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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의 현대적 의미

에반젤(복음) 2020. 2. 15. 11:49



제1계명 오직 하나님만 섬겨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 20:1-3)

I. 1 계명의 의미

    십계명은 크게 둘로 구분된다. 1-4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고, 5-10계명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1 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기초가 되는 계명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할 때 이 관계는 철저하게도 배타적이다. 한 남자가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다든지, 한 여자 외에도 여러 여자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 관계는 사랑하는 관계라 할 수 없다. 서로 연애할 수도 더더욱 결혼 할 수도 없다. 내게는 당신뿐이라는 피차의 고백이 진실하게 주고 받아들여질 때 두 사람의 사랑의 관계는 성립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세상의 모든 민족들 중에서 특별히 택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특별히 사랑하겠다는 선언이시다. 이제 언약을 맺으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너희도 나만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약속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사랑의 관계는 더 이상 성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only you!”를 고백해야 한다.

II. 본문 연구

  1.“너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단수인 “너”라고 부르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 전체를 하나로 보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에베소서에 나타난 신약의 교회관도 같은 내용을 말씀하고 있다. 엡 4:3-5을 보면 교인들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고, 성령이 하나 되게 하셨고, 고백하는 주도 하나이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라는 것이다. 즉 믿음의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라는 것이다. 4:12을 보면 이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눈에는 교회 안에 모인 무리들 전체가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각자 저마다 하나님만을 사랑한다고 고백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 전체 안에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고백이 굳건해야 하고, 또한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 가운데 혹시 하나님 외에 것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나오지 않도록 살피고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2.“나 외에는”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이 말은 ynIP l[' (알 파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파니’라는 말은 ‘나의 얼굴’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알’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용례로 쓰이는 말이다. ‘... 위에’, ‘... 앞에’, ‘ ... 대항해서’, ‘... 외에’ 이 말을 종합해 보면 다음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하나님 면전에서’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관계 속에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을 금하고 계신 것이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보는 앞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을 본다고 할 때 우리 마음이 어떻겠는가?

    2) ‘하나님을 대항해서’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긴다면 이것을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을 여기신다는 것이다. 내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 행위 자체는 나를 배반하는 것이요 내게 등을 돌리는 행위를 말하며 이 때 내가 겪는 마음 고통은 어떠할 것인가?

    3) ‘하나님 외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외에 것들을 사랑할 때 질투를 느끼신다는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는 사람이 나 외에 다른 사람을 또 사랑한다고 할 때 나는 견디기 힘든 질투를 느끼게 된다.

    결국 ‘나 외에는’ 이 알 파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뜨거운 사랑의 표현임과 동시에 배타적인 사랑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3.“다른 신들을”

    인류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를 보면 인간이 존재하는 그 어떤 시대, 그 어떤 종족, 그 어떤 지역에서도 신이 없던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원시시대는 물론이고 최첨단 현대 문명이 구가되는 오늘 이 시대에도 신은 여전히 놀라운 위력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신들이 변해왔다는 것이다. 과거 원시시대에는 토테미즘 형태로 신이 두려운 자연의 어떤 형상들의 형태로 존재했다. 고대시대로 오면서 이것이 샤마니즘 형태로 더 나아가 하나의 나름대로의 종교형태로 발전해 왔다. 근 현대에 와서 종교 외에 문화 현상 속에서도 신이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근본적인 물음이 있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단언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능력이라고 부를 현상들이 있을 뿐이다. 과거에는 인간이 이기기 힘든 동물들 그들을 신이라고 섬겼다. 번개나 태양과 같은 자연의 위대한 힘을 가진 것들을 신이라고 섬겼다.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초월적 현상들을 일으키는 영계의 잡귀들 무당들이 이들을 신으로 섬겼다.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식하고 초월적 어떤 존재들을 상정해 놓고 이를 신이라 개념화해서 여러 종교들이 섬기고 있다. 오늘 현대에 와서는 이념이나 과학 나아가 성취하고자 하는 어떤 최고의 가치들이 신으로 추앙 받고 있기도 하다.

    삼하 7:22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러므로 주는 광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참 신이 없음이니이다”

  4.“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 명령은 미혹함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나님 외에 것들을 하나님처럼 여길 수 있는 충분한 환경이 조성되어있다는 것이다. 여기 사탄의 미혹과 시험이 있다는 것을 있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보다도 더 하나님 같은 것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조화가 생화보다 더 생화처럼 헷갈리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 외에 것들이 더 하나님처럼 믿고 따르게 미혹한다. 탁닛한 스님이 왔다 해서 호들갑이다. 한 동안은 달라이라마가 어떻다고 시끄러웠다. 글께나 읽었다는 사람들도 거기에 뭐 대단한 것이 있는 양 떠들어댄다. 미혹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험이 있다. 하나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대구 참사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저들을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유대인 600만 학살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이 시험이다.

    이 명령은 선택의 결단을 촉구한다. 수 24:14-5장에서 여호수아가 촉구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미혹당하지 말고 시험 들지 말고 여호와만 섬기라는 것이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는 것이다.


III. 제 1 계명이 주는 오늘의 메시지

  1.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말자

    어떻게 보면 1계명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대단히 자존심 상하는 명령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다. 저들이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외에 자기들을 도울 자가 그 누구도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명령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선물을 사주고는 불러다가 너 아빠에게 감사하다고 해라! 라고 엎드려 절 받는 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명령을 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무지몽매하고 어리석어서 미혹당하고 시험에 빠져서 자기를 구원해 내신 하나님을 쉽게 저버릴 것을 너무도 잘 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들을 그런 멸망의 수렁에 빠지도록 버려둘 수 없기 때문에 또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이후의 우리의 삶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것이다. 이 놀라운 사랑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2. 올바른 신관을 갖자

    우리는 종교다원주의적 상황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우리가 믿는 기독교도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라고 인정하라고 강요받고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옹졸할 사람이요 배타적인 사람이라 해서 소외되기 일쑤이다.

    분명한 것은 참 신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신들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신일뿐이다. 우선 우리가 분명한 신관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참 신이신 하나님을 전해 주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공공장소의 장승을 밴다든지 타종교의 신상을 훼손한다든지 하는 극단적인 행동은 곤란하다. 그 신상을 무너뜨린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더 크게 세우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그들의 심령 속의 우상을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다.

  3. 사랑고백을 드리자

    1 계명의 핵심은 이 질문으로 대할 수 있다. “네가 나만 사랑하느냐?”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 “이처럼”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에게 물으신다. 우리가 분명하게 대답해야 한다. “주님 제가 주님만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최고의 가치요 최고의 존재 의미임을 고백 드려야 한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찬양을 진심으로 드려야 한다.


제2계명 절대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 20:4-6)
I. 2 계명의 의미

    1-4계명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앞에서 살핀대로 1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기초에 관한 계명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제 2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본 원리를 말씀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고 영이시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본 원리는 사람을 사랑하는 기본 원리와는 다르다. 먼저 영이신 하나님을 영 아닌 어떤 우상으로 형상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요, 근본적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잘못 사랑하는 것이 된다. 다음으로는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본 원리는 그분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우선적인 방법은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결국 2계명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그 기본 원리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II. 본문 연구

  1. 우상을 만들지 말라

    1) 우상이란 무엇인가?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런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 가운데 가징 상징적 사건은 레닌의 동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중국이 개혁개방이 일어나면서 거의 대부분의 도시에서 모택동의 동상이 제거되었다. 그러나 아직 북한 전역에는 김일성 동상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공산정권이 통치자의 동상을 나라 전역에 세우고 나아가 집집마다 그 사진을 붙이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뱃지를 만들어 달고 다니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민들이 늘 자기들의 통치자가 누구인지 자기는 누구의 덕으로 이렇게 잘 살고 있는지 잊지 말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인민들의 마음까지 지배하고자 하려는 의도이다.

    우상은 결국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통해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사진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힘 있게 떠오르고 지금 나와 실제로 연관된 어떤 영향력을 미치게 만든다. 그래서 그 사진을 보고 눈물짓기도 하고, 분노를 느끼기도 하고, 기쁨을 느끼게 만든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상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나아가 우리에게 영향력을 미친다.

    현대에 오면 사람들이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 우상의 자리에 오른 것들이 있다. 예컨대 돈, 재물, 인기, 명예, 권력...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우리에게 영향력을 미친다.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의 삶이 휘둘린다. 나아가 현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우상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들도 참 많다. 예컨대 이념, 주의 주장이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이념들, n 세대니 비n세대니 하는 세대간의 주장들 이런 것들이 인터넷을 통해 쉽게 사람들의 마음에 전파되어 지배하고 영향을 미친다. 이런 것들이 현대적인 우상들이라 할 것이다.



    2) 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을까?

    우상이란 실제로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이미지화한 것들이다. 부처라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부처가 지금 여기 있다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김일성 동상을 만들어 놓고 지금 김일성이 여기 있는 것처럼 상상해 보라는 것이다. 마음 속에 자꾸 돈을 떠올리면서 마음에 우상을 만들어 놓으면 실제로 돈이 그만한 힘이 있는 것처럼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상을 만든다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만한 힘이 있지 않는데 큰 힘이 있는 것처럼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우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속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속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힘이 없는 것을 힘이 있는 것처럼 속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자신도 형상화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하나님을 형상화해 놓으면 사람들이 잊지 않고 늘 눈에 보이니까 기억하고 하나님을 믿고 살 수 있어서 좋은 것은 아닌가?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셔서 어디나 계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형상화해 놓는다면 지금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대신 하나님의 형상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는가? 그래서 하나님 자신도 형상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형상화하면 그 자체가 바로 우상이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그 우상에로 제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2. 우상에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

    1) 왜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 되는가?

    이것은 예배 문제이다.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기 때문에 제사 또는 예배를 드리며 살아왔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섬기고 절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다. 이것은 고대 사람들에게나 오늘 현대 사람들에게 다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안해 낸 손쉬운 방법이 바로 우상이다. 고래로 모든 종교에 다 우상이 있고, 그 우상에 절하고 그 우상을 섬긴다.

    하나님께서 우상에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상에 절하고 우상을 섬기는 그 자체가 하나님 외에 것에게 절하고 예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상을 섬기면 그 자체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선언이며,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택하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배신 선언인 것이다. 5절 보면 하나님께서 질투를 느끼신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들 그것도 인간보다도 하찮은 존재를 하나님처럼 받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견디시기 힘든 모욕과 수치를 느끼시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로 우상에 절하거나 섬겨서는 안되는 것이다.


    2) 그러면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그 답을 알려주셨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즉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것이다.

    신령으로 예배하라! 여기서 신령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영으로 예배드리라는 것이다. 예배가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구약 여러 곳에서 이런 표현을 흔히 만날 수 있다.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라” 예를 들어 시 63을 보면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자기의 영이 영이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느끼고 더욱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사모하고 있다.

    진정으로 예배하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은 일절 보여주지 않으시고 다만 말씀으로만 역사하신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변화되고 스스로 하나님을 따르고 복종하고 섬기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시며 우리 앞에 나타나신다면 우리는 그 모습 앞에 절하고 섬길 것이다. 그러나 몸만 절하지 마음이 변화되어 온전히 섬기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말씀으로 비록 더디고 힘들지만 임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으로 변화되어 하나님 앞에 예배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신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역사하시면 우리는 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뿐 만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역사하시면 우리가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기억나게 되고 그래서 말씀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III. 제 2 계명이 주는 오늘의 메시지

  1. 아직도 내게 우상이 자리 잡고 있는지 돌아보자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우상을 만들고 있다. 즉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에 우리 마음이 사로잡힌다든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을 마음으로 깊이 의지한다든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든지...우리 안에 하나님 외에 것으로 내 마음을 지배하고, 내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자식이든, 사업이든, 심지어 나 자신이든... 그런 것들이 있다면 버려야 한다. 그것이 우상인 줄 알고 무너뜨려야 한다.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을 따를 때 다 버리고 주를 따랐던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하자.


  2. 올바른 예배를 드리자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몸과 우리의 입술만 예배를 드려서는 안된다. 우리의 영이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우리의 영이 주를 갈망해야 한다. 우리의 영이 주를 찬양해야 한다. 우리의 영이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래서 예배 안에서 우리의 영이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말씀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깨닫고,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으로 변화되고, 그 말씀으로 새롭게 결단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으로 우리의 영이 배부르고,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3. 경고가 있음을 잊지 말자

    다른 계명과 달리 이 계명에는 덧붙여진 경고가 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삼사대에까지 그 죄를 물으시겠다는 것이다. 반대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것이다. 마치 중요한 일에 상이 큰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우상숭배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제3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라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라



“너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I. 3 계명의 의미

    지난 시간에 살핀 대로 1-4계명은 전체적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1계명은 그 관계의 기초로서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2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본 원리에 관한 명령이다. 즉 영이신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지 말고 영적인 예배로 섬기라는 명령이다.

    이제 3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또 다른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삶 속에서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기 위해서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분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이 3계명의 의미를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이름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세상 만물 중에 이름 없는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를 마치시고 바로 아담에게 명하신 것은 이름을 붙이라는 것이다. 이름이 주어질 때 그 존재가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도 태어나자마자 이름부터 짓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아담에게 지으라 말씀하지 않으셨다. 직접 그 이름을 말씀해 주셨다. 출 3:13-4에 보면 “나는 여호와 곧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이름을 알려주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셨다는 것은 인간에게 당신의 존재를 알려주신다는 뜻이고, 그 이름을 매개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겠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은 특별한 이름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귀하게 여김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귀하게 인정해 드리는 것이며, 그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과의 복된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의 특권이며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



II. 본문 연구

  1.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 “망령되이”

    망령 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shawa"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없다는 어근에서 왔다. 그래서 말 뜻 그대로 번역을 해 보면 “헛되이”라고 할 수 있다.

    # “일컫지 말라”

    일컫다는 말은 히브리어 “nasa"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원래 들어올리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말 뜻을 살려서 번역해 보면 ”거명한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일컫지 말라는 말은 거명하지 말라는 뜻이다.

    #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 말을 다시 번역해 보면 “헛되이 거명하지 말라”라는 뜻이다. 이 말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가?



    1) 함부로 그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 사물 지칭하듯이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예배 때라든지 주님의 이름을 오용한다든지 또는 남용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부르는 자마다... 주기도문을 몇 번 외웠다... 이런 식의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초혼이라는 시에서 사랑하는 님의 이름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고 칭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듯이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2) 헛된 약속이나 서원에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과거나 현재나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하면 신빙성이 없으니까 자기보다 더 높은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 사람들이 왕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그 문제에 대해 왕 앞에서 그 문제에 대해 재판을 받거나 왕의 판단을 받아야 했다. 예를 들어 바울이 유대인의 고소로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받을 때 로마 시민으로서 가이사의 이름으로 호소했다. 그래서 그는 로마로 가서 황제 앞에서 그 문제에 대해 재판을 받게 되었다. 또한 사람들은 조상들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경우가 있다. 조상들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않을 것이라 해서 그 맹세를 믿어준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도 그 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라 해서 그 맹세를 믿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지키지도 못할 맹세나 자기가 지킬 생각이 없는 서원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함부로 맹세하거나 서원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레 19:12, 마 5:34)



    3) 나쁜 일과 연관되어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렘 7:9-11에 도둑질할 의도로 성전에 들어와서는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경우를 말씀한다. 악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서는 안된다. 자기의 이익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또한 서양에서는 욕이나 한탄에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God Demn, Jesus, Oh! my God... 이런 표현을 장난 삼아라도 사용해서는 안된다.

    막 13:6을 보면 사람들을 미혹할 때 주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때가 말세인 것이다.



  2.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 “죄 없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나가쉬(nagash)라는 말인데 그 뜻은 법정 용어로 “무죄!”라는 선언이다. 그런데 그 원래의 뜻은 깨끗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날만한 자격에 하자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 마 12:37을 주목하자.

    우리가 헛되이 내 뱉은 말로 정죄를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은 자들을 결코 묵과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III. 제 3 계명이 주는 오늘의 메시지

  1.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함으로 간직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 늘 조심해야 한다. 그분의 존재를 생각하면서 그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존귀한 분의 이름을 부를 때 “함 자 *자 *자를 쓰십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 그 분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를 함께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대인들처럼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대체해서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아도나이’(나의 주님)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는 것이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그 이름을 주셨다. 단 그 이름이 훼손된다든지 그 이름의 존엄이 상실되는 것을 금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부터 하나님의 이름, 예수라는 이름, 성령이라는 이름을 내게 가장 귀한 이름으로 마음 속에 간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



  2. 하나님의 이름에 책임을 지자.

    시편을 보면 시인들이 자기들의 억울함을 직접 하나님께 호소하는 예가 참 많다. 세상 법정에서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썼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호소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의 심판석상에서 들으시고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자들 특히 고아나 과부들의 이런 호소에 귀를 기울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물론 이 때 자기가 그 일에 책임을 져야한다. 당장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호소해서는 안된다. 거짓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자는 모든 심판의 판결이 자기에게 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을 활용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적절하게 활용하도록 허락해 주셨다. 그래서 실제로 성경에 여러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능력있게 활용하고 있다.

    먼저, 삼상 17:45을 보자.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앞에 나아갔다. 오늘도 우리가 대적 앞에 나아갈 대 우리 힘으로 무너뜨릴 수 없는 적 앞에 나갈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면 승리할 수 있다.

    다음으로 막 16:17을 보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것이라는 약속이다. 오늘도 우리가 영적 싸움을 싸울 때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하나 행 3:6을 보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고쳤다. 오늘 우리도 예수의 이름으로 놀라운 능력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특권인 것이다. 이 특권을 누리자.


제4계명 주일을 철저히 지키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

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

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

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으니라”(출 20:8-11)



I. 4 계명의 의미

  1-4계명은 전체적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문제를 다룬다. 1계명은 이 관계의 기초로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2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의 첫째로 예배를 제대로 드리라는 것이다. 즉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며 영적인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3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 둘째로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 4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세 번째 방법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안식일을 지키라 명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430년 동안 애급의 노예로 그야말로 죽도록 일만했던 사람들이다. 잠시라도 쉬면 채찍이 날아왔다. 저들은 나면서부터 죽는 날까지 일의 노예로 살아왔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뒤에 쉼을 주신 것이다. 일로부터 해방을 맛보게 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일은 저들을 숙명처럼 억압해 왔다. 어떤 경우에도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쉴 수 있는 권리를 허락받은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해서 일하다가 쉴 수 있는 노예가 아니라 일의 창조자로의 변신하게 된 것이다. 마지못해서 억지로 일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정복하고 다스리라” 명령하신 것을 지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다음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분하시기 위해 주신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 성막을 허락해 주셨다. 이것은 공간을 거룩하게 구분한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느 곳과 달리 거룩하게 하나님과 영적 만남을 이룰 수 있는 공간을 구분해서 만들어 주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은 시간을 구분한 것이다. 일주일 다른 날과 구분해서 하나님과 영적 만남을 이룰 수 있도록 시간을 구분해 주신 것이다. 이것은 당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구분된 장소에서 구분된 시간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긴 세월 하나님을 떠나있던 세상의 노예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탈바꿈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축복의 표현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더 확장되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그리심에서도 말로... 라고 말씀하심으로 장소의 구분과 제한을 극복하셨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안식일 대신 주일의 개념이 도입되었고 언제나 예배할 수 있는 하나님과 열린 장소 열린 시간에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제 예배의 장소와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예배하느냐 신령과 진정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 것이다.



II. 본문 연구

  1. 여호와의 안식일이다.

    이 말씀은 안식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해 준다. 신약에 오면 마 2:28에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말씀했다. 이것은 안식일의 사용을 인간 마음대로 함부로 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셨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명령이다. 우리는 안식일을 지킬 때 왜 하나님께서 이 날을 특별한 날로 정하셨는지 물어야 한다. 내 편이에 따라 이 날을 함부로 변경한다든지 이 날을 자신의 뜻대로 활용하거나 범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주님의 날이라는 뜻이다. 내 날이 아니다. 주님을 위해 써야 하는 날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날 만큼은 주님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날인 것이다. 이 날 만큼은 주님의 뜻대로 보내야 하는 날인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이 날을 놀고 쉬라고 주셨다고 자의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거룩하게 구분된 날이다.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구분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다른 날과 다르게 취급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구분해야 할 것인가?

    엿새는 세상일에 몰두하며 살았다면 이 날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몰두하며 보내는 날이다. 성전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구별된 장소라면 이 안식일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구별된 시간이다. 그러니까 엿새 동안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땀을 흘렸다면 이 날만큼은 우리의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위해 땀을 흘려야 할 것이다. 예배에 전념하고, 하나님 말씀 묵상하는 일에 몰두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우리가 주일을 지킨다고 할 때 그저 주일 예배를 성수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다른 날은 직장에 출근하지만 이 날은 출근하지 않고 레저와 오락을 위해 허락된 날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특별히 주신 날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세상일로부터 벗어나서 온전히 행하라 주신 날이다.



  3. 쉬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하루를 안식하셨다. 이 안식 참된 쉼이 구분의 핵심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들에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노동을 하도록 하셨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을 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루만은 이 일로부터 해방되게 하신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이 안식이란 에덴동산의 삶의 회복을 뜻한다.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 안에서의 쉼을 말한다. 먹고 사는 문제, 이 세상 염려 근심으로부터 떠나서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 책임지시고 해결해 주신다는 에덴동산의 아담의 믿음으로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단지 이 안식은 육체적인 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지키고 곤고한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자아가 주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며 온전한 회복을 맛보는 것을 말한다.



  4. 주님의 안식일 해석

    예수님은 기존의 유대인들과 다른 안식일 개념을 가지고 계셨다. 우선 안식일은 사람들을 위해서 있다고 말씀하셨다.(막 2:28)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정해서 이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도록 해서 이 또한 하나님의 큰 짐이 되었다. 마치 안식일이 복된 날이고 사람들은 이 날을 복되게 지켜야 하는 또 하나의 안식일의 종노릇하는 일이 생길 판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날은 사람들에게 복주시기 위해 만들어주신 날이라는 것이다. 억지로 지킬 것이 아니라 자유함과 기쁨으로 이 날을 축복된 날로 누리라는 말씀이다.

    다음으로 주일은 오히려 일하는 날이라 말씀하신다.(요 5:17) 실제로 주님께서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금하는 일을 하셨다. 물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은 다른 일이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모든 일을 다 쉬라는 뜻이 아니라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고 해석하신 것이다. 즉 선을 행하는 일과 생명을 살리는 일은 해서 다른 사람들을 진정한 안식으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자기의 의식주를 위한 일이나 생명을 죽이는 일 그리고 악을 행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모두에게 안식을 빼앗는 일이기 때문이다.



III. 제 3 계명이 주는 오늘의 메시지

  1. 안식일의 축복을 누리라

    안식일을 주신 이유는 세상의 모든 짐으로부터 이 날만이라도 자유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 5:15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애굽에서 출애굽된 것을 기억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씀한다. 그러니까 이 날은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됨을 기억하고 우리 영혼의 자유를 누리는 날이고, 죄의 삯으로 우리가 짊어지고 가는 세상의 모든 무거운 짐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날인 것이다.

    우리가 이 험악한 세월을 살면서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 날만이라도 꿈꾸고 바라보며 성령의 인도를 따르며 부분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는 복된 날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서, 성도들과의 특별한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하면서,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내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다시금 체험하고 그 삶을 누리는 것이다.


  2.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자.

    안식일은 단지 세상일을 쉬는데 그 의미가 있지 않다. 엿새 동안 소홀히 했던 하나님과의 만남을 보다 깊이 하고, 주 안에서 내 영혼이 참된 안식을 누리고, 그 동안 제대로 하지 못했던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전념할 수 있는 날이다. 보다 깊이 기도하고, 보다 철저하게 말씀을 묵상하고, 주의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안식일을 예배드리는 날로만 규정하고 이것만을 지키는 것은 바로 율법적인 신앙이 되는 것이다.


  3. 안식일의 철저히 지키자

    주 5일 근무제가 확산 일로에 있다. 주일을 껴서 연휴로 해외여행이나 여러 가지 레저 프로그램들이 확대되고 있다. 삶의 질을 부르짖으면서 여가를 갖고자 하는 사회 분위기가 점차 팽배해 가고 있다. 또한 주일에 각종 시험이나, 각종 집회나, 각종 대회가 열리는 추세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주일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걸림돌 역할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구별된 날을 구별되게 지키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우선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제5계명 효도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20:12)



I. 5 계명의 의미

  5-10 계명은 전체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문제를 다룬다. 특히 5계명은 첫 번째 부분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룬 1-4 계명과 두 번째 부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룬 5-10 계명 사이의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인간 사랑하는 것 사이의 다리를 놓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부모 사랑이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부모 효도가 인간됨의 기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런 풍조 속에서 이 5 계명은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우리는 이 5 계명을 다룰 때 특히 두 가지 문제 의식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과연 이 5 계명과 유교 문화권의 효 사상은 같은 것인가? 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인데 하나님께서 구지 개입하셔서 일일이 챙기시고 간섭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점이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이 5 계명을 살펴보자.



II. 본문 연구

  1.‘네 부모를’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 두 단어로 되어있다. 즉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모두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모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1) 부모는 육신의 생명의 근원이다.

    모든 인간은 부모를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의 하나됨의 열매를 이 땅에 존재하게 된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그리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고 먹이고 입히고 양육하여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모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인간 바로 그런 존재이다.

    우리가 인간을 사랑한다고 할 때 이렇게 가장 가까운 인간인 부모를 사랑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2) 부모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권위의 근본이다.

    모든 인간은 부모의 권위 아래 존재한다. 어려서부터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고, 그분들의 돌보심을 받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가 아무리 머리가 좋고, 아무리 출세를 하고, 아무리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도 부모 앞에서는 여전히 자식일 뿐이다. 이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 밑에 겸손히 설 때 그 사람의 인간됨이 바로 세워질 것이다.

    부모의 권위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다른 권위들도 존중하여 건강한 사회생활을 할 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사회의 웃어른(딤전 5:1)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영적 부모(갈 4:19)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나아가 그리고 국가 지도자들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권위를 세우시고 그 권위가 존중받게 하셨다. 이 권위가 존중받지 못할 때 가정이 깨지고, 교회 공동체가 무너지고, 사회가 어지럽게 되는 것이다.



    3) 부모 공경은 하나님 공경의 훈련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아버지가 되심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법을 훈련시켜주셨다. 즉 성령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은 영으로 하나님과의 부자 관계를 맺게 된다. 우리가 육신의 부모로부터 육신의 생명을 부여받았다. 마찬가지로 영의 부모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영의 생명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이제 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주님의 가르침은 확실하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처럼 영의 아버지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영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을 공경하기 위한 훈련이 되는 것이다.



  2.‘공경하라’

    히브리어로 ‘공경하다’라는 말은 db'K;(kabad)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의 본래적인 뜻은 무겁다, 또는 무겁게 한다 라는 말이다. 이 말은 소중하게 여긴다 가장 귀하게 받든다 라는 뜻이다. 영어 성경에서는 honour로 번역을 했다. 이 말은 근본적으로 명예를 높이다는 뜻이다.

    1) 수치스럽게 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 때문에 수치를 느끼지 않게 해 드리는 것을 말한다. 대단한 영광을 누리기보다는 적어도 자식 때문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이 생겨서는 안될 것이다.

    우선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에서 우선은 부모가 수치를 느끼지 않도록 해 드려야 한다. 부모를 무시하고 제 멋대로 행동할 때 부모 입장에서는 수치를 느끼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사회에서 부모가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행동해야 할 것이다. 자식이 교도소에 수감된다면 그 부모는 말할 수 없는 수치를 느끼게 될 것이다.



    2) 순종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친 내용을 자식이 마음에 새기고 그대로 순종할 때 부모는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자식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여 문제를 일으킬 때 부모는 큰 수치를 느끼게 된다.



  3.‘네 생명이 길리라’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는 자들에게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약속하셨다. 장수의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땅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점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길게도 하실 수 있고 짧게도 하실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생명의 길고 짧음이 이 부모 공경과 직접 연관되어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에게는 영생을 약속하고 계신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듯이 하나님을 잘 공경하면 이 땅에서 장수할 뿐 아니라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III. 제 5 계명이 주는 오늘의 메시지

  1.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라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지나간 과거 세대가 그 권위를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이다. 그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부모 세대가 발 빠르게 변하는 정보화 시대 흐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여 새로운 세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를 가르쳤지만 이제는 부모 세대가 점점 자녀 세대에게 묻고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무시당하기 쉽다.

  둘째, 부모의 생각이 변화하는 시대에 적절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살아온 시대와 현 시대는 너무도 다른 것이 많다. 그 결과 부모들처럼 생각하며 살다가는 뒤처지고 왕따를 당하고 성공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부모의 가르침이 그 어느 때보다도 먹혀들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자녀들이 무시하려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셋째, 자식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기간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고령화 사회로 이미 접어들었다. 점차 고령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이것은 은퇴 후에 20년 이상 살아가야 하는데 이 기간이 자식들에게 점차 짐이 되게 된다. 그래서 자식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라 말씀한다. 그분들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감사하며 그분들을 높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2. 부모의 자랑이 되라

    자식들이 많아도 부모가 자랑할 만한 자식은 따로 있다. 부모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잘한다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식이 자기에게 잘한다는 사실을 자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 뿐 아니라 믿음 때문에 세상 살이 때문에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 또한 사람들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반대로 행여라도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자식 때문에 수치를 느끼지 않게 해야 한다. 자식 교육 잘못시켜서 죄송하다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3. 부모 공경을 통해 하나님 공경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아버지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자칫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아버지를 제대로 공경하지 못하기 쉽다. 이 때 육신의 부모를 공경한 것이 지침이 되어 영의 아버지를 공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아담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공경치 못하여 창조질서를 파괴한 것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와 질서를 지키고 바로 세워감으로써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과의 관계의 가장 기초가 되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인간 사랑의 궁극적인 방향이 잡히게 되는 것이다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찌니라.” (출20:13)



I. 6 계명의 의미

  앞에서 살핀 것처럼 5-10 계명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문제를 다룬다. 다시 말해서 더불어 사는 인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5계명은 그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가까운 인간이라할 수 있는 부모를 공경함으로써 이웃 사랑의 기초를 놓아라는 명령이다. 이제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으로써 이웃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한계를 설정해 놓고 있다. 즉 이웃을 사랑하는 최소한의 행동으로 이웃의 생명을 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본문의 의미를 보다 깊이 살펴보면서 이 계명의 구체적인 내용을 탐구해 보자.



II. 본문 연구

  1. 살인의 의미

  살인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나 외의 이웃의 생명을 해치지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허락해 주신 생명을 내 뜻대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살인이다. 더 넓은 의미로 이 살인은 인간 생명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생명공간의 모든 생명을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이 말씀하는 살인의 형태를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1) 직접적인 살인/

  의도적으로 생명을 해치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인 동기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폭력으로 생명을 해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자살도 포함된다. 자기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간접적인 살인/

  우리가 직접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로 인해 다른 사람의 생명이 상함을 입는 것을 말한다.

  우선 우리의 실수로 다른 사람의 생명이 손상을 받는 것을 말한다. 교통사고나 우리의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행동으로 다른 생명이 손상을 받는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 우리의 직무유기로 다른 사람의 생명이 손상을 받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마땅해 해야 할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 손상을 받는 것을 말한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이 땅에 존재한다. 생명치고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 생명치고 이 생명공간에서 불필요하게 존재하는 것도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와 뜻 안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저들의 존재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생명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다. 더더욱 생명이 풍성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생명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대로 누려지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찬양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대 자연이 그 자체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까지 노래했다.

  살인이란 바로 이런 생명 존재를 해치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존재케 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거역하는 행위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그 자체로 방해하는 것을 말한다.



  2.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의 뜻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뜻은 한 마디로 이런 살인으로 다른 생명을 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명령 안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1) 생명 창조를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있으라” 말씀하셔서 생명들이 존재한다. 특히 인간은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존재하게 되었다. 살인은 이런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존재케 하신 것을 존재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이니 반창조적 행동인 것이다.

  어찌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창조주의 창조행위를 거역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깊이 깨달아야 한다.

  2) 생명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셨고, 그 생명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존재한다. 그뿐 아니고 그 생명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 생명 안에는 하나님의 비전이 그려져있다. 때문에 생명은 그 자체로 무한한 가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