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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 나타난 교회

에반젤(복음) 2020. 2. 25. 12:21



구약성경에 나타난 교회


 


 

 


 

-출애굽기 19장을 중심으로-

 


저 : 피터 엔스(Peter Enns)/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구약학 교수

 

 

 

Ⅰ. 서론

 


이 글에서 다루려는 주제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교회이다. 어떻게 구약성경 안에 교회가 있을 수 있을까? 교회는 신약성경의 개념이 아닌가? 교회는 하나님이 불러내어 자신의 친 백성으로 삼으신 사람들,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 각 족속과 방언으로부터 하나님에 의해 불려나온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 교회는 구약성경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신약성경의 하나님 백성은 구약에서 시작된 것의 연속이다. 구약시대의 시초로부터 하나님은 열성적으로 세상에서 특별한 사람들을 불러내셨던 것이다.

 


여기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 ‘교회’라는 용어보다 ‘구약의 하나님 백성’혹은 ‘신약의 하나님 백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다.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신약의 뿌리가 구약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양자를 구분하게 된다. 그러나 양자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살펴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백성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신약성경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주제에 접근하기 위하여, 먼저 구약성경의 중요한 단락인 출애굽기 19장부터 면밀히 관찰하고 싶다. 출애굽기 19장은 구약성경의 하나님 백성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문단이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우리의 논의를 시작보자. 왜 하나님은 귀찮게도 어떤 사람들을 택해 자신의 친 백성이라고 부르시게 되었는가?

 


Ⅱ.출애굽기 19장: 논의의 출발점

 


1. 출애굽의 이유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유명한 사건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출애굽기 19장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후, 율법을 받기 전(20장) 시내산 기슭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는가? 이것은 좋은 질문지만 해답은 그리 쉽게 나오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만한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한 것은 아니다.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존재가 못된다. 단지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구원하신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해내신 것은 족장들에게, 특히 아브라함에게 그와 같이 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출2:23-25).”

 


그러나 그 외에도 또 다른 측면이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온 세계의 주목올 끌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마음에 이미 큰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2.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하다(1-4절)

 


19장 1-4절을 잠간 살펴보면, 5-6절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5,6절은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중요한 구절들이다. 출애굽기19장은 출애굽기에서 매우 중요한 장이다. 3장12절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후 시내산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신다. 모세에게 준 이 약속은 그들이 애굽을 떠난 후 성취되었다.

 


모세의 여행은 완전히 한 바퀴를 돈 셈이다. 호렙(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모세는 애굽에서 갓 나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이 산으로 되돌아 왔다.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거의 1년 동안 체류하게 된다. 기자는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을 59장에 걸쳐 기술하고 있다(민 10:11에서 출발). 시내산에 도착한 이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모체 오경에서 큰 부분으로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 도착해 장막을 친다(19:1, 2). 그리고 즉시 모세는 하나님을 뵈옵기 위해 산으로 올라간다(3절). 이번이 모세가 시내산에 처음으로 등정하는 때이다. 첫 번째 시내산 등정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기의 지금까지 내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이므로 분명 중요한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이 말씀은 자신뿐만 아니라 야곱 족속, 이스라엘 자손을 향한 말씀이었다(3절). 모세가 산에 오른 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 백성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애초부터 모세의 소명은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는 매우 간단하다. 기억하라는 것이다(4절).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최초로 이루어지는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이 맨 먼저 해야 일은, 하나님이 애굽을 파괴하시고 그들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인도해 낸 이 사건에 대해서 상기하는 것이다.

 


4절에서 주목할 만한 한 가지 표현은, 하나님이 독수리 날개로 그들을 업어 하나님 자신에게로 인도했다는 구절이다. 이 문구는 적어도 두 가지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독수리들은 구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약자들을 돌보는 새로 묘사된다. 이에 관한 핵심구절은 신명기 32장 9-14절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마치 독수리(하나님)가 새끼들에게로 급강하하여 그들을 안전하게 데려가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구약성경의 어떤 곳에서는 독수리들이 사나운 맹금으로 기술되기도 한다(신 28:49; 4:13; 48:40; 49:22 등). 이런 비유적 묘사도 출애굽기 19장4절과 어울린다. 애굽에 관한 하나님은 사나운 육식 맹금이었다. 아마 여기의 독수리는 이런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강한 새가 하늘에서 급강하하여 애굽을 습격하고 이스라엘을 안전히 인도해 낸다는 것이다.

 


이처럼 1-4절은 5-6절을 살피는 데 필요한 맥락을 제공해 준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자기 백성을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셨다. 먼저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행한 이 일을 상기시키며 이를 잊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3.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다(5-6절)

 


이 구절의 핵심을 살피기 전에 흥미롭고도 중요한 두 가지 일을 지적하고자 한다. 5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최초의 명령 가운데 두 번째 요소이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라는 말씀은 5절의 말씀에 순종하도륵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내산으로의 여행은 그들의 자유로운 소풍이 아니었다. 그들이 해야 할 무언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언약에 충실할 필요가 있었다. 시내산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4절)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들이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구속에 따른 결과로 발생한 일이다. 이것은 이미 구원받은 백성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일이다. 그러나 일단구원을 받은 후에는 그 거룩한 소명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했다. 이런 원리는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엡 4:1; 살후 1:11).

 


5절에서 일어나는 또 하나의 이슈는 이스라엘이 이 언약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이 20장-23장의 율법(십계명과 언약의 책)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혹자들은, 5절의 언약은 앞서 주어졌던 족장들과의 언약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매우 설득력 있는 견해라고 생각하고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출애굽기 기자의 계속적인 소급적, 후향적 시각에 비추어볼 때 이는 이상한 해석이 아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행하신다는 내용이다. 시내산에서 이제 곧 발생하려는 일은 새로운 언약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오래 전에 맺으신 언약의 지속이며 심화이다. 다시 말해, 율법의 수여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관계 시작이 아니라 그 관계의 고양이다. 내 언약을 지키라는 5절의 말씀은 아브라함과 처음 맺었던 언약에 계속 충실하라는 것이다. 율법은 그 언약의 진전 단계이다. 구약은 일련의 여러 언약이 아니라 이 상이한 단계들을 지닌 한언약이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위해 한 백성을 불러내셨는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기본 토대이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이런 일을 행하신 것이다. 이제 5-6절의 세 가지 요소를 보다 면밀하게 고찰해 보자. 구절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스라엘은 소중한 소유물,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본문은 말한다.

 

 

 

1) 소중한 소유물

이 단어의 히브리어는‘세굴라’이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종종 왕의 개인적인 값진 재물을 가리킨다. 여기 출애굽기에서는 왕이신 여호와의 귀중한 소유물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왕의 재산이다. 사람이 재물을 좋아하듯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아주 좋아하신다. 그들은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욕구에 따라 그의 백성이 되었다. 5절 초두에서 하나님은 세계가 내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그토록 질투하시고 애굽을 그토록 격렬하게 파괴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이런 대우를 받을만한 일을 행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소중한 소유물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소중하게 되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했다.

 


2)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

이것은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전혀 출현하지 않는 칭호이다. 때문에 이 문구의 정확한 의미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또 하나 묘한 점은 이스라엘에 아직 제사장 제도가 확립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사장 제도는 28, 29장에서 나타난다. 여기의 제사장 나라는 완전하게 발전된 제사장제도를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제사장 제도가 당시 그들에게 생소한 개념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제사장 제도가 있는 다른 민족들과 많은 접촉을 했다(창14:18; 41:45, 50; 46:20: 47:22, 26: 출 2:16; 3:1; 18:1). 제사장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십계명도 그들에게 생소한 개념이 아니라 옛 계명들의 반복이며 강조였다. 게다가 족장들도 제사를 지낼 때 제사장적 의무를 수행했다(창 15:10-11). 이스라엘은 고대 세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제사장이 무엇이며 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의 나라라는 말은 시대착오적인 표현이 아니다. 이 문구는 하나님이 다른 민족들과 관련해 이스라엘을 어떻게 사용하실 것인가에 관한 진술이다. 거룩한 백성이라는 용어도 제사장 나라와 매우 유사한 어떤 것을 언급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과 구별된 존재이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라 불리고 있다. 히브리어에서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소중한 재산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다. 그러므로 이 세 용어, 귀중한 소유물,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함께 동일한 일반적 의미를 전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구별된다는 것은 다른 민족들로부터 격리되어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서, 온 세계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만드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이 용어들은 이스라엘의 기능을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6절에서 백성의 의미로 사용된 히브리어‘고이’(백성)가 이런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통상 이 단어는 이스라엘 이외의 다른 나라들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창세기 12장2절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현상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이와 같은 용례는 드문 것으로 출애굽기 19장을 창세기 12장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출애굽기 19장의 고이는 창세기 12장에 주어진 약속의 성취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단순한‘고이’(백성)가 아니라 ‘거룩한 고이’이다. 이스라엘은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다른 나라와 다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구속이라는 광대하고 원대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선택하신 거룩한 제사장적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한 백성을 불러내셔서 그들이 세상에 되돌아가 하나님을 증언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제 출애굽기 19장을 넘어가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Ⅲ.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

 


출애굽기 19장은 구속받은 백성과 하나님의 첫 번째 공식적 만남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소중한 소유물,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지칭하는 곳이 바로 여기다. 출애굽 이후 자기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선언으로 이 용어들은 확실히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이 한 백성을 세상에서 택하시고 구별하신 것은 어떤 사적인 의미에서 그들을 하나님께 소속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통해 특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19장은 이스라엘 역사의 진전과 더불어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보다 완벽하게 표현될, 어떤 패턴의 기점이기 때문에 특별히 중요하다. 이 사건들의 일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출애굽기는 이런 약속의 성취이다

 


1) 아브라함과 족장들

우리가 앞에서 잠깐 지적하였듯이 이스라엘의 특별 지위는 혁신적인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직접적인 연속선상에 있다. 창세기 12장 1절-3절로 가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최초의 부르심을 살펴보겠다. 거기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복이 그의 자손을 넘어서서 전 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소명에는 세계적인 요소가 있다. 여기에 벌써 구약성경의 하나님백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무언가가 엿보인다. 하나님은 매우 거대한 목적을 위해 한 특정한 작은 백성을 부르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단지 미래의 이스라엘만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라 이미 온 세계를 생각하고 계셨다.

 

우리가 족장들의 이야기를 계속 읽어보면 이야기가 주로 다른 것들, 예컨대 그들의 결혼, 자녀, 여행, 형제들 간의 반목, 그리고 종국적인 애굽으로의 이주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소명에 함축된 범세계적 의의는 당분간 전경에 드러나지 않는다.

 


특별히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는 사라의 불임 문제가 곧 논의의 주된 초점으로 부상한다. 그 씨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유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사라의 불임은 단순히 하나님께 기적을 일으킬 기회를 제공한 것만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 출애굽기는 창세기 12장에 이미 등장한 과정의 한 단계이다. 하나님은 보다 크고 광대하고 세계적인 목적을 위해 특정 백성을 택하신다. 그 약속의 첫 번째 불입금(할부구매의 불입금처럼)은 아들 이삭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일을 주도하고 계신다는 최초의 주된 표징은 출애굽기 19장의 시내산에서 나타난다.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노아

 


노아의 홍수이야기는 죄와 심판의 이야기지만, 거기에는 그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노아와 그의 자손을 통해 결국 온 세계에 복이 임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창세기 9장1-17절에서 하나님은 다시는 지상의 거민을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방주 안에 들어간 자들과만 이 언약을 체결하신 것이 아니라 현재와 장차 지상에 살게 될 모든 피조물과 언약을 체결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노아가 특별 상황에서 구원받은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유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에 등장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은 한 사람을 특별 존재로 선택하신다. 노아와 맺은 언약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산피조물에게 유익을 주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지상의 모든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역시 종국에는 세계적, 우주적 결과로 귀결된다.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은 한 특정 백성을 가려 뽑는다. 이 백성도 역시 지구적,  세계적 영향을 미친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다. 이는 그들이 어떤 개인적 의미에서 순결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의 초점은 내적으로 자신들을 향한 것이나 자신의 순결에 있지 않고, 외적으로 그들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열방에 중개하는 자들이다.

 


이스라엘은 열방을 하나님에게서 멀리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일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을 이용해 하나님에 대한 구원의 지식을 온 세계에 전파하시고자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이스라엘이 담당할 역할이다.

 


3)아담

 


이 개념을 좀 더 완벽하게 하기 위해 앞으로 한 단계 더 올라가 본다. 아담과 하와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들이 동산에서 누린 복은 모든 인류가 향유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이 순종했다면 모든 후손이 그에 상응하는 복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의 불순종은 모든 후손에게 저주를 가져왔다. 노아와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한 사람의 행동이 뒤에 오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은 하나를 택해 다수를 유익하게 하신다. 다른 점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은 한 개인이고 이스라엘은 한 민족이라는 점이다. 전에 한 개인이 행했던 역할을 이제는 한민족이 행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이제 새 아담이다. 이것은 나중 신약 성경을 논할 때 극히 중요하다.

 

2. 이스라엘은 계획을 이행하지 못한다

 


앞에서 본 대로 온 세계와 관련하여 아담, 아브라함, 노아가 담당하는 역할은 출애굽기 19장 5-6절에서 한층 더 분명해진다. 세상의 구속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의 완벽한 실행이 본격적으로 엿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여기 시내산위에서부터다. 그러나 이 이상(理想)의 선포이후, 하나님의 귀중한 소유물인 하나님의 백성 편에서 거듭하여 그 고상한 소명을 저버리게 된다.

 


하나님은 열방과 화해하시기 위한 수단으로 한 백성을 지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자주 불순종에 빠진다. 불순종에 의해 그들은 화해의 수단이 되기는커녕 열국의 웃음거리, 조롱거리가 된다. 하나님의 계획은 단지 이스라엘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계획에의 자발적인 참여자가 되지 못한 것 같다.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 특히 선지자들의 탄핵은 특별히 이 문제를 겨냥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행동하지 못하고 열방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1) 출애굽기의 금송아지 사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고 애굽 군대를 멸함으로써 자신의 권능과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산상에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출현하시고 율법을 내려주심으로써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그들에게 가르쳐주셨다.

 


그러나 모세가 산에 오르자마자 백성은 반역을 저지른다. 모세의 조력자가 되어야 할 아론의 도움으로 그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출애굽기의 문맥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말을 내뱉는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4절).”출애굽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는19장 4절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이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또24장에서 이스라엘은 번제와 화목제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여기 32장에서 그들은 동일한 번제와 화목제로 우상과 언약을 체결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그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출애굽을 목격하였던 세대, 도저히 반역할 것 같지 않던 세대가 반역의 당사자들이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이용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실 수 있을까?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는 그 과업이 불가능하다. 25절,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이스라엘은 열방을 구속하기는커녕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반역을 저지름으로써 열방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뜻하신 바의 정반대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 너무나 화가 나서 사실상 그들을 아주 멸하려고 하셨다. 10절,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이 말씀은 홍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고자 하신다. 노아와 아브라함으로부터 민족을 일으키셨듯이, 불충성하는 자들을 진멸하고 다시 한 번 한 인간으로부터 한 큰 민족을 일으키기 원하셨다.

 


그러나 그 다음구절들이 말하듯이 모세의 중보기도로 인해 하나님은 이 위협을 거두어들이신다. 모세는 중보기도를 드리며 하나님께 열국이 지금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는가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멸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자체를 들먹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자기 역할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소행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거듭 반복된다. 왜 이 반역이 무서운 일인가를 우리는 여러 차례 목격할 수 있다. 하나님께 거역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열국의 마침은 참되신 하나님께로부터 전보다 멀어지게 된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통해 열국에 일어나야했던 일의 정반대 현상이다. 이 패턴이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되풀이되고 있다(왕상 9:6-9; 시 44: 13-14; 렘 24:9; 겔 5: 14-15; 14:8; 22:4) .

 


즉,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단순히 하나님과 이스라엘만의 관계로, 축복과 저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순종 혹은 불순종은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계획 성취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문제는 단순히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 자기 본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데 있다.

 


3) 하나님은 남은 자를 남겨두신다

 


이스라엘은 열방을 하나님과 화해시켜야했는데 불순종으로 문제가 생겼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 해답은‘남은 자’사상이다. 이것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주제이다.

 


하나님에 대한 출애굽세대의 거역은 금송아지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약속의 땅에 들어갈 무렵, 공격 전 그 땅을 정탐하기 위해 군사들을 보냈으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강해 이스라엘로서는 당해낼 수 없다고 보고한다.(민 13, 14장).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중대한 갈림길이었다. 이스라엘은40년 동안광야에서 방랑해야 했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그 세대의 모든 사람은 광야에서 죽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자기 계획을 지속시키기 위해 선택한 남은 자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임으로써 계획의 그 단계를 성취한다.

 

이 주제의 가장 강력한 표현은 이사야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사야서의 많은 부분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가고 거기에서 귀환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벨론에서의 귀환과 출애굽간에는 많은 유사점이 있다. 이스라엘은 죄 때문에 바벨론에 갔다.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으므로 하나님께 형벌을 당한 것이다(왕하21:14-15). 그들이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것들은 박탈되었다. 성전도, 제사도, 적절한 예배도, 왕도, 땅도 사라졌다.

 


이사야서의 많은 부분은 이스라엘이 고토로 돌아오고 이것들을 다시 얻게 될 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남은 자는 이 큰 재난에서 살아남은 이스라엘의 작은 그룹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작의 핵이었다. 잘 알려진 두 본문(사4:2-4; 11:1-16)의 기본 개념은, 그루터기에서 한 가지가 솟아나온다는 것이다. 또한 49장 6절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을 연상시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그 땅에 들아 오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의 우주적인 목적이 새로워질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포기하시지 않지만 죄악성이 넘치는 집단에서 남은 자 일부분을 선택해 전체의 일을 하게 하신다.

 


이것은 노아와 아브라함에게서 나타났던 그 패턴의 지속이다. 어떤 점에서는 그들도 각각 남은 자이다. 이스라엘 전체도 전 세계의 남은자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훨씬 더 분명해진다.

 

 

 

Ⅳ. 하나님의 백성과 신약

 


출애굽기 19장5-6절은 구약의 하나님 백성에 대한 이상적 그림이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이스라엘은 기대에 미치는 삶을 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신약에서 열매를 맺는다. 결실의 방식은 두 가지로, 그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성취된다.

 

1.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계획을 성취하신다

 


첫째, 그리스도 자신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의 성취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뜻하신 바(그러나 이스라엘이 완수하지 못한바)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라고 불린다. 출애굽기 4장 22-23절에서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고 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son)이라 불림으로써 구약의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사이에는 분명한 접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성취다.

 


그리스도는 또한 출애굽기 19장5-6절의 성취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물이며 제사장 나라이며 거룩한 백성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열방에 대한 세계적 소명이 궁극적으로 완전하게 효력을 발하는 것이다. 누가복음2장 32절에서 그리스도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불렸다. 이 구절의 어법은 앞에서 본 이사야46장 6절과 같은 구절들에서 왔다(참고 사42:6과 51:4). 궁극적으로 이 이상을 성취하는 이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이 행하지 못한 것을 행하였기 때문에, 곧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였기 때문에 이 역할을 수행하신다.

 


그리스도의 죽음 및 부활과 더불어, 마침내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진정으로 원대한 것임을 보기 시작한다. 이제는 참으로 모든 나라가 복을 받게 된다. 아브라함과 그의 지상적 후손을 통해서가 아니라 참 이스라엘, 그리스도, 참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 이상을 성취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모든 열국이 복을 받는다.

 


2.그리스도의 교회가 구약의 계획을 성취한다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교회도 이방의 빛이다. 그리스도가 구약적인 하나님 백성의 이상을 성취하지만 지금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롬 6장). 그 때문에 우리도 역시 이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수단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죽음, 부활, 승천, 고난 등이 우리에게도 발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역시 화해의 사역이 있다.

 


다시 말해, 교회가 새 이스라엘이 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약에서 시작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신 역할을 계속 수행한다. 우리는 모든 열국 백성으로부터 불려나온 특별한 백성이며, 우리의 직무는 타락한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것이다. 교회라는 것이 바로 이런 존재이다. 교회는 악을 행하지 않는 일단의 훌륭한 백성에 불과한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이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구절이 사도행전 13장 47절이다. 거기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우리가 앞에서 본 이사야 49장 6절을 인용하고 있다. 사도행전 13장의 문맥은, 두 사람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수많은 이방인들이 몰려와 듣는 것을 보고 유태인들의 시기가 가득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강퍅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에게 이 현상이 구약성경에 선포된 하나님의 목적의 절정임을 상기시켰다. “주께서 이와 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여기에서 언급된 ‘우리’는 사도들이다. 이들은 앞으로 확장될 교회의 핵이다. 그들은 복음을 처음으로 이방에 전파함으로써 구약성경을 성취한 이들이다. 사도들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파함으로써 교회의 문이 유대인 밖의 다른 민족에게로 열리게 되었다. 비시디아안디옥의 유대인들은 이를 불쾌하게 생각했으나 말씀은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민(46절) 또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19장 5-6절과 상호작용하는 신약성경의 본문은 베드로전서 2장4-10절이다. 이 구절 전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교회의 복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사용하는 어법에 주의해 보면, 베드로는 다수의 구약성경 구절들을 인용내지 인유(引喩)하여 이스라엘을 묘사하고 있다(사 8:14; 28:16; 시 118:22: 호1:6,9; 2:1,22 등).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구절은 9절이다. 이는 출애굽기 19장 5-6절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약성경을 인용해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구약에서의 열방이 복을 받으리라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약속은 마침내 이방인들이 무제한적으로 하나님의 가족 안에 들어옴으로써 실현되었다. 이방인들이 교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구약성경 약속의 실현이다.

 


또한 교회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된 것은 “이는…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신약의 하나님 백성은 구약의 하나님 백성과 동일한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한 특별한 백성이 부름을 받고 거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에 나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선포한다.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확실하게 주지시키고자 한다. 그들은 교회이기 때문에 남과 다른, 구별된 백성이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의도는 독자들에게 경건한 삶을 살도록 자극을 주는 데 있었다(11-12절). 바르게 사는 것은, 개인적 의미에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들의 윤리는 복음 전도의  목적올 가지고 있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된다는 것은 복음 전도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12절에도 이 점이 엿보인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또한 11절에서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훌륭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이 더 이상 복음에 대해 낮선 나그네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그네처럼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교회는 하나님을 향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세상과 구분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이 실패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이웃 이교도들의 많은 관행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되었다.

 


교회는 이스라엘과 달리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지극히 높은 표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세상이 일어서서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백성의 파라독스이다. 세상과 분리됨으로써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

 

 

 

Ⅴ. 오늘을 위한 몇 가지 실제적 교훈

 


베드로전서 2장 4-12절은 이스라엘과 교회간의 추상적 관련성에만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동일시의 목적은 매우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다. 새 이스라엘로서의 교회는 나무랄 데 없는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하라는 이 명령을 이행함으로써 우리가 세상과 다른 존재임을 나타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세상의 주목을 받고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수 있다.

 


하나의 특별하게 선택된, 거룩한 백성을 통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창세기 12장 1-3절에서 처음 선포되고 출애굽기 19장 5-6절에서 보다 분명하게 진술된 계획이다. 그 계획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절정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주변 곳곳에서 이 일을 성취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계획의 도구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야한다.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 구약시대의 성도들에게 요구되었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는 얼마나 더 절실하게 요구되겠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는 높은 도덕적 사고방식과 행동표준이 요구된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는 단순히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죽은 자들에게 효과적인 증인 노릇을 하기 위해 죄에 대해 죽은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이 말하듯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셨으며 우리에게 화해의 사역을 주셨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은 우리를 하늘로 올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가장 뚜렷한 증거는 논리적이고 기지가 번득이는 주석적 논증이나 강력한 웅변이 아니라, 십자가의 그늘에서, 부활의 찬란한 불꽃 가운데서. 순결하고 겸손하며 경건하게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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