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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에반젤(복음) 2020. 2. 22. 15:41



구원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거듭남을 확인하고 구원에 대하여 신중하게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기까지는 살펴야 할 것이 많다. 그 과정에서 사탄의 속임수를 민감하게 분별해야 할 것이다.

 

사탄의 속임수 가운데 하나는 구원을 가볍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의 신앙은 구원의 문제를 너무나 가볍게 다룬다. 구원은 절대로 가볍게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구원은 확인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여야 한다. 구원을 가볍게 다루는 것은 이미 사탄의 계략에 빠진 것이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우리가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이 죽음이 헛된 죽음이 되는 것이다. 사탄은 이 죽음이 헛된 죽음이 되도록 구원을 가볍게 생각하게 만든다.

 

“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한글킹]

 

본문의 말씀은 독생자를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 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논점은 독생자를 믿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이 여기서 말하는 믿음에 해당되는가를 질문하여야 한다. 또한 본문의 말씀과 연결 지어 상고해야 될 말씀이 있다.

 

“17 그와 같이 행함이 없으면 믿음만으로는 죽은 것이라“(약 2:17) [한글킹]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야고보서에는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 언급되고 있고, 마가복음에서는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 언급되어 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본문에서는 믿는 자의 표적이 따르더라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5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한글킹]

 

“15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영접하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시고“(막 10:15) [한글킹]

 

본문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상의 말씀을 종합해보면, 구원을 얻는 믿음에 대해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대로 ‘믿는 자’라면 믿는 자의 표적이 따라야 할 것이고(막 17:17~18) 야고보서 2장 17절의 행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은 ‘믿는다’는 것에 대한 하나의 기준이다.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한다면, 귀신들린 자들을 놓고 기도하면 귀신이 떠나가야 할 것이고 병든 사람에게 기도하면 나아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믿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믿는 자의 표적이 있고, 행함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영생은 얻을 수 없게 된다. 또한 거듭나지 아니하면 영생을 얻을 수 없다. 거듭났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아니하면 영생을 얻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영생에 관한 다른 요건이 모두 충족된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뜻을 찾지 못하고 그 뜻대로 하지 아니하면 영생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믿는다’고 표현하는 그 믿음이 지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17 세상도, 세상의 정욕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한글킹]

 

“2 이는 그가 육체 안에서 자기의 남은 때를 더 이상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2) [한글킹]

 

본문의 두 구절은 세상과 모든 세상의 정욕들이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하나님과 거한다는 것과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는 남은 육신의 때를 더 이상 사람의 정욕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 12:2) [한글킹]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그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이 보시기에 참으로 기쁨이 되는 것을 너희 안에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분께 영원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1) [한글킹]

 

여기서의 문제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이다. 나 자신이 먹고살기 위한 직업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하였다.(자세한 것은 이 책 03. 동행同行을 참조하라.) 아버지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음성을 들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성경 속에 있지만 개인을 향한 구체적인 뜻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씀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 가운데 첫째는 아이들이 안정을 얻는 상태이다. 아이들은 냉장고에 먹을 것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부모가 안 보이면 울고 찾는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있어야 안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안 보여도 찾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 또한 어린아이들은 언어를 배우고 삶의 방식을 배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언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언제나 부모와 동행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다. 주님의 어린아이의 비유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구원의 이 모든 것이 필요충분조건으로 맞아야 이루어진다. 어느 것 하나를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구원을 결코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천국과 지옥, 영생과 영멸이 걸려 있는 문제를 소홀히 한다는 것은 이미 마귀의 계략에 속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문제는 확인하고 또 확인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더더욱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30 너희는 그 쓸모없는 종을 바깥 흑암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울며 이를 갈고 있으리라.’고 하더라”(마 25:30) [한글킹]

 

본문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이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땅에 묻어놨다가 그대로 가져오자 주인이 책망한 내용이다. 이 비유에서 달란트를 배분받았다는 것은 주님의 종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분깃을 받은 것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 주님께서 일을 맡긴 사람이다. 한 달란트를 받은 자도 주님과 동행을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게으름 때문에 책망을 받는다. 게으른 것을 용서치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거듭나고, 믿음이 있고, 믿는 자의 표적이 따르고, 주님과 동행을 한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맡겨준 일에 대하여 게을러서 주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분명한 심판이 따른다는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이것 또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사유인 것이다. 구원의 요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한글킹]

 

천국에서 주님의 얼굴을 볼 자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삶에서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충족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21 그러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느니라“(행 2:21) [한글킹]

 

“13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한글킹]

 

본문의 말씀은 구원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흔히 인용하는 성경구절이다. 그들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주의 이름만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구절의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아무런 의미도 모르고 단순하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의 본문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던 내용의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삼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현장에서 언급한 대목 가운데 한 구절이다. 이때 베드로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을 언급하기 전에 사람들은 성령에 취해 있었고,(행 2:15) 그 가운데 “너희가 예언하리라.”(행 2:18)는 요엘서의 말씀이 인용되면서(행 2:17)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심판이 있고 그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단순하게 ‘구원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성령에 취해 있었고 요엘서에서 인용된 그 능력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즉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른 것과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같을 수가 없다. 그들의 말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모두 구원을 받는다면 점쟁이가 영업을 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불러도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되는데, 이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자도 예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베드로의 설교는 계속된다. 주님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하신 사건의 증인이 자신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성령의 약속을 받아서 너희가 지금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다.”고 말한다.(행 2:33) 그리고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양심이 찔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묻고 회개하여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날 삼천 명이 구원을 받은 것이다.(행 2:33~41) 단순하게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서 10장 13절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입술로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라.”는(롬 10:10) 말씀이 전제된 다음에 이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 상태가 어떤 상태인가? 이것은 성령님의 조명으로 거듭나고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가 각인된 상태를 말한다. 이 상태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의미도 모르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 또한 논리의 비약이다. 구원은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주제이다.

 

지금 교회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는 장치가 지금의 신앙체계 안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 아닌 지식으로 무장되어 있는 교회에서는 이들에게 지금 상태로 가도 구원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한다. 스스로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을 하도록 교회가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확신의 착각 속에서 살아가도록 만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심판대 앞에 서서 구원이 자기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망연자실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거니와“(롬 8:16) [한글킹]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님께서 직접 증거하셔서 그것을 알게 하신다. 사람의 말로 인하여 자기기만으로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기성찰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자기성찰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문제이다. 성령님의 증언은 진리와 합치된다. 성령님은 절대로 거짓을 높이지 않으신다. 성령님의 증거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거듭남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것이고 상한 심령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아갈 것이고 삶 속에서 믿는 자의 표적이 드러날 것이다. 성령님께서 믿는 자임을 증거하시는데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겠는가? 분명히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다. 생각해보라. 성령의 은사는 나타나지 않고 성령의 열매만 나타나겠는가? 세대주의자들은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은사주의자들도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성령님께서 확증하여 주는 사람은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무엇인가를 알고 이 평안을 얻기 우해서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를 안다. 그리고 말씀을 경시하지도 않을 것이고, 은사를 경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성령의 은사가 삶 속에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령한 복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즐거워하며 누릴 것이다. 이러한 구원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구원에 대한 자세한 것은 회복시리즈 <성경적 생활> 07-4-2. 영생을 얻는 믿음의 요건들을 참조하라.)

 

[회복시리즈 02. 신앙의 본질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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