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이사야 강해

이사야 - 개론

에반젤(복음) 2019. 12. 29. 00:40


     

이사야 - 개론

 

 

이사야 서론

 

 

●이름: “이사야“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뜻이다. 이 책에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사용되었다. 이사야가 훌륭한 가문 출신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는 여러 왕들의 궁정에 출입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결혼하였고(8:3), 최소한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7:3/8:1-3). 그의 사역은 웃시야왕의 통치가 끝날 즈음이나, 또는 주전 758년 경에 시작되었고 그 세기가 바뀔 때까지 활동하였으며, 사악한 므낫세 왕 때에 톱에 켜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히 11:37).

 

● 주제: 이사야서는 자체 내에서 자연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39장                    40-66장

바벨론 유수 이전          바벨론 유수 이후

유다가 앗수르를 이김      남은 자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옴

주제:정죄                 주제:시련 후의 위로

 

우리가 아는 바대로, 전반부 39장까지의 사건은 이사야가 직접 경험하였으나, 본 서의 뒷부분은 예언한 것이다. 그는 그 장들을 바벨론 유수로부터 돌아오게 될 유대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기록하였다. 전반부에서는 앗수르가, 후반부에서는 바벨론이 주된 적으로 다루어졌다.

 

● 역사적 배경: 솔로몬이 죽은 후에 왕국은 둘로 분할되어, 북쪽의 열 지파는 이스라엘을 조직하였으며 남쪽의 두 지파는 유다를 이루었다. 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였고, 유다의 수도는 예루살렘이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에서 사역하였으나, 그의 멧세지는 북쪽과 남쪽의 왕국을 다 취급하고 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북왕국)이 포위되어 결국은 앗수르로 사로잡혀 가는 것을 보고 살았다. 당시의 정세는 매우 흥미로운 데가 있다. 앗수르는 위협적인 세력이었으므로 다른 나라들은 앗수르와 싸우기 위해 동맹을 맺으려 하였다. 그러나, 유다의 아하스왕은 이 동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리아와 이스라엘은 유다를 침공하여 강제로 그들과 협력하게 하려 하자, 아하스왕은 여호와의 도우심을 신뢰하는 대신 앗수르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앗수르에게 있어서 이것은 문 앞에서음식을 취하는 격이었다. 그리하여, 앗수르는 주전 721년에 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유다를 그들의 속국으로 삼았으며, 아하스는 그 값을 치루어야 했다. 이스라엘이 더이상 방해가 되지 않자, 앗수르는 곧 유다를 공격하여 전 유대민족을 노예로 삼았다. 이사야는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도와주실 것을 신뢰하라고 말했으나, 많은 무리들이 애굽에게 원조를 요청할 것을 왕에게 고하였다. 36-39장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벽에서 히스기야 왕으로 하여금 앗수르를 이기게 하셨던 일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는 전쟁으로 인하여 매우 약화되었으며 성은 적들에게 심히 짓밟혀 있었으므로 사실상 결코 회복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앗수르는 애굽 사람들에게 패하였으며, 애굽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했다. 주전 606-587년에 바벨론은 유다를 포로로 잡아갔다. 그러므로 이 책 첫 부분에서 이사야는 앗수르를 조심하라고 충고하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남은 자들을 위로하였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을 이처럼 잘 나타낸 책은 없다

 

-출생: 7장 14절/ 마태복음 1장 23절, 9장 6절

-세례(침례)요한의 사역: 40장 3-6절/ 마태복음 3장 1절 이하

-성령으로 기름부어진 그리스도: 62장 1-2절/ 누가복음 4장 17-19절

-종된 그리스도: 42장 1-4절/ 마태복음 12장 17-21절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거부함: 6장 9-11절/ 요한복음 12장 38절 이하/ 마태복음 13장 10-15절/ 복음서의 관련성구들/ 사도행전 28장 26-27절/ 로마서 11장 8절

-거치는 돌: 8장 14절/28장 16절/ 로마서 9장 32-33절, 10장 11절/ 베드로전서 2장 6절

-이방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 49장 6절/ 누가복음 2장 32절/ 사도행전 13장 47절, 9장 1-2절/ 마태복음 4장 15-16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52장 13절-53장 12절

-그리스도의 부활: 55장 3절/ 45장 23절/ 사도행전 13장 34절/ 로마서 14장 11절/ 빌립보서 2장 10-11절

-왕으로 오시는 주: 9장 6-7절/11장 1절 이하/32장 1-2절/ 59장 20-21절/ 63장 2-3절/ 로마서 11장 26-27절/ 요한계시록 19장 13-15절

 

●고난받는 종: 본서에는 “여호와의 종“에 대해 17회 언급되어 있다. 이 가운데 13회는 민족적인 관점에서 사용되었고(41:8-9/43:10/44:1-2/44:21/44:26/45:4/48:20/49:3/49:5-7), 4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쓰여졌다(42:1/42:19/52:13/53:11). 52장 13절-53장 12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종으로서 말씀과 구세주를 세상에 보내기 위해 하나님께 사용된 민족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징계를 받아 마땅한 불순종하는 종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하여 죽으신 여호와의 종으로서 아버지의 뜻을 완전하게 행하셨다.

 

●이사야의 두 아들: 두 아들의 이름이 상징하는 바는 이사야서의 두 가지의 주된 멧세지를 예증하고 있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라“는 뜻이며, 예언의 두번째 부분인 바벨론에서 남은 자들이 귀환하는 것에 해당된다. “마헬살랄하스바스“는 “노력하는 데에 빠른, 또는 약탈하는 데에 성급한“의 뜻을 갖는다. 이것은 1-39장에 나오는 앗수르에 의한 멸망에 해당한다.

 

이사야서는 “축소된 성경전서“라고 불리워진다. 전 66장은 두 부분, 즉 첫 부분의 39장(구약)과 둘째 부분의 27장(신약)으로 나뉘어져 있다. 구약성경과 같이 전반부의 39장은 심판을 강조하며, 후반부의 27장은 자비와 위로를 강조한다.

 

 

▣ 이사야 개요

 

 

● 주제: 여호와의 구원

 

1. 정죄-앗수르에 의한 패망 /1-39장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설교/1-12장

다른 민족에 대한 심판으로 인한 부담/ 13-23장

민족의 장래 영광을 노래함/ 24-27장

민족의 죄로 인한 재난/ 28-35장

역사적 기술(히스기야왕)/ 36-39장

-앗수르에 대한 승리/ 36-37장

-바벨론과 더불어 범죄함/38-39장

 

2. 위로-바벨론에서 해방된 남은 자들/ 40-66장

 

하나님의 위대하심 / 40-66장

참 하나님 대 이방의 거짓 우상

성부, 여호와 하나님을 강조함

하나님의 은혜 /49-57장

인간을 위해 죽으신 고난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함

하나님의 영광/ 58-66장

장래의 왕국의 영광

성령을 강조함(59:19/59:21/61:1/63:10-11/63:14)"

 

 

▣ 이사야의 소명-이사야 1-6장

 

 

이 부분에서는 6장이 핵심 장이다. 6장에서는 이사야가 성전에서 탄식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웃시야왕은 죽었고 유다의 보좌는 비어 있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이사야는 도움과 위로를 받고자 하나님에게로 향하였다. 외관상으로는 패배한 것 같은 때에 그는 영적인 큰 축복을 체험하였다. 그가 받은 삼중의 환상을 살펴보자.

 

1. 위(여호와)를 바라봄(1-4절)

 

모든 헌신한 시민들처럼 이사야는 웃시야왕을 우상화하였다. 52년간 웃시야는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계획들을 시행해 왔으며, 이 때는 위대한 건설과 물질적인 업적을 남긴 시기였다.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하여 문둥병자로 죽어야 했던 것은 불행한 일이다(왕하 15:1-7/대하 26:1- 장). 이사야는 이 나라가 물질적으로는 번영되었지만 영적으로는 형편없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강조하였다. 외적인 성장과 평화는 부패한 마음을 덮고 있을 뿐이다! 유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하나님은 이사야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던 자리에서 하늘의 보좌를 바라보도록 하셨다. 유다의 왕좌는 비어있었으나 하늘의 보좌는 여전히 채워져 있었다! 땅에서는 혼돈과 불안이 있었으나 하늘에는 완전한 평화가 있었다. 하나님은 장엄한 권세와 영광 중에 앉아 계셨다. 이 땅의 인간들은 웃시야가 문둥병자로 죽은 것을 수치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늘에서는 실패로 인한 수치나 그늘은 없었다. 오히려 하늘은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였다!“

요한복음 12장 38-41절은 이사야가 영광 중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음을 우리에게 전한다. 그는 하늘의 보좌에 계셔서 천사들의 찬양을 받고 계셨다. 주님의 천사들인 스랍들(“불의 천사들“)은 주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였다. “온 땅이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하다!“ 이사야는 그 당시에 그같은 영광을 보지 못하였으며 오늘날 우리도 보지 못한다. 오히려 온 땅은 강포로 충만한 것만 같다!(창 6:11) 우리는 인간적인 시각으로 사건들을 보지만 천사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건들을 본다. 어느 날 예수께서 통치하실 때 온 땅은 그의 영광으로, 가득찰 것이다(사 11:9/민 14:21/시 72:19/합 2:14).“만군의 여호와“는 이사야가 가장 좋아하는 하나님의 이름이며 적어도 65회이상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군대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 선지자는 또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최소한 30회를 사용하고 있다. 여호와는 거룩한 전쟁의 하나님이시며 죄를 적대하시고 적을 무찌르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사야는 유다가 패망할 것 같아 보이는 날에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좋은 실천적인 교훈이다. 날이 어두울 때 눈을 하늘로 향하여 보좌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라!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거룩한 성전에 계신다!“

 

2. 안(자신)을 바라봄(5-7절)

 

참으로 하나님과 그의 거룩하심을 보게 되면 자신의 죄악과 실패를 반드시 깨닫게 된다. 욥은 하나님을 보고 회개하였으니(욥 42:6),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을 보았을 때(눅 5:8)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외쳤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 랍비 사울은 자기의 의가 그리스도의 영광만 같지 못한 “쓰레기“였음을 알게 되었다(행 9장/ 빌 3장). 그는 믿었고, 사도 바울이 되었다. 신자가 주님과의 참된 경험을 가지는 것은 그를 교만하게 하지는 않으며, 겸손케 하며 그를 깨뜨린다.

 

이사야가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을 때 그는 자기의 깨끗하지 못한 입술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였다. 물론 깨끗하지 못한 입술은 깨끗하지 못한 마음의 산물이다. 이 선지자는 그가 준비되지 못하고 정결케 되어 있지 않으면 주님을 충성스럽게 전파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주님을 만나 정결함을 받을 시간을 가지기도 전에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겠다고 달려가는 그리스도인들과는 얼마나 다른가. 하나님은 이 선지자의 필요를 해결하셨다. 하나님은 스랍을 보내어 제단의 숯불로 그를 정결케 하였다. 제단없이 보좌를 소유한다는 것은 얼마나 혹독한 일인가! 죄를 깨닫기는 하지만 정결함을 받지는 못하는 것이다. 스랍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보다도 이사야가 영혼 구원자가 되도록 준비시키는 일이 더욱 중요했음에 유의하라! 진정한 예배는 증거와 영혼 구원으로 이끌어 간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영적 체험“을 갖고 싶어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에 대해 나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에 놀라운 격려의 말이 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를 정하게 하시는 데에 신속하시다(요일 1:9).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위해 준비하기를 원하신다.

 

3. 밖(필요들)을 바라봄(8-13절)

 

이를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이제 하나님은 이사야를 불러 말씀을 선포하는 데에 사용하실 수가 있게 되었다. 선지자는 더이상 자기 자신의 필요들에만 얽매여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어한다. 그는 더이상 죄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 그는 정결케 되어 있었다. 또한 하나님이 보좌에 계심을 알고 있었으므로 더이상 실망하지도 않는다. 이제 그는 일하러 갈 준비가 되었다!

 

이러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다. 그는 이 땅 위에 자기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사람들을 사용하기를 즐겨하신다. 하나님은 물론 스랍들 중의 하나를 보내실 수도 있으며 즉각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순종하도록 할 수도 있으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있어서는 인간의 입술을 사용하셔야만 한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여전히 신자들을 부르고 계신다. 그러나, 이에 응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사야 시대에는 “남은 자들“만이 듣고 순종할수가 있었다(13절).

“가서 말하라!“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에게 주신 사명은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민족이 죄와 심판의 멧세지에 귀를 기울일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1장에서 하나님은 이 민족을 상처와 곪는 종기 투성이의 아픈 몸으로 비유하셨으며, 또한 자기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줄 모르는 고집세고 반역적인 동물에 비유하셨다. 5장에서 이 민족은 좋은 포도 열매를 생산하지 못하는 아름다운 포도원으로 비유하였다. 1-5장을 읽으면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주신 부담감을 이해하게 된다. 민족은 번영하는데 왜 죄에 대하여 전파하는가? “유행을 따르는 여인들“은(3:16-26) 이러한 멧세지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며, 지도적인 통치자들 역시 그러할 것이다(5:8- 이하). 사람들은 부유하고 넉넉하고 만족할 때 심판이 오는 것을 믿지 않는다.

 

9-10절은 신약에서 여섯 번 인용되었다(마 13:13-15/막 4:12/눅 8:10/요 12:40/행 28:25-28/롬 11:8). 따라서 모두 합하면 일곱 번 언급되는 셈이다. 하나님은 고의적으로 사람들을 눈멀게 하시고 이들을 정죄하시는 것인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을 순복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힘이 들고 눈이 먼 것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이사야가 말하는 내용이다. 얼음을 녹이는 태양이 또한 진흙을 굳게 한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아래로 향하는 단계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으므로(37절),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39절). 이들이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은(40절) 이들은 자신의 운명에 인을 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은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거나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이와 같은 사명에 순종하는 데에는 이사야의 편에서 볼 때 많은 믿음을필요로 하였다. “이와 같은 비극적인 결과들을 산출하고 있는데 얼마나 오랜 동안 계속 전파해야 합니까?“라고 그는 묻는다. 주님은 “이 땅의 심판을 마칠 때까지“라고 대답하신다. 이러한 종류의 심판은 1장 7-9절과 2장 12-22절에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이 민족이 멀리 포로로 잡혀가더라도 주님은 그 남은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12-13절). 이 예언은 포로가 되는 데에 직접적으로 적용이 되지만 또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 때는 유대인의 소수만이 환란 기간 동안 믿음을 지키게 될 것이다. 이사야는 이 민족을 찍혀 넘어져 있는 나무로 비유하여, 그루터기가 남아서 새로운 싹이 거기서 날 수가 있는 것으로 상징한다. 이것을 11장 1절 이하의 “가지-예수 그리스도“의 예언과 연관시켜 보자.

 

이사야가 그 날 성전에서 걸어나올 때 이제는 더이상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그는 선교사였다! 그는 구경하는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였다. 하나님은 이사야가 일을 하도록 준비를 갖추어 주셨다. 이사야는 주님을 보았고 자기자신을 보았으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았다. 하나님이 보좌에 계심과, 하나님이 그를 불러 사명을 맡기셨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말씀을 전할 준비를 갖추었으며 죽도록 충성할 준비가 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따라야 할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사야 7-12장

 

 

구약 예언을 연구할 때 마음에 새겨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원리들이 있다. 즉, 선지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겸손하게 오시는 것과 영광 중에 오시는 것을 보았으나 그 두 사건들 사이에 있는 기간 곧 교회시대는 보지 못했다(벧전 1:10-12)는 점과, 각 예언들은 제한된 역사적인 상황에서 나오게 된 것이지만 그 시대를 넘어 미래를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 앞에 놓여진 장들을 통하여 이러한 원리들을 찾아보려 한다. 이 선지자는 유다 역사상 가장 처절한 위기, 곧 이스라엘(북왕국)과 수리아에 의한 임박한 공격 상황을 다루고 있으며 어떤 일들이 생길 것인지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선지자들과 더불어 이사야도 역시 메시야의 오심을 알리고 있다! 그의 예언들에 주목하자.

 

1. 유다는 적들에게서 구원될 것이다(7:1-16)

 

상황(1-2절)-앗수르는 점차 강대해져서 다른 나라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수리아는 군대를 연합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이들은 유다가 그들의 편에 가담하기를 원하였으나 유다는 동조하지 않았다. 사실상 아하스는 은밀히 앗수르와 거래하여 그를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왕하 16:1-9)! 수리아와 이스라엘이 공격하려고 하였고, 피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이 백성은 깜짝 놀라고 당황하였다.

 

약속(3-9절)-하나님은 이사야와 그의 아들 스알야숩(“남은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을 보내어 아하스왕을 접견하도록 하였는데 그 때 이 왕은 수로의 안전도를 점검하고 있었다. 이사야는 왕에게 희망과 신뢰의 멧세지를 전하였다. “수리아와 이스라엘을 겁내지 마시오. 65년 안에 이들은 망할 것입니다!“ 이 예언은 사실이 되었다. 앗수르는 수리아(다메섹)를 732년에 멸망시켰으며, 이스라엘(에브라임, 사마리아)을 721년에 멸망시켰는데 이 시기는 예언된 기간안에 들어 있었다!

 

징조(10-16절)-아하스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징조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여 매우 위선적으로 행동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하스로부터 등을 돌려 다윗의 집에 징조를 보이셨다(13절). 이 징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으로 성취되었다(마 1:23). 그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눅 1:31-35). 14절에 나오는 “처녀“라는 단어를 젊은 여인으로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일이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었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8:8/8:10)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서, 죄가 없는 분이시다(요 1:14).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좋은 사람“이거나 “위대한 선생“일 뿐만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다(요일 4:1-6).

 

왕과 민족에게 보내는 징조로서 이같은 종류는 즉각적으로 성취될 수도 있다(반드시 그래야 했을 필요는 없었지만). 이 말은 기적적인 처녀 탄생이 그 당시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런 방식으로 태어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유대 처녀가 결혼하여 다음 해 안에 아이를 낳는다는 뜻을 암시하는데 이 아이가 유대의 법으로 계수 대상이 되는 나이(12세)가 되기 전에 원수인 이스라엘과 수리아는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징조가 주전 735년에 주어진 것이라면(추정연대) 721년에 약속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수리아는 732년에, 사마리아는 721년에 망하였다! 이 “징조의 아이“가 이사야의 아내에게서 태어났을 수도 있다. 8장 1-8절에 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말은 선지자의 첫 아내가(스얄야숩의 어머니, /7:3) 죽었고 이 예언을 말한 직후에 둘째 아내와 결혼했다는 뜻이다. 앗수르에 뇌물을 바치기 위해 성전 기물을 훔치는 아하스 왕의 불신앙과 속임수에도 불구하고(대하 28:24-25),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유다를 그의 적들에게서 구원하셨다. 그러나 유다는 앗수르의 노예로 남게 되었으며, 히스기야 시대의 하나님의 중재로써 이 민족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사 36-37 장)."

 

 

2.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될 것이다(7:17-10:34)

 

7장 17절부터 계속해서 이사야는 배반하는 이스라엘과 왕 베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북왕국에게 경고하기를 “앗수르가 그들에게로 와서 그들을 완전히 패망시킬 것이라“고 하였다. 나라는 축복으로 가득 차는 대신 빈곤과 패망에 남겨지게 될 것이었다. “징조의 아이“가 태어난 것은 바로 이 시점에서이다(8:1-4). 그의 이름은 마헬살랄하스바스(“노략하기에 빠름, 서둘러 빼앗음“)였다. 그의 이름은 사마리아와 수리아의 다가오는 패망에 강조를 두고 있다(8:4). 이스라엘과 수리아가 연맹을 하였지만, 자신을 방어할 수 없었다(8:11-15). 이들은 여호와 편에 서서 주께서 그들의 안전한 바위가 되도록 했어야 했다. 이들은 율법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8:20). 9장 1-7절에는 오실 메시야에 대한 두번째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마 4:13-16 참조). 9장 1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곳은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휩쓸었을 때 가장 고난을 많이 당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메시야의 빛을 보기 위한 사람들이었다! 3-5절에서 이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즐거워하며 짐을 벗게 될 때, 전쟁의 무기들이연료로 사용되어 불탈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왕으로 통치할 때를 내려다 본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한 아기가 태어나다“)과 신성(“한 아들이 주어지다“)을 본다. 그 다음은 그의 겸손한 탄생에서 영광스러운 통치로 옮겨진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실 것이며 그 때 완전한 평화가 임할 것이다. 그의 이름은 그의 성품과 사역을 또렷하게 보여 준다. 기묘자는 그의 출생과 생애와 말씀, 죽음, 부활과 약속 등을 나타내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영원의 아버지“, 즉 자기의 영적인 가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을 의미하며, 평화의 왕은 그가 다윗 보좌에 오르실 때 평화가 임할 것을 나타낸다.

 

9장 8절-10장 34절에서 이사야는 계속하여 임박한 재난을 경고한다. 또한 앗수르에게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앗수르가 멸망할 날이 올 것이다! 앗수르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예루살렘에 대항하여 모든 나라들을 모으는 적그리스도로 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능력으로 앗수르를 멸망시키신 것처럼 주님은 또한 사단과 그의 연합군을 무찌르실 것이다(계 19장)."

 

 

3.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은 통일될 것이다(11-12장).

 

분열된 민족들이 어느 날 통일될 것이며 평화 가운데 자기의 나라로 돌아가게 될 것에 유의하자(11:12). 11장 1-3절의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이다. 6장 13절에서 우리는 이 민족이 나무가 찍히듯 “베어버림을“ 당하여 그루터기만 남았음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백성을 구하시려고 그 그루터기로부터 오심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법적인 자손이시며 한 사람의 유대인으로 유다의 “뿌리“에서 나셨다. 그는 “여호와의 싹“(4:2), “의로운 가지“라고 불리워진다(렘 23:5). 스가랴 3장 8절에서는 “내 종 순“이라고 하였고 스가랴 6장 12절에서는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히브리어의 네째르(“가지“)는 마태복음 2장 23절에서 예수님께 주어진 이름인 “나사렛 사람“과 관계가 있다.

 

사복음서들은 이 “가지“에 대하여 각각 묘사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다윗의 의로운 가지“(렘 23:5)로, 마가복음 “나의 종 순“(슥 3:8), 누가복음은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슥 6:12), 요한복음은 “여호와의 싹“(사 4:2)으로 언급하였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날 구약의 모든 예언들을 유대인들에게 성취하실 것이며 영광과 승리 중에 왕국을 다스리실 것이다(롬 15:8-12).

11장 2절에서는 삼위의 각 인격이 다 나오는 것을 본다. “여호와의 영이 그(그리스도)에게 머물러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성령의 일곱 가지 사역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 성령께서 능력을 주신 것은 확실하다(요 3:34). 성령은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에게 영광을 돌릴 수있도록 능력을 입히신다(행 1:8). 4절부터는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셔서 통치하실 때 세우실 영광스러운 왕국을 묘사하고 있다. 이 때는 죄가 즉각적으로 처리를 받는 정직한 심판의 때가 될 것이다. 자연을 회복될 것이며(롬 8:18-25) 더이상 저주가 없을 것이고, 폭력과 전쟁은 사라질 것이다! “땅은 여호와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할 것이다!“(9절/ 사 6:3/합 2:14 참조). 이러한 약속들을 “영적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이 약속들을 이스라엘에게서 훔쳐서 교회에 적용시키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일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느 날 다스리시게 될 문자 그대로의 왕국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약속들이다.

 

10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을 부르셨다는 것을 듣는다. 출애굽 당시 홍해를 횡단한 기적은 마지막 때에 다시 반복될 것이며, 이스라엘은 자기의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11-16절). 사람들은 과거에 이러한 약속들을 비웃었으나, 현재 이스라엘은 자신의 땅과 거룩한 성(예루살렘)을 소유하고 있다. 예언의 성취는 가까워진 것 같다. 12장은 이 민족이 부른 승리의 노래이다. 이들은 애굽에서 구원되었을 때 이 노래를 불렀으며(출 15:2), 바벨론 유수에서 돌아와 성전을 다시 건축하였을 때도 이 노래를 불렀다(시 118:14). 이들은 예수께서 평화와 번영의 세상을 통치하실 때 승리와 영광 가운데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다시 이 노래를 부를 것이다."

 

 

 

▣ 내 백성을 위로하라-이사야 40-46장

 

 

이사야 40-66장은 흔히 이사야서의 “신약 부분“이라고 부른다. 27장으로 되어 있는 것이 신약의 27권으로 되어 있는 것과 유사하다. 이것은 세례(침례)요한의 사역으로 시작되며(40:3-4/마 3:1-3) 그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와 구원이다. 이 부분의 한가운데 53장이 나오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에 대한 가장 위대한 구약 예언이다. 이사야 1-39장이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반면 40-66장은 위로와 구속의 소리를 들려 준다. 이 부분은 70년간 포로 생활을 한 후 바벨론 유수에서 구원을 받은 유대의 남은 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이사야는 남은 그루터기가 위로를 필요로 하기 150년 전에 이 놀라운 예언을 썼다! 이 장들을 읽어 가노라면 몇 가지 중요한 사상들이 뚜렷해진다.

 

첫째는 “두려워 말라“는 지속적인 강조이다(41:10/41:13-14/43:1/43:5/44:2/44:8). 유대인들은 무엇을 두려워하였는가? 세계를 정복하며 전진하는 이방 강대국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점령당하였고 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하였으며, 이제 새로운 바사제국이 무대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나라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 어떤 유대인들은 “이 나라가 이토록 승리를 하는 것을 보아 그들의 신들이 참된 신인 것이 틀림없으며, 여호와는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 일은 두번째의 중요한 생각 즉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이방 우상들의 거짓됨“으로 이끌어간다(40:18-20/41:6-7/41:29/42:8/42:17/43:10-12/44:9-20/45:16/45:20/46:1-2/46:5-7). 44장에서는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을 가차없이 노출시킨다. 또한 하나님은 참되시며 그와 비교할 다른 신이 없다는 거듭된 진술에 유의하자(40:18/40:25/43:10-11/44:6/44:8/45:5-6/45:14).

이 부분의 각 장에서 이사야는 우상의 어리석음을 노출하고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높인다. 유대의 남은 자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은 위대하셔서 바벨론의 속박에서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으시며 그들의 땅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이었다.

 

세번째 중요한 생각은 바사의 왕 고레스와 관계가 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정복하셔서 유대인들을 자기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고 일으키신 왕이다(41:2-5/41:25/ 44:28-45:4/47:11). 그는 에스라 1장 1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고레스이며, 주전 559-529년에 다스렸다. 이사야가 고레스왕이 태어나기 2세기 전에 이름까지도 부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입증하는 또하나의 증거이다. 요시야왕도 그가 태어나기 수백 년전에 이름이 지어졌다(왕상 13:2/왕하 23:15-18 참조). 이 장들을 읽을 때, 고레스에 대한 것과, 바벨론에서 남은 자들이 귀환하는 일은 예언이 즉각적으로 성취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서 우리가 가지는 구속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성취되는 것임을 명심하자. 바벨론으로부터의 놀라운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값주고 사신 구속의 상징이다. 고레스왕은 이방인 통치자였으나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45:1-4). 이사야 42장 1-9절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순종적인 종이며, 유대인에게 영광을,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제시한다(마 12:18-20 비교).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는 이제 이 장들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은 자신을 그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계시하셨으며, 그를 의지하도록 어떻게 격려하셨는지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위대하심을 계시하신다.

 

1. 그의 인격의 위대함(40장)

 

본 장에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미약함(6-8절), 우상의 무력함을 대조시킨다(18-20절). 유대의 이러한 연약한 남은 자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가? 하나님께서 앞서 가셔서 그 길을 열어놓으셨다(3-5절)! 마태복음 3장 3절에서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도래를 기다리며 전파하는 세례(침례)요한에게 적용되고 있다. 9-17절에서 선지자는 “너희들 자신을 쳐다보지 말라“고 말한다. “너희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는 우주의 창조자이시다! 그러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우리를 지탱시키실 수 없겠는가? 28-31절에 나타난 축복된 약속들을 살펴보라."

 

 

2. 그의 목적의 위대함(41장)

 

여호와는 단순히 유대인의 하나님만은 아니었다. 그는 민족들을 조절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동쪽에서 고레스를 일으키시며(바사제국/2절) 북쪽에서 쓰러뜨리신다(메대에게 정복됨 / 25절). 민족들은 떨며 그들의 우상들에게로 향하였으나 우상들은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3-7절). 하나님은 나라들의 흥망성쇠에 있어 목적들을 가지고 계시다. 이스라엘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10, 13-14절).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의 목적들을 성취하고 계셨기 때문이다(롬 8:28). 주님은 “벌레“를 탈곡기로 변화시킬 수 있으시다! 우상들은 아무런 목적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들은 계획을 세울 수 없으며 미래의 사건들을 조절할 수가 없다(21-24절)."

 

 

3. 그의 용서의 위대하심(42-43장)

 

1-9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소개된다(마 12:18-20). 우리는 겸손과 은혜로 초림하신 주님이 또한 능력과 심판 가운데 재림하시는 것을 본다. 물론 이 두 사건 사이에는 현재의 교회 시대가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죄로 인하여 그들이 포로되어 유배되도록 허락하셨었다(18-25절). 하지만, 영원히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심판 중에 오셔서 바벨론을 멸명시킬 것이며(10-17절), 고레스를 자기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다. 43장은 다시 이스라엘에게 확신을 준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이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대하여 세상에 간증이 될 것이다(10, 12절). 그러나, 이사야는 이 민족이 하나님을 잊은 것에 대해 꾸짖고 있다(22-27절).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그들의 죄들을 용서하실 것이다(43:25). 이러한 용서의 약속들을 환란 기간 동안에 유대의 남은 자들에게 적용시킬 수도 있겠다."

 

 

4. 주님의 약속의 위대함(44-45장)

 

이 장들에서 “내가... 하리니“ 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되는 것에 유의하자. 여기서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도움과 축복을 약속하고 계신다. 44장 1-8절에서 그는 이들을 자기 땅으로 돌려보낼 것과 그 땅을 축복하실 것, 그리고 그들의 왕으로 다스리실 것을 약속하신다. 물론, 이 민족은 용서를 받기에 앞서 자신의 “죄들“을 자백해야만 하는 것이다(21-23절). 44장 9-20절에서 이 선지자는 이방 우상들을 섬기는 어리석음을 다시 폭로한다. 어떤 사람이 나무를 베어 그중의 일부는 땔감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자신을 신으로 만드는 데 사용한다!

여호와는 약속을 세우시며 그 약속을 지키는 분이시다. 그러나 우상들은 거짓말을 한다(18-20절). 44장 24절-45장 8절에서 우리는 고레스를 통하여 구원할 것이라는 또하나의 약속을 본다. 이방의 제사장들과 술사들은 패전을 약속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거짓말을 꺾으시고 고레스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다. 유다에는 다시금 주민들이 살게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재건될 것이다. 이 예언은 에스라 1장에서 성취되었다. 45장 1-3절에서 이사야는 고레스가 바벨론의 난공 불락의 요새를 점령하는 데에 사용하는 방법까지도 말하고 있다. 고레스는 그 성으로 들어가는 강줄기를 마르게 하여 문 밑으로 들어갔던 것이다(사 44:27/ 단 5:30). 역사는 이 사실을 기록한다. 그러나 예언은 이 일이 발생하기 수백 년 전에 이 일을 알렸다!

 

하나님의 약속들과 목적들을 좌절시키거나 반대할 사람이 있는가(5-10절)?없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일으켜 주님의 성을 세우게 하셨으며(13절), 다른 나라들을 그의 속국으로 고레스에게 주셨다(14절). 우상은 비난을 받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16-19절). 45장 17절에서 역사적인 일들이 영원한 일들과 혼합되고 있는 것을 눈여겨 보자. 이것은 영원한 구원이 될 것이다. 여기서 이사야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구원을 미리 바라 보고 있으며(22절), 또한 미래에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과 왕국을 건설할 것을 수십 세기 앞서 내다보고 있다."

 

 

5. 그의 능력의 위대하심(46-48장)

 

이 장들은 바벨론의 철저한 패망에 대하여 묘사한다. 이사야가 이 일들을 말하고 기록했을 때는 바벨론이 세계적인 큰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때였다. 따라서 어떤 유대인들은 그의 멧세지를 이상히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바벨론은 힘차게 솟아 올랐으며 유다를 정복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날 바벨론을 정복하실 것이며 바벨론의 거짓 신들은 유배를 당할 것이다! 이 땅 신들이 바벨론 백성들을 데리고 나오는 대신 그 백성이 그 신을 운반할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이끌어 오셔서(3-4절) 시온에 구원을 가져 오실 것이다. 11절에 나오는 “굶주린 새“란 물론 고레스를 두고 하는 말이다. 47-48장을 읽고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큰 바벨론 나라를 멸망시키실 것인지 알아보자.

 

“두려워 말라!“ 이 말은 우리 신약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큰 약속이다. 그는 사단과 그의 세계보다 더 위대하시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는 우리의 생명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 그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실 것이며 주님의 약속들을 지키실 것이다. 할렐루야, 놀라운 구세주가 아니신가!"

 

 

 

▣ 그리스도의 십자가-이사야 53장

 

 

본 장은 이사야 40-66장 중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이며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해 간다. 예수 그리스도께 이 구절들이 적용된다는 사실은 신약의 곳곳에서 입증되었다(요 12:38/마 8:17/행 8:32-35/막 15:28/눅 22:37/롬 10:16/벧전 2:24). 이사야 53장은 신약에서 최소한 85회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사실상, 이 예언은 52장 13-15절에서 시작된다. 13절은 그리스도의 높여지심을 말하고 남은 부분은 그의 낮아지심을 다룬다. 베드로전서 1장 10-11절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처럼 이 예언은 구약 예언자들에게 혼란을 주는 하나의 이상한 “모순“이다. 이들은 고난을 당하며 죽기 위하여 오시는 종과, 높임을 받고 다스리기 위하여 오시는 종 사이에 긴 기간이 있을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 14절은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고난이 그를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며, 그로 인하여 인간들은 그를 보고 놀라게 된다고 알려 준다. 그러나 그가 두번째 돌아오실 때는(15절)온 세상은 “깜짝 놀라 충격을“ 받을 것이다(슥 12:9-10/계 1:7 참조). 주님께서 처음에 오셨을 때 팔레스틴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가 다음에 오실 때는 온 세상이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본 장은 그리스도의 역량과 사역을 추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1. 그의 거절당하심(1-3절)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이제 알려지게 된다. 그들은 주님을 보고 들었지만 그를 신뢰하지는 않았다(요 1:11/요 12:37-38). 그들은 삼중으로 거절하였다. 주님의 말씀(“보고“)을 거절하였으며, 주님의 사역(“여호와의 팔“)을 거절하였다(요 12:37-40 참조). 이 선지자는 6장 9-10절에서 이처럼 강퍅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 경고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그의 인격을 거절하였다(2절). 그는 궁전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출생하셨으며, 나사렛의 경멸받는 마을에서 장성하셨다(요 1:43-46). “연한 식물“은 문자 그대로 하찮은 가지에서 생기는 것 같은 “작은 덤불“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는 큰 나무가 아니라 작은 덤불이었다! 그러나, 그가 나타났을 때 그 민족은 영적으로 황폐한 불모의 땅이었고 메말라 있었다. 이들은 종교의 형식은 가지고 있었으나 생명은 없었다. 주님께서 생명을 가져왔으나, 이들은 주님을 거절하였다. 얼마나 비범한 분이신가. 그는 인간이시며(“그는 장성할 것이며“) 거룩하시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종의 형체로 오셨음을 믿을 수 없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이 되었다(막 6:1-3). 주님의 인간으로서의 외모는 비범한 것이 아니어서 불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인간적인 매력이나 광채 같은 것은 없었다. 물론,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는 멋장이 중의 멋장이이시다(시 45:1- 이하). 그는 업신여김을 받으셨고(원하는 사람도 없었고 경멸당하셨다), 거절을 당하셨으며(제자들에게, 민족과 세상에게서 버림받으셨다). 하찮게 평가를 받으셨다(높은 값으로 평가되지 못하였고 그를 탐내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선한 일을 하며 소망없는 이들을 도우셨다! 본 장은 인간의 마음이 사악하다는 것을 나타내며,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이처럼 취급할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2. 그의 구속(4-6절)

 

예수님과 같이 죄가 없으신 분이 왜 십자가에서 그처럼 무서운 죽음을 당하셔야 하는가? 이 구절들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그들이 받을 심판을 받고 계신 것이다(벧전 2:24/고후 5:21 참조). 그가 지불하신 값을 보자. 그는 찔림을 당하셨는데, 십자가에서 못에 찔려 죽으심과 관계된다(요 19:37/슥 12:10). 그리고 상함을 받으셨는데, 이는 그가 담당하셔야 했던 죄짐의 무게 아래 으스러지는 고통을 당하신 것이며(6절), 또한 징계를 받으셨다. 그는 마치 법을 어긴 자처럼 채찍에 맞는 징벌을 당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들은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허물(5, 8절/ 우리의 반역, 하나님의 법을 고의적으로 어김)과 우리의 죄악(5-6절/ 우리 본성이 비뚤어짐), 우리의 질고와 슬픔(4절/ 재난과 죄로 인한 불행한 결과들)을 짊어지실 때 받으신 십자가에서의 영적인 고난에 비교할 것이 못되었다. 인간은 죄인이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인이며(“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또한 선택으로 인하여 죄인이다(“각기 제 길로 갔거늘“/ 시 58:3/시 5:12- 이하 참조). 6절은 정죄를 나타내는 “모두“로 시작되지만 구원을 나타내는 “모두“로 끝맺고 있다! 주님은 우리들 모두를 위하여 죽으셨다! 이 구절들은 복음의 핵심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3. 그의 복종(7-9절)

 

그는 정당하게 취급을 받지 못하였다. 그는 “압박을 받으셨으며 괴롭힘을 당하셨고, 거칠게 다루어지셨다.“ 그러나, 불평하거나 소리쳐 울지 않으셨다. 그들은 그를 조롱하였고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밀어 대었지만, 그는 잠잠하며 어린양처럼 온순하였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다(요 1:29).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8절은 그가 감옥에서 격렬하게 다루어졌고 공정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셨음을 시사한다(행 8:33/마 27:22-31 참조).그리스도에 대한 재판은 미리 꾸며진 대로 엉터리로 진행되었으며 모든 일들이 불법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관대함“은 이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또한 그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부정한 문둥병자처럼 “끊어짐“을 당했으며 성 밖에 내던져졌다. 불법적이고 비인간적인 취급을 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저항하시거나 논쟁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그가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러 오셨기 때문이다. 죄수 바라바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보다 오히려 더욱 많은 공의와 친절로 대우를 받았다.

9절은 이렇게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사악한 자들과 함께 주님의 묘소를 지정하였으나 죽은 동안 그는 부자와 함께 있었다.“ 니고데모와 요셉이 아니었더라면 예수님의 시신은 토기장이 밭에 매장되었거나 아니면 쓰레기 더미에 던져졌을 것이다(요 19:38-42).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정원에 있는 “묘소“를 약속하셨고 이 약속은 성취되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않으며 그 입에 궤사가 없었다.“ 인간들은 의롭지 못하나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그리스도에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심으로 우리에게 참으로 놀라운 본을 보이셨다(벧전 2:18-25). 인간들이 우리를 불공정하게 다룰 때(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해야만 한다.

 

4. 그의 상급(10-12절)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계획은 완전한 성공을 거두셨다! 52장 13절과 42장 1-4절을 보면 구세주께서 그 사역에 성공하신 것을 본다. 이 구절들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편에서 보여 주고 있다. 그의 죽음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였다.“ 이 말은 아버지가 그의 아들의 고난과 죽음을 즐기셨다는 말인가? 아니다! 구원의 계획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사역은 끝났고, 죄가 속하여졌다.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의 은혜 안에서 자격이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악한 손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셨지만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미리 정하신 바 되었다(행 2:22-24). 그리스도의 죽음은 도덕적인 본보기가 아니라 죄를 사하기 위한 제물이었다(10절). 그는 우리 대신 죽으셨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기쁨과 달리 그리스도의 보상은 무엇이었는가? 그 한가지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이며(“그의 날은 길 것이요“), 영적인 가족이 주어진 것이다(“그가 그 씨 그의 자녀들을 보게 될 것이며“).

11절은 영적인 가족에 대한 상징과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의 그의 영혼의 고통을 설명하는 구절이기 때문이다(시 22:30/히 2:13 참조). 이사야 9장 6절에서 그리스도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우는데 그 이유는 십자가 상에서의 그의 죽음과 고통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죄인들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가족이 구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가 의롭게 하신 사람들이며 주님의 은혜를 통하여 의롭다고 선포되었다.

 

12절은 충성된 종의 보상을 보다 깊이 다룬다(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의 유업). 그는 죄와 사단을 정복하셨으며, 이제 그 탈취물들을 분배하신다(엡 4:8). 그가 이 땅에 계실 때에는 대수롭지 않은 존재로 평가를 받으셨으나, 이제는 “왕 중의 왕“으로 여겨진다. 왕들은 그에게 절할 것이다(52:13/52:15/시 72:8-11/계 19:14- 이하). 시편 2편은 그리스도께서 어느 날 자기의 유업을 주장하실 것을 묘사한다.

 

끝부분의 귀절들은 우리를 십자가로 데려간다. 그는 범죄자들과 함께 수를 세인 바되셨는데 그것은 두 도둑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사람들이 그를 죄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마 27:38). 그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중재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눅 23:34- 43). 그는 사람들이 지독하게 욕설을 퍼부었을 때에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는 끊어버린 죄인들을 위하여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오늘낱 자기의 사람들을 위하여 중재하시며(롬 8:34), 그가 친히 모든 심판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더이상 심판이 없을 것이다! 당신은 그를 당신 자신의 구세주로 신뢰하는가?"

 

 

 

▣ 그가 오시리라-이사야 60-66장

 

 

이 장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다스리기 위해서 돌아오실 때 세우실 영광스러운 왕국을 묘사한다. 이 부분에서는 영광이라는 단어가 여러가지 형태로 23회 나오고 있다. 물론 유다나 이스라엘이 바벨론 유수를 끝냈을 때, 또는 미약한 남은 자들이 돌아왔을 때 이들에게 무슨 영광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쟁으로 찢겨진 땅에 돌아오는데 얼마나 실망이 되었겠는가! 성벽과 성읍은 파괴되고 성전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먼 훗날을 내다보고 있다. 그는 영광스러운 성전을 가진 영광스러운 “거룩한 도성“(60:7/64:11)과, 재건된 성벽과 성문을 보았다(60:10-11). 이스라엘은 이방나라들에게서 경멸을 당하였으나, 이 땅의 중심이요, 하나님의 보좌가 될 것이며,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60:3/60:5/60:11/60:16/ 61:6/61:9/62:2/66:12/66:19). 따라서 이 민족의 미래 영광에 대한 약속들은 포로 생활이 끝나고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는 유대인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본 장에서 회복된 민족의 놀라운 네 가지 모습을 살펴보라.

 

1. 영광스러운 새벽(60장)

 

새 날이 밝아온다(1-9절)-이사야 시대의 유대인들은 얼마나 암담하였겠는가? 이 민족이 적그리스도와 이방 나라들의 손 아래 고난을 당하게 될 환란 기간 동안에는 얼마나 더 암담할 것인가? 그러나, 이 어두움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심으로 끝이 날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유대인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실 것이며 “그들은 그들이 찔렀던 자를 볼 것이다“(슥 12:10/계 1:7). 이스라엘은 주님이 다윗의 보좌에서 다스리실 그 날에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왕국에서 그와 함께 왕노릇할 것이다.

 

이사야는 이방 나라들이 전쟁 목적이 아니라 평화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와서 이 민족의 부(富)에 참여하는 것을 본다(3-9절). 어떤 이들은 5절이 사해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오늘까지도 유대인들은 이 물에서 굉장한 부를 추출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나라들은 예루살렘에 대항하고 있으며, 예루살렘은 전세계의 공격 중심지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게 영광을 되돌려 주시는 날 이방인들은 평화 중에 머리를 숙일 것이다.풍성한 축복들(10-22절)-이 민족은 재건될 것이며 다시는 성문들이 위험때문에 닫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천년왕국(계 20:4-5)은 평화와 번영의 때일 것이며 온 세계가 이를 누릴 것이다. 의로운 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는 인류에게 있어 “새 시대“가 될 것이다(말 4:1-3). 이러한 약속들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시켜서 “영적으로 해석하거나“, 또는 “상징들로“ 변화시키지 말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 약속들은 땅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신약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동트기 전의 “밝은 새벽별“을 기대하고 있다(계 22:16).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심판이 이 세상에 임하기 전에 그의 교회인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시기 위하여 공중에 돌아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2. 즐거운 혼인 잔치(61-62장)

 

1-2절은 나사렛의 회당에서 그리스도께서 읽은 구절이다(눅 4:16-21). 그는 자신에게 이 구절을 적용하셨었다. 그는 백성들의 영적인 필요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오셨었으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러“ 오셨었다. 거기서 주님은 읽기를 멈추셨는데 그것은 환란 때까지는 “복수의 날“이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63:1-4).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때 곧 은혜의 날에 살고 있다. 물론 이사야는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사역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이 때 여호와는 그들의 “장례식“을 즐거운 “결혼식“으로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 3절은 애곡하는 이들이 눈물을 닦으며 곡하는 옷 대신에 연회복을 입고 있음을 보여 준다. 10절은 신부와 신랑으로서 즐거워하는 민족을 묘사한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여호와와 결혼하였으며, 이 때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이 민족은 불충실했으며 다른 나라의 우상들을 좇아 갔다. 이 민족은 영적인 음행으로 인하여 유배를 당하게 되었으나, 이 일조차 그 죄들을 치료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버리운 바된 아내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이 민족은 구원을 받을 것이며, 다시금 여호와와 “혼인을 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 62장 4절은 이 민족이 “아스바“(버림받음)되거나 “셈마마“(황폐함)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헵시바“(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 그리고 “뿔라“(결혼한)라고 불리울 것을 약속한다. 5절은 주께서 그의 아내가 회복된 것을 즐거워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와 혼동하지 말자(고후 11:1-2/호 2:1-/사 50:1/사 54:1)."

 

 

3. 의로운 승리(63-64장)

 

6장 1-6절에서 우리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나라들을 승리하시고 돌아오시는 피에 젖은 군사로 묘사된 그리스도를 본다(계 19:11-21). 주님의 승리는 포도주틀에서 즙을 짜는 농부로 묘사되고 있다. 이 땅에 계실 때 그리스도의 첫번째 기적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지상에 그의 왕국을 세우기 전의 마지막 승리는 주님의 진노의 포도주틀을 밟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왜 유대인들을 쓸어버리려는 나라들을 패망시키시는가? 주님의 은혜와 신실하심때문이다(7-9절). 이사야가 이스라엘이 반역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할 때에 그는 이 민족을 정결케 해주실 것을 위하여 기도로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63:15-64:12).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전에 행하셨던 대로 위대하신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되기를 얼마나 갈망하였던가! 성전은 짓밟혔고, 이 민족이 성전을 소유하고 있었던 기간은 얼마 되지 못했었다(63:18). 이사야는 그들의 부정함(64:5-6)과 무관심(64:7)과 순복하지 않는(64:8) 죄들을 지적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을 때 그는 나귀를 타고 평화 중에 입성하셨다. 그가 두번째로 오실 때는 흰 말을 타고 오실 것이다. 나라들은 평화의 왕이 또한 죄를 심판하시며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전쟁에 능하신 분임을 배우게 될 것이다.

 

 

4. 놀라운 출생(65-66장)

 

하나님은 이 두 장을 통하여 이 땅에 왕국(천국)이 건설될 때 그가 하실 일을 설명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의 죄를 상기시키실 것이며(65:1-7) 이방인들에게 주의 구원을 알림으로써 이스라엘을 책망하실 것이다(롬 10:19-21). 구약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였으나,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한 몸인 교회를 구성할 것에 대해서는 계시하지 않았었다. 이 민족은 멸망을 당할만 했으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존하실 것이었다(65:8). 믿는 남은 자들이 그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며, 불신자들은 끊어질 것이다(65:9-17). 18-25절은 예루살렘이 온 땅의 중심이 될 때 왕국이 받을 축복들을 비유한다. 장수하며(20절), 사단이 최종적으로 심판을 받을 때, 왕국시대가 끝날 때까지는 죽음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계 20:7-14/고전 15:26). 사람들은 평화와 행복 가운데 그들의 일을 하여 완전히 성취할 것이며, 자연도 평화로울 것이다(25절/ 롬 8:18-24). 그 날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날이 될 것인가!

 

66장 7-9절에서 우리는 새로운 민족의 놀라운 탄생을 보게 된다. 이스라엘은정치적으로 1948넌 5월 14일에 태어났으나, 이 국가는 불신앙 가운데 있다. “의로운 이스라엘“은 예수께서 돌아오셔서 그들이 주님을 보고 믿게 될 때에 태어날 것이다. 환란 기간은 이 민족이 고통 중에서 괴로워하게 될 “야곱의 환란의 때“(렘 30:7)가 될 것이다. 이 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정화시키는 날이며, 믿는 남은 자들은 살아 있어 왕국을 세우게 될 것이다. 현재의 이스라엘이 한 나라를 이루기까지 정치적인 고난의 해들을 보내었으나, 이들이 그리스도를 보는 날 회복된 국가는 하룻만에 태어날 것이다. 출생은 7-9절에서 알리고 있으며, 10절에서는 출생의 기쁨을 알린다. 이 “젖먹이“는 다른 사람들 품에서 길러지는 대신 다른 나라들에게 축복을 끼칠 것이다(11-12절)!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새로운 나라의 “어머니“가 될 것이며(13절) 이 나라로 하여금 온 땅엔 기쁨과 축복을 가져오게 하실 것이다.

7절에 유의하자. 환란의 고통이 있기 전에 이스라엘에 그리스도의 탄생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으로서의 아이인 그리스도의 출생과(7절) 환란 후에 있을 회복된 민족의 출생(8-9절)의 두 가지 출생이 있게 된다.

 

다음 사건들의 순서에 유의하자

교회의 휴거/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

적그리스도의 발흥/ 데살로니가후서 2장

유대인과 맺은 7년 언약을 적그리스도가 3년 반 후에 깨뜨림/ 다니엘 9장 27절

이방인과 순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의 진노가 세상에 부어짐/ 마태복음 24장 15-18절

그리스도께서 나라들을 멸하러 교회와 함께 돌아오심/ 요한 계시록 19장 11-21절(아마겟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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