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에 나타난 교회의 本質(본질)과 使命(사명)
문 순 삼
‘교회(εκκλησια)’라는 말은 상당히 함축성이 있는 말이다. 더구나 신약성서에는 수많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개념들이 등장하고 있는 데, 그것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본 고찰을 통해서 신약성서를 중심으로 교회의 어원적 의미와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나타난 각종 교회 표상(表象)들을 중심으로 살피며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찾아보려고 한다.
Ⅰ. ‘교회(εκκλησια)’에 대한 어원적 의미 고찰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카알(לꕗꙌ)’에 해당하는 신약의 용어인 ‘에클레시아(εκκλησια)’라는 여성명사는 신약성서에 총114회 등장하는데 특히 바울서신에서 집중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사복음서 중에서는 마태복음에서만 3회(1:18;18:17) 등장할 뿐 마가와 누가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이 용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저자별로 보면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 특히 고린도전서에서 이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고전 22회, 고후 9회, 롬 5회 등),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 용어가 바울이 즐겨 사용하던 애용어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책별로 보면 사도행전에서 23회로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요한삼서에 3회, 야고보서에 1회,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20회, 히브리서에 2회 등장하고 있다.
이 여성명사 ‘에클레시아(εκκλησια)’는 전치사 ‘엑(εκ)’과 동사 ‘칼레오(καλεο)’로 구성된 복합동사 ‘엑칼레오(εκκαλεο)’로부터 파생된 명사이다. 이 말의 원래의 의미는 단순히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지도자의 ‘부름을 받아’ 공적인 장소에 모여 온 시민들의 모임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이 용어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붙이고 단순한 하나의 모임을 가리키는 의미에서 사용하지 않고 특별한 의미에서의 ‘모임’이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신약의 저자들은 ‘교회’란 구약에서 말하는 대로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그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적인 성서의 용법에서도 이 용어는 어느 경우에나 ‘백성’을 의미하는데, 모든 곳에 있는 그리스도의 전체 백성이나 고린도와 같이 어떤 특수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신자들의 지방적 회중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이 용어는 유대적 배경과 관련하여 볼 때, 유대인들이 희랍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이 계약 가운데로 불러들인 자들, 즉 그를 섬기도록 선택하여 분리해 낸 자들을 의미했다. 디아스포라 가운데서는 그 말이 이방인들로부터 분리된 백성인 유대인으로 이해하였고, 팔레스틴에서는 예배를 위해 모인 그리고 계약에 충실한 경건한 유대인들(핫시딤)의 집회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 용어를 채택하여 자기 자신들을 가리키는 말로, 즉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로부터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이 되도록 “불러낸” 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 용어는 나중에 이방인들로부터 “불러내어” 성별된 자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에클레시아 (εκκλησια)’라는 용어가 신약저자들에 의해 채택된 이유는 그 용어가 교회와 유대교와의 연속성, 그러나 교회의 독특성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었고, 또한 이방적․이교적 문화와의 다른 독특성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Ⅱ. 교회의 정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파송 목적과 공생애 활동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교회가 어떤 곳이고,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활동을 하셨는가 하는 물음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엘톤(ελθον)'말씀을 통하여 여러 번 밝히셨다. 그 말씀들을 통하여 예수는 죄인들을 부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막2:17;마9:13),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오셨으며(막1:38;눅4:43), 메시아의 불을 붙이고9눅12:49)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대속물(lytron)로 내어놓고 죽기까지 섬기기 위해서(막10:45;눅19;10)오셨다고 밝힌다. 특히, 예수는 나사렛 취임설교(눅4:18-19)에서 자신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그리고 만민에게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밝히고 있다.
예수의 공생애 목적은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의 구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공관복음의 진술에 의하면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의 중심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께서는 많은 비유말씀과 비유적 행동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선포하셨으며, 또 직접 자신의 삶으로 구현하셨다. 예수의 오심은 바로 이 땅에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구현하는 데 있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을 대행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이 땅의 모든 교회들도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해서 세워지고 파송된 교회들이다. 즉,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구현하도록 부름받은 종말 신앙인들의 공동체이다.
Ⅲ. 신약성서의 교회상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셈족 계통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약성서를 살펴보면, 우리가 사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교회 자체에 대한 추상적 정의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1세기 팔레스틴에서 볼 수 있는 농업, 건축, 목축 등과 같은 친밀한 장면으로 교회를 묘사한 수많은 표상(表象)들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는 약 백여 개의 표상들을 일곱 그룹으로 나누어 고찰함으로 교회의 본질을 살피고자 한다.
1. 목회적 표상 속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과 그 사명
성서 기자들이 계약 백성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던 가장 오래된 비유적 표현들 중에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양으로 설명한 표상들이 있고 그 양들을 돌보시는 분은 그 백성의 목자라는 묘사가 있다(시23:1;사40:11). 이 표상은 왕과 백성들 간의 이상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으며 따라서 다윗이 시편78:70이하에서는 이스라엘의 ‘목자’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 예언자들은 이 표상을 메시아적 의미로 사용하여 백성들에게 참 목자이신 왕을 보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기도 하였다(겔34:2;37:24)
이런 관점에서 바울을 제외한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예수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관계(교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목자와 양의 비유를 많이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상(요10:11;히13:20)은 이스라엘의 속죄 제의 전승과 관련하여 예수를 목자이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통해 세상 죄를 속죄하며 그 “죄를 영문 밖으로” 없애 주는 희생적인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묘사하고 있다(요1:29,36;행8:32;벧전1:19;히13:12;계5:6;7:17;12:11).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따라야 할 모범을 제시했으며 또한 그들이 그의 양떼인 교회에 보여주어야 할 목자적 관심의 규범을 제정해 주셨다(요21:16;행20:28;벧전5:2-4). 더구나 그의 희생적 역할이 어린 양떼를 위한 본보기가 되어야 했다(롬8:36;벧전2:21-25;계12:11),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그에 대한 우리들의 제사직과 희생제사들은 “이 우리(αθλε)안에 들어있지 않은”자들 가운데서 예수의 사업을 계속시켜 “한 양떼”와 “한 목자”가 생기게 해야 한다(요10:16).
2. 정치적 및 시민적 표상들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과 사명
이 정치적 배후에 있는 기본사상은 주권자와 종속자간의 관계이며, 하나님이신 왕의 영역 안에 있는 “종”들은 계약 의무에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기 구약성서 시대와 초기 신약성서 시대에 유행했던 이 표상에 대한 묵시적 해석에서는 모는 인류가 두 개의 대립적인 주권자 밑에 있는 두 가지의 영역, 즉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 따라서 이 표상에 있어서 예수의 오심은 마귀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침입으로 그리고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수립되어 두 나라 간의 싸움을 종식시켜 버리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병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낸 행동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능력이 이 땅에 작용하고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르렀다는 표적이 되고 있다(마12:28;눅11:20;10:9).
또 다른 교회에 대한 정치적 표상으로는 흔히 이스라엘에 사용되었던 ‘도성(都城)’이 있다. 다윗의 도성이 이스라엘 왕국과 그 제의 생활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사야는 그 말을 비유로 사용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사람들을 “시온의 딸”그리고 “”버림당하지 않은 도성“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에게 소망을 전해주려고 했었다(사62:10-12). 그와 같이 장차 올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건축하시고 지으신“ ”하늘 도성“이 이 땅에 임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다(히11:10,13-16).
이에 대한 교회의 사명은 죄에 대한 노예 상태로부터 ‘구속된’, 사탄의 나라 세력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영역으로 옮겨진 자들로서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의의 병기들’을 사용하여 악의 세력들에 대항해 싸움으로써 예수의 해방의 활동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 또 다른 표상과 관련하여 말한다면, 교회는 외국의 속박 아래 노예가 된 ‘포로들’에게 하나님의 ‘대사(大使)’로서 봉사하면서 그의 절대주권과 화해의 복음을 선포하며(고후5:17-21) 그들에게 ‘좁은 문’을 통해 그들의 ‘하늘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3. 가족 및 결혼의 표상들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과 사명
구약성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관계를 자주 아버지와 그의 가족이나 아들(때에 따라 딸), 혹은 권속들에 대한 관계로 그리고 흔히 남편과 아내,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그려주고 있는데 이런 모든 표상들은 상호간의 신의, 꾾임없는 사랑, 친밀과 신뢰를 지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약성서의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하나님의 권속’으로 그리고 자녀들을 형제와 자매들로 묘사되고 있다(마5:45;10:6;23:9;눅1:33,69;행2:36;7:42;히3:2-6;벧전4:17;엡2;19:3:6;4:14).이것은 결국 교회가 아들과 딸의 신분과 형제와 자매의 신분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가족으로서의 교회생활이 각자의 상호 의존성에 근거되어 있고 또 그들의 상호 의존이 결국 성부 하나님에 근거되어 있음을 뜻한다.
예수도 이런 비유를 사용하여 자신을 교회와 ‘약혼’한 ‘신랑’으로 말했고, 그의 오심(재림)이 ‘그들 결혼’의 완성이 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이스라엘과 분명히 연관시켰다(막2:19-20;마9:15;25:1-13;요3:29).
이 표상과 관련한 교회의 선교는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요17:21-23)이며, ‘화평케 하는 자’로서 ‘화해’의 직분을 이행하여 모든 사람들을 하늘 아버지의 ‘권속’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4. 건축적인 표상들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과 사명
부분적으로 구약성서로부터 유래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는 비유적 표현에 의하면(시118:22;127:1;사28:16등), 교회는 건물 구조로 그리고 그 건물의 모퉁이 돌은 그리스도요, 건축자는 하나님으로 묘사되어 있다. 초대교회는 자신들을 예루살렘 ‘성(城)’에 비유하면서, 자연히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생각하려 했는데 그것은 그 성전이 이스라엘의 생활과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히11:10).
그러나 ‘새 예루살렘’의 핵심이었던 ‘성전’은 역사상의 성전과는 달리, 보통 돌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 의해 돌로써 만들어진 그와 같은 성전에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성전을 대신한 그의 백성의 “살아있는 성전”안에 거하신다(행17:24). 하나님은 거룩한 영 이시기 때문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집이 필요치 않다. 그는 오직 믿는 자들의 공동체 안에 거하시며 성령으로 그 가운데 거처하신다(마18:20;고전6:19;엡2:22;히3:6). 이처럼 교회가 내재하시는 성령에 의해 만들어졌고 형성되었으며, 성령에 의해서 성장하고 성령과 함께 살아 가기 때문에, 교회는 ‘성령의 전’, ‘성령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비유의 요점은 분명하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집이며 결코 개개인의 신자가 아니다.
이 표상과 관련하여 교회는 ‘산 성전’, 즉 ‘성령의 거처지’가 되기 위해 예언자와 사도들의 기초 위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퉁이 돌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성령의 은사를 받아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서로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움”으로써 “몸을 세워야”한다(엡2:22;벧전2:4-9)
5. 유기체적 표상(몸, σωμα)들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과 사명
구약에서 아무런 전례도 없고 신약에서도 아무런 평행적 표현이 없는 유일하게 바울의 서신에서만 나타나는(고전12:12-28과 롬12:3 이하) ‘몸(σωμα)’으로서의 교회상은 교회가 생활률의 문맥들에 속해 있으며,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 의존하고 서로 서로를 섬겨야 하며 한 몸의 지체들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설령, 개별적인 공동체가 생각되고 있다 할지라도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σωμα εν Χριστω)’ 즉, 올리워진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을 그 특질로 하는 공동체를 이룬다. 요컨대 바울의 저작에서 몸이라는 관념은 그리스도인들의 상호연관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공통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밝혀주기도 한다.
또한, 이 표상은 자아(그리스도)와 공동체(교회)를 나타내 주는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몸’은 집합적 혹은 공동체적 상징으로 ‘몸’,‘머리’ 그리고 그 여러 지체들간의 집단적 연대성과 통일성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몸이 갖고 있는 유일한 ‘생명’은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하나님의 성령의 생명이며, 몸이 갖고 있는 유일한 기능은 다 그의 것이 된다. 결국, 하나님의 성령을 떠나서는 교회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따라서 교회는 ‘죄와 죽음의 몸’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함께 일으킴을 받아’ 그 한 몸 가운데서 그 몸의 머리와 연합되어야 한다. 지체들은 성령의 여러 가지 ‘생활 기능들’을 구현하면서, 몸을 세움으로써 그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성인’으로 자라나고 성숙하게 되도록 해야 한다(골1:28).
6. 우주적 표상들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과 사명
새 생명으로 부활된 ‘몸’으로서 표현된 집합적 인격의 개념은 새 사람과 새 피조물이라는 표상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제 우주적 문맥 가운데서 새 시대로 생겨나서 이미 그 새 시대 안에서 살고 있는 새 인류의 핵심으로서 이러한 우주적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새 인류는 창조의 시초부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 창조가 완성될 때까지의 단일한 구속 과정에 이르는 수단이요 동시에 그 목적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렇기에 구속과 구원은 궁극적으로 온 인류를 그리고 그 이와의 모든 하나님이 피조물을 포함하게 될 ‘재창조’의 과정으로 보여지고 있다(롬8:19-23). 재창조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교회는 새로이 생겨나게 되는 새 인류에 대한 눈에 보이는 표적이요 초점이 된다(엡2:11-22).
따라서 교회는 ‘아담 안에서’지어진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고 그리스도로부터 순종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교회는 새 인류에 대한 표적과 그 핵심으로 봉사해야 하며, 그럴 때에 새 인류인 ‘온유한 자들’은 언젠가 땅을 유업을 받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재창조’되고 다시 지음을 받아 해방된 종들이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을 것이다.
Ⅳ. 교회의 사명
1. 교회와 사명
구원받은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예배를 통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 감사와 마음 속 깊은 곳의 기도를 드리고 또 말씀 속에서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깨우치시고 강건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해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있게 증거함으로써 놀라운 회개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고전14:26-33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신령한 예배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 신령에 예배에 있어야 할 것들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외에도 찬송시(찬양), 계시, 방언, 방언 통역, 예언, 예언 분별 등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완전히 개방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성령을 향해서 마음과 심령을 활짝 열어야 한다.
성령을 향해서 닫혀진 예배는 성령의 은사가 전혀 활용될 수 없게 눌림받는 예배, 틀에 박힌 의식과 전통에 의해 자유로운 성령의 역사가 배제된 예배, 복음이 아니라 율법이 선포되는 예배, 사랑과 용서를 통한 화해와 일치가 아니라 비판과 정죄를 통한 분열과 갈등이 야기되는 예배 등이다.
사도 바울은 롬12:1-2에서 또 다른 종류의 영적 예배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 예배는 성도들이 온 몸으로, 온 삶으로 드리는 거룩한 제사 즉 영적 예배이다. 야고보서 기자도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약1:27). 예배는 교회 건물 안에서만 드려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는 우리 성도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온 몸으로, 온 삶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사랑과 평화가 없는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구현하고, 미움과 갈등으로 상처받은 심령들에게 화해와 용서의 복음을 전파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이 땅의 고난받는 작은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삶, 이것이 바로 교회와 성도들이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영적 예배이다.
2. 복음전파(전도․선교)와 사랑의 실천(διακονια)
예수님은 약 3년의 공생애 기간에 중점적으로 두 가지 일을 하셨는데, 첫째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고(전도․선교), 둘째는 병든 자, 귀신들린 자, 눌리고 소외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었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오늘날 이 땅에서 수행해야 할 핵심적 과제 역시 첫째는 아직도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지 못한 수많은 영혼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는 일이요, 둘째는 사회와 세상 속에서 섬기고 봉사는 자세로 불우한 우리의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일이다.
교회는 신․구약 성서 속에 담겨져 있는 순수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교회의 비극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 대신 죽은 문자를 전파하는 데서, 또한 순수한 복음 대신 율법이나 율법주의를 추구하는 데서, 사랑과 화해 대신 투쟁과 갈등을, 자유와 평화 대신 구속과 분쟁을 발산하고 야기하는 데서 시작된다. 교회의 최우선적 사명은 세속 철학이나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천국 복음만을 전파하신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에게 직접 행동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신 것처럼 오늘의 교회 역시 사회 속에서의 디아코니아(섬김․봉사)적 과제를 교회의 핵심적 사명으로 인식해야 한다. 예수님은 분명한 언어로 이 땅의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자기 자신에게 한 것임을 밝히셨다(마25:31-46). 예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예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불우한 이웃을 외면하는 것은 참된 사랑일 수가 없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며 이웃의 고통과 탄식을 외면한다면 이것은 참된 예배와 경건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경건이 의식적인 예배나 입술만의 고백에 있지 않고 구체적인 사랑과 섬김의 실천(디아코니아)에 있음을 역설한다(약1:27).
Ⅴ. 결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부터 이 땅에 세워진 실존적인 수많은 교회들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인도하심을 통해서 성장할 수 있고, 성장해 왔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교회는 이상에서 살펴 본 교회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신앙은 교회 안에서 살아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을 향해서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오늘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에 하나님 나라 복음 전파와 병든자,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핵심적 과제로 삼으신 것처럼 모든 교회들이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복음 전파와 행동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부름받고 있다.
◈ 참고문헌 ◈
성종현. 『신약성서의 중심 주제들』.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
───. 『신약 총론』.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6.
───. 예수와 디아코니아, 장신논단12. 서울: 장신대출판부. 1996.
김명용. 『열린 신학 바른 교회론』.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7.
국제성서주석. 『에베소서』.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4.
G. Miller.박상증 역. 『교회의 本疾과 使命』.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
B. Wrightsman. 김득중 역. 『교회의 의미와 사명』. 서울: 컨콜디아사. 1981.
J. Kremer. 『pneuma, in : EWNTⅢ』. 1983.
Ridderbod. 박영희 역. 『바울신학』. 서울: 지혜문화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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