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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의 기원과 배경

에반젤(복음) 2020. 2. 15. 11:54



십계명의 기원과 배경



장일선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교육원에서는 몇 년 전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조, 신앙선언 등을 쉽게 풀어 구역예배 교본으로 만든 적이 있다. 이번에 교육원에서는 그것을 따로 떼어 평신도용으로 단행본을 만들게 되었다. 필자는 앞서 구역예배 교본에 십계명 부분을 집필했기에 그것을 토대로 『십계명 해설』을 펴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십계명에 관해 살펴 본다면 우선 십계명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에 처음 나가는 이들은 찬송가 뒷 표지 안쪽에 십계명이 인쇄되어 있는 것을 읽을 수 있다. 한국 교회에서는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또는 장년이 세례를 받을 때 십계명을 외우도록 하는 습관이 있다. 이것은 십계명이 기독교인에게는 주기도문이나 사도신조처럼 신앙생활에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십계명은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가 하는 질문도 해 볼수 있을 것이다.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고 그것을 우리는 마태복은 6장과 누가복음 11장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사도신조는 성서에 기록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믿고 주장하는 교리를 천명하기 위해 제정한 것이다. 그런데 십계명은 신약이 아닌 구약의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된 것이다.

 

  구약성서의 표현은 '십계명'이 아니라 '열 가지 말씀'이다(개역성서 신명기4장13절에 '곧 십계명'이란 표현이 있으나 히브리어로는 '열 가지 말씀'이다). 구약성서의 설명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온 뒤 시내산에 이르러 야훼 하나님과 계약을 맺게 된다. 그때 하나님께서 친히 시내산에 강림하시어 말씀을 하시는데 그 말씀이 곧 '열 가지 말씀'이라는 것이다. 출애굽기 20장 1절은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하면서 십계명을 소개하고 있다. 성서 본문이 '계명'이란 말 대신 '말씀'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십계명'이 법적인 제제의 성격보다는 하나님의 보살피시고 인도하시는 측면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이제 시내산에서 하나님과의 계약을 맺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계명은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벌받는다는 강압적이고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다는 특권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더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서는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 하나님이 직접 쓰신 석판 둘을 들고 내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출 34:28-29). 좀더 자세히 말하면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 있는 동안 백성들은 그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 준 야훼 하나님과 모세가 그들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출 32:1)고 아론에게 요청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모세는 산에서 내려오다 이 광경을 보고 너무 기가 막히고 분노에 차 돌판을 던져 깨뜨려버렸다. 그 후 그는 다른 돌판을 만들어 다시 하나님의 글을 받아왔다. 후일에는 법궤 안에 잘 모셔두었으며 광야 유랑 때에 그 법궤는 지휘 사령부 역할을 한 셈이다.

 

  위의 기사는 십계명을 모세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십계명의 형태를 살펴보면 히브리어로는 열 마디 말씀이 아니라 도합 172자로 되어 있다. 제4,5 계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말지니라'의 부정형 문장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제6,7,8 계명은 단 두 마디로 되어 있고, 나머지 계명들은 기다란 수식어가 첨부되어 있다. 그 수식어의 내용은 "아들, 딸, 남종, 여종, 소 나귀"등 농경문화권의 사회제도를 반영하고 있다. 그 내용 면에서 "살인하지 말지니라" "도적질 하지 말지니라" "탐내지 말지니라" 등은 모세 시대보다 더 앞선 함무라비 법전에도 이미 언급되어 있는 사항이다. 그러나 굳이 모세 시대 때 처음 공포된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실상 이같은 규정은 인류 공동체가 시작된 이래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우해선 불가피하게 강요된 것으로 보인다. 함무라비 법전은 단지 오랫동안 구두로(또는 불문율로) 전해져 내려오던 법들을 집대성하여 발표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함무라비는 그 법을 발표하면서 그가 섬기는 태양신에게 법을 인수받아 공포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야훼 하나님에게서부터 받았다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다. 즉 모세 시대에 처음으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새로운 공동체의 '대헌장'은 야훼 하나님의 직접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반영된 것이다. 특히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은 모세 시대에 처음으로 드러난 공동체의 야훼 하나님 인식이 잘 표명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주전 13세기 중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시내산에 이르러 야훼 하나님과 계약을 맺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열 개의 말씀이다. 그렇지만 그 성격은 사법적인 제재라기보다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인도하시는 은총의 표현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계명이 기독교인들에게도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이스라엘'이 되기 때문에 야훼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한 백성'(출 19:6)이 되는 것이다.

 

2. 야훼 하나님

 

  우리의 관습으로는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처음 만났을 때 통성명을 함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상대방의 이름을 앎으로 인해 그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는 셈이다. 이것은 우리가 통성명을 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이 우리 의식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름은 그 사람의 가문, 인물,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만큼 우리 선조들도 이름 석자를 깨끗이 보존하여 후대에 남기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쳐 왔던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십계명의 주체자 즉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분이 야훼 하나님임을 보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그 하나님의 이름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어느 유치원 학예회에서 해와 바람이 사람의 외투 벗기는 이야기를 연극으로 꾸미기로 하였다. 그런데 선생님이 배역을 맡기는데 어느 아이가 자기는 하나님의 역할을 하겠다고 요청하였다. 그 아이는 햇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우리의 조상들 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천체는 물론 대자연까지도 초인간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믿어왔다. 기독교가 한국에 소개되기 이전 우리는 이미 '하늘에 계시는 분' 이라는 '하늘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그래서 가톨릭 교회에서는 천주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분은 막연하게나마 하늘에서 우주 삼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 기독교에서는 이 분을 유일하신 신이라 여겨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가톨릭교에서는 '하느님',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으로 불러왔지만 가톨릭과 개신교가 합쳐서 성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우리말 문법으로는 '하느님'이 옳다고 보아 공동번역에서는 그렇게 쓰고 있다. 그것은 하늘이 인격화 되어 하느님이 될 수 있지만 하나라는 추상명사는 의인화시킬 수 없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의 이름은 아니다.

 

  사람들은 신이 무엇이며 또 누구이신가를 알아보려고 오랫동안 고심해 왔다. 그것이 곧 철학이고 신학이라는 학문을 낳게 하였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막연하게 하늘에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우주적인 신을 생각해 왔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신이 하늘 위에서 땅으로 내려오셨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이야기는 바로 이같은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내가 …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출 3:7,8)라고 기록함으로 땅에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 한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세상에 어린아이로 탄생하신 것으로 믿는다. 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 가운데 계시다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부활 후 승천하시면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였다. 우리가 비록 선교사들을 통해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이긴 하였으나 우리는 우리의 역사 현실을 통하여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이것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건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마을에 돌아가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말하였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여인의 증언보다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직접 만남으로써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요 4:42)이신 줄 알았다고 고백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들의 고난의 역사와 삶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우리들의 고통과 삶을 굽어 살피시고 우리 역사에 동참하시는 분이시다.

 

  모세는 가시덤불의 불꽃 체험을 통해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출 3:13).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었다 하라"(출 3:14)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스스로 있는 자'라는 히브리어의 발음은 개역성서는 '여호와'로, 공동번역은 '야훼'로 표기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음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이름을 우리 인간에게 가르쳐 주심으로 신의 속성과 비밀과 신비까지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다는 점이다.

 

  우리는 위에서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실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야훼의 이름은 야훼의 실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이 신의 실체를 안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불을 만지는 것처럼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그러기에 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우리의 옛 조상들이 부모와 스승의 함자를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도 지극히 거룩하신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거의 부르지 않았다. 바벨론의 마르둑 신은 50개의 이름이 있었다. 그중 어느 것을 불러도 신의 응답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단 한가지 이름뿐이었기에 그 신과 접촉을 갖기에는 마르둑 신 보다는  50배가 더 힘들었다는 말도 성립된다. 야훼는 그 만큼 지엄하시며 초월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인간이 쉽게 접촉할 수 없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름을 이미 계시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이름 때문에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이 야훼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는 곳이라고 보았다(왕상 8:29). 이 말은 예배 처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실체와 만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시고 또 예배 처소에 자신의 이름을 두심으로 그 이름을 통해 백성들을 만나시는 야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예배 처소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시기도 하는 것이다.

 

1. 해방자 하나님

 

  십계명은 "나는 너의 하나님"으로 시작된다. 개역성서는 히브리 본문을 따라 제2인칭 단수를 사용하지만 공동번역은 복수2인칭 '너희'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내용적으로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계약 체결을 위해서 공동체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신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교회도 하나의 신앙공동체이며,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즉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해 낸"(출 20:2) 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애굽(이집트)은 이스라엘에게 고역의 자리이고 멍에의 자리이며 죽음의 자리였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너희가 벽돌을 여수히 바칠지니라"(출 5:18)는 바로의 명령은 이집트에서 종노릇하는 이스라엘의 고난의 현실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에 내려갔던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노예가 되었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출 1:11). 구약성서에서는 항상 이집트는 종살이하던 집으로 소개되고 있다.

야훼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의 몸에서 쇠사슬을 풀어 자유인이 되게 하셨다. "내 백성을 보내라"고 외친 모세의 절규는 인류 역사상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온 눌린 자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갈구 및 그 성취를 위한 투쟁의 원형이 되고 있다. 모세가 빈 주먹으로 채찍을 쥔 바로 앞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 라는 야훼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다. 주전 1250년 경 일련의 노예 떼들이 갈대바다를 건너 이집트를 탈출한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며 그들의 의식 속에 굳게 자리잡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기에 구약성서 전편을 통해 '출애굽사건'은 곧 하나님의 구원사건으로 이스라엘을 하나의 신앙공동체로 형성해 놓은 중대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기에 필자는 출애굽사건이야말로 구약성서의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보고 있다.

 

  "나는 너의 하나님" 이란 말로 시작되는 십계명 서언은 출애굽 사건의 주체가 야훼 하나님이며,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의 구속자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사건이 있었기에 하나의 공동체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애굽 땅 종되었던 집'으로부터의 탈출을 가능케 한 야훼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기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재천명하는 것이며, 예배를 통해 야훼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리해 나가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에 따라 천체 사물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듯이 구약학 연구에도 고대 히타이트 왕국의 조약이라는 원칙으로 시내 계약의 내용을 설명하기도 한다. 고고학자들은 주전 1500년 경 소아시아 구역에 있었던 히타이트 왕국에서 사용하던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정치 조약 문서를 발견하였는데 그 문서는 주권자를 소개하는 전문과 계약 당사자 간의 예전 관계를 설명하는 역사적 서언을 제시한 다음 본격적인 법조항을 제시하고 있다. 주권자를 소개하는 전문에는 "이것은 ○○의 말씀이다"라고 시작되며, 여기에는 주권자 대왕의 이름과 직책, 족보가 소개된다. 그리고 역사적 서언은 종주국이 봉신국에 베푼 과거의 조약을 회상시키며 봉신국은 감사하는 정신으로 이 조약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십계명의 서언 부분도 이렇게 본다면 히타이트 조약의 전문과 역사적 서언에 해당하는 것이다.

 

  십계명 서언은 그러므로 법조항에서 거론되는 야훼 하나님과의 충성 서약의 조건이 실은 야훼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속해 주었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바로를 섬기다가 죽임을 당했다면 이제는 야훼를 섬김으로써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훼가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또 약속의 땅을 거저 주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 있었다면 그들은 평생 노예생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자유인이 되었고 또 땅을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출애굽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혹사시킨 바로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학자들은 그가 라므세스 2세일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출애굽기의 '바로'는 로마의 '가이사' 나 우리나라의 '대통령'처럼 최고 통수권자를 지칭할 뿐 구체적 인물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최근의 새로운 해석은 여기의 '바로'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폭력과 압제의 화신이라고 본다. 사도 바울이 지적하는 대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혈과 육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 6:12)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손아귀에서 구해주신 야훼 하나님은 기독교인들도 악의 영들의 지배에서 구해주실 수 있는 것이다(어느 주석가는 이집트의 생활은 '벽돌공장'과 같이 생산을 위주로 한 지배문화의 산물이라고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야훼 하나님의 공동체에 대한 '샬롬'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으셨다. 그 내용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계층간의 구별이나 빈부의 격차, 사회적 지위, 인종, 종교, 성별 등의 구분을 타파시키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자가 되게 하신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해방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교의 좁은 울타리와 로마의 정치적 속박을 벗어나 이제는 세계 종교로 퍼져 나가게 된 것이다.

 

2. 인격적인 하나님

 

  우리는 예수를 알게 됨으로 인해 운명이 바뀐 사람들이다. 복음 안에 살기 전에는 죽음을 향해 살아가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를 믿고 다름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운명만이 아니라 생각, 삶, 생의 목표, 모든 것이 바뀐 것이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살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게 된 것이다.

 

  실제로 사람이 누구를 만나고 아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부부의 관계, 사제의 관계, 교역자와 교인, 한 나라의 정치적 지도자와 시민 등의 모든 관계에서 이 만남은 커다란 변수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중요한 만남의 사건을 신앙 안에서도 경험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써 이집트의 종살이를 벗어나 자유인이 된 것을 말함이며 기독교인도 예수를 알게 됨으로 인해 죄의 굴레를 벗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신을 만나 더불어 사귄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바벨론의 창조설화에서는 인간은 신의노예로 창조되었다. 구체적으로 신은 지상에 세워진 신전에 거하며 모든 들판은 다 신의 영토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 들판에 나가 신을 위해 농사를 짓는 노예로 보았던 것이다. 노예가 상전을 받들어 식사준비를 하며 일거수 일투족 모든 행동에 수발을 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신을 위해 제사상을 차리며 신이 필요한 일상용품을 공급하며 수발드는 종노릇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신이 인간의 봉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며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고 보았다. 이것은 사람이 말에게 채찍질을 가하듯 또는 상전이 노예를 임의로 부리듯 신도 인간을 자기들 마음대로 부린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서양문명의 발상지인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계곡은 자연 산세가 험해 상류지방의 폭우가 갑자기 급류로 변해 강 유역에 오막살이처럼 옹기종기 모여 살던 사람들을 많이 떠내려 버렸던 것 같다. 성서의 노아 홍수도 이와 유사한 경우로 보는 해석도 있다. 그러니 고대인은 자연 자체가 모두 신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변덕도 신의 심술이나 재앙으로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이같은 상황하에서 인간은 항상 신 앞에 굴종적이며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달랐다. 그들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사귀는 놀라운 체험을 경험한 백성이다. 그들의 조상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신과 더불어 겨루어 이겼기 때문에 그 이름이 이스라엘(신과 더불어 겨루다, 창 32:28)로 바뀌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신의 체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계약 사건이 바로 그같은 체험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신명기 신학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권능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신 4:32-3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계약을 맺으신 것은 이스라엘을 계약의 반려자로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며 그 점이 곧 인격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란 십계명의 서론이 곧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만남이며 이 만남은 시내계약으로 구현화된 것이다. '계약'을 뜻하는 히브리어의 '베리트'는 원래 '쇠고랑'을 뜻한다고 본다. 형사가 죄인을 호송하기 위해 자신의 팔을 내어 죄인의 팔과 더불어 쇠고랑을 차듯, 하늘에 계시는 엄위하고 거룩하신 야훼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이스라엘 백성의 자리에까지 오시어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계약은 쌍무적이며 조건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약속에서 벗어나 임의로 행동할 수 없을 만큼 제약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고대 근동의 신들과는 달리 자신의 약속을 지키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면모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 위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앞을 지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훼로다, 야훼로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고대 근동의 다른 신들과는 달리 인간과 맺은 약속도 끝까지 지키시는 분이시다. 금송아지 사건 때 하나님은 화가 나시어 노아 홍수 때처럼 죄인들을 싹 쓸어버리고 모세를 중심으로 새 민족을 시작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당신의 명예를 걸고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다 너의 후손에게 주어 길이 유산으로 차지하겠다고 맹세해 주셨던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출 32:13)라고 간청을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재앙을 거두셨다. 이것은 우리가 과학영화에서 보듯 우주의 커다란 불덩어리가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다가 마지막 순간 궤도를 바꾸어 빗나간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도 자신의 뜻 즉 그가 하시고자 했던 일을 돌이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여기에 제시되지만, 그보다는 야훼 하나님은 신실성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점이 더 크게 부각되고 있다. 모세가 하나님의 신실성을 지적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은 노아 홍수와 같은 큰 재앙을 겪었을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약점'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신실성은 아킬레스근과도 같다. 모세 앞에 서 있는 거인 하나님은 모두 철제 장비로 완전무장되었기에  어떤 화살도 다 튕기어 나오지만 발뒤꿈치 아킬레스근만은 모세의 조그만 화살이 명중시킬 때 그 거인은 넘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야훼 하나님이 주변 신들에 비해 약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이 인간과 맺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야훼 하나님이 "나는 너의 하나님" 이라면서 자신을 소개한 것은 자신을 완전히 이스라엘에게 내어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스라엘이 있는 이 땅까지 내려오셨기 때문에("내가 내려와서" 출 3:8) 출애굽 사건이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상징적인 표현이긴 하나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신 26:8)이 있었기에 마치 수퍼맨이 산사태로 큰 바위 밑에 압사한 사람을 바위를 밀치고 구해주듯 이스라엘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해주신 것이다. 십계명 서언도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을 요약하는 것이며 십계명 전체의 요약이기도 한 것이다. 즉 십계명은 이스라엘을 구해주신 야훼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답이기도 한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은 이 땅에 내려와 종의 형체를 입었다고 말한다. 종을 구하기 위해 구속자가 종의 형체를 입은 것이다. 복음서는 이를 '도성인신'으로 나타내지만 바울은 '비움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7-8) 그는 이어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나니"(2:12)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主)는 구약성서의 '야훼'와 같은 의미이다. 구약성서도 '야훼'의 이름이 거룩하여 '주'라 불렀기 때문이다.

 

  어느 주석가는 고대 근동의 다른 신들은 모두 침묵을 지키지만 야훼만이 역사의 현장 안에 그의 말씀을 선포하신다고 말한다. 스스로 있게 하신다는 그분의 이름은 곧 세상의 창조와 역사의 진행을 전제하는 것이다. 야훼의 이름이 선포되는 곳에 그의 백성이 고통 가운데서 해방되며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야훼의 이름은 그러므로 단지 신의 성품을 계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공동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개방된 미래를 향해 과감히 나서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이름 넉자 그래서 주라고만 불렀던 그 이름이 구약 공동체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