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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위일체/김효성 목사

에반젤(복음) 2020. 2. 21. 12:38



하나님은 삼위일체(三位一體)되신 하나님이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6문답은 “하나님께는 세 인격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신데 이 셋은 본체에 있어서 동일하고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한 한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은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포함한다.

 

한 하나님

첫째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신구약성경은 온 세상에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심을 증거한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신명기 6:4,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이사야 44:24,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고린도전서 8: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5문답은 “한 분 이상의 하나님들이 계신가?”라는 질문에 대해, “살아계시고 참되신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신다”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은 그의 본체 혹은 본질의 단일성이라고 이해된다. 하나님의 본체 혹은 본질이란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과 활동들의 공통적 주체가 되는 객관적 존재를 의미한다. 우리 말에 본체와 본질은 약간 다른 뉘앙스를 가지는 것 같다. 본질은 하나님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비교적 추상적 개념이며 본체는 그러한 본질을 가진 구체적 존재를 가리키는 맛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본질 혹은 본체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초대교회의 니케야 신조는 성부와 성자는 같은 본질을 가지신다고 진술했다. 촬스 핫지의 논평대로, 니케야 신조의 ‘같은 본질의’(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은 단지 종류적 동일성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수적인 동일성(numerical identity)도 의미하는 것이며, “만일 호모우시오스가 종류적 동일성의 의미로 해석된다면, 니케야 신조는 삼신론(三神論, Tritheism)을 가르칠 것이다”(Hodge, I, p. 460). 또한 초대교회에 작성된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한다: “아버지는 영원하시고 아들은 영원하시고 성령은 영원하시다. 그러나 그들은 세 영원자들이 아니고 한 영원자이시다. . . . 이와 같이 아버지는 전능하시고 아들은 전능하시고 성령은 전능하시다. 그러나 그들은 세 전능자들이 아니고 한 전능자이시다. 이와 같이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하나님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세 하나님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53)

 

 세 인격

둘째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이 계시며 이 삼위(三位) 혹은 세 인격은 서로 구별되신다. 인격(person)이란 자의식(自意識)을 가지고 자신의 신분을 인식하는 이성적 존재를 가리킨다. 하나님께 있는 세 인격은 서로 구별되는 세 개체적 존재이다. 칼빈은 “내가 의미하는 인격은 신적 본체 안의 한 실존 즉 다른 둘과 관계되어 있으나 함께 나눌 수 없는 특성들에 의해 구별되는 실존이다”라고 말했다(기독교강요, 1. 3. 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한 하나님 안에 한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을 가진 세 인격 즉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계시다. 아버지는 아무에게서 나시지도 나오시지도 않고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구별된 세 인격이시다. 마태복음 3:16, 17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증거한다. 또 요한복음 14:16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본체는 동일하게 세 인격들에 공통적이며 이런 의미에서 그 셋은 하나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본체는 인격적 특성에 의해 구별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영원히 존재하시며 이런 의미에서 그 셋은 셋이다. 그러나 세 인격은 하나님의 본체와 나란히 있는 어떤 존재들이 아니고 그 본체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본체의 존재 양식이다. 아버지는 참 하나님이시요 아들도 참 하나님이시요 성령도 참 하나님이시다. 각 인격은 하나님의 본체와 동일하고, 만일 두 인격을 합한다 할지라도 하나보다 더 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 인격에 하나님의 본체 전체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상,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을 부정한 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들의 사상은 사벨리우스주의 혹은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고 불리웠다. 아버지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소위 ‘성부(聖父) 수난설’은 이런 사상에서 나온 오류이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세 인격을 대표하는 분으로서 단순히 하나님으로 표현된다.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린도전서 8: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그는 아들과 관계하여 아버지로 언급된다. 요한복음 1:14, “아버지의 독생자.” 요한복음 5:17,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요한복음 8:54,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요한복음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에베소서 1:3,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아들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이해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그것이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때에라도 그것은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존재적 관계에서 아들이시다.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갈라디아서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특히 ‘독생자’(모노게네스 μονοgενής)라는 명칭은(요 1:14, 18; 3:16, 18; 요일 4:9), 비록 그것이 신약성경에서 사람의 외아들이나 외동딸에게도 사용되었지만(눅 7:12; 8:42; 9:38), 아버지와 아들의 독특한 관계를 나타낸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다른 여러 구절들도 아버지와 아들의 독특한 관계를 암시한다(마 11:27; 요 5:18-25 등). 신성(神性)은 인격성을 내포하고,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인격적 관계에서 가장 잘 이해된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1의 ‘말씀’(로고스 λόgος)은 인격성을 가진 신적 존재로 인정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 가장 잘 이해된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아들은 참된 신성을 가진 자로 이해되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아들의 출생은 영원하다고 이해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은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시고”라고 진술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요 17:5). ‘창세 전’은 시간 세계 이전이며 영원이라는 말로만 표현될 수 있다. 물론 영원 전의 출생이라는 생각은 하나님만큼이나 신비하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시간 세계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아들의 신성에 결함을 주고 결국 그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출생 관계는 영원적이라고 표현되어야 하며 아들의 영원 출생을 부정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들의 참된 신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아들에게 돌려지는 신적 명칭들은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이사야 9:6, “그 이름은 . . .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요한복음 1:1,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디도서 2:13,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요한일서 5:20,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둘째로, 그가 가지신 신적 속성들은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마태복음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골로새서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셋째로, 그가 행하시는 신적 사역들은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 외에도 그가 행하신 모든 기적들이 그러하다.

넷째로, 그가 받으시는 신적 존영이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마태복음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요한계시록 5:12, 13,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이처럼 성경에 풍성히 증거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부정하는 초대교회 시대의 아리우스주의나 오늘날의 일위신론(一位神論, Unitarianism)이나 자유주의는 명백히 이단이다.

성령

제3위이신 성령은 성경에서 ‘영,’ ‘성령,’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등으로 불린다. ‘영’(루아크, 프뉴마)은 바람같이, 호흡같이 일하시는 그의 사역의 양식을 나타낸다. ‘성령(聖靈)’은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낸다. 그는 거룩하시며 거룩한 일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영원함같이, 아버지와 성령의 관계도 영원적이라고 본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성령의 참된 신성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의 영이 하나님이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성령의 참된 신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성령은 하나님과 동일시되신다. 사도행전 5:3, 4, “네가 성령을 속이고 . . .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사도행전 28:25,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사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둘째로, 성령께서 가지시는 신적 속성들은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고린도전서 2:10,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히브리서 9:14, “영원하신 성령.”

셋째로, 성령은 신적 사역을 하신다. 창세기 1:2, “하나님의 신[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욥기 26:13, “그 신[영]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넷째로,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신다. 마태복음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교회 역사상,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다(단일신론, 소시너스주의, 일위신론 등). 그들은 성령께서 인격적 하나님이심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의 신성을 증거하며 신성은 그의 인격성을 내포한다. 더욱이 그의 인격성은 성경에서 그에게 사용된 인격적 명칭과 인격적 특성에서 확증된다.

첫째로, 성령은 인격적 명칭으로 불리우신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오시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6:14). 영은 헬라어에서 중성명사이지만, 여기 ‘그가’라는 말은 남성 지시대명사이다. 바울은 성령에 대해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라고 말했다(엡 1:14). 여기의 ‘이는’도 남성 관계대명사이다. 이 말들은 성령의 인격성을 증거한다.

둘째로, 성령은 인격적 특성들을 가지신다. 예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고(요 14:26) 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요 15:26).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말씀하심을 증거한다(행 8:29; 10:19; 13:2). 사도행전 16:7은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고 말한다. 바울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말했고(롬 8:16) 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했다(롬 8:26). 또 그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교훈했다(엡 4:30).

초대교회는 성령께서 아버지로부터 나오실 뿐 아니라 ‘아들로부터도’(filioque = and from the son) 나오신다는 사실에 대해 논쟁하였다. 이것은 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동방교회는 성령께서 아들로부터도 나오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나님의 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영’ 혹은 ‘아들의 영’으로도 불리우신다는 사실은 성령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오실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부터도 나오신다는 말할 수 있는 근거이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1:19,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요한계시록 5:6, 어린양의 일곱 눈은 하나님의 일곱 영 곧 성령이시다.


 세 인격 간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시는가? 세 인격은 신적 본체에 있어서 동일하고 그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시지만, 그 인격적 특성과 사역에 있어서 어떤 종속적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삼위 간의 논리적 순서는 아버지-아들-성령이며, 아들은 아버지에게 속하시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속하신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은 “아버지는 아무에게서 나시지도 나오시지도 않고,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보내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셨고(요 3:17), 또 성령에 관하여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라고 표현하셨다(요 15:26).

세 인격은 사역에 있어서도 구별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신다. 낳으시는 일은 성부만의 독특한 사역이다. 아들은 낳으심을 받을 뿐이다. 또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보내신다. 성령은 그들로부터 나오신다. 또한 세 인격은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도 구별되신다. 아버지께서는 만세 전에 택자들을 예정하셨고, 아들께서는 2천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택자들의 구속(救贖)을 이루셨고, 성령께서는 그 구속을 택자들에게 적용하셔서 그들을 실제로 구원하신다. 중생(重生)과 성화는 주로 성령께 돌려진다.

결론적으로, 삼위일체 진리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기독교 체계의 중심과 같아서 신학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만일 이 진리가 버림을 당한다면, 속죄와 중생 같은 다른 중요한 교리들도 큰 손상을 당할 수밖에 없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상은 항상 인간의 전적 부패성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부정하는 자력(自力) 구원사상과 같이 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매우 신비하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적 진술은 하나님의 신비를 만족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라기보다 단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단일신론, 양태론, 삼신론 등)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삼위일체는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명백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우리가 이것을 믿음은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는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신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교의신학, 2권, 2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