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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출애굽기] 십계명 강해. 구약설교

에반젤(복음) 2020. 2. 15. 10:25



십계명강해

                       기둥교회  박찬휘 목사

 

1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

 

 

 

십계명은 성서에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한가지는 출애굽기 20장의 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신명기 5장의 것입니다. 두 계명이 어떻게 다른 지 여부와 관계없이 이 계명들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이스라엘과 맺는 창조주의 계약입니다. 기본적인 이 계명들로부터 율법의 기본적인 토대들이 정리되고 보전되었습니다.

 

이 계명은 예수님에게로 와서 새로운 계명으로 주어졌습니다. 예수의 계명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정신을 압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마태복음 19장에서 새 계명을 언급하였으며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을 통하여 계명의 정신을 말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는 마태복음 22:34-39에서 어느 계명이 큰지를 묻는 율법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의 계명의 정신은 크게 두가지로 나타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여 계명을 두가지 차원으로 압축하였습니다.

 

구약의 계명들은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라는 문구를 초두에 삽입합니다.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을 주도하여 낸 여호와는 그들의 삶과 신앙에 계명들을 요구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너희가 만일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한 14:15)고 명함으로써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한 존재로 부각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10가지로 나누어 전한 것입니다. 구약의 십계명이 오늘날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질문에 계명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나는 율법(계명)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하려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 (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과 인간에 대한 계명 (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으로 나누어집니다. 십계명을 요약하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6-41)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기본 정신은 사랑이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내용을 살펴 봄으로써 삶의 기준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1계명인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는 계명은 다른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라도 절대자인 하나님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분에게서 생명이 나오고 그분에 의해 생명이 보존되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분를 대신 하는 모든 것은 거짓 신이며 우상입니다. 인류는 과학이나 기술을 하나님으로 생각하여 이것들을 섬기며 경배하려는 시도도 해보지만 그러나 창조자는 한 분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에 대하여 경고하며 나훔 선지자를 통해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나훔 1:1-2)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 3:95은 이교도인 느브갓네살조차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을 칭찬하고 있다. "저들의 하느님께서, 어명을 어기면서까지 목숨 걸고 당신만을 믿고 저희의 신 아닌 다른 신 앞에서는 절하지도, 섬기지도 않는 이 신하들을 천사를 보내시어 구해 내셨구나.(3:95)

 

신명기 32:12"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45:6에서도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이가 없는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고 하여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는 다신교 국가였습니다. 정복한 모든 지역의 종교를 수용하고 태양신을 그 으뜸으로 삼아 숭배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까닭에 다른 신들의 신전에 제물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이런 태도는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신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이었던 것입니다.

 

데키우스는 로마 제국의 모든 시민들이 신전에 나와 제물을 바칠 것을 명령했습니다. 제물을 바친 자들에게는 제사증서(libellus)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항상 지니고 다녀야 할 통행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만일 검문에서 이 증서를 제시하지 않으면 그는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투옥되었고 제사를 강요당하였습니다. 감독 코르넬리우스(Cornelius)와 히폴리투스(Hippolytus)는 이 박해기에 사르디니아(Sardinia)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배교자와 고백자, 순교자의 세가지로 나타났습니다. 배교자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제사를 지냄으로 석방된 자들과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지만 어떤 방법으로 얻었든지 '제사증서'를 소유해서 체포를 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자들은 희생제사를 드리지는 않았지만 제물을 사르는 불 속에 향을 뿌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순교자는 말 그대로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들이며, 고백자는 투옥되어 고난을 당했지만 믿음을 버리지 않은 채 박해가 느슨해지고 혹은 끝이 났을 때 석방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데키우스 박해는 251년 데키우스가 고트족(the Gothic)과 싸우다 전사함으로 끝이 났습니다

 

 

223-235 A.D.년경(혹은 225년에) 순교한 타티아나는 주님을 부인하고 아폴로를 경배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너나할 것 없이 순교를 가장 축복된 목표로서 염원하였는데 경건하고 순결한 타티아나 역시 배교를 강요받으며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심한 매질을 하고는 그녀의 신체를 톱으로 절단하고 굶주린 사자에게 던졌습니다. 그러나 사자들도 해하지 않자 아버지와 함께 목베임을 당하여 순교하였습니다.

 

 

155-160년이나(트라얀 황제의 통치기) 161-180(우리에게 '명상록'으로 잘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통치기) 중의 어느 해, 222/23일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폴리갑(Polycarp)"86년 동안 나는 그의 종이었습니다. 그 동안 그분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하신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여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여호수아 24장을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불러 모아놓고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4:15)고 하였습니다.

 

시편기자는 16:4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기로 다짐합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우리는 신약성서를 통하여 우리 예배의 주인을 만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4:12)

 

하나님이신 주님만 홀로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2006. 7 23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둥교회 목사 박찬희



2계명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 우상에 절하지 말라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5:8-10)

 

오늘은 교회사 속의 아름다운 순교자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제2계명을 생각해보겠습니다. 3세기 경 지금의 중부 터어키 지역인 안디옥의 피시디안(Pisidian)이란 곳의 이교도 귀족가문에서 한 여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마리나(ST. MARINA)였습니다. 마리나는 12세가 되던 해에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두 순교를 당하거나 옥에 갇혀버려서 세례를 받지 못해 늘 세례받기를 갈망했습니다.

 

마리나가 살던 시기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맹렬했던 때였습니다. 마리나 겪은 최초의 박해는 아버지에게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자기의 딸이 예수를 믿는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격노해서 딸을 미워하며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여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오는 학대를 견뎌냈습니다.

 

15세가 되었던 어느 날, 올림부리우스(Olymbrius)라는 사람이 지역총독이 되어 부임해왔습니다. 마리나를 본 그는 어찌나 아름답고 예뻤던지 아내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마리나는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작정했습니다"라고 말하며 멀리 도망갔습니다. 총독은 안디옥으로 마리나를 잡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이교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회유했습니다. 그러나 마리나의 신앙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나는 한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하여 배웠고 그 분만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나는 나의 창조주에게 드릴 영광을 생명 없는 우상들에게 바칠 수는 없습니다" 총독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마리나의 마음을 되돌리려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마리나는 더욱 담대히 자기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의 충성스런 종으로 남아있기를 원합니다. 그 누가 나를 박해한다해도 그는 결코 나의 사랑을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어 내시고 죽으신 가장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몸에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 분을 위하여 고난받고 심지어 죽는 것을 마다하겠습니까? 당신의 협박도 나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나의 주님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나의 소망을 지켜주시고 나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마리나가 신랑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며 완고하게 신앙을 굽히지 않자 극렬한 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구타해서 흘러내린 피로 온 땅이 물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통을 감내하며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화가 난 올림부리우스는 그녀를 기둥에 묶게 하고는 쇠갈고리로 살점을 뜯어내게 하였습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앙상하게 뼈가 드러났습니다. 기둥 아래 땅이 흘러내린 그녀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잔인한 올림부리우스 마저도 솟구치는 그녀의 피를 더 이상 볼 수 없어 자기 얼굴을 손으로 감싼 채 고개를 돌리고 고문을 중지시켰습니다. 어둡고 지저분한 감옥 속으로 내던져진 마리나는 고통 중에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자비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받아주소서. 상처받은 나를 고쳐주소서. 영광을 받으실 당신의 이름으로 내가 대적자를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옵소서"

 

밤이 되자 고통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마리나에게 사탄이 찾아왔습니다. 무시무시한 환영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나고 이상한 소리가 땅으로부터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마리나는 마음을 모으고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기적같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갑자기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황금 십자가가 그녀의 머리 위를 덮더니 눈처럼 흰 비둘기가 머리위로 내려앉았고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둘기 마리나여 기뻐하라. 너는 악한 대적을 물리치었도다. 너는 영원한 하늘의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마리나는 기쁨으로 충만해졌고, 바로 그 때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이 깨끗이 치료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침이 되자 총독이 다시 마리나를 불러내었습니다. 그런데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가던 여자가 너무나 아름답고 건강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총독은 "우리의 신들이 자비를 베푼 것"이니 신들에게 경배하라고 회유했습니다. 그때 마리나가 대답했습니다. "나를 치료하신 분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영혼과 몸을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다시 고문이 가해졌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이성을 잃은 총독은 초를 한다발 가져오게 해서는 마리나의 몸의 부분 부분을 그을리게 했다. 촛불 더미가 닿는 곳마다 검게 타들어 갔지만 그녀는 그 고통을 끝까지 견뎌내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극렬한 시험에서 이겨 당신에게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당신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도록 나의 죄를 씻는 세례의 물을 내려주시고 나로 하여금 그것을 건너 당신의 것이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신앙을 지키는 마리나를 보고 이제 더 이상 고문도 필요없다고 생각한 총독은 큰 물통을 준비하게 하고 아구까지 물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마리나의 온몸을 묶고 물통 속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마리나는 통속에서도 기도를 드렸습니다. "죽음과 지옥의 사슬을 끊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의 종을 살피시고 나를 묶은 올무를 벗겨주옵소서. 이 물이 나를 부활과 영생으로 이끄는 거룩한 세례의 물이 되게 하옵소서"

 

통 속에 던져지자마자 하늘로부터 마리나에게 빛이 내려 비취었고 새하얀 비둘기가 부리에 황금 화관을 물고 와서 머리 위를 맴돌다가 머리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 후 하늘로부터 마리나의 머리 위로 장미꽃이 뿌려졌습니다. 그와 함께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그대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손이 베풀어주시는 시들지 않고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으라." 모든 사람들이 이 땅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빛을 보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불타는 기둥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과 그 위로 형언할 수 없는 빛 가운데 십자가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들도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들도 기독교인들입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기독교인들입니다" 총독은 군중들의 갑작스런 회심에 극렬하게 화가 났고 그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날에 15천명의 사람들이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마리나 역시 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목이 베어지기 전에도, 마리나는 군중들을 향하여 신앙을 지키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마리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이제 곧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순교했습니다.

 

 

우리는 제2 계명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계명을 잘못이해하면 조각이나 동상 등이 모두 우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예술품이나 기념물으로서의 조각이나 동상 등을 우상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2계명이 말하는 것은 그 조각이나 동상등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히는 것을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교회에는 많은 상징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조항을 잘못이해하면 교회 안의 모든 상징을 우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징과 우상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상징은 본질을 보여주는 표식이지 경배받아야 할 본질 그 자체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데 있어서 상징적인 것은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본질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상징은 신앙을 독려하고 심화시키는데 유용합니다. 상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면을 보게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의 법궤나 성막등은 모두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 안에는 상징들이 우상이라는 생각에서 너무나 많이 사라졌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그린 그림이라든지 십자가 등은 모두 상징입니다. 그 누구도 그것이 예수님 자신이고 십자가 자체가 섬김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상징들을,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주님을 생각하고 보게 하는 도구들로 사용될 때에는 유익합니다.

 

2계명은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 것과 형상을 만들어 그것들에게 절하고 섬기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2계명은 제1계명(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과 연관되어서 좀더 구체적으로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있는 조항입니다.

 

나훔 1:14절에도 오늘의 계명과 같이 우상숭배에 대하여 강력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예비하리니 이는 네가 비루함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계명을 확실히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유대 총독으로 발령이 난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로마 황제의 초상과 상징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유대인들이 격렬히 저항하여 빌라도가 그것들을 버리고 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유일신 사상과 강력히 연관되어 있는 제1, 2계명은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좀더 확대하여 가르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19-25을 보면 하나님 대신 재물(mammon)을 섬기는 일이 우상이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재물을 땅에 쌓는 것이야말로 몸의 등불인 눈을 어둡게 만드는 것이며 이는 재물을 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마음의 우상숭배를 경고하신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부수적인 것을 필수적인 것으로, 영원한 것을 유한한 것으로 대체하는 모든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등이 모두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높이고 앞세우면 하나님은 그를 징계하십니다. 본문은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5:7-21)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숭배하지 말라는 금지명령인 동시에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께서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끊이지 않고 변함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2006. 7. 30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둥교회 목사 박찬희

 


[3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 20:7(5:11)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많은 부분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기쁨이며 능력입니다. 시편기자는 148:13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다"고 했습니다. 또한 잠언 18:10"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홀로 높으시며 천지에 그 영광을 드러내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그에게 피하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그러므로 시편 66:4"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할찌어다"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려야 합니까? 시편 148:5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기독교에는 여러 교단들이 있습니다. 처음에 교회는 하나였습니다. 예배의식도 하나였고, 드리는 기도도 하나였고, 신앙고백도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1054년에 와서 오늘의 그리이스와 아프리카, 러시아와 동부 유럽을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와 로마와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로 나뉘어졌습니다. 동방교회는 동방정교회라고 부르고 서방교회는 로만-카톨릭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때까지도 예배의식이나 기도, 교회의 제도는 거의 일치했었습니다. 그런데 1517년에 와서 당시 로만-카톨릭이 면죄부를 팔고, 사제들이 성직을 매매하는 등 타락의 길을 갔습니다. 그 때에 마틴 루터가 면죄부로 죄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며 루터교가 탄생했습니다. 이후 교회는 성공회와 감리교 장로교로 나뉘었습니다. 그러다가 장로교가 미국에 들어오면서 사분오열로 분열되었고, 감리교도 성결교회, 구세군, 오순절교회 등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그 후 이 교회는 한국에 들어와 수백개의 교파로 분열되었습니다. 한국의 장로교 교파만 해도 28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한국의 교회가 양적으로 큰 교회가 되었지만 교회분열의 잘못은 씻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각기 제도가 달라지고 예배 의식도 달라졌습니다. 특히 종교개혁 당시 아주 급진적인 그룹들은 교회에서 피아노나 오르간을 사용하는 것도 금지하고, 십자가도 우상이라고 해서 떼어냈습니다. 예배의식도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성만찬도 사람들이 우상처럼 생각한다고 해서 일년에 한 두 번 부활절과 성탄절에만 시행했습니다. 성직자의 예복도 당시 제네바의 법률가들이 입었던 까운으로 대치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1500년간 기독교 안에 이어져 오던 전통을 완전히 무시해버린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날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버리고 단순화시키는 것이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도신경은 성경에 없고 로만-카톨릭이 만든 것이니 고백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기도문도 무슨 주문과 같으니 예배 때에 드리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평신도가 축도할 수 있고, 설교도 평신도가 돌아가며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 건물도 필요없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성만찬도 평신도가 집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모두가 전통과 형식은 무조건 나쁘다. 성경과 상관없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만찬 한가지만 볼까요? 주님께서는 모일 때마다 즉 예배할 때마다 성만찬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2세기의 기독교 변증가 저스틴의 기록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이 말씀을 따라 주일에 모이면 반드시 성만찬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도 전통도 모두 무시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서만 예배하고 영광을 드려야 함에도 경배와 찬양이란 명목으로 사람들을 위한 노래로 일색하는 곳도 많습니다. 성서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오히려 성서와 역행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드릴 마땅한 영광을 사람에게로 가로채고, 자기들의 생각대로만 합니다. 그래서 자기들 생각과 다르면 교회를 분열시켜 교단을 만들고 거기서 또 분열하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언제나 동시에 행할 의무입니다. 시편 29:2"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반대로 인간이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드리는 것은 중구난방으로, 자기 멋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거룩한 옷'이란 일정한 형식과 질서 즉 외형적인 모양을 질서있고 규모있게 갖추라는 말입니다.

 

근래에 세계의 모든 교회들과 한국의 교회들은 종교개혁 당시 급진적인 영향으로 잃어버린 많은 것을 회복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의식에서는 지난날 잃어버렸던 많은 순서들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이 순서들은 초대교회에서부터 계속되어 왔던 순서들입니다. 예를 들어 예배의 처음에 목사와 성도들이 인사를 나누는 것이라든가 성도들이 앉아서 예배를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참여하여 일어서고 앉으며 입술로 고백하고 말하고 찬양하고 서로 인사하는 것 등이 그렇습니다. 또한 성만찬도 교단이 정한 예배 예전에 따라 매주 혹은 자주 행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교단들은 예배 예식서를 발간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 예식서들은 모두 초대교회로부터 루터, 칼빈, 웨슬리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이어온 예배모범을 따르고 있습니다. 목사가 교회력에 따라 다른 색의 스톨을 가운 위에 걸치는 것이나 강단에 강단보를 덮는 것도 그렇습니다. 또 교회 안에 각종 성화를 게시하거나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하는 것도 그런 일환입니다. 또 모든 교회가 주님의 생애를 따라 일년을 구분한 교회력을 사용하는 것과 각 주일에 해당되는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도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것을 공동성서일과라고 하는데 이것을 가지고 설교하면 성도들은 적어도 삼년에 한번씩은 성경을 한번 읽게 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에 형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형식이 필요없다면 왜 우리가 교회에 모여 예배하겠습니까?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면 덥다고 런닝바람으로 앉아 예배해도 되고, 누워서 기도해도 되고, 다리를 꼬고 앉아 예배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형식은 파괴해야할 것이 아니라 다듬고 정제시켜서 마음과 함께 준비되고 드려져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영광은 마음과 형식을 다하여 즉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29:2"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경배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이 세상 그 어느 것 보다 아릅답습니다. 8:9에 보면 시편기자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찬양합니다. 이 찬양은 오늘 우리의 찬양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이름이 아름답다고 했을까요?

 

 

1.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18:11"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고 말합니다. 그 어떠한 대적이, 문제가 에워싸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사슬을 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124:8에 보면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도움이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아름답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2.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8:24에 보면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은 성도가 그 이름을 부를 때에 응답하십니다.

 

3. 구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고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0:10에서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찌어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요한복음 20:31에도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되기에 하나님의 이름은 존귀와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40:13"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그 앞에서 정직히 행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4:5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름을 의지함으로써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말은 '헛되이, 믿음없이, 의식없이' 그저 내뱉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무의미하게 말하고, 천박스럽고 말하고, 거짓된 목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위증하거나 거짓 맹세하는 것을 금지하는 계명입니다. 레위기 19:12"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명령합니다. 또한 이교도의 주문처럼 되뇌는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무의미하게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아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안에서 경건하고 신중하게 부르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기에 경배하는 마음으로 존귀하게 불러야 합니다.

 

이 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행하면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형벌을 면치 못한다는 말입니다. 레위기 24:16"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찌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 이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다하였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마땅히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입술의 열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화롭게 한다고 해도 행실이 올바르지 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8:21"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흠을 잡힌다면 그들은 사람의 잘못만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까지 욕합니다. 레위기 21:6은 그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과 삶의 모습이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6)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고 망령되게 하는 죄를 범치 말고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림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56:6-8을 보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의 예배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면 하나님도 우리의 이름을 사랑스럽게 부르시고 형통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2006. 8. 6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둥교회 목사 박찬희

 

 

[3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 20:7(5:11)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많은 부분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기쁨이며 능력입니다. 시편기자는 148:13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다"고 했습니다. 또한 잠언 18:10"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홀로 높으시며 천지에 그 영광을 드러내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그에게 피하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그러므로 시편 66:4"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할찌어다"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려야 합니까? 시편 148:5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기독교에는 여러 교단들이 있습니다. 처음에 교회는 하나였습니다. 예배의식도 하나였고, 드리는 기도도 하나였고, 신앙고백도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1054년에 와서 오늘의 그리이스와 아프리카, 러시아와 동부 유럽을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와 로마와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로 나뉘어졌습니다. 동방교회는 동방정교회라고 부르고 서방교회는 로만-카톨릭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때까지도 예배의식이나 기도, 교회의 제도는 거의 일치했었습니다. 그런데 1517년에 와서 당시 로만-카톨릭이 면죄부를 팔고, 사제들이 성직을 매매하는 등 타락의 길을 갔습니다. 그 때에 마틴 루터가 면죄부로 죄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며 루터교가 탄생했습니다. 이후 교회는 성공회와 감리교 장로교로 나뉘었습니다. 그러다가 장로교가 미국에 들어오면서 사분오열로 분열되었고, 감리교도 성결교회, 구세군, 오순절교회 등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그 후 이 교회는 한국에 들어와 수백개의 교파로 분열되었습니다. 한국의 장로교 교파만 해도 28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한국의 교회가 양적으로 큰 교회가 되었지만 교회분열의 잘못은 씻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각기 제도가 달라지고 예배 의식도 달라졌습니다. 특히 종교개혁 당시 아주 급진적인 그룹들은 교회에서 피아노나 오르간을 사용하는 것도 금지하고, 십자가도 우상이라고 해서 떼어냈습니다. 예배의식도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성만찬도 사람들이 우상처럼 생각한다고 해서 일년에 한 두 번 부활절과 성탄절에만 시행했습니다. 성직자의 예복도 당시 제네바의 법률가들이 입었던 까운으로 대치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1500년간 기독교 안에 이어져 오던 전통을 완전히 무시해버린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날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버리고 단순화시키는 것이 개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도신경은 성경에 없고 로만-카톨릭이 만든 것이니 고백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기도문도 무슨 주문과 같으니 예배 때에 드리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평신도가 축도할 수 있고, 설교도 평신도가 돌아가며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 건물도 필요없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성만찬도 평신도가 집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모두가 전통과 형식은 무조건 나쁘다. 성경과 상관없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만찬 한가지만 볼까요? 주님께서는 모일 때마다 즉 예배할 때마다 성만찬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2세기의 기독교 변증가 저스틴의 기록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이 말씀을 따라 주일에 모이면 반드시 성만찬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도 전통도 모두 무시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서만 예배하고 영광을 드려야 함에도 경배와 찬양이란 명목으로 사람들을 위한 노래로 일색하는 곳도 많습니다. 성서로 돌아간다고 하면서 오히려 성서와 역행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드릴 마땅한 영광을 사람에게로 가로채고, 자기들의 생각대로만 합니다. 그래서 자기들 생각과 다르면 교회를 분열시켜 교단을 만들고 거기서 또 분열하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언제나 동시에 행할 의무입니다. 시편 29:2"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반대로 인간이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드리는 것은 중구난방으로, 자기 멋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거룩한 옷'이란 일정한 형식과 질서 즉 외형적인 모양을 질서있고 규모있게 갖추라는 말입니다.

 

근래에 세계의 모든 교회들과 한국의 교회들은 종교개혁 당시 급진적인 영향으로 잃어버린 많은 것을 회복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의식에서는 지난날 잃어버렸던 많은 순서들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이 순서들은 초대교회에서부터 계속되어 왔던 순서들입니다. 예를 들어 예배의 처음에 목사와 성도들이 인사를 나누는 것이라든가 성도들이 앉아서 예배를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참여하여 일어서고 앉으며 입술로 고백하고 말하고 찬양하고 서로 인사하는 것 등이 그렇습니다. 또한 성만찬도 교단이 정한 예배 예전에 따라 매주 혹은 자주 행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교단들은 예배 예식서를 발간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 예식서들은 모두 초대교회로부터 루터, 칼빈, 웨슬리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이어온 예배모범을 따르고 있습니다. 목사가 교회력에 따라 다른 색의 스톨을 가운 위에 걸치는 것이나 강단에 강단보를 덮는 것도 그렇습니다. 또 교회 안에 각종 성화를 게시하거나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하는 것도 그런 일환입니다. 또 모든 교회가 주님의 생애를 따라 일년을 구분한 교회력을 사용하는 것과 각 주일에 해당되는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도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것을 공동성서일과라고 하는데 이것을 가지고 설교하면 성도들은 적어도 삼년에 한번씩은 성경을 한번 읽게 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에 형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형식이 필요없다면 왜 우리가 교회에 모여 예배하겠습니까?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면 덥다고 런닝바람으로 앉아 예배해도 되고, 누워서 기도해도 되고, 다리를 꼬고 앉아 예배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형식은 파괴해야할 것이 아니라 다듬고 정제시켜서 마음과 함께 준비되고 드려져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영광은 마음과 형식을 다하여 즉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29:2"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경배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이 세상 그 어느 것 보다 아릅답습니다. 8:9에 보면 시편기자는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찬양합니다. 이 찬양은 오늘 우리의 찬양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이름이 아름답다고 했을까요?

 

 

1.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18:11"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고 말합니다. 그 어떠한 대적이, 문제가 에워싸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사슬을 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124:8에 보면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도움이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아름답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2.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8:24에 보면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은 성도가 그 이름을 부를 때에 응답하십니다.

 

3. 구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고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0:10에서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찌어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요한복음 20:31에도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되기에 하나님의 이름은 존귀와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40:13"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그 앞에서 정직히 행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4:5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름을 의지함으로써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말은 '헛되이, 믿음없이, 의식없이' 그저 내뱉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무의미하게 말하고, 천박스럽고 말하고, 거짓된 목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위증하거나 거짓 맹세하는 것을 금지하는 계명입니다. 레위기 19:12"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명령합니다. 또한 이교도의 주문처럼 되뇌는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무의미하게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아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안에서 경건하고 신중하게 부르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기에 경배하는 마음으로 존귀하게 불러야 합니다.

 

이 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행하면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형벌을 면치 못한다는 말입니다. 레위기 24:16"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찌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그 이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다하였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마땅히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입술의 열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화롭게 한다고 해도 행실이 올바르지 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8:21"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흠을 잡힌다면 그들은 사람의 잘못만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까지 욕합니다. 레위기 21:6은 그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과 삶의 모습이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6)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고 망령되게 하는 죄를 범치 말고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림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56:6-8을 보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의 예배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면 하나님도 우리의 이름을 사랑스럽게 부르시고 형통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2006. 8. 6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둥교회 목사 박찬희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히 지키라

 

20:8-11(5:12-15)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준수를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준수를 명하신 것은 인간의 시간을 빼앗아 속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 주신 선물입니다. 인간을 위한 좋은 제도로서 주신 것입니다. 엿새동안 힘써 일한 자에게 쉼을 갖게 하시는 배려입니다. 칠 년에 한번 쉬고 경작하던 토지를 쉬게 하는 안식년 제도나 40년에 한번 노예들을 해방하고 빚을 탕감해주는 희년제도 등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날을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거룩히 지킨다는 말은 구별하여 지킨다는 것입니다. 엿새동안이 자기 삶을 위한 시간이라면 제7일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시간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을 위한 시간인 동시에 사람을 위한 시간도 됩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고 즉 일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 12:12을 보면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은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한 시간으로 구별하여 두는 것이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 보면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쓰는 날입니다. 엿새동안 하지 못한 선한 일을 도모하는 날입니다.

 

안식일 준수 계명은 출애굽기 20:9에 의하면 엿새 동안은 힘써 일을 행할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일하는 자에게 안식이 주어져야 함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일하는 것이 아담에게 내린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은 저주가 아닙니다. 단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일이 기쁨의 일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힘겨운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쁨이 고통으로 변한 것이 저주이지 일 자체가 저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5:17에 보면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저주스런 것을 하십니까? 아니지요? 이 말씀을 따라 생각해 보면 일은 결코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은 인간의 본분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안식일 계명의 참 의미는 힘써 일한 뒤에 쉼을 얻어야 하며, 일상의 삶과 일에서 구별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경배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힘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또한 복잡한 일상으로 소홀하였던 자신의 영과 육을 돌보고 가정과 교회를 돌보는 일도 이 날에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속박하는 계명이 아니라 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배려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주신 은혜입니다.

 

또한 마가복음 2:23에 보면, 안식일에 예수님 일행이 밀밭 사이로 지나실 때 제자들이 길을 열기 위해 이삭을 잘랐는데 바리새인들이 "어찌해서 당신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할 일을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시며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안식일에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오신 이후 제자들은 얼마동안 안식일을 준수했습니다. 아직 유대교와 분리되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는 안식 후 첫날에 모여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떡을 떼며 주님을 회상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바로 주님이라는 것을 주님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에 모여 예배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일의 시작입니다. 주일에 모였던 것은 발견된 초대교회 문서들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안식일은 물론 토요일입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만물을 지으셨고 7일째 되는 날 쉬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안식 후 첫날 일어났습니다. 즉 우리가 요일로 따지는 일요일입니다. 하나님이 월요일에 빛을 만드시고, 화요일에 --, 수요일에 --을 만드신 것이 아님을 명심하세요. 첫째 날, 둘째 날---입니다. 즉 일곱째 되던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다음 날 즉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신 그 첫째 날 부활하셔서 흑암을 밝히는 빛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날을 '주님의 날' '주일'이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주님의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과 함께 부활할 수 없다면 그것 역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주님과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주님의 부활의 날에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 중심의 신앙이지요. 그런데 유대교는 주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주일을 외면하고 아직도 안식일을 지킬 것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일파 중 이단적인 교회들 중에는 이런 유대교적 생각을 가지고 안식일을 주장합니다. 그것은 명백히 그리스도(예수님) 중심의 신앙이 아닙니다.

 

안식일이 주님 오시기 전 즉 구약의 개념이라면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의 신약의 개념은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완성입니다. 구약에 예언된 것들이 주님을 가리키고 있으며 구약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그림자라는 것이지요.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기에 우리는 이제 안식일 준수라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주님을 경배하고 주의 날에 모이는 것입니다. 주의 날은 사람들에게 복된 날입니다. 구원을 이루신 날이고 소망을 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마지막의 영원한 안식을 얻기까지 이 땅에서 힘쓰고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안식일 제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준수명령은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오심으로, 주님을 경배하고 주님 안에서 쉼을 얻는 것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주님은 막 2:27에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 계명과 연관하여 볼 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말을 어떻게 지낸다는 말일까요? 아직도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들은 주일에 물건을 사거나 금전을 지불하고 버스를 타는 것도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앞뒤조차 가리지 못하는 생각입니다. 만약 그들이 율법대로 살려 한다면 그들은 여전히 주일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안식일에 소나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제 안식일은 주님 이후로 새롭게 해석되고 지켜지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안식을 주시는 주님께서 율법에서 자유롭게 하셨고 율법의 정신을 주님 안에서 새롭게 하셨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안식일에 행할 일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그 날에 주님께 예배하고 만물을 지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날은 구별된 날입니다. 주님이 행하셨던 일을 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날입니다. 소극적인 준수가 아니라 적극적인 시행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안식일이라는 그림자 만을 잡지말고 이제는 그 그림자의 실체이신 주님을 경배하고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날을 지키는 것은 주님의 제자들의 의무이자 특권이고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게 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영과 육의 복을 얻을 것입니다.

 

2006. 8. 13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둥교회 목사 박찬희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5:16)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우리는 지금까지 1-4계명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계명을 공부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사람에 대한 계명입니다. 오늘의 제5계명은 제1계명이 말씀하는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계명과 대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계명을 주시면서 제일 먼저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1계명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를 말씀한다면 오늘의 제5계명은 가시적이고 육적인 근원인 부모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5계명을 통하여 부모에 대한 순종과 존경과 감사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와 감사를 배우게 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동시에 인륜의 질서를 바르게 세우는 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레위기 20:9절을 보면 부모에게 불효한 자는 극형에 처하도록 하였습니다. "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 그가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였은 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면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오늘은 동양 고전인 명심보감을 예로 들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부모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입니다. 1계명부터 제5계명까지는 하나님을 공경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에게 나아가 경배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얼굴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6:29-30을 보면 요셉이 부친을 모셔오게 하고는 권좌에서 기다리지 않고 친히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부친을 맞으며 그에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싸 안고 울었습니다. 그 때에 부친이 요셉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 또한 신명기 16:16"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라고 명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곳에서 하나님께 얼굴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계신 곳을 찾아 얼굴을 보이는 것이 효도입니다. 명심보감 효도편에 보면 身體髮膚受之父母하니 不敢毁傷孝之始也라고 했는데 "우리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다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조심하여 자기 몸을 잘 보존하라는 말도 됩니다만, 좀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자식의 몸이 아프면 부모는 마음으로 아파합니다.

 

저는 동생이 군에서 사병들에게 크레모아라는 폭탄을 다루는 교육을 하다가 후임자의 조작 실수로 폭탄뇌관이 터지는 바람에 몸을 다쳐 후송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병원에 가시기까지 몇 일을 식사도 마다하셨습니다. 저는 그 때 처음으로 어머니께서 우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언제나 자식 앞에서 꿋꿋하고 절대로 약한 모습이나 약한 말을 하지 않으셨던 어머니인데 그 날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우셨습니다.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이 가장 큰 불효라고 하지요? 이 말을 좁혀 보면 부모 앞에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도 불효입니다. 근래에는 삶이 바쁘고 하는 일이 여의치 못해 부모를 찾아 얼굴을 보여드리는 것이 특별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풍족히 용돈을 보내고 좋은 선물을 보내드린다고 해도 일년 내내 얼굴한번 비치지 않는다면 이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심보감을 또 인용해보면 "父母在어시든 不遠遊하며 遊必遊方이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계시면 멀리 떠나서 오랫동안 집을 비워서는 안 되고, 어디를 갈 때는 반드시 가는 곳을 말씀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보이지 않으면 부모는 걱정합니다. 부모가 걱정하시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은 부모에게서 자신을 숨기지 않고 자기 얼굴을 보이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들을 보면 솔로몬은 왕이 된 후에도 어머니 밧세바의 말을 귀하게 여기고 존경했습니다. 왕상2:20을 보면 밧세바가 솔로몬에게 한가지 작은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 때 솔로몬이 즉시 대답하며 "내 어머니여 구하시옵소서 내가 어머니의 얼굴을 괄시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부모의 말을 귀하게 여기고 거역하지 않는 것이 공경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5:16공경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바드' '무겁다'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부모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지 말라. 무시하지 말라. 신중하게 들으라는 것입니다.

 

명심보감을 보면 "아버지께서 부르시거든 즉시 대답하며, 손에 일감을 잡고 있으면 일손을 놓고, 음식이 입에 들었으면 토해내고서라도 달려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모의 말씀을 가장 귀하게 여겨 가장 먼저 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1:8"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부모의 훈계와 법은 하나님 안에서 지켜져야 함을 성경은 또한 말씀합니다. 6:1"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뜻에 맞는 일일 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명심보감에는 부모님께서 혹시 잘못하시는 일이 있거든 바로 잡아 드리되 그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세상의 효도와 기독교의 효도관의 차이가 있습니다. 부도덕하고 불의한 일이라면 공손히 주 안에서 권면하여 바로잡아드리는 것이 성경적 효도입니다. 우리나라는 제사문제로 부모와 자식간에, 자식들 간에 문제가 일어나곤 합니다. 제사 때문이라는 핑계로 찾아가 뵙지 않는 것은 불효입니다. 그런데 효도한다고 제사상에 넙죽 절하는 것도 불효입니다. 이는 주 안에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언 15:20"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고 했습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고 그것이 결국은 진정으로 부모를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잠언 23:25"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셋째, 최선을 다하여 공경해야 합니다.

 

한자의 효도 효() 자는 늙을 로() 자 밑에 아들 자() 자가 붙어 있는 모양입니다. 즉 아들이 연로한 부모를 업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아비가, 어미가 자식을 등에 업어 키웁니다. 이와같이 장성한 자식이 이제는 다시 그 아비 어미를 등에 업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효입니다.

 

명심보감에 또 보면 "경행록에 이르기를,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섬기면 효자가 될 수 있다"(景行錄云 以愛妻子之心으로 事親卽曲盡其孝)는 말이 있습니다. 선후를 구별하고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바로 그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이 효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은 이 말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6:1-3) 6:1"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듯이, 주님을 섬기듯이 그런 마음으로 진심으로 정성을 다하여 하라는 뜻도 있습니다.

 

명심보감에 "효자가 부모를 섬기는 일은 일상에서 공경을 다하고, 봉양할 때는 즐겁게 하고, 병드셨을 때는 염려를 다하고, 돌아가셨을 때는 슬픔을 다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엄숙함을 다해야 한다"(子曰 孝子之事親也居卽致其敬하고 養卽致其樂하고 炳卽致其憂하고 喪卽致其哀하고 祭卽致其嚴이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때나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 요즘은 자식이 상전이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고 있습니다. 부모와 한 상에 앉아서도 자식 앞에 좋은 것을 놓아두고, 자식 먹이기에 바쁜 부모들이 많습니다. 부모가 수저를 들기도 전에 자식 먼저 먹이려 달려드는 부모들도 많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상놈"과 같다고 합니다. 여기서 상놈이란 말은 배우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명심보감에 "효도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다시 효도하고 순종하는 자식을 낳게 되고,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은 다시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자식을 낳게 된다"(孝順還生孝順子五逆還生五逆子)는 말이 있습니다. "어버이에게 효도하면 자식 역시 효도한다. 자신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데 자식이 어찌 효도하겠는가?" (太公曰 孝於親이면 子亦孝之하나니 身旣不孝子何孝焉이리오)라는 말도 있습니다. 집안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질서를 가르쳐야 합니다. 나라고 가정이고 질서가 뒤집히면 망합니다. 그러나 질서가 있으면 평안합니다. 흥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생활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먼저' 라는 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십계명을 잘 살펴보면 계명을 지킬 때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꼭 두 계명에서만 나타납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섬기라는 제1계명에서이고 두 번째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4계명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두 계명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이 잘 지키지 못하고 어길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제4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복은 무엇입니까? 이복은 엡6: 2-3에서도 말씀되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나눠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이 계명을 지키면 땅에서 장수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계명은 어느 한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오늘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수의 복은 개인이 오래 살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그 가정과 사회와 나라가 장수할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장수란 단순히 오래사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지요? 건강하게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장수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명령이지만 동시에 우리를 향한 축복입니다.

 

둘째 복을 누리게 됩니다. 복을 누린다는 말은 형통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의 질서를 잘 유지하면 그 안에 평안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함으로써, 그 말을 귀담아 들음으로써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열립니다. 오늘 계명을 잘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시면서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게 준 땅'이란 말을 주목해보면 삶의 터전이란 말과 같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하나님이 주신 땅에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삶의 터전을 넓혀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부요한 삶을 주십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삶은 질서와 평화, 그리고 지혜를 통하여 생활의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에서 얻은 힘으로 삶의 터전을 풍요하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이 계명을 지켜 복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고 지키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제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 있었던 일을 말씀드립니다. 운동장에서 졸업식을 마친후 모두가 교실로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모두 빨리 졸업장과 상장 등을 받고 나갈 생각만 했습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께서 한참동안 칠판을 향해 서게시더니 칠판에 한문으로 글을 쓰셨습니다. "樹欲靜而 風不止 子欲養而 親不待"라는 글입니다. 근래에 제 동기들이 상을 많이 당하고 있습니다. 문상을 갈 때마다 이 말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그 뜻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무는 고요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려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주시지 않는구나"

 

2006. 8. 20() 오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둥교회 목사 박찬희

 

 

 

 

6계명 살인하지 말라

 

20:13, 5: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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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뮌헨에서 올림픽의 열기가 한창이던 197295일 새벽 '팔레스타인 인민해방기구'(PLO)의 예하 단체인 '검은 9월단'(Black September) 소속 테러범 8명이 이스라엘 선수들이 묵고있던 곳에 잠입했습니다. 이들은 2명의 선수를 사살하고 9명의 선수를 인질로 삼아 팔레스타인 게릴라 200명의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서독의 군인들과 총격전이 벌어져 9명의 인질 전원과 테러범 5명 그리고 서독인 1명이 숨졌습니다. 생포된 테러범 2명은 얼마 후 석방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73년에 세계각지에서 아랍인들이 테러로 숨졌습니다. 이들은 '검은 9월단'의 지도부들로 알려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유명한 정보기관인 모사드가 정예요원 애브너의 팀를 통해 가한 보복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도 계속 양쪽의 보복테러가 계속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2005년에 유명한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에 의해 뮌헨이란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습니다. 모사드 요원들이 갖는 적을 살해하는 행위에 대한 복잡한 심경과 살인으로 살인을 막을 수 없다는 감독의 철학이 담긴 내용입니다.

 

여러분! 한가지 물어보겠습니다. 뮌헨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을 죽인 팔레스타인인민해방기구가 나쁩니까? 아니면 그 범인들을 찾아내 보복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나쁩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어느 한 쪽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나쁘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명분이 있다해도 살인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제6계명을 통해 분명히 살인을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윤리적인 면에서도 살인하면 안된다는 것은 인류보편의 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설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설교의 초점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 계명을 통해, 하나님께서 왜 '살인하지 말라'는 조항을 계명에 구체적으로 명시하셨는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첫째로 우리 자신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므로 우리는 죽음의 노예가 아니라 생명의 종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영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살인은 죽이는 영인 사탄의 권세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인은 물론 그 어떠한 전쟁과 자살도 사탄의 권세에 눌린 자의 행위인 것입니다.

 

둘째로 살인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생육하고 번성할 권리를 파괴하는 것이기에 이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그의 신분이나 나이, 성별, 국적을 막론하고 동등한 존엄성을 갖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살인은 이러한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생육하고 번성하라 말씀하시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 22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이 계명을 더 발전시켜 말씀하셨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 말씀은 살인이라는 가시적인 행위를 넘어 인간에 대한 미움이나 욕설, 경멸을 금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같은 것들을 살인과 동일선상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비하시키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13:15에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씀했습니다.

 

셋째로, 생명의 주인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하실 수 있고 그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에스겔 18:4을 보면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하는 계명을 특별히 주신 것입니다.

 

지난 2005219일 국회의원 과반수가 넘는 170여명의 의원들이 서명하여 법사위에 사형제폐지특별법안이 상정됨으로써 사형제도의 존폐 여부에 관심이 주목되고 있습니다. 상정된 사형폐지법안은 사형제도는 폐지하고 수형자가 사망할 때까지 감형이나 가석방 없이 형무소에 수감하자는 내용으로 사형제 폐지 국가들에서 많이 도입한 제도입니다. 사형제 폐지는 몇 가지 점에서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먼저는, 억울하게 사형을 당하는 경우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탐 행크스와 마이클 클락 던컨이라는 배우가 주연한 그린마일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탐 행크스가 분한 폴 에지컴이라는 전직 사형집행인이 60년전의 사건을 회고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1935년 대공황기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의 삭막한 콜드 마운틴 교도소에는 '그린 마일'이라 불리는 초록색 복도가 있는데 사형수들이 그 길을 걸어 전기 의자가 놓여있는 사형 집행장까지 갑니다. ''과 동료들은 수많은 이들을 그 길로 데려가서 집행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날, 이 교도소에 '존 커피'라는 거구의 살인범이 들어옵니다. 마이클 클락 덩컨이라는 흑인 배우가 그를 연기했습니다. 2미터가 넘는 키에 140Kg이나 나가는 거구의 몸집을 지닌 그가 쌍둥이 여자 아이를 살해한 흉악범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어린 아이같은 순진한 눈망울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그의 어리숙한 모습에 ''은 당혹감을 느낍니다. 더우기 그는 신비한 초자연적 능력으로 ''과 교도소장의 오랜 지병을 치료해주기까지 합니다. '존 커피'를 전기 의자로 데려가야 할 날이 다가올수록 ''은 그가 무죄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법으로 이미 사형이 확정된 그를 살려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사형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소된 이유가 사실은 정확한 목격자나 증거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는 다른 범인에 의해 아이들이 살해된 후 그곳으로 달려가 그 아이들을 내려친 도끼를 집어들고 범인을 찾아 두리번 거리고 있었고 그 부모들이 그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를 범인으로 지목한 부모들의 말을 따라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그 자신이 자기에게 씌워진 죄목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 뿐입니다. 착하디 착한 그는 무참히 죽은 어린 생명을 본 충격과 자기가 흑인으로서 부당하게 당했던 어린 시절의 일들로 인해 살고싶은 생각이 없어져 자기를 변호하지 않은 것 뿐입니다. 이 영화는 한 선량한 인물의 부당한 죽음을 통해 사형제도의 허점을 고발한 영화입니다.

 

사형제도는 진범이든 아니었든 간에 그의 생명을 공권력을 통해 합법적으로 빼앗는다는 점에서 분명히 법적 살인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서 누구도, 어떤 이유에서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을 권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 사상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살인을 경계하는 말씀이 많습니다. 그 중 신명기 19:10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림이 없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시대에 특별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민수기 35:25-26 여호수아 20:5-6에 있는 도피성 제도입니다. 하나님은 혹 살인죄를 지은 혐의가 있는 자라해도 도피성에 들어오면 그의 생명을 보존케 하셨습니다. 민수기 35:25을 보면 비록 살인죄를 지었다 해도 도피성으로 피한 자는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곳에서 거하며 생명을 보존받았습니다. 이는 생사여탈의 권한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주지시키는 말씀입니다. 또한 여호수아 20:5을 보면 "피의 보수자가 그 뒤를 따라온다 할찌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어주지 말찌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 이웃을 죽였음이라"고 하여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혹 당할지도 모르는 복수를 막기 위해 배려하셨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이 자기를 죽이려 뒤쫓을 때에 동굴에서 사울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해하지 않고 그의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죽이려하는 사울일지라도 그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죽이려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행위는 당시 종교적 율법에 따라 합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처형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그 부분에 대한 기록은 주님께서 돌을 든 사람들 역시 죄인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만 법적 형식 면에서도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의 태도는 당시 통용되던 율법과 종교상의 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주님은 그 누구도, 어떤 이유에서든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그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일러주신 것입니다.

 

6계명은 금지명령입니다. 그러나 이 계명은 주님께서 더욱 확대된 개념으로 말씀하심으로써 새로운 계명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마태복음 22:34-39을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어느 계명이 큰지를 묻고 주님이 대답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과 율법의 핵심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새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속에 무관심이 쌓이고 미움이 자리잡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생명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법입니다. 우리 마음에 사랑이 있다면, 그래서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없다면 생명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시자 아벨을 질투하고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은 바로 사랑없는 마음, 미움과 시기와 질투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요한13:14"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22:15을 보면 이단들과 악신에 사로잡힌 점쟁이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증거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우리들에게 생명을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제6계명을 통하여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2006. 8. 27 오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둥교회 목사 박찬희

 



[7계명] 간음하지 말찌니라

 

20:14, 5: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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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둘이 한 몸을 이루어 서로를 돕는 배필로서(2:18), 서로에게 보완적인 관계로서 살게 하셨습니다.(2:7-25) 남녀에 있어서 어느 한 성이 다른 성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양성이 서로에게서 보완되지 않으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의 차별은 인정될 수 없고 다만 구별이 있을 뿐입니다. 각 성은 그 나름대로의 능력과 특성을 따라 존중되어야 합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창조질서를 보존하시기 위해 정해놓으신 법칙입니다(2:18-25). 하나님께서는 성의 바른 사용을 위해서 결혼 제도를 제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선물이요 아름답고 행복한 에덴동산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께서 배필로서 하와를 지으셨을 때, 너무나 기쁜 나머지 하와를 보고 자신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감탄하며 기뻐했습니다.

 

성경은 성을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성 자체는 죄도 아니고 부정한 것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닙니다. 결혼관계 안에서의 성은 잘 가꾸고 다듬어 더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들어 가는 화단과 같습니다. 오히려 결혼관계 안에서도 성을 꺼려하고 금기하는 것, 결혼을 해 놓고 배우자를 방기하는 것이 죄입니다. 왜냐하면 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복되고 아름답고 즐거운 것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결혼관계 안에서의 성적 행복이 죄이고 단지 자손을 낳기 위한 배려에 그치는 것이라면 애초에 하나님은 성을 통해 그 어떠한 느낌도 갖지 않게 하셨을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은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간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파괴하는 죄이며, 인간의 가치를 동물적인 것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부부라는 관계를 벗어난 성은 죄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이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제7계명이 금하는 간음을 세 가지 유형으로 말합니다.

 

첫째, 육체적 간음입니다. 고전 10:8을 보면 바울사도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 중에 육체적 간음을 하다가 하루에 23천명이 멸망당한 일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간음은 가정을 파괴할 뿐 아니라 사회의 전반적인 질서를 파괴합니다. 역사가들은 로마가 멸망한 원인 중에 반드시 성의 문란을 들고 있습니다. 로마 말기의 문화는 향락이 극에 달했던 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폼페이가 멸망한 잔해를 보면 당시 문화가 매우 향락적이고 퇴폐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울타리 밖의 성은 당사자들은 물론 사회를 망하게 합니다. 고전 6:18절은 말씀합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그러면서 바로 이어지는 1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순결하게 지켜야 합니다. 나아가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 마음의 간음(5:27-28)이 있습니다. 5:27-28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현대는 이 점에서 무감각합니다. 조금 유명하다는 연예인은 죄다 누드사진을 찍었습니다. 그것이 인터넷과 서적과 휴대폰으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좀 점잔은 직업이라고 인정받는 아나운서들까지 이런 흐름에 자기 몸을 팝니다. 노래들과 춤 역시 자극적이고 가수들이 입은 옷 역시 너무나 선정적입니다. 영화치고 남녀간의 일을 한번이라도 묘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온갖 신문과 서적과 그림들이 정신적 간음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부부가 마음을 맞추어 음란한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려놓고 판매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근래에 서울 삼성동의 엑스포에서 소위 섹스포라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온갖 것들을 다 진열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입니다. 겉으로 하는 이야기는 올바른 성문화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이 땅에 음란 문화를 심고 심화시키는, 마음의 간음을 유도하는 악한 사탄의 간계입니다.

 

주님의 계명은 인간 내면의 생각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람의 행위는 동물적 본성보다는 내면의 생각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의사들은 건강조차 마음에서 좌우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마음 혹은 그 속에 품은 생각은 그 사람의 삶의 모습도 바꾸는 법입니다.

 

셋째, 신앙적 간음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3:8을 보면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에 대하여 예레미야가 간음에 빗대어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 다른 것을 더 의지하는 것, 그것은 신앙적 간음입니다.

 

이런 사상의 맥락으로 기록되어 있는 예언서가 호세아입니다. 호세아서를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부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는데 전체 주제는 다른 신을 섬기는 것도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12:39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당시를 "음란한 세대"(12:39)라고 하셨는데 그 말은 하나님을 떠나 사는 세대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의 본문을 보면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 7계명을 설명하시면서 외면적이고 생물학적인 문제로만 취급하시지 않고, 내면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측면으로 발전시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간음은 인간 상호 간에도 죄가 되지만 하나님께 대한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의 법칙, 가정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죄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법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두려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 지켜진 율법에는 어떤 이유로 아내와 헤어질 때에는 이혼 증서를 주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버림받거나 헤어진 여인이 재혼하였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전 남편과의 분쟁을 막고 또 여인 혼자 살 수 없는 고대의 사회적 환경에서 이혼한 여인 자신이 재혼하여 가정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여 주기 위해 율법의 조항으로 명시함으로써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배려이지 이혼을 용납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저 이혼증서를 주고 헤어지면 그만이라 생각하고 제 맘에 들지 않으면 이혼증서 한 장 달랑 써 주고 대책도 세워주지 않고 쫓아냈습니다. 마치 하갈이 대책없이 쫓겨났듯이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하갈이 쫓겨난 것은 좀 다른 이유였습니다만 아무튼 남자들은 자신들의 욕정을 위해 아내를 버리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주님은 그런 당시의 풍조를 보시고 이혼 문제에 있어서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음행한 이유 없이 이혼하는 것은 불법적인 것이며, 그런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그에게 음행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심으로서 실제적 간음이라는 현실적 행위뿐 아니라, 사전에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다른 이에 대한 음욕이 그 안에 있어서 이혼한 것이기 때문에 배우자의 음행에 의하지 않고 이혼하는 것이 죄라 하셨고. 음행의 여지를 제공하는 것까지 포함한 포괄적 죄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해석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가정을 보존하게 하는 율법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더 발전시키신 것입니다. 음행은 상대에게 분명한 죄이기에 이혼에 합당한 조항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유 이외에 행해지는 이혼은 상대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는 것이고 상대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는 것이고 또 그런 죄를 범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간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외면과 내면의 정조를 지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가정을 보전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법칙을 정하셨습니다. 주님의 계명 해석은 율법보다 더 철저히 가정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2010-20절을 보면 여러가지 간음의 유형을 제시하고 그것을 행했을 때에는 사형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6:32"간음하는 자""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엡 5:5을 보면,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더러운 자는 이단을 말합니다. 음행은 이단과 우상숭배와 동일한 선상에서 취급되는 중죄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뻗치는 유혹을 뿌리침으로써 모함을 받게된 요셉이 보디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그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39:8-9). 또 다윗이 밧세바에게 범죄 했을 때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 했습니다(51:4). 간음은 곧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엡5:3"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계 21:8'음행하는 자'들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 간음에 대해 이렇게 극한 형벌을 두신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하나님 의 거룩한 성품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이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또한 간음은 자기의 몸과 가정에 대하여 범죄하는 것이며, 사람의 인격만 아니라 사회에 대하여 범죄하는 것입니다. 또한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음에 대하여 하나님은 극한 형벌을 정하신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5:3). 하나님이 정해주신 관계를 벗어나는 것은 사탄에게 굴복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관계를 소홀히 하는 것 역시 사탄에게 시험할 빌미를 주는 것입니다. 고전 7:2-5은 부부생활의 수칙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그러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사람을 행복하게 살도록 선물로써 가정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울타리입니다. 아무리 밖에서 힘들어도 집에 들어오면 쉼이 있고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 울타리 안에서 모든 시름을 덜고 새 힘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지키고 원만하게 꾸미는 것은 단순히 사회생활의 한 부분을 지키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여 놓으신 것을 지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119:9"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이 성결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는 대로 살고, 금하는 것을 금할 때 그것은 어떤 것이든 깨끗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몸과 마음이 깨끗한 남자와 여자들을 찾으시고 그들에게 자기를 보여주십니다(5:8). 그리고 그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십니다.

 

2006. 9. 3(오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둥교회 목사 박찬희

[8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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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대로 공급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동안 하나님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일용할 양식으로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들을 주시면서 조건을 한가지 붙이셨습니다. 그 날 필요한 만큼만 거두어들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계명에 비추어 보면 그 날 필요한 분량 이상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것이라는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모든 것들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잘 관리하고 선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 이외의 것을 넘보는 것은 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이동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공동체 안에는 엄격한 규율이 필요했습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잘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입니다. 그 중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공동체의 사회질서를 잘 유지하게 하는 기초적 계명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 어디에서나 남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은 죄입니다. 당연한 규칙이지요. 그런데 도적질은 단순히 남의 것을 훔치는 것만이 아니라 일꾼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는 것(임금체불, 착복), 저울을 속이는 것 등, 남을 속여 부당한 이득을 얻는 것, 또한 남의 명예나 명성을 차지하는 것(, 지적 재산권문제, 쇼트트랙의 오노) 등도 도적질하지 말라는 이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제8계명을 좀더 세밀히 생각해보며 교훈을 얻으려합니다. 이 계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구제활동이 아주 활발했습니다. 교회에서 집사를 세운 이유도 바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돕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주일에 양식을 준비하여 찾아온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였고 또 모여서 예배한 후에는 공동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자기 삶에 충실하지 않고 그저 교회로 찾아와 교회가 제공하는 음식으로 연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일찍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고 이어지는 말씀 살후 3:12에 보면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거꾸로 읽으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양식을 얻을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성경의 정신입니다. 열심히 일하여 양식을 얻고 만족을 얻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도적질은 일하지 않고 양식을 얻는 것입니다. 또한 양식을 얻는 것뿐 아니라 치부와 방탕을 위한 탐욕이기에 세상에서는 물론 하나님 앞에서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 6:1-5을 보면 남의 재산권을 침해한 죄를 범하여 손해를 보게 하였으면 그것을 돌려주는 것은 물론 그것의 20%를 더하여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재물을 올바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25:35-36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재물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것의 주인은 아닙니다. 단지 맡은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물질관입니다. 2:4"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15:7-10은 구제에 대한 중요한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재물을 움켜쥐고 구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비결이 됩니다.

 

사전적 의미로 도적질이란 남의 재물을 불의하게 취하는 것 즉 인간 관계 안에서의 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의 관계 안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도적질이 있다고 말합니다. 말라기 3:8,10"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도적질을 구제와 연관하여 말씀하는 부분이 또 있습니다. 4:28"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부당히, 일하지 않고 남의 것을 취할 생각을 하지말고 열심히 일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선한 일 즉, 빈궁한 자를 구제하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고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적질이 단순히 도덕적 죄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말씀되는 것처럼 구제는 단순히 장려되는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즉 성경이 도적질을 단순히 도덕적 죄로만 생각하지 않듯이 구제도 도덕적인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것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고 즐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웃을 도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나누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웃을 위해 사용하라고 맡겨놓으신 것을 착복하는 죄, 도적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도적질이라는 죄는 비단 물질에만 관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드려야 할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시간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도 도적질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주일에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과 성도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에 예배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시간을 도적질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옷과 금을 숨긴 아간(7:20-22)이나 돈궤의 돈을 도적질한 가롯유다(12:6)만이 도적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응당 사용해야 할 재물과 시간과 힘을 들이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우리는 제 8계명을 단순히 도적질이라는 행위여부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이웃의 것은 이웃에게 마땅히 돌림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계명을 준수해야 되겠습니다.

 

2006.9.17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둥교회 목사 박찬희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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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은 소극적으로는 남을 해하려고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라(23:1-2)는 것이요 적극적으로는 진실된 말을 하라(14:5, 벧전3:16, 25:10, 4:15)는 것입니다. 사람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신뢰일 것입니다. 부부간에, 형제간에, 친구간에 나아가 자기가 속한 단체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정직하고 신실한 말이 있어야 신뢰가 쌓이고 그런 관계야말로 가장 든든한 관계가 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말에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3:2"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말에 세치 혀가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말이 중요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3:6"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의 계명은 특별히 송사 중의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 증거 즉 위증은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듭니다. 왕상21:1-16을 보면 거짓증거의 본보기가 있습니다.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어했습니다. 그때에 왕후 이세벨이 거짓 증인을 내세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한 자라고 거짓 증거케 하여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강탈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사장과 공회가 거짓으로 증거하여 죽으셨습니다.(26:57-8), 6:11을 보면, 그들은 이후에도 계속 거짓증언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어서 스데반집사가 모세와 하나님을 훼방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거짓증언을 하게 하여 스데반집사를 죽였습니다.

 

거짓증거는 자기와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 거짓 증거하는 것(5:23)도 있고, 직접적으로 남을 해치기 위해 하는 것도 있습니다(25:18). 어떤 것이든 간에 거짓증거는 계명으로 분명히 금지되고 있습니다. 가나안을 향해 광야를 지나고 있던 수많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분란을 막기 위해서는 이 계명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거짓말(3:9), 헛된 말(11:13, 20:19), 누설(25:9), 비방(4:11), 공박(50:20), 비판(6:37)등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이단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거짓증거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 영원한 멸망으로 밀어넣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44절에 보면, 사탄은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진리를 선택하지 못하게 막아섭니다. 언제나 거짓으로 우리를 속입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에덴동산에서 사람에게 거짓증거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탄을 가리켜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거짓을 말하는 것은 사탄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거짓증거를 하는 죄를 짓지 않으려면, 말을 함에 있어서 신중해야 합니다.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란 말이 있습니다. 말에는 그 사람의 인격과 품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잘못하면 남을 해치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의 품격을 여지없이 망가뜨리게 됩니다.

 

더욱이 남에 대해 말하게 될 때는 속단하여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할 수 있는 한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는 것이 오늘의 계명을 잘 지키는 비결입니다. 더 좋은 비결은 아예 남의 약점과 잘못, 부정적인 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도 그런 것들은 역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거짓증거 하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정확한 사실이라 할지라도 되짚어보고 또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란 말도 있습니다. 이처럼 말하는 것보다 듣고 되짚어 보는 것을 더 깊이하면 할수록 일없이 남을 궁지에 몰아넣게되는 실수의 여지도 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양심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양심이란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인 도덕과 윤리에 비추어 살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신앙양심 즉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말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533-3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이 말씀은 말의 신중성, 증언의 신중성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 신중성은 신실하고 꾸밈없이 말하라는 것입니다. 거짓증언, 거짓맹세는 자기의 양심을 속이는 것이요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레위기 1912"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거짓증거와 맹세는 사람을 해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께서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의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4:29)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는 것일까요? 두 구절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1)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

 

(2) 4:8.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2006. 9. 24 (오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둥교회 목사 박찬희

 


[10계명] 탐내지 말찌니라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누가복음 12장에보면 어떤 사람이 상속받는 재산을 동생에게 나눠주지 않고 다 가졌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예수님께 와서 그것을 자기에게 나눠주도록 말좀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했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2:15) 인간의 행복 여하는 그 소유의 많고 적음과 무관합니다. 많이 가졌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질 때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13:5"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했습니다.

 

부유함은 때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서양의 부가 오히려 교회를 약화시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 또 교회가 부유하다고 해서 반드시 그 교회가 선교와 구제에 부유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유한 교회일수록 교회당을 더 크게 짓는데 돈을 씁니다. 교회 몸집을 유지하는데 더 많은 돈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빙자한 탐심입니다.

 

2:4"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눌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3:5을 보면 탐심은 땅에 있는 지체 즉 세상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탐심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자기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탐심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에서 생겨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기에 우상숭배가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부를 축적하는 것을 오히려 죄로 여깁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실 때 주신 규칙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지옥에 간 부자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탐욕적인 사람이 하나님께 제대로 된 헌물을 드릴 리가 만무하고, 돈만 아는 사람이 이웃에게 베풀며 산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탐심은 인간을 하나님께로부터 떼어놓습니다. 탐심은 마귀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탐심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마귀의 종인 것입니다. 우리는 열왕기 상 21장의 나봇 이야기를 잘 압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탐한 결과 아합은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딤전6: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탐욕으로 얻은 재물은 그를 망하게 합니다. 17:10-11"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탐심을 이기지 못하면 시험에 빠집니다. 1:14은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탐심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약 1:14"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장례식을 보면 사람이 죽으면 입에 쌀을 넣어주고 저승가는 노자돈으로 쓰라고 동전을 넣어줍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무덤을 파보면 동전은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몇 년 전 뉴스에 어떤 노인의 죽음에 대한 보도가 있었습니다. 허물어져가는 집에서 한 노파가 죽었습니다. 죽은 이유가 영양실조였습니다. 그런데 장례를 치루고 집을 허물기 시작했는데 여기저기서 돈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장판을 드니 장판 밑에 돈이 깔려 있습니다. 벽장을 여니 돈뭉치가 보자기에 쌓여 깊숙이 숨겨져 있습니다. 찬장의 그릇 밑에도 돈이 들어있습니다. 수천만원의 돈이 그 집에서 나왔습니다. 노파는 수천만원을 모을 줄만 알았지 쓸줄을 몰랐습니다. 돈을 사랑하다가 굶어죽은 것입니다. 돈이란 제대로 사용할 때에 유익합니다. 하루에 한끼 밥이라도 제대로 챙겨먹었다면 노파는 그렇게 비참하게 죽지는 않앗을 것입니다. 자신의 몸보다 돈을 더 사랑했기에 돈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었으니 이웃을 위해 단 한가지라도 무슨 좋은 일을 했겠습니까? 시장에서는 날마다 아등바등 값을 깏느라 싸움질만 해댔을 것이 분명합니다.

 

4:11-12을 보면 바울 사도는 친히 자족하는 생활을 했다고 했습니다. 스스로의 삶을 돌보고 일하면서 자족했다는 것입니다. 분에 넘치는 것을 좇지 않고 자기 능력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부유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4:12"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는데, 바울의 이같은 고백은 그 자신이 탐욕에 매이지 않고 살았고 그렇기에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겠습니까? 탐심을 버리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작은 것이어도 하나님의 선물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탐심과 적절한 누림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탐심을 버리라고 했다고 해서 구두쇠가 되어 벌벌 떨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모아둔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쌓아두면 썩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만큼 주신 것은 우리를 위해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신 것 안에서 그것을 감사히 누리는 것은 행복입니다. 누리지 못하고 아등바등하는 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제가 아이에게 용돈을 주는 것은 아이들이 그것으로 장난감도 사고 맛있는 떡꼬치도 사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깝다고 쓰지않고 모아두기만 한다면 저는 다시는 용돈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용돈을 주면 잘 사용하고 또 친구들에게 맛있는 것도 사주고 하면 더욱 좋습니다. 그러면 정해진 것에 얼마를 더해 줍니다. 하나님도 그러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선한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그것을 감사히 누리기 원하십니다.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나누는 마음이 될 때 더 주십니다. 그는 재물을 사랑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4"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했습니다. 재물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있고 때로는 하나님을 근심케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주신 것을 잘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리는 모습입니다. 반대로 주신 것을 제대로 누리지도 않고 늘 궁색이나 떨고 아등바등하며 자기 행복도 잃고 남을 대하여서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모습은 하나님을 근심케 합니다.

 

30:8을 보면 솔로몬의 기도가 나옵니다. "너무나도 가난하게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옵소서". 그리스도인의 물질관은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4:23"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탐심이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마찬가지로 행복도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잘 지키면 생명을 보존합니다. 28:16"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탐심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사회를 망하게 하고 교회를 어지럽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고 오늘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이제 10계명 강해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 계명은 우리를 억압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 계명을 통해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행복을 누리고 그 행복이 하나님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계명을 지키며 가나안에 들어갔던 것처럼, 우리도 이 계명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즐겁게 지킴으로써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성도의 길에서 낙오되지 않고 행복을 얻으며 마지막에는 하나님 나라에 안전히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006. 10. 1(오후)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기둥교회 목사 박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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