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이사야 강해

이사야전체(김성수교수) - 성경신학

에반젤(복음) 2019. 12. 28. 20:52


              

[이사야]

이사야 1, 김성수, 97. 8. 26.

 

이사야서의 다중 저작설. 1 이사야(1-39), 2 이사야(40-50), 3 이사야(51-66)

 

이사야서를 3부분으로 나누는 이유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1) 1-39.

이사야 39장까지는 앗시리아 침입이전 주전 8세기의 상황이다.

2) 40-50.

40장 이하는 이미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있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8세기에 이사야가 저자일 수 없다는 것. 움직일 수 없는 증거는 앞으로 등장할 어떤 정복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고레스라는 이름을 들어 이야기한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는 사람을 이름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이는 이미 그 이름이 부각된 때에 제2 이사야서가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바벨론의 특수한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시기에 저작.

3) 50-66.

50장 이후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공동체를 재건한 상황을 묘사한다. 그러므로 포로후 시대 작품이 분명하다고 주장.

 

일반 문학 작품이라면 얼마든지 그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성경은 특수한 책이다. 일반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책과 똑같이 취급하므로 그런 결론을 내린다.

 

성경에 보면 몇백명 후에 태어날 사람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이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쪽에서 선지자가 올라와서 북쪽에 세워진 제단에 대하여 저주하고 요시야라는 왕이 일어나 이 불법적인 단을 헐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수백년 후에 낳을 자의 이름을 언급한다. 물론 이것도 기록시기가 요시야 이후라면, 또는 선지자는 막연히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데 요시야 이후에 요시야라는 이름을 거기에 삽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경우 성경 자체가 성경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권위를 훼손당하게 된다.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자의 주장에 대하여 성경에 대한 믿음과 여러 가지 우리의 믿는 바에 따라 거부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이러한 제2 이사야서 문제는 자유주의자들 이전 랍비들에 의해 이미 주장되었던 이론이다.

 

우리와 동일한 성경에 대한 신뢰를 가진 사람들도 이사야를 둘로 구분한다. 1-39, 40이후

내용상 다르기 때문이다.

40장에 이르면 내용이 완전히 달라진다. 앞으로 임할 소망이 부각되어 이전의 내용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따르는 것이다. 주장의 내용은 다르지만 이사야는 40장을 전후로 두 부분 내지 3부분으로 나뉘어진다는 것이 일반적 이론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이다. 이사야는 40장에서 나뉘어지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36장에서 나뉘어진다.

앗시리아가 예루살렘을 침략하였을 때 히스기야가 믿음으로 그래서 앗시리아가 천사에 의해 18만명이 죽고, 왕은 아들에 의해 살해된다. 그 후 신바벨론에 의해 앗시리아는 멸망한다. 예루살렘에서의 패배가 앗시리아 멸망의 결정적 배경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40장 이후 내용의 서론이고 오히려 크게 단락을 나눈다면 36장에서부터 큰 단위로 나누어야 한다. 주 구별선은 40장이 아닌 36장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왜 이렇게 보는가?

이사야 전체를 훓어보면 우리말로 보면 잘 들어나지 않지만 문체적으로 한가지 두드러진특징이 있다. 확연히 구분 되는 부분이 6-8, 36-39장까지이다.

문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하면, 히브리 성경에 보면 두가지 문체가 있다. 하나는 오경이나 역사서(전선지서)에서 보듯이 서술체이다. 또 하나는 운문체(시체)이다.

,,,전 등이 운문체이다. 분량에서 그것 못지 않은 것이 선지서들이 모두 운문체이다. 선지서들이 기본적으로 운문체로 기록. 요나서는 예외, 요나의 기도는 운문체이지만 다른 기록은 서술체이다.

이사야도 모두 운문체이다. 그런데 중간에 서술체가 나온다. 그것이 6-8장과 36-39장에 이르고 있다. 물론 그 사이 사이에 운문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들의 전체적인 흐름은 서술체인 것이다.

 

6-8장까지 내용은 무엇인가? 6장은 이사야가 부름받은 내용이다. 첫 소명이든 아니든 간에.

7장은 아하스 시대의 일이다. 아합군이 침략한 내용이다. 8장 초두는 이사야의 내용이 성취될 것이란 증거로 아이의 이름을 이렇게 하라는 내용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하스의 즉위, 6장에 보면 웃시야의 죽던 해에 라고 시작한다. 7장에 보면 아하스가 다스리는 시대라고 되어있다. 아하스가 주된 인물로 부각된다. 그리고 이시대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36장은 히스기야의 즉위는 34장에 이미 암시가 되어 있지만, 36장은 아하스의 아들인 히스기야 시대에 일어난 가장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서술체로 기록된 내용의 특징은 무엇인가?

실제로 그들이 겪고 있는 상황,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이사야서의 큰 구조는 특별한 형식이 있따.

하나님의 예언이 나오고 그 예언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이 나온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서 이전에 이야기 되었던 예언의 내용이 새로운 단계에 돌입하게된다. 새로운 역사적 상황을 계기로 이미 말씀되었던 예언의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시킨다. 구체적이고 발전된 내용을 갖게 된다. 서술체란 새로운 역사적 상황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예언의 내용이 한단계 더 발전하는 계기, 발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일면의 에언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6-8장까지 서술체의 내용이 이런 내용을 갖는다고 할 수 있고, 36-39장까지의 앗시리아 침입에 관한 서술도 이와 비슷하다.

10장에서 이미 예언된 것이 실현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것이 더욱 궁극적인 미래에 대하여 예언하는 하나의 발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40장 이하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나뉘어야 하는가? 36장이하를 앞으로 붙여야 하는가? 아니면 뒤의 서론에 붙여야 하는가? 뒤로 붙여야 한다.

이렇게 되면 40장 이하로 나누어 제2 이사야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다. 이사야의 글의 구조도 이해하지 못한 말이다.

보수주의에서도 40장을 나누는 이유가 전반부가 심판에 대한 내용일 뿐 아니라 앗시리아의 침입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예언이 나와 있다. 40장이하는 바벨론 포로 상황을 중심으로 예언이 기록되었다.

앗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내용과 40장 이하의 바벨론을 중심으로 한 예언이다고 하여 두 구조로 나눈다. 그러나 이사야의 서술 구조로 본다면 맞지 않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앗시리아와 바벨론이 함께 상충하고 있다. 100년이라는 역사적 공간이 있음에도 매우 밀착된 역사로 이야기 한다.

 

앗시리아의 침입과 멸망과 바벨론의 침입과 멸망, 이 두가지를 한가지로 다루는 것이 이미 앞쪽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더더욱 40장을 앞뒤로 나뉘는 것은 불가하다.

 

이번 강의에서는 지난 학기 강의에 이어서 이사야 11장 이후의 내용을 계속 강의 하겠다.

 

이사야 내용 요약.

이스라엘의 죄의 심각함, 절망적 상황을 서술한다. 소망없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두가지 미래가 제시 - 심판과 구원.

이사야 전체는 이스라엘의 이중 미래, 혹은 심판의 의미와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심화시킨다.

그런데 산만하다는 느낌이 든다. 처음에 성전이 있는 산이 모든 산위에 높아질 것이다. 시온의 영광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 다음에 정반대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궁국적인 심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여호와의 날에 대한 언급 - 하나님에 대하여 높아진 것들.

어리둥절하게 된다. 이스라에의 죄악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절망적이다. 이중적 미래를 이야기하다 갑자기 날들의 끝(궁극적 미래)을 이야기한다. 여호와의 날을 이야기한다.

그 뒤 이스라엘의 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다스림이 폭력화, 시온의 아름다움 대신 부패와 타락상.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 강력한 나라를 불러와 강력하게 심판.

6장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전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정의 핵심이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그 죄악 때문에 당분간 영적 무지 가운데 두어 심판을 철저히 받게 하여 나무가 둥치가 잘려 나가듯이 심판 당하게 한다. 그러나 완전한 멸망이 아니라 남은 그루터기에서 새롭게 시작할 것을 약속.

 

유다가 큰 위기에 봉착 - 아람과 북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입, 이때 하나님이 친히 구원 제시. 믿기만 하라. 그런데도 아하스는 믿지 않는다. 그 결과 하나님의 결정은 무엇인가?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은 말씀했고, 이것을 믿지 않는 아하스는 유다도 그들이 당한 심판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고 하면서, 5장의 강력한 나라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힌다. 그 나라가 앗시리아다.

8장에서는 임박한 심판을 이야기한다. 이사야의 아들의 이름을 통해 계시.

그런데 이 앗시리아에 의한 위기에 유다도 휩쓸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앗시리아의 도모가 유다에 대해서는 실패할 것이라고 한다.

임마누엘의 약속.

앞의 내용을 정리하며 중요한 요소를 빼먹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심판과 구원에서 구원은 한 인물과 관련하여 나타난다. 4장에서는 여호와의 순”, 7임마누엘”, 9태어난 아이의 심성이 들어난다” - 신적인 성품, 다윗 계통의 신적인 왕, 치리자임이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이 특수한 인물과 밀착되어 있다. 그런데 10장에 가면 한가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때까지 논의의 중심이 이스라엘이 있었다. 앞으로 이스라엘을 짓밟게 될 앗시리아는 단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나타난다. 이것이 10장에 가면 앗시리아에 대한 어떤 말씀들이 나타난다. 이스라엘과 직접 관련이 없는 앗시리아 자체의 존재의미를 이야기 한다. 범죄한 백성 이스라엘을 징치할 도구임이 분명하지만 완전히 이스라엘에 가리워 자체로서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앗시라아 자체로서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을 보여준다.

앗시리아의 문제는 단순히 하나님의 선민을 괴롭힌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앗시리아의 문제는 스스로의 교만에 있다.

앗시리아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것이다. 그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인 것처럼 행사한다. 히스기야때 어느 신이 앗시리아 앞에서 구원했는가 하고 교만을 떤다. 이것 때문에 앗시리아는 멸망한다.

앗시리아가 하나님 앞에 평가받는 근거는 그 자체적으로 받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는 것이다.

이것은 이방도 단순히 이스라엘의 들러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의미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독자적으로 하나님 앞에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앗시리아의 멸망이 하나님 앞에 독자적인 의미를 갖지만 또한 이스라엘의 멸망과 독특한 관계를 갖는다. 앗시리아가 이스라엘 심판의 도구라면 앗시리아의 멸망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 멍에서 벗어난다.

 

11장에서는 앗시리아의 멸망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고 그 뿌리에서 새로운 움이 돗는다.

이새의 뿌리란 다윗의 왕통이다. 이것이 이새의 뿌리에서 다시 움이 튼다는 것은 이미 다윗 왕가가 멸망의 위기를 당한다는 것이다. 잘려나가 뿌리밖에 남지 않는 상태, 절망적인 상태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윗 왕통의 새로운 시작은 메시야의 출현으로 이루어진다. 이 메시야는 또한 모든 민족의 소망이 될 것임을 이야기 한다. 이것은 이미 앗시리아의 심판의 근거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앗시리아가 이미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에서 예견된 것이다. 이방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 것이다.

 

11:11 메시야의 등장으로 시작된 새로운 다윗 왕조의 회복은 제2 출애굽과 관련이 되어 있다. 두 번째라는 말은 옛 출애굽을 의식한 것이다.

메시야의 깃발 아래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이 모인다. 이때까지 갈라졌던 남북 이스라엘이 다 함께 그 깃발 아래 모임으로 하나의 이스라엘을 이룬다. 이 하나의 이스라엘이 주변의 족속을 정복한다. 메시야 왕국의 확장.

흥미로운 것은 이방이 적극적으로 메시야를 향해 달려온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이방을 정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같은 내용이다.

이러한 미래를 이야기하며 감격하여 찬송하는 것이 12장이다. 진노의 역사에서 위로의 역사에로 전환을 의미한다.

이것은 너희가 내 백성을 위로하라1장의 말씀을 상기케 한다. 이사야 40장의 내용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고 이미 이야기 된 것이라는 사실을 본다. 단지 더 깊이 있게 이야기 될 뿐이다.

 

그 뒤에 마사”(경고)라는 말이 나온다. 바벨론의 마사다. 15장 모압, 17장 다메섹, 19장 애굽, 20, 21장 골짜기, 23장 두로,

이러한 23장까지의 내용의 특이함은 마사이다. 우리말로 경고로 번역되어 있다.

cf) 여기에는 운반하다는 뜻이 있다. 짓누르는 것, 무거운 것, burdin. 우리를 짓누르는 것,

 

13,

그 제목이 뜻하듯이 바벨론에 관한 말씀이다.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내용이다.

앗시리아의 융성과 패망, 그리고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작, 여기서는 바벨론의 융성과 멸망이 기록된다. 시기적으로 떨어진 두 사건을 밀착되게 말하는 것이 40장에서만이 아니라 여기서도 보게 된다. 바벨론에 대한 내용은 앗시리아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 상호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이사야에서 드문 것이 아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단순히 이야기 하지 않고 많은 내용이 덧붙여진다. 그 의미를 밝힌다.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는가?

벌거벗은 산위에서 깃발을 들고 소리를 높여 네 손을 흔들어 그들로 오게하라. --- 내가 내 거룩한 자들에게 명하여, 내가 내 진노의 용사들을 불렀노라

어떤 내용인가?

하나님께서 어떤 대상을 부르시는 것을 이야기 한다. 이 대상이 어떤 사람인가? “귀인들의 성문에 이르게 하는 사람” - 전쟁을 위해 성문에 접근한다.

나의 거룩하게 된 자들” - 윤리적, 영적인 의미의 거룩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된 자들을 의미한다. “나의 진노를 위한 내 용사들” -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할 용사.

산들의 웅성 거리는 소리, 큰 백성과 같은” - 매우 큰 세력임을 알려준다. 여러 민족들이 모여 내는 소리와 같은.

부름을 받은 대상이 어떤 성격이며 어떤 목적인지 짐작케 한다. 먼 곳에서 불러오는데 진노의 도구요 온 땅을 파괴할 진노의 도구이다.

 

바벨론의 멸망을 이야기 하면서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단지 강대국이 소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설명한다. 하나님이 그 진노를 발하사 온 땅을 파괴한다. 온 땅에 대하여 진노하여 파괴하시는 계획의 일부로 바벨론 멸망을 다룬다. 그러므로 단순히 강대국의 멸망의 의미를 넘어서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6슬피울라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음이라”. 여기보면 여호와의 날이 언급된다.

한 세력을 불러올려 온 땅을 파괴하시는데 이것과 관련하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 일이 여호와의 날과 관련 있음을 알려준다.

그 날은 잔인한 날이요, 온 땅을 황폐케 하는 날이다. 땅의 모든 죄인을 멸절하는 날이다. “여호와의 날의 본질에 대한 언급이다. 까닭없이 땅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죄가 원인이다. 땅에서 죄를 제거하시는 것이다.

 

10절 이하 여호와의 날의 다른 성격.

하늘의 별들이 빛을 잃고” - 천체의 질서의 붕괴, 정상에서 벗어날 것, 신약에서도 이 표현을 많이 사용. 근본적 붕괴와 변화, 격변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날에 내가 재앙으로 세계를 심판할 것이요 --- 그리하여 오만한 자들의 자랑을 끊을 것이요 폭력자들의 거만을 내가 낮출 것이다 -- 어린 아이들, 아내들의 욕 --” - 심판의 비참한 결과 암시.

17절 이하 태의 열매도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 메대라는 나라가 등장하여 바벨론을 멸망시킬 것. “메대의 바사” - 페르시아.

 

바벨론 멸망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포로를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바벨론의 멸망과 앗시리아의 멸망을 함께 둔다. 역사적 거리를 무시한 것을 어떤 사람들은 고레스의 바사제국이 아니라 잠시 득세한 메대를 말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안된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모든 질서를 파괴하시는 궁극적인 심판의 날과 관련하여 말씀하시는 것, 바벨론의 멸망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이방에 관한 시각과 이스라엘에 관한 시각은 오늘날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옛날 이스라엘이 이방을 어떻게 보아야 했는가와 관계를 갖는다.

약속과 상관없는 이방인들, 이들이 메시야의 구원에 참여 하는 일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선택을 거쳐 이루어지는지 그 과정을 보면 도움이 된다.

 

 

 

* 이사야 2, 97. 9. 2.

 

이방이 하나님에게 주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이 이방인의 마사를 통해 드러났다.

이방이 독자적인 존재의미를 갖는 것은 여기가 처음이 아니다. 7장에서 앗시리아는 이스라엘의 심판의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앗시리아 자체로서 의미를 갔지 못하고 이스라엘의 주변적인 존재밖에 안된다. 독자적인 역할과 존재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10장에 오면 완전히 달라진다. 징치의 도구임을 분명히 하고는 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곧 이어 이스라엘과 관계된 역할이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하나님 앞에서 어떤 책임을 갖는다고 함으로써 그 독자적으로 앗시리아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가 있음을 밝혀준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앗시리아를 세우셨는데 그들이 어떤 태도로 그것을 수행하고 감당했느냐는 태도를 문제삼으신다. 그 독자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자리,

 

앗시리아의 흥기, 열국의 정복자로서의 역할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를 가지며, 앗시리아의 멸망은 압제 세력, 심판의 도구의 제거, 즉 자유와 해방, 구원을 의미한다.

 

앗시리아로부터의 해방이 단순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앗시리아로부터의 해방을 무엇과 비교하는가?

기드온의 승리(9:4), 그리고 출애굽과 비교(11:16)한다. 앗시리아로부터의 해방을 기드온의 승리, 출애굽에 비교함으로써 앗시리아의 멸망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닥치는 사건이 매우 중요한 의미와 기능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11:6절 이하, “사자가 풀을 뜯는”, 어떤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의 때까지 시야가 넓어진다. 이것이 어디에서 누구를 통해 시작되는가? - 다윗 왕권의 회복,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다윗 왕권은 어떤 인물로 인해 시작되는가? - 메시야다. 성령으로 메시야가 나셔서 의와 공평으로 다스리사, 어떤 복된 상태를 이루는가? - 사자가 풀을 뜯는 모습이다.

 

사자가 풀을 뜯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맹수에게서 흉폭성이 제거될 것이라는 것이다. 9장에 가면 하나님께서 인류 존속을 위해 동물들에게 인간을 향한 공포심을 심어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동물이 맹수화 했다는 것을 전제한다. 사람을 해치는 야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죄의 결과가 땅에 미쳐서 땀을 흘려 수고해야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척박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것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는 간접적인 결과이다. 그 비참한 결과이다.

 

인간으로 죄로 말미암은 주변상황까지 완전히 회복될 것을 암시함으로써 메시야 통치로 인한 회복이 완벽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한가지 새로운 요소가 추가된다. 이메시야는 이스라엘을 위한 자일 뿐 아니라 만민을위한 존재가 될 것, 모든 민족의 소망, 열방이 그에게 달려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메시야 출현의 직접적 축복의 대상은 이스라엘이다. 메시야의 출현과 그의 통치가 이스라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가 11장에 나타난다.

한마디로 두 번째 출애굽이다고 한다. 이스라엘을 존재케 했던 사건의 하나와 같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새로운 이스라엘의 시작을 말한다. 2의 건국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러한 메시야의 깃발 아래 둘로 나누어졌던 유다와 에브라임이 하나로 될 것이다. 하나의 나라, 하나의 교회 건설. 그리고 블레셋 등의 주변국을 정복.

이러한 이스라엘의 나아가는 길에 장애가 되는 것은 홍해에서 애굽의 모든 군대가 멸한바 된 것처럼 여지없이 깨뜨려지고 제거될 것이다고 말씀한다.

 

이중계획(심판과 구원)이 이사야 초두에는 궁극적인 구원에 대하여 말한다. 반면에 심판에 대하여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이 낮아질 것이라고 말씀한다. 2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이중 미래가 먼 미래, 마지막날에 까지 투사된다. 막연하나마 구체적인 내용은 없지만 확대됨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의 실제 당시 상황으로 돌아오는데 4장에 가면 메시야로 말미암는 사역이 나온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당시 상황과 유리한다. 그 다음에 6,7장에 당시 상황을 말하면서 임마누엘이 당시의 상황고 유리된채 조금씩 먼 미래가 구체화 된다.

 

8장에서 나오는 임마누엘, 임박한 하나님의 역사, 9장에서는 곧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할 분이 아니라 좀더 거리가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10,11장에 오면 아직도 여전히 거리는 있지만 앗시리아의 흥기와 쇠퇴 멸망이라는 세계사적 큰 사건과 관련하여 이제까지 죄지어 오던 이스라엘의 심판과 구원이 상당히 구체화된다. 역사적 맥락속에서 처음 2장에 비교하여 매우 구체화 된다.

 

14장 이하에서도 계속 같은 구조로 이어진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개괄적인 몇가지를 던져놓았다가 반복적으로 그러나 새로운 것이 추가되면서 구체화 된다. 이것이 이사야의 서술 구조이다.

이방에 관한 14장의 내용도 이와 같은 구조 속에서 앞에서 말한 것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방이 주된 대상으로 취급되는 예언은 이방 역시 하나니이역사엣 독자적인 존재의미를 갖는 것임을 암시한다. 주변적인 존재만은 아니다.

따라서 이사야 32장 이하에서 구원역사에서 이방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과 어떤 기능을 기대할 수 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본 바벨론에 관한 환상”.

이사야를 통해 주어졌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을 위해 세워진 선지자가 이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방도 그 관심사로 포용하고 있다.

 

교회의 현실 참여, 교회가 이방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이방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면 전도의 필요성도 없어진다. 전도는 가장 큰 관심과 행동의 필요성이다.

단 정치적 참여, 그 참여의 방법과 성격의 문제에서 교회가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심 자체가 세상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려준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예고되자 아브라함은 목숨을 내어놓고 기도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 정이 많아서?, 롯 때문에?, - 이방에 대한 관심과 중보는 아브라함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했다.

 

13, 메대를 불러일으켜 바벨론을 멸망할 것을 예언.

메대 바사를 일으켜 바벨론을 멸망하시는 그 앞에 막연한 표현으로 한 강한 세력을 불러 일으키시리는 말을 하신다. 그 막연한 세력의 발흥과 더불어, 그리고 그 세력이 온 땅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다고 말씀.

하나님게서 온 땅을 파괴할 진노의 도구” - 하나님의 진노를 시행하여 온 세계를 파괴할 세력,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세력이, 그리고 바벨론의 멸망이 단순히 역사적으로 계속 반복된 그렇고 그런 사건이 아니고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여호와의 날과 관계를 갖는 것이라고 암시한다. 메대의 등장과 바벨론의 멸망은 보통 사건이 아니다. 한 나라의 흥망의 사건이 아니고 여호와의 날의 심판의 의미를 갖는다(13:6 이하)

앞의 여호와의 날은 바벨론의 멸망이 갖는 의미를 꿰뚫어 보게 한다. 악인의 죄를 갚으시고, 오만한 폭력자를 낮추시는 날.

바벨론의 멸망의 원인은 그들의 폭력과 오만이다. 이것은 10장의 앗시리아의 멸망의 원인과 같다.

그렇다면 왜 바벨론과 앗시리아를 함께 긴밀하게 다루어지는가의 이유가 들어난다.

바벨론과 앗시리아는 오만과 폭력의 대명사로 불리운다.

 

메대의 등장과 메대에 의한 바벨론의 멸망이 당시의 흔히 있었던 싸움중의 하나로 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메대의 등장과 바벨론 멸망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여호와의 날과 연관시켜 보통 사건이 아님을 나타낸다. 더 중요하게는 14장의 내용이다.

19바벨은 열왕국의 아름다움이다”. “갈대아인들의 영광이요 자랑이었다”. 이말의 의미는? - 바벨론이 세상 왕국의 한 이상이며, 전형이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여러 왕국이 가장 사모하는 이상적인 하나의 전형이었다는 사실이 여러 국가들이 멸망한 것과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준다. 14장 이하에 가면 구체적으로 이것이 드러난다. 모든 세상 나라들이 사모하는 바벨론. 그러나 이 이상적인 국가 세력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망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죄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적 개입을 초래한 것과 같은 결과를 바벨론 역시 맞을 것이다.

오는 세대에 영영 바벨론은 나라로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철저한 파괴요 멸망이다.(20-22)

 

14,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4절에 또다시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망한 바벨론에 대하여 어떤 -- 이것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바벨론의 멸망이 밀착되어 있음을 암시.

그와 동시에 독자성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메대의 등장과 바벨론의 멸망이후, 이스라엘의 구원이 또 이야기 된다.

14:1, 이스라엘의 재선택, 그들의 땅에 놓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선택과 안식의 땅에 두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역사를 축약하여 말씀하신 것. 시작과 마지막을 요약하여 말씀하신 것.

그런데 이것이 재차 2번째 일어날 일임을 말씀하신다. 심판하여 망하게 하시고, 너는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시고(하나님의 백성의 지위를 상실한 이스라엘 - 구원역사가 무,원점으로 돌아감을 의미) 여기서 하나님은 다시 선택하여 약속으 땅에 정착케 하리라는 말씀으로 제2의 이스라엘을 일으키시겠다는 것.

그리고 그 앞쪽에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리라는 것을 덧붙임으로써 이러한 재차 일어난 역사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에 의해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다시 선택하시고 안식케 하신다. 옛 이스라엘이 무너지고 파괴된 상태에서 다시 선택하여 일으키실 때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하신다.

 

14:1 “그들에게 객이 연합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이란 이스라엘내에 있으면서도 이스라엘인이 되길 거부했던 자들이다. 구별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방이 이스라엘의 들어오게 된다. 11장에서 접붙임을 받았다고 표현. 하나님의 땅에서 유업으로 얻을 것이다.

바벨론이 멸망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실 때 이방과 이스라엘 사이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방이 이스라엘내에 살면서도 구별된 존재로 살던 객들이 이스라엘로 들어오길 원하게 되고, 또한 이스라엘 회복 역사에서 이방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됨을 말한다. “민족들이 그들을 데리고 그들의 본토에 돌아오리니”,

- 고레스의 역할, 포로를 돌려보내고 성전을 건축하게 되는 일로 드러나지만 이것이 확대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방인들이 그 땅에서 차지할 위치는 무엇인가? - .

이전에는 이스라엘을 사로잡던 이들이, 이제 이스라엘이 그들을 사로잡는다.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14:2)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이방이 이스라엘에게 연합하고 참여하며 기여하는 역사, 그리고 이방을 유업으로 받는 이스라엘의 모습, 이스라엘과 이방의 관계를 종과 주인의 관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 등,

처음엔 연합, 그 다음엔 이방의 적극적 역할, 그 뒤엔 종의 위치, 그리고 정복당한 자. 이러한 표현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회복된 이스라엘에 이방인이 참여는 하되 그들의 상황이 우열의 차이가있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이스라엘은 주인이요, 정복자요, 지배자이고, 이방은 종이요, 포로들이다.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에 이방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열등한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회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차별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선 종이요, 사로잡힌 자요, 지배당하는 자로 나타난다. 이 둘이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 둘 중 어느 하나도 부인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스라엘이 그들을 포로로 잡고 굴복시키는 것은 하나님 나라안에서 영적, 신분적, 우열과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없다.

관계의 반전을 이야기 한 것 뿐이다. 그 범죄로 말미암아 이방에 짏밟히던 이스라엘이 복음으로 정복하는 역사적 반전을 단지 의미할 뿐이다.

 

교회안에 우열이 있을 수 없다. 이스라엘의 우선성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이 선지자 이심을 발견하고 제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입니다고 하고 사마리아 전체의 문제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이곳이 예배드리는 곳으로 주장한다. 그런데 유대인은 예루살렘만을 이야기한다이것은 사마리아의 토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권리가 유대인에게만 독점되어 있는 것입니까?

이때 예수님은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고 너희는 모르는 것을” - 계시의 독점성을 이야기 하신다. 더 나아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온다고 하신다.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 이루어 오셨다는 것을 밝히신다. 이런면에서 유대인의 우월성을 인정하신다. 그러나 때가 오면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 그때 바로 이때다. 그리스도 오신 때.

구원의 때가 오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는 의미가 없다. 이런면에서 볼 때 유대인의 우월성은 역사적인 우월성을 갖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안에 들어오면,

 

14:3,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련된 단어 여호와께서 긍휼이 여기시사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다고역으로부터 쉬게 하신다는 이미지는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은 40장 이후의 내용과 전혀 다른 새로운 내용인가? 아니면 이미 언급한 내용인가? -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40장 이후에는 심판이 내용이고, 그 이후에는 구원이 주된 내용이다고 하는 분류는 올바른 것이 아니다. 꼭 같은 내용이 그만큼 구체적이진 않지만 이미 다 나와 있는 것이다. 13,14장에서 이미 이야기한 것을 40장 이후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다룰 뿐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메대의 등장과 바벨론의 멸망은 6세기 말엽에 있을 역사이다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40장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방의 역할이 14장 이하에 나타난다. 반전의 역사. 그리스도의 시대와 직결되는 내용이다.

4절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망해가는 바벨론과 이스라엘의 구원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4절은 암시한다.

그런데 직접적 관련을 갖는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바벨론 멸망을 어떻게 보는가를 살펴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억압자가 어찌하여 그쳤는고 진노가 어찌하여 그쳤는고” - 여기서는 억압자의 심리적 상태를 가리킨다. 바벨론의 멸망은 노발대발하던 억압자의 멸망 의미.

5절 여호와께서 악한 자의 막대기와 지팡이를 꺽으셨다. 그 권력을 여호와께서 꺽으셨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가리키고 있는듯 하다. 이스라엘의 직접적 역사와 거리가 있는 것.

6분노로 열방을 치는 자” - 정당한 권세를 부정하지 않음에도 분노로 치는 포악한 권력이 바로 바벨론의 권력이다. 무자비하게 치는 세력의 종식, 멸망.

7, 그 결과 온 땅이 편안히 거하게 되었다”. 기쁨의 소리를 발한다.

 

 

* 이사야 3, 97. 9.9.

 

13, 14장 바벨론의 멸망. 이것이 후대 사람들이 삽입한 것인가? 아니면 본래의 기록인가? 혼란스럽다.

진노의 보수를 시행하시는 여호와의 날을 또한 언급하고 있어 바벨론의 멸망과 관련이 없는 것과 같이 보인다.

바벨론 제국 멸망은 한 제국의 멸망이 아니라 모든 악을 제하시고 벌하시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가 확대 심화되고 있다.

여호와의 날의 의미는 바벨론의 멸망의 의미를 심화 확대시키고 있다. 이런 의도를 반영하기나 하듯이 13:19에서 바벨론을 어떤 존재로 이야기하는가? “열국의 영광”, 모든 국가의 이상, 모든 국가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바벨론 멸망을 한 국가의 멸망이 아닌 하나님의 공의의 궁극적 심판의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것과 관련이 있다.

 

14.

느닷없이 이스라엘의 재선택에 대하여 언급된다. 나중에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남유다의 멸망의 역사를 아는 우리는 문제가 없지만 주전 8세기의 당시에는 매우 엉뚱한 이야기다. 이사야 예언의 시대는 앗시리아의 시대이다. 그런데 바벨론이 이런 식으로 등장하는 것은 매우 뜻밖이다. 그러나 고바벨론의 영광을 기억하는 사람은 다시 바벨론이 등장하겠구나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지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다.

이것은 언약관계의 파기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낯선 것이며 뜻밖의 것이다.

 

14:1, “나그네”, 이스라엘 내에 살면서도 이스라엘에 동화되지 않았던 자들, 철저한 이방인들이었다. 이들이 스스로 이스라엘에 속하기를 원하게 되고, 열국의 백성들도 이스라엘의 고토로 돌아오는데 어떤 역할을 할 것이다.

이스라엘과 나그네 그리고 열국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종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신분상의 구별을 의미하는가? 교회 안에서도 유대인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다른 위치에 처하게 되는 것인가? 신약은 분명히 확언하기를 교회안에서 유대인,헬라인,이방인의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여러 곳에서 아무 차별이 없다. 구약 이스라엘의 구별됨을 이야기 하면서도 또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 어떤 의미의 우월성인가? 현실적으로 유대인은 복음을 배척하고 이방인은 복음을 받아들인다.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이 구원얻을수 있다면 자신이 구원에서 끊어질지라도 바라는 바다고 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교만하지 말 것을 이야기한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유대인,이방인의 차별이 없음을 강조한다. 막힌 담이 헐리고 장벽이 없다는 것이다.

이사야의 기록도 범죄로 말미암아 멸망하고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와 이제 그 처지가 뒤바뀐 것을 의미한다. 강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이스라엘을 다시 기억하시고 옛 땅에 정착시키셨다.

3, “고된 노역에서 쉬게 하실 때에” -- 이 표현은 사 40장을 상기 시킨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 같은 정서와 내용을 이야기 한다. 거기서도 바벨론과 관련된 상황을 다룬다. 즉 사 40장이후으 내용이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 간략한 형태로마나 여기에 이야기 되고 있고, 이것이 40장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것이다.

내용을 판단 기준으로 하여 40장 전후를 나누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3절 앞에 무엇이 있는가? 히브리 맛소라 본문을 보면 3절은 1-2절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로 연결된다.

앞에서 바벨론 멸망과 이스라엘의 재선택은 아무런 관계가 지어지지 않는다. 어떤 관련된 언급이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둘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앞의 13장의 바벨론의 멸망과 함께 생각해서 이해해야 한다.

 

4절이하, 이스라엘이 바벨론 멸망에서 지어 부른 노래의 내용을 어떤 내용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벨론의 멸망이 이스라엘에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런 연관이 없다면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악한 통치 권력을 멸하신 하나님. 반역하는 것도 아닌데 치는 자, 까닭없는 분노로 열국 백성을 치는 자, 그들로 하여금 무자비하게 짓밟히게 한다. 따라 가면서 끝까지 짓밟아 치는 무자비함이다. 자제함이 없다.

7, 그런 자가 망하였다. 그래서 온 땅이 쉼을 얻고 평안하게 되었다.

바벨론은 악한 세력이요, 무자비한 세력이요, --- 그런데 그들이 이스라엘에 어떤 특별한 악을 행했다는 언급이 없다. 단지 일반적인 바벨론이라는 세력의 성격을 언급하고 있다. 즉 바벨론의 멸망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지어 부른 노래가 이스라엘과 무관한 매우 일반적인 차원의 것이다.

또 하나의 증거는 온땅에 안식과 평화가 임하였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평화가 아니라 온 땅의 평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할이 전세계로 보편적인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의미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바벨론의 멸망이 갖는 의미, 멸망이 갖는 중요성을 유사이래 등장하였던 모든 열강들의 반응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나타내려 한다. “스올이 아래에서 격동한다”. 스올은 죽은 영혼이다. 바벨론의 멸망을 일종의 죽음으로 비유한다.

땅의 왕자들의 죽은 영혼을 불러 일으킨다. 여기서 땅의 방백들은 그들이 다스렸던 권력과 세력을 상기한다.

10, 바벨론 너 역시 우리와 같이 연약해졌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망하지 않을 세력, 별다른 세력으로 강력하게 존재할 것 같은 나라로 알려져 있음을 말한다.

11, 국가로서의 모습을 상실하고 혐오스런 모습으로 전락하였다.

 

12절이하, 바벨론의 멸망이 다른 모든 국가들에게 주는 교훈, 왜 바벨론은 망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는가?

바베론은 스스로 자신의 지위와 권세를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너 새벽의 아들 계명성이여 ---”, 반문하는 형식으로 이야기 한다. “어찌하여 네가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 “열국을 지배하고 정복하던 자여

- 바벨론의 멸망을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계명성이여 라고 지칭한다. 하늘에서부터 지상으로 추락한 것으로 비유,

여기서 하늘이란? 초월의 영역을 의미한다.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 즉 죽음과 파괴와 쇠퇴와 소멸의 영역으로 추락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스스로 심중에 이르기를 나는 하늘에 오르리라고 한다. 바벨론은 스스로의 권력을 이와 같이 말한다. 그렇게 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늘에 올라가리라고 한 것은 창 11장의 바벨 건설의 동기를 생각나게 한다. 동일한 영적 자세이다.

바벨론이 성경에서 특수한 존재로 등장하는 것은 그와 같은 배경을 갖기 때문이다.

신의 별들 위에 내 보좌를 높이리라” - “신의 별들이란?

- 신화적 세계에서는 별들을 어떤 존재로 취급하는가? 신적존재로 취급한다. 바벨론은 신적 존재의 위치에 자신의 권력을 두고, 그렇게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 하리라 ---”, ‘회의’, ‘정한 모임의 산에,

많은 신화에서는 신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북쪽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방민족들 가운데 널리 퍼진 신화적 사고를 따라서 그들의 생각을 이런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의 신화에 따르면 권력자가 어떤 땅 차원의 권력이기를 거부하고 신들의 영역의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권력이기를 원하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문제가 있다.

 

48터가 높고 아름다워 --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여기서 북방에 있다는 것이 시온산이 신화적 표현을 빌려온 것인가? - 시온산 북쪽 편에 무엇이 있는가? 성전이 위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온산의 지형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설명한다. 어떤 이는 신화적 색채를 거두어내기 위해 이사야 14장의 본문의 북쪽을 시온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 버린다. 하나님의 회가 있는 장소로 이야기한다. 욥기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의 회”, 미가야 선지자가 언급하는 하나님의 회”. 이와 같이 하늘과 땅에 대한 모든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회가 있다.

 

이사야 본문은 이방 나라 왕의 말을 옮긴 것이기에 신화적 표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단지 시 48편과 충돌을 일으킬 수 있기에 이렇게 해석하는 것도 까다롭다.

 

14, “지극히 높은 자와 내가 방불하리라” - 대단한 교만.

15, “너는 음부의 맨 밑으로 떨어질 것이다”.

16절 이하, “그리하여 너를 보고 알아본 자가 말하기를 바로 이사람이 열국으로 떨게 하던 자냐. 세상을 광야처럼 휩쓸어 황폐케 하던 자냐

18, 열국보다 더욱 비참한 국가 종말을 맞이할 것임.

 

이방에 대하여도 하나님은 여러번 징치하신다. 다니엘서에 나타난 느브갓네살을 하나님은 7년간 정신 이상자로 만드셨다.

 

바벨론이 열국보다 훨씬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그 후손들에게도 폐를 끼치는 것이다.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후손들에게까지 미치게 할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일어서서 땅을 차지하거나 그들의 성읍들로 온 지면이 뒤덮이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다시는 그 세력이 일어나지 못하게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바벨론이 어떤 나라고 이해되는가? 모든 국가 권력의 이상, 선망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의 멸망이 여호와의 날과 관련된다.

결코 망하지 않을 것 같던 바벨론. 신의 영역에까지 비견되던 권력의 바벨론. 이런 바벨론이 하나님에 의해 망할 것이다는 것은 단순히 바벨론이 망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따.

바벨론의 성격은 까닭없이 짓밟고, 억압하는 악한 지배 세력으로 나타난다. 이런 세력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바벨론의 멸망을 선언하는 것은 포괄적으로 이러한 폭력 세력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폭력적 세력의 이상인 바벨론의 멸망이 갖는 의미는 모든 폭력 세력의 종식을 의미한다.

폭력 세력이 종식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가? 역사상 단 한 순간이라도 폭력 세력이 종식된 적이 있는가? 교육, 징계,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했다.

역설적이지만 폭력은 다른 폭력에 의해 지배되었고, 전쟁은 또 다른 전쟁으로 다스려진다.

cf) 폭력이 지배하는 시기인 고등학교 때, 폭력을 제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선도부이다. 그런데 그 집단이 반깡패 집단이다. 예를 들어 폭력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경찰도 비슷하다.

 

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생각한데로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내가 계획하고 결정한 대로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왜 갑자기 이 말이 등장하는가? - 이 앞에서 언급한 바벨론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내 말이 반듯이 이루어 지리라하지 않고 내가 생각한 것이 이루어 지리라 계획한 그것이라고하여 땅 위의 모든 역사의 본질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땅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생각하는 것, 정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는 것, 이것은 단지 앞에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 지리라는 것보다, 앞서 바벨론은 스스로 나는 아무도 건들지 못한다. 나는 이 땅에 거하는 자들과 다르다. 신들의 보좌에 두리라. 신들도 건들지 못하리라는 것, 바벨론은 이땅의 역사를 자신들의 마음대로 한다는 것.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내가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말씀으로 이땅의 역사의 주권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다.

그 계획과 생각의 내용이 25,

앗수르를 내 땅에서 깨뜨리며 내 산에서 짓밟는 것”.

왜 갑자기 바벨론이 아니라 앗수르로 넘어 가는가? 이것이 저자의 혼란이 아니라면, 바벨론이나 앗수르를 서로 상호 교환하여 말할 수 있는 긴밀한 관계를 갖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10장의 앗시리아와 14장의 바벨론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 권력의 성격이 비슷하다는 것.

 

학자들은 40장이후 앗수르에서 바로 설명없이 바벨론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하여 이사야는 내용상 40장에서 끊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틀렸다. 바벨론은 아무런 경계없이 앗수르와 서로 넘나들 수 있는 것이다. 동일한 성격을 가진 두 세력이기 때문이다.

 

25, “내 산에서 때려 부순다” - 하나님의 땅, 그 나라에서 때려 부순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26절에서 그 범위를 말한다. 그 범위는 온 땅이다. 앗수르와 관련한 계획인데 그 계획은 온 땅, 모든 민족들과 관계있는 계획이다.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 단락의 의도는 27절에서 정리하고 있다. 하나님의 역사적 주권에 대하여 명백히 천명한다.

 

28, “아하스 왕의 죽던 해에 받은 경고”.

여기에서 단순히 블레셋에 대한 경고라고 하지 않고 아하스 왕의 죽던 해라는 시기를 밝힌 이사야의 의도는 무엇인가?

아하스는 앗시리아의 침략과 심판과 관련이 있는 왕이다. 물론 5장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한 나라를 일으키시리라는 말씀을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세력을 밝힌 것은 7장의 아하스 왕 때이다.

 

아하스가 죽던 해라는 것은 그 아들 히스기야의 통치가 시작한 것을 의미.

아하스의 불신앙과 앗수르의 심판이 수행되고, 8장에서는 유다까지 그 심판의 대상이 될 것임을 예고. 아하스는 불신앙과 그로인한 심판의 인물, 아하스의 죽음은 이런 상황의 종식을 의미한다. 동시에 히스기야의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예루살렘에서 앗시리아가 결정적으로 패배를 당하게 되고 그 이후 그 세력은 쇠하고 신바벨론에 의해 망하게 된다.

아하스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 히스기야 시대는 하나님의 구원과 밀착된 시대다.

이것이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것이 36장 이후이다. 여기서 앗시리아의 패망이 나타난다.

 

13장을 시작하면서 경고가 시작된다. 바벨론에 대한 경고, 블레셋에 대한 경고, 다메섹에 대한 경고 --- 13-23장까지 한 묶음으로 묶인다. 이렇게 보면 이사야서를 어떤 관점에서 분류하는 것인가?

글들의 형식과 내용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예언이 있고, 일부가 성취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더 구체적이고, 포괄적이며, 풍부한 예언이 따라온다. 이런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역사적인 짤막한 사건의 기록이다.

6장에서 웃시야의 죽던 해, 그리고 14장에서 아하스의 죽던 해가 나온다. 웃시야와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이것은 유다 역사에서 큰 역사적 흐름의 방향 전환이 있는 시기다. 이러한 역사적 시기를 따라서 이사야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문학적 형식으로 분류하여 이해한다면,

이것은 13-23장까지 나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묶는다면 6장에서 14장 일부분까지 그리고 14-39장까지 묶어진다.

시기적인 구분, 웃시야 죽던 해, 아하스 죽던 해 등의 시기적인 구분을 따라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19장이 클라이맥스이다. 40장 이하를 이해하기 위한 정지작업이 지금 배우는 것이다. 다음시간까지 그것을 끝내고 40장 이하를 들어가겠다.

* 이사야 4. 97.9.23.

 

14장의 바벨론 멸망은 앞장의 앗수르의 멸망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 14:24이하에서 앗수르의 멸망을 재차 언급한다. 왜 갑자기 여기서 앗수르를 언급하는가? 이미 멸망한 나라아닌가? 사전의 어떤 예고도 없이 바베론을 말하다가 갑자기 앗수르를 언급한다. 이것은 글을 잘못쓴 것이 아니라면 저자의 의도라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자의 심층에는 바벨론의 멸망과 앗수르의 멸망에 대한 의식이 함께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특별히 앗수르의 멸망에 관한한 앗수르라는 폭력적 세력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짓밣히게 딜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을 높이는 오만한 세력인 앗수르가 하나님에 의해 멸망당하는 것은 이 세계의 진정한 통치자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는 이 세계의 폭력과 불의에도 불구하고 과연 하나님께서 지금도 세계를 다스리시는가? 본 회퍼가 마음 아파하며 고뇌했던 그러한 때에도 결정적일 때 하나님은 그의 의를 드러내실 것임을 알 수 있다.

 

14:28.

이방이 어떤 성격으로 이야기되는가?

폭력의 화신으로, 폭력의 대표세력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그 뒤에는 이방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드러난다.

 

아하수가 죽던 해에 블레셋에 대한 경고다라고 되어있다.

아하스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말을 암시한다. 히스기야는 부친과 모든 면에서 반대된다. 아하스는 히스기야와 대조적인 자다.

 

앗시리아의 종말과 함께 새 시대의 도래를 암시한다.

앗수르 세력의 멸망과 그 멍애로부터 해방을 말한다. 그러나 블레셋이 그 해방을 기뻐하지 말라고 한다. ?

- 뱀의 뿌리에서 독사가 나올 것이다. 더 독한 뱀의 등장. 날으는 뱀의 등장 - 앗수르 보다 더한 세력이 일어나 너희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30가난한 자는 평안히 눕게 하겠지만, 블레셋은 뿌리채 멸망 받게 하겠다

뱀의 뿌리에서 독사가 나온다. - 앗수르를 능가하는 폭력세력의 등장 예시.

32, 이러한 암담한 미래를 두고 이와 같이 말한다. “나라의 사신들에게 뭐라고 대답 하리이까?”

32, “나라의 사신이란? - 아직 뚜렷한 해결은 없다. 많은 사람들은 블레셋이 보낸 사신들이라고 해석. 블레셋이 무언가 묻기위해 보낸 자들이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 시온을 건설할 것이요, 그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거기에 피할 것이다”.

앞서(30) “가난한 자들은 풀을 뜯고 -- 너희는 멸망”. 그 가난한 자와 32절의 가난한 자가 동일하다고 볼 때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이방 역사에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 시온을 건설할 것이요 그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거기에 피할 것이다고 한다. 이것은 소망의 내용이다. 시온의 건설이 소망이다.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마련된 무엇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 피난처가 이방에 소망이 되게 한다는 말씀이다. 이방의 소망은 미래에 소망이 없다. 더욱 암담한 미래가 기다린 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방에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께서 건설하는 시온이라는 것이다.

 

* 15. 모압에 관한 예언.

하룻 밤 사이에 파괴됨.

5, 특별한 내용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울부짖는도다. 그들의 도망자들이 소알과 ---”.

여기서 는 누구인가? 모압을 위해 울부짖는 사람은 누구인가?

- 두가지 가능성. 첫째 선지자, 둘째는 하나님 자신이다. 어느 쪽으로 하던지 이 슬픔은 하나님의 심정이다. 즉 하나님이 모압의 비참한 상황을 슬퍼하신다는 것이다.

 

이방이 그 죄악으로 당연히 멸망하느 것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과 안타까움 피력. 이것은 궁국적 심판을 기다리는 이방에게 피난처 시온이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모든 인류에 대한 관심과 사랑, 보편적 안타까움에 대한 심정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스라엘을 위한 피난처가 어떻게 이방에게 소망이 되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그것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은 이스라엘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것이다. 죄 가운데 망하는 이들을 향한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보편적인 심정이다.

 

Q.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보편적 관심제한적 구속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 만인 구원설의 근거가 될 수 없는가? 없다면 왜 없는가?

혈통적 울타리는 의미가 없어졌다. 바울의 주장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보편적 관심을 모든 민족에로 확대될 것을 염두에 둔 것이지 모든 민족의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선택된 자만이 구원을 얻고 이방 중에도 마찬가지다.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변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이미 계획에 들어있던 것이다. 이방에 대한 보편적 관심과 사랑은 여기서 처음 들어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그 의미에 이미 들어있다.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이 이방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불리운다.

 

16. 모압 심판에 대한 언급이 계속된다.

1, “땅의 통치자에게 수양을 보내라” - “땅의 통치자는 하나님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닌 모압의 하나님도 되는 온 땅의 하나님이 된다는 사실이다.

CF)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할 때 땅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1절의 수양을 보내라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는가? 이방인에게 시온이 소망이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것을 전제로 하고 시온의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라는 것이다.

 

2, “둥지에서 내던져져서 팔딱 거리는 새와 같으며, 모압의 여자들은 아르논의 나루터에서 있을 것이요” - 모압의 비참한 상황.

3, 둥지에서 떨어져 나온 새와 같은 모압의 비참함에 뒤이어 너는 대낮에 네 그늘로 밤중 같이 캄캄한 곳이 되게 하라. 그래서 재난을 피해 흩어진 자들을 숨겨주라” - 피하는 자가 스스로 숨길 수 있는 피난처가 되라는 것이다.

앞에서 시온이 그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피할 곳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늘로 숨겨주라는 것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여기서 시온으로 하여금 이러한 역할을 하도록 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파괴하는 자들 앞에서 그들의 은신처가 되라는 것이다.

 

5, 보좌가 은혜로 세워질 것이며 - 통치 권력의 등장 예고. “그 통치자는 진리로 그 보좌위에 앉을 것이다. 다윗의 장막에서” - 다윗 계통의 통치자임. 다윗의 위를 이어받는 메시야일 것이다. 그가 다스릴 때 공의를 추구하고 의를 행할 것이다.

앞에서는 시온이 이방의 소망이 되다가 여기서는 시온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도 구체적으로 다윗 계통과 관련을 갖는다. 결국 다윗 계통의 메시야로 인하여 그러한 구원이 베풀어질 것이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 모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

1) 하나님의 보편적인 죄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

2) 이방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

3) 구체적으로 시온이 이방에게 소망이 될 수 있는 것은 메시야의 통치 때문임이 밝혀진다.

 

17. 다메섹.

3, 다메섹과 함께 에브라임이 언급된다. 이방과 한 묶음으로 언급된 것은 의외이다. 한 묶음으로 이야기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 앞서 7장에서 에브라임이 아람과 연합하여 유다를 친다. 그들에게 심판이선언될 때 그들에게 한 묶음으로 심판이 선언된다. 본문은 이런 것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에브라임은 이미 이스라엘로서 지위를 상실했음을 암시한다. 이방과 같이 되었다. 이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선택을 저버린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흥미로운 것은 긍정적인 면에서 놀라운 변화를 볼 수 있다.

이들이 당하는 심판이 하나님을 알게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날에 그들이 -- 더 이상 그들의 손으로 만든 제단을 보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 하 아담”. - 정관사가 붙어 한정됨, 정관사가 붙어 대표 단수를 의미하는 용법이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아니라 인류가 된다.

인류가 우상을 바라보지 않고 참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과 특정 민족 이스라엘그리고 하나님과 이방이라는 구별된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류 전체가 이야기된다. 이것은 다메섹과 에브라임이 한 묶음으로 이야기 된 것이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긍정적인 무엇으로 발전할 요소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9-11, 10절의 네가는 누구를 말하는가?

이방인을 가리켜 하나님에 대하여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고한다. 이스라엘과 하나님만의 관계에 모든 인류가 포함되고 있다.

네가라는 지칭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면 무언가 대단한 요소가 들어있다.

 

18,

구스 강 건너 편의 날개치는 소리나는 땅이여” - 강대한 나라. 모든 나라를 두렵게 하는 정복 민족. 이들은 이스라엘과 접촉이 거의 없었던 나라이다. 대개 주변국이 아닌 멀리 있는 민족에 대하여 신비롭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는 예언의 범위가 땅끝까지 확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4, 이와 같이 먼 나라들도 하나님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쬐는 일광” - 절정에 이른 상태, 그 순간에 꽃이 떨어지고, 가지를 찍어 독수리의 밥이 되게 하겠다. -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7, 이 먼 나라도 심판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언급한다.

 

19. 애굽.

당시 세계의 질서의 또 하나의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가 애굽이다. 중동 지역의 세력은 몇 개의 축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남으로 애굽이다. 때로는 서북쪽의 히타이트가 있지만 그 지역은 한때 반짝했을 뿐이다.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의 애굽이 항상 중심 축이었다. 애굽은 힘이 크면 팔레스틴을 치고 올라와 메소포타미아까지 도모하려 한다. 메소포타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굽의 이러한 기능과 역할에서 이해해야 한다.

 

3,

신접한 자는 옛날에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을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리고 실제로 초자연의 힘을 드러내기도 하는 존재였다. 자연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평가 받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과학이 발달하여 미신으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이다. 귀신의 힘이다. 요즘에는 귀신의 힘을 인정하는 추세다. 과학을 맹신할 때는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이제 과학의 힘보다(과학은 이제 식상해졌다) 더욱 영적 힘을 숭배하는 경향이 최근의 추세다.

 

신접한 자들의 능력, 영적 흑암세력들에 의존하던 노력, 이들의 힘을 빌어 난국을 타개하려 하는 것이 헛될 것이다. 하나님이 이 모든 힘을 부수고 혹독한 왕국이 침입하여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악한 힘, 영들의 힘이 무력함을 드러낼 것이다고 하신다.

 

16-17, 이스라엘이 애굽에게 하나의 공포의 대상이 될 것이다.

18-19, 다섯 성읍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애굽 땅도 여호와의 땅임이 나타난다.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경계석이 있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가 드려진다는 것은 애굽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가 될 것임을 드러낸다.

 

* 정리.

이방이 망하는 것을 슬퍼하신 하나님, 메시야가 저들에게 소망이 된다. 구원과 심판이 모든 나라에 임하게 될 것이다. 애굽과 같은 나라도 돌이켜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가 될 것이다. 이때 애굽과 앗수르가 화해하여 모든 나라와 민족이 화해하며 하나님과 화해할 것이다. 이때 이스라엘의 역할은 제3자의 역할이다. 즉 화해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저들 가운데 축복의 매개가 됨을 증거한다.

이것은 교회의 복음전파를 통해 가능하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계획이 온 땅에 확대되어짐과 그 가운데 이스라엘의 역할이 드러났다.

 

 

* 이사야, 97.9.30.

10-12장과 13장의 내용 사이의 연결이 어떠한가?

- 1장에서부터 더듬어온 이야기는 논리적이다. 즉 연결이 분명하다. 그런데 12장에서 13장으로 넘어가는 논리적인 단계가 없다. 왜 바벨론이 갑자기 출현하는가?

이사야 전체 내용을 조망하면서 이해할 때만이 연결이 가능하다. 특히 14장 마지막 부분에 바벨론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앗시리아의 멸망에 대해 언급했다는 것을 통해, 이 둘의 멸망이 어떤 같은 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사야서의 생각의 흐름을 이러한 면에서 볼 수 있다. 큰 시간의 거리를 뛰어 넘어 앗시리아를 이야기하고 비슷한 맥락의 사건인 바벨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바벨론에 포로됨을 생략하고 바로 바벨론으 멸망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은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이며, 유다 역시 위기를 맞이하고 바벨론은 멸망할 것이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바벨론의 멸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

이스라엘의 심판을 위해 도구로 사용된 강대국의 성격들, 그 자체의 역사는 온 땅을 짏밟는 파괴의 세력이다. 이스라엘은 그러한 파괴적인 세상의 세력의 손에 넘기운바 된 것이다.

로마서의 육체를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는 말씀의 의미. - 그의 육체를 멸한다는 것은 육체의 부정적인 의미, 타락한 인간의 의미, 이것을 사탄에게 내어주고 그의 영혼은 마지막날에 구원얻게 하신다는 말씀.

약속의 땅에서 끊겨져 이방 땅으로 내 팽겨쳐진 것이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은 단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를 멸망시킨 다는 의미를 넘어 온 땅을 폭력으로 파괴하는 세력을 심판하는 그런 의미가 있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등장으로 고통을 받은 거시 이스라엘만이 아니다. 전 중동지역이 그들에게 밣혔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음에 나오는 열방에 관한 내용이 그들의 죄에 관하여 심판 받을 것을 계속 말씀하신다. 흥미롭게도 그들의 죄로 인한 심판과 파괴를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슬피우시며 통곡하신다고 한다.

범죄한 자라 할지라도 이러한 관심과 사랑, 즉 이방의 구원으로 연결될 것이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요나는 똑똑하다. 하나님의 뜻을 꿰뚫고 보았다. 그래서 다른 선지자들과 달리 니느웨에서 심판을 선언하라고 하실 때 이미 이방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았기에 도망쳤고, 혼이나고 어쩔수 없어 전하고, 그 나라가 망해야 하는데 회개하니 이 놈의 성이 망하나 보자하고 가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런데 한가지 열방의 심판에 대하여도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관심을 표현하요 그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말씀하시는데 이방이 가질 수 있는 소망은 무엇과 관련되는가?

이스라엘과 관련을 갖는다. 이방 역사 자체에서 소망이 나오지 않는다. 이스라엘로 인한 소망이다.

열국에 관한 심판의 범위가 넓여져 애굽에 까지 나아간다. 중동사를 움직이는 두 축 가운데 하나인 애굽까지 심판하신다.

 

그리고 구원이 임하는데 애굽뿐 아니라 앗시리아도 포함된다. 애굽과 앗시리아가 화해한다고 한다. 이것은 동일한 구원이 임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때 제 3자의 역할, 조정자의 역할을 이스라엘이 할 것이라고 한다. 온 세계의 화목이 임하는데 이스라엘의 역할이 그 조정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24-27.

24-27장에 오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온 우주로 확대된다. 천체가 흔들리고 온 땅의 질서가 흔들린다. 그 내용이 계시록과 흡사하다.

전 우주적으로 시야가 확대된 후, 다시 한 곳으로 모아진다. 이스라엘이다. 그리고 예언의 특징이 극히 세밀해진다.

구원의 성격이 밝혀지는데 이것은 신약의 내용고 다르지 않다. 영적으로 풍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면 이사야의 서술 방식은 기본적인 테마, 즉 이스라엘의 심판과 구원이라는 줄거리가 있다. 이것이 개괄적으로 이야기된 후, 그 다음에 반복되면서 광범한 차원에서 심오한 차원에서 다시 언급된다. 동일한 주제이지만 정교하고 더 풍부한 내용으로 말해지는 것이다. 또 반복될 때는 더 구체적이고 심오한 내용으로 나아간다. 반복이 될 때 구체적인 역사적인 사건, 예전에 말씀하신 예언의 성취, 이것을 발판으로 궁극적이고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예언이 뒤따름을 볼 수 있다.

이것이 36장 이하에 보여진다.

 

36- 37.

36:2절의 내용, 여기에 나오는 장소가 앞에서 언급되었다. 73, 이사야가 유다왕 아하스를 만난 곳이다. 이사야는 거기서 아하스에게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국을 두려워 말라 그들은 불타는 부지갱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아하스가 나는 하나님을 시험치 않게노라고 하여 불신한다.

36:4절 이하. “네가 과연 네 주 앗수르 왕의 군대를 당할 수 있겠느냐”.

37,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제사장들을 베옷을 입혀 이사야에게 보낸다.

이사야는 그들에게 대답을 주어 히스기야 왕에게 돌려 보낸다. 그리고 37:30에서 징조가 되리니라는 말씀을 한다.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이년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 농사하지 않고도 놀고 먹을 수 있는 좋은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 즉 전쟁의 참화로 인하여 앞으로 2년동안 계속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3년째 가서야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징조를 통해서 나타내고자 한 것이 무엇인가?

31, 유다의 남은 자가 더하여진다. 아래로는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열매를 맺힌다.

이것은 식물의 성장과정과 관련된 이미지다.

30-31절까지는 전체적으로 식물과 관련된 이미지 속에 어떤 상징적인 뜻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2년동안 전쟁속에 아무것도 먹지못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다 집에 피해 남은 자가 다시 번성하게 될 것이다는 사실이 주요한 것이 된다.

밑으로 깊이 뿌리내리고 위로는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된다. 30절이 심판으로 인한 피폐와 황폐를 말한다면 31절에서는 이러한 것들로부터 회복을 나타낸다.

 

앗시리아가 쳐들어와 만난 장소가 바로 앞에서 이사야가 아하스를 만난 곳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불신의 심판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오만한 앗시리아의 모습을 본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앗시리아의 패퇴를 알리신다. 이 일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징조를 보이신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새롭게 될 것이라는 것, 즉 앗시리아의 멸망은 이스라엘 역사의 어떤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앗시리아의 군대를 쓸어버린다. 그리고 산헤립은 신전에서 예배드리는 중에 그 아들들에게 살해당한다.

유다에게 패하고 산헤립이 죽고난 후 앗시리아는 급속도로 쇠퇴하여 결국 한참 뒤의 일이지만 바벨론에게 멸망당한다.

 

38.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들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 왜 이러한 기사가 기록되었는가?

- 악창이나 등창의 종류일 것이다(38:21참조).

히스기야의 기도(2-3). 죽음을 가지고 왜 이렇게 히스기야가 슬퍼하는가? 또한 하나님의 행동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조금전에 이사야 보내어 죽는다고 하다가 다시 번복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신다.

7-8, “징조” - 아하스의 일영표가 뒤로 15도 후퇴.

9절이하 히스기야의 감격.

그런데 39장은 또 이상하다. 전혀 연결이 안된다.

바벨론의 사자가 히스기야의 병 나음을 축하한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그에게 곳간을 보여주고 그것 때문에 이사야는 히스기야를 찾아와 곳간의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라고 한다.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이야기들이다.

 

15년 생명 연장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가?

그런데 15년의 생명 연장이 단순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15년 더 살게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내가 너를 앗수르 왕의 손에서 그리고 이 도시를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리라고 한다.

15년이라는 기간은 앗수르에서 구원하는 기간과 관련된 것이다. 히스기야의 개인의 생명이 아니라 유다 전체의 생명과 구원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앗수르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보호하고 지키겠다는 것이다. 15년이라는 기간은 이러한 구원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히스기야가 죽음을 슬퍼했다는 것은 그가 단순히 자신의 죽음을 슬퍼한 것이 아니라 유다의 운명에 대한 불안과 안타까움을 통곡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징조를 왜 보여주는가? 단지 말씀으로 충분한데 해시계를 15도 물러가게 하는 불가사의한 징조를 보여주신다. 이것은 이 사건의 중요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표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37장의 표적의 의미와 동일하다. 그곳에서는 심판에서의 회복을 이야기했다. 여기서도 죽음의 위기에서의 회복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서 종결이 안되고 또다른 사건이 초래된다. 바벨론의 사신이 온다.

생각건대, 앗시리아의 등장은 유다에게만 위기가 아니다. 중동 전체의 위기다. 그러므로 앗시리아의 침입을 저지하려는 공동의 노력이 있어왔다. 그런데 중과부적으로 힘이 모자라 앗시리아에게 패하면 앗시리아의 침입을 받고 조공을 바친다.

앗시리아는 그리고 계속 자신의 편에 남게 하려한다. 아하스는 여기에 넘어갔다. 그러므로 반앗시리아 정책을 펴는 북이스라엘과 아람 등의 주변국들이 불안을 느끼고 북이스라엘과 아람왕이 연합하여 침입한 것이다.

그런데 아람이 완전히 망해버리고 북이스라엘이 망해버린다. 결국 반앗시라 국가들이 앗시리아에게 모두 망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벨론은 호감이 가는 국가다. 앗시리아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는 자로서 느끼는 우애적인 감정이다.

앞에서 앗시리아는 유다를 침입했다가 철저하게 패퇴한다.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하는데 바벨론의 사절이 오자 그것을 반기고 있다.

그러자 이사야는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갈 것이다고 예언한다.

 

앞에서의 유다의 남은 자의 회복, 그리고 히스기야의 병고침을 통한 유다의 회복, 그뒤의 바벨론에 포로됨의 예언.

이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15년 생명 연장이 바로 그런 사실을 암시한다.

39:8절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 한다.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 이것은 유다의 회복과 평안이 잠정적인 것임을 히스기야 자신이 증거하고 있는 말씀이다.

 

40

앗시리아의 멸망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게 회복을 의미,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의미. 그러나 곧 이러한 것을 이어 히스기야의 병듬, 그리고 병고침과 바벨론의 포로 예언. 이것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회복이 잠정적인 것, 15년이라는 한정적 기간이 될 것임을 가리킨다.

 

그 뒤의 이야기는 광대한 구원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40장 이하는 앞의 36-39장의 배경으로 하여 이해할 때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앗시리아의 멸망과 함께 이스라엘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데 이것은 잠정적이고 바벨론으로 인한 심판이 있다. 그런데 또 구원이 있다는 것이 40장에서 선언된다.

이것은 구원이 단순하지 않고 매우 복잡하고 우여곡절을 겪어야 하는 구원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원하심에 대하여 40장 이하에서 예언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 너머에 있는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성경을 통독하여 전체적인 윤곽을 잡는 방법이 성경연구 방법으로서 매우 좋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고 뒤이어 바벨론의 심판을 말씀하심은 구원에 얽힌 우여곡적을 생각게 한다.

또한 이스라엘이 경험할 시련과 고난의 역사는 바벨론의 심판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러한 시련이 계속된다. 새로운 구원의 역사에 대한 선언이 장미빛이 아니고 심판의 역사와 반복 되는 것이다.

그 뒤에 40장에서 구원을 선포하는 것은 궁극적인 구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새로운 구원이 약속되었지만 순탄지 않다. 바벨론의 심판이 또 있다. 그러나 그 너머에 있는 궁극적 소망을 40장 이하는 이야기 한다.

1너희 하나님”, “너희는 누구인가?

-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위로의 근거가 어디에서 오는가?

죄 값이 치러졌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구원의 메시지 답다. 이스라엘의 모든 고통과 저주와 심판의 다양한 역사의 근저에는 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위로의 때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죄값이 치루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배나 받았다고 한다. 이 말씀은 문제가 있다. 이스라엘이 그들이 범한 죄 값을 배나 치르었다는 것이다.

2죄악의 사하을 입었느니라”.

과연 그러한가? 배나 죄값을 치루었는가? 심판의 참혹함과 혹독함이 죄 값을 모두 결산할 수 있는가?

이것은 무슨 말인가?

- 죄 값이 치루어졌음을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사야의 예언이 왜 53장으로 끝나는가를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40:3-6,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말씀이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오심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다.

위로의 핵심은 죄의 값이 치루어졌다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오심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 40:3절의 번역의 차이. “외치는 자의 소리여”.

1. “a crying voice”

2. “a voice in crying”

3. “a voice of crier”

신약에서는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번역한다(3). 세례 요한이 이 말씀을 가지고 선포했다.

6:4 “외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개역성경에는 창화하는 소리라고 되어 있다. 같은 단어를 이렇게 차이나게 번역)

40:3절은 6장과 깊은 관계가 있다. 여기서 외치는 자는 어떤 천상의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사나 스랍이다. 6장의 상황과 40장의 상황이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상황 설명은 40장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그와 비슷한 상황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환상과 계시는 한 선지자가 여러 번 받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사야의 이 부분을 신약에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여라고 되어 있다.

오늘은 시간이 부족하여 여기까지만 한다.

평생 성경을 한번이나 묵상하고 죽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너무나 그 깊이가 심오하다.

 

 

* 이사야.97.10.7.

 

가장 심각한 위기가 가장 놀라운 구원으로 바뀐다. 앗수르의 군대가 몰살하고 그 제국이 그 시점으로 몰락하기 시작하여 결국 망해버린다.

히스기야의 병든 것과 이적적으로 낫게 하심등과 관련하여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구원은 잠정적인 것, 히스기야 생명의 15년 연장에서 이와 같은 잠정적인 암시가 나타남.

유다도 바벨론에 멸망할 것. 히스기야는 이것을 받아드려 당분간 있을 평화에 대해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앗수르로부터 구원을 받았을 때, 그 일이 일어나고 있는 와중에 이사야를 통해 주신 말씀이 있다. 이 위기가 지나고 나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번성하리라. 아래로는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번성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번성에 대한 예언이다.

이것은 상당히 장기적 예언이다. 앗수르의 멸망과 지금 이스라엘이 경험한 구원은 구원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히스기야 병 사건이 나온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이지만 이것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유다 역시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40장 이하의 예언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다. 구원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는 예언의 연장선상에서 말씀하고 있다. 특히 38장에서 밝힌 유다 역시 잠깐 동안의 평화후에 근본적인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을 넘어서 있을 위기를 말씀하고 또한 궁극적 구원을 말씀한다.

 

궁극적 위로의 핵심은 그들의 죄가 제거되었다는 것이다(40:1-2).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 ”. 세례 요한을 떠올리면 본문 이해의 방해가 된다. 본문은 세례 요한이 있기 전의 말씀이다. 반대로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요한을 이해해야 한다.

계시의 역할,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 이것은 인격이 개입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계시와 계시를 전달받는 선지자와의 관계. 계시 전달의 과정과 관련한 이해.

 

어떤 음성이 가로되 광야의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라” “우리 하나님을 위한 대로를 곧게 하라이러한 표현에서 무엇이 전제되어 있는가?

- 하나님의 오심이 전제되어 있다. 하나님의 오심과 관련하여 언급된 장소가 광야로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바벨론의 포로에서 귀환하는 사건을 이야기 한다고 하여 광야를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팔레스틴을 가로막는 아라비아 사막이라고 해석한다. 귀환의 장애가 되는 아라비아 사막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맞지 않다. 40장 이하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는 것이 가장 주된 관심사인가? 아니다. 물론 바벨론의 포로 귀환에 대하여 관심이 있지만, 더욱 궁극적인 구원에 관한 관심이 핵심을 이룬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포로귀환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더욱 넓은 견지에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사야에는 광야가 자주 언급된다. 32:10-16, 여기에서 광야란 무엇을 나타내는가?

- 심판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상황이다. 모든 것이 무너진 황폐된 상황, 35:1절 이하에도 나타난다.

광야는 이사야서에서 13회정도 나타난다. 광야가 이런 의미로 이해되는 것은 이사야뿐 아니라 성경에서 자주 등장한다. 출애굽에서 광야는 연단과 훈련과 심판의 장소가 된다. 호세아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성경적 용례를 생각하면 여기서 광야라는 것은 심판의 땅, 하나님의 진노로 무너지고 황폐화한 곳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심판의 땅에 오심을 의미한다. 심판으로 황폐한 땅에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신다는 의미가 된다. 심판의 땅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라는 것이다.

 

40:4 “골짜기마다 --- 평지가 될 것이요라고 하는 것보다 평지가 될 지어다라는 해석이 정확하다. 3절에서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문자적으로 시온성으로 이르는 길을 닦아 놓으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오시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제거하라는 것이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무슨 의미인가?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준비사역으로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가? 회개 사역이다. 하나님의 오심을 맞이할 수 있는 영적인 마음의 준비이다.

골자기처럼 낮아 겸손한 마음은 하나님의 은헤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산처럼 높아진 교만한 마음은 겸손한 마음으로 되어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게서 찾아오시는 심판의 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리적으로 무너진 이스라엘의 형태를 가리키는가?

- 이것 역시 영적으로 보아야 한다. 죄로 인한 심판으로 고통당하는 영혼에 찾아오시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5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요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하나님의 찾아오심속에 그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는 뜻.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 시온산에 하나님이 임하실때에 천둥과 번개와 연기등이 있었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 연기나 불 등인가?

본래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연기 화광, 불 등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간접적인 수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이 심판의 땅에 찾아오심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다. 심판의 땅을 찾아 오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래없는 계시가 , 즉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게 되는 그러한 계시가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인류에게 이 계시는 또한 개방될 것이다.

 

40:6 “---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 ‘사르크’, 창세기에서 범죄한 인간을 지칭하는 단어다. 영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죄로 오염됨으로 말미암아 썩고 소멸되어 버린 일시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지칭한다.

풀과 같은 인간 - 인간의 잠정성

그 모든 영광(아름다움)은 꽃과 같으니”.

cf) 벧전 1:24

[헤세드] 하나님과 사람을 대상을 하여 사용되어 인자, 사랑 등을 뜻한다.

하나님에 대한 표현은 내가 제사를 원치않고 긍휼을 여기는 것을” - 제사보다 긍휼을 더 옳게 보는 말씀인가?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한, 호의 친절 등의 의미를 갖게 된다. “모든 육체의 헤세드”, 즉 내적 덕목들, 사랑, 긍휼 등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인간에게 그의 영광이라 할만하다고 해서 의역하여 헬라어 [독사]로 표현. 그러나 [헤세드]의 기본 뜻을 요즈음 이렇게 생각한다. 사랑스러운, 아름다운 등이다. 그렇다고 하면 일반적인 뜻을 접목시키면, 인간의 모든 Lovely 사랑스러움, 아름다움이 인간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인간의 가장 흠모할 만한 것들, 인간의 최고의 것들, 이것들 역시 들의 꽃과 같은 것이다. 곧 한 순간의 것이다. 찰라적이며 덧없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말이다

6-7, 인간의 연약함과 부패성, 최고의 아름다움이라 해도 덧없을 뿐이다.

실로 이 백성은 풀이다” - “은 육체를 가리킨다. “이 백성이란

8, 영원한 것과 잠정적인 것의 대비. 인간의 찰라적인 것과 하나님의 영원한 것의 대비.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는 무슨 뜻인가?

- 예언된 말씀의 신실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 나온 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요 육체가 보리라고 한것과 관련하여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암시한다고할 수 있다. 인간의 자랑할 만한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력하고 덧없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말씀이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 - 여성을 사용하였다.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다하여 외치되 두려워 하지 말고 유다성읍들에 말하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다

이것은 어떤 상황을 나타내는가? - 이미 와 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수도 있으나 경우에 따라 임박해 계시는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다. 곧 임하실 상황에 대하여 사용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10절이 보라 주 여호와께서 강력으로 오실 것이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는 40:3절 이하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오심에 대하여 재차 언급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의 오심을 말한다. 오심의 성격, 구체적 의미에 대하여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 하나님의 오심을 무엇이라고 특징짓는가? 그는 무엇으로 오시는가?

- “강한 능력으로 오시는 자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수반될 것이다는 뜻이다. 강력한 능력으로 오심의 구체적 의미가 그 다음에 그의 팔이 그를 위해 통치를 베푸실 것이다고 되어 있다. 팔은 상징적 수단이다. 그의 능력의 팔로 통치를 베푸실 것이다.

 

10-11, “---보라 그의 삯(개역성경, ‘상급’)이 그와 함께 있고, 그의 품삯(개역 보응’)이 그의 앞에 있다. 목자처럼 그 양떼를 이끄시고 그의 팔로 모으시며 그 품에 안으시며 암양을 인도하실 것이다

- 하나님의 오심은 강한 능력으로 오셔서 능력으로 통치를 베푸시는 오심이다. 그리고 그의 삯이 그 앞에 있다고 한 뒤에 목자처럼 그의 양을 품에 안으신다고 되어 잇다.

삯이란? 수고의 대가이다. 양떼를 가리킨다. 그가 능력으로 통치를 베푸사 그의 양떼를 얻으신 것이다. 이 양떼를 품에 안으시고 인도하시는 모습, 이것은 그의 소유로 얻으신 양무리에 대한 깊은 애정과 보살핌을 나타내신 것이다.

12, “누가 그 손웅큼으로 물을 측량해 보았는가 하늘을 손뼘으로 재어 보았는가 땅의 그 많은 흙, 티끌을 저울에 달아보았느냐 산들을 저울에 언덕을 저울에 달아 보았느냐

- 이것은 강한 부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으신 것들, 인간으로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거대한 것들이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놀라운 것들이다. 인간으로는 잴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창조하신 것이다. 인간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것들을 만드셨다.

누가 하나님의 지혜를 --- 누가 하나님을 가르칠 수가 있겠느냐 하나님의 의논 상대가 될 사람이 누구냐 그에게 공평의 길을 가르쳐 줄 사람이 있겠느냐 누가 그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명철의 길을 가르칠 수 있겠느냐

- 보이는 물리적 세계조차 인간이 잴수 잇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면 영에 관한 것은 더욱이 누가 감히 재어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무한성, 우리의 능력 범위를 벗어난 분이심을 말한다.

 

나라들은 어떤 것이냐

국가는 인류사회에 존재하는 가장 대규모, 강력한 권력체가 바로 국가이다. 이보다 더 큰 권력이 없다. 이 강력한 나라들이라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물통의 물한 방울 같은 존재다는 것이다.

천칭의 앉은 먼지돌 하나 같이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먼곳의 섬들도 한꺼풀의 먼지에 지나지않는 것이다.

온 중동 지방이 탐하는 레바논의 백향목도 하나님껜뗄감도 되지 않는다. 그 안에 사는 모든 짐승들은 번제로 드리기에도 모자란다.

- 인간의 자랑, 귀중한 것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말씀한다. 수에 칠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모든 나라들, 인간의 가장 강력한 권력체도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며 공허한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하나님을 너희들은 누구에게 비기고 있느냐 어떤 형상으로 그와 비견하고 있느냐 나란히 세워 놓느냐? - 이것은 열국이 세운 우상신들을 가리킨다. 열국의 우상 신들은 장인들이 부어 만든 것이다. 대장쟁이가 금을 쳐서 만들었고 은사슬을 입힌 것에 지나지 않는다.(19)

 

하나님은 신을 무엇에 비기냐고 하심으로 참 하나님에 비길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신다. 인간의 고안물 피조물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인간이 생각하는 가장 최고의 것들, 권력이든 다른 무엇이든 그것들을 하나하나 부정해 가고 있다. 그것들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다.

 

21,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들은 땅의 기초가 놓일 때부터 깨닫지 못하였느냐

22, “땅에서 그 위에 초월하여 좌정해 계시는 분이라고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고, 이러한 하나님이 보시기에 땅에 있는 자들은 메뚜기와 같은 자들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성을 드러낸다.

하늘도 하나님을 수용할 수 없다. 하늘이라도 휘장처럼 둘러 칠 뿐이다.

 

23, “땅의 치리자들을 헛된 것으로 만드신다

24, 땅의 모든 권력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다. 세우시는 분도, 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26, 그 하나하나에 이름을 주시는 것은 그의 본질을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존재의 본질을 규정하신다.

30-31, “소년 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바라는 자는 항상 새 힘을 얻고 ---”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말씀하신 뒤, 마지막에 이스라엘이 깊은 실의에 빠져 하나님께서 내 사정을 헤아리지 않으신다고 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결코 피곤하지 않으신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 신실한 하나님으로서 피곤하고 지친자, 힘없는 자에게 힘을 주시는 자임을 말씀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을 발견하는 자는 결코 지치거나 힘이 없지 않으리라.

 

40장에서 하나님의 오심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고,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과 우엄과 초월성을 계속 강조하시는가? 그런 과정에서 특별히 열국들과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언급하시는가?

이런 존재이심을 밝히시는 것이, 즉 이러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것과 어떤 관련을 갖는가 생각해보라.

 

이것이 학시말 시험문제다.

 

 

# 이사야. 김성수. November 14, 2014

 

이스라엘을 향한 미래 계획이 열국과 이스라엘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반복해서 이야기된다.

죄의 문제 처리, 이어서 이미지를 달리해서 광야, 곧 심판의 땅에 찾아 오심의 의미, 이에 관련하여 포괄적인 보편적인 자기 계시가 있을 것임. “모든 육체가 보게 될

그 다음에 하나의 오심에 대한 다른 구체적인 표현이 따른다. 하나님께서 강력으로 오셔서 통치를 베푸사 그의 양무리를 얻으시고, 그들을 품에 안으시고 시온으로 오시는 것으로 묘사된다.

 

시편이나 선지서를 대할 때, 유의할 것이 있다. 광야에 찾아오시고, 골짜기가 낮아지고 하는 것들에 대하여, 예루살렘에 찾아오시고, 양떼를 품에 안으시고 등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면 이해가 안된다. 이 내용들이 서로 연결이 안된다. 그리고 계속하여 어떤 내용들이 언급된다. 이것들도 앞의 것과 연결이 전혀 안된다. 소경이 눈을 뜨는 것 등,

그러므로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시는 특성이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있는 그것을 서술하는 것이 시가 아니다. 심상, 곧 이미지를 사용한다. 어떤 이는 이것을 그림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그림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실물 그대로는 사진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림이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 대상에 얻는 그 무엇을 화가가 재구성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그림을 가지고 소나무를 그렸다고 소나무만 보면 그림을 볼 줄 모른다. 그 소나무가 화가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보아야 그림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같은 대상을 놓고도 화가마다 그림이 다 다르다. 그림이 실물을 사진찍듯이 나타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대상에서 깨달은 무엇을 전달하려는 것이라면 이사야의 표현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무언가 전달하고자 하는데 하나는 이런 그림으로 또 조금 있다가는 다른 그림으로 소재와 표현 형식이 다른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여러 가지 그림을 통해 각기 다른 여러 가지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 그림의 세부 사항으로 무엇을 찾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다. 문제는 그런 겉 모습 배후에 있는 여러 의미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그것을 보고, 그것들을 서로 연결해야 이사야의 의미가 분명해 드러나게 된다.

 

6절에서도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에 임한 구원에 대해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하여 계속 이야기한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

12절 이하는 다른 그림을 그린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고, 대조적으로 한나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나타낸다. “하늘과 땅과 산 --- 누가 헤아릴 수 있는가?”.

그의 피조물도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는가? 즉 창조물의 위대함을 말하고 더 위대하신 하나님을 증거한다.

누가 하나님에게 지식과 지혜의 길을 가르치겠는가?”

 

무한한 하나님 앞에서 나는 물통의 한 방울 물과 같다. 레바논의 삼림도 번제를 드리기도 모자란다.

 

17절에서 나라들이라는 것은 그 앞에 아무것도 아니다. 6절의 맥락에 닿아 있는 동일 계통의 표현이며 내용이다.

 

열국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의도가 무엇일까?

-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열국의 무가치함을 계속 열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18, “너희 들이 하나님을 누구에 비견하고 있는가? 무슨 형상”.

여기서 []이 고유명사인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사용되었다면 너희 열국들이 []을 누구에 비기고 있느냐 장인이 우상을 부어 만들고 ---,

우상 종교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과 []을 누구와 비견하고 있는가를 연결시키면 너희가 섬기는 우상과 어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비견될 수 있느냐가 된다. 즉 우상과 이스라엘 하나님의 비교우위를 말함이다.

그러나 []을 일반적인 신적 존재라고 한다면 너희들은 []을 무엇에 비교하고 있는냐가 된다. 그렇다면 이방종교에 있어서 신적 존재가 차신으로 대우 받고 있찌 못한 것을 말한다. 우상종교에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신이라고 하니, 솔직히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이상한 존재다.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자기 신으로 섬긴다. 신에 대한 참된 지식이 잘못되었음을 질책하는 말씀이다. 우상종교에서는 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신성 모독이다.

참된 하나님의 지식이 변질되고, 왜곡된 무엇이다.

 

그러므로 18절의 말씀은 인간이 만들어낸 고안물로 전락시킨 것에 대한 책임 추궁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방에 대한 태도를 나타낸다.

첫 번째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방과 하나님의 관계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의해서 하나님의 관계가 규정되고 한정된다.

그런데 두 번째 경우를 취한다면 즉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왜곡되게 한, 신을 고안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이방과 하나님의 관계가 상당히 다른 시각에서 다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직접 이방인들을 상대로 그들과 대화하시는 관계로 비추어 진다.

 

너희에게 처음부터 말하여지지 아니하였느냐이 뒤에 하나님의 초월성이 말씀된다.

땅의 모든 권세자를 세우기도 하시고 무너뜨리기도 하시는 하나님

너희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즉 초월자로서의 모습, 땅의 모든 권세와 정사를 그 뜻대로 하시는 절대주권자로서의 모습은 창세전부터 이야기 되었다는 것이다.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으 이와 같이 계시하심에도 불구하고 땅에 초월해 계신, 그 모든 권세와 역사를 주장하시는, 이러한 거룩하신 하나님을 너희가 어느 누구에 비기고 있느냐? 너희 눈을 들어 이 전체를 누가 만들었는가? 그 본질을 규정하는가?

이와 같이 하나님을 분명히 알시셨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상종교의 형태로 전락하게 되었고, 왜 이러한 우상종교의 시도가 정죄될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를 어디에서 밝히는가?

1:18이하에서 밝힌다. “거짓 것을 참된 하나님의 지식과 바꾼다”.

1장의 모든 내용들이 이사야서의 이부분에서 토대를 이루고 있다.

 

27-31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

버림 받았다는 깊은 절망감의 표현이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 땅끝까지 모든 것으 창조하신 하나님. 이것은 조금전에 이방을 향하여 말씀하신 무한하신 분이시다.

이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다. 젊은이도 지쳐 피곤하고, 장자라도 걸려 넘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는 지치지 않는 힘을 얻는다.

 

앞서 열국이 의지하는 우상의 허망함에 대하여 언급하며,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됨을 추정한다.

 

41장에서는 다시 열국으로 돌아온다. 반복된다.

 

41장에서 흥미로운 것은 섬들이여 내게 조용하여 귀 기울이라. 열국들이여 네 힘을 새롭게 하라. 그리하여 나와 이야기 하라---”.

일목요연한 이해를 위해 40:27-31을 생략하고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왜곡한 것에 대한 징계를 하시는 말씀과 바로 연결시키면,

앞에서 징책하는 것은 무엇인가? 너희가 어찌 참된 하나님을 만들어 놓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열방들에게 나아오라고 하면서 네 힘을 새롭게 하라고 한다. 이것은 40:31절을 의식한 표현이다. “여호와를 바라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힘을 새롭게 한다)”고 되어 있다. 똑같은 말이 41:1절에 나온다. “열국들은 힘을 새롭게 하라

그러나 힘의 내용은 다르다. 앞의 힘을 새롭게 하라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주시는 힘이다. 그러나 열국의 힘은 인간의 힘, 우상종교의 힘이다. 이것은 마귀의 권세를 힘입는 권력이다.

 

참 하나님의 지식을 왜곡시킨 열국을 불러 옳고 그름을 따져보자고 할 때, 쟁점이 무엇이겠는가? 쟁론의 핵심은 무엇인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쟁론한 것과 같은 것이다. 누가 참 하나님인가?

이스라엘에 알리신 하나님과 너희가 생각하는 하나님중 누가 참 하나님인가?

 

41:2, “누가 동방에서부터 불러 일으켰느냐” - 목적어가 없다.

의가 그에게 닥치리라. 승리가 그에게 맞닥뜨리라이렇게 되면 위대한 정복자의 출현을 암시한다.

NIV는 이 구절을 이상하게 해석한다. "Calling him in righteouness to his service".

나라로 하여금 그 앞에 굴복하게 할 것이라는 의미. 그가 왕들을 굴복시키리라.

 

3, 아무 장애가 없이 그는 전인미답의 정복자의 길을 가게 된다.

여기까지를 보면 하나님께서 한 정복자를 세우실 것인데 그가 열국을 쳐 부술 것이고, 그의 정복은 전인미답의 정복이 될 것이다. 동방의 위대한 정복자, 그의 정복은 전무후무한 정복자가 될 것이다.

 

문제는 누가 이것을 행했느냐는 것이다.

4, “누가 태초부터 세대를 불러 존재케 하시며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누가 행했느냐에 대한 대답 형식으로 시초부터 세대를 불러 존재케 하시는 분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뒤의 해석이 좋을 듯하다.

누가 정복자를 불렀느냐? 이것은 역사의 시작부터 각 세대를 불러 존재케 하시는 이가 했다는 것이다.

그 뒤 나 여호와가 처음이요 마지막과 더불어 내가 있는 것이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이런 일을 행하신 분이 누구인가고 질문한 뒤 그는 태초로부터 역사를 주관한 분이 행한 일이라고 한다.

 

[정복자의 출현 --> 역사 주관자 --> 나는 시작이요 마지막이다]

여기서 논리를 다시한번 따라가 보자.

하나님께서는 참 하나님을 무엇에 비교하느냐? 피조물의 형상으로 전락시키느냐? 우상신으로 격하 시킨 것에 대한 책망을 한다.

이어서 이들을 불러 시비를 가리자고 한다. 이 시비의 성격은 누가 참 하나님인가를 밝혀 보자는 것이다.

그래놓고 제시한 것이 이것이다. 그가 참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시는 논증인 것이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동방에서 위대한 정복자를 일으키실터인데 이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것을 행하는 이가 참 하나님인 것을 나타내는 증거다고 하신다. 하나님게서는 자신을 이러한 모습으로 참하나님으로 나타내시겠다고 하신다.

이러한 증거 방식을 일반화 시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자신의 주인됨을 나타내시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는(40) 앞으로 하나님의 오심과 더불어 그가 어떤 분인가를 나타내실 터인데 그것이 여러 가지로 나타냈다. 심판의 땅을 찾아오시는 분, 등등 , 여기서는 역사의 주인 되시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것에 대한 열방의 반응들이 게속하여 나타난다.

41:5 두려워 한다. 이것은 믿는 자의 경외와 다르다.

이들은 두려워 하면 하는 짓이 무언가 하면 서로 서로 돕고 격려하여 장인은 금장색을 돕고 함마를 치는 자는 다른 망치를 치는 자를 도와서 하는 말이 ---”

역사속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보고 두려워 하기는 하지만 무엇으로 귀착되는가?

그 신들을 자신들이 만드는 것으로 귀착된다. 참 하나님을 두려워 함에도 그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끼리 협력하여 우상 신을 만드는 것으로 끝이난다.

 

위대한 정복자를 불어 일으키는 이 일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8, 호칭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과 이스라엘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앞서서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 이전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모든 관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야기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바벨론 포로까지 전제하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모든 이전의 관계의 무효화 선언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때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택한 자로 부른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그의 뜻을 행하도록 세우신 것이 지금도 변함이 없다는 것, 그 관계와 지위는 지금도 여전하다. 그 선택은 유효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내 사랑하는 자 아브라함의 자손아라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에게 약속하신 유업을 이을 자다. 아브라함의 상속자로서 지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모두 부정하신 것이 사실인가? 아니면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이 사실인가? 둘다 맞을 수는 없다.

이 말씀은 정복자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앞서는 이방인에 대한 말씀이고 여기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이다.

그렇다고 보면 정복자의 출현과 함께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따. 이것이 고레스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이렇게 보면 앞의 버림 받은 이스라엘과 여기서의 택함 받은 이스라엘이 상충되지 않는다.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궁극적으로 이스라엘과 관계가 정상화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수치스럽게 하던 자들에 대한 정복자의 출현이 지닌 의미는 어떤가?

11절에서 그들이 멸망할 것이다고 하신다.

 

14, “벌레같이 비천한 야곱이러한 야곱을 하나님이 도와 어떻게 하시는가?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를 삼아 ---”.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회복하실 뿐 아니라 비처한 상태에서 위대한 위치로 끌어올리시되 날카로운 타작기계와 같이 하셔서 산들과 언덕들을 부슨다.

강력한 이스라엘로 세우실 것, 모든 열국을 쳐 부수어 강력한 나라로 세우실 것.

 

그리고 그림을 달리해서 이와 같이 말한다.

17, “가난한 자들이 물을 찾으나 없어 그 혀가 타는 것 같다

이스라엘을 곤궁에 처한 자요 그 가운데서 애타게 물을 찾는 절박한 상태로 묘사한다. 이러한 절박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신다.

 

21절 이하에서 41장 초두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은 이야기가 반복된다. 열국을 불러 쟁론하는 것.

쟁론의 초점은 누가 참 하나님이냐는 것이다.

네가 힘을 다 동원해보라.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말해보라

- 역사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라는 것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인가 말해보라

-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 역사의 의미를 말해보라는 것이다. 역사, 행위에 대하여 그 본질과 의미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 그 일을 자기 뜻대로 행한 사람만이 그 일에 대하여 이런 일이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하여 그 본질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주관자, 그것을 행한자만이 말할 수 있다.

왜 이것이 참 하나님 되심의 증거가 될 수 있는가 하면 역사의 주인만이 역사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역사의 본질에 대하여 말하라. 그리하면 우리가 그 종국을 알리라는 말은 역사의 본질을 알면은 그 종국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투명성과 일관성이 역사 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역사 내에는 그 종국을 가리키는 어떤 지향성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앗수르와 바벨론과 같은 대제국, 이러한 자들아 역사을 이야기 해보라. 너희가 행한 그 일을 이야기 해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부르리라고 한다.

너희가 진정한 역사의 본질을 이야기 할 수 있느냐?

 

# 이사야, November 14, 2014

 

40장 이하에서 앞으로 행하실 일과 관련하여 심판의 땅에 찾아오심과 더불어 그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 했다. 심판의 땅에 찾아오심을 통해 어떤 분이신가를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서술해나가는 이사야의 기록속에 나타난다. 특히 강력으로 능력으로 오셔서 흩어진 백성을 품에 안으시어 시온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드러낼 것인지 보여준다.

그 앞에서 열국과 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사실을 더 강조하여 하나님은 초월자시오, 하늘과 땅의 정세와 권세를 세우시고 폐하시는 분, 모든 것을 존재케 하시고, 본질을 주장하시고 운행하시는 분, 동시에 약하고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어 붙드시고 도우시는 분.

이스라엘을 붙드시어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소망이 있음을 보여준다.

 

41장 이하 열국을 소환하여 시비를 가리자고 하신다. 위대한 정복자, 그로 하여금 전무후무한 일을 행하실 것임, 이어서 덧붙이길 누가 이를 행했느냐 시초부터 각 세대를 불러 존재케 하신 분이 하셨다”, 그 하나님께서 일으 행하신 것이라. 일을 시작하신 분도, 마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얼핏 보면 이 세부분의 말씀이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열국을 불러 시비를 가리자 하시고서, 다음에 위대한 정복자를 불러 일으키신다고 하고 마지막 내용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시종이 되신다고 하신다. 이 세 내용이 어떤 내적 연관성을 갖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우선 하나님께서 위대한 정복자를 일으켜서 이것을 하나님게서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의 시작자요, 종국자이시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갔는가?

앞으로 일으시키실 위대한 정복자,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역사의 시종이 하나님이 되신다는 증거가 된다.

이 말씀을 하시기 직전에 열국을 불러 시비를 가리자고 한 만큼, 앞으로 행하실 위대한 정복자의 길, 이것을 통해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심이 이방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polemic(논쟁), 즉 이방과의 논쟁을 통한 싸움, 열방을 논리적으로 굴복시킨다.

하나님께서 정복자를 일으켜 열국을 정복케 하시고, 그가 모든 역사를 존재케 하시는 분임을 증명할 것인데 이것을 목격한 이방은 두려워 떨면서도 참 믿음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우상신을 만들어낸다고 말씀한다. 우상신을 의지한다.

이스라엘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스라엘의 선택, 특권, 아브라함의 씨, 이 모든 특이한 신분과 지위와 관계들이 여전히 유효함을, 이것이 무효화 한 것이 아니라, 이전에 하나님이 언약파기를 선언하셨음에도 근본적으로 파기된 것은 아님을 나타낸다.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 진노하고 괴롭힌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고 말씀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벌레와 같은 이스라엘, 비천한 존재 이스라엘을 강력한 나라가 되게 하셔서 열국을 짓밟아 정복하게 하실 것이다고 한다.

이 일은 광야의 강을 내는 것과 같은 일이다. 생수를 마시는 것과 같은 일.

 

본다고 하는 일은 단순히 눈으로 본다는 것을 지나, 발전적 의미로서 목격한 것은 경험한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경험하여 알게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알게 하는가?

- 하나님의 손이 이 일을 행하셨고, --창조하셨음을 경험하여 알고 인정하게 하신다.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

저들로 하여금 경험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 구원 경험을 가리켜 이적을 체험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어서 어떻게 되었는가?

만나를 먹으면 어떻게 안 먹으면 어떤가? 시내산의 음성을 친히 들으면 어떻게 안들었으면 어떤가?

그것이 구원의 요소가 되는가?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할 때 그 구원 경허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통으로들억는 것, 깊은 영적 교통으로 들어가는 것. 내 경험과 머리로 아는 것이다. 이적적 경허이나 능력체험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 체험하는 수단이 될 때 의미있다. 그 귀중한 가치가 있다.

이적적으로 먹었던 그저 집어서 먹었던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오별이어의 이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체험할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베푸심을 알게 될 때, 그런 결과를 나타낼 때 오병이어는 의미가 잇다. 한끼 밥을 놀랍게 얻어 먹었다고 왕으로 삼으려는 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너희가 표적을 본 연고라고 하신 에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우리가 깊이 생각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 영적 교통, 믿음,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 등 무엇이라고 해도 좋다. 이런 것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신 다음, 우리로 하여금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실 것을 기도하게 하신다. 이제는 열국을 불러 자신이 참 하나님이 되심을 증거하고 자 하신다.

 

열국을 소환하여 누가 참 하나님인지 시비를 가리자고 하신다.

41:4,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말해보라. 역사의 의미를 말해보라. 역사가 이런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이런 일을 행하였다고 말해보라.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밝힌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기본적인 방향을 알게된다. 역사의 목적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의 본질을 말해볼 수 있다면 말해보라. 아니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이야기 해보라. 미래사를 예견하는 것은 역사의 주인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다. 역사를 주관하는 자만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 수 있다.

일반 영매, 점장이들은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 자신들이 접하는 신의 도움으로 천기, 하늘의 비밀을 간파한다. 미래의 비밀을 미리 알고 예언한다. 그러나 여기의 미래사를 이야기해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직 역사를 그 마음대로 그 뜻대로 이루시는 분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미래를 말할 수 있다는 뜻에서 미래를 이야기해보라는 것이다.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면 너희가 하나님인 것을 내가 알겠다. 이것은 논쟁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누가 참 하나님인가?

그 증거로 제시하라는 것이 역사의 주관자되심이다.

 

선한 일이나, 재난이나 무엇이든지 해보라. 그러나 너희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어리석은 이방이 너희를 신이라 받들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희를 신이라 택한 자는 가증한 자들이라.

누가 참 신인가? 참 신의 자격이 무엇인가 말한 뒤에,

41:25절 이하에서, 하나님 편에서 누가 하나님인가의 증거를 과거 역사의 본질에 대하여 그리고 미래 역사의 본질에 대하여 밝히고 계신다.

내가 북쪽에서부터 일으켰고, 그가 이르렀다 ---” 여기 이상한 것이 있다. 우리말 번역은 그저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인물에 관한 내용으로 본다. 그런데 25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북쪽에서 한 인물을 일으켜 오게했고, 동방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오게

 

25,

동방에서 출현하는 자를 41장에서는 위대한 정복자의 출현으로 이야기 한다. 이로 보건데 25절을 미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개역 성경은 과거로 번역, “오게 하였나니로 되어 있다.

26절에서 아무도 그렇게 말한 사람도(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한 것을 말한 사람도) 없다”.

 

흥미로운 것은 27절이다. 개역 성경에서 27절을 보면 비로소라고 번역된 말은 근거가 없는 말이다.

앞으로 가서 보면 이전의 일들을 의미. 옛 일들에 대하여 그 본질을 이야기 해보라고 할 때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시온과 관련된 이전의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 한다고 하면, 보라 이미 이루어졌지 않느냐이것이 임박한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눈 앞에 이루어진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내가 북쪽에서부터 일으켜서(이미 왔다)”. 이것은 히스기야 시대의 앗수르의 침입을 가리친다. 하나님은 이미 앞에서 앗수르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치게 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일은 이미 이루어졌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한 실례를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 이루어질 일에 대한 일을 보여준다.

즉 여기서는 과거의 일에 대한 본질과 미래에 대한 일을 두가지 다 보여준다고 할 수 잇다. 이것이 억지다라는 생각이 없지는 않으나 자세히 보면 무리는 아니다. 앞의 맥락에서, 즉 두가지 증거를 제시하라는 맥락에서 비추어 볼 때 이와 같이 두가지,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25절 안에서 우리는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을 다 보는 것이다.

 

25절 한 절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과 앞으로 행하실 일을 다 말한다는 것을 전제로 계속 해석해 보자.

동쪽으로부터 어떤 인물이 출현하여 내 이름을 부르리라” - 이것은 미래의 일이다. 위대한 정복자의 출현이다.

그 다음을 약간 억지로 해석해 보면 그가 방백들에게 이르렀다(공격적으로 이르렀다고 한 뒤 그 다음을 말한다)고 한 뒤 짓밟았다고 한다

- 이것은 강력한 정복자의 모습이다.

누가 시초부터 이를 이야기하여 우리로 알게 하였는가”? - 이것도 앞으로 출현할 인물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앞부분은 이미 이루어진 일로 보고, 뒷부분은 미래의 일로 볼 수 있다.

누가 미래의 일을 말해 오리로 하여금 네가 옳다고, 네가 신이라고 말하게 하였는가? 누구도 없다. 그리고 듣는 자도 없다. 누구도 하나님이 될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증거를 제시하신다

시온과 관련한 이미 이루어진 일을 말하면 보라 이미 이루어졌지 않느냐(앗수르 침입)”

내가 소식 전하는 자를 예루살렘에 두리라” - 40:9절 이하 시온에 전하는 자여 산에 올라가 외치라를 연상해 주는 구절이다. 미래에 관한 예언이다. 앞으로 행하실 그 일에 대하여 소식 전할 자,

 

그러나 내가 보아도 누구도 이 일을 제시하는 자가 없는 것을 보았노라. 그들의 행위는 아무것도 아니요 그들이 부어 만든 신상은 부어만든 것이라

 

여기서 전체적인 흐름을 놓치기 쉬운데 전체적인 특을 머리에 넣어보자.

이사야의 의중에서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앞으로 유래없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이루어 지리라. 그 백성에게는 죄사함의 선언과 위로의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드러날 것이다. 이와 동시에 무한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열국을 물한방울 같이 여기시는 하나님, 절대권세의 하나님, 하늘의 천체를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 이와 더불어 하나님은 여기서 아주 강하게 말씀하고자 하는 대상이 누구인가?

 

낙심에 빠진 이스라엘 외에 또 강한 관심을 가진 대상이 이방이다. 우선은 이스라엘에 대한 태도와 상반된 것처럼 보인다. 열국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는 겉으로 보기엔 논쟁적이다. 그러나 그 목적은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목적은 그들로 하나님을 알게 하려 함이다. 열국과 논쟁함도 결국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군가 알게 하려 하심이다.

역사의 하나님, 주인이신 하나님을이야기 하면서, 밀착된 사건이 앞으로 위대한 정복자를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이방에게 주인되심을 알리시려는 것이다. 이러한 큰 틀을 이해하고 해석해 가야 한다.

 

그렇다고 하면 논쟁하여 밝히시는 맥락에서 왜 여호와의 종의 출현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이해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42장의 내용과 전혀 관련이 없게 된다.

내적 일관성을 가지고 예언됨을 알 수 있다

42장의 종의 모습은 앞의 내용과 다르다. 맞지 않다. 앞에서 말한 정복자는 열국을 짓밟는 자이다. 그런데 42장의 종을 보면,

내가 그 위에 나의 영을 주리니 그가 열국에 공의를 시행하리라. 그는 부르짖지도 음성을 높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밖에서 그의 음성을 들리게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정복자의 호령하는 모습과 너무나 상반된 모습이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 ” 긍휼. 그럼에도 참된 의미에서 공의를 시행할 것이다.

땅의 평화를 정착하기전까지 그는 결코 약하여지지도 --- ”

열국이 그의 통치를 소망하리라

사람들은 여기서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이 고레스라고 해석한다.

고레스라고 한다고 할 때 하나님이 그의 신을 그에게 준다고 할 때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고레스가 진정한 의미에서 공의를 시행한 사람인가?

- 고레스의 유래없는 유화 정책, 피정복민을 앗수르의 행위와는 반대로 고토로 돌아가 자기 신전을 다시 세우고 살게한 것, 이러한 것을 두고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고 한다.

이것은 피상적으로 관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부어 주신다는 표현은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야 고레스에게 이르시되라고 할 때 매우 이레적이지만 고레스에게 하나님의 메시야라고 부르고 있는 장면이 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

먼 이국으로 이주되어 그 민족의 정체성이 멸절될 위기에서 각 민족이 고토로 돌아가 그 정체성을 되찾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레스를 성경적 입장에서 이 땅에서 공의를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5-9절까지 내용을 보면 고레스를 가리키는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분명히 해 둘 것은 여호와의 종이라는 특별한 본문들, 이의 논의는 고레스로부터 논의하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을 짓기 힘든 모종의 인물이다. 고레스는 그 논의속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될 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종의 논의의 한 부분으로 고레스의 문제는 취급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내가 내 영을 그 위에 둘 것이요, 그가 열국에 공의를 시행하리라

이것을 고레스와 연계시키지 말고 이사야서 자체의 연관된 내용을 찾자면 11장으로 갈 수 있다.

11,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것과 열국의 통치를 이야기 한다. 이것은 고레스 왕과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42장의 인물은 사11장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여호와의 신으로 열국을 통치 하시되, 그의 통치 방식은 특이하다. 이방의 장군처럼 호령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의 통치는 무자비하게 짓밟아 반역을 꿈도 꾸지 못하게 하는 이방과 달리 상한 갈대도 꺽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이러한 통치가 이방에서 통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통치에 감동한 나머지 사랑, 희생, 봉사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런식으로 하면 세상에서 실패하게 된다. 사랑과 희생을 세상은 병신이라고하고 이용해 먹는다. 우리는 불쌍한 자를 생각할 때 그의 불쌍한 처지만을 생각하여 도와주지만 실제로 그런 자들의 성격은 매우 나쁘다. 도와 주면 도와 줄수록 더 이용해 먹는다. 그래서 대단한 결심으로 시작했다고 중도 포기하는 자들이 많다.

세상 사람들이 물론 우리도 속으로는 그렇지만, 악하고 이기적이고, 될 수 있는데로 화평하게 살려고 한다. 그러나 몇번 짓밟히고 나면 달라진다.

교회안에서 섬김의 통치원리가 실행 가능하고, 시행되어야 할 규범으로 명하신 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보고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니므이 통치를 전제하고 명한 것이다. 이것을 일반 사회에 적용시키면 부작용만 나타난다.

희생적인 사람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군인들의 철권 통치가 있고서야 가능했던 이야기다. 철권적인 통치가 인간의 악을 어느정도 제어하는 그런 상황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만일 전혀 법적인 보호나 악을 행하는데 악을 처벌하여 보고, 선을 장려하는 사회질서가 없이 그저 사랑하고 하는 것이 참 이상 세계가 도달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이사야 본문의 이와 같은 긍휼의 통치를 행해 공의를 시행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보통으로는 이런 모습으로 공의를 시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42:4, 유약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쇠하지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달리지도 않고 꾸준히 통치가 지속되고 땅에 공의가 정착되고 그 결과 열국이 그의 통치를 바라게 될 것이다.

 

42:5절 이하, 그 정복자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된다.

거민들을 창조하신 분, 백성들의 생명의 호흡을 주시는 분, 땅위를 걷는 자에게 ---”

여기서 고레스와 전혀 다른 인물임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6, “내가 너로 백성의 언약이 되게 할 것이니라. 이방의 빛이 되어 장님의 눈이 뜨게 할 것이며, 갇힌 데서 이끌어 낼 것이며, 흑암에 앉은 자들을 이끌어 낼 것이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 - 여호와의 종의 두가지 사역.

이 둘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장님의 눈을 뜨게하고, 갇힌 자를 이끌어 내고, 흑암에 앉은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이 한마디들이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key가 된다. 43장 이하에 가면 이 한마디 한마디(“장님의 눈을 뜨게하고, 갇힌 자를 이끌어 내고, 흑암에 앉은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는 것”)가 다 하나의 주제로 구체적으로 취급된다. 여호와의 종의 사역을 아주 포괄적으로 압축하여 서술한 것이다.

우선 여기서 고레스일 수 없는 것이 장님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고레스일 수 없다.

8장 마지막에서 이스라엘의 심판을, 9장 초두에서 어떻게 표현하는가 흑암에 앉은 자들이 큰 빛을 보았다라고 한다.

구체적인 것은 다시 밝혀질 것이므로 넘어가고,

 

종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뒤,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으리라 내 찬송을 우상에 주지 않으리라---”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시는지 강하게 드러낸다. 이것은 40장 이하에서 이사야가 드러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42:9보라 이미 이루어졌다. 그러나 새 일을 이루리니 내가 새 일을 이루리라

41장 초두가 여기서 계속됨을 알 수있다. 신됨의 자격을 과거와 미래의 일에 대한 언급에서 증명된다. 그런데 여기서 과거의 일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한 뒤, 미래의 일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이다.

41:25절을 이미 이루어진 일로 보았고, 후반부는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이야기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로써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이방을 향해 제시하신다. 지금 열국을 나오라 시비를 가려 보자하시고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심을 밝히시고 증거하시는 것이다.

 

42:10-13절은 짤막한 찬송이다.

10새 노래로” - 매일 새로운 찬송가를 작곡하여 부르라는 말인가?

하나님의 행하심이 이전의 행한 것과 대조되는 의미에서 새로운 일이라 했다. 그러한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높이는 의미에서 새로운 찬송이라는 의미이다.

# 이사야, October 28, 1997.

 

40장 이하는 앞으로 행하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유래없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 -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예언의 바탕이며, 주제이다.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 위대한 정복자를 일으키리라고 하신다. 그 다음에 이 인물의 오심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반복된다. 그리고 이방 열국에 대하여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기록된다. 위대한 하나님의 행하심이 열국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부각된다. 이것은 매우 새로운 방향이다. 이전에는 이만큼 구체적으로 열국을 향한 내용과 언급이 없었다.

위대한 정복자의 오심, 그의 오심이 갖는 의미 - 이스라엘과 열국에 갖는 의미.

 

이러한 틀이 근본적인 틀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바탕이 된다.

 

41 위대한 정복자의 등장.

5절 이하는 정복자의 등장에 따른 열국의 태도

8절 이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이스라엘의 선택관계가 변치않음, 오히려 이스라엘의 대적이 멸망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벌레와 같이 비천해진 그들을 높이셔서 열국의 정복자로 세우시겠다는 말씀.

21절 이하, 하나님께서 열국을 불러 참 하나님되심을 증거하는 논쟁.

누가 참 하나님이냐?

이 논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참 하나님이심을 열국에 알리시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이심은 이 모든 논쟁의 바탕은 하나님의 영광, 참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려는 바탕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42 등장할 여호와의 종.

위대한 정복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묘사된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 고레스의 모습과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특히 40장 이하를 바벨론 포로 이후와 밀접하게 관련짓는 것으로 보려는 자들은 이 모델이 고레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다. 이사야는 고레스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한 인물에 대하여 설명한다.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면을 이사야는 처음부터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고레스는 여호와의 종의 지엽적인 예, 역사적인 예에 지나지 않는다. 예표일 뿐이다.

이방 세상의 통치자와는 달리 그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한다. 그럼에도 공의를 이 세상에 실현한다. 열방이 모두 그의 다스림을 사모하게 된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는 것은 통치의 성격을 암시한다. 긍휼의 통치이다. 긍휼로서 행하시는 통치. 그럼에도 그 통치는 유약하지 아니하고 참된 의미에서 공의를 실현하실 것이다.

 

공의의 성격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생각한다면, 계시사의 한계를 생각한다면, 정치적 공의에서 거리가 멀지 않을 것이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이 옳은가?

이런 시각, 정치적 시각에서, 땅에 속한 어떤 육적 차원에서 이해하려다가 낭패를 본 자들이 누구인가? -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다. 이들이 성경을 몰랐는가? 성경의 박사들이다. 그러나 이 예언의 성격을 이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역사적 해석이라고 할 때, 개혁주의자들의 해석법, 문법적, 역사적 해석이라고 할 때, 이것을 새겨서 이해해야 한다.

역사를 어떤 의미에서 대개 이해하게 되는가? 역사와 밀착된 상황과 관련하여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역사적 요소를 고려한다고 할 때, 우리가 대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 한 걸음 나아가 이스라엘의 종교사, 당시 주변의 역사적, 종교적 상황 등을 다루게 된다. 이런 것에 비추어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해석이란? 하나님의 역사적 경륜에 비추어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열국에 대하여 그들의 우상의 신됨을 증명하라고 할 때, 역사적 본질을 이야기해보라고 하셨다. 역사의 본질이 뭐냐를 말해보라고 햇다. 하나님을 떠나 역사의 의미가 발견될 수 없다.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역사의 참된 의미를 하나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해석이라는 것도,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지, 역사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이해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방의 빛으로서의 역할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자를 해방케 하는 역사를 감당하실 것임. 이 일이 자신이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과 밀착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으키실 인물과 그 인물의 행할 일을 통해서, 하나님게서 가장 중요하게 행하시려는 것이 무엇인가?

- 그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곧 등장할 인물과 그 인물이 할 일이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결정적으로 나타내실 것이며, 그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8, “나는 누구냐. 여호와---”.

야훼라는 이름은 출애굽의 하나님이시다. 모세에게 앞으로 행할 일을 통해 나를 알릴 것이다고 말씀한다.

내 영광을 다른 이에게 주지 않을 것이며, 내 찬송을 우상들에게 주지 않을 것이라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 하나님께서 자신이 참 하나님이심과 그의 영광을 확실하게 나타내실 것임을 확실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의 종을 일으키심을 통해서 그의 영광을 참 하나님되심을 확실히 증명해 보이실 것임의 의지의 표명이다.

 

이러한 의도에 있어서 앞으로 등장할 여호와의 종과 그의 행하시는 일이 얼마나 관계를 가지는가? - 결정적이다는 것이 10-13절까지의 내용이다.

10-13, “땅끝에서부터 그를 찬송하며 바다에 항해하는 자, 섬에 거주하는자, 이 모든 대상들이 하나님에 대한 찬송에로 초청하는 일이 있고, 이 찬송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의 찬송을 섬들에 선포하는 모습”.

- 자연스럽게 찬송이 흘러나오게 하는 것이다. 앞으로 오실 종과 그의 행하실 일이 극히 중요하고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지시해 준다.

 

14절 이하, 종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내가 오래 전부터 잠잠 하였고, 나 자신을 스스로 억제하였으나, 임산한 여인처럼 내가 신음하며 놀라고 헐떡일 것이라 - 극도의 고통의 순간, 위급한 순간의 정서 - 내가 산들과 언덕들을 파괴할 것이요, 채소들을 시들게 할 것이요, 강들을 섬이되게 할 것이요, 물이 가득한 저수지를 내가 말리라라

내가 장님으로 그들이 알지 못한 길들을 걷게 할 것이요. 내가 어둠으로 그들 앞에 빛이 되게 할 것이며, 비틀린 길을 평탄케 할 것이라

여기서 앞뒤의 내용이 맞지 않는다.

15절의 말씀의 성격 - 산과 언덕들을 뒤엎고, 채소들을 말리는 파괴적인 심판의 성격의 일이다.

그런데 16절엔 어둠을 빛이되고 뒤틀린 길이 평탄케 되는 것은 긍정적이며, 구원의 길임을 암시한다.

그렇다고 하면 한 유니티 내에 상반된 성격의 내용이 언급된 것이다. 어느 것이 하나님의 의도인가? 둘을 한꺼번에 할 수는 없지 않은가?

- 이것은 심판과 구원을 언급한다고 할 수 있다. 심판으로 뒤엎은 뒤 다시 구원을 하시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잇다.

그렇게 보지 않고 한가지 의미로 본다면 15절의 내용은 앞의 14절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고, 즉 임산한 여인의 고통과 같이 급격한 일이 임하게 하실 터인데, 하나님께서 급격한, 정상적인 상태의 행위가 아닌, 산들을 뒤 엎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행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지 앞으로 행하실 일이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스런 의미를 살린다면 앞의 해석, 즉 심판이후의 구원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내가 장님들로 그들이 알지 못하던 길로 가게 하리라. 어두움을 빛으로 바꾸겠다

- 이들이 경험할 일이 아직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되게 하겠다는 것, 이 경험의 성격과 내용은 어떤 것인가? 매우 긍정적인 것이다. 어두움을 빛으로 변하게 하시고, 비틀린 것을 평탄하게 할 것이다.

장님이 보지 못하는 어두움의 상태, 곧 장님의 개인적이 상태와 또한 장님의 상태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어두움의 상태를 빛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장님이 눈을 뜨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두움이라는 상태를 말하고자 한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경험하는 어두움의 상태를 하나님께서 빛의 상태로 바꾸시겠다는 것이다.

만약 여기서 장님이 눈이 멀었으니 빛을 비추어도 모르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외부적인 것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빛을 보지 못하는 내부적인 문제까지 고치시겠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앞에서(7) 언급한 여호와의 종이 행하실 일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경험은 어두움이 빛으로 바뀌는 경험일 것이다.

 

18절 이하, 중요한 내용의 진전이 있다.

귀머거리여 들으라. 장님이여 보라”.

- 장님에 귀머거리가 추가된다. 문제는 장님이 누구인가? 누가 장님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누가 장님이냐, 나의 종(선지자)이 아니냐.” - 여기서 은 앞에서 언급한 여호와의 종이 아니다.

 

19절에서 사자로 번역된 인물은 누구인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는 이스라엘의 제사장, 선지자의 직분을 맡은 자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