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이사야 강해

이사야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에반젤(복음) 2019. 12. 28. 20:41


                  

이사야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개역개정을 비롯한 대부분의 성경은 그 배열방식에 있어서 칠십인 경에 의존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독자들 역시 히브리어 성경의 배열방식보다

칠십인 경의 배열방식에 훨씬 익숙하기도 합니다.

예언서에 대한 배열도 예외는 아닙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후기 예언서에 속하는 네 권의 책을 따로 예언서의 항목에 두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성경에서 예언서로 보지 않았던 다니엘서 역시 예언서에 삽입합니다.

아울러 한 권의 책으로 편집되었던 소선지서를 일일이 쪼개 열두 권의 책으로 분책합니다.

또한 동일저자인 예레미야의 또 다른 책인 애가를 예언서에 배치하여

모두 열일곱 권의 예언서가 되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란 말이 있습니다.

대선지서란 무엇이고 소선지서란 말은 무엇입니까?

선지자 중에 대선지자가 있고 소선지자가 있다는 말입니까?

예언의 분량이 문제가 아니라 예언의 진정성이 언제나 핵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대선지서는 있지만 대선지자는 없습니다.

소선지서는 있지만 소선지자는 없습니다.

모든 선지자가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대로 예언했다면 그는 선지자입니다.

예언 분량의 많고 적음이 선지자의 능력 여부를 가늠하지는 않습니다.

글쎄요.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대형교회가 반드시 하나님의 교회는 아닙니다.

물론 소형교회가 역시 하나님의 교회라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관건은 교회의 규모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이지요.

성령님의 내주하심이지요.

어느 대형교회의 담임목사가 고백한 것처럼 대형교회는 인적 자원이 넘쳐납니다.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주님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무슨 말인가요?

대부분의 성도들이 여전히 묻어간다는 말입니다.

다른 이의 봉사에 기대어 간다는 것이지요.

현저한 자원낭비이지요.

그런데도 작은 교회에 가서 사역하기를 꺼려합니다.

왜냐하면 누리기는 하겠지만 섬기지는 못하겠다는 심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이들이 자꾸만 큰 것과 작은 것을 구별합니다.

 

큰 선지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큰 선지자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곧 왜 대선지서입니까?

대선지서란 말은 사실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소선지서란 말은 있습니다.

열두 분의 선지자의 귀중한 예언 메시지가 뭉쳐져 있는 책이지요.

헬라어 성경이 이 소선지서를 분책했습니다.

한 권의 책을 열두 권의 책으로 나눈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책들이 전부 선지서입니다.

문제는 그 앞에 있는 성경들이지요.

이사야서를 비롯한 덩치가 큰 예언서들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소선지서에 대응하는 말로 대선지서가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결코 대선지서가 소선지서에 비해 예언의 가치가 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동일한 가치를 지닌 소중한 예언서들입니다.

 

모든 선지서의 앞에 이사야서가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그런 면에서 선지서 이해의 길라잡이입니다.

이사야서를 모르면 다른 선지서의 이해 역시 곤란하다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문서선지자들이 그렇듯이 이사야 역시 고난의 삶을 통과합니다.

참된 예언이 그 시대에 주목 받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예언은 그 성격상 까칠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찔러대는 말들이 태반이고 흠집을 잡아내는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논리는 적어도 선지자에겐 통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온통 고래를 춤추게 하는 말들에 익숙하고 거기에 빠져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의 강단은 그런 이들에 의해 점령 된지 오래입니다.

목회자의 예언자적 상상력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주 없다는 것이 아니라 찾아보기 힘들어 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달콤한 말이 훨씬 잘하는 설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기질은 상당히 모가 나 있습니다.

고쳐질 때까지 끊임없이 찔러대는 것이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오염된 곳이 깨끗하게 씻길 때까지 닦아내라고 소리치는 것이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세력에 눈을 감은 삯군이 넘쳐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나무 톱으로 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전하는 무명의 순교자 중 한 분이 이사야란 말이 되겠지요.

이사야의 활동 시기를 대충 가늠해 봅니다.

대략 주전 8세기경으로 봄이 좋겠지요.

동 시대에 활동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예언 사역을 하신 분들이 있지요.

미가와 아모스와 호세아입니다.

아마도 요나는 이 분들 보다 조금 앞서서 사역한 것으로 볼 수 있겠지요.

남 유다에 두 분, 이사야와 미가가 활동합니다.

북 이스라엘에는 요나가 빛을 드러내고 그 뒤를 이어 아모스와 호세아가 사역합니다.

특히 호세아의 경우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기까지 예언사역을 감당합니다.

그야말로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속에서 외롭게 예언의 말을 토해냅니다.

믿어주는 이가 없다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사람이 불타는 마음으로 토해내는 하늘의 메시지 아닙니까?

그 진실을 믿어주지 않으니 얼마나 갑갑한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런 말은 말하지 말라는 윽박지름이 있어도 예언자들은 올곧게 하늘의 메시지만을 전합니다.

 

이사야의 시대도 그랬습니다.

히스기야와 같은 괜찮은 왕도 있었지만 모든 왕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사야의 예언 사역기간 동안 네 명의 왕이 바뀝니다.

왕들의 통치 기간을 산출하며 이사야의 예언 사역을 부인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사야가 그렇게 장기간 예언 사역하기는 어렵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제 2 이사야 설입니다.

이사야서는 한 사람의 예언이 아닌 두 사람 이상의 예언을 묶은 것이란 주장입니다.

나름 적절한 근거도 있습니다.

바로 1-39장과 40-66장의 주제가 다르다는 것이지요.

최근에는 제 3 이사야설이 유력하게 떠올랐습니다.

56-66장은 포로기 이후의 상황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활동 시기와 상당한 격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세 명의 선지자로 보는 학설이 최근의 통설이 아닐까 여깁니다.

쪼개기 좋아하는 학자들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예언자가 지닌 상상력, 즉 예언의 통찰력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예언자적 상상력이란 시대를 뛰어넘어 미래를 보는 것을 말합니다.

한 시대가 아니라 수 세대를 뛰어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것이 본래의 예언자적 상상력입니다.

그런데 그 예언자적 상상력은 깡그리 무시하고 배경이 다르다느니,

문체가 다르다느니 하면서 이사야서를 잘게 쪼갭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제 2 이사야의 예언 속에 있는 53장을 보십시오.

솔직히 예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보면서 읊는 시 같지 않습니까?

골고다 언덕의 핏방울을 보면서 토해내는 고난의 찬가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누가 이 예언을 수백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고한 예언이라 보겠습니까?

예언의 언어는 어제를 오늘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언이 지닌 독특한 매력입니다.

그런데 굳이 문체가 다르다고,

그 시대적 배경이 달라졌다고 선지자를 쪼갤 수는 없겠지요.

 

이사야서에 대한 여러 호칭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구약의 복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사야서는 특이하게도 신구약 성경 66권을 상징하듯 6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1-39장까지의 율법적 구도가 40-66장에는 은혜, 곧 복음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복음이란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사야서에는 네 개의 종의 노래가 나옵니다.

그 중 압권은 아무래도 53장이겠지요.

제 개인의 고백입니다만 신학생 시절 이 본문을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총신대학교에 입학하여 첫 개강수련회 때에 들은 메시지는 가슴을 숱하게 찔렀습니다.

나 같은 놈이 목사가 되어도 괜찮을까 숱한 고민을 하며 그 말씀을 보고 또 읽었습니다.

히브리어를 배우던 시절, 제일 먼저 그 본문이 떠올랐습니다.

되지도 않는 발음을 갖고 그 본문을 외워보려고 숱한 노력을 하기도 했습니다.

외우고 또 외우면서 53장의 그 절묘함에 반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말합니다.

이사야서를 함부로 보면 곤란합니다.

이사야의 학문적 수준을 가볍게 보면 곤란합니다.

53장이 지닌 시문학의 세계는 가히 모든 평행법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습니다.

동의적 평행법을 필두로 교차 평행법까지 세세하게 등장하는 53장은

 예언의 의미를 제쳐놓더라도 시문학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시는 시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지서 속에 있다고 저는 말합니다.

그렇게 메시야의 고난을 세세하게 보듯이 그려낸 예언이 53장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 53장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사야의 예언 사역이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6장의 이야기를 통해 이사야의 소명을 듣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환상의 세계가 열립니다.

그가 본 세계는 놀랍게도 성전의 환상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사야의 직업을 성전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사실 이름 중에 “야”, 혹은 “엘”로 끝나는 경우 귀족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귀족 가운데도 왕족과 제사장족에게서 흔히 이런 이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를 왕족으로, 또는 제사장족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의 출신이 어떠하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는가가 보다 중요한 본질이지요.

그러나 그의 예언 내용들을 볼 때에,

그의 수려한 문학적 기질은 충분히 그의 신분을 가늠하게 합니다.

 

이사야의 성전 환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예배학적으로 재구성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임재와 그 앞에 떨림으로 서는 것이 예배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살펴보는 일은 최우선의 과제입니다.

죄인 됨을 자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예배학적 성찰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보면서 이사야는 자신의 죄인 됨을 처절하게 고백합니다.

죽었다고 고백할 때가 살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하는 내적 성찰이 고백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불로 씻김을 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불로 태워질 때가 깨끗하여 지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자를 찾습니다.

그 부름에 반응하여 소명자로 보내 줄 것을 청원합니다.

하나님의 황홀한 은총으로 예배의 정점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세워지는 것만으로 예배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참된 예배는 파송과 더불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적절한 인물이 선택되어지고 파송되어야 할 시간입니다.

이사야는 서슴없이 자신을 보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소명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사야는 파송을 받습니다.

들려주어도 듣지 못하고 보여주어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에게로 파송을 받습니다.

메시지를 전해야 할 대상이 이런 자들임을 하나님께서 일러주십니다.

그래도 가야한다는 것이지요.

오늘의 예배에도 파송은 빠질 수 없는 요소입니다.

 

고난의 시대를 겪으며 보여주실 하나님의 약속이 표징으로 소개됩니다.

그것이 곧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임마누엘입니다.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처녀에게서 나셨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최고의 예언이 임마누엘입니다.

그 예언만으로도 이사야의 선지자로서의 위상은 확실합니다.

성육신과 고난을 통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를 모두 이사야는 말합니다.

특히 마지막 메시지에서 새로운 세계를 강렬하게 드러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는 희망의 예언을 전한 선지자입니다.

 

사족처럼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이사야서는 말라기서와 함께 유대인들에게는 꺼려하는 선지서입니다.

특히 마지막 메시지를 읽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두 예언서는 모두 이스라엘의 저주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름 편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22절의 말씀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지요.

그 차이점을 한번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통상 이사야서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런데 22절을 다시 반복하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새 하늘과 새 땅”,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 아닙니까?

바로 신천지이지요.

신천지는 모든 이들의 소망이지 어느 한 특정 집단의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그 새로운 세계에 대한 소망이 고난 받는 메시야를 통해 이룰 역사인 것을 내다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