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이사야 강해

이사야 연구1

에반젤(복음) 2019. 12. 28. 20:33


         

이사야 연구1

 

 

 

1. 저자

 

 

 

일반적으로 이 책의 저자는 사1:1에 등장하는 것처럼 '이사야'이다. 그는 히브리 예언자들 중에서 훌륭한 어법과 뛰어난 예언력, 문체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면에서 타예언자들보다 뛰어나다.

이사야는 전 . 후가 구분된다. 여기서 후반부가 이사야가 쓴 것이 아니라는 비평적 주장이 있다. 첫 번째 이유는 후반부(사 44-60)가 포로시대요, 예언의 역사적 기능에 비춰볼 때 그의 저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기능에 하나님의 영이 직접 역사하신다는 예언의 본질적 사상은 시간과 공간에 의하여 제한받지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전 . 후반의 문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변론 자체가 모순되고 주관적이다. 오히려 문체의 유사점에서 동일 저자를 주장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학 사상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두 번째와 같이 사상의 광범위성에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이 저서 전체의 저자는 이사야 한 사람으로밖에 볼 수 없다.

 

 

 

2. 시대적 배경

 

 

 

이사야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한 인물이다(사1:1). 이들은 통치 시기는 공동 섭정을 포함하여 웃시야가 주전 790-739년, 요담이 주전 750-732년, 아하스가 주전735-715년, 히스기야가 주전 715-686년이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당한 혼란기였다. 즉 북이스라엘 왕국이 주전 722년에 대제국 앗수르에 의해 함락되고 그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남유다 역시 앗수르에 의해 함락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극심한 우상 숭배 풍조 등으로 인한 총체적인 타락상 가운데서 이사야는 유다 백성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것이다.

 

 

 

3. 기록 목적

 

 

 

이사야서가 주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의 역사가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는 데 있다. 특히 이사야의 설교는 유대 역사의 중요한 시기에 선포되어졌는데, 그 당시에는 앗수르가 발홍되었고, 이로 인해 자국 내에 두 개의 정치적 견해가 생겨 났다. 하나는 앗수르와 동맹을 맺자는 파였고, 또 다른 하나는 애굽과 동맹을 맺자는 파였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적인 세력에 의존하는 것을 그만 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할 것을 강하게 역설하였다. 그는 또 이사야서를 통해 메시야 탄생을 선포하고 그 다스리는 왕국의 성격에 관해 예언 하면서 모든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을 말하고 있다. 비평가들이 내용상 다르다고 주장하는 40-60장까지의 부분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목적의 맥락에서 서술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4. 전체 내용 요약

 


이사야는 전체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지는데, 전반부가 1-39장이고, 후반부가 40-66장이다. 이사야는 신병기적 원리(모세의 율법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축복의 시기 전에 형벌이 와야 한다는 주장)를 따른다. 그래서 전반부는 죄의 문제를 다루는데,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전에 꼭 치루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이 죄의 문제에서 강조된 심판은 후반부의 용서와 회개를 강력하게 필요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후반부의 소위 '종의 노래' (사42:1-9 사49:1-13 사50:4-11 사52:13-53:12)는 용서와 회개를 이루는 구원이 메시야로부터 올 것을 예언하고 있다. 후반부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우주의 대변혁과 창조 질서의 회복을 언급하고, 간주곡으로 유다의 심판날이 언급되며, 이스라엘과 온세계에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구원의 회복시키심이 기록되어 있다.

 

 

 

5. 구속사적 의미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계약 공동체임을 상기시키고 있다(사 7-12장). 이는 이사야가 아브라함의 계약(창12:2-3 창15:18-21 창17:3-8,19)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축복이 있음을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올 것을 호소했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을 아브라함의 약속 때문에 회개와 용서의 구원 메시지로 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의 방법은 오로지 메시야를 통한 구원이었다. 그 메시야의 모습은 세상의 집권자(막10:35-45)와 다른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가진 '고난의 종'이었다. 아브라함의 자손을 믿음으로 구원케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예언한 이사야는 인류의 구원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참뜻을 멀리 내다본 선지자였다.

 

 

 

6. 타성경과의 연관성

 

 

 

먼저 구약과의 연관성에 있어서 이사야는 신명기 사관(율법 이행)을 철저히 고수했다. 그리고 미가 선지자가 동시대에 활동했으며, 전(前)세대에 이스라엘에서 아모스와 호세아가 활동했는데, 이들과 같은 사상적 입장으로 예언했다.

ex) 유다에 대한 심판 사3:1-15미1:8-16.

     메시야 왕국의  도래 사11:1-6미1-5:1

     이스라엘의 남은 자 사10:20-34미5:2,3

그리고 신약과의 연관성에 있어서, 신약은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음을 직접적으로 인용, 해석하고 있다.

ex) 사40:3-5 마3:3, 믹1:2,3, 눅3:3-6, 요1:23

     사42:1-4 마12:17-21

     사53:1 롬10:16

     사53:4 마8:17

     사53:7,8 행8:32,33

     사65:1 룸10:20

 

 

 

7. 내용 분해

 

 

 

Ⅰ. 전반부 : 하나님의 심판(1-39장)

    1. 유다의 책망(1-6장)

    2. 메시야 왕국의 예언(7-12장)

    3. 이방에 대한 책망(13-23장)

    4. 미래의 심판과 왕국(24-27장)

    5. 이스라엘과 유다의 화와 복(28-35장)

    6. 산헤립에 대한 책망(36-39장)

Ⅱ. 후반부 : 하나님에 의한 회복(40-66장)

 

 

 

* 유다의 책망과 메시야 왕국(1-12장)

물론 이사야의 외침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그의 메시지는 메시야 왕국을 목표로 정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며, 이런 일이 메시야 왕국을 세우는 길임을 강조하였다. 이 부분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는 것에 의미를 담았는데,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야 하나님이 주신 복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1. 책망의 방법(사1-4장)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사1:2)고 허공을 향하여 외치는 선지자의 목소리는 어찌된 것인가? 이제 하늘과 땅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겠다는 것인가? 어떤 이유로 하늘과 땅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는가? 신32:1에서 모세도 이사야와 같은 방식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미6:2도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여호와의 쟁변을 들으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은 서로 어떤의미를 가지는가?

 

 

 

1) 창조질서를 지키라

직접적인 이유로 사1:2 후반부에서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라고 기록한다. 즉 유다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의 말씀을 듣지 않으므로 하늘과 땅에게 외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어리석고 무감각한 백성들보다는 자연이 오히려 순종을 잘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신32:2에도 하나님의 교훈과 말이 자연에 비유되었고, 식물이 질서를 지키는 것으로 비유되었다. 미6:2은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가 법정의 참관인 격으로 나오고 있다. 이는 창조의 질서를 지키는 무생물이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는 이스라엘 앞에서 법정 참관인으로 나오고 있다는 의미이다.

 

 

 

2) 하나님을 거역치 말라

이스라엘이 거역함으로 하나님은 창조 질서를 지키는 무생물에게 그 눈길을 돌리셨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에게 순종의 의미를 부각시키셨다. 무생물에 빗대어 이스라엘을 책망하신 것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거역함이 없어야 할 것이며, 창조 질서에 순응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1:18)는 여호와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열매 없는 포도원(사5-8장)

 

 

 

요15:6에 열매 없는 포도나무 가지를 밖에 버리신다는 말씀과 더불어 줄기에 붙어 있어 열매 맺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그리고 마21:19에는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어 그 나무가 말라 죽는 사건이 나온다. 이렇듯 신약에는 열매 없는 나무의 모습이 나오는데, 본문에서는 올바른 열매를 맺지 않고 들포도를 맺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들포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줄기는 그 줄기로되 열매는 그 열매가 아닌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고 이 들포도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1) 이스라엘의 악행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탐욕과 탐심, 술취함과 흥청거림,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더럽힘, 덕과 악의구별을 혼란시키고 신앙의 원칙을 격하시킴, 자만심 공의를 악용함과 같은 악행들을 저질렀다. 이들은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가라지의 열매와도 같았다(마13:24-30). 이제 이 일(들포도 맺음)로 인해 포도원은 무너지고 비도 내리지 아니하여 황무하게 된다.(사5:5,6).

 

 

 

2) 교회 안의 들포도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는 항상 빗나가는 얼굴들이 있다. 예수의 제자 중에서도 들포도 같은 인물로 가룟 유다가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처럼 어떤 열매를 가지고 있지만 들포도같이 불의한 열매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들포도와 같은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냥 두신다고 하신다. 이제 우리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이 들포도의 삶이 아닌지 확인해야 할 때이다.

 

 

 

3. 메시야 왕국(사9-12장)

 

 

 

아브라함의 대를 이삭이 있고, 이삭의 대를 야곱이었다. 이렇게 그 씨가 대를 이어 그 가족을 다스림과 같이 나라도 '한 씨'가 대를 이어 다스린다. 사9:6,7에 따르면, '한 아들'이 다윗의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한 아들'이라 표현된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인가? 아니면 어떤 관계성을 가지는가?

 

 

 

1) 구속사적 의미의 메시야 약속

이스라엘은 현대 신앙인들의 한 모델이 되고 있다. 이들(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계시하셨다. 그 계시의 의미는 하나님 백성을 불러모으고, 그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윗이 이런 이스라엘을 통치함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대리인으로서의 통치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한 모델로 다윗을 세웠으며, 그는 메시야의 한 그림자 역할을 한 것이다. 결국 '한 아들'은 메시야로서 하나님 나라를 다스릴 분이시다. 그분은 그림자로서 보여 준 '다윗의 위'를 그림자가 아닌 실제적 모습으로 나타나시어 다스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메시야를 약속하고 계신다. 사7:14은 그 아들(메시야)의 이름을 '임마누엘'로 밝히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구속사에 한 맥을 이어 주는 그림자 역할을 한 것이 다윗이요, 그 실제가 메시야로 나타난 하나님의 '한 아들'인 것이다.

 

 

 

2) 메시야 왕국 운동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가 오심으로 우리는 믿음으로 형성된 그의 나라의 백성이 된다. 이는 그분의 통치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떤 나르든 법이 있듯이 메시야 왕국에도 법이 있다. 이법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늘 배우는 그분의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마5:17). 우리는 메시야 왕국을 확장하고자 기도하고 전도하며, 그분의 말씀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들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무질서(불순종)를 무생물에 견주어 드러내고 있다.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나무의 최고 목표이듯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고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이 하나 둘 쌓여 갈 때 그리스도의 나라는 빨리 우리 곁에 다가올 것이다.

 

 

 

*이방에 대한 책망(13-23장)

것으로서 책망을 받은 후에는 반드시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 본문에는 이방과 유다에 대한 책망이 나오는데, 이 책망이 그들에게만 임한 것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 책망으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도록 우리에게도 각성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이러한 은혜에 대해 항상 감사해야 할 것이다.

 

 

 

1. 바벨론에 대한 책망의 교훈(사13-16장)

 

 

 

바벨론은 일찍부터 하나님 대신 큰 우상을 경배하는 행위가 많은 곳이었다(창11:1-9). 그리고 계시록에는 대혼란 속에서도 이곳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중심 장소로 상징된다(계 17,18장). 이러한 바벨론이 이사야를 통하여 책망을 받게 되는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어떤 죄로 인하여 책망을 받게 되는 것인가? 이들의 죄악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1) 오만과 거만

사13:6-16까지의 전반적인 내용의 흐름은 여호와의 날에 야기되는 큰 혼란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무분별한 파괴가 아니라 죄인들(사13:9)과 사악하고 교만한 자들(사13:11)을 구별하여 멸한다고 한다.

결국 이 메시지를 통해 볼 때 바벨론의 중심적인 죄악은 바로 '교만'이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인류의 상징인 바벨론은 그들의 힘을 믿고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2)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다고 하는 자들

인간이 헛된 자만심으로 우쭐거린다면, 필연코 주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배운다. 이사야가 선포한 내용의 교만 속에는 인간들이 스스로 뭐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자신의 권력이나 재물을 자랑하면서 남을 낮추어 보는 등의 행동이 포함되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러한 교만을 간과하시지 않을 것이다.

 

 

 

2. 책망과 교훈(사17-20장)

 


북왕국 이스라엘(에브라임)은 앗수르의 공격에 대비하여 아람과 연합했다. 그런데 이들 두 나라는 유다를 자기들과 합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멸망시키려 한다(왕상22:31). 이런 에브라임과 아람의 성읍 다메섹에 대하여 이사야는 폐허더미가 될 것을 예언하였고, 에브라임에 대하여도 견고한 성읍들이 황폐하리라고 한다(사17:9). 이러한 심판을 불러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죄악을 우리는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1) 하나님을 잊어번린 죄

먼저 에브라임이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렸다고 사17:10은 지적한다. 그리고 다메섹은 이러한 에브라임과 합세하여 에브라임에게 우상의 씨앗을 심어준다(사17:10,11). 여기서 "네가 기뻐하는 식물을 심으며"는 육욕적인 구행으로 예배하는 이방인의 기질을 말한다. 암7:13을 보면, 여로보암의 우매한 판단으로 이방 기질의 예배 수행을 국가 종교로서 인정해 준다. 즉 음란한 육욕적 예배 형태를 보장한 것이다. 이것의 근원은 모두가 '자기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까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2)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이 확고한 신앙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선하심의 기쁨을 맛보게 하셨을 때 그 기쁨이 확고하게 우리들의 마음에 자리잡는다면, 어떤 것에도 끌리지 않는 굳건한 신앙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신앙의 기쁨이 확고히 자리하지 못한 자는 에브라임이 하나님을 잊어버린(망각함)것과 같은 죄에 빠지게 될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능력의 반석'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항상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도록 성령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예루살렘에 대한 책망과 교훈(사21-23장)

 

 

 

앗수르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읍을 둘러싸고 있었을 때, 이 성읍은 그 군대를 대항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백성들은 적군이 이 성읍을 진격할 때가 여호와의 심판의 날임을 인식하고 있었다(사22:12,14,15,25). 이런 와중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참회의 기도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했는가? 하나님의 원하는 바를 그들은 어떤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죄악을 범했는가?

 

 

 

1) 하나님의 뜻을 떠난 즐거움

예루살렘의 임박한 어려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사22:12)고 하셨는데, 이들은 오히려 "기뻐하며 즐거워"(사22:13)했다. 아마도 "내일 죽으리라"는 문구로 봐서 자기들의 처지에 자포자기하고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살다가 죽자는 것이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정신을 가다듬어 자신의 신앙의 위치를 찾아야 할 백성들이 오히려 자포자기로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인하고 있는 모습이다.

 

 

 

2) 웃을 때와 울 때

'기쁨'은 신앙인들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기쁨은 빌4:4에 언급하듯이 '주 안에서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여기 예루살렘의 기쁨은 일반적으로 '회개에서 우러나오는 슬픔'(고후7:10)에 위배되는 기쁨이다. 즉 우리 신앙인들은 웃을 때와 울 때의 의미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회개할 자가 슬픔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 거만하게 보일 것이다. 더욱이 오늘 예루살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슬퍼할 때라고 명령함에도 그 시기를 깨닫지 못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연후에 베개가 젖도록 슬퍼함과 같이 회개의 슬픔이 신앙인들에게 필요하다. 오늘의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는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임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교만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하나님께 가장 큰 죄악이다. 예수님께서도 겸손한 모습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강조하셨다(막10:42-45). 만약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가 있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죄는 범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교만과 하나님을 망각하는 죄악은 서로의 연관성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겸손한 자는 하나님을 잊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심판과 왕국(24-27장)

인간은 미래에 대해 알 수 없다. 단지 우리는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뿐이다. 그분의 특별 계시인 성경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 새 왕국의 도래에 대해 항상 말해 오고 있다. 그런데 그 왕국이 도래하기 전에 심판이 있음도 빠뜨리지 않는다. 본연구에서는 어떤 자가 심판을 받고 어떤 자가 새 왕국 백성이 되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세상에 대한 심판(사24장)

 

 

 

"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리라"(사24:3)는 심판의 모습이 처참함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세상을 보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장)고 하셨다. 이런 세상이 어찌하여 험악하게 파괴되어야 하는가? 분명 거기에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본분은 그것을 무엇이라 하는가? 그리고 백성 중에 어떤 자가 쇠약하게 된다고 했는가? 이것은 예수의 어떤 말씀과 연결되는가?

 

 

 

1) 파기된 언약과 율법

사24:5에 중요한 단어 세 개가 나온다. 먼저 이 단어들을 보면, 첫째, hrwt(토라; 율법)로, 이는 교훈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이 본문에는 복수로 쓰여서 율법에 포함된 모든 교훈을 의미한다. 둘째, qh(호크; 율례)란 단어인데, 이는 도덕과 의식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셋째, tyrb(뻬리트; 언약)로, 이는 계약을 의미한다. 즉 택한 백성에게 주어진 그 '계약'을 의미한다(출19:6 출29:45 레26:12).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아시기에 그들의 삶의 규범과 그들의 위치를 정하여 하나님과 약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약속들을 파괴했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까지도 특별히 주어진 언약을 파기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 그리고 더욱 쇠약해질 인물들은 '높은 자'들이다. 이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고 말씀하셨다.

 

 

 

2)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치 말아야 함

우리에게는 중요한 언약이 있다. 그것은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 구원진리를 믿고 주님의 제자가 되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다(요3:16). 물론 이 언약은 구약 시대부터 예시되어 왔으며, 그 진정한 내용은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이제 우리들에게는 이 십자가언약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오늘 본문의 심판의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 언약을 따르지 않을 경우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영원히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할 것이다.

 

 

 

2. 새 왕국에 대한 찬양(사25,26장)

 

 

 

평강에 평강으로 지킴을 받는 자는 어떠한 자인가? 사26:3에 '심지가 견고한 자"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요동함이 없는 상태를 설명한다. 즉 심지의 견고함을 위해 필요함을 채우는 자가 평강에 평강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그리고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26:4)라고 했는데, 여기서 영원한 반석은 누구를 견주어 말하는가? 그리고 이 반석과 심지가 견고한 자와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1) 주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

먼저 본문에 &ms(싸마크, 시118:8 시112:8)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견고히 세웠다'는 뜻이다. 견고한 세움은 기초가 확실해야 한다. 본문에서는 이 기초를 '영원한 반석'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영원한 반석이신 여호와를 기초로 견고히 세움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강에 평강으로 지킴을 받을 자는 바로 '주를 의지하는 자'이다. 이런 자는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는 자이다. 즉 모든 생각, 행동 그리고 소망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은 영원한 반석에 기초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도 의를 배우지 못하고 정직한 곳에서 불의를 행하게 된다.

 

 

 

2) 행함이 있는 마음

우리의 곁에 있는 많은 신앙인들의 약점은 그 믿음을 세우기 위한 행함이 적다는 것이다(약2:14). 교회 안에서 정직함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생활에서 그 정직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들이 본문의 악인의 모습(의를 배우지 않고 정직한 곳에서 불의를 행함)과 결코 다르지 않다.

 

 

 

3. 새 왕국의 백성들(사27장)

 

 

 

심판의 날에 이방의 멸망당함과 같이 그 백성을 하나님께서 멸하시겠는가? 또한 그 모든 징벌 가운데서도 여호와께 돌아와 경배할 자들은 누구인가? 과연 어떤 인물들이 여호화께 돌아오는가? 율법을 지킨 자들인가 아니면 권력을 가진 자들인가?

 

 

 

1) 멸시받는 자

사27:13은 "앗수르 땅에서 파멸케 된 자와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가 돌아와서" 여호와께 경배를 드리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이들은 물론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이스라엘의 멸망 때 흩어졌던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모든 죄악으로 인하여 그들을 멸하실 때 그들 중 구원할 자들을 선택하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스라엘)이요, 잠시 흩어져 이방에서 고통을 받던 자들이다. 하나님이 새 왕국 백성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맏음으로 형성된 자들로 본다면 이스라엘의 멸시당함과 같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멸시함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백성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완전한 파멸이 없음

하나님은 택한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하시지 않으셨듯이 이 시대의 신앙인들도 부름받은 자는 결코 하나님을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 재림 나팔 부는 그 때까지 주 안에서 살아간다면 그들은 주 예수의 재림때에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경배"(사27:13)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행위로서는 도저히 구원을 받을 길이 없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언약을 지키는 믿음이 꼭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우리의 심판을 면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새 왕국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항상 신앙의 자리를 다져 가야 할 것이다.

 

 

 

*두왕국의 화와 복(28-35장)

하나님 나라에 의로운 왕이 나타나며, 그로 인하여서 엄청난 축복이 임하게 되는데,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이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되고 있다. 과연 그 나라의 통치 방법은 어떤 것이며, 지금의 통치와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는 어떤 기쁨이 충만한지를 생각해 본다.

 

 

 

1. 멸망과 구원의 차이(사28-30)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사망과 언약했기 때문에 재앙이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리라고 하며, 거짓과 허위가 그들의 피난처라고 말한다(사28:14,15). 또한 그들은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을 믿는 자들이다. 여기의 견고한 돌은 모퉁이 돌과도 연결된다. 슥10:4과 엡2:20은 모퉁이 돌이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견고한 기초돌은 직접적이진 않지만 예수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1) 멸망과 구원

성경은 먼저 전자에게 '재앙이 유행한다'고 언급하며, 후자에게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전자에게는 재앙이 유행하듯 그들에게 덮쳐도 하나님께서 돌아보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이며, 후자에게 적용되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한다는 표현 속에서는 그들이 급절하게 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돌보셔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돌보심의 근거는 바로 견고한 기초돌을 믿는 믿음이다. 이 돌은 아다윗의 주권이 아니라 다윗의 진정한 씨(자손)이다. 이것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에서 난 것이라는 바울의 말을 입증 하는 듯하다(롬1:17). 여기서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기억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인이 서야 할 자리

모든 사람은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 전에 문제가 되었던 종교다원주의이다. 여기 본문의 내용도 '견고한 기초들'인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함을 강조했고, 행4:12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라고 못박고 있다. 인간사의 모든 주체가 하나님임을 알고 있다면, 우리의 설 자리는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좁은 문인 것이다.

 

 

 

2. 의로운 왕과 회복의 약속(사31-33장)

 

 

 

사32:1에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라고 언급한다. 물론 문장의 문법상 미래에 있을 내용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는 의로 통치하는 모습이 보여지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당시 통치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리고 장차 다스릴 의의 통치는 어떤 모습인가? 그 두 모습은 어떤 다른 두가지의 모습을 나타낼 것인가? 그리고 장차 그 통차자는 누구인가? 이 통치자는 인간의 통치 방법이 아닌 다른 통치 방법을 보일 것이다.

 

 

 

1) 예수그리스도의 공의와 사랑

먼저 당시의 통치 방법(모습)은 사33:1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학대와 속임이 그 대표적 내용을 담고 있다. 사33:1-6은 구원을 바라는 기도인데, 이러한 학대와 속임에서 해방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이 학대와 속임 속에서는 공의와 사랑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장차 의로 통치하는 곳은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사32:2), 사랑의 의미를 간직하신 분이 다스릴 곳이다. 그리고 "공평으로 정사할 것"(사32:1)을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광풍을 파는 곳"(사32:2)이라 했는데, 이는 어려움을 당한 자에게 큰 사랑을 베풂이다. 이러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분은 예수그리스도뿐이시다. 그분은 이 땅에서 공생애 기간에 이러한 통치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결코 불의와 타협치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분이셨다.

 

 

 

2)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공의

미6:8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공의를 베풀고자 정직을 행하면 오히려 그 소속 단체에서 따돌림을 받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정직히 행하고자 공무원이 뇌물을 거절하면 저만 똑똑한 척한다고 배척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한 기독교인은 온전한 하나님의 공의를 사회에 희생적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3. 이스라엘에게 임할 축복(사34,35장)

 

 

 

하나님께서 새롭게 한 왕국은 육적 중심의 모습이 아니라 영적 중심의 모습이다. 이스라엘에게 임할 이 왕국은 과연 어떤 모습이며, 그곳에서 살 백성은 어떤 자들인가? 영원한 희락과 즐거움을 얻을 이들은 무엇을 얻은 자들인가? 그리고 이들에게서 사라질 것은 무엇인가?

 

 

 

1) 사막의 백합화

먼저,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사35:1)라고 했다. 여기서 광야가 주는 의미는 온 세상을 의미한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기쁨이 넘침은 엄청난 변화를 말해 주는 것이다.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고생한 이스라엘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었다면 그들의 생명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한 고난의 장소가 광야인데, 그 광야에서 기쁨이 그리고 사막이 백합화를 피운다. 이는 창조 질서의 변화를 예고한 듯 싶다. 사막에는 물기가 없기에 백합화와 같은 연약한 식물은 견딜 수 없다. 그러나 그곳에 백합화가 핀다. 이곳이 하나님의 새 왕국이다. 그리고 영영한 희락을 얻을 자들은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을 자들이다. 여기에는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

사막의 백합화는 만물의 회복을 상징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에 의해 그 선취함을 보았다. 그리고 오직 그분만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며 본연의 질서에로 회복시키신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회복의 나라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치유의 역사로 모든 영적 병든 자들에게 희망의 빛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설 자리를 확인하라고 말씀하신다. 요셉이 결코 범죄의 편에 서지 않았듯이 우리도 예수그리스도의 편에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공의가 가득한 곳이며,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들을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곳이다. 이런 그리스도의 왕국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목소리를 더 높여야 할 것이다.

 

 

 

*산헤립에 대한 책망(36-39장)

본문에는 산헤립과 히스기야가 대결하는 장면이 나온다. 산헤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이고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이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사단이 예수를 시험하는 사건을 연상하게 된다. 이사건은 히스기야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그 승리가 어떻게 주어졌으며, 진정한 승리자는 누구인가를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사36장)

 

 

 

앗수르 왕 산헤립은 주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을 함락시킨 후 유다를 침입하여 거의 모든 성읍을 탈취하였다(B.C. 714년). 이제 남은 것은 예루살렘뿐이었다. 이때 랍사게가 사신으로 성 앞에서 연설을 한다. 여기서 랍사게는 사람 이름이 아니고 관직명을 말한다. 이 사람은 이사야의 말과 히스기야의 말을 조롱하고 히스기야의 정책을 비난하면서 예루살렘 백성들의 마음을 요동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랍사게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말을 하고 있다. 과연 어떤 내용으로 하나님께 도전하며 여호와를 비난하는가?

 

 

 

1) 북이스라엘을 보라

랍사게가 이사야와 히스기야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비난하다가 하나님에게도 그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는데, 그 내용은 다름 아닌 "북왕국 이스라엘(사마리아)을 보라"는 것이었다. 즉 열방(하맛과 아르밧)의 신들도 구원하지 못했으니, 여호와는 더욱 구원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로 인하여 징벌을 받았을 뿐이다(왕하 18장). 결국 앗수르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인 것이며, 도구로 쓰인 입장에서 그 도구의 주인을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는 파멸을 가져오게 된다.

 

 

 

2) 외로운 핍박

습2:8-10은 모압이 교만하여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함으로 심판을 받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훼방은 일단 하나님 백성의 잘못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히스기야 시대의 사마리아는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당한 일을 앗수르가 비난하고 나섰다. 우리는 믿지 않는 자에게 비난과 핍박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자기의 잘못으로 받는 것은 의로운 것이 되지 못한다. 마5:11에 언급한 대로 "예수를 인하여" 비난과 핍박을 받도록 해야 한다. 이는 하늘의 상이 보장 된 것이다.

 

 

 

2. 앗수르의 패망(사37장)

 

 

 

앗수르의 패망하는 모습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진 중에 들어가서 185,000명을 죽였다. 그리고 그 왕 산헤립은 자기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사37:33의 예언대로 활 한 번 쏘지 못하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한 채 패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패망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1) 기도

성경은 기도의 능력을 항상 기록하고 있다(삼상1:27 막11:24 행4:31). 오늘 히스기야는 어려움의 처지에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 이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즉시 응답하시어 "그들은 오던 길로 돌아가리라"고 하셨다. 결국 히스기야의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였고, 앗수르의 패망의 원인은 히스기야의 기도와 그에 따를 응답이었다. 히스기야는 손하나 움직이지 않고 큰 전쟁의 승리자가 되었다. 실제적으로 히스기야는 기도의 승자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타난 것은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치러 왔을 때 엘리사가 기도하여 그 사환 게하시의 영안을 열어 하나님의 군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왕하6:17). 이렇듯 기도의 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감사와 찬양을 올려야 할 것이다.

 

 

 

2) 기도하기를 쉬는 죄

삼상12:23에 사무엘은 백성에게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고 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아니한다. 그러나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한시도 살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결국 자신의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예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열심히 기도하셨다. 우리는 모든 어려움들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로써 해결해야 한다.

 

 

 

3. 히스기야의 치유와 교만(사38,39장)

 

 

 

히스기야의 와병 기사는 욥의 그것과 비슷하다. 히스기야는 자기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런 고통스런 병을 주셨다고 깨닫게 된다. 욥 역시도 자기에게 이런 고통이 주어질 수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자기를 위한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도록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치유함을 받은 히스기야는 대하32:31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시험대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일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 즉 히스기야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1) 과시욕(교만)과 안일함

사39:4을 보면 모든 은금과 무기를 드러내 보이는 히스기야는 어떤면에서는 어리석게 보인다. 한 나라의 왕이 그 나라의 1급 비밀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당시 바벨론은 앗수르의 속국으로서 므로닥발라단은 앗수르에 발란을 일으키고자 히스기야의 동참을 유도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공격때처럼 기도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과 안일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다.

 

 

 

2) 변치 않는 신앙생활

대체로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기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면, 나 자신이 훌륭해서 이 어려움을 극복한 듯이 그 마음이 변한다. 그러나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움과 시험을 당해도 요동하지 않고 견고한 믿음 가운데 시련과 어려움을 이겨 나간다. 편안할 때나 어려울 때나 늘 하나님을 의지하는 변치 않는 신앙 생활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산헤립과 같은 책망과 멸망을 받게 된다. 산헤립은 자신의 능력(군대의 힘)을 믿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함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한 히스기야와의 전쟁에서 참대한 패배를 당한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할 때 승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승리 후 실수를 범하는 히스기야를 보면서, 선 줄로 생각할 때 넘어질까 조심하는 깨어 있는 신앙이 필요함을 깨닫게 해준다.

 

 

 

*위대하신 하나님(40-48장)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주인이다. 따라서 그분은 세상의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시며, 어느 누구도 그분을 능가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런 분이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신다. 왜 그분은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여 그분의 깊은 뜻을 찾아 보아야 한다.

 

 

 

1. 여호와의 종(사40-42장)

 

 

 

사40:3-5에 나타난 예비되어야 할 그 길은 누가 사용할 것인가? 겔10:18,19에서 보듯이 성전은 여호와의 거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곳을 떠나신 때가 있었다. 이는 여호와가 그의 백성을 떠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떠나셨던 여호와가 다시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함은 전형적인 동양의 방식이다. 이 길을 사용한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사42:1-4에 여호와의 종이 나타나는데, 그 종은 여기 길을 사용하는 자와 연관이 있는가? 그리고 그 종의 모습은 어떠한가?

 

 

 

1) 구원자

먼저 예비되어야 할 그 길을 사용할 분은 여호와 자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길은 '여호와의 길'이라 했다. 이 길로 오시는 여호와가 사42:1-4에 오실 여호와의 종과 동일 인물인가? 먼저 사42:1에 '하나님의 신'을 받은 자가 여호와의 종임을 나타낸다. 그러면 그 여호와의 종의 모습은 대표적으로 모든 이방에까지 진리로 공의를 베푸는 자의 모습이다. 이는 이방에 빛이 되며 소경의 눈을 밝히고, 갇힌 자를 자유케 하실 모습이다. 이 모든 내용이 나사렛 회당 설교 때 이루어졌음을 예수께서 선포하셨다(눅4:16-21). 결국 여호와의 종의 모습은 구원자의 모습이다. 이 구원자는 겸손하시어 나귀 새끼를 타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2) 교회의 할 일

오늘날 교회가 큰 고랑에 빠졌는데, 이는 개 교회주의를 말한다. 자기 교회를 중심으로 단단한 울타리를 친다는 뜻이다. 그 울타리가 단단할수록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원자 되신 예수님의 온유를 따라 개 교회만을 위한 목소리를 낮추고, 주님의 사랑을 널리 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유일신 여호와(사43-45장)

 

 

 

이사야 43장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전체적인 의미(회복)의 강한 표현은 '두려워 말라'에 있다. 그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유일한 구속자이시기 때문이다(사43:1). 많은 사람들이 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을 하나님께서는 소용없는 일로 간주하고 말씀하셨다. 어떤 근거에서 두려움이 소용없는가? 그리고 그 '구원자"라는 표현은 무슨 의미로 주어지는가?

 

 

 

1) 이스라엘의 창조자

사43:1은 유일신 여호와가 "두려워 말라"는 이유로 두 가지를 밝히고 있다. 첫째는 "너를 구속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확실하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자에 의해서 자신들의 위험이 벗겨졌다는 것이다. 즉 올무에서 해방된 새와 같은 것이다. 두 번째는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라고 했는데, 이는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상대를 불렀다는 의미이다. 이 특수한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심은 모두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를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사43:19,20). 결국 이것을 알고 확실히 믿는 자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자라는 표현은 '주인'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2) 우리 삶의 주인

이스라엘의 주인은 분명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들(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새 일(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을 성사시키실 것을 말씀하셨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되실 때 우리들은 새 일을 얻게 되는 것이다.

 

 

 

3. 이스라엘의 구원자, 여호와(사46-48장)

 

 

 

처음과 나중은 누구인가? 그의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하늘을 폈다. 그리고 그분은 이스라엘을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셨다. 이사야는 본문을 통해 그분께서 하신 일을 땅 끝까지 반포하라고 외치고 있다. 우리가 소식을 전하는 데는 두 가지의 내용이 있다. 그것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다. 모든 사람이 알게 하는 일에 대해서 좋은 소식은 서로에게 기쁨을 주지만 나쁜 소식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어떤 것을 반포하라는 것인가?

 

 

 

1)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하나님

처음과 나중되신 분은 구원자 여호와이시다. 그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상의 역사 전부를 바퀴처럼 둘러싸신다. 그에게는 모든 만물과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이 절대적으로 현재이다. 그분께서 "그 종 야곱을 구속하셨음"을 선포하라고 이사야는 명령형을 사용하여 기록하고 있다. 신약에서도 지상 명령을 내리신 적이 있는데(눅24:44-49 막16:15 마28:18-20), 이는 예수께서 인류의 대속물로 죽으사 그를 믿는 자들을 '구속하심'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이스라엘을 구속하심과 대속제물이 되시어 그 백성을 구속하신 예수그리스도는 그 내용을 같이하고 있으며, 온 땅에 전파할 한 가지의 내용임을 알 수 있다.

 

 

 

2) 선교의 사명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실 것을 엄숙하게 말씀하신다. 이는 구분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의 처지도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원의 체험을 한 자는 이사야의 선포 명령을 따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인자하심 속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나팔수의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함이다. 그분은 한 번도 자신을 위해서 기적을 일으키신 적이 없으시다. 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곳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뜻은 바로 그의 택한 백성을 구속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구속의 방법이 권위와 위엄의 모습이 아니라 천한 '종'의 모습이었다. 그분은 겸손히 마굿간에서 출생하시었고,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다. 그분의 이러한 모습을 상기한다면 우리 인생의 모든 교만한 생각들이 사라질 것이다.

 

 

 

*구원자 메시야(49-57장)

불교인들은 해탈이란 의미를 부여하면서 구원과 연관된 이야기를 한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운다는 의미이다. 결국 자신이 자신을 구원시킬 수 있다는 원리로서 시작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철저하게 자신이 자신을 구원시킬 수 없음을 전제로 한다. 본 연구에서는 구원자 메시야가 당하시는 그 고난의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우리에게 오는 구원의 실상을 알아보고자 한다.

 

 

 

1. 여호와의 종(사49,50장)

 

 

 

49장 전체를 통하여 여호와의 종의 임무를 나열하고 있다. 그 임무 중에 종이 쓰러진 자를 일으키듯, 그의 일으킴을 받는 자들이 있으며, 흩어졌던 자들을 모으는 일이 있다. 과연 어떤 자들이 그 대상이 될 것인가? 이들은 신약의 해석상 어떤 무리들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여호와께서 어떤 비유를 내세워서 "그들은 너를 잊을지라도 나는 잊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 비유는 무엇이며, 그 비유에서 '그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이 비유와 종이 일으킬 자와는 해석상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1) 야곱의 지파

사49:6에서 '야곱의 지파'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들(롬4:16)도 포함된다. 그리고 이 야곱의 지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여인이 젖먹는 자식을 잊지 않음보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긍휼히 여김보다 더 잊지 않고 긍휼을 베풀겠다고 하셨다(사49:15). 이 은혜는 종이 일으킬 자들에게 직접 임하는 것이다.

 

 

 

2) 이방인의 구원자

사49:6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의 '너'는 '여호와의 종'을 지칭한다. 그 여호와의 종은 '이방의 빛'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빛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말함이다. 결국 그분이 오심은 우리를 위함이요, 우리 믿는 자가 '이스라엘의 보전된 자'인 것이다.

 

 

 

2. 고난받는 종(사51-53장)

 

 

 

먼저 존귀케 될 분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어떠하다 했는가? 그리고 그 모양은 어떠하다 했는가? 이는 우리 인생의 어떤 면을 부각시키고자 함인가? 그리고 그는 멸시와 간고와 질고를 겪었으며,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였는데, 왜 그분은 멸시와 질고를 받아야 했으며, 자신의 어떤 잘못으로 이런 고난을 받아야 했는가?

만약 자신의 잘못이 없다면 누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인가? 그가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라고 했는데(사53:10), 어떻게 할 때에 여호와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가?

 

 

 

1) 택함받은 자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다"(사52:14). 이는 우리 인생의 완악하고 죄 많음을 부각시킴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인생의 죄를 짊어지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질고와 멸시를 당하신다. 사53:4-6에 따르면 '우리'를 위하여 그 일을 당하신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① 개인적인 존재요, ② 죄인들을 대신하는 수난자요, ③ '우리'로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대속자이다.

결국 '그'로 지칭되는 여호와의 종은 고난받으시는 메시야로서 택한 백성을 위하여 스스로 속건 제물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다. 이 속건 제물로서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절정인 것이다.

 

 

 

2)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심

마11:28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다. 우리의 모든 인생은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무거운 짐들을 가지고 있다. 이 집은 아무도 들어줄 수 없다. 왜냐하면 인생은 누구나 같은 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짐이 없는 자가 와서 대신 들어주어야 한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짐을 가지고 계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신 것이다.

 

 

 

3. 메시야로부터 올 구원(사54-57장)

 

 

 

목마른 자가 찾는 것은 물이다. 그 물을 값 없이 주시겠다는 분이 계신다. 그런데 이런 분들 멀리하고 값을 지불하면서 자기들을 위하여 사먹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이스라엘이었다. 그들이 값을 주고 산 것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를 베푸시는데, 그것은 무엇이라 했나? 그리고 하나님은 초청장을 보내고 있는데, 이 초청장을 이스라엘은 어떤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인가? 또한 이 초청장은 신약의 누구에게 보내지는 것이며, 이 초청장을 받은 자들은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인가?

 

 

 

1) 영원한 언약

여호와는 이스라엘이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값을 준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있는 구절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임하셔서 '영원한 언약'을 세워 주셨다.

삼하7:11-16은 다윗에게 세우신 영원한 계약이 유효함을 상기시키는 내용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에 따르는 초청장을 보내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대가를 원치 않는 삶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은 값을 요구하시지 않고 오심이다. 그리고 영원한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값을 원치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들은 조그마한 일을 남에게 해주고서도 대가를 바란다. 그리고 그 대가가 주어지지 않으면 원망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자기는 남에게서 그냥 받으려 하면서 남은 자기에게 대가를 지불해 주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웃에게 그저 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인생은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롬3:23).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간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사실을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공의대로 그 죄를 징계하신다(롬6:23). 그런데 그 징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대속자가 오셨다. 그분이 대속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은 그분에게는 죄가 없기 때문이다(고후5:21).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고전15:3) 우리를 대신하여 멸시와 고난을 받으시고 죽기까지 하셨다.

이제 그분의 부활하심을 따라 우리가 온전히 부활함을 입을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평화와 하나님의 계획(58-66장)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평화를 원하신다. 이를 위하여 그분은 계획을 세우셨으니 그것을 이스라엘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리셨다. 우리는 그분의 특별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그분의 계획을 읽을 수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온전한 평화를 이루어 함께 기뻐할 그 때와 그곳을 기록하고 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획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며 받아들일 것인가?

 

 

 

1. 시온의 미래(사58:1-63:6)

 

 

 

예수님께서 오시어 빛보다 참빛이 왔음을 외치셨다(요1:4,5 요3:16-21). 그 빛은 여기 본문 "일어나 빛을 발하라"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이스라엘 위에 임하게 된 것은 무엇인가? 또한 이스라엘이 그 빛으로 비추어야 될 대상은 어떤 것인가? 이 빛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구절은 어디인가?

 

 

 

1) 여호와의 영광

참빛이신 예수그리스도는 사61:1-3의 내용을 모두 이루신 분이시다. 결국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예수그리스도의 빛을 만민에게 선포하라는 것이며, 이는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주어진 복음의 빛인 것이다. 그들은 이 빛을 열방에게 인정받는 이스라엘의 모습이다(사60:10-14).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 앞에 몸을 굽힐 것이며, 이스라엘을 멸시하던 자가 무릎을 꿇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할 것이다.

 

 

 

2) 참빛되신 예수로 인한 영광

시온의 영광의 모습은 승리자의 모습이다. 괴롭히던 자와 멸시하던 자가 무릎을 꿇어 굴복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참빛되신 예수님을 붙들 때 그분은 우리를 영원히 높이신다. 우리는 단지 일어나 빛을 발할 뿐이다. 그러나 그 빛을 숨기고 감추려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당당히 밝히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화합하지 못하는 자도 이 빛을 어두움에 감추는 자이다.

 

 

 

2. 백성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사63:7-65:25)

 

 

 

우리는 호칭을 두고 여러 가지의 의미를 찾곤 한다. 사64:15은 도움을 구하는 기도로서 자비와 긍휼'이 그쳤다고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 그 지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 이스라엘의 누구라고 하는가? 이 호칭이 신약에 사용된 적이 있는가? 있다면 혹 서로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또한 이 호칭과 더불어 여호와는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무엇과 무엇의 관계라고 비유하고 있는가? 이 비유를 우리는 어떤 방면에서 해석해야 할 것인가?

 

 

 

1) 우리의 아버지

이스라엘은 기도를 하면서 그 시도를 들으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그분이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사64:8에 그분은 토기장이요, 이스라엘은 진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그분은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부르는 대상에 있어서 신약과 차이가 있는데, 구약의 사람들은 아버지를 단지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여기는 것에 그치길 원했다. 결국은 자신들만의 아버지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신약은 영적 아버지의 개념으로 만유의 아버지이심을 나타낸다.

 

 

 

2) 아바 아버지

롬8:15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것을 권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음을 뜻한다. 우리가 알 듯이 잘못을 저지를 때 아버지는 무서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가까이에 있는 정다운 관계를 원하신다.

 

 

 

3. 하나님의 위로와 그의 영광(사66장)

 

 

 

이사야의 결론 부분은 이 예언을 받는 자들의 미래가 어떠할 것을 선포하고 있다. 과연 이스라엘 자손이 있을 곳은 어디인가? 분명 그곳에는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고 했는데, 이 이름의 기록부에 대해 언급한 신약의 구절은 무엇인가? 그리고 모든 혈육이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했는데, 언제 경배할 것이라고 했는가? 그 때가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즉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1)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사65:17)하신다고 했다. 이것이 사66:22에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이다. 이곳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경배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는데, 이는 계3:5에 생명책이란 명칭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계20:15에 여기(생명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자는 불못에 던지움을 받는다고 한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이루어질 일임을 우리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월삭과 매안식일에 경배하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안식일이 주는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의 일을 하시고 7일째 쉬셨다. 이것은 완성의 의미를 주는 날이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부활하셨다. 그 날은 완전한 구원의 완성을 이룬 날이다. 이 완성의 날, 즉 주일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이다.

 

 

 

2) 생명책에 기록된 우리의 이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기 위해서는 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다(요1:12), 사66:22의 너희 자손은 다윗의 자손이다. 이 다윗의 자손은 구속사의 일맥을 이룬다. 결국 메시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영원한 언약을 성취시킨 분으로서 다윗 자손의 대표가 되신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잘 따르게 될 때,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죄라는 것이 우리의 빛을 가림으로 인해 우리는 진정한 빛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참빛되신 예수그리스도가 베시야로 우리에게 오시어 잃어버린 빛을 되찾게 하셨으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합하게 된것이다(요일4:10,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 또한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셨는데, 그곳은 반드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주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그 영원한 천국집이 믿는 자의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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