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및 설교자료
1. 설교를 흥미로 채우는 법
2. 21세기를 대비한 설교문화
3. 인터넷 설교에 대한 비평적 고찰
4. 효과적인 설교를 위한 제언
5.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12가지 원리
6. 제자훈련과 설교, 어떻게 준비할 것이가?
7. 귀납법적 성경연구 방법론
1) 강화체본문과 구문분석
2) 주문장
3) 문장분석순서
8. 강해설교를 위한 구문분석
1) 요나서1:1-3
2) 욥기 1장
3) 빌 1:1-8
설교를 흥미로 채우는 법
- 빌하이벨스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마음이 어수선해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불행을 느끼고 있다. 가정이 이상적이지 못할 수
도 있다. 또는 경제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수도 있다 과중한 일에 억눌려 있을
수도 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때, 그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메뉴에
대한 식욕을 억누른다. 설교자로서 내가 할 일은 복음의 향기로 근심 걱정으로 여윈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설교할 때 끊임없이, '사람들이 내게 기울이는 미약한 주의를 어떻
게 유지하고 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나는 그들의 주의를 오래 끌지 못한다. 주일에 교회 휴게실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듣고 있다 보면, 나는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빨리 거룩한 예배로부터 미식축구나
야구 또는 돈 벌이와 정치 문제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 가는가를 보고 놀라게 된다.
따라서 나의 한 주동안의 주요한 책임 중 한가지는 설교를 가지고 그들의 주의를 끄
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적절성을 알아 보기 위해서 내 설교 자료로 하여금 "그래서요?" 테스
트("So what?" test for relevance)를 거치게 한다. 성경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성
경은 적절하다. 그러나 나는 설교를 성경만큼 적절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내가 사람들이 떠나면서, "그래서요?"가 아니라 "알았습
니다"라고 말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하는 방법이 지성과 감정과 의지
에 설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성에 설교하라
신학은 지성에 도전한다. 나는 많지 않은 사람들만이 신학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아마도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 그들이 자기들의 삶의
배후에 있는 세계관-삶의 철학-을 살펴보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설교할 때 그들로
하여금 계속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고자 한다.
나는 나의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의 이해를 넓혀 주고자 애쓴다. 나는 사도신경 시
리즈 설교를 하는 중에, "천지를 만드신"이라는 문구에 대해 설교했을 때 그렇게 했
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주를, 경험적으로 식별 가능한 법칙에 따라 작
용하는 폐쇄 체계(a closed system)로 본다. 그렇다면 "천지를 지으신"이라는 표현이
어디에 맞는다는 말인가? 유물론자들과 자연주의자들이 우리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
기 때문에, 나는 폐쇄 체계에 대한 대안을 조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발견
했다. 나는 자연 과학과 이론 물리학을 건전한 신학과 연결시킨 좋은 설교를 가지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었다.
사람들의 지성에 접근하는 것은 낭비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성을 사로잡으려고 애썼다 나는 그들의 생각과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 그들이 복음
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씨름했다.
의지에 설교하라
의지에 설교할 때,나는 반응을 기대한다. 나는 사람들이 설교된 바에 기초해 행동
하기를 원한다 목사인 나는 부흥회 설교자보다 더 점잖고, 덜 요구적이 되기가 쉽다.
여러 해 동안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 번에 모든 것을 얻거나
잃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대개 어떤 굉장히 큰 조치보다는 방향이 올바른 작
은 운동을 기대한다.사람들의 의지란 자연히 움직이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작더라
도 방향이 올바른 운동을 격려하는 말씀과 예화를 선택하려 애쓴다. 나는 의도적으
로 격려한다는 말을 사용한다. 대개 사람들은 "도전"보다는 격려에 더 잘 반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야단치는 것 보다는 자극과 격려를 필요하다. 따라서
나는 사람들에게 감당할 만한 말씀을 제공하려고 애쓴다.
의지는 교활한 피조물이다. 의지는 때로는 격려를, 때로는 도전을 받을 필요가 있
다. 의지에 설교하는 데 있어서의 비결은 어떤 종류의 자극이 여러분의 설교 대상들
에게 가장 빠른 효과를 나타내느냐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감정에 설교하라
얼마 전에, 나는 거부 당하신 그리스도에 관해 설교하고 있었다. 그렇게 친숙한 주
제는 설교를 듣는 사람을 졸게 만들기 쉬운 주제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흥미를
추가할 수 있었을까? 감정이다.
나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전후(戰後)에 겪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나는 처칠의 팬이다. 그래서 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그의 엄청난 영향력을 회상
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딱딱 소리를 내는 라디오에서 그의 유명한 연설에 귀를 기
울였다고 말했다. "우리는 해변에서 그들과 싸울 것입니다...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
을 것입니다!" 폭탄이 떨어지고, 대공화포 소리가 들리고, 밤하늘을 가로 질러 비취
는 서취라이트의 섬광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불독 같은 결단은 우리가 그 끔찍스러
운 시기를 통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처칠은 전쟁 중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선거가 실시되
었을 때, 놀랍게도 처칠은 낙선했다. 처칠이 행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영국 사람
들은 그를 수상으로 선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려 주었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아주 조
용한 목소리로, "그는 거부당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동안, 그들은 거부가 의미
하는 바를 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감정을 끌었다. 처칠이 거부된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언짢게 만들었던 것이다. 거기서부터 그들의 감정을 예수 그
리스도께서 거부당하신 사실로 옮기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은 것이었다.
혹자는 우리가 지성을 희생하여 감정에 호소할 수도 있다고 정당한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로서는 사람들의 감정을
교묘히 이용하기보다는 그 감정을 잊어버리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순전히 지적인
문제는 지나치게 무미건조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은 생명을 더해 준다. 감정은 사람
들을 반응으로 인도한다. 사람들은 감정과 일체가 된다.
유머는 감정을 유도하기 때문에 내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유머
는 놀라운 종이나 무서운 폭군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필립 브룩스의 설교에 대
한 정의 -설교는 인격을 통해 전달되는 진리이다 -가 옳다면, 나는 유머를 통해서
진리를 전달해야 마땅하다. 내가 유머를 즐기기 때문이다.
유머는 또한 설교 중에 정신적인 휴식을 제공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이따금씩 휴
식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유머는 설교의 매력을 더하는 방식으로 휴식을 제공한다.
잠깐 동안의 웃음이 지나간 후에, 사람들은 더 큰 만족을 얻을 준비를 갖추게 된다.
또는 어떤 것-커다란 기침 소리 같은-이 설교의 분위기를 어지럽힐 때, 훌륭한 유머
가 담긴 말대꾸가 사람들의 주의를 설교자에게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설교자가 되라
설교할 성경 본문이 내가 일생 동안 다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나는
설교를 다 했다는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전혀 없다. 그러나 나는 내 설교의 무미건조
한 부분들을 공략한다. 한 동안 시리즈 설교를 해 온 경우에, 나는 때때로 이렇게 생
각한다. '가만 있어봐. 이건 정말 무미 건조하군. 여기서 빨리 벗어나서 피해를 최소
로 줄이자!'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내가 성경적인 자료와 씨름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잠재의식 속에서 재미없는 것으로 무시해 온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주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설교자와 청중 모두를 지
루하게 만들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새로운, 독특한 각도를 발견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다 나는 본문의 호기심을 일으키는 측면을 발견할 때, 내가
할 말에 대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더 쉽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해가
가면 갈수록 내 설교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 나는 내 생각을 재미있게 유지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모든 설교자에게 있어서 끝이 없는 과업이다.
아이디어들이 나를 자극해 준다. 나는 김이 빠지기 시작할 때 사람들과 대화하기
를 좋아한다. 대화는 사람들과 삶과 신앙에 관해서 계속 흥분하게 해 준다. 또한 대
화는 설교에 흥미를 더하는 방법들을 제공해 준다. 왜냐하면 대화가 나를 세상 풍조
에 밝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주일 저녁에 열두어 명 되는 사람들을 우리 집에 초청해 커
피와 디저트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한다. 나는 단지 사람들을 불러 그들의 흥
미를 끄는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할 뿐이다. 나는 그들이 어디 출신이고, 무엇
이 그들의 흥취를 자극하고, 그들이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 는가를 듣는 것을 좋아한
다.
그런 대화들은 종종 서로의 이해를 풍성하게 해 준다. 언젠가 판사와 의료 윤리학
교수가 함께 자리에 앉았을 때, 대화 내용이 낙태로 바뀌었다. 그 교수는 밀워키의
낙태 병원을 경영하는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시행했다. 그는 의료 윤리에 관심을 가
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판사는 가족들의 복지를 다룬 오랜 경험을 근거로 그 대화
에 개입했다. 이어지는 대화는 우리 모두를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내게 재미 있었던 것이 언제나 내 회중을 즐겁게 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
의 음악적 취향이 회중의 취향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비록 내가 유럽 역사에 큰 관
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별로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이에 덧붙여, 나는 전형적인 남성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반면에, 나의 교구민들
대부분은 당연히 여자들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취향과 관심사가 기준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사람들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에 관해 생각해야 한다. 나는 단
지 나와 꼭 같지 않은 사람들을 흥미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위해 귀를
열어두어야 한다.
또는 항상 눈을 열어두어야 한다. 나는 비행기를 탈 때, 「글래머 (glamour)」나
「미즈(Ms)」같은 잡지를 후딱 넘겨보곤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때때로 나는 설득
력 있게 잘 쓴 기사들이 세속적인 사고를 들여다 보는 창문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다. 나는 종종 노트를 한다. 나는 흥미 있는 자료를 접촉함을 통해서 세속적인 생각
을 접하고 세상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삶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내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예화들을 산출해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는 것에 관심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동의할 필요가 없다. 전부를 다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사를 이해하고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사람들
에게 재미있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알
아야 하는 것이다.
("현대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중에서)
21세기를 대비한 설교문화
황 성 철 교수 (한국교회연구소소장)
1. 21세기적 변화의 일반적 조망
2. 21세기 설교자들 의식에 있어서의 패러다임 쉬프트
3. 21세기를 위한 설교문화의 실제적 대안들
* 아래 내용은 총신대학 부설 한국교회연구소가 발행한
"한국교회"에서 요약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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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는 정보의 홍수로 말미암아 인간 삶의 모든 분야에 엄청난 변화가 도래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이를 실감있게 경험하면서 살고 있는 중이다.즉 18
개월마다 100%의 비율로 새로운 정보가 걸러져서 새로운 지식으로 정리됨으로 인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는 18개월 후면 쓸모없이 되는 급격한 변화의 시대
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설교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번씩은 해보
게 될 것이다.'시대의 변화에 맞추어서 우리의 설교도 변해야 하
는가?' '변해야 한다면 그 변화의 범위는 어디까지여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은 앞으로 변화하여 가는 시대에 복음을 이식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이 분명하다, 교회가 변화하는 시대를 막을 수 없다고 한다면 교회 자체가 이
새로운 시대의 사고구조와 삶의 방식을 따라 구조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주
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21세기적 교회가 수반해야 할 이상적인 설교 문화 역시
나름대로의 적절한 탈바꿈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도태되어 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누구
도 할 수 없을 것이다.
1. 21세기적 변화의 일반적 조망
1) 대체되어지는 혼돈
한때 세계는 납으로 금을 만들려는 연금술사들이 존재했던 적이 있었다. 그들이
유명해진 이유는 납에서 금을 창조하려 한 그들의 시도 때문이었다.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기술은 중세이래 오랫동안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던 많은 것들을 하나하나 가
능한 것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혼돈의 시기에 모든 낡은 질서는 붕괴되고 새로운 변화가 문화, 기술, 교육, 정치
를 재정비해 가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연금술의 약속이라는 보다 큰 약속을 낳고 있
다. 그것은 납을 금으로 만드는 일이라기보다는 문화, 기술, 학습, 정치를 혼합해 변화
시켜 사고, 생활, 학습, 노동양식의 새로운 결합을 유도하는 것이다.
16세기와 지금을 비교하자면, 그 당시 한 사람이 일생동안 습득 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은 현재 신문 한 부에 수록된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오늘날 컴퓨터, 전화선, 모
뎀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루 저녁 사이에 그의 부모가 일생동안 접할 수 있었던 정보
보다도 많은 정보에 접할 수 있게 해준다.
근자에 와서 일부 목회자들에게서는 들려지는 종래의 설교 형태를 과감히 탈피하
여, 보여지는 형태의 설교를 추구하고 있는 경향도 나타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서 종전의 수요 예배를 모뎀 통신을 통한 성경공부로 대체시키거나 대체시키려고 한
다는 말도 듣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교통량이 날로 증가되고 있는 지역에서의 교
통체증을 감안한다면 하나의 효율적인 형태의 말씀을 통한 교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시도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면이나 성도들 간의 인격적인
교제의 면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사실이지만, 재테크나
시테크의 개념으로 따져 보자면 매우 혁신적이고 고무적인 시도임에는 틀림이 없다.
2) 과학의 진보가 개인에게 초래시킬 변화들
의학적 진보, 특히 생물학과 공학 기술의 결합은 인간 수명 연장의 추세를 계속해
서 가속화시키고 있다. 일례로 예순이 넘어 백내장에 걸린 안구 대신에 과학자들은
외과 수술을 통해서 렌즈를 이식해 2.0.의 시력을 제공해 주기도 하는데, 오늘날 신체
부위의 72곳 이상을 이식할 수도 있다.
얼마 전에는 노인들의 퇴화된 기억력을 젊은이 정도의 수준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물질이 개발되기도 했으며, 더 나아가 미국의 인디아나와 네바다주의 연구가들은 성
인의 골수를 양 의 수정란에 이식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이 실험양으로부터 양과 인
간의 혈액세포를 생산하는데 성공한 사례도 있다.
이렇듯 진보된 과학과 결합된 개인에게 대해서 관절염에 걸린 코끼리처럼 작동하
고 있는 정부는 더 이상 정보를 통제할 수 없다. 광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커뮤니케이
션에 편승한 성도가 날아가고 있는데 교회의 지도자들은 걸음마를 배우고 있다면 21
세기를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일본의 후지쓰 컴퓨터 회사는 일본어를 영어로, 영어를 일본어로 1분에 천 단어를
번역할 수 있는 번역기계를 가지고 있다. 이 번역 프로그램으로써 다른 언어를 사용
하는 사람들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대화가 디지털화됨으로써 음성합성도 가능하
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 당시 오순절 때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 각국 방언이 은사로
임했던 사건은 단회적일 필요가 더 이상은 없어진다. 이제는 모든 필요한 부족에게
얼마든지 음성 통역도 가능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3) 커뮤니케이션
걸프전 동안 바그다드에서 다른 고참 뉴스 네트워크 기자들이 전화부스를 찾고 있
을 때 CNN기자는 소형 위성 안테나와 전송장치를 갖춘 서류가방으로 그 회사의 위
성 트랜스폰더로 전송할 수 있었다. 국경이 없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엄청난 양의 텔레비젼, 팩시밀리, 데이터, 전화, 라디오, 그리고 미래의 광역 멀티미
디어와 다른 커뮤니케이션들이 케이블의 이르는 어떤 곳으로도 여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광섬유 케이블 네크워크(광역 ISDN)이다. 또한 그것은 컴퓨터에 기초한 비디오
프로세싱과 전세계의 데이터 뱅크에의 접근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정보는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핵이다. 유식자와 무식자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인종, 피부색, 제도, 교육, 경제의 문제가 더는 아니다. 그것은 태도로써, 정보는 지식
으로 이어지고, 지식은 지혜 로 이어질 수 있기에, 또 지혜는 힘으로 이어짐을 감안한
다면 열린 태도는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다.
성도들은 21세기적 정보화 세계의 격동기에서, 초대교회 당시 로마의 길과 헬라의
문화에 편승해 복음을 편만히 전했던 사도들, 특히 바울을 포함해서 그들이 이뤄낸
역사를 현명하게 재현하기 위해서는 어두움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고 빠르게 효율적
으로 정보를 걸러서 믿음의 권속들에게 분배해야 할 마땅한 시대적 과업이 기다리고
있음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땅 끝까지, 모든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그것은
복음과 기독교인들의 노력과 기술의 결합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땅 끝까지 편만히 복음이 전해지기는 하겠지만, 기왕에 그것이 기독교인들의 사명이
라면 정보 고속도로가 뚫리고 있는 이 호기를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설교는 자신들의 교인들에게만 공급하는 그런 형태에서 벗어나 인터넷을 통
해서나, 위성망을 통해서 세계 각국, 특히 불신자들을 포함하는 모든 이들에게 전해져
야 한다는 종말론적 사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어있는, 또한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는
목회자라야 시대와의 경쟁에서 우월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2. 21세기 설교자들 의식에 있어서의 패러다임 쉬프트
이미지 수용이 문자 수용보다 쉬운 세대인 지금보다도 더 진보해 있을 21세기의
설교자들에게는 이미 전통 운운한다는 사실 자체가 설득적일 수 없다는 것이 본 소고
의 주장이다. 멀티 미디어 시대인만큼 각종 정보와 음악 및 온갖 류의 엔터테인먼트
가 집약된 매스 메디아에 익숙해지고 있는 시대의 아들들에게 구태의연한 방법을 적
용시킨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비효율적인 방식이 될 수 밖에 없음
을 시사한다.
인터넷을 통하면 당장에라도 출처 불명의 새로운 신학사상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세계의 정보가 손에 잡힐 듯이 몰려 오는 판국인데, 어째서 강대상에서 선포되어지는
설교의 형태는 종래와 다를 바 없이 획일적이고 판에 박은 듯하게 붕어빵모냥 양산되
어야만 하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본 설교자라면 자신의 설교 형태에 대해 여러
번의 숙고와 변화를 시도해 보지 않은 이는 적지 않을 것이다.
복음의 진수를 변개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변화, 이를테면 창세기 22장의 이삭
을 젠물로 바치는 장면을 드라마로 일부 전환한 설교의 형태가 반드시 주일 예배와
교제의 빛을 흐리게 하는 위협적인 것인가 하는 점에는 다소 회의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이런 형태의 설교, 예배 형식은 전통적이지는 않지만, 등장 인물들의 상이
한 목소리와 그에 맞게 세밀히 연출된 인물들의 각 배역을 통해서 이미지세대인 피설
교자들에게는 상당히 실감있게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벤허」라는 영화가 오랜 동안 관객들의 기억에서 지위지지 않는 효과를 이뤄낸 것
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헐리웃의 영화 한 편이면 세계의 숱한 젊은이들을 환상사상에로, 무신론자로 얼마
든지 전이시킬 수 있다. 그들이 이용하는 첨단 기술을 교회의 지도자들, 특별히 말씀
의 사역자로 부름받은 이들이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어떤 규제가 성경 내에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격변하는 21세기를 지향하는 설교 사역자들이 다가
오는 세기를 소극적으로만 수호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한 므나를 받고서 그대
로 묻어둔 악하고 게으른 종의 반열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부담을 반드시 안아
야 함을 지적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수반되어져야 할 필수적인 것이 바로 설교를 맡은 말씀 사역자들의 패러다
임 쉬프트(Paradigm Shift)인 것이다. 오르간을 탐탐해 하지 않았었던 스펄전도 있었
고, 현대 음악에 놀랐을 17세기 청교도들도 존재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가상현실이
펼쳐질 미래세대들에게 적용될 현대적 방법론들, 특히 일례로 전술한 시청각적 요소
를 가미한 설교형태는 아마도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성경적 전파기재
가 되리라고 생각된다.
3. 21세기를 위한 설교문화의 실제적 대안들
1)설교 내용의 혁신
미국에서 매주 1만 4천명 이상 모이는 윌로우크릭 커뮤니티교회 (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는 빌 하이블(Bill Hybels) 목사가 부머세대, 즉 1946년에서 1964
년 사이에 출생한 세대를 겨냥하여 시작되어진 교회이다. 그는 전통적인 교회의 죽은
의식과 같다고 여겨진 예배 형식, 그리고 대부분의 주요 교단 교회들의 급속히 떨어
지는 출석율에 불만을 품고, 자신과 같은 세대인 베이비 부머들을 전도하기 위해 새
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그 결과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발견했다. 첫째,사람들은 교회가 항상 돈을 요
구하고 있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방문자들에게 헌금을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광고를 하게 되었다.
둘째,사람들은 설교가 지루하고 판에 박혀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일반적인
교회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의사전달과 관련된 실험을 하기로 했다.
세째,사람들은 교회가 실생활과 관계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매일의 삶을 다
루는 설교를 하게 되었다.
네째,사람들은 목회자들이 자신들을 무지하고 죄가 많다고 느끼게 만든다고 주장
했다. 이 비난을 들은 후 그는 결코 청중들을 무시하는 말을 하거나 그들에게 변화된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죄책감을 주지 않기로 결심
을 했다.
상기의 예는 윌로우크릭 교회의 단편적 사례이다. 빌 하이블 목사는 자신이 부머
세대인 만큼 그 대상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이 교회의 주 구성원이 될 것이란
점을 확신했고, 그에 맞는 전략을 세웠는데, 그것은 그 세대들의 보편적인 성향에 초
점을 맞춘 것으로써, 히피 세대라고도 할 수 있을 그들에게 매력적인 접촉점을 제공
하기에 부족하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이렇게 설교를 받는 세대가 어떤 세대인지를 분석하는 일은 필요한 것이다. 복음
의 내용은 성경적인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하지만, 그 내용의 수용을 위한 밭을 탐
색해서 접촉점을 발견하고 씨를 뿌려야 함을 놓쳐선 안된다. 예수님께서도 농부들에
게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목자들에게는 양치는 비유를 통해,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그녀가 필요로 하는 물에 관해 언급하심으로써 복음의 적절한 접촉점을 찾으셨던 것
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복음의 대상을 고려하는 설교는 매우 유익이 있다. 뉴 호프 커뮤니티교회 (New
Hope Community Church)의 데일 개로웨이(Dale Galloway)목사는 로버트 슐러목사
의 조언에 따라 필 요한 것이 있는 사람을 찾아 그 필요를 채워주고, 상처받은 사람
을 찾아 그 상처를 치료해 주는 사역을 한 결과,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을
위한 '승리의 새 생활' 사역, 혼혈가족사역, 별거생존, 이혼에서의 회복, 상담사역, 미
취학 아동들을 위한 어머니 및 성폭행의 희생자들을 위한 사역 등을 감당해 내고 있
다. 즉 그 대상에 따라서 유연한 복음의 내용이 결정되어지고 그에 따른 선포가 이뤄
짐을 알 수 있다.
현대는 물론 21세기에는 더욱 이혼율이 높아질 것이며, 그에 따른 결손 가정이 많
아질 것이 명약관화한데도 설교자가 그 대상에 맞는 적절한 설교를 준비하지 않는다
면, 그야말로 직무유기가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비정상적인 형태의 청중들이 생
겨날 것을 감안한다면, 그에 따른 복음의 핵심 이외의 부수적인 접촉점들의 개발은
불가피할 것이다.
2)설교 형식의 혁신
초대 교회 이래로 교회는 순례해 왔다. 개인을 통하던 것이 이제 는 거대한 조직
으로 탈바꿈한 경우도 적잖이 목격되고 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성도들 자신이 설
교자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물론 모였다가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사명
을 감당하면서….
그런데 현대를 지나 21세기를 맞이하게 될 차세대 믿음의 자녀들에게조차 동일한
형식의 무미건조한, 물론 성령의 감동이 충만한 선포를 통해서 회심과 성장이 이뤄지
겠지만, 그 유효 사정권 밖에 있는 방랑자들이 많아질 것이 분명한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종래의 구태의연한 틀을 수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칫 교회를 화석화
할 위험이 충분히 있음을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세기적인 정보 혁명을 목전에 두고 있는 세대들에 걸맞는 영상 및 멀티 미디어를
이용한 전도전략을 수용하여 나아가는, 즉 그들에게 먼저 주도권을 가지고 접근해가
는 능동적 형식이 필요한 때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다가오는 세대를 위해 열 린 마음과 유연한 자세로 변치 않는 복음의 진리를, 마
치 쓴 약을 당의정에 싸서 먹이듯이, 전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 앞에서 형식에 연연함
이 없이 수용성의 원리를 살펴봄은 매우 현명한 결정이 되리라고 믿는다.
드라마면 어떻고, 컴퓨터 매니아에게 컴퓨팅으로 다가서면 어떻고, 음악광에게 복
음의 열린 음악회면 어떤가, 다만 복음의 진전이 방해받지 않고 진리의 왜곡이 전무
하다면 모두가 바람직한 변화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종교 개혁이 주도되어지기 전까지의 중세는 말씀의 암흑기였다. 종교 개혁은 성도
들을 말씀의 풍성한 잔치로 초대했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21세기라는 전무한 변
화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20세 기 말은 아마도 대단한 영적 각축장이 될 것이다 그 전
쟁을 위해 설교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진두에 나서서 전진해가는 설교자들
은 그들의 동역자들, 넓게는 복음으로 낳은 자신의 영적 자녀들까지도 힘과 지혜를
합쳐 성령의 도우심으로 21세기를 승리의 장으로 만들어야 할 시대적 사명이 기다리
고 있다. 21세기는 급변하는 기술사회가 될 것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문명의 이기들을
적절히 이용하지 못하고 방치한다는 것은 게으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한 복음의 전파를 위한 설교의 내용이나 형태 면에서의 현명한 취사선택을 거친 변화
는 미래 세대를 위한 복음의 교두보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물결을 얼마나 슬기롭게 타느냐에 따라서 설교문화가
만개하거나 쇠락하는 역사를 이뤄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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