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선지서가 이사야 한 권에 압축된다고 할 만큼 중요하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66장이 신구약을 대표한다고도 한다. 마가복음의 경우 이사야의 인용으로 시작할 정도이다. 이사야는 매우 깊으므로 또 중요하므로(구약 이스라엘 멸망과 메시야 왕국의 예언, 매우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 신구약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선지서 중 가장 밝히, 풍부히 신약을 나타내는 것이 이 이사야이다. 그렇게 중요한 만큼 마귀의 장난으로 가장 말 많은 책이기도 하다. 18세기 비평학 이전에 이븐 이즈라는 사람은 제 2이사야란 칭호를 붙였다. 최근에 56장 이후를 제 3이사야라고까지 부르기도 한다. 이런 이론들의 근거는 굉장히 복잡하다. 이런 쓸데 없는(그럴듯하기는 하나)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
최근의 책들은 1,2,3 이사야서 이론이 정설처럼 되어 버렸다. 인정하건 반대하건 이 구분설을 인정해야 이야기가 된다. 순수한 예언의 가능성을 믿는다면 이 구분설은 필요가 없다. 8세기 선지자들은 세계 상황의 변화를 보고 예언할 수 있었다는 이론, 이것은 예측에 불과하지 순수한 예언이 아니다.
1:1 ןוזח(하존)은 아모스서의 ירבד(디브레)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같이 ןוזח이라고 되어 있다. HJA는 아람어로서 히브리어의 RAh와 같은 뜻이다. 이사야의 아버지는 아모츠인데 아모스서의 아모스와는 다르다.
ימיב(비메) / 하나님의 계시는 관련된 시기가 명시되어 있다. 시대적 상황과 결부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선지서의 역사의식은 선지자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경계시의 보편적 특징이다. 성경의 기본틀은 歷史이며 그 歷史的 상황과 결부하여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사야서를 이해하려면 그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B.C. 19세기 / 구 바벨론
B.C. 11세기 / 다윗왕국
B.C. 9-8세기 / 앗시리아
B.C. 8-7세기 / 신 바벨론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주인이 바뀔때마다 서남쪽으로 진출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목재(레바논 : 두로, 시돈), 공물, 해상무역 때문인데, 애굽도 힘이 남으면 올라간다. 팔레스틴은 바로 두 세력간의 길목이다. 그래서 항상 짓밟힌다.
이사야 시대(B.C. 8-9세기)에는 친 애굽파와 친 앗시리아파 등으로 팔레스틴은 복잡했고, 그러나 당시 애굽은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였다.
팔레스틴의 내부는 다윗왕국 이후 내부 분열이 일어나고 솔로몬은 실정함으로 외부 반란이 일어난다. 웃시야 시대는 북 아람의 내부 분열로 이스라엘은 세력을 확장하고 남 유다도 에돔까지 정복하여 솔로몬 시대의 고토를 거의 찾았다. 팔레스틴 지역은 한편으로는 열강의 각축장이나 또 한편으로는 주요 교역로이다. 이 교역로를 장악하는 것은 부의 원천이 된다. 솔로몬 시대에는 백향목을 뽕나무처럼, 은, 금을 돌처럼 흔하게 했다는 말이 이런 것이다.
북 앗시리아가 돌아가고 아람이 불안하고 이 지역의 주도권을 남북 이스라엘이 50년간 잡았던 때가 이사야의 시대적 배경이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망상을 아모스가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도 당시의 시대 배경을 이렇게만 생각할 것인가? 사 1:1에서 언급하는 시대 배경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역사적 사실 진술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고 사건들을 꿰는 틀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으로는 열방의 침입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다.
메소포다미아 지역의 2개의 세력은 바벨론과 앗수르, 니느웨요, 구 바빌로니아의 가장 흥한 왕이 바로 함무라비이다. 그후 B. C. 11C에 다윗왕국이 큰 나라를 형성한다. 이때는 바벨론이 약했었다. 그리고 바벨론 대신 앗시리아가 커진다(B. C. 9C). 그리고 이 앗시리아는 느부갓네살의 신 바벨론에게 B. C. 8-7C에 망한다. 그리고 이어서 동방의 고레스에 의한 메데 바사에 신 바벨론 역시 망한다.
Palestine의 세력 균형은 바벨론(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애굽에 의해 이루어진다. 바벨론이 커지면 서방정책을 쓰고(두로와 시돈 향하여) 레바논의 목재와 광석을 구하기 위해 지중해 진출을 하게 되는데 이때 소아시아 진출의 길이 열린다. 그리고 힘이 더 강해지만 애굽을 바라보고 남하정책을 쓴다. 반대로 애굽 역시 마찬가지이다. 애굽이 커지면 북진정책을 쓰고, 더 힘이 커지만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넘보게 된다. 따라서 두 문명권의 길목이 바로 Palestine이기에 항상 짓밟힌다.
다메섹의 아람민족 - 아람 다메섹이(벤하닷, 하사엘 왕) 큰 세력으로 당시 존재했다. 이들은 두 산맥 사이의 깊은 골짜기-베카(קב; 골짜기, 쪼개어진 곳), 골란고원에 위치하였고 이들의 침입경로는 이 골짜기를 따라 갈릴리로 들어온다. 그리고 다메섹 위에 하맛왕국, 그 밑에 두로와 시돈, 해안평야지대로서 블레셋 지역, 이 모든 곳 즉, 야르묵강=길르앗지역을 성경에서는 바산지역(골란고원)이라고 한다. 이 야르묵강에는 라반의 민족(아람민족의 근원)이 살았다. 아람과 이스라엘의 경계지역(라반과 야곱의 협정)이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친애굽파와 친앗시리아파의 갈등이었다. 정치적으로 저울질하다가 갈등한다. 그러나 당시 애굽은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였다. 르호보암 때 시삭이 쳐들어 왔고, 8세기 선지자인 요나, 아모스, 이사야, 미가 시대에는 가장 위협세력이 앗시리아였다. 이스라엘의 내부사정을 보면 내부적으로 혼란했다.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지자 속국들(아람, 다메섹)이 떨어져 나갔고, 나라는 2분되어 서로 분열과 다툼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때부터 2대를 못나가 반란이 일어난다.
북이스라엘은 두로와 시돈 화친으로서 아합을 두로의 공주와 결혼시키고, 여호사밧의 아들과 아합의 딸 아달랴를 결혼시킨다. 이때 아람이 앗시리아 때문에 힘이 부쳤던 것 같다. 아합시대는 그의 아들 때 예후의 반란으로 끝난다. 예후 이후 이스라엘은 아람에게 짓밟히기 시작하고, 이 결혼으로 남, 북이 흥망성쇠를 같이 한다. 아합이 병거 천승, 보명 2만을 둔 것에 비하여 예후 때는 앗시리아가 쳐들어 올 때 파견한 군사가 겨우 병거 십승이었음을 볼 때, 이스라엘은 공격력이 전무한 상태인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아람에 의해 철저히 유린된 상태였다.
앗시리아가 서남진정책을 쓰면 다 망하고 마니까 앗시리아와 동맹을 맺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Qarqar전투에서 여러 동맹국이 앗시리아와 대항하나 이때 앗시리아가 철저히 승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추측컨대 한참을 앗시리아가 저지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Adadhirari 3세가 앗시리아 왕일 때 아람, 다메섹을 완전히 짓밟고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받는다. 그러나 여로보암 2세 때 앗시리아가 바벨론 때문에 지치고 아람 다메섹과 하맛의 자기네들끼리 싸우므로 그 틈을 타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큰 세력을 떨치게 된다.
여로보암 2세, 웃시야 왕 때에 이스라엘이 세력을 크게 확보하기 시작한다(에돔을 다시 정복). 웃시야 왕은 농업을 크게 일으키고, 옛 솔로몬 시대에 버금가는 영토가 된다(비록 남북으로 갈라졌으나). 나쁘게 보면 열국 사이에서 눌리는 지역이지만 좋게 보면 두 큰 문명권의 다리 역할(교역로)로 여기서 떨어지는 부가 상당히 크다(솔로몬 시대가 그러했다). 그리고 그 다음 앗시리아가 침략할 때까지 약 50년간 그 당시 판도를 주름잡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부흥기였다.
이스라엘이 가장 정치적으로 융성했던 시대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선지자가 8세기 선지자들이다. 그 당시 교회 지도자들의 자세, 그들의 업적에 대한 자랑, 유례없는 축복의 때에 살고 있다는 허황됨에 대한 치는 예언자가 아모스였다. 그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를 평가했다. 이스라엘이 맞은 정치적 호기들을 이렇게 해석하고 보아야 할 것인가? 이사야 1:1의 말씀에 비추어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 대해 어떻게 암시하고 있는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주류인데, 과연 그러한가? 역사적 사실만 들어서 이야기한 것이지만 이 사실들을 꿰는데는 어떤 틀(시각)이 있다.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는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겠다는 큰 나라 형성 계기와 엘리야 사건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가실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한 사건이다. 언약 파기한 이스라엘에 대해 철저한 심판을 하고, 그 심판의 도구는 하사엘(이스라엘을 철저히 괴롭힌 자), 예후, 그 손을 피하는 자는 엘리사를 통해 심판하시리라. 그러나 남은 자를 남기리라. 이러한 이스라엘이 당할 심판을 예언한 자가 요나이다(여로보암 2세 때). 죽었다가 사는 의미의 심판이다. 사망의 곳에서 부활하여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할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요아스, 여로보암 2세를 통해 융성케 하신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이스라엘이 너무 고생하므로 불쌍해서라고 한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교회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시각을 제공한다. 조금 넓게 보면, 글을 남긴 선지자 - 아모스, 호세아 등등 8세기에 들어와 거의 동시대에 선지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물론 엘리야, 엘리사, 요나 등등 함께 튀어나온다. 이들 선지자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표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주신 계시의 말씀은 특정시대와 관련되어 이해되어야 하고, 그것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오고 오는 모든 시대에 말씀하시는 계시의 성격이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이사야가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에 연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12장과 13장 이후는 그 내용이 구분된다. 1-12장은 이스라엘에 관심이 있고 13장 이후는 이방에 관심이 있다. 심판과 구원의 예언이 번갈아 등장한다.
文體 / 說話體 : 오경, 역사서, 역대기(중간 중간 모세의 노래, 라멕의 노래 등은 詩體가 되기도 함). 詩體 : 히브리 시체의 특징은 parallelism한 시행이 둘로 나뉜다. 앞과 뒤가 상관관계 가짐. 대표적으로 시편, 욥기, 잠언, 전도서.
동의적 평행법 : 같은 뜻, 같은 내용을 반복.
반의적 평행법 : 다른 것을 대조함으로 강조.
합성적 평행법 : 특별한 내용상의 상응관계가 없다.
선지서들 거의 대부분이 시체로 기록되어 있다. 이사야의 경우 시체로 계속되다가 7,19,20,36장에서 설화체 부분이 나온다.
설화체 부분을 중심으로 2분하는데, 전 후반부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전반 끝 : 서원, 후반 끝 : 찬양.
1장
이사야를 가리켜 ץומא ןב(벤 아모츠)
아모스서의 아모스는 סומע(아모스)로서 서로 다르다.
1절에 등장하는 이상 즉, הזה(하자) = 말씀과 연결시켜 말함 즉, 하나님의 계시와 깊은 관계가 있다.
아모스 1:1 היח־רשׁא / סומע ירבד(디브레 아모스 아쉐르 하야)
이스라엘에 대해 본 / 아모스의 말씀들
하나님의 계시와 관계된 선지서의 언급 순서는 누구에게 그 계시가 주어졌나? 이 계시가 무엇에 관한 것인가? ימיב(비메; 시기, 때) 즉, 이 계시가 주어진 때의 순서를 갖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는 특정한 시대와 그 상황과 밀착되어 있다. “......에 관한 계시”라고 밝히는데 대부분 그 시기가 명시되어 있다. 어떤 시대적 상황과 결부되어 있고, 그리고 그 시대와 결부시켜 해석(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특정상황에 대해 말씀되어진 계시라는 뜻이다.
어느 시대나 초시간적으로 영원한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과 연관된 계시임을 밝힘이다. 이것은 성경계시의 보편적 특성이다. 성경계시가 담긴 틀 자체가 역사이고, 역사 흐름과 결부되어 계시된 것을 볼 수 있다. Von Rad는 구약을 가리켜 “역사책”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이사야의 계시를 이해할려면 당연히 이사야가 처한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계시의 말씀이 특정 시대, 특정 인물과 관련하여 주어진 것이지만, 그 계시의 의미가 그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앞으로 올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말씀인 것은, 그것이 기록되었다는 사실로 보아 알 수 있다. 계시가 특정 시대, 시간, 공간, 특정 대상과 연관되되 그 시대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임은 아주 중요하다. 여기에 대해 역사주의는 이 계시는 그 시대와 함께 끝나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의미가 있는가? 실존주의에서는 나의 삶의 관계 속에서 내 관심사와 관계된 것이 있을 때, 과거의 사실이 내게 의미있게 된다(그 계시의 객관성과 관계 없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만 찾는다). 과거를 과거로 묻어버리는 역사주의와 실존주의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와 과거 속에 묻혀버리지 않고 오늘도 내게 말씀하신다.
2절 רבד הוהי יכ ץרא יניזאהו םימשׁ ועמשׁ(쉬므우 샤마임 웨하아지니 에레츠 키 아도나이 디베르)
1장 내에서도 내용을 구분할 실마리가 있다. 즉, 실마리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하나의 연결된 표현을 시작과 끝에 나누어 이 전체가 하나의 unit를 이루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1-9가 한 단락, 10-20가 한 단락, 그 나머지가 한 단락. 즉, 이와같은 단락법이 내용에 충실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들으라” 그 후에 이스라엘의 죄악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8세기 선지자들의 주된 내용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선언이기 때문이다. indictment(정죄)의 글이라고 볼 수 있다. “자녀로 길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녀 처럼 키우고, 양육하였는데 이스라엘이 부모를 배반하듯 하나님을 배반하였다. 짐승도 주인과 구유를 아는데 “이스라엘은 짐승보다 못하다”.
여기서 ‘자녀로 키웠다’는 것은 비유적 표현으로 “아비와 자식”의 관계는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양식비평학자들은 지혜문학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잠언에 그 표현이 많으므로). 가장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 나라,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아비와 자식”,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의”, “정절”이 아주 중요하다. 이처럼 신실이 강조될 때 이 표현을 쓴다. 결국 이 말은 이스라엘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기르시고, 양육하셨다.
언약 파기 때는 하나님을 배반하였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은 언약과 관계되어 있다. 신 32:1에 ...ץראה עמשׁתו / ...םימשׁה וניזאה (하아지누 하샤마임... / 웨티슈마 하아레츠...)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들으라’라고 말하는 배경이 된다. ץראה־תאו םימשׁה־תא םב הדיעאו(신 31:28; 웨아이다 밤 에트-하샤마임 웨에트-하아레츠) 여기서 밑줄 친 것은 명사에서 동사로 만든 것으로(dinominative) “...을 증인으로 세우다”의 뜻이다. 이 말은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운다. 앞으로 너희가 반역할 것에 대한 증거의 노래이다. 다시 말하여 이 노래가 증거가 될 것이다. 이것을 예언하면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운다. 그러면서 신 31:28-29는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들으라”고 하면서 하늘과 땅을 세워 증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사 1:2이하는 신 32:1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32: 6 - 이스라엘은 지혜가 없는 우매무지한 백성이며
7 - 하나님을 아버지로 묘사
20 - 무신한 자녀
32 - 소돔, 고모라
이렇게 신 32장 자체는 앞으로 이스라엘이 배역할 것에 대한 증거이며 이사야는 이 말씀(증거)을 배경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이사야가 출현한 역사적 상황은 엘리야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시의 말씀 즉, 시내산 언약이 전제되고 있다. 시내산은 어떠한 곳인가? 이스라엘이 순종을 맹약한 장소이다. 그곳에서 철저한 심판을 선포하심은 근본적으로 언약 파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사야의 구속사적 맥락에서 보면, “하늘이여 땅이여 들으라......”는 말은 시내산 언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이 언약 파기를 선포하심이다.
“아들 처럼 길렀다” -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언약의 주로서 기대되는 모든 은혜를 베푸셨다는 말씀이다(부성적인 사랑으로). 이 언약의 관계가 의무 이상의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나에 대하여 반역하였도다”로 보여지며, 그와같은 사랑 받고도 반역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짐승보다 못하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죄 범한 민족이요” אטח(호테) = miss the mark; 하나님의 표적에 이르지 못함
ןוע(아온) = 길에서 벗어나다
결국 이 말은 반역 = 하나님의 요구하신 정당한 길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렸고 말씀을 능멸했다” 죄의 근본적 동기를 하나님을 버린 것(뒤돌아섬, 등을 돌림)과 말씀을 능멸한 것으로 즉, 그가 명하신 율법의 말씀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짓는 고범죄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등을 돌리고 세상의 욕심을 좇을 것인가 중에 선택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죄의 근본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이때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취급해 오셨는가의 은혜의 역사를 말하고 동시에 그 반응으로 이스라엘이 계속 반역했던 것을 말한다. 상처투성이의 이스라엘(어찌하여 더 맞으려고 반역을 계속하느냐)에게 묻는 질문은, ①배역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때리심을 볼 수 있다. “온 머리가 병들었고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고 표현 즉, 상처가 아물 틈이 없도록 계속 맞아왔다. ②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속 반역하고 있다. 혹은 반역해 왔다.
7절 땅이 황폐했고 너희 성읍은 불살라졌다. 이는 전쟁의 참화를 그린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곧 전쟁은 배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8절 딸 시온만이 오이밭의 망대 처럼(포도원의 움막) 예루살렘만 남았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만 남겨두지 아니하셨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배역을 치셨고, 이스라엘은 계속 배역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남기셨다(그 채찍 속에는 그래도 아들에게 향한 사랑이 “남은 자”로 표현되어 남았다). 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로 표현했나가 여기서 밝혀진다(아들의 배역에도 불구하고 문 밖에 기다려 섰는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었으므로).
10절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아 - 이는 두번째 부분의 시작으로서 들으라는 대상을 지칭한다. 이 표현은 바로 앞 절을 의식한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위해 긍휼 베푸시지 않았더라면 소돔과 고모라 같이 완전히 멸망받아 마땅했다(그 죄질 자체로 볼 때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죄질이기 때문이다. 경제, 사회적으로 부요하고 군사적으로 강국이었고, 그들의 외적 경건과 열심도 대단했다. 즉, 3일마다 십일조를 드리고 제물의 향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사야는 “오해하지 말라”고 한다. 너희는 망해야 마땅한 존재이지만(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의 시기이다),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잠시 외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 뿐이라고 한다. 오늘 우리 시대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평안이 없는데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지 않는가? 위기의 시대 속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상, 죄질에 대해 원칙적으로 재림까지 유보된 상태였으나 심한 죄악상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잠시 심판하신다.
11절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어떠한가? 너희 많은 제물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목까지 차서 넘어오려고 한다” - 배불렀고 /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찬양하나 올라올 정도라니...... ירצח סמר(ל) םכדימ תאז שׁקב־ימ(미-비퀘쉬 조트 미웨드켐 리르모스하체라) 나의 뜻을 밟는 것(부사적 연계형)은 תאז(조트)를 수식. 이에 대한 해석은 ①내 성전을 짓밟는 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했느냐?(즉, 나의 뜰을 밟는 것이 짓밟는 것이라고 말하는 격), ②한글역;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는 두 가지가 있으나 둘 다 가능한 해석이다.
13절 일을 하지 않으면서 모이는 것(그 모이는 사람들이 악을 행한다고 하면) 즉, 성회와 기도로 모이는 것이 짐스러운 것이 되었다 - הרצע(아차라; 도저히 못참겠다) 왜냐하면 너희 손에 피(ואלמ םימד םכידי; 위데켐 다밈 말레우; 모든 종류의 폭력, 남을 억울하게 하는 것, 말, 정신적 폭력까지)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16절 ועמשׁ(쉬므우) 들으라 - 듣는 대상이 이스라엘로 직접 호칭한다. 과거 역사에 관한 것으로 하늘이여 땅이여 하고 하늘, 땅을 대상으로 불렀으나 이제는 취급하는 상황이 이스라엘의 현재상황이다. 그 첫 예가 그들의 예배의식(cult)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언약의 주로서) 선택하여 세우신 그 일에 있어서 모든 임무를 행하셨으나 이스라엘은 배역하였다. 이같이 배역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고치시려고 징계하시나 이스라엘은 고침받으려 하지 않고, 반역을 계속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은 자”를 두셨다. 여기서 ‘남은 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희망을 아직 버리지 않으셨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소망을 가질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한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과거역사의 모습니다. 10절 두번째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들으라 하늘이여 땅이여 ?? 어법 자체도 첫째 부분에서 들으라는 대상이 제 3자이고
들으라 이스라엘이여 ?? 이스라엘의 지칭도 3인칭으로, 이스라엘의 과거 상태이다. 나 자신이 3인칭으로 지칭될 때는 강도가 약하다. 그래서 두번째 부분에서는 2인칭으로 호칭(“너희들”; םה; 헴)하므로, 이때는 강력한 호소력이 있다.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가 주된 관심이 된다.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에서 취급하는 것은 의식(cult)이다(삶에 연결되지 않은 cult의 영역). 의식 명령에 평가 대상을 삼는 이유는? 현태 상태에서 의식을 취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식은 현재와 관련되어 있다.
cult의 본질적 특성은 Vergegenwärtigung(페어게겐베르티궁; 현현화)이다. 미래의 일을 지금 이 시간에 성취하고, 과거 사건을 지금 이 시간으로 재현(review)하는 의식은 과거와 미래가 한 순간에 집적(현재화)한다. 의식이야 말로 우리 삶의 현재와 가장 밀착된 것이므로 우리는 과거의 사건을 현재에 체험하고, 미래에 있을 역사를 선취체험하며, 우리의 경험 영역 밖의 하나님을 가시적 순간을 통해 영적인 것을 우리 삶의 현실 속에서 누리는 것이 cult이다.
동시에 cult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성전이다. 성전은 이스라엘 삶 속에서 핵심적,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여기서부터 이스라엘의 삶은 시작된다. 여기서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모든 영역으로 삶이 확산된다. 이스라엘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여기서부터 하나님에 의해 거부되고, 하나님이 혐오스러워 “내 얼굴을 돌리겠다, 눈을 감겠다”는 것,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하는 것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하나님에 의해 거부되었다. 하나님과 영적 교통에 장애가 되는 것을 넘어선 헌신된 삶, 영적 기도, 영적 형식의 삶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되었다.
대개 제사와 관련하여 성경에 잘 나타나는 표현은 하나님이 제사를 열납하시는 것이다. 본래 제사가 잘 되었으면 열납되어야 하는데 혐오, 가증한 짐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말이다. 의식이 이루어지는 장소(cultic place)인 성막은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이 모든 다양한 것을 하나로 묶는 본질은 만남이다. 성막을 회막으로도 말한다.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제사드리는 것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것인데 만나기를 외면하시겠다고, 거부하셨다.
15절 하반절 하나님이 친히 제정하신 것이 의식인데 하나님께서 만나기를 거부하신 것은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피는 삶의 모든 종류의 폭력을 의미하며, 남을 억울하게 한 것이다. 바로 손은 인간 행위의 도구이다. 너희 삶이 남을 억울하게 하는 폭력으로 가득하다. “성회와 아울러”, 성회는 금식을 선포하고 아무 일도 않고 모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식을 거부하는 이유가 그들의 삶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다.
17절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가르치신다. 일상 삶의 질서와 관련된 부분에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려는 의식적 시도들이 철저히 거부되는 이유가 그들의 삶이 선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우리 교회에 적용시킨다면? 이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주위 세계의 의식 개념에 대한 변증적 의도와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의식이 무엇인가’ 이방세계의 cult는 철저한 비윤리성이다. 신에게 이방인들이 드리는 cult는 그 사람의 윤리적 상태는 필요없고, 절차에 따라 요식법대로 되었느냐는 것이다. 아모스서에서 법의 이름으로 행한 불의를 지적한다. 이방의 의식은 정신과 상관없이 요식대로 행하면 효과가 나온다. 이런 의식은 아무 상관없다. 그들의 삶과 직결되지 않는 의식은 하나님이 거부하신다. 이사야서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가 이 부분인가?(17절) 이것이 이사야의 생각의 전부일까?
쉽게 말하여 우리 행위를 고쳐 우리의 삶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의식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까? 이런 피상적 판단에서 생겨난 것이 바리새인들이었다. 삶 속에서 실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는(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바르지 않다 하고 여기서 그치면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한다. 여기서 바리새인의 외식주의가 나온다. 겉으로 무엇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역기서 하나님이 참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성전 밖의 일상적 삶과 의식과의 괴리 같은데, 외부적 특징이 뚜렷한 것이 의식인데, 삶도 마찬가지이다. 외부적 행동도 우리의 내면적 본질을 표현하는데 외부적 형식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면적 진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여도 그 마음은 멀도다” 실제적 삶과 의식을 대비하면서 우리에게 경계시키는 것은 외식주의이다. 진정한 내면적 본질, 경건, 사랑을 제외한 것은 무의미하다. 진정한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외부적 삶은 무의미하다. 내면적 본질을 강조한 성경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행하지 않은 것이 죄’라고 한다. 우리 행위가 잘못되면 우리의 내면적 믿음의 상태를 알아보아야 된다. 믿음이 고장난 것이다. 잘못된 행위를 고치려는 것은 고쳐지지 않는다. 고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가능한 것이다.
18-20절 이 부분의 말씀에서 문장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 “오라 변론하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변론하자는 말은 따져보자는 말인데 그런데 따져보자 해놓고, 그 다음에 나오는 “주홍같이 붉을지라도......”와는 맞지 않는다. 이 본문을 요즈음 와서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주홍같이 붉으면 과연 희어질 수 있겠는가?”(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다고 하자). 이 해석은 이스라엘 스스로의 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다. 하나님의 엄중한 평가원리를 말씀하신다. 이 판단원리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운명은 분명하다. 이렇게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추가적 진리는 이스라엘에 희망이 없음을 말한다.
21-31절, 18-20절이 하나님의 심판원리요, 이스라엘의 소망이 없음을 말한다. 이것을 확증케 하는 것은 20절의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하고 엄중하게 끝난다(추가적 언급). 21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정죄의 심판을 선고받은 이스라엘의 상태이다. 예레미야 애가에는 “어찌하여 통곡하는가?”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시온의 심판을 눈 앞에 두고 하는 말이다. 예레미야의 슬픔은 바로 하나님의 슬픔이었다. 이렇게 볼 때 21절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스라엘의 이전 상태를 신실, 공의로 충만, 그 안에 의가 거하였던 그런 때가 있었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살인자들이 우글거린다. 신실했던 성읍이 창기, 공평과 의가 있었던 곳이 살인자들로 우글거린다.
22절의 말 뜻은 םיגיס(시김) = 은박(pbo - 산화납)으로서 은에 pbo가 섞이면 쓸모없는 은이 된다. 여기서 은이 찌끼가 되었다는 것은 즉, 제거되어야 할 가짜 은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신실, 의, 공평이 없어지고 창기의 불성실, 살인자의 폭력과 불성실로 된 이스라엘은 내적 본질이 변질되어버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은을 원하셨으나 즉, 신실, 의 공평을 원했으나 살인자의 폭력과 불의로 바뀐 것이 외형적 은이 찌끼로 바뀐 것과 같은 것은, 겉으로는 의로운 것 처럼 보이나 속은 딴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현재 상태를 가리켜 변질되었다고 선언하시는데 그 선언의 전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참 본질이 된다. 그것이 앞에서 언급한 신실함, 공평, 의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너희는 변질되었다고 함은 이는 변질되기 전 참 본질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3절 이하 너희 방백들은 반역자들이요, 도적들과 한 패라. 뇌물을 좋아하며 추구하고, 과부들의 송사는 올라오지 않고, 과거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삶의 본질에서 변화되었다. 내가 내 대적들로부터......보수하시겠다. 이 대적은 바로 이스라엘을 가리킨다(하나님 백성의 본분을 버리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슬프다” 이 말은 이스라엘에 대한 절망감의 표현이다. 왜 절망할 수 밖에 없는가 상황을 묘사한 후 24절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고 하신다.
그리고 24절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나 다시 정결케 하시고 회복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모든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의 미래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이스라엘의 미래는 하나님의 미래이기도 하다. 절망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이것은 2가지 의미를 시사한다. 첫째는 불순물 제거 과정 즉, 모든 찌꺼기와 잡된 불순물을 제거하리라는 정화의 의미와 다음에 옛 재판관들을 회복하신다. 정화와 회복 후(옛 상태로)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읍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본질대로의 회복(의롭고 거룩한 백성으로 세움을 받는 일)이 심판의 의미이다.
27절 시온이 공평으로 귀속(회개하는 자들이 구속되리라) בושׁ, בשׁ, היבשׁ(슈브, 샤브, 샤베하) = 회개하다, 돌아서다. 패역한자는 패망 = 여호와를 버린 자는 패망한다 = הוהי בזוע(= הוהי יבזע; 요자브 아도나이 = 요즈베 아도나이)
정리해 보면, 8-20절에서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 역사는 하나님 앞에서 혹은 하나님의 평가에 의해서는 절망적이다. 그래서 남은 것은 이스라엘의 모습대로 보면, 철저한 심판 밖에 없다. 이스라엘 스스로의 가능성으로는 철저히 부정적일 수 밖에 없으나 인간의 힘, 지혜, 계획에 의한 역사가 아니고,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해서만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 계속 반역하는 이스라엘을 아주 멸망케 하지 않으시고 철저한 하나님 은혜에 근거하여 남은 자를 남기시는 미래, 죄에 처한 백성을 회복케 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미래의 소망은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더러움 제거, 참여케 하시고 신실하고 의로운 백성에 대하여 회개하는 자) 밖의 사람은 철저히 심판당할 것이다.
בשׁ(샤브; 돌아오는 자, 회개하는 자) / דירשׁ(샤리드; 남은 자) -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가 돌아온다. 이 두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모든 신학자들의 공통되는 주장이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하시면 이는 철저한 심판인데 그와 동시에 돌아오라고 요구하신다. Psychological impossibility(심리적 불가능, 정신적 불가능) = 8세기 선지자는 너희는 철저히 멸망하리라고 선포한 반면, 그후 선지자들이 돌아오라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로서의 미래는 심판으로 확정 선언하면서 그러나 그들 가운데 ‘남은 자’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결코 상호모순한 것이 아니다.
2장
1-4절이 그대로 미가(같은 8세기 선지자이다)서에서 반복된다. 이것은 이사야서 전체 내용의 서론이요 요약이다.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계속 반역한 이스라엘은 징계를 받는다. 이 일은 인간의 철저한 부정과 오직 하나님께 모든 가능성을 두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이것이 우리 심령 속에서 철저히 고백되어야 한다.
원래 범죄 - 하나님 같이 되어보리라는 충동 /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게 하는 것이 마귀이다. 나의 능력, 목표에 대한 부정이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미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공평과 의(이스라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귀속이 되리라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 = 우상숭배하는 자들 = 가짜 하나님을 택하고 참 하나님을 버리는 자 = 그들은 그 우상들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시온을 구원하실 때 그들이 섬기던 신이 거짓된 우상임이 밝혀질 것이다. 하나님의 미래 즉,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여호와를 버린 자를 멸망시킨다는 것이 종말론에 투사된다. 모든 산들 위에 굳건히 설 것이요,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시온, 즉 하나님의 교회)이 우상의 산(산당, 우상 섬기는 곳)들 보다 높아지겠다, 높이 들리겠다. 이는 교회가 높아진다는 뜻이다.
그러면 교회가 높아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교회의 높아짐의 참 본질이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이다. 불신자들로부터 “참으로 너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 교회는 인간들이 모여 장난치는 장소에 불과할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역한 것과 징계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반역과,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로 남은 자 두심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외면당한 그들이 열심히 여호와를 찾고, 외양으로는 어느 때보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컸으나 하나님 앞에 그들의 시도가 역겹고 가증스러운 것이었다는 엄청난 불행의 원인에 대해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나?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식과 실생활간의 괴리, 실생활에 옮겨지지 않는 예배는 무의미하다. 의식과 예배의 관계는 성경에서 여러 군데 다룬다. 롬 12:1; 신 16장 등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그 땅의 소산을 가져오라 원래 유랑인이었으나 그 축복의 표시인 땅의 열매를 드리라.
가장 중요한 문제 제기는? 의식을 통한 하나님 만남의 실패, 예배의식과 삶의 괴리가 원인이다. 그러면 이 간격을 제거하는 일에 있어서 위험한 것은 율법주의이다. 바리새인들의 경건은 과소평가할 것은 아니다. 바울도 율법의 의로 말하자면 책망받을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율법주의가 왜 나쁜가? 의식과 삶의 간격이 없어지면 된다. 의식과 관계된 것이 우리 삶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영적 영역에서의 무엇없이는 결코 삶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데 있다.
막 7장에서 왜 손을 씻지 않고 먹습니까? 왜 유전을 지키지 않습니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하신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떠났다” 즉, 마음이 없는 외부적 선행, 경건을 위선이라고 하고 외적 규례만을 강조, 발전시켜온 장로들의 유전이나 그것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법을 저버린다고 하셨다. 이는 영적 무지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법의 참 뜻을 오해하여 저버리는 그 한 예로서 “고르반”을 들고 있다.
이것이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밖에서 먹는). 우리를 참으로 더럽게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을 깨끗케 하는 것을 부정, 정결은 심령에 있다(마음과 영적인 차원). 인간의 존재방식이란 내부에서 시작되어 외견에 드러난다. 그러므로 안을 고쳐서 밖이 깨끗케 된다. 우리 마음(영적 내면)이 부정, 정결을 결정한다. 참된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것은 모두 악하다. 깨끗한 마음에서 시작되지 않은 선행도 더럽다는 것이다. 겉으로 아무리 꾸며도 마음이 깨끗지 않으면 그것은 더러운 것이다. 위선은 있을 수 있으나 위악은 있을 수 없다.
의식과 삶의 괴리 문제에 있어서도 이런 내면적, 영적 문제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의식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이야 말로 어떤 면을 직접적으로 가르치는가? 영적 차원 즉, 의식을 통해 참으로 영적 은혜에 참여해야 한다.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진정한 경건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사야 1장만 보아도 선지자가 어떤 재료를 선택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가? 왜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를 말하며 예배의식적 상황을 예로 들고 있는가? 이는 그들의 영적 상태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절망, 소망이 전혀 없다. 여기에 하나님의 미래의 2가지 면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구원과 심판이다. 즉, 시온이 의와 공평(하나님의 의와 공평)으로 귀정, 구속되리라. 이는 이스라엘의 모든 가능성을 부정했기 때문에 남은 소망은 하나님의 의와 공평(“결정하다”는 뜻으로 재판정을 염두에 둔 단어이다) 뿐이다.
2절 하나님의 산이 영화롭게 될 날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모든 산(우상 신전들이 있는 산)들 위에 높아지리라. 이 말은 무엇을 염두에 둔 말인가? 앞으로 행하실 하나님의 심판의 핵심은 인간들이 의지한 우상들이 수치를 당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으로 드러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호와의 전이 있는 산 즉, 교회의 높아짐 그것은 곧 하나님의 높아지심이요, 진정한 하나님되심이 계시,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있는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 영광의 참 본질이다. 여기 시온은 여호와의 통치가 이루어질 곳이요, 앞으로 메시야의 통치기 이루어지는 영역을 말한다.
구약에 있어서 “날들의 끝”(末日)은 상당히 포괄적 의미를 가진다. 열방들이 모여든다. 무엇을 보고 모이는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이는 교인들에게 무엇을 제시해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내게 없으면 나누어 줄 것도 없다. 열방이 나아온 목적을 3절 하반절에서 설명하기를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길로 행함을 배우러 나아온다. 시온 = 예루살렘(하나님의 통치 보좌가 있는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통치가 시온으로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이 온 우주의 통치자시며 생사화복이 그에게 달려 있는 그런 분이심을 계시하신다.
4절 그가 열방을 판단하신다. 즉, 그의 심판이 보편적(세계로 확대된 것을 의미)이라는 말이다. 하반절에서는 통치의 결과가 나타난다. 그들의 칼, 창(이는 살륙의 도구)을 보습과 낫으로 바꾸어 다시는 전쟁 훈련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바로 평화의 통치요, 평화의 나라일 것이라는 의미이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다시는 살륙이 없는 참된 평화의 통치일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나라에 대적하는 세력을 멸하시지만 그 나라의 본질은 평화이다(םולשׁ; 샬롬).
5절 “야곱 집아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이는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통치로서 그 통치는 안식이요(이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전제된), 온전함이 된다. 그러므로 ‘빛’은 하나님의 통치 자체요, 하나의 힘(power)이요, 생명이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자고 권고하는데, 이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내다볼 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주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시며’에서 빛은 주의 얼굴을 바라볼 때 비쳐지는 실제적인 무엇이다.
6절 “주께서 야곱 족속을 버리심은...” 이는 1-5절 내용(앞으로 나타날 통치 바라보는 구원)과 상반된다. ךמע התשׁטנ יכ(키 나타슈타 암므카) 여기서 יכ라는 접속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여러가지로 볼 수 있다. 즉, for, but, although, indeed 등 다양한 뜻 중에서 but이 가장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6절 이하는 심판의 내용이다. 이 급격한 전환은 1:27-28에서 예견할 수 있었다. 앞으로 행하실 하나님의 구원의 양면을 보면 알 수 있다. 미래에 대한 소망에서 하나님께 외면당한 비참한 현재 상태로 되돌아온 것.
וקיפשׂי םירכנ ידליבו םיתשׁלפכ םיננעו םדקמ ואלמ יכ(키 말우 미퀘렘 웨온님 카플리슈팀 우브얄르베 나크림 야스피크)
밑줄은 버림받은 이유를 말한다. 여기 םדקמ는 옛날부터 동방과 전쟁이 가득했다는 의미이고 םיננעו는 신접한 자를, םיתשׁלפכ는 블레셋으로서 어미가 붙어 블레셋의 아들 처럼이요, םירכנ ידליבו는 동방에 사는 족속들로 인하여 혼혈아가 탄생하였고, 이로 인하여 영적변질이 유도됨을 그리고 וקיפשׂי는 많았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볼 때,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했는가?를 볼 수 있다. 블레셋 처럼 신접한 자들이 가득했고, 이방인의 소생(국제결혼의 소산)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결국 외국인들이 많았다는 의미는 신접한 자들이 많아졌다는 말이다. 즉, 이스라엘 내에 이질적 요소들이 존재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구별됨”을 상실하게 되었다. 혈통적 순수성을 상실함으로 변질되어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질은 영적 변질까지도 암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혈통적 변질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변질되어가는 모습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오늘날 세속화된 교회의 모습과 유사하다. 물탄 술 같이, 은이 변질된 것 처럼 이것이 속화된 이스라엘의 구체적 모습이었다.
7절을 보게되면 그들의 땅에 은, 금이 가득했고, 말도 가득했고, 병거 수가 한이 없었다는 표현은 은, 금은 경제력의 상징이요, 말과 병거는 군사력의 상징으로서 돈을 의지하고 인간의 폭력적 수단을 의지했다는 말이다.
8절 그들의 땅은 우상들로 가득했고, 그 본질은 그들의 손으로 만든 것에 그들이 절하는도다. 우상은 Man-made Religion(인간이 만들어낸 종교, 신앙)로서 인간이 의지하면서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것의 특징이 있다. 곧 우상숭배의 근거는 인간숭배이다. 모든 우상숭배의 특징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자기 행위로 하나님의 축복을 살려는 것(이것이 율법주의), 자기 힘으로 안되는 것을 깨달은 자만이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린다. 자기 모습을 자기가 알 때 꿇어 엎드릴 수 밖에 없다.
9절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שׁיא־לפשׁיו םדא חשׁיו(와이솨 아담 와이슈팔-이스) 여기 םד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라는 의미요, לפשׁיו는 인간이 낮아졌고 사람이 낮아졌다는 의미이다. 9절은 8절 초반에서 연결되는 ו접속법(와우접속법)으로 여기서는 미완료로 되어있다. 하나님 대신 돈을 의지, 군사력, 특별히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는 오히려 피조물 앞에 절하는 하나님 형상의 고귀함을 저버린 비참한 저질화된 인간으로 낮아졌다. 즉, 원래 만물을 다스릴 자로 지으셨는데 그것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욕되게 했으니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말라” 돌이나 흙 속에 뒹굴라(자신의 더러운 모습 숨기기 위해 땅 속에 숨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에게는 구원을 베푸시나, 어떤 자에게는 심판을 베푸신다. 그러나 궁극적 결과는 같다. 오직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 되심이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홀로 높아지시리라. 인간이 스스로 의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들의 정체가 드러남으로 인간이 자랑하던 것들이 모두 다 낮아지고 하나님 홀로 높아지시리라. 인간에게는 무엇을 기대하지 말아라. 그 호흡이 코에 달려 있는 만큼. “수(數)에 칠 가치가 없느니라”(무엇으로 쳐줄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문이다). 3장부터는 그것이 이스라엘의 현상황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가 나타난다.
심판과 구원의 교차구조가 큰 맥락에서 독특한 의미있겠으나 1장에서 보았듯이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그 후에 오는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반영한다. 이 동일한 메시지의 반복은 앞으로 행하실 심판과 구원의 내용이 더 풍부하게 제시되어 가고 있다.
1장은 이사야 전체의 근본적 내용의 틀을 제시한다(이스라엘의 과거는 반역이요, 현재는 심판을 받아야 할 상태이다). 그 미래는 그 자신으로 볼 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고 다만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볼 뿐이다. 심판이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구원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멸절로 끝나지 않고, 그 심판은 죄된 이스라엘을 정화시켜 구원의 반열에 참여케 하심이다.
2장은 포괄적으로 종말의 시간까지의 풍부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신약의 모든 메시지를 cover하는 구원 메시지가 주어진다. 낙관일색의 미래는 아니고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극적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한다.
3장
3장은 당시의 구체적 상황으로 옮아간다. 포괄적, 궁극적 심판이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미래 시행원칙들이 당시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הנעשׁמו ןעשׁמ(마슈엔 우마슈에나) 즉, 같은 단어를 남성, 여성, 단수, 복수를 다양하게 함께 씀으로 모든 종류의 의지물들을 제거하실 것을 의미한다. 빵, 물(육적 생존의 기본 조건), 용사(군사력, 대적으로부터의 보호), 재판관(한 공동체 내에서 질서확립 직임), 선지자, 점쟁이(םסק; 코셈; 신접자), 장로들(ןקז; 자퀜; 원숙함, 오랜 경험의 축적을 통해 어린 사람을 지도할 수 있는 지혜자들), 지혜자들을 앞으로 제하실 것이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그의 뜻을 알리리라 하심으로써 의로운 모습을 잃지 않도록, 회복하도록 세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에 םישׁרח םכח(하캄 하라쉼) 즉, 매직 Art(사술), 귀신과 속살거리는 것, 사술에 능한 자들도 장로들과 함께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의 신앙이 변질되어 이들이 세움을 입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רענ(나아르; 미숙하고 제멋대로 날뛰는 어린 아이들) 즉, 이 미숙자들이 제멋대로 날뛰다가 사회질서를 붕괴시키는데 그 이웃과 더불어 사나와진다. 즉, 싸우려는 태도를 갖게된다. 젊은 아이가 노인에게 큰 소리지르면서 권위를 무시하고 휘둘러대는 것 바로 하극상이 일어날 것이다. 천한 신분의 사람이 존귀한 신분의 사람에게 대든다. 즉, 고상한 것이 천한 것에 의해 축출당하고 짓밟힌다. 이 말은 곧 그 사회 가치관의 전도(뒤바뀜)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런 형편에서 모두 책임을 회피한다. 그리고 네가 이 난국을 수습해 보라. הלמשׂ, םחל(시믈라, 레헴 = 겉옷과 빵) 이는 경제적 여유, 지위를 뜻한다고 생각하기도 하나 사실 겉옷은 그 사람의 신분과 지위를 상징한다. 엘리야의 승천시 겉옷(선지자의 직분)을 떨어뜨린다. 그러므로 이 말은 위정의 책임을 맡을 만한 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무질서한 상태에서 난국 수습해달라고 하나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상처를 싸매는 자가 되지 아니하리라” = 나는 그럴 능력도 책임도 없다.
이와같은 심판의 이유에 대해서 8-9절에서 그들의 말과 혀가 하나님을 거스려 촉범케 했고, 표정이 그들에 대해 증거하며, 죄가 소돔처럼 말하고 숨겨도 숨겨도 숨길 수 없는 상태, 이스라엘의 죄악의 상태가 그토록 심각하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상태를 11절에서 말한다. 어린 아이가 백성을 학대하고 여인들이 그 아이들을 관할할 것이다. 이스라엘 지도층의 난맥상(무자격자들의 천행)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들이 내 백성이 행해야 할 길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이와같은 이스라엘의 지도층의 잘못을 심판하시려고 재판하실 것이다.
14-15절 이것은 폭력이다. 교묘하게 말로하는 폭력, 남의 칼로 폭력을 쓰기도 하고, 남을 억울하게 하는 그 모든 것이 폭력이다. “지도층” - 그들이 가진 권력을 연상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신 것은 그 힘과 능력으로 가난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돕게 하려 하심이나 오히려 짓밟고 힘을 오용하였다.
재판관은 법을 이용한 폭력,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폭력, 지식인은 지식으로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은사, 힘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돕고 일으켜 세우기 위함 즉, 사랑을 베풀기 위한 수단으로 이러한 것들이 주어졌으나 자기를 위해 남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사랑을 위해 쓰지 않고 자기 위해 쓰는 것이 곧 권력남용이다.
남자다움을 연상하면 힘이다. 이 힘은 너그럽고, 인내하고, 포용하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 힘을 타인에게 유익을 주고 세우는 목적에 사용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오용하면 폭력으로 남을 착취하게 된다. 남자의 사나움은 힘이 아니다. 반대로 여성의 연상은 미(美)이다.
16절 이하 여인들의 죄를 논하면서 그 핵심을 아름다움에 두고 있다. 남자들이 착취한 것을 집에 가져오면 여자들은 그것으로 자신의 외모의 아름다움으로 치장한다. 그러니 진정한 아름다움이 그곳에서 나올 수 없다. 부드러움과 겸손과 단아함이 여자의 무기요, 이것은 내적인 아름다움이요, 성경이 말하는 여자의 진정한 미이다. 아기죽거리고, 늘인 목과 눈은 타락한 정욕을 자극하는 미로서 진정한 미가 아니다. 바로 선정적인 태도이다. 이들은 속사람을 아름답게 하는 대신 남을 유혹하고, 충동하게 한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선정과 유혹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머리(여자의 머리는 치장의 핵심이다)에 부스럼이 나게 하고, 대머리(수치를 드러냄)가 되게하겠다고 하신다. 이 말은 바로 그들의 치장을 수치스럽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4장
1절은 전쟁이 나면 남자가 귀해질 것이므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2-6절 ‘구원의 예언’이다. 이스라엘의 임박한 미래는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그것은 정화를 의미하며 다시 구원으로 이어질 것을 암시한다. הוהי חמצ(체마 아도나이; 여호와의 싹) 이는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은 앞으로 메시야가 “아름다움과 영광”이 되리라는 말인데, 이 영광은 이스라엘 남은 자들의 영광과 자랑거리가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타락하고 부패한 아름다움은 제하시고 그 후에 여호와의 싹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이 영광은 어떠한 것인가? ץראה ירפ(페리 하아레츠; 그 땅에 와서) “메시야가 그 땅에 와서 이루실 일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영광이 될 것이다. 예루살렘에 남은 자가, 생명 얻기로 녹명된 모든 자들은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때 시온이 거룩하다고 불릴 것이다. 메시야로 말미암은 치장과 아름다움은 ‘성결과 거룩’이다. 즉, 영적 아름다움이다.
어떤 의미에서 메시야가 영광이 되시는가? 진정한 ‘성결과 의’를 주시므로. 4절에 보면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폭력과 죄)을 씻으심으로 성결과 의를 주신다. 여기서 우리의 성결(여호와께서 주시는 내적 미)은 사죄에 근거한다. 심판, 공의, 불사름의 영으로 이스라엘의 더러움과 죄를 씻기실 것이다(심판을 통해). “그 죄값이 다 치루어졌도다” 육신의 고난은 죄값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요나서 - 이스라엘의 죽음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그 완성이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이 이스라엘의 죄값을 완전히 치루었는가? 전부는 아니다.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은 더 궁극적인 심판과 죽음을 상징한다. 완전히 죄값이 치루어진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임박한 심판은 앞으로 올 궁극적 심판의 표현이다.
5절 여호와께서 시온의 모든 집회 위에 구름과 연기, 화염과 빛이 될 것이다. 이때 구름과 연기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말하며, 이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이 거룩을 전제로 해서만이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임재하실 것이다. 이 임재하심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자랑과 영광이 될 것이다.
5장
포도원 노래(그의 포도원을 위한 사랑의 노래)이다. “내 사랑하는 자(하나님)를 위하여 노래하되...” 하나님 편에서는 농부로서 하실 일을 다 하셨다. 내가 농부로서 포도원에 하지 않은 일이 무엇이냐? 이 말은 1장을 상기시킨다. 바로 1장 전반부의 요약이다. “열매 맺지 않은 과일”을 불에 던지리라. 이어 비를 내리지 않겠다는 것은, 식물 성장의 ‘비’는 싹틈을 가능케 하는 생명을 상징한다. 바로 영적인 사망 속에 방치해 두시겠다는 표현이다.
הקעצ הקדצ חפשׁמ טפשׁמ(미슈파트 미스파 체다콰 체아콰)
공의를 구했으나 옳은 길에서 벗어났고, 의를 구했으나 울부짖음 뿐이다. 너희가 그 토지의 소유로 잘먹고 잘살겠다하나 불의한 수단으로 모아봐라, 결국 너희 많은 집들이 황폐하게 되리라. 8절은 이스라엘의 극단적 이기심을 나타내고, 12절은 세상 연락에 깊이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 10에바 = 1호멜, 1바트는 40되. 10절의 ‘열흘갈이’는 1겨리(2마리)의 소가 하루 동안 갈 수 있는 넓이가 바로 10에바이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행하시는 일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세상 쾌락에 빠져있다. 따라서 내 백성은 영적 무지로 가득차 있다. 그로 인하여 너희의 부요가 하루 아침에 무너질 것이다.
18절 ‘헛된 줄 = 자로 죄악을 끄는 자’라는 말은 죄를 적극적으로 짓는 사람들로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태도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고의적으로 범하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 해볼려면 해 보십시요”라고 하는 양심에 화인 맞은 자의 모습이다. 일말의 양심적 가책없이 행하는 일들에 대하여 강하고 잔인한 큰 민족을 불러 일으켜, 이스라엘을 철저히 심판하실 것이라는 선언을 하신다.
6장
1-12장에서 6-8장은 문체 style이 다르다(narrative section). 6장이 차지하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6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이사야가 겪은 경험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즉, 첫소명으로 보느냐, 이미 선지자로서 활동하던 중에 겪은 경험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웃시야가 살아있는 동안에 어느 정도 활동을 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느 정도 연대적인 틀에 비추어 볼 때, 6장보다는 더 앞에 받은 경험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웃시야의 죽던 해라고 한다면 웃시야와 요담 섭정기간에 받았던 계시를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보면 곤란한 점이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이 전혀 자격없음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죄를 깨끗케 하시고, 사명을 주신 이 일이 첫소명 때인가? 활동 중이었는가? 2차적인 경험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예레미야서 등 선지서의 구조를 들어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해고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6장에서의 사건을 이사야의 첫소명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내용상으로 볼 때). 그러나 이사야의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 중간에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통상적으로는 맨 앞에 위치해야 한다). 웃시야 시대의 선지자 이사야의 활동은 1년 미만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웃시야의 죽던 해는 죽은 그 해를 말한다.
이사야가 부르심받은 해가 웃시야의 죽던 해라 함은 암시적인 표현이다. 웃시야는 솔로몬 이후 가장 위대했던 왕이었다. 정치적 번영의 시대가 이때였다. 솔로몬 때와 버금가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던 때이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앗시리아의 팽창과 맞먹던 나라가 아람, 다메섹의 벤하닷이었다. 벤하닷 이후 이스라엘이 세력을 떨치게 되는데, 이들 세력이 그때 약화되기 때문이다. 당시 북왕국은 여로보암 2세, 남왕국은 웃시야였다. 북 이스라엘이 먼저 쇠퇴하기 시작하고, 유다에 있어 웃시야는 정치적 강성과 번영의 시대였다. 그러나 웃시야가 죽던 해라는 것은 번영의 시기의 종말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전성기의 종말과 더불어 이사야가 등장한 것은 그의 사역과 메시지의 성격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이사야가 본 성전은 지상 성전이 아니라 하늘 성전을 말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 만유를 통치하시는 왕의 모습, 온 세계의 왕의 모습으로 보았다. 쇠락에 들어선 이스라엘의 왕은 죽었으나, 하늘 보좌의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위로의 메시지라고도 해석하나 실제로는 위로의 뜻보다는 심판의 의미를 시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때 스랍이 좌정해 계신 하나님 위를 날고 있었는데, 이와 똑같은 장면이 계시록 4장에 나타난다(보좌에 둘러선 4생물과 24장로들). 스랍과 4생물의 관계는 무엇인가?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하는 그 소리의 거대함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지극하심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거룩 앞에서 거룩을 직면한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םיתפשׂ(세파타임; ותפושׂמ;메수파토)는 תפשׂ의 Nip.(사파트의 니팔형) 이 일로 인하여 ‘침묵시켜져 버렸다. 당해버렸다. 죽을 자 같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요한도 죽은 자 같이 되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입술이 부정한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 앞에 직면하여 자신의 더러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자기의 죄된 모습 때문에 “나는 죽은 자다”고 했는데 왜 자신의 죄를 입술의 부정으로 표현했을까?
선지자로서의 사역이 말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해왔다. 렘 1:9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다(그 입에 손을 대시며). 그러나 이 해석이 조금 곤란(무리)하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거하면서...’에서 그 죄는 내 죄이기도 하나 백성의 죄이기도 하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 이는 영적 더러움이다. 말은 영적 내면 상태와 가장 밀접한 상태요, 입술은 말과 연결된다. 따라서 영적 내면의 부정함을 입술의 부정으로 표현했다. 입술의 부정함은 그 사람의 전인격적 부정을 뜻한다. 29장의 내용과 관련해서 본다면 ‘입술로는 나를 부르나 마음으로는 내게서 멀도다할 때, 영적 내면과 일치해야 할 기관이 서로 다르다.
이사야의 환상의 의미
․왕상 22:19-20 미가야가 본 환상 - 하늘의 모든 영적 군대들이 좌우편에 서 있었다. 스랍들이 모셔섰다. 천사들이 찬사하는 소리, 누가 아합을 꾀어 엎드러지게 할꼬.
․사 6장 이사야가 본 환상 -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이 두 환상은 장면의 유사성이 있다. 이로 볼 때 두 환상은 동질의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욥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시고 사단이 와서 충동하는 사건이 가리키는 바는 무엇인가? 바로 지상의 역사는 하늘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선지자들은 어떤 특권을 얻은 자인가? 천상에서의 하나님의 결정(렘 23:18; 암 3장)을 환상 중에 계시받고 이것을 하나님이 명하신 자에게 전달하도록 파송받은 자들이다. 누가 하나님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 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였느냐?
6장의 전반부는 아사야가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뵙고 선지자의 사명 받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 자신의 계획을 인생에게 알리심이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역사 결정이다. 6장 이전에 이어 이 환상을 기록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정을 이사야가 친히 환상 중에 보고 전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계속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말아라. 계속 보라 눈을 풀칠하라. 명령으로서 imp형. 이 백성의 마음을 기름지게 = 둔하게 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마음으로 깨닫고 혹시 나음을 얻을까 하노라. 결과적으로 그렇다. 이는 예수님의 천국비유와 동일하다. 그들이 듣고 보아도 깨닫지를 못한다.
πωρω = hardening, Verstockung(페아스톡쿵) 돌처럼 굳게 만들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왜? 나음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구원 못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 선언한 하나님 심판의 예언의 또 다른 양상이다. 인간의 배역과 하나님의 심판 그것과 다른 새 국면이다. 2가지 예상이 가능하다. 유기적인 의미에서의 hardening, 심판의 한 형태로서의 hardening, 계속 돌아오지 않을 때 계속 내버려 두어(영적 무지 가운데) 회개의 길을 막으시겠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후자의 쪽이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심판은 인간의 책임을 전제한다).
영적 무지의 상태를 주여 언제까지니이까? 언제까지 그 완악한 상태로 버려두실 것입니까? “성읍이 황폐할 때까지” 그 목적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철저히 심판 받도록 하겠다. 거룩한 씨가 그 땅의 그루터기이다. 이는 남은 자를 전제로한 심판이다. 여기서 ‘거룩한 씨’는 누구인가? 남은 자인가? 아니면 메시야인가? 이 거룩한 씨가 싹터서 새 생명으로 자라나 열매 맺게 될 것이다. 이 유기는 정하신 기간 동안 영적 무지 가운데 버려두셔서 철저한 심판을 받게 한 후 새 소망 주실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남은 자 보다 그 핵심은 메시야이다. 이스라엘의 배역과 하나님의 심판과 그 다음에 오는 미래의 구원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한다.
7장
임마누엘의 예언이 나오는 곳, 가장 어렵고 논란이 많은 곳이다(7-8장). 7:14의 לא ונמע과 이것을 어디까지 확대시키느냐의 문제가 있다. 8:8, 8:10의 לא ונמע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앗시리아가 쳐들어오면 Palestine의 소국가들이 동맹하여 대항하려 했다.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이 반앗시리아 연합 동맹 맺으려 했으나 앗시리아의 포로로 사로잡히게 된다. 아하스는 반앗수르 동맹에 가담하기 싫어했다. 그래서 먼저 유다 쳐서 자기들에 동조하는 왕을 세우려하는 것이 역사적 배경(열왕기 참조)이다. 이에 아하스가 앗시리아 왕에게 도움을 청하자 와서 북 이스라엘, 아람 다메섹을 쳐 복종케 한다. 모든 나라를 앗시리아에 편입시키고 북 이스라엘은 조그만 영토에 붙어살다가 망해버린다.
6장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통해 새로운 소명을 받게 된다. 심판 예언 다음에 왜 또 다른 구원을 약속하시는가? 6장에서 암시되기를 심판 자체에 대해서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들의 마음을 영적 무지 가운데 잠시 버려두는 것,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완악케 하사 회개케 하는 것을 막으심, 이것이 가장 무서운 심판일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철저히 심판하심이요, 나무가 둥치째 짤려버린 것 같은 상태까지이나, 남은 자를 남겨 두시는 하나님의 긍휼 = 그러나 거룩한 씨가 남아 있도록(새 생명의 가능성) 하시겠다. 완악한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이 남겨두시지 않았더라면 소돔과 고모라 같았으리라(긍휼의 여지). 미래의 역사가 완전한 절망이 아님을 암시한다.
7장에서는 앗시리아에 대해 북 이스라엘과 아람이 주동이 되어 반 앗시리아 세력을 규합하는데 이에 대해 유다가 동조하지 않자, 이스라엘 왕 베가가 아람 왕 르신과 더불어 유다를 쳐들어 온다. 아카바 항구를 점령한 북 이스라엘 베가가 수만의 포로를 잡아가나 선지자의 책망 때문에 돌려보낸다. 이 사건을 당한 유다의 자세는 백성과 왕의 마음이 나무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요동했다. 상당한 동요가 있었다. 이때 이사야가 그 아들 스얄야숩(= 오직 남은 자 만이 돌아오리라)을 데리고 아하스를 만나러 간다. 이 스알야숩은 역사 계획에 대한 하나님께서 세우신 표적이었다. ‘에브라임은 65년 내에 멸망하리라’ 이때가 B.C. 735년 쯤이었고 721년 혹은 722년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다.
이사야를 통해 아하스에게 말씀하신 것은 구원의 약속이다(일방적인 하나님의 선언). “너는 스스로 조용하라 무서워 말라 네 마음이 왕들 앞에서 요동치 말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몇 년 후 앗수르 원군에 의하여 대적이 망한다. 하나님은 구원을 선언하시되 단 한 가지 조건은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라는 것이다.
9절 ונמאת אל יכ ונימאת אל םא(임 로 타아미누 키 로 테아메누) 이 말은 믿지 않으면 정녕 서지 못할 것이라는 이중적인 뜻을 가진다. 그리고 ונימאת와 ונמאת는 조건으로서 ןמא(아민) 즉, 믿는 것이 선행되는 것을 뜻한다.
10절 하나님께서 이어 말씀하시기를 “네가 여호와로부터 표적을 구하라” 하나님이 선언한 구원이 확실한 것을 보증하기 위한 것이었고(이스라엘로 믿게 하려하심이다), 표징을 통해 확실한 믿음을 가지라고 하신다.
12절 그러나 아하스의 대답은 여호와를 시험치 않겠다고 한다. 이미 아하스는 앗시리아 원병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먼저였었다. 그는 하나님보다 앗시리아의 군대를 더 신뢰하였다.
13절 사람을 곤비케 한 것이 외적 침입으로 국난을 겪은 것인지 명확히 모르겠다. 그 당시 아하스는 다윗 왕조를 대변,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14절 마 1장에서 예수의 탄생과 관련하여 마태복음 기자는 동정녀를 통한 예수의 탄생을 이 구절을 인용하였다.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궁극적 사실은 움직일 수 없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의지는 이루어진다. 아하스의 불순종과 그 결과 이루어진 심판의 의미는 무엇인가? 6장에서는 이스라엘을 영적 무지 가운데 두시고 철저히 심판하시나, 하나님이 거룩한 자를 남기신다. 이것인 실증된 예이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유다의 멸망으로 놔두지 않고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거룩한 씨(6장)가 새싹의 움틈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한 번 선언하신 구원의 뜻은 변치 않고 이루신다. 아하스의 불순종으로 이스라엘에게 선언된 구원은, 하나님의 심판은 먼 미래로 밀려났다. 이렇게 보면 7장과 8장의 구분되는 내용은 지금까지 상호 연관성 없이 된 역사적 상황과 결부된다. 여기에 심판과 구원의 의미가 다양한 시각에서 조명된다.
이것을 넓은 맥락에서 살펴보면, 이사야의 독특한 면은 이스라엘의 심판은 당시 역사적 상황과 밀접하다. 구원은 당시 상황과 유리된 면이 있다. 1장과 2장, 4장에서도 앞에 이스라엘의 타락한 여자를 말해 놓고 הוהי חלצ(첼라 아도나이)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의 내용이 6장이다. שׁדק ערז(제라 코데쉬) 마지막 거룩한 씨라는 말로 언급한다.
하나님이 선언하신 표적이 “임마누엘” 이스라엘의 임박한 심판의 표적이면서 앞으로 올 구원의 표적, 임마누엘 표적이 심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이라 한다. 9장에 가면 이 아이를 신적으로 말한다. 임박한 역사적 상황과 관련되면서도 거리가 있는 상태이다. 이같은 예언 성격 때문에 저자가 여러 시대 사람이라 한다. 이같은 상황이 다른 선지서에도 나온다.
마가복음에 보면 사 2장의 시온성에 대한 것과 같이 말한다. 미가는 이사야와 같은 시대이다. 이사야와 다른 것은 웃시야가 빠진다는 것인데, 동일시대 하나님의 계시의 사역자로 말한 사람에게 유사성이 발견되는 것은 당연하다. 믹 5장, 4:13 앗시리아의 침입을 에언한다. 5장의 예언이 어떤 맥락에서 언급되었는가? 다윗의 존재 계통에서 나오는데 신적 존재이다.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적군에 붙이리라(5:3). הדלי הדלוי תע־דע םנתי(이테넴 아드-에트 욜레다 얄라다) - Assyrian invasion, Assyria defeat liberation 앗시리아의 침입과 멸망 사이에 신적 존재의 출현과 밀접히 관련시킨 깊은 의미이다.
당시 역사적 상황을 초월하면서 밀접하게 연관된 의미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앗시리아의 멸망 - 해방에서 선용하신 사람은 궁극적 구원자가 아니고(히스기야 등), 이들은 신적 존재의 예표이다. 이런 예언 구조는 당시 역사에 우리 시선을 머무르게 하고 앞으로 올 것을 보게 한다. 먼 미래 사건 인물과 관련됨을 의식하고 선지자들은 예언을 연구했다 → 벧전 1:10-11. 이 예언의 궁극적 성취는 앞으로 올 한 인물에 대해서 선지자들도 그 시대를 초월하여 미래를 가르치는 것임을 인식하고 예언을 연구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역사가 요지부동한지 아하스 사건을 통해 알려졌다. 이스라엘의 미래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준다. 앗수르가 유다에 침입하나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것은 히스기야를 통해 이룬다. 선지자 중심으로 한 그의 제자들인 남은 자들은 어찌 살 것인가를 말한다.
11절 이 백성이 행한 길로 가지말아라 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말라 이것은 당시 가치관의 혼돈, 정치적 무질서 등, 당시 진리의 척도의 혼란을 말한다.
14절 이스라엘의 두 집(유다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거치는 돌이 된다.
16절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인봉하라. 이 말은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와 모순된다. 16절의 말은 이사야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증거를 인봉하라는 뜻은 온 나라가 망했으나 주의 통치가 남는 자 중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또 달리 타락한 백성 편에서 보면 교회가 타락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소수 무리에 국한된다고 볼 수 있다. 15절에 보면, 악을 거부하고 선을 택한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규범의 단순형태이다. 선, 악을 안다, 구별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행동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서양에서는 올바른 행동규범을 분별하는 나이(age of discontinue)를 13-14세로 잡는다.
여기서 버터와 꿀의 의미는 무엇인가? 7:2에 보면 “그날에” 앗시리아가 침범하여 황폐케 되는 날에 암소 1마리, 양 2마리에서 나오는 우유가 너무 많아 버터를 만들지경이라면 말이 안된다. 즉,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다 죽고 없을 것이다. 버터를 먹는다는 것은 평화로운 암시보다 심판으로 말미암은 황폐현상이다. 꿀은 자연식품이다. 이스라엘에 전쟁으로 인한 황폐상태가 있을 것을 말한다. 버터와 꿀은 앞으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황폐한 상황을 말한다. 이 아이가 커서 버터와 꿀을 먹을 때는 심판의 참담한 환경에 처할 것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선악을 분별할 나이가 이르기 전에 아람 왕과 북 이스라엘 왕의 땅이 완전히 망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제시하심을 받고도 불순종한 유다에게도 앗수르 왕을 보내어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13년 이내에 아람과 북 이스라엘, 유다까지 쓸어버리겠다는 것이다. 이 아이가 14세 쯤 되면 전쟁의 참화를 느낄 것이다. 여기서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니”라고 한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임마누엘이 예수님일 수 없다(?). 아직까지 깨끗하게 해결못했다. Calvin은 15절과 16절을 분리하여 다르다고 한다. 15절 아이와 16절의 아이는 다르다. 이것은 옹색한 해석이다. 15절과 16절은 יכ(키; 왜냐하면)로 연결된다. המלעה(하알마)는 꼭 처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가 크게 패한다. המלע(알마)는 왕궁의 처녀아내로 보고, 아이를 히스기야로 예언한다. 히스기야는 이미 태어난지 오래 되어 9세 정도로 추측한다. 또 אמלעה는 그 당시 처녀가 낳은 아이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님과 관련성이 희박해지고 특히 동정녀와 관계가 없어진다. 70인 역에서 המלע를 신혼의 아내로 하지 않고 παρθενος(파르테노스; virgin; 처녀)이라 한다. 그러나 אמלע는 앞으로 태어날 신비한 인물을 반증하는 것이다. γενανις(게나니스; 젊은 여인)이라고 후대 역본에서 바꾼 것은 초대교회에서 헬라어로 사용, 당시 복음증거시 παρθενος를 가지고 증거하므로 반작용으로 γενανις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당시 신혼 초의 여인들이 낳은 아이들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에 제동거는 것이 70인 역에서 παρθενος라고 번역한 것을 말한다. 당시 אמלע를 통한 아이가 신비한 것임을 알고 번역한 것임을 반증한다. 이 예언을 둘러싼 논의가 복잡하다. 이 문맥을 보아서는 이 아이가 성년이 되기 전에 전쟁의 참화를 겪고, 앗수르, 북 이스라엘, 유다가 망하고 전쟁을 겪을 것을 분명히 말한다. 임마누엘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Immanuel Sign) 위협적 심판의 의미이다. 이 자체의 문맥을 보면 너무 당연하다. 임마누엘 표적은 앞에 한 말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임마누엘 해석시 7:4 전후를 보는데, 8:10 마지막 부분에 임마누엘이 2번 나온다. 즉, 7-8장의 문맥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8장
표적의 의미를 이 아이가 철들기 전에 다메섹과 사마리아로부터 약탈당하게 된다.
6절 앗수르 군대를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이 침입시킴.
8절 목에까지 찰 것이다. 죽음(위험수위)에 임박한 상태, 아이가 성년이 되기 전에 세 나라가 망한다. 8장에서는 엄마, 아빠를 부를 때까지는 즉, 수년 내에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신다. 촉급함이 나타난다. 미묘한 반전이 일어난다. 마헬살랄 = 서둘러 약탈하라. “날개” = 세력, 앗수르의 세력의 펼침이 온 땅에 가득하다. “온 땅”을 “당신의 온 땅에 편만” 당신은 임마누엘, 앗수르가 쳐들어온 그 세력의 편만 속에서 임마누엘을 부르며 당신의 땅에 앗시리아의 참화가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임마누엘을 2인칭으로 언급하며 탄원한다.
9절 10절에서 임마누엘 뜻이 풀어진다. 이방이 유다를 멸망시키려고 쳐들어오나 성공 못한다. 그들의 도모가 서지 못한다. 임마누엘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소망이다. 구원의 소망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17절 배역하므로 하나님이 그 얼굴을 돌리시고, 영적 무지 중에 두시고, 철저한 심판을 겪게 하시는 상황에서도 그 얼굴을 완전히 돌리신 하나님, 그러나 남은 자 중에 하나님의 통치는 이루어지고, 생존하는 자 중에 이사야는 소망을 잃지 않고 얼굴 돌리신 하나님께 간구한다. 이사야와 그의 자녀는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하나님의 징표들이다. 방금 말씀은 미래 앞에 서 있는 믿는 자가 취할 태도이다.
19절 믿지 않은 자의 태도, 이들의 영적 무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망할지도 모르고 귀신에게 가서 묻는다. 사단은 우리 죄를 참소하는 자이다. 계시록의 “아바론” = 파괴자, 사단은 죽이려고 인격을 파괴한다.
20절 영적 무지 중에 살게 된다. 이들은 여호와의 율법과 증거를 바라지 않은 자들이다.
9장
1절 환난의 땅 =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땅, 스불론과 납달리 땅 → 갈릴리 지역(circle ring; 이방과 대적 지역), 아하스가 앗시리아에 원병을 청했을 때 Dor(해변지역) 지역을 따라 내려와서 애굽 지경에 진을 치고 예루살렘 쪽으로 올라온다. 그들은 갈릴리, 길르앗, Dor 지역을 자기 땅으로 편입시킨다. 이 땅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심판 당한 상징의 땅이다. 이 땅에 다니는 백성에게 빛이 비취인다. 예수님의 갈릴리 지역 사역을 이 예언의 말씀에 비추어 말한다. 앞으로 임할 구원은 앗시리아의 침입에 의한 역사적 사건과 연관된다.
5절 전능하신 하나님 = 용사로서의 하나님(그 백성을 대적에게서 구하시는), 태어날 아이는 신적이다.
7절 아하스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밝혀진다. 곧 아람과 이스라엘이 망할 것이요, 그 앗시리아는 유다까지 침입할 터인데 이와같이 남은자 =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미래 앞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나?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말라. 그들이 말하는 반역을 반역으로 여기지 말라 - 진리를 분별하라. 하나님만이 네가 두려워 해야할 대상이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은 성소가 되어주신다. 이스라엘의 두 집(남,북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파멸의 올무가 될 것이다.
16절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제자들에게 율법을 봉함하라. 그러나 나는 여호와를 기다리며 바라보리라. 이것을 이사야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내용이라고 본다. 교회가 타락할 때 계시, 진리의 말씀이 소수의 남은 자에게 국한된다. 온 나라가 망했으나 주의 통치가 남은 자(그 적은 무리) 가운데 상존한다는 뜻이다. 이사야가 바라보는 것은 야곱 집에 낯을 가리우시는 하나님을 나는 기다리며, 배역함으로 하나님께서 얼굴 돌리시고 영적 무지에 가두시고 철저한 심판 겪게 하시는 중에도 이스라엘에게서 완전히 얼굴 돌리신 하나님, 소수의 무리들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의 통치는 이루어지며 상존한다. 그 하나님을 기다리리라. 나(선지자 이사야)와 그의 자녀들은 이와같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교리의 표적, 징표이다. 하나님의 미래 앞에 선 믿는 자가 취할 태도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의 태도는 19절에 신접한 자, 마술사에게 물으라고 하거든 어찌 산 자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 하나님 불신하는 자들의 영적 무지. 사단의 이름; 참소하는 자, 방해자, 파괴자(영혼의), 하나님의 율법으로 돌아가자 말하지 않는다면 날의 밝아옴이 없을 것이다.
21절 굶주리고 짓눌려 분노가 끓어올라 자기 왕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다.
23절 그러나 어두움이 있는 땅에는, 억압받던 땅(환난 = 하나님의 심판)에는 어두움이 있지 아니하리라. 이전에는 스불론과 납달리(아하스가 앗시리아 원병을 청했을 때)를 낮추셨으나 이 심판의 땅과 그 백성에게 큰 빛이 임한다. 탈취물을 나눈는 때, 미디안의 날과 같이 될 것이다. 이와같은 구원의 날이 누구에 의해서 일어나는가? 한 아기에 의해서 전능하신 하나님, 용사로서의 하나님, 모사(Wonderful counceller), 기묘자 즉, 하나님이신 신적인 분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가 다윗의 위에 앉아 공의와 정의로 든든히 할 것이요, 임박한 심판과 심판 뒤에 올 구원이 드러나며, 그 구원은 신적 모습으로 태어날 여호와의 순에 의해 일어날 것이다. 앗시리아의 침입과 패배와 관련하여 극도로 확대되는 신적 메시야, 임마누엘에 의해서이다.
지금까지 진행된 것을 보면 이스라엘의 구체적 상황을 언급하고, 예언이 진행되는 중에 하나님의 심판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구원은 한 존재에 의한 것으로 말한다. 4장 - 여호와의 순, 7장 - 임마누엘, 9장에 오면 신적 존재로 태어날 어떤 분임을 말한다. 9장 나머지와 10-11장은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의 심판이 앗시리아와 더불어 확대된다. 앞으로 태어날 메시야가 어떤 분임을 말한다. 거룩한 씨 - 철저한 심판이 완전한 멸절은 아니고 남은 자 통한 구원의 시사이다.
8장까지 드러난 의미의 대강은 하나님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을 제시하신다. 아하스의 불신앙(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대변)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임마누엘’이라는 표적(상징)으로 제시되는데, 그 표적의 첫번째가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박한)이다.
앗시리아의 위기가 유다에게 닥쳤을 때, 앗시리아에 뒤덮인 땅을 ‘임마누엘이여’ 당신의 땅이 앗시리아에게 짓밟혔습니다고 탄원, 그 탄원자는 누구인가? 36,39절 설화체.
앗시리아 군대가 유다를 침입한 위기 상황에 있어서 아하스는 하나님을 불신앙하고 오히려 앗시리아를 택하나, 히스기야는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 즉,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나타낸다. 이 두 경우에 앗시리아 침공을 유다의 구원으로 끝나리라는 예언을 받지만 즉, 하나님이 똑같이 구원을 제시하셨으나 부자(父子)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익명의 이 탄원자는 히스기야 시대의 신망자들을 가리킴, 왕이 백성을 대표하는 자라면 그 시대의 이스라엘의 탄원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는 자기 스스로를 ‘남은 자’로 이해하고 있다. 남은 자의 2가지 자세 ①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요(그가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실 때까지), ②귀신들에게 물으며,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는데까지 이르며 스스로 자멸하는 자들.
9:7 이하 주께서 말씀을 야곱에게 보내셨고 그 말씀이 이스라엘 가운데 떨어졌다(여기서는 실현되었다). 말씀이 떨어졌다는 말에 대하여 실현되지 않았다고 일반적으로 말하나 여기서는 실현된 것으로 본다. 그 말씀의 이루어진 것을 체험하고서도 마음이 완악(교만)하여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이스라엘에서 흔한 천한 재목)들이 찍혔으나 백향목(이스라엘에게 나지 않은 귀한, 최상의 건축재료)으로 대신 하리라” 천한 건축재료가 무너졌으나 그보다 더 나은 것으로 지으리라 → 이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만홀히 여기는 자세(경험하고서도 깨닫지 못함), 이에 대해 하나님은 아람 왕 르신의 대적들을 일으킬 것이요(동), 블레셋을 일으켜(서) 그들이 이스라엘을 삼키리라고 말씀하신다. ו(와우) 접속법을 분사로 해석하나 운문에서는 불규칙적이어서 구분하기 어렵다.
10절 (ו)와우 계속법을 적용하며, 르신을 일으켰고, 그를 치게 하셨다 - 이는 이방을 통해 심판하신 사건(예; 앗시리아 침공).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이스라엘의 대부분을 앗시리아에 빼앗기고도)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았다는 말인가? 이스라엘을 치는데 르신의 대적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치게 한다는 말은 맞으나, 문제는 아람(당시 정치 상황과 맞지 않다)과 블레셋(주로 유다가 침략을 받는다; 지리적 상황이 부적합)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러나 이렇게 볼 때는 전체적 흐름이 느슨해 진다. 앞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10절의 심판은 앗시리아에 의한 심판이라 하고 와우 접속법을 무시하면 외부적 세력(10,11절에 의한), 내부적 전력 분열로 보면 르신의 대적들과 아람 즉, 정복한 나라의 군사로 다른 나라를 친다(총알받이). 앗시리아 자체보다 앗시리아가 정복한 땅의 친앗시리아적 아람 정권이 앞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2절 그 백성이 그를 치신 자는 하나님이셨다(앗시리아가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머리(정치적 지도층)와 꼬리(선지자들과 거짓 선지자들)를 잘라버리겠다 - 이는 백성을 인도할 자가 오도하는 자가 되었다. 영적 지도층의 오도로 인한 난맥상을 시사한다.
16절 지도층의 제거 - 심판이 먼저 지도층에 임함을 뜻한다. 왜냐하면 백성을 인도할 책임이 있으나 오도함으로, 부실함으로 영적 무지와 배교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지도층의 제거는 백성들에 대한 심판이기도 하다(공동체 질서의 와해, 무정부 상태). 이런 악순환, 상황의 악화는 하나님 심판 형식의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국가도 그렇지만 교회가 이런 악순환에 빠지면, 서로서로 세워야 할 공동체가 무너지면 더욱 무서운 일. 이러한 무질서 속에서 골육상잔(형제가 형제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며, 왼쪽으로 빼앗고 오른쪽으로 만족함이 없는 므낫세가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이 므낫세를)이 발생한다. 하나님 심판의 한 형태인 동시에 또한 범죄함이다.
10장
3절 보응의 날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누구에게 피하겠느냐?) 어찌하여 여호와를 버렸느냐? 이런 부패의 거센 탁류에 휩쓸리지 않고 굳건히 서는 사람이 있어서(남은 자) “하나님 나라의 참된 모습은 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다”를 알고, 체험하고, 스스로 보여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영적 어두움이 심할 때는 복음전파보다 가짜들이 많이 날뛰니까. “참 하나님의 것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는데 실제적으로 능력있는 나라 보여주고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가 전할 것이 무엇인가를 자기 스스로가 분명히 알고, 말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것이 분명치 않으면 암만 신학공부해봐야 불필요하다. 분명히 전할 것을 알고 있는 자가 굳건히 설 때 다른 사람들이 위로받는다(그 속에서 능력있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때, 그 하나님 때문에 힘과 위로를 얻는다).
5-34절 앗시리아의 심판에 대해 예언. 앗시리아 - 하나님의 이스라엘 심판 위한 도구, 이것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뜻한다. 그 심판의 이유는 앗시리아와 그들이 행한 역사적 정당성은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 그러나 앗시리아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계획대로 행하지 않았다. 그들의 정복욕에 의해서 많은 나라들을 멸절시키려 했다. 앗시리아 - 대규모 추방정책, 이전에는 침공국과 조약 맺고 조공만 바치게 했었다. 그러나 앗시리아는 다른 곳의 거민을 그곳에 두고 그 거민은 사방으로 흩어버려 다시는 나라를 형성하지 못하도록 와해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특별히 8절에 그 교만한 마음에 대해서 말한다. 예전 나라의 멸망은 그 수호신의 멸망을 의미 - 신들의 전쟁, 국가의 운명과 수호신의 운명이 직결되었다. “사마리아와 그 신들” - 예루살렘과 그 신상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행하리라. 여기서 그들의 정복욕의 절정에 달한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모욕으로 연결, 이에 대해 하나님은 “시온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그들의(앗시리아) 교만과 자랑을 처벌하리라” 도구가 사용자에게 대항하여 교만할 수 있는가? 앗시리아의 멸망은 그들 자신의 범죄 때문이다(여기서도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난다). 앗시리아의 죄 -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짓밟고 착취하는 것, 이것은 이스라엘 내의 지도층의 죄와 상응한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스라엘의 죄는 이방의 죄와 똑같다. 즉, 세대 속에 야합하여 세속화했음을 의미한다.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과 관련지어 하나님께 물은 선지자 - 하박국, 바벨론도 심판 받으나 그 역시 그 자신의 죄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공의에 입각하기에 남을 억울케 하는 일이 없다. 악인도 그 날에 적당히 쓰임받는다. 그러나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철저히 옳고 의로우셨음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20절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그를 친 자(앗시리아)를 의지하지 아니하리니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라. 여기서 남은 자(하나님께 돌아온 자)의 특징은 “돌아오리니” = 참 믿음의 회복을 의미.
24절 앗시리아의 멸망이 애굽이 이스라엘을 박해하던 것과 비교된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처럼 그의 막대기를 바다 위에 펴실 것이다. 과거 홍해사건 통해 애굽군병 멸하셨듯이 앗시리아 멸망케 하실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앗시리아에서의 해방이 예전의 출애굽과 비교될 수 있는 사건임을 시사한다(제 2의 출애굽). 앗시리아의 이스라엘 박해와 애굽의 이스라엘의 박해를 호세아서와 비교해 보면 심판 = 구속역사를 원점으로 환원시키는 일의 의미를 가진다. 호세아서 - 음녀 고멜(범죄한 이스라엘) 데리고 광야(즉 범죄한 이스라엘을 광야로 내칠 것을 시사)로 간다. 옛날 이스라엘이 노예로 살던 땅, 따라서 세상 세력의 노예가 되는 상태로 되돌아 갈 것.
배역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인 앗시리아가 심판받게 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편애로 억울하게 압제자가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앗시리아 자체의 죄악(국가적 횡포)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모든 일들에서 공의로우시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억울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공의를 구부려뜨리시면서 “예정”을 이루시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인 동시에 의이다. 은혜와 의 사이에 잘못된 긴장이 있어서는 안된다. 앗시리아의 심판(심판의 도구 제거)은 이스라엘의 심판 도구 해소로서 더 이상 앗시리아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심이다.
교회사 - 일반 역사학적 방법론에 치중하고 있으나(최초에 일어난 학문) 사실은 하나님의 실제적 역사는 따로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으시고 단지 계시로 알려주셨다. 따라서 교회사는 철저히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사는 성경해석사이다.
앗시리아의 압제는 세상 세력의 구현이다(하나님 백성을 자기의 노예로 삼으려는). 앞으로의 앗시리아의 위협이 극에 달할 것이다(예루살렘에까지 이 세력이 침입할 것이다). 북편에서부터 앗시리아가 침입할 것이다. 이는 산헤립 때 성취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앗시리아가 질 것이다. 왜냐하면 시온을 곧 하나님을 만홀히 여김으로(랍사게의 행동과 편지 내용). 하나님의 군대가 하룻밤 새 18만명을 몰살시킨다(36절).
11장의 내용이 climax(1-10장의)이다.
1절 이스라엘을 꺾어버린 그 앗시리아의 세력이 하나님에 의해 꺾여진 다음
ישׁי עזגמ רטח(호테르 믹게자 이샤); 가지가 짤려나가고 남은 둥치(cut accoss), 그 밑둥치에서 새로운 시작이 날 것, 그 뿌리로부터 싹이 나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여기서 이새의 언급은 다윗왕조를 의식한 것, 다윗 왕권이 이스라엘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 수 있다. 이는 다윗 왕권으로부터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을 의미한다. 이새 자신은 다윗 왕권과 아무 연관이 없다. 그런데 왜 이새를 언급했나? 다윗 왕조의 뿌리, 밑둥치를 언급. 미 5장 ‘네게서 다스릴 자(다윗 왕권)가 나올 것인데 그의 근원은 상고라’ 즉, 앞으로 나타날 메시야는 다윗 왕권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부분으로 다윗 왕조의 근원적 성취일 것이다. 열매 맺을 것이라는 말은 다윗에게 주사 언약이 성취될 것을 의미한다. 메시야 이 사람에게 성령께서 임하실 것이며, 메시야에게 임한 성령의 능력은 지혜로, 명철로, 힘, 모략, 지식,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나타날 것이다.
9장에서 הצע(에챠; 모략), רובג(기보르; 힘)라는 단어를 사용함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언된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정사를 멘 자 즉, 9장에서 태어날 아기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11장 초두의 메시야는 9장의 아기와 동일하다. 11장에서 그분의 등장을 말씀하시면서 다윗왕조의 근원에서부터 나온 분이라 하여 성자 하나님의 incarnation(성육신)을 말한다. 3절 이 모든 능력, 모략, 지식, 명철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함이다. 내가 나의 뜻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함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주님은 그분의 뜻을 순종으로서 이루신다. 하나님 왕국의 통치자에게 요구되는 이상적 전형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다윗이 이상적 모형으로 제시됨은 그가 철저히 순종하여 그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한 자이므로 이 가지에서 나오는 것으로 말한다.
4절 가난한 자의 언급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통치로 가난한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와 공평함으로 다스리리라. 이 통치에 의해 가난한 자(영적 가난한 자)들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와같은 통치의 수단은 막대기(무기)와 입술의 능력(말씀과 관련 - 계시록)과 입의 기운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말씀으로 통치하신다. 이 통치는 가난한 자를 구원하는 통치와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악인들에 대한 심판의 통치이다. 이때 성령님께서 통치하는 능력을 חור(루하)라고 한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진리로 허리를 동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쟁의 준비이다. 4-5절은 종합하면 메시야가 통치하여 악인을 죽이는 심판을 시작하는데 의와 진리의 말씀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이 통치의 구체적인 수단은 의와 성령의 말씀이다. 바로 성령의 지혜와 권능으로 나타난다.
6절 이와같은 메시야 통치의 결과는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거하게 된다. 6-10절이 그 통치의 결과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인류의 뿌리깊은 적의(투쟁, 피흘림)가 제거되고 참된 평화가 모든 영역에, 동물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평화가 도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레미야 31장과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게 된다. 하나님과 인간의 영적 깊은 관계를 앎(메시야 통치의 결과)으로 표현한다.
10절 이새의 뿌리 = 다윗의 약속, 왕조의 뿌리,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모든 민족을 향하여 확장되어가는 왕권이다. 열방이 그에게 나아올 것이다. 그의 안식처 곧 메시야의 안식처가 영화롭게 될 것이다. 열방이 시온을 향하여 나오는 것이 사 2장에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의 통치 때문이다. 여기서는 메시야의 통치가 나타났다. 모든 기독론의 핵심이 시편 2편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셨다. 그리스도께서 만국의 기호로 선다. 이는 만인의 통치이다. 모든 민족 통해 확장되어가는 형태이다. 시온을 하나님의 안식처라고 한다(시 130편). 그의 안식처가 영화롭게 될 것, 여기서도 시온 성전이 메시야의 안식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메시야의 동일시이다. 그리고 열방이 나아오는 이유가 이것이요, 모든 기독론의 핵심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시는 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시편 2편은 잘 설명한다. 그의 resting place, 예루살렘 시온의 성전은 “하나님의 안식처”라 부르게 된다. 시온 성전이 영화롭게 되리라(시 87편). 시온에 대해 영광스런 일을 언급하리라 하면서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에 와서 예루살렘 시민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예루살렘은 교회를 의미한다. 말세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11장 전반부에서 메시야 출현, 그의 통치, 그의 통치는 말씀으로, 평화를 끼치므로 열방이 그에게로 나아온다. 열방의 통치를 구체적으로 말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앞에서는 다윗이 모델이었고, 두번째로 내 손을 더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더하시겠다는 말씀으로 앗수르와 애굽에서 남은 자를 다시 구원하시겠다고 한다.
15절 이것은 출애굽 사건의 model이다. 그가 다시 능력 행하신다는 것은 제 2의 출애굽을 시도하신다는 것이요, 10장에서 말한 앗시리아로부터 해방과 관련된다. 10장 하반부에서 이미 앗시리아로부터 해방을 언급했는데 또 여기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11장 전체가 종말론적 성격이 강하다. 10장과 11장 사이에 상당한 시간적 gap이 있다. 40장 이하 해석시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이것은 다음에 다룰 것임). 11장으로 넘어가면서 시간이 밀려간다. 이런 시간적 확대와 더불어 예언의 성격, 내용도 시공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즉, 종말론적 성격을 띠게 된다.
앗시리아로부터 해방,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은 그 나라 자체도 가리키지만 어떤 비유적 의미도 있다. 그리고 뒤에 언급하는 나일강 상류의 애굽인 바드로스, 구스(더 동남쪽), 엘람(인도지역), 시날(북쪽)의 언급은 그 당시 알고 있는 전세계(모든 민족)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앗시리아로부터의 해방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학개, 스가랴는 포로후시대 이미 앗수르, 애굽이 없을 때 앗수르와 애굽에서 해방된다고 기록함은 실제적 나라보다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 노예로 삼으려는 하나님의 대적세력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때의 앗수르와 애굽 해방은 문자보다 무엇을 상징한다. 밑줄친 부분을 염두에 둔다면 「제 2의 출애굽」은 종말론적 의미가 강하다 하겠으며, 이 해방이야말로 궁극적인 해방인 것이다. 즉, 몇 십년 이후 있을 앗시리아의 해방의미 이상이다.
11절 만민을 향하여 기호로 설 것이요, סנ(네스; sign)
12절 10절에서 이새의 뿌리가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라 하므로 이 기호는 메시야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이 세계 각처에서 메시야의 깃발 아래 메시야 왕국을 세우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12절의 결과가 13절이다.
13절 이들이 한 몸을 이루어 한 왕국을 성취할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야 왕국의 통일성은 다윗을 모델로 한다.
14절 블레셋에게 날아가 앉고, 동방자손을 노략한다. 남으로는 애굽을, 서로는 얌마를, 북으로는 앗수르를 동으로는 에돔, 암몬, 모압을 노략하게 되는데 이는 메시야 왕국의 정복사역으로서 메시야의 왕국이 전세계로 확장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 복종한다는 것은 다윗을 모델로 하고, 또 동서남북의 정벌은 여호수아를 모델로 한다. 그리고 애굽을 치는 것은 모세를 모델로 한다.
11절이 출애굽을 연상시킨다면, 12-14절은 다윗과 여호수아의 정복사역을 연상시키며, 그리고 11절은 15절과 연결되고, 16절에 연결되어야 자연스러운데 그 사이에 정복사역이 끼어있다. 이 의미는 앞으로 메시야 통해 정복사역이 이루어질 것인데 출애굽이 모델의 틀이 되어 출애굽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이루어질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미래의 출애굽과 메시야 왕국의 설립이 엄격히 분리되지 않는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하나의 내용을 가진 역사이다. 출애굽, 나라정복, 건설은 메시야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는 하나의 동일한 본질, 내용을 다루고 있으면서 출애굽으로 표현한 것은 전체의 내용을 출애굽의 내용으로 요약하고자 함이다. 사실 4장, 7장에서 메시야 왕국 건설이 투사되나 여기서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12장의 내용은 정리하는 찬송이 나오고 내용이 마감된다. 또 13장 이후는 우주적 열방에 관한 예언들이 등장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12장까지 일단락된다. 즉, 일단 앗시리아와 관련지어 내용이 마감된다.
내용정리
1장은 이스라엘의 과거 배역의 역사와 징계하신 역사, 긍휼히 여겨 남은 자를 두신 역사, 그러나 정죄받아 망할 수 밖에 없는 현재, 하나님의 미래는 심판과 구원이다. 바로 초두에서 이사야는 심판과 구원을 말한다. 앞으로 구원받을 이스라엘에게는 심판도 정화의 의미(끝까지 배역하는 자는 철저히 멸망)를 갖는다. 하나님의 미래 계획이 이스라엘의 구체적 역사와 관련되어 구체적으로 확대 제시되는데, 심판도 말할 수 있으나 이사야를 통해 알리신 구원계시를 종합해보고 여기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1장 후반부 ①시온이 공평과 의로 구속되리라 - 4장, 53장으로 이어질 때 큰 의미를 갖는다. ②2:1 - 시온으로부터 하나님의 통치, 그로 인해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고 열방이 모여든다. ③4:2 -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통치하실 것이다.
4장이 주는 의미
①הוהי חמצ(체마 아도나이)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통치하시는 것을 보고 열방이 나올 것이다. 스가랴에서도 이스라엘의 심판과 정화를 말하는데 그러나 그 심판 후에 의와 공평으로 구속될 것이다. 이때 열방도 참여된다.
②2장 1절 이하는 시온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면서 그 결과는 평화이다.
③4장 2절 이하에서는 시온이 의와 공평으로 구속되는데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곳을 거룩하다고 불릴 것이다. 왜냐하면 시온으로부터 죄를 씻어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분이 הוהי חמצ이다. 죄를 정결케 하므로 제사장적 사역을 감당할 인물인데 하나님의 임재로 나타날 것이다.
임마누엘(לאונמע) - 예언의 의미, 구원적 의미의 구체화는 앗시리아가 예루살렘을 침입할 때 실현되었다. 이는 적어도 제사장적 직분을 포함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9:1이하에서는 왕으로 나타난다(앞으로 태어날 한 아기). 즉, 제사장이면서 왕이신 모습이다. 그리고 이것의 절정이 11:1 이하이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구원 내용이 나타나는데 즉, 구원의 핵심인물이 나타나는데 이가 임마누엘이다. 그는 제사장이면서 왕이다.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스가랴서와 히브리서이다. 왕직과 제사장직의 결합을 통해 암시되고 있지만(왕직, 제사장직의 결합은 53장을 하고 나서야 밝혀진다) 그러나 찾아보니까 앞으로 올 구원사건은 출애굽과 다윗사건, 홍해사건과 연관된 사건으로 미래를 알리신다. 하나님이 미래를 말하면서 창세기부터의 모든 역사와 관련하여 언급하므로 과거사건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 올 구원사건은 가장 흔한 것이 출애굽, 다음이 미디안 사건, 다윗정복, 여호수아, 모세를 언급하고 11장은 에덴동산을 언급한다.
창세기부터의 모든 역사가 다 거론되는 것, 모세, 다윗, 여호수아, 기드온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은 모든 역사의 절정, 완성이 그리스도이심을 보이고자 함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미래 구원역사의 핵심인물로 등장하는데 이분이 행할 사역을 옛날 인물과 관련시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모든 구원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된다. 11장을 읽으면서 다양성은 그 자체가 뜻이 있다. 신약에서도 말하기를 약속의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되었다고, 궁극적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다양한 인물, 사건이 그의 사역에서 발견된 이유는 무엇인가? 히 1장에 보면 πολυμερος(폴류메로스; 여러 모양), πολυτροπως(폴류트로포스; 여러 부분) 등 여러 부분으로, 여러 모양으로 당시에 계시하셨다고 한다. 구약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언급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지막날에는 아들 안에서 말씀으로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요 5:39를 보면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지혜와 모든 보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데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구약의 선지자들이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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