는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임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이 세상에서의 성도들의 삶과 생활 또한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기도는 우리 모든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한 기도이며 찬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속한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국가와 민족과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헌신해야 할 것이며, 기도해야 할 것인지 알게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나라가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 1장에서 말씀하신 복음 전파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 안에 많은 무리가 모였을 때에 그들은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7,8)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든 나라가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 되기를 소망하십니까? 복음 증거만이 우리가 주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임을 기억하십시오. 복음이 전파되어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주의 나라를 위한 최고의 헌신이며 노력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권세가 영원히 주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권세’는 헬라어 원어로 ‘두나미스’라고 하며, 영어로는 파워(power)입니다. 성경을 보면 성도들이 가지는 권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그렇다면 모든 권세가 영원히 주의 것이라고 기도하라는 본문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도 따르는 권세가 있을 수 있지만 이 권세조차도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히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가능하다면’,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말을 우리의 기도에 포함시키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구해 본다는 심정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근거는 모든 권세가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께 능치못할 일은 없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9장을 보면 악령에게 사로잡힌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선생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자비를 베푸셔서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책망하시면서 "할 수만 있다면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529년 어느 날 45세의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혼자의 힘으로 부패한 카톨릭의 거대한 세력과 맞서서 싸운다는 것이 너무도 힘들어 실망과 좌절 속에 빠져 들고 말았습니다. 교황의 법정에 서야하는 바로 그 전날 밤 그는 무기력하고 극심한 좌절감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무한한 권세와 능력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날 그는 일어나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능력을 공급받고 위대한 찬송시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이 장순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유의 주시라 당할자 없으니 반드시 이기리로다” 여러분, 모든 권세가 주의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힘과 권세가 주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의 도우심을 구할 때 우리는 이 세상 누구도 갖지 못한 권세와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결코 빠져서는 안될 고백이며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모든 권세와 능력이 아버지께 있음을 믿으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세 번째로 영광이 영원히 주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찬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사실 오늘날 이 땅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그것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자의 비참한 최후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와 사마리아의 통치자였던 헤롯 왕은 로마의 황제 갈리굴라(Caligula)가 암살당한 후 글라우디오(Claudio)가 황제로 즉위할 수 있도록 공헌한 데 대한 대가로 그 자리에 올랐던 사람으로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독교를 탄압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백성들 앞에서 왕복을 입고 연설을 할 때에 백성들은 그의 소리를 신의 소리로 추켜세웠습니다. 그 때 헤롯은 이를 매우 흡족해 하였고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를 치셔서 죽이셨습니다. 매우 짧은 이야기이지만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챈 자가 받을 죄가 얼마나 큰지 잘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잘못은 흔히 일어납니다. 목회자라는 이유로 중직자라는 이유로 헌금을 많이 하거나 봉사를 많이 한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과 존귀를 자신이 받고자 하는 일들은 비일비재합니다. 때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결코 이러한 잘못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한 사람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고치는 이적을 행함으로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추앙하며 그에게 경배하고자 할 때에 자신의 옷을 찢고 그들을 향해 큰 소리를 내며 그 영광의 주인은 바울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시라고 외쳤던 것처럼 우리는 결코 이 세상에서 어떠한 영광과 찬사도 오직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아멘이라는 말의 몇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 아멘은 “진실로 그러합니다.”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멘은 “꼭 그렇게 될 줄로 믿고 기대합니다, 믿습니다”라는 뜻이며




셋째 이는 “내 충성을 바칩니다”라는 뜻이며




넷째 “내 생애를 드립니다”라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일곱 교회의 교인들을 향해 예수님을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계 3:14)라고 말하였습니다. 말씀하신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모든 기도를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이처럼 ‘아멘의 주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아멘’이라는 말 속에는 바로 결단의 믿음과 헌신의 다짐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든 기도를 아멘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화답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참된 아멘의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어떤 목사님은 이 아멘을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으로 말씀하면서 아멘하고 나면 그 이상 잘 되었든 못 되었든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견이 없어야 하며 전적으로 신뢰하고 위탁하라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깊은 신뢰와 위탁의 마음으로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분명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며 축복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오늘 주기도문에 대한 마지막 시간으로 ‘송영’에 해당하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권세와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믿음의 기도이며 내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권세가 선하고 아름다워서 내가 가지는 모든 권세도 그를 본받아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것과 내 삶의 감격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주기도문을 드리는 신앙인들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믿음의 자세이며 진정한 기도의 자세일 것입니다.



이제 주기도문의 강해는 끝났습니다. 이 기도는 모든 기도의 모범이며 원칙입니다.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항상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따라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으십시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기도는 놀라운 능력의 기도가 될 것이고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 응답받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 참된 기도를 드림으로 우리의 신앙 전체가 바로 세워지고 성장하며 성숙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