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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에반젤(복음) 2020. 2. 21. 11:33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Ⅰ. 칼 바르트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의 위치
칼 바르트는 1932년 그의 [교회교의학] 제1권에서 삼위일체론을 다루고 있는데, 그의 방대한 교회교의학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이 제1권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의 내용은 교의학의 체계에 있어서 외형적으로 한 특별한 위치를 가질뿐만 아니라 "전체 교의학에 대하여 결정적이고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교의학은 인식의 원리로서 성서로부터 시작하였다. 바르트의 견해에 의하면 기독교의 출발점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다음의 질문들을 제기한다. : 1)자기를 계시하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2)이 하나님은 무엇을 행하시는가? 3)이 하나님은 무엇을 일으키시는가?. 계시에 관한 이러한 질문들은 필연적으로 삼위일체론의 문제를 야기한다. 그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와 계시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통하여 자기를 계시하기 때문이다. 즉 "계시하는 하나님 그리고 계시의 사건 그리고 인간에 있어서 이 사건의 작용"은 하나이다. "파괴될 수 없는 단일성 가운데에서 계시자, 계시, 계시의 능력"이신 하나님은 "또한 그 자신 속에서 파괴될 수 없는 상이성을 가지고 이 세 가지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다.
"파괴될 수 없는 단일성'과 '파괴될 수 없는 상이성" 가운데에서 계시자, 계시, 계시의 능력, 이 세 가지 존재방식을 가지는 하나님,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야말로 기독교의 신론과 계시의 개념을 다른 신론들과 계시의 개념으로부터 구분하고 그의 기독교성을 보장한다.

Ⅱ. 삼위일체론의 기초


삼위일체론의 기초, 그 뿌리는 바르트에 있어서 한 마디로 말하여 "계시"에 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주로서 계시한다" 이 명제가 삼위일체론의 뿌리이다. 달리 마하여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출발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계시의 사건은 하나의 주체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아버지, 아들, 성령의 삼위에 의하여 이루어진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시의 사건으로부터 삼위일체론이 형성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바르트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은 "계시의 해석"이요, 게시는 "삼위일체론의 근거"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단지 '계시의 해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자기를 계시하는 하나님의 해석"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계시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동"의 문제, 곧 삼위일체의 두 번째 인격인 아들의 문제, 그리스도의 신성의 문제였으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아버지와 성령의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에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계시의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첫째, 성서에 있어서 계시는 그의 본질상 인간에게 드러내어질 수 없는 하나님이 인간에 그 자신을 드러냄을 뜻한다. 둘째,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의 계시된 본질 안에서", "드러날 수 없다". 셋째, 계시는 언제나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며 '구체적 인간들에 대한 구체적 관계'이다.

Ⅲ.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1. 삼위의 일체성
삼위의 일체성은 삼신론을 방지하고 '하나님의 일체성에 대한 인식과 일신론"을 지키는데 있다. 하나님이 삼위로 존재한다고 하여 하나님의 일체성 내지 하나됨이 폐기되고 세 가지 신성이 있다고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말하여 삼위의 일체성의 의도는 "기독교의 일신론"을 지키는데 있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여기에서 그는 삼위에 대하여 "인격"이란 개념 대신 "반복"이란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세 인격들"의 본질의 수적인 일체성의 진리를 강조하는데 그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2. 일체의 삼위성
동시에 바르트는 일체의 삼위성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의 일체성은 물론 삼위성'도 강조하고자 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의 일체성, 곧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이 개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하나의 구분, 하나의 질서를 포함한다. 이 구분 내지 질서는 세 '인격들'의 구분 내지 질서이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인격"이란 개념 대신에 "존재양식"이란 표현을 채택한다. 그리하여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은 "세 가지 존재양식"을 가진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가지 존재양식 안에서 한 분이다는 명제는 단 한 분이신 하나님, 즉 단 하나의 주, 단 하나의 인격적 하나님은 ..... 아버지의 양식으로, 아들의 양식으로, 성령의 양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 가지 존재양식은 "하나님의 서로 다른 고유한 존재양식"이다. 그리고 바르트는 세 존재양식이 가진 상이성 내지 고유성을 "형식적 고유성", 다시 말하여 "그들 상호간의 관계를 통하여 주어져 있는" 고유성이라고 부른다.


3. 삼위일체와 그 의미
삼위일체란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삼위에 있어서의 일체성과 일체에 있어서의 삼위성"을 종합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이다. 이 삼위일체라는 개념은 먼저 "아버지, 아들, 성령 상호간의 일치성"을 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삼위의 세 가지 근원적 관계는 역시 "분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각 존재 양식의 다른 존재 양식들에의 한 특수한 참여"를 뜻한다.
아버지, 아들, 성령 상호간의 일치성은 "밖을 향한 그들의 일치성", 즉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활동에 있어서의 일치성과 상응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본질과 활동은두 가지의 것이 아니라 하나이다. 계시자-계시-계시의 능력, 창조자-화해자-구원자이신 하나님의 본질이 곧 하나님의 활동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활동이 곧 그의 본질이요 그의 본질은 곧 그의 활동이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론은 아들과 성령이 아버지의 아래 잇다는 종속론을 거부하고, 아들은 하나님이 나타나는 양식에 불과하다는 양태론을 거부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아들은 아버지가 현상하는 단순한 양태가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신적 존재이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의 존재양식이며 하나님은 오직 이 존재양식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이 세 요소 너머에 있는 어떤 보다 더 높은 존재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 된다.

Ⅳ. 바르트의 신관
바르트의 신관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관을 다시 찾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삼위일체 신관은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이 대화할 수 있는 접촉점을 찾았다고 볼 수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현실성을 무시하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사변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전제를 무시하고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문제도 철학적인 공론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바르트의 신관은 유대교나 모하메트에서와 같은 유일신론과는 구별된다. 또 일반 철학적인 수로 본 '일신론'과도 구별된다. 또 그는 삼위일체신론을 '삼신론'으로 떨어뜨리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극단의 '유일신론'과 극단의 '삼신론'을 억제하고 여기에다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관'을 전개시키려는 것이 바르트의 복안인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관은 결코 바르트의 '그리스도교 유일신론'에 지장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리스도교 유일신관을 '인격적'으로 터닦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객관적으로 해석해 놓은 것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성서에 제시된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 관념이나 절대자 혹은 실체가 아니요, 철두철미하게 '주님'으로 나타나신다. 바르트는 이 '주님' 사상이 그의 삼위일체 교리의 근본 바탕이 된다고 말하였다. 이 '주님' 사상은 계시론적 입장에서 볼 때에도 다시금 삼위일체적인 기능으로 각기 구획되게 됨은 물론이다. 즉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계시자'로서, 아들은 '계시' 자체가 되시는 분으로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은 '게시답게 하시는 분으로 각기의 기능이 분배된다.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은 그러므로 결코 '비인격적인 지
배' 즉 '세력' 또는 '능력'이 아니고, '인격'으로서, 즉 '주님'으로서, 다시 말하면 '절대정신'이 아니고, '인격' 혹은 '사람'으로 이해하지 아니하면 안되게 된다. 따라서 삼위일체 되신 주 하나님은 결코 중성적이며 비인격적인 어떠한 세력이 아니고, 철두철미하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되시는 인격적인 '그 분' 즉 라틴어로 'alius-alius-alius'(he-he-he)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은 그 각기의 위격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입장을 바르트는 고수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 있어서 '성령'도 '중성'이 아니요,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남성'으로 간주된다.

바르트는 삼위일체 신론을 토대로 하여 그의 신학적 '삼분법'을 조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창조'를 맡아 다스리시는 '창조주'가 되시고, '아들'되시는 하나님은 '속죄'를 맡아 다스리시는 속죄주가 되고 마지막으로 '성령'되시는 하나님은 '구원'을 맡아 다스리시는 구원주가 되신다. 성령이 구원주가 된다는 사상은 아마 전에 찾아보기 어려웠던 사상의 하나라고 생각하며 이것은 바르트 신학의 치밀한 조직력에서 비로소 찾아내진 것이라고 말해서 좋을 것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이채 있는 특징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러한 삼분법이 인간에게 적용될 때에도 세 가지 특징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바르트는 그의 그리스도론에서 '칭의' '성화' '약속'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시켜 놓았다. 그리고 여기에 각기 해당하는 인간 쪽에선 세 가지 특이성을 도출해 놓고 있다. 즉 '칭의'에 대비되는 인간 쪽의 반응은 믿음이고, 성화에 대비되는 인간의 의무는 '사랑'이며, 마지막으로 '약속'에 대비되는 인간쪽의 태도는 '소망'인 것이다.
우리는 바르트의 '교의학'이 삼위일체론을 기반으로 하고 전개시킨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르트의 내심으로는 '칭의'에서 출발시켜도 좋고 '성화'에서 출발시켜도 좋고 또 '약속'에서 출발해도 동일한 결론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복음주의 신학'이라는 책에서는 전연 다른 각도에서 즉 믿음, 사랑, 소망이라는 각도에서 자기의 교의학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의 '상호관련성'(Perichoresis)과 '상호 개별성'(Ap

propriation)을 동시에 성립시켰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소위 '삼중성 가운데서이 통일성'과 '통일성 가운데서의 삼중성'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만물의 창조자로서 만물과 구별되고 성별되는 점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초월성'을 찾아볼 수 있으며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의 간격을 메꾸시려 이 세상에 오신 속죄자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역사적 객관성'을 찾아볼 수 있으며 따라서 마지막으로 성령은 하나님의 역사가 현재뿐만 아니라 장래까지도 우리들의 마음에 오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내재성'이 여기서 입증되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내재성'을 신비주의와 구별시키기 위하여 바르트는 바울의 서신들을 인용하면서 '구원'은 신약성서에 있어서는 게시나, 속죄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직 오지 않은'(noch ausstehehende)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과거로부터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모양의 실례들을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이라고 말해서 바르트는 일괄적으로 평가하여 놓았다. 이것은 많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적인 삼분법을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러한 설명은 물론 설명으로서는 좋으나 그러나 삼위일체신 자체는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하고 앞서 이미 말한 바 있는 '계시', '성서' 그리고 '전도' 이 세 가지가 'vestigium' 자체라고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론은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바르트가 강조하고 있는 중요한 점이며 동시에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 자체로서 완전하신 하나님 모습이라느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직접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요, 이 역사는 다시금 하나님의 세 '존재양식'에 해당되고 대비되는 인간 쪽에서의 반응양식과 교호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현실성은 입증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Ⅴ. 계시된 하나님
바르트가 보는 하나님 관념은 아주 엄밀하게 성서적인 특색을 살려주고 있다. 바르트는 막연한 공상적인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철두철미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초월한 어떠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이 세상 가운데서 행동을 취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바르트는 구체적으로 성경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해 주고 있는데,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보편적인 그리고 막연한 중성적인 초월자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기의 자유스러운 뜻에 의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빼내어 다른 민족으로부터 성별시키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비단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빼내심으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실현되던 구원의 역사를 실현시켰을 뿐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살게 하며 이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역사를 감행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즉 바르트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인식 근거'라는 바르트의 입장이 그의 교의학의 지배적인 주류임을 알 수 있다.
바르트에 있어서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사람'임을 강조한다. 여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심'도 동일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존재는 어떠한 종류의 행위인가가 문제가 되는데 첫째로 하나님의 존재는 '사랑하시는 존재'이시다. 아니 하나님은 곧 사랑이신 것이다. 이 사랑의 주체자로서 하나님은 인간과의 교제를 원하시고 만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만 그의 이러한 모든 의지는 자신의 결함이나 고독을 풀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독특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과의 만남 없이는 존재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요, 하나님이 사람이시며 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바르트는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만이 사람이요, 따라서 '유일한 삶'이시오, 이 분이 예수 그리스도에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는 자유 가운데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단 인간의 어떠한 계기나 소질로부터 초월한 사랑이요, 달리 말하면 거룩한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자유스러움은 그것이 옛 신학에 있어서 표현되던 하나님의 '자존성'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바르트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내재성을 위한 그의 자유성'을 의미하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피조물 가운데 내재하실 수 있는 자유성을 의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공존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은 성령의 역사이기도 한 만능하신 하나님의 품성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품성을 '신적인 사랑'과 '신적인 자유'로 갈라서 소위 하나님의 속성에 해당하는 부분을 각기 갈라 생각하고 있다. 즉 신적인 사랑에 해당하는 부분을 '은혜와 거룩하심' '긍휼과 의' '인내와 지혜' 등으로, 그리고 신적인 자유에 해당하는 것으로 '통일과 편재' '불변성과 전능' '영원과 영광'등으로 보고 있다.
바르트는 여기서 하나님의 완전하신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와 속죄의 주체가 되시기 때문에 주님이 아닐 수 없으며, 이러한 창조와 속죄와 구원의 역사를 현실적으로 감당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완전하신 주님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완전성이란 곧 창조주와 속죄주와 구원주의 각기의 역사를 완전성이라는 개념으로 바르트는 표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와 삼중성을 다시금 상호 밀접한 관련속에서 해명하려는 것이 바르트의 '계시돤 하나님'의 모습인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바르트는 새로운 '예정론'을 제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놓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르트에 의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이라는 말로 명명된다.


Ⅵ. 결론
삼위일체론의 근거 내지 출발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있다고 보는 바르트의 견해는 탁월한 것이다. 왜냐하면 바르트의 교의학에 있어서 그 출발점인 하나님의 말씀, 곧 에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되고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게시로부터 정립되는데, 기독교 신학의 기독교적 특성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이 여러 학자(허지슨, 몰트만, 베일리)에 의하여 그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되고 있긴 하지만 교부시대 이후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더 깊이 생각하여 볼 수 있는 기초를 다시 한번 정립하였다는 위대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