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은 신학 교과서에만 있는 지식인가?
비록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일상적인 삶에서 사실상 ‘단일신론’을 따르고 있다. 비록 매주일마다 성부, 성자, 성령께 송영을 돌려드리면서 예배를 마치지만, 설령 삼위일체론이 거짓으로 판명되어진다 하여도 기독교 경건 서적의 대부분 바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삼위일체론이 창조론, 기독론, 은혜론 교리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경건과는 거의 분리되어 있다. 가령 삼위일체론이 없어도 기독론에 결정적인 변화를 끼치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로 현대 기독론 연구는 대부분 주석적이지만, 삼위일체론이나 성령론적으로 통합되어진 연구는 흔치 않다. 성령 안에서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께 기도를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드리며, 사도신경을 암송하면서도, 성도들의 머리에는 ‘단일실론’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안타까운 신앙 현실을 주목하면서 우리는 신앙의 대선배인 칼빈의 교훈을 살피려고 한다. 칼빈(1509-1564) 신학의 구조는 한 마디로 삼위일체론적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신학의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사실은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자’라 할 수 있다.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신학의 유일한 주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 점에서 칼빈은 신학 정의에 충실하였다. 우리는 그의 신학을 공부함으로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욱 더 잘 알기를 원한다. 성경의 주인공도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요, 설교의 주인공도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우리 한국교회의 모든 설교자들이 성경의 내용이 삼위 하나님이기 때문에 신학과 설교의 내용도 삼위 하나님으로 꽉 채우는 지혜를 얻기를 바라면서 본고를 시작한다.
I. 신학: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표현으로 칼빈은 신앙을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신앙은 이곳 저곳이나 잡다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따라 다닐 것이 아니라 한분 하나님을 주목해야 한다(I,xiii,16). 그는 신앙을 설명할 때는 종종 요한복음 17:3을 인용한다. 즉 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인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이처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III,ii,3).
그리스도의 광채가 우리 위에 비취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완전히 은폐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계시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이다. 볼 수 없는 성부를 우리는 오직 보이는 성자의 형상에서 찾아야 한다. 타락 후 신지식(神智識)은 중보자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찾게 된다(III,i,1).
칼빈은 이처럼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통하여 신앙을 해명한다. 사실 신앙은 바로 이 삼위 하나님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이 신앙을 지식으로 정의한 것은 성경적인 탁견(卓見)이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진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자비에 관한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인데, 성부와 성자의 양 사역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생각에 계시되고 우리 마음에 인쳐졌다.”(III,ii,7; I,vii,5 참고) 그가 신앙을 성령의 사역으로도 계속 설명하는 것을 고려하면, 삼위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 곧 신앙이 신학이다.
신앙은 삼위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라는 칼빈의 입장에 서서, 그의 삼위일체론을 살펴보기로 하자.
II. 우리의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계시하시되, 당신이 삼위이심을 계시하셨다. 이 삼위 하나님을 붙잡지 않으면, 하나님이라는 공허한 이름만 뇌리에 번쩍이면서 참 하나님을 놓치고 말 것이다(2). 그러면서 칼빈은 계속 성자와 성령의 ‘위격’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나서 ‘일체’에 집중한다(3). 즉 우리 한글 표현대로, 그는 먼저 삼위에 대하여 말하고 그리고 일체를 다룬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지닌다. 먼저 내용상 이것은 삼위일체론의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흔히들 서방교회의 전통은 하나님의 본성(일체)에서 출발하고, 동방은 삼위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칼빈은 동방의 전통에 서 있는 셈이다. 이 점은 아래에서 계속 논의될 것이다.
둘째로 용어 자체에 대한 칼빈의 유연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신학 논쟁이나 교회 연합의 시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라 하겠다. 한편으로 칼빈은 ‘위’라는 말이 성경에 나온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일체’라는 말은 없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요, 성자는 성부가 아니고 성령은 성자가 아니며 비공유적 속성으로 서로 구별된다는 신앙에 이견이 없다면, 위나 일체라는 말은 매장되어도 좋다는 포용적인 자세를 취한다(5).
물론 성경은 우리 사고와 용어 표현의 확실한 규범이다. 그러면 교회는 왜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용어를 도입하였는가? 아리우스(Arius, 280-336)를 대항하여 교회는 ‘동등’이라는 말을 도입하였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거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성부께) 동등’이라는 용어를 제시하니까, 그는 그리스도가 피조물이요 시작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즉 이 용어가 아니었다면 아리우스의 이단성은 폭로되지 않았을 것이다. 후에 사벨리우스(Sabellius, 215년경)가 성부, 성자, 성령이란 한 하나님의 속성에 불과하며, 삼위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았다(4). 그때 선인들은 삼위는 한 하나님 안에서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3).
그러면서 칼빈은 힐라리(Hilary, )를 옹호한다. 즉 제롬(Jerome, 340-420)은 하나님에게 3 본질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죄라 하였다. 그런데 힐라리에게서는 이런 표현이 일백번 쯤은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악의없는 평범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칼빈은 위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표현하려기 보다는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이 3분이라는 것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지 않으려고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언어의 제한성에 기인한다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한다(5).
용어에 대한 자유를 천명한 뒤에, 칼빈은 인격을 정의한다. “인격은 비공유적 속성(proprietas incommunicabilis)으로써 상호 관계 하에 구별되는 하나님의 본질 안에 있는 실재(subsistentia)이다.”(6) ‘위’를 대개 관계로 설명하지만, 칼빈은 아주 의도적으로 ‘실재’라는 말로 위를 정의한다. 물론 관계성에서 구별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구별되지만, 실재하는 구별이라는 뜻이다. 본질은 단일성을, 위는 단일성 안에 있는 구별을 말한다. 본질의 단일성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하나님 안에 있는 경륜이라는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년경)의 말에도 동의한다.
III.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신성.
칼빈은 성경의 자료들을 증거하면서, 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성부와 ‘동등’하다는 식으로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증거한다. 지금까지는 삼위일체론의 여러 용어들에 관한 도입이라 할 수 있고, 7절부터 비로소 칼빈은 삼위일체론 자체를 다룬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하신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말씀은 성부와 함께 처음부터 계셨고, 만유의 창조주이시다(7). 하나님이 창조하시려고 입을 여실 때에, 말씀이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본질에 변화를 초래하는 모독이다. 성자가 말씀하신 ‘창세 전에 성부와 함께 가졌던 영광’(요 17:5)은 성자가 성부와 영원 전에 이미 함께 계셨다는 것을 증거한다(8).
또 구약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표현하는 본질적인 이름인 야웨가 신약에서는 ‘주’로 번역되면서, 그리스도께 사용되었다는 점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한다(9-11). 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났고(딤전 3:16), 교회를 피로 사셨는데(행 20:28), 이것은 이등 신이 아니라, 바로 성자의 신성을 증거한다(11). 나아가 예수께서 죄를 용서하심에서 오직 창조주에게만 해당되는 권세가 있었다. 이 권세에서 신성을 알 수 있다(12).
마지막으로 성경은 예수를 믿고, 기도를 받으실 분으로 설명한다. 신앙과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성부와 성자에 공통적인 구원 능력을 경험한다. 천부께서 주시는 모든 은사들은 성자의 중보로 주어지지만, 이 권세에 대한 참여로 성자가 바로 이 은사들의 주인이시기도 하다(13).
성령님에 대해서도 유사한 증거를 전개한다. 성령께 돌려지는 것들은 피조물의 속성은 아니다. 성령은 만물을 유지하고 자라게 하며 생명을 준다. 성령은 중생과 불멸성의 주인이시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한다. 그는 칭의, 성화와 능력과 모든 선한 것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은 위격적으로 하나님 안에 실재한다(14-15).
IV. 하나님의 단일성과 삼위되심.
칼빈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증거하고 난 뒤에, 하나님은 한분이심을 증거한다(16). 이를 위하여 특히 그는 에베소서 4:5과 마태복음 28:19의 세례명령을 주석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 신앙과 종교에 가입한다.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계시며, 삼위로 한 하나님이 알려진다는 것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삼위이면서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이는 세례 받을 수 없다.
성자와 성령의 신성이 증거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성자와 성령의 구별이 강조되어야 한다(17). 칼빈은 신학자 그레고리(Gregory the Theologian, 330-389년)의 말을 기꺼이 인용한다. “나는 한분을, 삼위의 휘광으로 재빨리 휘감기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고, 삼위를 구별할 때는 즉시로 한분에게로 옮겨진다.”
그러면서 그는 삼위만을 혼란스럽게 생각하고 일체로 복귀하지 않는 잘못을 경고한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은 공허한 칭호가 아닌 ‘실재적인 구별’(vera distinctio)이며, 구별은 결코 구분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 구별은 성육신을 기점으로 삼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온다고 하여 성부와 성령을 구별하였고, ‘다른’ 보혜사라 하여서 자신과 성령을 구별하셨다.
칼빈은 위격의 구별을 인간事에서 빌려오는 신학 전통을 따르지 않고 성경에 표현된 대로 설명한다(18). 성부에게는 사역의 시작과 만유의 근원이심이, 성자에게는 지혜와 모사, 그리고 만유의 집행이, 성령께는 사역의 능력과 효과가 돌려진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지혜와 능력과 나누어질 수 없다. 물론 영원에 선후(先後)가 없지만, 성부가 먼저, 그리고 성자,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라는 순서를 설정하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그리고 나서 칼빈은 중요한 요소를 하나 지적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위는 구별되지만, 각 위에서 각 위의 특징, 말하자면 불공유적 속성으로 신성의 전부가 이해되어진다는 것이다(19).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계신다(요 14:10). 각 위는 본질의 구분이 원인이 되어 서로 분리될 수가 없다.
구별이란 상호 관계를 나타낼 뿐이지, 본질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발생 가능한 어떤 혼동을 시정하려고 한다. 성부와 관련되지 않고 성자를 부르면, 그는 스스로의 원인자이다. 그러나 성자가 성부와 가지는 관계에 치중하면, 성부는 성자의 원인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와의 관계에서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하나님이다.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한 본질을 이해하며, 동시에 그 본질 안에서 삼위를 파악한다(20). 그러므로 구체적인 언급 없이 하나님이 나오면, 성부 뿐 아니라 성자와 성령도 지칭된다. 그런데 각 위들의 특징들에는 어떤 질서가 수반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특히 성부에게 적용될 때도 있다.
이런 식으로 본질의 단일성이 유지되며, 성자와 성령의 신성에 아무 손상도 없이 정당한 순서도 유지된다. 각 위를 언급할 때마다 신성의 단일성에로 복귀하는 것은 항상 필연적이다. 하나님이라는 단순한 이름은 관계를 지칭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자기와의 관계에서 이러하고 저러하다고 말할 수 없다. 즉 관계성은 항상 본질이 아니라 위격의 문제라는 것이다.
V. 하나님의 단일성과 위격들의 구별에 대한 오해 논박
칼빈은 신앙을 파괴하는 사탄의 책락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이들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훼손하거나 위격들의 구별을 무시한다. 그는 아리우스로 대표되는 본체론적인 종속설과 사벨리우스가 대변인인 양태론을 동시에 거부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호기심으로 미로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께 당신의 지식을 위임한다(21).
하나님의 본질은 단순하고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께 공히 적용된다. 그러나 각 위격에만 고유한 특징으로 위격들 간에는 구별이 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하나님 안에는 3 구분이 있다 하여 단일성과 충돌되는 주장을 한다. 반면에 그는 위격이란 실질적인 실재가 아니라고 한다(22).
나아가 칼빈은 어떤 자들(Gentilis 등)이 성부는 신성의 원천(fons et principium deitatis)이며 성자와 성령의 신성 수여자(essentiator)로 보는 오류를 범한다고 논박한다(23). 칼빈은 다시 그리스도가 야웨임을 상기시키면서, 만약에 모든 신성이 오직 성부에게만 있다면, 신성은 분리 가능하거나 아니면 신성은 성자에게서 다시 탈취될 수 있다는 말이라면서, 이런 주장의 헛점을 논박한다. 즉 신성은 성부와 성자에게 공통적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타날 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여 졌다(24). 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을 뿐 아니라, 중보자의 인격과 사역을 지고서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켜야 하셨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또 ‘영’이라는 이름은 성령 뿐 아니라 성부와 성자에게도 해당된다. 야웨와 마찬가지로 성령은 전체 신성에 해당되는 표현이다.
성부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성부일 수가 없다. 성자도 하나님이 아니라면 성자일 수 없다. 그러므로 신성은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성자가 하나님이기에 위격과는 관계 없이 그는 스스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가 성자이기에 그는 성부로부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본질에는 시작(principium)이 없다. 이 경우 성부와 성자는 함께 원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격에는 원천이 있다(25). 성부와 하나님이 무조건 동의어라면, 성부는 신성 수여자(deificator)가 될 것이요, 성자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성부는 본질의 수여가 아니라 ‘질서상’(ratione ordinis) 신성의 원천(principium deitatis)이라고 말할 수 있다(26).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이나 그의 위상은 항상 그가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사역하셨음을 고려해야 한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다’(요 16:7)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성부에 비하여 본질상 이등 신(二等 神)에 해당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늘 영광을 입으시고 신자들을 성부와의 교제로 불러 모으시는 사역을 지칭한다. 때로는 ‘성부’라는 이름 아래에 자신의 신성도 포함시켜 말씀하시기도 한다. 즉 이런 발언들은 모두 구원역사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다. 그러나 성경에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이라 불리는 분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도 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시다(27). 또 터툴리안이 하나님의 말씀은 경륜적으로 존재한다는 발언을 하였으나, 이는 본질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 위격에 관한 언급일 뿐이다(28). “하나님은 본질에서는 단일하시나 이 단일성은 경륜의 신비를 통하여 삼위로 나타나셨다. 세 분이 계시나 정도의 문제이지 위상이 아니며, 형식의 문제이지 본질의 문제가 아니며, 현현의 문제이지 능력의 문제는 아니다.”
성부는 누구에게서도 기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신성의 원천이라 부른다. 원천이 성부에게서 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단일성이 인식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특히 성부에게 돌린다(29). 성부의 원천이심은 어떤한 존재론적 우위와는 무관하다.
칼빈은 삼위일체론 전부를 신실하게 다 설명하고 난 뒤에, 호기심과 사변의 추구가 아니라 ‘교회 건덕’(建德, ecclesiae aedificatio)에 대한 열정을 언급하면서 마친다(29). 이런 실천적인 지식은 어떠한 허망한 사변보다도 더 확실하고 견고하다(13).
칼빈은 이렇게 잘 정리한 삼위일체론을 「기독교강요」의 뼈대로 삼았다. 물론 더 정확하고 바르게 표현하려면,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분의 사역이 이 저작의 구조로 드러나게 하였다. 그는 세례 명령에 기초하여 형성된 사도신경을 그의 신학의 틀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은 80장으로 구성되었고, 기본 뼈대는 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이는 3구분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으니, 사도신경에 근거한 엄격한 삼위일체론적 구분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칼빈은 초판(1536)에서부터 사도신경을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교회로 4분하여 해설하였다. 이것이 3판(1543년)에서는 4장으로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고립된 사도신경의 해설에 불과했다.
1559년 판에 칼빈이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언급한 구조 변경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는 이전의 노고를 탓하지 않으나, 작품이 지금 제시된 순서대로 배열될 때까지 만족할 수 없었다.” 즉, 고대교회의 교의인 삼위일체론이 중세의 신학 전통과 마찬가지로 개혁교리 곁에 있는 또 다른 신앙 항목으로 고립되어 있는 한, 종교개혁은 완성될 수 없었다.
이 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개혁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이 ‘새로운 교리’의 고안일 따름이라는 로마교의 공박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론과 기독론이 객관적 교의가 되고, 이신칭의는 ‘주관적’ 구원론이 될 수 밖에 없는 위험이 있었다.
바로 이 문제를 칼빈은 이렇게 풀었다: 새로운 고백은 옛 신앙에서 나왔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요 신뢰인 이 믿음이 성령의 일차적인 사역이다. 성령은 성부의 말씀인 성자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이 생긴다. 이로써 삼위 교리가 설교에서 구체화된다.
만약 이런 성령론이 개신교회의 발견이라면, 개신교회의 믿음론(신앙론)에 고대 교회의 삼위론과 기독론 교의가 초석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개신교회의 교의라는 이신칭의와 선택론 역시 고대 교회의 삼위론과 기독론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게 된다.
이를 그는 「기독교강요」가 ‘사도신경 해설’(Expositio Symboli)의 형태를 취하게 함으로써 단번에 풀어버렸다. 외견상 이는 사도신경의 해설에 불과하나, 사도신경의 뼈대로 삼위 하나님을 그 사역에서 고백하는 형태를 취했고, 이신칭의의 교리는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옛 신앙의 새로운 이해에 해당될 뿐임을 밝히 보였다.
이처럼 「기독교강요」 전면에는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른 삼위일체론이 깔려있다. 설교와 주석에 기초한 개혁파의 교회적 신학이 중세의 사변을 뛰어 넘고서 고대 교회의 교의와 악수를 한 셈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강요」가 사도신경의 구체적 항목들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흠 잡을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칼빈은 신론을 삼위일체론으로 취급하였고(제일권), 그렇게 함으로 삼위일체론이 교의학 전체 구조에서 고립되는 구습을 극복하였다.
VII. 삼위일체론의 신학자 칼빈
칼빈은 서방의 일반적 전통, 즉 하나님의 본성이라는 ‘一’의 관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三’의 문제로 나아가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는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바로 성경의 증거를 따라서 먼저 정리한다. 그는 성경에 경륜적으로 나타난 삼위 하나님의 사역들을 살피면서, 삼위들의 단일성을 증거한다.
또 그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수 많은 비성경적인 변증을 가하는 전통을 벗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삼위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호기심이나 사변이 아니라 구원론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그는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성부와 동등’이라는 관점에서 증거한다. 이것은 교회사적으로 볼 때 성자의 신성을 증거한 유일한 방식이었다. 이 점에서 종속설적인 흔적이 묻혀있을 수 있다. 그러면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젠틸(Gentile)식으로 성부를 ‘신성의 수여자’로 보는 입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라는 것은 신성의 본질이 아니라 질서의 측면에서만 가능하다(I,xiii,26).
성경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와 동시에 성자와 성령도 지칭한다. 그렇지만 위격들 간에는 어떤 경륜적 질서가 있고, 성부는 원천이요 원인자이시니까,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특히 성부에게 해당될 경우가 많다. 칼빈은 고대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성부는 한 위격의 이름일 수도 있고, 동시에 전 신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도 쓰임을 말한다.
그러나 성부가 신성의 원천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성자와 성령께 추호의 약탈도 없이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된다. 성자와 성부의 신성은 공유적 신성에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결코 성부의 위격은 (본체론적) 원천은 아니다. 성부만이 ‘절대적으로’ 원천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리우스가 주장한 이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이라는 이름 하에 삼위로 이해되는 단일하고 단순한 본질을 말한다.”(I,xiii,20) 그러므로 본질의 단일성에 도달하는 것은 항상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주’, 또는 ‘영’이란 성부께만 적용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삼위의 각 위격이 불려지며, 이로써 하나님의 단일성이 보장된다(I,xiii,19,20,24).
그러므로 칼빈은 실재(subsistentia)와 본질(essentia)를 구분한다. 실재는 관계성 속의 존재이고, 본질은 자체로서의 존재이다. 실재는 다른 위격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단순한 구별적 관계일 수는 없고, ‘실재’로 존재한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실재는 유명론적인 칭호이지 않고, 실재한다.
이점에서 칼빈이 동방의 전통 중에서 위를 ‘존재 방식’으로 보는 입장을 탈피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즉 그는 성부를 신성의 촛점으로 보지만, 성부의 위격을 신성의 통일체로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신성의 충만은 성부에게만 집중되어 있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께 공히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재 사상이다.
칼빈은 삼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도입되는 인간적인 유비들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키프리안(Cyprian)이 말한 감독제도의 동등성을 예로 든다. “감독 제도는 하나이며, 개개 감독에 의해 전체적으로 그 각 부분이 유지된다”는 말 중의 “전체적으로”에 근거하여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즉 본질은 성부와 성자께 전적이고 ‘전체적으로’(in solidum) 공통적이다(I,xiii,23).
즉 삼위는 비공유적 속성에는 동참하지 않지만, 신성에는 동참한다. 그리고 비공유적인 속성들은 삼위를 서로 분리시키지 않고 실재하는 상호 관계로 서로 연합시킨다. 공재에 관한 이해가 위를 개별적인 단자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오해를 불식시킨다.
이런 공재 이해에 근거하여서 성부의 주권(μοναρχια)를 말할 수 있다. 성부가 성부인 것은 성자와 성령과의 실재적인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물론 성부가 하나님이기에 그는 성부일 수 있다. 성부를 ‘신성 수여자’로 오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 말은 삼위의 공재에 의한 협동 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말할 수 있다. 신성은 성부, 성자, 성령께 공통적이다. 그럼에도 성부의 신성을 말하는 것은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 질서의 문제일 뿐이다. 본질은 나눌 수 없다.
우리는 칼빈의 삼위일체론이 아주 성경적이며, 균형을 잃지 않으면서도 교회사에도 찾기 힘든 삼위일체론임을 밝혔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앙이며 경건이며 이것이 또한 신학이기 때문에, 호기심이나 사변이 아니라 실천적인 지식을 그는 추구하였다. 성경과 설교의 주인은 삼위 하나님이시다. 신앙은 삼위 하나님을 향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성경에서 당신을 삼위로 계시하신 하나님의 계시 의도를 잘 파악하고, 설교 또한 삼위 하나님을 잘 소개하는 설교가 정착되어야 되겠다.
[출처] 칼빈의 삼위일체론 l 작성자 Dr Ye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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