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렬 교수
B.B.Warfield의 삼위일체론 연구
I.서론: B.B.Warfield의 생애와 그의 신학적 작업
워필드(Benjamin.B.Warfield)는 구 프린스톤의 위대한 3대 정통신학자들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Archibald Alexander, Charles Hodge와 함께 그는 구 프린스톤의 신학적 기초를 놓은 조직신학자들 중의 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1851년 켄터키(Kentucky) 주의 렉싱턴(Lexington)근교인 “Grasmere"라는 곳에서 출생하였으며, 1871년에는 뉴저지 대학(현 프린스톤 대학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는데, 대학시절에는 학문적 탐구열이 뛰어난, 열렬한 다윈주의자(Darwinian)였다.
워필드는 대학을 졸업한 후, 유럽의 에딘버러 (Edinburgh), 하이델베르그(Heidelberg)에서 유학생활을 하기도 했다. 유럽에서 1년을 보낸 후, 미국으로 돌아와 1873년에는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876년에는 졸업했다. 같은 해 여름에는 Annie Pearce Kinkead와 결혼한 후, 곧바로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공부했다. 1877년에 귀국한 후, 볼티모어 제일 장로교회에서 협동목사로 사역하기도 했으나, 다음 해인 1878년에는 웨스턴 신학교의 신약학 강의를 담당해달라는 요청을 수락하여 그 곳에서 프린스톤 신학교로 옮기기까지 9년동안 교수사역을 수행했다.
워필드의 스승은 Charles Hodge로서, 그의 스승의 아들인 Archibald A. Hodge도 프린스톤에서 조직신학자로 사역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A.A.Hodge가 프린스톤 신학형성에 있어서, 그리 중요한 위치를 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교수 재임기간이 1877년부터 1887년까지 십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C.Hodge의 진정한 후계자는 바로 B.B.Warfield인 것이다. 워필드는 조직신학을 함에 있어서, 자신의 스승인 C.Hodge의 신학에 크게 의존적인 태도를 취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또 다른 어떤 새로운 조직신학의 체계를 세우려하기 보다는 스승의 조직신학의 체계 위에서 신학을 전개하면서, 자유주의를 비롯한 당시의 수많은 도전들에 대해서 정통 기독교를 변호하는 변증학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잡지나 정기 간행물, 혹은 사전류, 그리고 특히 Presbyterian & Reformed Review (후에 Princeton Theological Review)에 기고한 논문들을 통해서 신학적 변증작업들을 수행하였다. 프린스톤의 신학적 입장에 반대하는 여러 가지 관점들과 주장들에 대해서 정통신학자의 입장에서 논쟁을 벌이고 변증을 시도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물론, 그도 많은 저술들을 남긴 것이 사실이나, 그 저술들은 어떤 하나의 종합적인 조직신학서라기 보다는, 그의 스승들이 확립한 정통신학의 전제들 위에서 전개된, 여러 가지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연구서인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우리는 완전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서를 들 수 있다. 19세기의 지평 위에서 신학을 전개했던 워필드는, 프린스톤의 신학에 도전하는 여러 경향들에 대해서 주목했는데, 특히 오벌린 학파가 채택했던 New Divinity 신학과 연관되었던 완전주의사상을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반박하는 글을 광범위하게 써내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그의 저서인 완전주의(Perfectionism)에 포함되어있다. 그 밖에도 그가 주목했던 프린스톤의 대적들 중에는 슐라이에르마허, 리츌의 신학을 비롯하여, 테일러와 부쉬넬의 신학, 그리고 성서비평, 진화론 등이 포함되었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워필드의 논의들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전체적인 조직신학의 체계적 논의들을 전개해가는 가운데, 그 일부로서 삼위일체론을 제시했던 것이 아니다. 단지, 당시의 자유주의 신학을 비롯한 다양한 현대의 도전들을 주목하면서, 정통신학의 삼위일체론을 대변하려는 입장에서 하나의 개별적인 논문을 집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쓴 “The Biblical Doctrine of the Trinity"라는 글은 자신의 조직신학서의 전체틀 속에서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한 성경사전 속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본고에서 논의의 초점은, 그 논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워필드가 자신의 삼위일체론 논의를 어떻게 전개했느냐 하는 부분이다. 그 논문을 통해서 그가 강조하려했던 특징적 요점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먼저, 워필드의 삼위일체론 논문의 구성과 그 내용들을 요약, 정리한 후, 그 논문을 통해서 워필드가 강조하려했던 주요 관심점들이 정리해보려 한다.
II. Warfield의 삼위일체론 논의의 구조와 내용
워필드의 논의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은 성경이 제시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성경의 계시적 진리임을 주장하는 내용이고, 둘째 부분은 그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계시적 진리를 말하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들을 신,구약의 본문들을 통하여 설명해준다. 그리고 끝 부분에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를 초대교부들로부터 종교개혁자 칼빈에 이르기까지 간략히 개관해주었다.
(1) 논문의 첫째 부분: 삼위일체는 성경의 계시적 진리(교리)이다.
먼저, 워필드는 성경에서 계시된 기독교 유신론이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는 “성경적” 교리이고, 또 “계시적” 교리임을 주장했다. 삼위일체 교리는 철학적 논의나 다른 종교적 가르침에서 찾아질 수 있는 진리가 아니라,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만 발견되는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논문의 첫 번째 부분이 마무리되는 곳에 이르러, 워필드는 기독교의 유신론만이 오직 안정되고 견고한 유신론이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첫째 부분의 내용들 속에서 워필드가 먼저 주장하고있는 것은, 삼위일체 교리란 “성경적 교리”라는 지적이다. 그것은 성경에서 주어진 교리이지, 어떤 철학자들의 논의들로부터 주어질 수 있는 성격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은 “삼위일체”라는 용어 자체가 성경에서 발견되는 용어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본체는 하나이나 삼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진술할 때, 우리는 성경의 어휘를 그대로 사용하여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교리가 성경적 교리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성경의 내용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성경에서 직접 나타나는 어휘들을 사용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성경의 진리를 보존하게될 때, 그것은 성경적인 교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접근될 수 밖에 없는 이유로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에서 하나의 “공식화된 정의”로서 제시되지 않았고, 오히려 “단편적인 언급들”을 통해서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The doctrine of the Trinity is given to us in Scripture, not in formulated definition, but in fragmentary allusions; when we assembled the disjecta membra into their organic unity, we are not passing from Scripture, but entering more thoroughly into the meaning of Scripture.
우리들이 그러한 성경의 단편적인 언급들을 유기적으로 연합시켜나갈 때, 워필드는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벗어나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의미 속으로 더 철저하게 들어가게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작업의 과정 속에서 철학적인 반성을 통하여 제공된 기술적인 용어들이 사용될 수도 있으나, 그 진술된 교리내용은 진정한 성경의 교리가 된다고 보았다.
계속해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의 계시적 진리라는 명제가 함축하고 있는 내용들을 더 설멸해준다: 즉, 그 교리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얻어지는 진리이므로, 인간의 자연이성이나, 어떤 다른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서 주어질 수 있는 성격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의 어떠한 추구나 노력들을 가지고서도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인간의 이성적 논구를 통해서는 성경의 삼위일체 개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워필드의 논지는 당시의 자유주의 신학이 견지하고 있는 “자연주의적 기독교”에 대한 정통신학자의 분명한 비판적 시각이 반영되고있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통개혁신학의 중요한 성격들 중의 하나를 “신본주의적 신학(theocentric theology)"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통찰력이나 종교적 경험이나 재능을 통하여서는 진리가 찾아질 수 없음을 인식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성경의 계시말씀만을 통하여 진리가 찾아질 수 있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를 단지 하나의 종교로만 간주하고, 따라서 기독교의 진리들도 단지 과학적, 경험적 연구방식을 따라 분석될 수 있고, 추구될 수 있다고 보는 자연주의적 혹은 내재주의적(immanent) 신학방법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신학연구란 단지 현상적 세계에 속한 인간의 종교적 활동에 대한 분석과 연구일 뿐이다. 정통개혁신학이 신본주의적 성격을 띄는 것은, 그들의 신학적 교리들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서부터 기초하여 세워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삼위일체 논의를 시작하면서, 워필드는 우선적으로 이러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내재주의적 경향성에 대해 주목하면서, 정통개혁신학의 입장에 서서 암묵적으로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워필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란 인간의 이성적 논의나 다른 종교적 가르침들 속에서 발견될 수 없는 진리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워필드는 이집트인들의 Osiris, Iris, Horus와 같은 존재들의 경우들과 같이 제시되는 “3개의 신격들”의 개념은 거의 모든 다신교적 종교들에서도 발견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혹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숭배되는 신들이 모여진 형태의 혼합주의적 개념이나, 힌두교의 Brahma, Vishnu, Shiva, 혹은 Homer의 신화에 나타나는 삼위일체적 개념, 불교의 Triratna, 플라톤 철학의 관념론이나 파르시교의 교리 등과 같은 여러 이방종교들 속에서 제시되는 삼위일체와 유사한 개념들이 발견되고 있으나, 그러한 것들은 성경의 계시적 가르침 속에서 제시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성격과는 어떤 유사성도 확인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It should be needless to say that none of these triads has the slightest resemblance to the Christian doctrine of the Trinity. The Christian doctrine of the Trinity embodies much more than the notion of "threeness," and beyond their "threeness" these triads have nothing in common with it.
일반 다른 종교에서 제시되는 방식처럼, 단순히 3개의 신격들이 혼합적으로 설명되는 형태의 개념만으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이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오직 성경의 계시적 가르침에서만 찾아진다는 점에서 유일성 내지는 독특성을 지니게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방향에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가 인간 이성의 통찰력에 의해서도 찾아질 수 없고 또 이성으로부터의 어떠한 증거나 자연 속에서의 어떠한 유추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없는 초월적인 진리임을 강조한다. 초월자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전 우주 속에서 유일한 존재방식이므로, 그 분의 존재방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삼위일체에 대한 이성적 증거들을 세우려했던 시도들을 몇 가지 사례로 들면서, 그 시도들의 한계점들을 지적함으로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의 유일성과 초월성의 성격을 확인해준다.
워필드는 삼위일체 개념에 대한 이성적 증거들을 제시하려 했던 과거의 시도들을 크게 2종류들로 분류한다. 즉, “자기 의식”(self-consciousness)의 개념과 "사랑(love)"의 개념 속에 함축된 의미들을 분석함으로서 입증하려했던 시도들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 두 개의 개념들은 그 개념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며, 그러한 개념을 위한 어떤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논리를 따르자면, 우리가 “자기의식”이나 “사랑”의 개념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게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통일성과 아울러 복수의 형태로서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자기의식”의 개념을 통한 삼위일체 입증의 시도는 17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Bartholomew Keckermann에 의해서 발전된 것으로 보았는데,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식적 사고라고 전제하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고는 전부터 존재해온 완전한 대상을 소유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완전한 대상은 하나님이므로, 바로 복수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게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워필드는 그와같은 시도가 범신론으로 빠질 위험성을 지니게 된다는 점, 그리고 또한 세 번째 위격인 성령님의 존재에 대한 자연스러운 설명을 제시하기 어려운 점을 지적했다.
다음으로 “사랑”의 개념을 통해 삼위일체 개념을 입증하려했던 시도를 소개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랑이신데, 그러나 그 사랑이 사랑의 대상을 갖지 않는 한 사랑일 수 없다”라고 주장했던 Valentinus의 논증, 그리고 “the lover", "the loved", 그리고 ”the love"라는 3개의 개념들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유추하려했던 어거스틴의 논증들을 워필드는 차례로 소개한다. 그러나, 워필드는 그러한 시도들은 단지 추상적인 관념 정도로서가 아니라, 좀 더 명백하고 구체적인 요소들로서 설명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결국 그러한 시도들은 단지 비유적인 언어의 남용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성적 논증들의 마지막 사례로서, 워필드는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의 본체론적 증명을 소개한다. 에드워드가 사고, 사랑, 공포와 같은 개념들 혹은 영적 개념들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고 논의를 전개했음을 지적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자신에 대해 가지시는 관념은 다시 그 자신이 된다”는 논지를 제시했음을 지적했다.
God's idea of Himself is absolutely perfect, and therefore is an express and perfect image of Him, exactly like Him in every respect... But that which is the express, perfect image of God and in every respect like Him is God, to all intents and purposes, because there is nothing wanting...."
그러나, 워필드는 이러한 시도들도 결정적인 논증이 될 수 없다고 평가한다. 개념이란 그 형태로 구성되어있는 것이 아니므로, 단지 그 형태들의 반복을 통하여 그것을 이중적이거나 삼중적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 할찌라도, 우리는 본체의 복수성을 말하게될 뿐이며, 한 본체 안에 계시는 복수적인 위격을 말하게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와같이, 워필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완벽한 관념이나, 완전한 사랑의 개념들로부터 하나님 자신을 또 만들어낼 수 있다는 방식의 시도들을 비판했는데, 결국 그것은 그 분이 그의 개념이나 자신에 대한 그의 사랑과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워필드는 삼위일체 존재에 대한 위와같은 이성적 추론들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비판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성의 긍정적인 기능까지도 간과했던 것은 아니다. 워필드는 이성의 긍정적인 역할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 교리가 단순한 추상적 단자(monad)적 개념보다 훨씬 우월한 가르침이 되고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되고, 그 교리에 대한 중요하고도 합리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 다양한 난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조명하며 또 풍요롭게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논문의 첫째 부분의 마지막에 이르러, 워필드는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그냥 단순한 추상적 단자로서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으므로,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향해 부르짖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그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만 인생의 진정한 풍요로움이 발견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바로 그 부분에서 인간의 이성과 마음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인생의 참 풍요로움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도록 역할을 하게된다는 보았다.
(2) 논문의 둘째 부분: 그러면, 성경의 계시내용은 무엇인가?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나?)
위에서 정리한 바와같이, 워필드는 논문의 앞부분에서 다른 종교의 가르침들이나 인간의 이성적 증거들을 통하여 삼위일체 개념을 제시하려는 이들의 모든 입을 틀어막은 후, -바른 접근방식으로서- 논문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계시적 증거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성경계시의 증거들에 대한 워필드의 설명들은 크게 두 부분들로 나누어볼 수 있다. 앞의 부분에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진리가 신약과 구약의 성구들 속에서 제시된 방식들을 살피는 가운데, 그것이 구속사의 계시사건들과 어떻게 밀접한 연관이 있는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둘째 부분에서는 삼위의 하나님들 사이의 관계성(성부,성자,성령 3위격들의 연합성과 구별성의 문제, 혹은 삼위 하나님 사이의 동등성과 종속적 성격에 관한 문제 등)에 대한 성경의 설명들을 제시하고 있다.
1)삼위일체 교리의 기초: 구속사 속에서 주어진 행위계시
이제 워필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거들과 신약성경의 증거들에로 향한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의 구체적인 구절들을 살펴보기 전에, 그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증거들의 성격들을 먼저 정리하고 있다. 그 두 부분의 증거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그럼에도 또 어떻게 유기적 연관성 지니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워필드는 궁극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증거란 사실상 삼위 하나님의 계시내용 즉,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 계시와 성령 하나님의 부으심(outpouring)이라는 행위 계시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뒷받침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ㄱ.구약의 증거들
먼저 워필드는 구약의 증거들의 성격을 정리해준다. 구약성경 안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증거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워필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구약 안에서 주어진 계시에 근거하여 삼위일체 교리에 도달할 자는 아무도 없음을 지적한다. 구약의 증거들은 단지 모호한 암시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복수적인 형태인 “엘로힘”과 같은 단어처럼 사용된 복수명사(창 1:26; 3:22; 사6:8)나 복수동사의 용례, 잠언 8장에서의 지혜의 개념,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언급들(출 3:2), 그리고 민 6:24-26과 같은 구약의 암시들은, 단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이미 숙지한 이들이 그와같은 모호한 암시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줌으로서, 구약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게되는 것일 뿐이라고 보았다.
단순히 구약의 특정한 본문들을 인용하는 방식 외에도, 워필드는 ‘모든 사물들의 존재와 보존에 대한 3중적 원인들’이라는 개념으로 제시되는 구약계시의 유기적 성격에 호소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즉, 시편33:6; 학개2:5,6과 같은 내용들 속에서 언급되는 “하나님”, “말씀”, “그의 영”의 역할에 대해 설명함으로서 삼위일체를 증거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워필드는 결국 구약 안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에 관한 개념의 발전 속에서, 우리는 단지 아직 오지 않은 삼위에 대한 계시를 바라보는 준비를 확인케될 뿐이라고 정리해준다. 그는 구약을 “호화스럽게 가구가 비치된, 그러나 불이 희미한 방”으로서 비유하면서, 구약증거의 성격을 정리하였다:
The Old Testament may be likened to a chamber richly furnished but dimly lighted; the introduction of light brings into it nothing which was not in it before; but it brings out into clearer view much of what is in it but was only dimly or even not at all perceived before.
구약의 증거들에 대한 워필드의 결론은 이것이다: 삼위일체의 신비가 구약에서 명백하게 계시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구약의 계시의 기초로 존재해 있었고 그러한 차원에서 여기 저기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계시는 계속되는 더 충분한 계시에서 수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성되고 확장되며 풍성해진다는 것이다.
ㄴ.구약과 신약 계시 사이의 연속성
워필드의 계속되는 논지는 구약의 계시와 신약의 계시 사이의 유기적 연관성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계시와 신약의 계시 사이에 있는 연속성이 무시되거나 간과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신약의 저자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과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개념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 사이에 어떠한 부조화도 느끼고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신약성경의 많은 증거들 속에서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약의 저자들도 분명코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경배를 잃지 않았지만, 그들은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을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으로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묘사할 때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새로운 창안적 시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갖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물론, 이 말은 삼위일체의 교리가 구약의 모든 부분들 속에서 명백히 가르쳐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 속에서 그들이 예배하고 있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확인하였으므로, 구약계시의 문맥 속에서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었고, 그들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었다. 또 그 두 하나님의 동일성에 대한 그들의 확신은 너무나 명백하므로, 그들의 마음 속에 어떠한 의구심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ㄷ.신약의 증거들
바로 그러한 신구약 계시의 연속성의 관점 속에서, 워필드는 신약의 증거들의 성격을 설명한다. 그러한 신구약 계시의 유기적 통일성은 우리가 신약성경 속에서 어떠한 새로운 개념으로 하나님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찾을 수 없는 사실에 대한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신약에서 나타날 때,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조는 이미 전체 내용들 뒤에 놓여있는 기초로서 간주되고 있으며, 이미 세워져있는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로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는 여기 저기에 산발적으로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다. 신약 전체의 핵심이 삼위일체이므로, 오히려 그것은 모든 다른 가르침들의 기본적인 전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 속에서 그 교리는 “이미 충분히 완성된 상태로서”, 그것이 발전되어진 어떠한 자취들도 남겨놓지 않았다는 Gunkel의 말을 인용하면서, 워필드는 그 교리가 신약성경에서 새로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서 제시되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전제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우리에게 이 어려운 교리가 싸움없이- 그리고 논쟁없이- 기독교의 진리들로서 수용된 다른 항목들 사이에서, 조용하고도 알아채기 어려울 만한 방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인간사상의 역사들 속에서 매우 놀라운 일이다”라고 말한 Sanday의 말을 인용한 후에, 그러나 그것은 신약성경이 어떤 교리의 발전이나 융합에 대한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워필드는 말한다. 그 교리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이미 수납된 사안이었기 때문에, 그 수납되는 과정에 대한 것은 신약성경의 배후에 놓여있다고 보았다.
ㄹ.구속사 속에서 주어진 “행위 계시”에 기초한 교리로서의 삼위일체
워필드는 이어서, 신약성경의 배후에 놓여있다고 보았던 바로 그 ‘삼위일체가 수납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왜 구약성경 안에 좀 더 충분하고 명백한 증거들이 부족했는가에 대한 이유에 대한 답도 발견할 수 있고, 또 신약성경이 왜 그 교리를 이미 수납된 교리로서 간주했으며, 가르치는 방식이 아닌, 단지 암시적인 방식으로만 제시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게된다.
삼위일체 교리란 “성경적 교리”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신약과 구약의 내용들 속에서는 그 교리가 반영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그 교리가 수납되는 과정에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행위계시에 기초하여 수납된 것으로 봐야한다고 워필드는 주장한다:
The Old Testament was written before its revelation; the New Testament after it. The revelation itself was made not in word but in deed. It was made in the incarnation of God the Son, and the outpouring of God the Holy Spirit. The relation of the two Testaments to this revelation is in the one case that of preparation for it, and in the other that of product of it. The revelation itself is embodied just in Christ and the Holy Spirit.
이러한 의미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계시적”교리인 것이다. 그 진리는 인간의 고안이나 다른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서 수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령님의 오심의 “행위계시”로 말미암아 드러나고 수납된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성령이 바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근본적인 증거가 된다고 워필드는 설명한다.
여기에서 워필드는 또한 삼위일체 교리가 “구원론적” 진리가 됨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교리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령의 강림에 기초한 교리이라면, 그것은 곧 삼위일체 계시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구원의 성취를 위해 주어졌던 행위계시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교리는 인류의 죄의 문제를 감당하시기 위해서 이 땅 위에 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 속에서, 그리고 세상에 죄와 의와 심판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성령님의 강림 사건 속에서 이해되는 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하나님을 바로 만나고 이해하고 믿는 자들은 그 분을 삼위일체 존재방식 이외의 모습으로 생각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Those who knew God the Father, who loved them and gave His own Son to die for them; and the Lord Jesus Christ, who loved them and delivered Himself up an offering and sacrifice for them; and the Spirit of Grace, who loved them and dwelt within them a power not themselves, making for righteousness, knew the Triune God and could not think or speak of God otherwise than as triune.
결국, 삼위일체 교리란 구속역사의 과정 속에서 자신을 충분히 계시하신 하나님의 “행위계시”를 통하여,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좀 더 확장되고, 완성된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적인 기초를 바로 이해하게될 때, 우리는 삼위일체에 대한 구약의 계시와 신약의 계시의 성격들에 대한 몇 가지의 의문점들을 해결하게 된다.
첫째 의문점은 왜 구약성경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좀 더 명백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는가? 에 대한 문제이다. 워필드는 먼저 Nazianzus의 그레고리 시대로부터 구약계시의 임무란 하나님의 유일성(unity)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 확고히 세우는 일이었다고 설명해왔음을 지적한다. 그 임무가 충실하게 성취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신격의 유일성 안에 존재하는 복수성을 말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워필드는 그의 논지를 따라, 구약에서 삼위일체의 계시가 지연되었던, 좀 더 실제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해준다:
the times were not ripe for the revelation of the Trinity in the unity of the Godhead until the fulness of the time had come for God to send forth His Son unto redemption, and His Spirit unto sanctification.
하나님 안의 복수성에 대한 구약의 계시가 지연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경륜 속에서 예수님의 성육신과 성령님의 강림의 때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약의 말씀의 계시가 그 충분한 설명을 더하기 위해서는 그와같은 행위의 계시를 기다렸어야 했던 것이다. 구속역사 속에서의 구체적인 행위계시에 대한 이해없이, 하나님 안에 계시는 삼위에 대한 단순한 추상적인 진리진술은 적합하지 않었기 때문이다.
신약의 계시와 관련된 또 다른 의문점도 그러한 “행위계시”의 사실과 연결되어 설명될 수 있다. 그 의문점이란, 왜 신약성경에서는 삼위일체 교리가 가르치는 표현으로가 아인, 단지 암시적인 형식으로 제시되는가? 공식적으로 가르쳐주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우연히 제시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가?와 같은 물음이다. 그것은 구속역사 속에서 주어진 행위계시의 사실들이 이미 모든 기독교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라고 워필드는 설명한다. 기독교인들에게 그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들이었으므로, 서로에게 어떤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진리를 다시 상기시키며 확인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워필드가 자신의 논문의 둘째부분의 전반부에서 주장한 내용의 요점은, 삼위일체 교리의 근원적인 증거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혀주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삼위일체 교리란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성육신과 성령님의 강림의 행위계시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교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신약성경의 전 내용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증거해주는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그 안에는 성령의 신적인 인격과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증거들로 가득 채워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삼위일체 교리를 위한 어떤 새로운 진리 체계를 세우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은 이미 확인된 계시적 진리임을 전제하고 있을 뿐이다.
2) 삼위일체 교리의 내용: 3위간의 상호관계성
논문의 둘째부분의 후반부에서, 워필드는 논의의 초점을 성경에서 제시되는 삼위 하나님 사이의 상호관계성에 관한 주제로 맞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성과 구별성, 그리고 동등성과 종속의 성격에 관한 주제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 논의한다.
신약성경도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모든 곳에서 또한 하나님으로서의 성령, 하나님으로서의 성자, 그리고 하나님으로서의 성부를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삼위는 구별된 인격들로서 셋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워필드는 삼위 간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요구되는 3가지의 기본적인 원리들을 소개해준다:
...... the principle which has ever determined the result has always been determination to do justice in conceiving the relations of God the Father, God the Son, and God the Spirit, on the one hand to the unity of God, and, on the other, to the true Deity of the Son and Spirit and their distinct personalities.
즉,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가 지니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원리들이란, 오직 하나인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아들과 성령의 참된 신성, 그리고 그 삼위간의 구별된 위격성의 원리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본적인 원리들을 신약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통해서 확인해준다. 특히 워필드는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 속에서의 증거들을 제시해주는데, 예를들면, 주님의 수태고지 사건이나(눅1:35; 마1:18), 예수님의 세례장면(마 3:16-17; 막1:10-11 등)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가르침들 속에서의 증거들로 나아간다.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들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구별되었다는 의식 속에서 아들로서, 그러면서도 또한 자신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하나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음을 지적한다. 그런데, 그와같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하나됨과 구별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워필드가 핵심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본문들이다.
워필드는 요한복음 10:30, 38 등과같은 본문들 속에서 발견되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의 하나됨의 증거들을 언급한다. 또한 요 8:58과 같이 성자의 영원성을 제시하는 구절들을 통하여, 성부와 성자의 연합성에 대한 요한복음의 증거들을 요약해준다. 그러나, 워필드는 이러한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성은 거기에서 멈추지않고, 성령님과의 관계성에까지도 확장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요한복음 14:16-26의 본문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은 삼위 하나님 사이의 구별성과 하나됨에 대한 요한서신의 가르침을 요약해준다:
...... But the Advocate,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He shall teach you all things, and bring to your remembrance all that I said unto you.'(본문 속의 강조는 워필드의 강조임) It would be impossible to speak more distinctly of three who were yet one. The Father, Son, and Spirit are constantly distinguished from one another- the Son makes request of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response to this request gives an Advocate, "another" than the Son, who is sent in the Son's name. And yet the oneness of these three is so kept in sight that the coming of this "another Advocate" is spoken of without embarrassment as the coming of the Son Himself (vs.18,19,20,21), and indeed as the coming of the Father and the Son (ver.23).
워필드가 설명하는 삼위 간의 구별성과 하나됨의 원리는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떠나시고, 그 대신 성령님이 오신다고 말할 수 있는 차원이(구별성) 있으나, 동시에 성령님이 오실 때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라고 말할 수도 있으며, 또 그리스도의 오심 속에서 성부께서 오신다고 말할 수 있는 차원이(하나됨)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위격들 사이의 구별성이 인정되면서도, 동시에 그들 사이의 연합성이 존재하는, 다시 말하면 그 양자의 양립을 위한 여지가 삼위일체 교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성경의 계시적 증거는 하나님의 유일성(Unity)과 3위간의 위격적 구별성을 함께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을 때에, 우리는 구별된 인격들로 활동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더 깊은 근원적인 의미에서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세 위격들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만나게된다는 것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성부로부터 보냄을 받은 성자도 하나님이시며, 성자로부터 보냄을 받은 성령도 하나님이신 것이다.
다음으로 삼위 간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워필드의 또 다른 관심있는 주제는, 그들의 동등성과 종속적 성격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앞 부분에서의 워필드의 강조는 성부 만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도 참되신 하나님으로서 인정하되, 그 삼위간의 하나됨과 위격적 구별성을 함께 제시하려함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이 두 번째의 논의의 초점은 “종속론”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서 성자 예수님을 “아들”로 명명함에 있어서, 우리가 “존재의 파생이나 종속”에 대한 암시를 받게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워필드는 성경의 어법을 주의해야한다고 하면서, “독생하신 하나님”(요1:18)과 같은 구절이 결코 파생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고, 오히려 요5:18절과 같은 구절을 통하여 동등성이 확보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령”이나 “여호와의 영”이라는 이름들도 파생이나 종속의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정체성을 나타내줄 뿐이라고 설명한다. 고전2:10-11에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 자신에 관한 지식의 원리임을 말하고 있으며, 곧 그는 하나님의 존재의 가장 깊숙한 본질인 하나님 자신임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워필드는 신약성경에서 성자나 성령의 종속 혹은 파생의 의미를 제시하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결론내린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의 방식(modes of operation)”에 있어서, 즉 구속역사의 과정 속에서 삼위의 하나님 각각에게 부여된 기능들을 수행함에 있어서, 종속의 원리가 표현되고 있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The Father is first, the Son is second, and the Spirit is third, in the operations of God as revealed to us in general, and very especially in those operations by which redemption is accomplished.
워필드는 여기에서 삼위의 하나님 사이의 의논이였던, “(구속)언약”의 개념을 도입한다. 구속역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삼위 하나님의 역사의 방식에 있어서의 종속의 성격으로서, 즉 성부에 대한 성자의 종속, 성자에 대한 성령의 종속이란, 삼위 사이의 언약적 논의를 기초로 하여 주어진 것이고, 따라서 삼위의 하나님 각자가 자발적으로 취해진 성격의 종속으로 이해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워필드는 성경에서 제시되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용어의 사용례들이 구속역사 속에서의 “경륜적(economical)" 관계 속에서 이해되는 것만 가능할 뿐 아니라, 그러한 용어들은 또한 영원하고 필연적 관계성에도 적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이 결코 성부와 성자가 그 존재방식에 있어서 첫째와 둘째라든지, 혹은 우월과 종속과 같은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워필드의 결론은 신약의 어떠한 성구를 가지고서도, 우리는 성자나 성령의 종속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논문의 마지막 부분: 구원교리와 맞물려있는 삼위일체론
워필드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자신의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그 교리가 성경의 구원교리와 밀접히 연관되어있음을 지적해준다. 먼저, 삼위일체교리는 성경의 구원역사를 경험한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경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준다는 점을 지적한다. 구원역사의 과정 속에서 삼위의 하나님은 3중적인 신적 원인들로서 계시되었기 때문에, 그 구원을 경험한 모든 신자들의 의식 속에서 그 3위 하나님에 대한 반향이 자연스럽게 울려나게 된다는 것이다:
Every redeemed soul, knowing himself reconciled with God through His Son, and quickened into newness of life by His Spirit, turns alike to Father, Son, and Spirit with the exclamation of reverent gratitude upon his lips, "My Lord and my God!"
역으로 말한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가 없다면, 신자는 자신의 영적 구원의 삶에 대하여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고, 무질서한 모습으로 남게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의 마음은 창조주 하나님, 구속사역을 이루신 예수님, 그리고 그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의 삼위일체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안정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와같은 차원에서, 워필드는 F.E.Koenig의 글을 인용하면서, 삼위일체교리와 구원의 교리는 역사적으로 함께 서고 넘어진다고 주장한다. 그 점이 바로, 왜 기독교회가 역사적으로 분명하고 완숙한 삼위일체 교리에 도달하기까지 안식할 수 없었는가에 대한 답변이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차원에서 그는 자신의 논문의 나머지 부분에서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개관해주었다.
우선 대표적인 사례로서, 유니테리안 신학을 들면서, 그들의 신학적 (일신교적) 오류는 그것이 펠라기안주의 인간론과 소시니안 구원론과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밖에도 역사상에 나타난 여러 이단들을 지적해준다. 예를들면, 사벨리안주의나 아리안주의의 오류도 그것들이 신자의 구원경험의 내용들에 대해서나, 그리고 성경계시의 내용에 대해서도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같은 타협되거나 왜곡된 설명들이 나타날 때마다, 신자의 의식은 필연적으로 성경의 계시내용들을 다시 검토하게 되었고, 완숙한 삼위일체교리가 제시될 때까지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워필드는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된 삼위일체론 논의들, 즉 로고스 기독론이나 양태론적 군주론(Monarchianism)과 같은 오류들에 대한 정통신학자들의 반응들, 즉 터툴리안, 아다나시우스, 어거스틴, 그리고 종교개혁자 칼빈의 신학적 시도들에 대해서 간략히 개관해준다. 그러나, 워필드의 관심은 단지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를 연구하려함에 있다기 보다는, 그러한 신학적 시도들 속에서 기독교회와 신자들은 그 교리가 성경의 계시내용의 자료들과 자신들의 구원경험에 충실한 내용으로 세워지도록 노력함으로서, 완숙한 삼위일체교리에 이르려 하였었다는 사실을 말하려한 것이다.
III. 결론: Warfield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주된 강조점)들
서론에서도 지적했었듯이, 워필드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의는 자신의 포괄적인 조직신학서의 체계적 논의들 속에서 그 일부로서 제시되는 교리적 진술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스승 C.Hodge의 조직신학서를 전체적인 조직신학의 틀로서 전제하고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논문에서 워필드는 기존의 삼위일체론 논의들을 모두 반복하려하지 않았다.(물론, 그 교리의 중심적인 내용들이 중복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그렇다면, 자신의 논문에서 그가 주로 주장하려 하였던 특징적인 강조점들은 무엇인가? 다음과 같이 몇 가지의 내용들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강조점은 그의 논문의 첫 번째 부분에서 주장되었던 내용으로서,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의 계시적 진리임을 강조한 사실에서 찾아진다. 그러한 강조를 통해서, 변증학자였던 워필드는 당시의 자유주의의 내재적 신학에 대한 정통개혁신학의 비판과 변증을 시도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삼위일체 교리의 내용은 어떤 철학자들의 논의나 다른 종교적 가르침과 같이, 인간의 자연이성에 의해서 도달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초월적인 계시말씀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와같은 강조점은 곧 그의 논문의 두 번째 주된 강조점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워필드가 삼위일체론을 구원론과 직결된 교리임을 강조한 사실을 가리킨다. 그 점은 그의 논문의 두 번째 부분 중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구속역사 속에서 주어진 ‘행위계시’에 기초한 교리”임을 말하는 대목에서 그 점을 제시하였다. 삼위일체 교리가 인간의 고안이나 다른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령의 강림이라는 “행위계시”에 기초하여 주어진 진리이라면, 그 계시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의 성취를 위해 주어졌던 행위계시의 필연적인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란 구속역사의 과정 속에서 인류의 구원사역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더욱 온전히 계시하신 하나님의 “행위계시”를 통하여 제시된 교리이므로, 그것은 신자로 하여금 구원의 하나님을 바로 만나며 자신의 구원 경험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교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지적은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다시 반복된다. 신자의 구원경험 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3중적인 원인들로서 역사하시고 계시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신자가 자신의 구원경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하는 틀을 제공해준다고 지적했다.
이와같은 워필드의 강조점들은 결국 삼위일체 교리를 더욱 실천적인 교리로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준다. 즉, 삼위일체 교리란 신학자들이 단지 책상 위에서의 이론적인 토의 만으로 제시되는 어떤 사변적인 가르침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신자의 삶과 구원경험과 밀접히 연결되는 “구원적” 진리임을 드러내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워필드가 자신의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삼위일체 교리와 구원의 교리는 함께 서고 넘어진다”라고 말했던 것은, 교회사적으로도 삼위일체 교리가 완숙한 표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회가 안정할 수 없었다는 의미에서도 이해될 수 있으나, 좀 더 근본적으로 그것은 신자 개인의 영적 경험의 차원에서 적용될 수 있는 지적인 것이다. 구원의 경험을 소유한 신자의 마음은 창조주 하나님, 구속사역을 이루신 예수님, 그리고 그러한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을 말해주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 안에서 안식을 얻게되기 까지는 혼돈에 빠지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바로 이해하며, 신자의 구원경험을 바로 해석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교리임을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소위 “본체론적 삼위일체(ontological trinity)"와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al trinity)"에 관한 워필드의 관점을 지적해볼 수 있겠다. 물론, 워필드가 그러한 용어들을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나, 그의 설명들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개념들이 어느 정도는 표출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예를들어, 경륜적 삼위일체의 개념은 삼위일체 교리가 계시적 진리임을 말하는 대목에서, 그 교리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령님의 강림하심이라는 “행위계시”로 말미암아 드러나고 수납된 교리임을 말할 때, 이미 표출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개념은, 삼위 하나님 사이의 상호관계성에 대해 설명하는 문맥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용어사용이 구속역사의 경륜적 관계 속에서만 이해가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영원하고 필연적인 관계성 속에서도 적용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가 바로 “본체론적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을 견지하고있음을 보게된다.
물론 워필드는 이 주제에 대한 현대적인 논의의 상황이 전개되기 전에 논문을 정리하였으므로, 그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진술을 하고있지는 않다. 그러나, 논문의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분석해볼 때, 논문의 앞부분에서는 구속의 과정 속에서 주어진 예수님의 성육신, 성령님의 강림과 같은 행위계시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주어졌음을 지적하였고(경륜적 삼위일체), 다음으로 3위간의 상호관계성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들 속에서 성경본문들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삼위간의 영원한 하나됨이나 동등성을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본체론적 삼위일체) 이 주제에 대한 논의가 워필드의 논문 속에서는 그렇게 충분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필드의 관점은 -그리고 그의 논문들 속의 어떠한 내용들도- 적어도 현대의 논의들 중에서 본체론적 삼위일체 자체를 거부하거나, 혹은 그것이 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입장들을 거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출처 :자기부인 글쓴이 :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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