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이사야 강해

이사야 서 : The Book of Isaiah

에반젤(복음) 2019. 12. 29. 00:38


                 

이사야 서 : The Book of Isaiah

 

 

[영] The Book of Isaiah구약성서의 제23번서(書).

 

특히 이사야서는 66장으로 예레미야서 52장, 창세기 50장, 욥기42장보다 크고, 예언자의 글에 있어서 제1에 위치하는 글이기도 하다. 이사야서 전66장을일관하는신학적기조는 하나님의 의(義)이다. 그것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고 또 구원하시는하나님의 역사(일)이시며, 세계와 제국민, 자연과 역사를 지배하시는 크신 하나님의 경륜이시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로써 끝나는 이사야서 66장은, 바로 구신약성서 66권의 글을포함하는 전성서의 축도이고, 그 의미에 있어서 질이나 양 모두 [소성서](小聖書)로 불리우고도 있다. 시편과 함께 이사야서에서는 신약성서의 인용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할 수가 있다.

 

1. 이사야를 비롯한 선지자(예언자)의 어의(語意)

 

구약성서의 이사야서 이하를 총칭하여 [예언자](선지서)라고 한다. 다만 히브리원전(유대인의 성서)에 있어서는 다니엘서는 [예언자]에 속하지 않고, [문학]에 넣어져 있다. 예언자를의미하는 히브리어에는 [나-비 nabi'](告하는 자의 뜻), [로-에 ro'eh], [호(코)-제 hozeh](함께 보는 자의 뜻)의 셋이 있는데, 모두가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이것을 사람에게 고하는 자가 예언자이다. 그것은 반드시 장래의 일을 미리 예언하는 것뿐만 아니라, 과거 및 현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도 포함하는 까닭에, 한역(漢譯)의 예언자란 역은 정확한 번역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보다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자 즉 [대언자]라는 편이 원어의 의미에 가깝다는 것이학자들의 거의 일치된 견해이다. 그렇다고 관용되어 온 선지자나 예언자라는 말을 바꿀 것을 주장한다기보다는 다만 장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만이 [예언자]의 본질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라는 의미에서는 아브라함도, 모세도 예언자로서 불리웠다(창 20:7,신 18:15). 사회적 직업적 일단으로서의 예언자가 생겨난 것은, 사무엘시대 이후이다(삼상 19:18,20,왕하 6:1참조). 하지만 성서에 특히 [예언자]로서 편집되어 있는 일군(一群)의 사람은 기원전 8세기 중엽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모스 및 호세아, 남왕국 유다의 이사야 및 아가의 출현을 시초로 하여 그 후 3, 4세기경까지의 사이에 잇달아 일어나고,제사장 및 거짓된 직업적 예언자들에 대하여 영적 종교의 순결을 유지하기에 전심한 이들이다. 예언자 시대를 기원 1세기까지로 내리는 학자들도 있다. 현재의 형태로 예언서가 편집된것은, 기원전 4세기 내지 2세기의 무렵이리라.
 
2. 본서의 명칭

 

히브리어 성서의 이사야서명은 [예사야- hy:[]v'y] (y shayah)]인데, 본문 중에서는 더 자세히[예사야-후- Why:[]v'y] (y sha'yahu)]로 되어 있다. 본서가 이사야에 의해 기록된 책임을 말해준다.
 
3. 본서의 히브리원전에 있어서의 위치

 

본서는 히브리어성서의 I. 율법, II. 예언서, III. 제서중의 제2의 예언서에 속하고, 그 중 전예언서와 후예언서에 있어서 후예언서 제일 처음에보여진다.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소예언서의 순으로 되어 있다.
 
4. 본서의 저자(이사야)

 

[저자문제] 18세기 중엽까지, 선지자 이사야가 이사야서 전체의 저자였음을 의심한 일은 거의 없었다. 1775년에 데-데를라인이, 40-66장은 이사야의 작품이아니라고 한데서부터, 비평학자 사이에서는, 이 부분을 제2 이사야로 부르고, 어느 불명의저자가 바벨론 포로끝 무렵(B.C. 550-539경)에 썼다고 하게 되었다. 더구나 둠 (Duhm,Burnhard 1847-1928 독일의 구약학자)은 40-66장의 통일성을 부정하여, 제3 이사야(55-66장)설을 주장했다. 또 다른 비평가들을, 제3 이사야서는 한 사람이 아니라, 일군의 저자에의한 것이라고 했다.

 (1) 이들 비평가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40-66장은 예언의 역사적 기능의 관점에서 포로기의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비평가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전적으로 배격한데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40-66장은 부분은, 그 문체에 있어서, 전반과 다르다는 것이, 그 또 하나인데, 이는 특히 억단적, 주관적인 이론이다. 이사야와 같이 40년 이상이나 문필에 종사하고보면, 그 문체가변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3) 두개 부분의 신학적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들어 말한다. 제1 이사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위엄에 역점이 주어져 있는데, 제2 이사야에서는 하나님을 무한성이 고조되어 있고, 또전자에서는 남은 자의 사상이 현저한데, 후자에서는 고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이것들은 비평 그것의 불건전성을 보이고 있는데서 이다.더구나 이사야서 전체가 이사야의 붓으로된 것임은, 다음에 의해서 특히 증명된다.
1). 신약성서의 증언-요 1:23,눅 3:4→마태 3:17, 12:17-21, 요 12:38-41,롬 9:27-33,10:16-21
2). 포로기의 선지자의 증언-이사야의 제2부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임을 포로기의 선지자들이인정하고 있다(나훔 1:15와 이사야 52:7, 렘 31:35와 이사야 51:15, 렘 10:1-116과 이사야 41:7,44:12-15, 스바냐 2:15와 이사야 47:8, 10).
3). 유전 전언(傳言)의 증언-이사야서 사본, 사해사본, 70인역, 유대인의 전설, 오세푸스,외경, 교부들, 그리고 18세기까지의 그리스도인의 증언은 모두, 제2, 제3 이사야의 존재를부정하고, 본서 전부가 이사야 1인의 저작임을 말하고 있다.

 

5. 본서의 내용

 

이사야서는 대별하여 구분할 수가 있다(1-39장과 40-66장). 우연이기는 하지만, 현행 성서의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의 수와 일치하므로 기억하기가 쉽다. 다시 앞의 반은 1-12장, 13-35장, 36-39장으로, 후반은 40-48장, 49-66장으로 대별할 수가 있다. 본서는또한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1) 서언 1장
2)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 (2-4장)과 그 계속, 또 밀접하게 관련한 예언 (5장). 이 예언은, 번영했던 웃시야 시대로, 요담이 섭정이었던 때에 말해진 것이다.
3) 6장의 이상(異像)인데, 이것은 임마누엘(구주의 탄생)의 글(7-12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4) 타국에 대한 예언(13-23장).
5) 세계 심판과 이스라엘 및 시온의 구원(24-27장, 32-35장).
6) 역사적 부분( 36-39장). 앗수르와 바벨론 세력의 유다에 대한 군사행동의 최초의 기록인데, 이는 위로의 글의 서언이기도 한다.
7) 위로의 글(40-66장). 이것은 유다에 대한 엄한 심판의 연고로 주어졌는데, 바벨론의 지배에서의 구원(40-48장), 여호와의 종의 고난과 희생에 의한 구속(49-57장), 왕국의 승리와요호와의 보편적 지배(58-66장)가 그것이다. 이 부분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여호와의 종의모습이다.


6. 이사야의 신학 사상

 

이사야의 신학 사상은, 다른 예언자에 볼 수 없는 신(神)개념에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그 유일성, 그 지고성을 이사야만큼 예리하게 드러낸 예언자는 없다. 예컨데, 그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자]라는 명칭을 25회나, 본서 전체에 일관하여 쓰고 있는데서, 그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다른 예언자들은 예레미야가 2회 쓰고 있을 뿐이다(사 1:4,5:19,24,10:20,12:6, 17:7, 29:19,30:11, 12, 15, 31:1, 37:23, 41:14, 16, 20, 43:3, 14, 45:11, 47:4, 48:17, 49:7, 54:5, 55:5, 60:9,14, 29:23에서는 야곱의 거룩하신 분, 렘 50:29,51:5). 이사야서 6장은 이사야 신학의 축도라고도 할만한 것으로서, 거기에는 하나님과 백성에 대해 간결하게 말해져 있다.

 

그의 신학의 근저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과 영광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개념은 보통 말해지는 정결함이라든가 장엄같은 질적 내용의 개념보다도, 먼저 [만물에게 절리(切離)되어 있다]는 위치적, 상황적 개념이다. 하나님은 일체의 것을 초월하시며, 누구도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체를 지배하시며, 역사를 주장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동시에 이 하나님은 [심판]과 [정의]라는 윤리성을 통해서도, 절대자로서 자기를 나타내시고 계시다(사 5:10). 이 양측면을 가지고서 다가서시는 하나님의 앞에 선 때, 모든 사람은 , 이사야 6:5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고 외침과 같은 비탄을 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심판]과 [정의]는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창 1:28, 9:1, 12:1-2)에의 진실성속에서 나타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고성은 인간에의 철저한 심판과, 일방적인 구원의 역사(일하심)의 양면을 포함하는 [남은 자]의 개념속에 보여진다(4:3).

 

또한, 이같은 이사야의 신관은, 우상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다른 온갖 신과 비교할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다른 일체의 신신은 존채치 않는다.다른 것은 모두 인간이 지은 것이며 불신앙의 심리적 산물이다.다음은 하나님의 영관이시다. 이것은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6:3)라고 스랍이 노래한 의미에 있어서의 영광이시다. 영광의 히브리어인 [카-보-드 kabod ]는 [부(富), 미(美), 존귀, 풍부] 등으로 역되는 말인데, 이사야가 즐겨 쓴 말이기도 하다. 이사야서전체에 38회나 씌어져 있는데, 약 그 절반은 주의 영광에 씌어져 있다(3:8, 6:3, 10:16, 24:23,35:2, 40:5, 42:8, 12, 43:7, 48;11, 58:8, 59:19, 60:1, 2, 66:18, 19, 19). 또한 메시야의 영광에 대해서는 네 곳에 씌어져 있다(사 4:2,11:10,22:23,62:2).영광이란 하나님의 탁월성, 완전성, 지상 주권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포괄적 용어이다(→영광). 이사야는 그러한 하나님께서 자연 및 인간의 역사에 군림하시는 것이라고 한다.그런데 유다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상주권은, 그들의 우상예배, 자기만족, 외국의존 등에 의해 부정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반성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반성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때, 이스라엘은 축복되고, 어떤 위기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임을 역설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했다. 그 때문에 마침내는 그들의 존재가 하나님에 의해 부정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불신과 부정으로 인해 임하는 형벌이다.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8:6)같은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에 추파를 보내는자는 반대로 앗수르에 의한 재해를 받는 것으로 된다. 하나님의 형벌에서 도피하여 지하의영인 음부와 협정을 맺기도 하고(8:15), 외국의 원조를 추구하기도 하는(30:1, 2, 31:1), 하나님을 떠나서는 노력을 헛 것으로 돌아갈 뿐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불변이시고, 그 뜻은 반드시 수행되는 것이다(28:22).

 

그러나,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시련에 처해도 그것에 의해 민족이 근절되는 것으로는 생각지 않고 있었던 듯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백성을 벌하시는 데 흥미를 가지시고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형벌에 의해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에 대한 뜻이 달성되는 것이아니라, 엄한 징계의 매는 선민으로 하여금 선민되게 하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남은 자]의신앙은, 이사야가 장자에게 붙인 [스알야숩]이라는 이름에 잘 보여져 있다. 다수의 사람이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나 소수의 사람은 하나님의 신성과 영광에로 귀의한다는 신념이다. 그리고 이남은 자의 희망은 시일을 중심으로 하여 생각되고, 유다의 다른 성읍들이 적의 손에 넘겨진대도, 예루살렘만은 결코 앗수르의 손에 함락되지 않을 것을 단언했다(14:32). 예루살렘의 안태는 그의 신조였다.이 [남은 자] 즉 새 예루살렘과의 관련에 있어서 고찰해야만 할 사상으로서의 메시야 왕국이 있다. 1:26을 비롯한 여러 곳에 있어서, 현재의 오염된 사회와 장래의 이상적 사회가 대조적으로 묘출되어 있는데서, 이사야가 심판후의 축복된 상태를 고려하고 있었음은 조금도부정할 수 없다. 그의 신관 특히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의 일하심, 주도한 계획 등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스라엘 및 앗수르의 궤멸로서 성취 될 것으로는 생각지않았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심판을 넘어서 저 피안에 있어서 새 시온의 건설을 보았다. 그리고 새로운 국가는 남은 자에게서 생기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7:14에 [임마누엘] 계시가 있고, 그것은 9:6, 7 과 11:1-5의 메시야 상을 통하여 40장 이하에 보여지는 고난의 종의 상에로 이어져 가며 그 클라이막스가 52:13-53:12에 보여지는 고난과 죽음에 의해 죄를속량하시는 종의 노래이다. 둠(B. Duhm, 독일의 구약학자)이래 오늘까지, [주의 종의 노래]를 문맥에서 떼어 놓는 경향이 있으나, 우리들은 이것을 단편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이사야서 전체의 통일적 메시지는 6:9, 19 과 52:13-53:12를 결합할 때 비로서 파악할 수 있는것이다. 이사야서 전체의 다종 다양한 메시지를 총합하고, 단순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비유하여 말하면, 6:9-10에 포대를 놓고, 52:13-53:12의 종의 상을 목표로 하여 탄환을 발사한다면, 그것은 이사야 전체의 중심선을 일관할 뿐 아니라,저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께까지 달하는 것이다. 신약, 특히 요한복음 12:37-43의 증언도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7. 이사야의 문체와 용어

 

이사야의 경우 처럼 60년에 가까운 예언자 활동 기간에, 여러가지상황에서, 여러가지의 주제에 대하여 말하고 써서 남긴 것, 그리고 수집된 예언집을 일관하는 [문체와 용어]에 대해 요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그 위에, 취급해야 되는 본문 자체가, 문제들을 확립하기 위한 곤란성을 안고 있다. 본래 히브리어 원본에서는 장과 절의 구별은 없고, 모음기호도 없이,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행을 계속하는 것이고 보면, 그 것이 산문체인지 시문체인지 구별하기는 아주 곤란하다. 번역에 있어서 시문체로 하느냐 산문체로 하느냐, 또는 일단락을 어디까지로 하고, 괄호를 어디에 하느냐는, 모든 역자의 해석에 의한 것으로, 이것에 의해 말씀의 권위가 논해질 것은 아니다. 예컨대, 4:1은 3:26과 연결되어져 있고, 9:1도 8:22와 연결되어 있어서, 장의 구분으로서는 적절하지가 않다. 문체에 있어서도 이전에는 산문체로 취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시문체로 취하는 경향이 보여진다. 다만 여기에 몇가지 중요한 점을 고려해 둘 필요가있다.


1). 이사야서 중에는, 분명히 산문체로 기록된 것이 포함되어 있다.

6장의 소명의 기록, 7장의아람(시리아)과 이스라엘 연합군 침입의 기록, 8장의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증거, 20장의 맨몸의 생활의 기록, 36-39장의 역사적인 덧붙임은, 처음부터 써내려갔을 것이 틀림없는 것으로 보고들 있다.또한 기록이 아닌 산문체가 있다(10:23-26, 19:16-25, 44:9-20 등). 이것은 처음부터 써 내려갔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 계시를 받고 예언을 전하는 때 산문형식의 말씨가 되었는지알 수 없다.

2). 이사야서의 대부분은 시문체이다. 예언자가 예언을 전달하는 방법은 여러가지였다.

상징적 행위로써 하는 일이 있었다. 아히야는 여로보암에게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하는 때, 새 옷(겉옷)을 12조각으로 찢어, 10조각을 그에게 주었다(왕상 11:30-31). 아합에게심판을 예고한 예언자는, 몸에 상처를 내고, 수건을 감고서 그와 만나고 있다(왕상20:35-42). 엘리사는 요아스에게 활을 쏘게 하여 예언했다(왕하 13:15-16). 이사야는 3년간벗은 몸이 되어, 벗을 발로 걸어다니며 예언했다(사20장).예레미야도베띠를 사서 허리에띠고, 그것을 유브라데강의 바위틈에 감추었다(렘 13:1-7). 또한 토기장이의 오지병을 깨뜨려 예언했다(렘19장).에스겔은좌편으로 390일, 다음은 우편으로 40일이나  누웠다(겔4:4-6). 자기 아들에게 특별한 이름을 붙인 것도 상징적인 행위로 생각된다(스알야숩, 사7:3,마헬살랄하스바스, 사 8:3-4). 기타 호세아도(호 1:6-9,2:1), 어떤 기적이 아니고, 그대로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다윗의 죄를 책망한 나다나엘, 가드 기타). 이사야서 자체를 보아도, 서판(書板)에 써서도 하고(8:1), 아이에게 이름을 붙여서도(7:3, 8:3), 혹은 책에 써서(30:8, 34:16)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말에 의한 전달, 그것도 특히 암기와 낭독에 적합한 시문체로 메시지가 전해졌다. 그것은 한번 예언되면, 다음에서 다음으로 구전되고, 가령 한번 기록되었대도 낭독되는 때에는, 다시 하나님께로부터의산 메시지로서 회중 앞에 낭독했다. 히브리어 [다-바-르 dabar]라는 말에는, [말씀]이라는 뜻과[일](역사) 등의 뜻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일하심도 있다는 설명으로서 사람들은 들었다. 그리고 이사야의 예언이 낭창되는 때마다, 자기들이 살아 있는현재의 상황에의 메시지로서 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형태는 시문체라도 현재의 우리들이이해하고 있는 [시]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고, 구약시대의 예언 전달의 최선의 형식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특히 주목할 것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말씀],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등의 틀에 박힌 문구들인데, 이사야서에는 100회 이상 씌어져 있다(1:2, 11, 18, 20,24, 3:15, 16, 6:9, 11, 7:3, 7, 10, 8:1, 3, 11, 10:24, 14:22, 22, 23, 24, 27, 16:13, 14, 17:3, 6,18:4, 19:4, 20:2, 3, 21:10, 17, 22:12, 14, 15, 25, 23:11, 24:3, 25:8, 28:13, 16, 22, 26, 29, 29:13,22, 30:1, 12, 15, 31:4, 9, 36:10, 37:6, 21, 22, 23, 34, 38:4, 5, 40:1, 5, 25, 41:14, 42:5, 43:1, 10,12, 14, 17, 44:2, 6, 24, 26, 27, 28, 45:1, 11, 13, 14, 18, 48:17, 22, 49:3, 5, 6, 7, 8, 18, 22, 25,50:1, 51:22, 52:3, 4, 5, 5, 54:17, 55:8, 56:1, 4, 8, 57:15, 19, 21, 58:14, 59:20, 21, 21, 63:8,65:8, 13, 66:1, 2, 5, 9, 12, 17, 20, 21, 22, 23). 그 밖에 [경고](선고의 뜻도 있음 massa' 사 13:1,14:28,15:1,17:1, 19:1, 21:1, 11,13, 22:1, 23:1, 31:1)등을 글을 매듭짓는데도 크게 중요하다.

 

다음으로는 운인데, 히브리어의 경우, 대개는 3+3의 운을 밟고, 그 외에는 [키-나- qinah]의 3+2, 또는 4+2, 2+2+2든가 특별한 경우에 4+3이라든가, 3+4의 파조가 있다. 특히 40장 이하는, 44:9-20 및 52:3-6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일관된 아름다운 시형을 취하고 있다. 전체로 3+3이라는 운인데, [키-나-] 조의 3+2의 운도 상당수 씌어지고, 곳곳에 파조인 2+3, 또는 3+4가 씌어져 있다. 40장 첫머리의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이하, [외쳐 고하라]까지는, 3+2의 [키-나-]조인데, [그 복역은 그치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는 2+3의 파조로 되어 커다란 감동을 나타내고 있다.

드라마 형식도 있다. 시문체는 동시에 드라마 형식을 포함하는 일도 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드라마란 연출하는 자와 보는 자가 분리되어 있는 드라마가 아니라, 양자 일체로 되어 있는 드라마이다. 또한 드라마란 진실의 세계와 유리된 전시위한 것이 아니라, 드라마란 형식을 빌어 나타내는 진실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적 세계관에 있어서는 불교와 한가지로 처음도 끝도 없고, 혹은 인과율에 지배된 [지금]뿐 이므로, 거기서 연출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의 사건이고, 거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역할은 결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히브리인에게 있어서는, 드라마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다.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은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절대의 것이다. 그러므로, 드라마는 우리들의 5감으로 감득하고 있는 현상 세계이상의 진실한 것이다. 진실 그것이다.

 

 

 

 

<출처: 호학의 지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