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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2)

에반젤(복음) 2020. 2. 21. 12:31



삼위일체와 각 위격과 일치



아버지가 삼위일체가 아니고 아들이 삼위일체가 아니며 양자의 선물인 성령도 삼위일체가 아니다. 아버지가 선하시고 아들이 산하며 성령이 선하시다. 또 아버지 아들 성령이 전능하시다. 그러나 세 하나님이라거나 세 선이나 세전능자가 아니라 한 하나님 한 선 한 전능자 곧 삼위일체 자체이시다 이것은 본질에 따라 말해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과 위대하심 선하심 지혜로우심 등은 각 위격에 대해서나 삼위일체 자체에 대해서 곧 그들 자신에ㅡ대해서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 인격들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본질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셋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떤 한 말로 답할 수 있기 위해서 그러하다. 삼위일체 내에는 그런 큰 동등성이 있으므로 신성에 관하여는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성령보다 크지 않으며 각 개별 위격도 삼위일체 자체보다 작지 않다.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만큼 크시다. 왜냐하면 둘은 참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또 삼위일체 자체도 각 위격만큼 크시다 진리의 본질에 관해서는 참인 것은 존재하는 것과 동일하고 존재하는 것은 위대한 것과 동일하다 (de trn.vlll,1, 2).



성령=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하나님의 말씀 즉 성부의 독생자는 성부와 모든 면에서 같으며 동등하시다. 성자가 아시는 모든 것을 아시나 성부에게서 아는 것과 존재가 하나이기에 성자의 지식은 그 존재와 같이 성부에게서 온다. 따라서 성부는 성자를 반포하듯이 모든 점에서 자기와 동등한 성자를 낳으셨다 (de trin. xv,14,23). 성경에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시다. 그래서 둘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세 위격에 공히 타당하다. 그러나 성령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de trin. xv, 17, 27, 28, 29). 성경에서는 성령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부른다. 삼위일체 내에서 성령만이 사랑이신 것은 아니지만 특히 성령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함, 양자에게 공통된 분으로 사랑으로 불리움이 당연하다 (de trin. xv, 18, 19).



삼위일체의 유비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를 하나님 내의 관계에서 피조세계에 나타난 유비들에서 찾고 확인한다. 왜냐하면 삼위 하나님에 의해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되었으므로 그 유사성이 그들에게 나타나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유비들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그리고 그둘을 묶는 사랑에서 본다 (de trin, v111, 10, 14, 1x,2,2). 또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도 일종의 삼위일체가 있다고 본다. 마음이 자기를 사랑할 때는 두 가지가 있다. 마음과 마음 사랑이다. 또 마음이 자기 자신을 알 때에도 마음과 그 지식이 있다. 마음과 마음 사랑과 그 지식 세 가지가 (tria quaedam) 있는데 이 세가지는 하나이고 그것들이 완전할 때는 동등하다 (de trin. 1x, 4, 4). 이 세가지 곧 마음 사랑 지식은 일종의 삼위일체이다. 그들은 각자가 그들 자체 안에서와 상호적으로 모든 것이다. 또 각 둘은 다 하나 안에 있다. 그러므로 모두는 모두 안에 있다 마음은 그 자체 안에 있다. 그러나 지식에 대해 마음을 알고 알려지고 알려질 수있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동일한데 서로 분리불가하고 각각 실체이다. 그리고 모두는 한 실체이고 상호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서술된다 (de trin. 1x, 5, 8).



인간은 어느 한 위격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삼위일체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삼위일체의 형상을 지닌다. 마음은 내면적인 기억력으로 자체을 회상하면 더 내면적인 이해력으로 자체를 이해하며 더 내면적인 의지력으로 자체를 사랑하다. 그리고 이 셋은 그 곳에 항상 함께 있으며 있기 시작한 때부터 항상 함께 있었다. 삼위일체의 형상은 기억력과 지성과 의지라는 셋에서 보아야한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본성과 같지 않지만 모든 본성보다 탁월한 하나님의 본성의 형상은 우리 마음에서 찾아서 발견해야 한다. 우리 마음에서 가장 순수한 것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비록 부패하였어도 하나님께 참여하며 하나님을 받아드릴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런데 마음은 자체를 기억하며 이해하며 사랑한다. 이 점을 안다면 하나의 삼위일체를 아는 것이다 (de trin. x1v, 7, 10).

아버지와 아들과 관계는 기억과 이해의 관계와 비교된다. 성령은 사랑이시다 (de trin. xv, 21).



아우구스티누스의 공헌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을 개진하여 그의 신학이 공회의의 결정에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아다나시우스 신경에 표현되므로 서방교회의 신학의 기본이 되었다. 섭리적 삼위일체론 이후 계속되어온 종속주의의 색채가 완전히 제거되었다 삼위일체의 각 위격이 각각 자기에 대해 동등하다고 확정하므로 삼위격은 동등 완전한 하나님으로 고백되게 되었다.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와 아들에게서로 확립하므로 서방교회의 기본 자산이 되어 381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의 결정을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보다는 본질을 선호하고 강조하므로 하나님의 본성을 추상적으로 생각하게 하여 세 위격에 강조에 놓이게 하여 삼위일체가 한 하나님이요 한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강조에도 불구하고 한 실체보다는 위격들을 독립적으로 생각하도록 하였다 또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와 아들에게서로 확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출래에 대한 대한설명은 제시하지 못하였다



아다나시우스 신경



아다나시우스 신경은 이름은 정통신앙의 수호자이고 대변인이므로 이 이름으로 신경이 적성되었어도 그 신학은 아우그스티누스의 신학을 재생산하였다. 따라서 개신교회는 이 신경을 정당한 신경으로 받되 루터교회은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서 (confessio Augustana).에 이 신경을 표준 신경으로 지목하였다. 이 신경으로 삼위일체교리가 그 마지막 귀결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는 것으로 확정하였다.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면 모든일에 앞서서 카토릭 신앙을 지켜야 한다. 누구든지 이 신앙을 견실하고 범할 수 없는 것으로 보존하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에 이를 것이다.



카토릭 신앙은 이것이다



삼위일체 내에 한 하나님을 하나안에 삼위일체를 우리는 경배한다.

위격들을 혼동하지 않으며 실체를 분리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위격이 다르며 아들의 위격이 다르고 성령의 위격이 다르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고 동일 영광과 동등 영원한 엄위이시다.

아버지만큼 아들이시고 또 그만큼 성령이시다.

비창조되신 아버지 또 비창조되신 아들 그리고 비창조되신 성령.

거대하신 아버지 거대하신 아들 거대히신 성령.

영원하신 아버지 영원하신 아들 그리고 영원하신 성령.

그러나 세 영원자가 아니고 한 영원자이시다.

세 비창조자가 아니고 세거대자가 아닌 것처럼 하나의 거대자이시고 하나의 비창조자이시고 하나의 거대자이시다.

전능하신 아버지 전능하신 아들 전능하신 성령.

세 전능자가 아니고 하나의 전능자이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세 하나님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

주 아버지 주 아들 주 성령 세 주들이 아니고 한 주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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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아무에게서도 만들어지지도 않으시며 창조되지도 않으시며 나지도 않으신다.

아들은 오직 아버지에게서 나오시고 만들어지지 않으시고 창조되지 않으시고 출생되신 것이 아니고 나오시다.

한 아버지이시고 세 아버지가 아니시다 한 아들이고 세 아들이 아니다 한 성령이시고 세 성령이 아니시다.

삼위일체에는 전후나 대소가 없고 세 전 위격들이 자신들에 대해 동등 영원하시고 동등하시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삼위일체 안에 하나를 하나 안에 삼위일체를 경배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이처럼 삼위일체를 께달아야 한다.

이처럼 삼위일체 교리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친대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또 성령의 출래를 아버지와 아들에게 서로 확정하므로 더 이상 동방교회를 의식하고 괄 호안에 아들에게서도를 넣을 주저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기독론의 교리를 칼세톤 신경을 따라 작성하므로 삼위일체 교리와 교독론의 교리를 기독론의 근본 신경의로 삼았다.




****초대교회사 교회사 교리사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탐독하면 위에 1편에서 6편까지 탐독하여 누구나 알 수 있다



[출처]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작성자 하나님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