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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십계명 강해

에반젤(복음) 2020. 2. 15. 01:48



십계명 강해

십계명은 두 개의 돌 판으로 나뉘어져 있었다(출32:15; 34:1; 신10:1). 첫째 돌 판은 처음의 네 개의 계명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지고 있는 의무를 보여준다. 즉, 그분을 유일한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며 무엇보다도 그리고 모든 다른 것에 앞서 그분을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며 두려워하는 것, 우리의 모든 소원과 필요를 그분 안에서만 구하는 것, 항상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그것이다. 둘째 돌판은 남을 여섯 개의 계명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 우리의 이웃을 향하여 행해야 할 사랑의 의무를 설명하고 있다. 복음서 기자가 말한 거처럼 우리 주님은 율법을 두 개의 주제로 요약하신다. 즉,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마22:37, 39; 눅10:27). 비록 모든 율법이 이 두 개의 주제로 요약되었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서 모든 변명의 구실을 박탈하시기 위해 십계명에 의해 더 깊고 명백하게,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것에 관계된 전부와 우리의 이웃을 향한 사랑과 관계된 모든 것을 선포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계명을 시작하시기 전에 그는 다음과 같은 머리말을 주셨다(충20:2; 신5:6).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 로라.

이 말씀에 의해 그는 우리에게 순종해야 할 계명을 주실 권리가 있는 주님이심을 보여주고 계신다. 게다가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와 애굽의 굴레에서 자유 할 때에 얼마나 영광스럽게 자신의 힘과 능력을 나타내셨는가를 상기시키신다. 즉, 그가 택한 자들을(진정한 이스라엘) 죄의 굴레(‘애굽’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된)로부터 구해 내실 때, 그가 그들을 애굽인 등(자신의 정욕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자들)의 주, 즉 영적 바로인 마귀의 쇠사슬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실 때 어떻게 날마다 동일한 능력을 나타내시는가를 상기시키시는 것이다.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1계명은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께만 두어야 하는 신뢰를 다른 신에게 두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혹은 어떤 선이나 무슨 덕이든지 그것을(그분에게 바쳐 드려야 할) 다른 신에게 향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사30:1-5; 31:1; 렘2:13,32). 오히려 다른 모든 것보다도 그분만을 경외하고 사랑해야 하며 그분만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하며 우리의 모든 소망과 신뢰를 그분에게 두어야 하는 것이다(딤전1:17; 신6:4-14; 10:12-13). 그러는 중에 우리는 모든 선한 것이 그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묵상해야 하며 그분이 영광을 받고 찬양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전10:23-31). 이것을 우리는 단지 말과 몸짓으로 또한 모든 외적 표시에 의해 우리가 다른 어떤 하나님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천명하기 위해서 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모든 열심히 과연 우리가 그러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과 외적 행위만 그분에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과 생각까지도 우리 자신에게 보다 그분에게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대상28:9).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4-5).

1. 이것은 모든 예배와 경배를 한 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은 불가해하며 육신이 없으며 보이지 아니하며 만물을 포용하기 때문에 아무 장소에서도 갇힐 수 없다. 그렇다면 마치 어떤 형상이나 우상의 모습이 하나님을 형용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표현 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자.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데 그분은 영이시며 진리 안에 계신다(신6:13-16; 10:12-13; 왕상8:22-27; 딤전1:17; 요1:9-14; 4:24). 그런고로 제 1계명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분을 떠나서는 어떤 다른 신도 생각하거나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 계명은 하나님 자신이 그러한 분이며 그러한 경배에 의해 영광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에게 육체적인 어떤 것을 감히 부과하려해서는 안되며 그분을 우리의 감각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해서는 안 됨을 가르친다. 마치 그가 우리의 아둔한 머리에 의해 이해될 수 있거나 어떤 형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구차한 변명을 가지고, 옛날에 참 종교를 삼켜 버렸던 저주받을 우상숭배를 옹호하려 하는 자들은 다음의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형상들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기 전에 자기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 낸 하나님이었다는 분인 것을 망각할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잊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이방인들이 하나님은 나무나 돌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마음대로 형상을 바꾸곤 했지만 그러나 마음속에서 항상 동일한 신들이 있었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한 신에게 많은 형상을 부가했지만 자신들을 위해서 형상들이 있는 만큼 많은 신들을 만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매일 새로운 형상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자기들이 새로운 신들을 만들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된 일인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든 우상숭배자들은 하나님이란 그들의 공허한 정신이 상상해 낸 꼭 그대로 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 공허함에 부패가 부가되었다. 즉 그들이 속으로 상상한 그대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고로 정신은 우상을 상상했고 손은 그것이 출현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그러한 형상을 입은 영원한 하나님, 하늘과 땅의 한 분, 참되신 주를 예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이방인들은 자기들 자신의 신들, 엉터리이지만 그래도 자기들로서는 하늘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들을 경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서 그들은 만일 하나님이 자신을 육체적으로 보여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심을 믿지 않았다. 이 맹목적인 갈망에 순응하여 그들은 표상을 만들었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그들 육안에 나타났다고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것들 가운데서 스스로 계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또한 그것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경배했다. 마침내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과 눈을 그것들 위에 고정시킨 채 마치 그것에 어떤 신성한 것이 깃든 것처럼 그것들에 대해 경탄하기 시작하고 또한 점점 야수 화 되어 갔다. 과거에 우상숭배 없었고 지금도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부끄럼도 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왜 이러한 것들 앞에 서는가? 그들은 왜 기도하려 할 때 마치 하나님의 귀를 향하는 것처럼 그것들에게 향하는가? 왜 그들은 심지어 전멸 당하는 순간까지도 마치 그것들이 제단이나 난롯불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형상들을 지키기 위해 칼을 빼드는가? 그들은 우상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한 분 하나님을 빼앗기는 것을 택하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무리들의 형편없는 실수를 일일이 나열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의 무한대의 것으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그들이 특별히 자기 자신을 우상숭배와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싶어 할 때 그들이 고백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의 신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한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도 그것들을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고 단지 하나님의 표시와 모양이라고만 불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과 모든 성경은 그들이 나무와 돌과 간음했다고 주저 없이 고발했다(렘2:27; 겔6:4; 사40:19-20; 합2:18-19; 신32:37).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고 싶어 하는 자들에 의해 매일 행해진 바로 그인들, 말하자면, 그들이 나무와 돌 속에 있는 하나님을 물리적으로 경배한 바로 그 일들을 행했다는 이유 때문에 말이다.

 

2. 최종적 회피는 우상들을 “교육받지 못한 자들의 책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한다 하자(비록 그것은 전적으로 헛된 것이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부복하는 유일한 목적이 경배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러한 형상들이 교육받지 못한 자들에게(특별히 그들이 하나님을 묘사해 보여주고자 하는 자들에게)의인화된 신을 제시해 주는 것 외에 어떤 유익을 주는지 알 수 없다. 그들이 성자들에게 바치는 것들-그것들은 가장 타락한 정욕과 음탕함의 본보기 외에 무엇이겠는가? 만일 누가 그들을 모방하고 싶다면 그는 채찍 형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정말이지 교회들이 처녀들을 더 정숙하고 덕스럽게 보여준다. 그런고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형상들을 최소한 적절한 체통을 지닌 것으로 만들게 하라. 그래야 그들은 조금 거 정숙하게 이것들은 어떤 거룩한 책들이라고 헛되이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또한 이것은 주님께서 이러한 쓰레기와는 전혀 다른 교리를 가르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육하는 방법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는 자기 말씀의 선포를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 교리로 설정하셨다. 만일 다음의 사실이 적절하고도 신실하게 가르쳐졌다면 나무와 돌과 심지어 금은으로 만든 그렇게 많은 십자가를 세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허물을 깨끗케 하기 위해서 우리 죄 때문에 자기 몸을 주셨다는 사실 말이다. 이 한마디 말로부터 그들은 나무나 돌로 만든 수천 개의 십자가로부터 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마도 탐욕스러운 자들은 자기들의 마음과 눈을 어떤 하나님의 말씀보다 금과 은에 더 집요하게 고정시키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그들은 누구더러 “배우지 못한” 자들이라고 부르는가? 정말이지 주님께서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자”(요6:45)로 인정하시는 자들인 것이다. 여기에 비길 데 없는, 값을 매길 수 없는 형상의 축복이 있다. 그러나 그는 더 분명하게 다음의 두 계명을 부과함으로써 모든 불신실과 우상숭배를 얼마나 지독히 혐오하는가를 말씀하신다.

 

제3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출20:7).

이는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나 사랑하고 두려워해야 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지극히 거룩한 그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의 거룩하심으로 인해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분을 높여야 하며 순탄할 때나, 역경에 처할 때나 매사에 그분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 그분의 손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그분에게 간구해야 하며 그분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조심스럽게 모든 모욕과 불경함을 멀리함으로써 그분의 높은 위엄에 적합한 것 외에 어떤 다른 이름으로 그를 부르거나 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그분이 의도했던 것 외의 어떤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도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성을 모독하고 모욕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의 이름을 강신술, 저주, 불법의 축귀 행위, 그리고 기타 사악한 주문 암송 등의 미신에 사용하는 자들처럼 말이다(신18:10-12). 서약과 맹세에 관한 한 우리는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결코 거짓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영원한 진리는 거짓에 대한 증인으로 인용되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모욕을 당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형제들의 필요가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 한 진실한 맹세라 할지라도 성급하게 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목적을 제외하고는 어떤 종류의 맹세도 금지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율법의 이 조항의 뜻은 우리의 모든 말은 예, 예, 혹은 아니, 아니 뿐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지나는 것은 악한 자로부터 온 것임을 증거 한다(마5:37). 여기서 다음의 사실을 또한 주목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성급함 때문에 어떤 맹세를 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치안 판사가 요구할 때 하는 맹세는 전혀 이 계명에 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성구에서 하나님께서는, 진실에 대한 증인이 재판에 필요할 때 치안 판사에게 맹세를 지시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이다(출22:11; 히6:13-18). 아니, 모든 공적 맹세는 이 금지에서 면제된다. 바울이 복음의 위엄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했던 맹세들도 그러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롬1:9; 9:1). 왜냐하면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사도들은 사사로운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적 종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약을 엄숙하게 하기 위해 왕들이 하는 맹세, 혹은 자기 왕의 이름으로 백성들이 하는 맹세 등 사사로운 욕심에서가 아니라 공공의 선을 위해 행하는 맹세 등은 다 그러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첫 번째 사실은 맹세가 허용된 것이 정욕이나 탐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말을 확정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상과 같은 경우 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그러한 필요가 있을 때에 한해서만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유일하고 영원한 진리 되신 그분이 진리의 유일한 증인이시며 또 그렇게 간주되는 것은 그분의 명예와 영광에 관계되기 때문이다(신6:13; 10:20; 사45:23; 48:15).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자기 이름의 탁월한 위엄을 더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그 계명에 다음의 말씀을 덧붙이셨다.

 

나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 하나님은 삼 계명을 어기는 자들에게 특별한 저주를 선언하고 계신다.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 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8-11).

안식일 준수는 경건과 하나님 예배 양자에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첫 번째 돌 판에 포함되어 있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심”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주님께서는 다른 어떤 것도 이것보다 더 강조하시지는 않았다(출31:13-17). 그리고 선지 서에서 모든 종교가 파괴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실 때 그는 안식일이 더렵혀지고 모독당하고 침해되어 지켜지지 않고 거룩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마치 이 계명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어떤 것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겔20:12-13; 22:8; 23:38; 렘17:21,22,27; 사56:2; 민15:32-35). 그러나 이 계명은 그림자였으며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영적 예배를 보여주기 위해 의식기간 중에 부과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고로 그림자의 빛이시오 형상의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그것이 모세 율법의 잔영처럼 폐기된 것은 바울이 밝히 증거하고 있는 바와 같다(갈4:8-11; 골2:16-17). 그러나 유대인들의 신앙이 율법의 교육 하에서 표현되었던 그 의식들과 외적 제사는 폐기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주님께서 유대인들과 우리가 공히 영원토록 가지기를 원하셨던 계명의 진리를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의 것이 그 진리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경외하고 사랑해야 하는 고로 그분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우리가 양심을 혼란시키고 괴롭히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 우리의 사악한 욕망들을 깨끗이 청산하고 육신의 모든 깨끗지 못한 일들을 버린다면, 말하자면 어떤 인간적 지혜의 외양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모든 일들, 즉 우리의 현세에 대한 욕망에서 나온 사악함이 우리 본성 속에 조성되게 하는 모든 것을 버린다면,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히3:7-19; 4:9; 사5:8; 58:13-14). 그러한 종류의 모든 일들은 노예와 같은 일이다. 안식일의 율법은 그러한 일들을 중단하라고 우리에게 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며 선한 영향을 미치게 하고 양심에 평안과 평정을 부여해주는 성령의 인도에 의해 우리를 다스리시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안식일이며, 유대인의 안식일은 사실상 그것의 모형이요 그림자였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성경에서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인 일곱째 날에 할당되었다. 그것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명하셨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데 그 안식에는 아무 한계가 정해지지 않았다. 둘째, 그것이 완전하고도 적절하게 거룩해지는 일은 일곱째 날까지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히4:1-11). 그 일곱째 날은 사실상 최종적이며 영원하다. 신자인 우리 모두는 부분적으로 그것에 들어갔지만 아직 그것에 완전히 도달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누리기 시작했지만 그 속에서 또한 매일 진보를 이루어 마침내 이사야의 말이 실현될 때 그것이 완성될 것인데 그 말속에는 안식 위에 안식에 대한 약속이 하나님의 교회에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사66:23). 말하자면, 그때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되실 것이라는 말이다(고전15:28). 이것을 또한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에 완성하신 천지 창조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오직 일곱째 날에 하나님은 모든 일을 쉬셨는데(창2:1-3). 그분의 모범에 의해 우리 또한 우리의 일을 쉬고 그분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찾으며 일곱째 날의 이 안식을 열렬히 동경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주일에 적용된다. 주일은 우리가 모든 다른 것에 앞서 그것을 거룩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 즉 그것을 거룩하게 하려고 제정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날들을 공히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만의 특권이기 때문이다(롬14:5).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기도와 찬양과 말씀을 듣는 것과 성례의 시행을 위해 모이도록 제정된 것이다(갈4:8-11; 골3:16). 우리의 모든 노력을 이러한 일들에 한 마음으로 바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기계적이며 육체적인 노동을 중지해야 하며 이생의 행위와 관계있는 모든 추구들을 중지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엄숙한 날들도 같은 종류의 것인데 그때 우리 구원의 신비를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말씀을 온 마음으로(그것이 적절하지만)마시게 되면, 또한 그것을 통해 옛 사람의 행위를 죽이게 되면, 특별한 절기 때뿐만 아니라 우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그러한 명령을 받고 있기 때문에 안식일마다 축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한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는 것은 종교에 의한 것만 아니라 공통의 국가를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규정된 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을 그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시기나 하는 것인 양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어떤 날에 함께 모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일들이 질서를 따라 방해받지 않고 이루어 질 수 있는 지정된 날을 두는 것이 긴요하다(고전14:40). 그와 같이 함으로써 4계명의 의식적인 부분만 폐지되었다는 유대인의 인식을 가지고서 세상을 오염시킨 궤변론자들의 넌센스를 추방하게 되는 것이다(그들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일곱째 날의 지정’이라 한다). 그들은, 도덕적인 부분은 남아 있는데, 말하자면, 한 주 가운데 어느 날을 지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날을 지키는 것을 유지하면서 유대인들이 화내기 위해 날을 바꾸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그들이 그러한 교훈에 의해 얼마나 많은 이득을 얻게 되는지를 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제도에 집착하는 자들은 무식하고 육적인 안식일의 미신에 있어 유대인들을 세배 이상 능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사야서에 있는 책망이 오늘날 이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선지자가 그 당시에 책망했던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과 꼭 같다(사1:13-15; 58:13).

 

유대인들은 안식일주의 속에서 지킬 또 하나의 과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종교와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공평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비인간적인 주인들이 계속적으로 종들과 짐승들을 심하게 다스리니 적절한 한도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종들과 짐승들의 노동을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모세는 사실상 자기 자신의 어떤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이미 가르쳐졌던 어떤 것의 유용성을 지적하고 있었다(출23:11; 신5:14). 우리도 또한 오늘날 어떤 노예의 필요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명령에 따라 공평에 대한 존중심을 가져야만 한다. 이제 여기에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을 향해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처음의 네 계명들이 있다. 이것들이 첫 번째 돌판을 결론짓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곳에서 수락된 보편적인 형태 외에 첫 번째 돌 판에 네 개의 계명들을 포함시킨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중요한 이유이다. 확실히 권위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달리 구분하여 두 번째 계명을 우리가 언급하는 수에서 제외시킨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계명으로써의 확실한 위치를 부여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을 터무니없이 둘로 나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단일한 계명인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오리겐이 우리의 구분을 그대로 제시했다는 사실에서 보다 순전한 시대에는 그와 같은 구분 방식이 알려진 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그와 같은 구분은 어거스틴의 시대에 나타났는데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지도 못했다. 다른 점에서 있어서는 우리의 구분이 보다 더 그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그것에 의해 우상 숭배가 그처럼 명백히 금지되었던 2계명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서서히 사라져 버리게 된 것은 마귀의 사기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 점을 짚고 넘어 가야만 사람들이 나의 구분을 어떤 새롭고 최근에 고안한 것으로 비웃거나 의아해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두 번째 돌 판이 남아 있다.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20:12).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분인 고로 우리는 우리의 부모를 무시하거나 어떤 식으로 노엽게 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에게 커다란 경의를 표해야 하며 그들을 존경하고 명예롭게 해야 하며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이 일들에 있어 우리의 노력이 소용될 수 있는 사람들은 기쁘게 하고 그들에게 감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엡6:1-3; 마15:4-6). 여기에는 축복이 부가되어 있다.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독특한 추천의 방식을 통해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를 선포하며 우리의 나태함을 일깨우며 동시에 자기 부모에게 보답하고 감사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배은망덕한 자식들은 확실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출20:13).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종류의 행위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쳐서도 안 된다.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해서는 안 되며 누구를 공격하거나 아무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만일 우리 속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나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 친구든 원수라도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위험에 처해 있으면 도움의 손길일 베풀어야 하며 최선을 다해서 친구나 원수나 관대하려는 노력을 하자.(마 5:27-30).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출20:14)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 우리의 모든 행위를 순결하고 자제심 있게 조절하고 행해야 한다. 순결이란 신의 특별한 선물이므로 우리 각자는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마5:43-48; 엡5:3-4; 고전6:13-20; 마19:11-12; 고전7:1-40).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그들 육신의 불순함을 위해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치료책이 있다. 순결치 않으면 하나님을 대항해서 싸우고, 그분의 규례에 저항하는 셈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노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움은 오직 그의 길에 행하는 자들에게만 임하기 때문이다(시91:1-14).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해서 떠난다. 순결로 부르심 안에 행하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도움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강퍅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신6:16; 미4:7)는 기억하자.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본성에 반하여 그가 주신 현재의 은사들까지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들이 하는 일은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세우시고 명예로운 것이라 선언하신 결혼 관계마저 감히 깨뜨린다. 그리스도 우리 주께서 친히 가나 혼인집에 왕림하셔서 그의 첫 번째 기적의 은혜를 베풀어주심으로 거룩하게 하신 결혼 관계이다(창2:18-24; 히13:4; 요2:1-11).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단지 어떤 종류의 독신 상태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기 위해서이다. 마치 독신과 처녀성은 별개가 아닌 것처럼! 그들은 그것은 “천사 같은 생활”이라 부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음행 자들과 간음 자들, 그리고 그보다 악하고 더러운 어떤 것을 천사들에 비유하여 하나님의 천사들을 심히 부당하게 취급하고 있다. 우리는 주께서 때때로 이런 종류의 교만과 은혜에 대한 경멸에 대해 어떤 무서운 형벌로 보수하시는지를 안다. 부부들은 자기들에게 모든 것이 허용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남편은 자기 아내를 하늘나라 공주처럼 대하며 아내도 남편을 그렇게 대해야 한다. 자기 결혼의 순결한 절제에 합당하지 않은 어떤 것도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주안에서 결혼한 것이며 주와 함께 거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제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출20:15).

8계명의 뜻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해야 하는 고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사기에 의해 도둑질하거나 완력에 의해 움켜잡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자아나 계약을 할 때 다른 사람의 무지를 악용하지 말아야 한다. 즉 물건 값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너무 비싸게 팔거나 혹은 너무 싸게 구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어떤 종류의 간계에 의해 다른 사람의 재산에 손을 대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친구든 적이든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움과 충고를 줌으로써 그의 재산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어떤 것을 취하기보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만일 그들이 어떤 물질적 곤란을 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짐을 나누어 져야 하며 우리의 물질을 가지고서 그들의 가난을 덜어 주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이다.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출20:16).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해야 하는 고로 어떤 사람에 대해 거짓된 비난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평판에 손상을 주어서는 안 되고 험담을 하거나 독설에 귀를 기울여서도 안 되며 어떤 사람에 대해 의심을 하거나 악의를 가져서도 안 된다. 오히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사랑이 있다면 할 수 있는 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좋게 말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에 대한 공정한 판단자로서 우리는 사람들을 말과 행위를 가장 좋게 해석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마7:1-5; 롬13:8-10; 14:10). 9계명에 또한 우리가 어떤 거짓말도 기뻐하지 않으며 그럴듯한 아첨을 하지 않으며 무익한 잡담을 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한다(잠5:6; 마12:36-37; 엡4:25-28; 5:6-11).

 

제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20:17).

10계명에 의해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아내나 가족이나 소유나 어떤 좋은 것에 대한 모든 탐심을 금지하신다. 이런 식으로 그는 더 많은 것을 금지하신다. 우리는 어떤 술책이나 사기나 잔꾀로써 아내가 남편과의 교제에서 떠나게 한다든지 종들이 도망치게 한다든지 혹은 어떤 소유물들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게 하면 안 된다. 우리는 공교한 말로 아내가 남편에게서 혹은 종이 주인에게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남편이 자기 아내로부터 떠나게 함으로써 남편에 의해 버림받은 아내가 우리의 것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인에 의해서 쫓겨난 종들이 우리 차지가 되도록 해서도 안 된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의 소유에 탐욕스런 사람들이 사용하는 종류의 사기를 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가 금지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그러한 것을 의도하거나 원하거나 생각하는 것마저도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오히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경외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떤 사람의 아내와 모든 소유물들이 안전하게 보존될 것을 바라야 할뿐 아니라 남편과 아내 사이에 애정을 조장해 주어야 할 것이다. 노예들로 자기들의 의무를 다 하게 하며, 할 수 있는 대로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의 것을 간직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소유물들을 탐내는 것을 금하는 이 규칙은 또한 각 사람이 자기의 소명을 따라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며 자기 직분에 관계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도록 하는 방식으로도 적용되어야 한다(엡4:). 그리고 자기 자신의 소명의 은사로부터 그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을 낳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소유들을 탐내고 차지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사람들은 왕들과 왕자들과 관원들과 다른 권세 있는 자들을 공경해야 하며 그들의 정부에 인내심을 가지고 대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 아래에 수행될 수 있는 어떤 것도 거부하지 말고 법률과 계명들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롬13:1이하, 벧전2:13이하, 딛3:1). 한편 통치자들은 그들 자신의 보통 백성들을 돌보고 정의를 구현하며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선한 자들을 보호하며 악한 자들을 징벌해야 한다(엡4:1, 7, 16, 28) 그리하여 마치 최후의 왕이시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자신들의 봉사에 대한 회계를 곧 해야 할 것처럼 모든 것을 관리해야 한다(신17:19; 대하19:6-7비교; 또한 히13:17). 교회의 감독들과 목사들은 말씀의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하며 구원의 도리를 혼잡케 함이 없이(고후2:17비교).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채 전달해야 한다. 또한 그들은 말로써 뿐만 아니라 생활의 본보기를 통해서도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선한 목자들로서 양떼들에 대한 권위를 행사해야 하는 것이다(딤전3:1-5; 딤후2:15; 4:2,5; 딛1:6이하; 벧전5:2이하). 한편 백성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사자요 사도로 받아들여 주께서 그들에게 합당하다고 여기신 명예를 부여해야 하며 그들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그들에게 공급해야 한다(마10:10이하; 롬10:15 그리고 15:15 이하, 고전9:6-14; 갈6:6; 실잔5:12; 딤전5:17이하).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 주신 자녀들을 양육하고 가르치고 다르시는 일을 감당해야 하며 인정 없고 잔인한 태도로 그들을 노엽게 함으로써 그들이 부모에게 들을 돌리게 해서는 안 된다(엡6:4; 골3:21).

오히려 온유함과 친절함으로 자녀들을 품어 주고 감싸주어야 한다. 그것이 부모에게 합당한 일이다. 우리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주께서 노인들은 공경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신 말씀을 따라 젊은이들은 노인들을 공경해야 한다. 또한 노인들은 젊은이들보다 나은 지혜와 경험으로 젊은이들의 부족함을 지도해 주어야 하며 심하게 큰 소리로 그들을 꾸짖지 말고 유순함과 온유함으로 그들의 가혹함을 조절해야 한다. 종들은 주인들에게 부지런하고 고분고분하게 행동해야 하며 눈가림만 하지 말고 마음으로부터 주께 하듯 순종해야 한다. 또한 주인들은 종들에게 까다롭고 고약하게 행동하지 말고 지나친 엄격함으로 그들을 억압하지 말고 그들에게 욕설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종들을 자기 형제들로, 하늘에 계신 동일한 주의 종들로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인간적으로 대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엡6:5-9; 골3:22-25; 딛2:9-10; 벧전2:18-20; 골4:1; 몬16비교). 이런 식으로 각 사람은 자신의 위치와 신분 속에서 이웃에 대한 의무를 생각하고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